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유럽의 파시즘 *
우리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유럽 전역에서 극우가 전진하고 있고 그들의 자신감이 커지고 있다.
1 오스트리아에서는 나치 친위대SS 장교 출신들이 세운 정당인 자유당FPÖ이 중도우파와 연립 정부를 수립했다. 독일에서는 창당한 지 6년밖에 안 된 ‘독일을 위한 대안’(이하 AfD)이 오른쪽으로 급진화했고 2017년 총선에서 3위를 기록했다.
프랑스에서는 국민전선FN 후보 마린 르펜이 2017년 프랑스 대선 결선 투표에 올랐는데, 이는 창당 이래 겨우 두 번 있는 일이다. 르펜은 1060만 표를 얻어 그녀의 아버지가 2002년 얻은 것의 갑절을 받았다. 지난해[2018년] 9월 총선을 치른 스웨덴(한때 사회민주주의의 아성으로 여겨진 곳)에서는 1980년대에 파시스트 거리 운동에서 만들어진 스웨덴 민주당이 다섯 차례 연속으로 득표를 늘리며 17.5퍼센트를 얻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반反이민 정당 ‘동맹’이 연정을 추동하는 세력이 됐다. 헝가리에서는 오르반 빅토르와 그의 피데스당 정권이 갈수록 권위주의 성향을 강화하는 가운데, 반反무슬림 인종차별과 노골적인 유대인 혐오(유대인 자선가 조지 소로스를 괴롭히는 방식)를 결합시키고 있다.영국에서는 영국수호동맹EDL 지도자 출신인 토미 로빈슨을 중심으로 아마도 영국 역사상 가장 클 극우 거리 운동이 결집하고 있다. 영국독립당UKIP은 오른쪽으로 급진화하면서 그런 세력의 정치적 대변자 노릇을 하려고 한다.
전체 그림을 보면 이와 다른 풍경도 있다. 급진좌파는 유럽 전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세력이다. 도널드 트럼프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파업이 벨기에 전역과 포르투갈 공공부문에서 일어났고 아일랜드 간호사들도 파업에 나섰다. 프랑스에서는 노란조끼 운동이 계속 동원을 유지하고 있고, 유럽 전역에서 기후변화 대응을 촉구하는 학생들의 시위 물결이 일었다. 이 모든 사례에서 저항의 잠재력을 볼 수 있다.
정치적 양극화나, 한때 정치 지형을 지배했던 주류 정당들이 지지를 잃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러나 2010년대 전반기에는 좌경화가 주된 흐름인 것처럼 보였고, 그런 흐름에서 대표적인 것은 시리자와 포데모스에 대한 기대였다. 유럽연합의 잔혹한 개입으로 패배한 시리자는 오늘날 긴축을 집행하고 있고 더는 유럽 좌파가 희망을 품을 대상이 되지 못한다. 포데모스는 분열하고 표류하는 듯 보인다.
반면 오늘날 정치 지형을 주름잡고 정치 의제를 주도하는 것은 극우의 전진이다. 지난 20년간 심화돼 온 이슬람 혐오와 이주민 공격,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에서 트럼프가 권좌에 오른 것은 극우가 정당한 정치 세력이라는 인식을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런 변화가 분명 심각한 것이고 또 인종차별과 반동이 고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파시즘이라는 문제는 혹시 별개 아닐까? 일부 사람들은 그렇다고 본다. 몇몇 공공연한 파시스트 세력을 논외로 하면, 프랑스의 국민연합RN 같은 정당은 의회주의 전략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비非파시스트] 극우 정당으로 나머지 급진 우파 세력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엔초 트라베르소는 우리가 직면한 세력을 “포스트파시즘”이라고 부른다. 포스트파시즘 정당과 운동들은 그 뿌리가 역사 속 파시즘에 있을 수는 있지만, 이후 “돌연변이 과정”을 겪으면서 “최종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트라베르소는 국민전선/국민연합(이하 국민전선)이 “허물을 벗었다”고 보고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을 바꾸고 싶어 했던 고전적 파시즘과 달리 현 국민전선의 야심은 체제를 내부에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그런 관점은 21세기 파시스트들의 주장을 너무 많이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극우의 부상이라는 더 커다란 그림 속에서 명백한 파시즘 세력을 변별해 내야 한다. 그러려면 파시즘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현대 자본주의에 어떻게 적응했는지 알아야 한다.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내가 여기에 혁명가로서 서 있다면, 나는 혁명에 반대하는 혁명가이다.”
— 아돌프 히틀러, 1924년 법정에서
전간기[제1차세계대전 종전과 제2차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의 시기]의 유럽에서는 온갖 파시즘 운동이 부상했다. 유럽은 1914~1923년에 전례없는 산업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을 겪었고, 뒤이어 여러 혁명적 위기와 잔혹한 반反혁명적 운동들이 있었다. 1920년대 중엽에 일시적으로 정치적·경제적 유예 국면을 거친 후 대공황이 찾아왔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혼란에 빠지고 기성 정치 구조는 쪼개질 위기에 처했다. 이런 환경에서 파시스트 세력들이 주변부를 벗어나 사회적 기반을 다졌고 일부는 권좌를 노리게 됐다.
이탈리아와 독일 두 나라에서 파시즘은 성공적으로 집권했다. 이 파시스트들이 승리한 대가는 익히 알려져 있다. 민주주의가 폐지되고, 노동계급 조직이 분쇄되고,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으로 향하는 길이 더 빨라졌고, 아우슈비츠 같은 살인 공장에서 유럽의 유대인 등 차별받는 집단들이 인종 학살을 당했다.
4 트로츠키의 분석에는 몇몇 상호의존적인 요소들이 결합돼 있다.
파시즘이 오늘날에도 유의미한지를 이해하려면, 가장 “고전적” 형태로 발전한 전간기 파시즘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본질에서 어떤 요소들이 오늘날 연속되고 또 단절됐는지 살펴야 한다. 파시즘 분석의 핵심을 제공한 인물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인 레온 트로츠키다. 그는 파시즘의 독특한 본질을 포착했고 파시즘이 다른 권위주의적 반동에 비해서도 특별하게 더 위협적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결정적으로 트로츠키는 파시즘이 자본가 계급 핵심부의 직접적 정치적 표현체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했다.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의 주장과 달리 파시즘은 그저 “대자본의 도구”가 아니었다.파시즘은 반혁명의 극단적 형태다
파시즘의 목표는 노동계급 조직을 혁명적 조직부터 보수적 조직까지 모두 영구적으로 뿌리 뽑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탄압을 가하고 공포 정치를 펴는 것, 심지어 노동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부문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파시즘은 그만큼 가장 철저한 반혁명이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지적했다.
파시즘은 단지 보복, 잔혹함, 경찰 테러로 이뤄진 체제가 아니다. 파시즘은 부르주아 사회 안에 있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요소를 모조리 뿌리 뽑고 들어선 독특한 통치 체제다. …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노동자들 중 가장 혁명적인 부문을 물리적으로 멸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뿐 아니라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노동계급 조직 일체를 분쇄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방어적 구조물을 파괴하고, 지난 세 번의 사반세기 동안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이 이뤄낸 모든 것을 뿌리 뽑는 것이 필요하다.
6 나치는 모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기관들”이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완전히 파괴했다.” 7
트로츠키가 독일 노동계급에게 쓴 이 경고문은 비극적이게도 선견지명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히틀러가 1933년 1월 30일 총리가 된 지 넉 달 만에 독일공산당KPD뿐 아니라 사회민주당SPD까지 불법화됐고 나치 돌격대SA와 국가가 가하는 폭력 물결 앞에 파괴됐다. 노동조합은 [보수적인] 기독교 노동조합까지 나치에 장악됐고 더는 독립적 단체가 아니게 됐다.파시즘은 대중운동이다 이런 일을 관철시키려면 기존 국가 기구(경찰, 군대 등)에 기대는 통상적인 권위주의적 반동으로는 부족했다. 거리에서 좌파들과 물리적으로 대결하고 궁극적으로는 국가에서 독립적인 모든 단체들을 분쇄하고 원자화할 수 있는, 광신자들로 구성된 준군사 조직을 만들어야 했다. 1930년에 나치가 선거에서 돌파구를 냈을 때, 그들의 준군사 조직 돌격대의 규모가 이미 10만 명이나 됐다. 1933년이면 40만 명까지 성장했고, 나치당 자체도 당원이 1928년 10만 명 이하에서 1933년 85만 명으로 빠르게 늘었다.
이 지지자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파시즘은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자는 이데올로기적 비전을 제시했다. 그런 비전 속 사회에서는 “민족” 자본과 노동이 다시 조화를 이루고, 소생산자들이 주름잡고, 민족의 쇠락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민족적 통일성(이것 자체가 허구다)을 해친다고 여겨지는 요소들을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숙청 대상에는 계급 적대를 조장하는 노동자 단체들, 그런 갈등을 “감내하는” 자유 민주주의 기관들, 그리고 나치들의 눈에 “외부 세력”으로 보이는 유대인 등 인종적 소수자들이 포함됐다. 트로츠키는 그런 대중 운동의 핵심부가 프티부르주아지(조직 노동자들과 대자본 사이에 있는 소생산자와 독립적인 전문직들)로 이뤄져 있다고 주장했다. 위기 국면에서 프티부르주아지는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노동계급으로 전락할까 두려워하는 동시에 자기보다 위에 있는 대기업에 대해서는 분한 마음을 갖고 있다. 이처럼 파시즘은 독립적인 반동적 대중 운동으로서 성장하면서 우고 팔레타가 지배계급으로부터의 “상대적 자율성”이라고 부른 것을 갖게 된다.
파시즘은 혁명적 운동으로 위장한다
프티부르주아 대중 운동을 하나로 묶기 위해 나치들은 “마르크스주의적” 노동자 단체들을 공격했을 뿐 아니라, 대자본과 독일의 “반동적인” 기성 정치권에 맞서는 “민족 혁명”이 필요하다는 미사여구를 사용했다. 그런 수사는 데마고기인 동시에 매우 교묘한 것이었다. 근본에서 나치는 자본주의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 대신 생산적이고 민족 이익에 종속되는 “건강한” 자본주의와, 그들이 보기에 투기적이고 민족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유대인 자본”(그들의 유대인 혐오적 세계관을 반영한다)을 구별했다.
이를 통해 나치는 반혁명적 운동을 혁명적인 반反자본주의 운동이라고 내세웠다. 이처럼 나치는 급진적 언어를 쓰고, (설령 개별 자본가 몇몇의 지원을 받았더라도) 자본가 계급의 정치 구조물 바깥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발전한 대중 운동이기 때문에 지배계급의 제1 선호 대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 독일의 지배자들은 히틀러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의 돌격대가 노동자 운동과 유대인 사업가들만이 아니라 더 광범한 지배계급을 적대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그들은 히틀러가 노동자 운동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면 아래로부터 저항이 폭발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1934~1936년 프랑스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프랑스의 파시스트 “연맹들”이 정부를 무너뜨리자 노동자들이 대규모 행동에 나선 것이다. 1936년 스페인에서 프랑코 장군이 권력을 잡았을 때 반란이 터져 나온 것도 비슷한 경우였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천한 것”들의 수단을 쓰는 것을 내켜 하지 않는다. … 그 충격과 혼란이 비록 부르주아 사회의 이익을 위한 것일지라도 위험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파시즘과 전통적 부르주아지 정당들 사이에 있는 갈등의 원천이다. … 대자본이 이 수단을 꺼리는 것은, 마치 치통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이를 뽑기를 꺼리는 것과 같다.
지배계급이 히틀러를 선택한 것은 도박이었고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 엄청난 위기가 있어야 했다. 전통적 우파 정당들의 지지층 붕괴와 독일의 전례 없는 경제적 몰락이 결합되자 지배계급이 히틀러를 권좌에 앉혔다.
나치는 어떻게 세력을 형성하는가: 이중 전략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줄여서 나치)은 더 광범했던 푈키셰völkische 운동(유대인 혐오적인 극단적 민족주의) 단체들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그 가운데서 히틀러의 전략이 독특했던 것은 바이마르 정치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선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접 실행할 전투 조직 양성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또한 나치는 의회 내 부르주아 극우 정당들(예컨대 독일민족인민당DNVP)을 배척했는데 그들이 대중적 뿌리도 충분치 않고 의회 내 타협에 너무 젖어 있다는 것이었다. 반면 나치는 대중의 염원과 “가장 잔혹하고 가차없이 행동할” 의지를 결합한다고 히틀러는 설명했다. 처음에 나치는 의회주의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군사적 운동으로 간주됐다. 실제로 1922년 나치 당대회에서는 히틀러의 주도 아래 선거 참여 반대 결정이 통과됐다.
그러나 1923년 뮌헨 맥주홀 쿠데타(히틀러와 그의 동맹이 직접적 무장 투쟁으로 쿠데타를 촉발하려 시도했다)가 실패한 후 히틀러는 기존 노선을 재평가하고 재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나치당이 선거 참여를 완강히 거부하는 기존 입장을 버리도록 했다. 이제 히틀러는 이렇게 주장했다.
(나치는) 새로운 행동 노선을 추구해야 한다. … 음모적 무장 투쟁으로 권력을 잡으려 하기보다는 우리는 코를 막고 의회에 들어가 가톨릭과 마르크스주의 의원들에 맞서야 한다. 표 대결에서 그들을 이기는 것이 총 대결보다 더 오래 걸릴지라도, 적어도 그 결과는 저들이 만든 헌법의 보장을 받을 것이다.이런 이중 전략, 즉 선거와 준군사적 거리 운동을 결합하는 전략이 나치의 목적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돌격대 대장이었던 헤르만 괴링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 국가와 현재 체제를 철저하게 무너뜨리기 위해 싸우지만, 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한다. … 우리는 국가를 증오한다고 했지만 [이제는 — 마크 토마스] 국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래도 우리의 진심을 모두 알고 있다.”
반혁명적 강령을 혁명적 언어로 위장한 나치는 이제 “용인될 만한 세력”이라는 가면과 정상적 세력이라는 가림막 뒤에 숨어 전진하려 했다. 역사가 요아힘 페스트는 이렇게 관찰했다.
[히틀러의 — 마크 토마스] 야심은 변하지 않았다. 바로 권력 장악이다. 이를 위해 그는 독재적이고 군사적인 정당을 건설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권세 있는 집단과 기구들의 신뢰를 회복해야 했다. 다시 말해, 히틀러는 혁명적으로 보이는 동시에 기존 질서의 수호자처럼 보여야 했고, 급진적이면서도 온건하게 보여야 했다. 그는 체제를 위협하는 동시에 보호하는 구실을 해야 했다. 그는 법을 어기는 동시에 법의 수호자로서의 신뢰도 구축해야 했다.
분명 1929~1932년 경제 대붕괴는 나치가 돌파구를 연 것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열쇠이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나치는 히틀러의 주도 아래 정상적 세력 행세를 하고 더 전통적인 보수 세력과의 동맹 관계를 통해 정당성을 인정받고, 언론 지면을 장식하고,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에 대공황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파탄 난 상황을 이용할 수 있었다.
핵심적인 변화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요 보수 정당이었던 독일민족인민당이 급진화한 것이었다. 독일민족인민당은 1918년에 창당했고 제1차세계대전 이전 보수 정당들의 계승자로서 매우 반동적이었다. 왕당파에 친화적이고 유대인 혐오적이며 바이마르 공화국에 적대적이었다. 1920년대 중엽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부분적으로 인정했는데 당시 혁명의 위협이 가라앉고 경제가 확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28년에 당권을 차지한 언론 재벌이자 산업가인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의 지도 아래 독일민족인민당은 더한층 우경화하며, 더 광범한 바이마르 공화국 반대 정서(나치도 포함된다)의 기수가 되고자 했다. 독일민족인민당은 나치의 강령과 수단들을 일부 차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통해 요란할 뿐 보잘것없는 히틀러가 아니라 자신들이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후겐베르크는 나치와 함께 영 안Young Plan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영 안은 제1차세계대전 후 독일을 망가뜨리던 전쟁 배상금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일부 조정하는 계획이었다.
15 또한 나치 돌격대원 수천 명이 철모단(독일민족인민당의 무장조직) 등 다른 민족주의 준군사 조직들과 함께 행진도 했다.
히틀러는 후겐베르크와 동맹을 맺고 영 안 반대 운동을 함께 벌이면서 정치적 변방을 벗어날 기회를 잡았고, 또 나치가 급진 우파 중에서 가장 혈기왕성한 세력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 우파들의 단결로 주되게 혜택을 본 것은 나치였다. 페스트는 영 안 반대 운동과 그 과정에서 정당성을 인정받게 된 것이 히틀러에게 “전국 정치로 향하는 최종 돌파구가 됐다”고 평가했다. 1930년 9월 총선에서 나치의 득표는 2년 전 2.6퍼센트에서 18.25퍼센트로 크게 뛰었고, 나치는 제9당에서 제2당이 됐다. 후겐베르크와 독일민족인민당은 다시 한 번 히틀러와 손을 잡았지만 이제는 약자의 처지였다. 독일민족인민당 투표자의 절반이 나치로 옮겨 간 것이다. 1931년 10월 바트 하르츠부르크에서 민족주의 야당들이 단결을 과시하기 위해 개최한 대중 집회에 초대된 히틀러는 후겐베르크를 비롯해 “우파 중 권력, 돈, 명망이 있는 모든 이들”과 나란히 서는 모습을 보였다.히틀러의 방향 전환 ― “정상적 세력”이라는 외양을 추구하기, 권력층을 향해 좀더 점잖은 모습을 보여 주기, 1923년 이후 선거 정치에 참여하기 ― 과 기존 우파 일부의 급진화가 이제 맞물리면서 나치가 전국 정치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진출하도록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히틀러는 나치가 광범한 연합 안에서도 여전히 독립성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에 가장 급진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은 바로 자신들이라는 점을 지지자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행동했다. 바트 하르츠부르크 집회에서 히틀러는 나치 돌격대의 행진이 끝나자마자 무대에서 보란 듯이 곧장 내려왔는데, 철모단 행렬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일주일 후 히틀러는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돌격대 10만 명을 동원한 거대한 집회를 조직했고, 〈라이프치히 최신 뉴스〉의 편집자에게 “당신은 우리가 맞서 싸우고 있는 부르주아지를 대표하고 있다”고 말했다. 용인될 만한 세력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자신들이 독립적 세력이고 반혁명적 급진주의로 무장했음을 내세울 필요 사이에는 긴장이 있었다. 그래서 나치는 내부 분열이 상시적이었고 때때로 당이 쪼개질 위험에 이르기도 했다. 독일 노동자 운동 측이 대중적 반격을 제대로 하지 않아 나치가 그런 내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독일 좌파의 비극이다.
파시즘의 재부상: 1970년대~1990년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의 시기에 파시즘은 명성을 잃고 주변화됐다.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이 패배하며 파괴됐고, 홀로코스트의 현실이 드러나면서 그들을 공공연하게 옹호하는 자들은 만인의 기피 대상이 됐다. 게다가 1950~1960년대에는 장기 호황으로 완전고용이 이뤄지고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복지 국가가 확장돼 파시즘이 자라날 비옥할 토양이 거의 남지 않게 됐다. 사회학자 마이클 만은 “유럽에서 파시즘은 패배로 사망했고, 땅에 묻힌 것”처럼 보였다고 묘사했다.
19 그러나 하먼은 공통점뿐 아니라 차이점도 지목했다. 결정적으로 그 파시스트들은 전간기에 비해 활동가 기반이 훨씬 약했고, 무솔리니나 히틀러가 권좌에 오르기 전에 거느렸던 대규모 거리 폭력 조직을 전혀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25년 전 크리스 하먼(이 저널의 전 편집자)은 유럽 전역에서 파시즘이 부활할 조짐을 보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먼은 1988년 프랑스 대선에서 국민전선 지도자 장마리 르펜이 14퍼센트를 득표한 것과 독일에서 극우 공화당이 부상한 것을 지목했다. 그 선거 결과들은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집권하기 직전의 수년 동안 득표한 것에 견줄 만했다.신흥 파시스트들이 이처럼 선거에서 부흥하지만 거리에서의 존재감이 미약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전후 호황이 끝나면서 경제 위기와 대량 실업이 다시 돌아왔지만 선진 공업국의 경우 그 정도가 1930년대 초와 비교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래서 현대의 파시스트들은 선거에서 받은 지지를, 좌파와 노동자 운동을 상대로 전면적인 물리적 공격에 나설 태세가 된 간부층 확장으로 변환시키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동시에 하먼은 “선거중심적 파시즘”이 도전받지 않고 방치되면 “거리 투쟁 파시즘”이 성장할 기반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후 호황이 끝나고 경제 위기가 돌아온 것만으로는 파시즘이 온전하게 부활하기에 부족했고, 두 가지 추가적인 조건이 충족돼야 했다. 첫째로 파시스트들이 성장할 정치적 공간이 생겨나야 했다. 사회민주주의가 전후 호황의 절정기에 가능했던 개혁을 갈수록 제공하지 못하면서 이 조건이 충족됐다. 추가적으로, 이렇게 개혁의 전망이 어두워지자 이주민을 둘러싼 정치와 인종차별이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게 됐다. 그러나 둘째 조건이 남아 있었다. 파시즘이 만인의 기피 대상이라는 처지에서 벗어나려면 그 자신을 혁신해야 했다.
여기서 결정적 구실을 한 것이 프랑스의 국민전선이다. 독일의 파시스트 민족민주당NPD이나 영국의 국민전선NF은 대규모 반反파시즘 운동으로 패배했지만, 프랑스에서는 사회당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에 대한 환멸이 만들어 준 정치 공간을 이용해 국민전선이 돌파구를 열었다. 제대로 된 도전에 부딪히지 않은 덕에 국민전선은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1960년대에 프랑스 파시스트들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의 변화된 조건에서 다시금 유의미한 세력으로 부상할 방안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짐 울프리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1960년대에 프랑스 극우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파시즘이 적응해야 했던 세 가지 요소를 놓고 씨름했다. 친나치 비시 정권의 패배, 빠른 경제적 현대화, 탈식민지화라는 문제가 나치즘의 유효성에 의문을 던지고 있었다. 프랑스 북부에서 비시 정권 민병대의 지휘관 활동을 했던 프랑수아 고셰는 1961년에 그 문제에 관한 책을 썼다. 《파시즘은 여전히 현재성이 있는가?》에서 그는 파시즘의 특징이 교리를 유연하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전간기에 활동했던 방식을 고스란히 따를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21 초기 국민전선의 핵심적 일원이었던 프랑수아 뒤푸아는 “파시즘은 단지 그 외적인 측면(독재, 지도자의 원리, 단일 정당, 제복, 경례, 준군사적 훈련, 청년 지도)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22 그러나 르펜과 국민전선이 용인될 만한 세력임을 표방하고 완곡어법을 쓴다고 해서 파시즘 프로젝트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새로 얻은 청중을 “우리의 모습대로” 탈바꿈시키는 것, 즉 인종차별적인 선거 지지자들 사이에서 파시스트 간부층을 확충하는 것이다. 23
그런 변화로는 전간기 파시즘과의 연계를 명시적으로 드러내기를 일절 삼가고, 용인될 만한 세력이라는 이미지를 쌓고, 겉으로는 의회민주주의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권력을 잡으려면 긴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있었다. 또한 알랭 브느와 같은 프랑스 신우파 사상가들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알랭 브느와는 인종차별을 “문화적 차이”로 포장하는 법을 개발했다. 생물학적 우월성에 기대는 주장은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바로 이것을 위해 르펜이 한편으로는 용인될 법한 세력으로 인정받고 또 주류 우파의 일부를 끌어당기려 하면서도, 국민전선의 아웃사이더 이미지를 유지하고 자신의 지지자들을 더 강경하게 만들려 하는 것이다. 르펜의 악명 높은 홀로코스트 발언, 즉 1987년 라디오 황금시간대에 홀로코스트가 “역사의 세세한 사실일 뿐”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동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늘 그렇듯 언론과 르펜의 적수들은 그 발언을 “말실수”라고 치부했지만 실제로는 치열하게 계산된 행위였다. 국민전선의 내부 교육자료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겁주거나 불쾌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는 이 유약하고 겁이 많은 사회에서 과격한 발언은 많은 사람들의 불안과 불신, 혐오를 자아낸다. 그런 만큼 대중 앞에서 자신을 드러낼 때 거칠거나 극단적으로 보이는 표현을 삼가야 한다. 어떤 말이든, 똑같은 힘을 담고서도 대중이 쉽게 받아들일 언어로 바꿔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컨대 “깜둥이들을 바다에 빠뜨리자”고 말하는 대신, “제3세계 이주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조직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피시와 울프리스가 “이중 담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발전시킨 것이다.
국민전선은 의도적으로 이중 담론을 구사한다. 하나는 공식적이고 대외적인 담론으로 자신들이 정치 질서 내의 정상적 세력임을 표방한다. 다른 하나는 비공식적이고 내부용 담론으로 자신들이 반反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 의제를 추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정상적 세력이라는 가림막은 적들과 관찰자들을 속일 수 있도록 어느 정도 불투명해야 하지만, 자신의 당원들은 속아 넘어가지 않을 만큼 투명하기도 해야 한다.
현대의 파시스트들이 이런 변신을 꾀하는 만큼, 그들이 공개한 강령에만 관심을 쏟으면 가면을 그 본질로 오판할 위험이 커진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급진 우파에 관한 연구들을 지배하는 것은 이런 관념론적 접근법이다. 그래서 그 단체의 교리를 조직과 전략보다 우선시하고, 겉으로 보이는 것을 수면 아래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보다 중시하고, 파시즘이 더 이상 중대한 세력이 아니라고 결론 짓는다. 더욱이 역사학자 로버트 팩스턴이 통찰력 있는 연구를 통해 보였듯이 파시즘이라는 정치 조류는 다른 무엇보다도 “진실을 급진적으로 도구화하는 것”에 능하고 이는 역사로도 입증된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내세울 강령을 상황에 맞게 대단히 유연하게 바꿀 줄 안다.
유리한 환경에서 뿌리 내리기
27 다행스럽게도 아직 우리는 3단계를 앞두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팩스턴이 말한 2단계, 즉 파시스트들의 “뿌리를 내리기”(선거에서 득표하기, 의회 입성, 전국 정치 논쟁에 개입하고 영향력을 키우고 그럼으로써 우경적 압력 넣기, 동시에 더 크고 자신감 있는 파시스트 간부층 양성하기)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팩스턴은 더 나아가, 파시즘은 변화하고 진화할 줄 알고, 고정불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팩스턴은 파시즘을 다섯 단계로 구분했다. 1) 파시스트 운동의 탄생, 2) 정치 체제에 성공적으로 뿌리 내리기, 3) 권력 장악, 4) 권력을 휘두르기, 5) 장기적 운명으로 보수적 권위주의 정권으로 “정상화”하거나 더한층의 급진화하기. 2007~2009년 선진 공업국들을 뒤흔든 금융·경제 위기 후 10년 동안 이 과정은 더한층 진척됐다. 그 결과, 파시스트들이 상당한 존재감을 가지는 나라가 전에는 유럽 내에서 한 줌이었다면 이제는 어디서나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처럼 상황이 흘러가고 있다. 비록 현대 파시스트들이 상당한 약점(아래에서 다룰 것이다)을 갖고 있더라도 말이다. 실제로 2009년 이후 여러 나라에서 파시스트 정당들이 각국 의회에 잇따라 진입했다. 헝가리 요빅(2010), 독일의 AfD(2017), 스웨덴 민주당(2010), 그리스의 황금새벽당(2012), 키프로스에서는 황금새벽당의 자매정당인 ELAM(2016), ‘이탈리아 형제당’(2018), ‘인민당-우리의 슬로바키아’(2016). 1994년에 하먼이 당시 득표를 두고 1930년대 나치들이 얻은 것과 비슷하다고 했는데, 사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다(표 1).당명 | 연도 | 득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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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독일) | 1930 | 18.3 | |
플람스의 이익(벨기에) | 2014 | 3.67 | 연방 의회 |
5.98 | 플란데런 의회 | ||
황금새벽당 | 2015 | 7.0 | |
자유당(오스트리아) | 2016 | 35.1 | 대선(1차 투표) |
46.2 | 대선(12월 결선 투표) | ||
2017 | 26.0 | ||
국민전선/국민연합(프랑스) | 2017 | 13.2 | 총선(1차 투표) |
8.75 | 총선(결선) | ||
21.3 | 대선 | ||
33.9 | 대선(결선) | ||
독일을 위한 대안(독일) | 2017 | 12.6 | |
스웨덴 민주당 | 2018 | 17.53 | |
요빅(헝가리) | 2018 | 19.06 |
극우 지지표가 늘어난 것을 경제 위기, 긴축, 커지는 불평등이 낳은 자동적 결과라고 볼 수 없다. 경제 위기로 부자와 지배계급을 향한 분노가 커지고 노동계급의 단결이 강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극우 부상에 대한 그런 조야하고 경제주의적인 분석은, 경기 확장 국면이 돌아왔는데도 그들이 무너지지 않을 경우에 허를 찔리게 된다(헝가리와 폴란드는 현재 GDP가 해마다 약 5퍼센트씩 성장하고 있지만 두 나라 모두 파시스트 운동이 주요하게 존재한다). 경제 환원론적 분석은 또한 정치적으로 협소한 경제주의적 대응으로 이어진다. 경제주의적 대응은 투쟁의 초점을 오로지 임금과 노동조건, 해고 문제나 반反긴축 정부 당선에 둔 채, 파시스트 단체들 자체와 그들의 무기이자 성장 비결인 인종차별주의에 직접 도전하는 것은 중시하지 않는다.
경제환원론적 분석의 거울 대칭 같은 오류는 극우의 부상이 “문화적 요소”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백인 노동계급”의 정체성 위기가 원인이라고 보는 설명이 그런 사례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어째서 인종차별적 주장이 정치 의제의 중심을 차지하게 됐는지, 또 왜 그것이 파시스트 정당 투표로 이어지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이런 접근법은 인종차별적 주장에 도전하는 것이 무망하고 거기에 타협해야 한다는 함의로 이어지기도 한다.
경제환원론적 주장이든 관념론적 주장이든 둘 다 부족하다. 신자유주의적 사회 구조조정으로 인한 경제 충격과 극우 성장에 유리한 이데올로기 지형, 이 둘을 핵심적으로 매개하는 것은 정치다. 결정적으로는 지배계급 내 흐름을 주도하는 자들, 특히 대중의 동의를 얻어 내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하는 기관들(정치 정당과 언론 등)이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위기에 대처하며 인종차별 문제에서 오른쪽으로 급진화한 것이다. 그런 대응은 신자유주의 중도파의 지지를 되살리기는커녕 극우의 사상이 더 쉽게 받아들여지도록 만들었다.
정당 체제의 위기
신자유주의 공격으로 인한 충격, 그리고 심화되는 불평등과 그로 인한 압력, 거기에 긴축까지 겹치면서 신자유주의 주장(시장과 기업들의 이익을 추구하면 인구 다수에게 이익이 돌아갈 것이라던)은 힘을 잃었다. 이런 상황은 정치 체제의 위기로 이어졌고 신자유주의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정당들(보수 정당과 사회민주주의 정당 둘 다)은 사회적 기반과 선거적 호소력이 썰물처럼 빠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 결과 좌파적 “아웃사이더”뿐 아니라 극우를 위한 공간이 생겼다.
정치 체제의 위기로 특히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 2017년 독일 총선에서 사민당은 1949년 이래 최악의 성적(20.5퍼센트)을 기록했는데 1998년 득표의 절반이었다. 2012~2017년에 집권해 있었던 프랑스 사회당은 2017년 총선에서 겨우 7.5퍼센트 득표하며 추락했다. 네덜란드 노동당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정기적으로 집권했던 당인데 2017년에 6퍼센트 미만 득표로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스웨덴에서 사회민주당은 2018년 총선에서 1위였지만 득표 자체는 3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고, 이는 1920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나 보수 정당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예컨대 독일 기민당도 2017년 총선에서 1949년 이래 최악의 성적을 받았고, 프랑스의 핵심 우파 정당인 공화당은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오스트리아 인민당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래로 핵심적인 보수 정당인데 새로 지도자가 된 세바스티안 쿠르츠 지도 아래 지지 기반 상실을 막고자 우경화하는 도박을 벌이고 있다. 그는 파시스트 자유당의 인종차별적 공약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그들과 함께 연립정부를 꾸리고 있다. 위기에 빠진 주류 정당들은 지지를 다시 끌어올리고자 인종차별을 밀어붙였지만, 그 결과 극우의 지지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극우의 관점을 더 용인될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더 심각해진 이슬람 혐오 이슬람 혐오는 현대 인종차별의 가장 뜨거운 문제가 됐다. 미국이 2000년대 초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한 이래로 이슬람 혐오가 전례없이 사회에 뿌리내리게 됐다. 그 변화를 보여 주는 척도 하나로, 무슬림 여성의 옷차림에 어떤 형태로든 법적 제한을 가하는 유럽연합 회원국이 9개로 늘었다. 이 정부들은 전국적으로 제한하거나(네덜란드, 덴마크, 벨기에, 불가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프랑스)과 일부 지역에서 제한하고(독일과 이탈리아) 있다.
30 기사당의 거점인 바이에른의 지방선거에서 AfD와 경쟁하게 되자 또 다른 내무부 장관이자 기사당 지도자인 호르스트 제호퍼는 다시금 “이슬람은 독일에 맞지 않는다” 하고 천명했다. 31 주류 정치권에서 이슬람 혐오가 심해진 것은 단지 우파 때문만은 아니었다. 2010년 사민당의 베를린 재무장관 출신이자 연방은행 이사회 중 한 명인 틸로 자라친은 《독일은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는 책을 발표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무슬림들의 독일 이주를 공격한 그 책은 100만 부 이상 팔렸다.
독일에서 “이슬람은 독일에 맞지 않는다”는 표어를 처음 내건 것은 AfD가 아니었다. 2011년 당시 연방정부의 내무부 장관이었던 보수 기사당의 한스-피터 프리드리히였다. 프랑스에서는 2007~2012년에 집권한 우파 대통령 니콜라스 사르코지가 악명 높은 발언을 했는데, 강력한 호스로 아랍인과 로마인[‘집시’의 정식 명칭] 청년들이 사는 주택단지를 쓸어버리겠다고 했다. 또 그들을 “라카일르”(‘쓰레기’라는 뜻)라는 매우 인종차별적 용어로 불렀다. 심지어 사르코지는 ‘이주민·통합·국가정체성·공존부’라는 것을 만들었다. 2012년 대선에서 사르코지와 그에 맞선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최종 승자)는 릴르의 한 공영 수영장에서 한 무리의 여성들(일부는 무슬림)을 위해 여성 전용 아쿠아짐 수업을 개설한 것을 두고 “공화국의 가치”가 위협받았다고 운운했다.33 주류 정치인들과 언론, 국가가 이슬람 혐오를 부추기고 극우의 사상을 정당화하는 일이 거듭 벌어졌다.
영국에서는 소위 자유주의-보수적 총리라던 데이비드 캐머런이 2011년 한 안보 대회에서 “국가 다문화주의”가 실패했다며,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것은 줄이고 … 훨씬 더 능동적인 근육질의 자유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무슬림들에게 “영국의 가치”를 내면화하라고 요구했다.이주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요새 유럽’ 인종차별을 악화시킨 또 다른 요인은 유럽연합의 국경 관리 체체가 확장·강화된 방식에 있다. 스타키스 쿠벨라키스는 유럽연합의 외부 국경 통제와 내부 이주 관리 체제의 충격적 실상을 들춰낸 바 있다. 쿠벨라키스는 이렇게 지적했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동의한 국제 조약에 따른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탈영토화된’ 구역이 [유럽]연합 내부에 여러 개로 늘었다. 공항 등 통과 지점에 인접한 난민 수용소들과 전쟁 지역을 연상시키는 ‘일시적’ 수용소들이 그렇다.”
난민을 외부 위협으로 간주하고 그들이 권리 보장의 위계에서 유독 낮은 지위를 갖는다는 관점은 인종차별을 부추기고 극우가 제시하는 권위주의적 해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극우가 부상하면 할수록 주류 정치 세력들은 더한층 그에 적응하는데,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유권자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그 자신이 인종차별을 부추겨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인종, 문화
신자유주의로 인한 사회 구조조정이 긴축과 결합되면 경쟁 격화로 이어질 수 있는데, 노동자들 사이에 “모두 나눠 가질 만큼 풍족하지 않다”는 생각이 자리 잡을 경우에 그렇다. 이런 생각이 집단적 투쟁 경험으로 도전받지 않으면 인종차별적 방향으로 이용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그 충격을 받는 것은 노동계급만이 아니다. 중간계급의 일부도 불확실성과 커지는 불평등이라는 소용돌이 속에 사회가 무너져 내린다는 공포에 사로잡힐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 올리버 나흐트바이의 묘사에 따르면, 독일의 중간계급은 수십 년간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뒤로 하고 이제는 “아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독일 중간계급의 상당 부분에게 … 재앙의 위협이 실제로 커졌다기보다는 오히려 그에 대한 걱정이 커진 것이다. ‘지위 하락을 우려하는 중간층’이 특히 이런 공포심에 크게 휘둘린다. 많은 이들은 자신들의 안정성이 끝나고 있고 ‘몰락이 …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여긴다.”
이 때문에 지위를 지키려는 날카로운 쟁투가 벌어진다.
중간계급은 약자들과의 연대를 어느 정도 저버렸다. 자신을 고립시킴으로써 안전을 희구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자유의사를 좀 더 후하게 존중했다면, 이제는 도덕·문화·행동양식에 좀 더 경직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돌아갔다. “감염” 및 “전염”에 대한 공포가 커지면서, 사람들은 하층계급이 사는 “평행 사회”를 최대한 멀리하고 또 엄격하게 격리시키려 한다.
37 더 일반적으로, 지배계급의 모든 부문이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 인종차별 논의가 새로운 방식으로 이뤄지게 됐다. 신자유주의의 핵심 교리는 시장에 의해 능력주의 사회가 만들어지고 개인은 노력과 재능에 따라 보상받는다는 것이다. 실패는 개인 탓이고, 집단적으로 경험하는 불평등 ― 낮은 소득 수준이나 높은 수감자 비율 등 ― 은 특정 공동체의 문화적 관행 탓으로 간주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인종차별적 제도나 기관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닐 데이비슨과 리처드 서울은 이렇게 지적한다. “‘능력주의적’ 신자유주의 주체성에 부합하지 않는 외견상의 행동양식은 달리 설명될 수 없고 오직 문화[적 차이 ― 역자]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38
나흐트바이는 나아가 이렇게 주장한다. “가혹한 사회적 경쟁, 풍족한 생활을 향한 몸부림, 기대했던 생활 수준과 안정성의 좌절은 하층 중간계급을 ‘야만적’ 수준의 사회 갈등으로 몰아넣는다. … 그런 상황에서는 사회적 지위 하락에 대한 두려움이 아주 독특한 권위주의를 낳는다.”트럼프를 보며 자신감 얻기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해 극우의 언어와 강경 국수주의 경제 정책을 채택한 것은 유럽의 극우와 파시스트들에게 어마어마한 자신감을 줬다. 더욱이 “반反자유주의” 정부들(예컨대 헝가리의 오르반, 폴란드의 법과정의당)이나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의 권위주의 정권이 등장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헤게모니에 도전할 여러 준거점을 제공했다.
39 반면 오늘날 파시스트들은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들이 모방하고 교훈을 얻을 귀중한 경험을 발견했다.
이는 예컨대 1970년대 영국의 국민전선이 처했던 국제적 상황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다. 당시 파시즘은 전체적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예컨대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 정권과 포르투갈의 권위주의 정부가 1970년대에 타도됐고 프랑스의 국민전선은 1981년 대선 출마에 필요한 서명을 확보하는 데에 실패했다. 1970년대에 영국 국민전선은 세계를 둘러보며 고립됐다고 느꼈다.21세기의 파시즘
마린 르펜: 파시즘을 포기했다? 마린 르펜(아버지 장마리 르펜에게서 당 지도자 자리를 2011년에 물려받았다)의 지도 아래, 국민전선이 과거 파시즘에 물들었던 정당에서 벗어나 통상적인 “민족주의·포퓰리즘적” 의회 정당이 됐다는 견해가 흔하다. 비록 마린 르펜이 국민전선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재조정하려 애써 왔지만, 그것은 정상적 세력이라는 이미지를 키우고 잠재적 지지를 끌어올리기 위한 전술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국민전선의 부대표이자 마린 르펜의 파트너인 루이 알리오는 2013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거리에서 책자를 반포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의 성장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은 이주민도 이슬람도 아니었다. … 우리의 유대인 혐오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에게 투표하길 꺼려 했다. … 마린 르펜은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점에 동의했다.”
르펜은 국민전선을 유대인 혐오에서 멀어지도록 만들려 하고, 또 국민전선이 프랑스 공화주의와 “공화국의 가치”를 수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르펜의 연설과 인터뷰를 연구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엘트샤니노프는 르펜이 공식적으로는 유대인 혐오를 거부하지만 그녀의 연설에는 “수사학적으로 유대인 혐오 담론의 요소가 일부 담겨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 르펜은 소위 민족 국가 대 “세계화” 세력 간의 갈등을 연설의 주요 테마로 삼는다. 그녀가 정의하는 “세계화” 세력은 자유주의적 “전체주의”의 한 형태로,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에 견줄 만한 것이다. 르펜은 2012년에 이렇게 말했다.
좌우를 막론하고 세계화주의자들은 … 시장의 … 법칙에 따라 지배되는 보편적 제국의 수립을 공공연히 옹호한다. 적이 사라지고 물질주의적 행복이 넘치는 세계라는 저들의 거짓말 뒤에는 가차없는 이데올로기,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 시장 중심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그 이데올로기는 지구 전체를 생산과 소비의 노예로 만들려는 끔찍한 목적에 복무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을 세력은 소수 대기업과 은행들이다.
42 그 결과로 “민족은 희석되고, 가족은 약해지고, 민족 단결은 사라지고, 우리의 정체성과 뿌리는 부정되고, 우리의 기억은 잊히고, 노력·노동·장점·용기·정의의 가치는 멸시당한다”고 주장한다. 43 이런 데마고그적이고 거짓된 반자본주의론은 신자유주의 시대 동안 고통받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또 이주민들이 세계화의 첨병이라며 사람들의 불만을 이주민들에게 돌리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대규모 이주를 통해 소위 건강하고 동질적인 민족을 위협하는 “세계화주의” 추동 세력은 누구인가? 가짜 민주주의 뒤에 숨은 은밀한 “압력 단체들”과 “특수한 이익 단체들”이 통제하는 금융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린 르펜이 그 은밀하고 강력한 세력이 누구인지 암시할 때 주기적으로 유대인 이름을 거명한다고 엘트샤니노프는 지적한다. 르펜이 공공연하게 유대인의 세계 지배를 주장하지는 않지만, 결국에는 “유대인 배척 수사를 통째로” 차용하는 것에 가깝다.
르펜은 이처럼 외견상 반자본주의적인 주장을 또 다른 주장과 연결시킨다. 승리한 시장이 대규모 이주민을 무기 삼아 원주민들을 살던 곳에서 떠나도록 만들고, 사람들이 그들의 집단적 역사와 단절돼 “언제든 바꿔치기 될 수 있는 존재”이자 무력한 존재가 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분명한 것은 유대인 혐오적 청중이나 독자는, 그녀의 말을 통해 자신들의 강박적 필요를 충족하려 할 것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의견을 숨기는 데에 익숙한 이들은 그녀의 말이 암시하고 또 거기서 연상되는 것을 기꺼이 읽어 내고 스스로 행간을 채울 것이다. 동시에 유대인 혐오적이지 않은 청중도 이 담론을 수용할 수 있다. 사회경제적 유대인 혐오로 나아가는 것에서 겨우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45 이런 충성도 시험은 ‘프랑스 유대인들의 애국심을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다.
르펜의 가장 중요하고 공공연한 표적은 프랑스의 무슬림이다. 그러나 에단 B 카츠가 관찰했듯, 그녀는 무슬림을 공격할 때 유대인만의 “차이점”을 주기적으로 거론하면서 무슬림과 유대인을 이간하려고 한다. 예컨대 르펜이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 상징”을 금지해야 한다고 2016년 10월과 2017년 2월에 주장했을 때, 그녀는 무슬림들의 히잡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키파도 거론했다. 르펜은 많은 프랑스 유대인들이 이슬람을 격퇴하기 위해 그런 “작은 희생”을 수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르펜은 프랑스 시민 중 비非유럽 국가의 국적을 가진 복수국적자들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주로 북아프리카계 무슬림들을 겨냥하는 것이지만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진 프랑스 유대인들도 그 대상이라고 분명히 했다.르펜의 시온주의 지지 선언은 유대인 혐오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속임수 이상이기도 하다. 식민 정착민 국가인 이스라엘은 인종주의적으로 배타적이고, 고도로 군사화된 서구 제국주의의 동맹이고, 자신의 존재가 “급진적” 이슬람주의 운동과 그런 국가한테 위협받는다고 상습적으로 주장한다. 이는 르펜의 세계관에 매우 부합한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유대인 시민들은 자신들의 민족국가에 뿌리내린 바람직한 “민족적” 유대인이고, 이와 대조적으로 소위 “세계화주의” 세력을 조장하는 해악적인 “범세계주의” 유대인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렇듯 시온주의를 지지한다고 해서 유대인 혐오가 아닌 것이 아니다.
46 이런 행보가 가능해진 것은 앞서 봤듯이 주류 정치권이 오른쪽으로 급진화하고 갈수록 권위주의적인 인종차별을 수용한 덕분이다. 47
마린 르펜의 “탈악마화” 전략의 둘째 요소는 프랑스 공화주의에 관한 수사를 차용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프랑스의 파시스트 전통은 프랑스 공화국에 적대적이었다. 이제 르펜은 국민전선이 “위대한 공화주의 정당”이라고 선언하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2007년 대선에서 처음 시작한 주장을 이어 가고 또 강화하는 것이다.48 물론 그런 발언은 무슬림을 악마화할 뿐 아니라 나치 점령이 사소한 문제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효과를 낸다. 2017년 대선에서 르펜은 1942년 비시 정부가 1만 3000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체포한 것(결국 이들은 아우슈비츠로 넘겨졌다)에 프랑스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마린 르펜이 대선 기간에 그런 발언을 한 것은, 용인될 만한 세력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치밀한 도발로 (그 과정에서 설령 일부 표를 잃더라도) 지지자들을 더 강경하게 다지는 전략이 장마리 르펜이 국민전선 지도자에서 물러난 뒤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모든 것과 함께 마린 르펜은 고의적 도발을 주기적으로 반복했다. 예컨대 무슬림들이 모스크 공간이 부족해서 거리에서 예배를 드린 것을 나치의 프랑스 점령에 비교했다(그리고 1년도 채 안 돼 프랑스 정부는 거리 예배를 금지하는 것으로 대응했다).‘독일을 위한 대안’AfD: 혼종
49 영국에서 유럽연합 반대를 내세우며 활동을 시작한 영국독립당과 유사했다.
AfD는 성장 과정에서 매우 빠르게 오른쪽으로 급진화했다. 이 당은 유로화와 유럽연합에 반대하는 우익 학자들이 2013년에 창당했고, 처음부터 작은 파시스트 중핵을 품고 있었지만 초기에는 공공연한 인종차별적 수사를 삼갔다.50 페기다와 AfD의 급진화로 당내 파시스트 계파는 영향력과 자신감을 키우며 강화됐다. 2015년, AfD 내 파시스트 계파의 지도자들인 비외른 회케와 안드레 포겐부르크는 “에르푸르트 선언”을 발표하며 AfD가 공공연한 나치 세력들의 입당을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기민당 정치인 출신으로 AfD 파시스트 계파의 또 다른 지도자인 알렉산더 가울란트가 재빨리 서명했다(그는 현재 AfD의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에르푸르트 선언은 AfD가 “갈수록 기성 정당 정치의 모습”을 답습하고 있다며 그 대신 “기성 정당들에 대한 애국적 대안”, “최근 수십 년의 사회적 실험(성주류화, 다문화주의, 무계획적 양육 등)에 맞선 인민의 운동”, “독일의 주권과 정체성이 껍데기만 남긴 채 사라지는 것에 맞선 저항 운동”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51 이 선언이 요구한 것은 AfD가 더 단단한 파시스트 중핵을 형성할 수 있도록 급진적 아웃사이더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르푸르트 선언과 함께 출범한 내부 분파 “날개”는 AfD 안에서 파시스트 계파를 조직하고 그 선언의 구상과 목표를 관철하고자 했다.
AfD 바깥에서 나치들이 시작한 인종차별적 이슬람 혐오 거리 대중 운동인 페기다Pegida가 2014년 하반기에 부상하면서 AfD 안에서는 인종차별을 핵심 정치적 메시지로 삼고자 하는 이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그래서 원래의 당 지도자 베른트 루케가 밀려나고 프라우케 페트리로 교체됐는데, 그녀는 국경을 넘는 난민들을 총으로 쏴 버려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인물이다.52 영국독립당의 경우, 창당 후 25년이 지난 2018년에 당대표가 된 제러드 배튼이 이슬람 혐오적 거리 운동(축구사나이연맹FLA과 토미 로빈슨을 중심으로 했다)에 구애하기 전까지 파시스트 입당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와 비교하면 AfD는 비슷한 변화 과정을 불과 2년 만에 압축적으로 거친 것이다.
2015년 AfD 당대회에서는 나치 조직들인 민족민주당과 공화당에 속했던 사람들의 입당을 허용하기로 표결했다(이전까지는 금지돼 있었다).이제 AfD로 파시스트들이 물밀 듯 들어왔고 신자유주의적이고 유럽연합 반대를 내세운 계파는 더욱더 주변화됐다. 그러나 AfD는 여전히 인종차별적 신자유주의자들과 민족주의 우익, 파시스트들이 섞여있는 혼종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앞의 두 집단이 기꺼이 파시스트들과 함께하려 한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53 가울란트도 AfD 청년 조직의 모임에서 “1000년이 넘는 독일의 성공적인 역사에서 히틀러와 나치는 새똥 같은 존재들”이라고 했다. 이것은 나치 시기를 역사적으로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파시스트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54
파시스트 계파의 자신감이 커졌다는 점은 그들이 지지자들을 다잡기 위해 사용하는 도발적인 언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적으로, 회케는 2017년 초 AfD 청년 조직의 모임에서 의도적으로 도발적인 내용의 연설을 했다. 그는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추모 공원을 두고 “기억의 정치학”이 문제라며 “우리 독일인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의 수도 한가운데에 자신을 욕보이는 기념물을 세운 사람들”이라고 말했다.파시스트들의 세력이 커지자, 선거적 지지를 잃을 것을 우려한 페트리가 파시스트 계파와 충돌했다가 당에서 쫓겨났다. AfD를 학문적으로 관찰하는 마티아스 크벤트는 페트리와 회케 사이의 긴장이 서로 다른 전략 간의 경쟁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페트리는 다른 정당과 연합할 수 있는 정당을 만들고 싶은 반면, 회케는 AfD를 운동 정당, 즉 새로운 우익 개념이 사회적으로 더 수용되도록 만들 수단이라고 본다. … 회케에게 의회주의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 “우리 대 저들”이라는 흔한 구도를 넘어 국가사회주의 언사와 곧장 통하는 것이다.페트리를 대신해 지도자가 된 가울란트와 알리스 바이델은 각각 파시스트 계파와 민족주의 보수 계파를 대표한다. 그러나 그 조건은 후자가 전자를 수용한다는 것이다. AfD의 파시스트 계파는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지지층을 만들려 한다. 예컨대 회케는 2018년 4월 아이젠바흐에서 자동차 노동자들의 공장 폐쇄 반대 시위에 나타났다(노동자들이 그를 쫓아냈다). 또한 그들은 주요 기업의 직장평의회 선거에도 후보를 내보내는데, 그 성과가 대단치는 않다.
57 회케는 이런 목표를 위한 전략의 3요소를 제시한다. 1) 선거용 정당을 건설하기, 즉 AfD. 2) 페기다 또는 2018년 여름 캠니츠에서 나치가 주도한 것과 같은 폭도들의 거리 운동. 3) 국가와 보안기구 안에서 동조적 세력 형성하기.
회케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최근 출판된 책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는》은 파시스트 계파가 추구하는 것의 본질을 더 명확하게 보여 준다. 미국 잡지 《자코뱅》의 보도를 보면, 그 책에서 회케는 우리가 사는 시대가 “민주주의 타락의 마지막 단계 … 로 절대주의적 전제정이 그 뒤를 이을 것”이라고 주장한다.AfD의 부상과 그들의 급격한 우경화는 주류 정치권이 인종차별의 정치에 매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면서 더 강경한 파시스트 프로젝트들이 파고들 수 있는 토양을 만든 것에서 비롯했다. 이전까지 파시스트들을 격리시켰던 “방역 지대”가 점점 얇아지면서 보수주의 우파 중 일부는 파시스트들의 인종차별을 따라하는 것을 넘어 조직적으로도 협력하고 일부는 같은 당에서 공존하기까지 한다.
선거 파시즘과 거리 운동: 자신들의 힘을 시험해 보기
58 그렇다고 해서 선거 파시스트 정당들이 거리를 장악할 의사가 없다거나 좀 더 작은 거리 투쟁 나치 조직들과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국민전선/국민연합의 경우 비록 거리 투쟁 조직을 공개적으로 양성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모임과 지도자들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상당한 규모의 보안 조직을 거느리고 있다. 그 조직은 최소 수백 명 규모이고 준군사 조직처럼 운영된다. 이 보안 조직은 또한 ‘방어연합기구’, ‘민족혁명청년단’ 같은 더 작은 나치 단체들과 연계를 맺고 있고 둘 중 후자는 2013년에 반파시스트 청년 활동가 클레망 메리크를 살해한 후 불법화된 곳이다. AfD는 메이데이 동원 등을 통해 자신들의 거리 동원 능력을 시험해 본다. 2018년 5월 베를린에서 AfD 집회를 조직한 귀도 라일은 그 집회가 이중 전략의 일환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우리는 대안적 정당이고 그래서 우리는 낡은 정당들과 다르게 행동한다. [의회 활동과 ― 마크 토마스] 병행해 우리는 거리로 나서 우리 당원들과 지지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59
오늘날의 선거 파시스트들은 1920~1930년대 무솔리니나 나치가 거느렸던 준군사 조직에 견줄 만한 조직을 갖고 있지 못하다. 한편 그리스의 황금새벽당과 헝가리의 요빅은 둘 다 상당한 준군사 조직을 갖고 있고 결과적으로 고전적 파시즘에 훨씬 가깝다(비록 요빅은 최근 “유로파시스트로의 전환” 중이고 자신이 용인될 만한 세력이라는 것을 전보다 더 내세우고 있지만 말이다).60 또한 로빈슨이 중심에 있는 지금의 거리 운동은 이전의 거리 운동들보다 국제적으로 극우/파시스트 단체들과 더 공공연하게 연계를 맺고 있고 이데올로기가 더 선명하다. 이들의 거리 운동에서 독일의 대안 우파 청년 운동 단체 ‘정체성 세대’ 회원들이 여러 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네덜란드의 이슬람 혐오론자 헤이르트 빌더스와 [벨기에의] ‘플람스의 이익’ 지도자 필립 드윈터, [도널드 트럼프의 전 백악관 수석 전략가] 스티브 배넌 같은 자들이 연설하기도 했다.
지난 10년은 이슬람 혐오 중심의 인종차별적 거리 운동이 부상한 시기였다. 영국에서 처음에는 영국수호동맹, 더 최근에는 축구사나이연맹이 등장했고, 갈수록 토미 로빈슨이 그 구심점이 되고 있다. 초기에 축구사나이연맹은 토미 로빈슨과 거리를 두려 했는데, 그에게 근본적인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극우와 무관하다고 내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후 축구사나이연맹은 빠르게 급진화했고 로빈슨이 중심적 인물로 부상했다. 한편 영국독립당은 축구사나이연맹을 자신의 영향력 안으로 끌어들여 당세를 재건하려 하고 있다.오늘날 거리에서 파시스트들의 위세는 히틀러와 나치 때보다 훨씬 약하다. 그러나 선거 파시스트들이 (초보적 형태로라도) 거리 영향력 강화로 노선을 바꾸고 준군사 조직의 발전을 도모할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회가 커다란 위기에 처하고 부르주아 정치가 더 오른쪽으로 급진화하며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면, 파시스트들은 그런 전환을 꾀할 수 있다.
보수, 극우 그리고 파시즘
오늘날의 대다수 파시스트 조직들이 선거적 영향력은 큰 반면 거리에서는 위력이 약하기 때문에 그 지도부 중 일부는 자유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분쇄한다는 장기 전략을 포기하는 대신 그 일부로 자리 잡자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61 이후 민족동맹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이탈리아 형제’FdI가 떨어져 나와 파시스트 정당을 재건하려는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와 비슷한 일이 1990년대 이탈리아의 옛 ‘이탈리아 사회 운동’MSI에서 벌어진 듯하다. 이탈리아사회운동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무솔리니 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정당으로서 남부 이탈리아에서 작지만 나름의 세력권을 형성했다. 총선에서 이탈리아사회운동은 정기적으로 5~8퍼센트를 득표했지만 기민당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정부 구성에서 계속 배제됐다. 1990년대 초 이탈리아사회운동은 약 50년간 이어졌던 정부 배제에서 벗어나 정부에 참여하고 주류의 일부가 될 기회를 잡았는데 이전까지 주름잡던 기성 정당들이 모두 삽시간에 몰락한 덕분이었다. 이탈리아사회운동은 이름을 ‘민족동맹’AN으로 바꾼 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전진 이탈리아’ 그리고 ‘북부동맹’과 함께 연정을 구성했는데, 그 대가로 민주주의에 대한 충성을 약속했다. 민족동맹은 자신이 “포스트파시스트” 보수 정당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런 전환을 둘러싼 모호함은 계속 남았고, 그 당원 다수는 옛 대의를 여전히 신봉한다는 증거도 있다. 오스트리아의 자유당 역시 그 지도자 회르크 하이더 아래에서 2000년대 전반기에 정부에 들어갔지만, 그 결과로 지지율이 추락하고 당이 쪼개졌다. 이후 자유당은 더 강경한 기조 아래 재건됐고, 자유당의 파시스트 간부들은 자유당이 보수 세력들과 꾸린 연정에서 중심적 구실을 맡고 있다.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 다비트 알브리히가 설명하듯 자유당은 오스트리아 국가를 더 권위주의적이고 공공연하게 인종차별적인 방향으로 재구성하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면 향후 거리 투쟁 조직 건설이 더 수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보수 세력과 파시스트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쌍방향적 관계다. 이탈리아에서 선거 파시스트 세력이 다시금 부상한 것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자유당이 연정의 일부로 전보다 더 성과를 거둔 것은 그 관계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보여 준다. 주류 정치권의 급진화로 더 큰 공간이 열리면서 파시스트들은 자신의 목표를 유지한 채 전진하고 있다.
파시스트 조직들의 약점들
파시스트 정당들은 그들이 뿌리를 내리려 할 때 문제가 되는 취약점을 갖고 있다. 심지어 전간기의 파시즘도 용인될 만한 세력으로 인정받으려 애쓰는 것(지배계급에게 자신들과 손잡아도 된다고 안심시키는 활동을 포함해)과, 독자적 조직을 건설하고 지지자들을 고무하는 것 사이의 긴장을 겪었다. 주류의 일부가 돼 활동하는 것과 파시스트 간부층 양성을 위해 아웃사이더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모두 이루는 것은 그들이 전진하고 있을 때 훨씬 수월하다. 정치적 동맹을 맺기 위한 희생이나 지지를 늘리고 주류의 일부가 되기 위한 타협이 비교적 쉽게 당내에서 받아들여지려면 분명한 이득이 손에 잡혀야 한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의 전진이 가로막히고 지지를 잃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서로 긴장 관계에 있는 당내 세력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질 수 있다.
히틀러와 나치도 1933년 집권 전에 몇 차례의 내부 반란에 휩싸였다. 이를 요약적으로 보여 주는 두 사례가 있다. 하나는 슈테네스의 반란이다. 돌격대 내 거리 깡패들은, 당 지도부가 의회 진입을 위해 전통적 보수 세력들과 기꺼이 타협하고 또 (적어도 입으로는) 합법적 테두리 내의 활동을 고수하는 것이 참기 어려웠다. 이런 긴장은 1930년 국회의원 선거 운동 기간에 공공연한 쟁투로 번졌다. 발터 슈테네스가 이끄는 베를린 돌격대는 자금과 자율성 부족, 선거 공천 순번에 대한 불만이 쌓여 있었고 당 지도부를 향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나치의 베를린 지역 사무실들을 공격해 엉망으로 만들고 이를 지키던 친위대를 제압했다. 이언 커쇼는 이렇게 지적한다.
그 갈등은 나치의 당 조직과 돌격대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적 갈등을 수면 위로 드러냈을 뿐이고 그것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 이 “당의 병사들”이 “민간인”들에게 갖는 경멸은 … 늘 존재했다. 돌격대원들은 그들이 당 조직에 종속된다고 주기적으로 교육을 받았지만 그것이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험난한 곳에 투입되고, 공산당·사회당과의 거리 전투에서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히틀러는 돌격대 지휘권을 직접 가져올 수밖에 없었고 그 자신의 개인적 권위에 기대어 그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나치에 대한 지지가 커지는 국면에서는 이런 긴장이 일정 수준 이하로 억제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당을 뒤흔든 최대 위기는 나치의 권력 장악 직전에 벌어졌다. 1932년 7월 선거에서 나치는 득표가 갑절로 늘며 1위를 했지만 당시의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히틀러의 총리 임명을 거부하면서 권좌로 향하는 길이 막힌 상황이었다. 11월에 치러진 두 번째 선거에서 나치당은 엄청난 자원을 쏟아부었지만 1928년 이후 처음으로 득표가 줄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치 지도부 2인자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이제 프란츠 폰 파페(보수 권위주의 총리)와 독자적으로 협상을 벌이려 했다. 파펜은 나치를 하위 파트너로서 연정에 참여시키려 했다. 슈트라서는 1924~1925년, 뮌헨 [맥주홀] 쿠데타 실패 이후 시기에 나치당을 밑바닥에서부터 재건한 인물이었다. 그는 나치가 갖은 노력을 쏟았는데도 원하는 결실을 맺지 못하면 해체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히틀러가 독일 지배계급에게 총리직을 승인받는 것에 ‘올인’ 도박을 벌인 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봤다. 슈트라서는 틀렸고 히틀러는 그를 쫓아냈다.
만약 독일공산당이 효과적인 전략으로 사회민주당의 일부를 나치에 맞선 공동전선으로 끌어들였더라면 나치 내부의 긴장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그 대신 공산당은 사민당을 “사회 파시스트”라며 배척하는 한편 또 나치를 여느 보수 권위주의 정당과 다를 바 없다고 봤다). 이를 통해 나치의 전진에 제약을 가하고 그들을 공공연한 위기에 빠뜨리고 그들이 권좌로 가지 못하도록 차단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의 종파주의, 그리고 독일 국가와 그것의 민주주의라는 함정에 대한 사민당 지도부의 환상이 결합되면서 나치는 위기 때마다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고전적 파시즘”이 위와 같다면 오늘날의 선거 파시즘은 더 취약하다. 그들의 능동적 활동가층은 그 주변부를 이루는 선거 지지자들에 비해 훨씬 작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선거 파시즘 조직들은 용인될 만한 세력으로 인정받아 득표를 늘릴 필요와, 더 급진적이고 도발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자신들의 진짜 강령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자는 (또는 그것을 당이 막지는 말아야 한다는) 핵심 파시스트 간부층의 요구 사이에 끼어 있다.
핵심부의 파시스트들은 공개적 활동에 제약이 걸리는 것을 한동안은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좌절감이 커질 수 있다. 특히, 효과적인 반파시스트 운동이 존재해 그들이 용인될 만한 세력이라는 주장을 반박하고, 주변부를 이루는 더 온건한 선거 지지자들과 강경한 파시스트 핵심부 사이의 갈등을 키운다면 그 좌절감이 폭발할 수 있다. 그러면 선거 전략에 가장 일체감을 느끼는 세력과 파시스트 프로젝트 유지를 가장 중시하는 세력 사이의 긴장이 내부에서 폭발해 조직이 쪼개질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어떤 종류의 반反파시즘인가?
자유주의 중도와 동맹해서는 안 된다 극우와 파시스트들의 부상을 보며 일각에서는, 더 끔찍한 위험에 맞서 불가피하게 “차악”과 손을 잡아야 한다며 좌파가 신자유주의 중도와 시급하게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좌익 저술가이자 제러미 코빈 지지자인 폴 메이슨은 사회주의자들이 “중도와 전술적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메이슨이 보기에 사회 정의를 위협하는 세력이 더는 신자유주의 엘리트가 아니라 “난민을 기꺼이 익사시킬 자들, 무슬림들을 소아성애자라고 비방하고 … 임신중지를 범죄화할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이 지중해에서 난민들을 익사시키고 이슬람 혐오 운동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면서 극우가 성장할 토양을 만들어 왔다. 동시에 그들이 사회를 신자유주의에 따라 구조조정한 탓에 인구의 상당수가 불확실성에 시달리고 가슴에 응어리를 갖게 됐다. 자유주의 중도와 동맹을 맺는 것은 파시스트와 극우 세력이 ‘좌파는 권력자들의 편이고 우리만이 진정한 대안’이라고 거짓말하는 것을 돕는 셈이다.
둘째, 신자유주의 중도와 화해한다는 것은 대중 동원의 중요성을 작게 보고, 국가 같은 기성 기구나 제도들에 기대어 파시스트들을 억제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뼛속까지 인종차별로 구조화돼 있고 거의 모든 경우에 좌파를 파시스트보다 더 큰 위협으로 여긴다. 이런 국가활용론의 더 최근 버전은 유럽연합이 악독한 인종차별과 파시즘을 막을 방벽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봤듯 유럽연합 자신이 신자유주의·긴축·인종차별의 결합이라는 독극물을 살포해 인종차별과 파시즘을 대거 배양해 온 장본인이다. 그렇다고 유럽연합에 일부 환상을 가진 사람들(많은 경우, 극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다)이 효과적인 반파시즘 운동에서 주요 세력이 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효과적인 반파시즘 운동이 그런 환상에 기초할 수는 없다. 예컨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놓고 노동계급과 좌파가 분열한 트라우마가 있는 영국에서는 인종차별과 파시즘에 반대하는 운동이 “브렉시트를 막자”는 주장에 기초해서는 안된다고 논쟁하는 것이 필요했다(‘또 다른 유럽은 가능하다’에 속한 친유럽연합 좌파 등이 그 논쟁 대상이었다). 그런 주장에 기초했다가는 반파시즘 운동이 분열할 뿐 아니라 토미 로빈슨과 영국독립당이 브렉시트에 투표한 1700만 명을 대변한다고 자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셋째, 자유주의 중도는 극우에 맞서 “단결해야 한다”며 좌파가 신자유주의와 긴축에 맞서 투쟁하기를 중단하라고 틀림없이 요구할 것이다. 자유주의 중도는 이런 식으로 왼쪽에서 제기되는 도전을 억누르는 것이 오른쪽에서 제기되는 극우의 도전을 막기 위한 방안이라 믿으며 인종차별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파시즘에 효과적으로 반대하기 위한 결정적인 전제 조건은 신자유주의 중도로부터 정치적 독립성을 갖는 것이다.
인종차별에 타협하지 않기
66 바겐크네히트는 디링케의 원내공동대표이고, 라퐁텐은 사민당에서 분열해 나와 디링케의 창당을 도운 노련한 사회주의 정치인이다. 바겐크네히트는 디링케가 국경 개방 주장에 매달린 탓에 표를 잃었고 AfD에게 추월을 허용했다고 주장한다. 바겐크네히트는 “많은 이들이 저임금 일자리에서 경쟁이 격화된 핵심 원인이 자유로운 이동과 이주라고 본다”며 “난민 위기로 불확실성이 더 커졌다”고 주장한다. 67
일부 좌파는 인종차별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의 주장에 타협함으로써 그들의 호소력을 줄일 수 있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특히 선거 활동을 중시하는 정당들이 그런 유혹에 많이 빠진다. 오늘날 여기에 해당하는 눈에 띄는 사례는 독일의 좌파 정당 디링케Die Linke의 저명한 두 지도자 자라 바겐크네히트와 오스카 라퐁텐이 출범시킨 운동 ‘일어서라’Aufstehen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2015년에 많은 난민이 독일로 유입된 것이 AfD가 돌파구를 열도록 해 줬다는 주장이 제시된다. 그러나 또 다른 디링케 의원이자 마르크스21 회원인 크리스티네 부흐홀츠는 그런 주장의 전제, 즉 이주민의 인구 비율과 인종차별이 자동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헝가리에서는 인종차별과 이슬람 혐오가 한껏 기승을 부리지만 2015년에 난민이 사실상 전무했고 무슬림 인구도 아주 작다. 반면 그리스에서는 2015년에 많은 난민이 도착했지만 황금새벽당은 거기서 별다른 이익을 얻지 못했다. 이런 차이점은 효과적인 인종차별과 파시즘 반대 운동이 그리스에 존재했지만 헝가리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재했던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인종차별에 타협하는 것은 극우를 정당화해 줄 뿐이고, 이주민·무슬림 또는 소수인종이 문제라는 거짓말에 힘을 실어 주고, 극우들이 자신들의 적들도 동의하는 내용이라고 주장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또한 극우의 지지층을 빼앗기는커녕 그 지지층이 공고해지도록 만들고, 극우의 생각이 조직 노동계급 운동에 더 광범하게 침투하도록 해 준다.
경제적 투쟁을 인종차별 반대 투쟁과 대립시키지 않기
앞서 주장했듯, 극우 부상의 원인을 전적으로 경제 문제에서 찾고 좌파는 인종차별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쟁점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류다. 신자유주의적 사회 구조조정이 극우 성장의 뿌리 중 하나라는 점과 높은 수준의 집단적 저항으로 인종차별에 맞설 기초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적 투쟁을 더 많이 벌인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극우가 몰락하는 것은 아니다. 인종차별의 뿌리는 매우 깊고 지배계급은 아래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하면 인종차별을 더욱 부추기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끈질긴 운동으로 인종차별적 주장에 도전하고 파시스트 단체들을 겨냥하는 것도 필요하다. 계급 투쟁 수준이 높은 호조건에서도 그 필요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프랑스는 이런 필요성을 나쁜 방식으로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1990년대 초 이래로 프랑스에서는 몇 차례 전투적인 사회운동의 물결이 일었지만, 그 기간 동안 국민전선의 지지는 늘었다. 프랑스 좌파는 영국과 달리 단결된 운동을 만드는 데에 실패했다. 영국의 경우, 1970년대 후반 반나치동맹ANL이 결성돼 영국 국민전선을 박살 냈고 다시 1990년대 전반기에 영국국민당BNP을 무너뜨렸다. ANL의 후신으로 2000년대와 2010년대 전반기에 활동한 ‘파시즘에 맞서 단결하자UAF’는 선거에서 영국국민당을 패퇴시켰고 거리에서 영국수호동맹을 무찔렀다.
프랑스에서도 비슷하게 대응했던 시기가 한 번 있었다. 1990년대 후반 국민전선은 심각한 위기로 빠져들었고, 국민전선의 2인자였던 브뤼노 메그레가 국민전선을 떠나 경쟁 조직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은 1990년대 후반기에 벌어진 두 가지 사건 때문이었다. 첫째, 1995년 11~12월 거대한 공공부문 파업이 정치적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국민전선은 대중 담론에서 주변화됐고, 노동계급 연대의 정서가 광범하게 자리잡으며 이전 10년 동안의 사기 저하 국면이 끝났다. 둘째, 이런 변화 속에 이주민 희생양 삼기에 맞서려는 의지가 더 강해졌고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다시금 부활했다. 특히 ‘국민전선에 맞선 시위Le Manifeste contre le Front National’와 ‘지긋지긋한 국민전선’Ras l’Front 두 단체는 국민전선에 맞서 특히나 더 전투적인 활동을 벌였다. 1997년에는 국민전선 당대회장을 향해 5만 명이 행진했는데 이는 국민전선을 직접 겨냥한 첫 전국 행진이었다. 또한 그 운동은 국민전선이 파시스트임을 명시적으로 문제 삼았는데, 수많은 참가자들이 [국민전선의 알파벳 약어 FN에서 ― 역자] “N은 나치, F는 파시즘이다, 국민전선을 박살 내라” 하고 외쳤다.
이런 식으로 국민전선이 공격받은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 마크 토마스] 국민전선을 구성하던 모순적인 경향들이 압력을 받아 서로 충돌하게 됐다. … 르펜은 국민전선이 권력층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남아야 한다고 강조한 반면, 메그레는 전통적 우파와 동맹을 맺어 국민전선 내 가장 취약한 성원들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분적으로 이런 갈등은 국민전선이 자유민주주의 내 용인될 만한 세력처럼 보이려 하는 동시에 그 민주주의를 분쇄하길 꿈꾼다는 이중의 과제에서 비롯했다. … 국민전선은 1990년대 중엽 약 1500명의 선출직을 갖고 있었다. … 선거적 성공으로 상당한 조직 간부층이 관료화할 가능성이 생겼고 관리주의 문화가 자라나 당원 다수의 반체제적인 태도와 충돌했다. … 메그레는 르펜과 다르지 않은 전망을 갖고 있었지만 당 간부층이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주류와의 동맹을 통해 단기적 선거 성과를 가장 확실하게 가져다줄 인물로 메그레를 바라본다. … 르펜은 르펜대로, 당 활동가들 중 ‘드골주의자 출신인 메그레가 “의회주의화” 위험을 대표한다’고 의심하는 이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국민전선이 잘나갈 때에는 이런 긴장이 한도 내에서 관리됐지만 인종차별 반대 운동의 반격에 부딪히자 더는 함께하지 못할 정도로까지 악화됐다.
1998년 말에 메그레는 제명됐고 이후 국민전선은 쪼개져 상당한 간부가 떠났다. 이 시기는 국민전선의 위기를 더 심각하게 만들 전환점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인종차별 반대 운동은 사그라들고 말았는데, 집권 사회당과 연계가 있는 ‘국민전선에 맞선 시위’가 국민전선은 이제 끝장났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르펜은 다시 세력을 모으고 당을 재건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나치를 멈추기 위한 공동전선 건설하기
파시스트를 무찌르려면 다른 폭넓은 쟁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대중적 공동전선을 건설해야 한다. 혁명가들만 모으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더 광범한 사람들, 특히 개혁주의 단체들(예컨대,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여기에는 개혁주의 단체들의 지도자들과 가능한 한 함께하는 것, 즉 그 지도자들에게 공동 활동을 제안하고 그들을 운동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래야 하는 객관적이고 근본적인 이유는 파시즘의 본성에서 찾을 수 있다. 파시즘은 혁명적이든 개혁주의적이든 가리지 않고 노동계급의 모든 조직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핵심 과제 중 하나는 파시스트들이 여느 공당처럼 행세할 때 그 핵심부에 파시스트가 있다는 것을 들춰내고 그 가면을 벗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적 인물과 그 단체의 과거사를 들춰내고, 그들의 대중적 발언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들의 세계관을 폭로해야 한다. 그런 가면 벗기기는 단지 선전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고 파시스트 정당들이 “정상적 세력”처럼 행동하려는 것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것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 즉 그들에게 공적인 공간을 내주지 않고, 그들의 공개 집회·대회·행진 개최를 막고, SNS를 포함한 언론에서 모습을 보이려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시스트의 관점이 얼마나 문제적이든지 간에 그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다”는 주장에 도전해야 한다. 파시스트들이 공적 영역에 더 많이 진출할수록 그 지지자들은 더 자신감 있게 인종차별을 표현할 것이고, 파시스트들이 주류 세력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능력도 커질 것이다.
파시스트들이 성공을 거둘수록 그들은 (집회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의 분쇄라는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한참 전부터도) 정적들의 표현의 자유를 더욱 자신감 있게 해치려 들 것이다(즉 좌파와 노동조합의 모임 공격, 파업 노동자들의 [대체인력 투입 저지하기 위한] 피켓라인 공격, 인종차별적 거리 소요 등을 벌일 것이다). 때로는 파시스트들에게 공적인 공간을 용납하지 않기 위해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대결을 벌여야 한다. 1977년 영국 사우스런던 루이셤에서 사회주의노동자당SWP과 현지 흑인 청년들의 동맹이 [영국] 국민전선의 행진을 무산시켰을 때가 그랬다. 또, 그들의 행진 경로를 가로막거나 결집 예정 장소를 미리 점거해서 거리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이 쓰이기도 한다. ‘파시즘에 맞서 단결하자’가 영국수호동맹에 맞서 2011년 타워햄리츠와 2012년 월섬스토에서 취한 행동이 그랬다.
그런 전술은 큰 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자율주의나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많은 경우에, 투철한 소수 활동가들로 파시스트들과 물리적 충돌을 벌이는 데에 골몰하고 대중 동원에는 소홀하다. 그런 접근법은 더 큰 세력을 끌어들일 전략 없이 반파시즘 활동을, 물리적 충돌 위험을 감수할 소수의 활동으로 축소시킨다. 더욱이 그런 방식은 비관주의와 결합돼 반파시즘 운동을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로 한정하고 다수 백인 노동자들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기각할 수 있다.
반파시즘 운동이 급진적 소수에서 시작할 때조차 인내심을 갖고 공동전선을 구축해 더 광범한 세력을 끌어들이려고 해야만 한다. 그래야 파시스트들에게 거리를 내주지 않고 그들을 공적 영역에서 밀어낼 만큼의 대규모 동원과 대규모 대결의 기초를 놓을 수 있다. 이는 또한 파시스트들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과 인종차별과 파시즘 반대 세력이 고립돼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고, 반파시즘 운동이 지역과 작업장에 뿌리내리도록 자신감을 고무할 것이다.
운동의 반격으로 파시스트 조직이 고립되고 기피 대상으로 전락하면, 파시스트들의 이중의 과제에 내재한 긴장이 공공연한 갈등으로 터져 나오고 조직이 쪼개질 수 있다.
이런 전략은 그저 주창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실천으로 검증돼야 한다. 비교적 최근의 역사와 현대적 사례들을 보면 공동전선으로 파시스트들을 폭로하고, 그들이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것을 문제삼고, 더 광범한 인종차별적 생각들에 함께 도전하는 것이 효과를 발휘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독일
AfD의 부상에 아무런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봄 독일에서는 난민에 연대하고 인종차별적 우파에 반대하는 거대한 인종차별 반대 운동의 물결이 있었고, 이는 가을~겨울 AfD 반대 운동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올해 5월 베를린에서 AfD가 소집한 시위에 5000명이 참가했지만, 그에 반대하는 시위에 7만 명이 넘게 참가해 이를 압도했다. 켐니츠에서 나치가 [8월 5000명 이상] 동원한 것은 충격파를 일으켰고 사태의 시급함을 다시금 일깨웠다. 일주일 후 켐니츠에서 회케 일당이 행진하려 할 때 맞불 집회가 그들을 저지했다. 이틀 후, 켐니츠에서 열린 반파시즘 음악 공연에 6만 5000명이 참가했다. 이후 10월 13일 500개 단체들이 “우리는 불가분”Unteilbar이라는 이름으로 호소한 반우파 시위에 25만 명이 모여 베를린에서 행진했다.
이런 상황은 AfD 정치인들의 대중 집회나 공개 연설에 전보다 더 많이 항의하도록 고무했다. ‘인종차별에 맞서자’Aufstehen Gegen Rassismus 같은 단체들이 그런 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주도력을 발휘하거나 다른 이들과 함께 움직였다. 예를 들어, [2018년] 늦은 9월 로스톡에서 반파시스트 대오 6000명이 회케를 가로막아섰고, 켐니츠의 나치 난동 일주일 후 함부르크에서는 1만 명이 넘는 반파시즘 시위대가 178명이 모인 파시스트 시위대를 압도했다. 가을에 독일 주 선거를 치르는 두 곳(헤세주州와 바이에른주)에서 AfD는 지속적으로 맞불 시위에 직면했다.
바이에른에서 … 선거 운동 기간인 8~10월에 AfD에 맞서 수만 명이 결집한 집회가 적어도 네 차례 있었다. … 바이에른에서 벌어진 인종차별 반대 시위로는 아주, 아주 긴 기간을 통틀어 최대 규모였다. AfD가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에서 행진을 소집했을 때 AfD 지지자 수십 명은 수천 명의 맞불 시위대를 맞닥뜨렸다. 헤세에서도 상황은 같았다. 맞불 시위 때문에 AfD는 선거 기간 내내 대중 행진을 성사시킬 수 없었다.AfD의 “정상화” 시도는 이처럼 전투적인 반파시즘 운동의 물결로 제약을 받았고, 수세에 몰린 AfD 안에서는 긴장이 커졌다. 그 효과 하나는 독일 국가 기구의 위기로 나타났는데, 국내 담당 첩보기관의 수장 한스-게오르크 마센이 AfD를 만나 정보를 공유한 사실이 폭로돼 쫓겨난 것이다.
이제 AfD는 용인될 만한 단체라는 이미지를 복원하려고 애써야 하고, 파시즘과의 연계를 공공연하게 밝히는 것을 삼가려 하고, 당원들이 바깥을 향해 사용하는 언사를 규율하려 한다. 또한 “AfD의 유대인 당원들”이라는 단체를 꾸리고, 이어서 그런 움직임을 비판하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볼프강 게데온을 제명했다. 이에 회케와 가울란트 둘 다 “AfD 안에 나치가 설 곳은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2015년만 해도 회케는 게데온이 쓴 유대인 혐오 저서들을 AfD 당원들에게 읽으라고 추천했다. AfD의 파시스트 계파는 자신들의 대외적 활동이 제약당하자 반발하고 나섰다. AfD 당원 1200명이 서명한 “슈투트가르트 선언”은 자신들의 “사상과 표현”이 제약당한다며 비난했다.
그렇다고 해서 AfD가 곧 와해될 것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한 가지 입증된 것은 있다. 광범한 인종차별 반대 운동과 파시스트들을 구체적으로 겨냥하는 대중 운동을 결합하면 그들의 조직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
영국에서는 극우 거리 운동이 다시금 만만찮은 위협이 되고 있다. 그러나 2000년 이래로 반파시즘 운동은 유의미한 선거 파시즘 프로젝트와 거리 파시즘 운동을 모두 무찔러 왔다. 영국국민당은 유럽의 다른 파시즘 단체들처럼 2000년대에 거리 운동에서 힘을 빼고 선거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프랑스 국민전선을 모방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상당한 성공을 거둬, 1930년대 오스왈드 모슬리가 이끌던 영국파시스트연합BUF이나 1970년대 영국 국민전선보다 훨씬 더 커질 수 있었다. 영국국민당은 전성기인 2008~2010년에 시의원 5명, 유럽의회 의원 2명, 런던광역 지역의원 1명을 거느렸다. 2010년 총선에서는 약 50만 표를 얻었고, 그 전년도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95만 표 가까이 얻었다.
이 모든 성과가 무너진 것은 ‘파시즘에 맞서 단결하자’ 같은 단체들이 가차없이, 또 체계적으로 활동한 덕분이었다. ‘파시즘에 맞서 단결하자’에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 노동당 좌파, 영국국민당이 선전하고 있던 지역들의 일부 노동당 지구당(좌파가 아닌 곳도 있었다), 노동조합 활동가들과 모스크·교회 등의 지역사회 조직들이 참여했다. ‘파시즘에 맞서 단결하자’는 영국국민당이 용인될 만한 세력인양 내세우는 가면을 찢어 파시스트 본색을 들춰내고자 했다. 이런 ‘파시즘에 맞서 단결하자’ 안에서도 단결과 헤게모니를 둘러싼 논쟁과 토론이 불가피했다. 어떤 사람들은 빠르게 부상하는 영국국민당을 저지하기 어렵고 그들이 버림받은 “백인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는다며, ‘파시즘에 맞서 단결하자’도 “진보적인” 영국 또는 잉글랜드 국민성을 내세워 “백인 노동계급”을 설득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처럼 민족주의에 타협하려는 주장을 거부하고, 인종차별·파시즘 반대로 다수를 설득할 수 있다고 확고하게 주장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또한 이주 문제와 이슬람 혐오 문제에서 타협하자는 압력도 있었다.
그런 타협으로는 반파시즘 운동을 효과적으로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런 생각에 영향받는 사람들을 공동전선에서 배제해서도 안 된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파시즘에 맞서 단결하자’가 실천에서 단결해야 할 필요를 확고하게 주장하면서도, 시간을 들여 우리의 방법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실천에서 입증함으로써 더 광범한 활동가들을 혁명가들의 전략에 동참시켜야만 했다.
지속적인 압력 탓에 영국국민당은 선거 지지 기반을 잃었다. 영국국민당은 내부 긴장으로 찢기고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파시즘의 위협이 사라지지는 않았는데, 이전까지는 용인될 만한 세력으로 보이려고 거리 동원을 자제했던 영국국민당의 일부 간부층과 지지자들이 이제 다시 거리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국의 반파시스트 활동가들은 2009년 이후 영국수호동맹의 부상에 대응해야 했다. 영국수호동맹은 비非파시스트, 심지어 반파시스트 단체를 표방했고, 생물학적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언사를 일절 삼갔고 그 대신 이슬람 혐오를 중심으로 지지자들을 모았다. 영국수호동맹은 영국국민당보다 훨씬 느슨하게 조직됐고 축구 훌리건들, 조직적 인종차별주의자들, 일부 나치들을 하나로 묶었다. 영국수호동맹은 (적어도 초기에는) 지도부가 훨씬 흐릿한 조직이었다.
영국수호동맹은 행진을 통해 2000~5000명을 동원할 수 있었고 초기에는 ‘파시즘에 맞서 단결하자’의 맞불 시위가 더 작은 경우도 많았다. 파시스트들이 거리 운동으로 전환하면서 광범한 반파시즘 운동도 방향을 재조정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참을성 있게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이 필요했다.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2011년 타워햄리츠였는데 당시 영국수호동맹은 이스트런던 모스크를 향해 행진하려고 했다. 현지 무슬림과 좌파, 노동조합원들의 연대체가 수천 명을 거리로 동원했고 노동당이 이끌던 현지 시의회의 지지도 이끌어냈다. 결국 영국수호동맹은 타워햄리츠에 발을 내딛지 못했는데, 무슬림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는 조직으로서 사기가 크게 떨어지는 경험이었다. 영국수호동맹의 각종 행진에 참여하고 토미 로빈슨 등 영국수호동맹 지지자들을 인터뷰한 두 학자들이 발표한 연구를 보면 타워햄리츠에서의 경험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줬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 학자들은 “영국수호동맹이 조직한 시위는 초기에 호응이 있었고 매번 2000명 이상이 참가했다.” 그러나 “2011년 하반기부터 그 수가 뚜렷하게 줄기 시작해서 18개월 동안 하락세가 이어졌다. 일부 시위는 적은 참가자만 끌어모을 수 있었다.(2012년 8월 키슬리 150명, 2013년 2월 캠브리지 50명)” 로빈슨은 짓씹으며 이렇게 불평했다. “경찰은 업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고, 참기 힘들 만큼 따분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 타워햄리츠에서 저들은 모두를 여섯 시간 동안 거리에 붙잡아 뒀다. 지랄 맞을 만큼 따분한 일이었다. 내가 맥주도 한 잔 마시지 못한 채 도로에서 여섯 시간이나 버리려고 뉴캐슬에서 거기까지 갔다고 생각하는가?”
76 그래서 핵심부의 파시스트들은 더욱 단련됐다. 2012년 월섬스토, 그리고 2013년 다시 한 번 타워햄리츠에서 영국수호동맹에 맞선 대규모 동원이 성공하면서 영국수호동맹은 완전히 끝장났다.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은 경찰이 아니라 ‘파시즘에 맞서 단결하자’가 이끈 거대한 맞불 집회였다. 그 학자들이 “주변적인”(덜 투철한) 영국수호동맹 지지자라고 부른 이들은 꽁무니를 뺐고 더 이상 영국수호동맹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것은 내부에서 서로 비난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자존감과 연대의 공급원이 더한층 무너졌다.” “주변부적인 인자들이 탈퇴하면서 영국수호동맹 안에서 백인 우월주의를 따르는 생물학적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상대적으로 더 두드러졌다.”그리스
그리스 황금새벽당은 2009년 총선에서 2만 표도 받지 못했지만 2012년에는 44만 표(7퍼센트)를 얻었다. 잔혹한 긴축 정책을 집행하면서 정당성을 심각하게 잃은 그리스 정치권이 반이민 인종차별을 부추긴 것에서 자양분을 얻은 덕분이었다. ‘인종차별과 파시즘 반대 운동’KEERFA이 2009년에 출범했다. KEERFA에서 핵심적 구실을 한 것은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SEK였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목표는 기층 노조와 지역 단체들(파키스탄인 등 그리스에 새로 생긴 이주민 공동체도 포함됐다)을 끌어들이고 다른 좌파 단체들과 함께 황금새벽당에 도전할 수 있는 공동전선을 만드는 것이었다.
중요한 전환점은 반파시스트 래퍼 파블로스 파이사스가 2013년 9월 황금새벽당 준군사 조직에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이제 KEERFA는 이전까지의 노력을 거대한 반파시즘 운동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고 거대한 시위들을 조직했다. 이는 그리스 노동조합들이 나치 위협에 맞선 총파업을 선언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6만 명이 황금새벽당 본부를 향해 행진했다. 그리스 국가는 뭔가 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고, 실제로 일주일 안에 황금새벽당 중앙 지도부를 전원 구속해 그들을 법정에 세웠다. 이런 상황 덕분에 국영 방송에서 일하는 언론 노동자들도 황금새벽당의 방송 출연을 막기 위한 파업에 나설 만큼 자신감이 높아졌다. 파시스트들이 2015년에 난민 어린이들의 학교 입학에 반대함으로써 난민 연대 운동을 파괴하려 했을 때 이에 맞서 KEERFA는 교사, 학부모 등을 성공적으로 동원했다.
그리스의 경우에도 황금새벽당을 효과적으로 몰아붙인 것은, 황금새벽당 반대와 나치들의 공적 영역 진출을 막는다는 구체적인 목적을 위한 단결된 행동이었다. 거기에 황금새벽당에게 자양분이 되는 인종차별에 맞서는 활동도 함께했다. 그 결과로, 황금새벽당은 시리자가 2015년 1월 집권하며 내세운 긴축 반대 정책을 배신한 상황을 이용할 수 없었다. 황금새벽당의 득표와 당원 규모는 늘지 못했고, 2015년 그리스 해안에 많은 수의 난민들이 도착했을 때에도 인종차별적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반파시즘, 사회주의 그리고 혁명 정당
과거의 망령들이 재부상하고 있다. 나치들이 다시 성장하고, 의회에 진입하고, 수백만 표를 얻고, 인종차별주의 독소를 정치에 퍼뜨리고 있다. 아우슈비츠 해방과 무솔리니·히틀러 정권의 몰락 이후 처음으로 그런 세력의 승리가 상상 가능한 것이 됐다. 여전히 전간기와 비교하면 오늘날 파시스트들은 훨씬 약하고 무엇보다 거리에서 약하지만, 새로운 경제 위기와 그것이 일으킬 정치적 격변 속에서 그들의 성장이 가속화되고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지만, 그 전제 조건은 우리가 행동에 나선다는 것, 그것도 효과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 단체들에게는 파시즘에 맞설 공동전선이라는 과제가 있다. 그런 공동전선은 일반적인 정치 강령을 기초로 하거나 참여 대상을 반자본주의자들로 제한하지 않고, 인종차별주의자와 파시스트들의 부상에 몸서리치는 모든 이들을 동원해야 한다. 혁명적 좌파들은 의회 바깥 활동에서 대중을 동원하는 것에 무게중심을 두고 인종차별에 비타협적으로 반대하는 점 때문에 종종 그런 공동전선의 초기 제안자 구실을 맡는다. 국제사회주의경향IST는 유럽 전역에서 이 과제에 헌신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인종차별에 맞서자’Stand Up to Racism를 통해 두 가지 과제, 즉 사회 내의 광범한 인종차별에 도전하는 것과 토미 로빈슨을 중심으로 한 파시스트 거리 운동에 강력하게 맞설 운동을 건설해내야 한다.
한편 혁명가들은 파시스트에 맞선 공동 행동에 참여하면서도 파시즘이라는 야만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라는 주장, 또한 파시즘에 맞선 투쟁은 그런 끔찍한 변종을 양성하는 사회 자체를 타도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는 주장으로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 지배계급은 자신의 지배력이 극단적으로 위협받게 되면 파시스트들을 권좌에 앉히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지배계급은 결코 의회 투표로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오로지 대중이 참여하는 혁명적 격변으로 타도돼야만 한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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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ark L Thomas, ‘Fascism in Europe Today’, International Socialism 162(Spring 2019).
↩
- 2018년 6월 국민전선은 국민연합으로 당명을 바꿨다. ↩
- 다음을 보시오. Sereghy, 2018, pp305-323. ↩
- Traverso, 2019, pp7-8. ↩
- 이런 스탈린주의적 관점은 오늘날 학계 대부분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분석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다른 면에서는 탁월한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 해부》[국역: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교양인, 2024]도 스탈린주의 관점을 정통 마르크스주의 해석으로 받아들인다. ↩
- Trotsky, 1932. ↩
- Evans, 2004, p347, p358. ↩
- Trotsky, 1932. ↩
- Evans, 2004, pp208-211; Wilde, 2013. ↩
- Palheta, 2017. ↩
- 다음에서 인용. Gluckstein, 1999, p38. ↩
- Noakes, 1971, p66. ↩
- 다음에서 인용. Gluckstein, 1999, p50. ↩
- 다음에서 인용. Gluckstein, 1999, p50. ↩
- Fest, 1977, p333. ↩
- Fest, 1977. ↩
- Fest, 1977, pp452-453. ↩
- Wilde, 2013. ↩
- Mann, 2004, p370. ↩
- Harman, 1994. ↩
- Wolfreys, 2002. ↩
- 다음을 보시오. Wolfreys, 2013, p23. ↩
- Palheta, 2017. ↩
- Fysh and Wolfreys, 1998, pp96-97. ↩
- 다음에서 인용. Palheta, 2017. ↩
- Fysh and Wolfreys, 1998. ↩
- Paxton, 2005, pp18-19. ↩
- Paxton, 2005, p23. ↩
- ‘플람스의 이익’이 벨기에 전국 선거에서 거둔 최고 성적은 2007년 12퍼센트였다. 플란데런 의회 선거의 경우 2004년 지지율 1등을 하며 24.2퍼센트를 득표했다. ↩
- Open Society Justice Initiative, 2018. ↩
- BBC, 2017; Davison, 2016. ↩
- Independent, 2018. ↩
- Wolfreys, 2018, p34. ↩
- BBC, 2011. ↩
- Kouvelakis, 2018. ↩
- Nachtwey, 2018, p133. ↩
- Nachtwey, 2018, p150. ↩
- Nachtwey, 2018, p198. ↩
- Davidson and Saull, 2017, p715. ↩
- Rosenberg, 1988. ↩
- Palheta, 2017. ↩
- Eltchaninoff, 2018, p66. ↩
- 마린 르펜은 다음에서 인용. Eltchaninoff, 2018, p67. ↩
- Eltchaninoff, 2018, p69. ↩
- Eltchaninoff, 2018, p117. 에단 B 카츠는 2014년 설문 결과를 지적한다. 그 설문 결과를 보면 2012년에 마린 르펜에 투표한 이들은 유대인들이 경제·언론·정치에서 지나친 권력을 행사하고 시온주의자들이 세계적 규모에서 음모를 꾸민다고 믿을 확률이 다른 프랑스인들보다 곱절로 높다. — Katz, 2017. ↩
- Katz, 2017. ↩
- Eltchaninoff, 2018, p81. ↩
- Wolfreys, 2017. ↩
- Daily Telegraph, 2010. ↩
- Mosler, 2013. ↩
- Deutsche Welle, 2015. ↩
- Henning, 2016. ↩
- AfD에 대한 통찰력 있는 논의를 보려면 폴카트 모슬러, 가비 엥겔하르트, 아인데 오캘러헌이 수지 바이스만과 한 인터뷰 ‘Beneath the Surface’를 보라. (2018년 9월 16일) ↩
- Dearden, 2017; Deutsche Welle, 2017. ↩
- Deutsche Welle, 2018. ↩
- Taube, 2017. ↩
- 다음을 보시오. Blauwhof, 2018. ↩
- Tschekow, 2018. ↩
- 다음을 보시오. Byrne, 2017; Bíro-Nagy and Boros, 2016 ↩
- Chase, 2018. ↩
- Walker and Halliday, 2019. ↩
- 다음을 보시오. Wolfreys, 2013. ↩
- 다음을 보시오. Albrich, 2019. ↩
- Kershaw, 1998, pp346-347. ↩
- Kershaw, 1998, pp395-403. ↩
- Mason, 2018. ↩
- 인종차별 반대 연대체 ‘인종차별에 맞서자’Aufstehen Gegen Rassismus와 혼동하지 말 것. ↩
- Kimber, 2018. ↩
- Buchholz, 2018. ↩
- Morgan and German, 1997. ↩
- Wolfreys, 2002. ↩
- Tengely-Evans, 2018 ↩
- Haller, 2018. ↩
- Knight, 2018. ↩
- Bennett, 2013. ↩
- Morrow and Meadowcroft, 2018. ↩
- Morrow and Meadowcroft, 2018. ↩
- 또한 카탈루냐에서 활동하는 ‘인종차별과 파시즘에 맞서 단결하자’UCFR에 대해서는 Karvala 2018을 보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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