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요의 뿌리 *
최근[2005년 11월] 프랑스에서 발생한 도시 소요 사태는 사회적·경제적 소외가 인종적·지정학적 차원 둘 다와 중첩되는 방식을 드러냈다. 이민자 후손 출신의 실업자 청년들은 적어도 1980년대 초부터 경찰과 전쟁을 벌여왔는데, 이 전쟁에서 그들은 결코 이길 수 없었지만 전쟁은 끊임없이 재점화돼 왔다. 2001년 9월 11일 이후에는 국가가 고용주들과 결탁해 파리 근교 루아시에 있는 샤를 드골 공항 같이 고용의 주요 중심지들에서 일하는 무슬림 노동자들을 일자리에서 쫓아내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고집스러운 믿음
인종적·사회적 배제의 중첩은 프랑스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최근의 소요는 이런 긴장이 모든 종류의 정치 시스템 내부에 존재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줬고, 1789년의 기념비적인 혁명에 담긴 공화주의 원칙(보편적 참정권, 인권, 법 앞의 평등)에서 기인한 정치 시스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만의 독특한 점은 국가가 추상적인 정치적 권리를 수호할 주체라고 고집스럽게 믿는 탓에 인종적 차이 및 인종차별의 본질과 각종 양태에 대해 일종의 근시안적 태도를 갖는다는 것인데, 좌우 정치 담론 모두 그렇다. 단적으로 1963년 장 포이어 법무부 장관은 국회에서 “프랑스는 자국 영토에 인종차별이나 인종 분리 법률이 없다는 점을 자축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지만 불과 2년 전인 1961년 10월 17일에 경찰이 비무장 알제리 시위대를 공격해 200여 명의 남녀와 어린이가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었다. 또한 1971년 당시 총리 자크 샤방델마스는 한 유대인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는 세계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적은 나라 중 하나 … 존재하지 않는 것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는 것은 비생산적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프랑스 사회는 산업화로 인한 노동력 수요가 현지 노동력 공급을 앞지른 이후 150년 동안 외국인들을 동화시키는 데서 독보적 기록을 보여 왔다. 우파는 이것이 이민자들 자체의 특성 때문인 것처럼 말하길 좋아한다. 북아프리카 출신 청년들이 1980년대에 처음으로 떨쳐 일어나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 극우와 그 동조자들은 유럽인 이민자들에게는 없는 문제였던 것처럼 반응했다. 그들은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벨기에인은 수십만 명씩 국경을 넘어왔어도 대부분 가톨릭 신자이고 프랑스인과 같은 농민 출신이었던 반면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인구학적·정치적·종교적 부흥을 한창 겪고 있는 이슬람 세계”에서 온 이민자들은 “동화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진실은 양차 대전 사이에 나치에 점령된 유럽에서 온 유대인 난민을 비롯한 유럽인 소수자들도 똑같이 독설에 가득 찬 학대를 당했다는 것이다. 당시 극단주의 언론은 그들을 기생충, 범죄자, 더러움과 질병의 매개체로 지목했고 오늘날의 [파시스트 정당] 국민전선만큼이나 앙심을 품고 인종차별적이었다.
또한 프랑스 정치 시스템의 그 유명한 기원에도 불구하고 이주 노동자들이 누린 사회적·정치적 권리 체계는, 예컨대 미국보다 어떤 식으로도 더 낫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특정 산업과 지역으로 제한되는 취업 허가를 정기적으로 받아야 했다. 그들은 독립적 협회를 결성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는 있었지만 1968년까지는 간부직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고, 1930년대에는 수천 명의 폴란드 광부와 그 가족이 노동 조건을 지키기 위해 파업을 벌이다 추방당하기도 했다. 프랑스 국가는 예컨대 독일보다는 더 관대해서, 외국인 부모를 두고 프랑스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성년이 되면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는 태어날 때부터 시민권을 받는 미국보다는 덜 관대한 것이었고, 19세기 중반에 본질적으로 군사적 이유로 도입된 것이었다. 프랑스 공화국은 급성장하는 독일 제국에 비해 군대의 규모가 밀릴까 봐 우려했던 것이다.
나치 점령과 비시 정권으로만 중간에 끊겼을 뿐 1870년부터 1958년까지 이어진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은 18세기 전임자들이 정한 원칙을 사실 온전히 입법화한 적이 없었고, ‘시민’과 ‘신민’을 구분하며 어색한 상태를 유지했다. 1947년 제정된 알제리 관련 법은 알제리를 관할하는 3개 주에 국회 의석 30석을 부여했는데, ‘유럽인’ 유권자 1명이 알제리인 8명과 같은 비중을 차지하도록 나눠놓은 2개의 선거인단이 의원을 선출하도록 했다. 당시 프랑스는, 알제리는 식민지가 아니라 모국의 일부라고 주장하면서도 이 모든 일을 벌였다. 해방 전쟁만이 그것을 바꿨다.
고밀도 주거 단지
오늘날 프랑스에는 국적법 덕분에 비유럽 1세대 이민자의 후손으로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청년들이 매우 많이 살고 있다. 이들이 사회적으로 배제된 것은 산업적·주거적 입지 과정을 통해서였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개입 정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모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전후 장기 호황에 따른 도시 인구 폭발에 대처하기 위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고밀도 주거단지가 처음 개발됐지만, 곧 기록적인 수준의 이혼과 신경 쇠약이 발생했다. 이 지역 최초의 (선주민) 입주민들은 그전까지는 아늑하지만 슬럼화된 도심지에서 지냈었는데 새 주거지에서는 불편한 고립감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내 집 마련을 위해 돈을 저축할 수 있는 사람들이 술집, 상점, 학교 등 사회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진 지역으로 황급히 떠나면서 ‘백인 이주’가 발생했다. 그 후 이 지역들에는 가난한 북아프리카와 포르투갈계 가정들이 불비례하게 많아지며 그들로 채워졌다. 1980년대 초부터 도시 외곽에서 일자리를 제공하던 굴뚝 산업이 점차 문을 닫으면서 그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됐다. 전쟁 전 유럽의 유대인들처럼 법적 강제로 살게 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 지역들이 본래의 의미에서 ‘게토’는 아니다. 그러나 이 지역들은 밀집된 청년 실업자들이 오늘날 개인적 또는 집단적으로 폭력을 분출하는 거점이 됐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실직을 겪고 있으며 소수 인종 출신이라는 점에서 유대감을 느낀다. 각 집단 구성원들의 실제 출신이 다를지라도 말이다. 이런 이유로 최근의 소요는 인종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문제로 봐야 한다.
이런 패턴의 대부분은 영국에서도 익숙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영국에서는 인종평등위원회를 중심으로 인종 모니터링, 기회 균등을 위한 실천 강령, 반反인종주의 교육 등 다양한 기술을 활용한 완화 조치가 일찍부터 개발됐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냉소가 널리 퍼져 있음에도, 이런 정책들이 비교적 성공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현지의 주요 대규모 고용주들이 평등 정책을 도입한 지역에서는 고용에서 ‘인종적’ 편중이 감소했다(그렇다고 해서 고급 일자리의 인종별 분배 문제 같은 장기적인 문제가 해결됐다는 뜻은 아니다). 반면 영국 내무부가 몇 년 전 올드햄 폭동을 촉발한 요인을 조사했을 때, 해당 지방 의회와 지역 보건 당국(둘 다 ‘구 노동당’의 안이한 텃밭이다)은 평등 교육과 소수 인종 고용 모두에서 형편없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던 것이 밝혀졌고, 그 결과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 후손인 현지 청년들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게토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상태였다.
프랑스에서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인종 모니터링과 사회적 약자 우대 정책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알려진 경우에도 그런 대책은 ‘앵글로색슨’의 위험한 발명품이고 명백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비난받고 영국과 미국에도 ‘게토’가 존재한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됐다. 이런 태도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공화주의의 유산과 직결돼 있다. 파리에서 권력을 장악한 뒤 왕당파의 영향을 받은 지방 반란에 직면한 혁명가들과 그 뒤를 이은 나폴레옹은, 중간 매개 조직을 허용하지 않는 국가-사회 관계 모델을 체계적으로 구축했는데, 가톨릭이나 왕당파들이 지지 기반을 얻을 여지를 없애려는 것이었다.(노동조합 조직을 금지한 르샤플리에법이 만들어진 것도 이 때다). 이 모델에 따르면, 한편에는 특별하게 구획된 도道를 운영하는 도지사들로 대표되는 국가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공화국의 평등주의 법률에 의해 동등하게 보호받는 시민 대중이 단일한 집단으로서 존재한다. 현대의 [프랑스]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공동체주의’라고 부르는 것, 즉 영국과 미국에서 국가가 인종별 ‘공동체’를 인정하고 각 ‘공동체 지도자’가 [국가와 시민 사이에서] 중간 매개 역할을 하도록 승인하는 경향을 비난할 때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이런 공화주의 전통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 인구 조사에는 출신 인종에 대한 질문이 없어서, 국가가 인종적 불이익을 해소하는 데 필요한 사회 정책을 개발할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프랑스 공화주의 전통에서 학교 시스템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도 작용했다. 19세기 후반 이전까지만 해도 초등 교육은 전적으로 가톨릭 교단이나 마을 신부의 손에 달려 있었다. 1870년 제3공화국이 수립되자 공화주의 지도자들은 승리를 굳건히 하고자 교회를 교육 역할에서 밀어내길 바랐고(경우에 따라서는 금지했다), 이를 위해 보편적 무상 의무 교육 프로그램을 야심차게 도입해서 국가가 비용을 부담하고 교육은 교사 양성을 위해 특별히 세워진 대학인 에콜 노르말의 졸업생들이 맡도록 했다. 교사들은 가톨릭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하지 말고 민주주의, 평등, 통일성이라는 시민적 미덕을 가르치도록 엄격히 명령받았다. 교직원과 학생 모두 자신이 속한 종교를 드러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1989년 다름 아닌 자유주의 좌파의 횃불인 〈누벨 옵세르바퇴르〉가 스카프로 머리카락을 가린 무슬림 여학생들을 공격하고 나섰을 때, 그 좌파 지식인들이 내세운 것이 바로 이 라이시테[정교분리] 원칙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분별력 없게도 전년도 대선에서 국민전선이 14퍼센트의 지지율을 기록했던 정치적 맥락을 무시했다.
이에 따라 지난 25년 동안 소수 인종들은 두 가지 동화주의 담론에 시달려야만 했다. 한편에서 국민전선은 문화적으로 프랑스인과 유사한 사람들의 정착만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라이시테의 투사들이 국가는 인종적 차이를 드러내는 것을 어떤 식으로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며 그랬다가는 공화주의 원칙에 기반한 사회적 결속을 해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우울한 상황이 바뀔 첫 징후가 간신히 나타난 것은 1997년 사회당, 공산당, 녹색당으로 구성된 이른바 ‘복수 좌파’ 연합이 선거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둔 뒤였다. 첫째, 고등통합위원회(소외된 사람들의 사회 통합을 돕기 위한 제안을 담당한다)에서 보고서를 발행해 고등통합위원회 자체가 영국에서와 같은 조직으로 교체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즉 고용 패턴을 조사하고, 기회 균등 지침과 이행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권한이 강화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사회부 장관은 이전에는 정치적 담론의 일부가 된 적이 없는 ‘인종차별’이라는 단어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문제삼았고, 고용센터를 운영하는 국립고용청 등의 행정부 기관에서 반인종주의 교육을 시작하는 등 몇 가지 대단히 온건한 정책을 추진했다. 다른 장관들도 경찰, 철도 같은 분야에서 인종적으로 더 균형 잡힌 채용 방식이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사회적으로 가장 영향이 컸던 조치는 특별 전화를 개설해 인종차별 피해자들이 일자리, 주택 임대, 서비스 등을 거부당했을 때 가해자를 익명으로 고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접수된 사건들은 시민권접근위원회라는 특별 조직이 조사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위원회에는 충분한 인력이 배정되지 않았고 폭주하는 신고 전화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실패했다. 기대감을 높여 놓고는 그에 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2005년 11월의 도시 소요 사태는 프랑스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좌절감이 표출된 것이다. 국가는 그들이 빈곤과 차별에 찌든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거의 제공하지 않았고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정부가 이번 폭동에 탄압과 미봉책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좌절감을 잠재우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 방리외의 청년들이 보여준 분노와 반항에 의미 있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실질적인 정치적 대안이 발전하기 전까지,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평등을 위한 청년들의 투쟁은 다양한 형태로 계속될 것이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폭동일 것이다.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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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Peter Fysh, 2005, ‘France: Roots of a Revolt’, Socialist Review 302 (December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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