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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 관점에서 본 대만 문제

MARX21

  1. 대만의 정식 명칭은 중화민국이고, 자국 내에서는 타이완으로 부른다. 그런데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중화인민공화국 대만 특별행정구라고 부른다. 1980년대부터 중국의 압력 때문에 중화민국은 올림픽 등 국제 기구에서 중화 타이페이Chinese Taipei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대만으로 통일해 쓴다.
  2. 대만 총통 선거는 간선제였다가 1996년부터 직선제로 바뀌었다. 총통의 임기는 4년이며 중임이 가능하다. 1996년 선거에서 국민당의 리덩후이(부총통은 롄잔)가 당선됐다. 2000년과 2004년에는 민진당의 천수이볜(부총통은 뤼슈롄)이, 2008년에는 국민당의 마잉주(부총통은 샤오완창)가, 2012년에도 마잉주(부총통은 우둔이)가, 2016년에는 민진당의 차이잉원(부총통은 천젠런)이 당선됐다. 차이잉원(부총통은 라이칭더)은 2020년 선거에서 재선했다.
  3.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메이리다오美麗島라고도 불린다.
  4.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전문에는 대만과 그 부속 섬들이 중화민국에 귀속된다는 구절은 없다. 이 때문에 장제스의 지배는 점령이라고 주장하는 본성인 출신 대만인들이 생기게 됐다.
  5. 공산당을 반대하고 나라를 되찾는다는 의미다.
  6. 구체적인 내용은 실질적인 일당 체제, 야당 불법화, 총통 간선제, 언론과 출판 등 정치적·시민적 권리 제한 등이다.
  7. 쑨원의 삼민주의는 민족주의·민권주의·민생주의를 일컫는다.
  8. 공산당과 러시아 반대 총동원운동이라는 의미다.
  9. 다케시 2015, p61.
  10. 1958년에 지배계급 내 일부가 민생주의를 내건 국가자본주의적 경제 계획에 반대하고 자유주의 시장 경쟁을 요구했지만 지배계급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11. 1949년 이전부터 대만에 살고 있던 중국 출신의 본토인들을 본성인이라 하며, 그들의 다수는 푸젠성 남부(민난인) 출신들이다. 장제스를 따라 대만에 온 중국 본토인들은 외성인이라 한다.
  12. 동원감란시기 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은 중화민국 헌법의 임시 조항인데, 1948년 5월 10일에 선포됐고 1991년 5월 1일 폐지됐다. 1947년 중화민국 헌법이 발표될 당시 중국 공산당이 세력을 점차 확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제스는 난징에 있던 국민정부 제6차 국무회의에서 “전국 총동원령을 엄히 시행해 공비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동원령을 내렸다. 그래서 중화민국 전역이 ‘동원감란시기’에 접어들었고,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옮겨온 뒤에도 1991년까지 유지됐다.
  13. 중앙민의기구의 하나로 상원 격이다. 1991년부터 직선제로 치러졌으며, 2000년에는 그 기능이 축소되었고, 2005년에는 그 기능을 입법원에 넘겨주고 사실상 폐지됐다.
  14. 1970년대 초반 장징궈가 대만 본토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리덩후이 같은 기술 엘리트 세력들이 국민당에 입당해 당내 세력을 형성했다. 대만 본토화 정책은 외성인들이 지배하던 국민당에서 본성인 출신 인사들을 비례적으로 늘려서 국민당을 대만화한다는 정책이었다. 이는 국민당이 대만에서 장기 생존을 하기 위한 전략이자 대만을 발판 삼아 미래에 중국을 수복하려는 책략이기도 했다. 또, 대만 본토화 정책은 미국의 양안관계 현상 유지론에 부합하는 정책이기도 했다.
  15. 국민당의 억압적인 통치에 반대한 자유주의자 이오가 중국의 전통 사상을 비판하면서 시작된 논쟁이다. 이오는 중국 전통을 강조하는 입법위원 호추원을 겨냥해 논쟁을 벌였는데, 학술 논쟁이었음에도 국민당을 비판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녔다. 장성구·오회련, 1992, 214~223쪽 참고.
  16. 1957년 4월 제3대 지방선거 때 국민당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모여 ‘당외후선인 연의회’黨外候選人 聯誼會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때부터 국민당 밖 인물들을 ‘당외’라고 불렀다.
  17. 민진당은 사회운동 세력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본가 계급에 기반한 정당이다.
  18. 대만에서 계엄령 해제는 사회운동이 폭발적으로 분출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저변에 잠재하던 각종 문화적 창조력이 대대적으로 방출됐다. 수많은 상이한 문학 및 예술 현상이 등장했고, 다원화된 문학적 과제가 모두 관용적으로 대중에게 수용됐다. 여성 문학, 동성애 문학, 권촌 문학(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건너온 국민당 소속 군인과 그 권속들이 모여 살던 권촌에서 유래한 말로, 이방인으로서 외성인들의 삶을 형상화했다), 원주민 문학 등이 그 사례들이다.
  19. 1986년 이후 다양한 사회운동(노동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소비자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등)이 등장했다. 대만의 노동계급은 장제스 통치하에서 제조업 발전으로 크게 늘었지만, 국가보안법과 일당독재 때문에 노동운동은 성장하지 못하고 짓눌려 있었다.
  20. 리덩후이는 대만 본토화 정책을 추진했는데, 국민당 내에서 대륙 출신 원로들을 배제하고 대만 자체 실력을 배양해 양국론(두 중국 정책)을 실시하기 위해서였다. 리덩후이의 이런 행보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국민당 내부 투쟁을 위해 신국민당연선을 결성했다. 그들은 1993년에 신동맹회를 결성했다가 국민당을 탈당해 신당을 창당했다.
  21. 장징궈 말기인 1986년부터 야당 후보가 입법위원 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됐고, 1989년 선거 때 야당 후보의 출마가 합법화됐다. 1991년 개헌이 이뤄지면서 1992년 선거는 총선으로 전환됐다. 2005년 국민대회의 기능이 입법원으로 이전되면서 입법위원의 임기가 3년에서 4년으로 연장됐다. 또,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전환하면서 입법위원 수도 225명에서 113명으로 대폭 축소됐다.
  22. 유엔 결의 뒤로 대만은 국제기구 등에서 Chinese Taipei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한 지방이라는 의미다.
  23. 1979년 중국과 수교한 뒤 1991년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 미국이 중국과 양안관계에 취한 태도를 전략적 모호성으로 설명한 책은 해리 하딩의 《중국과 미국》(나남출판)이다.
  24. 1979년 1월 1일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대만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했는데, 이 글에는 하나의 중국을 견지하고 대만 독립을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양안 간의 3통(통선, 통향, 통상)을 확대하고 군사적 대치 상태를 종결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25. 덩샤오핑은 9개 조 평화방침에 대해 “두 가지 제도는 허락할 수 있으나 대만은 대륙의 제도를 파괴해서는 안 되고 중국도 대만의 제도를 파괴하지 않을 것”(김진열 2013, 15쪽)이라고 설명했다.
  26. 당시 대만의 대중국 공식 정책은 장제스가 주장한 반공본토수복의 기조 아래 3통4류(통상·통우·통항과 경제·문화·과학기술·체육 교류)를 추진하고 중국이 삼민주의 통일 방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중국과는 3불, 즉 접촉·협상·타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7. 1970년대 후반 미·중 수교 이후 양안관계는 미·중 관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미국이 중국과 수교한 뒤에도 늘 대만을 중국 압박의 카드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미·중 관계의 맥락에서 양안관계를 다루지 않고 중국과 대만 관계만 살펴보고 있다.
  28. 2010년까지 대만의 1인당 GDP는 한국보다 높았다.
  29. 1991년 대만·중국·홍콩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또 대만과 중국은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도 가입했다. 1995년 GATT가 세계무역기구WTO로 바뀌었고, 중국은 2001년에 WTO에 가입했다.
  30. 대만의 대중 수출이 늘면서 대중 무역 규모가 대미 무역 규모보다 더 커졌다. 이런 사정은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중국에서 만들어진 완제품의 최종 소비국은 미국이기 때문에 대만과 한국 경제의 미국 시장 의존도가 크게 낮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31. 대만 국민당은 장징궈 집권 동안에는 일국론(대만의 대륙 통일론)을 갖고 있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과 대만의 경제력·군사력 격차가 벌어지면서 일국론을 버리고 양국론을 채택하게 되는데, 리덩후이의 관점 변화가 이를 잘 보여 준다. 하지만 국민당 주류는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 때문에 친중국 입장으로 돌아섰고, 리덩후이는 국민당에서 탈당한다. 민진당은 리덩후이가 대만의 독립을 위해 기여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국민당이 공산당과는 어떤 제휴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장제스의 유훈이 민진당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32. 중국과 대만의 경제적 연관성 때문에 민진당 내에서도 대만 독립을 둘러싸고 분파 갈등이 존재한다. 1990년대 민진당 내 최대 계파였던 메이리다오파는 대만 독립보다는 ‘자결’이라는 용어를 선호했고, 신조류파는 대만 독립을 주장했다. 중국의 대대만 태도에 따라 자결파와 대만 독립파의 세력 관계가 엎치락뒤치락해 왔다.
  33. 2008년 11월 중국의 해협양안관계협회와 대만의 해협교류기금회가 타이베이에서 해협양안공운협의(양안 간 항공 교류), 해상양안해운협의(양안 간 해상 교류), 해협양안우정협의(양안 간 우편물 교류) 정책에 서명했는데, 이것을 신3통이라 한다.
  34. 홍콩의 우산운동에 대해서는 이정구(2019)를 보라.
  35. Election Study Center, National Chengchi University 웹사이트
    https://esc.nccu.edu.tw/PageDoc/Detail?fid=7800&id=6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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