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와 선거 *
2 제러미 코빈이 노동당의 의사를 거슬러 [다음 총선에서 런던] 이즐링턴 노스 선거구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한다면(지금으로서는 그럴 것 같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선거 참여를 둘러싼 논의는 대단히 격화될 것이다(코빈은 한때 노동당의 대표였는데, 현재 당대표인 스타머는 코빈이 노동당 후보로는 총선에 출마할 수 없다고 이미 밝힌 상황이다). 또 다른 저명한 노동당 좌파 의원 다이앤 애벗도 노동당으로부터 의원직 정지 징계를 받고 있는 중이다(애벗이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부적절하게 말한 것을 스타머가 집요하게 이용한 결과다). 3
2023년에 일어난 몇 가지 사건은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선거 활동에 관여할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는 데 일조했다. 그 사건들로는 영국 노동당이 키어 스타머의 지도하에서 계속 우경화하는 것, 5월 지방선거에 무소속 좌파가 여럿 출마한 것, 초대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 니컬라 스터전이 사임한 것(그 요인의 하나는 스코틀랜드 독립을 이루려는 그녀의 방식이 힘을 다한 것이다) 등이 있다. 우리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이하 SWP)과 더 광범한 혁명적 좌파는 선거 문제를 고려할 때 단지 감感이나 임시방편으로 길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선거 활동에 관여하려 했던 혁명가들의 역사적 경험에서도 배워야 한다. 이 글의 목적은 유럽에서 있었던 그런 경험을 평가해서, 선거 활동을 둘러싼 논의의 이론적 수준을 높이고 다음의 개입 때는 그와 관련된 더 깊은 문제들을 두고 토론과 논쟁이 왕성하게 벌어지도록 하는 것이다.선거의 ABC
선거 활동에 대해 논의할 때 고려해야 할 두 가지 영역이 있다. 첫째는 선거에 대한 혁명가들의 일반적 입장과 관련된 영역이다. 둘째는 지난 30년간 영국은 물론 다른 여러 나라에서 축적돼 온 경험들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관련된 영역인데, 그 경험들은 각각 구체적인 정치 국면에서 전개됐다.
첫째 영역, 즉 선거에 대한 혁명가들의 기본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100여 년 전에 레닌이 《좌파 공산주의 — 유치증》(1920) 등의 저작들에서 잘 정리해 설명했다.
의회주의는 “역사적 폐물”이 됐다. 이 진술은 선전宣傳의 말로는 진실이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듯이 의회주의를 실질적으로 극복하려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 … 우리에게 폐물이라고 해서 노동계급에게도 폐물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 우리는 노동계급에게 쓰디쓴 진실을 말해야 한다. 그들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편견과 의회주의적 편견을 있는 그대로, 즉 편견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노동계급 전체의 계급의식과 태세의 실제 상태를 냉철하게 따라가야 한다. … 부르주아 의회와 여타 반동적 기구들을 해체해 버릴 수 없는 조건에서는, 우리는 그 안에서 활동해야만 한다.레닌의 조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혁명적 봉기로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사회주의자들은 선거에 관여하려 해야 하고 가능한 곳에서는 후보를 출마시켜야 한다. 의회를 통한 개혁에 어떤 환상이 있어서가 아니다. 의원이 된 혁명가의 구실은 사회주의를 선전하고, 노동계급의 투쟁성과 자신감을 높이기 위해 선동하고, 의회 바깥 활동에 주된 기반을 둔 혁명적 대중정당 건설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런 활동의 궁극 목적은(자본가 계급과 그들의 기구들을 혁명적으로 전복하는 과정의 일부로서) 의회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훨씬 더 풍부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세우는 것이다. 이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는 대중적 노동계급 투쟁에서 탄생할 것이고, 절정에 이르면 노동자평의회를, 즉 소비에트와 유사한 기구들을 신속하게 건설할 수 있다.
그럼에도 혁명가들은 레닌이 주장한 방식으로 의회를 활용해야 한다. 혁명적이지 않은 시기에 의회제 민주주의하에서 노동자 대중은 의회를 통한 개혁의 가능성에 환상을 갖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의원[이 된 혁명가]들이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중요한 호민관이 될 수 있고, 의회와 선거가 사회주의자들에게 유용한 연단이 될 수 있다. 혁명적이지 않은 시기에 선거에 출마하는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정치를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가인 후보에게 투표하려는 유권자는 반드시 그 당의 혁명적 강령 전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 되면 의회를 “역사적 폐물”로 여기는 노동자들에게만 지지를 얻게 될 것이다. 그 대신에, [선거에 출마하는] 혁명가들은 “최소강령”을 주장해야 한다. 즉,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를 거스르기 시작할 만큼 파급력이 크고 상당한 개혁을 쟁취하기 위해 대중적 노동자 투쟁을 벌이자고 주장해야 한다. 그런 투쟁이 전진하는 만큼 강령도 더 급진화할 것이다. 혁명가의 선거 강령에는 혁명가들이 동의할 수 없는 조처, 예컨대 이민 통제 도입 같은 것이 담겨서는 결코 안 된다.
7 이에 더해, 의석을 얻은 혁명가들은 친자본주의 정당들(이나 그리 되고 있는 정당들)과 무원칙한 동맹을 맺거나 연립 정부를 구성하지 말아야 한다. 볼리비아의 어느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강령이 노동계 출신 각료를 두고 “부르주아지를 위한 속물 뚜쟁이”라고 길이 기억될 묘사를 했듯이 말이다. 8 선거주의의 압력을 감안해, 혁명적 당 소속의 의원단은 그들에게 노동자들의 활력적 투쟁에 참여하라는 상쇄 압력을 가하는 더 넓은 조직에 종속돼야 한다. 9
혁명적이지 않은 시기에 혁명가들이 의석의 다수를 차지하고 정부를 구성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레닌이 굳게 지키고 레온 트로츠키 같은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견지한 이런 유형의 입장은 일반 원리로서 여전히 타당하다. 그렇지만 지난 100년 정도 동안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들은 큰 신뢰를 받으며 선거에 후보를 출마시킬 정도로 규모가 크지도 않고 노동계급에 내린 뿌리가 깊지도 않았다. 1976~1978년에 국제사회주의자들(이하 IS, 1977년에 SWP가 됐다)은 선거에 후보들을 출마시켰는데, 당시는 노동당 정부가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때였다. 이 공격은 1960년대 말부터 전개된 치열한 계급투쟁 물결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다. IS는 몇 번의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 출마해 0.5~1.9퍼센트를 득표했다. IS 회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 폴 풋이 버밍엄 스테치퍼드에서 1퍼센트밖에 못 얻어, 당혹스럽게도 다른 좌파 단체인 국제마르크스주의자그룹의 후보보다 적었다. IS의 또 다른 후보는 1978년 4월 램버스 센트럴에서 1퍼센트를 얻어 노동자혁명당의 후보와 ‘사회주의자 단결’의 후보 모두에게 조금 뒤졌다.
10 오늘날 SWP가 후보를 출마시킨다 해도 아주 다른 결과를 얻을 것 같지는 않다. 처참한 선거 실패는, 노동자 투쟁을 전진시키고 노동계급 내 혁명가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거의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이런 결과가 나온 후 던컨 핼러스는 선거 활동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하는 문서 초안을 SWP 지도부에 제출했다. “우리가 주되게 표를 얻기 위해 선거 활동을 시작한 건 아니지만,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 시작한 것도 확실히 아니었다.” 이 문서의 결론은, 적어도 좌파의 도전이 실질적이지 않은 압도 다수의 선거구에서 SWP는 “보수당에 반대해 노동당에 투표”하라고 주장하면서 노동당 정책에 대한 비판도 동시에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79년 총선 때에 이르면, SWP에서 선거에 직접 출마하는 노선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11 공감과 비판 사이의 엄밀한 균형은 노동자들의 의식 상태, 노동당의 정책과 지도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지만, 노동당 개혁주의라는 전략에 대한 일반적 비판은 누가 그 당을 이끄는지와는 무관하게 필요하다. 이런 관점은 다른 맥락에 놓인 다른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좌파 개혁주의 정당에도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 우리 SWP는 노동당 왼쪽에 믿을 만한 대안이 없는 곳에서는 노동당 후보에게 투표하라고 주장하곤 했다(SWP가 광범한 선거 연합의 일원으로 선거에 참여한 예외적 시기가 있는데, 이는 뒤에서 다룰 것이다). SWP는 이것이, 가장 정치화돼 있지만 노동당에 투표하는 성향이 있는(또는 그랬던)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기초적 행위라고 본다. SWP의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보수당을 정부에서 걷어차 내거나 재집권하지 못하게 할 표를 제공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노동계급을 동원하는 파업과 여타 투쟁들에 연대를 제공해 주기 바랍니다.’ 여기에 왜 노동당 개혁주의가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지 설명하는 선전을 결합시킨다.사회민주주의의 우경화
12 코빈이 당대표를 맡은 시절[2015~2020년]은 노동당이 우경화 행진에서 잠깐 벗어난 예외적 시기였다. 코빈 지도부는 왼쪽으로 기울었지만, 노동당 개혁주의의 논리와 그것의 의회 정치 강조와 결별하지는 않았다. 코빈주의가 몰락하고 스타머가 당대표로 선출되자 코빈 이전의 패턴이 재개됐다.
혁명가들이 선거 활동을 고려할 때 둘째 요소는 훨씬 더 구체적인 것이다. 바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다른 지역에도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유럽에 초점을 둔다)가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시기에 우경화하는 경향을 보이며, 노동계급 내 자신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갈수록 노동자들의 염원과 공공연히 충돌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영국에서 이런 패턴은 최근 수십 년 동안 심해졌다. 특히,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이 이끈 “신노동당”이 신자유주의 정책 컨센서스를 노골적으로 받아들인 시기에 더 그랬다.이런 패턴은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왼쪽에 상당히 넓은 공간이 창출됐고, 혁명가들은 다양한 전술을 활용해 그 공간을 채우려 했다. 크게 보아, 그런 도전을 할 만한 세력들이 창출된 역사적 국면은 두 차례 있었다.
13 SWP가 참여하고 있는 국제사회주의경향 소속 단체들과 제4인터내셔널통합사무국 소속 단체들처럼 극좌파 중 가장 외향적인 세력들은 이렇게 자본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문제제기와 운동이 부활하는 덕분에 좌파의 재편을 위한 환경이 생겨났다고 봤다. 14 좌파의 재편은 다양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혁명적 조직들의 잠재적 재편, 혁명가와 비혁명가를 포함하는 광범한 좌파적 선거 정당, 둘 사이의 다양한 중간 형태들(‘반자본주의’ 관점을 공통으로 하는 여러 조직들)이 그런 것들이다. 그 사례들은 뒤에서 얘기할 텐데, 그중에는 영국의 밀리턴트경향(나중에 사회당이 된다)이 속한 국제 모임인 노동자인터내셔널위원회에서 비롯한 조직들도 있다. 그들도 좌파의 재편 논의에 참여했는데, 그들이 이 논의에 이끌리게 된 이유에서 반자본주의적 환경이 새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핵심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노동당 같은 조직들이 혁명적 대중정당의 잠재적 기반이 될 정당에서 단도직입적인 친자본가 정당으로 변모했고 그 덕에 새로운 노동자 정당이 생겨날 공간이 열렸다는, 잘못된 견해가 더 큰 이유였다. 15
첫째 국면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의 분출과 함께 찾아온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다. 2001년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 벌어진 중요한 대중운동도 이 시기에 포함된다.좌파가 사회민주주의에 도전한 둘째 국면은 2008~2009년 경제 위기 뒤에 찾아왔다. 이번 국면은, 선진 자본주의 세계 곳곳에서 긴축정책이 채택된 것, 그중에는 주류 좌파가 집권한 나라도 있었던 것, 긴축이 낳은 곤경과 자본주의가 야기한 장기적 불평등에 맞서 커다란 저항 운동이 일어난 것을 배경으로 했다. 이런 맥락의 추동력을 받아, 그 투쟁들에 정치적 표현체를 제공하려는 새 프로젝트들이 생겨나고, 기존 급진좌파 선거 조직들 중 일부의 인기도 상당히 상승했다.
두 국면 모두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여러 사회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났지만, 노동자 투쟁이 지속되는 수준은 그 이전 시기들보다 비교적 낮은 채였다는 점이다. 2008~2009년 위기 후의 그리스나 2010년과 오늘날[2023년]의 프랑스 같은 일부 예외가 있다. 뒤에서 논의하겠지만, 이런 차이는 이렇게 예외적 맥락에 놓인 급진좌파 조직들이 돌파구를 연 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렇더라도 아직은 1968년 프랑스 총파업부터 1974년 포르투갈 혁명까지의 시기에 견줄 만한 수준으로 계급투쟁과 노동계급의 자신감이 전반적으로 고양되는 상황은 없었다.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혁명적 상황이 전개된 제1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시기에 못 미치는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이 점이 중요한데, 노동자들이 스스로 벌이는 행동의 수준이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의 영향력이 어떨지를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기 때문이다.
둘째 문제는 첫째 문제와 연관돼 있는데, 사회민주주의의 왼쪽에 열린 공간이 혁명가들에게만 열려 있는 건 아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혁명적 조직들의 규모를 고려하면, 혁명가들이 홀로 그 공간을 채울 가능성은 낮기도 했다. 1990년대 말, 중도 좌·우파 정당들이 수용한 신자유주의 컨센서스를 거부하는 정서가 널리 확산되며 정치 양극화가 나타났고, 그 덕에 다양한 급진좌파가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에 도전할 기초가 생겨났다. 이 도전은 자본주의가 원리적으로는 개혁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그 결과, 혁명가들은 새로 등장하는 좌파 개혁주의 조직·조류들과의 관계를 두고 입장을 정해야 하는 처지에 흔하게 놓였다. 2015년 코빈이 노동당 대표가 되면서 발전한 코빈주의는 언뜻 보기에는 이런 좌파 개혁주의 정당의 성장과는 다른 예외처럼 얼핏 보일 수 있다. 영국에서는 노동당 개혁주의가 회복 탄력성이 있고, 이것이 한 요인이 돼서 코빈의 부상 이전에 있었던 좌파 재편 노력들이 실패했고, 사회민주주의 바깥의 급진좌파가 역사적으로 비교적 약하고, 선거제도가 “승자 독식형” 소선거구제여서, 새로운 좌파 개혁주의 조직이 등장하기가 녹록지 않다. 그렇지만 코빈주의도 급진좌파의 도전이 주되게 이런저런 버전의 좌파 개혁주의로 나타났다는 더 광범한 패턴에 들어맞는다. 다만 이 경우에는 기성 사회민주주의 정당, 그것도 당내 우파가 매우 견고한 당 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개혁주의의 끈질김 좌파 개혁주의의 부상은 더 큰 쟁점, 앞으로의 논의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쟁점을 반영한다. 개혁주의 문제는 다양한 개혁주의 정당의 실패와 배신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개혁주의가 조직으로 구현돼 있더라도 근원적으로는 특정 조직이 낳은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하 노동계급 의식의 가장 흔한 형태가 낳은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노동자들, 즉 다른 형태의 사회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자본주의적 힘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 힘들을 실질적으로는 거의 통제할 수 없다고 여기는 노동자들이 받아들이는 상식에는, 겉보기에 자연스러운 현존 형태의 체제를 통째로 거부할 수는 없다는 것이 포함된다. [동시에] 노동자들은 흔히 체제의 일부 측면들을 거부하며 그것들은 도전받거나 변화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자신의 투쟁 경험이나 주위 사람들이 전해 준 경험에 근거해 그런다. 그래서 서로 모순되는 생각들이 뒤섞인 혼합물이 생겨나는데,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를 두고 “모순된 의식”이라고 불렀다.
18 그렇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혁명에 훨씬 못 미치는 투쟁들에 참여하면서 노동자들이 그들 스스로의 집단적 노력으로 개혁을 성취할 수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 그렇지만 역으로, 개혁을 바라는 강한 염원은 노동당 같은 조직들을 통해 “위로부터 개혁”을 도입하려는 노력 쪽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이 반격을 시도할 때는 대부분 체제의 “개혁”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노동자들의 의식은 혁명적 상황에서조차 개혁주의적인 것에서 혁명적인 것으로 하룻밤에 홱 바뀌지는 않는다. 1905년 러시아 혁명 같은 반란과 그 후에 벌어진 많은 반란은 “개혁”을 요구하며 시작됐다. 트로츠키가 1917년 혁명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말했듯이, 노동자들은 “점진적 근사치” 과정, 즉 개혁주의를 통하는 길이 모두 소진되고 혁명가들이 관여해 노동자 대중을 설득해 내는 과정을 거치며 혁명적 사상으로 나아간다.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장기 호황 시기에 견줘, 체제가 개혁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도, 주류 정치 지도자들이 개혁을 제공하려는 의지도 크게 감소했다는 것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그럼에도 노동계급의 개혁주의적 의식은 지속된다. 이 때문에, 개혁이 성취될 여지가 줄었어도 개혁주의 경향·조직은 회생할 수 있는 것이다.
좌파의 다양한 선거 개입
혁명적 좌파가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의 왼쪽 영역을 온전히 차지할 만큼 규모와 사회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는 개혁주의적 노동자, 개혁주의 지도자, 개혁주의 조직들과 함께 선거에 도전하기로 모종의 협정을 맺는 것은 흔히 매력적이다. 이는 선거 활동에 국한된 것만도 아니다. 사실 혁명가들의 많은 활동에는 그런 협정이 수반되고, 그런 협정은 뒤에서 논의할 “공동전선”의 모든 기초다. 예컨대, SWP는 파시즘 반대 활동을 할 때, 꼬박꼬박 개혁주의적 인물들과 개혁주의적 노동자들을 동참시키면서도, 동시에 그 결과로 벌어지는 운동 안에서 전투적 전술이 채택되도록 추진한다. 그러나 선거라는 맥락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선거 영역은 개혁주의자들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며 가장 잘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특별한 난제가 생겨난다(그것이 무엇인지는 앞으로의 논의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어느 선거 연합체에서 혁명가들이 우세한 경우, 부활하거나 회생한 개혁주의 세력들은 외부의 압력을 강력하게 행사해서 그 선거 연합을 짜부라뜨리거나 혁명가들이 선거주의에 순응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 개혁주의자들이 우세한 경우, 개혁주의는 내부의 압력을 강력하게 행사한다. 이 압력은 선거 성적이 좋을수록 흔히 스스로 더 강해져서, 혁명가들의 순응을 촉진한다. 혁명가와 개혁주의자가 비등한 경우, 개혁주의는 흔히 안팎의 압력을 행사한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최근 수십 년 동안 혁명가들이 선거에 관여할 때 채택한 크게 보아 세 가지 유형의 방식을 검토하면서, 앞서 말한 개혁주의의 압력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 보여 줄 것이다. 그 세 가지 유형은 다음과 같다. (1) 명시적으로 개혁주의 지향을 밝히는 조직에 혁명가들이 들어가 관여하는 방식. (2) 혁명가들이 범좌파 개혁주의 선거 연합체에 들어가되 그 안에서 독립성을 유지하며 “특별한 종류의 공동전선”을 창출하려 애쓰는 방식. (3) 혁명가들이 개혁주의 조직과 혁명적 조직을 구분하는 낡은 공식을 뛰어넘는다고 주장하는 “전략적 경계가 모호한” 조직을 만들고 처음부터 획득한 주도권을 유지하려 애쓰는 방식.
개혁주의 정당 속 혁명가들
19 특히, ‘밀리턴트 경향’은 1960년대부터 노동당에 관한 태도를 발전시켰는데, 그에 따르면 노동당 입당이 단지 회원을 모집하기 위한 단기적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중심 활동이었다. 20 여기에 전제된 것은 계급투쟁의 수위가 올라가면 노동자들이 정치 행동의 필요성을 알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노동자들이 일단 정치 행동의 길에 들어서면 나아갈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노동조합들이 쌓아 올린 그 조직을 변화시키려 애쓰는 것, 즉 노동당을 노동자들의 필요에 맞게 개조할 마음을 품고 노동당에 입당하는 것이다.” 21 이런 생각에다가, “경제의 80~85퍼센트를 지배하는 200개의 독점 기업, 은행, 보험사를 국유화하는 수권법을 의회에서 제정”하는 것을 통해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개시될 수 있다는 생각이 결합됐다. 22 [수권법은 누군가에게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률이다. 예컨대, 좌파 정부가 의회의 승인을 얻지 않고도 기업을 국유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SWP는 두 견해, 즉 지속적인 대중 투쟁에 돌입하는 노동자들이 노동당[의 변화]을 중심 과업으로 삼을 것이라는 견해와 경제 국유화가 사회주의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견해 모두에 반대했다. 23
혁명가들이 명시적인 개혁주의 정당에 입당하는 방식은 영국에서는 역사가 길다.입당 전술은 코빈[이 노동당 대표로 있던] 시절에 얼마간 되살아났다. 몇몇 소규모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이 노동당에 들어갔고, 그 전부터 노동당 안에서 있던 이들도 코빈 지지자들을 끌어당기려 애썼다. 그러나 코빈주의 지지자들이 노동당 개혁주의와 조직적으로 분열한 실질적 사례는 없었다. 노동당에 입당한 혁명가들의 염원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리고 그들이 얻은 자그마한 이익이 무엇이었든 간에, 코빈주의를 지지하는 대중을 혁명적 정치로 설득해 내며 떠오른 그룹은 하나도 없었다.
24 세 사례가 보여 주는 바는, 정치 양극화가 벌어지는 맥락에서 좌파 개혁주의 조직이 엄청나게 급성장할 수 있지만, 또한 집권에 가까워지거나 집권하기 시작하면 혹독한 시험대에 오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조직들의 개혁주의적 성격을 반영한다. 즉, 말로는 이렇게 저렇게 주장하겠지만, 의회 바깥의 대중적 활동에 대한 열정을 선거 승리의 지속에, 자본주의 국가를 통한 개혁 획득 시도에 체계적으로 종속시킨다. 이런 조직의 지도자들은 사회민주주의를 기존 정당들보다 더 좌파적인 기초 위에서 다시 세우려고 (종종 드러내 놓고) 애쓴다. 비록 자본주의가 개혁을 허용할 능력이 꽤나 제약된 조건인데도 말이다. 25
영국의 경험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전통적 사회민주주의보다 더 좌파적인 개혁주의 조직 안에서 활동한 혁명가들의 경험이다. 이 글에서는 주목할 만한 사례 셋을 검토한다. 그리스의 시리자, 스페인의 포데모스, 독일의 디링케(좌파당)다. 세 정당은 각각 2008~2009년 경제 위기 이후 시기에 지지가 상승했다.26 2010년에 유로존 위기가 터지고 뒤이어 격렬한 계급투쟁이 벌어지면서, 오래된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2009년부터 집권하고 있던 사회당이 폭삭 주저앉았고 시리자가 지지를 확대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2015년 마침내 시리자의 [대표]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총리가 됐다. 그는 서유럽 최초로 주류 사회민주주의보다 더 좌파적인 정당의 소속으로 국가 지도권을 거머쥔 인물이 됐다. 그러나 그리스 자본이 가하는 압박과 보다 광범한 유럽 자본주의 기구들이 (유럽연합집행위원회와 유럽중앙은행을 통해) 가하는 압박 앞에서 치프라스는 굴복했다. 치프라스가 그리스에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이 요구하는 구제금융 프로그램[긴축정책]을 시행하게 되자 시리자 내 좌파 사이에 대소동이 벌어졌다. 27
시리자는 가장 분명한 사례다. 시리자는 이미 존재하던 단체들의 연합 정당으로 2004년에 창당됐다. 그 중심 조직은 시나스피스모스[‘좌파 연합’이라는 뜻]로, 옛 그리스 공산당이 둘로 쪼개질 때 그중 하나를 기원으로 하는 조직이다.28 치프라스가 승리한 직후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시리자 안에는 극좌파가 여럿 있었다. 영국 SWP의 자매 조직인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이하 SEK)에서 분열해 나간 소규모 그룹인 ‘국제주의노동자좌파(이하 DEA)’도 그 일부였다. DEA 지도자들은 시리자라는 틀 밖에서 활동하는 좌파들, 즉 SEK와 SEK가 참여한 반자본주의 연합체 안타르시아에 소속된 단체들을 종파주의라고 비난했다. 시리자가 2015년에 집권하기에 앞서, DEA는 노동계급의 염원을 지지하는 요구들을 담은 강령을 가진 “좌파 정부는 … 사회주의적 파열을 향한 전환적 한 걸음”이라고 주장했다.이 새로운 상황에서 시리자가 정당으로서 하는 구실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시리자의 당 조직과 당원의 기능은, 이와 더불어 당내 곳곳에서 이뤄지는 집단적 참여와 민주주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시리자의 최종 승리, 그리하여 좌파 전체와 우리 민중의 최종 승리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시리자 안에서 활동한 또 다른 마르크스주의자 스타시스 쿠벨라키스는 DEA 등이 참여해 만든 [시리자 내 좌파적 의견 그룹] ‘좌파 플랫폼’의 기본 관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좌파 플랫폼은 “정부 권력으로 들어가는 전망은 모두 사회적 동원을 일으키는 수단”으로 여겼다. 쿠벨라키스는 곧 들어설 시리자 정부의 노선에 따라 [시리자 내 좌파 인물들이] 정부 직책을 맡을지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쿠벨라키스는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되, 사회적 동원을 결합하는” 입장, “외부에서 봉기를 일으켜 국가를 공격한다는 이중 권력 개념과 결별하는데, 국가는 안으로부터 밖으로부터 그리고 위로부터 아래로부터 장악돼야 하기 때문이다”는 입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리자 내 극좌파들은 시리자의 굴복 이후에 시리자와 결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며 민중단결이라는 새 조직을 결성했다. 민중단결은 의석을 25개 보유하고 있었지만 치프라스가 굴복한 지 몇 달 뒤에 치러진 총선에서 곧바로 그 의석을 모두 잃었다. 혁명가들이 좌파 개혁주의 정당의 후보로 나서 얻은 성공이 그 당 밖에서의 성공으로 반드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훨씬 더 좌파적인 개혁주의 정당을 새로 만들더라도 말이다.
31 이 문제는 이미 2012년에, 즉 시리자가 의회 내 제1 야당이 됐을 때 분명히 드러났다. 선거에 성공을 거두자 시리자 지도부의 다수가 마음 속에 품고 있던 프로젝트의 좌파 개혁주의적 성격이 더욱 강화됐고, 시리자의 한 대변인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이제 27퍼센트를 득표하는 정당이므로 4퍼센트를 얻을 때와 똑같이 말할 수는 없다.” 32 당시 쿠벨라키스와 코스타스 라파비차스는 대중 동원[이 활발한] 맥락에서는 시리자의 잠재적 승리가 유로존과 결별할 정치 지형을 창출한다고 주장했는데,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이에 대해 논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치프라스의 행보와 그로 말미암아 시리자 내 혁명가들이 겪게 될 어려움들은 예상하지 못할 것이 아니었다.그들은 투쟁의 논리 자체가 시리자 정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 시리자가 긴축에 맞선 정책을 시행하려면, 그만큼 아래로부터의 강력한 압력이 필요할 것이다. … 그러나 투쟁은 …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투쟁은 조직된 정치 행위자라는 의식적 주체에 달려 있다.시리자 내에서 개혁주의적 사고방식, 즉 기존 의회제 민주주의 구조 안에서 집권에 도전하는 것에 주력하는 것이 득세하고, 시리자 내 좌파는 그에 대항해 명확하고 일관된 대안을 뚜렷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은 극복되기 어려운 걸림돌이었다고 판명됐다. 시리자에 가맹하는 것은 실천에서는 극좌파가 “독립적으로 행동할 능력”을 엄청나게 제약할 터였다.
35 제4인터내셔널과 연결된 단체인 ‘이스케르다 안티카피탈리스타(반자본주의 좌파라는 뜻, 이하 IA)’는 포데모스 창당 초기부터 그 안에서 일익을 담당했다. 포데모스가 창당할 무렵에 IA는 포데모스를 “시민들의 분노가 표현되는 수단”이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독재와 40년의 신자유주의 공세와 과두제 자본주의에서 물려받은 고통을 근본적으로 끝장낼 다시 없는 기회”로 여겼다. 36
포데모스도 시리자 경험과 유사하게 아주 명징한 경고를 던지는 얘기를 들려 준다. 포데모스는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와 이니고 에레혼이라는 두 정치학자가 2014년에 세운 당이다. 포데모스는 시리자와 비슷하게 유로존 위기 이후 스페인에서 벌어진 격렬한 사회적 투쟁의 [정치적] 표현체로서 혜성처럼 나타났다. 그 투쟁은 2011년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사람들)” 운동의 광장 점거 형태로 일어났는데, 스페인 기성 정치권 일체를 거부하는 데로 나아갔다. 포데모스는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프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무프가 주장하는 “좌파 포퓰리즘”을 지지했다. “좌파 포퓰리즘”은 포데모스 지도자들이 “카스트”[권력층을 전근대 신분제 사회의 상층 계급에 비유한 것]라고 부르는 것에 대항하는 민중의 혼성적 운동들을 일으키려는 전략인데, 이 카스트는 엘리트를 넘어 기성 좌파 정당들까지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다.37 이를 통해 지도부는 당을 우경화시킬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사회민주주의자 두 명이 포데모스 경제 강령의 초안을 작성할 수 있게 됐는데, 그 초안은 스페인 자본주의와의 급진적 결별이 아니라 “실용적 단기 계획”을 강조했다. 38 2016년 이글레시아스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변화는 제도에서 생겨난다. … 제도가 아니라 거리에서 변화가 생겨난다는, 우리가 극좌파이던 시절에 말하곤 했던 멍청한 소리는 사실이 아니다.” 39 이 정책 변화는 소득이 없었다. 유로존 위기가 진정됨에 따라 투쟁이 감소하고 스페인 경제가 다시 안정화되면서, 포데모스의 득표가 제약되고 그럴수록 포데모스는 훨씬 더 확고하게 기성 좌파를 끌어안게 됐다. 처음에는, 공산당 주도의 좌파연합IU과 다른 여러 좌파 정당들이 참여하는 선거 연합을 결성했다. 그다음 2017년에 이글레시아스는 포데모스를 한층 더 우경화시키며 그 전까지 동맹자였던 이니고 에레혼을 밀어내고, 케인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훨씬 더 분명하게 받아들이는 데로 나아갔다. 40 2019년에 이글레시아스는 스페인 사회민주주의의 주된 세력인 사회당PSOE과의 “진보 연합”을 주장했다. 이 연합은 2020년 초에 집권했다. 그 전까지는 사회당을 “카스트”의 일부로 여기며 경멸하라고 지지자들을 가르치던 포데모스는 이제 그 정당과 나란히 정부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퇴조하자 포데모스는 갈수록 가차없이 선거에 강조점을 뒀고, 동시에 내부 조직 구조를 단단히 죄며 그 전까지 당 조직화의 골간이던 느슨한 “서클”들과 거리를 두고 중앙집권적 지도 체계로 나아갔다.41 이글레시아스는 IA의 지도자 테레사 로드리게스와 함께 찍은 영상을 트위터에 올렸는데, 그들은 “의식적 이별”에 이르게 됐다고 발표했다. 42 IA가 2021년 12월에 발표한 내부 회보에서 상당히 우울한 분위기로 쓰인 부분을 보면, 이 조직이 어떻게 노선을 바꾸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IA가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IA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포데모스를 떠났다. “또다시 좌파 프로젝트는 근시안적으로 차악 논리에 스스로 복종하면서, 각료 회의 안에서 행사할 보잘것없으며 결정적이지도 않은 영향력을 얻으려고 자신의 정책들을 내버릴 것이다. 뭐라고 선전하든지 간에, [포데모스와 사회당의] 이 연립정부의 정책은 정설 경제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지난 주기, 즉 유로존 위기와 포데모스 부상의 시기에 우리 조직은 패배했지만, 그래도 몇몇 중요한 “상대적” 진전을 이뤘다. … 실로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소규모 반자본주의 조직이 대중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었고, 전에는 끈이 없던 부문들과 연결됐고, 당 일꾼들이 새로운 지역에서 탄탄하게 자리 잡았다. … 우리의 약점 역시 명백하다. 우리의 견해가 언론을 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고, 당 일꾼 네트워크를 복구하고 재활성화해야 한다.
독일의 디링케(좌파당)는 포데모스나 시리자와는 달리 중앙정부 수준에서 집권한 적은 없다. 디링케는 민주사회당(이하 PDS, 옛 동독의 스탈린주의 집권당[인 공산당]이 무너진 잔해 속에서 생겨난 정당)과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 대안’(이하 WASG)이 통합하며 2007년에 창당한 정당이다. WASG는 독일의 주류 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SPD의 일부가, 사회민주당이 이끌고 녹색당이 참여한 연립정부[1998년~2005년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총리로 한 정부.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며 대중의 불만을 샀다.]에 환멸을 느끼며 사회민주당에 떨어져 나오면서 창립됐다. 이렇게 사회민주당에서 이탈한 이들 중에는 전 사회민주당 의장[1995~1999년]이고 사회민주당·녹색당 연립정부에서 잠깐 재무 장관을 한[1998~1999년] 오스카 라퐁텐이 있었다. WASG는 반자본주의 활동가들도 끌어당겼는데, 그중에는 SWP의 자매 조직인 링크스룩(‘좌선회’라는 뜻)의 회원들도 있었다.
44 PDS는 [디링케 창당 전에 이미] 베를린 연방주에서 [사회민주당과의] 연립정부에 참여하고 있었는데(이렇게 지방정부 수준에서 사회민주당과 협력하는 패턴은 끈질기게 지속된다), PDS 출신 디링케 소속 지방의원들은 [지방정부가] 긴축을 시행하는 등 노동자를 공격하는 것을 수용하면서 디링케의 좌파로서의 신뢰도를 훼손했다. 한편, WASG의 리더였던 인물 중 많은 이들도, 좌파적이고 사회민주주의적인 기초 위에서라면 중앙정부 수준에서 범좌파 연립정부를 구성한다는 생각에 열려 있었다.
디링케는 창당 몇 달 만에 당원이 7만 명에 이르게 됐고, 그 덕에 독일에서 셋째로 큰 정당이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거에서 11~14퍼센트를 득표했다. 디링케 내부에는 창당 초기부터 긴장이 있었다.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옛 서독 지역에서 우세한 반면, PDS와 연관된 이들은 옛 동독 지역을 꽉 잡고 있으면서 지방의원을 여럿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PDS는 옛 동독 공산당한테서 물려받은 “위로부터의 사회주의” 관점을 가지고 지방 정치에 개입하는 실천을 하는 조직이었다.이런 문제들이 있었어도 혁명적 좌파의 많은 이들이 처음부터 디링케에 참여했다. 링크스룩은 디링케 안에서 새로운 경향이 생겨나는 데 일조했다. 그 경향은 잡지 《마르크스21》을 중심에 뒀고, 단체명도 이 잡지 이름에서 따서 지었다. ‘마르크스21’은 국제사회주의경향의 공식적 일부가 아니었고 그 지도부에는 국제사회주의 전통에 속하지 않는 인물들도 있었다. 이렇게 한 것은 십중팔구 실수였다. 비록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니 더 분명해지는 면이 있고 2000년대 중반에 등장한 반자본주의 운동이 고취한 단결의 정서를 반영한, 그래서 이해할 만한 실수라는 면도 있지만 말이다. 노동조합 상근 간부층의 구실이나 스탈린주의의 성격 같은 핵심 쟁점들에 대한 견해가 모호한 것은, 디링케라는 더 큰 개혁주의 조직 안에서 활동하면서 혁명적 관점을 명료하게 일구는데 어려움을 줬다.
디링케라는 틀 내에서 활동하는 것에도 함축된 문제가 있었다. 마르크스21은 독자적으로 주도력이나 진취성을 발휘하는 데 주안점을 두지 않았다. 그 대신에 마르크스21에 속한 혁명가들의 활동 대부분은 디링케의 구조들을 통해서 이뤄졌다. 이런 방식으로 활동하는 것은 혁명가들이 발의한 주장이나 실천이 그 구조들을 통해 빠르게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더 흔하게는, 응집력 있는 지도부를 갖춘 유능한 혁명가들의 단체 특유의 예리하고 개입주의적인 사고·행동 방식이 억제됐다. 그래도, 디링케는 처음에는 극좌파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는 이들을 끌어당기며 혁명가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마르크스21 회원들은 디링케의 일부로서 의석을 획득했고, 디링케의 활기찬 정치 문화 속에서 마르크스21은 논쟁에 관여하며 지지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디링케는 2017년 총선 때까지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냈고 보통 전국적으로 10퍼센트가량 득표했다. 그러나 2021년 선거에서 사정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디링케의 득표는 반으로 꺾여 5퍼센트 아래로 떨어졌고, 이 때문에 69명의 의원 중 30명이 의석을 잃었다. 당시까지 나타난 특징적 양상은 중도 우파 정당과 중도 좌파 정당의 지지가 모두 감소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 변한 것은 앙겔라 메르켈이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그의 뒤를 이은 중도 우파가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하면서부터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민주당은 왼쪽으로 이동해 득표를 극대화해야 할 필요를 알아차렸고, 2021년 선거가 다가오면서 녹색당과 함께 지지가 급상승했다. 주류 사회민주주의가 제한적으로나마 부활하자, 좌파 개혁주의자를 위한 공간이 압착됐다.
45 설상가상으로, 디링케의 지도자 중 가장 유명한 자라 바겐크네히트가 기성 정치권에 대한 디링케의 도전을 되살리겠다면서 인종차별주의와 민족주의에 영합하는 잘못을 저지르면서 디링케는 또 타격을 입었다. 46 바겐크네히트는 AfD가 처음에 2017년 선거에서 약진한 것이 좌파가 노동자들의 걱정거리, 특히 이민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결과로 봤다. 바겐크네히트는 “현실주의적 좌파 정치”를 가지고 이민 문제에서 우경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47 바겐크네히트 분파는 2022년 6월에 열린 디링케 당대회에서 당 집행권 획득에 실패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공개적으로 당 노선을 비판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전쟁과 독일의 무기 지원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더해졌다.
이와 동시에, 독일 정치권에서 급진 우익이 강화되면서 ‘독일을 위한 대안(이하 AfD)’이 부상했다. 이런 양방향 압박이 디링케 지도부에 영향을 미쳤다. 디링케 지도부의 다수는 디링케를 권력층에 대항하는 급진적 대안으로 내세우기보다는 주류 좌파와 함께 ‘적-적-녹’ 연립정부를 구성한다는 전망에 집착하게 됐고, 그에 따라 디링케의 명망과 통치 의지를 강조하는 데 열중하게 됐다. 그러나 이는 자멸적인 것이었다. 결국 사회민주당이 지배하는 정부로 쉽게 귀결될 것이라면 왜 디링케에 투표해야 할까? 디링케 지지자들은 더 믿을 만한 개혁주의적 대안을 찾아 대거 디링케를 떠났다. 140만 표가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으로 옮겨 갔다.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21 같은 혁명가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마르크스21의 장기 전망은 이 그룹의 이론가 폴카트 모슬러가 쓴 글에서 분명히 표현됐다. 그 글은 WASG와 PDS가 통합을 위해 회담하던 때에 쓰였다. 모슬러는 베를린 주정부 안에서 긴축과 민영화를 강행하는 PDS 당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시간이 걸릴 역사적 과정의 출발점에 있다. 사람들은 투쟁을 통해 배울 것이고 우리는 공통의 경험을 함께 이해할 집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우리는 커다란 연합 정당이 필요하다. 지금 베를린 문제로 분열하는 것은 1910년 네덜란드에서 안톤 판네쿡 같은 ‘좌파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실수를 똑같이 범하는 것이다. 당시 그들은 사회민주노동자당에서 500명을 데리고 나왔다. 나머지 3만 5000명을 그 당의 우파에게 남겨 놓은 채 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와 달리 옳은 입장을 취했는데, 독립사회민주당 내에서 스파르타쿠스동맹을 유지했다. 룩셈부르크는 우리는 대중과 동고동락해야 하고 이 과정 바깥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49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소규모 단체인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USPD의 일부였지만 독일이 혁명으로 뒤흔들리자 거대한 시위를 이끌 수 있었고 진정한 노동자·병사 평의회에서 청중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스파르타쿠스동맹은 1918년 말 USPD와 실제로 결별하고 독일 공산당을 창당하는 데 일조했다. USPD의 규모가 팽창하고 그에 따라 한층 더 급진화한 것은 룩셈부르크가 USPD와 결별한 뒤, 사회민주당 정부가 반혁명적 행보를 보이는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1920년 12월 이 중간주의 정당인 USPD가 분열했다. 당원의 거의 절반이, 레닌과 트로츠키 같은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창립한 코민테른에 가입하는 데 필요한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산당으로 합류했다. 50 이렇게 대중적 공산당이 등장할 때 룩셈부르크는 이미 죽고 없었다. 사회민주당 정부가 도발해 혁명적 노동자들이 때 이른 봉기를 일으켰을 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가 이끌던 작고 경험 없는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은 때 이른 봉기를 막을 수도, 질서 있게 퇴각하도록 이끌 수도 없었다. 51
이 유추는 얼마나 유용할까? 독립사회민주당(이하 USPD)은 1918년 독일 혁명을 앞두고 사회민주당에서 축출된 중간주의 대중 조직이었다.52 마르크스21 내부 논쟁의 결과로 무엇이 등장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혁명적 당의 확대는 아닐 것 같다.
역사적 정확성 문제를 제쳐 놓더라도, 모슬러의 유추는 다소 억지스럽다. 디링케는 [USPD와 달리] 노동자들의 혁명적 봉기가 가하는 압력을 받으며 사회민주당에서 떨어져 나온 정당이 아니다. 디링케의 정치는 좌경화하던 시절에도 USPD에 견주면 한참 우파적이었다. 즉 디링케의 정치는 중간주의가 아니라 개혁주의였다. 또 마르크스21의 구상은 적절하고 유리한 때에 사람들을 이끌고 디링케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혁명적 조직을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 마르크스21 회원들이 충분히 설득돼 있었는지도 불확실하다. 어쨌든 끝내 그런 상황은 현실화되지 않았고, 지금 디링케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2023년 초 마르크스21도 내부 논쟁에 휩싸였는데, 이는 지도부 일부가 노동조합 관료 부문으로 이끌리는 듯한 상황을 반영한다.“특별한 종류의 공동전선”
53 당시 이 이론은 혁명적 당이 개혁주의 지향이 뚜렷한 더 큰 조직 안에서 독립성을 보존할 방법으로 보였고, 앞에서 알아본 유형의 문제들을 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었다.
영국에서 SWP가 선거 활동에 가장 집중적으로 관여한 2000~2008년에 도입한 이론적 틀은 “특별한 종류의 공동전선”이었다.54 트로츠키는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공동전선이 개혁주의 노동자들까지만 포함해야 하는지, 아니면 개혁주의 지도자들도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공동전선 전술은 러시아 혁명 후 트로츠키와 레닌과 그 동료들이 발전시킨 것이다. 그들은 1919년 창립한 코민테른을 통해 이 전술을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주로는 당시의 신생 프랑스 공산당에 조언하면서, 사회민주주의와 성공적으로 결별한 혁명가들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공산주의 노동자 대중과 (사회민주주의자를 포함해) 비공산주의자 노동자 대중이 공동 행동을 할 수 있는 조직적 방안을 끝까지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우리의 깃발이나 우리의 실천적 구호로 손쉽게 노동자 대중을 단결시킬 수 있다면, 그래서 개혁주의 조직들을(정당이든 노동조합이든) 그냥 건너뛸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다면 공동전선 문제 자체가 지금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점, 다시 말해 노동계급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 개혁주의 조직에 속해 있거나 개혁주의 조직을 지지한다는 데서 비롯한다. 그런 노동자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경험은 개혁주의 조직을 떠나 우리에게로 올 만큼 충분하지는 않다.
56 공동전선으로 혁명가들은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만약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혁명가들과 함께 활동하기를 거부한다면, 노동자들의 이익을 방어하는 데 진지하지 않다는 사실이 폭로될 수 있다. 반대로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단결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개혁주의 지도자들을 바라보는 개혁주의 노동자들이 혁명가들과 조직적 관계를 맺는 데로 이끌릴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면 혁명가들은 그들과의 공동 투쟁에 근거해서, 혁명가들의 사상과 전술이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것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이 노동자들에게 입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이 전술은 개혁주의 지도자들에게 딜레마를 던져 준다. “개혁주의자들은 대중운동의 혁명적 잠재력을 두려워한다. 개혁주의자들이 좋아하는 무대는 의회 연단, 노조 사무실, 중재 기구, 장관 면담실이다.”우리가 비판하고 선동할 자유를 제약하는 조직적 협약은 어떤 것이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 투쟁에 참가하면서, 광범한 대중은 우리가 다른 누구보다 더 잘 싸운다는 것, 우리가 다른 누구보다 더 명확히 사태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더 대담하고 단호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될 것이다.
58 공동전선 전술은 SWP의 활동 대부분에서 기반 구실을 해 왔다. 그런 활동으로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영국 혁명적 좌파가 거둔 두 가지 커다란 성공 사례인 반反나치동맹과 전쟁저지연합이 있다.
나중에 트로츠키는 독일의 반反파시즘 투쟁을 다루는 글을 쓰면서 공동전선 전술을 일반화했다.선거 활동에 공동전선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에는 몇 가지 잠재적 이점이 있었다. 2000년대에 SWP가 선거에 관여한 목적은 결정적 순간에 계급 투쟁을 가로막고 억제해 온,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당 개혁주의의 유구한 장악력을 끊어 내는 것이었다. 노동당 개혁주의를 깨뜨리면 결국에는 혁명가들이 두드러지는 구실을 하는 커다란 급진좌파 조직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노동당 개혁주의의 문제를 그저 새로운 형태로 되풀이하는 일이 되지 않으려면, 그 과정에서 더 크고 뿌리도 더 튼튼한 혁명적 좌파가 탄생해야 한다. 따라서 새 급진좌파 조직의 동역학에는 융합의 필요성뿐 아니라 분열의 필요성도 내재해 있는 것이다. 혁명가들이 독립적으로 논쟁하고 조직할 능력을 유지한다면 이 전망은 더 유망하게 될 것이다. 둘째 이점은 선거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활동하는 여러 무대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실제로 흔하게, 특히 계급 투쟁이 고조될 때에 선거는 혁명가들에게 부차적이다. 혁명가들이 독립성을 유지하면 다른 형태의 공동전선 활동을 하면서, 아직은 혁명가들과 선거 동맹을 맺을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노동자들과 그들의 개혁주의적 대표들과 함께 활동할 수 있다. 예컨대, SWP가 어떤 개혁주의 그룹과 함께 선거에 나가 노동당에 도전하는 활동을 하더라도 SWP가 ‘파시즘에 맞서 단결하자’에서, 즉 여전히 노동당과 강하게 연계된 인물들의 지지를 받는 공동전선에서 활동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지 않았다.
이것들은 진정한 이점이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에 분명해진 사실은, 혁명가들이 개혁주의자들과의 공동 선거 활동에 참여할 때 맞닥뜨리는 중요 문제들 중 하나를 이런 공동전선적 방식으로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공동전선 전술의 논리를 네 가지로 요약해 보자.
첫째, 혁명가들은 공동 행동을 벌이기 위해 개혁주의 조직들과 그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으려 한다.
둘째, 이 동맹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거부한다면, 그들이 노동계급을 방어하는 데 진지하지 않다는 것이 폭로되고 혁명가들은 그 개혁주의 지도자들을 뛰어넘어 노동자들을 동원하려 할 수 있다. 이 동맹이 받아들여지면, 수많은 노동자들이 공동 행동을 통해 혁명정당과 접촉하게 될 것이다.
셋째, 혁명적 당은 공동 행동을 통해 개혁주의자들보다 뛰어난 전술, 이론적 통찰력, 단호함을 보여 줄 수 있다.
넷째, 이런 활동을 통해 계급 투쟁이 전진할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혁명적 당이 성장하고 노동계급에 더 깊이 뿌리내릴 것이다.
공동전선 모델을 선거 활동에 적용하는 것은 첫째와 둘째 논리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셋째 논리는 무너진다. 선거 활동의 성공 여부는 무엇보다 선거 승리로 측정된다. 선거 활동에서 계급 투쟁은 단지 간접적이고 특별히 맥빠지는 방식으로만 연관된다. 선거 운동은 보통 좌파에 투표해 달라고 노동자 개인들을 설득하는 형태를 취한다. 이는 혁명가들이 참여하는 여러 활동들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예를 들어, 파업에서는 노동자들이 상당한 성취를 이루길 바란다면, 협상과 타협보다 평조합원들의 집단적 투쟁을 우선시하는 전투적인 방식들이 대개 더 우월하다. 마찬가지로 극우의 거리 운동에 맞서는 전투에서도 혁명적 전술(노동자 대중을 동원해서 파시스트들의 자신감을 꺾고 그들을 더 광범한 연성 인종차별주의자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효과적임이 거듭거듭 입증돼 왔다.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집단행동에 나서는 혁명적 시기에 치르는 선거를 상상해 볼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일상적 시기의 선거에서는 단지 소수 사람들에게 주류 사상과 단절하고 좌파 사상을 지지하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는 기회주의에, 그리고 정치화 수준이 낮은 노동자층에 영합하는 것이 성과 면에서 유리하다. 이것이 노동당이 수 세대에 걸쳐 효과적으로 노동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다. 즉, 노동당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노동계급 전반의 현재 의식 상태에 타협한다.
선거 과정에서 당원 수를 조금 늘리고 핵심 쟁점들을 부각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주 헛되지는 않았다고 혁명가들을 설득할 근거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와 함께 선거 활동에 참여한 개혁주의적 노동자들에게는 대체로 별 의미 없는 일이다.
이렇듯, “특별한 종류의 공동전선”은 바로 자체 논리에 따라 혁명가들보다 개혁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혁명가들은 선거 활동에 훨씬 더 큰 노력을 쏟아부어 이 불리함을 만회하려 할지도 모른다. 더 뛰어난 활동력과 결의를 보여줌으로써 자신들의 우월함을 입증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혁명가들이 그런 선거 조직을 건설하는 데 성공할수록, 그리고 선거 승리에 실제로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조직 내 개혁주의적 요소의 무게가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성공적인 선거 조직에는 공직에 진출해 권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들이 이끌리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런 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혁명적 당 자체의 활동을 뒤틀리게 할 수 있다. 최악의 경우에 “특별한 종류의 공동전선”은 혁명적 당이 선거주의에 적응함에 따라, 개혁주의자가 혁명적 당으로 건너오는 다리가 아니라 혁명가가 혁명적 당에서 이탈하는 다리가 될 수 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혁명적 당이 다른 영역의 투쟁에 두는 관심이 약해지면서 일반화된 혁명적 정치를 발전시키는 능력이 약화될 수 있다.
60 리스펙트는 사회주의자동맹(이하 SA)을 계승하는 조직이었다. 1990년대 말에 결성된 SA는 1997년 블레어하에서 집권한 신노동당에 대한 불만에 정치적 표현체를 제공하고자 했던 좌파 세력들의 네트워크에서 비롯했다. SA를 주도한 중심 세력은 사회당(밀리턴트 경향의 후신)이었다. 사회당은 노동당이 자신들을 축출한 것을 노동당이 사실상 그저 또 하나의 자본가 정당이 됐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간주했고, 자신들이 입당 전술을 쓸 수 있는 새로운 노동자 대중 정당을 건설하려 했다.
이 점을 보여 주는 중요한 예가 바로 리스펙트다.61 런던사회주의자동맹(이하 LSA)은 신설 런던 의회 선거에 노동당 왼쪽의 후보들을 내보내는 한편 리빙스턴을 런던 시장으로 뽑아 달라고 호소했다.
SWP가 국제사회주의자그룹(제4인터내셔널과 연결된 조직), 노동자권력, 노동자해방동맹 같은 더 작은 트로츠키주의 단체들과 함께 1999년에 SA에 가입하게 된 동기는 노동당에서 상당한 규모의 분열이, 먼저 런던을 중심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전망이었다. 1980년대에 런던광역시의회의 노동당 좌파 지도자였던 켄 리빙스턴이 런던 시장 선거에 노동당 후보로 출마하지 못하게 됐다. 리빙스턴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런던 시장직을 거머쥐겠다고 선언했고, 결국 성공했다.62 이런 결과를 얻은 것은 리빙스턴 선거 운동의 대중적 분위기와 활동가들의 등골 빠지는 노력이 한데 모였기 때문이었다. SWP의 지회들은 활동을 멈추고 당원들이 선거 운동을 하도록 “해방”시켜 줬고, SWP는 여기저기 선거 운동에서 핵심 구실을 하게 됐다. 이는 SWP에 상당한 부담을 줬다.
결과는 그럭저럭 성공이었다. LSA는 광역비례대표 명부에서 단 1.6퍼센트를 득표하는 데 그쳤지만, 일부 지역구에서는 주목할 만한 약진을 이뤘다. 즉, 몇몇 지역구에서는 최대 7퍼센트를 득표해 극좌파 후보들이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트롯보트”를 훨씬 상회한 것이다.[트롯보트는 영국 선거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보통 얻는 득표율, 즉 1~2퍼센트를 가리키는 속어다.]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은 지역구 네 곳 중 세 곳은 SWP 당원들이 출마한 곳이었다. 노스이스트 런던에서 7퍼센트, 램버스 앤 사우스워크에서 6.2퍼센트, 시티 앤 이스트 런던에서 4퍼센트를 얻었다.이렇게 선거 활동으로 전환하고 지회가 뒷전에 놓인 것을 둘러싸고 얼마간 내부 동요가 일었는데, 특히 런던 선거 후에 이 노선이 다른 지역 지회로도 확산됐을 때 그랬다. 그래도 선거에서 성공하고 있는 동안에는 불평이 비교적 잠잠했다. 의견을 달리 하는 당원들은 조용히 탈당하거나 활동을 줄이거나 묵묵히 다른 운동에 집중했다. 런던의 경험으로 자신감을 얻은 SA는 뒤이은 2001년 6월 총선에서 98개 선거구에 입후보했다. 평균 득표율은 1.7퍼센트, 1970년대에 SWP가 여러 선거구에서 얻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였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도 평균보다 훨씬 나은 성과를 얻은 몇몇 지역이 있었다. 전 노동당 의원이자 사회당 당원인 데이브 넬리스트가 코번트리 노스이스트에서 7퍼센트를 얻은 것이 가장 좋은 결과였고, SWP 당원들을 포함한 몇몇 후보들도 특히 런던에서 괜찮은 결과를 얻었다.
64 사회당은 [SA의 의사 결정 방식으로] “1인 1표제”가 도입되자 탈퇴했다. 그중에서는 덩치가 가장 큰 SWP가 SA를 지배하게 될까 봐 두려워서였다. 사실, SA에서 SWP가 수적으로 우세했다는 것은, 커다란 개혁주의자 층과 함께 광범한 공동전선을 건설하려는 시도로서 SA의 성공이 아주 제한적이었다는 뜻이다.
내부적으로 보면 SA는 정치적 이견으로 쫙쫙 갈라져 있는 조직이었다. 구성 면에서는 주로 트로츠키주의 단체들의 연합이었고 여기에 노동당에 대한 단일한 좌파적 대안이라는 개념에 이끌린 저명한 무소속 좌파 활동가 몇몇이 합류한 조직이었다.SWP는 이 점에서 SA의 한계를 인지했고, 곧 SA의 핵심 부분들이 2004년 1월 출범한 리스펙트로 흡수됐다. 리스펙트 결성은 어마어마하게 큰 반전 운동에 정치적 표현체를 제공하기 위한 시도였다. 반전 운동에서는 SWP와 여러 세력이 발의한 전쟁저지연합이 가장 두드러진 조직이었다(반핵군축운동CND, 영국무슬림연합과 함께). [미국과 영국 등이] 이라크를 침공한 지 몇 주 후인 2003년 5월에 열린 선거에서 마이클 라벌레가 SA 후보로 출마했는데, 강력한 반전 정서 속에서 랭커셔의 프레스턴 시의원으로 당선했다. 이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암시해 주는 징조였다. 이 승리는 무엇보다 그 선거구에 거주하는 상당히 많은 수의 무슬림 노동계급의 표 덕분이었다. 리스펙트는 “이슬람주의자”와 좌파의 동맹이라고 잘못 희화화돼 왔다. 그렇지만 리스펙트가 가장 크게 약진한 곳이 좌파적인 반전 플랫폼으로 이끌릴 수 있는 무슬림 인구가 많은 지역(그러나 비무슬림 노동자들도 사는 지역)이었다는 것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리스펙트 결성에서 중심적 인물은 조지 갤러웨이었다. 요즘의 갤러웨이는 “진보의 위선에 비판적”이며 “애국적”인 계급 정치를 자신이 이끄는 영국노동자당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 그래도 [2000년 초의] 갤러웨이는 선동적인 의원이고, 반전 운동에서 인기가 매우 높은 연설가이고,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노동당에서 제명된 아주 저명한 인물이었다. 그 전에도 갤러웨이는 미국과 영국이 벌이는 전쟁들에 좌파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입장에서 반대하고 이슬람혐오와 아랍인을 향한 인종차별을 확고하게 반대하는 인물로 인식됐다.
65 그러나 그런 균열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과 이에 맞선 운동으로 노동당의 지지율 하락이 가속되고 많은 평당원이 탈당했지만, 갤러웨이를 따라 나오는 의원은 없었다. 그래도 리스펙트는 다른 저명한 인물 몇몇을 끌어들였다. 잘 알려진 환경 운동가 조지 몽비오는 리스펙트의 창립 멤버였으나 리스펙트가 선거에서 녹색당의 경쟁자가 될 것이 분명해지자 몇 주 후에 떠났다. 66 살마 야쿱은 젊은 무슬림 활동가로 전쟁저지연합 버밍엄 지부에서 두각을 드러낸 인물로 역시 리스펙트의 창립 멤버였다. 그는 몽비오와는 달리 거의 십 년 동안 리스펙트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 개혁주의의 회복력 때문에, 리스펙트의 지역 조직 대부분에서 핵심적인 조직 세력은 SWP였다. 갤러웨이와 야쿱 같은 개인들이 자체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던 곳은 제외하고 말이다.
갤러웨이와 동맹하기로 결정한 것은 영국 노동당 개혁주의라는 획일체 안에서 커다란 균열이 일어날 수 있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67 지방의회 선거에서는 리스펙트에 가입한 무슬림 사회주의자 올리어 라먼이 타워햄리츠에 있는 세인트 던스턴 앤 스테프니 그린 구의회 의석을 획득했다. 한 달 뒤 리스펙트는 버밍엄 호지힐과 레스터 사우스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국회의원 후보를 내보내 각각 6.3퍼센트, 12.7퍼센트를 득표했다. 이 두 선거구 역시 무슬림 노동계급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그 뒤 2005년에 갤러웨이가 베스널 그린 앤 보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했다. 야쿱도 버밍엄에서 노동당 후보에게 10퍼센트 이내의 [작은] 차이로 패했고, 이스트런던에서도 리스펙트의 후보는 의미 있는 표를 획득했다.
리스펙트는 2004년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과거에 SA가 얻었던 것과 같은 1.7퍼센트를 얻지만, 노동당 왼쪽 세력의 도전이 거듭돼 온 런던에서는 훨씬 많은 지지를 얻었다. 런던 의회 선거에서 리스펙트는 당선에 필요한 5퍼센트 문턱에 0.4퍼센트포인트 못 미치는 표를 얻었다. 5퍼센트를 얻었다면 당시 SWP의 지도적 당원이자 전쟁저지연합 의장인 린지 저먼이 의석을 얻었을 것이다. 이 선거에서 리스펙트는 특히 시티 앤 이스트 선거구에서 많이 득표했다(15퍼센트). 이 선거구는 타워햄리츠와 뉴엄 자치구에 있는 국회의원 선거구 몇몇을 포함하는데, 이들 지역에는 주로 방글라데시계 무슬림 노동자가 많이 사는 곳이다. 그 무슬림 중 많은 이들이 노동당과 결별하고 있었다.갤러웨이가 의원이 되자 리스펙트에서 그의 권위는 견고해졌고, 이것이 리스펙트의 성격에 끼치는 영향은 갈수록 커졌다. 그 다음 해에 열린 지방선거에서 리스펙트 후보들이 16석을 획득했는데, 타워햄리츠에 크게 집중돼 있었다. 이는 리스펙트에서 중대한 위기가 발생할 길을 닦았는데, SWP와 갤러웨이 지지자라는 두 축으로 의견이 좍 갈렸다. 2007년 가을 갤러웨이가 리스펙트 전국위원회에 서한을 보내면서 이 논쟁이 크게 불거졌다. 갤러웨이의 주장인즉, 당시 SWP 당원인 존 리즈가 맡고 있던 전국 사무총장 옆에서 일할 전국 조직자를 새로 두자는 것이었다. 당시 SWP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리스펙트는 다원주의적 조직을 표방했고 그렇기에 언제나 주요 구성 단체들 간의 타협을 기초로 운영돼 왔습니다. SWP는 지금까지 의견을 많이 굽혀 왔고 앞으로 더 많이 그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SWP에 요구되고 있는 것은 리스펙트 내 사회주의 좌파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어 걱정됩니다. … 불행히도 영국 노동당에서는 독일에서 일어난 대량 탈당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독일에서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고위급 사회민주당 당원들이 탈당해 디링케를 창당한 것 같은 일 말입니다. … 그래서 리스펙트는 무슬림들에게서 받는 훌륭한 지지에 불균형적으로 의존하게 됐습니다. … 조지 [갤러웨이]와 그의 동맹자들이 공격해 온 것은 바로, 리스펙트의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SWP가 노력해 온 것, 즉 리스펙트에 대한 노동계급의 지지를 넓히고 다양화하려 애쓴 노력입니다.
69 이런 논쟁들은 그 동안 봉합돼 왔지만 이제 공공연하게 터져 나왔고, SWP 당원 중 지도부에 속하지 않는 많은 당원들이나 리스펙트 지역 조직 중 이스트런던과 버밍엄 조직이 충격을 받았다.
이때쯤 반전 운동 물결이 퇴조하고 있었다. 갤러웨이는 실용주의적 개혁주의 정치인이 할 법한 일을 하고 있었다. 즉, 선거에서 비교적 잘 먹혀 온 수단에 대한 지지를 뒷받침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반전 운동의 절정기에 SWP는 쓸모 있는 보병이었고 당시의 핵심적 정치 현안들에서 갤러웨이의 입장에 동조했다. 그러나 이제 갤러웨이는 자체적 지역 기반을 갖게 됐고, 조직된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은 그가 보기에 자신의 선거 승리를 도울 정치적 입장에 걸림돌이 됐다. 이미 2005년에 작은 충돌이 있었다. 갤러웨이가, 지역 주민들을 움직일 수 있겠다고 자신이 판단한 여러 무슬림 유력자들을 띄워 주려 했기 때문이다. 그 무슬림 유력자들 중에는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백만장자 식당 경영자와 건설업자들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도, 사회주의자나 여성보다는 정치적 입장이 의심스러운 벵골인 남성들을 리스펙트의 후보로 내보내자는 압력이 있었다. 2007년 버밍엄에서도 유사한 논쟁이 벌어졌다. 2007년 11월 리스펙트는 분열했다. SWP가 이끌던 쪽은 결국 “좌파 명부” 후보로 따로 출마했는데, 린지 저먼이 런던 시장 선거에서 고작 0.7퍼센트를 얻었고, 런던 의회 비례대표 투표에서는 1퍼센트도 못 얻었다. 갤러웨이가 여러 소규모 좌파 그룹들의 지지를 받아 이끈 리스펙트 잔류파는 2010년 선거에서 유일하게 갖고 있던 국회 의석을 잃었다. 2012년에는 갤러웨이가 브래드퍼드 웨스트 보궐선거에서 당선하여 리스펙트 초창기의 승리를 재연하면서 리스펙트는 잠깐 부활했다. 그러나 이것이 리스펙트의 재탄생을 알리는 신호는 아니었다. 2015년 노동당은 갤러웨이에게서 의석을 탈환해 갔고, 갤러웨이는 다섯 명의 리스펙트 지방의원들(갤러웨이가 국회의원에 당선할 때 분위기에 힘입어 의석을 얻었다)과 사이가 틀어졌고, 그가 전국적으로 누리던 지지도 점차 줄었다.선거 관여 노선의 실패로 SWP는 잇달아 위기를 맞았다. 이 위기는 당의 민주적 중앙 집중주의 실천을 점검하는 조사 과정, 당 건설을 더욱 강조하는 전략 재설정, 지도부 구성 변화로 이어졌고, 존 리즈와 린지 저먼 같은 인사들과 그 지지자들의 탈당을 촉발했다. SWP가 선거에 관여해서 결국 더 튼튼해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만약 SWP가 노동당 왼쪽에 생긴 선거적 공간을 활용하려 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도 알 수 없다. SWP가 맞닥뜨린 문제들은 단지 전술적 오류나 불운이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 갤러웨이의 성향 문제로 축소될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 문제들은 투쟁 수준이 낮은 상황에서 개혁주의가 가하는 압력, 그러나 리스펙트의 특수한 조직 구조와 선거 기반을 통해 굴절된 압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전략적 경계가 모호한” 조직
71 “전략적 경계가 모호한” 조직은 혁명가들이 자신의 원래 조직을 완전히 해산하거나 더 큰 조직 내의 “플랫폼”으로 전환하면서 그 더 큰 조직의 지도부로 참여해서 만드는, 그럼으로써 의식적으로 개혁과 혁명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조직을 뜻한다. 이 폭넓은 유형에 속하는 조직 셋을 검토할 텐데, 각각 독특한 특징이 있다. 스코틀랜드사회당(이하 SSP), 프랑스의 반자본주의신당(이하 NPA), 아일랜드의 ‘이윤보다 인간을(이하 PbP)’이 그 사례들이다. 72
2000년대 초에 선거 관여 수단을 구축하려 애쓴 혁명가들에게, SWP의 “특별한 종류의 공동전선” 개념에 대한 주요 경쟁자는 “전략적 경계가 모호한” 조직이라는 개념이었다.SA와 마찬가지로 SSP도 기원은 밀리턴트 경향 회원들이다. 스코틀랜드에서 밀리턴트 경향 지지자들은 노동당에서 축출된 뒤 ‘스코틀랜드 밀리턴트 노동당(이하 SML)’으로 활동하면서 1996년 ‘스코틀랜드 사회주의자 동맹’을 결성하는 데 일조했다. 스코틀랜드 사회주의자 동맹은 그 다음 두 해 동안 지방선거와 총선 모두에 출마했다. 이 조직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토미 셰리든이다. 그는 1991년 주민세 반대 운동 때 옥살이를 한 뒤 유명해졌고, 1993년에는 SML 소속의 지방의원 여섯 중 한 명이었다. [1998년] 신설 스코틀랜드 의회를 구성하는 첫 선거를 앞두고 스코틀랜드 사회주의자 동맹은 SSP로 전환됐다. SSP는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셰리든은 1999년 글래스고 지역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해 스코틀랜드 의회 의원이 됐다. 뒤이은 2003년 선거에서 SSP는 추가로 다섯 석을 더 획득했다. 스코틀랜드의 SWP 당원들은 2001년 5월 1일 SSP에 가입해 ‘소셜리스트 워커 플랫폼’이라는 의견그룹으로 활동했다.
73 ISM이 잉글랜드 조직과 동의하는 것도 있었는데 노동당이 이제 단지 또 하나의 부르주아 정당이 되면서 새로운 좌파 정당이 활동할 커다란 무대가 창출되고 있다는 견해였다.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SSP가 내놓은 것은 ISM의 지도적 회원인 머레이 스미스가 SWP의 공동전선적 방식을 비판하며 쓴 글에서 설명돼 있다.
SSP가 이렇게 성공을 거두고 그와 함께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지지를 점점 더 강조하면서, 밀리턴트의 스코틀랜드 조직과 잉글랜드·웨일스 조직 간에 긴장이 고조됐다. 결국 SML의 다수파가 분열해 나가서 ‘국제 사회주의 운동’(이하 ISM)을 만들었다. ISM은 SSP의 초기 시절에 그 안에서 가장 유력했다.SWP는 혁명적 당과 … 새로 생겨나고 있는 정당을 서로 대립시키는 듯하다. 이것은 잘못된 이분법이다. 정당들은 … 화학적으로 순수한 혁명적 당으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게] 진화할 수 있다. … 우리는 정당을 건설할 때 다양한 세력과 함께 활동할 의욕과 공통의 경험에 기초한 토론을 통해서 명확함에 도달하겠다는 인내심을 갖춰야 한다. … 미래의 대중적인 혁명적 당은 … 개방적이고 다원적이며 비위계적일 것이다. … 출발점은 기성 노동자 정당들의 질적 변화다. 이 변화는 사회주의 정치와 계급투쟁 정치를 기초로 노동자 정당을 건설할 가능성을 열 것이다. … 노동계급과 노동당 간의 관계 변화를 보면, 왜 SSP가 현 시기의 과제에 맞춤하는 답인지 알 수 있다.
75 그로 말미암아 더 폭넓은 운동 안에서 명확성이 결여되는 것과 [선거 영역에서는 이견을 갖는] 더한층 광범한 개혁주의 세력의 참여가 제약될 수 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SWP가 “특별한 종류의 공동전선”이라는 개념을 통해 피하려 했던 문제들이었다.
SSP 지도자들이 폭넓게 개혁주의 세력들과 함께 활동할 필요성을 말할 때, 그런 활동은 SSP(이미 개혁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의 연합 정당인)와 더 넓은 개혁주의 세력들의 관계를 기초로 하는 것일 것이다.SSP가 “플랫폼”으로 알려진 내부 영구 분파에 관대했을지라도, 스미스는 SWP가 조직적 독립성을 유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충고했다.
SWP가 공동전선 내의 혁명적 부분이나 중간주의 정당 내의 혁명적 분파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SSP나 SA에 온다면 건설적인 방식으로 기능하기 힘들 것이다. 만약 SWP가 SSP의 특수한 성격을 이해한다면, ISM처럼 해야 할 것이다. 즉, 당내 당처럼 굴지 말고, SSP를 건설하는 가운데 그 안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을 키우는 것 말이다. 게다가, 그래야 SA가 하나의 당으로 발전하는 것을 도울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77 그렇지만, 이런 정당의 모습은 “다양한 정치적 플랫폼들의 … 조직적 표현체”로서 “다원주의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핵심 구분선이 혁명가와 개혁주의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암묵적 가정이 깔려 있다. 78 물론 이 가정은 특수한 전술 문제에서는 진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런 조직은 시간이 지날수록, 바로 그 문제를 두고 내부 의견 대립이 결국 불거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내부에 영구적 ‘플랫폼들’이 존재할 때, 그 당 바깥의 개혁주의가 부활할 때 특히나 더 그렇다.
여기에 내재해 있는 것은 혁명가와 비혁명가를 아우르는 광범한 정당이라는 개념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혁명적 분파 건설이 아니라, … [광범한] 당 전체를 전진시키고 …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함께 풀어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합류해야 한다는 것이다.실제로는, 이 문제는 SSP 전성기 동안에는 시험대에 오르지 않았다. 대신, 2004년 11월 SSP 전국집행위원회가 셰리든이 자신의 사생활 관련 의혹을 제기한 어느 타블로이드 신문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 셰리든은 SSP 의장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SSP 지도부의 몇몇은 그 재판에 출석해 셰리든에 불리한 증언을 했다. 그 결과 SSP는 분열했다. 셰리든과 그의 지지자들은 SWP 등과 함께 ‘솔리대리티’라는 조직을 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SSP든 솔리대리티든 양쪽 다 분열로 타격을 입었고 2007년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에서 둘 다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셰리든에게 제기된 의혹은 그가 스윙어클럽[서로 파트너를 바꿔 성행위를 하는 곳]에 드나들고 불륜을 저질렀다는 것인데, 그 출처는 〈뉴스 오브 더 월드〉[영국의 대표적 황색신문으로, 전화 도청 사실이 밝혀져 2011년 폐간됐다]의 보도였다. 그러나 SSP 지도부 중 일부가 셰리든을 적대한 것의 이면에는 더 깊은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이 신빙성이 있다. 일찍이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ISM과 논쟁을 벌일 때, 당시 SSP와 같은 조직들이 활동하고 있는 정치 지형이, 거의 구별도 안 되는 친자본주의 정당들로 채워져 있다는 견해[노동당이 보수당과 매한가지라는 견해]를 비판했다. 캘리니코스는 그런 견해를 가지면 가능성을 실제보다 과장해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개혁주의를 과소평가하면 … 개혁주의가 남긴 공백 전체를 채우려 들 수 있다. SSP 지도부는 사회민주주의가 죽었으므로 일상의 경제적 요구들을 내놓고 투쟁하면 자동으로 급진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것은 모종의 편협한 경제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 예컨대, SSP 지도부의 일부는 자기 당이 우선시하는 경제적 요구들을 중심으로 선거 운동을 벌이려 하면서 … 반전 운동 건설의 의의를 깎아내리는 경향을 보인다.SSP가 분열한 뒤에 마이크 곤살레스는 캘리니코스의 이 비판을 상기시키며 SSP 지도부의 핵심부는 자기 조직이 통제하지 못하는 더 넓은 운동들에 관여하기를 꺼렸다고 주장했다. 곤살레스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전쟁저지연합이 보여 준 최상의 모범[반전 운동을 크게 건설한 것], 특히 무슬림 조직들과 함께하며 거둔 성공을 스코틀랜드에서 재현하려는 것에 그들이 저항한 것을 언급했다. 2005년 스코틀랜드 시골에 있는 글렌이글스 호텔에서 G8 정상 회의가 열리는 것을 겨냥해 커다란 반자본주의 항의 시위가 벌어졌을 때, SSP 지도부는 그 운동을 “중간계급 리버럴들”의 운동이라며 일축했다. 셰리든은 이 쟁점들과 관련해 ISM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ISM 지도자들 중에서는 더 넓은 운동들에 가장 많이 관여한 인물이었다. SSP가 그렇게 파괴적인 분열을 겪지 않았다면 얼마나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 스코틀랜드의 정치 지형은 급진좌파에게 더 유리했다. 노동당 개혁주의가 스코틀랜드에서 특히 급격하게 쇠퇴했기 때문이다. 코빈이 대표일 때조차 노동당은 스코틀랜드 좌파에게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SSP가 자체 위기로 무력해지자, 노동당의 쇠퇴로 정치적 이득을 가장 크게 본 세력은 스코틀랜드국민당(이하 SNP)이 됐다. SNP는 전통적 개혁주의 조직은 아니다. 하지만 앨릭스 샐먼드와 니컬라 스터전이 당대표를 맡은 시절의 SNP는 신노동당이 추구하던 것보다는 좌파적인 온건한 사회민주주의 정책들이라도 내놓고 노동당과 경쟁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다. 이 사례 역시, 개혁주의 의식의 생명력이 끈질기고 그 때문에 새 조직이 등장할 수 있고 그 때문에 혁명적 좌파의 공간이 찌부러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82 결국 SSP는 2021년에 ‘일어나라’를 떠나게 되지만 그 해에 열린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에 출마할 처지도 되지 못했다.
SNP의 부상과 더불어 그리고 그와 연계돼, 2014년 9월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가 치러질 무렵에 대중적 독립 캠페인이 성장했다. 이 운동 역시 대중의 개혁주의 정서가 표출된 것이었다. 여러 단체가 이 운동에 조직적 표현체를 제공하려 했는데, 흔히는 더 주류적 친독립 세력들에게 스스로 종속됐다. 솔리대리티는 우선회를 하면서, 샐먼드가 SNP에서 떨어져 나와 만든 앨바당[‘Alba’는 게일어로 ‘스코틀랜드’를 뜻한다] 속으로 용해됐다. SSP도 한동안은 광범한 독립 운동에 대체로 포함돼 있었다. SSP는 국민투표 후에 등장한 ‘일어나라 – 스코틀랜드 좌파 동맹’이라는 조직에 가입함으로써 다른 좌파적 친독립 세력들과의 재편을 잠깐 도모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프랑스 NPA는 또 다른 흥망성쇠 얘기를 들려준다. NPA는 2009년, 제4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조직인 혁명적 공산주의자동맹(이하 LCR)이 창당한 정당이다. LCR은 올리비에 브장스노를 후보로 내세운 대통령 선거에서 상당한 성공을 맛봤다. 바로 2002년 대선 1차 투표에서 브장스노가 120만 표(4.3퍼센트)를 얻고, 2007년에는 150만 표(4.1퍼센트)를 얻은 것이다. 2002년 대선 1차 투표에서 프랑스 극좌파들이 얻은 표는 모두 합해 10퍼센트를 넘겼다. NPA의 창당 시점 당원 수는 9200명이었다. LCR 회원 수의 거의 세 배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NPA 당원은 2000명도 안 되고, 심각한 내부 분파주의를 극복하려다 최근에 또 분열을 겪었다. 이 재앙적 몰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83 조직 구조 문제도 있었다. LCR과 마찬가지로 NPA도 영구적 내부 플랫폼들을 허용함으로써 분파주의를 제도화했다. 이런 구조는 겉보기로 더 개방적이고 다원주의적일지 몰라도, 조직 전반에서 토론을 억제할 수 있다. 각 플랫폼들이 자신의 입장을 미리 정한 다음 이를 관철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프랑스 정치에서 가장 첨예한 쟁점인 무슬림과 히잡 착용 권리를 방어하는 데서 NPA 지도자들 일부가 명확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 등의 문제였다. 프랑스 좌파의 많은 이들이 대개 이슬람 혐오를 받아들이는 것에 견주면, NPA가 2010년 지방선거에 히잡을 착용하는 21세 여성 일함 무사이드를 자기 당의 후보로 출마시키기로 결정하고 이를 브장스노 등이 강력히 지지해 준 것은 긍정적인 신호였다. 그러나 무사이드가 NPA의 후보가 되자, 다른 좌파들이 이를 헐뜯었을 뿐 아니라, NPA 내부에서도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무사이드와 그의 지지자 일부는 NPA를 떠났다. 그러나 NPA에게 핵심 문제는 좌파 개혁주의, 특히 장뤽 멜랑숑이 이끄는 조직으로 표현된 개혁주의의 부활이었다. 좌파 개혁주의의 압력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이해하려면 NPA의 전략적 관점을 알아야 한다. NPA의 창립 기초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당”이 아니라 “반자본주의 정당”이었다. ISM의 머레이 스미스와 SWP의 여러 지도적 인물들이 논쟁을 하고 있던 2003년, LCR 유명 인사들도 그 논쟁에 참여하며, 좌파 재편 가능성에 대한 자신들의 독특한 견해를 밝혔다. LCR의 견해는 ISM의 견해보다는 미묘했다. 그러나 LCR은 사회민주주의가 [단순 부르주아 정당으로] 변모했다는 스미스의 주장을 약간의 단서를 붙여 지지하면서, 프랑스 공산당 같은 공산주의 세력도 나름의 “단말마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LCR은 스미스의 “전략적 경계가 모호한” 조직이라는 개념을 자신들 나름으로 변형시킨 “전략적 경계가 완성되지 않은 당” 개념을 내놨다.85 또 중요한 것이 있다. NPA의 당명과 지향은 신당이 더 말랑말랑한 “반신자유주의” 조직들처럼 돼서 중도 좌파 세력들과 함께 연립정부에 참여할 유혹을 느끼게 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는 점이다. 86 SWP 당원들은 그런 형식적 장치만 가지고 그 가능성을 막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즉, NPA가 혁명적이지 않은 시기에 선거에서 높은 수준의 지지를 얻는다면, 당명이나 강령이 어떻든지 간에 그런 연립 정부에 참여하라는 압력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현실에서 문제가 확 불거지게 된 것은 NPA가 개혁주의를 받아들여서라기보다는 선거 영역에서 NPA를 능가할 수 있는 좌파 개혁주의 조직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LCR은 NPA 출범 당시 당명에 “반자본주의”를 넣기로 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광범한 정치 환경으로부터 지지자들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혁명”이나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피하면서도 자본주의와의 결별 가능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서는 NPA 창당 초기에 NPA를 둘러싼 토론이 벌어졌다. NPA의 지도자 중 한 명인 프랑수아 사바도는 이런 사태 전개를 미리 보여 주는 듯한 주장을 내놨다.
사회당 좌파의 조직자 중 한 명인 멜랑숑이 그의 개혁주의 사상을 계속 유지한 채 사회당(프랑스의 주요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떠나 … “프랑스판 디링케”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한다면, 혁명가들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멜랑숑을 지지하면서, 프랑스 공산당과 동맹을 맺자는 그의 제안과 계획에 동참해야 할까? 공산당은 앞으로 사회당과 연립정부를 꾸릴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아니면, 멜랑숑이 사회당과 결별한 것을 참작해 그의 세력과 함께 행동 통일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여기면서도, 반자본주의 좌파 건설과 좌파 개혁주의 정당 건설을 혼동하지 않으면 될까? … 혁명 운동의 역사와 NPA가 축적해 온 경험에 비춰볼 때, 프랑스판 디링케 건설은 반자본주의적 대안을 건설하는 데서 후퇴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반자본주의 좌파의 영향을 받는 모든 부문이 전통적 좌파의 지도와는 거리를 두게 된 때에, 새로운 좌파 개혁주의 세력을 세우는 것은 노동자 운동의 퇴보를 뜻할 것이다.
그러나 NPA에 합류한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와 결별하기 위해 애쓴다는 강령을 아주 확실히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다. 실제로, 독자적인 혁명적 조직 LCR을 해산한 것 때문에, NPA로 이끌린 많은 젊은 활동가들과 후에 벌어진 투쟁들에서 급진화한 이들은 자본주의와의 결별 같은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교육과 훈련의 기회가 부족했다. 이 문제는 NPA가 투쟁을 이끌 역량이 있는 개입주의적인 혁명적 조직이 아니라 주되게는 선거 조직을 자처하면서 더 악화됐다. 이[렇게 선거를 과하게 중시하는] 문제는 NPA 창당 이전에, LCR 시절부터 있었다.
LCR은 1968년에 결성된 후 … 대단히 개입주의적이었다. 이 당은 실제로 1973년 파시스트 집회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금지당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혁명적 좌파의 위기에 대응하는 가운데 LCR은 투쟁에 대해 훨씬 더 수동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이런 태도는 LCR이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종종 빠졌던 대리주의적 오류에 대한 과잉 반응이었는데, 그들은 정치 조직은 “사회운동들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며, 투쟁에 수동적이게 된 태도 변화를 정당화했다. 노동조합 등 운동 기구들은 이데올로기들의 충돌과 정치적 견해들의 충돌에서 다소 자유로운 것인 양 말이다. LCR과 그 후 NPA의 활동가 개인들은 파업, 노동조합, 반세계화 연합체들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 정치 조직으로서 LCR과 NPA는 운동에 개입하기 위해 집단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 활동가들을 한데 모아 특정 쟁점에 대해 토론하고 노선을 정하는 것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이는 두 가지 부정적 결과를 낳았다. 첫째, LCR과 NPA가 다양한 투쟁과 운동에 영향을 끼치는 능력이 제약됐다. 둘째, 그로 말미암아 실천에서는 선거가 … 조직이 존재하는 중심 이유가 됐다.
89 이런 상황에서 멜랑숑이 자신의 좌파당과 프랑스 공산당을 결합해 만든 좌파전선이 성장하자 NPA는 심각한 어려움을 맞게 됐다. 좌파전선은 창립된 후에 2009년 여름 유럽의회 선거에 처음 도전했는데 6.5퍼센트를 득표했다. 반면 NPA는 4.9퍼센트를 득표했다. 그다음 2012년 봄 대선에서 멜랑숑은 11.1퍼센트를 득표한 반면, NPA의 후보 필리페 푸투는 겨우 1.2퍼센트를 득표했다. NPA가 반자본주의 공동 후보를 내자고 형식적으로 요구한 것 외에는 좌파전선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면서, 좌파전선은 NPA를 제치고 좌파의 단결을 위하는 세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90 NPA의 당원은 빠르게 감소했고, 당내 분파 간 긴장이 심화했다. 이렇게 당이 마비된 상황에서 초좌파적이고 종파주의적인 분파들이 득을 보기도 했다. 이에 더해서, “반신자유주의” 대통령 후보라는 구상에 공감하는 상당한 의견 그룹이 생겨났다. 이 그룹은 나중에 NPA에서 탈당하고 좌파전선으로 들어가서, 일찍이 멜랑숑의 견해를 지지하며 LCR에서 떨어져 나간 이들과 재통합했다.
이런 태도는 정치와 노동자 투쟁을 아주 별개로 보는 것으로 이어졌고, (국제사회주의경향 소속으로 NPA에 참여하고 있는 이가 말했듯이) 그런 관점 속에서 NPA는 “주로 선거적 표현 수단으로 기능했다.”91 한편 NPA는 같은 선거에서 겨우 0.8퍼센트를 얻었다. 명시적인 좌파 개혁주의 조직이 “전략적 경계가 완성되지 않은 당”을 완전히 밀어낸 것이었다. NPA는 2022년 12월 당대회에서 아주 큰 분열을 겪었고, 당이 쇠락하는 가운데 상대적 비중이 커진 더 종파적인 세력들도 탈당했다. 동시에, NPA 잔류파는 성장하기 위해서는 공동전선 전술을 통해 멜랑숑 지지자들과 관계 맺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6년 멜랑숑은 새로운 조직 불굴의프랑스를 출범시켰다. 이 즈음 사회당은, 2012년에 임기를 시작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에 대한 광범한 환멸로 인해 자유낙하를 하고 있었다. 에마뉘엘 마크롱이 당선한 2017년 대선 1차 투표에서 멜랑숑은 19.6퍼센트를 거머쥐며 4위를 차지했고, 사회당 후보는 겨우 6.3퍼센트를 얻으며 그 뒤를 이었다. NPA의 푸투는 고작 1퍼센트를 득표했다. 2022년 봄 대선에서 멜랑숑의 득표는 22퍼센트로 증가했다. 그 덕에 멜랑숑은 3위를 차지하고 불굴의프랑스는 의회 내 주요 좌파 야당으로 자리매김했다. 좌파 개혁주의의 이런 약진의 결과로, 사회당, 녹색당, 공산당은 멜랑숑이 건설하고 이끄는 신생태사회민중연합NUPES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동맹은 바로 NPA가 그토록 우려하는 범좌파 정부 창출을 목표로 했다.계급 의식이 쇠퇴하고 있다는 분석은 우리를 단호한 공동전선 전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고려하는 데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현재 불굴의프랑스를 뒤흔들고 있는 논쟁에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위기는 주로 그 당과 제도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다. … 이 당의 활동가들에게 개입하려면 우리가 적수가 아니라 협력자로 비쳐야 한다.
이런 방식이 NPA의 쇠퇴를 멈출 수 있을지는 두고볼 일이다.
아일랜드 혁명가들은 아직까지는 다른 사례들보다 행복한 경험을 하고 있다. 지금은 사회주의노동자네트워크(이하 SWN)가 된 아일랜드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출신 활동가들은 어떤 점에서는 이 글에서 다루는 “전략적 경계가 모호한” 조직과 비슷해져 온 형태의 조직을 발전시켰다. SWN이 참여하고 있는 ‘이윤보다 인간을(이하 PbP)’은 이 글을 쓰는 시점에 네 명의 아일랜드 국회의원과 한 명의 북아일랜드 국회의원, 남북 아일랜드 전체에서 열한 명의 지방의원을 보유하고 있다.
93 이런 좌파적 대안을 위한 공간은 2008~2009년 경제 위기 이후 상당히 크게 열렸다. 남아일랜드의 집권당인 ‘피애너 포일(공화당)’의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했다. 2009년 지방선거에서 약 20명의 극좌 후보가 당선했다. 그다음 2011년 선거에서 다섯 명의 극좌파 국회의원이 생겨났다. 두 명은 PbP, 두 명은 사회당, 나머지 한 명은 ‘노동자와 실업자 행동’ 소속이었다. 94 이 국회의원들은 그들 각자의 조직이 연합해 만든 통합좌파동맹의 공동 후보로 출마한 것이다. PbP는 이 성공을 바탕으로 더 전진하기 위해 통합좌파동맹을 당으로 전환하자고 했지만, 다른 단체들은 이에 반대하며 곧 동맹을 탈퇴했다. 95
아일랜드 사회주의노동자당이 2000년대 중반 처음으로 지방선거에 뛰어든 것은 폐기물 수거에 대한 세금(“쓰레기통 세금”)을 신설하는 데 반대하는 상당한 규모의 운동과 반전 운동 등 여러 운동들이 벌어지는 상황에서였다. 브리드 스미스와 리처드 보이드 배럿은 모두 잘 알려진 사회주의 활동가로 2004년에 아일랜드 사회주의노동자당 후보로 출마했고, 이듬해 ‘이윤보다 인간을 동맹’을 출범시키는 데 일조했다. 해당 지역의 특징을 잘 포착한 그들의 선거 운동은 비교적 성공적이었고, 두 후보 모두 당선할 뻔했다.96 그 결과 2016년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아일랜드 노동당이 연립정부에 참여한 것을 심판했고, 동시에 PbP와 AAA의 동맹은 각각 세 석씩 모두 여섯 석의 국회 의석을 차지했다.
아일랜드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들이 PbP 건설에 힘쓰고 있을 때, 강력한 운동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그 노력은 힘을 얻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수도세 신설에 반대하는 항의 운동이었고, PbP의 여러 회원들이 여기서 두드러진 구실을 했다. 2014년에 PbP와 긴축반대동맹(이하 AAA, 사회당이 만든 조직으로 나중에 솔리대리티(아일랜드)로 이름을 바꿨다) 모두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AAA는 그해 치러진 두 번의 보궐선거에서 승리했다. PbP와 AAA는 주류 좌파 정당들의 패착에서도 득을 봤다. 아일랜드 노동당은 경제 위기가 터지고 나서 처음에는 지지율이 상승했다. 그러나 의회 내에서는 좌파가 작은 데다가, 아일랜드 노동당은 주요 친자본주의 정당인 ‘피네 게일(통일아일랜드당)’과의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오래된 습성이 있었다. 2011년에 노동당은 또 연립정부에 참여했고, [경제 위기와 긴축에 대한] 대중적 불만이 불러오는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이때쯤에는 경제적 요구를 내건 운동이 줄어들고 있었지만, 좌파는 계속해서 낙태 금지 법률 반대 운동이나 기후 운동 같은 중요한 정치 운동들에 관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6년 총선과 2020년 총선 사이에 개혁주의 좌파 세력들의 지형이 달라졌다. 2020년 총선에서 신페인당은 살짝 좌파적으로 선거 운동을 펼치며 대승을 거뒀다. 신페인당은 제1 선호 투표에서, 24.5퍼센트를 득표하며 1위를 차지했다. 이전 선거 득표율보다 10퍼센트포인트나 급상승한 것이다. 이제 신페인당은 피애너 포일과 피네 게일 연립정부에 맞선 제1 야당 구실을 하게 됐다. SWN의 지도적 당원 키어런 앨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페인당이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개혁주의적 염원이 표현되는 주요 수단이 됐다. 개혁주의[정당]는 보통은 사회민주주의 전통에서 생겨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 사회민주주의 전통이 강력하지 않은 곳에서는 다른 정치적 표현체를 발견할 것이다.반면, 노동당과 다른 온건 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둘이 합쳐 겨우 7퍼센트를 넘겼다. PbP와 솔리대리티 공동 후보단은 신페인당의 부상으로 지지율이 줄었지만 그래도 PbP는 세 석의 의석을 유지했다. 나중에 다른 국회의원 폴 머피가 PbP에 가입했다. 2019년에 사회당과 갈라선 그의 조직 ‘일어나라’는 이제 PbP에 합류했다. 이로써 PbP는 남아일랜드에서 신페인당 왼쪽의 주요 정당으로 입지를 굳혔다. PbP는 어떤 종류의 조직인가? SWN은 PbP를 “과도적 조직”으로 보며 공동전선과는 다르다고 한다. “PbP는 분명한 정당으로, 선거에 계속 출마할 뿐만 아니라 포괄적인 정책 강령도 가지고 있다.” SWN은 PbP를 개혁주의 정당으로나 심지어 “시리자, 포데모스, 디링케 같은 좌파 개혁주의” 정당으로 보는 견해도 반대한다. 그 대신에 NPA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정식에 공감하며 PbP를 “철저하게 반자본주의적이고, 부르주아 정당들과의 연합을 반대하며, 정말로 체제와 대결할 태세가 된 정부에만 들어갈 준비가 된” 조직으로 여긴다. 그러나 “아직은” 완연한 혁명적 당이 “아니”고 비혁명가들에게도 개방돼 있다고 한다. 그래도 “PbP의 지도부는 공공연한 혁명가로 이뤄져 있다. … 이 조직 모임의 문화와 정서는 … 분명히 사회주의적이고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적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정당 개념은 그 발전 과정의 산물이다. PbP는 반신자유주의 연합체로 시작했고, 그 안에서 처음에는 혁명가들이 좌파 개혁주의적 담론을 얘기하곤 했지만, “조직된 개혁주의의 축”이 없는 가운데 점차 공공연한 사회주의 조직으로 변하며 혁명적 전통으로 끌리고 있다는 것이다.
PbP가 이 글에서 논의한 다른 모델들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 앞에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난관들을 강조할 가치가 있다. 첫째는 개혁주의와 좌파 개혁주의의 지형이 변하는 것이다. PbP를 주도하는 이들은 PbP를 개혁주의 조직으로 여기지 않을지라도, PbP에 투표하는 많은 사람들은 PbP가 마침내 집권해서 그 힘으로 개혁을 가져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투표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그 유권자들이 PbP의 당원들이 의회 밖 행동에서 하는 구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인정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개혁을 가져올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 다른 좌파적 선택지가 생긴다면, 유권자들은 PbP에서 그쪽으로 옮겨 갈 가능성이 생긴다. 남아일랜드에서는 노동당이든 사회민주당이든 최근 몇 년 동안에는 그런 구실을 하지 못했지만, 앨런이 지적했듯이 신페인당은 그 정당들보다 더 신뢰를 받게 될 수도 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많은 신페인당 지지자들이 제2 선호 투표에서는 PbP를 골라 준 덕분에 PbP가 의회 밖으로 밀려나지 않았다.
100 신페인당이 성장하면 다른 전략적 쟁점도 생길 수 있다. 특히 “좌파 정부”의 등장 가능성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을 다루는 것이 사활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101 이런 난관들이 예상된다고 해서 PbP가 이룬 성취와 PbP에 참여한 이들이 선거 영역에서 생긴 기회를 부여잡고 그들이 획득한 연단을 활용하며 보여 준 정열의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장차 생겨날 수 있는 어려움이 무엇일지 속속들이 이해하려면 PbP의 경험은 물론이고 유럽 다른 나라 혁명가들이 선거 활동에 관여한 덜 고무적인 사례들을 맥락 속에서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난관은 PbP가 이루는 선거적 성공을 보며 입당하는 사람들이 생기면,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된 개혁주의 경향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SWN이 PbP의 지도부 안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이지만, ‘일어나라’가 하나의 조직으로 PbP에 가입하기로 결정했고 자체 잡지와 팟캐스트를 갖고 있으므로, 장래에는 PbP 안에서 더 첨예한 논의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몇 가지 교훈
유럽의 혁명적 좌파들이 선거에 개입한 경험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선거 영역은 2000년대 초와 2008~2009년 경제 위기 이후 여러 해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예상한 것보다 [혁명가들에게] 훨씬 덜 유리한 곳임이 입증됐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들이 단지 불운한 사고나 혁명가들의 고유한 오류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다. 그런 사고와 오류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더 깊은 정치적 요인, 즉 혁명적이지 않은 시기에는 개혁주의가 선거 영역에서 뚜렷한 강점을 누린다는 것에서 비롯했다. 혁명가들도 참여하는 급진[좌파] 조직이 돌파구를 열며 기성 사회민주주의 조직에 도전하거나 심지어는 그 조직을 밀어내는 순간이 이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지나가면 개혁주의는 새로운 형태나 재편된 형태로 다시 조직돼 혁명가들에게 열려 있던 공간을 압박해 들어올 것이다. 혁명가들의 선거 관여 조직들을 개혁주의가 가하는 압력에서 완벽하게 보호해 줄 조직 형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조직의 구체적 장단점이 무엇이든 말이다.
이런 어려움을 인식할 때 피해야 할 중대한 위험은 무능한 종파주의나 혁명적 교조주의로 미끌어 떨어지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이 아직은 비교적 단편적인 조건에서는 종파주의적 그룹이 번창하고 성장할 수 있고, 특히 더 큰 극좌파 조직이 위기에 빠져 있다면 더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에서 NPA가 급격히 몰락하면서 일어난 일이 바로 그런 것이고, 유럽의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사태 전개가 목격된다. 그러나 그런 종파주의적 그룹은 노동계급이 비교적 조용할 때 이룬 점진적 성장을 대중 투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의 성공으로 전환할 능력이 거의 없다. 그 단체 회원들은 한쪽으로 치우친 방식으로 훈련받고 성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치적 기회를 잡으려는 본능, “좌파 재편”과 더 일반적으로는 선거 활동을 둘러싼 논의에 관여하려는 본능은 좋은 것이다. 남·북 아일랜드 혁명가들이 의회에 들어가 그 지위를 활용하며 보여 준 것처럼,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 의회의 의석을 획득하는 것은 분명히 이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 그리스의 안타르시아처럼 선거 활동과 함께 투쟁 개입을 강조하는 반자본주의적 연합체도 그중 하나일 수 있다. 이 글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더 깊이 살펴볼 가치가 있는 유럽 바깥의 모델도 있다. 예컨대, 아르헨티나 트로츠키주의 정당들의 선거 연합 ‘노동자 좌파 전선-단결(이하 FIT-U)’이 반자본주의적 공약을 내놓고 선거에 출마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FIT-U 모델을 그대로 영국에 이식한다고 해서 곧바로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맥락이 중요하다. 개혁주의 세력들의 구체적 편제, 혁명적 좌파의 힘, 계급 투쟁의 상태를 포함하는 맥락 말이다.
이런 가능성을 살펴보면, 혁명가들은 광범한 선거연합을 만들거나 거기에 참여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일종의 혁명적 포모fomo 증후군(“fear of missing out”의 줄임말로, 유행에 뒤처지거나 남들과 동떨어질까 봐 불안에 시달리는 것)을 겪을 수 있는데 그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앞에서 봤듯이 그리스에서 시리자가 성장하고 선거에서 돌파구를 열기 시작하면서 극좌파에게는 시리자에 참여해야 한다는 압력이 가해졌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혁명가들이 그런 압력에 저항한 것은 명백히 옳았고 우리는 이 경험에서도 배울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지난 30년에 걸쳐 축적된 경험들이 있다는 것이 주는 이득은 우리가 위험 감수를 회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더 영리하게 베팅하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1990년대 말이나 2000년대 초의 혁명가들과는 처지가 다르다. 당시 혁명가들은 러시아 혁명 등 양차 대전 사이 기간에 벌어진 격변에 대해 심사숙고한 것을 주되게 참고하곤 했다. 우리가 거기서 확실히 배울 수 있는 것은, 혁명적 대중정당은 SWP 같은 조직이 조금씩 점진적으로 성장해서라기보다는 [혁명가들이] 더 커다란 개혁주의·중간주의적 조직들과 갈라서고 융합하는 과정에서 생겨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이 혁명가들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고 지속적인 수준의 노동자 투쟁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 투쟁이 벌어지면 정치 지형이 개혁주의의 협소한 비전에서 벗어나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자주적 행동으로 확 옮겨 가게 될 것이다. 불행히도, 최근 수십 년 동안 유럽에서 그런 일은 없었다. 이런 현실이 바뀔 때까지 우리는 지금의 조건에서 다양한 실험이 어떻게 전개됐는지에도 주목해야 한다.
영국 혁명가들의 전망 여기 영국의 혁명가들은 보수당 정부를 상대하고 있다. 보수당 정부는 상당히 노쇠해 보이지만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을 공격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고, 대중의 분노를 작은 배로 영국해협을 건너오는 난민들에게로 돌리려고도 한다. 스타머가 이끄는 공식 야당인 노동당은 당내 좌파를 공격하고 있으며, [집권하면] 공공서비스를 토니 블레어 정부나 고든 브라운 정부 때보다 훨씬 더 “개혁”할 것이라고 벼르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계급 투쟁이 “가다 서다 회복”을 하고 있다. 1980년대 말 이래로 가장 오래 지속된 파업도 그 일부이다. 비록 이 행동은 노조 관료가 주관하고 있지만 말이다. 조직된 개혁주의의 특정한 형태인 노조 관료는 파업을 일정 범위 안에 가두는 능력을 그동안 보여 왔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내년에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총선에서 코빈과 애벗 같은 인물들이 노동당 바깥의 좌파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결정한다면 무조건 환영해야 한다. 그들이 노동당과 결별한다면 노동계급의 정치적 급진화가 지배적 개혁주의 정당의 틀을 넘어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 줄 것이다. (노동당 의원들에게 파업 현장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도 말하는) 스타머의 명령을 거스르는 그런 행동은 투쟁하려는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더 높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코빈주의가 노동당 개혁주의의 좌파적 변종으로 남아 있더라도, 코빈이 리빙스턴처럼 선거 승리 후에 노동당으로 복귀하기를 염원할지라도 마찬가지다.
103 이 결과에서도 지배적인 정치는 노동당 개혁주의의 좌파적 변종으로서의 코빈주의다. 이 사례를 제외하면 급진좌파 후보들은 대부분 형편없거나 그저 그런 결과를 얻었다. 스타머와 보수당 모두에 반대하는 항의성 투표에서 득을 본 쪽은 주로 녹색당이다. 물론 앞으로 스타머 정부가 들어서고 두어 해가 지나면 사정이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노동당에서 중대한 좌파적 분열이 일어날 것이라는 근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선거에서 우리는 믿을 만한 좌파 후보가 없는 곳에서는 노동당에 대한 비판적 투표를 하자고 계속 주장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노동당 개혁주의에 환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보수당에 반대하는 정서와 연대하는 기초적 행위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더 광범한 투쟁들 속에서 공동 행동을 하자고 노동자들을 더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다.
영국의 우리는 독립된 혁명적 사회주의자 부대로서, 믿을 만한 좌파 후보들을 지지하고 그들을 위해 선거 운동을 하면서도, 주로 선거 활동을 지향하는 개혁주의자들과의 공동 조직 결성을 주된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지금으로서는 복잡하지 않은 문제일 것 같다. 올해 5월 지방선거에서는 좌파 측에서 소소하지만 인상적인 결과가 나왔다. 대체로 전 노동당 지방의원으로 구성된 ‘리버풀 지역 무소속 후보’ 중 세 명이 당선한 것이다.104 역설이게도, 선거와 의회적 책략에 몰두하는 것은 급진좌파가 선거에서 돌파구를 여는 데 흔히 도움이 되는 투쟁을 약화시킬 수 있다.
노동당 바깥 좌파들의 선거 운동에 관여하고 있다면, 선거 활동을 하라는 요구를 상당히 강하게 받을 수 있음을 이해하면서도 다른 중요한 여러 활동들을 소홀히 하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파업 운동에서 미약하게나마 나타나는 평조합원의 진취성을 발전시키는 것, 인종차별과 극우의 위협에 맞서 싸우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코빈이 노동당 내에서 우세하던 시절은 사회주의 사상이 다시 대중화 됐기에 반가운 때였지만, 좌파의 많은 이들이 노동당으로 흡수된 것은 광범한 사회 운동들이 선거 영역을 뛰어넘어 전진하도록 하는 데서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마지막으로, 선거 활동이 중요하긴 하지만 더 커다란 목표, 즉 혁명적 조직이 노동계급에 더 깊이 뿌리내린다는 목표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최근 수십 년간의 집단적 경험은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준다. 이 교훈에서 배운다면, 앞으로 우리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더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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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 당원들과의 토론에 힘입어 썼다. 그러나 오류가 있다면 모두 내 책임이다.
출처: Joseph Choonara, “Revolutionaries and Elections”, International Socialism 179 (Summer 2023).
↩
- 스코틀랜드 문제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이번 호에 실린 다른 글을 보라. ↩
- Prasad, 2023. ↩
- 이 글이 다루지 못한 중요한 사태 전개들이 유럽 바깥에 있다. ↩
- Lenin, 1993, pp65 and 68-69. ↩
- 이런 견해에 대한 고전적 설명은 Barker, 1987을 보라. ↩
- 만약 영국 하원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전체 650석 중] 325석을 차지할 정도로 영국 노동계급이 급진화된 상황이라면, 이미 혁명적 상황이 도래했다고 볼 수 있고 그러면 당선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선거 강령에는 노동자 봉기가 포함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 Sándor John, 2009, pp92-93. ↩
- 혁명 전 러시아에서 이 원칙을 견지하기 위한 노력에 대한 설명은 Badayev, 1987을 보라. ↩
- 여기에 나온 수치들은 존 루지가 공유해 준 연구 보고서에서 가져 온 것이다. 루지는 초기 IS와 그 전신인 사회주의평론그룹이 노동당 안에 있는 소규모 경향이었을 때는 트로츠키가 “간부의 원시 축적”이라고 부른 활동을 하면서 여러 회원이 노동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고도 지적한다. 그들 중 몇몇은 득표가 꽤 좋았는데, 흔히 30퍼센트 정도였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노동당 후보로 출마한 덕분이었다. 사실 이렇게 의석을 얻고 유지하려면 노동당의 주류적 정치를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은 거의 잊힌 일화가 있다. 1966년 총선에서 오랜 IS 회원인 시드 비드웰은 사우스홀에서 노동당 후보로 출마해 의석을 획득했다. 그는 인종차별주의에 영합하는 선거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투표일 몇 주 전 IS에서 제명됐다. ↩
- 이런 관점도 1920년대 초 레닌이 영국의 신생 공산주의 운동에 조언한 것에 근거하고 있다. Lenin, 1993, chapter 9를 보라. ↩
- 영국에서 신자유주의가 승리하는 기초를 놓은 건 1974~1979년 노동당 정부였다는 사실도 기억할 만하다. 당시 노동당 정부는 마거릿 대처 정부[1979~1990년]의 전임 정부였는데, 케인스주의에 대한 굳건한 신념을 내버리고 통화주의 정책을 펼쳤다. Cliff and Gluckstein, 1996, pp320-332을 보라. ↩
-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운동은 종종 반자본주의 운동이나 대안 세계화(프랑스에서는 탈세계화) 운동으로도 불렸다. ↩
- 앞으로는 제4인터내셔널통합사무국을 간단히 제4인터내셔널이라고 부르겠다. ↩
- 노동자인터내셔널위원회와 달리 SWP는 노동당을 “자본주의적 노동자당”으로 본다. 즉, 노동당은 자본주의의 이익을 방어하지만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받고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계급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정당이다. 레닌의 저작에서 비롯한 이 규정 덕분에 우리 SWP는 노동당 개혁주의의 좌우 진자 운동을 보며 환상에도(좌경화할 때) 종파주의에도(우경화할 때)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Cliff and Gluckstein, 1996, pp1-2를 보라. ↩
- 예를 들어 Callinicos, 2012a를 보라. ↩
- Gramsci, 1998, p333. ↩
- Trotsky, 1997, p18. ↩
- 그 역사 초기의 많은 경험은 Hallas, 1982에 상세히 설명돼 있다. 입당 전술로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중간주의 조직”이라고 부르는 당에 혁명가들이 입당하는 형태가 흔했다. 여기서 중간주의 조직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존재한 개혁주의 조직들을 뜻하는데, 그 정당들은 사태 전개의 압력에 밀려 최소한 말로는 혁명에 헌신한다고 밝혔지만, 실천에서는 개혁과 혁명 사이에서 동요했다. 이 전술은 트로츠키가 (몇몇 경우에) 혁명적 경향을 키우기 위한 전술로 제안한 것이었다. 이 기간에, 아주 작은 영국 트로츠키주의 좌파가 중간주의 조직인 독립노동당ILP에 입당해 수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했다. 그러나 그 혁명가들이 ILP에 동화되고 ILP를 혁명 쪽으로 설득해 낼 수 없음이 명확해졌는데도 나오려 하지 않으면서 그 트로츠키주의 좌파는 약화됐다. 입당 전술을 사용해 매우 제한적인 성공을 거둔 사례나 실패했지만 곱씹어 볼 사례에 대해서는 Cliff, 1993, pp224-234를 보라. ↩
- 밀리턴트 경향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노동당에서 쫓겨나면서 두 그룹으로 분열했다. 하나는 ‘소셜리스트 어필’ 그룹으로, 1992년 창립 때부터 노동당에 계속 남아 있으려 했지만, 결국 2021년에 스타머에게 축출당했다. 최근에 소셜리스트 어필은 마르크스주의를 비교적 교조적으로 주장하는 ‘마르크시스트 소사이어티’를 조직해 대학가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다른 하나는 사회당으로, 이제는 노동당을 철저한 자본주의 정당이라고 비난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사회당은 지금 ‘노동조합-사회주의자연합TUSC’을 장악하고 있다. 셋째 그룹인 ‘소셜리스트 얼터너티브’는 차별 반대 정치에 대한 입장을 두고 사회당에서 떨어져 나온 단체다. ↩
- McGregor, 1986, p69에서 인용. ↩
- McGregor, 1986, p61에서 인용. ↩
- 이것은 클리프의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소련이 없는 지금도 여전히 의미가 있음을 보여 주는 여러 사례 중 하나다. 이 이론은 경제를 전면 국유화하면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자력·자기 해방을 이루지 않아도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도전했다. Cliff, 1996을 보라. ↩
- 지면 제약으로, 이탈리아의 재건공산당(‘리폰다치오네 꼬무니스따’), 포르투갈의 ‘좌파 블록’, 노르웨이의 적색당처럼 중요한 여러 사례는 이 글에 다루지 않았다. ↩
- Callinicos, 2012a, pp12-14를 보라. ↩
- 그리스에는 공산당 전통에서 뻗어 나온 정당이 여럿인데 오랫동안 따로따로 선거에 출마하며 활동했고 선거제도가 영국보다 소규모 정당에 훨씬 덜 가혹하다. 이것이 시리자가 처음부터 어느 정도 선거에서 성과를 얻는 데 도움이 됐다. 이런 성과는 시리자가 그 뒤에 더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
- Garganas, 2015을 보라. ↩
- 예를 들어 Davanellos, 2014를 보라. ↩
- Internationalist Workers’ Left, 2015. ↩
- Kouvelakis, 2015 ↩
- 쿠벨라키스는 치프라스의 항복을 제1차세계대전 개전 직후 독일 사회민주당이 제국의회에서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진 것[즉, 자국의 전쟁 노력을 지지한 것]에 빗댄다. Garganas, 2015, p20을 보라. 레닌은 사회민주당 기관지에서 이 찬성 투표 소식을 읽었을 때, 이것은 독일 군부가 날조한 것임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한탄스럽게도, 시리자의 굴복은 훨씬 더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
- Garganas, 2012, p199에서 인용. ↩
- Callinicos, 2012a, p19. ↩
- Callinicos, 2012a, p21. ↩
- Sierra, 2017과 2022를 보라. ↩
- Barriere, Durgan and Robson, 2015, p19에서 인용. ↩
- Barriere, Durgan and Robson, 2015, pp25-27. ↩
- Barriere, Durgan and Robson, 2015, p28. ↩
- Bravo, 2016에서 인용. ↩
- Sierra, 2017, p59. ↩
- Sierra, 2022, p153에서 인용. ↩
- https://twitter.com/PabloIglesias/status/1227684462718341122를 보라. ↩
- 나의 번역. 원문은 www.anticapitalistas.org/wp-content/uploads/2022/06/III-Congreso-Anticapitalistas-Documentos-p%C3%BAblicos.pdf에서 볼 수 있다. ↩
- Bornost, 2007 ↩
- www.marx21.de/die-linke-wie-weiter-nach-dem-wahldebakel를 보라 ↩
- 바겐크네히트는 책 《독선》을 써서 자신이 “라이프스타일 좌파”와 “정체성 정치”라고 부르는 것을 격하게 비판했다. ↩
- Connolly, 2018. ↩
- Buchholz, Mosler and Mosler, 2006. 이것은 별 생각 없이 던지는 말이 아니었다. Nachtwey, 2009, pp33-34에도 아주 유사한 구절이 나온다. ↩
- 여기서 쓰인 “중간주의”에 대해서는 각주 19를 보라. ↩
- 나중에 전개된 이런 상황을 보면, 이 시기 가장 유능한 독일 혁명가 중 한 명인 클라라 체트킨이 룩셈부르크가 USPD와 결별한 것을 왜 너무 이른 것이었다고 봤는지 쉽게 알 수 있다. Birchall, 2016, p189. ↩
- Harman, 1982, pp36, 55, 63, 65-95 and 191-218; Broué, 2004, pp189-225. ↩
- 이런 활동 방식을 보여 주는 것으로는 제인 맥컬레비의 조직 전략을 찬양하는 Stierl, Billor and Dormann, 2019를 보라. 반대로 이런 활동 방식을 비판하는 것으로는 Brook, 2022를 보라. ↩
- 이 정식은 존 리즈가 SWP 당원으로 선거 활동 지도를 담당하고 있을 때 발전시킨 것이었다. 예컨대, Rees, 2002, p63을 보라. ↩
- Trotsky, 1974, p93. ↩
- Trotsky, 1974, pp93-94. ↩
- Trotsky, 1974, p94, ↩
- Trotsky, 1974, p96. ↩
- Trotsky, 1975. ↩
- Rees, 2002, p64. ↩
- 이 조직의 전체 이름은 ‘리스펙트 단결 연합’이었다. ↩
- 새로 생긴 런던 시장직을 처음으로 선출하는 이 선거에서 리빙스턴이 승리한 것은 블레어에게 굴욕이었다. 그러나 리빙스턴의 첫 임기가 끝나는 2004년에 블레어는 리빙스턴에게 복당해서 노동당 후보로 나서 달라고 요청했다. 노동당에 강하게 집착하는 실용주의자 리빙스턴은 이를 수용했고, 조금 줄어든 득표로 재선에 성공했다. 리빙스턴의 궤적에 대해서는 Kimber, 2007을 보라. ↩
- 사회당의 이언 페이지도 그리니치 루이셤 선거구에서 4.2퍼센트를 얻었다. ↩
- SWP 당원들은 해크니 사우스 앤 쇼어디치 선거구에서 4.6퍼센트를 얻었고 토트넘에서 3.7퍼센트를 얻었다. ↩
-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리즈 데이비스였다. 그는 전 노동당 지방의원이자 전국집행위원회 위원이었고, 2001년에 SA 의장이 됐다. 데이비스는 그 9개월 뒤에 사임했는데, SWP가 SA를 지배하고 있고 9·11 테러 공격 후 전쟁저지연합 건설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는 것이 사임의 이유라고 말했다. ↩
- 갤러웨이는 좌파로서의 믿음직함이 토니 벤, 다이앤 애벗, 제러미 코빈 같은 인물들에 견주면 여러모로 약했다. 갤러웨이는 노동당 좌파 의원들의 모임인 ‘사회주의 캠페인 그룹’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는 마거릿 대처의 종말을 초래하는 데 일조한 1990년 주민세 반대 운동이 일어났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광인들과 아나키스트와 그밖의 극단주의자들, 주로 SWP 소속의 이 자들은 시종일관 큰 소란을 일으키려고 뛰쳐나온 것이다.” Harman, 2008, p32에서 인용. ↩
- 처음에 리스펙트는 녹색당과 선거 협정을 맺으려 애썼지만 퇴짜를 맞았다. ↩
- 이 지역 주민의 약 3분의 1이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밝힌다. 노스이스트 런던 선거구처럼 무슬림 유권자가 훨씬 적은 지역에서 리스펙트는 과거 SA보다 단 몇 퍼센트포인트 많이 득표했다. ↩
- 이 문서는 www.whatnextjournal.org.uk/Pages/Politics/RespectDebate.html에서 볼 수 있다. ↩
- Harman, 2008, pp33-37을 보라. ↩
- 야쿱은 2012년에 갤러웨이와 결별한 인사 중 한 명이다. 그때 갤러웨이는 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안 어산지에게 제기된 강간 혐의에 대해 그저 “성적으로 부적절한 에티켓”일 뿐이라고 했다. 제4인터내셔널은 그보다 2년 빨리 갤러웨이를 떠났는데 당시 갤러웨이가 제4인터내셔널이 지지하는 SSP와 상의하지도 않고 스코틀랜드에서 출마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
- 이 표현 자체는 Smith, 2002a에 나온다. ↩
- 어떤 면에서는 SWP가 잠깐 참여했던 ‘노동조합-사회주의자연합’(이하 TUSC)이라는 가장 최근의 조직도 이 개념에 잘 들어맞는다. TUSC는 처음에는 사회당, SWP, 철도해운교통노조RMT 지도부의 연합 조직이었다. TUSC는 2010년에 결성됐고, SWP는 2017년에 탈퇴했다. TUSC는 선거 조직으로서는 제한적인 성공만 거뒀다. 게다가 코빈이 노동당 대표가 되자, 노동당에 대항하는 좌파적 선거 플랫폼으로 출마하는 것이 의미 있는 결과를 낳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졌다. 2022년 RMT가 공식적으로 탈퇴하면서 TUSC는 주되게는 사회당의 외피로 얼마간의 개인 지지자가 남아 있는 조직이 됐다. 그러나 사회당은 때때로 TUSC를 공동전선에 견주기도 한다. Heemskerk, 2019를 보라. ↩
- ISM은 2006년에 스스로 해산했다. ↩
- Smith, 2002b, pp44-45. 이 점에 대해서는 Smith, 2003도 보라. 스미스의 정치 이력은 흥미롭다.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뒤에서 논의할 반자본주의신당(이하 NPA)을 창립하는 혁명적공산주의동맹(이하 LCR)에서 활동했다. LCR이 NPA를 만들 때 스미스는 LCR에서 탈당하고 좌파전선에 합류했다. 그러다가 룩셈부르크로 가서 좌파당The Left의 지도자가 됐다. 이런 궤적 속에서 그는 좌파 개혁주의에 근접하며 그것에 반자본주의적 포장지를 입히기도 했다. 10년 전에 쓴 주목할 만한 글에서 그는 프랑스 공산당과 시리자 같은 정당은 개혁주의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Smith, 2013을 보라. ↩
- McKerrell, 2002, p55를 보라. ↩
- Smith, 2002b, p47. ↩
- Smith, 2003, p73. ↩
- Smith, 2003, p74. ↩
- Callinicos, 2003. ↩
- Gonzalez, 2006. ↩
- 이 사태 전개에 대해서는 Davidson, 2008을 보라. ↩
- ‘일어나라’는 SWP에서 분열해 나간 소규모 조직인 국제사회주의자그룹(스코틀랜드)이 2015년에 결성한 조직이다. [조직명인 ‘일어나라RISE’는 영어 단어 Respect(존중), Independence(독립), Socialism(사회주의), Environmetalism(환경주의)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 옮긴이] ↩
- Wolfreys, 2015, p38. ↩
- Bensaïd, Crémieux, Duval and Sabado, 2003을 보라. ↩
- 그러나 NPA 창당 대회의 당명 결정 투표에서 많은 대의원이 [“반자본주의신당” 대신에] “혁명적 반자본주의당”을 지지하면서 접전이 벌어졌다. ↩
- Callinicos, 2008, pp97-101를 보라. ↩
- Sabado, 2009, pp145-146. ↩
- Callinicos, 2012b, p23. ↩
- Godard, 2013, p207. ↩
- Callinicos, 2012a, p21; Wolfreys, 2012, pp39-47. ↩
- NPA도 이 연합체 구성을 위한 대화에 참여했지만 사회당이 여기에 올라타자 조직으로서 참여하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
- https://lanticapitaliste.org/actualite/politique/npa-un-pas-en-arriere-pour-des-pas-en-avant 를 보라. ↩
- Molyneux, 2022, pp27-28. ↩
- 사회당은 [밀리턴트 경향과 연관된] 아일랜드 노동자인터내셔널위원회 소속 단체였다. ↩
- Molyneux, 2022, p29. ↩
- 아일랜드 노동당은 아일랜드 최대 노조인 서비스산업전문기술직노동조합SIPTU 관료들과 연결돼 있기도 한데, SIPTU 지도자들은 20년 넘게 사용자들과 “동반자 관계”를 맺어왔다. ↩
- Allen, 2021a. ↩
- 북아일랜드는 남아일랜드와는 다른 자체의 정치 동학이 있지만, 통일된 사회주의 아일랜드를 지지하는 PbP는 여기서도 인상적인 결과를 얻었다. [PbP 소속] 게리 캐럴이 2016년 벨파스트 웨스트에서 1위를 하며 북아일랜드 의회 의석을 차지했고, PbP는 몇 개의 지방의회 의석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약진은 PbP가 수년 동안 여러 쟁점을 둘러싸고 단호한 운동을 벌이고 주류 정당들이 약화된 것을 반영한다. 또 PbP가 남·북 아일랜드 양 국가 모두의 본질에 비판적이고, 민족 문제에 대해 선명하고 독특한 입장을 발전시킨 것도 한몫했다. PbP는 개신교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에 단호히 반대하고, 노동계급의 투쟁을 통한 통일 아일랜드를 지지한다. Molyneux, 2022, p34를 보라. ↩
- Molyneux, 2022, pp35-36. ↩
- www.letusrise.ie/featured-articles/rise-joins-pbp ↩
- 이에 대해서는 예컨대 Allen, 2021b를 보라. ↩
- Choonara, 2023. ↩
- Socialist Worker, 2023. ↩
- 코빈주의의 흥망에 대한 기록으로는 Thomas, 2017, Kimber, 2020, and Kimber, 2021을 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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