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밖으로, 여성 레닌주의자들과 러시아 사회주의 *
1 브라이언트의 이런 평가는 역사학계와 각종 레닌 전기가 지배적으로 그리는 레닌의 모습, 즉 여성들을 이용해 먹었다는 평가와 확연히 대비된다. 주류적 서술은 레닌과 가까운 여성들을 레닌에게 힘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레닌의 그늘에 있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종속적 인물로 그린다. 이 여성들이 레닌과 맺은 관계의 모든 면은 과장되는 반면, 그들의 독립적 활동은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폄하된다. 여러 언어를 구사하고, 번역하고, 필수적이고 중요한 정치 문헌을 출판하고 배포하며, 협의회·대중파업·반란을 조직한 여성들은 성차별적 수사에 의해 잊혔다. 예컨대, 레닌의 누나 안나 울리야노바는 “남편을 쥐고 흔드는 아내”이며, 여동생 마리야는 “괴팍한 노처녀”로 그려진다. 2 레닌의 아내 나디아 크룹스카야는 “오로지 레닌과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만 인생이 의미 있는” 여인이다. 3 이네사 아르망은 그저 “레닌의 정부情婦”로 다뤄진다.
1922년에 위대한 급진 언론인 루이즈 브라이언트는 레닌이 가까운 여성들에게서 큰 힘을 얻는다고 봤다.이런 노골적인 성차별주의보다 더 교활한 것은 레닌을 여성들을 조종하는 책략가로 끊임없이 그리는 것이다. 여성들이 혁명이 아닌 레닌이라는 남성에게 헌신했다는 것이다. 역사가 헬렌 래퍼포트는 이런 관점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했다.
레닌의 인생에서 여성들은 그에게 무자비하게 이용당했다. 나디아로 알려진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와 레닌의 어머니 마리야, 장모 옐리자베타, 누나 안나 울리야노바와 여동생 마리야 울리야노바, 한때 연인이었던 이네사 아르망은 모두 레닌 자신의 정치적 목적과 이익을 위해 기진맥진하도록 소진됐다.“정치적 목적”은 레닌에게만 있었다는 식이다. 최근 한 논문에서 조디 딘은 크룹스카야의 《레닌의 회상》을 “별난 책”이라고 했는데, 크룹스카야가 로맨스와 섹스가 아니라 사회주의 조직 건설에 대해 썼기 때문이다. 조직 건설은 남성이 하고, 여성은 사랑을 해야 정상이라는 것이다.
6 나는 이 논문에서, 레닌이 정치 전략을 정식화하고 실행하도록 도움을 준 여성들을 마찬가지로 복권시키는 작업에 착수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 레닌의 여성 해방에 대한 입장을 빠짐없이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노동계급 여성들이 자력 행동을 통해 어떻게 볼셰비키당 핵심부의 영향력 있는 네트워크와 상호작용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수많은 여성 사회주의자가 엄청난 개인적 희생으로 사회주의 조직을 건설하고 지켜냈고, 레닌은 이들 중 많은 이들과 교류했다. 옐레나 스타소바, 로잘리아 제믈랴치카, 아폴리나리야 야쿠보바 같은 지도적 볼셰비키가 여기에 포함되는데, 이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런던에서 레닌, 크룹스카야와 긴밀히 협력했다. 이 모든 여성이 러시아 사회주의 역사에서 온당하게 재평가받아야 한다. 이 논문에서는 안나 울리야노바, 마리야 울리야노바, 이네사 아르망,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에 초점을 맞출 텐데, 이들이 결정적 순간들에 주도력을 발휘해 볼셰비키당이 여성 노동자들과 사회주의 혁명을 향해 나아가도록 했기 때문이다. 레닌의 지도력이 10월 혁명의 승리에서 분명 필수불가결했지만, 그 정치 프로젝트를 레닌과 가장 긴밀히 공유한 여성들의 창의력, 용기, 헌신 역시 필수적이었다.
반갑게도 진지한 연구들이 레닌을 정치적 엘리트주의라는 비난에서 구해 내고, 혁명적 조직은 노동계급의 자력 행동과 유기적 연관을 맺어야 한다는 레닌의 비전을 복원했다.레닌의 누나 안나 울리야노바와 여동생 마리야 울리야노바는 1880년대부터 1930년대에 죽을 때까지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능동적 활동가였다. 그들은 때로는 레닌과 함께 지내고 때로는 수백 마일 떨어져 살았다. 크룹스카야는 1890년대에 급진적 분위기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레닌을 만나면서 그들과 합류했다. 이네사 아르망은 1903년에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1909년 당시 망명 중이던 레닌, 크룹스카야와 가까워지기 전에 이미 두 차례나 투옥된 적 있는 노련한 활동가였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볼셰비키가 별도의 조직으로 분립한 1903년에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3년 후 차르의 의회(두마)에 대한 의견 차이로 탈퇴했지만 말이다. 콜론타이는 널리 존경받는 연설가이자 저술가, 조직가로 활동하다 1914년 볼셰비키에 다시 가입해 1917년 7월 볼셰비키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콜론타이의 정치적 삶과 저작들은 역사가 캐시 포터의 노력에 힘입어 적잖이 복원됐다. 그러나 안나 울리야노바와 마리야 울리야노바는 사회주의 역사에서 빠져 있다. 이네사 아르망은 거의 전적으로 레닌과의 관계 때문에 사회주의 역사에서 거론된다. 여성 사회주의자들을 이렇게 무시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중대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이 1860년대 차르 알렉산드르 2세 집권기에 탄생해서 1920년대 스탈린의 손에 끝장날 때까지 그 중심에 있었다. 이 60년 동안 여성 볼셰비키가 건설한 운동은, 그 뒤 어떤 운동도 그 포부를 뛰어넘지 못할 정도로 여성의 완전한 해방을 지향했다.
7 카를 마르크스는 체르니솁스키와 서신을 주고받았고,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그의 소설이 “독일과 프랑스의 공식 역사학에서 … 생산한 그 어떤 것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8 《무엇을 할 것인가?》는 가부장적 결혼 제도가 여성에게 부과한 무거운 부담을 드러내고 평등주의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의 방식을 옹호했다. 이 소설은 러시아 사회주의의 기반을 놓는 문헌이 돼 많은 러시아 청년을 급진화시켰고 그 중에는 나디아 크룹스카야, 안나 울리야노바와 마리야 울리야노바, 레닌도 있었다. 9 레닌이 1902년에 쓴 중요한 저작의 제목 ‘무엇을 할 것인가?’는 체르니솁스키의 소설 제목을 본뜬 것이다. 크룹스카야는 이 소설이 이네사 아르망에게 미친 영향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네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여성의 권리와 자유를 묘사한 모습을 보고 사회주의로 이끌렸다. 정말이지 러시아 급진주의자들은 몇 세대에 걸쳐 통째로 체르니솁스키의 다재다능한 유토피아 소설에 영향받아 소설 속 ‘비범한 남녀’를 본받으려 했다.” 10
여성 활동가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끼쳤고 초기 러시아 사회주의를 통틀어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글은 1862년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이 소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감옥 안에서 쓰였다. 이곳에서 체르니솁스키는 8년의 강제 노역형을 살고 시베리아로 추방돼 61세에 사망했다.11 만일 자기 희생과 용기만으로 충분했더라면 이 여성들이 1917년 훨씬 전에 차르 체제를 전복했을 것이다. 그들은 차르 체제 전복에는 실패했지만 젊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를 포함한 새 세대에 영감을 주는 데 성공했다. 후에 피그네르는 콜론타이가 임명해 소비에트 정부의 사회보장인민위원회에서 일했다. 12
“여성 문제”에 대한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은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사상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었다. 1848년 혁명의 패배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여성들은 소규모 그룹들을 꾸리며 이제 막 조직화하기 시작했고 여성 해방 운동을 되살리고 있었다. 1866년 영국에서 1500명이 여성 참정권 청원에 서명했다. 프랑스에서는 소규모 여성 그룹이 앙드레 레오의 집에 모여 페미니스트 사상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는 청년 여성들이 테러리스트 조직들을 통해 체르니솁스키의 사상을 실천하고 있었는데, 이 조직들은 정치적 암살과 농민 봉기를 결합해 차르 체제를 무너뜨리려 했다. 소피야 페롭스카야와 베라 피그네르라는 두 여성이 1881년 3월 13일 알렉산드르 2세 암살에 가담했다. 피그네르는 그후 20년간 수감됐고, 당시 27세였던 페롭스카야는 러시아에서 테러리즘 혐의로 처형된 최초의 여성이 됐다. 1917년 2월 혁명 후 피그네르는 여성 참정권 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고, 혁명적 전통의 위인으로 인정받았다.가정에서 시작된 사회주의
13 그러나 안나는 남동생 레닌보다 여러 해 전에 이미 혁명가였다.
레닌의 전기들에서 지속되는 신화는 “어머니들”이 순전히 개인으로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행동할 뿐 정치적 사고는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레닌의 어머니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1886년 남편이 사망한 후 가족을 부양하면서 딸들에게 아들들과 똑같은 교육 기회를 제공했다. 마리야는 경찰 당국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고 추방지까지 동행했으며, 자식들의 혁명적 활동을 지원했다. 레닌의 편지들을 보면 그녀가 레닌을 경제적으로 지원했을 뿐 아니라, 레닌이 해외에서 보낸 글들을 받아 지하 출판사에 전해줬다는 걸 알 수 있다. 마리야가 겪은 가장 큰 시련은 1887년 5월 8일 장남 알렉산드르의 처형이었다. 장남, 장녀인 알렉산드르와 안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학생 혁명가가 됐다. 둘 모두 차르 알렉산드르 3세 암살 기도로 체포됐는데, 사실 안나는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다. 안나는 5년의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았지만 그 형을 집에서 치르는 게 허용됐다. 소련의 역사 문헌은 알렉산드르와 블라디미르 형제가 안나의 정치적 진로를 정했다고 말한다. “알렉산드르는 안나를 혁명가로 만들었고 블라디미르는 안나를 마르크스주의자로 만들었다.”14 또 다른 역사가는 레닌이 망명지에서 “나디아와 함께해서 기뻤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장모와 함께해서 기뻐했다”(강조는 나의 것)고 말했다. 진실은 옐리자베타가 집을 떠나 제네바, 파리, 브뤼셀, 갈리시아, 런던에서 망명 중인 혁명가들과 함께 지내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옐리자베타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고, 볼셰비키당의 서한을 해독하고 문건을 밀반출하기 위해 옷에 특수한 주머니를 달았다. 15 옐리자베타가 죽었을 때 크룹스카야는 이렇게 썼다. “어머니는 가까운 동지였고 우리의 모든 일을 도우셨다 … 동지들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16 그럼에도 역사가들은 옐리자베타를 성가시고 잔소리 심한 레닌의 장모일 뿐 결코 독립적인 여성으로는 보려 하지 않는다.
나디아 크룹스카야의 어머니 옐리자베타 크룹스카야는 보수주의자, 기독교인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옐리자베타는 [레닌의 어머니] 마리야처럼 자식들이 차르 체제의 억압에 도전하도록 용기를 주고 자식들이 체포·투옥·추방됐을 때 지원했다. 옐리자베타는 나디아가 1898년에 유배형을 선고받자 딸과 함께 유배를 떠났는데, 한 역사가는 딸이 레닌과 동거하는 것을 막으려고 갔을 뿐이라고 주장한다.지하 활동으로
17 여성들도 차르 비밀 경찰 오흐라나의 엄혹한 탄압을 똑같이 겪어야 했다. 1900년 안나 울리야노바는 스위스로 탈출해 체포를 면했다. 18 마리야 울리야노바는 1898년 모스크바로 이주하기 전에 이미 학생 혁명가였다. 마리야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에 가입해 1년이 지나지 않아 유급 당 활동가가 됐다. 19 마리야는 1899년 10월에 체포됐다가 풀려났지만 결국 1901년 다시 체포돼 3년간 추방됐다.
지하 혁명 운동은 고난과 위험으로 가득했지만, 적어도 여성들이 형식적 평등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20 마리야는 모스크바 〈이스크라〉에서 활동하는 동안 국외에서 책 표지에 숨겨 보낸 신문을 수령했다. 나디아 크룹스카야는 오랜 혁명가 베라 자술리치와 함께 런던 클라큰웰 그린에 있는 신문사에서 〈이스크라〉를 위해 일했다. 자술리치는 1869년에 4년 형을 살았고, 석방 후 그녀는 악명 높은 반동 장교 표도르 트레포프 대령 암살을 시도해 그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 배심원들의 자술리치 무죄 석방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자술리치는 스위스에 숨어 지내면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전신인 노동해방그룹 창립에 참여했고, 이후 〈이스크라〉 편집부에서 일했다. 21
1901년에서 1903년 사이, 볼셰비키 여성들은 〈이스크라〉를 이전 50년 동안 러시아에서 발행된 사회주의 신문 중 가장 성공적인 신문이 되도록 하는 데서 없어서는 안될 구실을 했다. 안나는 파리와 베를린의 〈이스크라〉에서 일했다.22 그러나 크룹스카야의 동시대 목격자인 루이즈 브라이언트는 크룹스카야의 기여를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크룹스카야는 “신문 발행 책임뿐 아니라 방대한 당 활동을 수행했다. 크룹스카야는 한때 러시아에 있는 모든 혁명가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23 이렇듯 브라이언트는 크룹스카야의 권위와 영향력을 인정했는데도, 후대 역사가들은 크룹스카야가 독립적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없는 존재였다고 전제해 버린다.
크룹스카야의 전기 작가 로버트 맥닐은 크룹스카야가 〈이스크라〉 그룹의 비서로서 “의심의 여지 없이 레닌의 직접적 감독 아래 일했고, 그녀의 독립적 구실을 부풀리려 해봤자 소용없다”라고 기술했다.24 1890년 크룹스카야는 자신이 속한 상트페테르부르크 토론 그룹을 위해 엥겔스의 《가족, 사유 재산, 국가의 기원》과 마르크스의 《자본론》 1권 서평을 썼다. 25 크룹스카야는 5년 동안 야간 학교와 일요 학교에서 노동계급 남성들을 가르쳤다. 26 1894년 가을 레닌을 처음 만났을 때, 레닌을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의 삶으로 안내한 것도 크룹스카야였다.
나디아 크룹스카야가 마르크스주의 토론 서클에 참여한 때는 1889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나중에 크룹스카야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을 때 “심장 소리가 들릴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뛰게” 만든 문구를 다음과 같이 떠올렸다. “자본주의 사유 재산의 조종이 울린다. 빼앗은 자들이 빼앗긴다.”27 크룹스카야와 콜론타이는 파업 노동자들을 위한 연대와 사회주의 선전 활동을 조직했다. 콜론타이는 파업 리플릿을 몰래 공장에 반입했고 파업이 여성 자신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고 깊이 감명받았다. 콜론타이는 이렇게 썼다. “억압받고, 소심하고, 권리가 없던 여성 노동자가 허리를 쭉 펴고 완전히 떨쳐 일어서서 투사와 동지로서 평등해진다.” 28 이런 변화가 남성 사회주의자들에게 자동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크룹스카야는, 여성이 투쟁적일 수 없다고 믿는 남성들 때문에 자신의 활동이 방해받았다고 회상했다. 29 크룹스카야에 따르면, 레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성들 속에서 그녀가 활동하는 것을 지지했고, 1903년에 작성된 당 강령 초안에 “남성과 여성 권리의 완전한 평등” 요구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레닌이었다. 30
1896년 여성 방직공들이 이끈 중요한 직물 노동자 파업이 벌어졌다.31 《여성 노동자》를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외면했지만 크룹스카야가 청중으로 삼고자 했던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1901년 〈이스크라〉가 이 소책자를 출판했는데, 이는 러시아인이 쓴 여성 차별에 대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이자, 여성이 쓴 것으로는 언어를 막론하고 첫 소책자 중 하나였다. 32 《여성 노동자》는 여성 노동자들의 토론 그룹을 만드는 기초가 됐고 그 중에는 19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콜론타이가 만든 토론 그룹도 있었다. 33 1914년 콜론타이는 국제여성대회를 조직하면서 크룹스카야에게 도서 판매대에 놓을 《여성 노동자》를 보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34 크룹스카야의 소책자는 볼셰비키 여성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정치적 무기였다. 35
1896년 10월 체포된 크룹스카야는 어머니의 정력적인 석방 청원 활동으로 풀려나기까지 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1년 후 러시아 당국은, 당시 시베리아 유형 중이던 레닌과의 혼인을 조건으로 크룹스카야와 레닌의 재회를 허가했다. 이 유형 동안 크룹스카야는 소책자 《여성 노동자》를 썼다. 크룹스카야의 전기 작가는 크룹스카야가 어떻게 “레닌의 가르침” 아래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는지 이 소책자가 보여 주기 때문에 “잠깐 주목할” 가치는 있다고 그로서는 후하게 인정한다.36 따라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만이 여성에게 다른 미래를 제공할 수 있다고 크룹스카야는 주장했다. 《여성 노동자》가 출판된 1901년, 크룹스카야는 해외에서 레닌을 만나 어머니 엘리자베타와 함께 다음 5년 동안 사회주의 조직을 뮌헨, 파리, 런던에서 건설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여성 노동자》는 여성 차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발전시켜, 끔찍한 조건일지라도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임금을 벌 때, 집에 고립돼 있을 때보다는 더 나은 위치에서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게 된다고 지적했다.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두 분파로 분열했다. 안나 울리야노바와 마리야 울리야노바는 러시아 국내에서 볼셰비키 조직을 견고히 하는 데 큰 힘을 쏟았다. 콜론타이도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콜론타이는 1872년 파리에서 프랑스인 어머니와 러시아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나 러시아에서 자랐다. 1893년 콜론타이는 [이복] 사촌 블라디미르 콜론타이와 결혼해 아들 하나를 낳았다. 3년의 결혼 생활 후 콜론타이는 남편을 떠나 [스위스] 취리히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1899년 그곳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다. 콜론타이의 많은 선구적인 글 중 핀란드 민족 독립 투쟁 연구는, 지금은 간과되고 있는 책이지만 1903년에 《핀란드와 사회주의》로 출판됐다. 이 책은 콜론타이의 추방 경험에서 나왔고 러시아 제국에 맞선 무장 봉기를 옹호했다.
37 아르망은 1874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르망은 19세에 부유한 러시아인 알렉산드르 아르망과 결혼해 네 아이를 두었지만, 1902년 알렉산드르를 떠나 혁명가인 시동생 블라디미르와 가정을 이뤄 아이 하나를 더 낳았다. 아르망은 알렉산드르와 계속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이네사 아르망은 대담함, 놀라운 정치적 헌신, 날카로운 이론적 분석으로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지도적 인물이 됐다.
당시 볼셰비키의 또 다른 신입 여성 당원으로는 이미 사회주의자였지만 혁명적 조직에는 처음 가입한 이네사 아르망이 있었다.1905년, “피억압자들의 축제인 혁명”
1905년 1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굶주린 노동자 수천 명이 노동일을 줄이고 임금을 올려 달라고 “작은 성부” 차르에게 정중히 간청하며 15만 명이 서명한 탄원서를 전달하기 위해 갔다. 그러나 시위대는 냉혹한 총탄에 쓰러졌다. ‘피의 일요일’로 알려진 대학살에 격분해 혁명적 대중파업 운동이 촉발돼 러시아 제국 전체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콜론타이는 대학살의 목격자 중 한 명이었고, 1905년 혁명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에 참여했다. 콜론타이는 늘고 있는 투쟁적 여성 노동자들을 볼셰비키가 조직하는 데 더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여성에게 동등한 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리플릿을 널리 배포했다.
39 마리야 울리야노바는 1905년 여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안나와 함께 당시 정신 없게 바쁘던 볼셰비키 활동을 했는데 그 모습이 “무엇에 홀려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40
안나 울리야노바는 ‘피의 일요일’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목격하고 급히 레닌과 크룹스카야에게 오랫동안 기다려 온 혁명이 시작됐다는 편지를 썼다.41 볼셰비키당은 몇 배 이상 성장했지만 이후 정부가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모스크바 봉기를 진압했다. 크룹스카야는 위조 여권을 구해 1906년 여름까지 그럭저럭 러시아에 머물 수 있었지만, 1907년 말 레닌과 함께 다시 한 번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크룹스카야는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시급히 망명지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당의 재정 관리를 맡고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가 됐다.42 경찰이 아르망의 방을 습격해 혁명적 문건과 권총을 적발했다. 아르망은 체포됐지만 풀려나 러시아를 떠났다. 43
1905년 아르망은 모스크바에 살고 있었는데 파업 운동이 도시를 마비시키고 봉기로 발전하자, 알렉산드르 아르망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혁명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평소에는 없던 활기가 엄청나요. 페테르부르크 전역이 파업 중이고, 모스크바조차 멈추기 시작했어요.”44 레닌은 1905년 대중파업 운동이 어떻게 러시아 피억압 민족의 민족해방 열망을 자극했는지 주목했는데 앞서 콜론타이가 핀란드 연구에서 확인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콜론타이, 울리야노프 자매, 아르망 모두 혁명의 힘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음을 직접 경험했다. 콜론타이는 러시아 여성 운동이 시작된 시기를 공장 여성들이 “활기를 띠고” 여성 농민들의 폭동이 남러시아 전역에서 분출했던 1905년 반란으로 잡았다.혁명은 억압받고 착취받는 이들의 축제다. 혁명적 시기만큼 인민 대중이 새로운 사회 질서의 창조자로 그토록 능동적으로 나서는 때는 없다. 그런 시기에 인민은 기적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다.
레닌, 마리야 울리야노바와 안나 울리야노바, 콜론타이, 아르망, 크룹스카야, 이들 모두는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이 사회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려 할 때 보여 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렬히 옹호했다.
여성들의 망명 생활
46 콜론타이의 《여성 문제의 사회적 토대》 출판을 기반으로 탁월한 독일 사회주의자 클라라 체트킨과 우정을 쌓았다. 1909년 콜론타이는 체트킨과 함께 여성 참정권 활동가이자 훗날 공산당 활동가가 되는 도라 몬테피오레를 런던에서 만났고 5만 명 규모의 강력한 런던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했다. 1913년 가을에 런던을 다시 찾은 콜론타이는 키이우(키예프)의 러시아 유대인 메나햄 베일리스의 재판에 항의하는 여러 집회에서 연설했다. 베일리스는 종교 의식으로 아이를 살해한 혐의로 부당하게 기소됐고,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에 비견될 정도로 악랄한 국가 주도 반反유대주의 캠페인의 표적이었다. 47
1905년 혁명 패배 후 탄압이 뒤따랐다. 혁명가들은 다시 망명을 떠나 새로운 운동과 투쟁이 벌어지길 기대해야 했다. 콜론타이는 1905년 후 두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고 회상했다. 하나는 중간계급 여성 운동에 도전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성 사회주의자들이 “여성 쟁점”이라고 여기며 다루길 꺼리는 것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1908년 체포를 피해 러시아를 떠나야 했던 콜론타이는 독일로 가서 독일사회민주당SPD에서 활동하며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립크네히트와 매우 중요한 관계를 맺었다.48 레닌은 안나의 요구 일부를 수용했고, 안나는 복사본 50부를 모스크바의 동지들에게 전해 줬다. 49 안나 울리야노바와 마리야 울리야노바는 사라토프로 국내 망명에 오를 수밖에 없었는데, 둘은 사라토프 볼셰비키 조직을 건설하는 데서 중심적 구실을 하다가 1912년 5월 7일 경찰 습격으로 둘 다 체포됐다. 안나는 곧 풀려났지만 마리야는 볼로그다로 유배됐다. 마리야는 볼로그다에서 레나 학살에 항의하는 파업을 조직했다. 레나 학살은 시베리아 금광의 파업 노동자 500명이 러시아 군대의 총에 살해당해 러시아 노동 운동에서 유명해진 사건이었다.
1908년 11월 안나 울리야노바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 비판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요약해 편지로 보냈다. 안나는 편지에서 이렇게 제안했다. “몇몇 독설을 빼거나 누그러뜨려야 해. 블라디미르, 정말 진정으로 독설이 너무 많아.”50 1911년 아르망은 해외조직위원회를 이끌도록 선출됐는데, 이 위원회는 유럽 전역의 볼셰비키 망명 조직들과 혁명 활동을 조율했다. 1912년 아르망은 볼셰비키의 두마 선거 운동 조직을 위해 러시아로 돌아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동안 아르망은 여성 노동자 쟁점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켰다. 1901년에서 1914년 사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 인구는 37퍼센트 증가했는데 새로운 노동자의 64퍼센트가 여성이었다. 그때까지 러시아 노동운동은 이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제쳐 놓고 있었다. 그렇지만 볼셰비키 신문 〈프라우다〉(진실)와 연관 맺는 여성 노동자 수가 늘어난 것에 자극받아 아르망, 크룹스카야, 또 다른 볼셰비키 콘코르디야 사모일로바는 노동계급 여성을 겨냥한 새로운 잡지를 낼 계획을 세웠다. 51
아르망은 1907년 세 차례 체포된 끝에 국내 유형 2년을 선고받았다. 1909년 1월 아르망은 병으로 위독한 파트너 블라디미르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로 탈출했지만 그녀가 도착한 지 2주만에 블라디미르는 사망했다. 아르망은 파리에 정착해 크룹스카야와 레닌 근처에 집을 얻었다. 아르망은 정치 전략을 잘 이해하고 여러 언어에 유창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프랑스 사회당에 파견한 볼셰비키 대표를 맡았다.52 그들의 관계가 진정 어떠했는지 그들만이 알겠지만,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아르망, 레닌, 크룹스카야가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로 지낸 것은 확실하다. 53 루이즈 브라이언트가 말했듯이 “레닌은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했으며 그녀에 대해 얘기할 때 열정적이었다.” 54 아르망은 1914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브뤼셀 “통합 당대회”(낙관적 명칭이었다)에서 레닌을 대변했다. 볼셰비키는 노동조합과 선거에서 지지가 높아지고 있었지만,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은 볼셰비키의 영향력을 제한하려고 술책을 부리고 있었다. 역사가들은 아르망의 대회 참가를 레닌이 그녀를 조종한 증거로 보며 레닌이 “경쟁자들의 공격에 자신이 노출되는 걸 꺼렸기” 때문에 그랬다고 주장한다. 55 그러나 이네사는 레닌을 위해 호의를 베푼 게 아니었고, 그런 류의 설명은 아르망 자신도 레닌만큼이나 볼셰비키가 러시아 좌파의 주도적 세력으로 자리잡도록 전념했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계획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아르망은 체포됐다. 남편 알렉산드르가 보석금을 내고 석방된 아르망은 레닌과 크룹스카야에게 돌아갔다. 역사가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편견을 갖고 이들의 관계를 바라봤다. 헬렌 래퍼포트는 이렇게 말한다. “이네사는 크룹스카야에게 없는 모든 것을 갖췄다. 이네사는 아름답고, 세련되고, 여러 언어를 구사했을 뿐 아니라, 천생 프랑스풍의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여인이었다.” 41세의 크룹스카야는 “매력을 잃어 가고” 있었던 반면 아르망은 고작 네 살 차이였음에도 “한창 때”였다는 것이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이 성장하자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국제사회주의자대회[제2인터내셔널 7차 대회]에 참석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남성 보통 선거권 획득을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해 여성 선거권 지지를 중단하고자 했다. 독일에서 온 클라라 체트킨과 루이제 지츠는 이들의 입장을 완전히 제압하고 온전한 보통선거권을 위한 투쟁에 사회주의자들이 헌신해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레닌은 그들의 승리를 열광적으로 보고하며 여성 참정권 요구 철회는 사회주의 원칙에서 일탈하는 것이었을 거라고 지적했다.57 8년 후인 1921년에 레닌은 세계 여성의 날에 관한 한 글에서 다시 이 주제를 다루며, 여성은 불평등한 권리 때문에 노동자로서 차별받을 뿐만 아니라, “가정의 속박”이 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여성으로서도 차별받는다고 주장했다. 58
1913년 독일 사회주의자 클라라 체트킨은 여성들의 파업과 참정권 운동에 고무돼 사회주의 운동이 세계 여성의 날을 [제정해] 기념할 것을 제안했다. 체트킨은 콜론타이의 지지를 받았는데, 콜론타이는 사회주의 정당들이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울 필요성을 더 많이 인식하게 됐다고 긍정적으로 평했다. 레닌도 여성 차별에 대한 이해가 이처럼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 레닌은 여러 글을 통해 가사 노동의 고역을 강조하고 “기본적이고 민주적인 시민권”으로서 임신중단과 피임의 권리를 방어했다.59 몇몇 동지는 귀중한 자금이 〈라보트니차〉에 낭비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는데, 그들은 그런 매체가 불화만 일으킨다고 여겼다. 이와 반대로 레닌은 아르망에게 “특별히 정열적으로” 신문 발간 준비에 착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60 3월 세계 여성의 날에 창간호를 발간할 계획이었지만 경찰 습격으로 편집부 전원이 체포되고 말았다. 안나는 늦게 도착한 덕분에 체포를 면했다. 61 대부분의 기사가 이미 인쇄소로 넘어갔던 터라 안나는 가까스로 〈라보트니차〉 1만 2천 부를 인쇄해 배포할 수 있었다. 62 안나는 1914년 2월부터 6월까지 7개 호가 성공적으로 발행되도록 조직했다. 63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라보트니차〉 편집팀 사무국장은 니나 아가자노바였다. 그녀는 1907년 볼셰비키에 가입했고 몇 차례의 투옥과 추방을 겪은 인물이었다. 1917년 10월 혁명 후 아가자노바는 몇몇 군사 임무를 맡았고, 그 뒤 영화감독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과 함께 영화 〈전함 포툠킨(포템킨)〉 시나리오를 썼다. 볼셰비키당이 노동계급에 뿌리내리고, 여성을 착취당하는 노동자일 뿐 아니라 성별 때문에 차별받는 존재로 인식하고 그 문제에 시급히 대응할 필요성을 인식한 것은 바로 전쟁 발발 전 이 시기였다. 그리고 이런 방향을 주도한 것은 아르망과 콜론타이, 레닌과 그들의 주변 동료들이었다.
1914년 봄에 노동계급의 투쟁이 고양되자 이에 자극받아, 안나 울리야노바, 크룹스카야, 아르망, 콜론타이와 다른 여성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 여성을 겨냥한 볼셰비키 매체 〈라보트니차〉(여성 노동자)를 복간할 계획을 세웠다.세계대전에서 계급 전쟁으로
64 전쟁 시작 8개월만인 1915년 3월, 이네사 아르망은 스위스 베른에서 국제사회주의여성대회를 개최했다. 비록 29명의 대표만이 참석했지만, 이 대회는 전쟁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의 구별되는 입장을 세운 중요한 일보 전진이었다. 참호 속 대량 학살에 대한 쓰라림과 반감이 커짐에 따라 이런 입장을 지지하는 청중은 꾸준히 늘어났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8월은 국제사회주의 운동에 재앙이었다. 하나둘씩 제2인터내셔널 사회주의 정당들은 오래 유지해 온 전쟁 반대 입장을 내던지고, 민족주의 물결에 굴복해 자국 정부의 전쟁 노력을 지지했다. 콜론타이는 독일사회민주당의 그런 굴종에 항의해 독일을 떠났다. 레닌의 동료들은 사회민주당들이 전쟁 몰이에 굴복한 것을 보며 볼셰비키의 혁명적 정당 모델이 단지 차르 러시아의 억압적 조건 하에서만이 아니라 더 보편적으로 적합하다는 증거로 여겼다. 레닌은 볼셰비키의 목표가 제국주의 간 전쟁을 차르에 맞선 내전으로 전환한다는 것임을 설명하는 일련의 문건을 1914년 9월 출판했다. 콜론타이는 이 문건들을 읽고 다시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콜론타이는 소책자 《누가 전쟁을 필요로 하나?》에서 주적은 국내에 있다는 볼셰비키의 사상을 널리 알렸다. 엄청나게 많이 팔린 이 소책자는 1916년 여름에 출판돼 러시아와 독일의 병사 수백만 명에게 읽혔다.전쟁 반대 활동이 막중한 와중에도 혁명가들은 여성 차별에 대한 이론적 이해를 계속 발전시켰다. 1915년 아르망이 제안한 여성 관련 소책자를 놓고 레닌은 아르망과 논쟁을 벌였다. 레닌은 “자유 연애”를 지지하는 아르망의 입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레닌은 노동자들은 경제적·물질적 걱정에서 자유로운 사랑에 관심이 있지, 파트너에 대한 헌신이나 임신·일부일처제에서 자유로운 사랑에 관심 있는 자들은 부르주아지라고 주장했다. 아르망은 충동적인 성적 만남이 기혼 부부의 사랑 없는 키스보다 더 “낭만적이고 순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충동적 키스도 추하거나 순수할 수 있으며, 아르망의 정식화는 성적 관계를 계급 동역학 안에 두기보다 우연한 만남들로 만든다고 반박했다. 이렇게 복잡한 성적 관계들을 살펴보는 것은 [개별 상황과 인물들을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소설이 적합하지 대중적 소책자 형태는 적절치 않을 것이라고 레닌은 주장했다. 레닌에게 설득됐든 낙담했든, 아르망은 여성 관련 소책자를 전혀 출판하지 않았다.
65 그러나 레닌은 “이혼의 자유가 더 완전해질수록 악의 근원이 권리 부족에 있지 않고 자본주의 자체에 있다는 사실이 여성들에게 더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그런 민주적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66 전쟁이 가하는 온갖 참상과 억압, 고립 속에서도 지도적 볼셰비키들은 여성 차별의 여러 양상에 대한 관점을 명확히 하고, 자본주의 체제 내 여성의 권리 확대를 계속 요구했다.
또 다른 논쟁이 벌어졌는데, 한 사회주의자가 여성은 종종 너무 가난해 이혼할 권리를 행사하거나 남편을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여성이 이혼할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소용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레닌은 “이혼의 자유가 없으면 억압받는 성[여성]의 부담이 가중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여성이 경제적으로 압박받고 “침실, 육아, 부엌의 노예”이기 때문에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다는 현실을 인정했다.2월에서 10월로
67 3월 8일 안나와 마리야는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에 선임됐다. 두 사람이 〈프라우다〉에 쓴 기사들은 망명 중인 혁명가들이 현지 사건들을 이해하도록 해 줬다. 둘은 한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모든 일이 얼마나 빠르게 벌어지는지! 이야기처럼, 환상처럼, 아름답고 장엄하다. 다른 때라면 1년 동안 경험했을 것보다 많은 일을 하루 만에 겪고 있고, 며칠 만에 대중이 우리를 과거에서 벗어나게 했다.” 68 역사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1917년 2월 23일, 이제는 페트로그라드로 개명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계급 여성들이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행진을 벌이기로 했다. 이 행진은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대중 파업 운동을 촉발했고, 전면적 혁명으로 급속히 발전했다. 1주일도 안돼 차르가 쫓겨나고 수 세기에 걸친 로마노프 왕가의 지배가 갑자기 끝났다. 안나와 마리야는 러시아에 있었다. 안나는 즉시 체포됐지만 동료 수감자 사이에서 선동을 시작하자 재빨리 풀려났다. 안나는 자신이 “민중에 의해 석방됐다”고 선언했다.레닌은 일련의 “멀리서 보내는 편지들”을 보내는 러시아 혁명가들이 혁명 과정을 계속 심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편지에서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여성들을 공적 활동에, 민병대에, 정치적 생활에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여성을 가정과 부엌의 숨막히는 상황에서 떼어 놓지 않는다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없다. 사회주의는 고사하고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레닌은 이제 여성을 혁명 과정의 중심에 두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4월 2일 〈프라우다〉에 이 편지들을 전달했다. 콜론타이는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의 영향력을 구축하는 일에도 관여했다. 당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는 볼셰비키 대의원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콜론타이는 한 목수 노동조합에 자신을 그들의 대의원으로 삼아 달라고 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다음 콜론타이는 어느 병사 연대에 찾아갔는데, 병사들이 처음에는 여성이 자신들을 대표한다는 생각을 거부했지만 그 뒤 생각을 바꿨다. 콜론타이는 그들의 소비에트 대의원이 됐다. 콜론타이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단 여덟 명이던 여성 대의원이었고, 그중 네 명이 볼셰비키였다.
71 레닌과 콜론타이의 반대자들은 러시아는 너무 후진적이어서 혁명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할 조건이 확립된 후에야 사회주의가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닌과 콜론타이는 러시아 혁명이 산업화된 나라들로 확산돼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점화하는 불꽃 구실을 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수많은 정치적 망명자들이 이제 시급히 러시아로 돌아왔다. 레닌과 크룹스카야는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해 멘셰비키, 자유주의자, 농민 기반의 사회혁명당으로 구성된 임시정부를 공격했다. 레닌의 입장에 모든 경향의 사회주의자들이 격분했다. 레닌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한 첫 연설에서 러시아 혁명을 더 심화시킬 필요성을 설명하자 그의 연설이 들리지 않을 정도의 고함과 야유가 돌아왔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이 대회에서 레닌의 4월 테제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유일한 볼셰비키[측 대의원]이었고, 크룹스카야와 아르망은 앞줄에 앉아 유일하게 콜론타이를 지지했다.72 5월과 6월 내내 크룹스카야는 페트로그라드의 대규모 노동계급 지구인 비보르그에서 열린 〈라보트니차〉 집회에서 연설했다. 같은 시기에 콜론타이는 페트로그라드 전역에서 열린 각종 집회에서 연설했고 아르망도 모스크바에서 대규모 청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73 〈라보트니차〉는 전쟁에 대한 반감을 고무하고, 노동계급 여성 사이에서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를 얻어 내고 여성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연단을 제공했다.
임시정부는 러시아군을 전쟁에서 철수시키기를 거부했다. 볼셰비키당은 노동계급 여성 사이에서 전쟁 반대 여론이 커지는 것에 응하고자 〈라보트니차〉를 복간했다. 마리야 울리야노바는 타자기를 구해 안나와 함께 〈라보트니차〉를 만들었다. 1917년 5월 10일 첫 호가 발행됐는데 인쇄한 4만 부가 모두 팔렸다.74 마리야는 〈프라우다〉에서 레닌의 대변인 구실을 했고, 제헌의회 선거를 위한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당 후보에 만장일치로 선출됐다. 75
1917년 여름 내내 노동자·병사위원회들은 점점 더 임시정부의 정당성에 도전했다. 레닌은 숨어야 했다. 이전까지 레닌은 안나 울리야노바와 마리야 울리야노바, 안나의 남편 마르크와 함께 지냈지만 이제는 너무 위험해졌다.76 또한 크룹스카야는 “병사 아내 구호를 위한 비보르그위원회” 의장이 됐다. 크룹스카야의 전기 작가는 이 활동이 “본질적으로 초당파적 복지 활동”으로 “분명 레닌주의적인 것이 전혀 아니었다”고 썼다. 77 이렇듯 병사 아내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자선을 바란다고 거의 도매금으로 무시당해 왔다. 그러나 크룹스카야와 콜론타이는 이 여성들이 갈수록 투쟁적이고 조직화되고 있음을 보며 그들을 평화와 빵을 위해 투쟁하는 동지로 인식했다.
크룹스카야는 볼셰비키 비보르그위원회의 일원이 돼 그곳에서 지역 무상학교 네트워크를 건설했다. 크룹스카야는 교육 활동에 헌신하면서도 임시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키기 위해 애썼다. 크룹스카야가 설명했듯이 “저기서는 내각과 시 두마가 하지 않은 일을 볼 수 있고 여기서는 대중과 볼셰비키가 이뤄낸 일을 볼 수 있다.”78 멘셰비키는 임시정부에 참여했고, 임시정부는 전쟁을 중단하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1917년 7월 재앙적인 “케렌스키 공세”를 감행해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병사 아내 사이에서 여성 활동가들이 선동한 것은 성과를 거뒀다. 크룹스카야는 이렇게 회상했다. “병사 속에서 최초로 볼셰비키 선동을 수행한 이들은 해바라기씨와 사과 주스를 파는 이들이었는데, 이중 많은 사람이 병사 아내였다.” 79
콜론타이는 병사 아내 약 1만 5000명의 시위를 조직했다. 시위대는 급여 인상과 전쟁 중단을 요구하며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로 행진했다. 멘셰비키인 당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이 나와서는 여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더 많은 돈을 바라지 말고, 전쟁이 끝나길 바라시오!” 콜론타이는 다음과 같은 야유로 응수했다. “멘셰비키가 그런 말을 하다니 뻔뻔하네!”80 여성 노동자들은 전쟁 반대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반대를 수반한다는 것을 갈수록 잘 이해하게 됐고 볼셰비키는 그들에게 정치적 안식처가 돼 가고 있었다.
수백만의 러시아 남성이 전선으로 징집됐다. 볼셰비키 여성들은 이 병사 아내 사이에서, 그리고 징집된 남성을 대신해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대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사이에서 선동 활동을 벌였다. 레닌은 1917년 6월 볼셰비키 강령을 개정할 때 이 활동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개정된 강령은 여성 투표권과 소녀 무상교육 같은 여성의 정치적 요구와, 직장 어린이집, 수유 시간, 유급 출산 휴가 등 여성의 경제적 요구를 위한 투쟁에 볼셰비키당이 헌신한다고 밝혔다.그럼에도 레닌의 동료 사이에서는 볼셰비키당이 혁명적 기회를 유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었다. 10월 5일, 크룹스카야는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권력 장악을 즉시 조직하라고 요구한 비보르그위원회의 일곱 볼셰비키 대표 중 한 명이었다. 10월 24일이 되기까지, 레닌은 주저하는 중앙위원회 수뇌부를 넘어서 지구위원회들에 호소했는데, 그 과정에서 당원들에게 메시지를 전파하는 책임을 크룹스카야가 맡았다. 콜론타이는 봉기 수행을 결정하는 밤샘 회의에 참여했다. 아르망은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서기가 됐다. 이들 모두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넘기라고 요구하는 데서 없어서는 안될 구실을 했다.
다시 태어난 세상
81 안나는 “공산주의자 동지들”에게 많은 호소문을 보내 “부디 사무실을 빽빽하게 써서” 아이들이 “눅눅한 지하실”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82 안나는 “새로운 사회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아이들이 신선한 공기 속에서 놀고 배울 수 있도록 도시 교외에 아이들을 위한 주택을 건설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83
10월 혁명으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고 최초로 노동자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밖으로는 세계대전, 안으로는 내전으로 황폐화된 나라라는 조건에서였지만 말이다. 여성들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안나 울리야노바는 아동보호부를 설립하고 책임자가 됐다. 안나의 임무는 전쟁 고아가 된 수많은 아이들을 위한 주택 공급을 개선하는 것이었다.84 마리야는 노동자들에게 기고하도록 장려하는 것이 “당을 대중에 더 가깝게 하고 대중도 당에 더 가까워지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구실”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85 마리야는 또한 노농통신원운동이 여성들의 신문 기고를 고무하기 위해 “충분히 정력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86
마리야 울리야노바는 노농통신원운동(랍셀코르)의 지도자가 돼, 노동자와 농민이 〈프라우다〉에 기고하도록 장려했다. 2월 혁명과 10월 혁명 사이에 노동자와 병사는 〈프라우다〉 본부에 있는 마리야의 사무실에 정기적으로 들러 자신들의 얘기를 전했다.87 이런 변화는 높은 문맹률로 고통받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에서 이뤄낸 크나큰 성취였다.
크룹스카야는,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가 이끄는 나르콤프로스(교육과 예술을 담당한 인민위원회)에서 부위원장이 됐다. 나르콤프로스는 교육 체계를 바꿔 모든 아이가 보편적 무상교육을 받도록 했다. 학교 수는 혁명 첫 2년 동안 최소 두 배로 늘었다. 여성 차별에 맞서 싸우는 방법으로 남녀 공학이 즉시 시행됐고, 학습 장애나 여러 장애가 있는 학생을 위한 학교들이 최초로 설립됐다. 대학은 자격 요건 없이 모두에게 개방됐다. 크룹스카야는 교육 개혁이 아래로부터 추동됐다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고 혁명을 조직했습니다. 그런 우리가 대중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 우리는 대중이 이 나라를 지도하고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기를 바랍니다.”88 콜론타이가 제출한 모성 권리에 대한 보고와 이에 대한 토론은 소비에트 정책의 기초가 됐다. 89 소비에트 정부는 양육을 집단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봤다. 10월 혁명 몇 주 안에 모든 여성에게 의료 서비스가 무상으로 제공됐고, 의사는 정부에서 임금을 받고, 모든 아동 보육 기관은 정부 관리하에 놓였다. 볼셰비키 공약인 유급 출산 휴가와 수유 시간 보장이 시행됐다. 90
콜론타이는 사회복지인민위원으로 임명됐다. 전 세계를 망라해 최초로 여성이 정부 각료로 임명된 경우였다. 페트로그라드 거리에서 아직 적대적 부대들을 제거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콜론타이·아르망·크룹스카야 등 〈라보트니차〉 여성 활동가들은 여성노동자대회를 소집했다. 콜론타이의 회고에 따르면, 일부 지도적 남성 볼셰비키가 이 대회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레닌은 이 여성 활동가들을 지지하며 대회 준비에 큰 관심을 가졌다.91 백군이 약해지면서 제노텔의 여성 노동자들은 러시아 전역에 지부를 세웠다. 그들은 여성들이 법적 권리를 위해 투쟁하도록 고무하고 여성에게 보건 의료 교육을 제공했다. 제노텔 노동자들은 중앙아시아를 누비며 무슬림 여성에게 다가가기 위해 “붉은 유르트[유목민 텐트]”와 “붉은 배”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1918년 가을 1000명이 넘는 여성 대표자가 제1회 전全러시아여성대회에 모였는데, 그 중에는 무슬림 여성도 상당수 있었다. 콜론타이는 어떻게 여성 활동가들이 이제껏 남성들이 했던 것보다 더 성공적으로 무슬림 여성에게 다가갈 수 있었는지 루이즈 브라이언트에게 들려 주었다. 92
아르망이 “노동 여성 속 선전·선동을 위한 중앙위원회(‘제노텔’ 혹은 ‘제노트델’)”의 책임자로 임명됐고, 콜론타이는 이 위원회에서 지도적 인물이었다. 제노텔은 대단히 독보적인 프로젝트로, “여성 해방을 위해 이제까지 정부 차원에서 시도한 것 중 가장 야심찬 것”이었고, 전쟁으로 황폐화된 나라에서 여성 차별의 유산에 도전하는 것이었다.아르망은 여성들이 자신들이 받는 차별의 뿌리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여성을 겨냥한 이론지 《코뮤니스타》를 창간했다. 이 잡지 다섯 번째 호에는 아르망의 부고가 실렸다. 하루 16시간 노동으로 기진맥진한 아르망은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캅카스 산맥 휴양지로 갔으나 백군이 그 지역을 공격했다. 아르망은 대피했지만 콜레라에 걸려 1920년 9월 23일 46세 나이로 사망했다. 아르망은 대중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가운데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묻혔다.
93 레닌은 여성이 “가정의 속박”에서 해방되려면 소규모로 개별화된 가사를 사회화된 대규모 가사 서비스로 바꿔 내야만 하고, 이를 위해서 정치적 헌신과 물적 자원이 모두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94 당시 노동자 정부가 집단적 아동 보육과 여성 해방을 위해 이뤄낸 진보를 뛰어넘은 경우는 아직까지 없다.
이 시기에 나온 레닌의 글과 연설은 그가 여성의 삶을 바꾸기 위해 헌신했음을 보여주는데, 여성이 형식적 평등뿐 아니라 고되고 지루한 가사노동에서도 해방돼야 한다고 봤다. 레닌은 새로운 소비에트 정부가 여성 권리에 대한 제약을 모두 없애는 데 어떻게 모든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월등히 능가했는지 지적했지만, 그럼에도 여성들은 여전히 가사 노예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고도 거듭 지적했다. 왜냐하면 “자질구레한 집안일이 여성을 압박하고, 옥죄고, 바보로 만들고, 품위를 떨어뜨리는가 하면, 여성을 부엌과 육아라는 쇠사슬로 묶어두고, 끔찍하게 비생산적이고 사소하고 진땀나고 참담한 고역에 노동을 낭비”하게 하기 때문이다.배반당한 여성 혁명
95 그러나 스탈린은 먼저 레온 트로츠키, 레프 카메네프,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를 정치국에서 쫓아냈고, 그다음에는 부하린을 공격하고 마리야에 대한 집요한 중상 비방 캠페인을 시작했다. 1929년 마리야는 〈프라우다〉와 랍셀코르[노동자·농민 통신원]의 직책에서 밀려났다. 안나 울리야노바가 커져가던 반反유대주의를 가라앉히기 위해 레닌 가족의 유대인 조상들을 찾아내 대중에 알리려 하자 스탈린은 안나를 공격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은 10월 혁명 전에 당을 건설한 “구 볼셰비키” 세대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권력을 공고히 장악했다. 이 논문 속 여성들은 어떤 면에서 레닌과 맺은 관계 덕분에 보호받았지만, 그럼에도 그들 모두 스탈린에 저항하려 했다. 크룹스카야는 1925년 당대회에서 형성된 통합반대파의 첫 발언자였지만, 괴롭힘과 협박 속에 굴복당했다. 스탈린은 그 과정에서 크룹스카야를 레닌의 미망인 자리에서 해고하고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겠다는 악명 높은 말을 했다. 콜론타이는 스탈린에 대항한 반대파를 지지했고 이후 스웨덴과 멕시코 외교관으로 파견됐고 마지막에는 주 노르웨이 소련 대사로 갔다. 마리야 울리야노바는 처음에는 자신의 옛 친구 니콜라이 부하린과 동맹한 스탈린이 “차악”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며 지지했었다.크룹스카야, 안나 울리야노바와 마리야 울리야노바, 콜론타이는 예외적으로 살아남은 경우였다. 남녀 불문하고 구 볼셰비키는 스탈린의 거짓 선전 기구를 위협했기 때문에 살해됐다. 바르바라 야코블레바는 1904년 18세의 학생으로 볼셰비키에 가담해 1917년 8월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선출됐는데, 그녀가 스탈린에 대항한 트로츠키의 반대파를 지지한 뒤 1938년 체포돼 징역 20년 형을 선고받았고 1941년 총살당했다. 지노비예프의 아내 즐라타 릴리나는 1938년에 총살당했다. 지노비예프의 전 부인 올가 라비치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사망했다. 러시아인 볼셰비키와 결혼한 영국 공산주의자 로즈 코언은 1938년 총살당했다. 트로츠키 여동생이자 카메네프의 아내인 올가 카메네바는, 1917년에 두드러진 구실을 했던 저명한 사회주의 지도자 마리야 스피리도노바와 함께 1941년에 총살당했다. 이 저명한 활동가들 외에도 수많은 여성 볼셰비키 — 교사, 간호사, 가게 점원, 공장 노동자 — 이 1917년의 혁명 정신을 체현했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살해당했다.
스탈린 반혁명의 살인적 야만성 때문에 볼셰비키가 대변했던 해방 전통이 잊혀서는 안 된다. 볼셰비키당은 당원들이 만든 살아 숨 쉬는 조직이었다. 마리야 울리야노바와 안나 울리야노바, 아르망과 콜론타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당에 기여했다. 첫째, 그들은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과 여성 해방 요구가 사회주의 운동에서 차지하는 중심적 구실을 인식했다. 둘째, 결정적 순간들에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볼셰비키를 지배적인 정치세력으로 만들고, 제1차세계대전 반대 운동을 건설하고, 1917년 여름에 혁명 운동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해방된 사회를 어떻게 창조할 수 있는지 세상에 힐끗 보여주었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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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udy Cox, 2021, ‘Out of the shadows: female Leninists and Russian socialism’, International Socialism, 171 (Summer 2021).
↩
- Bryant, 1923, pp5-6. 루이즈 브라이언트는 러시아 혁명을 취재하기 위해 러시아를 두 차례 방문하고 미국을 순회하며 혁명가들에 연대할 것을 주장한 사회주의 언론인이었다. ↩
- Turton, 2004, pp22-23. ↩
- McDermid and Hillyar, 2006, p148. ↩
- Rappaport, 2017. ↩
- Dean, 2021. ↩
- Le Blanc, 2015; Lih, 2006 ↩
- Porter, 1976, p53. ↩
- Ross, 2015, p83; Engels, 1976. ↩
- McNeal, 1972, p19. ↩
- Wolfe, 1963. ↩
- Hartnett, 2014, pp205-236. ↩
- Porter, 1976, p283. ↩
- Turton, 2004, p34. ↩
- McNeal, 1972. ↩
- McNeal, 1972, p95. ↩
- Dean, 2021. ↩
- Clements, 1997, p12. ↩
- Turton, 2004, p47. ↩
- Turton, 2004, p53. ↩
- Turton, 2004, p69. ↩
- McNeal, 1972, p93. ↩
- McNeal, 1972, p101. ↩
- Bryant, 1923, p23. ↩
- McNeal, 1972, p29. ↩
- McNeal, 1972, p30. ↩
- McNeal, 1972, p31. ↩
- Porter, 1980, p52-53. ↩
- Kollontai, 1984. ↩
- Clements, 1997, p101. ↩
- Krupskaya, 1966. ↩
- McNeal, 1972, p78. ↩
- 이전까지 여성 차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모두 남성(엥겔스와 아우구스트 베벨)이 쓰거나 남성과 함께 쓴 것(엘리너 마르크스와 에드워드 에이블링)이었다. 1905년에도 클라라 체트킨은 아직 짧은 기사 몇 편과 연설문만을 출판했다. ↩
- Porter, 1980, p121. ↩
- Porter, 1980, p193. ↩
- 콜론타이는 [이미] 1908년에 《여성 문제의 사회적 토대》를 출판했다. 이 책은 페미니즘에 대한 맹렬한 반박이었지만 400페이지 분량으로 대중적 소책자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
- Krupskaya, 2018, p10. ↩
- Elwood, 1992, p38. ↩
- Porter, 1980, pp92-93. ↩
- Turton, 2004, p114. ↩
- Turton, 2004, p51. ↩
- McNeal, 1972, p123. ↩
- Elwood, 1992, p45. ↩
- Elwood, 1992, p48. ↩
- Porter, 2020, pp51-54. ↩
- Lenin, 1962. ↩
- Porter, 1980, p152. ↩
- Porter, 1980, pp191-192. ↩
- Turton, 2004, pp106-108. ↩
- Turton, 2004, p108. ↩
- Elwood, 1992, pp78-79. ↩
- Elwood, 1992, p105. ↩
- Rappaport, 2010, p194. ↩
- Elwood, 1992, pp141-143; McNeal, 1972, p156. ↩
- Bryant, 1923, p20. ↩
- Elwood, 1992, p135. ↩
- Lenin, 1972a. ↩
- Lenin, 1977. ↩
- Lenin, 1965. ↩
- 이들 여성 사회주의자에는 프라스코브야 쿠델리, 콘코르디아 사모일로바, 류드밀라 멘친스카야, 릴리나 치오비에바, 류드밀라 스탈이 있다. ↩
- Lenin, 1976. ↩
- Turton, 2004, p199. ↩
- Turton, 2004, p201. ↩
- Turton, 2004, p215. ↩
- Porter, 1980, p226. ↩
- Lenin, 1964a. ↩
- Lenin, 1964a. ↩
- Turton, 2004, p116. ↩
- Turton, 2004, p123. ↩
- Lenin, 1964b. ↩
- Porter, 2020, p190. ↩
- Porter, 1980, p248. ↩
- Porter, 1980, p255. ↩
- Porter, 1980, p249. ↩
- Turton, 2004, p140. ↩
- Turton, 2004, p145. ↩
- Porter, 1976, p177. ↩
- McNeal, 1972, p177. ↩
- Porter, 1980. ↩
- McDermid and Hillyar, 1994, p165. ↩
- Lenin, 1964c. ↩
- Turton, 2004, p150. ↩
- Turton, 2004, p173. ↩
- Turton, 2004, p174. ↩
- Turton, 2004, p140. ↩
- Turton, 2004, p52. ↩
- Turton, 2004, p191. ↩
- Fitzpatrick, 2002, p28. ↩
- Kollontai, 1984. ↩
- Porter, 1980. ↩
- Porter, 1980, p275. ↩
- Clements, 1997, p126. ↩
- Bryant, 1923, p121. ↩
- Lenin, 1972b. ↩
- Lenin, 1965. ↩
- Turton, 2004, p1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