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생과 자본주의 *
저출생이 한국에서 정치적 쟁점이 된 지 오래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 저출생 대책을 경쟁적으로 내놓았다. 지난해 6월에는 윤석열이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문제는 바로 초저출생으로 인한 인구 위기”라며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기도 했다. 주류 언론은 저출생에 대한 종말론적 담론을 끊임없이 내보낸다.
1 이 현재 인구 수준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여성 1명당 2.1명에 못 미치고, 선진국 전반에서 출산율은 더욱 낮아지고 있다. 유럽에서 출산율이 가장 높은 나라인 프랑스와 북유럽에서도 출산율이 계속 하락하고 있다. 미국은 2023년 합계출산율(1.62)이 공식 집계를 시작한 1930년대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저출생은 세계적 현상이다. 대다수 나라의 합계출산율많은 나라에서 우파는 출산율 저하에 히스테리를 부리며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공격을 하고 있다.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등을 비난하고, ‘전통적 가족 가치’ 회복을 외치며 임신중단권,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의 권리, 성교육 등을 공격하고 있다. 북미와 유럽에서 우파는 출산율 하락을 인종 차별을 부추기는 데에도 이용하고 있다. 백인의 출산율이 낮아지고 유색인종의 이민과 출산율이 급증해 미국과 유럽에서 백인이 밀려나고 있다는 극우의 ‘대교체론’(Great Replacement Theory)이 주류 정치의 담론이 되고, 정책에도 반영되고 있다. 특히, 헝가리 극우 총리 오르반은 이민에 반대하며 순혈주의적 민족 이데올로기에 기반해 헝가리 여성의 출산을 독려하는 정책을 펼쳐 왔다. 이는 1930년대 독일 나치의 선전과 정책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많은 나라의 지배계급은 보통 세 가지 이유로 저출생 현상에 상당히 우려한다. 첫째, 장차 노동인구가 부족해질 것을 걱정한다. 임금노동 착취에서 이윤이 나오므로, 미래의 노동자가 충분히 공급되는 것은 지배계급에게 매우 중요하다. 둘째, 선진국에서는 고령인구 증가로 연금 등 복지비 지출이 증가할 것에 대한 우려도 크다. 셋째, 병역 인력 부족도 걱정한다. 자본주의 위기 심화로 국가 간 지정학적 경쟁과 갈등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이런 우려는 더 커지고 있다.
4 저출생으로 인구 고령화가 심화돼 사회복지시스템이 붕괴한다며 연금 등 복지를 공격하고, 돌봄 시장화를 더 촉진하는 정책이 선진국 전반에서 펼쳐지고 있다. 우파 정부만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정부도 이런 정책을 펼쳤다. 북유럽에서도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쳐 불평등이 심화되고 극우가 부상했다.
주류 언론의 저출생·고령화 담론은 신자유주의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저출생·고령화로 연금 등 복지 시스템이 위기에 처했다는 주장이 주류 언론과 학계 등지에 파다하지만, 출산율 하락이 복지 삭감으로 이어져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저출생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 위기와 그 부담을 노동계급에게 전가하는 지배계급의 긴축 정책이 복지 시스템의 위기를 낳고 있다.
저출생은 지난 수십 년간 여성의 삶과 가족의 모습, 그리고 대중의 의식이 크게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이 글은 저출생 현상에 담긴 여성의 삶과 가족의 변화를 살펴보고, 지배계급의 저출생 대웅에 담긴 모순을 밝히며 노동계급에게 필요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변화하는 여성의 삶
저출생은 오늘날 세계 대다수 지역에서 나타나고, 특히 산업 발전 수준이 높은 나라들은 거의 모두 합계출산율이 2.1 이하이다. 이는 여러 물질적·문화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삶이 크게 변화한 것을 나타낸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적으로 여성의 평균 출산 연령이 올라가고 여성 1명당 평균 출생아 수가 줄었다. OECD에서 여성의 첫 출산 연령은 2022년 평균 31세이고, 그중 한국은 32세로 가장 높다. 한국 여성의 첫 출산 평균 연령은 1993년 26.23세에서 2024년 33.6세로 높아졌고, 출산한 여성의 셋 중 하나가 35세가 넘어 아이를 낳는다. 비혼과 무자녀 여성도 세계적으로 늘었다. 한국은 20~40대 여성의 비혼과 무자녀 비율이 눈에 띄게 늘었고, 결혼 뒤에도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이 증가했다. 1960년 이전 출생한 기혼 여성의 무자녀율은 약 2.5퍼센트에 그쳤지만, 1970년 이후 출생한 여성의 경우 최근 출생자일수록 무자녀율이 크게 늘어났다. 1980년에 출생한 기혼 여성의 경우 2015년 기준 12.9퍼센트가 무자녀였다. 출산율 하락, 결혼 감소, 이혼 증가, 여성 취업 증가 등으로, 지난 수십 년간 가족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다. 가족의 규모는 더 작아지고, 전형적 핵가족 형태(부모와 자녀 둘로 이뤄진)는 약화돼 왔다. 북미와 유럽에서 가구 규모는 평균 3명이 조금 넘고, 미국에서는 두 부모 가구가 전체 가구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2022년 기준 부부와 미혼자녀로 이뤄진 가족은 전체 가족의 42.6퍼센트에 그쳤다.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 증가로 남성 혼자 생계비를 버는 가족 형태가 줄어들고 맞벌이가 증가해 왔다. 여성의 노동력 참여 비율이 높은 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커플이 맞벌이다. 한국은 여성 고용률이 OECD에서 하위권이지만 전 연령대에서 꾸준히 증가하며 2023년 맞벌이 비중이 역대 최고(전체 부부의 48.2퍼센트)를 기록했다. 특히 30대 여성 고용이 급증하면서 자녀가 있는 부부도 절반 이상이 맞벌이를 한다.
1960년대 이후 많은 나라에서 성별 규범이 약화되고 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가 확산됐는데, 서구에서는 비혼 출산도 크게 늘었다. 한국 등 동아시아에서는 비혼 출산 비중이 매우 낮지만, 한국에서도 비혼이 증가하는 가운데 비혼 출산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늘고 있다.
7 하지만 지배계급은 핵가족 형태를 표준으로 제시하고, 우파는 핵가족과 남성 생계부양자 가족을 이상적 형태로 취급하며 보수적인 ‘가족 가치’ 정치를 펼친다. 이는 약화되는 성별 규범을 다시 강화하며 여성과 노동계급의 삶을 통제하려는 시도이다.
남녀와 두 자녀로 이뤄진 가족이 ‘정상 가족’이고, 남성 생계부양자 가족이 표준이라는 관념은 갈수록 현실과 괴리되고 있다.출산율 하락에는 두 측면이 있다. 한편에서는 생활수준 향상과 아동 사망률 감소, 여성의 경제적 독립성과 자의식 변화에 따라 여성이 아이를 더 적게 낳게 된 것이다. 이는 긍정적 측면을 나타낸다. 다른 한편, 아이를 원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향대로 아이를 낳기 힘든 사회적 조건도 반영한다. UN 보고서에 따르면, 모든 나라에서 출산 의향과 실제 사이에 격차가 있다. 개인과 부부가 아이를 원해도 출산을 미루거나 원하는 수만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유로는 물가 인상과 고용 불안정에 따른 경제적 불확실성, 복지와 가족 지원 부족, 관념적 요인 등이 있다.
저출생 자체를 사회악으로 취급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 저출생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출산을 원하는 사람들을 돕는 정책이 필요하다. 여성이 아이를 낳을지 말지, 언제, 몇 명을 낳을지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이 돼야 한다. 동시에,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자녀를 낳아 기를 수 있도록 사회적 지원이 충분히 제공돼야 한다.
각국 정부는 저출생을 인구 감소와 인구 고령화 가속화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출산율이 낮은 수준으로 장기간 지속되면 인구 고령화가 가속될 수 있지만, 인구 고령화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생활수준과 보건의 향상으로 사람들이 더 오래 살게 된 것은 진보이다. 고령 인구 비중 증가는 연금, 보건과 장기요양 시스템을 보강할 필요가 있음을 나타내는데, 진정한 문제는 자본주의 국가가 그 비용을 경제에 주는 부담으로만 여기는 것이다. 즉, 고령화가 아니라 이윤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가 문제인 것이다
저출생의 주요 원인 자본주의에서 출산율 하락은 여러 시기에 걸쳐 일어났는데, 1900년대 초반에 출산율이 눈에 띄게 감소한 후 1930년대와 1960년대에 급격히 하락했다. 사회학자 예란 테르보른에 따르면, 전체 출산율은 1880년대와 1930년대 사이에 유럽과 북미에서,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전 세계적으로 두 차례에 걸쳐 하락했으며, 그 후 30년 동안 30~40퍼센트 감소했다.
출산율이 ‘인구 대체율’ 이하로 하락한 시기는 지역마다, 나라마다 다르다. 유럽과 북미에서는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베이비 붐이 일었다가 1960년대 이후 출산율이 하락하기 시작해 1970년대 중반 이후 2.1 이하로 하락했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산업화 이후 출산율이 급감했다. 1970년 4.5이던 합계출산율은 1983년에는 2.06을 기록해 인구대체 수준 아래로 낮아졌다.
이 시기 출산율 하락은 대규모 여성 고용, 여성과 아동의 교육기간 확대, 출산통제 기술 발전 등이 주요 원인이다. ‘인구 대체 수준’ 이하의 저출생은 이들 요인이 상호작용하며 생겨난 현상인 것이다. 유럽과 북미에서는 2차대전 후 장기 호황기에 서비스업이 팽창하면서 여성 고용이 크게 늘었는데, 결혼과 출산 뒤에도 일하는 여성이 대폭 증가했다. 또, OECD 모든 나라에서 여성의 교육 기간이 늘고, 고등교육을 받는 여성도 많아졌다. 먹는 피임약 개발 등 믿을 만한 피임 방법이 확산하면서 여성의 출산 능력 통제 수준이 전례 없이 높아진 것도 중요했다. 아동사망률 감소와 아동의 교육기간이 늘어난 것도 출산율 하락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물질적 조건 변화는 사람들의 의식을 바꾼다. 여성 고용 증가와 교육 수준 향상 등은 결혼과 성에 대한 대중의 의식을 바꾸며 전통적 성별 규범을 약화시켰다. 여성들이 자신의 인생에 거는 기대가 높아지면서 자신의 삶과 신체를 통제하려는 욕구가 커졌다. 평등과 해방을 위한 여성들과 노동계급의 투쟁도 대중의 의식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 산업이 발전한 나라들에서는 1970년대 이후 합계출산율이 대부분 2.1 이하로 하락했지만, 일부 나라는 1990년대 이후 합계출산율이 ‘초저출생’으로 불리는 1.4 이하로 더욱 낮아졌다. 초저출생을 기록한 나라는 1994년에 이탈리아, 스페인, 대만, 중국 등 8개 나라였는데, 2024년에는 24개 나라로 늘었다(7개 나라는 합계출산율이 1 이하로, 우크라이나를 제외하면 모두 동아시아 나라다). 정부와 언론이 보통 인용하는 합계출산율은 ‘기간 합계출산율’인데, 실제 출산율을 더 정확히 반영한다는 코호트 합계출산율은 기간 합계출산율보다 좀더 높다. 북유럽과 서유럽, 북미와 오세아니아의 영어권 국가들의 코호트 출산율은 여성 1인당 1.7~2.2명 수준이고, 남부, 중부 및 동유럽, 독일어권 국가, 동남아시아 및 동아시아의 32개 국가는 여성 1인당 1.6명 이하다.
한국은 2000년대 초 이후 ‘초저출생’을 기록해 왔는데, 2018년 이후에는 합계출산율이 여성 1명당 1명 이하로 떨어지며 현재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출산율 변화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고, 각국의 경제적·사회적 조건, 사회적 규범 등이 다르기에, 그 이유를 단순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12 양육과 가사 분담에서 성별 불평등이 더 크다. 또, 한국은 입시 경쟁이 치열해 사교육비가 매우 높고, 주거비도 높은 편이다. 이런 사회적 조건은 2000년대 들어 여성의 대학 진학률의 빠른 증가(현재 고등교육을 받는 여성 비율이 OECD 1위)와 노동시장 참여 증대(2010년대 이후 2030 여성 고용 대폭 증가)와 맞물려, 합계출산율 하락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국제 비교 연구에서 많이 거론되는 한국의 특징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OECD에서 출산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나라들과 비교할 때, 한국은 여성이 출산 시 경력 단절 위험이 높고여성 고용과 출산,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
자본주의의 핵심 역학은 이윤 축적 경쟁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발전은 장기적으로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를 증가시킨다. 그 수준은 나라별로 불균등하지만, 임금노동에 참여하는 여성의 수는 세계적으로 증가해 왔다.
2차대전 이후 유럽과 북미에서 여성 고용이 크게 늘었는데, 특히 기혼 여성 고용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기혼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은 20세기 초에는 낮았지만, 1930년대와 1940년대에 OECD 국가 대부분에서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고, 2차대전 이후 훨씬 더 빠르게 증가했다.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 뒤에도 계속 일하는 경향이 갈수록 우세해졌다. 후발 산업국가인 한국에서는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로 여성 고용이 대폭 늘어났고, 기혼 여성의 고용은 1980년대 이후 점점 증가해 왔다.
여성 고용이 크게 증가하며 출산율이 대체수준 이하로 하락하자 몇몇 나라에서는 노동력 재생산의 불안정성을 걱정해 출산 장려 정책을 펼쳤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출산 억제 정책을 펼쳤지만 출산율이 급감하자 2004년부터 출산 장려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여성 고용 증가가 언제나 출산율 하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성 고용이 증가하면서 출산율이 하락하는 경향은 2차대전 이후 1980년대까지는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최근 OECD 연구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에는 여성 고용률이 높은 나라일수록 출산율이 높은 경향을 보인다.
여성 고용이 증가하면서 대다수 OECD 나라들에서 유급 출산휴가 및 육아휴직, 유아교육과 돌봄 제도 등 가족 지원 제도가 발전했는데, 이로 인해 여성 고용률과 출산율의 관계가 바뀌었다는 분석이 많다.
유명한 복지국가 연구자 에스핑-앤더슨(Esping-Andersen)의 이론에 기반해, 부유한 나라에서는 성평등이 출산율 상승의 비결이라고 설명하는 페미니스트가 많다. 성평등 수준이 높은 북유럽에서는 여성 고용률이 높은데도 OECD에서 출산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라는 것이다. 북유럽의 복지국가, 특히 가족 정책이 핵심 비결로 꼽힌다.
북유럽, 특히 스웨덴의 복지국가는 여성 고용과 일하는 부모의 양육을 지원하는 정책이 가장 발전했다. 이런 제도는 스웨덴 국가가 전후 호황기에 노동력 부족에 대응하고 노동계급과 여성운동을 달래고자 도입한 것이다.
여러 연구를 보면, 북유럽의 가족 지원 정책은 1980년대 중반 출산율 상승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성평등 수준이 높을수록 출산율이 높아진다고 일반화하기는 힘들다. 출산율 변화를 복지 규모나 가족 정책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미국은 선진국 중 복지 수준이 낮은 나라이지만, 출산율은 스웨덴과 비슷하고, 최근엔 더 높다.
14 2000년대에 출산율이 다시 상승했지만, 2008~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에는 계속 하락해 2023년에 스웨덴 역사상 최저 수준(1.45)을 기록했다.
북유럽에서 1990년대 이후 출산율이 계속 안정된 것도 아니다. 스웨덴은 1990년대 초 경제 침체를 겪으면서 실업률이 급증해 특히 청년층과 저학력층이 큰 타격을 입었다. 실업률 급증 등 노동시장 불안정이 중요하게 작용해 출산율은 1992년 2.1에서 1997년 1.5로 하락했다.이처럼 경제 위기와 그에 따른 노동시장 불안정은 출산율 하락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OECD 연구에서도 지적했듯이, 2008~2009년 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 북유럽, 프랑스, 미국 등 선진국 전반에서 출산율이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다.
모순
일·생활 균형’ 제도를 도입하는 나라가 늘었다. 이런 제도의 발전은 국가가 여성 노동력 공급을 보장하고 노동력 재생산을 안정화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의 압력도 반영됐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급증하자 유럽에서는 1990년대 이후 일하는 부모를 지원한다며 ‘그러나 ‘일·생활 균형’ 정책의 수사와 현실은 상당히 다르다. 공공 보육시설과 유급 육아휴직은 사회적 필요의 수준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확산하면서 유럽의 부유한 나라들에서도 보육서비스 제공은 시장과 가족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자본가들은 유급 육아휴직 제공을 기피하기 일쑤다. 많은 여성이 직장과 양육을 병행하느라 녹초가 되고 있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일하고 함께 돌보는 사회’로 여겨지는 북유럽에서도 ‘일과 생활’의 ‘균형’이 아니라 ‘불균형’, ‘충돌’을 토로하는 여성 노동자가 많다.
자본주의에서 진전되는 성평등은 모순적이다. 계급사회에서 모든 여성은 평등하지 않고, 성평등 정책은 종종 신자유주의 정책과 결합되며 여성 간 불평등을 키울 수 있다. 최근 수십 년 사이에 모든 나라에서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계급 불평등과 여성 간 불평등이 커졌다. 스웨덴 등 북유럽도 경제 위기를 겪으며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초 이후 복지제도가 나빠졌다. 사회민주당과 우파가 함께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계급 불평등이 커지며 여성 간 불평등도 커졌다. 이제 스웨덴은 세계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 중 하나가 됐다.
복지국가의 규모와 형태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어떤 것이든 자본주의 가족제도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보완하는 데 그친다. 그리고 지난 수십 년간 가족의 형태가 변화하고, 여러 나라에서 동성결혼·비혼 출산 인정 등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가족제도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하는 핵심 구실은 변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 가족의 핵심 구실 자본 축적에 필수적인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을 판매할 수 없는 사람들(환자, 실업자, 노인 등)의 부양을 책임지는 것이다. 가족의 이런 구실은 지배계급에게 매우 유용하기에 지배계급은 계속 가족 이데올로기를 퍼트리며 가족제도를 보호하려 한다. 가족 이데올로기는 양육과 돌봄, 복지에 재정 투입을 최소화하고,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다르다는 생각을 고무하며 노동계급을 성별로 이간질하는 데 이용된다.
자본주의는 경쟁적 자본 축적이 지배하는 체제이므로, 이윤 추구가 우선시된다. 여성의 대규모 취업과 가족의 변화에 대응해 선진국에서는 노동력 재생산의 일부 측면을 사회화했지만, 이는 호황기 때조차 노동계급의 필요에 한참 못 미쳤다. 1960년대 이후 선진국에서 여성의 고용이 크게 증가하면서 국가의 양육 지원이 상당히 늘었지만, 여전히 개별 가정이나 커플이 양육을 주로 맡는다. 유럽과 북유럽의 복지제도도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심각한 경제 위기와 침체를 겪으며 약화됐다. 국가의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에 상당히 나빠졌고, 이로 인해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의 부담이 늘었다. 자본주의 위기와 국제 경쟁 격화 속에서 각 국가는 출산과 양육을 지원하는 데 대규모 투자를 하려 들지 않는다.
한국 국가는 2000년대 중반부터 저출생 대책을 내놨지만, 국가 지원의 규모는 매우 적었다. 보수 언론들은 15년간 출산율을 올리려고 280조 원이나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며 개탄하지만, ‘저출생 예산’의 규모는 과장돼 있다. 15 한국의 가족 관련 공공지출 규모는 다른 나라와 견줘 봐도 낮다. 보건복지부와 OECD 통계를 보면, 한국의 가족 관련 공공 지출은 2020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1.6퍼센트로 OECD 평균(2.1퍼센트)에 미치지 못했고, 스웨덴(3.4퍼센트)의 절반도 안 된다. 특히 아동수당, 육아휴직 급여 등 현금 지급 예산만 보면 한국은 GDP 대비 0.5퍼센트로 OECD 회원국 평균(1.1퍼센트)의 45퍼센트 수준이다.
윤석열 정부는 ‘인구 비상사태’ 운운하면서도 지원을 크게 늘리지 않았다. 오히려 경기 침체와 대규모 부자 감세로 줄어든 세수를 메우고자 긴축 정책을 펼쳤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면서도 저출산 예산의 ‘선택과 집중’, ‘효율’을 강조했다. 기업주들의 착취 강화를 돕고자 노동시간도 늘리려 해 왔다. 2022년 한국의 임금노동자 연간 노동시간이 OECD 5위이고, 평균보다 155시간, 프랑스보다는 500시간 가까이 많은데도 말이다. 노동시간 증가는 남녀 노동계급이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더 힘들게 만든다.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의 여가부 폐지에 반대하고 성평등 지지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보수적인 가족 정책을 유지해 왔다. 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진 ‘건강가정기본법’(혼인·혈연·입양 관계만 법적 가족으로 인정하며, 동거, 동성결혼 등을 배제한다)을 개정하라는 요구를 계속 무시해 왔다. 민주당은 국회 다수당이면서도 임신중단권 입법화를 계속 회피해 왔다.
민주당은 지난 총선 때 매년 28조 원이 투입되는 저출생 공약을 내놓았지만, 재원 마련 방안은 제시하지 않았다. 부유층 세금을 대폭 올리지 않는다면, 이런 공약은 공문구에 불과하다. 이번 대선에서 어떤 말잔치를 해도 마찬가지다. 민주당과 이재명은 국민의힘이 추진해 온 부자 감세 방안에 계속 타협하며 후퇴해 왔다.
이재명의 민주당이 다시 집권해도 대중의 개혁 염원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경제 침체와 지정학적 위기 격화로 군비 증강 압력이 커지는 상황이다. 이재명과 민주당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침해하려 들지 않기에, 말과 행동 사이의 모순은 커질 것이다. 또, 노동운동의 개혁주의 지도자들을 포섭해 노동계급의 투쟁을 억제하려 들 것이다.
16 노동운동의 역사적 경험은 투쟁적인 대중운동만이 지배계급에게서 실질적 양보를 얻어 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노동계급이 물가 폭등, 임금 억제 등으로 생계비 위기에 시달리고, 노동 개악이 예고되는 상황이다. 대중 투쟁이 없다면, 노동계급과 다수 여성의 조건도 개선되기 힘들다.
윤석열 정부가 등장한 것도 문재인 정부의 개혁 열망 배신에 대한 대중의 환멸 때문이었다. 민주당 집권기의 교훈은 민주당에 협력하는 방식으로는 서민층 여성과 노동계급의 조건을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주당과 동맹해 개혁을 얻어 내려는 개혁주의적 전략은 계급의식을 흐리고 아래로부터 대중 투쟁을 건설하는 데 방해가 된다.저출생과 이민
저출생이 지속되면서 많은 나라의 지배계급은 출산율 제고를 목표로 출산 장려 정책을 펼치고 있다. 또, 각국 지배계급은 생산인구 감소 대응책으로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증대, 자동화와 기술 혁신 등을 추진한다. 그러나 출산 장려 정책이 저출생 추세를 되돌릴 수 있을 만큼의 효과를 낸다는 증거는 없다. 인구학자들은 저출생이 지속되는 나라에서는 이민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면, 장차 노동력 부족과 인구 감소를 피할 수 없게 된다고 전망한다.
헝가리 오르반 정부는 강경한 이민 반대 입장을 편 극우 정부인데,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출산율이 급감하자 이민을 늘리는 대신 강력한 출산 장려 정책을 펼쳤다. 2015년에 우익 지식인, 정치인, 인구과학자들이 모여 세계 최초로 인구학 정상회담을 열고 매년 헝가리 국내총생산GDP의 약 4.6퍼센트에 달하는 예산(EU 국가 중 네 번째로 많은 액수)을 출산 장려 정책에 투입했다. 정부는 자녀를 많이 낳을수록 누진적 감세 혜택을 주고 보조금 지급을 늘리고, 국영 불임 클리닉도 운영한다.
이런 정책은 초기에는 효과를 봤으나 다시 출산율이 하락했다. 헝가리의 합계출산율은 2011년 1.23명으로 최저치를 기록한 뒤 2021년 1.6명까지 올랐다가, 2023년 1.5명으로 감소했다. 헝가리에서 2023년에 태어난 출생아 수는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많은 헝가리인이 EU의 다른 나라들로 이주해 인구 유출도 계속됐다.
이에 오르반 정부는 이민 반대 기조와 모순되는 정책도 펼치고 있다. 여전히 이민에 반대하는 우익 민족주의 이념을 펴고 있지만, 실제로는 노동력 부족에 직면해 조용히 이주 노동자들을 들여왔다.(주로 동유럽과 아시아 나라들에서 수용하며 가족 초청이 허용되지 않는 게스트 노동자 제도를 활용한다.)
이민 정책의 모순은 극우의 부상으로 이주민 대규모 추방이 추진되는 다른 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이주민 유입이 많은 나라에서 지배계급은 이민 정책을 놓고 흔히 분열된 태도를 보인다. 이민은 자본주의 경제에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기에, 우파의 반이민 정책은 지배계급 내에서도 논쟁을 낳는다. 특히, 대다수 선진국은 노동력 부족의 많은 부분을 이민 확대로 메워 왔는데, 미등록 이주민를 대거 추방하는 정책은 경제에 큰 타격을 준다.
17 트럼프가 미등록 이주민을 대거 추방하고 있는 미국은 이민에 대한 의존이 특히 높다. 2023년 민간 노동력의 18.6퍼센트가 해외 출생 노동자로 2006년 15.3퍼센트보다 더 늘었다. 2024년 12월에 발표한 미국 의회 보고서는 트럼프 정부가 100만 명을 매년 추방하면 연간 4.2~6.8퍼센트의 국내총생산GDP 위축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 미국 경제의 위축 규모(4.3퍼센트)와 비슷하다.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등 이민 수준이 높은 나라들은 청년 이주민들 덕분에 출생아 수가 증가해 저출생의 영향을 완화할 수 있었다.우파나 지배계급이 이주민 단속과 추방 정책을 펴는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주 규제는 이주 노동자의 임금을 낮은 수준으로 억제하고, 노동계급을 이간질하는 데 유용하다. 경기 침체기에 지배계급은 자본주의 실패의 책임을 이주민에게 전가하며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높아진 대중의 불만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는 데 쉽게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대규모 이주민 추방은 지배계급의 경제적 이득과 모순을 빚고, 대중의 저항도 낳는다. 이주민 추방과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운동이 여러 나라에서 성장하고 있다.
한국의 이주민 정책
한국 국가는 저출생 대응으로 여성과 이주민의 노동시장 유입을 늘려 노동인구를 확보하는 방안을 주요하게 추진해 왔다. 몇 년 전부터 인구 감소가 현실화하자 이민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배계급 내에서 커지고 있다. 단기에 출산율 높이기가 쉽지 않고, ‘초저출생’이 20년 넘게 이어졌기에 출산율이 2명으로 오른다고 해도 향후 대규모 인구 감소를 막을 수 없다는 전망에 기초한 것이다.
18 은 2022년 168만 8855명에서 2023년 188만 1921명으로 19만 3000여 명이 증가했다. 그 결과 2023년 합계출산율(0.72명)이 사상 최저를 찍었는데도 총인구가 늘었다. 2021년부터 감소하던 국내 총인구가 이주민 증가에 힘입어 3년 만에 증가한 것이다.
법무부 통계로, 한국의 장기체류 외국인저출생 장기화로 인구가 감소하자, 윤석열 정부는 이주 노동자 유입을 이전 정부보다 더 빨리 늘렸다. 고용허가제 할당량을 역대 최대 규모로 늘리고, 이주자 취업 허용 업종을 계속 추가하고, 계절근로 노동자(E-8) 체류기간 상한을 확대했다.
정부는 숙련 이주 노동자를 더 많이 확보하려고도 한다. 노동부는 2022년 말, 고용허가제에 숙련 이주노동자에게 10년 이상 계속 체류를 허용하는 특례(장기근속특례)를 신설하는 계획을 발표했다(임의자 의원이 고용허가제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그리고 법무부는 고용허가제 비자(E-9)에서 숙련기능인력 비자(E-7-4)로 전환할 수 있는 쿼터를 2022년 2000명에서 2023년 3만 5000명으로 늘렸다. 정주 비자인 E-7-4 비자는 가족 입국이 가능하고 단계적으로 영주권까지 취득할 수 있다.
이는 이주 노동자가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에 갈수록 더 중요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주민 유입은 지자체의 인구와 경제를 지탱하는 데서도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지자체의 요구로 법무부는 인구 감소 지역에 외국인 유입과 정착을 독려하는 ‘지역특화형 비자 사업’을 2023년부터 시행하고 있고, 지자체들은 외국인 관련 부서를 만들며 이주민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19 2024년 고용허가제 쿼터를 사상 최대로 늘리면서도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예산(71억 원)은 전액 삭감했다. 이주노동자 임금 체불이 늘어나 1000억 원대를 웃도는데, 44개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는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제4차외국인정책기본계획(2023~2027년)’에는 사회통합프로그램(한국어 교육, 문화 교육 등)을 점진적으로 유료화한다는 것도 있다.
그러나 한국 국가가 자본가들의 노동력 수요와 인구 증가를 위해 정책 변화를 꾀하고 있지만, 대다수 이주민의 삶을 개선하는 정책은 거의 없다. 심지어 얼마 되지도 않는 복지조차 줄이기도 했다. 2024년 4월 정부는 건강보험 외국인 직장가입자의 가족(배우자와 19세 미만 자녀는 제외)이 한국에 온 후 6개월간 피부양자 등록을 못 하게 해서 이주민 가족의 건강보험 적용을 축소했다.이주 노동자의 사업장 이동은 여전히 크게 제약된다. 고용허가제 개편안은 이주 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을 극도로 제약하는 방침을 고수하고, 장기근속특례에서도 고용허가제의 사업장 변경 횟수 제한은 그대로 유지되고 가족결합권도 보장하지 않는다. 숙련기능인력을 3만 5000명으로 확대하는 방안에는 비자 전환 이후 2년 동안 직장 이동이 금지된다. 2023년에 숙련기능인력 비자(E-7-4)로 전환된 수는 1만 2035명인데, 사업장 변경 제약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
국가는 이주 노동력 유입을 늘리면서도 통제를 강화해 왔다. 법무부는 41만 명에 이르는 미등록 이주민을 2027년까지 절반으로 줄이겠다며 단속을 강화했고, 2023년에는 고용허가제를 개악해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을 더욱 제한했다. 그해 9월 신규 입국자부터 어렵게 사업장 이동을 허가받아도 수도권, 충청권, 제주·전라권 등 일정 권역 내에서만 이동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난민의 정치 활동을 억제하려는 난민법 개악을 추진하고 있다.
20 외국인보호소에 무기한 구금을 가능하게 하는 출입국관리법의 조항이 2023년 3월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으나, 법무부는 2024년 10월에 헌재 결정의 취지를 무시하는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을 제출했고 최근 국회를 통과했다.
출입국 통제와 단속 강화로 ‘외국인보호소’에 감금되는 이주민의 수는 증가했다. 2022년 전국 외국인보호소에 갇힌 외국인은 2022년 1만 2102명, 2023년에는 3만 8636명으로 대폭 늘었고, 2024년에는 9월 말까지 3만 4735명이 갇혔다.저출생이 계속되고 고령인구 비중(2024년 말 65세 이상 인구가 20퍼센트를 넘어섰다)이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므로, 이주민 유입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한국 국가는 이주민 유입을 더 촉진할 방침이고, 여러 이유로 한국에 와서 살고 싶어 하는 이주민이 많다. 여러 국적의 이주 노동자들이 다양한 업종에서 더 많이 유입돼 일하고 거주하게 될 것이다.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들이 유학생 유치에 적극 나서면서 유학생도 더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노동조합과 좌파의 많은 수가 내국인 고용 보호를 우선시하며 이주민을 환영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참으로 문제다. 소수는 이주민을 배척하고, 이미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는 인정하라고 말하면서도 신규 유입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곳이 흔하다. 그러나 이주민 유입을 환영하지 않으면서 들어와 있는 이주 노동자의 권리 옹호에 적극적이기는 힘들다. 이주 노동자 유입에 반대하는 데에는 이주 노동자가 내국인 노동자의 일자리와 임금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데, 이런 생각은 이미 들어와 있는 이주노동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자리 감소나 임금 하락은 사용자들이 경제 상황이 나빠지자 투자를 줄이고 이윤을 지키고자 일자리와 임금을 공격한 결과이지, 이주노동자 증가 때문이 아니다. 해외 연구를 보면, 이주노동자가 내국인 고용과 임금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없거나 아주 미미하다는 연구가 많고, 국내에도 그런 연구들이 있다.
물론 개별 부문에서는 이주노동자같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가 노동시장에 유입되면, 일자리를 놓고 경쟁이 강화되고 임금 하락의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자동적인 것이 아니다.
이주노동자 배척과 유입 반대는 근시안적 요구다. 이주노동자의 유입을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엇보다 고용과 임금은 노동자들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저항하느냐에 가장 크게 좌우된다.
국가의 이주 통제를 지지하는 견해는 내국인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의 단결을 해쳐 모두의 조건 개선에 해롭다. 이주 통제는 노동자들이 한정된 자원을 두고 서로 경쟁해야 한다는 관념을 정당화한다. 지배계급은 평범한 사람들이 열악한 보건과 복지, 고용 불안, 저임금에 대한 분노를 이주민에게 돌리기를 바란다. 자본주의 체제의 실패를 외국인 노동자 탓으로 돌리게 하는 모든 이주 규제에 반대하며 이주 노동자를 환영하며 함께 단결해 싸워야 한다.
결론
지배계급은 출산율 수치에 집착할 뿐 경제적·사회적 위기로 노동계급 등 서민층 여성과 남성, 아이, 노인들의 삶이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은 외면한다. 노동력 재생산에 대한 투자는 크게 늘리지 않으면서도 노동력 재생산이 원활하기를 바란다. 자신들의 필요를 사회 전체의 필요로 내세우며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노동계급의 삶을 통제하려 든다.
출산율 높이기는 노동계급의 목표가 아니다. 출산 여부는 여성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한편, 육아를 사회가 전면 책임져야 한다. 양육과 돌봄을 지원하는 양질의 공적 서비스와 유급 출산휴가·육아휴직이 모두에게 제공되고,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노동조건을 크게 개선해 노동자들이 돌봄에 시간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저렴하고 괜찮은 공공임대주택도 대량 확충돼야 한다. 이런 정책들에 필요한 재원은 기업주와 부유층에 과세해 마련해야 한다.
이런 요구들을 성취하려면 아래로부터 대중 투쟁과 계급투쟁이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경기 침체와 군비 경쟁으로 복지 삭감 압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지배계급에게서 실질적 개혁을 성취하려면 노동계급이 거리와 작업장에서 자신의 힘을 보여 줘야 한다. 그리고 노동계급이 자신의 힘을 효과적으로 발휘하려면 계급적 단결이 중요하다. 여성 차별과 이주민 차별에 반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저출생·고령화로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이주민의 경제적 중요성은 더 커졌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위기와 국가 간 경쟁 심화로 세계적으로 이주민 통제가 강화돼 왔다. 이주민은 이주한 나라의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지만, 경제 위기와 극우의 부상 속에서 열악한 조건을 강요받고 단속과 추방, 인종 차별 공격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이주민 추방과 국경 통제 강화는 인종 차별을 부추겨 극우의 성장을 돕고 노동계급을 이간질해 계급적 힘을 약화시킨다. 좌파는 이주민 유입 억제가 아니라 이주민을 환영하며 인종 차별에 맞서야 한다.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제주의에 입각해 자본주의 국가의 이주 규제에 모두 반대하며 이주민 차별과 인종 차별에 저항해야 한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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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초안을 읽고 의견을 준 성지현, 임준형, 전주현, 최미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오류가 있다면, 그 책임은 당연히 필자에게 있다.
↩
- 여성 1명이 15~49살에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 합계출산율은 언론 보도와 국가 정책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지표이지만, 여성의 실제 생애 출산율과는 차이가 있다. 여성이 평생 실제로 낳는 평균 출생아 수는 이보다 좀더 높다. ↩
- Orr, 2024. ↩
- 냉전 해체 뒤 유럽의 대다수 나라들은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했으나,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병합 뒤 안보 위기가 고조되자 우크라이나(2014), 리투아니아(2015), 스웨덴(2018), 라트비아(2023)가 징병제를 재도입했다. 최근 프랑스와 독일 등도 징병제 재도입을 논의했다. 유럽에서 출산율이 가장 높은 프랑스에서도 합계출산율이 2010년 이후 하락 추세를 보이며 2023년 2차대전 이후 최저(1.64명)를 기록하자, 지난해 초 대통령 마크롱은 “인구학적 재무장”을 강조하며 출산 장려 정책을 발표했다. 이는 지정학적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프랑스의 출산 장려 정책은 역사적으로 지정학적 경쟁, 특히 독일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는 지배계급의 노력에서 비롯했다. ↩
- ‘저출생·고령화’ 담론에 대한 자세한 비판은 정진희, 2020을 참고하라. ↩
- 최선영 외 2023, p.32. ↩
- 통계청. ↩
- 정상 가족 개념에 대한 자세한 비판은 성지현, 2024, ‘윤석열 정부의 ‘정상 가족’ 개념 고수 ─ 그 이유와 의미’를 참고하라. ↩
- United Nations 2025, p.26. ↩
- Therborn 2004. ↩
- United Nations 2025. ↩
- Wilkins, 2019. ↩
- OECD에서 대졸 이상 여성의 평균 취업률이 83퍼센트인데, 한국은 69퍼센트이며 고학력 여성도 출산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출산과 양육으로 30~40대 여성의 고용률이 크게 감소하는 경향은 선진국 중 한국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
- Fluchtmann et al. 2023. ↩
- Lise Ellingsæter, Anne and Leira, Arnlaug (eds) 2006. ↩
- ‘저출생 예산’에는 육아에 직접 지원되는 예산만이 아니라 간접 지원 예산도 포함된다. 저출생 예산의 다수는 청년층과 신혼부부의 주거를 지원하는 대출 지원 예산이다. 게다가 대출 원금 전액도 저출생 예산에 포함되는 등 저출생 예산 규모는 크게 부풀려졌다. ↩
- 최근 진보당 등이 민주당과 동맹해 결성하려는 민중전선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최일붕, ‘윤석열 파면 그 후: 보이지 않는 사회 대개혁 전망’, 〈노동자 연대〉 542호를 읽어보라. ↩
- United Nations 2025. ↩
- 91일 이상 체류할 목적으로 ‘외국인 등록’이나 ‘거소 신고’를 한 외국인과 외국 국적 동포를 합친 수치(‘2023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연보’) ↩
- 임준형 2024a. ↩
- 이재호 2024. ↩
- 임준형 2024b. ↩
참고 문헌
성지현, 2024, ‘윤석열 정부의 ‘정상 가족’ 개념 고수 ─ 그 이유와 의미’, <노동자 연대> 436호.
이재호 2024, ‘위헌 결정에도 외국인보호소 구금 3배 증가’, 《한겨레21》 1542호.
임준형 2024a, ‘이주민 가족 건강보험 적용 축소: 이주민 유입·정주 늘리며 책임은 회피하는 윤석열 정부’, <노동자 연대> 504호.
임준형 2024b, ‘이주노동자 “신규 유입·불법고용 반대” 요구의 부적절함에 대하여’, <노동자 연대> 526호.
정진희, 2020. ‘‘저출산·고령화’ 담론 비판: 출산율 감소는 경제적·사회적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노동자 연대> 351호.
최선영 외, 《여성 고용과 출산 - 최근 연구동향과 향후 과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Fluchtmann, J, van Veen, V and Adema, W 2023, “Fertility, employment and family policy: A cross-country panel analysis”, OECD Social, Employment and Migration Working Papers, No. 299, OECD Publishing, Paris.
Lise Ellingsæter, Anne and Leira, Arnlaug (eds) 2006. Politicising parenthood in Scandinavia -Gender relations in welfare states, The Polic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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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r, Judith 2024. “Great Replacement theory: from the fringes to the mainstream”, International Socialism 182 (Spring 2024).
Bates, Sarah 2024. “Don’t buy the right’s panic about a birth rate crisis”, Socialist Worker (12 October).
Therborn, Göran 2004, Between Sex and Power: Family in the World 1900–2000, London: Routledge.
United Nations 2025, World Fertility Report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