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임금의 가부장제 ― 젠더, 재생산 그리고 커먼즈》
계급관계와 분리된 재생산 분석과 유토피아주의 *
실비아 페데리치의 《임금의 가부장제 ― 젠더, 재생산 그리고 커먼즈》(에코리브르, 2025)가 번역돼 나왔다. 페데리치는 자율주의 페미니즘의 기초를 놓은 인물 중 하나로, ‘국제 가사노동임금지급캠페인’ 설립을 이끌며 1970년대에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을 벌인 페미니스트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페데리치의 책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긴축 반대 투쟁과 페미니즘의 부상과 함께 해외에서 학계와 활동가들의 관심을 다시 받아 왔고, 국내에도 그의 책이 여러 권 번역 출간됐다. 1
《임금의 가부장제》는 1970년대 중반부터 2020년까지 발표된 페데리치의 논문 7편을 엮은 책이다. 2 서문은 서구의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부활했다는 것과 함께, 페데리치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차이를 드러낸다. 페데리치는 마르크스의 방법과 자본주의 비판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 착취를 분석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기반”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의 방법은 마르크스의 방법과 상당히 다르다. 마르크스의 분석과 용어를 차용하기 때문에 종종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으로 불리지만, 페데리치 사상의 핵심 기반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자율주의와 급진주의 페미니즘이다.
페데리치는 자본주의 축적에서 생산이 아니라 재생산이 중심이라고 본다. 재생산이 생산의 기초라는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가 ‘노동력의 생산’을 이론화하지 못한 것을 결정적 결함으로 꼽고,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축적 과정에서 가사노동이 갖는 전략적 중요성을 간과했다고 비판한다(가사노동에 대한 페데리치의 주장은 이후 ‘사회적 재생산 노동’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 사회 창출의 수단으로 ‘커먼즈’commons 3 에 주목한다.
페데리치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를 여러 측면에서 비판하는데, 그 주장은 종종 부정확하고, 추측과 논리 비약이 많다. 페데리치는 불평등과 생태계 파괴를 낳는 자본주의에 반대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과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전략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차이를 보인다. 이 서평은 《임금의 가부장제》에서 나타나는 주요 쟁점으로 먼저, 가정을 착취의 공간으로 보는 주장을 검토하며 그 이론적·정치적 문제점을 짚는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페데리치의 비판을 검토하고, 마지막으로 페데리치의 ‘커먼즈 정치’를 다룬다.
가정이 착취의 공간?
이 책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논문은 1970년대 중반 페데리치가 가사임금지급운동에 몰두하던 시절에 쓴 것으로, 이 운동에 대한 좌파의 비판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페데리치 주장의 핵심은 “가사 노동과 가족이 자본주의 생산의 기둥” 4 이라는 생각이다. 그 이유는 여성의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장 귀중한 생산물인 노동력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페데리치는 생산 현장(당시는 공장)의 계급투쟁만 중시하는 좌파를 비판하며 가정이야말로 핵심적인 계급투쟁의 장이라고 강조한다. “혁명은 공장이 아닌 부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가사임금지급운동은 1970년대 초에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와 셀마 제임스가 시작한 소규모 운동으로, 이탈리아, 미국·영국·프랑스 등지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가사노동이 공장 노동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보며 가사노동이 자본 축적에 핵심적 구실을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는 해방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착취’가 생산 현장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산 현장 바깥의 가정에서도 일어난다는 생각은 1960년대 이탈리아 자율주의에서 나온 ‘사회적 공장’ 개념에서 비롯했다. 이 개념은 사회 전체를 자본주의적 생산의 장으로 보는데, 자율주의 페미니즘은 ‘사회적 공장’이 “주방과 침실, 집안에서 시작되고 집중되어 있[다]” 5 고 여긴다. 즉, 가정을 자본 축적에 핵심적인 착취의 장으로 보며, 가정 내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생산 영역에서 이뤄지는 사회관계(생산관계)와 동일시한다.
달라 코스타는 셀마 제임스와 같이 쓴 소책자 《여성과 공동체의 전복Women and the Subversion of the Community》(1972)에서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의 가사노동으로 노동력이 재생산되고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은 상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 임금 노예’의 노예이고 여성 노예가 남성 임금 노예를 가능케 한다며, 가정주부를 마르크스가 말한 ‘생산적 노동자’, 즉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자로 규정했다.
이런 주장은 마르크스의 가치 이론과 다르다. 1970년대 서구의 가사노동 논쟁에서 많은 페미니스트가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나 ‘가치’ 개념을 도덕적 의미로 이해했지만, 이 개념은 특정 노동의 사회적 유용성 여부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에게 ‘가치’는 상품에 들어 있는 추상적 노동의 양을 가리킨다.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달려 있다.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노동시간 동안 생산한 가치 중 임금을 제외하고 자본가가 가져가는 몫으로, 이윤의 원천이다. 무급 가사노동은 사회적으로 유용하지만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기에, 마르크스가 말한 것과 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볼 수는 없다.
무급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요한 것은 잉여가치 창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 재생산에서 핵심적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은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이뤄지는 임금노동과 동일한 규율과 사회적 통제를 받는 노동이 아니다. 이윤의 직접적 원천은 임금노동 착취에 있다.
가사임금 운동가들은 가정주부가 자본주의를 파괴할 수 있는 핵심 주체라고 보았다. 그러나 가정주부도 사회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지만, 노동자들처럼 이윤을 중단시킬 수 있는 사회적 힘을 갖고 있지는 않다. ‘사회적 공장 개념’은 노동자주의 정치가 계급투쟁을 공장 내 자본가와 노동자 간 충돌로만 협소하게 보는 약점을 보완하려는 시도에서 나왔지만, 그 개념은 생산 현장이 자본주의 체제를 폐지하기 위한 투쟁에서 중심적 구실을 한다는 점을 흐려 버렸다.
가사임금지급운동은 당시 페미니즘 내에서도 우려와 논쟁을 낳았다. 그 요구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도 많았다. 가사를 여성의 일로 여기는 고정관념을 강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많았고, 무엇보다 가사임금 요구는 가사와 돌봄이 개별 가정에 떠맡겨진 것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노동계급에 기반을 두는 운동이라면, 가사노동 유급화가 아니라 가사와 돌봄을 사회 전체가 책임질 수 있는 사회화 조처를 요구해야 한다. 6
페데리치는 1970년대 후반에 이 운동을 중단했지만, 여전히 이 운동의 의의를 옹호한다. 그는 애초에 가사임금 요구는 개혁주의적 요구가 아니라 반자본주의적 요구로 제기됐다며 그 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강조한다. 가사임금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여성의 가사노동에 핵심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가사노동 거부’를 통해 자본 축적을 중단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애초 표방했던 것과 달리, 지배계급에게 타격이 되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되지 못했다. 지식인과 학생이 중심인 이 소규모 운동은 활동가들이 소진된 끝에 1970년대 후반에 대부분 중단됐다. 이 운동의 창립자 중 하나인 달라 코스타는 자신이 반자본주의 전략으로 강조한 ‘가사노동 거부’를 아이가 있는 여성들은 특히 실천하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7
사실, 가사임금 요구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호한 면이 있었다. 이 운동의 역사를 호의적으로 연구한 에밀리 칼라치의 책을 보면, 이 운동 내에서도 가사임금 요구에 대한 이견이 있었다. 일부는 돈이 목표가 아니라 의식을 바꾸고 사회 변화를 촉진하려는 도발이었다고 주장한 반면, 일부는 돈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8 1970년대 후반 이 운동은 분열하고 대부분 사그라들었다. 1980년대 이후 이 운동은 가사노동의 ‘가치’를 유엔 헌장이나 정부 정책 등에 반영되도록 압력을 가하는 활동을 벌였고, 일부 수용되기도 했다. 9 이를 가사임금운동의 성과로 평가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지만, 오늘날 가사노동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높다고 볼 수는 없다. 유급 가사노동을 저임금의 이주 여성 노동자가 많이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노동력 재생산의 기본적 책임이 개별 가정에 맡겨진 자본주의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 자율주의자들처럼 가정을 생산 현장과 동등한 성격으로 보면 자본주의하에서 가족제도의 변화나 가족제도의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이 유지되는 이유가 단지 지배계급의 필요 때문만은 아니다. (과거에 비해서는 줄어들긴 했지만) 노동계급의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많은 수가 가족을 꾸리길 바란다. 자본가들을 위해 노동력을 재생산하려는 생각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비록 가족에 대한 기대와 현실은 차이가 크지만, 노동계급이 비혁명적 시기에 소외에서 벗어나고자 가족에 기대는 것을 (비종파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해한다.
임금의 가부장제?
페데리치는 1970년대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즘에서 나온 ‘가부장제’ 개념(모든 남성이 권력을 갖고 여성을 지배한다는 사상)을 수용해 자본주의에서 새롭게 형성된 노동계급 가족을 ‘임금의 가부장제’라 부른다. 페데리치는 임금을 노동계급 남성의 특권으로 여기며 (노동계급 여성은 모두 전업주부라는 가정하에) 임금을 통해 노동계급의 성별 위계가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본다. 따라서 지배계급과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 차별을 유지하는 데 같은 이해관계가 있다고 보며, 자본가 계급뿐 아니라 노동계급 남성도 노동계급 여성이 맞서 싸워야 할 적으로 여긴다. 페데리치는 가사노동을 남성의 감독하에 수행되는 노동으로 규정하며 “먼저 우리 가족의 남자들에게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10
페데리치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새로운 노동계급 가족이 확립되면서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배제되고 남성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가사노동에 묶였다고 본다. 그러나 지배계급과 남성 노동자가 공모해서 가족임금을 도입했다는 그의 주장은 역사적 조건을 무시하는 것이다. 당시 남성 노동자만이 아니라 많은 노동계급 여성도 가족임금 도입을 지지했다. 가족임금제 도입은 자본주의 발전의 한 국면에서 여러 요인이 작용해서 이뤄진 것인데, 페데리치는 복잡한 현실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가부장제 이론의 틀에 꿰어 맞추고 있는 것이다.
영국은 18세기의 산업혁명으로 여성과 아동도 대거 공장에서 장시간 일하면서 노동계급의 가족이 해체 상태에 놓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기된 가족임금 요구(노동자 한 명의 임금으로 배우자와 자녀 등 가족 전체를 부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는 지배계급과 노동계급에게 그 의미가 달랐다. 지배계급의 상당수는 가족임금을 노동력의 안정적 재생산을 보장하고 노동계급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지만, 노동계급 사람들은 대개 이를 가혹한 착취에서 자신들의 삶을 보호하며 생활수준을 높이는 수단으로 여겼다.
가족임금 요구가 남성 노동자만이 아니라 많은 노동계급 여성의 지지도 받은 이유다. 많은 여성들은 끔찍한 공장노동에서 벗어나 아이를 더 잘 돌보고 가족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려는 열망에서 가족임금을 지지했다. 의료와 피임술 미발전으로 당시 여성은 위험한 출산을 자주 해야 했다는 점도 고려하면 많은 여성이 결혼 뒤 공장을 그만두길 바랐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지 않다.
물론 가족임금은 노동계급 가족이 겪는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고, 지배계급이 강화한 가족 이데올로기는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19세기 영국 노동운동에서 가족임금 요구가 나온 것은 차티스트 운동이 패배한 뒤 노동계급의 낮은 자신감을 반영하는 것이지, 여성을 가정에 묶어 두기 위한 남성의 음모 때문이 아니었다.
19세기 중후반 이후 가족임금 사상이 널리 퍼졌지만, 그 이상이 현실과 상당히 달랐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남성 부양자 가족’ 형태, 즉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고 여성이 전업주부로 육아와 가사를 책임지는 가족은 자본주의에서 보편적인 가족 형태로 자리 잡지 않았다. 영국과 미국에서 남성 부양자 가족은 20세기 초까지 노동계급의 상대적 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형태의 가족 형태가 중간계급뿐 아니라 노동계급에게도 다수가 된 시기도 있었지만,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장기호황기에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가 크게 증대하면서 남성 부양자 가족은 다시 약화됐다.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주된 가족 형태는 남성 단독 부양자 가족이 아니라 맞벌이 가족이다.
페데리치의 주장과 달리, 지배계급이 언제나 여성을 가정에 묶어 두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자본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는 경제 호황에 따른 노동력 부족에 대처하고자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독려했다. 많은 나라에서 오늘날 노동계급 여성은 다수가 임금노동자가 됐는데, 몰역사적인 가부장제 이론으로는 이런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11
물론 오늘날에도 자본주의는 노동계급 여성이 개별 가정에서 수행하는 무급 재생산노동에 크게 의존한다. 개별화된 노동력 재생산 방식이 계속 유지되는 이유는 ‘남성 노동자와 자본가의 공모’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경쟁적 축적이 지배하며 주기적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윤 중심 체제이기 때문이다. 가사와 돌봄을 온전히 사회가 책임지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한데, 지배계급은 호황기 때조차 이런 조처를 시행하기를 꺼린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질 때 가족은 자본주의 체제의 안전판 노릇을 하기에 지배계급은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 노동계급이 생산수단을 통제하지 못하기에 경제 위기를 막을 수 없고, 지배계급이 경제 위기의 부담을 떠넘기려고 노동계급의 삶을 공격하면서 노동계급 가족은 더한층의 압박에 시달리며 재생산 위기에 빠지고 노동계급 여성의 부담이 커진다.
마르크스와 젠더
페데리치는 마르크스가 생산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노동력) 재생산은 무시했다며, 마르크스가 남긴 것은 “남성적 관점 ― 주로 백인으로서 임금을 받는 산업 노동자인 ‘노동하는 남성’의 관점 ― 에서 이루어지는 자본과 계급에 대한 분석” 12 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주장은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페미니즘 내의 흔한 편견과 오해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백인 남성 노동자로만 여겼다는 주장은 아무 근거가 없다. 마르크스는 남성 노동자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아이의 노동조건에도 관심을 보였고, 파리 코뮌에서 여성이 한 기여를 높게 평가했다. 마르크스가 서문을 쓴 1880년 신생 프랑스 사회주의 정당의 강령은 “생산자 계급의 해방은 성별과 인종 구분 없이 모든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며 시작한다. 13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일찍부터 여성해방을 분명히 지지했다. 초기 저작인 《신성 가족》(1845)에서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의 말을 빌려, 사회의 진보를 여성해방의 진전 수준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산당 선언》(1848)에서는 여성을 재산으로 취급하는 부르주아 가족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헤더 브라운은 미발표 원고를 포함해 마르크스가 여성에 관해 쓴 글 전반을 면밀히 살펴보는 《마르크스의 젠더와 가족》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브라운은 마르크스가 젠더에 대한 체계적인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젠더 관계를 역사적·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것으로 정교하게 이해했다고 밝혔다.
페데리치는 마르크스가 실천에서 여성해방을 지지하며 투쟁한 것도 완전히 무시한다. 마르크스가 노동계급 내 여성 차별에 대해 회피적 태도를 취한 것처럼 쓰고 제1인터내셔널에서의 활동을 확증편향적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여성해방을 사회주의 정치의 필수적 요소로 보았고, 차별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므로 차별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성 고용에 반대한 독일의 라살레 지지자들과 프랑스의 프루동 지지자들과 논쟁을 벌였고, 여성의 노동권과 노조 가입을 옹호했다. 제1인터내셔널 출범 때 많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과 영국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여성에게 회원 자격을 주는 것을 반대했지만, 마르크스는 리지 번스Lizzie Burns에게 가입을 권유했고 남편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가입하라며 다른 여성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또, 자유사상가 해리엇 로Harriet Law가 제1인터내셔널 총평의회에 선출된 것을 자랑했고, 교회의 재산을 국가가 운영하는 학교로 이전하자는 해리엇의 제안을 지지했다. 마르크스는 당시 21세 여성 엘리자베스 드미트리에프Elisabeth Dmitrieff를 인터내서널의 공식 파리 특사로 임명했고, 드미트리에프는 파리 코뮌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 됐다. 14
페데리치는 《자본론》에서 젠더 논의가 거의 없고, 특히 가사노동을 무시했다고 여러 차례 비판한다. 마르크스가 노동력 재생산이 자본 축적에 필수적이라고 봤지만, 노동력 재생산이 노동자들의 임금 소비를 통해서만 이뤄진다고 상상하며 가사노동의 구실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15 《자본론》에 가사노동에 관한 상세한 분석이 없다고 해서, 이 책에 나오는 노동계급 여성과 가족에 관한 서술을 가볍게 제쳐 버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 마르크스는 여성 산업노동의 잔혹한 조건을 대대적으로 다루었고,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심한 착취를 받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여성과 어린아이까지 노동계급의 모든 성원들이 공장에서 하루 17~18시간씩 일하면서 노동계급 가족의 재생산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이것은 단순히 현실 묘사에 그친 게 아니라, 자본 축적의 모순을 보여 주며, 자본주의에서 재생산은 생산의 역학에 종속된다는 점을 나타낸다.
페데리치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가사노동을 자세히 다루지 않은 이유를 거듭 파고든다. 당시 노동계급 가족 모두가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공장에서 일하면서 가족 내 재생산노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가, 다른 글에서는 여성의 공장 노동 참여로 노동자 재생산에 필요한 시간과 자원이 급격히 감소한 상황이 보편적이지 않았다며 이전 주장을 철회한다. 공장 노동자는 여성 노동 인구의 20~30퍼센트에 불과했고, 이들도 일단 아이를 낳고 나면 공장 노동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페데리치는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이 산업 임금노동만을 중요하게 봤기에 재생산 문제를 무시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임금노동을 자본 축적의 중심이라고 봤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에서 노동력 재생산이 중요하다는 점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노동자계급의 유지와 재생산은 언제나 자본의 재생산에 필요한 조건이다.” 《자본론》 1권에서 재생산을 언급한 여러 구절은 마르크스의 통찰력을 볼 수 있다. 그는 임금이 단지 개별 임금노동자뿐 아니라 노동계급 가족 성원의 재생산과 관련돼 있음을 지적한다. “노동력의 가치는 개별 성인노동자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뿐 아니라 노동자 가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또한 자본주의 역학이 사람들이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에 끼친 영향도 지적한다. ”자본가를 위한 강제노동은 아동의 유희시간뿐 아니라 가정 안에서 가족을 위한 최소한의 자유노동까지도 빼앗았다.” 여성이 노동시장에 대거 진출하면서 가사노동이 상품화되는 과정도 포착했다.
게다가 페데리치가 제시한 수치는 영국 산업혁명기에 여성이 임금노동에 참여한 수준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여러 역사 연구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딸, 어머니, 아내 등 거의 모든 노동계급 여성이 임금노동에 내몰렸음을 보여 준다. 16 마르크스는 자본 축적 논리가 한편에서는 여성 노동자를 대거 창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계급 가족의 재생산을 위협하는 과정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했다.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본주의하에서 노동계급 가족이 사라질 것이라고 본 것은 잘못된 예측이었다. 영국의 산업혁명기에 여성과 아동이 하루 14시간씩, 휴일도 거의 없이 공장에서 착취당하면서 노동계급 가족이 거의 해체된 상황이었지만, 19세기 후반 이후 노동계급의 가족은 재건됐다. 노동계급 가족의 미래에 대한 마르크스의 예측은 틀렸지만, 여성 고용이 낳을 효과에 대한 예측은 옳았다. 여성의 대규모 고용은 여성의 사회적 구실과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바꾸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말에 등장한 노동계급 가족 모형은 상당히 약화됐다.
재생산을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바라보면, 자본주의와 이전 사회의 결정적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전 사회와 달리 자본주의는 매우 역동적인 체제이고 이런 역동성은 생산과정에서 비롯한다. 생산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자본주의 체제의 전반적인 역학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라고 본 것은 마르크스의 단연 탁월한 점이다. 《자본론》 1권에서 임금노동에 대한 착취가 잉여가치의 원천임을 보여 주고, 자본이 임금노동에 어떻게 의존하는지를 밝혀낸 것은 여성해방에도 큰 함의가 있다. 바로 여성이 임금노동자로서 얻게 되는 잠재력이다.
페데리치나 많은 페미니스트의 오해와 달리,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를 중요하게 봤던 이유는 그 자체를 해방이라고 봐서가 아니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사회적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여성의 독립성을 높이고 조직화와 투쟁에 나설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즉, 여성은 임금노동 참여를 통해 노동계급 남성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주체가 될 수 있다. 계급투쟁의 상승기와 혁명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자신의 힘을 거듭 보여 주었다. 17
페데리치는 임금노동 착취가 노동계급에게 부여하는 잠재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직장(생산 현장)이 노동계급 여성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투쟁의 장이라는 점을 주목하지 않고, 공동체 실험에 크게 주목한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페데리치의 재생산 중심 분석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현실적인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고 유토피아주의로 귀결된다.
유토피아주의
페데리치에게 자본주의의 대안을 창출하기 위한 수단은 ‘커먼즈’이다. 흔히 공유재, 공유지로 번역되는 ‘커먼즈’에 대한 논의는 1990년대에 부상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운동과 함께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커먼즈의 정의는 논자에 따라 다른데, 페데리치가 가리키는 커먼즈는 국가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 지배되지 않는 사회적 공간과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다. 18 자연적 커먼즈(토지, 물, 숲)을 보호하기 위한 투쟁, 공동체 활동(공동 쇼핑과 요리, 도시 정원 가꾸기 등), 미사용 공공 토지에서 제3세계 여성 농부들이 짓는 농사 등이 그런 사례로 제시된다. 페데리치는 더 집단적인 형태의 재생산 커먼즈를 창출하려는 페미니스트들의 실험에 특히 주목한다. 이런 커먼즈가 핵가족보다 더 많은 주체에게 재생산노동을 분담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19
페데리치는 “국가를 이용해 더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상상”을 거부한다. 자본주의 국가를 대안 사회 창출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없다는 생각은 옳다. 그러나 페데리치는 노동계급이 기존 자본주의 국가를 분쇄하고 자신의 국가를 세울 필요성도 부정한다. 노동계급 내 젠더와 인종적 차이를 극복될 수 없는 위계로 보며, “국가 형태로 구체화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계급 백인/남성 부분의 독재가 될 위험이 있다”고 본다. 페데리치는 옛 소련 등 스탈린주의 체제를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스탈린주의 체제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와 조금도 닮은 데가 없었고, 서방과 군사적·경제적 경쟁을 벌이며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국가자본주의였다. 20
앞서 언급한 것 외에도 페데리치는 종종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한다. 그중 하나는 마르크스를 기술 결정론자처럼 취급하며 마르크스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비대칭적이고 도구적인 관점을 장려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일방적 관계로 보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인간 사회는 자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자연과 상호작용을 한다고 봤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 존 벨라미 포스터가 《마르크스의 생태학》에서 체계적으로 밝혔듯이, 마르크스의 저작에는 수많은 생태학적 통찰이 들어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과 자연 사이에 “신진대사의 균열”을 낳는다고 날카롭게 비판했고, 이런 균열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조직하는 사회에서만 치유될 수 있다고 봤다.
페데리치는 자본주의 생산과정을 분석상 중시하지 않기에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규모가 증대하는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도덕적으로 거부하는 데 머문다. 또한 자본주의에서 발전한 과학과 기술 자체도 거부하며 노동계급이 과학과 기술을 통제해 공산주의(즉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용할 수 있다고 본 마르크스의 생각에 반대한다. “기술을 창조한 착취적 목적이 그 구성과 운영 방식을 형성”하기에 “우리는 자본주의적 산업 과학 그리고 기술도 장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21
자본주의하에서 과학과 기술이 노동자 착취, 농민 수탈, 전쟁, 생태계 파괴 등에 이용된다고 해서, 과학과 기술을 모두 거부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다. 페데리치는 자급적 농업을 예찬하지만, 그런 예찬은 흔히 가난한 농민의 삶을 미화하는 것이 되기 쉽다. 게다가 자급적 농업으로는 세계 수십억 명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도 없다. 자본주의에서 발전한 엄청난 생산력을 노동계급이 통제해야 비효율과 낭비를 제거하며 대중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자원을 동원할 수 있다. 생산의 목적이 이윤 추구가 아니게 된다면, 생태계를 보전하면서 생산을 발전시키며 협력과 평등에 기초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반자본주의자들의 커먼즈 논의에는 자본주의가 낳는 온갖 참상에서 벗어나 더 협력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려는 열망이 들어 있다. 하지만 커먼즈가 어떻게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대안 사회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인지는 매우 모호하다. 지배계급이 토지, 공장과 사무실, 항만 등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있기에, 노동계급의 혁명으로 지배계급의 권력을 파괴하고 생산수단을 노동계급이 장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소규모 공동체 실험으로 대안 사회를 창출할 수 있다고 보는 페데리치의 생각은 공상적이다. 협력적이고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어 사회주의를 만들려는 실험은 19세기 이래 무수히 많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자본주의 시장 경쟁의 압력이나 국가 탄압 등으로 그런 실험은 변질되거나 중단됐다. 자본주의 체제의 역학에 대한 이해와 현실의 계급투쟁에 기반하지 않는 ‘커먼즈 정치’로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만들지 못한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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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초안을 읽고 의견을 준 이현주, 성지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
- 《캘리번과 마녀 ―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갈무리, 2011), 《혁명의 영점 ― 가사노동, 재생산, 여성주의 투쟁》(갈무리, 2013),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이다》(갈무리, 2023). ↩
- 이 책은 이전에 나온 《혁명의 영점》과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
- ‘commons’는 흔히 공유지, 공유재, 공유물, 공동 자원 등으로 번역된다. ↩
- 페데리치 2012, p24. ↩
- 페데리치 2012, p25. ↩
- 페데리치는 당시 여성해방운동에서 제기된 사회화 요구(보육센터, 공동 주방 등을 국가서비스로 제공하라는)를 지지하지 않고 비판했다. 국가가 서비스를 직접 조직하면 “국가 통제의 확대”를 뜻한다며 가사노동의 사회화 대신 ‘가사노동 거부’를 강조했다(Federici, 1994). 이렇게 자본주의에서 제공되는 복지를 대중 통제의 측면으로만 보면 초좌파적 태도를 취하기 쉽다. 자본주의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는 지배계급의 필요뿐 아니라 계급투쟁과 여러 사회운동이 가한 압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
- Callaci, 2025. 10장에 이탈리아 가사임금운동의 해산과 이에 대한 달라 코스타의 소회, 달라 코스타와 셀마 제임스 사이의 심각한 갈등과 결별이 간략히 나온다. ↩
- Callaci, 2025. 머리말. ↩
- 오늘날 ‘가사노동에 임금을!’이라는 구호는 (정치적 강조점에 차이가 있어도) 반자본주의적 페미니스트뿐 아니라 개혁 입법에 치중하는 온건한 페미니스트도 받아들일 수 있다. ↩
- 페데리치 2025, p75. ↩
- 가부장제 이론에 대한 자세한 비판은 린지 저먼 2016을 보라. ↩
- 페데리치 2025, p57. ↩
- Marx, Guede, 1880. Brown, 2013, p130에서 인용. ↩
- Judy Cox, 2020. ↩
- 페데리치 2025, p63. ↩
- Foster, John Bellamy and Brett Clark 2018. ↩
- 자본주의에 도전한 노동계급의 강력한 투쟁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해당 투쟁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투쟁에 나선 대중의 자신감과 의식, 지배계급의 대응, 노동운동 세력들의 정치 등을 냉철하게 평가해야 정치적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다. ↩
- 페데리치 2025, p80. ↩
- 페데리치 2025, p100. ↩
-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알고 싶다면, 톰 오링컨의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론》(책갈피), 토니 클리프의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 국가자본주의이론의 분석》(책갈피), 마이크 헤인스의 《다시 보는 러시아 현대사 — 혁명부터 스탈린 체제를 거쳐 푸틴까지》(책갈피)를 읽어 보기를 권한다. ↩
- 페데리치, 2025, p97. ↩
참고 문헌
Brown, Heather A. 2012, Marx on Gender and the Family: A Critical Study, Brill.
Callaci, Emily 2025, Wages for Housework: The Story of a Movement, an Idea, a Promise, Penguin.
Cox, Judy 2020. “How Marx and Engels fought for women’s liberation,” International Socialism 166 (Spring).
Federici, Silvia 1995, Wages against Housework, the Power of Women Collective and the Falling Wall Press.
Foster, John Bellamy and Brett Clark 2018, “Women, Nature, and Capital in the Industrial Revolution,” Monthly Review vol. 69, no. 8.
마르크스, 칼 2015, 《자본론 Ⅰ》(하), 비봉출판사.
맥그리거, 실라 2017, “마르크스와 《자본론》, 그리고 여성”,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성차별, 성폭력》, 책갈피.
저먼, 린지 2016, “가부장제 이론 비판”, 《마르크스21》 17호.
포스터, 존 벨라미 2016, 《마르크스의 생태학》, 인간사랑.
페데리치, 실비아 2025. 《임금의 가부장제》, 에코리브르.
페데리치, 실비아 2012, 《혁명의 영점》, 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