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서영표의 《런던코뮌》
‘지방자치 사회주의’가 국가와 시장을 극복할 수 있을까?
1 의 경험(1981∼1986년)을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한 1980년대 초반에 현실적인 것을 넘어 실재하는, 다를 수 있는 가능성들을 상상력을 통해 발전시키려 한 사례”로 제시한다(서영표, 《런던코뮌》, 30쪽. 이하 쪽수만 표기). “GLC는 [시장과 관료적 국가에 저항할 수 있는] 잠재적 반경향을 찾아내고 발전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급진적’이었다. 현실로서 존재하는 국가와 시장을 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실재’하는 반경향의 에너지를 동원하고 발전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창의적이었다.”(30쪽)
《런던코뮌》의 저자 서영표는 노동당 좌파가 이끌었던 런던광역시정부(Greater London Council, 이하 GLC) 진보신당의 주요 리더들도 GLC의 실험에 주목한다.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는 지난해 11월 29일 서울시장 후보 출마 선언을 하면서 켄 리빙스턴이 한 참조 사례라고 밝혔다. “저와 같은 진보정치인으로서 영국 런던시장을 지낸 바 있는 켄 리빙스턴은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공공부문에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물론, 일반 사기업들에 대해서도 ‘이윤이 아닌 사회적 기준’을 만족시키는 기업들에 다양한 혜택을 주는 정책을 펼친 바 있습니다.”3 당시 김종철 후보는 이를 두고 “도시와 사회주의의 만남”이라고 했다.
김종철 현 진보신당 대변인도 민주노동당 분당 전인 2006년 지방선거에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을 때 켄 리빙스턴의 런던시를 벤치마킹했다.(당시 민주노동당 서울시당과 진보정치연구소는 켄 리빙스턴이 2004년 10월 발표한 보고서를 《런던 플랜》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 그때 장석준 현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원칙 있는 사회주의자 켄 리빙스턴 런던시장이 이윤 중심의 개발이 아니라 시민들의 복지를 최우선에 두며, 환경과 문화를 위해 개인 승용차 사용을 억제하는 대신 첨단의 대중교통을 발전시키고, 런던의 양극화와 여성, 소수인종, 성적 소수자들의 차별을 시정하는 데 열정을 기울인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켄 리빙스턴의 GLC는 ‘지방자치 사회주의’의 중요한 모델이었다. 《런던코뮌》의 부제도 ‘지방사회주의의 실험과 좌파 정치의 재구성’이다.
‘지방자치 사회주의’
4 첫째,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중앙정부에 도전하는 기지로 지방정부를 활용하려는 시도였다. 포플러 운동이 가장 유명한 사례다. 포플러 구청은 런던 전체의 지방세를 ‘평준화’할 것을 요구했다. 부유한 구들이 가난한 구들을 도와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이드 조지 정부는 이 요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포플러 구청은 정부를 압박하고자 경찰과 구호시설 등에 지급해야 하는 교부금을 보류한 채 이 돈을 빈민 구제 사업에 썼다. 1921년 9월 이 불법 투쟁을 주도한 노동당 구의원 30명이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6주 동안의 구명 운동 끝에 그들은 석방됐다. 둘째, 1950년대와 1960년대 노동당 지방정부는 대규모 공공 지출과 주택 건설 계획에서 결정적 구실을 했다. 때로 도시 내부의 현대화와 재건축에서 인기 없는 구실을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셋째, 1970년대 후반 지방정부를 인수한 노동당 좌파는 지방정부가 중앙정부에 도전하는 기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영국 노동당의 지방정부는 1980년대 전에 세 국면으로 뚜렷이 구별된다.5 서영표는 이를 두고 “‘국가 안에서 국가에 대항하기in and against the state’와 ‘시장 안에서 시장에 대항하기in and against the market’”, 곧 “국가의 민주화”, “시장의 사회화”라고 한다(188쪽, 315쪽).
그러나 1980년대 초에 지방정부를 장악한 노동당 좌파는 지방정부의 구실을 단지 대처 정부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의 구상 이면에는 국가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있었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도구가 아니라 언제든지 피지배계급의 투쟁에 의해 변화시킬 수 있는 장으로 인식되었다.”(31쪽) 다시 말해, 국가를 투쟁의 무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시아 코번은 《지방국가The Local State》에서 지방정부가 국가로부터 거의 독자적이므로, 좌파가 지방정부를 차지해 좌파적 목적을 위해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서영표는 “국가 내부에 내적 긴장이 존재하므로 그것은 일괴암적 조직이 아니다”고 주장한다(315∼316쪽). 따라서 “‘절대적인’ 제도 외적 정치에 근거한 총체적 혁명(기동전)”이 아니라, GLC와 정부기구에 다양한 형태로 시민들이 참여하는 것에서 보듯이, “새로운 종류의 사회주의 전략을 추구하지만, 현존 제도와 더불어 시작”(320쪽)해야 한다고 한다. “국가에 초점을 맞춘 구좌파와는 다른 방법을 통해 일상생활의 경험과 여기서 유래하는 실천적 지식을 정치화하려고 시도”해 온 운동으로 “GLC, 사파티스타, MST, 포르투 알레그레의 참여예산제” 등의 “방법은 풀뿌리 참여의 일종으로, 이것을 통해 국가 자체가 민주화될 수 있었다”(319쪽)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강조하듯이, 국가는 노동 대중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중립적인 기구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정치 권력은 …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조직된 권력”이라고 지적한다. 국가가 조직되는 방식은 대자본의 이익을 반영하고 또 이를 지키는 데에 맞춰져 있다. 국가 기구의 핵심은 군대나 경찰 등 고도로 훈련받은 무장 집단으로 이뤄진 억압적인 기구다. 이들의 임무는 위협에 맞서 현존 질서를 지키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경찰이 십대 청소년을 괴롭히거나 우익이 집회 대열을 방해하는 것을 수수방관하는 수준에 머물 수 있지만, 사회적·정치적 격변의 시기에는 군대가 나서 자본가 계급의 부와 권력에 대한 도전을 철저하게 분쇄하려 할 것이다.
심지어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기존 질서에 도전하려 할 때조차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1973년 칠레 군부는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무력으로 무너뜨렸고 수많은 사회주의자와 전투적 노조원 들을 학살했다. 2002년에 베네수엘라 군부도 차베스 정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부르주아 국가의 성격 자체가 국가 기구 내의 반자본주의적 계급투쟁 가능성을 배제한다. 부르주아 국가의 성격은 국가 기구 구성원의 개인적 특성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에서 그 국가가 수행하는 유기적 기능에 따라 결정된다. 현대 국가의 정부는 필연적으로 계급 지배 조직이며, 그 정부의 통상적 기능은 계급 국가를 존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자가 정부에 입각하더라도 계급 지배는 지속되기 때문에, 부르주아 정부는 그 자체로 사회주의 정부로 바뀔 수 없고 오히려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장관으로 바뀌게 된다.
1981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켄 리빙스턴은 런던시청이 “대처 정부를 끌어내리기 위한 공개적 캠페인의 기지로서”(42쪽) 이용될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오히려 그의 실험은 실질적 개혁을 제공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마감했다.
켄 리빙스턴이 지방선거에서 승리하자 주류 언론들은 “빨갱이 켄”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보수당 정부도 압박을 가했다. 보수당은 경제 위기에 대응해 공공 지출 삭감을 결정했다. 그 결과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에 지급하는 교부금, 즉 지방세 지원 교부금이 계속 삭감됐다. 또, 중앙정부는 지방세 상한제를 도입했다. 노동당이 장악한 지방정부들이 지방세를 징수해 재정 지출을 확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6 켄 리빙스턴은 1985년 2월 노동당 지방정부 협의회에서 닐 키녹의 견해를 지지했고, 한 달 뒤 지방세 상한제 거부 정책을 폐기했다. 뒤이어 다른 노동당 지방정부들도 투쟁을 포기했다. 1980년대에는 포플러 투쟁 같은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노동당이 주도하는 지방정부들은 처음에 “정부의 압박에 저항하여 불법적으로 투쟁”하기로 결정했다. “불법적 투쟁은 지방세 징수 계획을 아예 제출하지 않는 것, 즉 예산 편성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었다.”(53쪽) 그러나 노동당 당수 닐 키녹은 “노동당 지방정부가 집권을 유지해야 하고, 복지를 수호하려는 투쟁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7 지방정부가 중앙정부에 맞서 싸우려면 노동자들, 특히 지방정부에 고용된 노동자들(약 2백만 명, 영국 전체 노동조합원의 20퍼센트)을 동원하는 것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당 좌파를 포함해 개혁주의자들은 “진보가 노동자들의 행동이 아니라 정부 —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 의 조처에 달려 있다”고 봤다. 8 켄 리빙스턴이 지방세 상한제 거부 투쟁 방침의 폐기를 결정하던 무렵 바로 광원 파업이 패배했다. 광원들이 일터에 복귀한 바로 그 주에 좌파 지방정부들의 반격도 무너졌던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파산, 추징금, 공직 자격 박탈의 위험을 무릅쓸 태세가 돼 있는 노동당 지방의원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서영표 자신도 지적했듯이, “전통적으로 노동당을 지배하던 헌정주의constitutionalism는 불법적 투쟁과 잘 어울리지 않은 것이었다.”(54쪽) 셋째, 노동당 지방의원들 상당수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힘이 지방정부를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지방정부는 중앙정부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전혀 없었다.”결국 노동당이 주도하는 지방정부들은 ‘3불 정책’, 곧 복지 삭감 반대, 집세 인상 반대, 지방세 인상 반대를 포기했다. 보수당의 공세에 맞서 과거의 개혁 성과조차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1986년 4월 1일 대처 정부는 GLC를 포함해 광역시의회 여섯 곳을 해산했다. 이것은 자본주의를 개혁하려 하면서도 자본주의의 관리 책임을 떠맡는다는 모순 때문에 일관되게 개혁을 위해 투쟁하지 못하는 개혁주의의 약점을 보여 준다. 노동당 지방정부의 경험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 즉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비타협적 야당이어야 한다는 말이 옳았음을 철저하게, 그러나 부정적으로 확인시켜 줬다. “부르주아 사회 내에서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 운동]의 구실을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반대당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부르주아 국가의 폐허 위에서만 집권당으로 나설 수 있다.” 물론 제대로 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라면 ‘무장 집단’을 동원해 지배계급 지키기를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하는 중앙정부와 서비스 기능을 하는 지방정부 사이에 존재하는 잠재적 모순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교통 등의 사업을 지방정부가 소유하고 통제하는 것을 발판으로 ‘국유화’로 나아가려는 것이 아니다.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은 지방정부에서 다수파가 된 공산주의자들이 다음과 같은 일을 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부르주아 중앙정부에 맞서 싸우는 혁명적 다수파를 형성”하고,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빈민들을 지원”하고 “근본적 사회 변화를 방해하는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가차 없이 폭로”하고, “혁명적 선전을 확산하려는 운동을 단호하게 시작”하고 “그 때문에 국가권력과 충돌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1920년 제2차 대회, ‘공산당과 의회’)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지방정부 전술이 개혁주의자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회주의자들이 종종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승리해 주요 도시 경제를 지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수 있지만, 국가는 여전히 부르주아지가 지배하고 부르주아의 소유권도 여전히 유지된다. 지방자치단체에서 개혁주의자들은 알아서 부르주아 체제에 수동적으로 적응한다. 혁명가들은 이곳에서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행하며, 동시에 국가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는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이 무기력하다는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노동자들에게 교육한다.”
시장의 사회화?
12 그러나 요란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기업위원회는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기업위원회는 3년여 동안 6천만 파운드를 썼지만, 서영표가 지적했듯이 “대중의 힘에 의한 경제의 사회주의적 재편이라는 거창한 목표와 동떨어진 채, 도산의 위기에 몰린 기업들을 도와주는 투자은행 정도의 위상으로 쪼그라들고 있었다.”(203쪽)
한편, GLC의 “시장 안에서 시장에 대항하기”, 즉 “시장의 사회화”는 어떻게 됐는가? 경제 위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실질적 개혁을 제공하는 것이었지만, GLC는 공공 주택, 일자리, 복지 대신 각종 위원회만 늘렸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런던광역시 기업위원회GLEB였다. 영국의 사회주의적 페미니스트로 1982년 당시 켄 리빙스턴 런던시장의 차석 경제자문이던 힐러리 웨인라이트는 기업위원회가 “앞으로 몇 년 동안 런던의 자본을 괴롭힐” 것이라고 호언했다.무엇보다, “지방정부인 GLC가 경제의 ‘관제고지’에 접근할 수 없었”다(207쪽). “‘관제고지들’로 구성되어 있는 대기업들은 GLC 또는 GLEB의 영향권 밖에 있었다.”(223쪽) 그러나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경제의 ‘관제고지’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사회주의적 개입은 시장에 대한 패배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었다.”(224쪽) 결국 런던광역시 기업위원회의 ‘투자’는 대부분 상업적 압력을 견디지 못한 기업들의 파산을 잠시 유예시켰을 뿐이었다. “GLEB가 시장력의 압박 아래 ‘사회적 유용성’의 원칙을 포기하고 ‘상업적 생존 능력’”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206쪽).
이처럼, “현존 권력관계와 자본주의 사회체계를 변화시키려 했”던 “급진적 GLC의 정책”은 “‘조직화된 곤란’에 직면”해 좌초했다(240∼243쪽). 서영표는 GLC의 한계는 솔직하게 인정하는 편이지만, 혁명적 사회주의 대안에는 매우 비판적이다. “나이젤 해리스 같은 사람들에 따르면, 그 문제는 지역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시장의 문제였다. 즉 ‘낮은 이윤율’의 문제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세계 노동자연합을 통한 세계혁명인가? 또는 모든 산업의 국유화인가? 이런 전통적인 대안과 달리 GLC는 현존 사회체계 내부에서 사회주의적인 사회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자발적 행동, 다채로운 수단과 통로의 잠재성을 인식하였다.”(245쪽)
그러나 일국 사회주의도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경쟁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파산한 마당에, 한 도시에서 어떻게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을까? 서영표 자신도 “급진적 GLC의 계획은 “런던 규모에서는 달성될 수 없는 목표”로 보였다”고 인정했듯이 말이다(243쪽).
서영표는 또, “내부 전략”이 “항상 제도적 장애와 관습적 편견에 직면했고 적응적 흡수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239쪽). 국가나 시장을 인정하면서 그것에 대항해 싸운다는 전략이 언제나 긴장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필요와 자본주의적 현실” 사이에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현실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부르주아적 게임룰 수용을 의미했다. 반면에 ‘진보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내용이 비어 있는 추상적인 수사인 경우가 많다.”(240쪽)
그럼에도 서영표는 국가 기구 내의 ‘반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이 두 가지의 장벽[관료제와 시장의 힘]은 무시되거나 외부적 충격만으로 붕괴시킬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안에서 일어나는 ‘반란’이 요구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국가장치로서 GLC는 회피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GLC가 가지고 있는 자원과 재원이 누구를 위해 어떻게 쓰일 것인가를 둘러싼 내적 투쟁이 필요했다.”(188쪽)
좌파 정치의 재구성 — 신사회운동과 노동당 신좌파
서영표는 국가 기구 내의 “반란”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한편, 이것과 “대중의 참여정치”가 결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영표에게 GLC 실험은 정당과 사회운동의 결합이자 노동당 신좌파와 신사회운동의 결합을 뜻한다. “GLC의 사회주의적 실험은 새로운 사회운동이 제기한 급진적 민주주의에 기반해서 케인스주의적 위기에 대응하려 한 역사적 운동이었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57쪽)
“급진적 GLC가 주목했던 사회주의 정치의 주체는 노동자계급으로 한정되지 않는 다양한 ‘착취당하고, 주변화되고, 배제된’ 사람들”이었다(283쪽). 서영표는 탈산업사회에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투쟁이 주요한 사회적 쟁점”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여기에 의의를 부여한다(58쪽). “다양한 신사회운동의 의제와 가치들은 ‘산업사회’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자율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69쪽).
13 제3세계에서 신흥공업국이 등장한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본 축적과 제조업 생산의 새로운 중심이 출현한 것은 전 세계적 규모로 산업 노동자 계급이 괄목할 만하게 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14
그러나 탈산업사회라는 생각은 신화다. 탈산업사회론은 흔히 고용과 생산액에서 제조업의 비중이 줄어든 것의 의미를 과장한다. 실제로는 산업 고용 인구가 절대적으로 감소했다기보다는 선진국의 고용 노동 인구에서 제조업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감소한 수준의 변화다. 영국에서 제조업 고용 인구가 지배적이었던 적은 없었다.따라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투쟁이 주요한 사회적 쟁점”이 아니라는 주장은 잘못됐다. 신좌파들이 이런 잘못된 주장을 수용한 것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도 모종의 관계가 있다. 신좌파의 압도 다수는 고위직 공공서비스 직종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노동계급 조직과 자연스러운 연계가 거의 없었다. 노동당 좌파의 지방정부가 노동계급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면 노동당 당수 키녹과 그 지지자들이 지방정부들을 배신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서영표는 신사회운동 중에서도 특별히 여성운동에 초점을 맞춘다. “여성운동이 영국의 신사회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고] … GLC의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여성운동이었기 때문”이다(70쪽). 실제로, 1968년을 전후로 정치 활동에 입문한 많은 여성들이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노동당에 입당했다. 여성 활동가들은 소멸해 가는 노동당의 지구당에서 선거 후보자로 환영받았는데, 이들 중 일부는 지방의원이나 지방정부의 지도자가 됐다. 그러나 이 시기에 페미니스트들이 노동당에 대거 입당한 것은 여성운동의 활력이 아니라 쇠퇴와 우경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중간계급 페미니스트들이 노동당에 대거 들어왔을 때는 여성운동이 급속히 쇠퇴하고 산업 투쟁 패배로 노동운동이 우경화하는 시기였다. … 여성 운동의 초점은 더는 집단적이지 않았고, 강간을 비롯한 갖가지 여성 폭력 등 남성의 피해자로서 여성 개인의 문제에 맞춰졌다. 여성의 적은 남성이고 남성이 여성 억압의 수혜자라는 가부장제 이론이 득세했다. 이제 여성운동은 개인적 해결책, 대안적 관계나 라이프스타일에 집중했다. 이런 태도는 당연히 중간계급 여성에게 잘 맞았다. 노동계급 여성은 그런 사치를 부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페미니스트들이 개인적 해결책을 추구하면서 여성운동은 점점 파편화하고 붕괴됐다. 그리고 몇 안 남은 여성운동가들은 운동의 정치에서 제도 정치, 주로 노동당 정치로 전환했다. 자본주의의 산물인 여성 억압에 항의하지만 자본주의 자체에는 도전하지 않는 그들에게 노동당 정치는 딱 들어맞았다.
1980년대 초 노동당에 입당한 여성들은 당내에서 여성들만의 독자적 모임을 건설하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정부의 공세로 여성 노동자들이 특히 피해를 입었으므로 이에도 맞서 싸워야 했다. 켄 리빙스턴의 GLC는 여성, 흑인, 게이의 평등한 기회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직적 반격이 아니라 각종 위원회 건설로 대응했다.
GLC 여성위원회는 예산이 8백만 파운드에 이르렀고, 엄청난 직원 수를 자랑했다. 1982년 GLC 여성위원장의 연봉은 1만 8천 파운드로, 같은 직급의 남성과 동일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많은 여성 노동자들은 그 연봉의 4분의 1도 못 받았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돌아온 것은 실질적인 복지 서비스가 아니라 ‘의사 결정 구조에 참여하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극소수 중간계급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상승 기회였다. 흑인과 동성애자 차별 시정 조처들도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는 보잘것없었다. 그런 조처들은 모두 문제의 사회적 근원을 파헤치지 못했고, 언론과 보수당의 우파 이데올로기 공세에 저항할 수 있는 세력을 동원하지도 못했다.
노동당 좌파 그리고 사회주의
서영표는 노동당의 주류인 노동당 우파에 매우 비판적이다.
이른바 신노동당의 정책 방향은 보수당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마가렛 대처와 존 메이저가 시작했지만 결코 완성할 수 없었던 신자유주의적 역사적 블록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국민들의 반발 때문에 보수당으로는 완성할 수 없었던 시장 중심주의를 블레어의 신노동당이 해낸 것이다. 블레어의 전임자들인 닐 키녹과 존 스미스가 1980년대 중반 시작한 현대화modernization 전략은 이미 이런 우경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현대화 전략은 다양한 기층 사회운동의 직접적 참여를 통해 사회주의 전략을 재구성하기보다는 정치적 조건에 순응함으로써 의회주의로 당을 가두어버리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81쪽)
그러나 서영표는 노동당 혁신에 큰 기대를 건다. 그는 “노동당이 현대화 전략을 시작하기 전의 10년은 현대화 전략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혁신의 가능성이 보였던 시기”였다고 평가한다(81쪽). 그는 “노동당주의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이 그 내부에서 사회주의적 쇄신의 공간을 마련”해 준다고 여기며 “당 내부에서 다양한 급진적 기획이 제기되고 토론될 수 있다”고 믿는다(83쪽).
그러나 좌파가 노동당을 장악하려는 부단한 시도는 매번 분쇄됐다. 1921년 막 창당한 공산당은 노동당에 입당하려 했지만, 노동당 지도부는 두 차례나 입당을 거부했다. 공산당이 주도한 전국소수파운동에 참여한 노동당 지부들은 축출당했다. 노동당의 램지 맥도널드가 1931년에 보수당과 거국내각인 국민정부를 구성하자 온건 좌파였던 독립노동당조차 노동당을 사회주의로 전환할 수 없는 데 절망해 탈당했다. 우리가 살펴본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중반 노동당 좌파의 부상도 우파 지도부와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동맹을 깨뜨리지 못했다.
좌파가 노동당 전체를 견인할 수 있다거나 당 기구를 장악해 사회주의적 목적에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한 착각이다. 노동당을 바꾸려던 사람들은 오히려 점점 그 환경에 순응해 갔다. 그들에게 정치 활동은 지구당 모임에서 결의안 통과시키기나 선거 운동을 뜻하게 됐고, 이런 일들에 골몰하다 흔히 평범한 노동 대중과 접촉할 필요성을 잊었다.
16 〈트리뷴〉(노동당 좌파 의원 스태퍼드 크립스가 1937년 창간한 신문)은 “좌파가 지금보다 더 강력했던 적은 없었고, 급진적인 좌파 노동당 정부의 집권 전망이 지금보다 더 유력한 적은 없었다”고 선언했다. 17 당대회에서 획득한 표가 당대회장 밖의 수많은 노동자들을 대신했고, 급진적 정책을 담은 결의안이 계급 간의 실제 투쟁을 대신했다.
그래서 노동당 좌파는 때로 현실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당대회에서 승리하는 데 정신이 팔려 노동자 대중이 산업 투쟁의 침체와 패배로 고통을 겪는 사실을 무시했다. 1985년 당대회 뒤 〈밀리턴트〉(노동당 좌파 조직 ‘밀리턴트’가 발행한 신문)는 “거의 1천만 명의 노동자를 대표하는 대의원들이 참석한 당대회에서 급진적 사회주의 정책들이 여전히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고 환호했다.노동당 좌파는 당헌을 약간 개정하고, 몇몇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올바른 후보들을 선출하기만 하면, 사회주의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동당은, 좌파든 우파든,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노동당 정부들이 때로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성공하기도 했지만, 1백 년 동안 자본주의 권력의 요새는 건드리지 않은 채 내버려뒀다. 그리고 오늘날 노동당에 대한 지지는 역사상 가장 크게 감소했다.
서영표는 GLC가 “사회주의적 잠재력이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시장의 기제와 자본주의적 논리”에 맞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려는 시도였다고 본다(268쪽). “민주주의와 시장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제도적 원리”라는 서영표의 주장은 옳다(258쪽).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려면 “제도화된 총체적 계획 체계도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도 맞다(259쪽). 그러나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지적하듯이 “사회주의적 계획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그것은 국제적 수준에서 작동돼야 한다. 자본주의는 세계 체제다. 역사적 경험을 반추해 보면, 시장에 (마가렛 대처의 말로) 저항하는 국민국가들은 혹독한 제재들 — 자본 도피, 다른 형태의 경제적 고립, 정치적 전복, 그리고 제한적으로 군사적 침략 — 을 받았는데, 그러한 제재들은 가장 나은 경우에도 심각한 타협을 강요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현존 체제에 대한 대안을 건설하려는 노력을 파괴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대안적 경제의 틀은 국제적 규모로 건설돼야 한다.”
GLC를 이용한 노동당 좌파의 ‘지방자치 사회주의’ 전략이 실패한 까닭이다. 국민국가 규모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스탈린주의의 일국 사회주의 전략이나 전통적인 개혁주의 전략(오늘날 노동당 주류는 사회주의라는 용어조차 폐기했지만)도 실패한 마당에 한 도시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하겠다는 전략은 공상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이 사회주의자들이 지방선거에 도전하거나, 선거에서 승리해 지방정부에서 급진적 정책을 추진하는 것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지방정부를 운영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이 기구를 이용해 중앙정부에 도전하고 지배계급에 대한 노동계급의 증오(계급의식)를 발전시켜야 한다. 곧, 사회주의자들의 지방정부 활동은 자본주의를 끝장내려는 투쟁의 일부여야 한다.
주
- 1980년대 중반까지 영국 지방정부의 권력 구조는 중앙정부의 의원내각제와 같았다. 광역시 지방의회 선거에서 다수를 차지한 정당의 리더가 시장이 됐다. 1981년 런던 광역시의회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했고, 켄 리빙스턴이 런던시의회의 노동당 의원단 지도자로 선출됐다. 1986년 대처 정부는 노동당이 장악한 GLC를 포함해 광역시의회 여섯 곳을 해산했다. 1999년부터 광역시 지방의원과 시장을 따로 선출하기 시작했다. 2000년에 리빙스턴은 노동당에서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런던시장에 당선했다. 당시 영국 노동당 지도자 토니 블레어는 당내 경선 방식까지 바꿔 가며 친기업적 인물인 프랭크 돕슨을 시장 후보로 공천했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2004년에 노동당에 복당했고 다시 런던시장에 당선했다. 2008년 런던시장 선거에서 리빙스턴은 보수당 후보 보리스 존슨에게 패배했다. ↩
- 2010 지방선거 서울시장 예비후보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출마선언문 ↩
- 〈레디앙〉(2006. 5. 13). ↩
- Ann Rogers, ‘The end of an era’, Socialist Review 83 (January 1986), p. 15. ↩
- 같은 글, p. 15. ↩
- 토니 클리프·도니 글룩스타인, 《마르크스주의에서 본 영국 노동당의 역사》, 책갈피, 2008년, 531쪽. ↩
- 같은 책, 532쪽. ↩
- 같은 책, 533∼534쪽. ↩
- R Luxemburg, ‘Eine Taktische Frage’, the Leipziger Volkszeitung (6 July 1899), in R Luxemburg, Ausgewählte Reden und Schriften, vol ll (Berlin, 1955). Chris Harman, ‘The history of an argument’, International Socialism 105에서 재인용. ↩
- Theses Resolutions and Manifestos of the First Four Congresses of the Third International (London 1980) p. 101. 토니 클리프·도니 글룩스타인, 앞의 책, 201∼202쪽에서 재인용. ↩
- Leon Trotsky, ‘Nationalized Industry and Workers’ Management’, http://www.marxists.org/archive/trotsky/1938/xx/mexico03.htm ↩
- 토니 클리프·도니 글룩스타인, 앞의 책, 535쪽에서 재인용. ↩
- 알렉스 캘리니코스,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성림, 1994, 184∼185쪽. ↩
- 같은 책, 188쪽. ↩
- 토니 클리프·도니 글룩스타인, 앞의 책, 535∼536쪽. ↩
- Militant (12 October 1985). 토니 클리프·도니 글룩스타인, 앞의 책, 526쪽에서 재인용. ↩
- Tribune (11 October 1985). 토니 클리프·도니 글룩스타인, 앞의 책, 526쪽에서 재인용. ↩
- 알렉스 캘리니코스, 《반자본주의 선언》, 책갈피, 2003년, 16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