스탈린주의 정당들 *
이 글은 던컨 핼러스가 1951년 7월에 발표한 것으로, 서방에서 활동하는 공산당과 스탈린주의 운동들을 어떻게 봐야 할지를 두고서 다른 혁명가들과 논쟁한 글이다. 대괄호([ ])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번역자가 첨가한 것이다. 단, 인용문에서는 역자 주와 지은이 주를 각각 밝혔다.
1 의 글은 부족한 점이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대안적 글을 제출한다. 이 글은 힐먼 동지가 제기한 모든 문제에 답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스탈린주의 정당들의 본질’에서 제기한 모든 쟁점(몇몇 쟁점은 관련성도 떨어진다)에 답하려면 상당한 분량으로 다차원적인 글을 써야 할 것이다. 내가 그런 글을 쓸 시간을 내기도 어렵거니와, 더 중요하게는 다른 동지들도 그런 글을 읽을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이다. 이하의 내용은 내 생각을 아주 대략적으로만 개괄한 것이다. (출처를 따로 밝히지 않은 모든 인용은 E. 힐먼의 ‘스탈린주의 정당들의 본질’에서 따온 것이다.)
이런 중요한 토론의 기초로 삼기에 힐먼 동지트로츠키의 스탈린주의 정당 분석
트로츠키가 “별로 구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스탈린주의 정당들을 노동계급 정당으로 규정했다”는 힐먼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트로츠키는 완전히 구체적으로 따졌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 정당들을 독특한 중간주의 정당으로 봤다. 나중에 (코민테른 7차 대회 이후)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 정당들이 신新개혁주의 정당이 됐다고 판단했다. 트로츠키가 이처럼 분명하고 구체적 관점을 가졌던 반면, “퇴보한 노동자 정당”이라는 무의미한 용어에서는 그런 점을 찾아 볼 수 없다. “퇴보한 노동자 정당”이라는 용어는 그 정당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일부 말해 주지만 그 정당들의 현재 구실에 대해서는 말해 주는 바가 전혀 없고, 그래서 온갖 이질적 분석을 뭉뚱그릴 수 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제4인터내셔널 안에서 그 용어가 인기를 누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말의 혼동 가능성을 막고자, 트로츠키 본인의 정의는 다음과 같았음을 밝힌다.
2 [모든 강조는 원저자의 것이다 ― 핼러스]
코민테른 지배 분파는 “일반적 의미”의 중간주의가 아니라 중간주의의 아주 독특하고 역사적인 형태이고, 그 사회적 뿌리는 비교적 근래의 것이지만 아주 강력하다. 무엇보다 소련 관료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 프롤레타리아의 주체적인 전위로서의 당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 기구는 정부와 융합됐다. 당이 “총노선”을 수행할 때 가장 중요한 도구는 국가정치총국GPU이다. 통제받지 않는 지배적 위치에 있는 관료의 심리 상태는 많은 면에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심리 상태와 완전히 모순되기 십상이다. … 지난 몇 년 동안 스탈린주의 분파는 “강한 농민”, 기술자, 관리자, 중국 부르주아 지식인, 영국노총 간부의 심리와 이해관계는 속속들이 이해한 반면, 미숙련 노동자, 빈농, 반란에 나선 중국 인민, 영국 파업 노동자 등의 심리와 필요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함을 보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스탈린주의 분파는 민족적 기회주의 노선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가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노동자 국가의 관료들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 관료의 이중적 심리 상태와 정책들은 바로 여기서 비롯한다. 그런 이중성 때문에 중간주의, 그러나 노동자 국가에 기초한 중간주의만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여기서 트로츠키가 소련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다른 정당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라. 사실 위에 인용된 글은 주되게 독일 공산당에 관해 쓴 글이다.)
중간주의 경향은 그 정의상 마르크스주의를 향하고 있거나 멀어지는 중에 있다. 트로츠키는 코민테른의 진화 방향이 근본적으로 고전적 개혁주의를 향한다고 봤다. 소련 관료가 사적 자본주의(즉 독점자본주의)를 복원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본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제3기” 노선(1928~1934년)의 초좌파주의가 초기회주의적 노선으로 대체되는 것이 필연이라고 봤다.
브란들러주의자들(독일 사회주의노동자당SAP 지도부 포함)은 오늘날까지도 탈하이머의 이론적 제자로 남아 있고, 코민테른 정책들에서 “초좌파주의”만을 볼 뿐 관료적 중간주의의 말뜻을 송두리째 부정했고 지금도 부정하고 있다. 반면 우리는 기회주의적 전환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예견할 수 있었다. 현 시기(제4기)에 스탈린이 유럽 노동자 운동을 코민테른이라는 갈고리에 꿰어서 공식적 개혁주의의 오른쪽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보면 탈하이머-발허 일파의 공식 철학이 얼마나 얄팍하고 기회주의적인지 알 수 있다.
트로츠키는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스탈린주의의 개혁주의를 향한 진화가 최종 국면에 이르렀다고 봤다.
“소련 방어”는 이유가 아니라 핑계 즉, 카싱·자크모트·고트발트 [각각 프랑스·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지도자 ― 역자] 등의 부류가 “자국” 부르주아지의 “대중적 의견”에 굴복한 것에 대한 핑계일 뿐이다.
비슷한 이해가 제4인터내셔널의 핵심 문서에서 거듭 반복된다. 예컨대 다음을 보라.
5 [강조는 나의 것이다 ― 핼러스]
코민테른이 부르주아 질서 쪽으로 명백하게 넘어가고 있는 것, 세계적으로 (특히 스페인·프랑스·미국 등지의 “민주주의” 나라들에서) 반反혁명적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에게 특히 더한층의 어려움을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전쟁이 벌어지면 스탈린주의자들이 1914년 개혁주의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행동할 것이라고 봤다.
전쟁 위험이 임박한 상황에서 스탈린주의는 사회민주주의만큼이나 배신적인 구실을 할 것이다 … 그들은 다가오는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을 조직할 의지도, 그럴 가능성도 없다. 그 반대로, 사회애국주의에 완전히 물들고 “민주주의적” 제국주의라는 해적기를 휘날리는 것에 도취된 그들은 이미 제국주의 모병관 구실을 수행하고 있다.
이상이 트로츠키의 입장이다. 관료적 중간주의 정당들이 오른쪽으로 이동했다가(1923년), 다시 왼쪽으로(1924년), 오른쪽(1925~1927년), 왼쪽(1928~1933년), 오른쪽(1934년)으로 왔다갔다 하다가 마침내 1935년 이후로는 부르주아 질서(그중 “민주주의적” 형태)를 편드는 것으로 귀결됐다고 말이다. 관점 자체는 분명하고 모호한 점이 없다. 또한 그가 틀렸다는 것도 오늘날 우리는 한 치의 모호함 없이 알 수 있다. [스탈린이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전쟁 초기 국면(1939~1941년)은 트로츠키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했다. 트로츠키의 견해는 종전 후의 시기에 (특히 1947년 이후) 틀린 것으로 최종 드러났다. 천치가 아닌 한 오늘날 누구도 스탈린주의 정당들이 “자국” 부르주아지에 굴복했다는 주장을 고수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아무도 (심지어 제4인터내셔널 국제사무국IS도) 그러지 않는다.
그런 만큼 우리는 문제를 재검토해야 한다. 우리의 낡은 입장을 고수할 수 없다. 고수할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탈린주의 정당들은 과연 무엇인가?
노동자 정당인가?
힐먼 동지는 스탈린주의 정당들이 노동자 정당이 아니라는 점을 보이는 데 골몰한다.(샥트먼도 그런다.) 그런데 노동자 정당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당을 정의할 때 그 구성, 지도부, 강령(형식적인 것 말고 실제 강령)에 따라 또는 이 셋의 조합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힐먼 동지는 스탈린주의 정당들의 지도부와 그들의 (실제) 강령을 근거로 그 정당들이 노동자 정당이 아니라고 본다.(샥트먼도 그런다.) 샥트먼의 경우, 스탈린주의 정당의 구성이 무엇인지 중시하지 않는다. 힐먼 동지의 경우에는 그 구성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압도 다수가 아니고 프롤레타리아가 다수인 경우에도 그 노동자들은 입당과 함께 “탈계급화”함을 보이려 해쓴다. 그럼 그런 논리를 개혁주의 정당에 한번 적용해 보자.
예컨대, 영국 노동당의 지도부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 그 대신 노총 간부, 변호사, 성직자, 의사, “자유주의” 직업 정치인, 회사 경영자, 전직 공무원, 전직 대학교수, 귀족 집안의 후예 등등이다. 각종 중간계급으로 이뤄져 있고, 그중에서 노총 관료 출신자 집단이 (수적으로는 줄고 있지만) 중요한 요소다. 노동당 지도부는 이데올로기로 보든, 그 성분으로 보든 프티부르주아다. 그 당의 (실제) 강령은 신자유주의적 계급 협력과 친제국주의다. 노동자들의 단결과 해방을 위한 투쟁(영국 내에서든 국제적으로든)에 정확히 반대되는 것이다. 프티부르주아적 강령이고 그중에서도 아주 반동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노동당 내부 작동 방식은 민주적이지 않고, 민주주의 외피를 벗기면 의원단과 노총 지도자들의 독재가 있다. 이상의 사항들은 익히 알려진 것들이고 논쟁거리가 아니다. 그리고 힐먼-샥트먼 식의 논리대로라면 영국 노동당은 노동자 정당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영국 노동당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모든 개혁주의 정당도 비슷한 특징을 갖고, 어떤 경우에는 영국 노동당과 달리 당원들이 대체로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경우도 있다(예컨대 프랑스 사회당SFIO). 그런데 국제 노동계급 전체는 실질적으로 스탈린주의, 개혁주의, 준-파시즘적 민족주의 운동([아르헨티나] 페론, [브라질] 바르가스 등), “민주주의적” 부르주아 정당([프랑스] 대중공화운동MRP, 미국 민주당 등) 중 하나를 따르고 있다. 따라서 힐먼-샥트먼 테제의 논리적 결론은 오늘날 세계에는 노동자 정당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결론은 어떤 의미에서 뻔한 진실을 담고 있는데, 만약 강령과 지도부를 중심으로 노동자 정당을 정의한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구하는 공산당만이 노동자 정당일 것이고, 그런 당이 오늘날 (크든 작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스탈린주의 정당들의 본성에 관해 별로 알려 주는 바가 없다. “노동자 정당”이냐 “비非노동자 정당”이냐는 사실 쟁점을 흐리는 연막이다. 노동자 정당을 유의미하게 정의하는 방법은 그 성분을 기준으로 정의하는 것뿐이다. 노동계급에 주되게 기반을 둔 정당은 노동자 정당이다. 지도부나 강령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 그런 정당은 아무 강령이나 채택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 정당은 ‘경제연맹’ [영국판 전경련]이나 히틀러의 나치당과 동일한 강령을 (공공연하게) 채택하지는 못한다. 또 그런 정당이 프티부르주아 지도부를 갖고 있으면, 지도부와 당원 간 이해관계 충돌 때문에 이중적 구실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이상의 내용은 모두 자명하다. 그런데도 우리가 (혁명가로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노동계급을 획득하려면 그런 정당들에 특정한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방식이란 우리가 그런 정당에 공동전선 전술을 적용해서 기층의 프롤레타리아 당원들을 지도부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부터 떼어내어 그들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방법을 제시한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
그러나 힐먼 동지는 (그리고 샥트먼도) 나름의 반박을 갖고 있다. 개혁주의 정당들은 노동조합·협동조합 운동의 관료에 기반하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의존하고 그것의 중요한 일부분인데 반해, 스탈린주의는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전체주의 운동이고 노동자 조직을 파괴함으로써만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말이다. 이렇듯 스탈린주의는 개혁주의와 범주가 완전히 다른 만큼, 공동전선 전술을 (파시스트 정당에 적용할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 정당에 적용할 수 없다고 힐먼 동지는 반론을 펼 것이다. 이런 논리를 따라가면 그런 정당에 적용해야 할 전술은 “스탈린주의 파시스트를 박살내자”라는 구호로 표현돼야 마땅할 것이다.(그렇지 않은가, 힐먼 동지?) 이상의 테제는 언뜻 보면 터무니없지만, 진실의 일부를 담고 있고 그래서 찬찬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회파시스트 정당?
이 이론은 사실상 “사회파시즘”론의 일종이다. 스탈린주의 정당들을 “관료집산주의 정당”, “적색 파시즘”, “전체주의 국가자본주의 정당” 등 뭐라고 부르든 간에 말이다. (힐먼 동지만의 용어인 “맹아적인 전체주의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는 다음 기회에 다루겠다. 사실, 힐먼 동지는 그 개념이 아니라 사회파시즘 테제에서 자신의 결론을 도출한다.) 그 이론의 핵심은 스탈린주의자들이 (파시스트와 마찬가지로) 권력을 잡고 노동계급을 분쇄하고 전체주의적 사회를 건설하려 하고 특정 조건에서는 실제로 그런다는 것이다.
이것이 스탈린주의 지도부의 목표라는 힐먼 동지 등의 주장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옳다. 스탈린주의가 반대자를 억누르는 방식이 파시즘과 동일하다는 지적 역시 옳다. 스탈린주의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체계적 비방과 함께 깡패·총잡이를 동원한다. 여건만 된다면 반대파(특히 혁명가들)를 폭행하고 살해하는 것이 스탈린주의의 일반적 전술이다. 이런 점에서 히틀러의 돌격대와 스탈린의 돌격대는 차이가 없다. 두 정당의 내부 구조, 선전·선동에도 유사한 점들이 더 있다. 스탈린주의가 치장하는 가짜 마르크스주의를 걷어내면,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는 파시즘만큼이나 지도자 숭배에 기초한다. 스탈린주의의 심리 상태도 ([영국 파시스트] 모슬리의 구호 “행동!”에 나타난) 파시즘의 심리 상태와 비슷하고, 이런 것들은 계속 제시할 수 있다.
7 구실을 맡는 것이다. 이 마지막 방법만이 실질적이다.(특정한 조건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데 그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다루겠다.) 바로 이것이 (힐먼이 인용하는 존슨[C.L.R. 제임스의 가명]의 말처럼) 그들이 “실로 뻔뻔하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크렘린에 “충성”하는 이유다.
사회파시즘 테제의 근본적 약점은 계급투쟁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스탈린주의 정당들을 사회파시즘으로 간주한다면 ([앞서 말했듯이] 그런 규정이 전적으로 부정확한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 볼 수 있다. 그 정당들이 파시스트와 동일한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가?(그리고 그렇게 권력을 장악했는가?) 이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사회파시즘 테제가 왜 어리석은지 알 수 있다. 예컨대 독일에서 파시즘은 프티부르주아와 룸펜프롤레타리아 급진파의 운동이었고 대부르주아지에 의해 권좌로 끌어올려졌으며, 대부르주아지는 독점자본주의 또는 국가독점자본주의를 보존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 파시즘이 대자본가들에 맞서 권력을 잡은 적은 어디에도 없었는데,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대중을 동원해 국가 기구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국가 기구를 박살내야만 한다. 그렇지만 바로 그 대중은 파시스트들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 결과는 파시즘이 아니라 사회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파시즘과 달리 스탈린주의는 독점자본주의 또는 국가독점자본주의를 보존하는 게 아니라 “소련 체제”를 수립하려 하고(당면 논의에서는 그 체제를 “관료집산주의”,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기타 뭐라 부르든 중요하지 않다), 그런 체제를 수립하려면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대부르주아지를 제거하고 단일한 관료 기구로 대체해야 한다. 그런 만큼 우리는 100퍼센트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대부르주아지가 (무솔리니나 히틀러에게 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탈리아 공산당] 톨리아티, [서독 공산당] 라이만을 권좌로 끌어올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힐먼 동지와 샥트먼의 주장과 달리 부르주아지는 “이제껏 모든 논리적 설명에서 벗어나 있던 그 운동”에 조금도 속아 넘어가지 않고 있다.) 스탈린주의는 다른 두 가지 방법으로도 권력을 잡을 수 있다. 하나는 혁명적 투쟁의 길이고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은 파시스트와 같은 이유로 그 길을 택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외국 정복자 수하에서 대관구지휘자스탈린주의가 부르주아지에 맞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론이 현실에서 이미 두 차례 (유고슬라비아와 중국) 반증됐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그 “예외”들이 내 주장을 반증하지는 않지만 지극히 중요한 쟁점을 제기하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과 유고슬라비아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한편에는 극히 취약하고 무능하며 국가 기구를 장악하고 있지 못한 부르주아지가 있었고(유고슬라비아의 국가 기구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점령했던] 독일군의 껍데기에 불과했고, 중국의 국가 기구는 장개석이 이끄는 보나파르트 일당이 쥐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가 극히 취약하고 집중돼 있지 않고 무력한 반면 나라 전체로는 농민이 압도적이었다. 이런 조건에서는 스탈린주의자들이 빈농을 기반으로 보나파르트주의 군사-국가 기구를 건설하고, 구심력 없는 경쟁 세력들을 군사적 수단으로 정복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낡은 소농 농업 위에 군림하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가 들어섰다. 그런 만큼 우리는 스탈린주의자들이 비슷한 조건의 다른 지역에서 권력을 차지할 가능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부르주아 혁명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나라들에서 스탈린주의는 (노동계급이 무력하다는 전제 하에) 낡은 사회를 무너뜨리는 한 방식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연속혁명 이론은 이런 경우를 설명할 수 있도록 수정돼야 할 것이다. 또한 부르주아지가 (역시 예외적인 조건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의 핵심을 완수하기도 한다고 보완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렇게 되면 연속혁명 이론은 [역사] 발전 법칙이라기보다는 혁명 전략에 관한 논의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이 혁명적 투쟁으로 권력을 잡지 못한다는 점에는 조금도 바뀔 게 없다. 사회주의를 위한 결정적 전투는 프롤레타리아가 집중된 지역, 즉 선진국들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다. 식민지 반란은 보조적 세력, 중요하지만 여전히 보조적인 세력이다.
스탈린주의의 본성
스탈린주의는 독특한 현상이다.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물자체”의 하나이며, 단지 익히 알려진 다른 운동의 변종이 아니다. 힐만과 존슨이 강조하듯 스탈린주의는 노동계급이 패배하고 사기 저하한 것의 산물이다. 스탈린주의는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 둘 다와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와 지도부라는 면에서 프티부르주아적이다. 또한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파시스트 정당과는 달리, 선진국에서 스탈린주의 정당은 노동계급에 기반한다. 즉, “노동자 정당”이다. 파시스트 정당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정당과는 달리, 스탈린주의 정당은 구조와 목적에서 전체주의적이다. 사회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운동이 부재한 덕분에 존재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사회가 갈수록 양대 계급으로 나뉜다고 했다. 그 말은 진실이지만 지나친 단순화이기도 하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양대 계급 사이에 계급보다 더 세분화된 각종 집단과 카스트를 만들어 냈고 “옛” 프티부르주아(소상점인·소사업가 등)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포로로 남겨 뒀다. 이런 카스트 중 가장 식별하기 쉬운 것은 노동 관료층(“고전적” 개혁주의의 진정한 중추)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근본적으로 매여 있지 않은 다른 카스트들도 생겨나는데 전문적 관리자들, 온갖 전문직들(기술자·약사처럼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부도 있고, 광고대행업·보험중개업처럼 순전히 기생적인 것도 있다)이 그런 경우다. 이 다양한 계층들의 열망이 다양한 조건에서 스탈린주의와 파시즘 둘 다에 반영된다.(두 운동은 또한 전자본주의 시대의 잔존 계급들(특히 소농)이 수적으로 중요한 나라에서는 그들의 지지도 상당히 많이 받는다.)
이들 집단이 언제나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사회민주주의나 “민주주의적”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사회적 충돌이 격렬한 조건에서 (혁명적 정당이 부재하다면) 이들 집단은 노동계급을 직접적으로 적대하거나(파시즘) 간접적으로 적대하는(스탈린주의) 처지로 내몰린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는 (그 형태가 다르다는 자명한 사실 외에도) 내용 면에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둘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는 “신흥 프티부르주아지”와 전체주의적 노동 관료들에게서 나타나는 “순전히” 관리자다운 관점과, 부르주아지·프롤레타리아를 둘 다 경멸하는 태도를 더 반영한다. 여기서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의 가짜 합리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미사여구가 나온다. 가장 최신 단계의 “과학적” 전체주의인 것이다. 파시즘은 비합리주의에 속하고 “혈통과 영토” 따위의 헛소리를 늘어놓고 문명 위기 국면에서 제시할 수 있는 해법이 폭력뿐인 반면, 스탈린주의는 계급 사회를 급진적으로 재구성해서 계급 사회 자체는 보존시킬 대안을 제시하고, 적당한 여건 하에서는 노동계급을 지배할 수도 있는 만큼 프티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므로) 가장 반동적인 종류다. 다른 한편으로 스탈린주의가 경쟁 이데올로기에 비해 갖는 약점은 [자체적으로는] 권력을 잡지 못하고 소련 관료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앞서 설명한 의미에서) “노동자 정당”이라는 사실은 스탈린주의 정당의 강점인 동시에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이 핵심적 차이 때문에 스탈린주의는 파시즘과는 달리 정면 공격이 아니라 혁명적 경향을 성장시켜서 해체해야 하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에 맞서는 투쟁
8 은 그 결과다. 반면 “사회파시즘” 견해의 약점은 대중적 스탈린주의 정당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하는 실천적 질문을 던져야만 분명하게 드러난다. 미국에서는 그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은 탓에 샥트먼 노선의 사기성이 [제4인터내셔널을 따르는] 캐넌 노선의 멍청함만큼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질문(‘스탈린주의를 따르는 노동자들을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을 진지하게 마주하면 “사회파시즘”이 틀렸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노동자들이 공산당 입당과 함께 “탈계급화”하기는커녕 노동자들이 공산당에 입당하는 주된 이유는 공산당을 노동계급 투쟁의 정당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오직 투쟁을 통해서만 스탈린주의와 결별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전망은, 장기적으로 보면 계급투쟁이야말로 가장 견고한 당 기구보다 더 강력하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바로 이 사실에서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여기서 스탈린주의에 맞서는 우리의 노선이 도출되는데 다름아닌 공동전선 전술이다. 물론 이것은 즉각적으로 내걸 슬로건이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공동전선을 하자고 요구하려면 그 전에 우리가 자체적인 세력을 거느리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힐먼 동지는 우리가 대체로 좌파적 사회민주주의에서 세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아마 맞는 말일 것이다. 비록 모든 경우에 그렇지는 않더라도(예컨대 독일에서 우리의 노선은 스탈린주의 출신인 독일 독립노동자당UAPD 9 지도부를 지원해서 혁명적 입장으로 견인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임이 자명하다), 최소한 많은 경우에는 맞는 얘기일 것이다.
스탈린주의를 신新개혁주의로 보는 [트로츠키의] 견해의 약점은 현실을 조금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그 견해를 고수하는 이들은 자신만의 환상을 만들어 내야만 하고 결국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을 수밖에 없다. 제4인터내셔널 국제사무국과 그 지지자들의 운명이 그렇다. 최근 그들이 친親스탈린주의 쪽으로 쏠리며 치닫고 있는 것그러나 우리에게 핵심 간부층을 갖춘 당이 생기더라도 앞서 말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스탈린주의를 따르는 노동자들을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 진지한 답변은 하나뿐일 수밖에 없다. 사회민주주의를 따르는 노동자들을 우리가 획득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 바로 공동전선 말이다. 힐먼 동지는 “스탈린주의자들이 공동전선에서 활동하면 불가피하게 그들이 주도하게 되고, 또 불가피하게 관료적이고, 반동적이고 …” 등등을 말하는데, 틀린 얘기는 아니다. 물론 그들은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 논쟁거리가 아니었다. 공동전선 전술은 반反혁명적 조직의 지도부가 공동전선에 반대할 것이라고 처음부터 전제하고 있다. 공동전선 전술의 진정한 핵심은 그런 지도부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단결시키자는 것이고, 그러려면 지도부가 공동행동에 나서도록 그 지지자들의 압력으로 강제하거나(이게 가장 좋다) 그 지도부를 따랐던 지지자 일부를 떼어내야 한다. 스탈린주의 조직은 그 특유의 획일체적 성격·규율·지도자 숭배 탓에 사회민주주의 조직(상대적으로 더 이질적이다)을 상대할 때보다 그런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스탈린주의 정당의 이중적 성격을 간과하고 그 노동자들을 획득할 가능성을 지레 포기하는 것이다. “사회파시즘” 이론은 노동계급의 성공적 행동이 자신감과 투쟁 의지를 고양시키고 그 연장선상에서 스탈린주의의 기반을 잠식한다는 점을 간과한다. 대중적 분출은 혁명적 정당을 건설할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패배는 (힐먼 동지 자신이 설명하듯) 반동과 사기 저하를 낳는다. 그런 만큼 우리는 분출을 강화하려고 애써야 하고, 이를 위해 반동적인 지도부가 투쟁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려고 해야 한다. 만약 스탈린주의 지도부가 어떤 한계 안에서 스스로 투쟁에 나서려 한다면 (당연히 그 나름의 꿍꿍이가 있을 테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더 잘된 일이다. 힐먼 동지든 누구든 계급투쟁에 참여하고 그것을 전진시킬 다른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한 이는 아직 없었다. “사회파시즘” 개념을 지지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이 자문해야 한다. ‘스탈린주의 지도자들은 왜 언제나 혁명가들과의 공동전선에 반대할까? 그런 공동전선이 스탈린주의를 약화시키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열악한 조건에서는 국가정치총국의 위협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에 맞설 유일한 방법은 대중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더욱이, 혁명가들이 스탈린주의에 종파적 태도를 취한다고 해서 테러리즘 위협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스탈린주의 영향을 받는 노동자들과 접촉이 적어지는 탓에 테러를 당할 위험은 더 커진다. 스탈린주의자들에게 [트로츠키의 비서] 어빈 울프를 살해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지만, [스페인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 지도자 안드레우] 닌을 살해한 것은 엄청난 문제를 낳았고, [스페인 노동조합총연맹CNT 전국위원회 사무총장 마리아노] 바스퀘즈를 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보안 조처의 관점(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라 대중적 기반의 문제인 것이다.
권력을 잡고 있는 스탈린주의자들에 맞서는 투쟁에 대해서는 여기서 전혀 다루지 않았다. 그런 투쟁은 계급투쟁 그 자체일 것이다. 그와 관련된 문제도 물론 많을 테지만 지금의 논의에서는 별 관련성이 없다.
결론
앞의 내용은 내 입장의 개요만 제시한 것이다. 수많은 세부적 어려움이나 스탈린주의의 일반적 전망은 다루지 않았다. 이 중 후자는 일부러 생략했다. 단기적 전망은 사실상 수정 구슬을 갖고 하는 예언 이상이기 어렵고, 스탈린주의 정당들의 미래는 무엇보다도 혁명적 운동이 생겨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다뤄야 할 주제가 하나 남아 있기는 하다. 스탈린주의 정당에서 떨어져 나온 그룹들의 전망은 어떨까? 최근 몇 년 동안 그런 그룹이 몇 개 생겨났고(버마의 “적기”, 독일의 샤페 일당, 이탈리아의 쿠이치-만가노, 프랑스의 르콘느 등) 앞으로도 분명 더 생길 것이다. 사회파시즘 이론대로라면 이들은 (훗날의) 국가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잡으려고 경쟁하는 세력일 뿐이다. 마치 히틀러 운동의 그레고어 슈트라서, [영국 파시스트] 모슬리 운동의 아놀드 리스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파시즘 이론이 틀렸음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다. 스탈린주의 정당에서 이탈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들은 스탈린주의의 수원지[소련]에 맞서 투쟁하도록 내몰린다. 그런데 모스크바에 반대하는 입장을 일단 갖게 되면 그들은 계급투쟁을 통해서 노동계급 기반을 늘리려고 할 수밖에 없다. 소련의 외교적 필요와 무관하게 말이다. 그들이 수용했던 현재의 스탈린주의 노선 때문에 사회민주주의로 곧장 넘어가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유고슬라비아 수도] 베오그라드를 모스크바 대용으로 삼기도 마땅찮다. 결국 그들은 혁명적 입장을 향해 나아가는 중간주의 그룹이 된다. 그런 만큼 우리가 그들을 획득할 가능성이 만만찮게 생겨난다.
다른 한편, 그런 그룹을 덮어놓고 신뢰해서는 안 된다. 그 지도자들은 수년 동안 관료적 책략을 연마해 왔고, 많은 경우 자신의 과거를 떨치지 못하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과거의 경험은 우리에게 그런 인자들이 사회민주주의나 파시즘을 향해 나아갈 공산이 크다고 가르쳐 준다. 그렇지만 그런 경험은 패배기의 경험이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그런 방향으로 바뀌는 게 필연적이라고 볼 선험적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그 변화는 혁명적 세력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즉, 우리가 만만찮은 운동을 건설할 수 있음을 실천적으로 보여 주는 것에 달려 있다. 우리는 그런 그룹을 대할 때 실천 활동에서 우호적으로 협력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을 결합시켜야 한다. 비타협적인 강경함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은 그들의 오류를 못 본 체하는 것만큼이나 치명적 오류가 될 것이다. 그런 그룹을 대할 때는 (우리가 보통의 스탈린주의 정당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부분적이고 구체적인 투쟁 강령에 기초해야 한다. 소련 제국이나 유고슬라비아가 아닌 곳에서는 “스탈린주의에 맞서는 투쟁이야말로 계급 전쟁의 가장 첨예하고 높은 수준이 표현된 것”이라는 주장은 완전 허튼소리다. 그 반대가 진실이다.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사회민주주의 앞잡이들에 맞선 투쟁이야말로 핵심이고 스탈린주의에 맞서는 것은 그 부수적 일부이자 그 투쟁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다. 스탈린주의 노동자들과 행동 단결에 나서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일인지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그런 단결이 스탈린주의를 깨뜨리기 위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보 전진이라고 말해야 한다. 정치 감각을 마비시키는 ‘노동자 국가’주의 개념과 우리는 단절한 바 있다. 우리가 친親스탈린주의로 빠질 위험은 없다. 우리가 처한 큰 위험은 샥트먼 일당처럼 스탈린주의 혐오(결코 덜 위험하지 않다)에 빠지는 것이다.
주
-
출처: Duncan Hallas, 1951, ‘The Stalinist Parties’, The Fourth International, Stalinism and the Origins of the International Socialists, London 1971, pp.65-75.
↩
- [역자] Ellis Hillman은 당시 Socialist Review 그룹의 일원이었다. 그는 스탈린주의 정당에 영향을 끼치려 하는 것은 가망이 없고 노동당에 입당할 것을 주장했다. ↩
- Centrism “in General” and the Centrism of the Stalinist Democracy, 1931. ↩
- The Soviet Union Today (footnote), 1935. ↩
- The Seventh Congress of the Comintern, 1935. ↩
- Transitional Programme of the Fourth International, 1938. ↩
- ibid. ↩
- [역자]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등 외국 합병지에 임명한 지배자. ↩
- [역자] 당시 제4인터내셔널은 미셸 파블로의 지도 아래 스탈린주의 정당으로의 입당 전술Entryism sui generis을 다듬고 있었다. ↩
- [역자] 독일 공산당에서 티토 지지자들이 떨어져 나와서 1950년에 만든 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