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실된 혁명: 독일 1918~1923년 *
다음은 2017년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주최하는 맑시즘 중 동명 워크숍의 발제와 정리 발언을 녹취·번역한 것이다. 발제자는 청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적 상황을 재현하는 화법을 종종 사용했는데, 그런 대목은 홑따옴표로 표시해서 엄밀한 인용과 구별해 놓았다. [ ] 안의 내용은 편집부가 독자의 이해를 위해 추가한 것이고 소제목도 편집부가 추가했다. — 《마르크스21》 편집부
먼저 일요일 아침 10시 강연에 시간 맞춰 오신 여러분 축하 드립니다.
코민테른 의장이었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가 1923년 가을에 한 말을 인용해 보죠.
독일 상황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발전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이 1906년부터 1917년까지 12년에 걸쳐서 밟은 경로를 독일 혁명은 1918년부터 1923년까지 단 5년만에 밟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독일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오직 눈 먼 자만이 이 자명한 상황을 보지 못할 것이다. … 곧, 모두가 1923년 가을이 단지 독일의 전환점이 아니라 전 세계의 전환점이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자, 슬프게도 1923년이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의 말은 틀리게 됐습니다. 그리고 독일 혁명이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자 엄청난 후과를 낳았지요.
한편으로는, 독일 혁명 이전까지 러시아는 온 나라가 내전으로 쑥대밭이 되고 러시아 공산당도 내부 파벌 싸움으로 난장판인 상황이었습니다. 스탈린주의의 등장과 혁명의 패배로 나아가는 길이 닦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록들에 따르면 [독일 혁명이 절정에 달했던] 1923년 여름과 초가을 러시아에서는 이런 분위기 대신에 혁명적 가능성에 대한 열광이 꽃을 피웠었습니다. 그렇지만 [독일 혁명 패배 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1924년에는 스탈린주의의 시작과 “일국 사회주의” 선언이 이어집니다.
독일 혁명의 패배는 명백히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뒤 10여 년의 기간에 히틀러가 부상했고 제2차세계대전이 벌어졌습니다. 독일 혁명은 아주 큰 판돈이 걸린 사건이었던 겁니다, 그렇죠? 제1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벌어진 일은 향후 수 세대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줬습니다.
독일 혁명에 대해 둘째로 지적할 것은 대다수 사람들은 이에 대해 전혀 들어 보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도 않거니와 어디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여러 전략과 전술, 예컨대 공동전선이나 개혁주의에 대한 분석, 혁명가들은 개혁주의적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가 등의 것들이 독일 혁명 당시 매우 첨예한 상황에서 토론됐고 또 그 결과가 현실에 적용됐습니다.
그리고 독일 혁명에서는 단지 혁명적 행동이 벌어진 것만이 아니라 코민테른을 통해 독일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갈 이론적 논의도 진행됐습니다. 코민테른은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건설한 제3인터네셔널입니다.
자, 이제 격동의 사건들을 살펴봅시다.
독일 혁명은 1918년 11월에 시작됐습니다. 이는 제1차세계대전을 끝내는 가장 큰 한 방이자 마지막 한 방이었습니다. [제1차세계대전이 벌어진] 1914년부터 1918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혈낭자한 시기에 속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유럽에서 벌어졌지만 또한 세계적 전쟁이기도 했죠.
당연히 독일은 이 전쟁의 가장 중심에 있었습니다. 수년 동안 노동계급 사람들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사상자와 고통이 발생했고, 무장 저항도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1918년 11월 독일 군대가 사실상 붕괴하던 와중에 독일 해군 지휘부는 마지막 큰 전투를 벌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영국의 해군을 타격하고 독일 군대의 명예를 지킬 마지막 발악이었던 거죠.
당연하게도 독일 병사들은 그 작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은 전함의 보일러를 망가뜨리고 상관을 체포한 뒤 전함을 접수했습니다. 그들은 일단 국가에 반기를 들었으면 훨씬 단호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전에 벌어진 반란에 가담했을 때 그 지도자들이 처형당하거나 투옥된 걸 봤기 때문이죠.
수병들은 북부 독일로 대표단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함부르크 같은 도시들로 혁명을 확산시키기 시작한 것이죠. 이는 엄청난 반란 물결을 고무했습니다. 독일 전역에서 반란의 파도가 솟구쳤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 수 있었던 노동자 평의회가 세워졌죠. 정말 놀라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이성이 있는 몇몇 장군과 정치인들로 인해서 제1차세계대전이 끝났다는 건 헛소리입니다. 전쟁은 독일과 다른 나라들의 병사와 수병, 그리고 대중이 전쟁을 거부하고 더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겠다며 일어났기 때문에 끝장났습니다.
1914년 8월: 세계대전의 발발
전쟁이 발발한 것 자체는 1914년 8월이었습니다. 전쟁 발발로 노동자 운동은 전례 없이 분열하게 됐습니다.
독일의 주요 노동계급 조직은 사회민주당SPD이었습니다. 영국 노동당의 독일 버전이라고 할 수 있죠. 이는 엄청나게 놀라운 조직이었는데요. 수백만 명의 투표자와 수십만 명의 당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자전거 동호회부터 전국 신문, 지역 신문, 걷기 자선 단체 등 온갖 곳에 뻗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회민주당은 오늘날의 영국 노동당 같은 정당과는 꽤 다르기도 했습니다. 이 정당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었고, 스스로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이라고 표방했죠. 전쟁이 벌어지면 이에 반대해 파업으로 전쟁을 끝내겠다고 굳게 맹세하던 정당이었습니다. 모두가 전쟁이 벌어지면 사회민주당이 그런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것도, 다양한 사회주의 조직이 한 곳에 모여 있던 제2인터내셔널을 통해서 반전 행동을 국제적으로 벌어기로 맹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회민주당 내에서는 이전부터 심각한 의견 대립이 있었습니다. 논쟁이 결코 없지 않았습니다. 폴란드 출신의 젊은 여성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 등 몇몇 인물은 사회민주당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포착했습니다. 개혁주의가 자라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작업장 투쟁이나 혁명적 투쟁보다는 의회 선거와 지방선거, 노동조합 실무, 사회민주당 당원 모집을 중심에 두는 정당이 됐습니다. 베른슈타인 같은 사람들이 주도하는 개혁주의 경향, 즉 수정주의 경향이라는 문제를 룩셈부르크와 룩셈부르크 지지자들은 포착했습니다.
이렇듯 일부 사람들은 사회민주당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그러나 더 광범한 이들에게 독일 사회민주당은 전쟁과 자본주의에 맞설 정당이라고 받아들여졌습니다. 나중에 레닌의 팸플릿에서 “배신자 카우츠키”로 지적되는 카우츠키는 당시만 해도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으로 언급됐습니다.
볼셰비키와 다른 사람들은 사회민주당을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의 롤모델로 봤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자 사회민주당은 완전히 굴복했습니다. 그들 자신이 이전까지는 전쟁 반대 대중 집회를 조직했음에도 말이죠. 사회민주당은 러시아 군국주의에 맞서 독일 지배계급과 한편에 서야 한다고 말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런 태도는 독일 안팎의 운동에 큰 충격을 줬죠.
잘 알려져 있듯이, 로자 룩셈부르크는 좌파들한테 ‘여러분! 우리는 이런 상황에 제동을 걸어야 해요’ 하고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룩셈부르크는 300명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겨우 한줌의 사람만이 답장을 보냈습니다. 레닌은 사회민주당의 기관지 〈포어베르츠〉의 1면을 봤을 때 그게 조작이라고, 진짜일 리가 없다며 믿지 않았죠.
어쨌건 사회민주당이 전쟁을 지지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사실, 모든 제2인터내셔널 참가 조직들이 전쟁에 맞서 총파업과 선동에 헌신하기로 했었지만 오직 극소수 조직만이 전쟁에 실제로 반대했죠. 불가리아와 러시아의 볼셰비키, 이탈리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1914년에는 운동이 파멸한 것만 같았고 여기서 정말이지 절대 회복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난관을 딛고 운동은 다시 회복하기 시작하죠. 1915년 국제적으로는 치머발트 회의가 열려 반전 운동가들과 혁명가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또한 1915년 독일 내에서는 전쟁 반대파가 응집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칼 리프크네히트가 있었죠. 그는 전쟁 공채에 처음에는 반대표를 던지지 않았고 사회민주당의 규율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1914년 12월] 국회 두 번째 표결 때는 그는 전쟁 공채에 반대 투표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 때문에 반전 운동이 시작됐을 때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 등은 수감됐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노동계급이 저항에 나서기 시작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1916년이 되면 칼 리프크네히트를 석방하라면서 금속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는 일도 벌어집니다.
1918년 11월 혁명
1918년이 시작하면서 독일에서는 거대한 파업 운동들이 벌어지고 11월 혁명은 그 정점이었습니다. 독일 황제 카이저는 그 전에 러시아 짜르가 꼭 그랬듯이 물러나야 했죠(사실 카이저의 처지는 짜르보다는 좀 나았습니다. 네덜란드로 도망쳐서 처형은 면했거든요). 어쨌든 이는 환상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독일 지배계급은 완전히 겁을 집어먹었죠. 바로 1년 전 그들은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은 것을 봤습니다. 그들은 이제 [독일에서] 노동자 평의회가 생기고 병사들이 무장한 채 베를린 중심부에서 붉은 깃발을 들고 행진하고, 기관총을 설치하는 꼴을 봐야 했죠. 정말 이들에게는 오줌을 지릴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계급은 목숨을 부지하고자 누구에게 기대야 했을까요? 주요 개혁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에게 기댔습니다. ‘이보게나, 얼른 정부에 들어와 주게. 국가의 몰락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 비록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이들이 민주주의의 싹을 도려내고 사실상 군사 독재를 세우려 했지만 이제는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에게 살려달라고 빌어야만 했죠.
전쟁에서 자기 국가를 수호하기로 했던 사회민주당은 이제 혁명의 위협에서 자기 국가를 지키기로 합니다. 에베르트, 노스케, 샤이데만 같은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당시 독일 군대가 붕괴한 상황에서 자유군단이라는 준군사 조직을 만드는 걸 지원해 그 자유군단이 거리를 누비는 혁명가들을 죽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런 자들이 무장하고 조직되도록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 도왔죠.
한편, 전쟁 동안 노동운동은 분열됐고 사회민주당도 분당했습니다. 다수파와,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소수파로 나뉘어졌습니다. 후자에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혁명가뿐 아니라 카우츠키 등 개혁주의자들도 포함됐습니다. 소수파는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설립합니다. 이 정당은 독일 노동자 사이에서 급진적 인자를 모두 끌어모았습니다. 그러나 [독일 혁명 발발 뒤] 위기가 심각해지자 이 정당의 지도자들은 정부에 참여할 것을 요청 받고, 실제로 정부에 참여하게 되죠.
이제 혁명적 상황의 한복판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들이 주변에 거느리고 있던 것은 ‘스파르타쿠스 동맹’이라는 느슨한 혁명가들의 네트워크였죠. 이는 큰 단체가 아니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원들은 과거에는 사회민주당 당원이었다가 그 후에는 독립사회민주당으로 갔고, 격동의 사건 한복판에서 이제 그 정당을 나온 사람들이었죠.
칼 리프크네히트 개인은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리프크네히트를 위해 거리로 뛰쳐나와 파업까지 할 정도였으니까요. 사람들은 리프크네히트를 지지했고, 그는 전쟁 반대의 상징이었습니다.
1918년 12월: 독일 공산당 창당
12월 20일과 21일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혁명가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뭉치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들은 정부에 들어간 독립사회민주당과 결별하고 공산당KPD을 창당합니다.
공산당은 첫 당대회를 열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문제가 놓여 있었죠. 몇 가지를 언급해 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혁명적 조직의 개념에 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레닌과 꼭 마찬가지로 혁명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와 다른 사람들은 거대 좌파 정당에서 쪼개져 나오는 것에 대한 우려를 늘 안고 있었습니다. 혁명가들이 조직으로 뭉쳐야 한다는 생각 자체에 그들이 반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중에게서 고립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들은 볼셰비키의 조직 방식에 대해서도 우려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조직 모델을 상명하달식이라고 봤는데요. 그렇게 본 이유에는 자신들이 속했던 사회민주당이 관료 중심적이고, 상명하달로 인한 폐해를 의식했기 때문인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급진파들에게는 중앙집중주의, 규율, 조직을 강조하는 것이 낡은 사회민주당 방식처럼 들렸습니다. ‘아니, 이거 방금 분리해 나온 곳에서 듣던 거 아냐’라는 거죠. 그래서 이 점이 만만찮게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둘째는 당대회에 보내진 대표자들이 주로 젊은 노동자와 군인이었고, 이들은 노동계급을 획득하기 위해서 길고 고통스러운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저기요, 죄송하지만 됐거든요! 우리는 당장 권력을 잡을 거라니까요!’라는 태도였습니다. 이게 당대회에서 논쟁이 됐습니다. 이들은 얼마 전까지도 전쟁 참호에 있었고 손에 총도 있습니다. 게다가 평의회가 건설된 것도 봤죠. 그런 상황에서 의회 선거에 대응한다든지 노동조합 내에서 활동한다든지 따위의 일들이 눈에나 차겠습니까? 게다가 노동조합은 그들을 배신하지 않았습니까? 의회는 또 어떻고요?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 파울 레비 등이 공산당은 노동계급 다수의 지지를 먼저 얻어야 한다는 점을 매우 합리적으로 설득했지만 결국 당대회 표결에서 패배했습니다.
이 결과로 인해서 베를린 등지에 있는, 노동계급 내 아주 진지하고 혁명적인 급진파가 신생 공산당에 참가하길 거부하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태도였습니다. ‘공산당 사람들은 좀 무력정변 만능주의자들 같아. 다수의 지지 없이도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야.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런 우려가 풀리지 않는 한, 일단은 독립사회민주당에 머물러야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지켜보자고.’
그리고 나서 상황은 매우 빠르게 전개됐습니다. 그들이 이런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수 개월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죠.
1919년: 조율되지 못한 혁명적 공세
1919년 1월, 공산당 당대회 불과 몇 주 후에 사회민주당 정부는 베를린에서 도발을 합니다. 독일 노동자들이 정부를 뒤엎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전에 이들을 거리로 끌어내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정부는 11월 혁명으로 임명된 베를린의 경찰청장을 해임합니다. 노동자들은 거리로 뛰쳐나왔고 바리케이드가 처졌습니다. 총파업이 호소됐습니다. 좀 쉽게 들뜨는 성격이었던 칼 리프크네히트는 [사회민주당] 정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연서명을 베를린의 다른 좌파와 함께 냅니다. 나름 좋은 의도였겠지만 자신의 정당인 공산당과는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은 채 그랬습니다.
베를린에서의 봉기는 지리적으로 고립돼 버립니다. 자유군단과 친정부 병력이 베를린으로 와서 봉기를 분쇄해 버리죠. 그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찾아내 살해해 버립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흔한 장면은, 혁명적 조직에서 지도적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급행열차 타켓을 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온갖 고초를 겪죠. 이는 특히 당시 독일의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었습니다.
신생 공산당이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인물을 잃은 것은 엄청난 타격이었습니다. 룩셈부르크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이론가였으며 노동자 운동 전반에서 지도적 인물이었습니다. 레닌이나 트로츠키와 비견할 만한 존재였죠. 리프크네히트 역시 전쟁 중에 전쟁 반대 입장을 취해 국제적으로 저명한 혁명적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죽고 만 것이죠.
이처럼 베를린에서 패배했지만 그것이 혁명 운동을 멈추진 못했습니다. 대신에 루르 지방 등으로 운동이 퍼져나가게 했죠. 브레멘과 작센에서는 대규모 파업과 군대와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은 파업 물결에 참가했고 자유군단과 충돌했습니다.
독일 남부에 있는 바이에른에서는 3월에 조금 기이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이른바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이 수립된 것인데요. 우선, 공산당은 이를 “가짜 평의회 공화국”이라고 [옳게] 규정했습니다. 이는 노동자 평의회 등에 기반하지도 않았고 결국 붕괴됩니다. 공산당은 끝까지 남아 책임을 지기 위해 결국 ‘2차 평의회 공화국’을 선포하고 잠시 동안 집권하죠. 그리고 분쇄당합니다.
자, 지금까지 독일의 여러 지역에서 여러 시간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봤는데요. 한 곳에서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서면, 자유군단이 쳐들어오고 운동을 분쇄합니다. 그리고 나서 노동자들이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 들고 일어서면, 자유군단은 다시 그리로 이동하는 패턴이 반복됐습니다. 이는 중앙집중적인 혁명적 지도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탓에 모두가 힘을 뭉쳐 독일 국가를 향해 큰 한 방을 날린 적이 없었던 것이죠. 그 대신에 반란이 산발적으로 벌어졌기에 독일 국가는 이에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1920년 카프 쿠데타
1920년 3월이 되자 [핵심적 반동 세력인] 군 장성들은 이제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사회민주당 정부를 인내했고, 일련의 반란도 인내했으며, 그간 혁명적 운동도 여러 번 분쇄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모든 과정을 통제하고 완전히 민주주의를 끝장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카프라는 고위 관료를 내세워 무력 정변을 벌입니다. 그들은 베를린에서 권력을 장악합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완전히 ‘멘붕’에 빠집니다. 그러나 카를 레기엔이라는 한 사람만이 그러지 않았는데 그는 오랜 노동조합 관료였습니다. 그는 운명을 건 승부수를 띄우기로 하고 총파업을 호소합니다. 총파업은 엄청나게 성공적이었습니다. 온 나라가 마비됐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중부 독일(작센 등)과 루르 등지에서는 무장한 노동자들이 치열한 전투 끝에 군대를 격퇴했습니다. 계급투쟁이 엄청나게 높은 수준이었고 쿠데타 세력은 꽁무니를 뺍니다.
독일 전역에서 다시 한 번 노동자 평의회가 등장했습니다. 이는 엄청난 기회로 보였죠. 이 국면에서 칼 레기엔은 “노동자 정부”를 호소했습니다. 이것은 볼셰비키가 1917년 10월 혁명 이전에 요구했던 바와 비슷한 요구였습니다. 정부에서 자본가들을 제거하고 좌파인 사회민주당과 독립사회민주당만 남기고 공산당을 정부로 입각시켜라 등.
공산당은 어떤 입장이었을까요? 애초에 공산당은 사회민주당 정부를 방어하는 운동을 지지하지도 않았습니다. ‘굳이 왜 걔네를 방어해야 해? 걔네는 얼마 전에 우리를 공격했었는데?’라는 식의 태도가 사실상 공산당의 초기 노선이었죠. 그러나 공산당은 곧 운동으로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은 혁명 과정 중 처음으로, 의회 다수석에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노동자 정당들이] 다수석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러자 의원들은 도망쳐 버렸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의 전환
한편, 공산당은 잘못된 입장을 이내 바로잡습니다. 그들은 사태를 따라잡았고 지도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정말 거대한 진일보였습니다.
이 시기 공산당은 파울 레비라는 사람이 이끌었는데요. 파울 레비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인물이자, 공산당 운동의 역사에서 한마디로 뭐라 말하기 어려운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인데요. 아무튼 공산당 지도자로서 레비는 로자 룩셈부르크 등이 이전에 했던 주장을 이어 받으려 했습니다.
레비의 강조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무력정변 만능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공산당이 노동계급을 대신해 권력을 즉시 잡을 수 있다는 유치한 생각을 배격해야 한다. 소수로는 권력을 잡을 수 없고 심지어 잡는다고 해도 유지할 수 없다. 우리는 노동계급 다수를 획득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주저하지 않고 쓴소리를 하기로 했습니다. 예컨대, [2차]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 선포에 대해서 그는 공산당이 결코 하지 말았어야 했던 일,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주장으로 레비는 자기 당에서 인기를 꽤 잃었고 코민테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둘째로, 레비는 “노동자 정부”를 요구하기로 합니다. 그는 “노동자 정부”가 들어선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말했죠. 마치 볼셰비키가 “10명의 자본가 장관이 없는 정부”를 요구했던 것처럼 자신도 그런 정부를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레닌이 1917년에 사용한 언어를 빌려, 그런 정부에 대한 “충실한 야당”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이는 공산당 내부에서 공산당 내 ‘좌파’를 상대로 커다란 논쟁을 낳았습니다. 코민테른 안에서도 큰 논란을 낳습니다. 그러나 파울 레비의 이런 입장 중 일부는 레닌 등 코민테른 인물들의 지지를 받았죠.
파울 레비가 편 정책 또 하나는 그가 “초좌파”라고 본 자들을 공산당에서 내쫓는 것이었습니다. 레비가 겨냥한 사람들은, 사람 됨됨이 자체가 나쁘다기보다는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무지 수긍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금 당장 행동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바이에른에서 벌어진 실패의 이유였고, 1919년 1월에 베를린에서 벌어진 실패의 이유였습니다. 파울 레비는 대중을 획득해야 한다는 새로운 노선에 반대하는 모든 개인과 지회를 공산당 내에서 내쫓았는데 그 수가 아주 상당했습니다.
쫓겨난 당원들은 독일 공산노동자당KAPD이라는 새로운 당을 창당합니다. 이는 또다시 국제적으로 엄청난 논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레닌 등은, 당에서 가장 혁명적 인자들을 내쫓아 버린 것은 실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그리고 더 중요한 정책으로는 파울 레비와 (코민테른에서 독일에 보낸 사절이었던) 칼 라데크가 독립사회민주당 좌파를 획득하기 위해서 애를 썼던 것이 있습니다. 공산당이 창당할 때 가입하지 않은 혁명적 노동자들이 독립사회민주당에 있었습니다. 레비와 라데크는 정말 쌔가 빠지게 애를 썼습니다. 그들이 공산당 내 초좌파를 내쫓은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진정한’ 좌파라고 본, 독일 노동자 운동 내 진정한 혁명적 노동자들을 끌어당기기 위한 것이었죠.
그리고 레비와 라데크는 성공을 거둡니다. 1920년 말에 독립사회민주당의 유명한 당대회가 열렸습니다. 러시아 볼셰비키 지도자 중 하나였던 지노비예프는 그 당대회에 참가해서 코민테른을 지지하도록 설득합니다. ‘왜 독립사회민주당이 코민테른에 가입해야 하는지, 왜 그들이 독일 내에서 공산당과 합쳐야 하는지’ 등에 대해 지노비예프는 장장 3시간 동안 발언했습니다.(오늘은 그럴 사람이 없어서 다행입니다.[청중 웃음]) 그리고는 독립사회민주당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독립사회민주당은 소위 “21개 조항”이라고 불리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21개 조항은 코민테른에 가입하려면 진정한 혁명적 정당이 돼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개혁주의자들이] 이 조항을 통과해 코민테른에 가입하는 것을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게” 만들려는 거였죠. 그런 21개 조항을 독립사회민주당 다수가 지지한 것이죠.
이렇게 합당으로 만들어진 독일 통합공산당은 혁명적 조직으로서 50만 명이나 되는 독일 노동자들을 이끌게 됐습니다.
레비가 지도하는 공산당이 시행한 첫째 정책은 ‘공개서한’을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다른 노동계급 조직들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로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했습니다. ‘이보시오. 우리가 평의회 공화국에 대해서는 비록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여러분은 의회가 대안이라고 여기지만, 우리는 노동자 임금을 위해서는 단결할 수 있을 겁니다. 당연히 군대와 우익 깡패들을 무장 해제시키기 위해서도, 우리는 단결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매우 진지하고 만만찮은 제안이었습니다. 또한 코민테른 안에서도 진지하게 검토됩니다. 레비와 그 지지자들의 전술은 유럽에서의 혁명적 물결이 퇴조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정세 인식을 기초로, ‘수일 이내가 아니라 수년이 걸릴 수도 있는 기간을 염두에 두고, 공산당이 노동자 다수를 우리 편으로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한 결과였습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공산당 안에서 위기가 심대하게 벌어집니다. 파울 레비는 ‘우파’로 몰렸죠. 그가 혁명적 대의를 저버렸다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후퇴하려 한다고 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레비는 코민테른 안에서 이탈리아 사회당 분당과 관련한 코민테른 내 논쟁에도 휘말리게 됩니다.
공산당 지도부 내의 중대한 투표에서 결국 레비는 당내 ‘좌파’들에게 패배합니다. 그래서 당대표에서 사임했죠. 레비는 공산당을 지도하는 자리에서 물러나 버려야겠다고 마음 먹게 됩니다.
이는 매우 큰 실수였습니다. 왜냐면 50만 명이나 되는 당원이 있는 정당이 당시 정말 중대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1921년 ‘3월 행동’
한편, 여러분이 러시아에서 코민테른 수장을 맡고 있는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같은 사람이었다고 가정해봅시다. 당시 러시아는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신경제정책(‘네프’)을 막 도입한 상황이었는데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경제 영역에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일부 수용하는 것으로 러시아 혁명의 후퇴를 의미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코민테른 의장 지노비예프의 눈에 독일 공산당이 들어옵니다. 사실상 다음과 같이 생각한 거죠. ‘오 제발, 뭐라도 하란 말야! 우리 러시아는 벼랑 끝에 몰려 있는데 독일은 저리도 속 편하게 있다니. 50만 명이 있는데도 여전히 ‘다수를 획득한다’면서 공동행동 제안이나 하고 있구나. 그럴 때가 아니라 이제는 행동할 때야!’
코민테른은, 단명했던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수장이었던 벨라 쿤을 독일로 파견했습니다. 도대체 벨라 쿤이 코민테른에서 어떤 임무를 받았던 건지는 추측만이 난무합니다. 그러나 어찌 됐든 쿤은 독일에 와서 공산당이 행동에 나서도록 사실상 다음과 같이 촉구했습니다. ‘다수를 획득한답시고 빈둥대지 말아라. 이미 50만 명이 너희에게 있지 않냐, 당장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독일 공산당이 1921년 3월에 추진한 결과가 소위 ‘3월 행동’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공산당이 혁명을 강제로 앞당기려 한 것이죠. 그들은 ‘공세이론’이라는 것을 내세우며 이를 정당화했는데 사실상 다음과 같은 주장입니다. ‘공산당이라면 공산당답게 행동하라, 파업에 나서고 봉기를 일으켜라, 행동하라, 행동하라, 그것도 지금 당장!’
그러나 독일의 노동자 대다수가 아직 공세를 취할 태세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전술은 대실패를 낳았습니다. 공산당이 총파업을 호소했지만 심지어 당원 중에서도 일부만이 이를 지지했습니다. 실업자들이 공장 입구에서 노동자들의 출근을 저지하려는 상황이 벌어졌죠.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는 공산당이 노동자들을 화나게 해 파업에 나서게 하려고 자기 사무실을 폭파시키는 것도 검토했습니다. 완전히 엉망이었죠.
앞서 우여곡절 끝에 50만 당원을 거느리게 됐던 공산당은 ‘3월 행동’으로 당원을 절반이나 잃어버립니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공산당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거죠. 소수만으로 권력을 잡으려 달려 드는 무력 정변 만능주의에 빠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1920년에 공산당은 그런 노선을 거부한다고 내내 강조했지만, 1921년 3월의 실천은 영락없이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3월 행동’ 평가를 둘러싼 위기
또 다시, 이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커다란 논쟁을 야기합니다. 아직 독일 공산당 내 지도 기구에 있었던 파울 레비는 ‘3월 행동’이 완전히 대실패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공개적으로,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소책자를 내서 코민테른의 개입과 공산당의 지도력을 비난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공산당이 혁명정당으로서 함량 미달이라고 비난합니다.
클라라 체트킨과 공산당 내 다른 지도적 인물들은 정치적으로는 많은 부분을 레비에 동의합니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레닌과 트로츠키 같은 사람들도 레비의 말 자체는 맞다고 봤죠.
문제는, 레비가 자기 당을 비판한 방식이었습니다. 레비가 당 바깥에서도 볼 수 있도록 쓴 소책자가 인쇄기에서 찍히던 그 순간에, 당원들은 구속되고 있었고, 총살되거나 구타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비의 소책자에 대한 당원들의 반응은 자연히 끔찍했습니다.
결국 레비는 규율 위반으로 코민테른에서 축출됐습니다. 이는 비극이었죠. 레비는 노동자 운동에 아직 더 많이 기여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레닌은 레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레비는 머리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잃어버릴 머리라도 있었습니다.”
레비와 그 지지자들은 수개월 뒤에 결국 사회민주당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합니다. 사실상 레비는 코민테른은 가망이 없고, 공산당도 가망이 없다며 새로운 전략을 찾아야 한다고 봤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점에서는 레비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코민테른에서는 독일에서 어떤 점이 잘못됐는지 토론이 이뤄지고, 레비가 추진하려 했던 바로 그 아이디어를 결국 지지하는 방향으로 선회합니다. 바로 공동전선 건설을 시도하고, 레비가 ‘공개서한’으로 시도했던 방식으로 공산당이 지지자 확대를 시도합니다. 이를 통해 공산당은 기회를 한 번 더 잡게 됩니다.
이후 독일 공산당에서 지도적 위치에 서는 사람은 하인리히 브란들러입니다. 브란들러는 건설 노동자 출신으로 작센의 캠니츠에서 공산당 지부를 대중적으로 건설해 낸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그는 레비의 뒤를 이어 구성된 지도부의 일원으로 ‘3월 행동’을 이끈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브란들러는 그 뒤에 찬찬히 숙고하며 ‘3월 행동’이 완전히 미친 짓이었고 절대로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브란들러는 독일 공산당 내에서 ‘우파’라고 간주됩니다.
아무튼 공산당의 모든 전략은 공동전선을 복구하는 데 집중됐고, 당시 움트던 공장 평의회 운동 안에서 활동하는 데 집중됐습니다.
공장 평의회는 공장 노동자들의 연합체 같은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독일의 경제 위기가 심각하게 증폭되자, 공장 평의회는 노동자 통제와 노동자 권력의 요소를 더욱 더 많이 포함하게 됩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소비에트가 했던 것과 비슷한 역할을 맡기 시작하죠.
1923년: 위기의 해
1923년 1월이 되면 이미 독일에서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은 제1차세계대전의 배상금을 요구하며 독일에 다시 진군했습니다. 그들은 루르 지방을 점령했고 그 결과, 그 어떤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십중팔구 볼 수 없었던 극도의 정치적·경제적 위기가 일어납니다.
무엇보다 기근이 만연했습니다. 당시 벌어진 초 인플레이션을 묘사한 것이 많습니다만, 말 그대로 사람들은 11시에 공장에서 월급을 받으면 [가격이 새로 책정되는] 12시가 되기 전에 돈을 쓰러 달려 나가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운반하러 말 그대로 수레를 끌고 다녀야 할 정도였습니다. 조폐기를 아무리 빨리 돌려도 부족한 상황이 됩니다.
대자본가들은 이런 상황을 이용했고 심지어 인플레이션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왜냐면 인플레이션으로 자신들의 부채 부담을 덜 수 있을 거라 봤기 때문이죠. 몇 달 전에 빌린 금액을 기준으로 갚으면 되니까요.
한편, 독일 정부는 루르 지방 점령에 대응해 [프랑스 점령 당국에 협조하지 않는] “수동적 저항”이라고 부르는 것을 호소했습니다. 파업과 항의가 이어졌고 프랑스군은 이를 잔혹하게 탄압했습니다. 루르 지방에는 민족주의적 선동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독일에서 계급에 대해서 말하지 말아라, 우리에게는 하나의 프롤레타리아 나라만 있을 뿐이고, 우리는 협상국들에게 점령된 상황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일로 독일은 심각한 위기에 시달렸습니다.
일련의 엄청난 파업이 벌어졌지만 이제 파업으로는 역부족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냐면 파업에 나서는 이유는 임금을 더 많이 받기 위한 것일 텐데, 돈이 아무런 쓸모도 없어졌기 때문이죠. 수년 동안 돈을 저축해 온 중간계급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돈은 휴지조각이 돼 버렸습니다.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절망에 빠졌고 노동계급 내 차이라는 건 의미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한때 코민테른의 칼 라데크 같은 사람은 독일 사회민주당이 배신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노동계급 내 상층 부분이 매수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었는데요. 그러나 1923년에는 노동계급 내 누구도 매수됐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아무도 돈이 없었고 모두가 절망했죠.
이런 상황에서 바이에른에서는 ‘평의회 공화국’의 붕괴 이후 히틀러와 나치당을 중심으로 극우가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공산당이 나서서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도 커지죠.
공산당은 몇 가지 일에 나섰습니다. 우선 그들은 공장 평의회를 건설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백인대”라고 불리는 조직을 건설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백인대百人隊는 파시스트와 군대에 맞서 노동자들이 자신을 방어하고자 만든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단지 공산당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사회민주당 당원도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정부에 참여한 사회민주당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갈수록 사람들은 공산당이 이 상황에서 뭔가 하기를 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1923년 7월 말, 브란들러가 지도하는 공산당은 반反파시즘의 날 행동을 호소합니다. 이날 거리에서 행진하고 극우에 맞서서 세력을 과시할 계획이었죠.
이런 계획은 정부를 완전히 패닉에 빠트렸습니다. 그런데 공산당 내에서도 패닉이 벌어졌죠. 공산당 내에서 좌파 또는 우파를 표방했던 많은 사람들은 공산당이 그런 공세적인 행보에 나서는 것을 완전히 정신 나간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21년에 크게 실패했던 바가 있었으니까요. ‘왜 그런 짓을 또 하려고 하는 거야? 왜 사태를 또 밀어붙이려는 거야?’라는 반발이었죠. 결국 공산당은 이 계획을 취소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후 며칠 만에 독일은 경제 위기로 인해서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쿠노라는 자가 이끌던 정부는 위기에 빠집니다. 총파업이 터져 나왔지만, 노동조합이 동요하고 있어서 이 파업들은 공장 평의회가 호소한 것이었습니다. 공장 평의회에서는 공산당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 총파업으로 결국 정부는 무너집니다. 총파업에서 노동자들이 벌인 산업 행동은 엄청난 수준이었습니다. 파업과 무장 충돌이 거리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무너지자 소강상태가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나는 쿠노 정부를 무너뜨리려 나왔는데 이제 정부가 없어졌어, 이 다음은 뭐지?’
1923년 “독일의 10월”
한편, 이처럼 엄청난 수위의 투쟁이 벌어지자, 앞선 한 해 동안 ‘우리는 방어적 상황에 놓여 있어.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해’라고 생각했던 독일 공산당과 코민테른은 변화를 알아차리기 시작합니다. ‘오 세상에, 이건 혁명적 위기 상황이잖아! 우리 이런 상황에서 권력을 잡으려고 해야 하는 것 아니야?’라고 말이죠.
그래서 운동이 약간 소강상태에 접어든 상황에서, 공산당과 코민테른은 독일에서 권력 장악에 나설 계획을 세웁니다.
그동안 내내 공산당은 “노동자 정부”를 선동해 왔습니다. 그러나 쿠노 정부를 무너뜨리는 파업이 끝나고 들어선 것은 “노동자 정부”가 아니라 사회민주당이 보수 정당과 함께하는 “대연정”이었죠. 공산당은 “노동자 정부”를 계속 선동하기로 하고, 이미 좌파적 지방 정부가 들어서 있는 작센주와 튀링겐주 두 곳에서는 공산당이 정부에 참가합니다.
이에 대해서 엄청난 논쟁이 벌어집니다. 정말 그럴 만했죠. 여기 계신 분 중 누군가가 제러미 코빈[2015~2019년 영국 노동당의 대표] 정부의 각료가 된 것과 같은 것이니까요. 그러나 공산당은 정부에 들어가는 이유가 무장봉기를 조직하기 위해서, 숨겨둔 무기 등을 찾아내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공산당은 군사적으로 권력을 잡을 대대적인 준비를 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언제 거사를 치를지 날짜를 미리 정하는 것까지 고려합니다. 트로츠키를 독일로 데려와서 무장 봉기를 지도하게끔 하는 게 어떻겠냐는 논의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기본 계획은 이랬습니다. ‘작센주에서는 좌파가 강력하다, 공산당이 정부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군대가 작센주로 투입될 것이다, 군대가 진입하면 우리는 총파업을 호소한다, 전국적 총파업 선언을 신호로 권력 장악에 나선다.’
이런 계획에 따라 모두가 지하로 들어갔습니다. 지하 조직들이 나라 전체에 건설됐고, 사람들은 무기를 모아두기 시작했고, 군사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새벽 3시까지 일하는 것은 예사였습니다.
[군대의 작센주 진입을 코앞에 둔] 10월 말에 [작센주의] 켐니츠에서 열린 회의에서 모든 것이 정점에 올랐습니다. 켐니츠는 브란들러가 기반을 둔 도시, 브란들러의 영향력이 가장 큰 지역이었죠. 그가 회의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그 자리에는 브란들러와 함께 작센의 좌파적 주정부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있었고, 노동조합 지도자들도 있었고, 공산당 당원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브란들러는 총파업을 선언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 제안이 지지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민주당 내 좌파가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회민주당 내 좌파는 동요했습니다. 이들은 브란들러의 말이 맞는지 틀린지 확신이 안 선다고 말합니다. 당시 정부는 출병의 명분으로 바이에른의 극우에 대처하려는 것도 거론했는데, 이들은 그 빤한 거짓말에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브란들러는 그 회의에서 총파업 선언을 이끌어 내는 데 실패했고 그 순간 주눅이 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완전히 주눅 들어버렸어요. 그래서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봉기가 취소됩니다.
함부르크 한 지역만이 이 봉기 취소 소식을 듣지 못해서 공산당이 거리로 나왔고 24시간 동안 싸웠지만 고립돼 버립니다.
1923년의 교훈은 무엇인가
[발제 마무리]
첫째로, 10월의 혁명적 행동에 실제로 나섰다고 해서, 그것이 절대적으로 성공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주장도 거듭 제기됩니다. ‘1923년에는 사실 혁명적 기회가 없었다. 노동자들이 공산주의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1920년대 전반 내내 혁명적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1923년 여름 모든 표지는 공산당이 적어도 독일 노동계급의 과반이나 그에 준하는 비중으로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공산당이 방향을 더 분명하게 제시했더라면, 권력 장악을 시도하겠다는 것을 더 분명히 했더라면 성공할 가능성도 높았을 겁니다. 저는 당시 혁명적 기회가 있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공산당의 발목을 진짜로 잡은 것은 과거의 실패였습니다. 특히 1921년 ‘3월 행동’의 실수로 인해 지도부가 자신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스크바에 많은 문제를 의탁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파리에서 런던의 봉기를 조직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있는 곳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죠.
둘째로, 여러분은 “역사의 교훈은 우리가 혁명적 정당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너무 상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말은 진실입니다. 볼셰비키가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레비·브란들러 등과 달랐던 것은,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혁명가들을 하나로 조직하는 혁명적 네트워크를 이미 혁명이 일어나기 수 년 전부터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볼셰비키는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브란들러 등 당시의 많은 참가자의 얘기를 읽어 보면, 독일 내에 더 응집력 있는 혁명적 좌파 네트워크를 더 일찍 만들어야 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이는 정말 중요한 결론입니다. 왜냐면 수많은 경우에서 당시 독일 공산당은 영웅적 행동들과 운동에 대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최상의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정치 전략으로 획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주제는 그냥 역사 강연에 지나지 않을까요?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영국 총선이 치러질 지 모르는] 이번 10월이나 아마도 나중에 우리는 제러미 코빈 정권을 보게 될 지도 모릅니다. 이 나라에서 좌파적 노동당 정부를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좌파적 노동당 정부는 어떤 상황을 마주하게 될까요? 그들은 IMF와 세계은행, EU, 자본 파업 등을 마주하고, 노동조합 지도부와 노동당 내부에서도 적대적 세력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놓인 좌파 정부가 만일 자본주의에 맞서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는 전쟁과 인종차별 등에 반대하기 시작한다면, 독일 혁명 당시 벌어졌던 것과 정확히 같은 논쟁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입장이 ‘개혁주의 불길은 사그라들게 내버려두고, 모든 것을 훌륭하게 깨친 우리 동지들을 새 지도부로 내세우자’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독일의 진정한 교훈은 매우 발전한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혁명적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노동계급 내에서 논쟁을 통해 그 일부를 획득하는 일에 조직적으로 착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누군가가 ‘SWP에 왜 가입해야 해? 지금 브라이튼에서 모임을 하면 150명이 모이는데, 그 중 브라이튼 SWP 회원은 겨우 8~9명뿐인데 말야’라고 말한다면, 저는 솔직히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만약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독일] 브레멘에서 8명이나 9명이라도 조직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기회가 주어졌다면 룩셈부르크가 버선발로 나갔을 것이라고 말이죠.
이것이 우리 주장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독일 혁명에서의 ‘공개서한’과 프롤레타리아 백인대 활동 등에서 공동전선의 교훈을 적용하기 위해서도 애써야 하지만, 결국 최후의 일격을 날릴 수 있으려면 혁명적 조직을 건설해야 합니다.
청중 토론 후 정리 발언
독일 혁명에 대한 글을 읽을 때 마주치는 물음 중 하나는 혁명적 정당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SWP에 대해 ‘상명하달식 조직이다, 패권적이다, 획일적이다’ 등등의 얘기를 듣곤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일과 코민테른에서 벌어진 논쟁들을 보면, 정확히 그 반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당시에는 큰 논쟁들이 벌어졌습니다. 논쟁이 일어난 것은 사람들이 그저 논쟁하길 좋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때문입니다.
독일 공산당 내에서는 위기가 계속 있었습니다. 당내 좌파, 우파, 중도파 그리고 좌우에서 동요하는 개인들 사이에서 위기가 벌어지지 않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한 예로] 파울 레비가 당 대표를 그만 두고 브란들러가 대표가 되기 전, 아주 잠깐 동안 공산당 지도자가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초좌파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파울 레비의 입장에 동의해 레비를 따라 당을 떠나게 되죠.
그리고 실제의 코민테른은 레닌과 트로츠키가 매번 참가해서 위대한 전령을 내리는, 그런 곳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코민테른은 엄청난 논쟁의 장이었죠.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 파울 레비 등은 자신들이 모스크바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경험이 충분히 많았고 자신들이 볼셰비키 못지 않게 잘 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로자 룩셈부르크는 레닌의 사상을 많이 공유했지만, 공유하지 않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룩셈부르크는 레닌과 누차 논쟁했습니다. 그리고 파울 레비도 저자세로 모스크바에 갔던 게 아닙니다. 레비는 독일 혁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박 터지게 논쟁하려고 갔습니다. 그는 종종 볼셰비키에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레닌은 레비의 코민테른 비판을 수용했습니다. 레닌은 꽤 자주 코민테른의 정책이 말 그대로 러시아어로 쓰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심지어 이를 번역하더라도 여전히 러시아어로 쓰인 것만 같았는데, 왜냐하면 러시아인들이 이곳 영국 같은 나라의 조직들이 겪는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꽤 자주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중적인 노동조합 운동, 대중적인 개혁주의 정당 등등이 있는 상황 말이죠.
그래서 상부의 위대한 누군가가 다른 나라에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보다 코민테른은 전략과 전술을 익힐 학교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코민테른이 독일에 개입한 결과가 때때로 매우 훌륭하기도 했지만 재앙적인 적도 있었습니다. 1921년 ‘3월 행동’에 관한 개입은 정말 재앙이었죠.
왜 재앙적이었던 걸까요? 바로 억지로 혁명의 속도를 높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러시아에 있었다고 생각해 본다면 상황이 이해될 것입니다. 내전과 기근 그리고 온갖 문제에 수년 동안 시달리고 있는 정부가 왜 혁명의 속도를 높이지 않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진정으로 곱씹어 봐야 할 부분은, 혁명적 조직이 자기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필요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위건[영국 맨체스터의 도시]에서 활동하는데 길을 걷다가 SWP 당 중앙위원을 만나면 당연히 의견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나치가 2시간 후에 그 도시에서 행진을 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 상황이라면, 당 중앙이 어떻게 생각하고 자시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대응할지 여러분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죠. 그리고 당신이 만약 운동 내 더 큰 세력과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고 겨우 6, 10명 또는 20명 정도만 모을 수 있다고 한다면, 어차피 너무 작아서 아무런 대응도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넓은 운동에 뿌리를 내려야만 합니다.
시간 관계상 두 번째 특징으로 빠르게 넘어가겠습니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 안에 ‘이단’이란 없습니다. 파울 레비가 좀 그렇게 찍혔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모두가 레비의 글을 읽어야 합니다. 그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골칫거리였던 것은, 제 말이 좀 상스러울진 몰라도, 그는 좀 싸가지 없이 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입장과 도덕성을 앞세워 다른 이들을 업신여기는 경우가 꽤나 종종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낯설지만은 않은 광경이죠. 혁명적 조직 내에서는 의견 대립이 있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는 그런 대립에서 생긴 감정을 뒤로 하고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합니다. 당시에 체면을 심하게 구겼더라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단결하고 있는 이유는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교훈이라고 지적하고 싶은데요. 때로는 당신이 어떤 쟁점에서 아무리 옳더라도 당신이 남을 매우 재수없게 대한다면 남을 설득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동지를 설득하려는 자세로 토론해 나가고 건설적이어야 합니다. 이는 매우 소중한 혁명적 교훈입니다.
한 동지는 만약 트로츠키가 독일 혁명을 지도하기 위해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물었습니다. 물론 트로츠키는 천재였고 그 점은 더 말할 필요가 없죠. 그러나 저는 설령 트로츠키 본인이 등판했다고 할지라도 뭔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트로츠키는 다른 사람들은 경험해보지 못했던 봉기를 지도해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봉기에 대해서 기술적으로 탁월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난관은 독일 공산당 스스로가 당시 혁명적 운동의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어떤 것도 그들을 강제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 공산당의 문제는 먼젓번의 실수를 의식해 새로운 실수를 하는 좌충우돌을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정말 너무 큰 실수를 했다면, 그래서 50만 명이 되는 조직이 반토막 났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판단력에 점점 확신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일 공산당이 “공동전선, 공동전선, 공동전선”이라고 되뇌는 것에 좀 더 안락함을 느꼈던 것이 설명이 되죠. 물론 이것은 제안됐을 당시에는 완전히 옳은 구호였지만 어떤 시점에서는 공동전선보다 더 나아갈 태세를 갖추는 것도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독일 공산당이 실제로 전진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지도력이 충분히 탄탄하지 못했던 탓에 그냥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동지가 지적한 것에 대한 쟁점인데요. 당장 내일 영국에서 봉기가 일어날 거라고 우리도 믿지 않는다는 말에 관한 것입니다.
(잠시만 샛길로 빠지자면, 지금 영국의 분위기를 생각해 봐도 이런 말은 좀 이상합니다. 지금 그렌펠 타워 화재 사건에 대한 분노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렌펠 타워 화재 바로 다음 날 밤 중부 런던에서는 정말로 반란의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아무튼 제가 하고픈 말은 지금이 매우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라는 것입니다.
제1차세계대전으로 독일은 물론 엄청난 타격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사실 이전까지 상당히 안정된 사회였습니다. 매해 경제는 완만하게 성장했고 민주적 권리 등도 신장됐죠. 이것이 사회민주당의 정치가 기반을 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우리는 수 세대 만에 영국에서 분노가 엄청나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주목해야 합니다. 한편에서 제러미 코빈은 인기가 너무 많아 사람들에게 에워싸이지 않고는 거리를 돌아다닐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 오른쪽으로의 양극화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축구사나이연맹 등이 하는 일을 보십시오. 그들이 저지르는 폭력이나 [이주민을 겨냥한] 염산 테러 등을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다소 초좌파적인 경향의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코빈은 쓰레기야, 그는 배신자야 어쩌구 저쩌구’라고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누군가 운동에 처음 참여했거나, 젊은 노동자나 학생인데 이런 앙칼진 자세를 갖고 있다면, 솔직히 말해서 괜찮은 거예요. 왜냐면 누군가 운동에 생애 처음으로 뛰어들면서 모든 사람의 생각을 뜯어 고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하거든요.
실제로 코민테른은 수년 동안, 실제로 몇 년간 초좌파적 인자들, 아나코 신디컬리스트 등을 공산당 운동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싸우고 싶어한다는 걸 코민테른은 알았고 그래서 그들이 중요한 사람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다소 초좌파적인 경향의 사람들을 진지하게 대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대한 쟁점은 ‘제러미 코빈과 같은 개혁주의적 방식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수백만 명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첫째로 여러분은 100퍼센트 이런 사람들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팔짱 끼고 돌아서서 ‘뭐, 당신 말대로 코빈이 지금은 괜찮을지라도 정부에 들어가면 시리자 꼴이 날 걸요. 완전 쓰레기가 될 거예요’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누구도 설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역사는 단순히 반복되기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운동이 떠받치고 있는 좌파적 노동당 정부라면 그리스 시리자나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상황과 매우 다른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들과 한편에 서서 매주마다 지역 공공병원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우파에 맞서기 위해 싸운다면, 노동당 사람들이나 제러미 코빈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과 협력적으로 활동한다면, 여러분은 이런 사람들과 대화를 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러미 코빈, 정말 잘하고 있지요. 그런데 650명의 제러미 코빈을 의회에 보낸다고 해서 IMF가 사라질까요? EU가 사라질까요? 세계은행이 사라질까요? 영란은행이 사라질까요? 선출되지 않은 법원과 경찰, 군대, 혹은 코빈이 [핵무기] 트라이던트를 없애려 하면 쿠데타를 논의하겠다던 군 장성들은 없어질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여러분은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토론을 시작할 수 있고, 그러려면 인내심을 갖고 그런 사람들과 대화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독일의 혁명가들이 애쓴 것이었고, 비록 독일 혁명에서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이 점은 높이 사야 합니다. 그들은 하루 아침에 권력을 잡으려고 했던 초기의 입장에서, 노동계급 대다수를 획득하려는 방식으로 나아갔습니다.
저는 당시 증거들을 살펴봤을 때, 1923년 여름과 초가을에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다수를 획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는 매우 발전한 자본주의 나라에서 혁명이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선진 자본주의였다고는 해도 지금 우리 상황과 완전히 똑같을 순 없겠죠. 그러나 선진 자본주의에서도 혁명은 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독일 혁명에 대해서 주목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점 중 하나이기도 하고, 우리가 ‘맑시즘’ 같은 행사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역사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전혀 모르죠.
우리는 맨땅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독일 혁명에서 벌어진 일들은 영국의 상황과 매우 매우 관련성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몇몇 동지가 ‘노동계급 안에서 바로 지금 혁명적 경향을 건설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제러미 코빈을 지지하는 광범한 노동계급 대중과 분리되지 않고서 그래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아주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SWP에 가입하라고 제안하는 이유죠.
우리가 가입을 강조하는 것은 무슨 상이 주어지기 때문이 아니라[청중 웃음], 노동계급 내에서 토론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 전진한다면, 우리가 더 강력한 혁명적 경향을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운동이 실망만 안기고 끝나는 일이 없도록 만들고, 급진화를 키우는 흐름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바라건대 사회 변혁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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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e lost revolution: Germany 1918-23 - Michael Bradley’, SWP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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