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정치학 *
마르크스의 귀환
1 그 모든 것을 발판 삼아 (그리고 토니 클리프와 피터 클라크의 미소 띤 독촉 덕분에) 나는 그 책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우리는 다른 시기에 접어들었다. 지배계급이 공세에 나서고 노동자 운동이 후퇴하는 시기였다. 그 전환은 1984~1985년 광원 대파업의 패배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본지[《인터내셔널 소셜리즘》]는 이후 파업 투쟁이 감소한 원인들에 관한 논쟁을 이어 갔지만, 내가 보기에는 당시 광원들이 겪은 고통에 대한 기억이 특히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 그 기억은 무엇보다도 노동조합 관료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마르크스의 명성은 지난 35년 동안 크게 변해 왔다. 35년 전인 1983년은 그가 죽은 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를 맞이해 나는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썼다. 마르크스에 대한 연구와 논쟁이 크게 꽃피던 상황을 배경으로 쓴 책이었다. 1968~1976년의 고양기가 낳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급진화가 그러한 연구와 논쟁을 추동했다.2 푸코는 경제나 국가로 환원되지 않는 권력 관계들의 묶음으로 사회를 이해했는데, 이러한 이해는 1970년대의 운동에서 급진화한 사람들에게 유용한 이론적 틀이 됐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여성·흑인·성소수자 해방 운동을 포용하기에는 너무 경제환원론적이라고 생각했다. 푸코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은 그가 마르크스의 귀결이라고 여긴 스탈린주의라는 거대한 재앙 때문인 면도 있다. 적어도 이 대목에서 푸코는 주류 자유주의와 맥이 닿았다. 그리고 이 주류 자유주의는 소련의 위기와 붕괴 덕에 이데올로기적 맹위를 떨쳤다. 3 그에 따른 마르크스에 대한 지적 관심의 퇴조는 1992년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에 잘 드러난다. 후쿠야마는 그 책에서 마르크스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모든 경쟁자를 누르고 확실한 승리를 거뒀으며 헤겔이 말한 역사, 즉 적대적인 이데올로기들의 투쟁은 이제 종말을 맞이했다고 자신 있게 선언한다. 4
그러나 이러한 대대적인 계급 세력 균형 변화가 오기 전부터 마르크스가 누리던 지적 인기는 이미 시들해지고 있었다. 파리는 한때 모리스 메를로퐁티, 장폴 사르트르, 루이 알튀세르 같은 인물이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치열한 논쟁을 벌이던 논쟁의 중심지다. 1970년대 중반이 되자 파리는 훗날 학계에서 ‘포스트구조주의’로 홍보되는 사상적 조류의 요람이 됐다. 그 조류의 핵심 인물인 미셸 푸코는 근대성의 역사적 계보학을 극도로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니체에서 영감을 받은 이 연구는 다양한 형태의 “지식-권력”에 일차적 중요성을 부여했다. 푸코는 온갖 뛰어난 통찰을 제시했지만, 마르크스에 관한 언급은 대체로 무시하는 투였고, 때로는 적대적이며 많은 경우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하는 소리였다.1989년에 후쿠야마는 이렇게 썼다.
헤겔의 언어로 마르크스는 자유주의 사회가 자체의 맥락에서 해소될 수 없는 근본적 모순을 안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 모순은 바로 자본과 노동의 모순이다. 그 모순은 그 후 자유주의에 제기된 주된 비판을 이뤘다. 그러나 계급 문제는 오히려 명백히 서방에서 성공적으로 해결됐다.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지적했듯이 현대 미국의 평등주의는 마르크스가 꿈꾼 무계급 사회를 사실상 성취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후쿠야마는 뭐라고 하는가? 2016년 11월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승리를 이해하려 애쓰는 후쿠야마의 어조는 사뭇 다르다.
오늘날 교육 수준으로 좌우되는 사회 계급은 수많은 선진국과 신흥국에서 단연 중요한 사회적 분단선이 됐다. 이런 분열을 추동한 것은 세계화와 기술 진보였다. 그리고 세계화와 기술 진보를 가능케 한 것은 1945년 이후 많은 부분 미국에 의해 구축된 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였다 ⋯ 이 시스템의 혜택은 전체 인구에게 고루 돌아가지 않았다. 선진국 노동계급은 일자리를 잃었다. 기업들이 가차없는 경쟁이 벌어지는 세계 시장에서 생산을 외주화하고 효율성을 쥐어 짜내려 했기 때문이다.이어서 후쿠야마가 인정하듯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낳은 만연한 고통은 2007~2008년 금융 붕괴와 그 여파 — 마이클 로버츠가 말한 “장기 불황” — 로 훨씬 악화됐다. 그 금융 위기 자체도 잇따라 일어난 금융 위기들의 한 정점(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다)이었다. 1990년대 초에는 일본의 “거품 경제”가 꺼졌고, 1997~1998년에는 동아시아가 위기에 빠지고 러시아가 파산했으며, 2000년에는 월스트리트의 ‘닷컴 버블’이 붕괴했다. 위기의 진앙지도 갈수록 세계 경제 시스템의 중심지인 미국으로 가까워졌다. 이처럼 소련 붕괴 당시 후쿠야마가 열렬히 찬미하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여흥이 다하자 마르크스와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지적 관심이 만만찮게 되살아났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최대 적수이자 가장 강력한 비판자인 만큼,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질 때 마르크스가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관심은 “마르크스의 귀환” 운운하는 주류 언론 보도에서도 드러나지만, 《자본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자본론》 읽기 모임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것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데이비드 하비는 동영상 강연을 통해 이런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인물이다. 그 강연 시리즈에서 두 권의 책이 파생돼 출간됐고, 그 밖의 수많은 책과 기사, 대담이 나왔다. 하비는 이를 통해 《자본론》의 때로는 괴로울 만치 어려운 논리 전개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그것이 현대에 갖는 의미를 보여 주려 한다. 한편, 《자본론》과 그 초고들에 대한 학술적 연구도 늘어났다. MEGA2(마르크스-엥겔스 전집)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원고들이 공개된 것도 그 자극제가 됐다.
8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적 정치경제학 비판이 다시 각광받는 것은 중요한 정치적 사실이다. 조건이 잘 맞아떨어지면 이는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의 폭넓은 청중이 형성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주제는 그러한 부활에서 비롯한 지배적인 마르크스관觀에 있다. 즉, 마르크스를 단지 자본주의의 비판자이자 《자본론》의 저자로만 보는 시각이다. 나는 그 업적의 중요성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마르크스가 혁명가이고 정치 활동가였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의 삶과 투쟁과 동떨어진 채 대영박물관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던 학자적 인물 내지, 심지어는 비현실적인 몽상가였다는 인식을 강화한다.
이는 매우 반가운 변화다. 이런 변화는 적어도 일부 학계에서(특히, 다소 기이하게도 영어권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만만찮은 대화 상대로 취급되는 환경을 조성한다. 물론 학계를 벗어나면 상황은 좀 다르다. 몇몇 예외는 있지만 만만찮은 마르크스주의 조직들은 최근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국가, “사회가 낳은 불가사의한 사산아”
9 모두가 여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청년 마르크스에 관해 중요한 연구를 남긴 스타티스 쿠벨라키스는 이렇게 강조한다. “정치는 마르크스의 아킬레스건이나 불길한 빈틈의 징후이기는커녕 마르크스의 강점이다. 정치야말로 마르크스의 저작이 가장 폭넓고 혁신적으로 다룬 분야다.” 10
이런 상황은 마르크스가 경제학에 비해 정치가 약하다는 흔한 인식으로 더 강화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다룬 저명한 이론가인 랠프 밀리밴드는 심지어 이렇게 불평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그들의 직계 계승자들이 — 캘리니코스] 우리에게 남긴 고전적 저작들은 정치학과 정치 이론의 주요 쟁점들에 관해 입을 다물거나 형식적인 논의만 할 뿐이다.”확실히 마르크스 자신은 처음부터 투쟁과 변혁이 이뤄지는 영역인 정치에 몰두했다.《자본론》으로 나아가는 기나긴 여정의 초입인 1843~1844년에 마르크스는 헤겔의 정치 철학과 대결했다. 훗날 안토니오 그람시가 썼듯이 마르크스는 헤겔의 철학을 맥락 속에서 읽었는데, 그 맥락이란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과 그의 전쟁이었다. ⋯ 투쟁과 고통으로 가득한 격렬한 역사적 시기의 중요하고 직접적인 경험이 바로 그 맥락이었다. 그 시기는 외부 세계가 개인들을 압도하고 땅바닥에 내리꽂아 짓이기고, 모든 철학이 현실에 의해 매우 철저하게 반박당한 시기였다.
12 1844년에 쓴 그 책의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전제 군주 지배 체제에 의해 파편화되고 지배받고 있는 독일에서 필요한 것은 1789~1794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단지 정치 혁명”이 아니라 “근본적 혁명 ⋯ 전면적 인간 해방”이며 그런 혁명은 오직 프롤레타리아만이 수행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MECW 3: 184, 186) 13 1844년 11월에 쓴 것으로 보이는 “근대 국가에 관한 저작의 개요”도 비슷한 논지로 마무리된다. “참정권. 국가와 부르주아 사회의 폐지를 위한 투쟁.”(MECW 4: 666)
따라서 헤겔과 대결하는 것은 정치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의 미완성 원고에서 마르크스는 영국 혁명, 미국 혁명, 프랑스 혁명이 낳은 근대 정치 국가가 원자화되고 경쟁적인 시민사회의 소외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1840년대 중반에 마르크스는 두 권으로 된 《정치 비판과 정치경제학 비판》을 구상했다. 1857~1878년에는 새로운 세계 경제·금융 위기에 대응해 《정치경제학 비판》을 구상했는데 그렇다고 주제의 폭을 좁힌 것은 아니었다. 총 6권 중 제4권에서 국가를 다루려 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마르크스는 1862년 12월 28일 루트비히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앞으로는 첫 번째 권(《자본론》)에만 집중해 보려 한다고 하면서도 국가에 관해서는 특별한 단서를 달았다. “후속작을 개발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쉽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다만 국가의 다양한 형태와 사회의 다양한 경제 구조 사이의 관계를 다룬 책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MECW41:435) 물론, 결국 마르크스는 국가에 관한 책은 물론이고 《자본론》조차 생전에 마무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본론》 제1권에도 국가에 관한 내용이 꽤 있다. 특히 시초 축적을 다룬 8장에서 마르크스는 근대 자본주의가 성숙할 조건을 마련하는 데서 국가 폭력이 했던 구실을 부각한다. 이를 통해 국가가 한편으로는 자본가들의 손에 화폐를 집중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산 임금 노동자 계급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것의 귀결은 빼어난 제31장(특수한 용어로 인해 오해를 자아내는 “산업 자본가의 탄생”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에 요약돼 있다.
이제 시초 축적의 다양한 요소는 대략 시간 순으로 나열하자면 두드러지게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잉글랜드로 분포됐다. 이 다양한 요소는 17세기 말 잉글랜드에서 식민 지배와 국채, 근대 조세 제도, 보호 무역으로 체계적으로 통합된다. 이러한 방법은 노골적 폭력에 어느 정도 의존하는데, 예컨대 식민 지배가 그러하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은 마치 온실 재배처럼, 봉건적 생산 양식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으로 바꾸는 과정을 앞당기고 그 이행 과정을 단축하기 위해 국가의 힘, 즉 사회의 집중되고 조직된 강제력을 이용한다. 국가 권력은 새로운 사회를 잉태한 모든 옛 사회의 산파다. 국가 권력은 그 자체로 경제 권력이기도 하다.이 장만 보더라도 《자본론》이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의 논리를 답습하는 협소한 경제학 연구라는 견해(때로는 《자본론》을 남들보다 더 잘 알아야 마땅한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그렇게 주장한다)가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차 프라델라가 지적하듯이 제8부에서 마르크스는 더 일반적으로 “자본 축적에 대한 분석에 국가 체계를 통합시킨다 ⋯ 마르크스는 ⋯ 국가가 국민국가 수준과 국제적 수준 모두에서 자본주의적 관계를 만들어 내고 사회 질서 전반을 재생산하는 데서 하는 핵심 구실을 분석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국가의 논리는 자본의 논리 안에 포함돼 있다.”
16 이처럼 마르크스가 보기에 정치는 이 적대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그 적대의 최고점은 그가 《그룬트리세》에서 말한 “부르주아 사회가 집약된 형태인 국가”에 있다. 17
사실 《자본론》 제1권 전체가 자본과 임금 노동 사이의 계급 적대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그 적대 관계는 생산 과정에서 잉여 가치를 추출하는 것에서 비롯한다. 잉여 가치가 추출되는 숨은 근본 구조는 가치론과 잉여 가치론을 다루는 제1부와 제2부에서 밝혀지지만, 그것은 대립하는 “집단적 의지”의 충돌(훗날 그람시가 쓴 표현)이라는 형태로 표현된다. 또 다른 탁월한 장인 제10장 “노동 시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노동 시간의 표준화는 총자본(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즉 노동계급) 사이의 투쟁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국가는 생산 과정 재편을 강제하는 공장법으로 그 투쟁의 결과를 공식화한다.18 같은 해 마르크스는 페르디난트 라살의 국가 사회주의에 반대한 《고타 강령 비판》에서도 같은 논지를 재확인시켜 준다. 이처럼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 혁명은 애초 자본주의를 만들어 내는 데서 매우 중심적인 구실을 한 국가를 공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론》은 매우 정치적인 저작이다. 《자본론》과 마르크스의 정치 활동의 관계는 뒤에서 더 다루겠지만, 그 전에 강조할 것이 하나 있다. 국가란 자본가 권력의 집약된 형태라는 이해와, 《자본론》 제1권 출간 4년 후인 1871년에 마르크스가 파리 코뮌을 지지하면서 주장한 바가 서로 맥이 닿아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내전》에서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이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중앙 집권적 관료 구조를 해체하고 그것을 급진적인 형태로, 가능한 곳에서는 직접 민주주의적인 형태로 갈아 치웠다고 찬양한다. 1875년 마르크스는 아나키스트이자 자신의 적수였던 미하일 바쿠닌을 비판하면서 파리 코뮌을 이렇게 묘사하기도 했다. “그것은 국가 그 자체, 즉 사회의 이 불가사의한 사산아에 맞선 혁명이자, 인민이 스스로 자신의 사회적 삶을 복원하는 행위였다.”(MECW 22: 486)19 그러나 이 글의 목표는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이 아니다. 이미 크리스 하먼이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 자본주의 국가에 관한 권위 있는 논문을 쓴 바 있고, 나도 다른 글에서 그 주제를 다룬 바 있다. 20 이 글에서는 마르크스가 “정치학의 주요 쟁점들에 관해 입을 다물거나 형식적인 이야기만 했다”는 주장이 틀렸음을 보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가 실제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두 경험에 집중할 것이다. 하나는 1848년 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제1인터내셔널이다. 이 경험들을 보면 마르크스가 투쟁에 영향을 미치고 경험에서 배우는 정치 지도자임을 알 수 있다. 21
물론, 마르크스는 밀리밴드가 요구했던 정치에 관한 “체계적 이론”을 제공하지는 않았다.1848년과 그 후: 혁명적 자기 학습 1848년 2월 파리에서 분출한 혁명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돼 모든 기성 지배 체제를 뒤흔들었다. 이 지배 체제들은 대부분 1814~1815년 나폴레옹의 최종 패배 뒤 복원된 전제 군주정이었다. 당시 공산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이미 발전시킨 마르크스는 1848년 3월 베를린에서 대중 봉기가 일어난 후 그의 고향 라인란트에서 혁명에 투신했다. 마르크스에게는 두 가지 커다란 이점이 있었다. 첫째, 그는 1842~1843년 〈라이니셰 차이퉁〉[라인 신문] 편집장을 지내면서 이미 정치적 경험을 쌓았고 라인란트의 최대 도시인 쾰른에 조력자들이 있었다. 쾰른에서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프로이센의 식민 지배에 가까운 통치에 신물을 내고 있었다.(상대적으로 경제가 발전한 라인란트는 그 전에 나폴레옹이 통치하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고 그 시기에 진보적 개혁을 경험했다. 그런 만큼 1815년 라인란트가 프로이센에 병합된 것은 괴로운 경험이었다.) 둘째, 마르크스는 평생 친구이자 동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독일의 혁명적 장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 국제 정치 조직의 지도력을 획득했다. 마르크스의 부추김으로 ‘공산주의자동맹’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그 조직은 마르크스에게 강령 문서 작성을 청탁했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공산당 선언》이다.
그러나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추구한 전략에는 상당한 내적 긴장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들이 당면 목표로 제시한 것은 노동자 혁명이 아니라 1789~1794년 프랑스 대혁명의 독일판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자코뱅이 도시와 농촌의 소생산자들로 이뤄진 하층민 연합을 이끌고 구체제를 폭력적으로 타도한 혁명이었다. 즉,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급진적이고 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 혁명을 추구했던 것이다. 비록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서술하듯이, “독일의 부르주아 혁명은 거기에 즉각 뒤따를 노동자 혁명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했지만 말이다.(MECW 6: 519) 1848년 3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요구”라는 문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는 당시 소왕국들과 더 작은 공국들로 조각보처럼 나뉜 독일을 “단일한 통일 공화국”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촉구하며, 그런 공화국의 기초로서 보통 선거권, 봉건적 재산과 특권의 폐지, 자본주의의 한계 내에 머무르는 진보적 사회 정책들을 요구한다.(MECW 7: 3)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강령이 제정 러시아에 맞선 혁명적 전쟁을 통해 성취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러시아 차르는 1814~1815년 이래 유럽에서 일어난 반동의 군사적 보증인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790년대와 1800년대에 유럽을 뒤흔든 자코뱅과 그 후계자들의 혁명적 전쟁이라는 선례에서 영감을 받았다. 1848년 8월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더라면 독일은 불명예스러운 과거와 완전히, 공공연히, 실질적으로 단절하고, 진정한 해방과 통일을 성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봉건제가 무너지고 부르주아의 권력 장악 열망이 단명한 자리 위에서 민주주의를 수립했을 것이다.”(MECW 7: 352) 프랑스 대혁명 때 그랬던 것처럼 독일의 혁명에서도 부르주아지는 구체제에 맞서 일시적으로라도 대중을 동원해야 하는 처지가 될 것이라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전망했다. 마르크스는 1848년 7월 다음과 같이 썼다. “부르주아지는 인민 전체의 지지를 얻어야만, 따라서 꽤나 민주적으로 행동해야만 지배를 성취할 수 있다.”(MECW 7: 262)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을 더 급진적으로 재연한다는 이 전략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은 어떤 구실을 한다는 것인가? 마르크스는 쾰른노동자협회(전성기에는 회원이 7000명에 이른 상당한 조직이었다) 지도자인 안드레아스 고트샬크와 충돌했다. 고트샬크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의 타협을 일절 거부했고, 독일과 프로이센 의회 선거에 대한 보이콧을 성공적으로 조직했다. 마르크스는 고트샬크의 도전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좌파가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들에 대항하는 후보를 출마시키는 것에 반대했고, 공산주의자동맹을 통한 개입을 나중으로 미뤘다. 마르크스는 〈라이니셰 차이퉁〉을 계승한 〈디 노이에 라이니셰 차이퉁〉(신라인 신문)을 중심으로 혁명에 개입했다. 운동에 개입하는 민주주의 신문인 〈디 노이에 라이니셰 차이퉁〉은 라인란트에 대한 프로이센의 지배에 맞선 저항을 선동했고, 프랑크푸르트의 범凡독일 의회와 베를린의 프로이센 의회에서 활동하는 자유주의 정치인들의 소심함을 비판했다. 그 결과 마르크스는 혁명적 방법을 기피했던 부르주아지의 보수성과 갈수록 충돌하게 됐다. 부르주아지의 보수성은 1848년 6월 파리에서 극적으로 드러났다. 새 프랑스 공화국이 노동자 봉기를 유혈 진압한 것이다. 독일에서는 지역 수준에서는 쾰른, 그러나 더 중요하게는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에서 부르주아지가 동요해 프로이센 전제 군주정에 사태의 주도권을 내줬고, 프로이센 전제 군주정은 혁명을 진압했다.
1848년 유럽 전역으로 반혁명이 퍼지자,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의 두 얼굴을 모두 비판했다. 프랑스 부르주아지가 드러낸 잔혹함과 독일 부르주아지가 드러낸 소심함을 모두 비판한 것이다.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 자기 계급의 지배에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물을 무너뜨린 뒤 반혁명을 이끌었다. 독일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시민적 자유와 지배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기본 조건을 확보하기도 전에 봉건제와 전제 군주정의 수행단에 순순히 합류했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지는 폭군 역할을 맡아 스스로 반혁명을 일으켰다. 독일에서 부르주아지는 노예처럼 처신하고 자기 위에 군림한 폭군을 위해 반혁명을 수행했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지는 승리를 쟁취해 인민을 굴복시켰다. 독일에서 부르주아지는 인민의 승리를 막기 위해 스스로 굴복했다. 역사상 독일 부르주아지보다 더 창피하고 한심한 구경거리는 없을 것이다.(MECW 7: 504)
독일의 모든 것은 제2의 [16세기 — 캘리니코스] 농민 전쟁 같은 것으로 노동자 혁명을 지원하는 것이 가능하느냐에 달려 있네. 그것이 가능하다면 사태는 순조롭게 풀릴 것일세.”(MECW 40: 41) 그러나 마르크스가 이런 수준의 명료함에 도달하기 전인 1848~1849년의 입장은 과연 어느 계급이 “사회 공화주의적 혁명”을 이끌 것이냐는 문제가 있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가 믿을 만한 동맹이 아님을 알게 됐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들을 거스르고 혁명을 전진시킬 독자적 조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조너선 스퍼버는 이렇게 상황을 묘사했다.
1848년 12월 마르크스는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바꿨다. “독일에서 순전한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고 입헌 군주정의 형태로 부르주아의 지배가 확립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 독일에서는 봉건적 전제 군주정의 반혁명이나 사회 공화주의적 혁명만이 가능하다.”(MECW 7: 178) 이 모호한 정식의 문제는 전제 군주정에 맞선 일종의 계급 연합을 함축한다는 데 있지 않다. 사실 그런 연합은 당시 독일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 당시 독일은 인구의 다수가 농민이었고, “공산주의자들의 요구”에는 농민의 이익을 위한 제안들이 포함돼 있었다. 1856년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프랑스 대혁명을 이중으로 재연한다는 마르크스 전략의 두 줄기, 즉 프로이센에 맞선 민주주의 혁명과 부르주아지에 맞선 노동자 혁명은 각자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둘을 결합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프로이센의 지배에 맞서려면 계급 적대를 뒷전에 놓아야 했고, 부르주아지에 대한 노동자들의 적대를 부추기려면 쾰른과 라인란트에서 다른 민주주의자들과 협력을 중단해야 했다.
1849년 4월 마르크스는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주주의협회 라인 지구 위원회에서 사임했다. 마르크스는 사임의 근거를 이렇게 밝혔다. “협회들 내의 이질적 요소들을 고려하면, 그들에게서 노동계급이나 인민 대중에게 이로운 것이 나오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MECW 9: 502) 마르크스와 그의 동료들은 민주주의협회에서 빠지는 대신 라인 지방과 베스트팔렌의 노동자협회들을 단일 조직으로 단결시키려 했다. 또, 마르크스는 〈디 노이에 라이니셰 차이퉁〉에 “임금 노동과 자본”을 발표했다. 이 글은 처음으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착취를 정교하게 설명한 글이다. 그 글의 여는 말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현재 벌어지는 계급 투쟁과 민족적 투쟁의 물질적 기반을 이루는 경제적 관계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여러 곳에서 받아 왔다.”(MECW 9: 197) 왜 이제 그런 경제적 관계를 제시할 때가 됐는지 설명하면서 마르크스는 잇따른 반혁명의 승리가 남긴 교훈을 도출한다.
혁명적 노동자들의 패배로 유럽은 다시 옛날의 영국-러시아 치하의 노예제로 되돌아갔다. 파리의 6월 투쟁, 비엔나 함락, 베를린의 11월 희비극, 폴란드와 이탈리아, 헝가리의 필사적인 노력, 아일랜드 대기근 등 이 모든 사건은 유럽에서 부르주아지와 노동계급 사이에서 벌어진 계급 투쟁의 집약적 표현이다. 이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다음을 입증했다. 모든 혁명적 격변은 그 목표가 계급 투쟁과 아무리 동떨어져 보이더라도, 혁명적 노동계급이 승리하지 못하면 패배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 혁명과 봉건적 반혁명이 무기를 들고 세계 대전을 치르기 전까지 모든 사회 개혁은 공상에 그친다는 것이다.(MECW 9: 197-198)
이탈리아 노동자주의의 주창자 중 한 명인 마리오 트론티는 마르크스의 〈디 노이에 라이니셰 차이퉁〉 편집 활동이 갖는 이론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1848~1849년에 걸친 신문 편집 경험을 거치면서 노동과 자본에 관한 마르크스의 논의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 이 정치 논설들은 거칠고 맹렬하고 종파적이고 일면적이고 별다른 실증 없이 논지를 전개하지만, 오로지 계급적 증오만이 배태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향후 발전 경로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 그리고 이 논설들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추상적 노동과 현실의 구체적 노동이 중첩되고 결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결합의 산물이 바로 노동계급이라는 개념이며, 이제 이 개념은 이전 저작들에서와 달리 그저 천재성을 통해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규정을 갖는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혁명적 구실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일절 접은 마르크스는 이제 노동자들을 이데올로기적·조직적으로 무장시키려 했다. 그러나 반혁명에 의한 최종적 탄압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1849년 5월 라인란트에서 추방당한다.(엥겔스는 팔츠 지역의 무장 저항에 가담해 그 탄압에 맞서려 했다.) 런던으로 망명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9년 공산주의자동맹을 부활시키고 《디 노이에 라이니셰 차이퉁: 폴리티셰-외코노미셰 레부》(신라인 신문: 정치-경제 평론)를 발행했다. 공산주의자동맹 ‘버전 2’의 주된 의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에 추구한 전략에 대한 상세한 자기 비판의 장이 된 것에 있다. 그러한 자기 비판을 담은 것이 1850년 3월에 작성한 “공산주의자 동맹에 대한 중앙위원회의 호소”다. 여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민주적 프티부르주아지”를 집중 공격한다. 민주적 프티부르주아지는 급진적 미사여구 덕분에, “전제 군주정과 단결한” 부르주아지와 노동계급 사이에서 다리 구실을 할 수 있었다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지적한다.
민주적 프티 부르주아지는 [구체제에 맞선 — 캘리니코스] 혁명을 되도록 빠르게 끝내고 싶어 했지만 ⋯ 우리의 이익과 임무는 혁명을 지속하는 데 있다. 대부분의 유산 계급이 지배적 위치에서 끌려 내려오고, 노동계급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노동계급의 연합들이 한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주요 국가에서 그만큼 전진해 나라별 노동계급 간의 경쟁이 사라지고, 적어도 결정적인 생산력이 노동계급의 수중에 집중될 때까지 혁명을 지속해야 한다.(MECW 10: 279, 281)
미셸 뢰비가 해설하듯이
이 놀라운 구절은 나중에 트로츠키가 연속혁명론에서 발전시키는 세 가지 핵심 주제를 담고 있다. 1) 반半봉건 국가에서 혁명을 중단시키지 않고 계속 발전시켜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으로 나아가는 것 2) 권력을 장악한 노동계급이 뚜렷하게 반反자본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조처들을 도입하는 것 3) 혁명적 과정과 이를 통해 성취되는 계급과 사유 재산 없는 사회주의 사회가 필연적으로 띠게 될 국제적 성격.
이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훗날 레온 트로츠키가 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 정식화하고, 1920년대에 부상하던 스탈린주의 관료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일반화한 연속혁명론을 예고하고 있다. 독일의 조건에서는 부르주아 혁명과 노동계급 혁명이, 자기조직화한 노동계급에 의해 추동되는 단일한 과정의 일부일 것이라고 전망한 것이다. 이 전망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은 정치적 결론을 이끌어 낸다. 노동자들은 민주적 프티부르주아지가 “막연한 사회민주주의적 미사여구가 우세한 정당 조직”에 노동자 자신들을 “얽어매지” 못하게 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또다시 공식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부속물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MECW 10: 281) 따라서
노동자들, 무엇보다도 공산주의자동맹은 공식 민주주의자들과 구분되는 비밀스런 또는 공공연한 독립적 노동자 정당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리고 각 지역 조직들을 노동자 조직들의 중심이자 중핵으로 만들어서 노동계급의 태도와 이익이 부르주아의 영향력에 얽매이지 않고 논의될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MECW 10: 282)
또다시 혁명이 도래할 경우
그들[노동자들 — 캘리니코스]은 공식 정부와 나란히 존재하는 자신의 혁명적 노동자 정부를 세워야 한다. 지역 위원회나 지역 평의회의 형태든, 노동자 모임이나 노동자 위원회의 형태든 노동자들은 자신의 혁명적 정부를 세워서, 부르주아-민주주의 정부들이 노동자들의 지지를 순식간에 잃게 할 뿐 아니라 노동자 대중 전체가 뒷받침하는 기관의 견제와 위협을 초장부터 느끼게 해야 한다.(MECW 10: 283)
이러한 형태의 이원 권력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무장해 자신만의 “노동자 방위대”를 조직하는 것으로 뒷받침돼야 하는데,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선거에 — 캘리니코스] 자신들의 후보를 출마시켜야 한다. 이는 독립성을 유지하고, 자신의 세를 가늠하고, 자신의 혁명적 태도와 당의 관점을 대중 앞에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다.” 또, 노동자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 세력을 분열시킨다”는 비난을 물리쳐야 한다.(MECW 10: 283, 284) 그런데 이 비난은 마르크스가 1848~1849년 좌파 후보 출마에 반대한 이유와 정확히 일치한다. 혁명을 경험한 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전략을 암묵적으로 재평가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훗날 레닌과 트로츠키, 볼셰비키가 1905년과 1917년의 격변 속에서 더 발전시킨 혁명에 대한 접근법에서 등장하는 요소들을 대략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27 19세기 중반에도 중요한 부르주아 혁명들이 일어나기는 했다. 그러나 그 혁명들은 나중에 그람시가 말한 “수동 혁명”의 형태를 취했다.(이탈리아와 독일이 국가 간 전쟁, 외교적 책략, 계급적 양보를 통해 위로부터 통일된 것이 그런 사례다.) 19세기 중반 부르주아 혁명의 가장 위대한 사례로서, 미국 남부 노예 소유주들의 권력을 끝장낸 미국 내전은 합중국 정부와 그 정부가 거느린 거대한 군대의 엄격한 통제하에 이뤄졌다. 28
마르크스가 1850년부터 펴기 시작한 주장을 더 발전시키지 않은 것은 1848년의 격변이 다가오는 혁명의 예행 연습이 아니라 한 시대의 끝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적어도 서유럽에서는 그랬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시작된 그 시기 동안 부르주아지는 거리 투쟁을 기꺼이 감수하려 했다. 그러나 갈수록 조직되고 투쟁적이 된 노동계급을 포함하고 있는 대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구체제에 협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망명지였던 영국에서 1848년은 과두 지배 집단이 최초의 거대한 대중적 노동자 운동인 차티스트 운동을 꺾는 데 성공한 해였다. 이는 체계적으로 운동을 탄압하고 중간 계급을 기존 질서 옹호에 동원하는 데 성공한 결과였다.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 내에서 저항에 부딪혔다. 그 반대자들은 혁명이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고, 무장봉기 음모를 세워 투쟁을 소생시키려 했다. 1850년 9월 그들은 공산주의자동맹과 결별했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그들은
《공산당 선언》의 유물론적 세계관이 아닌 관념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인다. 혁명을 실제 상황이 아니라 주로 의지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상황을 변화시키고 권력 장악을 위해 스스로를 훈련하려면 15년, 20년, 50년간의 내전을 겪어야 한다.’ 반면 반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단번에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빠져서 잠이나 자야 한다.’(MECW10: 626)
몇 달 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이 경험한 혁명과 반혁명의 리듬에 대한 더 포괄적인 분석을 더 정교하게 제시하려 했다. 《디 노이에 라이니셰 차이퉁: 폴리티셰-외코노미셰 레부》 세 번째 호(결국 발행되지 못했다)에 실으려고 쓴 “5~10월 돌아보기”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7년 영국발 경제 위기가 대륙으로 확산돼 1848년 반란의 물결을 촉발했다면, 그 후의 경기 회복(호주와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서구 열강이 중국에 진출한 것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영국을 필두로 유럽 강대국들이 제국을 세계적으로 확장하면서 가능해졌다)은 그 반란들의 패배를 확정지었다고 지적했다.
위기는 유럽 대륙에서 먼저 혁명을 낳았지만, 그 위기의 토대는 언제나 영국에 있었다. 격변은 부르주아 세계의 심장부가 아니라 주변부에서 일어날 공산이 크다. 심장부[즉 런던 — 캘리니코스]에서는 조정의 여지가 주변부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거꾸로, 유럽 대륙의 혁명들이 영국에 반응하는 정도를 보면, 그 혁명들이 실제로 부르주아적 삶의 조건에 얼마나 큰 도전을 제기했는지, 아니면 그것의 정치적 층위에만 타격을 주는 데 그쳤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력이 부르주아적 관계의 틀 안에서 한껏 발전하는 전반적인 호황기에는 진정한 혁명을 논할 수 없다. 그런 혁명은 현대의 생산력과 부르주아적 생산 형태라는 두 요소가 서로 충돌할 때에만 가능하다 ⋯ 새로운 혁명은 새로운 위기의 결과로서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새로운 혁명은 새로운 위기만큼이나 벌어질 것이 확실하다.(MECW 10: 509-510)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
제1인터내셔널, 《자본론》의 저술,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과 결별함으로써 정치 조직 활동을 일시적으로 그만뒀다. 마르크스는 1851년 2월 11일 엥겔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자네와 나, 우리 둘이 처하게 된 이 공공연하고 진정한 고립에 나는 정말 기쁘네. 이 고립은 우리의 태도와 원칙에 전적으로 부합하네. 그저 원만한 관계를 위해 불충분한 조처를 용인해야 하는 상호 양보 체제, 대중 앞에서 저 얼간이들과 함께 당의 조롱거리를 짊어져야 할 의무, 이 모든 것이 이제 끝났네.(MECW 38: 285)
엥겔스는 1851년 2월 13일에 보낸 답장에서 더 격하게 동의를 표했다.
공식 직책을 역병처럼 멀리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찌 “당”과 어울릴 수 있겠는가? 인기를 경멸하고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우리가 “당”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당”은 그저 우리를 자기들과 같은 부류라고 확신하며 우리의 이름을 팔아먹는 얼간이들의 무리일 뿐일세.(MECW 38: 290)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거리를 둔 것은 당 개념 자체가 아니라 특정 당 조직, 특히 1848년 이전에 혁명적 좌파 사이에서 우세했던 비밀 음모 조직이었다. 마르크스는 거의 10년 후인 1860년 2월 29일 시인 페르디난트 프라일리그라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1852년 이래로 저는 당신이 편지에서 함축한 의미의 “당”에 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당신이 시인이라면 저는 비판가이고, 저에게는 1849~1852년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동맹”은 ⋯ 당의 역사에서 한 에피소드일 뿐이었고, 그런 조직은 현대 사회라는 토양에서 자연스럽게 도처에서 자라났습니다 ⋯ 저는 제가 “당”이라는 말을 8년 전에 효력을 다한 “동맹”이나 12년 전에 해산된 편집부를 뜻하는 말로 쓴다는 오해를 털어버리고자 했습니다. 제가 말하는 당은 더 큰 역사적 의미에서의 당을 말합니다.(MECW 41: 82, 87)
29 그러나 사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의 “당”에서도 완전히 손을 떼지 못했다. 1852년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정부가 쾰른에서 마르크스의 옛 동지들의 유죄를 미리 확정해 놓고 전시 효과를 위해 연 공개 재판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1852년 12월 7일 마르크스는 아돌프 클루스에게 이렇게 불평했다. “재판은 나를 더 깊숙한 수렁으로 끌고 들어갔네. 나는 5주 동안 생계를 위해 일하는 대신 정부의 책략에 대항해 당을 위해 활동해야 했네.”(MECW 39: 259) 게다가 오거스트 님츠가 지적했듯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의식적으로, 느슨한 당으로서 활동했다.” 두 사람과 함께 활동한 네트워크는 주로 옛 공산주의자 동맹 회원들과 그 외 1848년 혁명의 베테랑들로 이뤄져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인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훗날 독일 사회민주당(SPD)를 창당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30
몬티 존스턴은 이렇게 주장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그런 의미의 당은 그가 생각한 노동계급의 “임무”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즉, 노동계급이 ‘사회 내의 혁명적 열망’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자신의 일반적 존재 조건에서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역사적 과제’를 완수하는 과정이었다.”31 물론, 이것 자체도 매우 정치적인 작업이었다. 특히 1850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했던 분석을 생각해 보면 더 그렇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음 혁명의 물결이 또 다른 경제 위기의 분출에 달려 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1857년 다음 경제 위기가 찾아오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처음에 그 위기의 정치적 파장에 관해 낙관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그 위기에 관한 소책자를 함께 써서 ‘우리가 아직 여기에 있고 언제나 있었다’고 독일 대중에게 선포하자”라고 제안하기도 했다.(MECW40: 225) 마르크스는 “1857년 위기에 관한 책”이라고 일컬은 것을 엮기도 했다. 거기서 마르크스는 그 작업을 위해 수집한 방대한 기사들과 통계들을 체계적으로 나열한다. 32 혁명이 부활할 것이라는 기대가 꺾인 뒤에도, 마르크스가 자신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부여한 정치적 중요성은 1858년 11월 12일 라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그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출판사에게 원고를 보내지 않은(과연 그다운 일이다)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썼다. “그 원고에는 사회 관계에 관한 중요한 시각이 최초로 과학적으로 자세히 설명돼 있네. 따라서 이 작업은 당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고, 그래서 기개 없는 자들에게나 어울리는 지루하고 딱딱한 서술로 망쳐서는 안 되네.”(MECW 40: 354) 33
그러나 마르크스가 가장 우선시한 일은 다른 일들로 인해 끊임없이 일시 중단되고, 끝을 모른 채 계속 이어진 “정치경제학 비판”이었다. 특히 《런던 노트》(1850~1853)에 기록된 집중적인 연구와, 《그룬트리세》(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857~1858)를 비롯한 일련의 원고들을 쓰는 데 주력했고 10년 후 그 결실로 《자본론》 제1권을 내게 된다.34 망명자들의 언쟁을 제외하면, 마르크스는 논평을 하는 데 그쳤다. 그 논평은 대부분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기고한 기사들(때로는 엥겔스가 대필을 하기도 했다)을 통해 이뤄졌다. 이 기사들은 마르크스가 정치적·경제적 분석을 발전시키는 실험실 구실을 했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더 큰 역사적 의미에서의 당”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엥겔스가 주고받은 서신을 보면 그들이 당대의 정치적 사건들을 면밀하게 추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서신들에는 주요 정치 지도자들과 그들의 혁명적 반대자들에 대한 신랄한 논평이 꾸준히 담겨 있다. 때때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논쟁에 휘말려 들어가기도 했다. 가장 두드러진 사례로 1860년에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작업을 중단하고 동물학자인 카를 보그트와 논쟁하는 책을 한 권 쓰기도 했다. 프랑크푸르트 의회 지도자의 한 명이었던 보그트는 황제 나폴레옹 3세의 끄나풀이었는데, 마르크스에게 경찰 끄나풀이자 갱단 두목이라는 누명을 씌우려 했다.1864년 9월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영국과 프랑스의 노동자 조직들이 마르크스의 도움을 받아 폴란드 독립 투쟁을 지지하는 회합을 열었는데, 거기서 국제노동자협회를 출범한다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이것이 제1인터내셔널이다. 제1인터내셔널의 형성은 1848년의 혁명들이 패배한 후 진보적 정치와 노동자 운동이 되살아났음을 나타냈다. 개러스 스티드먼 존스에 따르면
잉글랜드에서는 세 가지 변화가 특히 중요했다. 그런 변화가 없었다면 국제노동자협회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는커녕 창립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첫째 변화는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공화주의적 운동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었다. 이것은 합스부르크 왕가, 부르봉 왕가, 러시아 전제 군주정에 맞선 이탈리아, 폴란드 등지의 감동적이고 영웅적인 민족 투쟁에 대한 지지로 표현됐다. 이것만큼이나 중요했던 둘째 변화는 노예제 폐지와, 미국 내전을 벌이는 북군의 대의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커진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운동들은 근본적인 셋째 변화 없이는 그 파장을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노동조합의 역량과 정치적 영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36 이 노동조합들은 숙련 노동자 사이에 기반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건설 부문과 금속노동자들이 두드러졌다. 이 노동조합들은 계급 전체를 아우르는 형태의 조직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런던노동조합회의(1860년)와 영국노총(1868년)이 대표적 사례다. 인터내셔널에는 영국 노동조합들과 더불어 유럽 대륙의 노동자 단체들과 급진적 정치 경향들이 포함돼 있었다. 프랑스의 프루동 지지자들과 이탈리아의 주세페 마치니 지지자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이 연합의 총평의회에서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마르크스였다. 인터내셔널의 창립 문서를 작성한 것도 그였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이렇게 불평했다. “나는 규약 서문에 ‘의무’와 ‘권리’에 관해 두 문장을 넣고, ‘진리, 도덕, 정의’에 관한 문장도 넣어야 했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아무런 해가 되지 않도록 배치해 뒀지.”(MECW 42: 18) 국제노동자협회는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는 마르크스의 근본적 개념을 받아들였다.(“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에 의해 쟁취돼야 한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정치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따라서 정치 권력의 장악은 노동계급의 중대한 의무가 됐다.”)(MECW 20: 14,12) 두 원칙 중 후자는 이후 프루동 지지자들과 바쿠닌 지지자들의 강력한 도전에 부딪히게 된다.
제1인터내셔널의 중심에는 23개의 영국 노동조합이 있었다. 그 조합원들은 2만 5000명에 이르렀다. 마르크스는 이 조합원들을 “런던의 진정한 노동자 왕들”이라고 일컬었다.(MECW 42: 44)과로하고 있네. 한편으로는 내 책을 완성하는 작업에,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노동자협회’에 상당한 시간을 들여야 하는 상황이야.”(MECW 42: 149) 이는 이론과 실천의 상호 수정受精으로 이어졌다. 마르크스의 가치론과 잉여가치론이 요약된 고전인 “가치, 가격, 이윤”은 원래 총평의회를 위해 쓴 것이었다. 이 글을 통해 마르크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로버트 오언의 한 지지자가 편 주장, 즉 임금은 최저 수준 이상으로 오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조합 투쟁은 무익하다는 주장을 논박하려 했다. 동시에 당시 노동조합 투쟁의 경험은 《자본론》 제1권에, 특히 노동 시간을 다룬 장에 반영됐다. 37
국제노동자협회의 초창기인 1864~1867년에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3권의 수고를 쓰고, 엥겔스의 끈질긴 재촉에 못 이겨 《자본론》 제1권을 완성해 1867년 9월 출판하게 된다. 지적 창조력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마르크스는 조직 노동계급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운동의 하나를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1865년 5월 1일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이렇게 불평했다. “나는 정말인터내셔널이 일궈낸 결과네. 예를 들어 트라팔가 광장의 장군인 [벤저민 — 캘리니코스] 루크래프트는 우리 총평의회의 일원이지.”(MECW 42: 289-289)
인터내셔널은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는 노동자 투쟁에 대한 연대를 건설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특히 파리의 청동 노동자 투쟁, 런던의 제본공 투쟁과 제단사 투쟁, 제네바의 건설 노동자 투쟁이 중요한 사례다. 파업을 파괴하고자 대체 인력을 외국에서 들여오는 것에도 인터내셔널은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초점은 경제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었다. 인터내셔널에 관여하는 영국의 노동조합들은 ‘개혁 동맹’을 주도했다. ‘개혁 동맹’은 1866~1867년에 옛 차티스트 운동의 요구인 남성 보통 선거권을 요구했고, 1867년 선거법 개혁으로 선거권의 상당한 확대를 쟁취했다. 마르크스는 1866년 6~7월 트라팔가 광장에서 열린 ‘개혁 동맹’의 대규모 집회를 보고 엥겔스에게 이렇게 썼다. “런던에서 열린 노동자 집회는 1849년 이래 잉글랜드에서 열린 어느 집회보다도 대단했네. 그리고 그 집회는 오로지38 그러나 이처럼 자본주의를 세계 체제로 본다면, 저항은 단지 개별 국가에서 임노동과 자본 사이의 투쟁으로만 나타나는 게 아닐 것이다. 국제적 차원에서 힘의 위계와,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 통합된 여러 착취 형태에서 비롯하는 다양한 정치적 해방 운동도 벌어질 것이다. 임노동과 자본의 직접적 관계 바깥에 있는 착취 형태들 중에서 마르크스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 노예제였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이렇게 썼다.
물론, 인터내셔널의 시야는 확고하게 국제적이었다. 마르크스의 시야도 마찬가지였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세계 경제 시스템으로 분석하고자 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발전시키면서, 특히 《자본론》 제1권을 거듭 개정하면서, 자본 축적이 낳는 경향들 — 자본의 집적과 집중, 산업예비군의 발전, 이윤율 저하 경향 — 이 서구의 영토 확장과 식민 지배를 추동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로써 마르크스는 20세기 초 로자 룩셈부르크와 레닌, 부하린 등이 발전시킨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론을 예고한 것이다.면직 산업이 잉글랜드에 아동 노예제를 들여왔다면, 미국에서 그 산업은 대체로 가부장적인 과거의 노예제를 상업적 착취 체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사실, 유럽 임금 노동자들의 은폐된 노예제에는 신세계의 노골적인 노예제라는 발판이 필요했다.
40 앞서 언급한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앞날을 내다보며 이렇게 묻는다. “사태가 머지않아 심각해지면, 맨체스터는 어떻게 될까?”(MECW 41: 5) 미국 남부의 노예 플랜테이션은 초국적 경제 복합체의 일부였고, 최초의 자본주의적 대규모 근대 산업 단지를 이루고 있는 잉글랜드 북서부의 방직 공장들과 긴밀하게 엮여 있었다. 노예 플랜테이션은 그 공장들에서 주 원료로 쓰는 면화를 생산했고, 그 면화는 리버풀의 상인들과 선박 소유주들을 통해 공급됐다. 41
마르크스는 1860년 1월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 세계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대한 사건은 노예 운동이네. 한편에서 그 운동은 미국에서 ⋯ 다른 한편에서 그 운동은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네.”(MECW 41: 4) 러시아의 농노 해방은 아래로부터의 거대한 격변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1860년 11월 에이브러햄 링컨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남부 노예주들의 분리와 거대한 투쟁을 촉발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각주에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미국 내전”이라고 썼다.스벤 베커트는 이렇게 지적했다.
고용 규모나 산출량, 이윤 등 여러 면에서 면화 제국은 독보적이었다. 한 저자의 과감한 추산에 따르면, 1862년 전 세계 인구 중에서 2000만 명 — 65명 중 1명 꼴이다 — 이 면화 재배나 면직물 생산에 관여했다. 전 세계 기계식 방직기의 3분의 2가 잉글랜드의 공장에 있었고, 잉글랜드 인구의 5분의 1에서 4분의 1이 그 산업으로 먹고살았다. 영국 자본의 10분의 1이 그 산업에 투자됐고, 모든 수출품의 절반 가까이가 면사와 천으로 이뤄져 있었다 ⋯ 1861년 세계 자본주의 선두 주자인 영국은 뉴욕과 뉴올리언스, 찰스턴 등의 미국 항구에서 오는 백금에 위험하리만치 의존하고 있었다. 1850년대 말 영국에서 소비된 면화 8억 파운드 중 미국에서 재배된 면화는 77퍼센트를 차지했다.
43 남부 주의 대리자들은 면화 기근을 이용해 남부 연합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획득하려 했다. 이 시도는 성공할 가능성이 꽤 있었는데, 영국 지배계급의 중요한 일부가 미국 내전에 개입하려 했기 때문이다. 영국 지배계급은 그 개입을 통해 미국이 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쟁자로 부상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한편, 이에 대항하는 북부 연방 지지 운동도 있었다. 이 운동을 이끈 존 브라이트 등의 국회의원들은 자유당의 급진파(자유 무역을 지지하지만 노예제와 귀족 특권에 반대했다)에 속했고, 나중에 인터내셔널을 구성하게 되는 노동조합들 사이에서 특히 기반이 있었다. 44 가장 위험한 전쟁 위기가 불거진 1861~1862년의 트렌트 사건이 끝난 후 마르크스가 논평했듯이, “적어도 잉글랜드의 노동계급은 난국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미국인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MECW19: 137)
그래서 미국 내전이 초래한 “면화 기근” — 처음에는 남부 연합이 수출을 금지했고 그 뒤에는 북부 연방이 반란 주州들의 교역을 봉쇄했다 — 은 경제적으로 파괴적인 효과를 냈다. “1863년 초 랭커셔 주민의 4분의 1 — 50만 명이 넘었다 — 이 일자리를 잃고 일정한 형태의 공공 부조나 민간 부조를 받았다.”마르크스와 엥겔스 자신은 북부 연방의 대의를 강력 지지했다. 그러나 그 지지는 계급적 이익에 기초한 것이었다. 예컨대, 1861년 10월 “미국 내전”이라는 글에서 마르크스는 남부의 승리(전쟁 초기에는 꽤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가 가져올 결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남부가 승리하면 북부 연방은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재조직될 것이다. 즉, 북부 연방은 노예를 소유한 과두 집단의 지배를 인정하는 가운데 노예제를 기반으로 재조직될 것이다 ⋯ 노예제가 미국 연방 전체를 감염시킬 것이다. 북부 주에서는 흑인 노예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백인 노동계급이 점차 노예와 같은 처지로 끌려 내려올 것이다. 이는 특정 인종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요란하게 선포된 원칙과 전혀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남부에서 실제 노동을 수행하는 것이 흑인의 숙명이듯이 북부에서는 독일인, 아일랜드인과 그들의 직계 후손들이 그 숙명을 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남부와 북부가 벌이는 투쟁은 두 사회 체제, 즉 노예제와 자유 노동 체제 사이의 투쟁이다. 그 투쟁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두 체제가 평화 공존하는 것이 더는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그 투쟁은 한 체제가 다른 체제를 이겨야만 끝날 수 있다.(MECW 19: 50)
인터내셔널은 미국 내전이 끝날 무렵에야 결성됐다. 그 전쟁에 관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실상 논평자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북부 연방 장군들의 나약함에 종종 좌절감을 느꼈다. 그러나 엥겔스와 주고받은 서신에서 마르크스는 링컨이 남부를 패배시키기 위해 흑인 연대를 창설하는 등의 혁명적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 1862년 9월 22일 링컨은 이듬해 1월 1일에 노예 해방을 선포하겠다고 발표하는 가장 급진적인 행보를 취했는데, 이에 관해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링컨의 선언은 마치 한 변호사가 상대 측 변호사에게 제시하는 합의 조건처럼 편협하고 장황하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선언의 역사적 중요성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세. ⋯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나도 양키[북부의 미국인]들의 운동이 취한 방식에 매스꺼움을 느끼네. 그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본성을 고려하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네. 그렇다 해도 그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세계적 변혁이라고 할 만한 일일세.(1862년 10월 29일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MECW 41: 421)
마르크스는 링컨의 능력을 과소평가했지만 그의 행위를 과소평가하지는 않았다. 1864년 11월 링컨이 대통령에 재선하자 마르크스는 링컨에게 재선을 축하하는 총평의회의 서한을 작성했다. 그 서안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문단이 포함돼 있다.
노동자들은 북부의 진정한 정치적 힘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노예제가 자기 공화국을 더럽히는 것을 용인하고,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판매되고 주인이 정해지는 흑인 앞에서 자신을 팔아먹고 자기 주인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을 백인 노동자의 최고 특권으로 내세우는 한, 노동자들은 진정한 노동의 자유를 얻을 수 없고 유럽에 있는 동료 노동자들의 해방 투쟁을 지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진보를 가로막는 이런 장벽이 내전의 피바다에 휩쓸려 무너진 것입니다.(MECW 20: 20)
46 이처럼 마르크스는 근로 계급의 한 부위가 인종적으로 예속되면 그들과 같은 차별을 겪지 않는 부위도 함께 약화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했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미국에 관한 글에서 잘 발전시킨 이런 통찰은 더 광범한 적용이 가능했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있는 산업 자본주의의 핵심부가 나머지 세계를 예속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 해방 투쟁은 단지 유럽에 잔존하는 구체제에서 비롯하는 것(이탈리아, 폴란드, 헝가리에서 일어난 민족 해방 투쟁이 그런 사례였다)이 아니었고,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등장하던 시기에도 계속 이어졌다. 47 이와 관련해서 마르크스는 제1인터내셔널에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그중에는 나중에 그의 사위가 되는 폴 라파르그도 있었다)과 대결해야 했다. 그들이 민족성은 “시대에 뒤떨어진 편견”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1866년 6월 29일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전날 총평의회에서 벌어진 논쟁을 이렇게 묘사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1권에서 같은 논점을 짚는다. “하얀 피부의 노동자는 검은 피부의 노동자가 낙인이 찍히는 곳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다.”민족을 폐기한 우리의 친구 라파르그와 그 일파가 청중의 10분의 9가 알아듣지 못하는 “프랑스”어로 연설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내가 운을 떼자, 잉글랜드 대표가 박장대소했네. 더 나아가 나는 라파르그가 모든 민족을 모범적인 프랑스 민족으로 흡수하는 것을 ‘민족의 폐지’로 무의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네.(MECW 42: 287)
48 아일랜드의 상태는 인터내셔널에 긴급한 정치적 사안이었다. 전횡적 소작제를 시행하는 영국계 아일랜드인 부재지주들에 맞서 투쟁이 성장하고 있었고(이는 1879~1882년 이른바 ‘토지 전쟁’으로 발전한다), 페니언들(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이 다양한 테러리즘 ‘만행’을 벌이는 등 영국의 지배에 맞선 무장 투쟁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상황을 면밀하게 조사하며 아일랜드의 경제나 역사에 관한 정보들을 서신으로 주고받았다.
민족 해방 투쟁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드러낸 사건은 바로 아일랜드의 투쟁이었다. 영국 국가는 자본주의가 득세하기 전에 이미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병합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의 가장 빼어난 대목에서 설명하듯이, 19세기의 아일랜드는 기근과 영국·미국으로 향한 대량 이민의 결과로 “바다 건너 잉글랜드에 옥수수, 양모, 소, 신참 노동자, 신병을 제공하는 잉글랜드의 농업 지구”로 전락했다.1867년 11월 2일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한때 아일랜드가 영국과 분리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분리가 불가피하다고 보네. 분리한 뒤에 연방을 이루게 될지는 몰라도 말일세.”(MECW 42: 460) 몇 주 후 마르크스는 그러한 견해를 더 발전시켰다.
아일랜드에 필요한 것은
1. 자치와 잉글랜드로부터의 독립
2. 농업 혁명 ⋯
3. 잉글랜드에 맞선 보호 관세. 1783~1801년에는 아일랜드의 모든 산업 부문이 번창했다. 잉글랜드는 아일랜드 의회가 설정한 보호 관세를 무력화해서 아일랜드의 모든 산업 활동을 파괴했다. 얼마간 남은 아마포 생산업은 사라진 산업 활동을 결코 대체하지 못한다. ⋯ 아일랜드는 독립하자마자 캐나다나 오스트레일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필요에 의해 보호 무역 정책을 취할 것이다.(MECW 42: 486-487)
마지막 요구는 특히 흥미로운데, 그 전까지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적 경제 민족주의자들에 맞서 자유 무역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리스트나 미국의 헨리 캐리 같은 경제 민족주의자들은 영국 자본주의의 지배력에 맞서 자국의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보호 무역 정책을 옹호했다. 그런데 위 글에서 마르크스는 “자치령” 지위를 인정받은 영국 식민지들 —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에이먼 데벌레라가 이끈 남아일랜드도 그중 하나였다 — 이 실제로 추구했던 노선을 예견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아일랜드 독립을 지지한 것은 단지 아일랜드인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1869년 12월 10일 엥겔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끝내는 것에 직접적이고 절대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네. ⋯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우위를 점한 잉글랜드 노동계급이 아일랜드의 지배 체제를 타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네. ⋯ 그러나 자세히 연구해 보면서 정반대 결론을 확신하게 됐네. 잉글랜드 노동계급은 아일랜드를 떨쳐 내기 전에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을 걸세. 혁명의 지렛대는 바로 아일랜드에서 눌러야 하는 것이네. 그래서 아일랜드 문제가 사회 운동 일반에 그토록 중요한 것이네.(MECW 43: 398)
아일랜드를 위한 정의에 관한 온갖 “국제적”이고 “인도적인” 어구들 — 인터내셔널 평의회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네 — 과 상관없이, 잉글랜드 노동계급은 현재 아일랜드와 맺고 있는 관계를
마르크스는 두 오랜 독일 동지인 지그프리트 메이어와 아우구스트 보그트에게 보낸 마땅히 유명한 편지에서 자신의 견해를 가장 자세히 밝혔다.
기실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지배를 나타내네. 따라서 아일랜드는 잉글랜드 귀족이 잉글랜드에서 지배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일세.
아일랜드는 잉글랜드 토지 귀족의 보루이네. 그들에게 아일랜드의 착취는 물질적 부의 주된 원천의 하나일 뿐 아니라, 정신적 힘의 가장 큰 원천이기도 하네. 아일랜드의 착취는아일랜드에서 농업 혁명이 일어날 것이네.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 귀족이 타도되면 잉글랜드에서도 즉시 귀족이 타도될 것이네. 이는 잉글랜드에서 노동자 혁명이 일어날 조건을 마련할 것이네. ⋯ 잉글랜드 부르주아지 또한 현 아일랜드 경제에 매우 중요한 이익이 걸려 있네. 지상권이 소수에게 꾸준히 집중된 결과 아일랜드는 잉여 인구를 잉글랜드의 노동 시장에 꾸준히 공급하게 됐네. 이는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임금을 떨어뜨리고 그들의 물질적·정신적 상태를 악화시켰네.
잉글랜드의 군대와 경찰이 당장 내일 아일랜드에서 철수한다면 즉각프롤레타리아와 아일랜드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적대 진영으로 분열한 노동계급을 잉글랜드의 모든 산업·상업 중심지가 갖게 됐다는 것일세. 평범한 잉글랜드 노동자는 아일랜드 노동자를 자신의 생활 수준을 악화시키는 경쟁자로 여기며 그들을 증오하네. 잉글랜드 노동자는 아일랜드 노동자들을 보며 자신이 지배 민족의 일원이라고 느끼고, 기꺼이 아일랜드에 맞서 자신의 귀족과 자본가의 도구가 되고, 그럼으로써 자신에 대한 귀족과 자본가의 지배력을 강화시키네. 잉글랜드 노동자는 아일랜드 노동자에 대한 종교적·사회적·민족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네. 잉글랜드 노동자가 아일랜드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미국의 “가난한 백인들”이 옛 노예주州 흑인을 대하는 태도와 얼추 비슷하다네. 이에 아일랜드인은 되로 받은 것을 말로 갚으려 하면서 제 살 깎아 먹기를 하고 있네. 아일랜드 노동자는 잉글랜드 노동자를 잉글랜드에 의한 아일랜드 지배의 공모자이자 어리석은 도구로 여기지.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이 있네! 그 덕분에 잉글랜드이 적대는 언론과 교회, 풍자지, 즉 지배계급 수중의 모든 수단에 의해 인위적으로 유지되고 강화되고 있네. 바로 이 적대가 잉글랜드 노동계급이 조직돼 있는데도 무기력하게 남아 있게 하는 비결이네. 자본가계급이 권력을 유지하는 비결인 것이지. 그리고 자본가 계급은 이를 잘 알고 있네. ⋯
추상적 정의나 인도주의적 정서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해방시킬 첫 번째 전제 조건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네.(MECW 43: 473-475)
잉글랜드는 자본의 중심지이자, 현재까지 세계 시장을 지배해 온 강대국으로서 노동자 혁명에서 현재 가장 중요한 나라이네. 거기에 더해 잉글랜드는 그 혁명의 물질적 조건이 어느 정도 성숙한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지. 따라서 잉글랜드에서 사회혁명을 앞당기는 것은 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목표네.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아일랜드를 독립시키는 것이네. ⋯ 런던에 있는 중앙위원회의 특별한 임무는 잉글랜드 노동계급에게 아일랜드 민족 해방이
49 이러한 변화는 대규모 목장 소유주 계급의 출현을 촉진했다. 그리고 이들은 1918~1923년 아일랜드 독립 전쟁과 내전에서 등장한 보수적인 ‘아일랜드 자유국’의 사회적 기반을 이루는 데 한몫했다.
인종에 따른 분열(빅토리아 시대의 대다수 영국인이 아일랜드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이를 부추겼다)의 위험성을 보여 주고자 하는 글에서 마르크스가 인종차별적 언어를 쓴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는 인종차별을 거부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종차별적 담론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게다가 마르크스는 영국계 아일랜드인 지주들이 영국 제국주의에 갖는 중요성을 과대평가했다. 아일랜드 자치 문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영국 지배계급 정치를 양극화시키고, 1880년대에 자유당을 분열시키고, 1914년 여름에는 내전 가능성까지 제기되게 했지만, 지배계급은 매우 가차없이 영국계 아일랜드인 귀족을 저버렸다. 영국의 자유당 정부와 연합주의 정부[1895~1905년 보수당과 연합주의 자유당의 연정] 모두 아일랜드의 대대적인 토지 개혁을 도입했다. 헨리 패터슨에 따르면 “토지와 관련된 일련의 입법 끝에 1903년 ‘윈덤 법’을 도입하면서, 불만의 초점이 돼 왔던 지주 계급이 제거됐다. 제1차세계대전 무렵에는 전체 농민의 3분의 2에서 4분의 3이 토지 소유자가 된 것으로 추산된다.”이런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주장은 여전히 중요하다. 첫째, 1861년에 쓴 “미국 내전”과 마찬가지로, 앞에서 인용한 서한은 이민자 유입이 상이한 나라들의 노동계급 형성 과정에서 하는 구실을 마르크스가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미국에서는 아일랜드인과 독일인이 노동계급을 형성하는 데서 일정한 구실을 했다면, 영국에서는 아일랜드인이 그랬던 것이다. 이런 이해의 바탕에는 산업예비군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이 있다. 마르크스는 기술 변화와 식민 지배의 결과로 산업예비군이 끊임없이 생겨나서 저렴한 신규 노동력 보충대가 자본에 국제적으로 제공된다고 지적했다. 둘째, ‘정주’ 노동자들과 이주 노동자들 사이의 노동 시장 경쟁이 낳는 긴장은 훗날 그람시가 ‘시민사회’라고 일컫는 이데올로기 기구에 의해 격화되면서 인종적 적대로 굳어질 수 있고, 그 결과 노동계급이 분열하고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피억압 민족이 정치적 해방을 위해 벌이는 투쟁을 사회주의자들이 적극 지지하는 것이 ‘정주’ 노동자는 물론 노동계급 전체에 이롭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일랜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런 투쟁이 자본주의의 한계 내에 머물더라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마르크스는 이러한 통찰에 따른 노선을 더 추진하지는 못했다. 인터내셔널은 처음에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그 다음에는 1871년 파리 코뮌을 거치면서 커다란 위기에 빠졌다. 인터내셔널 총평의회에서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을 옹호한 《프랑스 내전》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갈수록 양측의 공격에 시달렸다. 왼편에서는 바쿠닌과 그의 지지자들이 마르크스를 공격했고, 그 결과 인터내셔널은 갈수록 심각한 내부 분파 투쟁에 휩싸였다. 한편, 《프랑스 내전》이 언론들의 격분을 자아내고 이내 마르크스도 그 책의 저자로서 언론들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자, 총평의회의 중심추 구실을 하던 영국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마르크스를 저버렸다. 이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스티드먼 존스가 지적하듯이 영국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생각에 “인터내셔널의 근본 목표는 ⋯ 영국의 사회적 입법(노동 시간 제한, 아동 노동 금지 등)과 새로운 ‘합동’ 노동조합 운동 모델의 성과를 유럽과 세계의 다른 나라들로 전파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1867년 선거법 개혁으로 탄생한 유권자 대중에게 호소하는 새로운 부르주아 진보 정치를 개척한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자유당 당권을 잡게 되자, 과거에 브라이트 등의 ‘급진파’와 협력한 경험이 있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자유당을 매력적인 정치적 근거지로 여기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일찍부터 그러한 변화를 감지했다. 1868년 4월 6일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글래드스턴이 아일랜드 교회의 국교 지위 폐지를 옹호하는 것에 관해 이렇게 논평했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당에 불리한 효과를 낼 것이네. [조지] 오저와 [조지] 포터 등 차기 의회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노동자들 사이의 음모꾼들이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과 찰싹 달라붙을 새로운 핑계를 발견하게 될 테니 말일세.”(MECW 43: 3) 한때 마르크스의 동맹자였던 노동조합 인사 중 많은 수가 자유당-노동당 제휴파가 됐다. 이것은 종속된 형태의 노동계급 정치의 하나로서 19세기 말 영국 노동당이 등장할 때 분쇄돼야 했다.
1872년이 되면 인터내셔널은 영향력을 잃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전성기에 마르크스가 발전시킨 통찰들은 지속적인 중요성을 띠었다. 이후 레닌은 1917년 국가에 관한 저작을 쓰면서 그 통찰들을 재발견하고 《국가와 혁명》에서 더 발전시켰다. 1914년 이전에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쟁에서 레닌은 마르크스가 아일랜드에 관한 저작에서 제시한 견해를 응용했다.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은 자기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헤게모니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을 위한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고 레닌은 강조했다. 레닌의 지도하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그 주장을 더 일반화했다. 제국주의의 시대에 혁명적 노동자 운동은 식민지 반란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민족 문제에 관해서도 그의 계승자들, 특히 10월 혁명의 지도자들인 레닌과 트로츠키가 발전시킨 분석과 전략의 토대를 놓았다.
결론
물론, 마르크스의 정치적 개입에는 문제적인 측면도 있다. 가장 쉽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조직 문제에 관한 상대적으로 느슨한 태도다. 이런 태도는 그가 비교적 엄격하고 음모적인 공산주의자동맹에 참여하는 한편, 좀처럼 통제를 따르지 않고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이질적인 제1인터내셔널을 지도한 것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심지어 몬티 존스턴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에 나타나는 당 “모델”을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각 모델은 주어진 시기나 주어진 나라에서 나타난 노동계급 운동의 단일한 또는 복수의 발전 단계에 상응한다. ⋯ (1) 국제적 공산주의자 핵심 활동가들의 소규모 조직 (1847~1852년의 공산주의자동맹) (2) 조직 없는 “당” (1850년대에서 1860년대 초에 이르는 노동자 운동의 퇴조기) (3) 노동자 조직들의 광범한 국제 연맹 (1862~1872년의 제1인터내셔널) (4) 전국적 마르크스주의 대중 정당 (1870년대와 1880년대, 1890년대 초의 독일 사회민주주의당) (5) 차티스트 운동 모델에 기초한 광범한 전국적 노동자 정당 (1880년대와 1890년대 초 영국과 미국)
마르크스의 정치 저작을 관통하는 공통된 줄기는 종파주의에 대한 적대다. 1871년 11월 23일 프리드리히 볼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이 편지는 당시 생명을 다하고 있던 인터내셔널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인터내셔널을 설립한 취지는 사회주의 종파나 반半사회주의 종파들을 진정한 노동계급 투쟁 조직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네. 최초 규약과 창립 연설을 보면 대번에 이를 알 수 있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터내셔널은 역사의 진로가 미리 종파주의를 분쇄하지 않았다면 제자리에 서지 못했을 것이네. 사회주의적 종파주의의 발전과 진정한 노동자 운동의 발전 사이에는 언제나 길항 관계가 있네. 종파의 존재가 (역사적으로) 정당한 동안에는 노동계급이 독자적인 역사적 운동을 일으킬 만큼 성숙해 있지 않은 것이지. 그러나 노동계급이 그만큼 성숙해지는 즉시 모든 종파는 근본적으로 반동적이 되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처의 역사에서 벌어지는 일이 인터내셔널의 역사에서도 되풀이된 것이네. 새롭게 성취된 형태 속에서 낡은 것이 다시 자신의 힘과 자기 자리를 되찾으려 한 것이지.(MECW 44: 252)
52 그래서 마르크스는 당이 어떤 조직적 형태를 취해야 하냐는 문제에 실용적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쿠닌의 도전, 다른 한편으로는 훗날 자유당-노동당 제휴파의 도전은 그저 “낡은 것”의 재탕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그 문제는 마르크스가 죽고 1889년에 결성된 제2인터내셔널에서 더 큰 규모로 다시 돌아왔다. 특히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상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존 몰리뉴는 이렇게 썼다. “마르크스 사상의 강점은 유물론, 즉 경험과 투쟁에서 배우기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약점은 경제결정론과 낙관적 진화론이다.” 몰리뉴는 이렇게 지적한다. “당 건설에 관한 마르크스의 태도에는 숙명론의 요소가 강하게 있다. 노동자들의 계급성이 확실해지면 노동계급 운동 내의 여러 사상과 경향 사이의 투쟁이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주요 이론가인 카를 카우츠키가 옹호한 모델을 대체로 받아들였다. 그 모델은 다양한 경향이 공존하는 광범한 당의 틀 안에서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이 점진적으로 수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당과 제2인터내셔널에 속한 다른 정당들이 제1차세계대전에 보낸 지지는 그 모델을 위기에 빠뜨렸다. 이는 의회주의의 보수적 영향과 갈수록 강력해지는 노동조합 관료를 매개로 행사되는 개혁주의의 물질적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 줬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레닌과 볼셰비키는 다른 당 모델을 제시했다. 혁명가들이 개혁주의자들과 분리된 조직을 만들면서도, 노동자들의 일상적 투쟁에 적극 동참해서 노동자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체계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이 점에서 이 모델은 종파주의적인 “좌익” 공산주의자들과 달랐다).19세기 후반이 돼서야 대중적 노동조합과 대중적 사회주의 정당에서 온전히 드러난 문제를 마르크스가 예견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그가 속한 시대를 고려하지 않는 처사일 것이다. 오히려 마르크스가 처한 상황이 가한 제약 — 그것은 당시 자본주의의 발전 수준뿐 아니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비교적 드물었다는 점에서도 기인한다 — 을 고려하면 오히려 마르크스가 정치 지도자로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발전시킨 이론적 이해를 1848년 혁명과 제1인터내셔널에 적용했을 뿐 아니라, 실천 경험 덕분에 그 이해를 더 풍부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이론적 발전은 시간의 검증을 어떻게 견뎌냈는가? 1848~1849년 마르크스의 학습 과정은 실제 혁명을 겪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고, 오늘날 연속혁명론으로 알려진 것을 그가 예고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관계를 포착하는 데서 트로츠키가 남긴 업적은(물론, 트로츠키와 나란히 같은 결론에 도달한 레닌의 업적도) 마르크스의 이해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 업적들은 더 발전된 혁명의 경험과, 러시아 수준과 세계 수준의 자본주의 모두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물론, 그런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자본론》과 그것이 자극한 연구들 덕분이었다.
54 그러나 그 현재성은 오늘날 반자본주의 정치의 핵심을 이루는 사항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오늘날 자본 축적의 필요에 따라 국제적으로 동원되고 있고, 그에 따라 노동자들이 인종에 따라 분열할 수도 있지만 국제적 계급 연대를 이뤄낼 잠재력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1968년에도 반자본주의 정치의 핵심에 있었다. 당시 영국 보수당 소속의 총리 이넉 파월은 “피의 강물” 연설을 했고(이에 관해서는 이번 호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 실린 시린 허시의 글을 보라)[그 연설에서 파월은 이민자들을 공격하고 인종에 기초한 다양한 차별을 법제화하는 인종관계법을 제안했다 — 역자], 학생들은 국경을 넘나드는 반란을 일으켰다. 오늘날은 더할 나위 없다. 한편으로는 국가에 의한 인종차별과 극우의 공세가 전개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종차별과 파시즘에 반대하는 행동이 벌어지고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탐구하고 마르크스의 정치를 면밀하게 검토하다 보면 우리는 전혀 낡은 것이 아닌 사상을 조우하게 된다.
그러나 1860년대에 마르크스가 노동자 투쟁과, 민족 억압과 인종 차별에 맞선 운동 사이의 연관성에 관해 남긴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자본론》을 통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불균등 결합 발전의 역학으로 추동되는 세계 체제로 심층적으로 이해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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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lex Callinicos, “Marx’s Politics”, International Socialism 158(Spring 2018).
↩
- Harman, 1988 이 고양기를 다룬 고전적인 연구다. ↩
- 더 너그러운 글로는 Bidet, 2014이 있다. ↩
- 그렇다고 해서 푸코가 신자유주의에 동조한다는 오늘날 일각의 주장에 내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관한 푸코의 미묘하고 흥미로운 논의는 Foucault, 2008에 있다. ↩
- Fukuyama, 1992. ↩
- Fukuyama, 1989, p9.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헤겔의 역사 철학에 관한 매우 영향력 있는 해석을 제시한 저자다 —Kojève, 1969. 나는 Callinicos, 1995, chapter 1에서 그에 관해 다뤘다. ↩
- Fukuyama, 2016. ↩
- 이에 관해 더 자세한 논의와 《자본론》의 해석에 관해서는 Callinicos, 2014a를 보라. ↩
- Callinicos, 2014b. ↩
- Miliband, 1977, p2. ↩
- Kouvelakis, 2003, p351. ↩
- Gramsci, 1995, p401; Gramsci, 1975, II, p1317. ↩
- 이 글에 대한 사뭇 다른 독해는 Kouvelakis, 2003, chapter 5와 Finelli, 2016, chapter 5에 있다. ↩
- 각주가 넘쳐 나는 것을 막기 위해 Marx and Engels, 1975-2005에 대한 참조는 본문 안에 “MECW” 권 번호와 페이지 번호를 써서 표시하겠다. 밑줄 친 대목은 독일어 원문에서 영어로 쓰인 부분이다. ↩
- Marx, 1976, pp915-916. ↩
- Pradella, 2013, p130. Pradella, 2010, chapter 4에도 더 자세한 논의가 있다. ↩
- Marx 1976, p344; pp599-610에도 더 자세한 논의가 있다. Choonara, 2017에는 더 자세한 논평이 있다. ↩
- Marx, 1973, p108. ↩
- 이 대목이 흥미로운 것은 마르크스가 비교적 늦은 나이가 돼서야 1840년대 중반에 그의 저작에서 다루던 주요 주제의 하나로 돌아갔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 주제는 국가가 시민 사회의 소외된 형태이며, 혁명은 그런 분리를 허무는 것이라는 것이다. ↩
- Miliband, 1977, p6. ↩
- Harman, 1991, and Callinicos, 2009, chapter 2. ↩
- 나의 주장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치 활동 전반에 관한 어거스트 님츠의 탁월한 연구와 대체로 일치한다. Nimtz 2000. 이 글에서는 독일에서 노동자 정당을 구축하기 위한 두 사람의 노력을 다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님츠가 잘 다루고 있다. ↩
- 1848년의 마르크스에 관한 좋은 연구로는 Gilbert, 1981, part 2와 Sperber, 2013, chapters 6 and 7가 있다. 비록 두 연구에는 당시 저자들의 정치(각각 마오주의와 주류 자유주의)에서 비롯한 왜곡이 포함돼 있지만 말이다. 마르크스가 1848년과 그 직후에 쓴 글에 관한 자세한 분석은 Draper, 1978, chapters 7-10에 있다. 더 폭넓은 논의는 Löwy, 1981, chapter 1에 있다. ↩
- Sperber, 2013, p228. ↩
- 1814~1815년 나폴레옹의 패배로 영국과 러시아는 주도적인 유럽 국가가 됐다. 영국은 주로 경제적으로 힘을 행사했고, 러시아는 1848~1849년에 혁명 진압을 돕기 위해 투입한 군대를 통해 힘을 행사했다. ↩
- Tronti, 2006, p160. ↩
- Löwy, 1981, p15. 핼 드레이퍼는 마르크스가 이미 1844년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부터 “원시적 형태의 연속혁명론”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경험을 통해 견해를 수정하는 복잡한 경로를 밟았다. 처음에는 그런 시각에 근접하더니 다시 멀어지다가, 1848~1849년 혁명의 결과를 경험하고는 그런 시각으로 확실하게 되돌아와서 이를 더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Draper, 1978, p174. ↩
- Saville, 1987. ↩
- Callinicos, 1989와 Davidson, 2012. ↩
- Johnstone, 1967. ↩
- Nimtz, 2000, p155. ↩
- 《런던 노트》에 관해서는 Pradella, 2015, chapter 4를 보라. ↩
- Marx, 2017. ↩
- 마르크스의 위기론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Callinicos, 2014a, chapter 6에 있다. ↩
- 《보그트 씨》를 쓴 배경에 관한 더 공감 어린 설명은 Sperber, 2013, pp331-336를 보라. ↩
- Stedman Jones, 2016, p432-433. 더 일반적인 논의는 chapter 11를 보라. 실망스런 이 전기에서 가장 나은 부분이다. ↩
- Sperber, 2013, p357. ↩
- Roberts, 2017는 《자본론》 제1권에 관한 새로운 연구로, 마르크스와 다른 사회주의 경향 사이의 논쟁과 관련해서 그 책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
- Pradella, 2010, 2013, 2016. ↩
- Marx, 1976, p925. 신세계의 노예제에 관해서는 Blackburn, 1997와 Blackburn 2011을 보라. ↩
- Marx, 1976, p366, n78. 마르크스와 미국 내전에 관한 중요한 연구로는 Dunayevskaya, 1971, chapter 5와 Pradella, 2016, Anderson, 2010, chapter 3이 있다. ↩
- Beckert, 2014, chapters 5-8. ↩
- Beckert, 2014, Kindle locations 4388, 4401.. ↩
- Beckert, 2014, Kindle location 4486. Marx, 1981, pp219-234도 보라. ↩
- 영국과 미국 내전에 관해서는 Foreman, 2010를 보라. ↩
- 노예 해방 선언의 배경에 관해서는 Foner, 2010, chapter 7를 보라. ↩
- Marx, 1976, p414. ↩
- 1848년 혁명 동안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럽의 구체제를 분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기준으로 민족 문제에 접근했다. 그래서 그들은 독일, 헝가리, 폴란드의 자결권을 강력하게 지지했지만, 중부 유럽과 남동부 유럽의 범슬라브주의는 러시아 제정의 지원을 받는 반동적 운동으로 보고 반대했다. 그러면서 엥겔스는 몇몇 민족을 “몰역사적인” 민족이라고 무시하는 잘못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더 자세한 논의는 Callinicos, 1983, pp162-170에 있다. ↩
- Marx, 1976, p960. 산업혁명 동안 영국의 밀·가축 공급자로 “아일랜드를 재식민지화”한 과정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Belich, 2009, pp445-446를 보라.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입장에 관한 더 일반적인 논의는 Pradella, 2010, pp230-250과 Anderson, 2010, chapter 4에 있다. ↩
- Patterson, 1989, p10. 물론 토지 개혁은 영국 지배하의 아일랜드 사회의 모순을 끝내지 못했다. Allen, 2016, chapter 1은 부활절 봉기 직전의 아일랜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
- Stedman Jones, 2016, p458. ↩
- Johnstone, 1967. ↩
- Molyneux, 1978, pp30, 31. ↩
- Harman, 1968/9. ↩
- Pradella, 2010, 2013 and 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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