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가능성에서 파시스트에 굴복하기까지:
프랑스 민중전선 1936~19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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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이론은 경험을 세계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이해와 풍부한 역사 지식에 비춰 요약한 것이다. — 레닌, 《국가와 혁명》
노동계급 투쟁의 경험이 두 세기 반 동안 누적되면서, 역사에는 새로 등장하는 투쟁적인 활동가 세대에게 도움이 될 교훈이 풍부하게 있다. 마르크스주의자, 개혁주의자, 학술적 역사학자, 부르주아 언론은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뒷받침하려 역사를 동원한다. 오늘날 영어권에서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이 새로 늘고 있는 것을 배경으로 불거지는 논쟁들, 즉 어떻게 급진적인 노동자 운동을 새로 건설하고, 어떻게 개혁을 성취하고, 나아가 자본주의에 도전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에서 불가피하게 과거 경험이 동원된다.
2 만약 당신의 목표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면 어떤 투쟁을 최종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살펴야 할 문제들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 투쟁이 노동계급의 단결, 자신감, 자신과 적들에 대한 계급의식적 시야를 키우는 데에 일조했는가?’ 예컨대,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제국의 1905년 혁명으로 벌어진 대중파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대중파업의] 파도는 빠르게 오르내리지만 그 가운데 가장 값지고 지속적인 것은 정신적 퇴적물이다. 즉 프롤레타리아가 지적·문화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 성장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진행되고,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추가적 전진이 억눌리지 않도록 절대적으로 보장한다.” 3 반면에 혁명과 국가 타도라는 목표를 거부하고 전략적으로 급진적 개혁을 선호하는 역사가들은 역사 속 투쟁을 사뭇 다르게 평가한다. 예컨대, 그 운동으로 좌파 정부가 집권했는지 여부를 계급의식의 성장보다 더 중시할 가능성이 크다.
에릭 홉스봄은 그의 책 《역사론》에서 역사가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알려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4 홉스봄 자신은 20세기의 경험을 그의 책 《극단의 시대》에서 어떻게 요약했는가? 러시아 혁명에 관한 그의 서술에서 공장 노동자들이나 소비에트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괴물 같던 차르 정권을 타도하고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국가를 수립한 핵심 주체에 속하는 데도 말이다. 이를 두고 크리스 하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 만큼 개혁주의적 좌파와 혁명적 좌파 간의 정치적 대결에서 역사 해석이 중요한 전장이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역사는 우리가 대비할 것들(가능성 높은 난관의 유형, 극복에 필요한 것)을 가늠할 수 있도록 해 주지만, 홉스봄이 덧붙였듯 장차 벌어질 투쟁의 세부사항까지 예측하도록 해 주지는 않는다. 역사란 과거나 현재, 미래의 문제에 정형화된 정답을 척척 제시해 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과거에 쓰인 공식을 오늘날에 적용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어떤 새로운 상황도 과거의 무언가를 고스란히 되풀이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비교나 역사 해석에 관한 이견이 쉽게 해소되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 연구로 기존 분석이 도전받고 새로운 질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는 빛을 내지 않는다. 역사의 여러 사실 중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예컨대, 홉스봄은 《역사론》에서 “역사가들은 경험의 기억 저장소”라고 선언하지만이 사례는 예외적 일탈이 아니다. 노동계급은 홉스봄의 책 전체에서 크게 빠져 있는 퍼즐 조각이다. 책 전반부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막판에 마침내 등장할 때에도 오직 라이프스타일과 관련한 논의에서였다. … 20세기 노동계급 권력의 핵심 구현체들을 언급하지 않는데, 스페인 CNT, 미국 CIO, 프랑스 CGT,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중앙 노동자 평의회가 그런 경우다. 폴란드 솔리다르노시치(연대노조)는 한 번 언급된다. 홉스봄의 역사만 보면 제1차세계대전 종전 후 이탈리아에서 공장 점거 운동이나, 1930년대 프랑스 역사에서 1936년 점거 파업이 핵심 분기점이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20세기 자본주의의 주요 특징인 대규모 노동자 밀집 공장들도 언급되지 않는다. [미국 자동차 기업 포드의 디트로이트] 리버 루즈 공장, [프랑스 자동차 기업] 르노의 비양쿠르 공장, [이탈리아 자동차 기업] 피아트의 미라피오리 공장, [폴란드] 그단스크의 레닌 조선소 모두 마찬가지다.
홉스봄의 책은 대학교에서 널리 쓰이며 마르크스주의 문헌으로 추천되고 있는데, 마르크스주의가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 투쟁의 이론과 실천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주변화되는 데에 일조했다. 그의 책에서는 1936년 프랑스 민중전선을 평가할 어떠한 가이드라인도 찾을 수 없다. 그 책은 노동계급의 기억을 저장하기보다 망각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극단적 경우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역사가들은 늘 이런 류의 건망증을 드러내는데, 그들이 투쟁을 평가하는 기준은 (프랑스 민중전선 정부를 이끈 사회당 지도자 레옹 블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치인들의 “권력 접수”를 향한 노력, 즉 선거를 통한 집권에 도움이 됐는지 여부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나는 오늘날 개혁주의자들이 1934~1938년 프랑스 민중전선의 역사를 아주 협소하게 해석하면서 오도하고 있고, 그 목적은 버니 샌더스 등 민주당 정치인들을 지지하자는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임을 보일 것이다. 그 개혁주의자들은 사회당 레옹 블룸이 선거에서 이긴 것에 고무받지만, 혁명적 규모로 분출했던 대중적 파업이 왜 지속되지 못하고 결국 그 뒤에 파시즘이 도래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통 관심을 보이지 않고, 따라서 그들의 주장은 오늘날 우리가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운동을 건설하는 데에 기여하지 못한다.
오늘날의 역사 해석 우리는 영어권에서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좌파 개혁주의 흐름이 (특히 미국에서) 《자코뱅》을 그 이데올로기 중심지로 삼고, 역사 해석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들이 1930년대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계급협조주의 민중전선 전략을 지지하는 것은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하는데, 마르크스가 1850년에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 연설’을 한 이래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을 분리시켰던 문제다. 그 연설에서 마르크스는 1848~1849년 프랑스 혁명과 독일 혁명의 핵심 교훈이 노동자들(특히 그들의 지도부)이 “프롤레타리아가 독자적 정당으로 조직될 필요성”을 한시도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전통은 마르크스가 수립하고 레닌과 볼셰비키에 의해 초기의 혁명적 코민테른까지 계승됐지만, 민중전선은 그것과 단절했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 단체가 부르주아 정당과 동맹을 맺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원칙이라는 것은 그냥 추상적 공문구가 아니고 경험을 통해 확립된다. 그리고 1930년대 공산당들이 참여했던 민중전선들이 하나같이 비극으로 끝났다는 점은 이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그럼에도 오늘날 미국에서는 개혁주의자들이 선거적 계급연합 전략을 되살리려 하고 있는데, 민주당 후보 지원이라는 자신들의 정치 전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정당들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무시하거나 그 원칙은 종파주의적 선긋기일 뿐이라고 폄하한다. 그들이 보기에는 그런 과거 유물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오늘날 새롭게 부상하는 사회주의 지지 여론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문제는 그들이 이른바 폐물이 됐다거나 종파주의를 버리자면서 제안하는 것이 전혀 새롭지도 창의적이지도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은 스탈린주의의 계급협조주의를 재탕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프랑스 민중전선 정부의 사례는 그 전략이 패배와 사기저하를 낳을 것임을 전형적으로 입증하는 경우다.
그런 민중전선을 오늘날 본받을 만한 것인 양 그리려는 의도에서 개혁주의 필자들은 대중 투쟁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를 부각한다(당시 공산당은 계급협조주의를 추구하면서도 투쟁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개혁주의 필자들은 민중전선의 최종 결과에 대해서는 얼버무릴 수밖에 없는데, 민중전선이 투쟁 잠재력을 극대화하기보다는 끔찍하고 재앙적 결과로 이어지는 데에 일조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스페인 민중전선은 노동자들의 권력 장악을 의제에 올린 지 불과 2년 만에 1939년 프랑코의 파시스트 독재 정권 수립으로 귀결됐다. 2016년 미첼 아비도어는 개혁주의자들의 표준적 주장을 확립했다. 그는 《자코뱅》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프랑스 민중전선 지도자 레옹 블룸의 모습에서 우리는 전간기[역주 — 제1차세계대전 종전 후부터 제2차세계대전 발발 전까지의 시기] 사회민주주의의 위대함과 비극을 모두 발견할 수 있다.” 아비도어는 비극 부분으로, 블룸이 스페인 민중전선 정부가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대에 위협당할 때 지원을 거부한 문제를 옳게 비판한다. 그러나 아비도어는 이 문제가 블룸이 부르주아 정치에 굴복한 것(개혁주의 정치인들이 그러리라는 것은 익히 예상할 수 있다)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대신 블룸의 개인적 자질 문제로 돌려 버린다. 그래서 아비도어의 결론은 블룸이 “사회주의적 연대나 자신의 도덕성보다도 국가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했다”는 것이다. 아비도어의 글에는 부르주아 정당인 급진당과의 동맹으로 인해 벌어질 예상할 수 있었던 실패를 비판하는 내용을 찾을 수 없고, 그의 글은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을 건설하려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지식의 저장소가 아니라 (개혁주의적 역사 서술의 흔한 특징인) 의도적 망각을 부추긴다.
8 우선, 스탈린의 잔인한 독재를 자신들의 공산주의 모델이라고 추앙했던 정당이 어떤 종류의 인간 해방에서든 그 호민관이 될 수 있을까? 둘째, 사실관계를 따져 보더라도, 미국에서 민중전선 전략은 개혁주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미국 노동계급에게 재앙적 결과를 안겼다. 슈워츠와 순카라의 글을 반박하며 찰리 포스트가 썼듯이 “1930년대 공산당의 민중전선 전략은 노동운동을 약화시켰다.” 민중전선 전략이 남긴 것은, 부르주아 정당이자 결코 노동계급의 친구가 아닌 민주당이 강화되고, 강력하고 지속적인 개혁을 이루고 만만찮은 노동자 조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기회는 유실된 것이다. 포스트는 자신의 반박문 결론을 다음과 같이 맺는다. “나는 사회주의 교육 활동과, 직장과 공동체에서 저항을 건설하기 위해 분발하는 것 둘 다 필요하다는 그들의 주장에는 동의한다. … 그러나 민중전선 전략으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 9
2017년에 쓴 글에서 미국 민주사회당DSA 전국 부의장 슈워츠와 《자코뱅》의 편집자이자 출판인인 바스카 순카라는 [뉴딜 시기] 공산당이 민중전선의 계급협조주의 노선을 통해 “사회주의를 향한 호민관이자 최상의 조직가들”이 됐다고 주장했다.더 최근에는 영국의 저널리스트 폴 메이슨이 [노동당의 좌파적 대표] 제러미 코빈이 [보수당 총리] 보리스 존슨을 [총선에서] 꺾을 방안으로 민중전선을 제안했다. 메이슨도 1930년대 민중전선의 실제 결과를 부정직하게 못 본 척했다. 메이슨이 코빈이 민중전선을 꾸려야 한다며 제시한 핵심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파시즘에 맞서는 ‘민중전선’은 … 반년 안에 효력을 발휘했다. 스페인에서는 … 민중전선이 1936년 1월 권력을 장악했다. 그해 5월에는 프랑스에서 민중전선이 승리해서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 총리를 배출했다.”
10 베번과 크립스는 민중전선을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둘은, 당시 노동당에 전술적으로 입당하고 있던 공산당원들의 지도를 받아들인 소규모 집단에 속했다. 1938년에 스태퍼드 크립스는 오늘날의 가디언 컬럼니스트[폴 메이슨]와 달리 민중전선의 의미를 드러내는 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노동계급의 [생산] 통제라는 바람을 당분간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썼고 11 베번과 크립스는 이런 시도 때문에 제명됐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동당의 압도 다수는 민중전선을 거부하고, 민중전선의 계급협조주의 지향을 반대했다.
더 나아가 그는 좌파적 노동당 지도부를 지지하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영국 노동당의 역사도 왜곡해서 제시한다. “나이 베번과 스태퍼드 크립스는 노동당 좌파의 핵심적인 두 인물이었는데, 그들은 공산당과 자유당, 그리고 파시즘에 반대하는 보수당원들까지 포괄하는 선거 연합을 제안했다. … 이렇듯 민중전선 전술은 소규모 복고주의 좌파만의 애호품이 아니다. 서구 민주주의 전통의 정당한 일부이자, 1930년대 파시즘의 전진을 지연시키거나 가로막은 유일한 전술이다. 그리고 당시 그 전술을 개발한 이들은 오늘날의 코빈 지지자들과 비슷한 사람들이었다.”포스트가 1930년대 미국의 경험을 비판하면서 내린 결론은, 글 뒷부분에서 보겠지만 내가 1936~1938년 프랑스의 민중전선 경험에서 도출하는 교훈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민중전선이나 그와 비슷한 정치 재편 논의는 상당히 유혹적이다. 실력 있는 사회주의 좌파를 건설하고, 노동자와 억압받는 사람들이 체감할 구체적 성과를 이룰 지름길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길을 따라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내 “진보적”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고 민주당을 “확성기”로 이용해서 세력 관계를 바꿔 내고, 개혁을 성취하고, 급진적 흐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 전략은 실패와 후퇴만 낳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근본에서 자본주의와 노동계급 의식에 대한 비현실적 이해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간단명료한 진실은 노동자, 유색인,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이 실질적 변화를 쟁취할 수단은 대규모 사회 교란 행위, 즉 파업, 시위, 점거 같은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를 교란하는 행위를 통해 노동계급의 의식도 성장하는데, 노동자들이 공동의 조직과 투쟁 속에서 연대를 구축해야 하고, 기업주와 국가에 맞서며, 자신들이 세계를 변화시킬 역량이 있음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좌파들이 노동조합 관료, 민주당 자유주의자와 동맹을 맺는 전략은 우리가 독자적 조직과 전투성을 일관되게 옹호할 능력을 해친다.
이 논문에서 나는 1936년 1월부터 1938년 6월까지 프랑스 민중전선 — 공산당과 사회당, 부르주아 중도 정당인 급진당의 동맹 — 의 경험을 살피며 민중전선의 정치는 노동계급에게 재앙을 안겼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아가, 개혁주의자들이 [미국] 뉴딜 시기 민중전선의 역사를 왜곡해서 찰리 포스트의 비판을 샀듯이, 1936년 프랑스의 사건들도 개혁주의자들이 완전히 부정직하게 해석하고 있음을 보일 것이다. 순카라는 2019년 2월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블룸이 집권하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바로 노동자들의 야심이 한껏 방출된 것이다. 민중전선 정당들의 눈부신 선거 승리로는 만족하지 못한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고, 공장을 점거하고, 생산을 마비시켰다.
순카라는 오늘날 미국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고 인정한다. 실제로, “우리는 전례 없이 취약한 상태에 있다”고 인정한다. 그런데도 순카라는 샌더스가 대통령이 되면 (위력이나 전투성을 갖춘 대중적 기반과 노동자 조직들이 없는데도) “엘리트와의 대결을 통해” 개혁의 길을 열 것이라고 독자들에게 장담하는 태평함을 보여 준다. 어째서 전투적이고 잘 조직된 노동계급이 아니라 민중전선이 승리의 전략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모호하다”고 인정한다. 심지어 왜 지금 민중전선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도 제시하지 않는다. 순카라가 민중전선을 언급하는 목적은 오직 계급협조주의를 정당화하고 계급 투쟁과 [독자적] 조직 건설 문제를, 민주당 지도자를 대통령으로 선출시키는 문제로 축소하기 위해서다. 민주당은 조직 노동자나 억압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를 대변하는 정당인데 말이다. 이하에서 보이겠지만, 순카라 식 서술은 1936년 프랑스에서 지배계급에게 개혁을 강요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을 심각하게 축소하고, 그렇게 강렬했던 운동(순카라가 상정하는 오늘날의 그 어떤 잠재력보다도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이 어째서 재앙적 패배로 끝났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레옹 블룸의 민중전선 정부를 예찬하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순카라도 민중전선의 결과를 못 본 체한다. 민중전선이 파시즘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 사소해서 보이지 않는 듯하다. 블룸 정부가 최종 실패한 것을 순카라가 설명하는 방식은 “일단 개혁을 얻고 나면 노동자 동원이 계속 유지되기 어렵고, 자본은 그 개혁을 되돌릴 구조적 힘을 갖고 있다”는 것뿐이다.
진정한 사회주의 운동을 재건하려는 혁명적 좌파는 역사를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 즉 특정 투쟁이 오늘날 우리에게 유의미한지 여부를 판단하고 과거에 시도된 전략들을 정직하게 평가하려고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노동자들은 불필요한 패배를 반복하고 승리할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운동에는 풍부한 경험이 누적돼 있고 우리 자신의 경험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다. 과거 세대가 겪은 희생과 이뤘던 성과를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그들이 더 나은 세계를 위해 투쟁했던 역사를 개혁주의자들이 왜곡하는 것에 맞서 열과 성을 다해 싸워야 한다. 민중전선 전략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민중전선의 배경
1934년 2월 파시스트와 왕당파 무장 폭도들이 프랑스 국회의사당을 공격했다. 이 전투로 경찰 15명이 죽고 1435명이 부상당했다. 이 쿠데타로 부르주아 정당인 급진당의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이끌던 정부가 무너졌다. 파시스트들의 환호를 한껏 받으며 우파 가스통 두메르그가 이끄는 새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기층에서는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사회당이 단결하는 새 시대가 펼쳐졌다. 또한 노동계급의 전투성, 파업, 점거가 고양되는 국면이 촉발돼 1938년 말까지 이어졌다.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2월 12일, 사회당이 호소하고, 개혁주의 노조 CGT와 공산당, 공산당의 더 작은 노총 CGT-U가 마지막 순간에 그 호소에 응하기로 결정하면서 450만 명이 프랑스 전역에서 파업을 벌였다. 파리에서는 사회당과 공산당이 각각 이끌던 시위대가 세력을 합치는 역사적 광경이 전개됐는데, 1920년 공산당과 사회당이 분당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100만 명이 행진하면서 “단결! 단결!”을 외쳤다고 한다.
파시즘의 위협에 맞서고 갈수록 거세지는 기업주들의 경제적 공격에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노동자들의 단결 염원에 깔려 있었다. 1928년 이래로 공산당은 사회당을 사회[주의적] 파시스트라고 비난하며 공동 활동을 거부했다. “제3기”라 불린 이 종파주의적이고 정신 나간 정책은 전투적 노동자들의 거대한 저항 압력에 직면했다. 동시에 히틀러가 대대적으로 재무장하는 것을 보며 스탈린은 서구 열강 중 동맹을 찾기 시작했고, 또한 (1928년 이래로 축소되고 있던) 공산당 지지층 재건을 시도했다. 사회당 내에서 급진적 부문이 성장한 것도 이런 상황과 맞물렸다.
15 아닌 게 아니라, 도리오 제명을 결정한 바로 그 당대회에서 사회당과의 공동전선을 표결했다. 비록 공산당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는 계속해서 저항했지만, 1934년 7월 공산당과 사회당은 공동전선 협약을 맺고 7월 14일 대규모 집회를 공동 개최했다.
한편 공산당 안에는 제3기 정책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를 한사코 거부했던 투사들이 있었다. 예컨대, 파리 북부에 위치한 생드니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자크 도리오는 1933년 극우의 폭력 행위가 늘기 시작한 이래로 사회당과의 관계 개선을 주장했다. 그는 공산당원과 사회당원, 그리고 다른 투사들이 파시스트의 2월 폭동에 대응하기 위해 공동으로 결성한 반反파시스트 위원회를 해산하라는 공산당의 요구를 거부하며 스탈린의 [제3기]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공산당은 6월 도리오를 제명했지만 그것으로는 사회당과 단결을 요구하는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그러나 프랑스 공산당은 소련이 가하는 다른 압력을 받고 있었는데, 소련이 히틀러에 맞서 영국, 프랑스와 모종의 동맹을 맺는 데에 혈안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서유럽 공산당들이 계급 분단선을 넘나드는 투쟁이 아니라 계급에 기초한 투쟁을 선동하면 소련이 그런 동맹을 맺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프랑스 공산당은 신생 공동전선을 확대해 급진당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급진당은 공화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정당으로 주된 유권자는 도시의 프티부르주아지와 농민이었다). 이렇게 계급 분단선을 넘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민중전선이라는 명칭이 제안됐다. 민중전선은 선거 연합을 위해 1936년 1월에 공식화되고,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레옹 블룸이 프랑스 최초의 사회당 총리가 됐다. 이후 사회당과 급진당은 정부를 구성했고 공산당은 그 정부를 지지했다.
16 그러나 1936년 프랑스와 비교하는 것은 모두 순전한 공상이다. 오늘날 미국은 당시 프랑스와 비교 대상이 못 된다.
블룸이 총리로 당선한 이후 거대한 파업 물결이 분출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자코뱅》 필자들은 만약 샌더스가 대통령으로 당선하면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환상을 부추긴다. 앞서 나는 순카라가 1936년과 현재를 비교하면서 이 점을 어물쩍 넘어간다고 지적했는데, 에릭 블랑은 좀더 공공연하게 샌더스가 당선하면 대중적 파업 물결이 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2016년에 샌더스는 대통령에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수십 년 만에 가장 큰 노동자 반격이 촉발되도록 일조할 수 있었다. 만약 2020년에 샌더스가 당선돼 ‘수석 조직자’가 된다면 얼마나 많은 것이 가능해질지 상상해 보라. 노동계급의 높아진 눈높이와 백악관에 민주적 사회주의자가 앉아 있는 상황이 결합되면, 파업이 잠재적으로 전례 없이 치솟게 될 것이다.”1936년 6월 4일 블룸이 당선됐을 때 전율이 흐르는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단지 선거 승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민중전선이 오히려 당시 노동계급의 급진성이 상승하던 국면에서 득을 본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 민주당 같은 부르주아 정당에서 한 줌의 개인들이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면서 당선한 것도 아니었다. 블룸이 이끄는 사회당은 20만 2000명의 당원과 5만여 명 규모의 청년 조직을 거느린 진정한 대중 정당이었다. 프랑스보다 인구가 8배 큰 미국에서 이에 견줄 수 있으려면 160만 당원과 40만 명 규모의 청년 조직을 갖춰야 한다. 또한 극좌파로 여겨진 공산당의 성장세도 가팔랐다. 1933년 2만 9000명에서 1936년 9만 명, 계속 성장해서 1936년 12월에는 29만 8000명이 됐다. 공산당 청년 조직의 성장은 더 빨라서 1936년 1월 2만 5000명에서 같은 해 11월에는 10만 명이 됐다. 오늘날 미국에서 이에 필적하려면 72만~160만 명의 가장 급진적인 노동계급 투사를 당원으로 거느리고, 전국적으로 주요 작업장에 뿌리를 내리고, 추가로 50만~60만 명 규모의 청년 조직도 있어야 할 것이다.
민중전선의 득표 중 가장 큰 부분(21퍼센트)은 사회당을 향했고 사회당 의석이 97석에서 146석으로 늘었다. 공산당은 15퍼센트를 득표했고 의원이 10명에서 72명으로 늘었다. 그래서 거대한 노동자 정당 두 곳이 의회 598석 중 218석을 차지했다. 급진당을 민중전선으로 끌어들인 것은 [흔한 주장과 다르게] 오히려 급진당의 득표 하락을 완화하는 데에 기여했는데, 민중전선 정당들끼리는 결선 투표에서 서로 도와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1차 투표에서 단독 과반을 차지한 후보가 없는 지역에서는 결선 투표가 치러졌는데, 대부분의 지역이 그랬다. 여러 지역에서 사회당과 공산당은 급진당을 지원하기 위해 결선 투표에서 사퇴했다. 그래서 급진당은 득표가 줄었지만 민중전선 덕분에 더 커다란 쇠락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급진당이 크게 쇠락하는 것은 노동자 정당들이 마땅히 반길 일이지 최소화할 일이 아니었다.
파업 물결
그렇다, 파업 물결이 있었다. 일주일 내로 노동자 25만 명이 파업에 나섰다. 오늘날 미국으로 치면 4000만 명이 파업한 것과 같다. 공산당이 노동계급을 주름잡는 세력이 돼 있었다. 공산당 영향력은 당원 규모뿐 아니라, 재통합한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통제력과 공산당의 급진적 이미지에서도 나왔다. [자동차 기업] 르노의 공장들에서만 1936년 5월 28일 3만 5000명이 파업에 나섰고, 불로뉴-비양쿠르 공장과 플랭 공장에서는 점거를 했다. 파리의 모든 금속 공장에서 파업이 잇따랐다. 약 600만 명이 파업을 벌이고 공장 점거가 들불처럼 번졌고, 비조합원 노동자들을 대거 끌어들였는데 그중 많은 이들은 백화점과 은행, 보험사 직원처럼 이전까지 한 번도 쟁의에 참가해 본 적이 없는 노동자였다. 당시 한 사회주의자가 남긴 기록을 보면, 자기 집 주변의 작은 공예품 작업장의 노동자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우리도 남들이 다 하듯 작업을 중단하려고 합니다. 당신이 와서 우리가 파업 요구를 정하도록 좀 도와줄 수 있습니까?” 6월, 다른 모든 가게가 수일째 파업을 진행 중일 파리의 한 백화점에서는 노동자들이 경영진의 보복이 두려워 아직 말을 못 꺼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딱히 뭐라 정의할 수는 없는 분위기”가 느껴졌고, 오후가 되면 CGT 조합원으로 알려진 한 종업원의 책상 위에 “저는 믿어도 됩니다”, “도움이 필요하세요?”라고 쓰인 쪽지들이 놓였다.
은행 노동자들과 호텔 안내원도 파업 운동에 동참했다. 사탕과자점, 목공소, 가구점, 군복업체, 도제식 모자업체, 신발점, 가죽제품업소, 세차업소, 수도 당국, 영화관, 출판업에서도 총파업이 일어났다. 파리에서는 보험사 종업원들이 6월 8일 파업을 벌이면서 대체인력 투입을 막고 점거에 들어갔다. 다음 날에는 50개 회사에서 점거가 벌어졌다. 당시에 활동했던 다노와 지블랭은 그런 흐름이 가져온 아이러니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언론은 노조가 협상에서 합의했다고 보도했지만, 다음 날에는 교섭안의 하나일 뿐이었고 협상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보도할 수밖에 없었다. 한 곳을 제외하고는 파업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노동자들은 기업주들이 제시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수일 내로 기업주들은 광범위한 개혁을 양보하는 마티뇽 협정에 서명했다. 임금이 대폭 인상됐고, 주 40시간 노동, 유급 휴가, 노동조합 권리, 실업 보험이 보장됐는데 모두 노동조합이 오랫동안 요구한 것들이고 노동자들에게 괄목할 만한 조건 개선을 약속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전투성은 잦아들지 않았다. 여러 지역과 각종 산업 부문에서 노동조합 상근 활동가들은 조합원들을 다시 일터에 복귀시키는 데 애를 먹었다. 노동자들은 마티뇽 협정이 약속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했거나, 협정의 구속력을 더 확실히 하지 않으면 기업주들이 협정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며 불신했다. 한 곳에서는 노동조합 측이 더 나은 합의안을 갖고 돌아왔지만, 파업 대표 700인에게 파업 종료를 설득할 수 없었다. 이제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이 외부 세력 때문에 파업한다고 깎아내릴 수 없었다. 민중전선 지도자들의 구실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실제로 다노와 지블랭에 따르면 민중전선 지도자 중 한 명이, 파업위원회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그의” 노동자들에게 연설하려고 했지만 “여기저기서 노동자들이 주먹을 불끈 쥔 팔뚝을 들어 올렸고 모든 노동자들이 ‘나가라! 나가라! 나가라!’ 하고 외치며 그를 쫓아냈다. 화룡점정은 그가 퇴장하자 노동자들이 일제히 인터내셔널가를 부른 것이었다.”이 기업들의 관리자들은 자신의 종업원들 특유의 온순함에 익숙해져 있었고, 모범적이었던 자신의 직원들이 자신의 사무실 앞 도로에서 농성하는 모습을 볼 날이 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교섭이 열린 첫날, 그들은 서명했다.
20 하! 맞다, 부르주아 정당인 급진당은 블룸을 지지하지 않았는데 이는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수백만 노동자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순카라는 목소리를 낮춘다. “블룸에게는 더 급진적 조치를 취할 지지 기반도, 결의도 없었다.”마르소 피베르는 사회당 좌파의 지도자였는데 당시 그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선언해 유명해졌다. 6월 벌어진 파업의 75퍼센트는 점거 파업이었다. 청년 좌파 화가 보리스 타스리츠키가 그린 아름다운 작품 ‘1936년 6월의 파업’을 보면 당시 파리 근교 거리의 모습이 억압받는 자들의 축제처럼 묘사돼 있다. 《프랑스의 민중전선》이라는 훌륭한 책을 쓴 줄리언 잭슨은 당시 알렉산더 워스가 한 말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훗날 블룸은 친파시스트 비시 정권 하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당시 상황을 “사회적 폭발”이라고 부르며 갓 집권한 정부가 “얼굴을 정면으로 가격당한 것”과 같았다고 증언했다. 잭슨은 당시 계급의식과 자신감이 높았던 시기였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점거는 대체로 잘 조직됐고 규율이 있었다. … 파업 노동자들은 기계와 재고를 세심하게 관리했다.” 그리고 블룸은 파업 노동자들의 이런 “차분함, 일종의 위풍당당함”이야말로 자본가들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고 발언했다.모든 건물에서 — 작은 공장이든 큰 공장이든, 심지어 상대적으로 작은 공방에서도 — 적기를 걸었거나 적기와 삼색기를 함께 걸었고, 그 굳게 닫힌 문 앞에 피켓라인[대체 인력 투입을 막기 위한 대열 — 역자]이 형성돼 있었다.
파업을 촉발한 것은 전투적 노동자들을 보복 해고한 것이었다. 당시 실업률이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보복 해고는 쉬운 수단이었고 어떤 노동자든 쉽게 교체될 수 있었다. 노동조합 권리와 대량해고, 노동조건 공격은 나란히 진행됐다. 그런 만큼 일단 파업 물결이 시작되자, 어떤 직장에서든 기업주의 공격이 있으면 파업에 나섰고 점거까지 벌이기 일쑤였다. 경험이 없는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노조 사무실에 대표를 보내 파업 방법을 문의했다. ‘우리가 뭘 요구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좀 도와달라’ 하고 말이다. 또는 경험 있는 인근 공장의 노동자들에게서 도움을 받아 요구를 정식화하고 파업에 들어가거나, 심지어는 파업부터 먼저 시작하고 사후에 파업 요구를 정하기도 했다.
역사에 기록된 많은 혁명적 상황에서 그렇듯 노동자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권력을 일부 맛보았고, 지난 10년 넘게 극우 민병대와 갈수록 악랄해지는 기업주들에 시달려 온 만큼 너도나도 파업에 참가하고 싶어 했다.
그럼 이 대목에서, 노동계급이 주체적 활동에 대대적으로 나서도록 만든 요인들을 설명하는 몇 가지 방식을 살펴보자.
22 대규모 투쟁을 향한 최초의 자극은 1934년 2월 파시스트의 반란이었다. 당시 관리자들은 노동자들이 파시스트 반대 시위에 참가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고, 이듬해와 그 다음 해에도 노동자들은 이를 잊지 않았다. 둘째로 사회당과 공산당이 단결하면서 CGT가 성장했다. 사회당이 통제하던 CGT는 (공산당이 통제했고 훨씬 작았던 CGT-U와 아직 통합하기 전인) 1935년에 조합원 수가 78만 5000명이었는데 1937년 통합노총CGTU 하에서는 400만 명으로 늘었다.
1936년에 파업이 분출한 이유로 잭슨은 몇 가지를 든다. 단지 블룸이 총리로 선출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공산당의 전투적 활동가들은 노동조합 내 수십만 명에게 지도력을 발휘했다. 공산당은 노조 통합 과정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공장 내 공산당 조직을 더 활발하게 가동했고, 노동자들의 구체적 요구를 중심에 두고 조직하는 것에 강조점을 뒀다. 그 시작은 순차적인 조업 중단이었다. 선거(결선 투표는 [1936년] 5월 3일이었다)를 앞두고 파업 물결이 시작됐다. 마르세유 항만 노동자들의 파업이 1935년 12월에 시작된 것은 1936년 파업 동력을 형성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 파업은 신생 통합노총이 호소한 것으로, 사회당이 주도하던 시절 CGT가 합의했던 임금 삭감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파업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루 파업이 벌어졌는데 이번에도 10퍼센트 임금 삭감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광원들은 수주 동안 준비한 후 1936년 5월 1일에 파업을 벌였다. 광업에서 노조 조직률은 1935년 26퍼센트에서 1936년 3월 43퍼센트로 상승했다.
CGTU는 다가오는 선거에서 노동자들의 기대가 높아진 것을 이용해서 5월 1일 파업에 노동자 85퍼센트를 참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5월 28일 르노 파업은 블룸에 열광하거나 선거 승리로 환희에 찬 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인근의 더 작은 공장들이 노동 조건을 놓고 파업을 벌이고 있었고, 이웃한 공장들의 파업위원회들의 호소가 있었다. 르노에서 공산당이 통제하던 한 작업장에서 그들과 연대하기 위해 파업에 나섰다. 그 후 공산당 노조 지도자 몇 명이 공장에 도착했고, 파업이 공장 전체로 번졌다.
선거 승리가 이미 상승하고 있던 투쟁 수준에 일부 자극을 주기는 했지만, 거대한 파업 물결을 일으킨 것은 블룸의 당선이 아니라 전투적인 노동조합원들이었고 다수는 공산당 당원이었다. 일단 운동에 발동이 걸리자, 많은 파업과 점거는 대체로 자생적이었고 심지어 노조에 속하지 않은 노동자들까지 끌어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공산당과 CGTU 관료와 투사들의 구실이 핵심적이었다. 첫 공장 점거 투쟁은 5월 29일 코데르 공장에서 있었는데 “공장 내 공산당 노조 활동가들이 당 그리고 현지의 민중전선 위원회와 긴밀히 상의해서 준비한 것”이었다. 공산당은 이 공장에서 오랫동안 선전 작업을 해 왔다. 잭슨은, 연이어 분출한 모든 투쟁에서 개별 현장의 불만과 함께 공산당의 구실도 두 가지에서 중심적이었다고 강조한다. 공산당이 오랜 선전 활동을 통해 투쟁 여건을 마련했고, 5월 말 파업이 시작되도록 타이밍을 정하고 실제로 조직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 노조 지도자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이 파업들을 조직할 때) 기초가 된 것은 CGTU가 지난 15년 동안 발전시킨 방법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종종 조합원 당원이 없는 곳에서는 파업 과정에서 그 지도자가 배출되기도 했다. 이 신생 파업 지도자들, 파업 참가자들과 공식 노조의 지도자들 사이의 관계는 원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노동자들은 ‘우리들의 파업’을 원했다.” 그렇지만 노조 관료들은 당연하게 자신들이 통제권을 갖길 바랐다. 심지어 공산당 기반이 있는 르노 같은 곳에서도 현장조합원들의 반란 때문에 5월 28일 파업 종료가 지연됐는데, 일부 노동자들이 노조가 합의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민중전선 정부가 당선한 것은 분명 노동자들이 행동에 나서는 것을 더 수월하게 했는데 민중전선 정부가 이전의 우익 정부들보다 자신들에게 더 우호적으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정서가 꼭 블룸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1935년 지방선거에서 민중전선이 승리한 지역 의회에서는 공장 점거를 지원할 식량을 조직했다. 옛 공산당원 도리오의 생드니 지역의회는 15일 동안 13만 끼니를 제공했다. 또한 총선에서 불로뉴-비양쿠르 선거구에서 노동자들 자신의 후보(르노 노동자 출신)가 1차 선거만으로 승리해 노동자들의 사기를 크게 북돋았다. 그러나 잭슨이 강조하는 것은 “CGT와 CGTU가 동족상잔을 멈춘 것”이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노조 통합은 조합원 성장을 가져온 것 외에도 CGT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었고, 공산당 관료들의 권위를 높여 주었다. 또한 대공황으로 1930년대 초까지 노동자들이 방어적이었던 상황이 지나고, 경제가 1935년에 나아진 것도 노동자들에게 싸워서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크게 북돋았다.
개혁주의자들의 곡해
오늘날 미국에서 극우가 쿠데타를 시도하거나 수만 명이 무장한 채로 행진하지는 않는다. 또한 샌더스는 어떤 의미에서도 대중적 노동자 정당의 지도자가 아니다. 그보다는 부르주아 정당,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주의 국가를 운영하는 부르주아 정당에 매인 몸이다. 공산당이 부르주아 정당인 급진당과 동맹을 추진한 것은 비난받을 일이지만, 적어도 [또 다른 동맹 대상이었던] 사회당은 대중적인 노동계급 정당이었다. 오늘날 미국에는 공산당이나 사회당 같은 조직이 없고, 하물며 당원이 100만 명이고 반反자본주의인 척하는 조직은 더더욱 없다.
그러나 오늘날 개혁주의자들이 1936년 사건들을 실제에 부합하지 않게 주장하는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혁주의자들은, 노동자 투쟁의 물결을 타고 그 대표자로 권력을 잡은 블룸 등 정치인들의 중요성을 과장한다. 이를 위해 수많은 전투적 노동자들의 중요성은 역사에서 지워 버린다. 노동자 활동가들이 영감 어린 점거 파업의 기초를 놓고 또 실제로 조직하기 위해 애쓴 것, 그들의 규율과 단호한 처신이 동료 노동자들을 움직이고 계급적 억압자들이 움츠러들게 만든 것을 개혁주의자들은 무시하거나 낮게 평가한다. 1936년 중엽 (점거)파업이 치솟은 것이 대체로 “자생적”이었다거나, 사회당 내 좌파도 아니었던 블룸의 당선으로 노동자들이 단순히 고무받아 벌어진 것이라는 생각은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은 강력한 노동계급 조직을 건설하는 데에 들어가는 노력과 그런 노동계급 조직이 있었기에 1936년의 급진적 분위기가 가능했던 것을 경시하는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의 관점은 의회 선거나 그다지 급진적이지도 않은 정치인들을 좇으면 노동계급의 대규모 투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환상을 부정직하게 조장한다. 1936년의 투사들은 대중적인 저항 운동이 이미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이를 더 고양시키려고 선거 상의 중요한 승리를 이용했다. 오늘날 미국의 조건은 그와 전혀 닮지 않았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샌더스가 당선하면 투쟁이 비슷하게 분출할 것이라고 거짓말하려고 노동자 대중과 그들의 기층 지도자들을 전체 서사에서 지워 버린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의 이런 서사에서 수백만 노동자들은 정치인들과 그들의 선거 운동 소품으로만 등장한다. 그러나 정직한 역사학자인 줄리언 잭슨은 노동자들의 각종 행동을 우호적으로 분류한 후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결론을 제시한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았을지 몰라도, 그들은 가장 높은 수준의 직감을 갖고 있었다.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가장 높은 수준의 직감”은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자들에게는 자력으로 해방되고 그에 따라 인류를 해방시킬 능력이 있다고 신뢰하는 것의 바탕에는 바로 노동자 투쟁의 그런 특징이 있다. 개혁주의가 힘을 얻는 것은, 노동자들이 억압자들의 권력에 도전하면서 발휘하는 각종 재능과 조직적 비범함을 우리의 집단적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을 통해서다. 선거 승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제시하려는 사람에게는 투쟁이 노동자들의 의식과 자신감에 끼치는 영향이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당대의 관찰자들은 파업이 노동자들에 끼친 경험적 영향을 기록으로 남겼다. 시몬느 베이는 아나키스트에 우호적인 지식인이자 공장 노동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다른 많은 관찰자들과 마찬가지로 [1936년] 5~6월을 다음처럼 묘사했다. “기쁨”, “미소 짓는 노동자들”, 공장과 거리에서 음악이 울리고 춤추고 떠들썩하게 웃는 것. 당시 사진들을 보면 파업 중인 카페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시위대와 함께하는 모습,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점거한 공장이나 거리에서 춤추거나 카드 놀이를 하거나 아니면 그냥 친목을 다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청년 화가가 그렸듯이 그것은 실로 억압받는 자들의 축제였다. 그런데 일부 논평가들은 이런 묘사를 근거로 노동자들이 실제로는 혁명적이지 않았고, 잠시 유희를 즐긴 것이고 이내 정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주장한다. 잭슨은 그런 주장이 실제 사건들의 한쪽 면만 봤다며, 불끈 쥔 주먹과 적기도 당시 빠지지 않는 일부였다고 주장한다. “기쁨만큼이나 두려움도 있었다. 축제만큼이나 투쟁도 있었다. 친구뿐 아니라 적도 있었고, 미소뿐 아니라 엄숙한 표정도 있었다.”
1936년 5월 28일 르노 비양쿠르 공장에서 있었던 대규모 집회를 찍은 사진은 그 전형을 보여 준다. 노동자 수천 명이 서 있는데 웃고 있지만 결의에 차 있고, 파업에 찬성하기 위해 불끈 쥔 주먹을 공중에 들어올리고 있다. 심지어 한 무리의 중간계급 여성을 찍은 사진에서도, 민중전선 지지자인 그녀들이 주먹을 들어 올린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렇듯 노동계급 자력 활동의 양 측면이 언뜻 드러나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본다면, 당시의 모습에서 개혁과 혁명의 근본적 차이를 두드러지게 읽어 낼 수 있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썼듯이 혁명이 필요한 것은, 지배계급을 달리 타도할 방법이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대중 투쟁을 통해서만 변화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통치하는 데에 적합해지기 때문이다.
민중전선이 가치 있는 도박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계급 협력으로 끌려 들어오면, 자신감이 성장·발달할 잠재력이나 해방의 약속이 밀려나고, 힘을 잃게 만들 타협이 중심을 차지한다. 그 제약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살피기 전에, 당대 관찰자들 중 이런 우려를 기록한 이들이 있었음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프랑스에서 트로츠키는 민중전선이 재앙으로 끝날 것이라고 확신을 갖고 예측했다. 트로츠키는 공산당이 출범시킨 민중전선의 목표가 노동자들의 전투성을 축소하고, 혁명적 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는 데에 있다고 반복적으로 경고했다.
대중이 인내심을 잃고 더 폭발적일수록, 더 강력한 브레이크가 필요하고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한다. 공동 집회, 행진 대열, 맹세, 코뮌과 베르사유 깃발을 섞어 들기, 소란, 난리법석과 데마고기가 모두 한 가지 목적, 바로 대중 운동을 억제하고 사기를 저하시키려고 동원된다.
트로츠키는 급진당 지도자 사로가 다음과 같이 공공연하게 말한 것을 지적했다.
트로츠키는 혁명이 가능하다고 확고하게 믿었다. 파시스트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도 혁명이 필요했다. 그러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세력은 미약했고 그래서 사건에 영향을 끼칠 수가 없었다.(사로는 자신이) 민중전선을 인정한 것이 순전히 체제의 안전 밸브 구실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런 솔직한 발언은 경솔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의회 내 극좌파 의원들의 우뢰 같은 박수로 환대 받았다.
영국에서는 사회당 당원이었던 에드가 하드캐슬이 공산당이 동맹을 성사시키기 위해 이미 타협한 것들이 무엇인지 지적했다.
공산당은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가 유일한 희망”이고 그 유일한 수단이 독자성이라는 것을 부정해야 했다. 정반대로 그들은 자본주의의 대표자들이 보수파가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이라면 자본주의가 꼭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 그들은 급진당이 세력을 크게 잃지 않도록 구해 줘야 했다. 이하에 제시하는 공산당 측 논평들은 공산당이 어떻게 노동당주의자들[사회당을 가리킨다 — 블러드워쓰]과 급진당을 도왔는지 설명하고 있다.
〈데일리 워커〉는 러시아 공산당의 신문 〈이즈베스티야〉 논평을 이렇게 인용했다. “(급진당은) 자신의 주요 투표층 사이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다. 이것은 그들이 반파시스트 민중전선에 참여한 것의 직접적 결과다.”
이하에서 보겠지만, 공산당이 급진당에게 제안하고 충실하게 지켰던 거래는 급진당에게 꽤 유리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노동계급 정당을 자처하는 세력이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정당의 소멸을 막아 주는 것은 괴상한 노릇이다.
어떤 이들은 하드캐슬이 종파주의자이고 그의 주장은 그저 원한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이미 공공기록으로 입증된 것에 바탕하고 있다.
처음에 선거 결과는 자본가와 투자자들을 겁먹게 만들었지만, 블룸 씨는 이내 “안심시키는 연설”을 했고 이것이 주식시장에서 “긴장을 가라앉혔다.”(5월 12일자 〈데일리 텔레그래프〉)
블룸 씨는 “현존하는 사회 체제 안에서” 통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5월 12일자 〈타임스〉)
그리고 하드캐슬의 예측은 비극적이게도 예언자적인 것이 됐다. 그는 사회당과 공산당이 함정에 빠졌다고 주장했고, “자본주의적 정당들과 협약을 맺는 것”으로 당면한 긴급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이 잊는 것은 자본주의 관리 책임을 맡음으로써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잃게 된다는 것이다. 즉시 그들은, 자본주의를 이끌고 가는 정부를 주되게 향하는 경멸과 불만의 대상이 된다. 자본주의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그 거짓 희망을 소중히 여겼던 노동자들 사이에서 불확실성, 불신, 무관심, 절망을 낳고, 그만큼 보수파와 파시스트들에게 이후 이득이 된다.
당대의 이런 관찰은 예언자적이었음이 비극적으로 입증됐고, 오늘날의 전략을 심사숙고할 때 기초가 돼야 한다. 각국 노동당과 사회당이 친자본주의적 공격을 벌였던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런 과정에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주의자의 이런 선견지명이나, 노동자 정당들이 자본가 계급과 협력했던 파괴적 실험 경험이, 체제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혁명의 가능성에서 재앙으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일관되고 단호하고 진취적인 전술을 제시하면 대중에게 안전함, 자신감, 투쟁 의지를 일으킨다. 프롤레타리아 잠재력을 저평가해서 동요하고 나약한 전술을 내놓는 것은 대중을 불구로 만들고 혼란에 빠뜨리는 효과를 낸다. — 로자 룩셈부르크, 1906년.
민중전선 이야기는 1936년 6월로 끝나지 않는다. 그다음 두 해 동안 룩셈부르크의 통찰과 트로츠키의 경고가 현실이 됐고 그 결과는 비극이었다. 바슈카 순카라는 당시의 개혁이 그 성과를 무로 돌릴 씨앗을 품고 있다고 여러 번 주장했다.
1936년 5~6월의 분출은 기업주들의 반격을 촉발했는데 그들은 개혁의 이행을 문제삼았다. 정치적 불안정성이 커지는 가운데 블룸의 중간계급 연정 파트너들은 싸움을 포기했다. 블룸은 더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할 지지 세력도, 단호함도 갖지 못했다. 블룸은 집권 1년을 겨우 넘기고 권좌에서 밀려났다.
형식적으로 위 서술은 사건의 사실관계를 나열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은 노동자들의 기대가 매우 엄청났다는 것과 우파에 맞설 의지가 무척 컸다는 것이다. 또한 순카라는 정치 문제 — 민중전선 정당들의 구실, 어떤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지 — 를 없는 셈 쳐서, 노동자들이 다른 결과를 맞이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기 어렵게 만든다. 순카라의 설명만 들으면, 역사의 행진은 반드시 큰 호를 그리며 자본주의 정상성으로 돌아오도록 돼 있다. 그리고 1930년대 프랑스의 조건에서 이는 파시즘의 승리를 뜻했다.
따라서 순카라의 설명을 해체해 보자. 대다수의 부르주아지는 프랑스의 경제적 문제와 노동계급의 요구에 직면해 파시스트들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급진당(농민과 도시 프티부르주아의 전통적 정당) 역시 오른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동시에 절박하고 환멸에 젖은 중간계급들은 온건한 급진당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파시스트들에게 이끌리고 있었는데, 극단적 위기에 필요한 극단적 처방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중간계급들을 극우에서 떼어 내고 노동계급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노동계급이 혁명적 — 다시 말해 극단적 — 대안으로서 중간계급에게 매력을 주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급진당과의 동맹은 노동자 운동에 재앙이었다. 급진당 같은 정당이 자본가들과 그 국가를 상대로 하는 싸움에서 바로 포기할 것이라는 것은 완전히 빤하게 예상되는 일이었다. 트로츠키가 공산당에 맞서 주장했듯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워야 했다.
31 아직 무엇 하나 제대로 쟁취하기 전이었는데 말이다! 이런 지도력에 기초해서는 노동자들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얻어 낼 리 없었다. 사실, 기업주들은 마티뇽 협정으로 귀결되는 협상들을 제안·촉구한 인물이 블룸이라는 거짓 이미지를 만들어 냈는데, 고분고분하지 않은 노동계급을 규율하려면 블룸을 앞세우는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후 블룸은 자신은 보조적인 구실만 했음을 드러냈다. “오늘날 마티뇽 협정이라 불리는 것을 나 자신도 분명 추진했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진실을 존중해야 하는 이 상황에서 말하건대, 최초의 제안은 기업주들의 지도자 측에서 나왔다.” 32
블룸이 총리가 된 후 최초로 선포한 것 중에는 기업가들의 간청에 따라 “책임을 어깨에 지는 것,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이 나라의 법치를 준수하라’고 호소하는 것이 있었다.”공산당 투사들은 수년간의 경험을 통해 1936년 6월 대규모 분출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애매한 약속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조건을 지키기 위해 블룸 정부에 기대는 대신 스스로 계속 싸우려 한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공산당은 노선을 180도 바꿨다. 이제 공산당은 노동자들이 독자적 행동에 나서려고 하는 움직임을 모조리 좌절시켰다. 무엇보다 공산당은 급진당이 멀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는데 급진당이 자신들과의 동맹에서 벗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새 정부가 출범하기를 기다리는 5월에는 파업이 크게 늘었다. 기업주들은 자신들의 회의체 차원의 성명을 통해 “우리가 보기에 피고용인 측은 분쟁 해결책을 보는 관점이 협상 시작 때와 달라졌다”고 불평했다. 집권 대기 중인 정부의 요청 아래, CGT는 성명을 발표해 노동자들에게 운동의 “침착함, 규율, 질서, 신중함, 존엄함”을 지키라고 당부했는데 “평화롭고, 통제되고, 올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노동자들에게 “과장, 데마고기, 위험한 무질서”를 멀리하라고 호소했다. 블룸이 법치 존중을 호소한 지 얼마 후 공산당은 “운동이 처음처럼 규율과 평화적 속성을 유지하도록 만들 결의”가 있다고 성명을 발표해 언론을 안심시켰다. 6월 11일 무렵에는 공산당은 점거와 파업을 끝내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공산당의 입장은 스탈린주의 지도자 토레즈의 악명 높은 말로 요약된다. “파업을 끝낼 줄도 알아야 한다.” 피베르의 패기 있는 발언에 대한 답변으로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는 않다”를 제호로 삼았다.
33 는 “작업에 맞선 반란”이 벌어졌다고까지 했다. 잭슨은 르노의 상황을 이렇게 요약한다. “노동자들의 저항은 여러 형태, 즉 잦은 결석, 게으름, 태업, 비조합원을 상대로 한 폭력으로 나타났다.” 전투성은 많은 경우 현장 감독들을 겨냥했고 그 정도가 어찌나 심했는지 1937년 3월 르노에서는 현장 감독들이 “노조 독재”에 맞서 파업을 벌였다! 파업은 계속해서 풍토병처럼 남아 있었지만, 역사가들은 이를 일축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계속되던 경제적 투쟁은 당시 운동의 조직력과 결의를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기초였다. 그러나 파업은 “비공인” 상태로 남았는데 노조와 공산당이 파업을 막고, 파업을 비난하고, 노동자들에게 경영진과 타결한 끔찍한 협상안을 존중하라고 설득하는 데에 모든 시간을 쏟았기 때문이다. CGT 기관지 〈뤼니테〉는 비공인 파업들을 거듭 비난했고 한 번은 이렇게 썼다.
블룸이 지지 세력이 충분치 않아 더 급진적인 정책을 펼치지 못했다는 주장이 현실과 맞지 않다는 것은, 노조 지도자들과 민중전선 정당 지도자들 이외의 세력까지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진실은 노동자들이 프랑스 전역 수천 곳에서 점거 파업을 벌였고, 수백만 명이 노조에 가입하고 파업하고 행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혁주의자 순카라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무어란 말인가? 그는 노동자들이 한 차례의 개혁 외에는 달리 더 지지하는 게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6월 이후에도 파업은 계속됐고 한 역사가사소하거나 근거 없는 사유를 들어 보통보다 많은 수가 이탈하는 것 … 모든 이들은 경영진이 세웠고 우리가 수용한 작업 스케줄을 준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노조 규율을 지킬 것을 호소합니다. 우리의 적에게 여지를 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접근법에 따르면, 극우의 선동이 갈수록 커지는 것에서 노동자들 자신과 정부를 지키는 최상의 방법은 사장들이 6월 파업 물결의 성과물을 무너뜨리려고 펼치는 공세에 굴복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산당은 급진당을 민중전선 정부에 남게 하려는 목표 때문에 노동자 운동이 더 멀리 밀고 나아가는 것이나 권력에 도전하는 것을 막았다.
심지어 아나키스트인 시몬느 베이조차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지 않고, 그런 주장을 비난했다. 그녀는 노르를 방문한 후, 1936년 가을에 이렇게 썼다.
6월 전에는 공장들에 노예제가 세운 모종의 질서, 모종의 규율이 있었다. 노예제가 사라졌다. 그 노예제와 연결된 질서도 동시에 사라졌다. 누구나 이를 환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산업은 질서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
36 파업 노동자들이 CGT 사무총장 주오 같은 지도자들에게 야유를 퍼붓거나 1938년 3월 금속 노동자들이 그랬듯 파업을 끝내지 않으면 공산당은 파업 노동자들을 “트로츠키주의 선동가”라고 비난했고, 만약 파업을 공식 지침으로 뒷받침하면 블룸 정부가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랬던 만큼 “1936년 파업 운동의 목적을 두고 노조와 노동자들 사이에 견해 차이” 37 가 생겨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어서 시몬느 베이는 생산 통제가 “임의적”으로 이뤄진다고 불평했고, 갓 임명된 노동자 대표들이 노조 관료들과 의논도 하지 않고 파업을 조직해서 파업이 초보적 성격을 띤다고 불평했다. 잭슨은 이런 냉소적인 비판을 반박한다. “노동자들과 그 대표들이 무책임하다거나 권력을 남용했다고 낙인 찍는 것은 너무 단순한 관점이다. 그 파업들에는 실제로 중요한 쟁점이 걸려 있었다.” 노르와 파드칼레의 탄광의 경우, 노조는 노동자들에게 더 강도 높게 일하라고 요구했는데 “민중전선이 성공하기 위한 전제 조건”을 충족하려면 생산성이 높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CGT가 자경단을 만들어 조합원들을 단속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생산성 호소를 노동자들은 한 귀로 흘려들었다!”공산당의 이런 입장은 전혀 은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탈린이 그들에게 바라는 바를 실현하려면 이 입장을 공공연하게 선전할 필요가 있었다. 1938년 2월 의회에서 앙브루아즈 크루아자는, 노조의 발을 중재 기구에 묶어 두기 위한 새 법안에 공산당이 찬성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노동계급은 질서를 원합니다. 노동자들에게 파업이란, 기업주들의 비타협적 태도로 강요되는 최후의 무기입니다. 파업이 아닌 다른 무엇이 주어진다면 노동계급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할 것입니다.
만약 블룸과 사회당이 공산당보다 더 좌파적 입장을 취하고, 스탈린의 계급협조주의 정책이 바라는 것보다 운동을 더 멀리까지 끌고 나갔더라면 상황은 또 바뀌었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당은 공산당처럼 혁명적인 척하지도 않았다. 사회당은 그 전에도 이후에도 개혁주의 세력으로 행동했고, 자신들이 “자본주의의 충실한 관리자”(블룸이 자신을 가리키며 한 말)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블룸은 사회당 안에서 아주 오른쪽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회당 좌파였던 마르소 피베르는 다가오는 배신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자코뱅》에 실린 블룸에 대한 찬사들은, 자신의 정치로 미래에 노동자들이 자본가 계급에 맞서 벌일 대중 투쟁에 기여하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자신감도 심어 주지 못한다.
1936년 말에 공산당은 민중전선을 확대해, 민족주의 입장에서 독일에 반대하는 우익 보수파 세력까지 포함하는 프랑스 전선을 결성하자고 주장한다. 이와 동시에 블룸 정부는 군비 지출을 크게 늘리기로 하고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악화시켰다. 공산당은 극좌파로 여겨졌지만 노동자들을 무장시키기를 거부했고, 기업주들이나 총을 들고 다니는 극우를 꺾을 공세를 진지하게 준비하고 조직하기를 거부했다. 스탈린이 계급의 적들과 맺은 동맹은 공산당 투사들이 용맹하게 이끌었던 계급투쟁과 완전히 상반된 길을 걷고 있었다.
앞서 영국인 사회주의자 하드캐슬의 인용문이 주장했듯이,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어떤 개혁을 쟁취하든 그것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대공황이 있었던 1930년대에는 특히 그랬다. 1937년에 노동자들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었는데 마티뇽 협정의 일환으로 도입된 새 조정 제도로 노조의 발이 묶였기 때문이다. 투쟁이 하강 국면에 접어들자 사장들은 주 40시간 노동을 공격할 자신감을 얻었다. 상품 가격이 치솟으면서 1938년 5월이 되면 [1936년 파업 물결로 얻었던] 임금 성과가 모두 사라졌다.
민중전선 정부는 꾸준히 우경화했다. 1937년 3월 블룸의 경찰들이, 파시스트 모임에 항의 시위를 벌이던 노동자들에게 발포해 6명을 죽였다. 1937년 6월 22일에 블룸은 총리가 된 지 겨우 1년 만에 물러났다. 우파가 통제하는 상원이 경제 위기 대응 법안을 통과시키기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노동계급이 지배계급의 반격에 직면해 수세적인 데다 갈수록 방향 감각을 잃고 있던 상황에서 블룸의 퇴진 소식에 덤덤한 반응을 보인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노동계급을 다시금 일으켜 세우고 이끌어 우파를 완전히 박살내도록 할 지도력이 어디서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계급의 지도자들은 정확히 그 반대를 추구했다. 사장들이 무엇을 요구하든 이를 수용하고, 노동계급을 향한 공격에 맞서 아무것도 방어해 주지 않는 정부를 지키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정부와 기업주들이 갈수록 거세게 공격에 나섰다.
블룸을 교체한 급진당의 카미유 쇼탕은, 훗날 페탱이 나치와 손잡고 정권을 수립하도록 권력을 넘겨 주자고 제안하는 인물이다. 민중전선은 급진당 주도 정부(블룸이 1938년 한 달 동안 총리로 잠시 복귀하기도 한다)에 남아 있었지만 1938년 6월 최종 해산한다.
39 이 말은 1937년 하반기에서 1938년까지 벌어진 일들로 끔찍하게 입증됐다. 영웅적 투쟁이 일부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주도권을 되찾지 못했고 승리보다 패배를 더 많이 겪었다. 그 와중에 노동자들의 지도자들은 질서를 촉구했다.
1934년에 트로츠키는 이렇게 예측한 바 있다. “만약 [공산당과 사회당 사이의 — 블러드워쓰] 공동전선이 급진당과의 부적절한 연애에 돌입한다면 … 열정이 없고 무관심한 상태(이는 재앙의 전조이다)가 전개될 것이다.”1937년 12월 파리 인근 굿리치 타이어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점거 투쟁에 들어갔다. 당시 투쟁 중 유일하게 전해지는 사진은 파시스트들이 전투적 노동계급과 좌파의 “위협”에 반대한다며 자신들 포스터에 사용한 사진이다. 12월 23일 내무장관은 이 파업을 본보기 삼으려는 의도로 예비군 600명을 보내 공장을 포위했다. 요란한 경고 소리를 듣고 인근 노동자들이 움직였고, 23일이 끝날 무렵 3만 명이 굿리치를 에워쌌다. 내무장관은 자신의 사냥개들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마스에는 공무원들이 민중전선 정부에 맞서 역사적 파업을 벌였다. 그 결과, 12월 29일 파리에는 교통수단이나 기름, 전기가 끊겼다. 1938년 3, 4월에 파리의 야금 공장에서 노동자 15만 명이 파업을 벌였는데 1936년 6월 이후 가장 큰 파업이었다.
공산당과 사회당은 자신들의 노동계급 지지자들을 방어하고 점증하는 극우의 공격에 노동자들의 투지로 맞서도록 뛰어들기는커녕, 노동자들에게 물러서지 않으면 정부가 무너진다고 경고하는 쪽을 택했다. 이후 정부가 실제로 무너지자 공산당은 파업 운동이 고조되는 것을 막지 않았는데 자신들의 영향력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공산당 소속 노조 관료들은 일단 파업의 통제권을 접수한 후에는 재빠르게 종료시켰고, 전투적 조합원들이 그에 광범위하게 항의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에 역겨움을 느껴 이후 몇 달 사이에 금속노조를 떠난 조합원이 8만 명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투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38년 11월, 주 40시간 노동을 지키기 위한 파업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CGT는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11월 30일 총파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잭슨은 이 총파업이 [민중전선의] “조종弔鐘”이었다고 말한다. 광원들이 호응했고 일부 공장에서 점거에 들어갔지만 교통수단 등 핵심 산업들이 파업에 참가하지 않는 가운데 총파업은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르노 공장에서는 경찰과의 유혈 충돌이 벌어져 경찰 46명과 노동자 24명이 크게 다쳤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공장 점거를 풀고 나올 때 경찰의 명령에 따라 일렬로 걸으면서 파시스트 경례를 하고 “경찰 만세”를 외쳐야만 했다!
40 다노와 지블랭은 〈생디카트〉에 실린 성명을 지지하며 거기에는 “핵심적 교훈”이 담겨 있다고 썼다. 30일 총파업은 정부를 향한 공격이었고 “그런 만큼 봉기의 성격을 띠는 것이 불가피했다. … 그러나 봉기에서 법을 지키며 행동하겠다고 사전에 선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CGT가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41
이런 파괴적 패배를 직접적으로 낳은 것은 공산당과 CGT의 소심한 태도였다. 노조 측은 총파업이 하루 이상은 결코 진행되지 않을 것이고, 점거도 없을 것이고, 시위도 집회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다고 해서 지배계급이 자신의 세력을 동원하고, 공무원과 철도원들을 위협하고, 기업주들의 저항을 강화시키고, 대중 라디오를 이용해 선전 행위에 나서는 것을 자제하지는 않았다. 다노와 지블랭은 이렇게 논평한다. “2년간의 굴종으로 취약해진 노동자 운동은 그런 동원에 맞서지 못했다. … 30일 아침 10시가 되면 정부는 ‘철도가 정상 운행되고 있다’고 발표할 수 있었다.” 다른 부문들도 곧 그 뒤를 따랐다.이런 굴욕적인 패배 후 불어닥친 직장 폐쇄와 탄압의 여파로 수십만 명이 해고됐고 전투적 노동자들이 표적이 됐다. CGT 조합원 수는 급락했고 1939년 하반기가 되면 유급휴가를 제외한 모든 성과가 사라졌다.
평가
당시 노동계급이 더한층 투쟁에 나서고 더 많은 것을 쟁취했을 것이라고 입증할 수 있나?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투쟁을 전진시킬 만한 역량을 가진 조직들 중 어느 곳도 그런 대안적 방향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역사의 다른 유명한 에피소드를 살펴보자. 만약 1917년 2월 직후 러시아에서 레닌과 볼셰비키가 임시정부 앞에서 굽실거렸다면, ‘당시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이 더한층의 급진화를 바라지 않았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주장이 오늘날 정설로 널리 인정되고 있을 것이다.
지도하려는 단체와 그 지도부는 왜 이것이 아니라 저것을 해야 하는지 노동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투쟁을 벌여야 한다. 레닌과 더 광범한 볼셰비키당의 단호한 지도력, 그리고 고통을 감수하며 기층에서 끈질기게 작업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전투성의 불씨가 보일 때마다 이를 강화하고 또 그것을 기반으로 더 나아갈 수 있었다. 볼셰비키가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갈수록 많은 이들이 임시정부의 행태를 보며 수긍하게 됐다. 이처럼 객관적 조건과 단호한 지도력이 결합됐기에 10월 혁명이 가능했다.
42 비극적이게도 트로츠키가 옳은 것으로 입증됐다.
1936년 프랑스에서 사활적으로 필요했던 것은 ‘노동계급은 중간계급에 대한 지도력을 쟁취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당이었다. 또한 그런 일은 오직 혁명이라는 대안을 제기하는 것, 즉 파시스트들에게 돈을 대고 그들을 고무하는 자들의 권력을 빼앗아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정당이 필요했다. 파시스트 쪽으로 기울던 프티부르주아 대중을 설득할 유일한 방법은 위기의 효과에 맞서 행동에 나서는 것, 모든 이들을 이 도탄에 빠뜨린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분명하게 들춰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중간계급을 파시스트에게서 떼어 내려면 노동자들이 혁명적 대안을 제시해야 했다. 온건한 태도로는 중간계급을 끌어들이는 데에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사회가 무너질 때 노동계급도 무력하다고 보이도록 만들어 중간계급이 더 멀어지도록 만들었다. 1936년 7월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다. “만약 ‘중간계급’(민중전선은 자신이 이들의 소명으로 태어났다고 강조한다)이 왼쪽에서 혁명적 대담함을 찾지 못한다면, 그들은 오른쪽에서 찾으려 할 것이다.”43 순카라와 다른 개혁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직시할 수 없는데,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민중전선과 똑같은 계급협조주의이기 때문이다.
더 급진적으로 나아가기에는 지지가 부족했다는 주장은 순전한 이데올로기이자, 현실의 시험대에 실패한 개혁주의와 스탈린주의 지도자들에게 변명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권력에 도전했을 것이라고 우리가 100퍼센트 입증할 수는 없는 이유는 아무도 그 대안을 시험대에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한 줌에 불과한 소수의 트로츠키주의자만이 예외였다). 다노와 지블랭이 결론짓듯, 비록 만만찮은 투쟁을 벌였으면 사회주의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우리가 보장할 방법은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있다. 그런 투쟁이 없었던 것은 대중 단체들의 지도자들이 의식적으로 그것에 반대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전투적 노동자들 사이에 거대한 기반을 가졌던 사회주의자들도 중간계급에 뿌리를 둔 부르주아 정당에 이끌려 자신의 기반이 파괴당하는 패배를 스스로 이끌었는데, [오늘날 미국처럼] 사회주의자들이 전투적 노동자들은커녕 어떠한 사회적 기반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대부르주아지 정당의 대표로 선출되면 그 결과는 얼마나 더 필연적이겠는가? 집권 시 세계 주요 제국주의 국가를 이끌게 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잭슨은 그의 상세한 연구를 통해, 1938년 중엽이 되면 노동자들이 개혁주의 정당의 배신과 수동성에서 교훈을 얻으면서, 트로츠키를 지지하는 소규모 그룹이 성장하기 시작했다고 인상적 논평을 남겼다. 그러나 그들은 추세를 뒤집기에는 너무 작았다. 잭슨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936년 6월 노동 쟁의가 낳을 수 있었던 유일한 결과가 마티뇽 협정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파업 참가자들이 자신의 목적을 언제나 명확하게 인식한 것은 아닐 수 있지만, 그들의 운동이 갖고 있던 사회 질서를 위협할 잠재력은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이유로 시인하는 정도보다) 훨씬 더 컸다.
결론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길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프랑스 민중전선은 끔찍하지만 필수적인 교훈을 제공한다. 모든 혁명적 상황에서 노동자 대중과 억압받는 이들은 자력 해방을 위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큰 잠재력을 보여 준다. 그러나 주관적 요소가 객관적 요소에 부응해 발전하지 못하면 그런 상황은 반反혁명적 상황으로 바뀌게 된다. 민중전선의 정책은 노동자들의 에너지를 봉쇄했고 우파가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공산당은 스탈린의 지침 아래, 그리고 노동계급을 통제할 능력을 급진당에게 입증해 보이겠다는 열망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을 역사 무대에 언제든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행군 대열처럼 여겼다. 그 결과, 한때 혁명 직전 상황을 감내했던 노동자 대중 사이에서 피로감과 절망감이 자리잡았다. 1936년 6월 트로츠키는 당시 상황의 잠재력과 위험을 봤고 예언처럼 이렇게 썼다. “이제 투쟁은 가장 위대한 승리라는 결론으로 나아가든가, 그렇지 않으면 가장 무시무시한 패배로 귀결될 것이다.”
비극적이게도, 민중전선 이야기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복원과 힘들게 쟁취한 것들을 잃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는다. 파시즘을 막기는커녕 민중전선의 계급협조주의는 파시즘을 위한 길을 닦아 주었다. 급진당은 노동자 권력보다 파시즘을 선호했다. 민중전선 소속 의원들(사회당이 이끌던 정부에 참여했고 공산당의 지지를 받던 자들)은 1939년 9월 공산당 불법화를 표결했고, 이후 1940년 7월 페탱이 이끄는 파시스트 류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지지했다. 페탱 정권은 비시로 이전해 나치가 프랑스 대부분을 점령하도록 해 줬다.
10월 페탱이 히틀러와 악수를 나누는 장면을 담은 흑백 사진은 우리 모두의 뇌리에 각인돼야 한다. 그것이 민중전선 전략의 최종 성적표다. 오늘날 민중전선을 미화하는 얘기들은 재앙적 패배로 끝난 그 운동의 선두에 섰던 정당이나 지도자들의 책임을 제대로 논의하지 않고 있다. 다노와 지블랭의 다음 결론처럼 “지도자들은 승리자인 양 부각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 후 벌어진 일들에 책임을 져야 하고, 노동계급만이 성과를 쟁취한 기여자로서 영광을 누려야 마땅하다. 당시 성과를 거둔 조건과 교훈은 오늘날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47 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오늘날 사회를 더 낫게 바꿀 방법이라고 민중전선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물리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게 될 것이다.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거짓 희망이라는 달콤한 독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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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andra Bloodworth, ‘From revolutionary possibility to fascist defeat: The French Popular Front of 1936-38’, Marxist Left Review, No.19 Summer 2020.
↩
- Lenin 1917. ↩
- Hobsbawm 1997, p35. ↩
- Luxemburg 1906. ↩
- Hobsbawm 1997, p24. ↩
- Harman 1999. ↩
- Marx 1850. ↩
- Abidor 2016. ↩
- Schwartz and Sunkara 2017. ↩
- Post 2017. ↩
- Paul Mason, “Labour’s best tactic to beat Boris Johnson? A popular front”, The Guardian, 3 August 2019. ↩
- Stafford Cripps writing in Tribune, 10 April 1938. Harman 1965에서 재인용. ↩
- Post 2018. ↩
- Sunkara 2019. ↩
- 같은 책. ↩
- Trotsky 1979, p25. ↩
- Blanc 2019. ↩
- Jackson 1988, p93. ↩
- Danos and Gibelin 1986, pp88-98. ↩
- 같은 책. ↩
- Sunkara 2019. ↩
- Jackson 1988, pp85-86. ↩
- 이하 문단들에서 제시될 일반적 주장과 사실들의 출처는 (별도 언급이 없는 한) Jackson 1988, pp90-91. ↩
- Jackson 1988, pp92-94. ↩
- 같은 책, p92. ↩
- 같은 책, p93. ↩
- 같은 책, p97. ↩
- Trotsky 1979, pp142-144. ↩
- Hardcastle, 1936. ↩
- Luxemburg 1906. ↩
- Sunkara 2019. ↩
- Danos and Gibelin 1986, pp60-62. ↩
- 같은 책, p72. ↩
- Michael Seidman, “The Birth of the Weekend and the Revolts against Work: the workers of the Paris region during the Popular Front”, French Historical Studies, 12 (2), Autumn 1981. ↩
- Jackson 1988, p106. ↩
- 같은 책, p107. ↩
- 같은 책, p107. ↩
- 같은 책, p108. ↩
- Danos and Gibelin 1986, p212. ↩
- Trotsky 1979, p59. ↩
- Danos and Gibelin 1986, p229. ↩
- 같은 책, p230. ↩
- Trotsky 1979, p171. ↩
- Danos and Gibelin 1986, p232. ↩
- Jackson 1988, p104. ↩
- Trotsky 1979, pp163-164. ↩
- Danos and Gibelin 1986, p236. ↩
- Trotsky 1979, p43. ↩
참고 문헌
Abidor, Mitchell 2016, “Assessing Léon Blum”, Jacobin, 26 September.
Blanc, Eric 2019, “How Bernie helped spark the teachers’ revolt”, Jacobin, 30 October.
Danos, Jacques and Marcel Gibelin 1986, June ’36: Class Struggle and the Popular Front in France, Bookmarks.
Hardcastle, Edgar 1936, “The United Front in France”, The Socialist Standard, June.
Harman, Chris 1965, “Tribune of the People 1”, International Socialism (first series), 21, Summer.
Harman, Chris 1999, “The 20th century: an age of extremes or an age of possibilities?”, International Socialism, 85, Autumn.
Hobsbawm, Eric 1997, On History, The New Press. [국역: 《역사론》, 민음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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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 Karl 1850, “Address of the Central Committee to the Communist League”.
Post, Charlie 2017, “The Popular Front didn’t work”, Jacobin, 17 September.
Post, Charlie 2018, “The New Deal and the Popular Front. Models for contemporary socialists?”, International Socialist Review, 108, 1 March.
Schwartz, Joseph M. and Bhaskar Sunkara 2017, “What Should Socialists Do?”, Jacobin, 1 August.
Sunkara, Bhaskar 2019, “The exercise of Power”, Jacobin, 25 February.
Trotsky, Leon 1979 [1936], On France, Monad Press. [국역: 《트로츠키의 프랑스 인민전선 비판》, 풀무질,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