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요 가담자 인터뷰
“인종차별적 경찰 놈들에게 되갚아 줬다” *
인터뷰한 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대괄호([ ])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번역자가 첨가한 것이다.
“리옹 제4구 경찰서를 공격할 때 나도 함께 했다. 경찰서가 불타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파리드의 말이다.
“수년간 나는 억눌렸고,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분노가 쌓여 있었는데 이번에 되갚아 줄 수 있었다.
“내가 살면서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 그 놈들이 내 부모와 조부모, 형제자매를 모욕했던 것을 작게나마 복수했다.”
경찰이 17세 나헬 M을 처형한 후 프랑스에서 반란이 치솟은 이유에 대해 파리드는 할 말이 아주 많았다. “물론 나헬의 죽음은 끔찍한 일이었다. 경찰은 아마도 나헬이 운전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총을 쐈을 것이다. 겨우 그런 이유로 사형에 처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건 하나 때문만은 아니다. 한 주도 빠짐없이 경찰은 나를 못살게 군다. 경찰이 내게 화내지 않고 지나가는 주가 없다. 경찰이 나와 비슷한 누군가에게 ‘더러운 아랍 놈’이라고 말했다는 소리를 매주 듣고 산다.
“프랑스는 알제리에서 떠났지만, 그들 중 다수는 여전히 침략자의 사고방식에 젖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우리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고,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산다는 듯 군다.”
파리드는 베니시유에 산다. 베니시유는 리옹 교외에 있는 지역으로, 프랑스의 옛 북아프리카 식민지 출신 사람들이 많이 산다.
베니시유의 풍경은 주로 칙칙한 다층 주택 단지이다. 녹지와 카페와 상점은 간간이 볼 수 있다. 다른 나라의 비슷한 곳 어디에서나 그렇듯 “도시 재생”이나 “공동체 강화” 따위의 약속이 끊임없이 나오지만, 주민의 절반은 공식 빈곤층이고 청년 실업률은 40퍼센트다.
베니시유는 한때 주요 산업지역이었지만 이제는 기업도 일자리도 없다. 게다가 주거 환경을 개선한다면서, 과거 정부가 지은 [공공] 주택 단지 중 남아 있는 것들을 헐어 버리는 경우도 흔하다.
베니시유가 전부 칙칙한 것만은 아니다. 프랑스의 다른 많은 지역처럼 빈민가를 가리기 위한 화려한 건축물이 있다. 중앙정부나 시정부 공직자가 자신의 치적으로 삼으려고 지은 것들이다. 그러나 화려한 외벽과 멋진 디자인으로도 불평등과 인종차별을 가리지는 못한다.
정부가 인종차별 반대 운운하는 것은 전혀 알맹이가 없다. 나헬이 총 맞아 죽은 장소가 다름 아닌 넬슨 만델라 광장이었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파리드는 계속 말했다.
“내 일상이 어떤지 말해 주겠다. 내가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연립주택에는 부모님과 나 말고도 2명이 더 산다. 내가 어릴 적에도 매우 비좁은 집이었는데, 내가 성인이 된 지금은 더하다.
“21살이 될 때까지 나는 일자리가 없었다. 나와 같은 [아랍식] 이름을 갖고 있고 또 주소지가 베니시유이면 일자리를 구하는 게 쉽지 않다. 사장들은 많은 경우 쳐다보지도 않을 거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각종 테러와 ‘이슬람국가’ 탓에 사정은 더 나빠졌다. 어떤 사람들은 흑인이라는 것보다 무슬림이라는 것 때문에 더 끔찍하게 살아야 한다.
“지금 내 시급은 13유로다. 아주 고된 육체노동이다. 나와 함께 일하는 많은 이들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다. 그들은 제대로 된 문서를 갖추지 못해서, 말하자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 일부는 나보다도 시급이 낮다.
“나는 출퇴근 길에 경찰의 불심검문을 당하는 일이 아주 흔하다. 나를 잘 알고 있는 경찰관들도 꼭 그렇게 나를 불러 세운다. 일종의 통제 수단으로, 이 구역에선 자신이 상관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리옹 번화가에서는 경찰들이 잘사는 중간계급 백인들에게는 상냥하게 미소 짓는 것을 종종 본다. 또 그곳에서는 경찰이 사람들에게 말을 걸 때 총구를 바닥으로 내린다. 여기서는 어떤 경찰도 내게 미소 짓지 않는다.
“나헬과 같은 사건이 얼마나 많을지, 그리고 죽이지는 않았더라도 경찰이 그런 식으로 공격한 사건이 얼마나 많을지 자문해 봐라.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라헬의 경우도] 촬영된 영상이 없었더라면 그 경찰은 정당방위였다면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나헬 살해자 놈과 그 동료는 영상이 공개되기 전까지 그렇게 말했다.”
파리드에게 이번 인터뷰를 하라고 설득한 사니아는 근처 지보어에 산다. 파리드는 [경찰서를 습격한 행위로] “방화범”으로 붙잡히면 징역을 10년 이상 살게 될 수 있는 만큼 그의 두려움은 실질적이었지만 사니아가 설득했다.
사니아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소요는 난데없이 벌어진 게 아니다. 모두들 빈민가가 존재하고, 그곳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없고, 뭔가 변하지 않으면 언젠가 일이 터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막상 그런 일이 터지면 모두들 마치 크게 놀랐다는 듯이 행동한다.
1 기뻐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다녔다. 또 나중에 프랑스가 모로코를 이겼을 때는 아랍계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이겠다고 대대적으로 이 지역을 훑고 다녔다.
“어쨌든 리옹에서 그런 일은 낯선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경찰도 있지만 파시스트도 있다. 여기서는 파시스트들이 꽤 강력하다. 지난해 월드컵 때 드러난 바 있다. 파시스트들은 모로코의 승리에“월드컵 기간 동안 정말이지 긴장이 팽팽했다. 나는 사실 축구에 별 관심이 없지만, 그때만큼은 매 순간 모로코가 이기기를 바라면서 경기를 봤다.”
올해 프랑스를 몇 달 동안 뒤흔든 연금 개악 반대 파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에게 물었다. 파리드는 그런 운동이 벌어진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과연 연금이라는 걸 받게 될까? 내 친척 중에는 일찍 죽는 이들이 많다. … 그리고 내가 64살이 될 때쯤이면 너무 많은 게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 투쟁으로 마크롱을 꺾었더라도 나는 여전히 시급 13유로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경찰 눈치를 봐야 하고, 또 다른 누군가가 감옥에 갇히거나 경찰에게 두들겨 맞았다는 얘기를 반복적으로 듣고 살아야 할 거다.”
사니아는 좀더 희망적이었다. “마치 사람들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부 사람들은 깨어나는 듯 보였다. 그리고 당시 리옹에서는 아주 격렬했다. 나는 그런 용기를 우러러본다.”
항의 시위가 점잖은 행진 수준이 아니었다는 사니아의 말은 사실이다. 3월 17일 지역 매체는 이렇게 보도했다. “리옹에서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로 적어도 36명이 연행됐다. 리옹시 당국은 시청 건물이 ‘만신창이가 됐다’고 밝혔다.”
이어서 5월 1일에 시 당국은 이렇게 밝혔다. “리옹에서는 연금 시위가 폭력적으로 번져 적어도 33명이 체포됐다. … 경찰이 시위대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온갖 발사체들이 비처럼 거리에 쏟아져 내렸다. 당시 시내 상황을 찍은 사진을 보면 식료품점이 약탈당했고 은행 건물 앞에 불이 나 있다.”
일주일 뒤에도 언론은 “리옹에는 성난 바리케이드, 경찰, 최루가스”라고 보도했다.
사니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공 부문에서 일한다. 나는 그 행진 중 하나에도 참가했다. 그런 시위가 벌어지면, 사람들이 서로 간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시위가 끝난 다음에는 뭐가 있나?”
파리드와 사니아는 둘 다 정치인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사니아는 지난 대선 때 좌파 후보 장뤽 멜랑숑에 투표하려고 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는 관뒀다.
파리드는 “르펜은 파시스트이지만, 마크롱이라고 더 나을 게 있나?” 하고 말했다. “마크롱은 무슬림을 증오하고 우리를 처벌하려 들지만, 경찰이 해 달라는 것은 다 해 준다. 어째서 우리가 그 둘 사이에서 골라야 한단 말인가?”
사니아는 이렇게 지적했다. “[이번 소요로] 라이레로즈 시장의 집이 불에 탔을 때 좌파부터 우파까지 모든 정치인이 한목소리를 냈다. 시장 집이 불에 타면 비상시국이지만 경찰이 누군가를 쏴 죽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베니시유에는 기나긴 저항의 역사가 있다. 이 도시의 레맹게트에서 1981년 9월 벌어진 소요가 프랑스 교외에서 벌어진 최초의 저항 중 하나였다. 어떤 역사가들은 프랑스에서 자동차가 불탄 소요는 1983년 레맹게트 소요가 최초였다고도 말한다.
당시 인종차별적 동기의 살인 사건이 잇따라 벌어진 상황에서 경찰이 레맹게트를 공격하자 1983년에 현지 종교인들이 “평등을 바라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행진”을 조직했다. 미국 마틴 루서 킹의 시위를 본뜬 것이었다. 처음에는 겨우 17명이 참가했다. 그러나 그 행진은 50일간 프랑스 전역을 돌았고, 마지막 날 파리에서는 10만 명이 모여 그 대열을 환영했다.
당시 대통령이던 프랑수아 미테랑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사회당 소속으로 행진 주최 측에 많은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다.
파리드는 최근 자신의 친척 중 한 명이 1983년 소요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분은 한 번도 내게 그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마 지금 일어난 것과 똑같은 상황에서 그 분도 똑같은 일을 한 것일 게다. 난 그 분이 자랑스럽다. 앞서 싸운 모든 이들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파리드는 1980년대나 지금이나 변화를 일으키려면 자유주의적 캠페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불타던 경찰서를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다음에는 그런 일이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모든 빈민들이 함께하기를 바라자.”
“정치인들이 겁에 질린 것은 좋은 일이다”
킴버: 소요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파리드: 거리에 사람들이 모이고, 경찰도 우리가 모이는 것을 알고 대거 모여 든다. 그때 싸움이 시작된다. 때로는 우리가 경찰보다 쪽수가 더 많고, 불을 쓰면 경찰을 겁줄 수 있다.
경찰이 달아나야 한 적도 몇 차례 있다. 그런 경우는 일이 대단히 잘 풀린 경우이고, 그런 때에 일부 사람들이 상점을 약탈하거나 불을 놓는다.
킴버: 소요 와중에 판단은 누가 내리는가?
파리드: 전에도 비슷한 일을 해 봤던 사람들이 있다. 아주 위험한 상황인 만큼 그런 사람들의 말을 모두 경청한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붙잡히면 감옥행이다.
게다가 경찰이 우리를 향해 화기를 쏘아 댄다. 회의를 열고 논쟁을 할 상황이 못 된다.
사니아: 대체로 남성들이 지휘하고 결정을 내린다. 내게는 맞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여기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무시하고 또 어떤 이들은 나 같은 사람이 올 곳이 아니라고 여긴다. 고쳐야 할 문제들이다.
그렇지만 여성도 남성 못지 않게 분노하고 또 싸울 수 있다. 여성들도 남성들만큼 해낼 수 있다.
킴버: 소요 다음은 무엇인가?
사니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분연히 일어섰다고 느낀다. 그리고 나헬과 그 유가족을 위해, 또한 자신들을 위해 응당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전보다 긍지가 높아졌을 것이고 이전처럼 마냥 고개 숙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감옥에 가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도와야 하고, 지켜 주려고 해야 한다.
파리드: 난 미래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겁을 먹은 것은 좋은 일이고, 화산이 언제든 다시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도 좋은 일이다.
어쩌면 상황이 조금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아니라면, 그 때는 정신이 더 확실하게 들도록 해 줘야 할 것이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