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뿌리내리고 이곳에서 싸운다:
아시아계 이주민들은 어떻게 영국 노동계급을 변화시켰나?
*
이주민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고 다인종 노동계급이라는 새로운 전통을 형성한 것이 다음 세대들에서 많은 조건을 개선시킨 핵심 이유였다. 이로 인한 영향은 건강, 고용, 교육, 심지어 대중문화(TV와 음악에서부터 스포츠, 음식, 패션까지)에서도 발견된다. 주요 기관 중 일부는 그에 따라 변화해야만 했는데(재차 강조하건대 일부만 그렇다), 가장 명백한 사례는 학교다. 오늘날 학교 커리큘럼에서는 다양한 문화를 찬양하는 것이 흔한 일이다. 이러한 개선을 일부 사람들은 점진주의의 결과로 본다. 말하자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이 그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비이성적 편견들이 교육으로 무너지고, 차별 금지법들이 도입돼 사회를 규제한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편견은 마냥 약해지기만 하지 않고, 법 체계도 사회가 변한다고 저절로 그에 맞게 조정되지 않는다. 이런 변화들은 언제나 살아 있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투쟁한 덕분에 가능해지는 것이고, 이 경우에는 아시아계 이주민들 자신이,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는 것을 과제로 삼은 소수의 인종차별 반대 활동가들(노동계급 내에서 성장하고 있던)이 투쟁한 결과다.
종전 후 영국에서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벌인 투쟁에서는 중요한 교훈을 많이 얻을 수 있다. 그 투쟁은 인종차별적 고용주와 지배계급 내 그 지지자들에 맞선 이야기이자, 노동조합 건설을 위한 그리고 노동조합 내에서 벌인 투쟁의 이야기이며, 많은 백인 노동자들의 편견을 극복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파시스트 국민전선National Front, 인종차별적 린치, 경찰의 인종차별과 정부의 이민 통제에 맞선 저항의 이야기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그 투쟁은 토착 노동자들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변화의 주체인 아시아계 노동자 자신을 변화시켜 영국 노동계급의 외부자에서 필수적 일부로 만들었다.
2 순종적인 노동자 집단 탓에 임금이 깎이고 부족한 자원을 놓고 다투게 됐다는 생각은 지배계급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그런 생각은 노동자들이 더 나은 조건을 요구하는 것을 억누르는 동시에 열악한 생활수준에 대한 책임을 지배계급이 아닌 다른 데로 돌리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노동력이 부족했던 그 시기에, 건설, 의류업, 기계 공장, 주조 공장, 제분소의 사장들은 막 입국한 이주민들을 가장 위험하고 지저분한 미숙련 일들에 마음껏 부려 먹었고, 그 이주민들이 원래 갖고 있던 기술이나 지위는 전혀 안중에 없었다. 사장들이 그 이주노동자들에게 백인 노동자들보다 낮은 임금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보통의 노동자들로부터 고립돼 있고 싸우지 못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아시아인이 저임금 일자리에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가 흔했다. 이들은 대개 영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했고 그래서 교육 수준도 낮고 저항의 전통도 없을 것이라 생각됐다. 많은 이들에게 아시아인들은 굽신거리고 순종적인 사람들로 보였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출신 여성 노동자들은 특히 다루기 쉬운 사람들, 즉 착취와 혹사당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대상으로 여겨졌다.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는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출신 이주민들에 대한 태도 역시 더 나을 게 없었고, 그들도 여러 산업 쟁의에서 나름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이러한 고립을 부추긴 것은 수백 년간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지배였다. 모든 영국인들은 자신이 지배 인종의 일부라고 여기도록 고취됐다. 백인 노동자는 쓰레기처럼 취급당하더라도 여전히 뭔가 위대한 것, … 즉 대영제국의 구성원이라는 것이었다. 제국의 피식민지인들은 자신들이 지배당하는 이유가 사회 계급을 막론하고 모두 백인보다 열등한 존재로 간주되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식민지에서도 충분히 해악적이었지만, 이제 그 피식민지인들이 백인들과 같은 지역 사회와 작업장에 있게 됐을 때, 그것이 노동계급에 미치는 효과는 훨씬 더 파괴적이었고 인종차별로 노동자들을 이간질할 수 있었다. 사트남 비르디는 이런 점을 19세기 영국과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사례를 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영국을 지배하는 인종의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좋은 일자리”에서 아일랜드인들을 배제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수단임이 입증됐다. 또한, 영국 인종의 유기적 일부로 여겨질 수 없는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데에도 마찬가지 효과를 냈다. 이를 통해 영국 노동계급은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또 다른 전략을 얻게 됐는데 새 전략에서는 광범한 계급적 연대를 구축할 필요도, 국가와 정면 대결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영국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만 하면 됐다.
이는 노동조합 관료층에, 이후에는 부상하는 노동당에 잘 어울리는 이데올로기였다. 노동조합들은 아시아인들이 부도덕한 사장들 때문에 피해를 입는 희생자인 동시에, 자신들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노동조합들은 전쟁 동안 공장을 가득 채웠던 여성 노동자들도 거의 비슷하게 위협으로 여긴 바 있다. 이주민과 여성 둘 다 영국의 작업장 현장에서 다져진 전투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영국노총TUC 지도자들은 노조 지부들이 이주노동자들을 환영하며 도와주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동시에, 정부에게는 “완전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이주민 유입을 규제하라고 탄원했다.
1958년 TUC 대의원대회에 매우 모순되는 결의안 하나가 제출돼 당시 운동이 공유하고 있던 생각을 보여 줬다.
영국에 건너오는 유색인들은 영국 제국의 신민들로서 그들이 태어난 곳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생존 수단을 찾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든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온 힘을 다해 이주민들이 일자리를 얻고 각자의 노동조합에 가입하도록 도와줌으로써, 그들이 품위 있는 인간으로서 일하며 살 수 있게 해 주기를 간곡히 요청한다. 이제 모든 외국인 노동자들이 영국에 들어오는 것을 멈춰야 할 때이다. 그들이 영국 노동자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황이 닥치면 시장은 값싼 외국인 노동자들로 넘쳐 나 노동조합 교섭력에 심각한 지장을 줄 것이다.
5 그 결과 많은 아시아계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직장에서의 집단행동이라는 생각 자체에 대해서도 그럴 법했다. 그들은 노조 상근 간부와 현장위원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고충을 무시하는 것을 종종 경험했고, 함께 힘들게 일하는 백인 노동자들의 냉담함이나 때로는 노골적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높은 전투성을 드러내는 시기, 그것도 그 중심이 노동조합 사무실이 아니라 현장에 있던 시기에는 이내 그 시대정신이 이주노동자들에게도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1964년과 1967년 사이에 약 2333건의 파업이 벌어져 259만 7000일이 넘는 파업일을 기록했다. 6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참가한 파업들도 이러한 보편적 추세의 일부였다.
많은 지역에서 노동조합들은 이주민들의 취업에 제약을 가했다. 특정 작업장에서 아프리카-카리브계, 아시아계 노동자들의 취업자 수를 제한하거나, 몇몇 곳에서는 그들을 일절 배제했다. 당시는 공식적 인종차별주의가 증가하고 그와 맞물려 거리에서 인종차별적 폭력이 자행되던 상황이었다. 1958년 노팅힐과 노팅엄에서 일어난 흑인 공동체에 대한 공격은 당시의 인종차별적 폭력과 공포 분위기가 가장 눈에 띄게 드러난 경우였다. 언론이 폭력에 대해 우려를 표했지만, 이민자들이 너무 많은 게 문제라는 생각이 광범하게 퍼져 있었다. 1961년 보수당이 다른 영연방 나라들로부터의 영국 이민을 규제하기로 했을 때, 노동당은 보수당이 인종차별주의당이라고 옳게 비난하면서 새로운 법안이 의도적으로 흑인과 아시아계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을 겨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흔히 그렇듯 노동당이 항의했던 이유는 그러한 명백한 차별로 인해 영국의 국익이 훼손될 것이기 때문이었지, 노동계급 단결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노동당 의원이자 곧 장관이 되는 바버라 캐슬은 이렇게 주장했다. “이 영연방 이민법에 맞서 싸우다가 내 의석을 잃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 이 법안 때문에 이 나라가 영연방을 잃게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1964년 스메드윅 보궐 선거에서 보수당 후보는 이렇게 쓴 리플릿을 이용해 노동당 의석을 빼앗을 수 있었다. “이웃에 깜둥이가 살길 바란다면 노동당에 투표하시오.” 그 후 노동당은 한때 자신들이 공격했었던 편견에 굴복하고 커져 가는 인종차별주의적 야단법석에 편승하기로 입장을 바꿨다. 그리고 그해 총선에서 당시의 이민법을 유지하는 대신에,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민법[유지]은 인종차별을 합법화하고, 이주노동자들을 “골칫거리”로 여기는 이들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효과를 냈다.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에 양보할 때마다 탄압을 한층 더 키워야 한다는 요구는 더 커지기만 했다. 이 시기에 아시아계 노동자들은 겁을 먹기는커녕 일터에서 인종차별을 끝내라고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1965년 프레스턴에 있는 코톨드의 레드스카 직물 공장과 런던 서부 헤이즈의 울프 고무 공장에서 첫 번째 중요한 파업이 시작됐다.레드스카 투쟁 레드스카 직물 공장은 거의 25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고, 그중 4분의 1이 아시아인(절반은 파키스탄인, 절반은 인도인 시크교도)이었다. 사측은 노동자들을 종족별로 따로 조직하며 영어를 구사하는 대표들을 각각 뒀고, 거의 모든 아시아계 노동자들은 숙련도와 임금이 가장 낮은 두 부서에 몰려 있었다. 문제가 불거진 것은 운수일반노조TGWU 상근 간부들과 현장위원들이 그 부서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수당을 겨우 3퍼센트 인상하면서 50퍼센트 더 힘들게 일하도록 하는 협상을 타결했을 때였다.
10 대부분의 기준에서 봤을 때 파업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사측은 다른 노동자들을 파업 부서에 투입해 85퍼센트의 가동률로 생산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파업 노동자들을 인종주의자라고 낙인찍은 것은 그들을 불리한 처지로 내몰았다. 파업은 요구들을 따내지 못한 채 끝났고, 피터 프라이어의 뛰어난 저서 《떠나지 않고 버티는 힘》을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서들은 백인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이 아시아계 노동자들을 지지하지 않은 것을 이 파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1
아시아계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공식적 지지 없이 파업에 돌입해 3주간 지속했다. 노동조합은 이 파업이 다른 노동자들을 희생시켜 아시아계 노동자들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부족적 행위”라고 비난했다. 노동조합의 공식적 지원이 없었음에도 파업 노동자들은 프레스턴 밖에서 온 흑인 민족주의 활동가들이 “흑인만”의 노동조합을 만들자고 부추겼을 때 이를 거절했다.[역주 — 영국에서 ‘흑인black’은 때때로 아시아계 등 비非백인들 모두 포괄한다.]12 챌리너는 이 파업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노동운동이 전폭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동조합 지부들과 노동당 모임들을 순회하며 파업 노동자들을 위해 모금하고 의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결과 챌리너는 파업 지도자들의 신뢰를 얻게 돼 파업 노동자 900명이 참가한 대규모 집회에서 기립 박수를 받았다. 버철은, 불리한 조건에서도 파업이 얻어 낸 두 가지 성과를 지적한다. 첫째, 아시아계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서 자신들이 그저 사장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부려 먹고 혹사시킬 수 있는 값싼 노동력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 둘째, 코톨드 사측은 자사 아시아계 노동자들의 높은 파업 지지 열정에 충격받았고, 생산 유지를 위해 감수해야 하는 문제가 그토록 많다는 것에도 놀랐다. 사측은 더 이상의 분규를 방지하려고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다수인 부서들의 조건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장단에 박자를 맞춘 것은 아니었다. 이언 버철은 국제사회주의자들IS(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전신) 회원인 레이 챌리너가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를 건설하려고 노력한 것에 대해 몇 가지 기록을 남겼다.그러나 셋째 성과도 있다.
13 이런 접근은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SWP와 그 전신들이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이나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확실한 것은 레이 챌리너와, 역시 IS 회원으로 레드스카 파업에 대해 ‘인종 관계 연구소’에 장문의 글을 쓴 폴 풋 둘 다 이 파업을 노동조합 운동 내부의 인종차별주의에 도전할 기회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파업에 관여한 목적은 파업 노동자들에 연대하기 위해서였을 뿐 아니라, 모든 백인 노동자들이 인종차별주의자인 것은 아니며 노동운동 안에는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싸우자고 설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려면 또한 노동계급 내부에서 회피되고 있던 쟁점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야 했다.
반反인종차별 좌파의 일부 비판가들은 마르크스주의가 노동계급 내에 존재하는 분열 문제를 무시하고 경시하거나, 계급의 단결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이 투쟁으로 필연적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조야하게 주장한다고 부정확하게 그리곤 한다.아마도 이 파업 자체의 논쟁적인 성격 때문에, 그리고 소수의 인종차별 반대 활동가들의 노력 덕분에 레드스카 파업이 노동조합의 중요한 화두가 됐고, TGWU에서는 이 파업을 논의하기 위해 하루 전체를 할애한 회의가 소집됐다. 어느 보고에 따르면, 후에 코톨드의 한 현장위원은 자신이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홀로 싸우게 했던 것은 실수였다고 노동조합에 속내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번 사례에서, 백인 노동조합원들은 이중 잣대를 받아들이고 노동조합의 원칙을 저버림으로써 이 투쟁이 유색 인종만의 파업이 되도록 방치했다. 이 현장위원은 원래 유색인 노동자들에게만 적용됐던 조건이 이후에는 어떻게 백인 노동자들에게도 강요됐는지를 말해 줬다.
백인 노동자들이 아시아계 노동자들과 분열하면 자신들 또한 무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노동계급이 이후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할 혹독한 교훈이 됐다. 이것은 1870년에 마르크스가 강조했던 점인데, 그는 영국에서 영국 노동자들과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빚는 갈등에 대해 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계속해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적대감이야말로 영국 노동계급이 자신의 조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무기력한 비결이다. 이것이 자본가 계급이 권력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이 점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다.”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오늘날 영국의 모든 산업과 상업 중심지에서 노동계급은 영국인 프롤레타리아와 아일랜드인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적대 진영으로 분열돼 있다. 평범한 영국인 노동자는 아일랜드인 노동자를 자신의 삶의 수준을 낮추는 경쟁자로 여기며 미워한다. 그는 아일랜드인 노동자와 비교해 자신은 지배 민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며, 그 결과 아일랜드에 맞서는 영국 특권 계급과 자본가들의 도구가 된다. 그렇게 해서 영국인 노동자들은 자신을 지배하는 자들의 힘을 강화해 준다.
울프 고무 공장의 울부짖음 1965년의 두 번째로 중요한 아시아계 노동자 파업은 자동차용 고무 부품 제조 공장인 울프에서 벌어졌다. 시급이 어찌나 형편없었는지 노동자들은 주 7일, 75시간 동안 일하기를 밥 먹듯이 해도 근근이 살아가기 빠듯했고, 많은 노동자들이 특근을 얻기 위해 작업 감독관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 이 공장의 미숙련 노동자 약 90퍼센트는 [인도 북부] 펀자브 출신의 시크교도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이 영어를 거의 못 했지만, 그들 중에는 인도 공산주의 운동과 연계된 ‘인도계노동자협회’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울프에 노동조합을 만들어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쓰레기처럼 취급당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뜻을 세웠다.
울프의 생산 라인 노동자 비슈누 샤르마는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 인도계노동자협회원들은 TGWU를 끌어들여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도록 애썼는데, 비밀리에 공동체 안에서 집집마다 돌아다녔기 때문에 사측은 이를 주도하는 사람들에 대해 알 수 없었어요. 두세 달 후 생산 부문에서 일하는 노동자 대부분이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이제 문제는 노동조합 상근 간부들에게로 넘어가 공장 사측과 협상을 하면 됐어요.
1964년에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인정받고 TGWU에 가입했지만 이듬해 사측이 합의를 파기하고 활동가들을 해고하면서 7주간의 파업으로 이어졌다. TGWU 전국 지도부는 파업 지지를 굳게 약속했다. 어쨌든 파업이 승리하면 모든 노동자들과 전국 지도부에 득이 될 터였다. 그러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TGWU의 동료 조합원들이 화물 트럭을 몰고 피켓라인[역주 — 대체 인력 출입을 막는 것. ‘피켓라인을 넘다’는 말은 대체 인력으로 투입돼 파업 파괴자 구실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을 넘었고 TGWU는 파업 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 신생 노조의 현장위원들은 활동의 효율을 높이고 연대를 키우기 위해서는 사측뿐만 아니라 자기 노동조합 관료들과도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파업 노동자들은 자기 고향의 전투적 전통을 이용할 수 있었다. 공동체 조직들이 음식과 파업 기금을 호소해 줬고, 많은 아시아계 집주인과 상점으로 하여금 쟁의 기간 동안 집세·외상의 납부 기한을 늦추도록 만들었다. 약 1500파운드(현재 가치로 약 2만 6000파운드[한화 약 4500만 원])를 기부와 모금으로 모았다.
로저 콕스는 울프 파업 당시 런던 북서부 기계 공장의 현장위원이었다. 그는 IS 회원들이 현장위원회를 운영하던 ENV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울프 파업을 지지한 것을 기억한다.
이민자들에 대한 인종차별 수준이 지금보다 끔찍했고 훨씬 더 나빴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해요. 아시아계 노동자 파업을 지지하는 사람을 늘리려면 논쟁을 벌여야 했어요. 심지어 종전 후 영국으로 건너온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다수인 공장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고요. 그럼에도 ENV[의 현장위원회]는 울프 노동자들을 공식 지지하고 모든 노동자들이 의무적으로 파업 기금을 내도록 조직했어요. 당시 ENV 공장에는 약 1100명이 일했어요.
ENV가 다른 파업 노동자들에 연대하는 것으로 유명했음에도 일부 노동자들은 파업 기금 의무 납부에 저항했어요. 때때로 현장위원들은 파업 기금 납부를 관철시키기 위해 자신들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에 기대야 했어요. 그렇지만, 분명 긴장이 있었죠. 당시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우리의 주장은 다소 투박했어요. 우리는 노동계급이 단결할 필요에 대해 얘기하고 인간적으로 호소하곤 했죠.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당시에는 아시아계 노동자들의 대규모 투쟁을 지켜본 경험이 전무했고, 우리가 의지할 만한 커다란 인종차별 반대 운동도 없었어요. 이런 일들은 모두 나중에야 벌어졌죠.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계급 내의 인종차별적 편견에 대처하는 방법을 막 배우기 시작하고 있었던 거예요.
로저는 원칙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일터에 있었던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고 말한다.
지도적 현장위원들이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갔어요. 그들은 울프의 파업 노동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노동조합에서 어떻게 활동할지 울프의 파업 노동자들에게 조언했어요. IS 회원인 제프 칼슨은 특히 중요한 인물이었죠. 그는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철두철미했어요. 한 동료 회원이 이민 규제 반대 주장을 적당히 누그러뜨리자고 주장해서 제프가 대판 논쟁을 벌였던 기억이 나요. 당시의 모든 이야기는 헌신적 혁명가들이 소수일지라도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또 그런 전통이 얼마나 소중한지 일깨워 줘요.
1966년 1월, 파업은 승리하지 못하고 종료됐다. 최상의 활동가들 대부분이 복직하지 못했고, 그 후 회사는 공장을 폐쇄했다. 파업이 승리하지 못했다는 것이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얻은 교훈은 아니었다. 오히려 분명한 교훈은 오직 전투적으로 공식 노동조합 구조 바깥에서 행동할 태세가 돼 있어야만 인종차별적 고용주들과 무관심한 노조 지도부를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일부 백인 노동조합원들, 특히 강력한 현장조합원 조직의 전통이 있고 자신감이 높은 활동가들을 설득해 최근 입국한 이주노동자들 위주의 파업에 실질적으로 연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분명한 교훈이었다. 1960년대의 나머지 기간 동안 아시아계 노동자들은 더 광범한 노동자들의 일부로서 파업에 나섰고 노동조합의 공식 파업 지침을 거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필요할 때는 노동조합의 공식 지지가 있건 없건 간에 독자적으로 파업에 나섰다. 1960년대 말 무렵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참여한 파업들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목소리가 거세지는 상황에서 일어났다. 저질 신문과 우파 정치인들은 1968년 케냐에서 박해를 피해 탈출한 아시아계 가족들에 반대하는 대대적 캠페인을 시작했다. 노동당 정부와 거의 모든 노동당 의원들이 여기에 동조했다. 그들은 단 하루 만에 의회에서 법안을 통과시켜 영국 시민권이 있는 아시아인들조차도 영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권리를 박탈했다. 그러나 인종차별주의에 양보할 때마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요구는 더 커졌고, 그 절정은 그해 4월 [보수당 의원] 이녹 파월이 악명 높은 “피의 강물” 연설[이민자들이 영국을 ‘피바다’로 만들 것이라는 인종적 증오를 선동한 연설]을 하고 그를 지지하는 수백 명의 건설, 기계, 항만, 육류 운송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선 것이었다.
20 그 결과 이주노동자들의 밀집도가 높은 작업장들에서 긴장이 고조됐다. 인종차별적 현장위원들과 노조 상근 간부들이 사측과 한통속이 돼 이주노동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작업을 주지 않고 배척하는 사례가 다반사였다.
마침내, TUC 본부에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너무나 많은 이들이 잘못된 결론을 끌어냈다. 아시아계 노동자들을 특별한 골칫거리로 지목했고, 아시아계 노동자들은 언어 구사 능력이 부족하고 문화적 전통이 다르니까 영국에 들어올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미국 흑인 평등권 운동 연구자 베릴 라딘이 영국 노동조합과 이주민들에 대한 연구에서 지적했듯이, 뚜렷이 구별되는 두 가지 패턴이 나타났다. 하나는 노동조합 지도부들이 소위 “피부색을 따지지 말자”며 무관심한 경우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것은 인종차별로 인한 부당함을 은폐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 가지 패턴은 소수의 백인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조합 활동가들 사이에 새로운 전통이 부상한 것인데 그들은 노동조합을 이주노동자들의 안식처로 만들고 싶어 했다. 일부 작업 현장과 노동조합 기구들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새로운 흐름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었다. 라딘은 자신이 만난 그런 노동조합 조직자들이 아시아계 조합원들과 함께 스스로 주도력을 발휘해 아시아 언어들로 리플릿을 만들었고, 시크교 사원들에서 모임을 조직했고 사원에 들어갈 때 백인 노동자들이 신발을 벗고 흰 두건을 썼다고 전한다. 그들의 모임은 종종 두 가지 이상의 언어로 진행됐고, 건설 부문의 한 노동조합 지부 간부는 자기 지부의 이주노동자들을 “우리의 국제 여단”이라고 불렀다고도 했다.노동조합 내 이 두 가지 전통은 그 뒤에 일어난 두 차례의 중요한 쟁의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맨스필드 양말
22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여러 가지 불만도 연관돼 있었다. 맨스필드 공장과 인근 자회사(동조 파업에 들어갔다)의 가혹한 조건, 아시아계 노동자들은 임금이 편물공의 절반인 재료 운반공까지만 승진할 수 있다는 제한, 감독관과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의 이름 익히기를 거부하고 모든 아시아인들을 “야, 너”라고 부르는 등 일상적으로 겪는 인종차별적 모욕이 파업을 촉발한 또 다른 불만들이었다. 전국양말니트웨어노동조합은 이주민들을 적대적으로 대하기로 악명 높았고 추가 행동 없이 파업을 끝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파업 노동자들은 여러 가지 구호를 외치며 시내를 가로질러 행진해 노동조합 사무실을 점거하고, 노동조합 지도부가 파업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때까지 농성했다. 백인들 일색인 편물공들이 처음 한 주 동안 파업에 동참했지만 노동조합은 그들의 파업을 공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백인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위한 싸움에서는 아시아계 동료들을 지지할 태세가 돼 있었지만, [그들이 편물공으로] 승진하는 문제에는 그렇지 않았고, 노동조합은 이들의 편견에 도전하려 하지 않았다. 23
러프버러에 소재한 맨스필드 양말은 점퍼를 만드는 회사였다. 다른 많은 의류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공장도 노동자들을 인종별로 나눠 아시아계, 특히 아시아계 여성들에게는 숙련도가 가장 떨어지고 임금이 가장 낮은 일을 시켰다. 1972년 10월 노동자 수백 명이 파업에 들어갔는데, 그 계기는 한 아시아계 여성에게 더 이상 [인도 여성들의 전통 복장인] 사리를 입고 출근할 수 없다고 통보한 것이었다.사측은 12주 동안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며 작업 복귀를 설득하려고 집집마다 직원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파업 노동자들은 굳건히 버텼고, 이번에도 공동체의 대대적 지원과 함께 이주노동자들이 대거 고용된 다른 공장들에서 연대 행동에 돌입하겠다는 위협이 있었다. 결국 작업에 복귀하게 됐을 때 노동자들은 적어도 부분적인 승리를 거둬, 고용주와 노동조합은 이제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편물공이 되는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합의했다. 이 승리는 노동조합 기구와 백인 노동자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영향을 끼쳤다. 베니 번시는 잡지 〈스페어립〉에 쓴 기사에서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노동자들은 이제 15명의 대표로 현장위원회를 구성했고 그중 11명이 아시아계였다. … 영국인 소녀들과 아시아계 소녀들의 관계는 달라져서 옷 한 벌당 수당 같은 문제는 함께 논의한다. 욕설은 사라졌다. … 이제 일부 아시아계 여성들은 영어를 배우려 하고 있고 일부 영국인 여성들은 약간의 구자라트어를 안다. 마침내 파업이 끝난 것은 아시아계 노동자들에게 편물공 일자리가 허락되면서였다. 그러나 파업은 이밖에도 많은 문제들을 제기했고, 그중에서도 아시아계 노동자들의 인간 존엄성 문제는 분명 빼놓을 수 없는 문제였다. 노동자들이 자주 외친 구호는 “우리는 개같이 지내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였다.
궁극적으로 맨스필드 투쟁은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지위를 끌어올릴 수 있고, 또한 백인 동료들 사이에서 인종차별주의의 영향력을 깨트리기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아시아계 노동자들의 승리는 부분적으로 전투성과 파업 지도부의 정치적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이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에게로 행동을 확대하겠다는 압력을 노동조합과 사용자 측에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임페리얼 타자기 1974년 [잉글랜드 중부 도시] 레스터에 있는 임페리얼 타자기 회사에서 벌어진 투쟁은 훨씬 더 격렬했고, 그 투쟁에서는 악질적인 다국적 기업, 인종차별적 노동조합 지부 그리고 파시스트 조직 국민전선도 상대해야 했다. 국민전선은 ‘임페리얼 타자기 백인노동자들’이라는 명칭으로 공장에서 일부 백인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노동자 1600명 중 약 1100명이 아시아계였고 그들 대부분이 동아프리카에서 막 이주해 온 상태였다. 그러나 전체 공장에서 아시아계 현장위원은 단 한 명뿐이었고 노동조합은 의도적으로 노조 규칙을 바꿔 백인이 아닌 이들이 대표로 선출될 기회를 봉쇄했다. 모든 노동자들이, 그러나 특히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방아쇠를 당긴 것은 아시아계 노동자들로만 구성된 특정 부서에서 생산 속도를 높인 것이었고 3개월 동안 계속될 쟁의가 시작됐다. 5월 1일 약 27명의 여성과 12명의 남성 노동자들이 작업을 중단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500명이 동참했고 생산량이 대략 50퍼센트 감소했다.
26 파업 노동자 추닐랄 파르마에 따르면, 많은 백인 노동자들은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왜 파업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파업 초기에 단결된 행동을 할 기회를 놓쳤다고 했다. “우리가 파업에 나섰을 때 백인 노동자들이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이 사안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함께할 수 있겠어?’ 그들은 처음에는 행동에 나섰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어요.” 27
가장 빠르게 쟁의를 해결하는 방법은 노동조합이 모든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명령하고 생산을 완전히 멈추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TGWU는 결코 파업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런 동태를 파악한 사용자 측은 파업을 주도한 부서의 모든 노동자들을 해고할 기회로 삼았다. 공장 내 아시아계 노동자들의 조건도 끔찍했지만, 백인 노동자들 역시 낮은 임금, 생산 속도 증가, 열악한 조건에 시달렸다. 마땅히 노동조합은 공장 내 인종 간 분열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모든 노동자들의 불만들을 제기하며 파업을 공장 전체로 확대해야 했지만, 오히려 현장위원과 노조 지부의 상근 간부들은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불필요하게 노동조합을 위험으로 내몬다고 비난했다.28 그렇지만 많은 파업 노동자들이 “백인 노동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계속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29
일부 파업 노동자들과, 연대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흑인 민족주의 성향의 잡지 《오늘의 인종》 활동가들은 아시아인 공동체를 저항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봤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지금까지 인종과 공동체 의식만이 파업 노동자들의 힘의 바탕이었다.”초기부터 이 파업이 평범한 파업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파업 과정에서 급속히 떠오른 지도부는 젊었고, 핵심 대표자 두 명은 겨우 21세였다. 그리고 한 기사가 포착했듯이 파업 노동자들 자신이 아시아계 노동자에 대한 고정 관념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파업 노동자 가운데서 새로운 부류가 등장했다. 젊고, 긴 머리에 금 귀걸이, 청바지를 입고 갈색 피부인 그들은 겁이 없고 활기가 넘쳤다. 그들은 거리낌 없이 국민전선을 공격하고 경찰(레스터 경찰에는 피켓라인을 통제하고 다른 경찰들을 위해 통역하는 동아프리카계 아시아인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의 특별한 표적이다)을 조롱했고, 파업 방해자들에 대해서는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국가는 서인도 제도[카리브해] 출신 청년들 중 비슷한 부류를 통제하는 문제를 놓고 이미 한동안 우려해 왔다. 임페리얼 타자기 투쟁은 이제 아시아계 청년들 속에서도 비슷하게 활기 넘치는 세력이 등장했음을 보여 줬다.
파업 자체는 활동가적인 방식으로 운영됐다. 매번 200명에 달하는 이들이 피켓라인을 지키고 정기적으로 열리는 파업 집회에 참가했다. 파업 집회 때는 거기서 내려진 결정에 대해 아무도 의심할 수 없도록 녹음을 했다. 모든 전술과 상황 변화는 심도 있게 토론됐고, 다른 많은 정치 이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여성 노동자들이 매우 강력하고 전투적인 세력으로 부상했다.
파업 집회와 피켓라인은 정기적으로 경찰과 파시스트들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파시스트들은 흑인과 아시아인 공동체 모두에게, 더 일반적으로는 노동운동에 중대한 위협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파업 노동자들은 물리적으로나 법정에서나 스스로를 조직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러나 공동체의 지지는 바닥을 드러낼 줄 몰랐다. TGWU 소속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일하고 있는 인근 공장들도 그런 공동체의 일부였고 그들 중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시 임페리얼 파업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24시간 파업에 참가하기로 약속했다. 또한 영국 전역에서 성장하고 있던 인종차별 반대 운동도 파업에 지지를 보냈고 임페리얼과 관련된 상점과 사무실에 대한 피켓 시위를 조직했다.
공동체 차원의 대응에 힘을 싣자는 주장이 강력했지만 공동체 차원의 대응만으로는 승리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인도계노동자협회의 일원으로서 맨스필드 양말과 임페리얼 타자기 파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아브타르 조울은 [백인 노동자까지 끌어들이는] 단결된 파업을 성사시키지 못한 책임이 노동조합에서 지부와 지역본부 수준 모두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동조합의 원칙은 이렇다. 한 노동자가 파업하면 다른 노동자들은 그(그녀)가 하던 일을 대신해서는 안 되고, 피켓라인을 넘지 말아야 하며, 그 공장에서 만든 제품은 무엇이든 유통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백인 노동자들은 피켓라인을 넘어 파업 노동자들의 일을 대신하고 그들의 제품을 유통시켰다. … TGWU 지역본부가 발행한 보고서는[지부를 비판하며 변화를 권유한 보고서 — 프라사드] 매우 완곡한 어조로 쓰여 있었다. 그러나 그 보고서의 내용이 미처 반영될 수 있기도 전에 리톤인더스트리는 임페리얼 타자기를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32 함께 싸우지 않음으로써 아시아계와 백인 노동자 모두 패배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공장 폐쇄 후 여러 해 동안 일자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파업은 쓰라린 패배로 끝났다. 임페리얼 타자기의 소유주들은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이 낳은 약점을 간파하고, 레스터와 [잉글랜드 북동부에 있는] 헐에 있는 공장을 둘 다 큰 싸움 없이 폐쇄할 수 있었다.1974년에는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참여한 다른 여러 쟁의들도 있었는데, [잉글랜드 중부 도시] 너니턴의 아트 주물 공장, 런던 서부 소재 페리베일구터만, 레스터에 있는 델타 주조 공장, 펀필드앤바스토우 주조 공장, 케닐워스 부품 공장, 그리고 [잉글랜드 남부의 공업 도시] 슬라우의 컴바인드옵티컬스 등에서 파업이 벌어졌다. 〈소셜리스트 워커〉는 그해 벌어진 노동계급의 인종차별 반대 투쟁을 살펴보면서 대부분의 투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요소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형편없는 임금을 주는 공장들에서 이렇게 잘 조직돼 있지 않은 채로 많은 흑인 노동자들이 일해야 했다. 그러나 매번 … 패배했든 승리했든 모든 경우에서 그들은 투쟁하고 조직하는 능력을 보여 줬다. 노동조합의 공식적 지지는 거의 없었음에도, 노동자들은 투쟁 과정에서 조직을 만들어 냈고 사장들과 싸우는 법을 스스로 찾아냈다. 노동조합 상근 간부들은 알량한 지원조차 타이밍이 너무 늦거나, 더 나쁘기로는 아무것도 안 하거나 고의적으로 방해하기까지 했다.노동조합원들과 그 지도자들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는 징후들이 나타났다. 국민전선의 위협이 그러한 변화를 압박한 한 요소였지만, 아시아계 노동자들과 인종차별 반대 운동 내 그 동맹 세력이 보여 준 엄청난 강인함도 변화를 압박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TGWU의 좌파 지도자인 잭 존스는 평조합원 부두 노동자들이 만든 소책자를 공식 승인했는데 그 소책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노동계급이 인종차별로 인해 해로울 정도로 분열돼 있는 것이 가혹한 현실이다. 노동조합 활동가들에게 떨어진 긴급한 책무는 우리 계급을 단결시키고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인종차별주의에 정면으로 맞설 해결책들을 찾는 것이다.”
35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참여한 파업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났고 홀로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비록 이러한 태도 변화는 환영할 일이었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향후 파업들의 승리를 보장할 만큼 충분치 않았다. 당시 노동계급 운동 전체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바로 작업장 조직이 갈수록 파편화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개별 공장이나 부문에서 거둔 승리가 “계급 전체의 승리로 여겨지지 않았고 서로 다른 노동자 그룹 간의 연대가 취약했다.”1976년의 길고 뜨거운 여름
사회주의자와 평조합원 활동가,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의 흐름이 역전되길 바라는 사람들은 1976년을 맞이할 때 그리 큰 기대를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동당 정부가 사회협약[노동조합이 임금 인상을 일정 수준 이하로 자제키로 정부와 합의한 것]을 시행해 생활 수준이 곤두박칠치고 있었고, 노동조합 전국 지도부는 이것을 수수방관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작정한 듯했다.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했고, 국민전선이 거리를 행진하고 우려스럽게도 지방 선거에서 많은 표를 획득했다. 또한 언론은 자신들이 애호하는 관심사의 하나인, 아프리카 독재 정권들로부터 피난처를 찾는 아시아인들의 “위협” — 이번에는 겨우 250명의 말라위 출신 이주민들 — 에 대해 떠들어 댔다. 인종차별적 살인이 연이어 뒤따랐다.
36 런던 서부 사우스얼에서는 인종차별주의 청년 깡패들이 18세의 학생 구르딥 싱 차가르를 살해했다. 파시스트 지방의원이자 국민전선 전 의장인 존 킹슬리 리드는 한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료 인종차별주의자, 동료 영국인, 동료 백인 여러분, 나는 유색인 이민자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내가 니그로, 웍, 쿤[모두 아시아계나 흑인 등을 비하하는 표현]이라는 표현을 쓰더라도 양해해 주십시오.” 이어서 그는 구르딥 싱 차가르의 피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난주 사우스얼에서 한 깜둥이가 다른 깜둥이를 칼로 찔렀습니다.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한 명이 죽었으니 앞으로 백만 명이 남았습니다.” 후에 리드는 인종 혐오 선동 혐의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9월에는 60세 여성 모한 데브 가우탐이 살해당했다. 인종차별주의 깡패가 레밍턴 스파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그녀를 끌고 나와 산 채로 불태웠다. 알타브 알리를 포함해 적어도 네 명의 아시아인들이 런던 동부에서 백인 깡패들에게 살해됐다. 이 사건들은 모두 말라위 출신 아시아인들에 대한 공포가 조장된 지 2년 내에 벌어진 일이었다.
런던 동부의 사우스우드포드에서 19세의 디네시 추드리와 22세의 리피 알하디디가 백인 청년들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37 이런 행동은 1969년 켄트주州의 그레이브센드에서 시작된 전통을 따르는 것이었다. 당시 발윈더 라나와 그의 동료들은 ‘인도계청년연합’이라는 청년 단체를 결성해 지역에서 연이어 벌어지던 인종차별적 폭력(현지 언론은 “파키 때리기[역주 — ‘파키’는 파키스탄계 이주민을 가리키는 속어]”라고 불렀다)에 맞섰다. 38
그러나 1976년은 이러한 위기에 대한 결정적 대응이 일어난 해였다. 임페리얼 타자기 파업을 주도한 이들 같은 신세대의 아시아계 영국인들은,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에 영국에 앞서 정착한 일부 구세대 활동가들이 정치적으로 너무 소심하다며 그들의 정치를 거부했다. 신세대 활동가들은 악화하는 상황에 대응하려면 더 급진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중 일부는 부모 세대뿐 아니라 더 넓은 급진 좌파에까지 냉소를 보냈다. 그러나 [아시아계 “청년운동”] 창립 멤버의 많은 이들은 전에 혁명적 단체들에서 활동했었고 이미 신념에 찬 사회주의자였다. 그들 대부분은 성장하는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들은 공동체의 자기 방어 수단으로 “청년운동”을 함께 결성했다.사우스얼 “청년운동”은 인종차별 반대 투쟁이 전례 없이 중요할 때 그 속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당시 존 로즈는 이 잡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 이렇게 썼다.
어떤 운동에서든 그 지도부의 시험대는 지지자들을 얼마나 모을 수 있느냐다. 사우스얼 “청년운동”은 이 시험대를 통과했다. “청년운동”은 여러 번 시위에서 수백 명을 참여시켰고 좌파 조직들의 전통적 “시위” 방식을 무시했다. 소리를 지르는 대신 리듬감 있게 구호를 외치고 여기에 맞춰 깡통과 스틱으로 드럼을 만들어 두들겼다. 게다가 사우스얼 청년들은 노련한 IS 회원들조차 깜짝 놀라게 했다. 7월 11일 그들의 동료 두 명이 도로에서 인종차별주의자들을 추격하다 체포되자 [런던의 핵심 도심지] 피커딜리 광장에서 대규모 연좌 농성에 돌입해 동지들이 풀려날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우스얼의 모범적 사례는 이내 영국 전역의 도시에 있는 아시아인 지역들로 확산돼, 아시아인 “청년운동” 단체가 런던, 브래드퍼드, 루턴, 맨체스터, 노팅엄, 셰필드 등 많은 지역들에서 설립됐다. 이 단체들은 이미 전투적이었던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서도 더 전투적인 날개로 활동하곤 했다. 그들은 아시아인들이 굴종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인종차별주의 깡패들과 경찰의 괴롭힘에 대차게 맞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런 저항의 기세는 1977년 루이셤 전투로 이어졌다. 루이셤 전투는 5000명의 흑인 청년들이 SWP 당원들을 비롯한 현지 인종차별 반대 활동가들과 함께, 국민전선이 영국에서 가장 큰 아프리카-카리브인 공동체들의 하나를 위협하려고 벌인 거리 행진을 깨부순 사건이었다. 파시스트들의 행진은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끝났는데 경찰 병력 수천 명으로도 빗발치는 벽돌과 병 세례를 뚫고 나치들의 행진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루이셤의 승리는 반反나치동맹ANL의 창립과, 한 해 앞서 결성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록’이 ANL과 협력하는 배경이 됐다. 온갖 배경의 수많은 청년들이 나치 반대 활동에 뛰어들어 특별 공연 하기, 축제 참가, 전단 배포에서부터 파시스트들과의 물리적 대결까지 다양하게 기여했다. 일부 사람들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파시스트들의 인종차별과 야만성을 목격하게 됐다. 예컨대 교사이자 SWP 당원인 블레어 피치가 1979년 국민전선에 맞서 행진하던 중에 경찰에 살해된 것에서 보듯 일부 사람들은 이 투쟁에 참여한 것 때문에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사우스얼 아시아계 “청년운동” 활동가인 이크발 칸은 블레어가 살해됐던 시위에 참여한 인물로, 당시 사건들을 회상하며 〈소셜리스트 워커〉에 최근 이렇게 말했다.
내가 국민전선과 처음 마주친 것은 열여섯이나 열일곱 살 때였어요. 나보다 두세 살 어린 사촌과 함께 그의 여동생을 데리러 학교에 갔어요.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여섯 명의 백인 녀석들이 “파키 놈들을 잡아라” 하고 소리치는 걸 들었어요. 곧바로 우리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들은 쫓아와서 우리를 두들겨 팼어요. 그들이 내 사촌의 등에 ‘국민전선’을 새겼어요. 나는 그걸 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국민전선 놈들이 나를 붙들고 있었거든요. 이것이 국민전선의 폭력성에 대한 첫 경험이었어요. 아주 악랄한 공격이었어요. … 오랫동안 우리는 이것이 우리만의 싸움이라 생각했었어요. 그러나 [1979년 시위에 참여하면서] 수많은 더 광범한 토착 영국인들이 우리와 같은 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엄청난 시위로 인해 우리는 이길 수 있다고 느끼게 됐어요. 그리고 모든 것을 조금 달리 보게 됐어요. 더 이상 우연히 백인을 마주칠 때마다 두려워하지 않게 됐어요. 우리 편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한때 나는 모든 백인들이 어느 정도는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기꺼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걸 알았어요. 설령 그 때문에 블레어 피치처럼 자신의 목숨을 잃을 수 있더라도 말이에요.
그런윅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주 드문 경우에만 지배계급 권력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무자비함을 드러낸다. 체제의 심장부에 붙박여 있는 일상적 폭력은 보통 수많은 기만으로 은폐돼 있다. 그러나 계급 전쟁에서는 지배자들이 반드시 필요한 승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권력을 총동원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윅 파업이 그러한 순간의 하나였다.
노동계급 사람의 많은 이들도 그런윅 파업의 결정적 중요성을 이해했다. 노동조합 결성의 권리와 피켓라인을 칠 권리가 걸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처지가 나쁜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기 위한 전투이기도 했다. 그런윅 투쟁은 노동조합 운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백인-유색인 노동자 연대의 장면들을 낳았다. 거의 대부분 백인 노동자로 이뤄진 연대 대오가 영국 전역에서 달려와, 공장 문 앞을 지키던 압도적으로 아시아계 여성인 파업 노동자들에 가세했다. 또한 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피켓라인을 지키기 위해 경찰 기마대와 준군사 조직인 “특별순찰대”와 싸웠다. 또한 경찰은 피켓라인을 지키는 이들과 시위대를 대량으로 체포하고 잔인하게 구타했고, 파업 노동자들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경찰 앞잡이들을 풀어 성급한 행동을 도발했다. 그리고 우편 노동자들은 자신을 노동조합에서 제명하겠다는 노조 지도부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파업 파괴용 우편물 취급을 거부했다. 그런윅 투쟁에서는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었고 또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1976년 8월 20일 이 파업의 시작을 주목한 이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 사진 인화 공장은 런던 북서쪽 교외의 한적한 주택가 돌리스힐 가장자리에 위치한 낡아 빠진 산업 단지의 한쪽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물며 그런윅은 현지 노동조합 운동에서 존재감이 없었고, 반反노동자적이기로 악명 높은 대규모 기계 기업들이 여전히 주름잡고 있는 지역에 위치해 있어서 큰 투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더더욱 낮아 보였다. 약 440명이 그런윅의 사업장 두 곳에서 일했고, 그중 약 80퍼센트는 아시아인으로 대부분이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에서 얼마 전에 추방된 구자라트인들이었다.
일은 따분하고 임금은 형편없는데다 공장 내부 조건은 열악하고 현장은 가혹하게 운영됐다. 노동자들은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손을 들어야 했고, 말이 너무 많거나 시끄러우면 전횡을 일삼는 관리자들에게 심하게 질책받았다. 사장인 조지 워드는 악랄한 반反노동조합주의자였고 그의 이윤은 저임금, 저비용으로 회사를 경영하는 데 달려 있었다. 사업의 성격상 여름은 가장 바쁜 시기여서 매일 아침 휴가철 필름 수백 롤이 들어와 현상된 다음, 저녁에 사진 수천 장으로 인화돼 나갔다. 회사는 성수기 작업량에 맞추려고 모든 직원에게 강제로 초과 근무를 시켰고, 이 때문에 일부 노동자들은 밤 10시까지 퇴근할 수 없었는데도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출근해야 했다. 그런윅의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은 아시아계 노동자들을 그렇게 많이 사용하는 것이 의도적 계략이라는 것을 거의 의심하지 않았다. 가장 절박한 이들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런던 미숙련 여성 노동자 평균 임금의 3분의 2도 안 되는 임금을 참고 견디겠는가?
41 이렇게 우발적으로 파업에 들어간 그런윅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가입조차 하지 않은 채 파업 노동자가 됐다. 그들은 브렌트지역노동조합협의회와 접촉해 오늘날 GMB[지자체 노동자와 보일러공 일반노조]의 일원인 화이트칼라 노동조합 에이펙스Apex에 가입을 신청했다. 에이펙스는 열광하며 그들을 받아들였고, 이제는 150명에 달하는 파업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인정을 위해 조지 워드와 교섭을 시도했으며, 노동자들에게 파업 수당까지 지급하기 시작했다.
파업의 시작은 사용자 측의 요구를 따라갈 수 없었던 한 젊은 남성이 해고된 것이었다. 동료 세 명이 해고자와 함께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다음 며칠에 걸쳐서 자야벤 데사이의 지도 아래 거의 100명의 노동자들이 앞서 나간 이들을 따라 나갔다. 군대 선임하사관 같은 작업 감독관이 작업장을 이탈하면 해고하겠다고 말하자, 데사이는 그를 맹렬히 비난했다. “당신이 여기서 운영하고 있는 것은 공장이 아니라 동물원이다. 그런데 동물원에는 많은 종류의 동물이 있다. 당신 손가락 놀음에 따라 춤추는 원숭이들도 있지만, 당신의 머리를 물어뜯을 수 있는 사자들도 있다. 우리가 그 사자들이야, 이 관리자 양반아!”몇 주 동안 기본적인 피케팅[역주 — 피켓라인을 치는 것]과 경찰이 약간 협박한 것 외에는 거의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곧 결정적 변화가 찾아왔다. 그런윅의 우편물을 취급하는 크리클우드 우체국 노동자들이 그런윅의 우편물을 거부하는 블래킹[역주 — 다른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파업 사업장의 업무에 일절 협조하지 않는 보이콧 행동]을 시작했고, 이로 인해 우편 주문에 의존하는 그런윅이 치명타를 맞은 것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워드는 전국자유연합NAFF에 지원을 요청했다. NAFF는 보수당 강경파와 주요 기업주들이 만든 압력 단체였다. NAFF는 한 가지는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는데,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합법성과 노조 자산 지키기에 집착한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파업 지지 행동을 불법으로 규정할 수만 있다면 노동조합 관료들은 굴복할 것이 뻔했다. NAFF가 그런윅 사용자 측과 함께 우편노동조합UPW 노동자들의 그런윅 우편물 블래킹을 금지하는 고등법원의 명령을 받아 내자, UPW는 크리클우드 우체국 지부 조합원들에게 그런윅 우편물의 수거와 배달을 재개하라고 지시했다. 크리클우드 우체국의 많은 평조합원 노동자들이 격분했다.
42 이전에 파업을 벌인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상대적 고립을 견뎌야 했던 것에 비하면 이렇게 공식적으로 지지받는 것이 상전벽해처럼 느껴지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이런 지지에는 커다란 대가가 따랐다. 이때부터 노동조합 기구 꼭대기에 있는 자들이 결정권을 쥐고 싶어 했다. 그들은 파업의 김을 빼기 위해 조정기관ACAS으로 끌고 가려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법적 소송으로 인해 파업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동당 의원들과 내각 각료들조차 파업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열을 올렸고 이 파업이 기본적 권리를 위한 것이라는 데 모두 동의했다. 신문들은 “사리를 입은 파업 노동자들”을 참신한 소재로 여겼고, TUC 위원장 렌 머레이까지 브렌트지역노동조합협의회에 얼굴을 내밀어 파업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단지 여러분 뒤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여러분 옆에 나란히 서겠습니다.” ‘인종 관계 연구소’의 암발라바너 시바난단을 비롯한 일부 주도적 인종차별 반대 활동가들은 노동조합 지도부가 인종차별에 대해 태도를 바꾼 것에 깊은 의구심을 품었다. 시바난단이 생각하기에, 그런 태도 변화는 부분적으로 일부 흑인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내부의 인종차별에 학을 떼고 독립적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한 시바난단은 노동조합 지도부가 노동당 정부와, 더 일반적으로는 국가와 협력해 거리와 일터에서 폭발적으로 벌어지는 투쟁들을 더 잘 통제하려 든다는 것도 봤다. 무엇보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사회협약으로 알려진 정부의 긴축 계획을 보호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노동조합을 포섭하려는 더 광범한 구상의 일부로서 “고용상의 인종차별을 관리”하는 임무가 노동조합에게 맡겨지고 있는 것이었다. 시바난단은 신랄하게 비평하며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것은 ‘태도 변화’가 아닌 사회협약을 통한 전술 변화다. 이를 통해 국가와 노동조합 지도부는 노동계급에 공동으로 맞서는 전략을 공식화하고 정당화하고 지속하려 한다.” 시바난단의 서술은 노동운동 상층부의 역학을 일부 포착했을지 모르지만, 훨씬 더 중대한 무언가가 노동조합 기층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즉, 노동계급의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그 자체로 무시 못할 하나의 세력이 돼 가고 있었다. 그런윅 파업위원회는 공장 앞 피켓라인을 지키기 위한 대규모 시위를 호소했고 1977년 6월 노동자 수백 명이 이에 응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매일같이 영국 전역의 노동조합 모임에서 연설했고, 이 아시아계 여성 노동자들은 그들이 가는 어디에서나 광원, 부두 노동자, 금속 노동자, 병원 노동자, 자동차 노동자, 주물공, 건설 노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아시아계 여성들이 굴종적이고, 사악한 사장들의 호구라는 이미지는 대중의 의식에서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자야벤 데사이를 만난 이는 누구나 자신이 맹렬한 계급 전사를 만났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다. 데사이는 잡지 《여성의 목소리》에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공장을 완전히 멈추고 싶습니다. 우리의 투쟁은 우리의 모든 권리와 존엄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노동조합원들이 우리를 지지해 주기를 바랍니다.”45 피켓라인 시위에 참여하러 온 많은 노조원들은 경찰 폭력을 코앞에서 그렇게 본 적은 결코 없었기에 충격에 빠졌다. 멜 맥파틀랜드는 당시 〈소셜리스트 워커〉에 이렇게 말했다. “끔찍했어요. 믿을 수가 없었어요.” “확실히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그런 규모의 폭력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 정도의 사태에는 대비돼 있지 않았어요. 매우 존경받는 한 노동당 지방의원이 충격받아서 하얗게 질린 것을 봤어요. 그는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어 했어요.” 46
대중행동이 시작되자 경찰은 미쳐 날뛰며 많은 주도적 파업 노동자들을 비롯해 거의 100명을 체포했고, 그중에는 심지어 노동당 의원 오드리 와이즈도 있었다. Apex 노조의 상근 간부는 파업위원회 위원장이 어떻게 잡혀갔는지 회상하며 말했다. “경찰이 마흐무드를 붙잡고는 발로 차고 주먹으로 세게 때렸어요. 그들이 특별히 마흐무드를 잡으려 한다는 게 분명했어요. 경찰은 그를 발로 차면서 연행하려고 경찰 버스 후미진 곳으로 데려갔어요.”47 노동당 정부의 내각은 그런윅의 투쟁으로 인해 정부의 인기가 더 크게 떨어지고 있다고 염려했다. 그뿐 아니라 평조합원들이 주도력을 발휘하는 방식으로 산업 쟁의에서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두면 노동조합과 맺은 사회협약이 끝장날 수 있다고 걱정했다. 노동당 내각은 파업 노동자들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아 올 심산으로, 스카먼 경이 이끄는 파업 조사 특별위원회를 발족한다고 발표했다. 노동당 지도부는 특별위원회가 파업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과 복직 권리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며 피켓라인 시위를 중단하도록 노동조합에 압력을 가했다. 그러자 노조 지도부가 파업위원회에 행동 수위를 낮추도록 압박했다. 그러나 노조 지도부 마음대로 될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았다. 7월 11일로 예정된 다음 번 대규모 피켓라인 시위가 이미 한창 준비되고 있었고, 크리클우드 우편 노동자들이 블래킹을 재개했다.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피켓라인 시위는 자체적인 생명력을 갖게 돼 급진 좌파가 아닌 사람들까지 끌어들이기 시작했다.(처음 몇 달 동안에는 외부 연대 세력의 중심 부대는 급진 좌파 대열이었다.) 그리고 피켓라인 대열이 커지자 언론의 관심도 커졌다. 이내 “외부 선동가들”이 폭력을 부추긴다는 흔해 빠진 얘기가 신문과 TV를 장식했다.그런윅 피켓라인 시위는 규모가 가장 컸을 때 약 2만 명이 운집해 공장과 인근 지역을 완전히 봉쇄했다. 요크셔 광원 노동조합 위원장 아서 스카길이 탄광 지역에서 거대한 대표단을 이끌고 왔고, 스코틀랜드, 사우스웨일즈, 켄트에서 온 많은 노동자들도 가세했다. 런던 부두 노동자 밥 라이트의 설명은 그날의 기세를 잘 포착하고 있다.
감동적인 광경이었어요. 영국 4대 항구인 헐, 런던, 머지사이드, 사우샘프턴에서 온 현장위원 배너들이 도로 바로 건너편에 줄지어 걸렸거든요. 경찰이 몇 차례 큰 열의 없이 도로에서 시위대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피켓라인 시위대가 너무 많았어요. 특별순찰대SPG 버스 다섯 대가 우리를 향해 오는 것을 봤어요. 그러나 거의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 ‘파업 파괴자 보호 집단’[역주 — 영어 약자가 ‘특별순찰대’와 같다]은 방향을 돌렸어요. 자기들에게 승산이 없다고 본 게 틀림없었어요. 그 짐승 무리들로는 안 되자 경찰은 기마 경찰 36명으로 이뤄진 기마대를 투입했어요. … 기마 경찰은 도저히 지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들은 완전히 초라한 처지였어요. … 그래서 10분 뒤, 주인보다 똑똑한 말들이 머리를 돌려 주인들을 데리고 떠났어요. … 제가 시위에서 경험했던 거의 가장 신나는 순간이었죠. 1972년 펜턴빌[역주 — 펜턴빌 감옥에 수감된 항만 노동자들을 대규모 파업과 시위로 석방시킨 것을 가리킨다]의 짜릿하고 열광적인 날들로 돌아간 것 같았어요.
TUC는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대규모 피켓라인 시위가 예정된 날 오전에 ‘그런윅을 위한 행진’을 잡았다. TUC는 파업 지지자들을 공장에서 떼어 놓으려 했고, 겨우 22명의 파업 노동자만을 공장 정문에 남겨 파업 파괴자들을 태운 버스를 상대하도록 했다. 22명으로 피켓라인을 지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 말이다. 파업위원회는 TUC의 지지를 잃지 않으려면 피켓라인 시위 계획과 TUC의 행진 계획 모두를 지지하도록 강요당했다. 주도적 파업 노동자들과 그 지지자들은 몹시 불쾌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지만 달리 대안이 없다고 느꼈다. 그리고 당일 오전 11시가 되자, 노동자들에게 계속해서 피켓라인을 지키자고 설득할 수 있는 다른 단체는 아무도 없었다. 노동당 정부의 압력을 받은 노조 지도부가 자신들의 이익을 파업 노동자들보다 앞세운 것인데,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길 아래 크리클우드 우편 노동자들이 블래킹으로 다시 한 번 그런윅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었고, 그런윅의 우편물이 런던 전역 그런윅 공장들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NAFF가 ‘조랑말 특급 작전’을 벌여, 주로 한밤중에 그런윅 공장들에서 우편물을 수거해서 크리클우드가 아닌 다른 우체국들로 옮겼다. 이런 공격에 대해 노동조합이 전국적인 전면 파업으로 대응해야 마땅했지만, UPW 지도부는 더 많은 소송을 당할까 봐 너무 두려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크리클우드 지부 노동자들을 더 옥좼다. 당시 크리클우드 노동자들은 사용자 측의 직장폐쇄로 우체국 출입을 봉쇄당한 상태였는데 노조 지도부는 그런 이들에게 행동을 중단하지 않으면 조합원 자격을 잃고 일자리도 잃을 것이라고 다그쳤다. 그런데도 크리클우드 노동자들은 그런윅 파업 노동자들을 지지하며 한동안 버텼고 이후 7월 말에 아슬아슬한 표 차이로 작업 복귀를 표결했다.
우체국의 블래킹이 끝나면서 APEX 노조 지도부는 대규모 피켓라인 시위를 더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노조가 파업 수당을 지급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제 스카먼의 특별위원회만 바라보면 된다고 했고, 사기 저하된 파업위원회는 이에 응했다. 마침내 8월 말에 보고서가 나왔을 때, 스카먼은 파업 노동자들의 복직과 노동조합 인정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는 약속과 달리 승리가 아닌 신기루였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그런윅 사장 조지 워드는 특별위원회 결과를 거부하고 자신은 보고서의 권고를 따를 의향이 전혀 없고, 법률상 자신을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50 그러나 이것은 이 쟁의의 마지막 단말마였다. 파업 노동자들은 이후 몇 달 동안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심지어 TUC 건물 앞에서 단식 투쟁까지 시작했지만, 결국 1978년 7월 14일 거의 2년간의 전투를 종료했다. 자야벤은 TUC가 자신들을 대한 방식에 정당하게 분개하며 말했다. “TUC의 공식적인 [연대] 행동은 팔꿈치에 묻은 꿀과 같다. 냄새 맡을 수 있고 볼 수도 있지만, 결코 그 맛을 볼 수는 없다.” 51
고용주들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노조 지도부가 사실상 파업을 저버린 것에 대한 반발로 파업위원회는 다시 한 번 대규모 피켓라인 시위를 호소했다. 10월에 약 5000명이 공장으로 왔고, 11월에는 8000명이 왔다. 그리고 경찰은 다시 한 번 미쳐 날뛰며 113명을 체포했고, 피켓라인 시위 참가자 243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파업 패배에는 노조 지도부의 배신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1970년대 후반의 현장 조직들은 1970년대 초반에 존재했던 현장 조직들의 껍데기에 불과했는데, 1970년대 초반에는 적극적 연대가 지배적 분위기였다. 그런윅 파업위원회 활동가들은 기층의 현장위원과 노조 위원장들이 파업을 매우 열정적으로 지지했고 그들이 위험한 대규모 피켓라인 시위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 현장위원이나 노조 위원장들은 자신의 공장에서 평조합원들을 모아 그런윅 지지 집회를 조직하는 것에는 대부분 난색을 표했다. 자기네 조합원들이 치러야 할 투쟁이 이미 너무 많다고 했다. 많은 경우, 현장위원들은 자기 조합원들의 보수성을 실제보다 훨씬 더 과대평가했다. 그러나 그들의 진단을 검증할 길은 거의 없었다. 결과적으로 런던 북서부 기계 공장들에서 그런윅을 지지하는 파업이 벌어질 전망은 암울해 보였다. 블래킹을 확대해 그런윅 공장에 전기와 물 공급을 끊자는 말은 있었지만 그런 행동은 결코 현실화되지 않았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노동조합에 적대적인 고용주들을 무릎 꿇렸던 것이 바로 그런 전투적 전술이었지만, 그런 행동에 다시 나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이들은 이제 운동 안에서 거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런윅 파업은 SWP가 후에 “침체기”라고 부른 것의 초기 희생양이 된 셈이었다.그러나 파업 과정은 피켓라인을 지키는 투쟁을 훨씬 더 넘어서는 영향을 미쳤다.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이제는 영국 노동계급 운동의 매우 중요한 일부이며, 파업 과정에서 그들 자신과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그들이 참여했던 노동계급 운동도 변화시켰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전까지 노동조합은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무관심과 적대감에 직면하던 곳이었지만, 이후 몇 년 사이에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곳이 됐다. 사트남 비르디가 이를 명쾌하게 포착했다.
패배로 인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그런윅 파업은 조직 노동계급의 일부 사람들의 정치 의식이 극적이고 유기적인 변화를 (1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겪었음을 뚜렷하게 보여 줬다. 핵심 노동자 집단들이 이전에는 인종과 민족이라는 지배적 관념의 틀 안에서 편협하게 계급 개념을 이해했다면, 이후에는 계급을 더 포괄적인 언어로 이해했고 이제는 인종적으로 소수인 노동자들도 아우를 수 있게 됐다. 이런 정치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데서 핵심 역할을 한 것은 사회주의 활동가들이었다. 아시아인, 흑인, 백인으로 이뤄진 노동계급이 형성되는 이런 과정은 불균등하고 모순돼 있었지만, 가장 분명한 것은 영국 자본주의의 유기적 위기가 한창이던 1970년대에 벌어졌다는 것이다.
결론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고강도의 계급 투쟁이 벌어지는 시기는 가능성으로 가득 찬 시기다. 노동자들이 더 전투적일수록 그들의 조직과 전략은 더 창의적이고 자신감 넘치게 된다. 그러한 시기에 투쟁을 일반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급진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운동 안의 상식으로 부상하게 된다. 또한 이런 시기는 계급 내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편견과 분열까지도 극복할 기회이다. 런던 부두 노동자들의 사례는 여기에 딱 들어맞다.
1968년 4월 런던 부두 노동자들이 하루 파업을 벌이고 의사당으로 행진한 악명 높은 일이 있었다. 이넉 파월의 “피의 강물” 연설을 지지하며 흑인 이민의 중단을 요구한 것이다. 부두 노동자들의 행동은 그들이 종사하던 산업이 쇠퇴하는 가운데 노동당 정부가 자신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반영한 것이었다. 절망하고 분노한 노동자들이 그 대신 파월에게 기대를 건 것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1972년 7월, 이 부두 노동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현장위원 조직에 의지해 보수당의 산업관계법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기고 “펜턴빌의 다섯 명”을 석방시켰다. 이 승리가 부두 노동자들에게 심어 준 자신감으로 인해 더 일반화된 계급 정치를 향한 지지도 강화됐다. 5년 후인 1977년 7월 11일, 로열 부두의 현장위원들이 맨 앞에 배너를 세우고 압도적으로 백인 노동조합원들로 이뤄진 5000명 대오를 이끌고 대규모 피켓라인 시위에 참가하며,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던 런던 서부의 그런윅 투쟁을 지지했다. 런던 부두 노동자들은 1970년대 후반 영국을 휩쓴 파시즘의 급부상에도 대체로 저항했다.
백인 노동자들이 인종차별주의의 영향력을 뿌리칠 수 있는지 여부는 미리 결정돼 있지도 않고, 그저 우연에 내맡겨진 것도 아니다. 노동계급 내 소수가 동료들 사이에, 그리고 더 넓은 사회에 퍼져 있는 편견에 의식적으로 도전하는 것에 달려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러한 진전을 이끈 이들은 새롭고 다문화적인 노동계급 운동의 아시아인, 흑인, 백인 선구자들이었다.
55 순종적인 이주민이라는 고정 관념에 도전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이제 선명하게 가리킬 선례가 있었고, 이것이 아시아계 노동자들 자신의 자아상과 광범한 노동계급 모두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중요한 사실을 담고 있다. 즉, 종전 후 아시아계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지 흥미로운 역사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탄생 이래 계급 안에서 반복된 패턴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주노동자, 여성과 같은 새로운 층의 사람들의 노동시장 유입, 신기술이나 새로운 작업 방식의 도입,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완전히 새로운 산업의 등장은 언제나 운동에 도전을 제기해 왔다. 기존 조직들이 해체되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것은 변화 과정의 일부다. 이는 끊임없는 쇄신의 과정으로, 오늘날에는 동유럽 노동자들과 세계 여러 곳에서 온 난민들을 조직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쟁취한 성과들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고 지속적으로 싸워 지켜야만 한다.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이룬 진전은 오늘날 이슬람 혐오와 이주민 반대 인종차별주의가 크게 전진함에 따라 위협받고 있다.
그 뒤 여러 해 동안 아시아계 노동자들 위주의 파업은 더 많았지만, 그 파업들이 싸운 지형은 이제 매우 달라져 있었다.그런윅 투쟁 이후 많은 것이 변했지만, 노동조합 지도부의 동요하는 본성은 바뀌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날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지도적인 전국적 직책에 흑인과 아시아계 인물들을 포함하고 있고 정기적으로 인종차별 반대 대회를 연다. 그리고 많은 노동조합이 자기 대열 내의 분열을 극복한 자랑스런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낡고 새로운 편견들이 생겨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오늘날, 노동운동의 일부 부문은 영국 사회에서 성장하는 인종차별주의에 적응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노동당 우파 의원들이 앞장서고 있고 이들은 이민에 대해 강경하게 보이려고 필사적이다. 그러나 영국 인종차별주의의 역사가 보여 주는 바는 편견을 달래려는 시도들이 사태를 키우고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대안은 온갖 배경과 국적의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우리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인종차별주의의 지배력을 깨트리려고 투쟁하는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다.
주
-
출처: Yuri Prasad, ‘Here to stay, here to fight: How Asians transformed the British working class’, International Socialism, 153 (Winter 2017).
↩
- 이 논문 초고를 논평해 준 에스미 추나라, 찰리 킴버, 하산 마함달리, 발윈더 라나, 마이크 시몬스에게 감사를 전한다. 특히 자신의 지하 기록 보관실을 철저히 뒤져 준 마이크와, 값을 매길 수 없는 IS/SWP 팸플릿 보관물을 제공해 준 존 러지, 그리고 수많은 지난 호 신문들을 찾아내는 데 도움을 준 〈Socialist Worker〉 동지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
- 예컨대, 1963년 브리스틀 버스 회사들의 유색인 고용 거부에 맞선 쟁의 사례는 Dresser, 2013을 보시오. ↩
- Virdee, 2014, p36. ↩
- Ramdin, 1987, p199에서 인용. ↩
- Ramdin, 1987, pp199-204; Fryer, 1992, p376. ↩
- Joyce, 2015, p121에서 인용. 그에 비해서, 2015년에 파업으로 발생한 근로손실일수는 국가통계청 발표로 단 106건의 파업에 17만 일 정도였다. ↩
- Foot, 1965, p11. ↩
- 뒤이어 다음 투쟁들이 있었지만 이 글에서는 지면 제약으로 다루지 못한다. 1967년에는 팁톤의 코니그리 주조 공장, 1968년에는 미드랜드모터실린더 회사, 웨스트 브로미치에 있는 뉴비 주조 공장. ↩
- Castles and Kosack, 1973, p153. ↩
- Ramdin, 1987, p271. ↩
- Fryer, 1992, p386. ↩
- Birchall, 2011. ↩
- Gilroy, 1987, Roediger, 1999, Robinson, 2000. 또 Bourne, 2016과 나의 평가인 Prasad, 2016도 보시오. ↩
- Radin, 1966, p162. ↩
- Marx, 1975. ↩
- Campaign Against Racism and Fascism/Southall Rights, 1981, pp12-15. ↩
- Bourne, 2016, p103. ↩
- 저자와의 인터뷰(2016) ↩
- 파월을 지지해 파업을 벌인 노동자들 수와 공장들에 대한 더 상세한 분석은 Virdee, 2014, pp115-116를 보시오. ↩
- Wrench, 1986; Sullivan, 2012; Radin, 1966. ↩
- Radin, 1966, p169. ↩
- 참가자 수에 대한 설명은 다양한데, Bennie Bunsee는 Spare Rib 21호에 330명이라 보고하고, Robert Moore(1975)는 Racism and Black Resistance에 400명에서 500명으로 증가했다고 하고, TUC의 Britain at Work 웹사이트는 500명이라고 제시한다(Sullivan, 2012). ↩
- Moore, 1975, p75. ↩
- Bunsee, 1974. ↩
- Moore, 1975. ↩
- Leicester Mercury, 1974. ↩
- Prescod, 2008. ↩
- Dhondy, 1974. ↩
- Flynn, 1974. ↩
- Dhondy, 1974. ↩
- Prescod, 2008. ↩
- 헐 공장에서는 잠깐 점거가 벌어졌지만, 사용자 측이 해고 수당을 주지 않겠다고 위협하자 중단했다. ↩
- Socialist Worker, 1975. ↩
- Virdee, 2014에서 인용. ↩
- Callinicos, 1982. ↩
- Virdee, 2014. ↩
- Ramamurthy, 2013, Prasad, 2013과 Mahamdallie, 2007을 보라. ↩
- 2002년 데보라 콜먼이 감독한 채널4의 다큐멘터리 “시크교도 거리Sikh Street”를 보시오. 발윈더는 나중에 IS 회원이 된다. 그는 1979년 국민전선에 맞선 사우스얼 시위의 대표 간사였고, 그런윅 파업에서는 SWP가 파견한 상근 활동가였다. ↩
- Rose, 1976. ↩
- Socialist Worker, 2009. ↩
- Dromey and Taylor, 2016, p4. ↩
- Socialist Worker, 1977, p6. ↩
- Sivanandan, 1982, pp130-131. ↩
- Women’s Voice, 1977, p17. ↩
- Socialist Worker, 1977, p8. ↩
- Socialist Worker, 1977, p9. ↩
- 로갈리는 첫 번째 대규모 피켓라인 시위 후 두 주 동안 ITV 10시 뉴스의 그런윅 관련 보도에서 그런 내용이 3분의 1이었다고 추산한다 — Rogaly, 1977, p80. ↩
- Socialist Worker, 1977, p12. ↩
- 크리클우드 우편노동조합의 지도적 활동가 두 명과 나눈 인터뷰는 Kimber, 2006를 보시오. ↩
- Dromey and Taylor, 2016, p189. ↩
- Socialist Worker, 2006. ↩
- 노동조합 현장 조직의 쇠락과 그 결과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Cliff, 1979와 Callinicos, 1982를 보시오. ↩
- Virdee, 2014, p135. ↩
- Callinicos, 1993, pp60-61. 부두 노동자 미킨 펜과의 인터뷰를 보려면 Fekete, 2016을 보시오. ↩
- 중요한 싸움들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1979년 슬라우의 [레스토랑 체인] 칙스, 1992년 버밍엄의 [금속업체] 번설, 1995년 힐링던 병원 청소 노동자 투쟁, 1998년 히스로 공항의 루프트한자 [기내식 공급업체] 스카이셰프, 2005년 히스로 공항의 [기내식 공급업체] 게이트고메, 2005년 런던 동부의 [디저트 기업] 암발라 푸드. ↩
참고 문헌
Birchall, Ian, 2011, “Ray Challinor and the 1965 Courtauld Strike”, London Socialist Historians Group Newsletter, number 42 (summer).
Bourne, Jenny (ed), 2016, “Race and Class: The Colour of Struggle, 1950s-1980s”, Race and Class, volume 51, number 1 (July).
Bunsee, Bennie, 1974, “Women in Struggle: The Strike at Mansfield Hosiery”, Spare Rib, number 21 (March).
Callinicos, Alex, 1982, “The Rank and File Movement Today”, International Socialism 17 (autumn), [국역: 《노동조합 속의 사회주의자들》(책갈피, 2018) 1장으로 실린 캘리니코스의 논문 ‘노동조합 속의 사회주의자들’은 이 논문을 확장한 것이다.]
Callinicos, Alex, 1993, Race and Class (Bookmarks). [국역: 《인종차별과 자본주의》, 책갈피, 2020]
Campaign Against Racism and Fascism/Southall Rights, 1981, Southall: Birth of a Black Community (Institute of Race Relations).
Castles, Stephen, and Godula Kosack, 1973, Immigrant Workers and Class Structure in Western Europe (Oxford University Press).
Cliff, Tony, 1979, “The Balance of Class Forces in Recent Years”, International Socialism 6 (autumn).
Dhondy, Mala, 1974, “The Strike at Imperial Typewriters”, Race Today (July).
Dresser, Madge, 2013, Black and White on the Buses: The 1963 Colour Bar Dispute in Bristol (Bookmarks).
Dromey, Jack, and Graham Taylor, 2016, Grunwick: The Workers’ Story, second edition (Lawrence and Wishart).
Fekete, Liz, 2016, “Dockers Against Racism: An Interview with Micky Fenn”, Race and Class, volume 58, number 1.
Flynn, Laurie, 1974, “Rotten for Whites Too”, Socialist Worker (3 August).
Foot, Paul, 1965, “Immigration and the British Labour Movement”, International Socialism 22 (1st series, autumn),
Fryer, Peter, 1992, Staying Power: The History of Black People in Britain (Pluto).
Gilroy, Paul, 1987, There Ain’t no Black in the Union Jack: The Cultural Politics of Race and Nation (Hutchinson).
Joyce, Simon, 2015, “Why Are There So Few Strikes?”, International Socialism 145 (winter).
Kimber, Charlie, 2006, “Cricklewood Postal Workers Supported the Grunwick Strikers”, Socialist Worker (12 August).
Leicester Mercury, 1974, “Jobs Cut-back Fear as Asians’ Strike Goes On” (13 May).
Mahamdallie, Hassan, 2007, “Muslim Working Class Struggles”, International Socialism 133 (winter).
Marx, Karl, 1975, “Marx to Sigfrid Meyer and August Vogt in New York” (9 April 1870), Selected Correspondence (Progress Publishers).
Moore, Robert, 1975, Racism and Black Resistance in Britain (Pluto).
Prasad, Yuri, 2013, “Fighting Racism is no Crime—the Hidden History of Britain’s Asian Youth Movements”, Socialist Worker (22 October).
Prasad, Yuri, 2016, “Marxism and Oppression —do we say ‘Class First, Race Later?’” Socialist Worker (19 July).
Prescod, Colin, 2008, Struggles for Black Community—Four Films by Colin Prescod (Institute of Race Relations).
Radin, Beryl, 1966, “Coloured Workers and British Trade Unions”, Race and Class, volume 8, number 2 (October).
Ramamurthy, Anandi, 2013, Black Star: Britain’s Asian Youth Movements (Pluto).
Ramdin, Ron, 1987, The Making of the Black Working Class in Britain (Wildwood House).
Robinson, Cedric, 2000, Black Marxism: The Making of the Black Radical Tradition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Roediger, David R, 1999, The Wages of Whiteness: Race and the Making of the American Working Class (Verso).
Rogaly, Joe, 1977, Grunwick (Penguin).
Rose, John, 1976, “The Southall Asian Youth Movement”, International Socialism 91 (first series, September).
Sivanandan, Ambalavaner, 1982, A Different Hunger: Writings on Black Resistance (Pluto Press).
Socialist Worker, 1975, “Racism—Cancer we Must Erase” (4 January).
Socialist Worker, 1977, Grunwick (Socialist Worker Pamphlet).
Socialist Worker, 2006, “Thirty Years since the Grunwick Strike” (12 August).
Socialist Worker, 2009, “Beating the Nazis in the 1970s: ‘We Did it Before and We’ll Do it Again’” (20 October).
Sullivan, Wilf, 2012, “Black Workers and Trade Unions 1945-2000” (TUC Britain at Work website).
Virdee, Satnam, 2014, Racism, Class and the Racialized Outsider (Palgrave Macmillan).
Women’s Voice, 1977, “Mrs Desai Once Worked at Grunwicks. For 10 Months she has been on a Picket Line Determined to Win the Right to Belong to a Union” (July).
Wrench, John, 1986, Unequal Comrades: Trade Unions, Equal Opportunities and Racism (Centre for Research in Ethnic Relations, University of Warw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