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전선 *
《마르스크21》 편집부 주: 혁명적 조직은 여러 시기에 노동계급의 다양한 투쟁에 관여하고, 혁명적 시기에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도록 이끌기까지 여러 전술을 사용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추나라는 공동전선을 ‘전략’으로 지칭했는데, 공동전선의 목적이 몇몇 구체적인 요구를 놓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단결시켜 투쟁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감안할 때, 공동전선은 사회주의자들의 ‘전술’로 규정하는 게 더 적합할 것이다.
‘공동전선’은 하나의 전략이다. 공동전선은 다음과 같은 매우 보편적인 질문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이 내놓는 대답이다. 즉, 혁명으로 자본주의를 전복하려는 운동에 헌신하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개혁할 수 있고 혁명은 필요 없다고 믿는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지난 세기 대부분 동안 대다수 노동자의 의식은 혁명적이기보다는 개혁주의적이었다. 그리고 혁명이 아니라 개혁을 추구하는 조직들이 노동자 운동을 지배해 왔다. 이 때문에 공동전선이라는 전략 문제가 되풀이해서 제기돼 왔다. 그러나 이 문제가 제기되는 시기와 맥락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공동전선이 취하는 구체적인 형태는 그에 따라 달랐다.
토니 클리프는 레닌 평전에서 전략과 전술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전술 개념은 계급투쟁에서 하나의 과제나 하나의 부문에 해당하는 조치들에 적용된다. 그래서 레닌은 예컨대, 1905년 1월 투쟁 기간에 필요한 전술에 관해 말했고, … 노동조합 전술, 의회 전술 등도 말했다. 혁명적 전략은 여러 전술을 결합시켜 사용해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공동전선을 주어진 상황과 무관하게 적용될 수 있는 전술이나 특정 조직 형태로만 이해하면, 공동전선이 역사적·지리적 상황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기 십상이다. 공동전선이 취하는 형태는 노동계급이 직면한 핵심 과제, 노동계급의 의식, 개혁주의 조직과 혁명 조직 간의 세력 균형 등과 같은 상황에 달려있다.
공동전선을 거론할 때 다른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인 레온 트로츠키는, 공동전선이 엄청나게 다양한 형태를 아우를 수 있는 폭넓은 전략이라고 봤다.
노동조합이 경제 투쟁에서 공동전선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인 것처럼,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에 돌입하는 상황에서 소비에트는 공동전선의 최고 형태다.
소비에트가 공동전선의 한 형태라는 문제는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소비에트, 노동조합, 지금의 전쟁저지연합Stop the War Coalition과 같은 공동전선이 지닌 공통된 특징이다. 공동전선의 기본 특징은 다음과 같다.
· 공동전선은 혁명적, 비혁명적 노동자들을 한데 모아 함께 싸우도록 한다.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자들의 조건을 기본적으로 방어하는 투쟁(노동조합)부터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국가 건설(소비에트)까지 다양한 투쟁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 공동전선이 내세우는 요구들은 혁명가들과 노동계급 중 아직 혁명적이지 않은 부문 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 공동전선에 참여하는 세력들은 독립적 세력을 유지한다. 혁명가들이 공동전선과는 별개로 독립적인 목표를 추구하고, 자신들의 광범한 정치적 비전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데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
· 공동전선은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즉, 공동전선 내에서 개혁주의적 경향과 혁명적 경향들은 전략과 전술에 대해 논쟁할 수 있다. 실제로 공동전선 내에서는 사상 투쟁과 전략·전술 논쟁이 늘 벌어지기 마련이다.
· 혁명가들은 더 우월한 사상과 투쟁 방법들을 제시해서 공동전선에 참여하는 개혁주의적 노동자들 일부를 혁명적 정치로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공동전선 이론을 가장 명확하게 발전시킨 이들은 제1차세계대전에 뒤이은 혁명적 고양기에 참여한 마르크스주의자들로 트로츠키, 레닌, 안토니오 그람시 등이 있다. 이 시기에는 대중적 혁명 조직들이 대중적 개혁주의 조직들과 함께 활동해야 했다. 1920년대 초 투쟁의 첫 고조기가 끝난 후 혁명가들은 방어적 투쟁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노동계급이 수세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노동계급 단결의 문제, 따라서 공동전선 문제가 극도로 첨예하게 제기됐다.
선구자들
트로츠키는 공동전선 전략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다름 아닌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인용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노동계급 정당들과 대립하는 별개의 당을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노동계급 전체의 이해관계와 분리된 별도의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다. … 공산주의자들은 … 한편으로는, 실천적으로 모든 나라에서 노동계급 정당들의 가장 선진적이고 단호한 집단이며, 다른 모든 정당들을 전진시키는 세력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거대한 대중에 비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로와 조건들 그리고 그 운동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일반적 귀결들을 명확히 이해한다는 장점이 있다.대중적 개혁주의 정당들이 등장하기 전에 쓰인 이 구절들은 혁명가들이 직면한 과제의 본질을 포착하고 있다. 혁명가들은 노동계급을 단결시킬 일반적 이해관계를 내세워야 하고, 노동계급의 가장 단호하고 선진적인 부문으로서 그렇게 해야 한다. 실천적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양한 조직에 참여했다. 회원 수백 명 규모로 1848년 유럽 혁명의 물결에 참여한 초기 ‘공산주의자 동맹’부터, 영국 노동조합들과 사회주의 음모 조직 등 온갖 세력을 끌어들인 제1인터내셔널까지 다양했다.
생애 말년에 이르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이 “반反프롤레타리아적”이라고 부른 사상적 경향이 당대 최대 노동자 정당이었던 독일사회민주당SPD 안에서 부상한 것에 맞서 논쟁해야 했다.
지금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자들은 프티부르주아지의 대변자들로,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혁명적 위치에서 오는 압력으로 인해 “너무 멀리 나아갈”지 모른다며 불안감에 가득차 있다. 이들은 단호한 정치적 반대파가 되기보다는 전반적 화해를 추구하고, 정부와 부르주아지에 맞서 투쟁하기보다는 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설득하려 한다.
여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독일사회민주당이라는] 건강한 단체 내부에 “이질적 영향력”이 침투했다는 것이었고, 전체 노동계급을 포괄하고 대표하는 단일 노동자 정당이 필요하다는 주장 자체는 고수했다. 이런 노동자 정당 모델이 처음 도전받게 되는 곳은 러시아였다.
불법 조건에서 탄압받으며 활동하고 있던 레닌은 매우 다른 형태의 조직을 고안해 냈다. 레닌의 볼셰비키당은 전체 노동계급의 정당이 아니라 가장 선진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들의 정당이었다. 이 노동자들은 동질적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고, 볼셰비키는 중앙집중적 조직 덕분에 더 광범한 노동계급 안에서 전략을 관철하기 위해 싸울 상당한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레닌조차 이것은 차르 치하의 러시아에만 적합한 조직 형태라고 여겼다. 광범한 사회주의 정당 모델이 보편적으로 적절하다는 주장에 진지하게 도전한 마르크스주의자는 1914년까지 거의 없었다.
두 가지 사건으로 이런 상황이 바뀌었다. 첫째,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유럽 전역에서 사회주의 조직의 지도자들이 자국 지배계급을 앞다퉈 지지하고 나섰다. 이런 배신, 특히 독일사회민주당의 배신은 레닌조차 망연자실케 했다. 독일사회민주당은 그간 마르크스주의 수사를 계속 사용했지만, 실제로는 노동계급의 각성이 점진적으로 이뤄진다고 주장하고, 사회주의로의 느리고 부분적인 이행을 강조하며 딴 방향으로 나아갔다. 독일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의 전복이 아니라 자본주의와의 협상을 추구하는 각종 기구와 관료층, 의원단을 발전시켰다. 둘째 요인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승리였는데, 이는 레닌주의 혁명 정당의 장점과 함께 공동전선의 필요성에 대한 가장 확실한 통찰을 제공했다.
1917년의 공동전선
러시아에는 독일, 영국 등지에서 발전하고 있던 종류의 대중적 개혁주의 정당이 없었다. 그럼에도 개혁주의 의식이 노동계급 내에서 지배적이었다. 노동력을 팔아야 하고 일터에서 사장과 경영자들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노동계급은 누구나 혼재된 생각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일부는 투쟁과 연대 속에서 갖게 된 생각이고 일부는 체념 속에서 지배계급의 사상을 수용해서 갖게 된 생각이다. 이뿐 아니라, 개별 노동자의 구체적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노동계급 내 의식은 불균등성이 크기 마련이다.
레닌의 당 개념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다. 이 당은 의식이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을 한데 결집해 이론적 수단과 주장, 전략과 전술로 무장시켜 다른 노동자들을 이끌도록 한다. 공동전선은 의식의 불균등성을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핵심 요소다.
여느 혁명이 그렇듯이 러시아 혁명도 대중의 분노가 폭발하며 시작됐다. “자발적인” 1917년 2월 혁명은 그해 10월에 수행된 “의식적” 봉기와 대조적이었다.
2월 봉기는 자발적 봉기로 일컬어진다. … 2월에는 누구도 미리 길을 제시하지 않았고, 누구도 공장과 병영에서 혁명에 대해 투표하지 않았다. 위에서 대중을 향해 봉기를 촉구한 세력도 없었다. 여러 해 축적된 분노가 예기치 않게 표면 위로 분출한 것으로 대중 자신들에게도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10월에는 사뭇 달랐다. 여덟 달 동안 대중은 정치적으로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 기간 대중은 중요한 사건들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사건들의 관계를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매번의 행동 뒤에 대중은 그 결과를 냉철하게 평가했다.
2월부터 10월까지 혁명적 시기가 이어지는 동안 노동계급은 수많은 전진과 후퇴에서 배웠다. 그중 한 사건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7월부터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러시아의 ‘공식’ 국가 권력인 임시정부를 이끌었고 온건 좌파 정당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이를 지지했다. 임시정부는 혁명적 물결을 견뎌내는 동시에 제1차세계대전의 학살을 지속하고 러시아 자본주의의 안정성을 회복하려 했다. 다른 무엇보다 이것은 소비에트의 영향력을 분쇄한다는 것을 뜻했다. 소비에트는 2월 혁명으로 불쑥 등장한 노동자 권력의 대중적인 민주주의 기관이었다. 임시정부의 정책은 또한 볼셰비키당의 지도자들을 투옥하거나 지하 활동으로 내몰았다. 처음에 케렌스키는 우익 군 총사령관인 라브르 코르닐로프와 협력했지만, 8월 말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와 결별하고 혁명의 중심 도시인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했다. 코르닐로프의 목표는 케렌스키를 타도하고 스스로 러시아의 “독재자”로 군림하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볼셰비키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볼셰비키당은 어떤 노선을 취했을까? 코르닐로프에 맞서 싸우고자 전혀 주저하지 않고 자신들을 감옥에 가뒀던 자들과 … 실용적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처에서 혁명방어위원회들이 조직됐고 볼셰비키는 소수파로 여기에 참여했다. 소수파라고 해서 볼셰비키가 지도적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혁명적 대중 행동을 위한 협정이 체결되면 가장 철저하고 대담한 혁명적 정당이 언제나 득을 보기 마련이다. 볼셰비키가 가장 용감하게 앞장섰다. 그리하여 멘셰비키 노동자들과, 특히 사회혁명당 병사들과의 장벽을 허물고 그들을 이끌었다. … 코르닐로프의 쿠데타가 한창일 때 케렌스키는 순양함 아브로라호 수병들에게 동궁을 방어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 수병들은 모두 볼셰비키였다. 그들은 케렌스키를 증오했지만 삼엄한 경계로 동궁을 지켰다. 수병들의 대표단이 크레스티 감옥에 갇혀 있던 트로츠키를 찾아가 접견하며 “케렌스키를 체포하는 것은 어떨까요?”라고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반농담조로 물은 것이었다. 수병들은 먼저 코르닐로프를 격퇴하고 난 다음에 케렌스키를 처리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위에서 트로츠키는 공동전선의 정수를 제시하고 있다. 대중과 함께 활동하면서 그들을 개혁주의적 생각에서 떼어 내 획득한다는 전략이 성공하려면, 볼셰비키는 자신들이야말로 코르닐로프에 맞서 가장 일관되게 혁명을 방어할 수 있는 세력임을 실천에서 입증해야 했다.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원들과 공동 조직을 결성해서 볼셰비키는 이것을 해냈다. 레닌은 혁명을 방어하기 위한 전투가 한창일 때 쓴 글에서 또 다른 측면, 즉 볼셰비키가 이 공동전선 내에서 독립성을 유지하고 이데올로기 투쟁을 계속 전개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금 국면에서도 우리에게는 케렌스키 정부를 지지해야 할 의무가 없다. 케렌스키 지지는 원칙을 저버리는 짓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러면 우리가 코르닐로프에 맞서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당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코르닐로프에 맞서 싸우는 것과 케렌스키를 지지하는 것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그러나 많은 볼셰비키가 이 선을 넘고 “화해주의”에 빠져 사태의 흐름에 휘둘리고 있다. 우리는 코르닐로프에 맞서 싸울 것이고 실제로 싸우고 있지만 케렌스키를 지지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의 약점을 들춰내고 있다. … (코르닐로프에 맞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케렌스키의 약점과 그가 동요한다는 것을 설명해서 … 다양한 형태로 케렌스키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볼셰비키는 바로 코르닐로프에 맞선 투쟁을 통해서 러시아 노동자 대다수의 지지를 획득했다. 화해주의자들을 방어하는 투쟁으로 화해주의자들을 폭로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볼셰비키는, 이전까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지배하던 소비에트에서 마침내 다수파가 됐다. 그러나 혁명의 정점인 10월 봉기에서도 공동전선은 여전히 결정적이었다. 트로츠키는 당과 소비에트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혁명적 상황에서 소비에트는 — 혁명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는 소비에트 자체가 불가능하다 — 계급 전체를 포괄하고 완전히 후진적이고 무기력하고 사기 저하된 부분만을 제외하는 반면, 혁명적 정당은 계급의 두뇌를 대표한다. 권력 장악 문제는 당과 소비에트(또는 거의 소비에트와 동등한 다른 대중 조직들)의 확고한 결합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10 볼셰비키당이 봉기를 수행하는 데서 핵심적 역할을 한 것과 별개로, 트로츠키는 당이 단독으로 봉기를 선언하기보다는 소비에트의 선출된 기구인 군사혁명위원회가 봉기를 선언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러시아 혁명의 완수가 가까워지자 아주 날카로운 물음이 제기됐다. 즉, 누가 봉기를 지도할 것인가? 봉기를 조직하는 것은 소비에트여야 하는가, 아니면 볼셰비키당이어야 하는가? 처음에 레닌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가 봉기를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당의 이름으로 직접 봉기를 소집하는 것이 … 더 간편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상당한 장점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단점도 만만찮게 명백하다. 당이 마땅히 기대를 걸 수 있었던 수백만의 사람들을 세 층으로 구별해야 한다. 하나는 모든 상황에서 이미 볼셰비키와 함께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하나는 더 많은 사람들로, 볼셰비키가 소비에트를 통해 행동하는 한에서 볼셰비키를 지지한 사람들이다. 셋째는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에서 지배적이었음에도 소비에트를 따랐던 사람들이다.
혁명은 공동전선에 의해 완수됐다. 볼셰비키는 볼셰비키에 속하지 않은 노동자·병사·농민과 동맹을 형성해야 했고, 여기에는 볼셰비키는 달갑지 않지만 소비에트이기에 따른 이들도 포함됐다. 트로츠키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볼셰비키당 자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산업 노동자들이었고, 대대로 노동자였던 페트로그라드의 프롤레타리아가 선봉에 있었다. 볼셰비키가 소비에트라는 대의명분을 갖고 있는 한 지지하는 사람들에는 대다수의 병사가 속했다. 볼셰비키가 소비에트를 지배하고 있다는 … 사실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를 지지한 사람들에는 더 보수적인 노동자 집단(대중의 나머지 부분과 단절하기를 두려워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출신), 코사크들도 포함하는 군대의 더 보수적인 부분 그리고 사회혁명당 지도부와 결별한 뒤 사회혁명당 좌파를 지지하고 있던 농민들이었다.
트로츠키의 주장은 대중 의식에 대한 면밀한 평가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베레진 소위의 보고에 따르면, 10월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군사협의회에서 대표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볼셰비키 모스크바위원회의 부름에 부대들이 응할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소비에트의 부름에는 모두 나올지도 모릅니다.” … 10월 16일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협의회에서 보키는 당 위원회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모스크바 지구: “그들이 소비에트의 부름에는 응하겠지만, 당의 부름에는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네프스키 지구: “모두 소비에트를 따를 것입니다.” 이후 볼로다르스키가 페트로그라드의 정서를 다음 말로 요약했다. “전반적 인상은 거리로 나가길 열망하는 사람은 없지만, 소비에트의 부름에는 모두 응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올가 라비치가 그의 말을 이렇게 바로잡았다. “일부는 당의 부름에도 응할 거라고 말합니다.” … 당을 통해 봉기를 직접 이끌려는 시도는 어디에서도 결실을 맺지 못했다.
자신의 평가에 기초해 트로츠키는 공동전선으로 동원해낼 수 있는 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당이 소비에트를 움직이고, 소비에트는 노동자, 병사 그리고 어느 정도는 농민도 움직였다. 덩치가 커진 만큼 속도를 잃었다. 만약 이 지도 체계를 톱니바퀴 시스템에 비유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언젠가 레닌도 다른 주제에 대해 사용했던 비유다.) 소비에트라는 중간 크기의 톱니바퀴를 빠트린 채 성급하게 당이라는 톱니바퀴를 대중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직접 연결하려고 했다면 당 톱니바퀴의 톱니가 부러질 위험을 야기했을 것이고, 그러고도 대중을 충분히 많이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경험을 일반화하는 코민테른
15 불행히도 이때쯤 혁명의 물결이 퇴조하고 있었다.
1919년 3월에 창립돼 코민테른으로 알려진 제3인터내셔널은 1917년 혁명의 산물이었다. 코민테른은 제1차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벌어진 반란들이 유럽 대부분을 뒤흔들고 있을 때 결성됐다. 처음 코민테른은 한 줌의 작은 정당들로 구성됐다. 그러나 개혁주의 조직들이 연이어 분열한 결과 “1921년 초가 되면 코민테른에 가입한 정당들은 여섯 개 나라(프랑스, 이탈리아, 노르웨이,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정치 의식이 있는 유럽 노동자 대다수의 지지를, 다른 나라들(독일, 스웨덴, 폴란드)에서도 상당한 소수파의 지지를 받았다.”1918년 11월에 발발한 독일 혁명은 독일사회민주당과 군의 총사령부가 베를린에서 신생 공산당을 진압한 다음,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수립된 노동자·병사 평의회들을 공격하면서, 그 첫 국면이 종결됐다. 비엔뇨 로소(‘붉은 2년’)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거대한 투쟁 물결도 중단됐다. 1920년 4월 노동계급의 가장 선진적인 부위였던 토리노시市의 노동자들이 싸웠을 때, 이들은 개혁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이탈리아사회당PSI에 배신당해 고립됐다. 9월에 공장 점거 물결이 확산되고 있을 때에도 이탈리아사회당은 이를 방관하며 혁명적 기회를 흘려보냈다. 이탈리아나 독일에서 승리했다면 유럽 전역의 계급 세력 균형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패배로 인해 세력 균형은 옛 지배계급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이를 배경으로 1921년 여름 코민테른 3차 대회가 열렸다. 이미 그해 독일에서 벌어진 사건들로, 신생 공산당들의 실천이 당면한 전략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선명히 드러났다. 1921년 3월 독일공산당KPD 지도부는 인터내셔널(아직 체계를 다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에서 파견된 고문단의 조급하고 부적절한 조언에 따라 상황을 완전히 오판한 나머지, 국지적 파업 운동을 봉기로 발전시키려 했다. 전혀 준비되지 못했던 이 봉기는 재앙을 낳았다. “그 모험이 예정된 파국을 맞이하자 야만적 탄압이 뒤따랐다. 독일공산당은 불법화됐다. 당원이 15만 명 또는 그 이하로 괴멸적으로 감소했고 수많은 투사가 투옥됐다.”
이러한 상황을 검토하면서(그리고 독일공산당에 제공된 조언을 비판적으로 보며), 레닌과 트로츠키는 공산당들에게 후퇴의 기예를 가르칠 필요가 있고 공동전선이 이 과제를 위한 핵심 수단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과정은 코민테른 제3차 대회에서 시작해, 1922년 11~12월에 열린 제4차 대회까지 계속됐다. 계급 세력 균형의 변화에 직면한 노동자들은 단결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제대로 적용한다면, 공동전선을 통해 그러한 단결을 이루는 동시에 개혁주의로부터 노동자들을 획득하고 새로운 투쟁의 물결에 대비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하게 설명한 글은 트로츠키가 1922년 초 프랑스 공산당원들을 겨냥해서 쓴 보고서 “공동전선에 대하여”이다.
공산당이 [개혁주의적 — 추나라] 사회민주당과 철저하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결별하지 않았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당이 되지 못하고, 부르주아 국가에 부착된 의회주의적 안전밸브로 영원히 남았을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누구든지 공산주의 ABC의 첫 글자도 모르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공산당은, 공산당과 비공산당(사회민주주의 세력 포함) 노동 대중 간의 조율된 공동 행동을 가능케 할 조직적 방안을 끝까지 강구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공산당이 대중 행동을 바탕으로 노동계급의 다수를 획득할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셈일 것이다. 공산당은 공산주의 선전 단체로 타락해 권력 장악을 위한 당으로는 결코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칼을 가진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 칼에 날을 세워야 한다. 날을 세우는 것으로도 충분치 않다. 그 칼을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을 개혁주의자들로부터 분리한 후 조직적 규율로 그들을 하나로 융합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은 프롤레타리아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벌이는 투쟁의 온갖 집단 행동들을 지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 ABC의 두 번째 글자다.
혁명가들이 개혁주의자들과 갈라서는 것은 출발점에 불과하다. 혁명가들은 노동계급 안에서 다수파가 되려면 개혁주의자들과 나란히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공동전선의 연대 대상은 개혁주의 노동자들로만 한정해야 할까, 아니면 개혁주의 지도자들도 포함해야 할까? 트로츠키는 “이런 질문 자체가 오해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깃발이나 당면 실천 슬로건만으로 노동 대중을 결집할 수 있다면, 당이건 노동조합이건 개혁주의 조직들을 그냥 건너뛸 수 있다면,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면 공동전선 문제 자체가 지금 같은 형태로 제기되지 않을 것이다. 노동계급의 매우 중요한 특정 부문들이 개혁주의 조직에 속해 있거나 그 조직을 지지한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들은 개혁주의 조직과 결별하고 우리와 함께하기에는 아직 경험이 충분하지 않다.
19 개혁주의자들의 이런 특징 때문에, 개혁주의자들이 단결의 호소를 받아들일 경우 혁명가들은 확실히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고 이전까지 개혁주의를 받아들인 노동자들을 혁명 쪽으로 획득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단결을 거부한다면, 이 지도자들이 노동자들의 이익을 방어하는 데 진지하지 않다는 것이 폭로될 것이다.
이처럼 개혁주의 지도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그들에게 딜레마를 안겨 준다.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대중 운동이 가진 혁명적 잠재력을 두려워한다. 그들이 선호하는 무대는 의회 연단, 노동조합 사무실, 중재위원회, 각료 대기실이다.”마지막으로, 트로츠키는 공산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우리의 비판과 선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직적 합의는 어떠한 것도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공동전선에 참여하지만 단 한순간도 공동전선 속으로 용해돼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공동전선 내에서 독립적 분대로서 활동해야 한다. 바로 투쟁을 통해 광범한 대중이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더 잘 싸우고, 사태를 더 명확히 이해하고, 더 대담하고 단호하다는 것을 체득하도록 해야 한다.
공동전선의 경험
21 개혁주의 조직의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하는 것을 두고 당내 반발이 있었지만, 공산당은 이를 만회할 성과를 일터에서 거둘 수 있었다. 1922년에 일터에서는 공장위원회들이 강력한 세력으로 재부상하고 있었다. “1922년 가을이 되면, 공산당은 수천 개의 공장위원회에서 충분한 영향력을 획득해 그해 11월 공장위원회 전국 대회를 개최하고 그 대회에서 정치적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22 또한 공산당은 정부가 공공부문의 파업을 금지하려 한 그해 봄 철도 파업을 통해 영향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공산당은 개혁주의 정당들과 노동조합 총연맹들에 정부의 금지 조치에 맞선 철도 파업을 지지하자고 촉구했다. 개혁주의 조직들이 이 파업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당이 많은 노동자들에게 가장 진지한 계급 투사로 인식되는 계기가 됐다.
1922년이 되면 독일공산당은 1921년 3월의 재앙적 모험으로 입었던 상처에서 일부 회복하기 시작한다. 공동전선 전략은 이 과정에서 핵심적 구실을 했다. 피에르 부르에가 독일 혁명을 다룬 기념비적인 역사 책에서 기록하고 있듯이, 개혁주의적 사회민주당과 공산당 간 논의를 통해 드러난 것은 “사회민주당은 가장 완강하게 공동 행동을 거부한다는 것, 공산당은 가장 의욕적으로 동맹을 맺으려 한다는 것”이었다.또한 독일 공산당은 직접적인 정치 문제들에서도 공동 행동을 하자고 개혁주의 조직들을 압박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극우 부상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1922년 6월 24일, 정부 각료인 발터 라테나우가 전직 우파 군 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
[라테나우] 살해로 노동계급의 분노가 거대하게 폭발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공산당의 단결 촉구를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독일 전역의 사회민주당원들이 공산당원들과 함께 극우에 맞서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 지도자들이 단결을 위한 약간의 제스처라도 취하지 않는다면 당원증을 찢어 버릴 기세였다.
잠깐 동안 사회민주당과 공산당 사이에 극우에 맞서기 위한 동맹이 공식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다가 평당원들이 진정되자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돌연 협상을 중단했다.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거부했음에도 공산당은 공동 행동 문제를 거듭해서 제기했다. 공산당은 극우에 맞선 자기 방어 문제를 대개 인플레이션에 맞서는 공동 행동과 연결하면서 국가가 산업 시설을 장악해 공장위원회의 통제 아래 둘 것을 요구했다. 공산당은 사회민주주의 조직들의 지도부를 향해 호소했지만, 이는 사회민주당 평당원들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기층 공산주의 조직들은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거부한 공동 행동으로 사회민주당 평당원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25 당 지도부는 ‘3월 행동’을 낳은 초좌파적 광기에 격렬하게 반대했었는데, 이제는 반대 방향으로 치달아 “공동전선 노선에 뚜렷하게 우편향적인 관점”을 부여했다. 26
이러한 전술 덕분에 1921년 중반에서 1922년 말까지 공산당 당원은 약 4만 명 증가해 전체 당원 수가 약 22만 명이 됐다. 같은 시기 사회민주당은 비슷한 수의 당원을 잃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교훈의 한 측면만 배웠다. 공산당은 대중의 정서와 계급 세력 균형을 읽고 그에 따라 방향을 적절하게 전환하는 능력, 즉 레닌이 기예의 경지로 끌어올린 전술적 유연함을 전혀 보여 주지 못했다.1923년 프랑스 군대가 라인 지방을 점령하자 정치 위기가 극심해지고, 전대미문의 인플레이션으로 대표되는 심각한 경제 위기가 발생하자 노동자 투쟁이 급증하며 공장위원회들이 새로운 활기를 얻어 러시아의 소비에트와 유사하게 변모했다. 그해 6월이 되면 공산당은 공동전선을 통해 당원을 7만 명 더 늘릴 수 있었고 사회민주당을 좌우로 갈라 놓을 수 있었다. 상황이 혁명적으로 급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 지도부는 방어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조율된 공세적 행동을 통해 세력 균형을 시험해 보는 작업에 착수하지 않았다. 1923년 8월 주로 공산당 직장 대표들이 주도한 총파업이 우파 쿠노 정부를 무너뜨리자 공산당은 깜짝 놀랐다. 그 시점에서 공산당 지도부는 혁명을 일으킬 필요성에 원칙적으로 동의했지만, 노동자들의 일상 투쟁을 무장 봉기라는 과제와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봉기를 앞두고 공산당은 기술적이고 군사적인 준비만 했지,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무장시키는 것은 제대로 하지 않았다. 뮐러 장군이 작센주州로 진격하자 사태 전개가 빨라졌다. 작센주에는 전투적 노동자 운동으로 좌파 사회주의 주정부가 들어서 있었고, 공산당의 혁명가들도 장관을 맡고 있었다. 공산당은 새로운 총파업을 촉구하는 문제에서 사회민주당 좌파 지도자들의 지지를 기대했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총파업 요구는 봉기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개혁주의에 여전히 충실했던 사회민주당 좌파 지도자들은 총파업 호소를 거부했고, 기대됐던 독일 전역의 혁명은 좌절됐다. 독일 부르주아 계급은 이를 기회로 지배를 재확립했고(단 몇 년에 불과했지만), 유럽 전체의 정치 지형은 한층 더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그람시와 공동전선
이탈리아 공산당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공동전선이라는 아이디어를 이탈리아에 적용해 보려 했다. 무솔리니가 권력을 장악한 지 3년 반이 된 1926년에 쓴 리옹 테제에서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당은 전략과 전술을 통해 “노동계급을 지도한다.” … 당이 노동계급을 지도해야 한다는 원칙을 기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당이 자신의 권위를 외부에서 강요하는 방식으로 노동계급을 지도할 수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 노동계급을 지도하는 능력은 계급의 혁명적 기관임을 ‘자처’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일부로서 계급의 모든 부문과 ‘실제로’ 연관을 맺을 때 비로소 생긴다. … 공산주의자들이 건설하려고 분투하는 반파시스트, 반자본주의 투쟁 ‘공동전선’은 조직된 공동전선을 목표로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전체 대중이 그 주위로 재결집하고 자신의 조직적 표현체라고 여길 수 있는 기구들에 바탕을 둬야 한다. … 이탈리아에서 아직 공산당이 노동계급과 노동 인구 대다수에게 결정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한, 당은 계속해서 공동전선 전술을 활용해야 한다.
이를 실천에 옮길 기회는 거의 없었다. 1926년 가을 그람시는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공동전선이라는 주제는 그의 유명한 《옥중수고》 전반에서 되풀이된다. 예컨대, 그람시의 “모순적 의식”이라는 개념은 그가 공동전선 문제에 몰두했음을 보여 준다.
대중 가운데 능동적인 사람은 실천 활동을 하지만, 명확한 이론적 의식을 갖고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실천 활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한, 그 실천은 세상에 대한 모종의 이해를 포함하고 있다. 반면 그의 이론적 의식은 자신의 실천 활동과 역사적으로 대립될 수 있다. 우리는 그가 두 가지 이론적 의식(또는 하나의 모순적 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그의 실천 활동에 내재된 의식 곧, 현실 세계를 실천으로 변혁하는 과정에서 그와 동료 노동자들을 단결시켜 주는 의식이다. 다른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거나 말로 표현되는 의식 곧, 그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의식이다.
노동계급에게는 수동적이며 기성 질서에 순응하는 요소들도 있지만, 연대하고 투쟁하는 요소들도 있다. 혁명적 정당은 노동자들이 이처럼 모순적 의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단결을 이루고, 그럼으로써 “현실 세계를 실천으로 변혁하는 과정”을 통해 긍정적 요소를 이끌어내야 한다.
트로츠키의 반反나치 투쟁
30 그에 따라 1928년부터 1934년까지는 악명 높은 “제3기” 정책이 강요돼 최악의 “초좌파적” 입장들을 되살려 냈다. 1929년 7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이렇게 선언했다. “강력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있는 나라들에서는 파시즘이 ‘사회파시즘’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취한다.” 31 이러한 분석 때문에 독일공산당 지도자들은 나치라는 실질적 파시스트의 위협을 경시하고, 나치가 독일사회민주당보다 별반 더 위험할 것이 없다고 여겼다. 공산당 투사들이 베를린 같은 도시들에서 나치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우긴 했지만, 공산당 지도자들의 정책으로 인해 더 광범한 노동계급 운동에서 고립된 채 싸워야 했다.
서유럽에서 일었던 혁명적 물결의 패배가 낳은 가장 중요한 부산물 하나는 고립된 러시아에서 스탈린주의가 부상한 것이었다. 이것은 다시 서방 공산당들에게 계급투쟁의 실제 상황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정책들이 강요되는 것으로 이어졌다.트로츠키는 그람시만큼이나 대중 투쟁과 거의 단절돼 있었다. 비록 투옥이 아닌 망명 신세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트로츠키는 유럽 전역의 파시즘에 맞선 투쟁을 탁월하게 분석한 일련의 글을 내놓았다. 그가 공동전선 문제를 가장 날카롭게 다룬 글들 중 일부도 이 시기에 쓰였다. 그는 사회민주주의가 주적이라는 생각을 점점 더 절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 세력 전체는 (그들 내부에 온갖 반목이 있음에도) 파시스트와 첨예하게 충돌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우리의 임무는 이러한 충돌을 기회로 만드는 것이지, 우리의 적대자들을 단결시키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파시즘에 맞서 전선을 쳐야 한다. … 우리는 파시스트들에 맞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동맹할 만반의 태세가 돼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동맹을 받아들이는 모든 기회를 이용해서 그래야 한다. …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노동자들의 압도 다수가 파시스트들에 맞서 투쟁할 것이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말이다. 바로 그 노동자들의 조직이 움직일 때에만 투쟁에 나설 것이라는 점이다.트로츠키의 충고는 무시됐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공산당을 분쇄하고 세상에서 가장 전투적인 노동계급 중 하나에게 끔찍한 복수를 가했다. 패배의 원인은 두 가지였다. 사회민주주의 지도부가 투쟁을 거부한 것과 공산당이 우파에 맞선 동맹에 사회민주당이 참여하도록 강제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1933년의 패배 뒤에 공산당은 총파업을 호소했으나 실패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당은 이전 3년 동안 사회민주당이 주적이며 파시스트들은 위협적이지 않다고 노동자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총파업 실패 후에도 공산당과 코민테른은 여전히 자신의 이론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히틀러의 권력 장악 후에도 코민테른 지도부는 여전히 이렇게 주장했다. “파시즘의 승리 후 지금의 평온함은 일시적인 것이다. 파시스트들의 테러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혁명적 물결이 성장할 것이다.”
민중전선
독일의 사례가 단결을 이루기 위해 투쟁하지 않았을 때의 위험을 보여 줬다면, 1930년대 말에는 이와는 다른 위험, 즉 잘못된 종류의 단결이 낳는 위험을 보게 된다. 1933년 독일 나치의 승리는 사회민주당과 공산당 계열의 투사들에게 충격을 줬고, 이런 정서 때문에 이듬해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는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지도자들이 극우의 집권 시도에 맞서 공동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2월에 파리의 거리에서 거대한 시위가 벌어졌고 10월 스페인 아스투리아스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시점에 모스크바의 스탈린은 새로운 노선을 갖고 나왔다. 바로 “민중전선popular front”이었다. 이는 공산당이 사회민주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주류 자본주의 정당들과도 동맹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정치 투쟁은 모스크바의 외교 정책 목표 ― 프랑스 제국주의와 바라건대 영국 제국주의와 군사 동맹을 맺는 것 ― 에 종속됐다.
이제 프랑스 공산당은 선거를 위해 “민중전선People’s Front”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동맹은 단지 노동계급 정당들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었다. 급진당도 포함됐는데 급진당은 중도 좌파뿐 아니라 중도 우파까지 아우르는 부르주아 정당이었다. 갈수록 더 긴박하게 트로츠키는 민중전선을 좌우하는 것은 급진당이라고 주장했다.
‘민중전선’은 프롤레타리아트와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의 동맹이고,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는 급진당이나 그와 유사한 소규모 변변찮은 정당들의 형태로 참여하고 있다. … 급진당에 투표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참여하지 않고 따라서 ‘민중전선’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급진당은 ‘민중전선’에서 동등한 지위를 넘어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노동자 정당들은 급진당의 강령 수준으로 자신의 활동을 제한하도록 강요당한다.
민중전선은 인기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증대하는 우파의 위협에 맞서 단결하자는 열망에 올라탔기 때문이다. 민중전선이 1936년 6월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해 사회민주주의 지도자 레옹 블룸이 정부를 구성했다. 이 정부에 공산당 장관은 한 명도 없었다. 공산당이 프랑스 지배계급을 겁주지 않으려고 정부 바깥에 남아 있기로 동의한 것이다.
35 는 제목의 글을 썼다. 지배계급은 통제력을 잃지 않기 위해 양보해야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블룸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공산당의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에게 파업을 끝내라고 압박했다. “(공산당이) 새로 얻은 권위는 운동을 발전시키는 데 사용되지 않고 운동을 끝내는 데 사용됐다. 토레즈는 ‘파업을 끝낼 줄도 알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36
민중전선의 한계는 곧 명백해졌다. 선거 승리에 뒤이어 프랑스의 계급투쟁 수준이 급격히 상승했다. 파업과 점거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600만 명 이상이 여기에 참여했다. 망명지 노르웨이에 있던 트로츠키는 영감을 받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됐다”37 스페인 내전이라는 훨씬 더 극적인 상황에서도 민중전선은 우파에게 양보하다 패배하는 유사한 패턴을 반복했다. 38 모스크바의 영향력 아래 있던 공산당은 두 사례 모두에서 노동자들의 운명을 일부 지배계급과의 동맹에 종속시켰고, 그 결과로 혁명적 기회와 대중 투쟁은 소진되고 우파가 승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기회를 허비한 결과로 공산당은 더한층 우경화했고, ‘민중전선People’s Front’을 ‘프랑스 전선’으로 전환해 우익 민족주의자들도 포함시키자고 요구했다. 갈수록 더 보수적인 정부들이 연이어 들어섰는데도 공산당은 이들을 지지했고, 반면 노동자 운동은 쇠퇴했다. 공산당의 이런 행태는 민중전선 후보로 당선된 의원들이 공산당 불법화를 의결할 때까지 이어졌다. 마침내 1940년 6월 민중전선에 속했던 정당들이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던 의회는 “페탱과 라발의 준파시스트 정권의 수립”을 지지했다.공동전선의 부활
1970년대 초 영국 국제사회주의자들(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전신)은 작지만 만만찮은 혁명적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와 함께 국제사회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에 의해 변질되기 전 코민테른의 전통을 적용하고자 했다. 1970년대 중반 [노동당] 윌슨 정부하에서 급격한 실업률 상승, 실질 임금 삭감, 복지 국가에 대한 공격이 벌어지고 있을 때, 던컨 핼러스는 이에 반대하는 공동전선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글을 이 잡지에 썼다. “이 모든 상황은 우파의 전진과 공세를 격퇴하기 위해 좌파가 단결해야 한다는 문제를 전면에 제기한다.” 이 공동전선에서 잠재적 동맹들은 “노동당 좌파, 남아 있는 노동조합 좌파들, 공산당 그리고 혁명적 좌파”였다.
던컨 핼러스는 공동전선이 무엇이 아닌지도 설명했다.
공동전선은 혁명적 정당의 대체물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공동전선 전술은 혁명적 정치와 조직을 개혁주의 정치와 조직에 종속시키는 것이 돼서는 절대 안 된다. 공동전선은 혁명가들이 독자적 세력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혁명적 세력이 클수록 공동전선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많아진다. 공동전선은 “차이는 잊어버리고 단결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공동전선 전술은 개혁주의자들과 중간주의자들이 스스로 내뱉은 말에 부응하도록 강제하는 정치 투쟁, 그들이 자본주의 지배층과의 유대 관계(직접적이든 노동조합 관료를 통해서든)를 일부라도 끊고 자신들도 지지한다고 공언한 목표들을 위해 혁명가들과 함께 투쟁하게 만드는 정치 투쟁을 늘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공동전선은 혁명적 단체들의 연합도 아니다. 공동전선의 취지는 현재로서는 혁명적 정치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지만 당면 요구들에는 동의하는 노동자들과 노동자 조직들을 참여시키는 것이다.바로 이렇게 단결을 압박하는 방식에 기초해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반나치동맹Anti Nazi League, 광원 지원 단체, 비교적 최근에는 전쟁저지연합과 관계를 맺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각각의 경우에 개혁주의 조직·경향의 지도적 인물들과 함께 일할 태세를 갖춰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독자적 주장, 독립적인 선동 역량, 독자적인 신문과 조직을 유지했다. 오늘날에는 같은 접근법을 리스펙트Respect와 여타 공동전선(‘파시즘에 맞서 단결하자Unite Against Fascism’, ‘공공주택을 방어하라Defend Council Housing’)에 적용하려 하고 있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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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oseph Choonara, ‘The united front’, International Socialism 117(December 2007)
↩
- Cliff, 1986, pp253-254. ↩
- Trotsky, 1989, p132 (강조는 트로츠키의 것). ↩
- Marx and Engels, 1977a. ↩
- 당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태도를 뛰어나게 개괄한 것으로는 Molyneux, 1978를 보라. ↩
- Marx and Engels, 1977b. ↩
- Trotsky, 1977, p1126. ↩
- Trotsky, 1989, pp121-122(여기서 트로츠키는 자신을 3인칭으로 언급하고 있다.) ↩
- Trotsky, 1975, p108에서 인용. ↩
- Trotsky, 1977, p1126. ↩
- Bone, 1974, p101. ↩
- Trotsky, 1977, p1127. 이 인용문에 주목하게 해 준 콜린 바커에게 감사를 전한다. ↩
- Trotsky, 1977, p1127. ↩
- Trotsky, 1977, pp1128-1129. ↩
- Trotsky, 1977, p1130. ↩
- Hallas, 1985, p33. ↩
- Hallas, 1985, p64. ↩
- Trotsky, 1974a, p93. ↩
- Trotsky, 1974a, pp93-94. ↩
- Trotsky, 1974a, p94. ↩
- Trotsky, 1974a, p96. ↩
- Broué, 2006, p607. ↩
- Broué, 2006, pp609-610. ↩
- Harman, 1997, p236. ↩
- Harman, 1997, p236. ↩
- 전략과 전술에 대한 이러한 유연성은 토니 클리프가 쓴 《레닌: 당 건설을 향해》(1986)[국역: 《레닌 평전 1: 당 건설을 향해》, 책갈피, 2010]의 주요 주제였다. 2008년 후반에 재출판될 예정인데, 신세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
- Hallas, 1985, p91. ↩
- ‘독일의 10월’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Harman, 1997의 13장을 보라. ↩
- Gramsci, 1990, pp367-373. ↩
- Harman, 2007, pp109-110에서 인용. ↩
- 소련의 타락에 대해서는 Binns, Cliff and Harman, 1987; Cliff, 1974를 보라. 코민테른의 타락에 대해서는 Hallas, 1985, chapters 5, 6 and 7을 보라. ↩
- Hallas, 1985, p127에서 인용. ↩
- Trotsky, 1975, pp104-105. ↩
- Harman, 1989, p256에서 인용. ↩
- Trotsky, 1974b, pp99-100. ↩
- Trotsky, 1974c. ↩
- Hallas, 1985, p146. ↩
- Hallas, 1985, p147. ↩
- 스페인 민중선선의 일대기는 Durgan, 2007, and Hallas, 1985, pp148-155를 보라. ↩
- Hallas, 1976. ↩
- 공동전선 전략을 적용한 사례로 ‘리스펙트’와 그 전에 있었던 ‘사회주의동맹Socialist Alliance’에 대해 더 알려면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117호에 실린 크리스 하먼의 글[국역: ‘영국 리스펙트의 분당 사태’, 노동자연대, 2008]과 Rees(2001, 2002)를 참고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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