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탈성장은 대안일 수 있을까? *
《마르크스21》 편집부: 다음은 탈성장론을 옹호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아일랜드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고故 존 몰리뉴의 글이다. 이 글은 아일랜드 사회주의노동자네트워크SWN가 주도하는 좌파 연합체 ‘이윤보다 인간을’PBP에 참여하고 있는 트로츠키주의 단체 RISE의 지도적 회원 폴 머피와 제스 스피어의 글을 반박하는 글로 쓰였다.
자본주의는 축적과 성장을 향한 무제한적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 탓에 기후 재앙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좌파의 일부가 자본가들이 덧셈 기호를 쓰는 곳에 뺄셈 기호를 그으려 하며 “탈성장” 정책을 요구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시도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도 아주 중대한 실책이라고 생각한다.
1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공산주의자는 “노동계급 전체의 이해관계와 분리되거나 동떨어진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이렇게 썼다. “경제학자가 자본가 계급의 과학적 대변자이듯이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는 노동계급의 이론가이다.” 엥겔스는 《공산주의의 원리들》에서 이렇게 썼다. “공산주의는 노동계급 해방의 조건에 관한 이론이다.”탈성장 옹호는 우리 정치[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계급 기반에서 한 걸음 멀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계급을 사회 변혁의 주체가 아니라 그저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는 중간계급 환경운동에 한 걸음 가까워지는 것이다.
탈성장을 요구하며 지역 사회나 작업장에서 노동자들과 관계 맺기란 실로 불가능하다. 이것을 지적하는 것은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성소수자 차별 문제에서 노동계급의 후진적 의식에 타협하는 것과는 엄연히 경우가 다르다. 또, 그저 반발을 두려워해서 후퇴하는 것도 아니다.(노동계급 사람들이 반발하리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노동계급이 탈성장에 반발하는 이유는 탈성장이 실제로 그들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하에서 탈성장은 노동계급에게 재앙일 것이다. 현실에서 탈성장은 경기 침체와 실업, 그에 따른 고통을 뜻할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민주적으로 계획된 탈성장’이다”라고 주장해도 이러한 “난점”은 여전히 남는다. 자본가 계급이 권력을 쥐고 있는 자본주의를 그대로 둔 채로는 계획적 탈성장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어떻게 포장하든, 탈성장을 향한 시도는 어김없이 노동계급에게 타격을 줄 것이다.
탈성장론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이유는 탈성장 과정의 고통을 우리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노동계급 이외에는 자본주의에 만만찮게 도전해 승리를 거두거나 사회주의를 건설할 사회 세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이클 뢰비, 벤지 악불르트, 사브리나 페르난데스, 요르고스 칼리스는 “생태사회주의적 탈성장을 위해”라는 글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노동계급을 정의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서 그런 난관을 우회하려 했다.
생태사회주의적 탈성장을 이루려면 정치·경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지배계급과 화석연료 기업들에 맞서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투쟁의 주체는 누구인가? 인구의 대다수이자 이미 자본주의의 사회적, 생태적 해악 때문에 큰 고통을 겪고 있는 도시와 농촌의 노동계급이 적극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 체제를 극복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노동계급의 정의를 확장해서 사회적, 생태적 재생산을 담당하는 사람들, 사회생태 운동의 가장 선두에 있는 사람들을 노동계급에 포함시켜야 한다. 청년, 여성, 토착 원주민, 농민이 바로 그들이다.
이러한 주장은 “도시와 농촌의 노동계급”을 그저 운동의 여느 구성 요소 중의 하나로 축소시킨다. 또, 이론적으로는 형편없이 뒤죽박죽이다.
이들은 노동계급의 정의를 확대해 “청년과 여성”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청년 중에는 노동계급 청년뿐 아니라 지배계급 청년, 중간계급 청년도 있다. 여성 중에도 노동계급 여성이 아닌 지배계급 여성, 중간계급 여성이 있다. 단순히 정의를 바꾼다고 해서 이들이 노동계급 안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노동계급과 근본적으로 이해관계가 다르다.
2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밝히자면, 이들을 노동계급에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해서 투쟁이나 운동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당연히 노동계급은 농민과 토착 원주민, 모든 피억압 대중과의 동맹을 필요로 한다.)
더는 숲이나 덤불, 사막 등지에서 수렵·채집을 하며 살지 않는 토착 원주민들은 도시로 이주해 노동계급의 일부가 됐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아닌 토착 원주민도 있다. 농민들은 소규모 토지 소유자들로서 노동계급이 아니다.물론, 노동계급을 이렇게 정의한 것은 마이클 뢰비 등이지 스피어와 머피는 아니다. 또한 나는 스피어와 머피가 이런 정의를 거부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뢰비 등의 사람들이 노동계급을 이렇게 정의하게 된 것은 생태사회주의적 탈성장의 ‘주체’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스피어와 머피는 탈성장으로는 노동계급과 관계 맺기가 어렵다는 문제점을 두 가지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둘 모두 설득력이 떨어지고 만족스럽지도 않다. 첫째로, 그들은 제이슨 히켈을 인용하며 탈성장이 인기를 끌 수도 있다고 시사한다.
게다가 탈성장은 노동계급에게 ‘애시당초 고려 사항도 못 된다’는 주장은 최근 설문조사들에 부합하지 않는다. 《적을수록 풍요롭다: 지구를 구하는 탈성장》에서 히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환경 보호와 성장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사람들은 환경 보호를 더 중시했다.” 유럽연합 나라들에서는 ‘환경 보호로 인해 경제 성장이 해를 입는다고 할 지라도 환경 보호를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는 질문에 55~70퍼센트가 긍정하는 답변을 했다. 심지어 ‘야수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환경보호가 성장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에 70퍼센트가 동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을 매우 호도하는 것이다. 여론조사 설문에서 사람들은 도덕적 잣대에 따라 답변하는 경우가 흔하다. 더욱이 이 설문의 문항들은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인 우선순위를 다룬다. 경제 성장에 “해를 입힌다”는 것은 성장을 (2~4퍼센트 정도) 줄인다는 말처럼 들리지, “탈성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만약 탈성장이 그들의 직장과 지역 사회와 연관돼 구체적으로 제기된다면 결코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둘째, 스피어와 머피는 탈성장이 대중 동원의 기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탈성장이 슬로건이 아닌 ‘길잡이 개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사례로 ‘국가를 분쇄해야 한다’는 레닌의 사상과, 행동을 위한 대중적 슬로건인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의 관계를 든다. 그러나 그들의 발상과 예시 모두 잘못됐다.
이론적 개념과 대중적 슬로건의 관계는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관계여야 한다. 그람시는 《옥중 수고》에서 이를 훌륭하게 설명했다.
현대 이론[마르크스주의 — 몰리뉴]은 대중의 자생적 정서와 대립할 수 있는가? (여기서 “자생적”이라는 것은 의식적인 선두 집단이 벌이는 어떤 체계적인 교육 활동의 결과가 아니라 ‘상식’ 즉, 대중이 받아들이고 있는 기성 세계관하의 일상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는 뜻이다.)
현대 이론은 대중의 자생적 정서와 대립될 수 없다. 둘 사이에는 ‘양적인’ 차이가 존재할 뿐 질적인 차이는 없다. 말하자면 상호적 ‘환원’, 즉 현대 이론이 자생적 정서와 통하고 자생적 정서가 현대 이론과 통하는 것은 분명 가능하다.
‘탈성장’의 경우에는 이러한 상호작용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하에서 탈성장은 노동계급의 이익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하에서, 또는 사회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의 탈성장은 뒤에서 짧게 다루도록 하겠다.)
무상 대중교통을 널리 보급하라는 등의 요구는 탈성장론의 구체적 적용 사례로 볼 수 없다. 무상 대중교통 요구는 버스와 기차, 버스 기사와 기관사 등 관련 분야의 생산과 일자리의 확대를 수반할 것이고, 노동자들도 무상 대중교통 요구를 그렇게 이해할 것이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요구는 ‘기후’ 일자리를 늘리고 풍력 터빈과 태양광 패널을 증설하라는 등의 요구로 제기해야 마땅하다.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탈성장 개념과 대중 슬로건 사이에 만리장성을 세우고 탈성장은 장막 뒤에 숨겨두기만 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RISE[스피어와 머피가 주도하는 트로츠키주의 조직 — 역자]가 탈성장을 주제로 최근 주최한 한 공개 토론회에서 한 참가자가 청중 토론 시간에 지적한 바이기도 하다. 그 참가자는 RISE가 더블린 시 도심 전역에 탈성장을 옹호하는 포스터를 도배했다고 지적했다. [탈성장을 슬로건이 아닌 ‘길잡이 개념’으로 삼을 수 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실천에서는 결국 그것을 슬로건으로 제시했다는 뜻이다. — 역자]
그리고 설령 생태사회주의자들 자신은 탈성장을 적극 내세우지 않더라도 우리의 적들이 이를 전면으로 끄집어 낼 것이다. 특히 선거 운동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사실 스피어와 머피도 스스로 이를 의식한 듯 다음과 같이 쓴다.
따라서 분명 자본주의 틀 안에서 에너지 사용과 물질 처리량을 필요한 만큼 줄인다면 전 세계적 수준에서 국내총생산GDP이 줄어들 것이다. 우리에게 이는 목표가 아니라 결과에 가깝다. 그러나 논쟁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 문제에 관해 솔직해져야 한다. [강조는 몰리뉴의 것]
이는 결국 자본주의하에서의 탈성장을 지지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경기 침체를 뜻하는데 이들은 여기에 솔직해지자고 하고 있다. 물론, 단순한 말실수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진정으로 옹호하는 것은 ‘전환 강령으로서의 탈성장’이나 사회주의로 전환하는 시기에 추진하는 탈성장 정책, 또는 완전히 꼴을 갖춘 사회주의에서 필요할 탈성장일 수도 있다.
사회주의와 탈성장
스피어와 머피는 ‘전환 강령’에 많은 강조점을 두는 전통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하고 가자. 탈성장은 전환 강령으로서 첫 번째 관문도 통과하지 못한다. 트로츠키가 설명했듯이, 전환 강령은 반드시 “오늘날의 조건과 오늘날 광범한 노동계급의 의식에 기초”해야 하며 “한 가지 최종 결론, 즉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장악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탈성장은 “오늘날 광범한 노동계급의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다.
또한 탈성장은 새로운 노동자 국가에 들어설 혁명 정부의 정책일 수도 없다. 혁명이 한 나라에서 먼저 일어난다고 할 때(매우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다), 해당 노동자 정부·국가의 최우선 순위는 자신을 고립시키고 분쇄하려는 반혁명 시도 속에서 살아남아 다른 나라들로 혁명을 확산시키려 애쓰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현실적으로 사고한다면 그 나라의 자본가 계급이 패배 후 자본 유출과 사보타주를 감행하려 들고, 국제 자본주의는 제재와 단교, 심지어는 노골적으로 침공할 수도 있음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혁명 정부가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긴급한 조처들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할 것이다. 계획적 탈성장은 즉각적인 임금 노동 폐지나 즉각적인 군비 축소와 마찬가지로 혁명 바로 다음 날 의제에 오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가정해 보자. 오! 다행히도 모든 문제들이 극복되고 혁명이 확산돼 국제 사회주의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단계에 도달해 완전한 공산주의와 계급 철폐로 나아가게 됐다. 그럼 이제 탈성장을 추진해도 되지 않을까?
이윤이 아닌 필요에 의한 생산에 기반한 사회주의 사회에서 GDP 감소는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완전히 무의미해질 것이다. GDP는 생산된 재화의 양과 사용된 에너지의 양을 측정하는 지표가 아니다. GDP는 생산된 상품·서비스의 가치/가격을 측정하는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척도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로 성공적으로 바뀌었다면 GDP 개념은 그저 쓸모없어질 것이다. 스피어와 머피도 이를 알기에 더 ‘객관적’으로 들리는 ‘에너지 소비’와 ‘물질 처리량’이라는 용어를 쓰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 이런 응답은 탈성장이 해결하고자 하는 더 중대한 물음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가 에너지 소비와 물질 처리량을 전반적으로 줄여야 하는가’라는 문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그렇다”라고 분명하게 답한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적 수준에서 물질 처리량과 에너지 소비를 상당히 줄여야 할 과학적 필요성”에 대해 주장한다.
이것이 스피어와 머피 주장의 중요한 핵심이다. 여기서 ‘에너지 소비’와 ‘물질 처리량’이라는 용어가 그토록 중심적 구실을 하는데도 그들이 그 용어를 딱히 정의하거나 그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이 용어들은 딱히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에너지 소비량부터 한 번 살펴보자.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과학적 관점에서 모든 생명과, 동물, 인간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걷기, 뛰기, 자전거 타기, 수영하기 등 모든 이로운 활동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왜 머지않은 미래에 에너지 사용량을 줄여야 할까? 화석연료 사용을 왜 줄여야 하는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화석연료는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결코 멀지 않은 미래에 고갈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력·태양력·조력과 같은 에너지의 사용은 왜 줄여야 할까? 이런 에너지들은 고갈되지도 않을 것이며 환경을 파괴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물질 처리량은 어떻게 볼 것인가?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물질 처리량이란
일정 시간 안에 가공되는 원자재의 양이나 수효. 즉, 처리량은 어떤 생산 과정이 일정 시간 동안 진행되는 비율이다.
이 용어는 자본주의 산업에서 가져온 용어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이 용어를 쓴 경우는 없는 듯하다.) 그런데 이런 물음이 또다시 꼬리를 문다. 왜 일정 시간 동안 가공되는 원자재(어떤 원자재? 모든 원자재?)의 양을 줄여야 하는가? 스피어와 머피는 과학적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과학적 근거를 전혀 인용하지 않는다. 온실가스-기후변화 관계와 달리 이 문제에 관해서는 과학계의 합의된 의견이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스피어와 머피는 인간의 모든 활동과 생산이 근본적으로 지구에 해를 끼치고(만약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인류의 미래를 위협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인가?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어째서 탈성장을 전면적으로 요구해야 하는가? 어째서 해로운 활동과 공정(화석연료 사용, 무기 제조, 화학 물질 오염 등)은 줄이거나 없애되, 이로운 활동과 생산(병원과 학교, 대중교통 인프라 확충 등)을 확대하고 발전시키라고 요구해서는 안 되는가? 생태사회주의자들은 이미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이는 사회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주장해 온 바이기도 하다. 또, 이런 입장은 노동계급 속에서 지지자를 늘리려는 시도와 충돌하지도 않는다.
스피어와 머피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내 생각에 이 맥락에서 다뤄야 할 두 가지 문제가 더 있다.
첫째는 생산력에 관한 것이다. 이는 ‘물질 처리량’에 그나마 가장 가까운 마르크스주의 용어일 것이다. 그러나 생산력 개념은 더 포괄적이고 더 유익하다. 그 개념은 역사유물론의 초석이기도 하다. 1845년 《독일 이데올로기》를 쓴 이래 마르크스는 (그에 이어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그리고 그 이외에도 덜 알려진 숱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생산력이 인간 역사의 근본적인 동력이라고 줄곧 주장했다.
생산력 발전이 비록 자본주의하에서는 왜곡되고 속박돼 있지만 여전히 인류 전체의 진보를 가능케 하는 궁극적 기초이자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기본 조건이다. 생산력 발전은
공산주의의 절대적이고 실질적인 전제 조건이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그저 곤궁이 만연할 것이며, 기본적인 필요조차 충족시키지 못하고, 삶의 필수적 조건을 둘러싼 쟁탈전이 다시 시작되고, 필연적으로 옛날의 추잡한 일들이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생산력 발전은 생산되는 ‘재화’의 양을 맹목적으로 늘리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이 의식적이고 합리적으로 자연에 영향을 미쳐 자신의 필요를 충족할 능력이 커지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그런 필요에는 지속가능성도 핵심적으로 포함된다. 또한 생산력 향상은 (마르크스가 분명히 밝혔듯이) 노동시간을 줄일 방법이기도 하다.노동계급은 정치적 우위를 이용해 점차 자본가 계급에게서 모든 자본을 빼앗아서 생산의 모든 수단을 국가,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노동계급의 손에 집중시키고 생산력 전반을 최대한 빨리 증대할 것이다. [강조는 몰리뉴의 것]
앞서 언급했듯이 스피어와 머피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하에서 탈성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 핵심 사상들을 저버리는 것에 가깝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사상이니까 무조건 수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내용을 수정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감수해야 한다. 이 경우에 그 대가는 역사 이론을 완전히 새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더 우려스러운 둘째 문제는 다름 아닌 ‘과잉인구론’이다. 자본주의에서든 사회주의에서든 생산(“에너지 소비”와 “물질 처리량”)을 전반적으로 줄여야 한다면 논리적으로 그다음 단계에서는 인구 조절의 필요성을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온갖 위험한 함의가 수반된다.
5 와 제이슨 히켈 6 은 이런 관점을 살짝 내비치는 수준이고, 앨런 소넷 7 은 이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물론, 스피어와 머피는 자신들은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고 그럴 의도도 없다고 답할 수 있다. 그러나 ‘과잉인구론’은 환경 운동 안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갈래이며, 일부 생태사회주의적 탈성장 지지자들도 다양한 수준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요르고스 칼리스공상적 사회주의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 이전에 가장 지배적이었던 사회주의 경향은 생시몽, 푸리에, 오언으로 대표되는 공상적 사회주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그들이 자본주의에 관해 많은 중요한 점들을 탁월하게 통찰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사회 변화 전략이란, 미래 사회의 청사진을 고안해 내 그것이 현 질서보다 더 합리적임을 보여 주고, 거기에 권력자들이 설득돼 체제 변화에 착수하기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것이 완전히 헛된 희망이며, 사회주의란 자본주의를 실제로 전복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 세력인 노동계급의 운동이어야 한다고 역설하며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완전히 갈라섰다.
오늘날 환경운동은 유토피아주의자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세계 정치 지도자들이 생태계를 파괴하는 길에서 벗어나, 그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고안하고 다듬은 견실한 생태학적 해결책을 지도자들이 채택하도록 설득하는 게 자신의 임무라고 믿는다. 이 현대의 유토피아주의자들 중에는 스스로를 생태사회주의자로 여기는 이들도 포함돼 있다. 그들은 더 급진적이고 자본주의와 단절해야만 실현 가능한 것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다르긴 하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들의 해결책을 현실의 계급투쟁과 접목시킬 방법에 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으며, 그러한 접목을 위해 실천하는 일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스피어와 머피는 결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탈성장론은 그런 길로 가는 발걸음을 떼는 것이다. 왜냐면 서두에서 강조했듯이 탈성장론은 사회를 이러저러하게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자본주의 극복이든 타도든 그런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 세력에게서 오히려 멀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다.
MARX21
주
-
출처: John Molyneux, ‘Degrowth: A response’, Rupture, 4 December 2022.
↩
- F. Engels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7/11/prin-com.htm ↩
- 권위에 기대어 주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마르크스나 레닌, 트로츠키라면 이론을 이렇게 가뿐히 수정하는 것에 질겁했을 것이다. 정치적 경향으로서의 볼셰비즘과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 모두 노동자와 농민을 구분하는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 ↩
- 흥미롭게도 이 중요한 구절은 The Revolution Betrayed(New Park, p.56) [국역: 《배반당한 혁명》 (갈무리), 88쪽]에서 러시아 혁명의 타락을 다룬 부분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
- 스피어와 머피가 언급한 제번스의 역설[효율성 향상이 오히려 사회 전체의 소비량을 늘리는 현상]은 사회주의에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
- 요르고스 칼리스의 인터뷰 ↩
- 제이슨 히켈을 생태사회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부정확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 ‘이윤보다 인간을’에서 말하는 의미에서의 생태사회주의자는 분명 아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를 반자본주의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사실이다. ↩
- 엘런 소넷에 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하라. Facing the Apocalypse: Arguments for Ecosocialism(Resistance Books), London 2019, Ch.14 Popula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