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의 마르크스주의와 혁명 *
옮긴이 서문 ─ 30년 전인 1994년 4월,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후 흑인이 참가하는 진정한 보통선거가 처음 실시돼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넬슨 만델라가 집권했다. 만델라의 집권은 20세기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와 그에 기반한 백인 권력에 맞서 벌어진 위대한 투쟁의 성과였고 흑인 노동계급이 그 운동에서 핵심적 구실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공에서 평범한 흑인들은 여전히 천대와 착취,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형식적 불평등은 사라지고 지배자 상당수의 피부색은 검게 바뀌었지만, 아파르트헤이트 타도에 나섰던 평범한 흑인들의 해방 염원은 배신당했다.
그러나 그런 배신을 규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ANC나 남아공공산당 등의 민중주의 노선이 흑인 노동자들의 바람을 채워 줄 수 없다는 점은 아파르트헤이트가 무너지기 한참 전부터 남아공 운동 속에서 지적됐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답해야 할 것은 ‘왜 좌파는 민중주의를 대신할 정치적 지도력을 제공하지 못했느냐’이다.
남아공 좌파의 실패를 이해하는 데서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이 논문은 유용하다. 이 논문은 아직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이 한창이고 50만 조합원을 거느린 거대 노총 코사투가 출범한 직후인 1986년에 쓰여, ANC가 집권에 이르는 길과 집권 후 상황에 대한 분석이 담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아공 운동을 지배하던 민중주의와 노동자주의가 어떤 약점을 갖고 있었는지 분석하며 혁명적 좌파의 과제를 제시한다.(독자 편의를 위해 본문 뒤에 당시 남아공 단체를 소개했다.)
이런 분석과 과제들은 오늘날 한국 독자들에게도 유용할 것이다. 한국 운동에는 여전히 민중주의적 경향이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고, 노동조합 운동 내에서는 노동자주의적 경향을 띠는 활동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1 현재의 반란은 규모와 강도, 지속기간이라는 면에서 1976년 6월의 소웨토 대항쟁조차 벌써 뛰어넘었다. 더욱이 현재의 반란은 몇 가지 점에서 남아공 백인 권력에게 특히 위협적이다.
1984년 9월 이후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주시하고 있다.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을 뒤흔드는 타운십[옮긴이 주: 아파르트헤이트 하에서 흑인 노동자들은 ‘백인 지역’에 거주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백인 지역’ 외곽에 ‘타운십’이라는 흑인 거주 지역을 둬, 흑인 노동자들이 그곳에 살면서 출퇴근하도록 했다.] 투쟁이 지난 10년간 벌써 세 번째이다.2 셋째, 흑인 노동계급의 운동(독립노조를 통해서 조직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이 온전히 자력만으로 만만찮은 세력으로 부상했다. 노동조합들은 타운십 반란으로 빨려 들어왔고 몇몇 ‘결근 투쟁stayaway’에[옮긴이 주: 이 시기 남아공의 ‘결근 투쟁’은 타운십의 출입구를 봉쇄해 흑인 노동자들이 ‘백인 지역’으로 출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타운십 내 시민 단체들이 사용하는 전술이다. 노동자들이 생산 거점에서 맺은 관계를 바탕으로 투쟁을 벌이는 파업과는 구별된다.] 동참했는데(정치 총파업) 1984년 11월 트란스발 투쟁이 특히 중요한 사례였다. 흑인 노동계급 운동이 정권에 얼마나 위협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 준 사건은 1985년 12월, 수많은 노동조합들이 하나로 모여 50만 조합원을 포괄하는 신생 “슈퍼 노총”, 즉 남아공노동조합회의COSATU(이하 코사투)를 결성한 것이다.
첫째, 심각한 경기 후퇴가 (그 영향을 아무리 작게 보더라도) 이번 반란에 일조하고 있다. 경기 후퇴로 자본의 해외 도피가 더한층 심해지면서 남아공 자본주의의 어려움이 가중됐다. 정부를 이끄는 대통령 P W 보타는 그가 약속했던 개혁을 더 빨리 추진하라는 압력을 국내외 자본에게서 전례없이 크게 받고 있다. 둘째, 아프리카민족회의(이하 ANC)가 (비록 [남아공에 인접한] 스와질란드와 모잠비크에서는 기반을 잃었지만) 남아공 안에서 군사 작전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ANC의 무장 행동은 (대체로 산하 군사기구인 ‘움콘토 웨 시즈웨’(이하 MK)를 통해서 이뤄지는데) [옮긴이 주: ‘움콘토 웨 시즈웨’는 민족의 창이라는 뜻이다.] 1985년 들어 309퍼센트 증가했다. 그러나 이런 진행 상황에 눈길을 빼앗겨 남아공에서 혁명의 성공을 가로막을 수 있는 장애물들을 간과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될 것이다. 정권은 백인 성인 남성을 모두 동원해 자기 방어에 나설 능력 등 막대한 억압 수단을 갖고 있다. 타운십 반란이든 MK든 그 어느 쪽도 지배계급이 독점하고 있는 무장력에는 아직 심각한 균열을 내지 못했다. 한편 노동자들의 운동은 (아래에서 더 살펴볼 테지만) 대체로 노동조합 운동의 한계 안에서 발전해 왔다. 아파르트헤이트 국가를 타도하기까지는 향후 수년에 걸친 투쟁이 필요하고 그 속에서 전진과 후퇴를 겪을 공산이 크다. 현재 투쟁의 규모를 보건대, 그리고 아직 이 운동이 가야 할 길이 상당히 먼 만큼 분석과 전략을 날카롭게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수년 동안 우리[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는 남아공 투쟁이 단지 민족 해방과 정치적 평등을 위한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와 자본주의가 워낙 긴밀하게 얽혀 있는 탓에 사회주의 혁명만이 남아공에서 인종적 지배 체제를 끝장낼 수 있고, 그런 혁명에서는 흑인 노동계급이 중심적 구실을 수행할 것이라고 말이다.이와 아주 비슷한 주장을 노동조합이나 타운십 조직의 활동가들이 지난 5년 동안 펼쳐 왔다. 그리고 “노동자주의”와 “민중주의”로의 양극화가 진행됐다. 노동자주의자들은 노동계급 조직의 독립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특히 노동조합에 많다. 반면 민중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이, 모든 억압받는 이들이 모인 민주대연합의 일원임을 (다른 대중 단체들처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논쟁에는 노동자 권력이 당면 과제가 될 수 있는지, 아니면 남아공 대중이 흑인에 의한 다수결 통치만을 과제로 삼아야 하는지라는 질문이 깔려 있다. 후자는 ANC와 그 지지자들의 주장으로, 그들은 연합민주전선(이하 UDF)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질문들은 남아공 혁명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질문들로, 이 글에서는 그 답을 제시하기 위해 저항 운동 내 각종 정치 경향들을 살필 것이다. 나는 좌파, 즉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투쟁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과 떼어 낼 수 없다고 보는 이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러나 주류 민중주의 경향들(특히 ANC/UDF)의 강령과 실천을 다루지 않고는 그런 논의를 할 수 없다. 이하에서 내가 남아공 활동가들에게 던지는 비판은 그들의 용기에 대한 찬사와 투쟁에 대한 연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투쟁을 더 효과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주려는 것임을 독자들이 알아주길 바란다.
주류 민중주의 전통 — ANC, UDF, SA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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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UDF와 ANC 전통ANC는 1912년에 결성됐다. 첫 30년 동안은 소심한 개혁주의 단체로, 점잖은 아프리카 중간계급(성직자, 교사 등)이 다수였다. 그러다 1940년대를 거치며 다음과 같은 여러 요인 때문에 급진화했다: 노동자와 타운십 투쟁이 대규모로 벌어진 것(당시의 절정은 1946년 광원 파업이었다), 1943년에 전투적 민족주의 성향의 ANC 청년동맹이 결성된 것, 1948년에 국민당이 인종적 지배 체제를 강화하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내걸고 집권한 것. 이런 상황에서 ANC는 국민당 정부에 맞서는 각종 대중 저항을 조직했고, 1960년 3월 샤프빌 학살 이후 불법화됐다. 이후 ANC 지도부는 지하로 들어가 MK를 꾸리고 사보타주 활동에 나섰다. 1963년 7월 [요하네스버그 근교] 리보니아에서 MK 지도부가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은 이후 ANC는 사실상 망명 단체가 됐고 [아프리카 내륙국]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로 근거지를 옮겼다. MK 게릴라들은 꾸준히 남아공에 잠입했는데, 특히 1976년 소웨토 항쟁 이후 청년들이 ANC로 대거 가입하면서 더욱 그랬다.
1970년대는 ANC에게 힘든 시기였는데, 당시 ‘흑인 의식 운동’(뒤에서 더 다룬다)이 영향력을 키우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소웨토 항쟁에서 ANC 지지자들은 딱히 주도적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ANC 지지자들이 놀랍도록 크게 늘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일부만 적자면 다음과 같다: 흑인 의식 운동의 핵심 단체들이 1977년 10월 이후 불법화된 것, 흑인 의식 운동 이데올로기의 비일관성, ANC가 누리는 국제적 지지(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이 ANC를 정부로 인정한다), 1980년에 시작된 만델라 석방 캠페인, (마지막으로, 그러나 못지않게 중요한) ANC의 무장조직 MK가 갈수록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
6 “시민기구civic”라 불리는 이 단체들은 집세, 임금, 교통, 교육을 둘러싼 각종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이들 덕분에 높은 수준의 대중 동원이 가능하다.
UDF의 부상과 함께 ANC의 대중 장악력은 대단히 강력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권이 주장하듯 UDF가 ANC의 외피 조직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UDF는, 1976년 6월 이래로 대중 저항이 분출한 것과, 정권이 아프리카인들의 타운십 “자치 기구”라며 흑인지역기관(이하 BLA) 제도를 만들어 흑인 중간계급을 국가로 포섭하려는 전략을 추진한 것에 대응하려면 지역 시민 단체들의 촘촘한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커진 결과였다.7 둘째는 1983년 11월에 백인 유권자들의 승인 아래 이뤄진 개헌이었다. 개헌을 통해 행정부의 권한을 대통령의 손에 집중하는 한편, 컬러드와[옮긴이 주: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프리카 인종을 넷(백인, 아프리카인, 컬러드, 인도인)으로 분류했는데, 컬러드는 그중 하나로 백인과 다른 인종 사이의 혼혈을 가리킨다.] 인도인들이 (실질적 권력 분점은 없지만) 의회에서 자신들만의 원院[인종별 삼원제 의회]을 구성할 수 있도록 양보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아프리카인들의 경우에는 각자의 반투스탄[명목상으로 아프리카인들이 속하는 부족별 자치구] 바깥에서는 BLA를 통해서 정치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8
이런 기층 조직들이 전국적 구심을 갖추게 된 계기는 정권이 두 가지 일을 벌인 것이었다. 첫째는 아프리카인들의 도시 출입을 전보다 더 옥죄는 법안 3개를 1982년에 추진한 것이다(당시의 아파르트헤이트 관리 담당 장관의 이름을 딴 ‘P J 코르노프 법안’). 국가의 이런 계획에 전국적 대응으로 맞서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보타의 이런 “뉴딜”에 맞서 전국적 공동전선 창립을 가장 먼저 주창한 이는 1983년 초,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알란 부사크 박사였다. 이런 아이디어를 먼저 제안한 쪽은 훗날 전국포럼위원회(이하 NFC, 아래에서 더 살펴볼 것이다)를 결성하는 세력이었지만, ANC 동조자들이 그 아이디어를 “낚아챘다”. UDF 지역조직들이 먼저 생겼고, 그런 흐름의 절정으로 UDF 전국 조직이 1983년 8월 20일 케이프타운 인근의 록랜즈에서 결성됐다. UDF는 다음과 같이 공언했다. “우리의 모든 민중 — 그가 있는 곳이 도시든 시골이든, 공장이든 광산이든, 중고등학교든 대학이든, 집이든 스포츠 경기장이든, 교회든 모스크든 사원이든 — 을 우리의 자유를 향한 투쟁으로 단결시키겠다.” UDF는 독자적 정치 운동보다는 자율적 단체들의 광범한 전선체를 표방한다. 전국적으로 약 600개의 단체들이 가맹하고 있다(1985년 초 기준). 그러나 동시에 노동계급의 구실을 특별히 강조한다. UDF 창립대회에서는 “자유를 향한 민주주의 투쟁에서 노동계급의 지도력”을 신뢰한다고 천명했다.그러나 실제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케이프타운 지역의 UDF 조직을 분석한 다음 연구를 보면 알 수 있다:
UDF를 구성하는 대중 단체들의 저변은 남아공 지역마다 차이가 크다. ANC의 전통적 아성인 이스턴케이프 지역에서 UDF는 당연히 대단한 대중적 기반을 갖고 있다. 예컨대, 1983년 10월에 집세 인상에 항의하는 투쟁으로 결성된 [이스턴케이프 지역의] ‘크라도크 주민 연합’(크라도라)은 자체적으로 청년 조직과 학생 조직을 산하에 거느리고 있고, 선출된 거리 위원회들의 네트워크를 관리한다. 메튜 고니웨 등 크라도라 지도자 4명이 1985년 6월에 잔인하게 살해된 이유가 이처럼 성공적인 대중 조직을 건설한 것이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UDF에 합류한 단체들은 …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비주류” 단체들(예컨대, 교회나 직종별 협회). 이 단체들의 구성원이나 강령은 비교적 선명하게 프티부르주아적이다.
2) 학생/청년 단체들. 이들의 구성과 강령을 보면 대체로 급진적 프티부르주아지가 노동계급 성원을 지배한다.
3) 지역사회 단체들 … :
a) 이 단체들의 지역 기반은 매우 약하고 회원도 적고, 그 회원들도 이미 다른 운동 단체에서 활동 경험이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b) 이 단체들의 강령은 대체로 제한적이다. 예컨대 집세 문제를 다루더라도 임금이나 생산 현장의 경제적 착취와 연결시키지는 않는다.
c) 이들 단체 안에서는 계급 구분을 흐리고 계급에 따른 관점 차이도 흐린다. “우리는 모두 천대받는 여성이다”라거나 “우리는 모두 천대받는 세입자다”라는 식이다.
d) … 전반적으로 그 지도부는 개혁주의 이데올로기를 지닌 지식인들이 지배하고 있다. UDF를 다루면서 UDF가 다른 진보적 반대파 목소리를 제압하고 자신들의 핵심 노선을 은밀히 강요하려 한 것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UDF는 자신들의 노선(다른 어딘가에서 정해진다)에 반대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한다. UDF를 비판하는 것은 국민당 정부와 내통하는 것, 국민당의 첩자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전에 동료였더라도 “노동자주의”에 가까워지면 ‘선을 넘었다’고 여긴다. 이를 둘러싼 치열한 싸움이 학계뿐 아니라 활동이 별로 정치적이지 않은 위원회들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14 UDF의 이런 생각은 남아공 혁명의 성격에 대한 ANC의 전통적 관점에 기초한다. ANC와 그 동맹, 각종 파생 조직들에게 투쟁의 목적은 민족 해방, 즉 아파르트헤이트를 끝장내고 흑인 다수의 통치를 실현하는 것이지 사회주의 혁명 — 자본주의 타도와 흑인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 — 이 아니다.
그럼에도 UDF가 핵심적으로는 광범한 세력의 연합이라는 점은 UDF의 홍보 책임자 “테러” 레코타의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비非인종적이다. 그 뜻은 우리가 모든 인종을 포괄하고 또한 우리는 모든 계급을 아우른다는 것이다.” ANC에게는 2개의 핵심 강령 문건이 있다. 첫째는 자유헌장으로, 1955년 ANC가 소집한 민중대회에서 채택됐다. 자유헌장에 대한 추가 논의가 그 30주년인 1985년에 있었다. 지도적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인 던컨 이너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헌장에는 전체적으로 커다란 모호함이 있고 그 탓에 정치적으로 상이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를 향하는 것으로, 어떤 이들은 사회주의를 향하는 것으로 이해되길 바란다.”자유헌장 내용의 대부분이 더할 나위 없이 부르주아-민주주의 강령이라는 점에서 이런 모호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특히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자유헌장의 유명한 첫 문장(“남아프리카는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 흑인과 백인의 땅이다”)과 첫째 핵심 요구(“민중이 지배해야 한다”)이다. 물론, 셋째 요구(“민중은 나라의 부를 공유해야 한다”)에서는 “땅속 광물 자원과 은행, 독점 산업[오류는 원문 그대로 — 캘리니코스]”의 국유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자유헌장이 채택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넬슨 만델라는 해당 구절을 사회주의적 요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국유화 요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들 독점 산업을 분할하고 민주화하면 비유럽 부르주아 계급이 번영할 수 있는 발전 기회가 새로 제공될 것이다. 이 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비유럽 부르주아지가 자기 명의와 권리로 광산과 공장을 소유할 기회를 가질 것이고, 상업과 사기업이 전례없이 융성할 것이다.”헌장에서 주창하는 민주적 변화가 본질적으로 아주 심대한 것은 맞지만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청사진은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민중 내의 다양한 계급과 집단을 민주적 기초 위에서 통일시키는 것이다. … “민중이 지배해야 한다!”는 선언은, 권력을 특정 사회 계급이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민중 즉, 노동자든 농민이든 전문직이든 프티부르주아든 모두에게 이전한다는 것이다.
17 ANC에게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미래에나 고민할 일이다. ANC에게 당장 화두인 것은 흑인 사회의 모든 계급을 아우르는 동맹을 결성해 남아공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ANC의 또 다른 핵심 강령 문건은 1969년 5월 [탄자니아] 모로고로에서 열린 자문 협의회에서 채택됐는데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남아공의 우리는, 민족 해방 투쟁을 최우선에 두는 세력에 속한다.”(2) 남아공공산당과 2단계혁명론
이와 달리 ANC를 여러 경향이 혼재하는 조직으로 보면서, ANC 안에는 위와 같은 우파의 전략에 도전하는 좌파도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ANC와 UDF 안에서 투쟁의 목표가 민족 해방이지 노동자 권력은 아니라고 가장 정교하게 주장하는 세력은 다름아닌 남아공공산당SACP이다.
18 그 뿌리인 국제사회주의연맹ISL은 제1차세계대전에 반대하면서, 인종차별적인 남아프리카노동당에서 떨어져 나왔다. 남아프리카노동당과 마찬가지로, ISL과 초기 남아프리카공산당도 인적 기반이 아주 협소했다. 바로 직공들로 이뤄진 백인 노동귀족들이었는데, 이들 중 다수는 영국 출신으로 1914년 이전의 신디컬리즘과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남아프리카로 갖고 왔다. 비록 공산당에서 가장 창의적이었던 지도자들(예컨대 시드니 번팅, 데이비드 이본 존스 등)은 흑인 노동자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지만, 당 자체는 백인 노동귀족을 남아프리카 프롤레타리아의 전위로 여기고 그 직공들의 조직력과 전투성을 높이 사는 경향이 컸다. 그 결과 1922년 1~3월 백인 광원들의 반동적 파업이었던 랜드 반란을 지지했다. 그 파업은 흑인을 광업 숙련직에서는 고용하지 못하도록 한 인종차별적 제도가 점차 약화되던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어진 1924년 총선에서 공산당은, 명백히 인종차별적인 공약을 기초로 국민당과 노동당이 꾸린 선거연합을 지지했다. 19
남아프리카공산당CPSA[창당 당시엔 남아공이 아닌 영연방의 일부였다]은 1921년 7월 29일에 창당했다. 그러나 번팅과 다른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또 코민테른의 촉구에 따라, 남아프리카공산당은 흑인 노동계급을 지향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후 코민테른이 스탈린주의화하면서 이런 변화의 흐름은 다시 곁길로 샜다. 그러던 중 1928년 8~9월 코민테른 6차 대회에서 남아프리카공산당은 다음과 지시를 받았다. “반反원주민법에 맞서는 모든 투쟁을, 영국의 식민 지배에 맞선다는 일반적 정치 구호, 남아프리카에서 모든 인종(흑인·컬러드·백인)에게 온전하고 동등한 권리가 보장되는 노동자·농민 공화국으로 나아가는 한 단계로서 원주민들의 독립 공화국을 건설하자는 구호와 결합시켜야 한다.” “원주민 공화국”이라는 구호는 스탈린이 1920년대 중엽 식민지와 반半식민지 나라에 적용한 일반 전략을 남아프리카에 그대로 대입한 것이다. 이 전략에 따르면 혁명은 두 단계로 이뤄진다. 1단계에서는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노동자, 농민, 지식인, “민족 부르주아지”를 단결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를 완수한 후에만, 즉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민족독립을 쟁취한 후에만 [2단계로] 프롤레타리아가 사회주의를 향한 독자적 투쟁을 벌일 수 있다고 본다. 중국의 1925~1927년 혁명에 이 전략이 적용된 결과는 재앙이었다. 중국공산당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에 자신을 종속시켰고, “민족 부르주아지”의 반감을 우려해 노동자·농민의 독자적 투쟁을 억눌렀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국민당 장제스의 군대는 (군벌을 무찌른 후) 공산당 투사들을 학살했다. 트로츠키는 이 전략을 가차없이 비판했다. 트로츠키는 바로 이 시기에 연속혁명을 일반 이론으로 정식화했는데, 그 내용은 후진국에서 부르주아지가 더는 혁명적 구실을 수행하지 않으므로 노동계급만이 투쟁을 성공적으로 지도해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를 모두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22 그 이래로 남아프리카공산당은 모스크바 노선이 급선회할 때마다 이를 충실히 따랐다. 이처럼 남아프리카공산당이 크렘린 관료들에게 복종하는 태도는 심지어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 후에도 계속됐고, 헝가리 [혁명 진압]에서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이르기까지 남아프리카공산당은 소련의 모든 정책을 추종했다. 또한 남아프리카공산당이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토론하면서 보인 태도(특히 계간 이론지 《아프리카 공산주의》) 역시 비신스키나 즈다노프[둘 다 스탈린의 대숙청의 핵심 인물이다]가 논쟁에서 보인 모습을 빼다 박았다. 23
1928년 이래로 남아프리카공산당은 스탈린주의 2단계 혁명 전략을 추구했다. 코민테른 6차 대회 이후 남아프리카공산당은 “볼셰비즘화”했고 그에 따라 새 전략에 비판적인 인물들(번팅도 그중 한 명이었다)은 제명됐다.24 공개 활동을 재개하는 대신, 공산당 활동가들은 다른 단체들, 특히 ANC 자체와 [ANC가 주도하고 인도인회의, 컬러드회의, 노동조합회의, 민주주의자회의 등이 1955년에 결성한] 회의동맹CA 산하 다른 단체들(대표적으로 백인 단체인 민주주의자회의COD)에서 활동하는 방식을 갈수록 더 많이 취했다.
공산당의 이런 2단계 혁명 전략이 낳은 결과 하나는 ANC와 점차 융합된 것이다. [1948년에] 새로 집권한 국민당 정부가 만든 공산주의 금지법에 따라 불법단체가 될 상황이 되자, 남아프리카공산당CPSA 중앙위원회는 1950년 6월 20일 당 해산을 표결했다. 그리고는 1953년에 남아프리카공산당SACP으로 비밀리에 재창당했고 10년 동안 그 존재를 비밀에 부쳤다. 1958년 당대회에서는 공개적 대중 활동을 재개할지를 놓고 심각한 분열을 빚었다.이처럼 공산당이 ANC와 그 유관단체들을 통해 활동하는 방식은 ANC가 불법화되고 망명을 떠나게 되자 더한층 고도화했다. 공산당원들이 주요 지도부 직책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 사례는 조 슬로보인데, 그는 백인 변호사 출신으로 수년 동안 MK 최고지도부의 일원이었고, 1969년 무장 투쟁을 이끌기 위해 만들어진 혁명위원회에서 일했고, ANC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최초의 백인이었다(1985년 6월 잠비아 카브웨에서 열린 ANC 자문 협의회). 일부 관찰자들은 그 대회에서 새로 구성된 확대 집행위원회 안에서 공산당이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공산당은 조직적 측면만큼이나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을 발휘한다. 공산당은 2단계 전략을 가장 일관되게 옹호하는 세력이다. 공산당이 1962년에 채택한 강령 문서 《남아공 해방으로 가는 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남아공 민중의 모든 부문의 즉각적이고 긴요한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민족 민주 혁명으로 백인 우월주의 식민 국가를 전복하고 남아공에 독립된 민족 민주 국가를 세우는 것이다.” 그 문서는 “(자유헌장의) 남아공 민주주의 혁명의 주요 목표와 노선은 … 사회주의를 위한 강령이 아니”라고 인정하지만 그래도 “자유헌장을 전폭 지지하기로 약속한다.” 같은 취지에서 공산당의 그 문서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민족 해방 기구로서 ANC는 특정 계급이나 특정 이데올로기를 대변하지 않는다. ANC는 이 나라 아프리카인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계급과 계층을 대변한다.”
이런 맥락에서 공산당은 3가지 구체적 문제에 직면한다: 남아공 사회의 성격, 흑인 중간계급 문제, 광범한 연합 안에서 노동계급의 구실과 사회주의를 위한 노동계급의 투쟁.
이들 중 첫째가 문제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2단계 혁명 전략은 식민지와 반식민지를 염두에 두고 고안된 것이었다. 그런 경우에는 1단계 과제가 비교적 분명했는데 바로 외세 지배를 물리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남아공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오래전 영국에서 독립한 오늘날] 남아공에는 자국 지배계급이 깊이 뿌리박고 있는데 말이다. 이에 대한 공산당의 답변은 남아공 사회구성체에 식민지적 관계가 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내부 식민지론” 또는 “특별한 종류의 식민지 이론”이다.
한 층위에서는, 즉 “백인 남아공”에서는 제국주의라는 최종 단계에 도달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특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층위, 즉 “비백인 남아공”에서는 식민지의 모든 특징을 볼 수 있다. 토착민들은 극단적 민족 억압과 빈곤, 착취, 민주적 권리 결여를 겪고 있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집단은 자신들의 외세 “유럽” 특징을 강조하고 공고히 하려 한다… 비백인 남아공은 백인 남아공의 식민지다.
27 최근 슬로보는 이 이론의 정치적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남아공의 특징인 제도적 민족 억압을 확실히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혁명적 실천의 전망을 수립하는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런 이해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당면 투쟁의 주된 내용이, 인종적으로 지배받고 착취당하는 흑인 공동체의 완전한 민족 해방이라는 것이다.” 28 다시 말해, ‘흑인 남아공’은 백인들의 식민지 상태에 있고 따라서 정치적 독립을 위해 모든 계급이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나중에 ANC가 수용한다.이런 정치적 논리가 참 편리할 수는 있겠으나 “내부 식민지론”은 일종의 기이한 판타지다. 남아공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공업화한 나라이고 그 인구는 (흑인과 백인 모두) 지난 세기 동안 꾸준히 프롤레타리아화하고 또 도시화했다. 공산당은 이런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를 가리켜 계급 구조가 상이한 2개의 사회가 있고(하나는 백인 사회, 하나는 흑인 사회) 두 사회의 핵심 정치적 관계는 백인 사회가 흑인 사회를 식민 지배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설명은 단지 터무니없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난 15년간 남아공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연구 성과를 통째로 내다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간 남아공의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은 인종적 지배 질서가 생겨나고 또 이후 변화를 겪은 것은 남아공 자본의 이런저런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서임을 보였다.(아래에서 더 다룬다.)
29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그런 오류에 빠져 있다. 그들은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하 착취와 인종차별의 관계를 다루지 않았으므로 착취와 차별의 관계는 우연적이라고 가정한다. 그래서 남아공에서 자본주의의 지속을 위협하지 않고도 아파르트헤이트를 끝장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만을 다뤘다. 한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띨지는 구체적 상황, 예컨대 주된 계급 관계, 그 나라의 역사 발전 경로,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지위 등에 따라 달라진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자본주의가 계속 유지되고 번성하면서도 쉽게 제거될 수 있는 일탈 같은 것이 아니다. 남아공 자본주의의 독특한 특징 — 구체적으로는 자본 설비와 기계 수입을 위한 외화 획득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부문이 대단히 노동 억압적인 광업이라는 점 — 때문에 남아공에서 인종적 지배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생존을 위협할 것이다. 30
내부 식민지론을 옹호하는 이들은 그 이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추상적으로” 이해한다고 반박한다.둘째 문제는 천대받는 흑인 “민족”의 한 부문, 즉 흑인 부르주아지·프티부르주아지에 관한 것이다. 이들의 진보적 구실을 공산당 강령은 매우 강조한다:
식민지 남아공만의 독특한 특징, 즉 다른 식민지였다면 민족 자본가 계급이 성장했을 기회를 백인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아프리카인 자본가 계급은 발전 가능성이 차단되고 있다 … 아프리카인 상업 계급의 이해관계는 전적으로 노동자·농민과 함께 백인 지배 체제를 타도하는 데에 있다.
이런 분석은 무엇보다도 타운십의 발전으로 흑인 상업 부르주아지가 거둔 성공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런 변화가 1962년에는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 오늘날에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특히 [이 글이 쓰이기 불과 몇 해 전인 1980년에 독립을 얻어 낸 인접국] 짐바브웨에서 비슷하게 천대받았던 흑인 경영자 계급이 독립 후 부상해, 이전까지는 백인의 전유물이었던 부문으로 진입하고 집권당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지금 보타가 갖가지 경제적 양보, 개헌, BLA 개편을 하고 있는 전략적 의도는 흑인 중간계급을 국가로 포섭하는 것이다. 이미 여러 타운십과 반투스탄에서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물질적 이해관계를 갖는 부역자 층이 생겨났다. 공산당은 이런 현상을 알면서도 여전히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대다수 흑인 중간계층은, 같은 계층의 백인보다는 흑인 노동자들과 더 긴밀한 운명이다. … 그들의 이해관계는 민족 억압 체제 타도에 있다. … 중간계층 집단들을 갈수록 더 많이 우리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여전히 혁명적 필수 사항이다.”
흑인 자본가들이나 변호사 등 전문직들이 인종적으로 천대받는 한, 그들의 객관적 이해관계가 백인 지배 타도에 있다는 것은 물론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그런 상황에서 진지한 혁명적 정당이라면 최소한 그런 사회 부문이 중립화되도록 애쓸 것이고, 더 좋기로는 그들의 능동적 지지를 끌어내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남아공은 역동적인 상황에 있다. 한편으로는, 정권이 대자본의 압력을 받아 추가 개혁을 제공할 공산이 크고 그 일환으로 어느 단계에서는 전국적 수준의 “권력 분점”도 나타날 수 있다. 더 광범한 흑인 중간계급 층을 정권 편으로 만들려는 의도로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흑인 노동계급 운동이 독자적 투쟁을 벌이고 요구를 더 발전시킬 공산이 크다. 여기서 핵심 쟁점은 흑인 노동계급이 흑인 중간계급의 이탈과 동요를 막기 위해 장차 자신의 투쟁과 요구를 포기해야 하는가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가 중간 계층을 중립화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이 질문의 답변은 노동계급이 자신만의 독자적 정치 조직을 가졌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바로 그 때문에 공산당은 셋째 문제, 즉 광범한 민족 연합 내 프롤레타리아의 구실이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이론상으로 공산당은 분명한 답변을 갖고 있다. “노동계급은 민족 민주 혁명에서 농민, 도시 중간계급, 지식인과의 긴밀한 동맹을 추구한다. 오직 노동계급의 지도 아래에서만 그 혁명의 목표를 완수할 수 있다.”
34 조 슬로보는 이런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폈다. “만약 … 해방 투쟁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이 지배적 위치에 오르는 혁명적 민주 동맹이 실현된다면(이는 현재 남아공의 당면 과제다), 혁명 이후 상황은 사회주의로 계속 나아가는 길의 첫 단계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길은 오직 프롤레타리아와 그들의 자연스런 동맹만이 제시할 수 있다.” 35 이렇게만 보면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헛짚은 것인 양 보일 수 있다.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결국 노동계급과 그들의 이익이 중심적이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위 주장과 긴밀히 연결된, 마치 ANC 전략 비판을 무력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또 다른 주장이 있다. ANC 전략의 옹호자들은 2단계 혁명이 실제로는 중단 없는 하나의 과정일 것이라면서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를 대립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둘 다 하나의 과정에 속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36 그런데 그들은 혁명의 연속적 성격을 어떻게 보장할까? 그들의 답은 노동계급이 지도적 구실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리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노동계급이 지도적 구실을 맡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장될까? 남아공공산당의 역할이 이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남아공공산당은 “노동계급의 정당”이고 “비백인 민중의 민족 해방과 민주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을 지도하는 것을 당면한 중심 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7
‘2단계 혁명을 중단 없는 하나의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은 사실 스탈린이 2단계 혁명론을 처음 정식화할 때로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흑인 프롤레타리아가 다른 천대받는 부문에 지도력을 발휘하도록 담보할 유일한 방법은 노동자들의 모든 진취적 행동을 고무하는 것, 또한 노동자들이 투쟁 속에서 조직을 강화시키고 의식을 발전시키고 자신감을 고양시킬 모든 기회를 붙잡도록 고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간 남아공공산당이 보였던 모습은, 노동계급의 조직과 투쟁이 회의동맹의 테두리 바깥에서 등장할 때마다 엄청난 불신을 표하는 것이었고 심지어 적대적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 공산당은 ‘노동조합들의 남아공회의SACTU’(공산당이 지배하고 ANC 노선을 따르는 망명 단체)의 테두리 바깥에서 등장하는 독립 노조들에게 특히 그런 태도를 보였다. 단적으로 주요 노총인 남아공노동조합총연맹FOSATU(이하 포사투)의 조 포스터가 민족 해방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지도력을 발휘하려면 포사투 같은 노동조합 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남아공공산당은 그야말로 격분했고, 공산당이 노동계급을 대변할 권한에 도전하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감히 포사투가 이를 무시한단 말인가? 그리고 공산당이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포사투가 별개의 ‘노동자 운동’을 새로 만들거나 경쟁하려 들 경우 노동계급 기층에서 빚어질 혼란과 분열을 감히 무시하려 한단 말인가?”결국 민족 해방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지도력을 발휘하는 문제에 대한 남아공공산당의 개념은 대리주의, 즉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를 대변하고 대신해서 행동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리주의를 공산당이 ANC 안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으로 정당화한다. 공산당은 자신의 그런 영향력을 통해서 투쟁이 사회주의로 귀결될 것이 보장된다고 주장하지만, 광범한 연합과 그 연합의 전술은 “민족 해방” 단계에서 “사회주의” 단계로의 이행을 본질적으로 가로막고자 고안된 것들이다. 이 점은 ANC의 실제 전략을 살피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3) 게릴라전과 지역사회 투쟁
39 1970년대 후반부터 MK는 건물이나 시설 파괴, 정부 요원 암살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1961년 이래로 ANC는 MK를 통해 무장 투쟁에 나서는 전략을 추구해 왔다. 초창기 무장 투쟁은 아마추어 같았고, MK의 지하 사령부가 체포되는 ‘리보니아 참사’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후 20년을 거치면서 ANC의 무장 투쟁 활동은 고도의 전문성을 갖추게 됐고, 그 활동을 잘 아는 한 소식통에 따르면 잘 훈련된 게릴라 병력을 6000~1만 명 규모로 양성해 냈고 특히 소웨토 항쟁의 여파 속에서 그럴 수 있었다고 한다.40 달리 말하자면, ANC 게릴라전의 목적은 월등하게 우월한 보안군을 상대로 군사적 승리를 거두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대중적 지지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다른 지역과 세계 다른 곳들에서 그런 방식의 게릴라 투쟁을 발전시킨 바 있다. 그렇지만 그런 투쟁들은 거의 예외없이 농민 전쟁이었다. 농민 전쟁에서는 게릴라들이 고립된 농촌 촌락에 잠입한 후 점진적으로 대중적 기반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해방구”를 서서히 건설하며 국가 권력의 도시 거점들을 포위한다.
게릴라전은 통상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고 ANC도 예외가 아니다. 어떤 이는 ANC 게릴라 활동을 “무기를 통한 선전으로 대중적 정치 기반 구축하기”라고 적절하게 표현했다.41 남아공 인구 다수는 여전히 농촌에 살고 1980년에 아프리카인들은 3분의 1만이 도시화했다. 42 그러나 농촌 사람들이 생계를 농사에 기대지 않게 된 지는 꽤 됐다. 단적으로 트란스케이 반투스탄은 농촌 지역이 대부분이지만, 그 지역에서 농업 순소득이 가계 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퍼센트가 채 안 된다. 43 농촌 인구 대다수는 임금노동자이거나 그의 부양가족이고, 많은 경우 재정착촌에서 끔찍하게 헐벗게 생활하며 지낸다. 재정착촌이란, 언제든 “백인” 도시들에 노동력을 (이주 노동자나 통근 노동자 형태로)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투스탄 내 지역이다.
그러나 남아공의 조건은 사뭇 다르다. 이 나라 자본주의 발전의 독특한 점 중 하나는 독자적 사회 계급으로서 농민이 사실상 파괴됐다는 것이다.44 그리고 남아공 혁명의 운명이 결정될 곳도 바로 도시일 것이다.
이상이 뜻하는 바는 남아공에는 전통적 게릴라 전략을 수행할 사회적·경제적 토대가 없다는 것이다. 과거 남아프리카 농촌 지역에서는 한 세대 내내 대중적 투쟁이 매우 거대하게 벌어진 바 있다.(1950년대 후반에 있었던 폰돌란드 대항쟁이 그 정점이었다.) 대다수 농촌의 흑인들은 여전히 끔찍한 조건에 있지만, 최근 10년 동안에는 농촌에서 그런 투쟁이 재현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간 남아공의 사회 구조에서 도시화와 프롤레타리아화 경향이 확연해진 결과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연구자는 2000년이면 아프리카인의 75퍼센트가 도시에서 살 것이라고 전망했다.ANC도 암묵적으로는 이런 현실을 인정한다. MK의 무장 행동은 대부분 도시 지역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알제리·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이탈리아 등의 역사적 경험을 돌아보면 도시 게릴라전은 대체로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도시는 인구 밀집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보안군이 감시하고 통제하기가 훨씬 더 쉽다. 그 탓에 도시 게릴라들은 살아남기 위해 나머지 시민들에게서 고립된 비밀 지하 조직으로 활동해야 한다. 그래서 대중 투쟁을 고무하기가 농촌보다 훨씬 더 어렵고, 진정한 의미의 인민 전쟁은 두말할 필요 없이 더 어렵다. 대체로 보안군은 결국 도시에서 게릴라들만 솎아 내 분쇄하는 데에 성공한다.
남아공에는 도시 게릴라전을 펼치기에 다른 나라들보다 일부 유리한 조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MK는 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고, 타운십 반란으로 대중이 무장 투쟁에 나서기 유리한 정치 환경이 조성됐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ANC 지도부는 어느 정도 그렇게 믿는 듯한데, 1984년 이래로 MK의 무장투쟁을 인민 전쟁으로 발전시키려 하고 있다. ANC의 그런 전략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남아공을 통치 불능으로 만들자”는 호소로, 각종 전술(예컨대 등교 거부)로 타운십에서 국가의 행정력을 마비시키자는 것이다. 둘째는 타운십들에서 “민중 권력”을 창출해 “해방구”로 만들자는 것이다. ANC 의장 대행을 맡고 있는 올리버 탐보가 1985년 초에 다음과 같이 선언한 것도 같은 취지였다: “우리는 대중적 공세에 나서면서, 어느 한 지역에서 민주주의 세력이 아파르트헤이트의 권위에 도전해 그 지역을 통제하고 대안적 권력으로 부상하는 상황을 여러 차례 만들어 냈고 그 빈도는 갈수록 늘고 있다. 그런 지역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인민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MK가 민중의 군대로 발돋움할 거점을 혁명적 대중 속에 갖게 된다는 것이다.”
46 같은 내용의 유인물이 전국적으로 뿌려졌는데, 그 유인물에는 보안군에 속한 “백인 민주주의자들과 …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백인들”에게 상관의 명령을 거역하라는 호소도 다음과 같이 담겼다: “군대와 경찰 안에서 여러분은 동료 국민을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살상 행위를 여러분에게 명령하는 저 사디스트들에게 총구를 돌려야 한다.” 47
셋째로, MK가 게릴라 정예부대를 넘어 “민중의 군대”가 되려면 대중 자신이 무장을 해야 한다. 수류탄이나 심지어 AK-47 자동소총 같은 무기들이 타운십에 공급되고 있다는 증거가 어느 정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ANC가 주로 그런 식으로 대중을 무장시킬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1985년 2월 22일 ANC 방송에서는 이렇게 묻고 답했다. “이 정권을 무너뜨릴 무기는 어디에 있는가? 다른 나라 누구에게서 무기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무기는 바로 여러분이 사는 이 나라 안에 있다. 무기는 바로 여러분 앞에, 경찰관들이 들고 있다. 그런 경찰의 일부는 퇴근 후 타운십으로 돌아와 여러분과 함께 머물기도 한다. 여러분은 그런 경찰들이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다. 그들의 집에 침입해 그 총을 빼앗자.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우리를 죽이라고 저들에게 쥐어 준 총을 저들에게 겨냥하자. 저들의 병영으로 쳐들어가 각종 총과 기관총을 빼앗자. … 여러분은 경찰서와 병영을 공격해 무기를 획득해야 한다.”혁명적 상황에서라면 이런 일반적 접근이 완전히 타당할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을 겨냥한 대중 봉기가 임박한, 그런 상황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공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군사력 면에서 지배계급은 여전히 압도적 우위를 누리고 있다. 남아공 군대 안에서 군기가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는 조짐은 찾아볼 수 없다. 베트남전쟁 말기에 미군 안에서 볼 수 있었던 비교적 소규모의 마약 복용이나 프래깅(상관 살해) 같은 심각한 소요도 남아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데, 하물며 사병들이 반란에 나설 조짐은 더더욱 없다. 이런 상황에서 보안군을 군사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자살에 가까운 행위다.(MK도 신중하게 그런 공격을 피하고 있다. 1985년 6월 ANC 자문 협의회 이후 MK는 무장 투쟁을 늘렸지만 전과 달리 주되게 “소프트 타겟”, 즉 백인 시민들을 겨냥하고 있다.)
그럼에도 ANC 지지자들은 그런 호소가 유효하고 무장 투쟁은 거쳐야 하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전투에서 패배하는 것도 민중의 군대가 훈련되기 위한 필요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ANC의 무장 투쟁 호소 때문에 영웅적인 흑인 청년들이 보안군 습격이라는 가망없는 일에 목숨을 바치고 있다. (1985년 말부터 1986년 초 사이에 갈수록 늘고 있는) 그런 행위로는 아무도 훈련시키지 못하고 (운이 좋다면) ANC의 전략이 파산했다는 교훈만 남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타운십에 “혁명적 대중 기지”를 만들자는 구상도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 이스턴케이프 같은 몇몇 지역은 보안군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 됐다. 그러나 그런 지역들이 무장 투쟁의 거점이 되는 것은 별개다. 타운십은 처음부터 군대가 쉽게 포위할 수 있고 필요시 식량 공급을 차단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북아일랜드 투쟁의 경험을 보면, 도시 내 그런 접근 금지 구역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대중 동원이 뒷받침될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 반면, 영국 정부가 1972년 3월에 북아일랜드 직접 통치에 나서면서 그만한 대중 동원이 어려워지자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통제하던] ‘데리 해방구’ 등은 영국군에 다시 점령당했다. 남아공에서도 1976년과 1980년 타운십 반란을 돌아보면, 타운십은 가혹하고 지속적인 탄압을 받으며 오래 버티기엔 크게 취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타운십 반란은 과거보다 더 강인하고 지속적이지만, 국가 폭력과 장기전에 취약하다는 문제 탓에 역시 암초에 부딪힐 공산이 크다.
게다가 ANC의 “통치 불능” 전략이 오히려 그런 결말을 앞당길 수 있다. ANC는 “통치 불능” 전략의 일환이라면서 등교 거부 운동(1984~1985년에 전국을 휩쓸었다)을 원칙의 문제로까지 격상시키곤 했다. 등교 거부 활동가들은 “교육보다 해방이 먼저”라는 구호를 내걸었는데, 백인 권력이 타도되기 전까지는 사실상 학교에 나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학교는 타운십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조직화하고 활동하는 몇 안 되는 거점인데(주요 작업장들은 모두 타운십이 아닌 “백인” 구역에 있다) 학교를 오랫동안 폐쇄하는 것은 그런 거점을 스스로 없애는 일이었다. 결국 학생 투쟁은 대중 동원력이 점차 줄었고, 아주 용맹한 소수만이 보안군과의 불리한 거리 전투에 나섰다.
48 1985년에 좌파들은 그 교훈을 되새기며 전술적 후퇴를 호소했다. 케이프행동연맹(CAL, 뒤에서 더 다루겠다)의 ‘청년 아자니아[옮긴이 주: ‘아자니아Azania’는 아프리카 남(동)부를 일컫던 고대 그리스어다.] 학생들SOYA’은 1985년 말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의 전사들(학생 대중)이 우리의 훈련소(학교)에 올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어려움을 안겨 준다. 극히 일부 학생만이 등교하고 있다. 진지한 혁명가로서 우리는 병사 없이 장군만 10명 있는 군대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고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려면 학생대표자위원회SRC가 자신들 학교의 물질적 조건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49 좌우에서 압력을 받은 ANC 집행위원회는 등교 거부 운동을 일시적으로 종료한다는 1985년 12월 29~30일 ‘소웨토 학부모 위기 위원회’ 대회의 결과를 승인한다.
1976년 반란으로 이어졌던 학생 운동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소진됐다.50 남아공 지배계급은 분명 서방 자본과 밀접하고 또 서방 자본에 의존하지만, 그럼에도 외부 압력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 경제 기반이 있고 또 국가 기구를 통제하고 있다. 남아공 자본주의가 상대적 독립성을 가진다는 것이 1985년 여름에 드러났는데, 개혁을 가속화하라는 국내외 대기업들의 요구를 보타 정권이 뿌리치고 서방 은행들에 진 빚을 사실상 갚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ANC 전략에는 이런 것들보다 더 근본적인 약점이 있다. 게릴라전이 보통 성공을 거두는 곳은 식민지나 반식민지다. 그 방식은 적을 군사적으로 패퇴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본국 권력의 식민지 점령 의지를 꺾는 것, 그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수준으로 점령 비용을 키우는 것이다. 베트남과 알제리, 또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에서 그런 식으로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남아공은 (ANC와 남아공공산당의 이론과는 달리) 식민지가 아니다. 점령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할 본국 권력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남아공을 지배하는 것은 토착 부르주아지이고 그들은 현대적 금융 자본의 모든 특징을 보이고 있다.남아공 저항 운동이 대적해야 하는 세력은 이렇듯 현지에 뿌리내린 강력한 지배계급이다. 이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는 그들이 남아공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에 달려 있다. 곧, 그들에게는 “돌아갈” 본국이 없다. [본사가 영국에 있는 광물 기업] 앵글로아메리칸조차 그러하다. 앵글로아메리칸에게는 국제적 이해관계도 분명 상당하지만, 앵글로아메리칸은 남아공 경제의 사실상 모든 부문에서 지배적 지위를 누린다는 점 때문에 남아공 경제와 운명을 같이 한다.
그럼에도 ANC 옹호자들은 해방 운동으로 남아공 자본을 압박해 (마치 짐바브웨에서 랭커스터 평화협정으로 해방 전쟁을 종식시켰듯) 협상으로써 흑인 다수의 지배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지배계급의 한 분파가 협상에 나설 의향이 있다는 것은 1985년 9월 [잠비아 수도] 루사카에서 앵글로아메리칸 회장 가빈 렐리를 비롯한 백인 기업주들이 ANC 지도부를 만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첫째로 짚어야 할 것은, 남아공 자본가들의 이 자유주의적 분파조차도 흑인 다수의 지배는 거부했다는 것이다. 가빈 렐리 일행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는 “권력 분점”, 즉 흑인 지도자들의 중앙정부 참여는 허용할 수 있지만, 중앙정부 자체를 1인 1표 선거로 구성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 그런 식의 권력 분점조차도 상당한 난관에 부딪힐 텐데 백인 지배 하에서 물질적 특권을 누리는 백인 프티부르주아지와 백인 노동계급이 강력하게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설령 이런 난관이 극복되고 또 가빈 렐리 일행이 흑인 다수의 지배를 용인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인구 다수에게 매우 불리한 조건으로만 용인할 것이다. 랭커스터 평화협정은 그다지 모범적인 선례라고 볼 수 없는데 자본의 경제 권력을 건드리지 않은 결과, 국가 기구는 이제 흑인 중간계급이 운영하지만 [짐바브웨 흑인 다수가 처한] 저임금, 실업, 무토지 상황에서 비롯한 모든 비극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그것이 ANC 지도자들이 바랄 수 있는 최대치일 것이다. 게릴라전과 타운십 반란이라는 ANC 전략으로 이룰 수 있는 최대치는 남아공 지배계급에게 압력을 넣어 협상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런 협상이 성사된다면 백인의 정치 권력을 유지하는 기구들은 분명 해체되겠지만, 그런 권력이 창출한 저임금 경제는 건드지리 못할 것이다. 따라서 ANC의 앞길에는 배신이냐 패배냐, 두 선택지밖에 없다.
아프리카주의와 흑인 의식 운동
소수파 민중주의 전통 — ANC에 도전하는 정치 세력은 언제나 있어 왔다. 왼쪽에서는 예컨대 공산당이 아직 혁명적이던 시절에 그랬고 또한 1940~1950년대에는 비유럽인단결운동(뒤에서 더 다루겠다)이 그랬다. 그러나 ANC에 가장 만만찮게 도전한 세력은 전략 면에서 ANC와 다르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변종에 가까운 정치 경향이었다. 배타적 흑인주의는 투쟁의 특정 국면(195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중엽)에서 ANC를 밀어낼 것처럼 보였다. 오늘날에는 영향력이 줄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상대적으로 간략하게만 다루겠다. 아프리카주의Africanism는 ANC 내부에서 등장했는데, 시기적으로는 1943년 ANC가 산하에 청년동맹을 결성한 뒤였다. 청년동맹 안에서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초대 의장] 안톤 렘베데였는데, 그는 당시 영국 식민지를 휩쓸던 범아프리카주의 조류의 영향을 받았다. 렘베데는 1946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아프리카는 흑인의 나라다. … 민족 단결의 기초는 아프리카인들이 느끼는 민족적 감정, 즉 부족 연고나 사회적 지위, 교육 정도, 경제적 계급과 무관하게 아프리카인이라고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다.”이 아프리카주의자들은 ([1947년에] 렘베데가 죽은 후에는 로버트 소부크웨가 지도자였다) 자신들이 민족 해방을 위한 다계급 투쟁을 한다고 본 점에서 ANC의 정설을 따랐다. 유일한 실질적 차이는 이 투쟁에 백인들이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다는 점뿐이다. 이런 차이는 1950년대에 남아공공산당 소속 백인들이 ANC 정책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쟁점이 됐다. 1959년에 ANC에서 분열해 나온 사람들이 범아프리카회의PAC를 결성했다. 이어서 PAC는 통행법[주요 도시 등 백인 지역에서 흑인의 통행과 거주를 제한하는 법]에 반대하는 운동을 지도했다. 이에 대응해 정권은 [1960년] 샤프빌 학살을 자행하고 ANC와 PAC를 둘 다 불법화했다.
망명 중에 PAC는 좌경화했고, 애초 ANC와의 결별에서 틀림없이 한 요소로 작용했던 반공주의를 철회했다. PAC는 ANC에서 분열했을 때부터 마오쩌둥주의 전략의 일종인 농민전쟁 전략을 추구했다. 그런 그들도 MK보다 딱히 더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오히려 ANC는 남아공공산당을 통해 소련의 후원자들과 연계를 맺은 덕에 국제적 지지 네트워크를 훨씬 더 효과적으로 구축했다. PAC는 조직적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지금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1970년대에 대대적으로 부흥을 맞이했다. 1969년에 흑인 급진주의자들은 백인들이 우세했던 남아공전국학생연합NUSAS에서 분열해 나와 남아공학생조직SASO을 결성했고 이후 [흑인 의식 운동의 전국 조정 기구인] 흑인민중대회BPC도 만든다. 이 새 운동은 PAC와 마찬가지로 백인과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그 지도자들(스티브 비코가 특히 주목할 만하다)은 이후 ‘흑인 의식’ 이데올로기를 체계화한다.
53 넷째, 흑인들의 협상력이 점진적으로 커진 것(예컨대, 아프리카인 경영자 계급의 영향력이 전보다 커졌다)에 따른 관점의 변화를 반영했다. 비코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흑인 상품 구매’ 캠페인을 고려하고(한때 요하네스버그에서 제기됐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우리만의 은행을 세워야 한다.” 54
흑인 의식 이데올로기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미국의 흑인 권력[블랙 파워] 운동과 흑인 (해방)신학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 운동들은 흑인으로서의 긍지를 내세웠고, 또 해방의 요소로 흑인들의 자의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러려면 백인과의 협력을 거부해야 한다고 봤다. “흑인 청년이여, 당신은 다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다!” 둘째, 식민 지배 이전의 아프리카 사회들에서는 계급이 없었다고 주장하며 당시의 공동체적 가치들을 낭만적으로 내세운다. 셋째, 계급 분석과 계급 정치학을 거부한다. 비코는 백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다음과 같이 일축했다. “저들은 우리에게 현 상황은 계급투쟁이지 인종 투쟁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얘기는 프리스테이트의 반톤더[백인 빈민의 전형 ― 캘리니코스]에게나 해라.”55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흑인 의식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은 긍정적이었는데, 1960년대 초에 겪은 패배로 인한 좌절과 무기력을 극복하고 흑인들이 자신감을 되찾는 데 기여했다. 흑인 의식 사상이 소웨토 반란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흑인 의식 운동 활동가들은 소웨토 반란 이후의 탄압에 정면으로 맞섰다. 탄압이 정점에 달했던 1977년 10월, BPC와 SASO를 비롯한 흑인 의식 단체들은 불법화됐고 비코는 보안경찰에게 살해됐다.
고로, 흑인 의식 이데올로기에는 대단히 반동적인 요소도 있다. 국가의 이런 철퇴 앞에, 그리고 ANC의 재부상에 직면해 흑인 의식 운동은 적응하고 재편될 수밖에 없었다. 1978년 5월 ‘아자니아 민중 조직AZAPO’을 결성하며 다시금 공개적으로 부상한다. AZAPO는 모종의 좌경화의 산물이다. AZAPO는 흑인 노동계급의 구실을 강조하는데, 흑인 의식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노동조합들이 부상한 것의 반영이다. 이 노동조합들은 이후 남아공노조위원회CUSA를 결성한다. 그러나 이렇게 노동계급을 강조하지만 저변의 포퓰리즘 때문에 그 의미가 약해지는데, AZAPO는 “직업 상의 지위 고하를 떠나 모든 흑인 종사자”가 흑인 노동자라고 정의한다. AZAPO는 지난 몇 년간 투쟁에 아주 깊게 관여해 왔다. 예컨대 AZAPO는 발Vaal 삼각지대에서[옮긴이 주: ‘발 삼각지대’는 요하네스버그 남쪽 60킬로미터쯤에 있는 발 강 좌우의 세 도시를 잇는 삼각형 모양의 지역으로, 철강 등 주요 공업 지역이다.]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그곳은 현재의 타운십 반란의 파도가 1984년 9월 처음 시작된 곳이다. 게다가 보타 정권의 “뉴딜”에 항의하는 전국적 공동 전선체를 만들자고 1982년 11월에 처음 제안한 것도 AZAPO 활동가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데서는 ANC가 더 재빨랐고, AZAPO는 (1982년 12월 로벤섬에서[옮긴이 주: ‘로벤섬’은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정치수들이 갇혀 있던 곳으로 유명한 ‘감옥섬’이다.] 몇몇 BPC와 SASO 지도자들이 석방된 덕에 새로 활기를 띠면서) 1983년 6월 11~12일에 별도의 광범한 전선체인 전국포럼위원회NFC가 발족하도록 돕는다. NFC 창립대회에는 200개 조직이 참석했다.NFC가 UDF와 의견을 달리한 쟁점은 2개였다. 첫째는 전통적인 배타적 흑인주의로 “백인 민주주의자들”과의 동맹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AZAPO는, NUSAS나 ‘요하네스버그 민주주의 행동 위원회JODAC’처럼 UDF에 속하는 백인 다수 단체들과는 함께하기를 거부했다. 둘째 요소는 이전까지는 정치 방정식에 없던 항목인데, 어떠한 단계론도 거부하는 비인종적 좌파 경향이 NFC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케이프행동연맹CAL(뒤에서 더 다루겠다)은 NFC 출범에서 지대한 구실을 했다. CAL의 지도적 이론가인 네빌 알렉산더는 1983년 AZAPO 대회에서 논문을 발표해서 기립박수를 받았다. CAL의 영향력은 NFC가 채택한 ‘아자니아 민중 선언문’에서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의 민족 해방 투쟁은 인종적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방향을 가리킨다. … 인종적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는 것만이 아파르트헤이트를 끝낼 수 있다. 혁명적 의식에서 영감을 얻은 흑인 노동계급이 우리 투쟁의 원동력”이고 그 투쟁의 목표는 “아자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선언문은 4가지 원칙을 천명하는데 다음과 같다: “인종차별 반대와 제국주의 반대”, “억압자들과 그들의 정치 제도에 일절 협력하지 않을 것”, “노동계급의 독자적 조직”, “지배계급 정당과의 연합 거부.”
59 AZAPO의 많은 지도자들에게 좌파와의 연합은 진지한 정치적 변화의 결과라기보다는 UDF라는 거대한 경쟁 상대에 맞서기 위한 전술적 우회로일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2개의 주요 민중주의 경향 중 한 곳이 비록 언사일지라도 모종의 사회주의를 표방해야겠다고 압력을 받은 것은 주목할 일이다. 남아공 상황이 노동계급 정치를 얼마나 주요 의제로 올려 놓았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노동계급 정치에 능동적이고 의식적으로 헌신하는 세력들을 살피겠다.
‘아자니아 민중 선언문’은 이전까지 흑인 의식 운동의 특징이었던 민중주의와의 중요한 이론적 단절을 나타낸다. 그러나 AZAPO 내 지배적 세력들의 정치가 어느 정도까지 실질적으로 변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한 연구자는 NFC 창립대회 이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몇몇 배타적 흑인주의 활동가들은 새로운 좌파적 강조점에 불만이 있다고 털어놓았지만, 지금 반격에 나서기엔 ‘타이밍’이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좌파 지식인들
60 그러나 초기 역사의 대부분 기간에 남아프리카의 혁명적 좌파는 다수 흑인을 짓누르는 민족 억압의 현실에 제대로 맞서지 못한다는 커다란 약점이 있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ISL과 초기 공산당은 백인 노동계급을 프롤레타리아 전위라고 여겼다. 그들은 경제적 압력 때문에 백인과 흑인 노동자들이 저절로 단결하게 되리라 기대했고, 남아프리카 자본주의가 붕괴할 것이라는 예측을 번번이 내놓았는데 심지어 1930년대에 경제가 한창 호황을 구가할 때도 그랬다. 당시 남아프리카 마르크스주의의 이런 면들은 그것이 생겨난 환경을 반영하는 것이었는데, 그 환경이란 백인 수공업자들이었다. 이들은 노동조합 쟁점에서는 전투적이었지만 흑인 노동자들을 기껏해야 자신들과 무관한 존재로, 최악의 경우에는 위협으로 여겼다. 61
남아공에서 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 초에 영어권의 양대 혁명적 경향이었던 사회민주주의연맹과 사회노동당의 현지 버전으로 탄생했다고 말할 수 있다.코민테른이 남아프리카 마르크스주의에 끼친 영향이 처음에는 긍정적이었다. 특히 1920년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민족 해방 운동을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그랬다. 그러나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스탈린주의화한 뒤로는 공산당이 남아프리카 마르크스주의에 제공한 것이라곤 2단계 혁명 전략을 세밀하게 발전시키고 적용하는 것뿐이었다. [공산당 이론지인] 《아프리카 공산주의》에서는 스탈린이 생전에 한창 떠들어 댄 속류 철학 변증법적 유물론의 냄새가 진동한다.
62 남아프리카에서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를 지지하는 이들은 1932년에 케이프타운에서 레닌클럽을 발족하며 공개적으로 등장한다. 레닌클럽은 1934년에 공산주의동맹(이후 ‘제4인터내셔널 조직’이 된다)과 남아프리카노동자당으로 분열한다. 이들 중 남아프리카노동자당은 월간지 〈불꽃〉을 발행하지만 1939년에 조직이 붕괴한다. 공산주의동맹은 ‘[비유럽인]단결운동’(아래에서 더 다룬다)을 통해 더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반면 남아프리카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ISL이나 초기 공산당 특유의 추상적 마르크스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63 이런 노선을 따라 두 트로츠키주의 단체 모두 공산당의 “원주민 공화국” 슬로건을 맹비난했다. “그런 슬로건은 노동계급의 한 부문을 다른 부문에 대립시킨다. 노동자들을 단결시키지 않고 인종별로 분열시킨다.” 64
두 단체 모두 초창기 사회주의 단체들 특유의 추상적 마르크스주의를 설파했다. 단적으로 〈불꽃〉은 1938년 10월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남아프리카의 노동자들이여! 여러분은 모두 같은 억압의 사슬로 묶여 있다! 여러분의 피부색이 서로 다른 것이나 인종, 국적이 다른 것 따위는 잊어라! 여러분은 모두 똑같은 노동자이고 똑같은 억압자, 즉 자본가에게 착취당하고 있다.”트로츠키는 남아프리카에 딱 한 번 개입했는데, 그때 이런 관점에 도전했다. 남아프리카노동자당이 제출한 테제들을 살펴보고 1935년 4월에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흑인 공화국”이라는 슬로건이 “백인을 위한 남아프리카”와 전혀 다를 바 없이 혁명적 운동에 해악적이라고 이 테제들이 말하는 한, 우리는 그런 정식화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후자의 슬로건은 억압을 완전히 지지하는 반면, 전자는 해방을 향한 첫걸음을 떼자는 것입니다.
흑인이 어떠한 제약도 없이 온전하게 독립할 권리를 우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단호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백인 착취자들의 지배에 맞서 함께 투쟁하는 것이 기초가 돼야만 흑인과 백인 노동자들의 단결을 일구고 또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 남아프리카 프롤레타리아의 구성은 버림받은 후진적인 흑인들과, 특권을 누리고 오만한 백인 계층입니다. … 백인들의 특권과 편견에 조금치라도 타협하는 것은 혁명가로서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범죄입니다. 쇼비니즘이라는 악마에게 작은 손가락 하나를 주는 사람은 곧 통째로 잡아먹힐 것입니다.
동시에 트로츠키는 오직 노동자 권력만이 민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승리한 혁명은 계급 관계를 급격하게 바꿀 뿐 아니라 인종 관계도 바꿀 것이고 흑인들은 국가 안에서 자신들의 수에 걸맞은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만큼, 남아프리카의 사회 혁명은 민족적 성격도 띨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측면에 눈을 감거나 그 중요성을 축소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정당은 민족(인종) 문제 해결이라는 과제를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떠안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프롤레타리아 정당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민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민족 문제를 해결할 역사적 무기는 오직 계급투쟁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트로츠키는 남아프리카인들의 투쟁을 연속 혁명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이런 그의 통찰을 남아프리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은 40년이 지난 후에야 벌어진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영어를 사용하는 대학들에 존재했던 백인 위주의 자유주의 학생 운동 NUSAS가 급진화했다. 이 백인 급진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노동계급의 정치로 떠밀리게 된 데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첫째로는, 흑인 의식 운동이 발전하고 그 세력이 1969년에 NUSAS와 단절하면서, 정권에 맞서는 광범한 민주주의 운동으로 흑인과 백인을 단결시킬 가능성이 약해졌다.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둘째로, 1970년대 초에 흑인 노동자 운동이 시작되면서 생긴 변화 중 하나는 NUSAS 안에 흑인 빈곤 문제를 다루는 임금위원회가 생긴 것이다. 이를 통해 몇몇 백인 급진주의자들이 1973년 더반 파업 이후 최초의 독립노조가 세워지는 데 일조했다. 셋째, 많은 백인 급진주의자들이 해외 유학을 통해 1968년 이후 서방의 학생 운동과 부활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유학생 중 많은 이들이 귀국해서 영어 사용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얻어 자신들이 바다 건너편에서 발견한 새 이론들을 전파하고 남아공 사회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67 의 글 두 편은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옳게 평가받는다. 68 특히 레가시크의 글은, 자유주의자들과 ANC/공산당 모두 받아들였던 정설, 즉 자본주의가 아파르트헤이트와 모순 관계에 있다는 명제에 도전했다. 풍부하게 읽어낼 것이 많은 그 글은 다음과 같은 과감한 주장을 펼쳤다: “제2차세계대전 이래로 남아공에서 발전해 온 독특한 노동 통제 구조는 갈수록 자본을 위해 복무하고 있다.” 69
그 결과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정확하게는 여러 개의 마르크스주의들이 등장해서 남아공 역사를 체계적으로 재해석하려 했고 무엇보다 남아공 사회구성체의 특이한 점을 분석하려 했다. 중요한 것은, 그러려면 자본 축적과 인종적 지배 사이의 관계를 분석해야 했다는 것이다. 탁월한 학자들이 모인 그 무리에서 몇몇 이름을 따로 거론하는 것이 부당할 수 있지만, 해럴드 울프와 마틴 레가시크70 그러나 남아공의 정치 조건 —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없는 상황에서 노동자 운동이 부상하고 있는 것 — 때문에 아무리 학술적인 마르크스주의자라도 상아탑 안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남아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벌인 이론 논쟁은 종종 실천적으로 중요한 함의가 있었다. 두 가지 예를 들겠다.
이 새로운 남아공 마르크스주의는 그것의 기초가 됐던 서구 마르크스주의Western Marxism의 결점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알튀세르와 그 제자들의 저작이 상아탑에 안주하는 경향과 교조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강화시켰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영향력은 아주 광범하다. [알튀세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배리 힌데스와 폴 허스트의 《전자본주의 생산양식》이 1976년 레소토국립대학에서 열린 ‘남아공의 전자본주의 사회구성체와 식민지 침투에 관한 워크숍’을 “점령”하다시피 한 것은 상당히 우려스러운 일이다!)첫째 논쟁은 울프의 연구를 놓고 진행됐다. 울프는 남아공 자본주의에서 인종적 지배가 하는 구실을 설명하기 위해, 알튀세르를 좇아 사회구성체를 상이한 생산양식의 ‘절합’으로[옮긴이 주: 절합(articulate)은 관절들이 맞붙어서 마치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접합·분절이라고도 한다.] 본다. 그는 남아공의 부족 보호 지역들[반투스탄과 홈랜드]이 본질적으로 여전히 전자본주의 경제들이고, 거기서는 식민 정복 전부터 있었던 생산관계들이 아직도 우세하다고 주장한다. 그 지역들이, ‘백인’ 경제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의 생존을 보조함으로써 임금이 매우 낮게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1948년 아파르트헤이트 시행 이전의 — 캘리니코스] 인종분리정책Segregation의 핵심 구실은 이주 노동자 계급을 재생산할 수단을 아프리카인 사회들에서 얻어내기 위해 전자본주의 경제들의 생산 능력과 그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72 그래서 “(일정한 속도의) 자본 축적을 가능하도록 해 주는 (비자본주의 경제들과의) 관계가 해체되는 경향”이 남아공에서는 “차단됐는데, 자본이 그 관계를 보존하려 하고 그에 따라 (비록 제한적 형태로나마) 비자본주의 경제들도 보존하려는 모순된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73
울프는 인종분리정책이 무너진 것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부족 보호 지역들의 경제가 갈수록 몰락하고, 그 내부에서 계급 분화가 커지고, 흑인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등장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48년 [총선에서] 승리한 국민당이 인종분리정책 대신 실시한 아파르트헤이트는 “전통 사회들의 구조를 일부 바꾸더라도 전체적으로는 유지하려는 정책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74 울프는 감탄스러울 만큼 명확하게, 그런 이론적 설명이 마르크스주의적으로 합당하려면 “각각의 집단[백인 사회와 흑인 사회 — 캘리니코스]이 ‘고유한 구조’를 갖는 것, ‘특히 이해관계가 모순된 계급들의 존재로 인해’ 그런 구조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지적한다. 75 그리고 울프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자본주의 시기 남아공 사회의 독특함 또는 특수한 점은 바로, 하나의 민족국가 안에서 제국주의 국가와 그들의 식민지(신식민지) 사이의 외부적 관계가 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76
이런 주장이 실제로 낸 효과는 내부 식민지론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울프는 공산당이 내부 식민지론을 정식화한 방식에는 비판적이었지만, 그 자신이 훨씬 더 정교하게 다듬어 제시하려 했다. 그는 백인과 흑인 “사회들” 간의 관계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비자본주의 생산 체제들로부터 노동력을 추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이렇게 울프가 ANC/공산당의 정설을 알튀세르식으로 재구성하자 마이클 윌리엄스 등이 아주 강력하게 도전하고 나섰다. 윌리엄스는 이주 노동 시스템을 자리잡게 한 바로 그 정책들(예컨대, 국토의 13퍼센트 이하만을 아프리카인 보호 지역으로 설정한 1913년의 원주민토지법)이 전자본주의 사회들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반박했다:
아프리카인 사회들의 구조 개편 자체가 그 사회들을 파괴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특히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제한없는 토지 사용이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그렇다. 그들에게 토지 사용은 그들의 사회 구조 전체와 떼려야 뗄 수 없게 얽혀 있었다. 그런 토지 사용을 빼앗으면 사회 전체가 무너진다.
78 내가 소개하고 싶은 둘째 논쟁은 남아공 자본주의의 그런 모순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니코스 풀란차스는 남아공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1970년대에 서식스대학교의 발전학연구소에 머물렀던 이들이 대표적이다.
울프의 연구를 둘러싼 논쟁 이면에 있는 것은 (윌리엄스의 표현을 빌리면) “남아공 사회의 핵심 모순을 … 자본주의 생산양식 안에서 찾을 수 있느냐”였다. 이 ‘서식스 학파’는 특히 풀란차스가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을 강조한 것을 크게 받아들였다: “국가 형태의 차이를 결정하는 요인은 첫째, 권력 블록과 그 동맹, 권력 블록을 지지하는 계급들이 구성된 방식의 차이, 둘째는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계급/분파의 차이다.”80 클라크 등은 여러 가지 비판을 제기했다. 특정 사건에 대한 풀란차스주의자들의 해석에 도전하기도 했고, 풀란차스주의자들이 말하는 “분파”가 정설 부르주아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이익집단과 수상할 정도로 닮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근본적 비판은, 풀란차스주의자들이 남아공 역사를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설명하겠다면서도 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을 간과하고, “지배당하는 계급”은 수동적 객체로 보는 반면 관심을 온통 부르주아지 내부의 분열에 쏟는다는 것이었다.
풀란차스주의자들은 이런 내용을 기초로 1948년 이전 남아프리카 역사 해석을 발전시키면서 제국 자본과 민족 자본 사이의 갈등에 초점을 맞췄다. 1948년에 국민당이 승리한 것은 민족 자본 “분파”가 헤게모니를 차지한 것으로 간주됐다. 이런 설명에 처음으로 이견을 밝힌 인물은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인 사이먼 클라크였지만, 이후 많은 아프리카 학자들이 클라크의 접근법을 공유하고 그의 비판을 지지했는데 마틴 레가시크와 던컨 이니스도 그런 경우였다.81 그러나 자본 사이의 경쟁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근본적 측면에 속하고, 지배계급 내부의 역사적 분열에 무관심한 채로 남아공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설명하면 크게 엇나가기 쉽다. ‘서식스 학파’의 일원인 단 오미아라는 두 가지 모순 —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과 자본가들 사이의 모순 — 을 통합해서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82
이 비판은 정당한 것이지만 풀란차스주의자들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 것도 몇 가지 있다. 클라크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또 다른 경향을 지지하는데 바로 독일의 ‘자본논리학파’이다. 이들은 극단적 환원주의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그들에게 사회관계들이란 자본과 노동의 갈등이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83 연구 범위의 경우, 식민 정복으로 파괴된 전자본주의 사회구성체부터 남아공의 독특한 자본 축적 패턴으로 야기된 노동계급의 분열까지를 망라한다.
오미아라의 책 《민족 자본주의Volkskapitalisme》는 보어인 민족주의의 계급적 기초를 다룬 연구로, 1980년대 전반기에 남아공 마르크스주의가 이룬 지적 성숙을 보여 주는 걸작에 속한다. 오미아라의 책 외에도 제프 페이레스의 《팔로의 집The House of Phalo》, 제프 가이의 《줄루 왕국의 파괴The Destruction of the Zulu Kingdom》, 던컨 이니스의 《앵글로아메리칸과 현대 남아공의 부상Anglo-American and the Rise of Modern South Africa》, 에디 웹스터의 《인종의 틀 속에서Cast in Racial Mould》도 그런 작품인데 하나같이 이론적 정교함과 경험 사료를 섬세하게 다루는 능력을 겸비하고, 이들이 일으킨 지적 혁명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들의 연구는 부르주아 학자들의 도전장이 초라하게 보일 정도의 무게감과 연구 범위를 자랑한다.84 ‘서식스 학파’의 중요한 인물들(예컨대, 롭 데이비스와 단 오미아라)은 풀란차스를 좇아 풀란차스의 이론적·정치적 전제들을 가져다가 ANC/공산당 전략(남아공에서의 “민족 민주 혁명”)을 지지하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내가 이미 강조했듯이 남아공의 새 마르크스주의는 정치 상황 덕분에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과 같은) 학술적 소집단 문화에 갇혀 있지 않는다. 남아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1970년대에 했던 논쟁들은 실제로 중요한 것들이었다. 그 논쟁들은 그들이 두 진영으로 점차 양극화하고 있음을 보여 줬다. 한편에는 서구 마르크스주의를 이용해서 ANC/공산당의 전략을 더 정교하게 대변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이 진영의 전형적 인물인 울프는 좀더 나이든 세대에 속하기도 하고, 한때 MK 사령부의 일원으로 1960년대의 탈옥 사건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많은 풀란차스주의자들이 울프를 뒤따랐다. 풀란차스 자신도 한때 유러코뮤니즘을 지지하는 그리스 공산당[국내파]의[옮긴이 주: 그리스 공산당(국내파):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계기로 그리스 공산당이 분열했을 때, 국내파는 친소련파의 정책이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지령을 따른다며 그리스 공산당(외국파)라고 불렀고 자신들을 국내파라고 불렀다.] 일원이었고, (민중전선으로 독점자본에 맞선다는) 스탈린주의 단계[혁명]론을 확고하게 지지한다고 때때로 명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85 레가시크는 훗날 마르크스주의노동자경향MWT(뒤에서 더 다룬다)이 될 단체에 속해 활동하기도 했다. 몇몇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예컨대 에디 웹스터)는 새로운 독립노조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구실을 맡기도 했다. 남아공에서 1974년에 창간된, 감탄을 자아내는 저널 《노동 통신》은 부활한 노동자 운동에 관한 중요한 분석, 정보, 토론이 오고가는 포럼 구실을 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남아공 마르크스주의의 르네상스는 실천적 활동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그럼으로써 “노동자주의” 경향이 탄생하는 데 일조했다. 현재 두 민중주의 경향이 우세하지만 노동자주의 경향은 과거 민중주의에 도전했던 그 어느 세력보다도 강력하게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둘째 진영에는 (역사적 발전 과정이 비록 독특했을지언정) 남아공을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로 보고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는 노동계급을 조직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레가시크는 남아공 역사에 관해 중요한 돌파구를 열었던 글을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매듭지었다. “민족 해방을 이루는 것은 남아공에서 자본주의를 함께 폐지할 때에만 가능하다.” 레가시크는 사회주의자들이 “산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을 발전시키려 했던 1928년 이전의 시도로 돌아가야 한다”고 제안했다.노동조합 좌파
86 그러나 앞선 흑인 노동자 운동은 국가 탄압으로 분쇄됐었다.
1970년대 초에 등장한 독립노조들이 아프리카인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아니었다. 과거에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려는 흐름이 몇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20년대에, 제2차세계대전 중에, 1950년대~1960년대 초에 그랬다.오늘날의 노동조합 운동이 더 성공적이고 안정적이라는 사실은 남아공 자본주의의 구조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남아공 자본주의는 그 발전 과정에서 인종적으로 분열된 노동계급을 만들어 냈다. 한편에는 숙련직을 독점하는 백인 노동자가 있었는데 이들은 고임금, 노동조합, 정치적 권리를 누리고 그 대가로 국가의 일부가 됐다. 다른 한편 아프리카인 노동자들은 미숙련직에 집중돼 있었고 그런 일자리를 채우는 것은 대체로 [부족 보호 지역에서 백인 지역으로 온] 이주 노동자들이었다. 이런 인종별 분업은 남아프리카 자본주의가 1945년 이후, 특히 1960~1970년대에 엄청나게 성장하면서 허물어졌다.
87 한편 생산적 노동이 점차 “파편화”, “희석”되면서 반半숙련직이 대거 생겨났고, 흑인 노동자들이 그곳에서 일하게 되면서 더는 미숙련직에만 머물지 않게 됐다. 88 이런 변화는 아프리카인 프롤레타리아의 양적 성장으로도 나타났다: 1951년과 1980년 사이에 아프리카인들의 수가 제조업에서는 36만 명에서 110만 3000명으로 늘었고, 광업에서는 44만 9000명에서 76만 8000명으로 늘었다. 1980년에 생산에 종사하는 아프리카인 노동자 수는 230만 4000명이었다. 89
대량생산 산업들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과거 백인 노동귀족들이 맡았던 일들의 탈숙련화가 진행됐다. 백인 노동자들은 점점 더 감독직으로 이동했고, 그래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모순적 계급 위치, 즉 자본을 위해 잉여가치 생산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다시 말해, 백인 노동자들이 신중간계급의 일원이 되는 경향이 있었다.오늘날 남아공 자본주의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특징을 띤 여러 제조업들에 기초하고 있고, 앞서 봤듯 주되게 흑인으로 이뤄진 노동계급에 기대고 있다. 바로 이런 구조 변화를 봐야 독립노조의 부상을 설명할 수 있다. 독립노조의 탄생은 1973년 1~2월 더반 대중 파업에서 찾을 수 있는데, 당시 흑인 노동자 10만 명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자생적으로 파업에 나섰다. 사용자와 국가는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그저 탄압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아프리카인 노동조합들을 요구하는 폭발적 열기를 가라앉히려고 처음에는 경영진의 통제를 받는 현장 소통 위원회를 만들도록 권장했다.
91 그런 변화의 목적은, 백인의 정치 권력 독점은 유지하면서도 그 독점을 더 공고히 하기 위해 정권의 지지기반을 넓히는 것이었다. 흑인 중간계급에게 경제적·정치적 양보가 제공됐다. 더 중요하기로는, 흑인 노동귀족을 형성하기 위해 ‘10조에 해당하는 사람들’과 나머지 흑인을 이간하려 했다. ‘10조 사람들’이란, ‘(도시 지역) 흑인 통합법’의 10조 1항에 따라 도시에서 살 권리가 있는 아프리카인을 가리킨다. 반면에 그런 권리가 없는 다수의 아프리카인들은 도시에서 이주 노동자 또는 통근 노동자(반투스탄에 살면서 매일같이 ‘백인’ 지역으로 일하러 오는 경우) 신분이다. ‘10조 사람들’과 나머지를 이간하기 위해 정권은, 사용자와 노동조합을 포괄하는 산업위원회를 통해 아프리카인들의 노동조합 결성과 국가가 통제하는 단체협상 참여를 허용하되 이를 ‘10조 사람들’에게만 보장하고 이주 노동자에게는 같은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92
1970년대 말에 지배계급의 전략이 뚜렷하게 수정됐다. 1976~1977년 소웨토 항쟁 분출, 흑인 노동조합의 부상, 아프리카의 다른 백인 권력들의 몰락으로 “[인종별] 분리 발전” 정책(이에 따르면 흑인들은 [자신이 속한] 홈랜드 밖에서는 어떠한 권리도 누리지 못한다)이 파산했음이 분명해졌다. 1978년 9월 P W 보타가 총리가 된 후, 정권은 새로운 태세로 전환했는데 그 새 방향은 이듬해에 발표된 비한 보고서와 리케르트 보고서에 요약돼 있다. 해당 보고서들에서 제시된 변화를 가리켜 흔히들 이렇게 평가한다. “작업장에서는 ‘탈인종화’ … 그러나 사회 전반의 ‘탈인종화’는 없다.” 비한과 리케르트 보고서들이 제안한 변화는 많은 면에서 1920~1940년대에 대단히 성공적으로 백인 노동계급을 국가로 포섭했던 전략을 확장해서, 임금과 숙련도가 높은 일부 흑인 프롤레타리아를 포섭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보타가 정치 개혁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만큼이나 엄청난 역효과를 낳았다. 1980~1983년에 아프리카인 노동조합원 수가 22만 명에서 67만 명으로 3배 이상 는 것이다. 1983년에 전체 노동조합에서 아프리카인들은 43.4퍼센트를 차지한 반면 백인은 33.9 퍼센트, 컬러드와 아시아인은 22.7퍼센트였다. 남아공 노동계급 운동에서 사상 처음으로 백인의 우위가 깨진 것이다. 오늘날에는 경제 활동 인구의 15퍼센트가 노동조합으로 조직돼 있고, 이는 1970년대 수치의 갑절이다.94 ‘10조 사람들’에게만 노조 할 권리를 허용하려던 정권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아닌 게 아니라 가장 중요한 노동조합들, 예컨대 전국광원노조NUM와 ‘금속 일반 노동조합MAWU’(이하 금속노조)는 조합원이 대부분 이주 노동자들인데 해당 산업의 특징(기초 제조업 부문 노동력의 80~90퍼센트가 이주 노동자로 채워져 있다)을 반영한 것이다. 95
독립노조는 이런 성장의 핵심에 있다. 1985년 후반에 독립노조들의 등록 조합원 수는 79만 5000명, 그들 중 조합비를 내는 이는 52만 명으로 추정된다. 어떤 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23개 노동조합(조합원 도합 36만 3000명)에서만 직장위원이 1만 2462명이라는 것이다. 이 규모는 1984년 독립노조 운동 전체의 직장위원 수 추정치(6000명)보다 갑절 이상 많은 것이다. 이 새로운 흑인 노동자 운동은 전투적 노동조합 운동의 한 형태이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전반에 파업 횟수가 치솟았다. 1981~1982년에 이스트랜드 지역의 제조업에서 두 차례의 파업 물결이 일었고 그 과정에서 금속노조가 엄청나게 성장했다: 1981년에 조합원이 세 배로 늘었고, 이듬해에 다시 2배로 늘어 총 3만 6540명이 됐다. 같은 기간에 이스턴케이프의 자동차 산업과 나탈의 섬유업에서도 노동과 자본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정치적 행동에도 나섰다: 정부의 연금 법안에 항의하는 시위성 파업 물결이 일기도 했고, 보안경찰이 노동조합 조직가 네일 아게트를 살해했을 때 1982년 2월 11일에 노동자 10만 1000명이 30분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97 이미 1983년 후반에 마이크 로숄트(발로-랜드의 사장이자, 남아공 자본가들 중 ‘자유주의’ 분파의 지도자)는 독립노조들이 “사기업 체제 시스템”과 “경영할 권리”를 위협한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1982년에 경기 후퇴가 시작되자 노동계급의 전투성이 일시 멈췄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83년에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1984년에 투쟁이 재개됐다. 당시 파업 물결에는 지배계급에게 매우 위협적인 특징이 두 개 있었다. 첫째, 광원노조가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것이고, 그 결과 남아공의 가장 중요한 산업에서 흑인 광원들이 1984년 9월과 1985년에 처음으로 합법 파업을 벌였다. 둘째로, 독립노조들과 지역사회 단체들이 1984년 11월 트란스발에서 결근 투쟁을 공동으로 호소하자, 프레토리아-비트바테르스란트-발PWV 지역의 노동자 30만~80만 명이 참가한 것이다. PWV는 남아공 경제의 산업 중심지이다.남아공에서 강력하고 전투적인 흑인 노동계급 운동이 부상한 것은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자본과 노동의 세계적 투쟁에서 지난 15년 동안 벌어진 변화 중 가장 중대한 축에 속한다. 독립노조를 건설한 이들을 우리는 마땅히 찬양하고 또 그들과 연대해야 한다. 그럼에도, 노동자 투쟁이 더 광범한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는 투쟁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라는 핵심 쟁점이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왜 그런지 이해하려면 노동자 운동 내의 다양한 세력들을 살펴 봐야 한다.
98 첫째는 남아공노동조합연맹(포사투)인데, 9개의 노동조합이 가맹하고 있고 10만 6000명을 조합원으로 두고 있다. 포사투는 구조가 잘 짜여진 중앙집중적 조직으로, 산별노조와 강력한 직장위원 조직을 바탕으로 비인종적인 노동조합 운동을 건설하려 했다. 주요 가맹 노동조합 중에는 금속노조 외에도 ‘전국 자동차 연합 노조NAAWU’, 전국섬유노조NUTW가 있다. 백인 급진주의자들은 포사투 산하 개별 노동조합들을 건설하고 또 1979년에 포사투를 출범시키는 데서 핵심적 구실을 수행했다.
1983~1984년 대중적 분출 직전에 독립노조 운동 안에는 주된 경향이 세 개 있었다.포사투에서 백인 조직자들이 주요하게 활동했다는 점은, 다른 주요 노총인 남아공노동조합협의회CUSA와의 차이점이다. CUSA는 1980년에 출범했다. CUSA는 10개 노동조합이 모인, 훨씬 더 느슨한 조직으로 조합원이 14만 8000명이다. CUSA의 조합원들은 흑인 의식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그래서 흑인이 노동조합 운동을 주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CUSA에서 가장 중요한 노동조합은 광원노조이다. 더 작은 흑인 의식 운동 조직인 ‘아자니아 노동조합 연맹AZACTU’은 1984년에 등장했다.
셋째 경향은 7개의 이른바 지역사회 노조 또는 지역 일반 노조들이 모인 것이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남아공연합노조SAAWU, ‘의복일반노조GAWU’, ‘자동차 조립·부품노조MACWUSA’이다. 이 노동조합들의 정치 노선은 (적어도 비공식적으로는) ANC와, 노동조합 부문에서 ANC의 외피 조직인 SACTU를 지지한다. 이들은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의 통일을 강조하고, 또 노동조합들이 작업장 쟁점뿐 아니라 타운십 문제로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노동조합은 포사투나 CUSA 가맹 노동조합들에 비해서 훨씬 더 불안정했다. 가장 강력한 SAAWU는 이스트런던에 기반했고 조합원 수가 5만 명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2만 명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된다:
7개의 지역-일반 노조들은 모두, 1970년대 말에 노사 관계 개혁이 가파른 경기 상승과 맞물리며 노동조합이 단기간에 성장하기 좋았던 여건에서 등장했다. 파업 물결과 대규모 타운십 집회 속에서 조직한 덕분에 일부 노동조합들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지지자들을 얻었다. 그러나 조합원으로 등록한 사람이 빠르게 늘었던 것에 비해 그만한 영향력을 공장 현장에서 확보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1982년 중엽 경기 후퇴가 시작되자, 이런 노동자 조직 방식이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해고와 국가 탄압 강화에 직면해 모든 노조에서 공장 조합원들이 크게 감소하고 노동자들의 활동 참여가 약해지는 것을 경험했다.지역사회 노조들이 처음에는, 모든 독립노조들의 연합인 ‘슈퍼 노총’을 결성하는 데서 장애물이었다. 한 가지 중대한 쟁점은 국가가 새로 마련한 산업조정법에 따라 노동조합을 등록해야 하느냐였다. 그 법은 흑인 노동자들에게도 노조 할 권리를 인정했다. SAAWU와 몇몇 노동조합들, 예컨대 웨스턴케이프에 기반한 작은 노동조합인 일반노조GWU는 등록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등록하게 되면 독립노조들도 (마치 백인 노동조합들이 그랬듯) 국가에 포섭되고 관료화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반면에 포사투는 1980년에 등록을 결정했는데, 노동조합들이 국가 인정이라는 전술적 이익을 취하면서도 독립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벌어진 일들은 포사투의 주장이 좀더 현실의 검증을 이겨 내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독립노조들에게 갈수록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정치 투쟁에 어떻게 참여할 것이냐였는데, UDF와 NFC가 결성된 후에 이 문제가 특히 중요해졌다. 지역사회 노조들은 UDF에 가맹했고, CUSA는 UDF와 NFC에 둘다 참여했다. 그러나 포사투, GWU, 그리고 GWU와 마찬가지로 웨스턴케이프에 기반하면서 어느 노총에도 속하지 않았던 식품통조림노조FCWU는 두 민중주의 전선체 중 어느 쪽에도 속하기를 거부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동자주의”와 “민중주의”의 정치적 양극화가 공개적으로 형체를 갖췄고, 포사투와 그의 동맹들은 독립노조에 기반한 일관된 전략, 사실상 신디컬리즘 전략을 내세웠다. 그런 전략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 첫째, 노동조합 좌파(나는 포사투의 일반적 접근법에 동의한 이들을 이렇게 부르겠다)는 ANC/UDF 정치에 대한 비판을 발전시켰다. 이런 주장 중 가장 완숙한 형태는 알렉 어윈의 논문에서 제시됐고 그 논문은 선지자 같은 구실을 했다. 어윈은 포사투 초대 사무총장이었고 이후 전국교육을 맡았다. 어윈은 자신이 “해방의 정치”라고 부른 것을 분석했는데, 남아공에서는 그 형태가 “민중주의”, 즉 “경제적 이해관계가 다르지만 정권에 맞선다는 대의명분을 공유하는 계급들의 연합”이라고 봤다. 그에 따르면,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해방의 정치가 지배적이었는데 “아파르트헤이트가 너무도 끔찍했기 때문에 해방의 정치가 아주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동원력의 기초를 제공했다. 그 동원력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계급적 이해관계를 집어삼키는 흐름을 크게 강화시켰다.” 그러나 지금 같은 시기, 즉 구조적 위기와 위로부터 개혁이 진행되는 시기에는 해방의 정치가 “더는 해방의 정치가 아니라 협상의 한 과정이 된다”고 봤다. 어윈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현 경제는 심대한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어, 만약 노동계급이 — 도시와 농촌 모두 — 자신의 물질적 조건과 인도주의적 상황을 개선하려 한다면 상당한 변혁을 이뤄야 한다. 그러나 [해방의 정치가 — 캘리니코스] 요구하는 것으로는 그런 변혁에 필요한 정치적 실천이 고무받거나 더 수월해지지 못하고, 오히려 변혁의 초점이 상이한 계급 이해관계에 맞춰지게 될 것이다.” 고로 “만약 경제 위기가 경기 순환 탓이 아니라 심대하게 구조적인 것 때문이라면, 기존의 제약과 구조 안에서 행동하는 정권은 예외 없이” — ANC가 “민족 민주 혁명”을 완수하더라도 예외가 아닐 것임을 암묵적으로 가리킨다 —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무책임하고 경기 회복에 해로운 것”이라며 거부할 것이라고 어윈은 주장했다. 남아공 북쪽에 인접한 짐바브웨의 경험(무가베 정권은 독립된 노동자 단체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이 노동조합 좌파의 민중주의 비판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포사투 의장 크리스 들라미니는 짐바브웨를 방문한 후 충격을 받고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노동자 해방은 오직 강력하고 잘 조직된 노동자 운동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 좌파는 남아공 내의 노동자 운동 경험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특히 SACTU가 공개적으로 활동한 기간(1955년부터 1960년대 초에 탄압받을 때까지)에 SACTU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경험한 것의 영향을 받았다. 노동조합 좌파는 SACTU가 회의동맹 안에 용해돼 버렸다고 지적했다. 롭 램버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처럼 올바른 분석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회의동맹 안에서 노동계급의 이해관계가 종속적이었던 이유는 SACTU에 대한 ANC/공산당의 정치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정치 단체의 지도력은 언제나 노동자들의 고유한 이해관계와 투쟁을 용해시킨다는 것이다. 램버트 자신은 둘째 결론을 도출한 듯하다: “만약 SACTU가 회의동맹 안에서 독립성을 지키고 헤게모니를 구축했더라면, 일정 한도 내에서는 주도적으로 직접 결정하고 어쩌면 공산당이 했던 실수를 피했을 것이다.” 위 인용문에는 포사투 전략의 둘째 요소가 암묵적으로 들어 있다. 바로 강력하고 민주적인 노동조합 운동이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필요충분 조건이라는 것이다. 포사투 사무총장 조 포스터가 1982년 포사투 대회에서 했던 매우 중요한 기조연설을 보면, 외견상 포사투는 저런 입장을 거부하는 듯 보인다. 그 연설에서 포스터는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치] 운동이 필요하고, 그 점은 심지어 폴란드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하물며 남아공은 더 말할 것도 없다면서 남아공에서는 “노동자들이 더 광범한 민중 투쟁의 일부이면서도 자신만의 강력하고 효과적인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이 조직은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지키고 또 키우기 위해 필요하고, 또한 훗날 노동자들을 적으로 돌리게 될 수밖에 없는 세력이 민중운동을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포사투는 노동조합 연맹이므로 노동계급 운동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고 포사투가 더 광범한 민중 운동이나 주요 해방 운동과 대립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포사투의 과제는 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 중대한 정치적 행위를 하도록 그들을 위한 효과적인 조직적 기초를 건설하는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그런 노동자 조직을 위한 정체성, 자신감, 정치적 존재감을 창출하는 것이다.” 포스터의 이런 정식화를 보면 노동조합보다 더 광범한 운동에 기초한 노동계급 정치를 염두에 둔 듯하다. 실제로,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새로운 노동자 정당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다. 〈포사투 노동자 뉴스〉에는 브라질 노동자당에 관한 기사가 1985년 7월과 8월에 두 차례 실렸다. 그러나 실천에서 포사투 지도부는 노동조합과 노동자 운동을 동일시했다.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어윈은 노동자들에게는 “해방의 정치”를 넘어서 “변혁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정당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는데, 〈소셜리스트 워커〉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노동자 정당을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기상조의 현명치 못한 생각입니다.”SACTU가 실패한 핵심 이유는 … 회의동맹 안에서 종속적이었기 때문이다. ANC와 공산당 지도부가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SACTU는 장기적 전략을 실현할 한낱 수단으로서 그 뒤를 따랐다. SACTU에게는 독자적인 지도부가 없었다. … 이처럼 SACTU는 종속적이었던 탓에, 전국적 파업 운동에 나선다는 결정이 내려질 때 노동계급 조직의 준비 정도나 성숙도는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회의동맹을 ANC와 공산당이 지배한 결과, 결국 SACTU가 대중적 기반과 경험 있는 지도부를 막 갖추기 시작하려던 바로 그때 박살나 버렸다. 국가를 겨냥한 파괴 활동에 나서기로 공산당 주도로 결정했던 탓이라고 나는 말하겠다.
포사투 지도부가 이런 전략을 추구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단순히 조심스러운 것이다. 이제 걸음마 단계에 있는 노동자 운동이 국가나, ANC 및 그 지지자들과의 대결 때문에 파괴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공산당 같은 획일적이고 스탈린주의적인 정치 조직 개념이나 트로츠키주의 좌파(이하에서 다룬다)들의 선전주의와 종파주의도 많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정당의 필요성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도록 일조한 것은 분명하다. 이런 이유들이 이해할 만하다는 것과 별개로, 그 결과는 상당히 파괴적이었는데 몇 가지 이유에서 그랬다.
108 1980년대 남아공의 경제와 정치 위기라는 조건에서, 강력한 노동자 운동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국가와의 대결에 휘말릴 것이다. 둘째로,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기본적 방어 조직이다. 다시 말해 노동조합에는 노동계급의 불균등한 정치 의식이 상당 부분 반영된다. 남아공의 조건에서 이것이 뜻하는 바는 개별 조합원들이 받아들이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부족주의부터 사회주의까지 아주 상이하다는 것이다. 줄루족의 부족 운동인 ‘잉카타 웨 시즈웨’(지도자는 [망고수투] 가차 부텔레지)는[옮긴이 주: ‘잉카타 웨 시즈웨’는 줄루 민족의 왕관(잉카타)이라는 뜻으로, 보수 우파 정당인 잉카타자유당의 전신이다.] 더반 지역 노동조합 활동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실제로, 포사투 지도자들은 바로 이 점을 들어 UDF 가입을 거부했다.
그중 첫째는 노동조합 좌파의 주요 이론가인 에디 웹스터 자신이 지적한 바 있다: “작업장의 탈인종화 시도는, 사회 전반의 탈인종화가 수반되지 않는 한 현장의 요구가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광범해지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그러나 포사투 지도자들은 노동조합 의식이 모순적이라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남아공과 같은 조건에서 전투적 노동자들은 “노동자주의자”인 동시에 “민중주의자”이기 쉽다. 다시 말해, 스스로 전투적 노동조합 활동가라고 생각하고 독립적 노동자 조직을 건설하는 데 헌신하지만, 동시에 ANC/UDF를 지지할 수 있다. 작업장에서는 독립노조 활동에 참여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회의동맹을 추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독립노조 운동 내 ANC/UDF의 정치적 영향력은, 지역사회 노조들의 상대적 약소함만 보고 예상하는 것보다 더 크기 십상이다.
이 두 가지 요인 때문에 1984년 9월에 타운십 투쟁이 폭발적으로 분출하기 시작했을 때, 독립노조는 더 광범한 정치투쟁으로 빨려들 수밖에 없었다. 노동조합 좌파는 일관된 전략이 전혀 없었던 탓에 민중주의자들이 지배하는 대중 운동이 타운십을 중심으로 전개됐을 때 이를 추수하거나 기권하는 것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109 이라고 인정했던 현상이 왜 위험한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 1984년 7월에 있었다. ‘광산·금속 일반 노조UMMAWSA’가 금속노조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금속노조의 가파른 성장기가 끝난 것은 이스트랜드 금속 산업의 2차 대파업이 패배하면서였다. 1982년 4월에, 저미스턴에 위치한 스코메탈(앵글로아메리칸 자회사) 경영진은 노동자들을 모조리 해고했다. 경기후퇴가 시작된 덕에 사용자들은 직장위원들을 대거 해고할 수 있었다. 살아남은 직장위원들은 갈수록 현장조합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그들과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음을 발견했고, 동시에 노동조합 전임자들에게는 더 많은 권한이 집중되고 있음을 알게 됐다. 금속노조는 공장별 교섭이라는 자신들의 요구를 일시적으로 포기하고 1983년 2월에 [정부 산하] 산업위원회 금속 산업 부문에 참여했다. 110
일부 좌파 활동가들이 “정치적 공백”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금속노조 사무총장 데이비드 세바비는 “백인 관료 엘리트”를 비난하면서 UMMAWSA를 출범시켰다. 대파업 패배와 뒤따른 해고로 인한 사기저하가 이런 노조 분열의 매우 큰 요인이었음은 분명하지만, 정치적 노동조합주의 문제도 중요한 쟁점 중 하나였다. 세바비는 이렇게 말했다: “백인 지식인들이 우리더러 UDF나 잉카타, AZAPO에 가입하지 말라고 하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다. 우리는 이 나라의 해방을 위한 민족 민주주의 투쟁에 전적으로 헌신한다. 그런 단체가 있다면 우리는 지지할 것이다.” 한 주도적 직장위원은 새 노동조합에 합류한 후 그간의 불만을 이렇게 털어놨다: “포사투나 금속노조에서는 노동자들이 이런 [지역사회] 쟁점을 다루지 못하도록 공공연하게 억눌렀고 정치 단체들은 공개적으로 비판받았다.” 금속노조에 남은 한 직장위원은 이탈파들을 깎아내리며 이렇게 말했다: “저들의 관심사는 정치적 노동조합 운동이다. 저들은 지역사회의 정치 문제를 다루려고 저러는 것이다.” 몇 달 후, 발 삼각지대에서 타운십 투쟁이 폭발적으로 분출했을 때, 이처럼 지역사회 노동조합주의와 협소한 경제주의로의 양극화가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이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머릿속에 틀림없이 자리잡고 있었다. 충돌이 커지면서, 특히 1984년 10월 발 지역 타운십에 군대가 투입돼 집집마다 뒤지고 다니자, 결근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다. “타운십에서 양극화가 점차 첨예해지는 가운데, 노동조합들은 조합원들한테서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하라는 요구를 받게 되었다. … 국방군이 타운십에 진입하자, 트란스발에서 이런 요구는 더욱 커졌다. 노동조합은 그 압력에 저항할 수 없었고, 삽시간에 결근 투쟁에서 중심적 구실을 맡게 됐다. 이렇듯 노동조합이 마침내 공장 담장을 넘어 활동하게 됐을 때, 그 공간은 [포사투 사무총장] 포스터가 ‘노동자가 아닌 자들이 통제한다’고 비판했던 것과 근본에서 다르지 않은 공간이었다.” 실제로 1984년 11월 결근 투쟁을 발의한 것은 노동조합들이 아니라 UDF에 가맹한 남아공학생회의COSAS였다. 1976년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자신의 부모들에게 연대를 요구했다. 그 호소에 응해 세 곳(발 삼각지대, 소웨토, 콰테마)에서 각각 벌어진 결근 투쟁에 많은 현장조합원들이 참가했다. 이런 현장조합원들의 정서에 따라 포사투와 CUSA 소속 노동조합들은 1984년 10월 27일, 37개 조직(주되게 청년과 지역사회 단체)이 모이는 연대체에 참여해 결근 투쟁을 이틀 동안 벌이자는 호소를 함께 발의했다. 또한 그 투쟁을 조율하기 위한 4인 위원회에는 금속노조 직장위원 모세스 마예키소가 포함됐다. 이 결근 투쟁은 성공적이었고, 국가는 그 보복으로 노동조합과 학생 지도자들을 구금하고 사솔Sasol의 2번과 3번 석탄액화 공장의 노동자 5000~6000명을 해고하려 했지만 부분적 성과만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조합들이 지역사회 투쟁에 참여하는 방식은 대체로 민중주의자들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었다. 당시의 결근 투쟁은, 1950~1960년대 초 그리고 1976년에 그랬듯이 지역사회 투쟁의 확장판이었고, 작업장의 규율이나 연대보다는 타운십 조직들이 골간을 이뤘다.114 이 지역은 남아공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에 속한다. 이 지역은 그 일대의 이스턴케이프 주(州) 전체와 함께 ANC의 전통적 아성이었다. 포트엘리자베스 자동차 공장들은 경기 후퇴로 파탄난 상황이었다. 1982~1985년에 자동차 산업과 그 연관 산업에서 3만 100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1985년 8월 포트엘리자베스 지역의 실업률은 56퍼센트로 추정된다.
1984년 11월 결근 투쟁이 노동조합의 추수주의를 보여 준 사례라면, 이듬해 3월 18~22일 포트엘리자베스/위턴하흐 지역의 결근 투쟁은 기권주의의 사례였다. 자동차 노동자들은 전통적으로 전투적인 집단이었지만, 이 지역에서는 분열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1979년 10월~12월 포드에서 격렬한 파업을 벌이면서 노동자들은 세 갈래로 찢어진 바 있었다. 첫째는 포사투에 가맹한 자동차 노동조합들로 훗날에는 NAAWU의 핵심을 이루지만 당시에는 이들 사이에서 ‘전국 자동차조립·고무노조NUMARWOSA’가 지배적이었다. NUMARWOSA는 컬러드 노동조합으로, 백인이 다수였던 남아공노총TUCSA에서 분리해 나온 노동조합이었다. 둘째는 더 전투적인 ‘포드 노동자 위원회’였는데, 그 지도자인 토자밀 보타는 ‘포트엘리자베스 흑인 시민기구PEBCO’의 대표였고 훗날 UDF에 가맹하는 자동차조립·부품노조MACWUSA를 결성하게 된다. 셋째는 더 우파적이고 중간계급 성원들로 이들이 PEBCO를 통제했다. 이 분열은 1985년에 사뭇 다른 형태로 되살아났다. 1985년 무렵에 PEBCO는 UDF에 가맹한 전투적 시민기구가 돼 있었지만 타운십 운영은 [UDF에 가맹한] COSAS를 모델로 삼는 ‘포트엘리자베스 청년회의PEYCO’와 ‘위턴하흐 청년회의UYCO’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이 청년 단체들은 실업자 청년과 학생들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들 중에는 “게릴라” 활동을 했던 이들도 있었다. 게릴라 출신자들은 “청년회의의 평균적인 회원들보다 더 젊고, 교육은 덜 받고, 정치 의식이 부족한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크게 무리를 지어 타운십들을 돌아다녔고 경찰이나 군차량을 공격했다. 지방의원과 흑인 경찰관도 공격했다.”1985년 3월 결근 투쟁이 발발하기까지의 정확한 과정은 여전히 논쟁의 영역에 있다. 아마도 PEBCO가 노동조합들과 사전 논의 없이 결근 투쟁을 호소한 듯하다. 포사투와 다른 독립노조들은 그 호소를 거부했고, 흑인 의식 운동도 거부했다. 노동조합들은 PEBCO가 내건 요구(유가와 일반판매세 인상에 반대하는 전 국민적 요구였다)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또한 노동조합들은, PEBCO 측이 컬러드 노동자 동원을 시도하지 않은 것과 미조직 노동자들의 해고 위험에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을 들어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지역사회 단체들은 그대로 결근 투쟁에 돌입했다. 3월 18일 포트엘리자베스 파업에 아프리카인 산업 노동자 90퍼센트가 참여했다. 그러자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파업 참가율이 높은 것은 PEBCO와 그 “게릴라”들이 위협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결근 투쟁 이후의 상황은 더 가시밭길이었다. MACWUSA는 주민들이 학살당하게 된 책임에서 포사투도 자유롭지 않다고 주장했다. 학살 희생자들은 3월 21일 위턴하흐의 랑카 타운십 주민들로, 허가받지 않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중에 경찰에게 살해됐다. 그 장례식에 허가가 나지 않은 이유가, 노동조합들이 그 다음주로 예정된 다른 장례식을 대신 허가하라고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돌았다. 그러나 학살 일주일 후 포사투에 속하는 공장에서 노동자 8000명이 희생자들을 기리며 일손을 놓았다. 이 사건에서 누가 옳았고 누가 틀렸든 간에 작업장 대 지역사회, 노동자 대 실업자 등으로 양극화된 결과는 재앙적이었다. 데반 필레이의 다음 말에 동의하지 않기란 어렵다. “노조 지도자들은 … 청년과 조직 노동자들이 강력한 공동전선을 꾸렸을 때 생길 잠재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청년들은 열정과 용기, 전투성이 있다. 노동자들은 조직과 지속력 그리고 생산수단에 접근할 능력이 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직장위원들은 당시 결근 투쟁의 이런저런 약점을 따지고 들었지만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음으로써, 투쟁을 한 단계 끌어올릴 기회를 놓쳐 버렸다.” 노동자 운동이 두 세력으로 나뉘어 공공연하게 정치적으로 충돌할 가능성이 아주 실질적이었다. 한 편에는 “연합 노조”가 있었다. 여기서는 포사투와 CUSA가 핵심을 이뤘고 둘 다 새로운 “슈퍼노총”을 만드는 데 몰두했다. 맞은 편에는 지역사회 노조와 UDF가 있었다. 그들이 남아공에서 SACTU를 재건할 계획이라는 걱정스러운 소문이 퍼졌다. 이처럼 새로운 분열이라는 아주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고 1985년 11월에 코사투가 출범할 수 있었던 것은 세 가지 요인 덕분이었다. 첫째, 망명 중이던 ANC/공산당 지도부가 개입해 지역사회 노조들의 SACTU 재출범 시도를 막은 듯하다. ANC/공산당 지도부는 자신들의 처신과 무관하게,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들이 새로운 노총으로 연합할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봤고, 상황이 그런 만큼 그 노동조합들에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를 얻는 것이 취약한 지역사회 노조만을 기반으로 삼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한 것이 틀림없다. 둘째, CUSA와 산하 노동조합들이 포사투와 연합하는 문제에서 (한 곳을 제외하고는) 생각을 바꿨다. 그들이 생각을 바꾼 명목상의 이유는 1985년 5월 정해진 연합의 5대 원칙 중 하나(비인종주의)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나머지 원칙 4개는 ‘산업별 단일 노동조합’, ‘노동자 통제’, ‘조합비 납부 조합원 중심성’, ‘새 노총 하에서 전국적 협력’이었다.) CUSA는 연합 논의에서 철수했고 그 대신 흑인 의식 노동조합들의 느슨한 모임인 AZACTU(조합비 납부 조합원 규모 10~15만 명)를 결성했다.
셋째 요인은 CUSA 소속이었지만 새 노총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유일한 노동조합, 즉 광원노조였다. CUSA는 1982년 8월 연례 대회에서 광원노조를 출범시키기로 표결했었다. 그에 앞서 7월에 임금 인상을 놓고 벌어진 파업과 반란으로 광원 100명이 살해되고 수천 명이 강제 추방되는 일이 있었다. 그 투쟁은 광업이라는 남아공의 핵심 산업에서 10년 동안 벌어진 노동쟁의의 절정이었다. 흑인이 압도 다수인 광원들은 그간 노예 상태에 가까운 노동 조건 — 남성만으로 이뤄진 숙소, 회사 경찰, 부족장 같은 ‘인두나’ 제도 — 에 항의해 반란을 일으켰고, 백인의 숙련직 독점이 오랫동안 무너진 것을 이용해 임금 인상을 따낼 수 있었다. 1982년 투쟁의 결과로, 광업 자본가들의 단체인 광산회의소의 한쪽 날개, 특히 앵글로아메리칸과 랜드마인은 안정적 노동 공급을 위해 흑인 노동조합 결성을 권장하는 방향으로 떠밀렸다.
120 광원노조의 전략은 독특했다. 금속노조의 경우에는 조심스러운 조직화 방식을 취했는데, 공장 한 곳에서 지지 기반을 조심스레 구축하고 이후 경영진을 압박해서 노동조합을 인정받고 난 뒤에야 다음 공장으로 넘어갔다. 반면에 광원노조는 대규모 동원, 거대한 행진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노동조합 결성과 조합원 등록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사무총장 시릴 라마포사가 이끈 광원노조 지도부는 말은 급진적으로 했지만 그들의 전략은 광산회의소를 아주 조심스레 대하는 것이었다.
앵글로아메리칸과 랜드마인 측의 이런 전술 변화의 최대 수혜자는 광원노조였다. 광원노조는 충격적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해 1985년 후반이 되면 조합원이 23만 명이 됐고 52곳에서 사측에게 노동조합을 인정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1984년과 1985년에 노동조합이 임금을 요구하는 방식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단체협상을 벌이면서 조심스레 파업 투표를 결합하는 것이었다. 1984년 9월에 앵글로 금광에서 예정됐던 파업이 마지막 순간에 취소됐다. 그러나 그 전까지 이런저런 쟁의 행위에 참여한 노동자가 7만 명이었다. 1년 후 광산회의소가 분열했는데, 좀더 타협적인 앵글로아메리칸과 그 동맹들이 한편에 있고, 다른 한편에는 보어인 소유의 대기업 젠코의 주도 아래 더 강경한 노선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광원노조는 사측이 더 강경했던 기업들의 조합원들만(조직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을 동원하며 대응했는데, 약 1만~3만 명이 호응하고 나섰다. 국가와 사측 보안군은 파업을 신속하게 분쇄했다. 그러자 라마포사의 대응은 젠코와 그 동맹들을 산업재판소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산업재판소는 비한 보고서 개혁의 일환으로 1979년에 설립됐고 국가의 입장에서 단체협약을 감독하기 위한 기구였다.)광원노조가 CUSA와 단절한 것은 1985년 8월 특별 대회에서였다.(당시 그 대회는, 두 번째로 불발로 끝나게 될 파업을 호소하기 위한 자리였다.) 오늘날 아마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 가장 큰 노동조합일 광원노조가 포사투를 택하면서 그 결과로 등장할 새 노총 코사투는 어마어마한 세력이 될 것이 확실해졌다. 출범 당시 코사투에는 34개 노동조합이 속하고, 조합비를 내는 조합원은 45만 명, 등록 조합원은 56만 5000명이었다.
코사투 출범 대회에서 광원노조는 “노동자주의자들”과 “민중주의자들” 사이를, 그리고 포사투와 지역사회 노조 사이를 중재하는 데서 결정적 구실을 했던 듯하다. 양쪽 모두 상당한 양보를 받아들였다. 산업별 단일 노조 원칙을 수용함으로써 SAAWU 등 UDF를 따랐던 일반노조들은 결국 자진 해산을 지지하는 데 투표한 셈이 됐다. 다른 한편으로는, UDF 지지자들이 코사투 지도부에 아주 많이 포함됐다. 대표적으로 새 노총의 위원장 일라이자 바라이(광원노조), 사무총장 제이 나이두(‘사탕·음식연합 노조’), 사무부총장 시드니 마푸마디(‘의복일반노조’)가 그렇다. 중책을 맡은 사람 중 “노동자주의” 색채가 가장 뚜렷한 맥스월 쑬루(금속노조)는 코사투 회계담당자였다.
비록 코사투는 UDF에도, NFC에도 가맹하지 않았지만, 출범과 함께 공공연한 정치 행보에 나선 듯 보였다. 바라이는 창립 대회에 모인 대규모 참가자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면서 광산과 다른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요구하고,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을 상대로 진행 중이던] 국제적 투자 철회 운동 지지를 선언하고, 통행법을 6개월 안에 폐지하지 않으면 통행증 소각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일 것이라고 위협했다. 며칠 후 제이 나이두는 [짐바브웨 도시] 하라레에서 ANC 지도자들을 만났다.
코사투 중앙위원회는 이런 정치 행보 중 어떤 것도 승인한 적이 없었다. 자연스레 좌파들 사이에서는 새로 출범한 노총을 민중주의자들이 장악했다는 우려가 표출됐다. 옛 포사투 좌파 중 ‘생존주의’ 전략을 옹호하는 이들은 좀더 낙관적이었다. 그들은 UDF 노동조합들은 현장 기반이 없으므로 산별 노조로 통합되면 자연스레 조직적 구심이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CUSA와, 그와 동맹한 AZACTU가 합류하지 않아 주요 노조들이 코사투 바깥에 남아 있지만, 코사투 출범은 분명 역사적 전진이다. 또한 “노동자주의자”와 “민중주의자”가 하나의 노총에서 단결해 있는 편이 훨씬 더 나았는데, 공동 행동을 전제로 공개적 논쟁을 벌일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 편이 포트엘리자베스에서처럼 노동조합들과 UDF 단체들 사이에 상호 파괴적 양극화가 벌어지는 것보다 낫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조합 좌파는 ANC와 그 동맹들의 정치적 위협을 계속 과소평가했다. ANC와 UDF가 대중적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조직적 역량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코사투 안에서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노동자주의자들”은 “민중주의자들”과의 정치적 대결로 자신들이 공들여 구축한 현장조합원 조직들을 빼앗길 수 있다.
122 단호한 지도부와 강력한 현장 조직력을 갖출 때에만 광원노조는 피할 수 없는 힘의 시험대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광원노조가 현장 직장위원들이 노동조합의 기초라고 강조하고는 있지만, 그 뿌리가 실제로 얼마나 튼실한지는 분명하지 않다. 남아프리카 역사에는 흑인 노동조합이 아주 빠르게 성장했지만 혹독한 탄압을 받아 사라지고 만 경우가 여럿 있는데, 1940년대의 ‘아프리카 광산 노조’나 ‘비유럽인 철강·금속 노조 연맹’도 그런 경우였다. 후자의 경우 제2차세계대전 동안 조합원이 3만 5000명까지 치솟았지만, 1950년에 96명으로 줄었다. 123 광원노조가 이런 운명을 피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
물론 더 강력한 산별 노조들, 특히 광원노조가 십중팔구 코사투 내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발휘해 UDF가 코사투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을 막을 것이다. 그러나 광원노조 지도부가 노동조합을 건설해 온 전략은 대규모 동원을 조직하면서도 광산회의소와의 대결은 조심스레 피하는 것이다. 가까운 미래든 먼 미래든 승부를 피할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젠코처럼 강경한 기업들과의 대결뿐 아니라 앵글로아메리칸 같은 “자유주의” 사용자들과의 대결 또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앵글로아메리칸은 여전히 광산에서 고도로 억압적인 노동 정책을 실시하고 있고, 그 탓에 1985년 초에 투쟁 물결이 일었고 그 정점이었던 4월 말에는 앵글로아메리칸의 발리프 광산에서 1만 4000명이 해고되기도 했다.기본적으로 노동조합 좌파의 실수는, 프롤레타리아가 독립적이고 계급의식적이기 위해서는 강력한 현장 조직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민중주의를 대신할 조직적·정치적 대안, 즉 혁명적 노동자 정당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좌파들 중 정치 조직을 주로 강조하는 이들은 어떠한가?
정치 좌파
앞서 봤듯이 트로츠키주의는 1930년대 전반부터 남아프리카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했다. 이하에서 다룰 세 조직 모두 그 전통에서 유래했다. 이하에서는 마르크스주의노동자경향을 가장 먼저 다루는데 이 조직이 가장 오래돼서는 아니다. 그보다는, 독자적 조직을 건설하자는 입장과 더 광범한 전선의 일부로 활동하자는 입장 사이에서 중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아프리카민족회의 내 마르크스주의노동자경향MWT MWT는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전반기에 가장 유능했던 백인 급진주의자들 사이에서 출현했다. 나탈에서 섬유노조 초기 조직자였던 데이비드 헴슨, 탁월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마틴 레가시크도 그 회원이었다. 남아공에서의 정치 활동을 이유로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던 이들은 ANC에 가입해서 SACTU 안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또한 영국 밀리턴트 경향의 영향도 받았다. MWT 소속이었던 로빈 피터센은 SACTU 기관지 〈노동자의 단결〉 편집장이었다. 1979년 7월에 피터센은 편집장에서 해임됐다. 이후 그는 ANC 당원 자격까지 정지됐고 헴슨, 레가시크, 파울라 엔서도 같은 처분을 받았다. 1985년 ANC 자문 협의회에서는 이들의 제명이 확정됐다. ANC가 이들을 용납하지 못한 이유는 이들이 흑인 노동계급 쪽으로 방향을 확 바꾸자고 주장하고, SACTU가 전통적으로 MK의 모병소 구실을 수행해 온 것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125 당시 MWT는 이미 영국에 기반을 둔 한 조직에 개입하고 있었다. ‘남아공 노동 교육 프로젝트SALEP’라는 그 조직은 서방의 현장조합원 활동가들이 남아공의 독립노조들과 연관을 맺도록 힘을 쏟았고, 파업에 참가한 영국인 광원 레이 존스가 남아공을 순회하며 광원노조를 만나도록 조직했다. SALEP은 짐바브웨에서도 기반을 마련했고 현지 노동조합 운동에 관여하게 됐다. 그 활동으로 1985년 4월에 헴슨, 달시 더토이, 아네크 포페는 구속 후 추방됐고 몇몇 짐바브웨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구금되고 고문을 당했다. 126 현재 SALEP은 [영국] 노동당 전국집행위에서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
MWT가 공개적으로 모습을 처음 드러낸 것은 1981년 초였는데, 남아공 내에서 배포할 목적으로 잡지 《잉카바 야 바세벤지》(이하 《잉카바》)를 발행했다. 잡지는 창간호에서 그 지향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우리는 ANC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혁명적 노동계급 대중 조직으로 건설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할 것이다.”MWT를 탄압하는 자들의 됨됨이를 보면 MWT가 지지받아 마땅한 조직임을 알 수 있다. MWT는 아주 만만찮은 조직이자 남아공 투쟁에 관한 최근 분석 중 최상의 것들을 제시해 왔다. MWT의 기본 관점은 이 저널[《인터내셔널 소셜리즘》]과 무척 닮아 있다. 본지와 마찬가지로 MWT는 남아공에서 연속혁명의 동학이 진행 중인데,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해서 민족해방과 자본 타도를 모두 달성하는 것을 통해서만 연속혁명이 완수될 수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MWT는 영국 밀리턴트의 남아공 버전에 그치지 않는다. 밀리턴트는 전통적으로 남아공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흑인과 백인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 남아공의 옛 마르크스주의 좌파의 전형적 입장이자 계급 정치를 추상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밀리턴트는 그런 추상적인 관점 탓에 아일랜드가 민족 억압을 겪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 IRA를 지지하기를 거부했다. 반면 《잉카바》 측의 접근법은 그들의 영국 동료들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현실적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배계급의 공세로 흑인뿐 아니라 백인도 생활수준이 악화됐다고 인정하지만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시키는 대로 하던 백인 노동계급의 시대는 끝나 가고 있다. 그러나 특권적인 노동귀족들에게는 독자적인 계급 운동이 불가능한데 그들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자 임금이 낮고 억압에 시달리는 다수 노동자들의 요구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백인들의 반란은, 가장 반동적인 부르주아지·프티부르주아지 국민당 정치인들의 손아귀에 제일 먼저 떨어질 수밖에 없다. … [백인들의 — 캘리니코스] 변화는 전체적으로 오른쪽을 향할 것이다.” 동시에 MWT는, 지배계급이 백인들 사이에서 대중적 지지 기반을 유지함으로써 물질적 이익도 얻는다고 지적한다. 백인 지지 기반은 지배계급이 물리력을 독점하도록 해 주는 결정적 요소다: “이 국가가 백인 노동자와 중간계급의 지지에 언제든 기댈 수 있다는 사실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무지막지한 억압 기구를 지배계급의 수중에 남겨두는 것이 되고, 저들은 이를 이용해 언제든 우리 민중을 야만적으로 분쇄할 수 있을 것이다. … 물론 사회주의 강령을 선포하는 것만으로 만만찮은 규모의 백인 노동자들이 흑인 노동자들과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할 것이라는 생각은 공상이다. 그보다는 흑인 노동자들을 단호하고 의식적인 혁명의 세력으로 조직하는 것, 대중 운동이 무장하도록 하고 사회주의 강령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 그것만이 적잖은 규모의 백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을 우리편으로 끌어들일 방법이다.”
129 양대 백인 노총인 TUCSA와 SACOL은 탈숙련화를 밀어붙이는 사용자들, 보타의 개혁, 독립노조 사이에 짓눌리며 극심한 위기에 빠져 있고, 왼쪽과 오른쪽 양쪽으로의 분열을 잇따라 겪었다.
흑인 프롤레타리아가 독자성을 갖추고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점을 중심에 두면서 백인 노동자들에 계급적 호소를 해야 한다는 관점은 포사투 소속 노동조합들의 실천과 일치한다. 실제로 자동자노조인 NAAWU는 이런 방식으로 폭스바겐 위턴하흐 공장에서 백인 노동자 25명이, 전통적으로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남아공철강노동조합을 떠나 자신들에게 오도록 할 수 있었다. MWT가 현 상황을 설득력 있게 분석한 부문은 또 있다. 예컨대, ANC/UDF가 마치 국가 권력 장악이 당면 과제인 양 전술을 수립하는 것에 MWT는 강력하게 반대한다. 《잉카바》는 국제적 혁명 운동의 경험을 근거로 “승리할 수 있는 무장봉기가 당장 가능하지 않고, 비교적 짧은 시일 안에도 가능하지 않다”고 옳게 주장한다.131 그러나 《잉카바》는 그런 결과를 머릿속에 그리기 어려울지 몰라도, 남아공 자본이나 그와 손잡은 서방 자본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MWT의 전략은 몇 가지 오류 때문에 결함이 있고, 그 오류는 그들이 밀리턴트와 공유하는 종류의 마르크스주의에서 비롯한다. 근본적으로는 경제 과정에서 정치 변화를 기계적으로 도출하려는 경향에서 비롯하는 문제이다. 두 가지 사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MWT가 파국론, 즉 남아공 위기에 부르주아적 해결책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부르주아적 토대 위에 ANC 정부가 수립될 여건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MWT가 부르주아적 토대 위에서 ANC 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주장하는 첫째 근거는 남아공 경제 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둘째 근거는 백인 대중이 누리는 특권은 ANC 집권으로 위협받게 될 텐데, 그런 백인 대중에 현재 기반하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 기구를 개조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 두 가지는 현실을 제약하는 요인이고, 그래서 남아공에서는 짐바브웨의 랭커스터 평화협정 같은 타협의 가능성이 훨씬 더 낮다. 그러나 중대한 정치적 조건이 하나 충족되면 그런 제약이 풀릴 수 있는데, 바로 독자적 노동계급 운동이 없는 경우이다. 만약 ANC가 노동자 운동을 정치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된다면, ANC는 자본주의적 해결책을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일을 스페인 공산당과 포르투갈 공산당이 벌인 바 있는데, 1970년대에 파시즘이 붕괴할 때에 이베리아 반도 전역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 그랬다.이상의 논의에서 MWT 전략의 다른 주요 난점을 이해할 수 있는데, 당연히 그것은 활동을 ANC 안에서만 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ANC 입당(엔트리) 노선]. 이것은 밀리턴트가 영국 노동당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잉카바》의 핵심 슬로건은 “ANC를 사회주의 강령에 기초한 대중 정당으로 만들자!”였다. MWT는 스탈린주의 좌파가 아니면서도 노동조합들에게 UDF에 가맹하라고 요구한 몇 안 되는 세력 중 하나였다. (정작 ANC/UDF 지지자들 자신은 코사투 출범을 위한 협상 과정에서 그런 요구를 내려놓았다.)
이 문제에서 MWT는 단호하다:
남아공에 필요한 혁명적 노동자 정당과 노동자들의 지도력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내려면, 조직 노동자들과 청년들이 ANC를 건설하고 또 ANC 자체를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탈바꿈시키려고 투쟁해야 한다.
MWT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ANC가 남아공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든다:
ANC가 지지받게 된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그러나 모든 요인의 뿌리에는 대부분, 아니 어쩌면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작동하는 역사의 법칙이 있다. 그 법칙이란 바로 노동자 대중이 투쟁에 나설 때 그들이 가장 먼저 바라보는 대상은 자신들의 지난날 투쟁과 연관이 있는, 전통적인 기성 조직이라는 것이다.
일반적 명제로서 위의 말은 분명 참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바라보는 대상이 … 전통적인 기성 조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노동자들이 그 조직에 계속 안주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MWT의 답은 노동자들이 그럴 것이고, 또 ANC를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 운동으로 탈바꿈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저변에는 역사란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이 전진하는 자동적 과정이라는 관점이 깔려 있다: 대중이 ANC로 우르르 몰려가서 ANC를 강제로 좌경화시킬 것이라고 말이다.
또한 MWT는 노동자들이 사회주의를 상당 부분 이미 받아들이고 있다고 과대평가한다:
혁명적 의식의 열에 아홉은, 억압당하는 노동 인민의 삶의 경험에서 이미 생겨나고 있다. 나머지 10분의 1은 … 무장한 인민의 힘에 기대어 자본주의 국가 기구를 통째로 해체하고, 노동자 국가의 민주적 기관들로 대체할 필요를 명료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주장은 노동계급 의식이 모순적이라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미 지적했듯이 노동계급의 광범한 층은 노동자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민중주의자이고, 그런 태도에서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요구가 ANC 정권 하에서 실현되리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은 오류이고, 따라서 대중의 의식 중 노동자주의적 요소와 민중주의적 요소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노동자들이 이런 모순을 인식할 길은 자신의 투쟁 경험을 통해 깨닫는 것뿐이다. 예컨대, ANC 지도부가 만약 정권과 협상하는 기회를 갖게 돼 파업을 억누르려 할 때의 경험이 그런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136 밀리턴트와 마찬가지로 MWT는 “대중 조직”이라는 용어 아래 노동조합과 정치 조직을 뭉뚱그린다. 이 탓에 그들은 노동조합 — 노동자들의 초보적 방어 조직 — 과 ANC의 차이를 흐린다. 그러나 ANC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이고 극도로 비민주적인 조직이다.
MWT는 노동자주의적 요소와 민중주의적 요소 사이의 모순이 ANC라는 틀 안에서 드러나고 또 해소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탓에 MWT는 “대중 조직들을 분열시키는 일체의 종파주의적 시도를 비난”하는, 상당히 낯익은 주장을 펼친다. 특히 MWT가 ANC 안에서, 절차도 제대로 준수되지 않는 탄압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ANC 내부에서 하나의 “경향”이 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돈키호테 같은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최근의 대중 반란에도 불구하고 ANC 내부 체제가 더 관대해질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ANC 지도부는 1985년 6월에 헴슨과 그 동료들을 공식 제명하면서 MWT를 장황하게 비난하고 그 비난을 광범하게 공론화할 기회로 삼았다.[ANC의 망명 근거지인 잠비아뿐 아니라] 남아공 내의 상황도 딱히 더 낫다고 보기 어렵다. 미확인 보도들에 따르면 《잉카바》 지지자들은 이스턴케이프 지역의 UDF 조직에서 숙청됐다. 같은 보도에 따르면 그 지역에서 인기 있는 구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죽여라!”였다고 한다. 이 구호가 그저 말에 불과하다고 여긴다면 실수다. ANC를 비판하던 좌파들이 “목걸이” 공격을 당했다는 소식이 여럿 들려오기 때문이다.(“목걸이”는 기름을 바른 타이어를 목에 걸어 불태워 죽이는 잔혹한 보복 수단으로, 보통 타운십에서 정권의 앞잡이나 밀고자를 응징하는 방법이다.) 남아공에서 스탈린주의는 아주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렇게 지적한다고 해서 MWT 전략에 “합리적 핵심”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UDF 기층 지지자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잉카바》의 오류는 그 과정이 ANC/UDF라는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구체적 투쟁 사안(특히 노동조합 쟁점)을 놓고 “민중주의자들”과 공동행동을 벌임으로써 UDF 기층 지지자들을 끌어당길 수 있다는 관점이 그들에게는 없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이 성공할 전제 조건은 사회주의자들이 민중주의자들로부터 조직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그런 좌파들, 즉 ANC와 그 동맹들 바깥에서 활동하는 좌파들을 살펴보겠다.
(2) 단결운동The Unity Movement
남아공은 영토가 매우 방대한 나라인 만큼 지리적 차이가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국민당을 이해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국민당 내 트란스발 조직과 케이프 조직 사이의 오랜 갈등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런 지리적 요인은 지배계급 정치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남아프리카에서 트로츠키주의는 웨스턴케이프에서 탄생했는데, 이곳은 지금까지도 좌파의 아성으로 남아 있다. 이 지역의 독특함은 각종 좌파 조직들에 그 흔적을 남겼고 그 조직들이 활동하는 환경에도 영향을 끼쳤다. 케이프 일대는 무엇보다 가장 오랫동안 식민 지배를 경험한 곳으로 그 시작은 165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결과로 이곳에는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모여 있다. 이 지역 인구는 원주민인 코이산족, 더 동쪽 지역에서 온 코사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인들, 말레이시아 출신의 노예들, 인도 출신의 상인들과 계약노동자들, 네덜란드 정착자들, 프랑스 위그노교도 난민들의 후예들이 뒤섞여 있어서 정권의 인종 분류 체계를 완전히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웨스턴케이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들을 “컬러드”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로 이 지역에서는 (부두와 건설업이라는 중요한 예외를 제외하면) 식음료, 의류·섬유 등의 경공업이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웨스턴케이프에는 오래전부터 노동조합 운동의 전통이 있었지만, 독립노조들은 아직 이 지역에서 중대한 돌파구를 열지 못했다. 이곳 노동운동을 지배하는 이들은 여전히 TUCSA에 가맹한 기성 노동조합들이다. 이 노동조합들은 남아공 다른 지역들 못지않게 보수적이고, 웨스턴케이프만의 차이점이라면 백인 노동자들이 아니라 컬러드 수공업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몇몇 파업이 상당한 규모로 벌어지기도 했지만, 정권 반대 투쟁은 주되게 컬러드 학생과 아프리카인 학생들의 몫이었다. 중요한 학생 반란이 1976년, 1980년 그리고 1985년에 또 있었다. 단결운동은 한 세대 넘는 기간 동안 웨스턴케이프에서 주요 좌파 조직이었다. 1943년에 결성될 때는 ‘비유럽인단결운동NEUM’이었다. NEUM이 등장하게 된 핵심 쟁점은 정권에 일절 협조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에 정권은 ‘원주민 대표 위원회NRC’나 ‘컬러드 문제 위원회CAC’로 대표되는 각종 꼭두각시 기구들을 만들었다. NEUM은 CAC 참여에 반대하는 운동(컬러드 교사들 사이에서 지지가 컸다) 속에서 부상했다. 반면 ANC와 초기 공산당CPSA은 NRC에 참가해 뚜렷한 대조를 이뤘다. 제2차세계대전 때 공산당이 스탈린의 대외 정책을 좇아 얀 스뮈츠 정권을 지지한 것도 같은 효과를 냈다. 그 덕에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제4인터내셔널 조직’에게 기회가 생겼다. 그 단체는 CAC 반대 운동과 NEUM 출범 과정에서 주도적 구실을 했다.
NEUM은 공산당의 단계혁명론과 민중전선 노선에 비판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명시적으로 사회주의 강령을 채택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1943년 12월에 채택된 “10개 강령”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공동전선을 표방했다. “10개 강령” 각각은 최소한의 민주주의 요구들이지만 “10개 강령” 전체로서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무너뜨리도록 고안됐다.(그러나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요구라고는 제시되지 않았다.) 둘째로 NEUM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억압받는 이들의 단결과, 정권에 의해 조장된 분열 극복을 매우 강조했다. 셋째로, 정권과는 조금도 협력할 수 없다는 노선을 채택했고, 그 때문에 NEUM 일각에서는 상황 고려 없이 아파르트헤이트 기관 거부 전술을 무조건 제기하는 경향도 있다. NEUM이 1940~1950년대에 투쟁에 기여한 바는 결코 작지 않다. NEUM이 컬러드만의 조직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실제로, 아프리카인이자 유능한 선동가인 I B 타바타의 지도 아래 NEUM은 부족 보호 지역(특히 트란스케이) 빈농들의 저항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당시 빈농들이 맞서 싸운 대상은 국가가 강요하는 ‘농촌 재생 제도’와, 반투스탄 설립을 위해 부족 내 부역자들을 필두로 세운 기관들이었다. NEUM은 또한 1950년대 말 폰도란드에서 벌어진 위대한 농민 반란에서도 일정한 구실을 수행했다.
그럼에도 NEUM은 두 가지 약점 때문에 고통받았다. 첫째는 많은 트로츠키주의 단체들이 보인 약점인데 바로 선전주의로 흐르는 경향이다. 그것이 현실에서 나타난 모습은, 어느 운동에서든 투쟁의 구체적 쟁점을 놓고 ANC와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ANC의 정책에 자신들의 “10개 강령”을 대립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NEUM이 농민 투쟁의 경험을 일반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타바타는 1940년대를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썼다:
우선, 빈농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활동에 집중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 점은 단지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무토지 농민들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고, 그들이 가장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존재로서 혁명적 잠재력이 가장 크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주 노동자라는 것도 지극히 중요한 요소였다 — 남아공만의 독특한 상황은 광산이나 백인 농장뿐 아니라 중공업까지도 빈농들의 [이주] 노동에 의존해 굴러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아공에서 빈농들의 협력과 참여 없이는 만만찮은 투쟁을 벌일 수 없다.
142 오늘날에는 빈농의 몰락과 인구 다수가 임금노동에 의존하는 추세가 훨씬 더 진척된 만큼 타바타의 주장은 교조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이주 노동자들이 여전히 압도 다수인 산업(예컨대 제조업)에서도, 도시를 주된 근거지로 삼아 장기적으로 일하는 노동인구가 등장했다. 143 그런데도 타바타는 1976년 6월 소웨토 항쟁 얼마 후 나와 크리스 하먼, 존 로저스를 만난 자리에서 남아공에는 안정적인 흑인 노동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전히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남아공에서 흑인 프롤레타리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는데, 타바타의 분석에서는 아프리카인 임금노동자를 기본적으로 빈농으로 간주했다. 이런 주장은 1940년대에도 현실과 맞지 않았다: 그 시기에 농촌 투쟁이 중요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프롤레타리아화 과정도 이미 상당히 진척된 상태였다. 한 연구자는 1945년에 상업과 사기업에서 일하던 아프리카인들의 40퍼센트 이상은 간헐적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했다고 추산했다.1960년대 초 패배 이후, ‘남아공 단결운동’(NEUM의 새 이름)은 ANC, PAC와 마찬가지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망명지에서 NEUM은 쇠락했고, 아프리카단결기구OAU[오늘날 아프리카연합의 전신]가 자신들에게 주는 보조금이 다른 운동들보다 적다고 불평하는 신세가 됐다. 수차례 분열을 겪었는데, 중요했던 첫 분열은 1950년대 후반 남아공 안에서 일어났다. 이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단결운동은 계속해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고, 특히 웨스턴케이프 지역의 컬러드·인도인 학교 교사들 사이에서 그렇다. 이런 전통은 1980년대 중반에 운동이 다시 솟구치면서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왔다. 1985년 4월 새단결운동NUM이 케이프타운에서 출범했다.
144 두들리는 계속해서 프롤레타리아화의 진척도를 평가절하했고, “남아공은 발전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변칙을 겪은 탓에 전통적 계급 구분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 임금을 결정적 요소로 보는 것은 오류”라고 말했다. 145
이 NUM은 과거의 단결운동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빈농이라는 기본 쟁점에 관해 NUM 대표 R O 두들리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농촌/도시 사람 조직하는 문제에서 단결운동의 입장이 변한 것은 별로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146 두들리는 또한 “노동조합 운동을 발전시키는 것의 중요성이 민족 운동 내부에서 더 강조돼야 한다”고 인정했다. 147 그러나 NUM은 노동조합에 관한 어떤 전략도 없는 듯하고, 그나마 예외라면 다음과 같이 노동조합을 경제주의라고 비난하는 것뿐이다(이런 비난은 UDF도 똑같이 퍼붓는 것이다): “지배계급이, 정치 투쟁에 나서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힘을 무력화하려고 변함없이 사용하는 수법은 그 투쟁을 ‘노동조합 운동이라는 영역’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더 광범한 해방 운동에 도달할 길을 찾아야 한다. 노동조합의 조직 노동자들만을 위한 해결책이 따로 존재할 수는 없다.” 148
두들리도 일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인정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핵심적 구실을 인정했지만 그 때조차 강조점은 농촌에 있었다. “농촌의 노동계급과 도시의 노동계급이 투쟁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149 비록 NUM은 UDF의 민중주의를 비판하지만, 현실에서 NUM은 ANC/공산당의 전통적 단계혁명론의 좌파적 버전 이상을 제안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모든 것을 최소 강령 실현에 맞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을 중시하고 노동자들이 자본과 일상적으로 벌이는 투쟁을 중시하는 것만이 연속혁명의 전망을 진정으로 열어젖힐 수 있다. 그러나 NUM의 “즉각적 실천 과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두들리는 이렇게 답했다: “대체로 선전 작업, 우리의 문건을 배포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150 NUM은 옛 선전주의 장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더 광범한 해방 운동”이란 단결운동이 전통적으로 강조했던 것, 즉 “모든 민주주의자들을 … 온전하고 평등한 시민권이라는 최소 강령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단결시키는 것”이다.단결운동은 공산당보다 왼쪽에 있는 조직들 중에서 여전히 가장 크다. 그러나 정치적 약점 탓에 민중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현실에 성공적으로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 단결운동을 지지했던 많은 이들이 UDF에 합류했다는 소식들이 많다. 창조적 도전은 단결운동이 아닌 다른 곳, 노동조합 좌파와 케이프행동연맹에서 나왔다.
(3) 케이프행동연맹The Cape Action League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케이프행동연맹CAL은 (단결운동과 마찬가지로) 주된 기반이 웨스턴케이프에 있다. 남아공 다른 지역에도 CAL 지지자들이 있지만 말이다. CAL의 기원은 [‘협력과 개발부’ 장관] 코른호프가 추진한 법에 반대하는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운동으로 1982년 8월에 ‘부정의한 법 저지 행동 위원회DBAC’가 결성됐는데 케이프타운 일대의 노동조합 60곳과 시민기구 등 지역사회 단체들을 대표했다. DBAC는 이내 ANC 지지자들과 그 반대파로 양극화했다. 쟁점 중 하나는 [학생 단체] NUSAS나 [여성 단체] 블랙사시 같은 백인 자유주의 단체들의 DBAC 참여를 어떻게 볼 것이냐였다. 흑인 의식 운동 지지자들은 백인들의 참여를 반대했다. 그런데 DBAC 내 좌파는 그보다 더 멀리 나아갔는데,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입장을 대변하는 조직은 일절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입장에서는 NUSAS나 블랙사시뿐 아니라 ‘웨스턴케이프 상인단체’ 같은 흑인 중간계급 단체도 배제 대상이었다. 이런 논쟁에 끼고 싶지 않았던 노동조합들은 DBAC에서 철수했고 1983년 4월에는 ANC 지지자들도 탈퇴해서 UDF 웨스턴케이프 지부를 결성했다. DBAC에 남은 단체들은 이때 이름을 케이프행동연맹으로 바꿨다. CAL은 개헌 반대 선동에서 가장 적극적인 부문 중 하나였다. 정권 측이 컬러드들은 개헌의 가장 큰 수혜 집단에 속할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웨스턴케이프에서 개헌 문제는 특히 중요했다. 또한 CAL은 앞서 봤듯이 NFC 출범과, 사회주의를 명시한 ‘아자니아 민중 선언문’ 채택에서 주도적 구실을 한 단체 중 하나였다. CAL은 약 40개 단체가 모인 연방적 조직이고 참가 단체 중에는 시민기구 11~12개와 학생단체 ‘청년 아자니아 학생들SOYA’도 있다. 또한 CAL에는 여러 정치 경향이 모여 있다: 가맹 단체 중에 단결운동에 우호적인 단체들도 있지만(예컨대 ‘남부 지방 교육 조합’), 웨스턴케이프청년연맹처럼 CAL 중앙 지도부를 왼쪽에서 혹독하게 비판하는 단체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CAL이, 당면 요구를 위한 공동전선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CAL의 공보담당은 이렇게 말했다. “CAL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노동계급의 지도력에 대한 온전한 헌신, 그리고 사회주의만이 남아프리카/아자니아에서 급진적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사상이다.” CAL의 중핵에는 일군의 컬러드·인도인 정치 활동가들이 있는데, 이들은 오랫동안 단결운동에서 활동했었고 서로 공통된 이론적 입장을 갖고 있다. 이들의 핵심 인물인 네빌 알렉산더는 지금까지 남아프리카에서 출현한 재능있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서도 최상에 속한다. 알렉산더는 1953년 케이프타운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에 NEUM에 참여했다. 이후 1950년대 후반 독일에서 유학할 때 [독일 학생 단체] SDS에서 활동했고 유럽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접촉했다. 당시 유럽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제4인터내셔널 지도자] 미셸 파블로의 영향 아래에서 사회주의 투쟁의 주요 무대가 식민지 독립 혁명이 됐다고 여겼다. 중국과 알제리를 보며 영감을 얻은 알렉산더는 게릴라 전략을 지지했고 이 때문에 1961년 남아공에 돌아왔을 때 NEUM에서 회원 자격 정지 처분을 받게 된다. 알렉산더는 ‘전국 해방 위원회’ 출범의 한 축이었던 ‘비 치 찬 클럽’ 결성에 일조했다. 전국해방위원회란 급진적 자유주의자들과 좌파의 공동전선으로, 1960년대 초에 ANC처럼 파괴 작전을 벌였지만 역시 ANC처럼 보안경찰에 의해 신속하게 파괴됐다.(당시에 다른 트로츠키주의자들도 게릴라전 노선에 투항했다. 훗날 소웨토 항쟁의 역사가가 되는 바루치 허슨도 그런 사례다.) 알렉산더는 1963년 말에 체포됐고 로벤섬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는다. 석방 후에도 그는 (1979년 이전까지는) 정치 활동이 금지됐지만, 남아공 좌파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알렉산더의 주된 이론적 기여는 민족 문제에 관한 것이다. 감옥에서 쓰기 시작해서 1979년에 가명으로 출판한 책에서 알렉산더는, ANC/공산당과 비스탈린주의 좌파가 모두 문제를 혼동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논증한다. 그들 모두 ‘남아공에는 서로 구별되는 복수의 인종/종족 집단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첫째, 과학적으로 옹호할 가치가 없다고 알렉산더는 논증한다. 인종적 차이는 유전학적 근거가 없고, ‘종족성’이라는 개념 역시 현실과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종족성’은 ‘생물학적 인종’이라는 옛 표현의 부정적 이미지를, 문화라는 이름으로 세탁한 것에 불과하다고 그는 주장했다.) 둘째, 남아공이 인종이나 종족에 따라 나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면 뒤따르는 정치적 결과가 재앙적인데, 정권 측이 남아공에는 “복수의” 이질적 집단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정권은 ‘각 집단은 자결권을 갖는다’며 다수결 통치 원리를 거부하고, 각 반투스탄마다 ‘독립적인’ 부족별 통치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 더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알레산더는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이 단결해서 백인 지배를 타도하는 과정에서 남아공 민족이 출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책 제목이 《하나의 아자니아, 하나의 민족》인 이유다.
154 .
더 최근에 알렉산더는 자신의 관점을 더 분명하게, 그리고 더 발전시키려고 했다. 첫째로 그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다양한 저술(예컨대 예란 테르보른, 베네딕트 앤더슨)을 근거로 민족이란 역사적 구성물이고 계급투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자연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러므로 — 캘리니코스] 특정 시기에는 민족이 그 구성원들에게 대동소이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 이를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민족이란 발전하는(곧 변화하는) 자본주의의 생산력·생산관계를 기초로 이데올로기적·정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므로, 해당 사회구성체에서 서로 적대하는 계급들에게 민족은 각자의 계급 이데올로기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 둘째로, 남아공 민족을 그처럼 상반되게 인식하는 것에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함의가 있다. 남아공에 10개나 12개의 민족이 있다는 정권의 주장을 거부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저항 운동 안에서 팽배한 관점, 즉 남아공에 민족이 4개(백인, 컬러드, 인도인, 아프리카인) 있다거나 2개(백인과 흑인)라는 생각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2개 민족이 있다는 주장은 파산한 이론인 내부 식민지론에 근거한다.) 이 대목에서 알렉산더는 아주 단호하다. “‘종족 집단’이나 ‘민족 집단’ 같은 관점은, 열강이 분리주의 운동과 내전을 부추기기 위해 밀어넣는 칼끝이고 “종족 지도자들”의 기회주의에 무기를 공급하는 원천이다. 그런 의미에서 잉카타[줄루족의 자치 운동을 표방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적극 부역했다]야말로 이런 경고가 들어맞는 분명한 경우이지 않은가?”셋째로, 피부색·언어·종교·부족을 초월하는 단일한 남아공(또는 아자니아) 민족이라는 개념에는 그 계급적 구성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함축돼 있다고 알렉산더는 주장했다:
남아공 자본주의의 발전이 독특하기 때문에 인종적 차별과 인종적 평등의 문제, 즉 민족 억압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자본주의 구조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회주의) 체제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은 흑인 노동계급이다. 흑인 노동계급은 역사에서 대체불가능한 위치에 있고 그 때문에 모든 피억압·피착취 계급들을 단결시켜 인종적 자본주의를 폐지해야 할 과제가 주어진다. 그 과정에서 흑인 노동계급은 분열적 요소들을 약화시키고 모든 노동자와 그 동맹들을 단결시켜야 한다. 그 분열적 요소들은 각종 지배계급이 남아공 프롤레타리아를 혼돈 상태로 묶어두기 위해 정책적으로 고안하고 또 유지시키는 것들이다. 노동계급은 이를 넘어 대항 헤게모니 전략과 실천을 고안해야 한다. 그런 전략과 실천은 미래의 아자니아 민족이 수립될 기초를 예비하고 그 기초를 실제로 구성하게 될 것이다.
알렉산더의 글은 남아공 민족 문제를 다룬 글들 중 가장 풍부하고 또 가장 많은 영감을 준다. 남아공에 민족 문제가 존재한다는 그의 주장, 즉 인구 다수에게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민족 억압의 조건을 낳는다는 주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옳다. 또한 국가가 조장하는 “종족적”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가 힘껏 강조하는 것도 옳다: 콰줄루, 콰은데벨레 반투스탄 지역을 통치하는 자들이 최근 외부 ‘부족’을 상대로 자행한 포그롬을 생각해 보라. “분리주의 운동과 내전”의 위험을 알렉산더가 경고한 것은 훗날 불길하게 적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알렉산더의 접근법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이는 실천 상에서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알렉산더는 민족이란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라는 통찰에서 출발해서 알튀세르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에 관심을 보이는데, 그 이론들은 언어가 이데올로기를 표현하고 주입하는 데서 능동적 구실을 한다고 강조한다. 알렉산더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노동계급의 유기적 지식인들은, 흑인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기성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해체하는 작업과 새로운 담론을 창조하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동원하는 이론들이 관념론적 경향을 띤다는 것(다시 말해, 현실을 ‘담론’ 속에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할 위험)을 인식하고 있다고 분명히 밝힌다. 그러나 그보다 더 구체적인 문제가 있는데, 혁명적 의식의 발전을 사실상 이데올로기 투쟁의 산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는 혁명적 의식의 발전이란 본질적으로 “유기적 지식인”들이 “새로운 담론”을 만들고 그것을 대중에게 심어 주는 이데올로기 투쟁 과정이라고 본다. 이런 선전주의적 습성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CAL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알렉산더 자신도 ‘남아공 고등교육 위원회’의 케이프타운 지부를 이끌면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열고 있다. 알렉산더가 이런 “이데올로기주의”를 품고 있다는 점은 그가 민족 투쟁과 계급투쟁을 연결시키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알렉산더는 하나의 민족을 이룰 필요와 이데올로기 투쟁을 강조하는데 어쩌면 이것이 그가 흑인 의식 운동에는 덜 비판적이고 우호적인 이유일지 모른다. 실제로 그의 책 《하나의 아자니아, 하나의 민족》에서 흑인 의식 운동을 다루는 대목은 (그 운동의 오류와 혼란을 비판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우호적이고, 흑인 의식 운동이 흑인 부역자에 관한 계급 분석을 서서히 발전시키고 있다며 의의를 사 준다. “그런 계급적 관점을 갖고 있다면, 두 민족 이론의 흔적은 장차 씻은 듯 사라질 것이고, 인종적이지 않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단일 국가에 관한 이론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159 . 이는 때때로 매우 기괴한 정치적 오판으로 이어졌다 — AZACTU를 노동조합 운동의 좌파라고 보는 것이 대표적이다! 160
알렉산더가 흑인 의식 운동을 이렇게 높이 사는 것을 보면 CAL이 NFC 안에서 AZAPO와 동맹 관계에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알렉산더는 이렇게 주장한다: “AZAPO가 정권에 일절 협력하지 않는 것, AZAPO의 대중 기반, 또 AZAPO의 반反제국주의를 보면 … [원문 그대로의 인용이다 — 캘리니코스] 자유주의 반대에 매우 진지함을 알 수 있”고 이는 곧 “반자본주의”이다 이처럼 AZAPO에 매우 너그러운 태도의 뒷면에는 CAL이 UDF에는 매우 적대적이라는 점이 있다. 이런 적대감이 부분적으로는 UDF 웨스턴케이프 지부가 생겨난 구체적 상황, 즉 DBAC에서 분열해 나간 것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알렉산더가 공동전선을 좀 이상하게 이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알렉산더는 세 종류의 단결이 있다고 본다. 그중 첫째는 “전술적 단결”로, 상이한 두 조직이 동일한 전술을 채택하는 것이라고 본다. 둘째는 “전략적 단결”로, “둘이나 그 이상의 조직이 원칙과 투쟁의 상이 다르지만 특정 국면에서 정치적 목표를 공유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 둘째 사례에 공동전선이 속하지만 민중전선은 속하지 않는다고 봤는데, 민중전선의 경우에는 “자본가 계급의 이런저런 부문(대체로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이 포함된 계급들의 블록”이라는 이유였다. 셋째로 “원칙 상의 단결”이 있는데 이는 “상이한 조직들이 하나가 돼 같은 원칙을 공유하고 실천적으로는 하나의 정당처럼 행동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접근법에는 이견을 제기할 것이 대단히 많다. 우선, 단결을 세 종류로 구분하는 방법이 그다지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 알렉산더가 “전술적 단결”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단결이 아닌데, 그가 제시하는 사례만 봐도 그렇다. AZAPO와 잉카타는 둘 다 지방의회 선거를 보이콧했지만 두 조직은 이를 위해 실천적으로 어떠한 협력도 할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알렉산더가 상정하는 공동전선은 레닌이나 트로츠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지속적인 결합을 전제로 한다. 이 점은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공동전선이 성공을 거두면, 그 전까지는 서로 반목하거나 경쟁하던 단체들이 전보다 가까워지고 심지어 하나의 단체로 합쳐지기도 한다. 공동전선의 전반적 정신은, 동일한 전략적 목표를 위한다는 틀 안에서 상대의 관점을 용인한다는 것이다.”결국 알렉산더는 ‘전략적 단결’이 ‘원칙 상의 단결’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볼셰비키나 초기 코민테른의 이론·실천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당시의 공동전선은, 다른 문제에서는 서로 치열하게 반목하는 조직들이 당면 투쟁 과제를 위해 실천적으로 협력하는 것이었다 — 예컨대, 케렌스키와 볼셰비키가 코르닐로프에 맞서 공동전선을 구축한 것이 그렇다. 더욱이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공동전선은 그 안에서 협력하는 단체들 사이의 투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레닌·트로츠키·그람시는 공동전선으로 그런 투쟁이 격화된다고 주장했다. 공동전선이란 혁명가들이 혁명적이지 않은 지도자들보다 실전적으로 더 일관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상대방의 기층 지지자들을 끌어당기기 위해 사용하는 전술이다.
163 그러나 레닌이 멘셰비키를 비판한 것은 멘셰비키가 혁명 중에 지도적 구실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게 넘겼기 때문이지, 멘셰비키가 그들과 공동전선을 꾸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1920년 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레닌은, 공산당들이 식민지 부르주아지들의 “혁명적-민주주의” 운동과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중전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은,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지의 한 부문과 전략적 동맹을 맺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민주주의적” 자본의 이익에 종속시키게 된다는 것을 겨냥한 것이었지, 부르주아 조직과는 어떤 경우에도 공동전선(알렉산더가 사용하는 의미가 아니라 원래 의미의 공동전선)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둘째로는,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과는 어떤 경우에도 협력하면 안 되는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초기 코민테른이 공동전선을 개발했던 이유는 각국에서 공산당이 사회민주주의 정당 — 레닌은 이를 부르주아적 노동자 정당이라고 불렀다 — 의 지지자들과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누군가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대자본의 공공연한 도구는 아니지 않냐고 대꾸한다면, 그건 ANC도 (아직까지는) 마찬가지라고 답하겠다. CAL은 레닌이 멘셰비키를 비판한 것을 들어 자신을 정당화한다.CAL이 이처럼 단결 문제에서 혼란스러운 관점을 갖고 있고 흑인 의식 운동에는 놀라우리만치 관대한 태도를 가지면서 생겨난 효과는, CAL이 AZAPO를 상대로는 장기적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적극적이지만(나중에 하나의 조직이 될까?), UDF를 상대로는 진지한 공동전선 활동이 가능하지 않다고 배제해 버리는 것이다. ANC가 흑인 대중에게 끼치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이 아주 크다는 것을 감안하면, CAL의 이런 입장은 아주 심각한 약점이라 할 수 있다.
나의 비판이, UDF 지지자들과의 공동 행동의 어려움을 너무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ANC/공산당 지도부가 내부 반대파를 대하는 태도가 비민주적이고, 종종 스탈린주의적이고, 때때로 살인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은 분명 그들과 공동 행동을 종종 무척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러나 그런 공동 행동이 가능한 영역이 한 곳 있으니 바로 독립노조다.
불행히도 CAL의 전략에서 노동조합들은 그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웨스턴케이프 노동운동이 취약하고 보수적인 탓만은 아니다. CAL이 포사투 좌파의 경제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CAL 자신의 시선은 확고하게 지역사회를 향하고 있다. CAL 자체가 시민기구 등 지역사회 단체들의 연맹체이다. CAL의 청년 조직인 SOYA는 1985년 고등학교 투쟁에서 매우 능동적이었고 예컨대 ‘웨스턴케이프 학생 행동 위원회WESAC’를 광범한 연대체로 건설했다.(초기에는 UDF와 흑인 의식 운동 지지자들을 포함했다.)
물론 혁명가들이 그런 투쟁에 참여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CAL은 전략적 강조점 자체를 지역사회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CAL이 이런 태도를 정당화하는 방식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인 듯하다: ‘노동자들은 공장뿐 아니라 타운십에도 있고, 지역사회 단체들은 노동조합 투쟁을 포함할 뿐 아니라 그밖의 쟁점도 다룬다.’ 그 두 가지는 분명 진실이지만, 사회를 바꿀 힘이라는 문제를 어물쩍 넘어간다는 문제가 있다. 노동자들은 국가를 전복할 정도의 집단적 힘을 오직 광산과 공장에서만 갈고닦을 수 있다. 지역사회 투쟁은 그간 숱하게 분출해서 국가를 흔들었지만, 우리가 앞서 봤듯이 매번 억제되고 결국 분쇄됐다. 핵심 질문은 흑인 노동자들이 산업 영역에서 발전시키고 있는 위력을, 어떻게 정치적 목적을 위해 발휘하도록 만드느냐 하는 것이다.
CAL은 이 쟁점을 놓치고 있다. CAL은 경험 많은 활동가들과 청년 선동가들을 인상적인 간부층으로 거느리고 있는 조직이다. 또한 이론적인 면에서 창의적이고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저항 운동의 정치에 실질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앞서 제시한 증거들은, CAL이 단결운동의 선전주의와 아직 완전히 결별하지 못했다고 말해 준다. 그래서 CAL은 민중주의의 좌파적 버전으로 후퇴할 위험에서 자유롭다고 보기 어렵다.
남아공에서의 당과 계급
남아공의 노동조합 좌파와 정치적 좌파는 서로 장점과 약점을 마치 거울상처럼 뒤집어서 갖고 있다. 노동조합 좌파는 흑인 노동계급을 조직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한다. 그러나 코사투가 ANC/UDF의 정치적 부속물이 되지 않도록 해 줄 정치적 대안을 어떻게 건설해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다. 《잉카바》 그룹·단결운동·CAL은 노동조합의 이런 정치적 약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지만, 정치 조직을 경제적 계급투쟁과 대립시키는 방식으로만 제기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에게 정치 조직이란 언제나 작업장 바깥에 있는 것이다. UDF의 일부로 활동하든, NUM이나 CAL처럼 독자적 조직으로 활동하든 모두 타운십에 기반한 운동이다. 이런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좌파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개념 두 가지를 이해하고 또 적용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 두 가지란 대중파업과 혁명 정당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위대한 저작 《대중파업》은 남아공을 다루는 마르크스주의 글들에 종종 인용되지만, 그 중요성이 충분히 인식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지금 남아공 투쟁에서 빠진 것이 바로 대중파업이다. 결근 투쟁은 룩셈부르크가 말한 의미의 대중파업이 아니다. 결근 투쟁은 타운십에 기반한 행동이 확장된 것이고, 노동자들 자신이 주도해서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작업장 조직에 기초하지도 않는다. 이런 비판은 25년 전에 처음 제기된 것이지만 오늘날의 결근 투쟁에도 분명히 적용된다. 최근의 투쟁들은 지역사회 단체들의 주도 아래 시작되고, (포트엘리자베스의 경우에서 특히 분명했듯이) 그 집행도 그 단체들이 하고 있다.
룩셈부르크에게 진정한 대중파업이 중요했던 것은 노동자들의 자주적 활동에서 시작된다는 것, 노동계급의 ‘후진적’ 부위나 미조직 층이 투쟁으로 빨려들어올 뿐 아니라 종종 그들 자신이 대중파업을 촉발한다는 것, 부문의 경계를 넘어 프롤레타리아 전체를 단결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키는 벽을 허물고 국가 권력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었다.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의 상호작용은 대중파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인데, 예컨대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이 노동자들의 자신감·조직·의식을 고양시켜 더 광범한 정치 운동을 강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대중파업의 역사는 1905년 러시아에서 시작돼(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을 쓴 계기였다) 1980~1981년 폴란드까지 이어진다. 대중파업은 소비에트가 등장할 토양을 마련하고, 노동자들이 국가 권력 문제를 중심으로 단결하도록 해 준다.
오늘날 남아공의 투쟁에는 한 가지 모순이 있는데, 타운십 투쟁이 급진화해서 국가와 격렬하게 충돌하는 경향을 띠는 반면 노동자 운동은 노동조합 투쟁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순이 해소될 방식으로는 세 가지가 가능하다: 타운십 봉기가 일시적으로 붕괴하는 것(1976년과 1980년에 그랬다), 정권이 ANC와 협상에 나서는 것(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낮다), 대중 파업으로 진정한 혁명적 상황을 만드는 것. 그런 혁명적 대중파업이 언제 일어날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벌어지리라는 사실 자체는 확실해 보인다. 남아공 자본주의가 처한 구체적 상황(남아공 자본주의가 처한 구조적 위기, 심각한 난관에 부딪히지 않을 부르주아적 해결책의 부재, 강력하고 억압받는 노동계급의 존재)이 미래에 흑인 프롤레타리아의 정치 투쟁이 폭발적으로 분출할 환경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165 가 혁명을 지지하도록 만들고 대중을 무장시키는 것 — 를 떠안지 못한다면, 가장 위대한 노동자 운동도 패배할 것이다.
대중파업으로 권력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과, 그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폴란드 연대노조의 경험(많은 남아공 좌파가 이를 연구한다)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혁명적 정당이 노동계급의 모든 대중 조직 안에서 분투해서 다수가 권력 장악에 동의하도록 만들지 못하고, 무장 봉기를 성공시키는 데에 필요한 과제 — 가장 중요한 과제는 지배계급 진영의 모순을 파고들어 병력의 상당수 (현역 군인의 20퍼센트, 남아공 정규 경찰의 50퍼센트 가까이가 흑인이다)남아공 사회주의자들이 당과 계급의 관계에서 잘못 개념화하고 있는 것이 구체적으로 두 가지 있다. 첫째는 혁명적 정당에 관한 전통적 주장이 남아공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사실상 여기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다: 원래 혁명적 정당이 필요한 이유가 개혁주의 관료들이 노동조합 운동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인데, 남아공 노동조합들에서 그런 패턴이 반복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유럽중심주의’ 사고라는 것이다.
166 남아공의 노동조합들은 이 둘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조건에서 발전해 왔다. 남아공 자본주의는 깊은 구조적 위기를 겪고 있고, 그 탓에 질질 끄는 위기에서도 초저임금 노동에 계속 기대야 하는 처지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날 남아공이 혁명적 상황인 것도 아니다.
노동조합 운동에는 여러 상이한 모습이 있다는 말은 물론 사실이다. 토니 클리프와 도니 글럭스틴은 영국 제국주의가 확장하고 있는 조건에서 발전한 고전적 노동조합 관료층과, 혁명기 러시아의 노동조합을 대조한 바 있다. 후자는 1917년 경제와 정치의 구분이 무너지고 소비에트와 혁명적 정당이 대중적 규모로 이미 존재하던 조건에서 등장했다.167 관료화 경향은 노동조합의 본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자신의 조건을 지키거나 개선하기 위해 만드는 대중 조직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자신을 부정하는 제도를 수용하는 상황에서 등장한다. 즉, 노동자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거나 그럴 만한 자신감이 없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이렇게 스스로 억눌려 있는 한, 이들의 투쟁은 자본과 모종의 타협을 이루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그런 타협을 어떤 조건에서 이룰지, 즉 노동자들이 착취당할 조건을 협상할 관료층이 필요해진다.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노동조합 관료층이 등장하는 것이다.
노동조합 관료층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만 나타나는 현상도 아니고, (레닌이 틀리게 주장한 것처럼) 제국주의의 초과이윤으로 먹고사는 노동귀족층 가운데서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독립노조를 정직한 눈으로 지켜보는 이라면 그 안에 관료화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관료화 경향은, 노동조합 지도부 내의 중간계급적 인물이 있어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려고 노동조합을 이용해 먹는 경우(불행히도 남아공에는 그런 역사가 매우 길다)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금속노조처럼, 매우 전투적이고 현장조합원에 의한 통제를 강조해서 노동조합 운동 내 좌파라고 (옳게) 여겨지는 경우에도 관료화 경향은 존재한다.
에디 웹스터는 금속노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관심 갖는 문제가 아닌 것들은 지도부 수준에서, 그리고 그 지도부 성원이 아닌 사람들의 참여는 제한된 채로 결정된다는 증거가 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 준 사례는 노동조합을 정부에 등록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이 쟁점은 처음에 전국집행위원회에서 논의됐고, 전국 조직자가 찬반 토론을 이끌었다. 이후에는 각 지회집행위원회가 이 쟁점을 다루게 됐고 일부 대표자들이 직장위원들과 토론을 했다. 최종 결정은 전국집행위원회에서 내려졌는데 그 회의에서는 조건부로 등록하자는 쪽으로 다수 의견이 형성됐다. 1979년 연례총회에서도 이 쟁점이 다뤄졌지만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 당시 겨우 200명만 참석했다. 이처럼 몇몇 쟁점 결정 과정에서 소수의 사람들로 참가가 제한되는 경향은 등록 노동조합이 되고 난 뒤에는 더 심해졌다.독립노조가, 국가가 촉진하고자 하는 단체교섭 과정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됐으니 그런 경향은 향후 더 커질 공산이 있다. 금속노조가 1983년에 [정부 산하] 산업위원회의 제조업 부문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면서 (십중팔구 전술적 측면에서는 정당하겠지만) 노동조합 지도부와 기층 조합원 사이의 거리가 지금보다도 더 멀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물며 광원노조처럼 (금속노조와 달리) 기층에서부터 조직을 차곡차곡 건설하지 않은 데다 광산회의소와의 대결을 조심스레 피해 온 경우에는 그런 위험이 더 커진다. 노동조합들이 사용자들의 영향력에 대항하려고 산업재판소 같은 국가 기구에 기대는 경향도 관료화를 가속화할 공산이 있다.
물론 이런 경향을 상쇄하는 경향도 있다. 하나는 현장조합원들이 강력한 작업장 조직을 건설하는 흐름이 광범하다는 것이다. 그 흐름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서로 다른 공장에 속하는 노동자들을 아우르는 조직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속노조 직장위원들이 여러 지역에서 그런 직장위원회를 건설했고, 포사투에서 1984년까지 22개가 생긴 지역조직들도 그런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런 조직들은 산업 경계를 넘어 직장위원들을 한데 모으고 있다. 이런 지역조직들은 코사투 하에서 계속 존속하고 또 발전할 것으로 예상되고, 아래로부터 계급 전체의 행동을 조율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 상쇄 경향은 남아공 자본주의의 처지이다. 다수인 흑인에게 시민권을 계속 인정하지 않는 것과 주요 산업이 이주 노동에 기대야 한다는 점 때문에 남아공에서는 정치와 경제 사이의 경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서구 개혁주의의 핵심 조건)가 어렵다. 그래서 노동조합들은 정치 문제에 관여하도록 끊임없이 떠밀린다: 실제로 지금도 파업이 벌어지면 많든 적든 국가와 대결하는 국면이 언제나 펼쳐진다. 이런 상황은 노동조합 관료층이 단일한 세력으로 뿌리내리려 할 때 난관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런 상쇄 경향들이 있다고 해서, 관료층의 등장이라는 노동조합 운동의 본질적 위험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폴란드 연대노조 사례는, 취약하고 아직 형성기에 있는 개혁주의 층도 거대한 운동의 발목을 재앙적으로 잡을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여기서 사활적으로 중요한 것은 필요한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다: 노동자 정당을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 말이다.
170 어떤 이들은 ‘사회주의 조직자’의 주장을, 영국적 관점을 단순히 남아공 현실에 덧씌우려는 시도에 불과하다며 쉽게 기각할지 모른다: ‘사회주의 조직가’는 어딘가 들어갈 정당이 필요하다고 봐서 남아공판 노동당을 건설하려 하는 것인 반면, 《잉카바》 측은 (ANC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음에도) 그런 당이 ANC라는 형태로 이미 존재한다고 본다고 말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에 기반한 정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남아공 내에서도 반향을 얻고 있다. 금속노조의 트란스발 사무국장 모세 마예키소는 그런 생각을 지지하며 지난 8월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네, 그런 당을 만들 것입니다. … 내년에요.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 논의가 한창입니다.” 171 마예키소는 분명 너무 낙관적이었다: 코사투 결성 과정에서 드러난 노동조합 좌파의 정치적 패배를 감안하면 노동조합들이(또는 그중 한 부문만이라도) 노동당 창당에 성공할 가능성은 상당히 낮아 보인다.
남아공 사회주의자들이 잘못 개념화하고 있는 두 가지 중 둘째 것이 바로 이 대목에서 중요해지는데, 그런 정당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영국 노동당 좌파의 모임인 ‘사회주의 조직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노동자 정당을 만들 가장 좋은 길은 노동조합에 기반하는 것이다. 그런 정당의 형태는 영국 노동당과 비슷할 것이다.”172 왜냐하면 노동당 같은 당으로는 흑인 노동자들의 모순적 의식, 즉 가장 전투적인 노동자조차 그의 의식 속에는 노동자주의와 민중주의가 뒤섞여 있다는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정당이 실제로 창당된다면 중요한 변화가 될 것이고, 사회주의자들은 그 당과의 관계 문제를 매우 진중하게 다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당 모델을 옹호하는 한 인사가 말하듯 그런 당의 출범이 “남아공 노동자 운동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정적 한 걸음”인 것은 아니다.173 그리고 이 점이 노동당 모델의 앞길에 결정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처럼 광범한 정치 스펙트럼을 모두 대변하는 당으로 과연, 현재 흑인 노동계급 내에서 우세한 민중주의 이데올로기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노동계급의 선진 부위뿐 아니라 후진 부위까지 모두 대변하는 그런 정당으로는, 현재 부상하고 있는 노동조합 관료층처럼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 그칠 것이다.
노동당 같은 당에는 흑인 프롤레타리아의 불균등한 의식(부족주의부터 혁명적 사회주의까지 실로 상이하다)이 빠짐없이 반영될 것이다. 이 점은, 노동당 모델을 주장하는 이들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사회주의 조직자’는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많은 젊은 직장위원들은 UDF 또는 … NFC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남아공에 필요한 노동자 정당은 따라서 노동조합에 기초할 수 없다. 물론 노동조합은 남아공에서 사회주의 좌파가 발전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자본을 상대로 하는 일상적 투쟁과 그것을 대중파업으로 발전시키는 것, 이 과정이야말로 흑인 노동자들이 혁명에 필요한 조직과 자신감, 의식을 갖추도록 해 줄 것이다. 남아공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주되게 활동해야 할 공간은 독립노조들이다. 앞서 다뤘듯이 CAL 같은 단체들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게 활동하지 않는 것은 크나큰 실책이다.
그러나 미래의 혁명적 노동자 정당은 (앞서 다뤘듯이) 노동조합에 기초한 대중 정당에서 시작할 수 없다. 오히려 극히 소수파, 즉 흑인 노동계급이 자본을 혁명적으로 타도해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 경험을 보면, 이 소수는 대중적 투쟁의 시기에 성장하고 또 프롤레타리아의 더 광범한 층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럴 수 있으려면 그 소수는 노동자 투쟁과 체계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조직돼야 하고, 계급의식이 고양될 수 있는 파업 운동에 스스로 뛰어들어야 한다.
결국 오늘날 남아공의 주요 과제는 트로츠키가 ‘간부의 시초 축적’이라고 부른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이 노동조합, 지역사회 단체, 기성 좌파 단체, 학계의 상아탑 등 어디에 있건) 한데 모여서 공동 활동을 위한 기초를 이끌어내도록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명료해져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이 효과적으로 공동 활동을 벌이려면 이론적으로 동일한 관점을 공유해야 한다. 그 말은 이 글에서 다룬 각종 뜨거운 쟁점들 — 남아공 자본주의의 성격 문제, 민족 억압의 존재 문제,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 문제, 흑인 노동계급의 중심성 문제, 혁명 정당의 필요성 — 에서 의견 일치를 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언뜻 보면 관련성이 떨어지지만 여전히 정치적 명확성이 필요한 문제들이 더 있다. 남아공 좌파는 대체로 예컨대, ‘사회주의’ 나라들의 문제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폴란드 같은 나라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스탈린주의에 원칙있게 반대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심지어 CAL처럼 이론적 수준이 높은 단체조차 소련 사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쟁점에는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함의가 있다: 동유럽권에 국가 소유 경제가 있다는 이유로 그 나라들을 사회주의나 ‘탈자본주의’라고 보는 것은, 사회주의를 노동자 권력의 동의어로 이해하는 것(남아공 좌파 대부분의 견해)과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이론적 명료함을 다듬으려 할 때, 남아공 내부의 쟁점만 다룰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토론이 무한정 이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토론은 공동의 실천 활동을 합의하기 위해 마무리돼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지금까지 주장한 견해들을 서로 토론하고 또 발전시키는 것이, 사회주의 조직의 결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모두 헛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조직은 아무리 작을지라도 혁명적 노동자 정당의 기초를 놓을 수 있는 반면, 그런 조직이 없다면 남아공의 흑인 프롤레타리아가 보여 주는 거대한 잠재력은 낭비되고 말 것이고 지난 10년의 영감 가득한 반란은 패배나 배신으로 귀결될 것이다.
남아공에는 풍부한 저항의 역사가 있고 그곳 좌파는 활력 있고 창의적이다. 1970년대 전반 이래로 남아공에서 독립적인 노동자 운동이 부상한 것은 역사적 기회를 만들어 냈다. 바로 아파르트헤이트의 참상을 일소하고, 인종 지배 체제를 지탱하는 자본주의 체제도 그와 함께 날려버릴 기회 말이다. 이 기회를 붙잡으려면 좌파는 이제 한 걸음 더 전진해야 하고 노동자 정당을 만들기 시작해야 한다. 남아공 동지들의 과제를 다른 나라 사회주의자들이 대신해 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우리도 혁명적 조직 건설에 필수적인 정치적 명료화 과정에 도움을 줄 수는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것이 이 글을 쓴 이유이다.
주요 단체들
이 논문에는 많은 단체들이 등장하는데, 자주 언급되고 비중있게 다루는 단체들은 독자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추렸다. 찾아보기 쉽도록 본문에서 알파벳 약어로 쓰이면 이하에서도 알파벳 약어로 소개했다. ─ 옮긴이
ANC: ‘아프리카민족회의’. 대표적인 민중주의 단체로, 넬슨 만델라가 그 지도자이다.
UDF: ‘연합민주전선’. ANC가 중심이 돼 구성한 전국적 운동들의 전선체.
회의동맹CA: ANC가 주도하고 인도인회의, 컬러드회의, 노동조합회의, 민주주의자회의 등이 참여하는 연대체.
MK: ‘움콘토 웨 시즈웨’. ANC의 무장 조직.
남아공공산당: 2단계혁명론에 따라 ANC와 점차 융합된 스탈린주의 정당.
SACTU: ‘노동조합들의 남아공회의’. ANC가 탄압으로 망명가기 전까지 ANC와 공산당이 남아공에서 주도했던 노동조합 연대체.
AZAPO: ‘아자니아 민중 조직’. 민중주의 경향이지만 ANC와 달리 ‘흑인 의식’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단체. ‘흑인 의식’ 이데올로기에서는 좌파적 백인과의 협력도 거부한다.
NFC: ‘전국포럼위원회’. AZAPO가 중심이 돼 구성한 전국적 전선체로 UDF에 대당하는 성격이 있다.
CUSA: ‘남아공노동조합협의회’. ‘흑인 의식’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노동조합들의 연대체.
AZACTU: ‘아자니아 노동조합 연맹’. ‘흑인 의식’ 노조들의 연대체이지만 CUSA보다 작다.
포사투FOSATU: ‘남아공노동조합총연맹’. ANC/공산당에서 독립적으로 부상한 흑인 독립노조들의 연대체로 CUSA/AZACTU와 달리 백인 조직자들이 주요하게 활동했다. 노동조합 좌파들의 주요 기반이다.
코사투COSATU: ‘남아공노동조합회의’. 포사투와 ANC 지지자들, 그리고 CUSA 소속이었던 광원노조가 손잡고 1985년 11월에 출범시킨 “슈퍼노총”.
MWT, 단결운동, CAL: 남아공 트로츠키주의 전통에서 유래한 혁명적 정치 운동들.
잉카타Inkatha: 아파르트헤이트 분류법에서 아프리카인 종족 중 하나인 ‘줄루족’의 자치 운동. 그 지도자인 부텔레지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보다는 줄루족의 지도자로서 권력을 키우는 것을 더 우선시했다.
TUCSA: ‘남아공노총’. 백인이 다수인 노총 중 한 곳.
주
-
출처: Alex Callinicos, ‘Marxism and the revolution in South Africa, International Socialism, 31 (Spring 1986).
↩
-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남아공 인구를 4개의 인종 집단으로 구분한다 ― 백인 450만 명(15퍼센트), 컬러드Coloured 277만 명(9퍼센트), 인도인 87만 명(3퍼센트), 아프리카인African 2270만 명(73퍼센트). 아프리카인은 다시 부족에 따라 10개의 홈랜드Homeland/반투스탄에 속한다고 세부 분류된다. 대부분의 남아공 좌파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이런 분류 방식이 근거가 없고, 인종차별적이고, 분열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라며 인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남아공 좌파들은 (근본적 계급 대립 외에는) 백인과 흑인의 대립이 있을 뿐이라고 보고, 여기서 ‘흑인’은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모든 사람을 포괄한다고 본다. 이 글에서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아프리카인, “컬러드”, “인도인”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각각의 집단이 유전적 또는 민족적으로 별개라는 주장을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인용부호를 생략하고 쓴 것이라고 읽어 주길 바란다. ↩
- Business Day, 10 January 1986. ↩
- 이에 대한 더 상세한 분석은 다음을 보라: A Callinicos, ‘South Africa: Between Reform and Revolution?’, Socialist Worker Review, September 1985; N Lambert, Socialist Worker, and C Green, ‘South Africa: The Struggle Today’, ibid, 25 January 1986. ↩
- 특히 다음을 보라: A Callinicos and J Rogers, Southern Afnca after Soweto (London 1977), and A Callinicos, South Africa: the Road to Revolution (London 1985). ↩
- 남아공 투쟁을 다룬 역사서 중 돋보이는 것이 2개 있는데 다음과 같다: J J and R E Simons, Class and Colour in South Africa 1850-1950 (Harmondsworth 1969) and E Roux, Time Longer than Rope (Madison 1972). 이 중 전자가 더 풍부하고 노동계급 정치에 더 집중하고 있지만, 전반적 관점은 저자 2명이 전직 공산당 지도자였다는 점을 반영한다. M Benson, The Struggle for a Birthright (Harmondswort 1966)는 ANC를 찬양하는 관점에서 쓰인 역사서이다. T Lodge, Black Politics in South Africa since 1945 (Johannesburg 1983)은 더 나중 시기를 좀더 균형 있게 다룬다. ↩
- 이 과정에 대한 개괄로는 다음을 보라: J Grest and H Hughes, ‘State Strategy and Popular Response at the Local Level’, South African Review II (이하 SAR II) (Johannesburg 1984). ↩
- South African Review I (이하 SAR I) (Johannesburg 1983). ↩
- 이런 변화를 잘 요약한 것으로는 다음을 보라: International Defence and Aid Fund, ‘Reshaping the Constitution of Apartheid’, Briefing Paper 16, May 1985. ↩
- ‘Cape Action League: Challenging the Cliches’ (A Abrahams와의 인터뷰), Work in Progress (이하 WiP) 35, February 1985, p 19. ↩
- 다음에서 재인용: H Barrell, ‘The United Democratic Front and National Forum’, SAR II, p 13. ↩
- Loc. cit. ↩
- I Silver and A Sfarnas, ‘The UDF: a “Workerist” Reponse’, South African Labour Bulletin (이하 SALB) 8: 8/9, September/October 1983, pp 100-01, 103. ↩
- 다음을 보라: ‘Building People’s Power’, Supplement to State of the Nation, October/November 1985. ↩
- 다음의 인터뷰: SALB 9:2, November 1983, p 80. ↩
- D Innes, ‘The Freedom Charter and Workers’ Control’, SALB 11:2, October/December 1985, p 37. ↩
- N Mandela, ‘In Our Lifetime’, Liberator, June 1956, 다음에서 재인용함. South Africa’s Impending Socialist Revolution (London 1982) p 157. ↩
- ‘Strategy and Tactics of the South African Revolution’, in A La Guma, ed., Apartheid (London 1972) p 179. ↩
- 경험 많은 공산당 지도자가 쓴 다음 저작은 그 당의 공식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Michael Harmel, ‘A Lerumo’, Fifty Fighting Years (London 1971) 다음에서 더 유용한 사료를 찾을 수 있다. Simons and Simons와 South African Communists Speak (이하 SACS) (London 1981). 남아공공산당의 역사를 학술적이고 비판적으로 다룬 연구에 대한 갈증은 Tom Lodge의 연구가 출판되면 대부분 해소될 것이다. ↩
- 다음을 보라: Simons and Simons, ch 13 and 14. ↩
- SACS, pp 93-4. 당시 “원주민”은 오늘날 “아프리카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공식 용어였다. ↩
- 다음을 보라: H lsaacs, The Tragedy of the Chinese Revolution (Stanford 1974)[국역: 《중국 혁명의 비극》, 숨쉬는책공장, 2016], and L Trotsky, On China (New York 1976), The Third International after Lenin (New York 1970) and Permanent Revolution and Results and Prospects (New York 1970)[국역: 《연속혁명, 평가와 전망》, 책갈피, 2003]. ↩
- 번팅이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와의 교류 없이 독자적으로 단계혁명론에 대한 비판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하는 연구로는 다음을 보라: Tony Southall, ‘Marxist Theory in South Africa until 1940’ (MA thesis, University of York, 1978) pp 26--33. ↩
- 《아프리카 공산주의》(이하 AC) 78호(1978년 1/4분기)에 실린, 공산당의 지도적 이론가 “투상”이 《소웨토 항쟁 이후의 남아공》을 서평한 논문 ‘남아공 혁명에서의 계급과 민족’은 그런 태도의 본보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논문에는 다른 비방도 많지만 [그 책을 쓴] 나와 존 로저스가 미국 제국주의의 첩자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답변할 기회를 달라고 편집부에 요청했지만 거부됐다. ↩
- ‘Toussaint’, ‘A Mirror of Our Times’, AC 100, First Quarter 1985, p 23. ↩
- SACS, pp 313, 314, 307-8. ↩
- Ibid, p 300. ↩
- ‘Strategy and Tactics’, p 195. ↩
- J Slovo, ‘ “Reforms” and Revolution in South Africa’, Sechaba, February 1985, p 8. ↩
- Ibid, p 6. ↩
- 남아공 자본주의 고유의 특징과 구조적 모순을 요약한 것으로는 다음을 보라: A Callinicos, Southern Africa after Zimbabwe (이하 SAAZ) (London1981) ch 4. ↩
- SACS, pp 304-5. ↩
- SACP Central Committee, ‘A United People will Defeat the Enemy’, AC, p 96, First Quarter 1984, pp 48-9. See also ‘Makelekelathini’, ‘We Must Win Over the African Middle Class’, ibid 100, First Quarter 1985. ↩
- SACS, p 311. 노동계급의 “특별한 구실”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Strategy and Tactics’, pp 202-3. ↩
- R Suttner, ‘The Freedom Charter- the People’s Charter in the 1980s’, Free Azania 2:1, August 1985, p 41. ↩
- J Slovo, ‘South Africa — No Middle Road’, in B Davidson et al, Southern Africa: the New Politics of Revolution (Harmondsworth 1976). ↩
- 다음을 보라: J V Stalin, On the Opposition (Peking 1974). ↩
- SACS, p 311. ↩
- ‘Toussaint’, ‘A Trade Union is not a Political Party’, AC, Second Quarter 1983. ↩
- Africa Confidential, 3 July 1985. ↩
- T Lodge, ‘The African National Congress, 1983’, SAR II, p 25. ↩
- 예컨대 다음을 보라: C Bundy, The Rise and Fall of a South African Peasantry (London 1979). ↩
- M Lipton, Capitalism and Apartheid (Aldershot 1985) p 379. ↩
- R Bolus and N Muller, ‘The Drought and Underdevelopment in the Transkei’, SAR II, p 291. ↩
- Lipton, loc. cit. ↩
- O R Tambo, ‘Render South Africa Ungovernable’, Sechaba, March 1985, p 12. ↩
- 다음에서 재인용. P Storey, ‘South African Perspectives: Workers’ Revolution or Racial Civil War’, Supplement to lnqaba ya Basebenzi 16/17, May 1985, pp 44-5. ↩
- ‘Take the Struggle into the White Areas!’, Sechaba, December 1985, p 2. ↩
- 다음을 보라: B Hirson, Year of Fire, Year of Ash (London 1979) chs 11 and 12. ↩
- SOYA Bulletin No 3. ↩
- 다음을 보라: D Innes, ‘Monopoly Capitalism in South Africa’, SAR I. ↩
- 이 전통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을 보라: G M Gerhart, Black Power in South Africa (Berkeley and Los Angeles 1978). ↩
- 재인용, ibid, p 60. ↩
- S Biko, I Write What I Like (London 1978) p 89. ↩
- Ibid, p 97. ↩
- 흑인 의식 운동에 대한 비판적 평가로는 다음을 보라: Hirson, chs 15 and 16, and SAAZ, pp 146-50. ↩
- A Survey of Race Relations in South Africa, 1978 (Johannesburg 1979) pp 32-3. ↩
- 다음을 보라: Barren, pp 11-12. ↩
- “아자니아”는 PAC, 흑인 의식 운동, CAL이 남아프리카를 지칭하는 단어다. ANC와 그 동맹들은 그 표현을 쓰지 않는다. ↩
- Barren, p 12. ↩
- 다음을 보라: Simons and Simons, chs 4 and 5. ↩
- 다음을 보라: South all, passim. ↩
- 남아프리카 트로츠키주의의 초기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Southall, pp 20 and 34-7, and Roux, pp 311-13. ↩
- Southall, p 74. ↩
- Ibid, pp 72-3. ↩
- L Trotsky, Writings (1934-35) (New York 1974) pp 250, 254. ↩
- Ibid, pp 249-50. 그러나 트로츠키는 흑인들의 자결권을 “남아프리카에 별도의 흑인 국가 수립”(ibid, p 251), 즉 국가를 인종 별로 분할하는 것과 헷갈리는 실수를 했다. 남아프리카공산당CPSA도 “원주민 공화국”이라는 요구를 그와 비슷하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추정컨대 트로츠키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코민테른이 미국 남부에서 흑인들이 고유한 국가를 가질 권리를 정책적으로 옹호했던 것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다음을 보라: No Sizwe, One Azania, One Nation (London 1979) pp 49-53. ↩
- H Wolpe, ‘Capitalism and Cheap Labour Power in South Africa’, Economy and Society 1:4 (1972) and Legassick, ‘South Africa: Capital Accumulation and Violence’, ibid, 3:3 (1974). 레가시크는 이에 앞서 돌파구를 연 소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The Frontier Tradition in South African Historiography’, published in S Marks and A Atmore, eds, Economy and Society in Pre-Industrial South Africa (London 1980). ↩
- N Alexander, Sow the Wind (Johannesburg 1985) p 130. ↩
- Legassick, ‘South Africa’, p 269. ↩
- 다음을 보라: J 8 Peires, editor’s Introduction to Before and After Shaka (Grahamstown 1981) p 17. ↩
- Wolpe, ‘Capitalism and Cheap Labour-Power’, p 439. ↩
- Ibid, p 450. ↩
- Wolpe, ‘The Theory of Internal Colonialism: the South African Case’, in I Oxaal et al, eds, Beyond the Sociology of Development (London 1975) p 249. ↩
- Ibid, p250. ↩
- Ibid, p 241. 여기서 울프는 찰스 베텔헴Charles Bettelheim을 인용한다. ↩
- Ibid, p 248. ↩
- M Williams, ‘An Analysis of south African Capitalism’, Bulletin of the Conference of Socialist Economists vi:1 (1975) p 31. 제프 가이는 전자본주의 사회가 붕괴한 시기를 이보다 더 일찍 잡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1890년대 줄루 사회구성체를 가리켜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절합하게 된 전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고 개념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게 개념화하는 것은 형식과 내용을 혼동하는 것이다. … 자본주의가 줄루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한 시점은 1889년 처음으로 오두막세稅를 성공적으로 징수했을 때로 봐야 한다. 바로 이때부터 줄루 사회는 자본 축적에 복무하게 됐다.” ‘The Destruction and Reconstruction of Zulu Society’, in S Marks and R Rathbone, eds, Industrialization and Social Change in South Africa (London 1982) pp 189-90. ↩
- Ibid, p3. ↩
- R Davies et al, ‘Class Struggle and the Periodization of the State in South Africa’, Review of African Political Economy (이하 ROAPE) 7 (1976) p 5. ↩
- 다음을 보라: S Clarke, ‘Capital, Fractions of Capital and the State’, Capital and Class 5 (1978), D Innes and M Plaut, ‘Class Struggle and the State’, ROAPE 11, D Kaplan, ‘Relations of Production, Class Struggle and the State in South Africa in the Inter-War Period’, ibid, 15/16, and the editors’ introduction to Rathbone and Marks, ed. ↩
- 다음을 보라: A Callinicos, Is There a Future for Marxism? (London 1982), chs 5 and 6. ↩
- D O’Meara, ‘The 1946 Mineworkers’ Strike and the Political Economy of South Africa’; Journal of Comparative and Commonwealth Studies, xii (1975), and id, Volkskapitalisme (Johannesburg 1983). ↩
- Merle Lipton, Capitalism and Apartheid는 그런 도전에 속하는 것인데 이 역시 아주 초라하다. ↩
- 특히 다음의 결론을 보라: N Poulantzas, Classes in Contemporary Capitalism (London 1975). ↩
- Legassick, ‘South Africa’, p 286. ↩
- 다음을 보라: E Webster, ed, Essays in South African Labour History (Johannesburg 1978), Section Three. ↩
- 다음을 보라: H Wolpe, ‘The White Working Class in South Africa’, Economy and Society 5:6 (1976), and A Callinicos, ‘The “New Middle Class” and Socialist Politics’, International Socialism 2:20 (1983). ↩
- 이 과정에 대한 최상의 분석은 다음을 보라: E Webster, Cast in a Racial Mould (Johannesburg 1985). ↩
- Lipton, pp 381, 382. ↩
- 다음을 보라: Webster, ch 6. ↩
- Ibid, p279. ↩
- 비한-리케르트 전략에 대한 분석으로는 다음을 보라: SAAZ, ch 5. ↩
- SALB, August-September 1984. ↩
- J Lewis and E Randall, ‘The State of the Unions’, ibid, 11, October 1985, pp 74-6. ↩
- 다음을 보라: Webster, pp 202-12, and p 213 n 28. ↩
- 다음을 보라: Rand L Lambert, ‘State Reform and Working-Class Resistnce, 1982’, SAR I. ↩
- 다음을 보라: Labour Monitoring Group (이하 LMG), ‘The November Stay-away’ SALB 10:6, May 1985. ↩
- 독립노조에 대해 더 유용한 설명으로는 다음을 보라: D MacShane et al., ‘Trade Unions and the State in South Africa’, Capital and Class 15 (1981) ↩
- D Hindson, ‘Union Unity’, SAR II, p 93. ↩
- 다음을 보라: SAAZ, pp 124-6. 그리고 포사투 전술을 옹호하는 주장으로는 B Fine et al, ‘Trade Unions and the State in South Africa’, Capital and Class 15 (1981). ↩
- A Erwin, ‘The Question of Unity in the Struggle’, SALB 11:1, September 1985, pp 54, 60, 61. ↩
- Ibid, pp 68, 67. ↩
- MacShane et al, p 125. ↩
- R Lambert, ‘Political Unionism in South Africa’, SALB 6:2 and 3, September 1980, p 104. ↩
- Loc. cit. ↩
- J Foster, ‘The Workers’ Struggle- Where Does FOSA TU Stand?’, Appendix 1 to MacShane et al, pp 149, 150. ↩
- 나이절 람베르트와의 인터뷰, Socialist Worker 14 September 1985. ↩
- Webster, p 193. ↩
- LMG, Ioc. cit. ↩
- 다음을 보라: M Swilling, ‘Workers Divided’, SALB, August-September 1984. ↩
- Ibid, pp 115, 119-20. ↩
- LMG, loc. cit. ↩
- 다음을 보라: ibid, passim, and Socialist League of Africa, ‘South Africa: Ten Years of the Stay-at-Home’, International Socialism 5 (1961). ↩
- 이하의 내용은 주되게 다음에 기초한 것이다. D Pillay, ‘Community Organizations and Unions in Conflict’, WiP 37, June 1985, and LMG, ‘The March Staty-aways in Port Elizabeth and Uitenhage’, SALB 11:1, September 1985. ↩
- 다음을 보라: SALB 62 and 3, special issue on ‘Working for Ford’, and SAAZ, pp 126-9. ↩
- LMG, ‘The March Stay-away’, p 101. ↩
- Pillay, p 12. ↩
- SACTU 관계자와의 인터뷰, SALB 11:2, October/December 1985. ↩
- Lewis and Randall, p 84. ↩
- NUM, November 1985. ↩
- 다음을 보라: P van Niekerk, ‘NUM’s First Legal Mine Strike’, SALB October/November 1984, and ‘Briefings’, ibid, 11:1, September 1985. ↩
- ‘Mass Dismissals in the Mines’, ibid, 10:7, June 1985. ↩
- Webster, pp 60-1. ↩
- 다음을 보라: The Workers’ Movement, SACTU and the ANC (London 1979). ↩
- Inqaba ya Basebenzi 1, January 1981. ↩
- MWT 입장에서의 서술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ibid, 16, May 1985. ↩
- Storey, p 25. ↩
- South Africa’s Impending Socialist Revolution, pp 152-3. ↩
- Webster, pp 226, 230, n 51. ↩
- Storey, p 43 ↩
- Ibid, p 30. ↩
- 부르주아 해결책의 가능성에 대한 추가적 논의로는 다음을 보라: Callinicos, ‘South Africa’. ↩
- Storey, p 38. ↩
- South Africa’s Impending Socialist Revolution, p 147. ↩
- Ibid, p 139. ↩
- Storey, p 38. ↩
- 예컨대 다음을 보라: ‘Claris’, ‘Conference Expels “Left-Wing” Deviationists’, Sechaba, August 1985. ↩
- 다음을 보라: D Lewis, ‘Registered Trade Unions and Western Cape Workers’, in Webster, ed, Hirson, ch 12 and SAAZ, pp 130-35. ↩
- 다음을 보라: I B Tabata, The Awakening of a People (Nottingham 1974) and Roux, pp 354-9. ↩
- 다음을 보라: I B Tabata, Imperialist Conspiracy in Africa (Lusaka 1974) eh 3. ↩
- Ibid, p 34. ↩
- O’Meara, ‘The 1946 Mineworkers’ Strike’, p 153. ↩
- 다음을 보라: Webster, pp 202-12. ↩
- Free Azania 2:1, August 1985, p 31에 실린 R O Dudley와의 인터뷰. ↩
- Cape Herald, 11 May 1985. ↩
- Loc. cit. ↩
- Dudley, Free Azania, p 31. ↩
- New Unity Movement, A Declaration to the People of South Africa (Cape Town 1985) p 7 ↩
- Ibid, p 13. ↩
- Cape Herald, 11 May 1985. ↩
- A Abrahams, WiP, pp 35, 20. CAL에 관한 내용은 주되게 저 인터뷰와 다음 2개의 문서집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CAL Documents and Cape Action League — A Product of Mass Struggle. ↩
- S Gastrow, Who’s Who in South African Politics (Johannesburg 1985) pp 27-9. ↩
- No Sizwe, passim. ↩
- N Alexander, ‘An Approach to the National Question in South Africa’ Azania Worker 2:2, December 1985, p 5. ↩
- Id, Sow the Wind, p 49. ↩
- Id, ‘An Approach’, p 12. ↩
- Ibid, 13. 또한 다음을 보라: Sow the Wind, pp 139-50. ↩
- No Sizwe, p 125. ↩
- Abrahams, p 21. ↩
- Socialist Organiser, 19 September 1985. ↩
- Alexander, Sow the Wind, pp 13-16. ↩
- Ibid, p 15. ↩
- 다음을 보라: ‘Points on the Role of Liberals’, CAL Documents. ↩
- 다음을 보라: Socialist League of Africa, ‘Ten Years of the Stay-at-Home’. ↩
- ‘Breaking the Chains’, Workers’ Liberty September 1985, p 4. ↩
- T Cliff and D Gluckstein, Marxism and Trade Union Struggle (London 1986) ch 1[국역: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조합 투쟁》, 책갈피, 2014]. ↩
- 다음을 보라: T Cliff, ‘The Economic Roots of Reformism’ [국역: ‘개혁주의의 경제적 뿌리’, 《마르크스21》 15호(2016년 여름), 책갈피, 2016], in Neither Washington Nor Moscow (London 1982). ↩
- Webster, p 250. ↩
- N Haysom, ‘The Industrial Court’, SAR II. ↩
- ‘Breaking the Chains’, p 10. ↩
- M Mayekiso와의 인터뷰, ‘Towards a Workers’ Party?’, Socialist Worker Review 80, October 1985, p 19. ↩
- T Rigby, ‘Why a Workers’ Party’, Socialist Organiser, 12 September 1985. ↩
- ‘Breaking the Chains’, p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