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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와 선거 *

MARX21

  • 이 글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 당원들과의 토론에 힘입어 썼다. 그러나 오류가 있다면 모두 내 책임이다.

    출처: Joseph Choonara, “Revolutionaries and Elections”, International Socialism 179 (Summer 2023).

  1. 스코틀랜드 문제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이번 호에 실린 다른 글을 보라.
  2. Prasad, 2023.
  3. 이 글이 다루지 못한 중요한 사태 전개들이 유럽 바깥에 있다.
  4. Lenin, 1993, pp65 and 68-69.
  5. 이런 견해에 대한 고전적 설명은 Barker, 1987을 보라.
  6. 만약 영국 하원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전체 650석 중] 325석을 차지할 정도로 영국 노동계급이 급진화된 상황이라면, 이미 혁명적 상황이 도래했다고 볼 수 있고 그러면 당선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선거 강령에는 노동자 봉기가 포함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7. Sándor John, 2009, pp92-93.
  8. 혁명 전 러시아에서 이 원칙을 견지하기 위한 노력에 대한 설명은 Badayev, 1987을 보라.
  9. 여기에 나온 수치들은 존 루지가 공유해 준 연구 보고서에서 가져 온 것이다. 루지는 초기 IS와 그 전신인 사회주의평론그룹이 노동당 안에 있는 소규모 경향이었을 때는 트로츠키가 “간부의 원시 축적”이라고 부른 활동을 하면서 여러 회원이 노동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고도 지적한다. 그들 중 몇몇은 득표가 꽤 좋았는데, 흔히 30퍼센트 정도였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노동당 후보로 출마한 덕분이었다. 사실 이렇게 의석을 얻고 유지하려면 노동당의 주류적 정치를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은 거의 잊힌 일화가 있다. 1966년 총선에서 오랜 IS 회원인 시드 비드웰은 사우스홀에서 노동당 후보로 출마해 의석을 획득했다. 그는 인종차별주의에 영합하는 선거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투표일 몇 주 전 IS에서 제명됐다.
  10. 이런 관점도 1920년대 초 레닌이 영국의 신생 공산주의 운동에 조언한 것에 근거하고 있다. Lenin, 1993, chapter 9를 보라.
  11. 영국에서 신자유주의가 승리하는 기초를 놓은 건 1974~1979년 노동당 정부였다는 사실도 기억할 만하다. 당시 노동당 정부는 마거릿 대처 정부[1979~1990년]의 전임 정부였는데, 케인스주의에 대한 굳건한 신념을 내버리고 통화주의 정책을 펼쳤다. Cliff and Gluckstein, 1996, pp320-332을 보라.
  12.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운동은 종종 반자본주의 운동이나 대안 세계화(프랑스에서는 탈세계화) 운동으로도 불렸다.
  13. 앞으로는 제4인터내셔널통합사무국을 간단히 제4인터내셔널이라고 부르겠다.
  14. 노동자인터내셔널위원회와 달리 SWP는 노동당을 “자본주의적 노동자당”으로 본다. 즉, 노동당은 자본주의의 이익을 방어하지만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받고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계급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정당이다. 레닌의 저작에서 비롯한 이 규정 덕분에 우리 SWP는 노동당 개혁주의의 좌우 진자 운동을 보며 환상에도(좌경화할 때) 종파주의에도(우경화할 때)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Cliff and Gluckstein, 1996, pp1-2를 보라.
  15. 예를 들어 Callinicos, 2012a를 보라.
  16. Gramsci, 1998, p333.
  17. Trotsky, 1997, p18.
  18. 그 역사 초기의 많은 경험은 Hallas, 1982에 상세히 설명돼 있다. 입당 전술로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중간주의 조직”이라고 부르는 당에 혁명가들이 입당하는 형태가 흔했다. 여기서 중간주의 조직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존재한 개혁주의 조직들을 뜻하는데, 그 정당들은 사태 전개의 압력에 밀려 최소한 말로는 혁명에 헌신한다고 밝혔지만, 실천에서는 개혁과 혁명 사이에서 동요했다. 이 전술은 트로츠키가 (몇몇 경우에) 혁명적 경향을 키우기 위한 전술로 제안한 것이었다. 이 기간에, 아주 작은 영국 트로츠키주의 좌파가 중간주의 조직인 독립노동당ILP에 입당해 수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했다. 그러나 그 혁명가들이 ILP에 동화되고 ILP를 혁명 쪽으로 설득해 낼 수 없음이 명확해졌는데도 나오려 하지 않으면서 그 트로츠키주의 좌파는 약화됐다. 입당 전술을 사용해 매우 제한적인 성공을 거둔 사례나 실패했지만 곱씹어 볼 사례에 대해서는 Cliff, 1993, pp224-234를 보라.
  19. 밀리턴트 경향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노동당에서 쫓겨나면서 두 그룹으로 분열했다. 하나는 ‘소셜리스트 어필’ 그룹으로, 1992년 창립 때부터 노동당에 계속 남아 있으려 했지만, 결국 2021년에 스타머에게 축출당했다. 최근에 소셜리스트 어필은 마르크스주의를 비교적 교조적으로 주장하는 ‘마르크시스트 소사이어티’를 조직해 대학가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다른 하나는 사회당으로, 이제는 노동당을 철저한 자본주의 정당이라고 비난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사회당은 지금 ‘노동조합-사회주의자연합TUSC’을 장악하고 있다. 셋째 그룹인 ‘소셜리스트 얼터너티브’는 차별 반대 정치에 대한 입장을 두고 사회당에서 떨어져 나온 단체다.
  20. McGregor, 1986, p69에서 인용.
  21. McGregor, 1986, p61에서 인용.
  22. 이것은 클리프의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소련이 없는 지금도 여전히 의미가 있음을 보여 주는 여러 사례 중 하나다. 이 이론은 경제를 전면 국유화하면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자력·자기 해방을 이루지 않아도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도전했다. Cliff, 1996을 보라.
  23. 지면 제약으로, 이탈리아의 재건공산당(‘리폰다치오네 꼬무니스따’), 포르투갈의 ‘좌파 블록’, 노르웨이의 적색당처럼 중요한 여러 사례는 이 글에 다루지 않았다.
  24. Callinicos, 2012a, pp12-14를 보라.
  25. 그리스에는 공산당 전통에서 뻗어 나온 정당이 여럿인데 오랫동안 따로따로 선거에 출마하며 활동했고 선거제도가 영국보다 소규모 정당에 훨씬 덜 가혹하다. 이것이 시리자가 처음부터 어느 정도 선거에서 성과를 얻는 데 도움이 됐다. 이런 성과는 시리자가 그 뒤에 더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26. Garganas, 2015을 보라.
  27. 예를 들어 Davanellos, 2014를 보라.
  28. Internationalist Workers’ Left, 2015.
  29. Kouvelakis, 2015
  30. 쿠벨라키스는 치프라스의 항복을 제1차세계대전 개전 직후 독일 사회민주당이 제국의회에서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진 것[즉, 자국의 전쟁 노력을 지지한 것]에 빗댄다. Garganas, 2015, p20을 보라. 레닌은 사회민주당 기관지에서 이 찬성 투표 소식을 읽었을 때, 이것은 독일 군부가 날조한 것임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한탄스럽게도, 시리자의 굴복은 훨씬 더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31. Garganas, 2012, p199에서 인용.
  32. Callinicos, 2012a, p19.
  33. Callinicos, 2012a, p21.
  34. Sierra, 2017과 2022를 보라.
  35. Barriere, Durgan and Robson, 2015, p19에서 인용.
  36. Barriere, Durgan and Robson, 2015, pp25-27.
  37. Barriere, Durgan and Robson, 2015, p28.
  38. Bravo, 2016에서 인용.
  39. Sierra, 2017, p59.
  40. Sierra, 2022, p153에서 인용.
  41. https://twitter.com/PabloIglesias/status/1227684462718341122를 보라.
  42. 나의 번역. 원문은 www.anticapitalistas.org/wp-content/uploads/2022/06/III-Congreso-Anticapitalistas-Documentos-p%C3%BAblicos.pdf에서 볼 수 있다.
  43. Bornost, 2007
  44. www.marx21.de/die-linke-wie-weiter-nach-dem-wahldebakel를 보라
  45. 바겐크네히트는 책 《독선》을 써서 자신이 “라이프스타일 좌파”와 “정체성 정치”라고 부르는 것을 격하게 비판했다.
  46. Connolly, 2018.
  47. Buchholz, Mosler and Mosler, 2006. 이것은 별 생각 없이 던지는 말이 아니었다. Nachtwey, 2009, pp33-34에도 아주 유사한 구절이 나온다.
  48. 여기서 쓰인 “중간주의”에 대해서는 각주 19를 보라.
  49. 나중에 전개된 이런 상황을 보면, 이 시기 가장 유능한 독일 혁명가 중 한 명인 클라라 체트킨이 룩셈부르크가 USPD와 결별한 것을 왜 너무 이른 것이었다고 봤는지 쉽게 알 수 있다. Birchall, 2016, p189.
  50. Harman, 1982, pp36, 55, 63, 65-95 and 191-218; Broué, 2004, pp189-225.
  51. 이런 활동 방식을 보여 주는 것으로는 제인 맥컬레비의 조직 전략을 찬양하는 Stierl, Billor and Dormann, 2019를 보라. 반대로 이런 활동 방식을 비판하는 것으로는 Brook, 2022를 보라.
  52. 이 정식은 존 리즈가 SWP 당원으로 선거 활동 지도를 담당하고 있을 때 발전시킨 것이었다. 예컨대, Rees, 2002, p63을 보라.
  53. Trotsky, 1974, p93.
  54. Trotsky, 1974, pp93-94.
  55. Trotsky, 1974, p94,
  56. Trotsky, 1974, p96.
  57. Trotsky, 1975.
  58. Rees, 2002, p64.
  59. 이 조직의 전체 이름은 ‘리스펙트 단결 연합’이었다.
  60. 새로 생긴 런던 시장직을 처음으로 선출하는 이 선거에서 리빙스턴이 승리한 것은 블레어에게 굴욕이었다. 그러나 리빙스턴의 첫 임기가 끝나는 2004년에 블레어는 리빙스턴에게 복당해서 노동당 후보로 나서 달라고 요청했다. 노동당에 강하게 집착하는 실용주의자 리빙스턴은 이를 수용했고, 조금 줄어든 득표로 재선에 성공했다. 리빙스턴의 궤적에 대해서는 Kimber, 2007을 보라.
  61. 사회당의 이언 페이지도 그리니치 루이셤 선거구에서 4.2퍼센트를 얻었다.
  62. SWP 당원들은 해크니 사우스 앤 쇼어디치 선거구에서 4.6퍼센트를 얻었고 토트넘에서 3.7퍼센트를 얻었다.
  63.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리즈 데이비스였다. 그는 전 노동당 지방의원이자 전국집행위원회 위원이었고, 2001년에 SA 의장이 됐다. 데이비스는 그 9개월 뒤에 사임했는데, SWP가 SA를 지배하고 있고 9·11 테러 공격 후 전쟁저지연합 건설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는 것이 사임의 이유라고 말했다.
  64. 갤러웨이는 좌파로서의 믿음직함이 토니 벤, 다이앤 애벗, 제러미 코빈 같은 인물들에 견주면 여러모로 약했다. 갤러웨이는 노동당 좌파 의원들의 모임인 ‘사회주의 캠페인 그룹’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는 마거릿 대처의 종말을 초래하는 데 일조한 1990년 주민세 반대 운동이 일어났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광인들과 아나키스트와 그밖의 극단주의자들, 주로 SWP 소속의 이 자들은 시종일관 큰 소란을 일으키려고 뛰쳐나온 것이다.” Harman, 2008, p32에서 인용.
  65. 처음에 리스펙트는 녹색당과 선거 협정을 맺으려 애썼지만 퇴짜를 맞았다.
  66. 이 지역 주민의 약 3분의 1이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밝힌다. 노스이스트 런던 선거구처럼 무슬림 유권자가 훨씬 적은 지역에서 리스펙트는 과거 SA보다 단 몇 퍼센트포인트 많이 득표했다.
  67. 이 문서는 www.whatnextjournal.org.uk/Pages/Politics/RespectDebate.html에서 볼 수 있다.
  68. Harman, 2008, pp33-37을 보라.
  69. 야쿱은 2012년에 갤러웨이와 결별한 인사 중 한 명이다. 그때 갤러웨이는 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안 어산지에게 제기된 강간 혐의에 대해 그저 “성적으로 부적절한 에티켓”일 뿐이라고 했다. 제4인터내셔널은 그보다 2년 빨리 갤러웨이를 떠났는데 당시 갤러웨이가 제4인터내셔널이 지지하는 SSP와 상의하지도 않고 스코틀랜드에서 출마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70. 이 표현 자체는 Smith, 2002a에 나온다.
  71. 어떤 면에서는 SWP가 잠깐 참여했던 ‘노동조합-사회주의자연합’(이하 TUSC)이라는 가장 최근의 조직도 이 개념에 잘 들어맞는다. TUSC는 처음에는 사회당, SWP, 철도해운교통노조RMT 지도부의 연합 조직이었다. TUSC는 2010년에 결성됐고, SWP는 2017년에 탈퇴했다. TUSC는 선거 조직으로서는 제한적인 성공만 거뒀다. 게다가 코빈이 노동당 대표가 되자, 노동당에 대항하는 좌파적 선거 플랫폼으로 출마하는 것이 의미 있는 결과를 낳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졌다. 2022년 RMT가 공식적으로 탈퇴하면서 TUSC는 주되게는 사회당의 외피로 얼마간의 개인 지지자가 남아 있는 조직이 됐다. 그러나 사회당은 때때로 TUSC를 공동전선에 견주기도 한다. Heemskerk, 2019를 보라.
  72. ISM은 2006년에 스스로 해산했다.
  73. Smith, 2002b, pp44-45. 이 점에 대해서는 Smith, 2003도 보라. 스미스의 정치 이력은 흥미롭다.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뒤에서 논의할 반자본주의신당(이하 NPA)을 창립하는 혁명적공산주의동맹(이하 LCR)에서 활동했다. LCR이 NPA를 만들 때 스미스는 LCR에서 탈당하고 좌파전선에 합류했다. 그러다가 룩셈부르크로 가서 좌파당The Left의 지도자가 됐다. 이런 궤적 속에서 그는 좌파 개혁주의에 근접하며 그것에 반자본주의적 포장지를 입히기도 했다. 10년 전에 쓴 주목할 만한 글에서 그는 프랑스 공산당과 시리자 같은 정당은 개혁주의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Smith, 2013을 보라.
  74. McKerrell, 2002, p55를 보라.
  75. Smith, 2002b, p47.
  76. Smith, 2003, p73.
  77. Smith, 2003, p74.
  78. Callinicos, 2003.
  79. Gonzalez, 2006.
  80. 이 사태 전개에 대해서는 Davidson, 2008을 보라.
  81. ‘일어나라’는 SWP에서 분열해 나간 소규모 조직인 국제사회주의자그룹(스코틀랜드)이 2015년에 결성한 조직이다. [조직명인 ‘일어나라RISE’는 영어 단어 Respect(존중), Independence(독립), Socialism(사회주의), Environmetalism(환경주의)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 옮긴이]
  82. Wolfreys, 2015, p38.
  83. Bensaïd, Crémieux, Duval and Sabado, 2003을 보라.
  84. 그러나 NPA 창당 대회의 당명 결정 투표에서 많은 대의원이 [“반자본주의신당” 대신에] “혁명적 반자본주의당”을 지지하면서 접전이 벌어졌다.
  85. Callinicos, 2008, pp97-101를 보라.
  86. Sabado, 2009, pp145-146.
  87. Callinicos, 2012b, p23.
  88. Godard, 2013, p207.
  89. Callinicos, 2012a, p21; Wolfreys, 2012, pp39-47.
  90. NPA도 이 연합체 구성을 위한 대화에 참여했지만 사회당이 여기에 올라타자 조직으로서 참여하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91. https://lanticapitaliste.org/actualite/politique/npa-un-pas-en-arriere-pour-des-pas-en-avant 를 보라.
  92. Molyneux, 2022, pp27-28.
  93. 사회당은 [밀리턴트 경향과 연관된] 아일랜드 노동자인터내셔널위원회 소속 단체였다.
  94. Molyneux, 2022, p29.
  95. 아일랜드 노동당은 아일랜드 최대 노조인 서비스산업전문기술직노동조합SIPTU 관료들과 연결돼 있기도 한데, SIPTU 지도자들은 20년 넘게 사용자들과 “동반자 관계”를 맺어왔다.
  96. Allen, 2021a.
  97. 북아일랜드는 남아일랜드와는 다른 자체의 정치 동학이 있지만, 통일된 사회주의 아일랜드를 지지하는 PbP는 여기서도 인상적인 결과를 얻었다. [PbP 소속] 게리 캐럴이 2016년 벨파스트 웨스트에서 1위를 하며 북아일랜드 의회 의석을 차지했고, PbP는 몇 개의 지방의회 의석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약진은 PbP가 수년 동안 여러 쟁점을 둘러싸고 단호한 운동을 벌이고 주류 정당들이 약화된 것을 반영한다. 또 PbP가 남·북 아일랜드 양 국가 모두의 본질에 비판적이고, 민족 문제에 대해 선명하고 독특한 입장을 발전시킨 것도 한몫했다. PbP는 개신교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에 단호히 반대하고, 노동계급의 투쟁을 통한 통일 아일랜드를 지지한다. Molyneux, 2022, p34를 보라.
  98. Molyneux, 2022, pp35-36.
  99. www.letusrise.ie/featured-articles/rise-joins-pbp
  100. 이에 대해서는 예컨대 Allen, 2021b를 보라.
  101. Choonara, 2023.
  102. Socialist Worker, 2023.
  103. 코빈주의의 흥망에 대한 기록으로는 Thomas, 2017, Kimber, 2020, and Kimber, 2021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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