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를 부른 미국 공산당의 민중전선 전략 *
이 글은, 미국 사회주의자 찰리 포스트가 미국 민주사회당(DSA)이 급성장하던 2017년에 DSA 전국정치위원 조셉 슈워츠와 미국의 좌파 개혁주의 언론 《자코뱅》 편집자 바스카 순카라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쓴 글이다. 당시 슈워츠와 순카라는 공산당의 민중전선 전략이 미국 좌파가 받아들여야 할 모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포스트는 미국 공산당이 1930년대 말 바로 그런 내용의 민중전선 전략을 실천했다가 노동운동을 약화시키고 좌파에게도 재앙적 타격을 줬다고 지적한다.
다만, 포스트도 슈워츠·순카라와 같이 혁명적 정당보다 범좌파정당 건설을 추구한다는 약점이 있다. 범좌파정당도 계급투쟁이 첨예해지고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쟁점이 핵심 문제로 떠오를 때 노동운동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이 글은 민중전선 전략이 낳는 재앙적 실패를 미국 노동운동의 경험으로 잘 보여 주고 있다.
미국에서 새로운 좌파가 부상하고 있다. 당원 수가 3만 명에 이른 미국 민주사회당DSA의 급성장은 미국에서 사회주의 정치와 조직이 부활했음을 보여 줬다.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지금은 여러 경향이 함께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정치 조직을 건설하여, 그런 조직으로 사회주의를 대중화하고 새로 급진화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정치 투사로 훈련시킬 기회다. 지난 몇 달 간 DSA의 급성장은 40년 만에 처음으로 대중적 사회주의 조직이 등장할 가능성이 실질적임을 보여 줬다. 이런 부흥기에는 새로운 전략 논쟁이 필요하다.
최근 DSA의 지도적 당원들인 조셉 M 슈워츠와 바스카 순카라는 미국에서 다시금 사회주의 운동을 대중화할 전략을 제시했다. 사회주의자라면 그들의 비전 중 많은 부분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중 하나는 사회주의자들이 자본의 권력과 부에 도전하며 즉각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예컨대 전국민 단일건강보험 도입을 위한) “투쟁의 최전선에” 있어야 하고, 미국에서 사회주의를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세력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슈워츠와 순카라가 지적하듯
사회주의자들은 가장 유능한 투쟁 조직자여야 할 뿐 아니라, 개별 위기의 뿌리가 체제에 있음을 밝히는 분석과 자본주의의 논리에 맞서는 개혁 과제를 제시해야 한다.
또,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구조적 위치와 사회적 힘 때문에 “변화를 쟁취할 핵심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슈워츠와 순카라는 지적한다. 그리고 슈워츠와 순카라는 새로 부활한 사회주의 좌파가 시장 개인주의에 맞서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이고, 사회주의가 관료적 지배와 동일시되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마지막으로, 슈워츠와 순카라는 사회주의자들이 “공식 개혁주의” 세력들, 즉 민주당의 특정 진보 인사들, 노동조합 관료들, NGO 인사들과는 거리를 유지한 채 대중 투쟁에 갈수록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애써야 한다고 촉구한다.
슈워츠와 순카라는 미국 공산당CP이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사이에 취한 민중전선 전략에서 그런 전략적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다. 그들은 이 전략 덕에 당시 공산당이 “사회주의의 대변자인 동시에 최상의 조직자”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슈워츠와 순카라는 이렇게 쓴다.
공산당이 민중전선 전략을 폈던 시기는 미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대중적이었던 마지막 시기였다. 이는 부분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진정한 다인종 노동계급 운동을 건설하려 애쓰면서 미국 정치 문화 내에서 민주주의 투쟁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수행한 덕이었다.
그러나 슈워츠와 순카라는 이 시기의 “어두운 면”도 있었다고 인정하며, 다음과 같은 점을 환기한다.
공산당 투사들은 최대한 광범한 미국인의 호감을 사려고 사회주의자 정체성을 숨겼다.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밝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그들은 권위주의적인 소련을 자신들의 대안으로 제시했다. 소련의 독소불가침조약 노선을 추종하고, 그 후에는 제2차세계대전 기간에 무파업 서약을 하라는 소련의 노선을 주총함으로써 미국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가장 투쟁적인 부위를 저버렸다. 그렇게 공산당은 자유주의 세력들에게서 미국 노동계급 운동의 헤게모니를 쟁취해 낼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찼다.
민중전선 전략에 대한 슈워츠와 순카라의 모순된 진술은 그 전략 자체의 근본적 문제에서 비롯한다. 한편으로 공산당은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동안 대중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듯 보였다. 당원 수가 거의 10만 명에 이르렀고, 주요 산별 노조와 흑인 평등권 운동, 그 밖의 여러 조직을 지도했으며 대중 문화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했다. 하지만 동시에, 뉴딜 자유주의 세력, 산별노조협의회CIO 지도부와의 동맹 관계 때문에 공산당은 최상의 노동자 투사들과는 괴리됐으며, 훗날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에서 급진파가 축출될 조건을 마련했다.
사실, 역사를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공산당이 사회 운동과 미국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1936년 말 민중전선 전략을 채택하기 전이었다. 공산당이 민주당, CIO, 흑인 운동 내 중간계급 지도자들과 맺은 동맹은 오히려 노동자와 천대받는 사람들 중 투쟁적인 소수에 끼치던 공산당의 영향력을 깎아 먹었다. 결국 공산당은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동안 중도좌파 세력들이 투쟁을 좌절시키는 데에 일조하게 되고, 그 결과 제2차세계대전 시기와 종전 이후 미국 정치의 역사적 우경화가 벌어질 수 있었다.
물론 1930~1940년대 어느 시점을 봐도 미국에서 혁명의 기회가 임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산업 노동자, 여성, 흑인의 대중 투쟁으로 투쟁적인 노동자 운동이 일어날 기회가 열렸는데 강력하고 독립적인 기층 조직들이 있었더라면 미국 남부의 노동자들과, 또 점차 수가 늘던 사무직 노동자들을 조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런 투쟁들은 독자적인 노동자 정당을 건설할 가능성을 낳았을 뿐 아니라 작지만 대중적인 사회주의 경향을 노동계급 내에 만들어 냈다.
이런 가능성들은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다. 계급의 단결을 구축할 투쟁적 노동조합이 등장하는 대신에 관료들의 ‘실리적 노동조합 운동’이 CIO에서 득세했고, 인종과 성에 따른 노동계급의 분열은 깊어졌다. 대중적 [노동자] 정당이 부상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그리고 이후의 모든 사회운동)이 민주당에 의존하게 됐고 민주당은 미국 정치의 우경화를 줄곧 공모했다. 또, 역사에 남은 것은 노동계급 내에 작지만 대중적인 사회주의 경향이 아니라 사회주의 정치와 미국 노동자들 간의 단절이었다.
노동계급 중핵이 결코 2만 명을 넘지 않았던 비교적 작은 조직[공산당] 혼자서 CIO의 관료화, 민주당에 대한 노동운동의 종속, 전후 마녀사냥을 모두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분명 비현실적일 것이다. 그러나 공산당이 민중전선 전략으로 전환한 것은 그런 후퇴를 막아내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에 일조했다.
1930년대 후반, 산업 노동자들의 투쟁성이 가라앉았고, 그러자 미국 자본주의 국가는 노동계급에게 더는 양보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제2차 뉴딜” 개혁(공정근로기준법·사회보장법·전국노동관계법)은 1938~1939년에 돌연 중단됐고 결코 재개되지 않았다. 공산당 당원 수는 제2차세계대전 기간에 역대 최대로 늘었지만, 미국 정치는 이미 우경화했고 그 결과 급진적 투사들은 이후 노동운동에서 축출된다.
1934년 이전의 미국 공산당
1920년대 내내 공산당은 피복·석탄·철광·제철·자동차·기계 등 다양한 부문의 이민 1·2세대 노동자들 사이에서 규모는 작지만 활력 있는 당세를 구축하고 있었다.
공산당원 노동자들은 관료화된 미국노동총동맹AFL을 개혁하려 했던 현장조합원 운동(실패로 끝났다)에서 핵심적 구실을 했고 특히 AFL 산하 노조인 국제숙녀복노동자조합ILGWU과 연합광원노조UMW에서 그랬다. 공산당원들과 공산당 지지자들은 자동차 산업 등 미조직 부문에서 독립 노동조합 건설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공산당은 노동조합교육동맹TUEL을 결성했다. TUEL은 수많은 비당원 노동자 활동가들에게 민주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AFL 지도부에 맞서고, 독립적 노동자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TUEL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이 1920년대 제시한 “공동전선” 전략의 미국판이었다. 공동전선 전략의 바탕이 되는 믿음은 노동계급의 급진성이 사용자와 국가에 맞선 강력한 대중 투쟁으로 자라난다는 것이었다. 즉, 노동자들이 일터와 지역 사회에서 자본과 정면 대결해야만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할 힘을 기르고, 노동자와 천대받는 사람들에게 이로운 정책을 펴도록 국가를 압박할 힘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투쟁으로 노동계급 내 광범한 층이 반자본주의적 사상에 더 귀 기울이도록 만드는 동시에, 공식 개혁주의 세력(직업 정치인들과 노동조합 관료들)은 자본에 맞선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해 보일 수 있다.
스탈린주의화한 코민테른은 1920년대 말 자본주의가 “제3기”에 접어들었다고 선언했다. 1929년 대공황과 그에 뒤이은 세계적 불황은 체제가 회생 불가능한 위기에 빠졌음을 나타내며, 혁명이 전 세계에서 당면 과제로 올랐다고 코민테른은 선언했다. 그리고 혁명을 가로막는 것은 오로지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조합·정당의 “사회파시스트” 지도자들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노선에 따라 각국 공산당들은 개혁주의 지도자들을 종파주의적으로 공격했고 사회민주주의 정당·노동조합과의 공동 행동을 일절 거부했다. 이 전략이 가장 비극적인 결과를 낳은 곳은 독일이었다. 독일 공산당은 파시즘이 부상하고 있었지만 사민당과 힘을 합치기를 거부했다. 그 덕에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했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잘 조직돼 있던 독일 노동운동을 손쉽게 분쇄할 수 있었다.
“제3기 정책”이 미국 공산당의 정치에 끼친 영향은 좀 더 모호했다. 한편으로 공산당은 TUEL을 해산하고 이를 노동조합단결동맹TUUL으로 대체했다. 이 신생 조직은 기존 AFL 기구에 대당하는 “혁명적 노동조합”의 건설을 목표로 했다. 이 “적색” 노조는 조합원들에게 민주적·투쟁적 노동자 행동에 헌신하는 것을 넘어서 공산당 강령 전체에 동의하라고 요구했다.
노동조합 운동에서 공산당의 종파주의는 특히 철강 부문에서 재앙을 낳았다. 규모가 제법 있던 공산당의 철강 부문 프랙션은 제철제강노동자연합AAISW에서 성장하던 현장조합원 운동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당시 그 운동은 노조를 인정받기 위한 총파업을 호소하고 있었다. 공산당은 AAISW에 들어가 조직적·정치적 방향을 제시하려 하지 않고 그보다 규모가 작은 자신의 “적색 노조”인 철강금속산업노조에 안주했다. 어떠한 정치적 도움도 받지 못한 철강 노동자 투사들은 결국 [뉴딜 정책을 집행하던] 국가부흥국NRA의 연방정부 차원의 중재를 받아들였고 잠재력이 있었던 1933년의 파업 운동을 접었다.
같은 시기 공산당은 실업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활동을 했다. 비록 공산당은 다른 급진파, 특히 미국 사회당SP이나 A J 머스티가 이끄는 미국노동자당AWP 당원들과의 공동 행동은 거부했지만, 여러 산업 중심지에서 실업노동자협의회를 성장시켰다.
실업노동자협의회는 집세를 못 내 쫓겨나게 생긴 세입자들을 방어하는 전투적인 직접 행동을 조직하고, 구호소 앞에서 연좌 농성을 벌이고, 고용보험을 요구하는 대중 시위를 조직했다. 이들의 투쟁은 성공을 거둬 실업자 긴급 구호를 쟁취했고, 이는 1935년 연방고용보험제도가 수립되는 데 일조했다.
이 운동은 실업자들 사이에서 노동자들과의 단결을 고취해서, 실업자를 대체 인력으로 투입해 파업을 분쇄하려는 사용자들의 시도를 좌절시킬 수 있었다. 실업노동자협의회는 민족·인종·젠더 구분을 넘어 조직됐고, 디트로이트·클리블랜드·애크런 등 핵심 산업 도시에서 새로운 노동계급 활동가들을 사회주의 정치로 끌어들였다. 그 덕에 노동계급은 1919년 철강 파업 패배 후 최초로 승리를 경험할 수 있었다.
미국 공산당은 이 “제3기 정책” 시기에 흑인들을 조직하는 활동에 만만찮게 착수하기도 했다. 코민테른이 1928년 “흑인 문제”에 관해 채택한 문서는 흑인들의 투쟁이 미국 남부에서는 민족 자결권을 위한 것이고 미국 북부에서는 평등한 권리와 사회 통합을 위한 것이라 규정했는데, 이것이 옳았는지와는 별개로 그 주장 자체는 미국 공산당이 흑인 조직화를 중시하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미국 북부에서 공산당은 흑인들을 실업노동자협의회로 끌어들였고, 주택·교육 인종 분리에 맞서 투쟁했고, 인종차별 린치 반대 투쟁에 연대하는 위원회들을 건설했다. 미국 남부에서 공산당은 소작농 및 농업 노동자 조합을 성공적으로 건설했고, 버밍햄 같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들에서 산별 노조 운동을 건설하는 교두보가 될 TUUC 지부들을 건설했고, “짐 크로우법”에 따른 인종 분리와 권리 박탈에 반대하는 행동을 선동하고, 인종차별 린치에 맞서 무장 자경단을 조직했다.
흑인들 사이에서 공산당이 벌인 활동은 1930년대 초 “스커츠버러 소년들” 방어 운동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 운동에서 공산당이 주도하는 국제노동자변호단ILD은 백인 여성 두 명을 성폭행했다는 흑인 청소년 아홉 명의 누명을 벗기는 운동에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했다. ILD는 흑인이 다수이고 미국 남부 전역에서 활약하는 노동계급 ‘평등권’ 조직이었다.
미국식 공동전선
히틀러가 집권한 이듬해에도 코민테른은 나치의 승리가 성공적인 사회주의 혁명의 짤막한 전주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치가 그렇게 금세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해지자 국제 공산당 운동은 심대한 위기에 빠졌다. 기존의 전략이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코민테른에서는 과거의 잘못을 솔직하고 민주적으로 토론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코민테른과 미국 공산당은 정치적 혼란과 실험의 시기에 접어든다.
1 이 설립된다.
미국에서 공산당 노동자들은 사회당과 그 밖의 급진적 노동자들과 결성한 비공식적인 공동전선에서 활동하면서 파업 물결에서 핵심적 구실을 했다. 이 파업 물결의 결과로 대량 생산 제조업 부문에서 산별노조연맹1934년 초 공산당은 AFL의 성장하던 “연맹 지부들”[숙련공 중심으로 조직된 직능별 노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AFL에 직접 가맹한 지부들]을 배척하는 기존 정책을 폐기하고 비교적 규모가 작은 “적색 노조”들을 투쟁적인 AFL 산하 조직들로 편입시키기 시작했다. 여기서 공산당은 1920년대에 추진하던 정책들로 회귀했다. 공산당은 트로츠키주의자들,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투사들과 힘을 합쳐 AFL 산하 노조에서 현장조합원 운동을 건설해, AFL 지도부나 이전까지 동맹으로 삼았던 루스벨트 정부 인사들에게서 독립적으로 산별 파업을 벌일 능력이 있는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건설하려 했다.
공산당이 새 전략으로 최초로 성과를 거둔 곳은 태평양 연안 지역[서해안 지역]이었다. 공산당은 소생한 국제항만노동자조합ILA 지부 지도부를 장악해 1934년에 성공적인 파업을 벌였다. 이 파업은 샌프란시스코 지역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투사들과 해리 브리지스 같은 공산당 동조자들은 ILA 관료로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민주적인 현장 조합원 조직을 건설하고, 이 조직들을 기반으로 산별 노조를 결성했다. 그 산별 노조에서는 조합원들이 소수 상근자의 도움을 받아 매우 민주적으로 운영했고 노동자들의 파업 결정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모임에 보고하는 위원회들을 선출했다.
항만 노동자들 사이에서 활동하는 공산당원들은 국가의 중재나 밀실 협상이 아니라 대중 동원과 투쟁성에 의존했다. 공산당원들은 다른 노동자들에게 독립적인 정치 행동의 필요성을 교육했고, 투쟁을 좌절시키려는 ILA 위원장 조셉 라이언의 모든 시도에 맞섰다. 미국 서해안 항만 노동자들은 1948년 가을에 노조 인정을 쟁취했고 지역 노동시장(“직업 소개소”)에 대한 노조의 규제권을 얻어냈다.
1934년 미니애폴리스 트럭 노동자들과 톨레도 자동차 부품 노동자들의 파업 역시 도시 단위 총파업이었다. 이 파업을 이끈 것은 혁명가들이었다. [미니애폴리스가 속한] 미네소타에서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톨레도에서는 머스티 지지자들이 파업을 이끌었다. 이 세 파업은 산별노조연맹가 급성장하는 조건을 마련했다.
자동차·고무·해양·전자·기계 부문에서 공산당원들과 급진적 노동자들은 AFL 지부 내에서 현장조합원 운동을 시작해 새로운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공산당이 이 AFL 지부들에 개입한 것은 [AFL 산하 기구로 활동을 시작한] CIO의 초기 성공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 AFL 지도부가 1933년에 기간 산업 파업 시도를 좌절시키려 했을 때, 공산당과 다른 급진파들은 실질적인 대안적 지도력을 제공했다.
공산당은 특히 자동차 산업에서 현장조합원 운동을 성공적으로 건설했다. 윈드햄 모티머, 로버트 트래비스 같은 공산당 소속 노동자들과 다른 급진적 투사들은 AFL 지도부가 연방정부의 중재에 의존하는 것에 맞서 선동하며 민주적 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강력한 운동은 ‘진보 코커스’로 수렴돼 1934~1936년에 개별 공장 단위와 소기업 단위에서 비공인 파업을 조직했다.
1935년 5~6월 톨레도에서의 쉐보레 공장 파업은 그 시기의 가장 중요한 투쟁이 됐다. 당시 선출된 파업 위원회는 공산당원들과 머스티 지지자들, 기층 투사들로 이뤄져 있었다. 그들은 AFL 관료가 연방정부의 중재를 수용해 노조를 인정받지 못한 채 파업을 끝내고 노동자들을 복귀시키려고 하는 것에 맞섰다.
2 노조 초대 위원장을 선출할 때 다른 혁명가들과 급진적 투사들과 힘을 합쳐 공산당의 걸출한 노동자 지도자인 모티머 3 를 위원장으로 당선시켰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쯤 공산당은 [CIO 전체 지도자] 존 L 루이스와의 중도좌파 동맹을 이미 굳히기 시작할 때였고 그래서 모티머를 고려 대상에서 제외했다.
쉐보레 노동자들이 거둔 부분적 승리는 전미자동차노동조합UAW 창설의 발판이 됐다. 자동차 부문 최초의 국제 노동조합[캐나다에도 조합원이 있다]이었던 UAW는 1935년 8월 AFL 가맹 노동조합으로 창설됐고, 첫 해 동안 부패하고 무능한 초대 위원장 프랜시스 딜런의 통제하에 있었다. 공산당은 1936년 4월 UAW-CIO루이스는 공산당과 그 밖의 혁명가들이 조직하던 ‘계급투쟁적 노동조합 운동’의 발전을 두려워했다. 그가 CIO를 만든 이유는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을 전통적인 ‘실리적 노동조합 운동’의 규범 안에 묶어두기 위해서였다.
1935~1937년 CIO 파업 물결로 노동운동과 루스벨트 정부 사이에서 최초의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CIO는 연방정부와 결별하지 않고는 이 초창기 투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1933년에는 AFL 지도부가 산업 쟁의의 첫 물결을 국가부흥국의 중재(결국은 아무 소득도 없었다)로 돌릴 수 있었지만 1934~1936년에는 공산당과 그 밖의 급진적 투사들이 노동자들을 설득해 연방정부의 중재에 기대지 않고 파업과 연좌 농성, 그 밖의 직접 행동을 지속하도록 했다.
민주당과 이처럼 실천 상에서 결별한 것은 여러 지방·주 단위에서 노동자 정당 실험으로 이어졌다. 이런 정당들은 특히 미드웨스트 지역과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성공적이었다. 그곳 노동자들은 1930년대 중반 대중 파업들이 벌어지는 동안 민주당의 “뉴딜” 주지사들이 투입한 경찰·주방위군과 전투를 벌인 바 있었다.
1930년대 노동자 정당 건설 선동은 1936년 4월 UAW-CIO 대의원 대회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공산당과, 노동자당의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투사들, 사회당, 그 밖의 급진적 투사들이 주도한 ‘진보 코커스’가 대의원의 다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전국·주·지역 단위의 농민-노동자 정당 건설을 전폭적으로 한껏 지지”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UAW 대의원 다수가 1936년 루스벨트 재선 도전 지지를 거부했다. 상급단체 CIO 측 파견자 아돌프 거머가 UAW에 대한 CIO의 보조금 10만 달러를 회수할 수 있다고 협박한 후에야 UAW 대의원대회는 루스벨트 재선 지지 쪽으로 결정을 뒤집었다.
민중전선 전략과 투쟁성의 좌절
1935년에 코민테른 7차 대회는 미국 공산당의 정치적 실험을 끝장냈다. 코민테른의 새 전략적 기조는 “파시즘과 반동”에 맞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공산당들이 미국·프랑스·스페인의 급진적인 사회주의 노동자들과 맺은 비공식적 연합을 공식 승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코민테른은 사회민주주의 정당, 노동조합의 지도부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적” 자본가들도 포함시키는 더 광범한 민중전선을 건설하라고 지도했다.
소련이 민중전선 전략을 제시한 동기는 파시스트 강대국(독일·이탈리아·일본)에 맞서 민주주의적 제국주의 국가(미국·영국·프랑스)과 집단 안보 동맹을 맺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공산당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1936년 미국 공산당 제9차 대회에서 미국판 민중전선 전략을 정식화했다. 이 전략의 핵심 요소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민주당 내 중간계급·자본가들과의 동맹이었고, 다른 하나는 CIO 내에서 진보적이라는 노동조합 관료들과 장기적인 중도좌파적 연합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공산당은 루이스 등 친親루스벨트 성향의 CIO 지도자들을 확고하게 지지해 주면 루스벨트가 소련과 집단안보조약을 맺도록 마음먹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기대했다.
민중전선 전략은 공산당을 변화시켰다. 노동자, 흑인, 그 밖의 천대받는 집단에게 자기 조직화, 전투적 행동, 정치적 독립성을 고취했던 공산당이 이제는 노동계급을 순치시켜 루스벨트 정부와의 파트너십을 공고히 하려는 CIO 관료들의 선봉 구실을 자처했다.
이 전략이 끼친 영향은 가장 먼저 선거 정치에서 드러났다. 1936년 미국 좌파 다수는 새로 설립된 CIO에 기반한 제3당이 부상해 20~30석의 하원 의석을 확보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CIO 지도부는 노동자비당파동맹LNPL을 발족했다. 이것은 산업 노동계급을 민주당 투표 부대로 조직하기 위한 기구였다.
CIO 지도부는 민주당이 역대 최대 선거 승리를 거두도록 도움으로써 1934~1935년에 지역 수준에서 진행됐던 노동자 정당 실험을 대부분 망쳐 놓았다. 루스벨트를 “파시스트”라고 불렀던 공산당은 이제 그를 “서민의 친구”로 불렀고, 지역의 독립적 정당들을 민주당에 종속시키는 데서 핵심적 구실을 했다. 뉴욕에서 공산당은 신생 정당인 미국 노동당ALP이 좌파적 노동자들의 표를 루스벨트 같은 민주당 후보와 피오렐로 라과디아 같은 (민주·공화 양당이 지지하는) “통합” 후보로 몰아 주는 통로 구실을 하도록 만들었다.
민중전선 전략은 CIO 조합원들에게 훨씬 더 심각한 피해를 끼쳤다. 공산당은 루이스에 대한 영향력을 얻는 대가로 기층을 조직하고 직접 행동을 고무해 온 자신의 역사를 이어가기를 포기했다. 이는 특히 자동차 산업에서 두드러졌다.
연좌 파업 물결이 정점에 이른 1936년 12월 노동자들이 GM 플린트 공장을 점거했을 때, CIO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성이 민주당 정부를 ‘도발’해 민주당 정부가 주방위군을 투입해 이제 막 꼴을 갖춘 자신들의 CIO를 박살낼까 봐 겁에 질렸다. CIO 지도자들은 연좌 파업을 주도했던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 트로츠키주의자들, 공산당 내 지도부 반대파, 공산당원들에게 노동조합 인정 요구를 따내지 못한 채 파업과 점거를 접으라고 종용했다.
플린트 공장 내 공산당원들의 바람과 달리 파업 노동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노동자들은 점거를 풀기는커녕 전략적 중요성이 높은 엔진 공장인 피셔4공장을 점거했다. 피셔4공장을 점거한 덕에 파업은 신속하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듬해 봄 공산당은 자동차 노동자들 사이에서 지닌 영향력을 이용해 루이스와 CIO 지도부를 도와서 크라이슬러와 그 밖의 무노조 기업들로 연좌 파업이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 공산당은 “반짝 파업”(현장 노동자들의 불만으로 촉발된 단시간 조업 중단)을 멈추기 위한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공산당이 새로 맺은 이 중도좌파 연합은 1937년 봄 실패로 끝난 “리틀 스틸”[소규모 철강 기업들] 조직화 시도에는 훨씬 더 재앙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청년 공산당원 수백 명이 CIO 산하 철강노동자조직위원회SWOC에서 조직자로 일했지만, 이들은 “대의원 대회도, 선거도, 지부의 자율성도” 일체 허용하지 않는 SWOC 위원장 필립 머리의 관료주의적 전략에는 결코 도전하지 않았다.
“리틀 스틸”에 맞선 SWOC의 파업에는 대중 피케팅도, 연좌 농성도, 선출된 파업위원회도 없었다. 파업 노동자들은 사측의 대체 인력 투입도 막지 않는 형식적이고 정례적인 피케팅을 하는 데 그쳤다. 노동조합은 새로 설립된 전국노동관계위원회NLRB에 의존해 노조를 인정받으려 했다. 파업의 일상적 조직은 필립 머리와 선출되지 않은 상근자들에게 계속 맡겨져 있었다.
1937년 5월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 가족들과 함께 노조가 주최한 야유회에 참가한 조합원들에게 시카고 경찰이 발포하자, 루이스와 머리, 공산당원들은 루스벨트에게 탄원했다. 철강 기업주들과 민주당 소속 시카고 시장, 민주당이 이끄는 펜실베이니아·오하이오 주정부를 규탄해 달라고 말이다. CIO가 루스벨트의 1936년 재선에 꼭 필요한 지지를 제공했건만, 루스벨트는 사측과 노동자 모두 똑같이 문제라고 비난하고는 자신의 민주당 식구들이 자행한 “현충일 대학살”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민주당 정부와 CIO 지도부에 모든 판돈을 걸었던 공산당은 조직화 운동에서 대안적 전략을 제시하지 못했다. “리틀 스틸” 파업이 끝나자 기간 산업 부문에서 CIO가 벌인 공세도 끝났다.
민중전선 전략 덕에 더 많은 공산당원들이 노동조합 상근자나 지부 간부가 될 수는 있었지만, 정작 기층의 투쟁성은 꺾였고, 루스벨트의 제2차 뉴딜이 개혁주의적 요소를 포함하도록 압박했던 기간 산업 조직화 물결도 끝장났다. 공산당은 CIO 지도부에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들이 건설한 기층 조직을 해체했고, 노동조합 간부로 선출된 당원들은 그 덕분에 현장조합원 동지들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났다. 공산당 입당이 이전에는 다른 급진적 노동자들과 함께 노조를 바꾸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현장을 떠나 노동조합 관료가 될 기회에 더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했다.
공산당은 산업 조직이 해체되면서 노동자들과 접촉하는 능력도 약화됐다. 그 결과 공산당의 사회적 구성도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초반 사이에 크게 변했다. 당원 중 제조업·사무직·서비스 노동자의 비중이 줄고, 교사·사회복지사·간호사 등 반半전문직과 엔지니어·법조인·의사 등 전문직의 비중이 급등했다.
“무파업 서약”
제2차세계대전 직전에 미국 노동계급 운동은 기로에 서 있었다. 북부 산업의 주요 거점들에는 노조가 조직돼 있었지만, 자동차 같은 핵심 산업 부문에서 조직화를 완수하거나 남부에서 돌파구를 내는 시도는 지지부진했다. 신생 CIO의 지도부는 민주당 루스벨트 정부와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루스벨트 재선 이후 유의미한 개혁을 하나도 따내지 못했다. 노동조합은 갈수록 관료화했다. 루이스와 머리는 철강이나 육류 가공 같은 부문에 상명하달식 위원회를 세웠고, 자동차·고무·기계 부문처럼 현장 조합원 영향력이 강한 노동조합들에서는 현장 대표자들과 별개로 중앙 지도부를 따르는 지역 책임자들을 두는 이중 구조를 만들었다.
CIO 관료들은 1930년대 후반에 “뉴딜 당국자들과 협력해 ‘책임성 있는’ 협상 타결을 장려하고, 무분별한 연좌 파업을 억제”하려 했지만, 현장조합원들은 일상적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단시간 조업 중단이나 연좌 시위 같은 직접 행동을 계속 벌였다.
[1941년] 미국의 제2차세계대전 참전은 CIO와 공산당 둘 모두의 변화를 완성시켰다. 전쟁 동안 공산당원 수는 10만 명 가까이로 늘었고, 이 때문에 많은 역사가는 이 시기를 20세기 미국의 급진적 운동이 최고조에 이른 때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사뭇 다른 현실이 보인다.
공산당은 주로 화이트칼라·전문직 노동자층에서 급성장했다. 산업 노동자 사이에서 공산당의 기반은 지속적으로 축소됐다. 공산당은 전시 애국주의 덕에 ‘건전한’ 세력으로 인정받고 국무부와 전략사무국(OSS: CIA의 전신이다)에서 은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지만, “무파업 서약”의 주요 집행자 구실을 하면서 현장조합원 사이에서 좌파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CIO 관료들에게 제2차세계대전은 산하 신생 산별 노조들에 대한 통제력을 공고히 하는 기회가 됐다. 진주만 공습 직후 CIO는 ─ 루이스가 참전에 반대하면서 연합광원노조UMW를 이끌고 CIO를 탈퇴한 후 머리가 위원장이 돼 있었다 ─ 전시노동위원회에서 자기 몫의 자리를 얻고 정부가 기간 산업에서 유니언숍 규칙[입사시 노조 의무 가입]을 적용해 주는 대가로 무파업 서약에 합의했다.
CIO 지도부는 전시 협조로 산업과 정부 내 입지를 강화하기를 바랐지만, 오히려 그 동맹은 CIO를 정치적·경제적으로 약화시켰다. 무파업 서약에 따라 노조 지도부는 현장 조합원들이 서약을 준수하게 할 책임이 있었다. 그 결과 자본이 작업장 통제권을 되찾으려고 재개한 투쟁에서 노동조합 관료들은 자본의 적극적 동맹 구실을 하게 됐다. 관료가 생산 현장에서 경찰 노릇 하게 됨에 따라 노동조합 기구가 대거 중앙 집권화됐고, 관료적 불만 처리 절차들이 강요됐으며, 현장 조합원들의 민주주의와 활동이 전반적으로 약화됐다.
모든 것을 전쟁 노력과 소련 방어에 종속시켜야 한다고 확신한 공산당 소속의 노동조합 상근자들과 지부 간부들, 수가 줄어들던 공산당 소속 현장 노동자들은 노동계급 자기 조직화와 자기 행동의 전통을 분쇄하려는 CIO 관료의 노력을 적극 방조했다. 예컨대 공산당은 1943년 UMW 광원들의 파업을 “친親나치” 파업이라고 비난했고, 군수 산업에서 늘어나던 비공인 파업에 반대함으로써 CIO 관료를 도왔다. 또 공산당은 노동 강도를 높이는 여러 계획을 비호했고, 노사 협력으로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는 “산업위원회” 설립 제안을 지지했다. 심지어 공산당원인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수많은 산업 부문에서 성과급제 부활이나 단위 작업당 임금 삭감을 수용하려고도 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과 노동자당 소속 반反스탈린주의 사회주의자들은 전쟁 기간 동안 몇몇 파업을 조율해 내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비공인 파업들을 CIO 무파업 서약 파기와 독립적 노동자 정당 건설을 촉구하는 운동으로 전화시킬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촉구를 담은 결의안이 1943년 CIO 미시건주 지부 대의원대회에서 통과됐다.
반면 공산당은 노동 강도 강화와 작업장 내의 가혹한 처사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모든 시도를 “파시스트적”이라고 비난했으며, 경영진과 CIO 지도부가 군수 산업 비공인 파업을 분쇄하는 것에 부역한 경우가 많았다. 노동운동 내에서 실질적 비중이 있는 유일한 좌파 경향이었던 공산당이 전시에 파업 파괴 행위를 한 결과 무파업 서약에 맞선 운동은 패배하고 말았다.
애국주의를 받아들인 덕에 공산당은 자유주의적 중간계급과 CIO 지도부에게서 일시적으로 인정받았지만, 전시의 민중전선 전략은 현장 조합원들 사이에서 공산당과 다른 급진파들이 받던 신뢰를 무너뜨렸고 CIO 내의 보수·반공 인사들의 인기만 높였다.
축출
전력노조UE 가톨릭조합원협회, UAW의 [당시 위원장] 월터 루터 지지 세력 등 온갖 이질적인 세력들이 공산당에 맞서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수호하는 투사를 자처했다. 공산당이 미국 노동운동을 소련의 필요에 종속시킬 태세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기 때문이다. 전시 미-소 동맹 관계가 끝나자 공산당은 다시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반공주의자들은 새롭게 얻은 신뢰를 이용해 공산당원들과 다른 급진적 투사들을 노동운동에서 축출했다.
최근에 전후 노동운동 연구자들은 CIO에서 공산당이 축출되면서 미국 산별 노조 운동의 전략·전술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주장한다. 모리스 자이틀린과 주디스 스테판-노리스는 공산당이 주도한 CIO 노조들이 합의한 단협에 쓰인 문구들을 근거로 든다. 작업장 내 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파업이나 그 밖의 기층 투쟁을 허용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이틀린과 스테판-노리스는 공산당 주도 노조가 작업장 실천에서 중도파 지도하의(즉, 머리와 루터가 주도한) 국제 노조들과 유의미한 차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거의 제시하지 않는다. 노동조합 내 좌파와 중도파 모두 전국노동관계위원회의 틀을 받아들였고, 그 틀 안에서 노조를 인정받고, 작업장 내 불만을 관료적으로 처리하고, 자본주의 법 체계의 비좁은 테두리 안에서 위로부터 조직된 파업을 간간이 벌이는 가운데 정례적으로 단체협약을 맺으려 했다.
그럼에도 전후 공산당의 축출은 미국 노동조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이 때문에 미국 제국주의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노동운동이 만들어졌고, 민주당에 대한 노동운동의 종속이 더 심해졌다. 1948년 헨리 월러스가 진보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해(CIO 지도부는 그를 “공산당 앞잡이”라고 비난했다) 형편없는 성적을 내면서 실질적인 독립적 정치 행동의 가능성은 막을 내렸다.
둘째, 공산당 축출은 노동계급 내 분열을 고착화시켰다. CIO 반공주의의 승리는 야심찬 남부 조직화 계획인 “딕시[남부] 작전”이 좌절되는 배경이 됐다. CIO 지도부는 오픈숍 기업들과, 인종 분리를 지지하는 지주들, 그리고 이들을 대변하는 민주당 정치인들에 맞서 조직화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산당이 주도하던 기존의 광업·제철·제련노동조합을 공격하고 백인 노동자들의 인종차별에 영합했다. 1953년이 되면 전기 제조 부문에 80개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이들이 포괄하는 노동자의 수는 1948년 공산당이 이끈 전력노조 조합원 수의 절반에 불과했다.
셋째, CIO에서의 내전[공산당 축출]으로 사회주의 좌파와 미국 노동계급 간의 역사적 단절이 생겼다. 노동조합 관료주의가 점점 득세하는 와중에도 산업 쟁의의 전통과 급진성을 보존하고 있던 소수이지만 유의미한 수의 사회주의 노동자들이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공산당이 투쟁적인 공동전선 정책을 유지했더라도 뉴딜에서 ‘페어딜 정책’[1949년 당시 대통령 트루먼이 내건 정책]으로 이어지는 시기의 계급투쟁 결과가 사뭇 달라졌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공산당이 최선의 정치를 채택했어도 새 산별 노조들의 관료화를 저지하지 못하거나, 노동자 정당을 건설하지 못하거나, 노동운동을 휩쓴 반공 히스테리를 멈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민중전선 전략이 CIO의 탈급진화를 부추겼고 다양한 독자적 노동계급 정치 행동 시도들을 좌초시켰고, 노동운동 내의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 경향들을 모조리 파괴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민중전선?
오늘날 미국에서 민중전선 전략은 1930~1940년대 때보다 사회주의 좌파들에게 훨씬 더 파괴적일 것이다.
첫째, 우리는 우리를 “민중전선”에 끼워 주도록 자본이나 자유주의적 중간계급, 공식 개혁주의의 어느 부위에도 압력을 가할 사회적·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공산당은 노동계급과 흑인들 사이에 지지 기반이 있고 이들의 운동들이 기성 질서를 위협할 잠재력이 있었기 때문에 CIO 지도부 일부와 중간계급 일부를 중도좌파 연합에 동참시킬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아직 그런 위협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민중전선 같은 전략을 추구했다가는, 미국 좌파는 대중 저항을 재건하고 사회주의를 교육하는 과제가 아닌 엉뚱한 곳에 힘을 쏟게 될 것이다.
둘째, 노동운동 지도부에 침투하려는 모든 시도(우리의 정치 의제에 립 서비스를 해 주는 진보적 노동조합 관료를 지지하거나 노동조합 상근자가 되는 것)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미국 노조 관료들은 민주당과 동맹을 맺고 사측에 협조하는 데에 이전보다 더 열심이다. 미국 노동운동의 부흥을 위해 그들 어느 누구에게라도 기대를 거는 것은 잘못이다.
셋째, 민주당은 좌파가 침투하기에 이전보다 훨씬 어려운 곳이 됐다. 클린턴 정부 1기에 민주당에서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가 공고해진 이래로 민주당은 두 가지 변화를 거쳤다.
한편으로는, 민주당에서 선거 후보를 지명하는 평당원 주도 조직이 없는 문제는 민주당이 “모금 카르텔”로 변모하면서 더 심각해졌다. 킴 무디가 지적했듯 오늘날 민주당은 기업의 후원금을 후보들에게 전달하는 구실을 하는, 선출되지 않고 책임성도 없는 지역·주·전국 단위 위원회들이 주무르고 있다. 이들은 선거 자금을 통제하기 때문에 당내 좌파의 어떤 반란이든 분쇄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당에서 경력을 쌓는 것은 개인의 영달을 이루는 현실적인 수단이 됐다. 20세기 대부분 동안 미국에서 ─ 특히 전국 수준에서 ─ 출세한 정치인들은, 그 전에 혹은 그 후에 잘나가는 기업 경영인이 됐다. 오늘날 민주당은 자본가들이 전직 정치인들의 재단에 직접 돈을 내도록 촉진하며, 그 후원자들에게 전보다 큰 보상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미국에서 여러 경향이 공존하는 대중적 정치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슈워츠와 순카라의 비전을 공유한다. 또, 나는 일터와 지역 사회에서 사회주의를 교육하고 자본에 맞선 저항을 건설하자는 그들의 호소에도 공감한다. 슈워츠·순카라와 나는 친기업적인 민주당, 노조 지도자들, NGO 상근자들로부터 반드시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데에 견해를 같이 한다. 하지만 민중전선 전략으로는 그런 일들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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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harlie Post, ‘The Popular Front Didn’t Work’, Jacobin, October 17,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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