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주의 관점에서 본 대만 문제
1 2019년 홍콩 송환법 반대 투쟁 때도 대만 청년들은 민주화 운동에 참가하는 홍콩 젊은이들에게서 자신들의 미래를 보는 듯하다고 말하곤 했다. 2020년 1월 총통 선거 2 에서 지지율이 낮았던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이 국민당의 한궈위韓國瑜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는데, 차이잉원이 홍콩 송환법 반대 투쟁을 지지한 덕을 톡톡히 본 것이었다.
1949년 이후 대만 문제는 중국의 “핵심 이익”이었다. 그리고 중국과 대만의 관계, 즉 양안관계는 미·중 관계에서 항상 뜨거운 쟁점이었다.“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내건 시진핑 주석이 홍콩 민주화 운동의 열기 덕분에 재선에 성공한 민진당의 차이잉원과 대결해야 하는 상황이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중국도 대만을 침공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실제로 2022년 벽두부터 중국 전투기가 대만 영토를 침범하는 일이 잦았다. 미·중 갈등이 첨예해지는 상황에서 대만을 둘러싼 대립이 동아시아에서 미·중 간 제국주의적 경쟁과 갈등을 부추기는 중요한 불쏘시개가 되고 있다.
이 글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전통인 국제주의적 관점에서 대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대만의 역사와 민주화 운동을 간략하게 다룬 뒤 양안관계의 변화를 살펴보겠다. 마지막으로 대만 본토주의가 아니라 중국 본토 노동자들과의 계급적 연대를 추구하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대만의 역사
3 포르투갈 선원들은 대만을 식민지로 삼거나 정착하지는 않았다. 17세기부터 네덜란드, 스페인, 청 왕조가 차례로 이 섬을 지배했다.
대만 섬에는 석기 시대부터 폴리네시아계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16~17세기 포르투갈 선원들이 이 섬을 “일랴 포르모사”Ilha Formosa(‘아름다운 섬이라는 뜻)라고 부르면서 포르모사가 대만의 또 다른 이름이 됐다.4 그리고 중국 대륙에서 공산당과 벌인 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의 국민당이 1949년 대만으로 후퇴한 뒤 그 섬을 통치했다.
구미 열강이 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대만에 눈독을 들이자, 청 왕조는 이 섬을 성省으로 승격시켜 근대적 발전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1895년 청 왕조가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 뒤 일본이 이 섬을 지배했다. 1945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은 대만 섬과 인근의 펑후 제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5 입장을 버리지는 않았다. 중국 공산당도 대만을 미수복 지역으로 간주하며 통일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1958년 8월 중국과 대만이 서로 포격을 가했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졌다. 그런 군사 충돌의 한가운데에 진먼다오金門島가 있었다. 1958년 이후 양안에서 실질적인 군사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전쟁 위험은 상존했다.
국민당은 반공복국反共復國 장제스는 중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고자 대만에서 강력한 국민국가를 서둘러 건설해야 했다. 이를 위해 경제 발전을 이끄는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하고 정치적으로는 계엄령을 통한 권위주의적 정체를 확립했다.1950년 7월 장제스는 당의 개조를 결정한 중앙상무위원회 임시회의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반공전쟁의 실패는 정부가 민생주의를 실행하지 않은 데 있으며, 앞으로 반공전쟁에서 공비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민생주의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
7 중 하나였다. 쑨원의 민생주의는 토지의 균등한 분배와 경자유전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의 개선 등을 의미했다.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과제로 볼 수 있다.
민생주의는 쑨원의 삼민주의그런데 민생주의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제각각 해석될 수 있었다. 장제스의 민생주의는 국가자본주의적 산업 재편과 국가 주도 산업화를 의미했다. 장제스는 자유와 평등을 언급했는데, 경제에서 자유와 평등은 계급투쟁을 예방하기 위한 국유화와 독점자본 억제를 의미했다.
그리하여 국가의 강력한 관리와 통제 아래에서 민간 중소 자본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경제 구조가 대만 산업의 특징이 됐다.
8 이 시작됐다. “국가 총동원을 목적으로 한 이 운동은 경제, 사회, 문화, 정치 각 분야의 개조운동이라는 식으로 전개되었는데, 경제개조운동의 핵심은 ‘호조합작’과 ‘증산경쟁’에 있었으며 그 이념적인 바탕은 [장제스식의 — 이정구] 민생주의였다”. 9
1952년 2월에 ‘반공항아총동원운동’反共抗俄總動員運動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고 대만을 서방 세계의 자유민주주의가 우월함을 보여 주는 본보기로 만들려고 1951년부터 대만의 경제 발전을 지원했다. 장제스는 미국의 원조를 담당하는 상호안전보장국·경제안정위원회 같은 중앙 경제 기구를 설립해 국가 주도 경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또한 장제스는 1954년에 토지개혁을 단행해 자본이 산업으로 향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1953년에 행정부 산하 경제안정위원회가 4개년 경제건설계획(1953~1956)을 추진했다.11 여인의 담배 밀매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촉발된 본성인들의 반란은 그해 5월까지 이어졌고, 본성인 수천 명이 죽었다. ’2·28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 이후 본성인과 외성인 사이의 갈등이 생겨났고, 외성인들이 운영하는 국가기구의 억압적인 통치 때문에 이런 갈등이 계속 이어졌다.
한편, 1947년 본성인12 그리고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중앙 기구와 이에 상응하는 정부 기구를 기반으로 한 통치라는 뜻이었다.
장제스의 대만 통치 이데올로기는 ‘법통’이었다. 1947년에 공표된 중화민국 헌법과 1948년에 선포된 동원감란시기 임시조관13 는 전 중국을 포괄하는 기구이고 임기제였다. 그런데 제1회 입법위원과 감찰위원이 선출된 뒤 대만으로 후퇴하면서 중국 대륙의 각 지역별 입법위원과 감찰위원을 선출할 수 없게 되자 입법위원과 감찰위원의 임기가 무기한 연장돼 사실상 종신직이 됐다. 같은 이유로 국민대회가 선출하는 총통의 임기도 자동으로 연장됐다.
중앙민의기구인 국민대회(국회)장제스에서 아들 장징궈로 이어진 권력 세습과 종신직 국회에 대한 대중적 불만이 갈수록 쌓였다. 그러자 장제스는 1969년에 이른바 중앙 공직인원 증원 보궐선거법을 공표해 국민대회 증원 선거를 실시했다. 하지만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치가 바뀐 것이 아니었고, 계엄령도 해제되지 않았다. 1988년 장제스의 아들이자 당시 총통이었던 장징궈蔣經國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본성인 출신의 부총통 리덩후이가 잔여 임기를 승계했다. 1990년 선거에서도 리덩후이가 총통으로 선출되면서 본성인과 외성인 사이의 갈등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민주화 운동들
대만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촉진한 것은 국가보안법을 통한 억압적 통치 체제에 맞선 아래로부터의 저항이었다. 대만의 제조업 발전으로 노동자 계급의 규모가 늘어났지만 국가보안법하에서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보인 온건함, 국민당 친화성 그리고 부패 때문에 계급적 힘이 발휘되지 못했다. 권위주의 체제와 일당 독재에 대한 반대는 처음에는 체제 내 개혁파에서 시작됐다가 나중에는 들백합운동 등 사회운동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사회운동은 결국 부르주아 개혁파인 민진당의 영향력에 흡수되곤 했다. 그러면 체제 내 개혁파가 어떻게 등장하게 됐는지 살펴보겠다.
장제스가 통치하던 시기에 중앙 정치 무대는 국민당이 장악했지만, 지방의회 선거에서는 무소속 후보들이 종종 당선됐다. 그 무소속 의원들이 장제스의 통치에 집단 반발하곤 했는데, 1966년 천중광陳重光을 비롯한 성의회 의원 40여 명이 사실상 종신이었던 국민대표의 교체를 요구했다.
또, 장제스 부자의 가혹한 권위주의 통치에 반발하는 세력들이 주간지 《자유중국》을 발행해 민주화 요구를 제기했다. 그러자 장징궈는 《독소사상에 대한 총공격》을 발행해 《자유중국》이 “사상적인 밀수 활동이며, 공산당의 통일전선 책략을 도와 주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15 이 벌어졌다.
극심한 언론 탄압 속에서 민주화 열망을 은근히 드러낸 잡지로는 《문성》文星과 《대학》大學이 있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대만 문화계는 국민당을 지지하는 보수 세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서양 문화를 소개하는 게 진보적일 수 있었다. 그 당시 서양의 자유주의적 문화관에 근거해 국민당에 비판적이었던 후스胡適가 보수 진영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받았다. 그때 《문성》이 후스를 옹호하면서 중서문화논전中西文化論戰《대학》은 청년 지식인들이 1968년에 만든 동호인 잡지였는데, 1970년대 초반 정치 혁신을 주장하는 논설을 싣기 시작했다. 1971년 10월 대만이 유엔(국제연합)에서 대표권을 상실하자 국민당 정부가 중국 대륙까지 포괄한다는 대표성의 허구가 드러났다. 그러자 장징궈는 현실 정치 비판을 전면 억제하기보다는 부분적으로 표출되도록 하는 쪽으로 대처했고, 그 틈에 《대학》의 비판 활동이 가능해졌다.
16 당외 인사들은 《대학》과 1975년 창간된 《대만정론》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이들이 나중에 민주진보당(민진당)을 창당했다. 17
1970년대 중반부터 국민당 밖 세력들이 ‘당외’를 형성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1977년 11월 19일 중리사건中壢事件이 벌어졌다. 국민당 중앙이 타오위안 현장弦長 선거에서 《대학》 구성원인 쉬신량許信良을 낙선시키려고 개표를 중단했는데, 선거구 중 한 곳이었던 중리에서 개표 과정을 지켜보던 1만 명이 경찰서를 포위하고 항의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청년 2명이 국민당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18 등이 있었다.
1978년 당외 인사들은 ‘대만당외인사조선단’臺灣黨外人士助選團을 결성하고 ‘십이대정치건설’十二大政治建設이라는 강령을 만들어 사실상 정당 구실을 했다. 십이대정치건설에 포함된 정치적 요구에는 국민대회의 전면 개편, 지자체장 직접선거, 군대의 국가화(국민당의 군대 지배 반대), 사법 독립, 언론·출판·신문·잡지 간행의 자유, 정당 결성의 자유, 계엄령 해제1979년에 민주화 운동 세력들을 포괄하는 잡지 《메이리다오》美麗島가 창간됐다. 각지에 지역 조직을 두고 신세대 정치인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이 잡지는 사실상 정당 구실을 했다.
1979년 12월 10일 《메이리다오》는 가오슝시에서 국제 인권의 날을 기념하는 거리 행진을 조직했다. 민주 인사들이 행진을 이끌었으며 약 1만 명이 참여했다. 국민당은 이 행진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관련 인사들을 체포했다. 천수이볜이 이 사건의 변호인단으로 참여했다.
1984년에 장난江南(본명 유관량)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당했다. 그가 《장징궈전》을 써 총통 장징궈의 어두운 면을 폭로할 것으로 예상되던 차였다. 이 사건은 장씨 부자의 강압적인 지배 체제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보여 줬다.
민주 개혁
1986년 민주진보당이 창당됐다. 민진당은 부르주아 야당 세력(당외 세력)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회운동가들을 포함했다. 국민당의 철권 통치하에서 민진당이 창당됐다는 것은 억압적인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증표였다.
1987년 2월 ‘2·28평화일촉진회’二二八和平日促進會가 결성되어 1947년 2·28 사건 진상 규명, 희생자 복권, 희생자 유족에 대한 보상, 2월 28일을 평화일로 제정하기 등을 요구했다. 1986년 10월 국민당 중앙위원회 상임위는 계엄령을 해제하고 ‘비상시기 인민단체 조직법’(정당 결성 금지법)을 개정하기로 의결했다.
1987년 7월 계엄령이 해제됐다. 그해 11월 대륙 방문 자유화가 발표됐다. 12월 25일 국민대회를 포함한 중앙민의기구를 개혁하겠다는 발표가 있었고, 1988년 1월 1일에는 언론출판의 자유화 조치가 발표됐다. 그 며칠 뒤인 1월 13일 장징궈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20 그리고 1990년 3월 들백합운동이 벌어졌다. 40년 동안 교체된 적이 없던 국민대회가 1990년 3월에 임기를 9년으로 연장하자 대학생 20여 명이 중정기념관(중정은 장제스의 호)에서 국민대회 해산, 임시조관 폐지, 민주 개혁 시간표 확정을 요구하면서 시작된 시위가 전국적 운동으로 확대됐다. 들백합운동 세력들은 나중에 민진당으로 흡수됐다.
리덩후이가 우여곡절 끝에 장징궈를 이어 총통이 됐다.21 에서 161석 중 국민당은 103석, 민진당은 52석을 차지했다. 이 결과는 국민당의 패배, 민진당의 승리를 뜻했다. 이는 국민당 통치 시절 당외 등 민주주의 세력들의 투쟁(특히 1990년 들백합운동) 덕분이었다. 그리고 1995년의 입법위원 선거에서 국민당은 85석, 민진당은 54석, 신당 21석, 무당파 4석을 차지했다. 국민당의 지지는 줄었고 민진당은 답보했다. 한편, 리덩후이는 직선제 개헌을 추진했고, 1994년 5월 국민대회 임시회의에서 총통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됐다.
1992년 입법위원 선거개혁개방 정책과 양안관계의 변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중국과 대만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대립과 갈등이었다. 양측은 상대방을 흡수 통일하고자 했다. 중국은 기회만 되면 미수복 지역인 대만을 공격하려 했고, 대만도 미국과 손을 잡고 동남부 연안에서 중국에 군사적 위협을 가했다. 1958년 진먼다오 포격 사건은 중국과 대만의 군사적 긴장이 절정에 이른 사건이었다. 그 뒤로 양국은 직접적으로 무력 충돌을 벌이지 않았지만 긴장은 지속됐다.
그런데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치르면서 소련 견제를 위해 중국의 지원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미국과 중국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1971년 10월 25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문 2758호가 채택됐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에서 합법적 권리를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이 결의에 따라 대만은 불법적으로 중국 영토를 점령한 집단으로 전락해 유엔에서 자진 탈퇴했다.
미국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변화였다.
이처럼 1970년대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뒤 동아시아 지역에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려고 중국에 유화적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중국이 지역 패권자로 부상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미국은 중국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닉슨이 1972년 중국을 방문한 성과로 1979년에 미국과 중국이 수교를 체결했지만, 미국은 대만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은 유엔 결의안을 공식 승인함으로써 ‘하나의 중국’을 존중하기로 했지만, 내부적으로 대만을 주권 국가로 인정했다. 미국은 1979년 중국과 수교한 뒤 대만과 체결한 상호방위조약을 무효화했다. 하지만 그 대신에 미국은 ‘대만관계법’을 제정해 대만에 군사 지원을 보장해 줬다.
23 예를 들어, 미국 의회 내 친親대만 그룹인 대만 코커스 소속 의원들은 대만 국민당이 2005년 천수이볜 민진당 정부의 대규모 무기 구입 추진을 반대하자 마잉주 국민당 주석을 접촉해 입장을 바꾸도록 압력을 넣었다.
요컨대, 1979년 미·중 수교 이후 양안관계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다음과 같다. 즉, 미국은 중국이 무력을 포함해 자의적으로 대만을 통합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대만의 독립도 지지하지 않는다. 미국은 중국이 원하는 통일과 대만이 원하는 독립을 모두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전략적 모호성’ 정책 아래에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해 왔다.24 1979년 1월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은 “대만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강조했다. 이어서 1981년 9월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장 예젠잉은 대만 문제에 관한 9개 조 평화방침을 제시했다. 핵심 내용은 일국양제였다. 25
1970년대 이후 중국은 대만 흡수 통일 열망을 거둬들이지는 않았지만 이전의 무력 통일 지향적인 태도에서 양안의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바꾸었다.26 결국 1987년 11월 대만은 대만인들의 고향 친척 방문을 허용했고, 이로 인해 양안 간 민간 교류가 크게 늘어났다.
중국이 태도를 바꾸자 대만도 호응하는 분위기가 됐는데, 대만 내에서 평화통일, 삼통개방, 고향 친척 방문 등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이다.1987년 중국 국무원은 양안 간 경제 무역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일국양제, 평등호혜, 자유왕래의 세 방침에 근거해 ‘대만 동포들의 투자를 격려하는 규정에 관한 22개조 규정’을 발표했다. 또한 중국과 영국이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홍콩 반환 관련 협상에서 덩샤오핑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대만에도 적용하겠다고 했다. 중국과 영국은 1984년에 “일국양제, 항인치항, 고도자치”의 방침으로 홍콩 문제를 해결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대만 정치 지형에 변화가 생겼다. 1988년 1월 장징궈가 죽고 본토인 출신의 리덩후이가 총통의 남은 임기를 승계한 것이다. 1987년에는 계엄령이 해제됐으며, 바로 전해에 결성된 민진당이 합법적으로 활동하게 됐다. 중국과 대만 사이의 경제 교류는 더 확대됐고, 이 때문에 본성인과 외성인의 차이와 대립보다는 중국에 대한 태도를 둘러싼 지배계급 내 두 분파의 갈등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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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의 대만과 양안관계28 대만 경제는 미국 시장과 국제 분업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는데, 그 결과 대외 시장 의존도가 높았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성장률이 지속적으로 둔화하는 추세를 보였다. 1990년대 이전 대만의 경제성장률은 9퍼센트대였는데, 2000년 이후 3퍼센트로 크게 하락했다.
대만 경제는 1951~2000년에 연평균 8.1퍼센트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대만 경제와 밀접했던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 경제가 부진하면서 대만 경제의 성장률이 둔화됐다. 이는 중국이나 한국 등 동아시아 경쟁 국가들의 부상과 대비됐다. 가령, 중국은 2000년 이후 연평균 10퍼센트가 넘는 성장을 거듭했다.
29 대만 자본은 광둥성과 푸젠성 등지에 자본집약적인 투자를 늘렸다. 중국이 대만의 최대 무역 흑자국이 되면서 중국에 대한 대만의 경제적 의존도 증대했다. 그 덕분에 대만은 1997년 동아시아를 휩쓴 경제 위기에서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수익성이 하락한 대만 기업들은 1990년대 이후 중국 대륙에 대한 투자를 폭발적으로 늘렸다. 대만의 중국 무역 의존도는 1970년대 말 0.25퍼센트, 1990년 10퍼센트, 2001년 12.6퍼센트로 급증했다. 1991년 대만 전체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한 비중이 9.1퍼센트였지만 2005년에는 27.3퍼센트로 급증했다.1990년대 이후 대만과 중국의 경제적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중국은 대만 정치·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됐다. 대만 자본의 중국 진출과 중국 자본의 대만 유입이 초래한 결과, 중국 이주노동자의 대만 유입이 야기한 결과, 통일/독립 문제 등이 뜨거운 쟁점들이었다.
1992년 대만해협회의 양따오한 회장과 중국해기회의 꾸천푸 이사장의 회담은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더 긴밀해지고 인적·물적 교류가 더 확대될 것임을 예고했다. 이 회담에서 대만과 중국은 “하나의 중국, 서로 다른 설명”一個中國 各自表述에 합의했는데, 이것이 양안관계를 규정하는 92공식九二共識이다. ‘92공식’은 중국과 대만이 하나의 중국을 전제한 상황에서 각자 자신의 체제를 표현할 때 여지를 두도록 한 것이었다.
이 합의를 두고 리덩후이(1988~2000년 총통)는 양국론, 천수이볜(2000~2008년 총통)은 일변일국론一邊一國論, 마잉주(2008~2016년 총통)는 일국양구론一國兩區論으로 불렀다.
양국론은 중국과 대만이 각각 독립적인 국가라는 의미다. 일변일국론도 양국론과 마찬가지로 두 해변에 각각 독립적인 국가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반면, 일국양구론은 중국 대륙과 대만이 하나의 국가이긴 하지만 대륙과 대만에 각각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실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92공식에 대해서는 대만 정치권 안에서도 상이한 해석과 표현이 존재했다.
한편, 1995년 1월 장쩌민은 양안관계의 발전을 위해 ‘조국통일 대업완성을 촉진하기 위해 계속 분투하자’는 연설을 하면서 ‘8개항 주장’을 제기했다. ‘8개항 주장’은 덩샤오핑의 ‘평화통일과 일국양제’ 구상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대만 행정원장 리엔잔連戰은 상호 신뢰 협력 단계를 통해 평화 경쟁의 형제 관계를 구축하자며 화답했다.
1995년 4월에는 리덩후이도 양안관계에서 대만이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996년 3월 제9대 총통으로 재선한 리덩후이는 같은 해 8월에 “[중국 투자에 대한 — 이정구] 조급함을 버리고 인내심을 갖는다”戒急容忍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대만 기업들의 대중국 투자를 제한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31 경제적 갈등뿐 아니라 군사적 긴장도 고조됐다. 중국은 1995년 말부터 이듬해 3월 대만 총통 선거 직전까지 무력시위를 전개했다.
리덩후이가 입장을 바꾼 배경에는 양안 갈등이 있었다. 1995년 리덩후이가 미국을 방문하고 대만이 중국과는 별개의 국가라고 주장하면서 양안 갈등이 고조됐다.중국의 무력시위는 외려 대만 내에서 반감을 샀고, 결국 2000년에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이 집권했다. 2000년 3월 민진당의 천수이볜이 총통으로 당선되면서 국민당의 50년 집권이 막을 내렸다.
하지만 대만 공식 정치는 대중국 문제에서 혼란과 대립의 연속이었다. 중국의 경제 성장, 중국의 대만 투자 확대, 이로 인한 중국과 대만의 경제적 상호의존 증대가 초래한 결과였다.
32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를 이제는 더 중시하는 입장으로 돌아선 국민당의 후보 마잉주가 2008년 총통에 당선한 것은 이런 경제적 교류와 협력이 강화된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33
민진당은 대만 독립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천수이볜 집권기(2000~2008년)에 오히려 양안관계의 교류와 협력이 더 강화됐다.그럼에도 양안관계의 불안정성 때문에 대만의 양대 정당인 국민당과 민진당은 양안관계를 중심으로 대립하고 있다. ‘하나의 중국’과 ‘대만 독립’을 놓고 두 세력의 충돌과 대립이 빈번하게 나타나곤 한다. 2005년 4월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과 대만 국민당 렌잔 주석이 만나 5개항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그들의 합의는 2008년 선거에서 민진당을 고립시키고 국민당이 승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진당 집권 8년 동안 대만 경제는 정체했고 실업률은 치솟았으며 빈부격차가 커졌다. 2005년 5개항 합의사항 발표 이후 양안의 경제 협력과 교류가 더 확대되면서 대만 내에서 독립 주장이 잠시 힘을 잃었다. 국민당이 집권하고 있던 2010년에 양안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이 체결됐다. 합의한 부분에 대해서만 선별적으로 개방하는 부분적인 자유무역협정FTA이었다.
국민당 소속의 마잉주는 “독립하지도 않고, 통일하지도 않으며, 무력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서로 주권을 인정하지도 않지만 서로 통치권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하나의 중국인 중화민국의 둘로 나눠진 지역들이 각자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2014년 3월 18일부터 4월 10일까지 대학생과 사회운동 활동가 3백여 명이 대만 입법원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이 해바라기 운동(태양화운동)은 양안서비스무역협정海峽兩岸服務貿易協議, CSSTA을 졸속 처리한 입법원에 항의했다. 집권 세력의 신자유주의와 친중 정책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 운동에 참가한 대학생들은 서비스협정이 발효되면 서비스 분야의 규제가 완화될 것이고, 시장 개방이 대폭 확대될 것이며, 대만 경제가 중국에 종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해바라기 운동의 근원적 배경은 민진당과 국민당이 집권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번갈아 추진했고, 이로 인해 청년들의 일자리가 줄고 실업이 증대하고 생활수준이 하락한 것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었다. 이 투쟁은 1990년 들백합운동 이래 가장 거대한 사회개혁 운동이었고, 이 운동의 주역들은 2015년 진보 인사들이 만든 ‘시대역량’ 정당에 입당했다.
34 이 일어나 중국 정부의 억압 조치에 저항했는데, 해바라기 운동과 겹쳐지면서 차이잉원이 2016년 총통 선거에서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차이잉원이 2016년과 2020년 총통 선거에서 당선한 또 다른 배경은 홍콩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2014년 홍콩에서 ‘우산혁명’그런데 차이잉원이 법정공휴일을 줄이는 노동관계법 개악을 추진하면서 지지율이 10퍼센트를 간신히 넘길 정도로 인기가 떨어졌다. 이 때문에 차이잉원의 민진당은 연립정부를 구성했던 시대역량과도 사이가 틀어져, 2018년에 연정이 무너졌다. 2018년 11월 지방선거에서 민진당은 참패했다.
차이잉원은 추락한 지지율을 만회하려고 중국의 강압적인 태도를 부각시키곤 했는데, 때마침 홍콩에서 송환법 반대 운동이 벌어졌다. 2018~2019년 홍콩을 휩쓸었던 송환법 반대 투쟁으로 중국에 대한 대만 민중의 반감이 커졌다. 그 덕분에 2020년 선거에서 참패가 예상됐던 차이잉원의 민진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본토주의가 아니라 연대의 정치가 필요하다
대만의 기성 정치권은 중국과의 관계를 두고 크게 범람연맹과 범록연맹으로 나뉜다. 범람연맹은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고 장기적으로 통일하자는 입장으로 국민당·친민당·신당이 대표적 세력이다. 범록연맹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독립성을 더 강조하는 입장으로 민진당·시대역량이 대표적이다.
노동운동도 나뉘어 있는데, 노동당은 중국과의 통일을 주장하는 반면, 노동전선은 독립을 주장한다. 하지만 노동자입법행동위원회는 통일도 독립도 주장하지 않는다. 사실 대부분의 대만인은 대만이 중국과 다른 별개의 국가라고 본다.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여론조사에 따르면, 1992년에만 해도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기는 응답자(26퍼센트)가 자신을 대만인이라고 여기는 응답자(18퍼센트)보다 많았다. 2007년 여론조사에서는 자신을 대만인이자 중국인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45퍼센트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대만인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44퍼센트였으며, 중국인이라고 응답한 숫자는 5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2014년 여론조사에서도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기는 응답자가 4퍼센트에 지나지 않았고, 자신을 대만인으로 여기는 응답자가 60퍼센트 이상이었으며, 자신을 중국인이자 대만인이라고 여기는 응답자가 33퍼센트였다. 이런 추세는 2008년 마잉주가 총통에 당선한 뒤로 강화됐다.
그런데 중국 경제가 발전하고 중국의 정치적·군사적 영향력이 증대하자 미국이 중국을 제국주의적으로 견제하면서 대만을 핵심고리로 삼았고, 그에 맞서 대만에 대한 중국의 제국주의적 압력도 점차 커졌다. 이런 배경에서 대만 본토주의가 강화됐다.
본토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나 개인들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다양하지만, 중국 대륙(의 자본가와 노동자) 대 대만(의 자본가와 노동자)을 대립시키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대만 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에 대한 국제주의자들의 전통적 입장은 해당 민족주의가 제국주의 체제를 약화시키는 투쟁에 기여하느냐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실적으로 대만 본토주의가 미국의 중국 압박에 이용되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대만 본토주의가 중국 공산당의 억압적 체제와 제국주의적 행보에 대한 정당한 반발로 성장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같은 관점에서, 대만은 중국과 사실상 민족적 뿌리가 같다거나 대만이 국제 사회(제국주의적으로 운영된다)에서 독립국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근거로 중국의 대만 병합 시도를 지지해서도 안 된다. 그런 입장은 현실에서 미국에 맞서 중국이라는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를 지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만인 중에는 현재의 중국-대만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현상유지파가 많다. 우크라이나처럼 열강 간 제국주의적 갈등의 한복판에서 총알받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의 다른 많은 염원과 마찬가지로 대만인들의 현상유지 염원은 오늘날 체제의 위기로 바람 앞 등불 같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대만과 중국 본토의 노동자 대중이 국적을 뛰어넘어 국제주의적으로 제국주의에 맞서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대만 사회주의자들은 대만 노동자 대중이 중국 본토 노동자들과 연대해서 제국주의 체제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만 내 계급 갈등을 흐리고 미국 제국주의로 기울고 있는 대만 본토주의에 비판적이어야 한다.
한편, 중국 사회주의자들은 중국 노동자 대중이 대만 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만의 통일/독립 문제는 대만인들이 스스로 선택할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중국 지배자들이 대만을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병합하려 하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
대만과 중국 사회에서 양안 문제는 뜨거운 감자임이 틀림없다. 양안관계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압박과 대만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압박이 동시에 강화되는 흐름 속에서 더욱 그럴 공산이 크다. 제국주의에 대한 국제주의적 관점이 없다면, 국민국가들 사이의 쟁투만이 우리 눈에 보일 것이다. 오직 국제주의적 관점만이 전쟁을 둘러싸고 작용하는 계급 적대를 포착할 수 있다.
주
- 대만의 정식 명칭은 중화민국이고, 자국 내에서는 타이완으로 부른다. 그런데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중화인민공화국 대만 특별행정구라고 부른다. 1980년대부터 중국의 압력 때문에 중화민국은 올림픽 등 국제 기구에서 중화 타이페이Chinese Taipei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대만으로 통일해 쓴다. ↩
- 대만 총통 선거는 간선제였다가 1996년부터 직선제로 바뀌었다. 총통의 임기는 4년이며 중임이 가능하다. 1996년 선거에서 국민당의 리덩후이(부총통은 롄잔)가 당선됐다. 2000년과 2004년에는 민진당의 천수이볜(부총통은 뤼슈롄)이, 2008년에는 국민당의 마잉주(부총통은 샤오완창)가, 2012년에도 마잉주(부총통은 우둔이)가, 2016년에는 민진당의 차이잉원(부총통은 천젠런)이 당선됐다. 차이잉원(부총통은 라이칭더)은 2020년 선거에서 재선했다. ↩
-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메이리다오美麗島라고도 불린다. ↩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전문에는 대만과 그 부속 섬들이 중화민국에 귀속된다는 구절은 없다. 이 때문에 장제스의 지배는 점령이라고 주장하는 본성인 출신 대만인들이 생기게 됐다. ↩
- 공산당을 반대하고 나라를 되찾는다는 의미다. ↩
- 구체적인 내용은 실질적인 일당 체제, 야당 불법화, 총통 간선제, 언론과 출판 등 정치적·시민적 권리 제한 등이다. ↩
- 쑨원의 삼민주의는 민족주의·민권주의·민생주의를 일컫는다. ↩
- 공산당과 러시아 반대 총동원운동이라는 의미다. ↩
- 다케시 2015, p61. ↩
- 1958년에 지배계급 내 일부가 민생주의를 내건 국가자본주의적 경제 계획에 반대하고 자유주의 시장 경쟁을 요구했지만 지배계급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
- 1949년 이전부터 대만에 살고 있던 중국 출신의 본토인들을 본성인이라 하며, 그들의 다수는 푸젠성 남부(민난인) 출신들이다. 장제스를 따라 대만에 온 중국 본토인들은 외성인이라 한다. ↩
- 동원감란시기 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은 중화민국 헌법의 임시 조항인데, 1948년 5월 10일에 선포됐고 1991년 5월 1일 폐지됐다. 1947년 중화민국 헌법이 발표될 당시 중국 공산당이 세력을 점차 확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제스는 난징에 있던 국민정부 제6차 국무회의에서 “전국 총동원령을 엄히 시행해 공비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동원령을 내렸다. 그래서 중화민국 전역이 ‘동원감란시기’에 접어들었고,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옮겨온 뒤에도 1991년까지 유지됐다. ↩
- 중앙민의기구의 하나로 상원 격이다. 1991년부터 직선제로 치러졌으며, 2000년에는 그 기능이 축소되었고, 2005년에는 그 기능을 입법원에 넘겨주고 사실상 폐지됐다. ↩
- 1970년대 초반 장징궈가 대만 본토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리덩후이 같은 기술 엘리트 세력들이 국민당에 입당해 당내 세력을 형성했다. 대만 본토화 정책은 외성인들이 지배하던 국민당에서 본성인 출신 인사들을 비례적으로 늘려서 국민당을 대만화한다는 정책이었다. 이는 국민당이 대만에서 장기 생존을 하기 위한 전략이자 대만을 발판 삼아 미래에 중국을 수복하려는 책략이기도 했다. 또, 대만 본토화 정책은 미국의 양안관계 현상 유지론에 부합하는 정책이기도 했다. ↩
- 국민당의 억압적인 통치에 반대한 자유주의자 이오가 중국의 전통 사상을 비판하면서 시작된 논쟁이다. 이오는 중국 전통을 강조하는 입법위원 호추원을 겨냥해 논쟁을 벌였는데, 학술 논쟁이었음에도 국민당을 비판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녔다. 장성구·오회련, 1992, 214~223쪽 참고. ↩
- 1957년 4월 제3대 지방선거 때 국민당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모여 ‘당외후선인 연의회’黨外候選人 聯誼會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때부터 국민당 밖 인물들을 ‘당외’라고 불렀다. ↩
- 민진당은 사회운동 세력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본가 계급에 기반한 정당이다. ↩
- 대만에서 계엄령 해제는 사회운동이 폭발적으로 분출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저변에 잠재하던 각종 문화적 창조력이 대대적으로 방출됐다. 수많은 상이한 문학 및 예술 현상이 등장했고, 다원화된 문학적 과제가 모두 관용적으로 대중에게 수용됐다. 여성 문학, 동성애 문학, 권촌 문학(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건너온 국민당 소속 군인과 그 권속들이 모여 살던 권촌에서 유래한 말로, 이방인으로서 외성인들의 삶을 형상화했다), 원주민 문학 등이 그 사례들이다. ↩
- 1986년 이후 다양한 사회운동(노동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소비자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등)이 등장했다. 대만의 노동계급은 장제스 통치하에서 제조업 발전으로 크게 늘었지만, 국가보안법과 일당독재 때문에 노동운동은 성장하지 못하고 짓눌려 있었다. ↩
- 리덩후이는 대만 본토화 정책을 추진했는데, 국민당 내에서 대륙 출신 원로들을 배제하고 대만 자체 실력을 배양해 양국론(두 중국 정책)을 실시하기 위해서였다. 리덩후이의 이런 행보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국민당 내부 투쟁을 위해 신국민당연선을 결성했다. 그들은 1993년에 신동맹회를 결성했다가 국민당을 탈당해 신당을 창당했다. ↩
- 장징궈 말기인 1986년부터 야당 후보가 입법위원 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됐고, 1989년 선거 때 야당 후보의 출마가 합법화됐다. 1991년 개헌이 이뤄지면서 1992년 선거는 총선으로 전환됐다. 2005년 국민대회의 기능이 입법원으로 이전되면서 입법위원의 임기가 3년에서 4년으로 연장됐다. 또,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전환하면서 입법위원 수도 225명에서 113명으로 대폭 축소됐다. ↩
- 유엔 결의 뒤로 대만은 국제기구 등에서 Chinese Taipei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한 지방이라는 의미다. ↩
- 1979년 중국과 수교한 뒤 1991년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 미국이 중국과 양안관계에 취한 태도를 전략적 모호성으로 설명한 책은 해리 하딩의 《중국과 미국》(나남출판)이다. ↩
- 1979년 1월 1일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대만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했는데, 이 글에는 하나의 중국을 견지하고 대만 독립을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양안 간의 3통(통선, 통향, 통상)을 확대하고 군사적 대치 상태를 종결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
- 덩샤오핑은 9개 조 평화방침에 대해 “두 가지 제도는 허락할 수 있으나 대만은 대륙의 제도를 파괴해서는 안 되고 중국도 대만의 제도를 파괴하지 않을 것”(김진열 2013, 15쪽)이라고 설명했다. ↩
- 당시 대만의 대중국 공식 정책은 장제스가 주장한 반공본토수복의 기조 아래 3통4류(통상·통우·통항과 경제·문화·과학기술·체육 교류)를 추진하고 중국이 삼민주의 통일 방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중국과는 3불, 즉 접촉·협상·타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 1970년대 후반 미·중 수교 이후 양안관계는 미·중 관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미국이 중국과 수교한 뒤에도 늘 대만을 중국 압박의 카드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미·중 관계의 맥락에서 양안관계를 다루지 않고 중국과 대만 관계만 살펴보고 있다. ↩
- 2010년까지 대만의 1인당 GDP는 한국보다 높았다. ↩
- 1991년 대만·중국·홍콩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또 대만과 중국은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도 가입했다. 1995년 GATT가 세계무역기구WTO로 바뀌었고, 중국은 2001년에 WTO에 가입했다. ↩
- 대만의 대중 수출이 늘면서 대중 무역 규모가 대미 무역 규모보다 더 커졌다. 이런 사정은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중국에서 만들어진 완제품의 최종 소비국은 미국이기 때문에 대만과 한국 경제의 미국 시장 의존도가 크게 낮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
- 대만 국민당은 장징궈 집권 동안에는 일국론(대만의 대륙 통일론)을 갖고 있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과 대만의 경제력·군사력 격차가 벌어지면서 일국론을 버리고 양국론을 채택하게 되는데, 리덩후이의 관점 변화가 이를 잘 보여 준다. 하지만 국민당 주류는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 때문에 친중국 입장으로 돌아섰고, 리덩후이는 국민당에서 탈당한다. 민진당은 리덩후이가 대만의 독립을 위해 기여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국민당이 공산당과는 어떤 제휴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장제스의 유훈이 민진당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
- 중국과 대만의 경제적 연관성 때문에 민진당 내에서도 대만 독립을 둘러싸고 분파 갈등이 존재한다. 1990년대 민진당 내 최대 계파였던 메이리다오파는 대만 독립보다는 ‘자결’이라는 용어를 선호했고, 신조류파는 대만 독립을 주장했다. 중국의 대對대만 태도에 따라 자결파와 대만 독립파의 세력 관계가 엎치락뒤치락해 왔다. ↩
- 2008년 11월 중국의 해협양안관계협회와 대만의 해협교류기금회가 타이베이에서 해협양안공운협의(양안 간 항공 교류), 해상양안해운협의(양안 간 해상 교류), 해협양안우정협의(양안 간 우편물 교류) 정책에 서명했는데, 이것을 신3통이라 한다. ↩
- 홍콩의 우산운동에 대해서는 이정구(2019)를 보라. ↩
-
Election Study Center, National Chengchi University 웹사이트
https://esc.nccu.edu.tw/PageDoc/Detail?fid=7800&id=6961 ↩
참고 문헌
김진열 2013, 《양안관계와 중국통일》, 높이깊이.
다케시, 후지이 2015, “1950년대 대만의 ‘경제’ 인식 변화와 미국 원조 – 민생주의와 자유경제,” 《중국근현대사연구》 66호.
장성구·오회련 1992, 《대만현대정치사》 상, 한인희 옮김, 지영사.
왕푸창 2008, 《갈등의 정체성 – 현대 대만 사회의 에스닉 상상》, 지은주 옮김, 나남출판사.
이정구, 2019, ‘2019년 홍콩 투쟁의 역사적 배경과 쟁점’, <노동자 연대>
하딩, 해리 1995, 《중국과 미국》, 안인해 옮김. 나남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