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의 민주주의론
들어가며: 최장집, 그는 누구인가?
1 을 띠는 정치학자다.
최장집 교수(이하 ‘교수’ 생략)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현실을 개탄하고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개혁 배신에 대해서도 비판해 왔기 때문에 진보적인 학자로 주목받는다. 그러나 실제 그의 이론과 현실정치를 둘러싼 주장들을 보면 그는 진보적 자유주의 정도의 경향2 이라고도 하고, “회의적 자유주의자” 3 라고도 한다. 그가 존경하는 인물들은 미국의 프랭클린 로즈벨트, 독일의 빌리 브란트,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등으로 모두 케인스주의적 정치인이거나 사회민주당 지도자이다. 또한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 경제 분석에서는 뛰어나지만)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치와 권력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 4 고, “[마르크스주의는] 실천 프로그램으로서 … 효능이 없다” 5 고 본다.
최장집은 자신을 “베버리안”6 당시 〈조선일보〉가 그를 “빨갱이”로 마녀사냥하면서 “친북 좌경, 운동권 정치학자, 좌파 진보정치학자” 등의 수사를 붙였는데 이는 그의 이미지가 실제보다 왼쪽으로 보이게 되는 계기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평가들이 “모두 잘못된 이미지와 평가의 결과”라고 했다. 7
최장집은 1998년에 김대중 정부에서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김대중 정부의 이념을 뒷받침하면서도 신자유주의의 충격을 완화시키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다고 회고한다.8 이라며 북한 정권(과 토지 무상몰수로 표상되는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조선일보〉의 공격과는 달리, 최장집은 북한체제와 매우 거리를 둔다. 그는 “지주와 부농을 축출”한 북한 집권세력의 토지개혁이 “가장 폭력적 방법으로 이루어진 혁명”9 두 당에 대한 그의 태도는 대조적이었다. 진보신당과 최장집의 관계는 돈독한 듯하다. 노회찬의 ‘마들연구소’는 최장집 초청 특강을 열기도 했다. 최장집은 진보신당 지도부에 영향을 미치는 지식인 그룹을 이루는 인물인 듯하다.
이것은 진보신당과 PD계열에는 매우 우호적이지만 NL계열은 배척하는 그의 태도와 관련 있는 듯하다. 그는 2008년 4월 총선에서 진보신당의 심상정·노회찬 후보를 극찬하고 선거운동에도 참가했지만, 민주노동당에게는 박한 점수를 줬다. “[민주노동당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문제, 특히 남북관계에 초점을 두면서, 정작 대변해야 하는 서민과 중소기업의 비정규직 대변에 실패했다”는 것이다.최장집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2008년에 퇴임했다. 지금은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교환교수다. 도서출판 후마니타스의 박상훈 대표는 그의 주요 제자 중 한 명이다. 주요 저서로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2), 《민주주의의 민주화》(후마니타스, 2006), 《어떤 민주주의인가》(최장집·박상훈·박찬표 공저, 후마니타스, 2007), 《한국의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생각의 나무, 2008) 등이 있다.
최장집의 ‘정당 없는 민주주의’ 비판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최장집의 문제의식은 모두 정당제도 개혁에 집중돼 있다. 그는 한국 정당들의 “매우 협애한 이념적 대표체제”, 즉 보수와 극우만을 대표하는 “보수 독점의 정치구조”가 한국 민주주의 문제의 뿌리라고 본다. 한국은 해방 이후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냉전적 위협이 정치를 압도했고, 이런 냉전적 논리가 진보와 노동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편협한 민주주의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박정희 개발독재는 한국 근대화의 초석을 놓고 노동계급을 탄생시켰지만, 이런 근대화는 민주주의 없는 근대화였기 때문에 노동계급 대중의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고 본다.
그런데 최장집에 따르면, “보수 독점의 정치구조”는 단지 해방부터 전두환 정권까지의 문제만이 아니라, 1987년 항쟁을 통해 자유민주주의가 확대된 이른바 “민주화 시대”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다. 한국은 “운동에 의한 민주화”를 통해 민주주의의 첫 단계를 완수했지만, 노동계급을 비롯한 다양한 이익집단을 대변할 수 있는 정당체제가 자리 잡지 못해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뒷받침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민주주의가 오히려 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장집은 우리 사회가 교육 불평등, 경제적 불평등 심화, 정치에 대한 무관심 증가와 같은 사회·경제적 문제들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그 증거라고 본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왜 답보 상태인가?
김대중-노무현 정부 평가:그렇다면 민주당 세력조차 “민주주의 공고화”에 실패한 이유를 최장집은 뭐라고 설명할까? 군사독재 정당의 후신이며 상대적으로 우파와 대자본가를 대변하는 한나라당과는 달리, 민주당 세력은 한때 민주화 운동의 일부였던 사람들을 포함한 다계급적 기반을 보유하고 있고, 몇몇 민주주의 쟁점에 대해서는 한나라당과 대립하기도 하는데 말이다.
10 다만,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어야 한다는 수준에 머무르는 듯하다.
최장집은 김대중-노무현 두 자유주의 정권의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이념 자체가 문제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김대중 정부에 입각까지 했던 그는 당시 신자유주의라는 대세를 피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넘어서거나 대체할 수 있는 대안적 생산체제를 실천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상상할 수 없다”고 못 박는다.따라서 최장집은 두 정권의 이념이 잘못됐다기보다는 그 정도의 이념조차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우파들과 타협했다는 것을 비판하는 듯하다. 그리고 두 정권이 우파들과 타협한 것은 결국 자기 지지기반을 정당으로 잘 조직하지 못했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지지자들에게 책임지는 정치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선, 김대중 정부는 군사독재의 일부였던 김종필과 연합(‘DJP연합’)했듯이 태생부터 권위주의 헤게모니와 일부 타협하며 탄생했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지지기반에 책임지는 이상적 모델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자유주의 야당은 보수 일색인 한국 정당체제에서 늘 소수파였고 정부를 운영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미숙할 수밖에 없었다는 ‘김대중을 위한 변명’을 하기도 한다.
11 정당을 중심으로 정권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 밖의 운동에서 정권을 창출했기 때문이다.
최장집은 노무현 정부의 실패도 ‘정당 없는 운동’의 문제에서 비롯했다고 설명한다. 우선, 그는 노무현 정부를 탄생시킨 것은 거리의 운동(노사모 열풍, 한나라당 세력에 정권을 내줄 수 없다는 위기감에서 비롯한 젊은 세대들의 선거 참여 열기 등을 뜻하는 듯하다)이었는데, 이 자체가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를 노정하는 것이라고 본다.노무현은 열린우리당 내에서 비주류였고 이 때문에 개혁의 동력이 부족했으며, 자신이 책임질 기반이 정당으로 조직돼 있지 않아 쉽게 지지기반을 배신할 수 있었고(‘대표-책임 모델’로부터 이탈), 결국 결정적 순간에 대연정 제안, 4대 개혁입법 상정 포기, 각종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 등 권위주의 헤게모니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자유주의 정권 하에서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드러나고 민주주의가 정체된 것을 모두 대통령을 뒷받침할 정당의 부재 탓으로 돌리는 것이 옳은가. 노무현이 열린우리당 비주류로 출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권력을 잡은 이후에도 그가 계속 힘없는 비주류였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노무현이 개혁 열망을 배신한 것은 그가 자신을 배출한 정당에서 ‘왕따’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능동적으로 자신의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노무현은 이라크 파병, 한미FTA 추진, 비정규직 확산, 국가보안법 탄압 등을 능동적으로 추진했고, 자신의 다계급기반 중 자본가계급에게 적극 호응했다.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그의 이념 자체가 노동계급과의 충돌을 예고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열린우리당과 노무현은 본질에서 다른 세력이 아니었다. 둘은 대체로 기반과 지향이 일치했다. 노무현이 임기 말에 열린우리당을 탈당하라는 압력을 받았던 점이나 과거 노무현을 탄핵했던 옛 민주당 세력까지 통합한 현재의 민주당이 만들어진 점 등을 근거로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주류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벌어진 핵심적 이유는 모두 신자유주의·친제국주의 정책 때문에 노무현 정부의 인기가 너무 떨어져 대선을 앞두고 당이 그와 거리를 두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열린우리당 내 우파들은 노무현이 “좌파 사회주의” 정권이고 경제 살리기에는 무능했다는 식의 우파적 비판을 등에 업고 노무현과 거리두기를 했지만 말이다.
백번 양보해, 설사 정당이 없어서 문제였다고 해도 그가 책임질 대중이 없지는 않았다. 그가 자신을 뽑아준 대중의 힘으로 개혁을 하려고 했다면 다른 결과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그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대중이 반대하는 신자유주의적 행보를 취했다.
12 케인스주의의 실패를 메우기 위한 대안으로서 일정한 합리성이 있다는 것이다. 13 그는 노무현 정부와 민주당을 비판해 왔고, 진보적 정당의 필요성까지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이명박의 반민주 역주행이 강화되고 노무현 사망 이후 노무현에 대한 대중의 향수가 커지자, “야당을 강화해 현 정부를 대체할 대안 정부가 될 수 있는 길을 찾는 일의 중요함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기 어려울 것 같다” 14 며 “제1야당으로서 민주당이 대안 정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덕목을 주문하고 민주당에 대안 정부 구성의 중심적 구실을 하라고 요청했다.
최장집은 신자유주의와 민주당에 타협적 태도를 취하다 보니, 현실 정치에서도 계속 오락가락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민주주의를 해친다고 분명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효과를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고 한다.운동인가 정당인가
이 사회의 계급 갈등을 인정하고, 단지 절차적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까지로 확장해 민주주의 문제를 설명하는 것은 최장집의 이론에서 지지할 점이다.
그러나 그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은 기껏해야 절차적 민주주의 수준의 개혁이다. 그것도 정당제도 개혁이라는 협소한 쟁점에 한정된다. 따라서 그의 해법은 매우 온건하고 불충분하다. 그는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모두 서민과 노동계급의 이익 및 요구를 대표할 정당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보수적 이념을 대표하는 정당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을 비롯한 다양한 이익집단을 대표할 정당들이 건설돼 선거에서 경쟁할 수 있어야 하고, 각 정당의 대표자들이 자신의 정당 지지자들에게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민주주의가 안정되고 공고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15 이고, “민주화 이후의 체제에서 민주주의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핵심적 연결고리는 정당이다.” 16 그래서 그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폭로할 때는 매우 신랄하면서도 그것을 정당과 선거로 표현하지 않고 운동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냉소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노동계급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돼야 한다는 것은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최장집의 이론은 계급 갈등이 정당과 선거라는 방식으로 제도화돼야 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의 관점은 철저히 ‘위로부터’ 관점이다. 그에게 “민주주의란, 적대적이고 경쟁적인 이익들을 공식적 대표의 체계 내에 통합하고 제도적으로 관리하는 정치적 과정”17 하고 말한다. 이 말은 지난해 촛불항쟁을 두고 최장집이 “촛불의 결과는 얼마나 허망한가” 하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운동은 동원과 탈동원을 반복하기 때문에 성과를 남기지 못하고 흩어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는 “운동이 지향하는 과도한 이상주의적 비전은 먼저 운동가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의 이상과 실제 결과 사이의 큰 격차가 계속해서 실망과 자기 환멸을 만들기 때문이다. …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허무주의가 아닐 수 없다”그러나 운동은 결코 동원과 탈동원을 단순 반복하지 않는다. 운동은 그 규모가 크면 클수록 긴 파장을 남긴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과정, 즉 권위주의에서 (준)자유민주주의로 이행해 온 과정 자체가 1987년 항쟁의 여파다. 정권 교체의 동력도 아래로부터의 운동에서 나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노동계급의 조직력과 의식이 발전해 왔다. 이런 발전의 한 축이 성장해 2000년에는 부르주아 정당으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자 정당인 민주노동당을 탄생시켰다. 노무현을 지지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노무현 정부를 경험한 후 노무현 왼쪽으로 이동했다.
지난해 촛불항쟁이 광우병 의심 쇠고기 수입을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그 파장은 아직도 이명박을 괴롭히고 있다. 촛불항쟁에 나선 사람들은 이명박의 막가파식 탄압 때문에 억눌려 있긴 하지만, 의식의 급진화 과정은 계속되고 있고 저항이 언제 대규모로 분출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촛불항쟁은 그 뒤에 터져 나온 크고 작은 저항들 — 언론 노동자들의 파업, 용산참사 항의 운동, 노무현 추모를 계기로 터져 나온 6·10 범국민대회, 쌍용차·화물연대 등 경제위기 고통 전가에 맞선 노동자들의 저항 등 — 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런 저항들이 진보진영의 자신감을 진작시키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운동의 성과다. 이것은 정당제도 편입 같은 위로부터 개혁으로는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들이다.
18 고 말했다. 그는 “‘끝이 없는 시위’가 아니라 제도권 내 정당이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 정치를 통해 풀어야지 이 단계를 넘어서는 시위가 계속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19 고 말했다. 그는 거듭해서 “민주주의는 직접 통치하는 게 아니라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여 그에게 통치를 위임” 20 하는 제도이므로 “퇴진 구호는 잘못” 21 이라고 주장했다. 최장집의 발언은 아래로부터 운동이 체제의 안정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운동 내 개혁주의자들의 지원군 구실을 했다.
운동이 성취한 결과에 아쉬움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운동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점이다. 그러나 “촛불의 결과가 허망”하다고 했던 최장집은 정작 촛불항쟁이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운동을 전진시키는 데는 적대적이었다. 그는 촛불항쟁이 이명박 퇴진을 요구하며 절정에 달한 지난해 6월 10일 밤 광화문 촛불대행진 현장에서 “거리의 정치는 오늘 이 선에서 그쳤으면 좋겠다”22 , 고길섶 23 등은 최장집이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직접민주주의적 요소의 도입을 주장했다. 박명림도 최장집의 정당수렴론을 비판해 왔는데, 최근에도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는 너무 분명하다. … 환경, 복지, 새만금, 천성산, 평택기지, 탄핵, 방폐장, 행정수도 이전, 쇠고기 협상 … 등 현대민주주의에서 … 핵심 의제와 관련해 정당이 할 수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 점차 일반적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24 고 주장했다. 조희연도 최장집을 비판하며 “사회운동의 급진화”를 대안으로 내세웠다. 박명림의 말처럼 정당과 기성정치 전반에 대한 대중의 환멸이 심한 지금, “정당의 문제를 정당에서 찾는 것은 … 모순” 25 이다.
진보진영 내 일부 활동가들도 최장집을 비판했다. 박래군어떤 정당이어야 하는가
‘이제는 운동이 아니라 정당’이어야 한다는 최장집의 관점은 문제다. 그러나 최장집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운동이면 족하다’는 식으로 끝나서도 안 된다. ‘정당이 아니라 운동’이라는 주장에도 문제는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당과 운동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사실, ‘다함께’를 포함해 모든 정치조직들이 넓은 의미의 ‘정당’이다. 그리고 모든 운동은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조직적 표현체를 찾기 마련이다. 운동의 발전은 새로운 조직을 탄생시키거나 기존 조직의 성장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진정한 문제는 ‘어떤 정당이냐’다.
최장집이 유효하게 여기는 정당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내의 제도권 정당이다. 그러나 의회민주주의에서 정당제도가 아무리 발달해도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이 사회를 운영하는 문제는 전혀 해결할 수 없다.
생산수단을 소수의 자본가들이 소유하고 그들의 이윤 보장이 최우선 순위에 놓여 있는 체제는 노동자·서민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져다 줄 수 없다. 사실 제도권 정당들이 아무리 친서민적 개혁을 공약으로 내걸고, 과거 운동의 일부였던 사람이 제도권 정당으로 출마해 당선해도 큰 변화가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한국에서 노무현 정부가 대중에게 준 실망, 서구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대중에게 준 환멸은 이를 잘 보여 준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노동자 대중이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권을 쥐는 경제체제의 변혁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그래야 소수 자본가들의 이윤이 아니라 다수의 필요를 위해 사회의 부를 분배할 수 있고,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모든 문제들에 대해 노동 대중이 스스로 결정권을 가질 수 있다. 즉 우리에게는, 의회와 정당제도라는 액세서리를 갖췄지만 실질적으로는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자본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노동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민주주의와 혁명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혁명의 실현을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집단, 즉 혁명정당이 필요하다. 혁명적 좌파들은 혁명정당이 먼 미래에 혁명의 가능성이 현실화될 때나 건설될 조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혁명정당은 혁명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미리부터 건설해야 한다. 그래야 현실의 여러 투쟁 경험 속에서 전략과 전술을 구현해 봄으로써 단련할 수 있고, 노동계급에 뿌리내린 정당을 건설할 수 있다. 이런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1919년 독일혁명의 사례처럼 정작 혁명적 기회가 와도 그것을 붙잡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적 좌파들은 혁명정당 건설에 매진하면서도, 동시에 현실에서 혁명의 필요성이 대중에게 입증되지 않았을 때 노동계급 선진 대중의 현재 의식 상태를 고려해 그들과 소통하고 그들을 조직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체를 유연하게 만들고 개입해야 한다. 즉, 혁명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메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혁명적 좌파들이 유럽의 급진좌파 정당 건설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은 이런 노력을 보여 주는 사례다. 비록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다함께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진보대연합’을 제안한 것도 마찬가지 경우였다. 선거는 노동계급의 관심사가 집중되는 쟁점이므로 노동계급이 대안 부재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좌파적 지지를 결집할 선거대안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혁명적 좌파들은 급진좌파 정당이 단지 선거에만 치중하지 않고 아래로부터 운동에 적극 참가하도록 고무해야 한다.
혁명적 좌파들이 의회민주주의 하에서 선거 도전의 일부가 될 때조차도 그것은 노동계급을 혁명적 과정으로 이끌기 위한 부차적 수단일 뿐이다. 혁명적 좌파들은 일상적으로 언제나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 투쟁을 고무하고 그 운동이 성취할 수 있는 최대치를 구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 투쟁이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개입해야 한다.
이것은 최장집이 대안으로 내세우는 자본주의 체제 내의 제도권 정당 활성화와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주
- 윤건차는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 지식인과 그 사상 1980-90년대》(당대, 2000) 18~19쪽의 ‘지식인 지도’에서 최장집을 ‘진보적 자유주의’로 분류했다. 좌우파 스펙트럼으로 본다면, 중도좌파에 못 미치는 ‘중도중’ 정도 될 것이다. ↩
- ‘민주주의는 대의제, ‘정권퇴진’ 구호는 잘못 — ‘변방의 정치학도’ 최장집 고려대 교수 마지막 강의‘, 〈오마이뉴스〉(2008.6.20). ↩
- 최장집 외, 《어떤 민주주의인가》, 후마니타스(2007), 46쪽. ↩
- 주2와 동일 ↩
- 최장집 외, 《어떤 민주주의인가》, 후마니타스(2007), 61쪽. ↩
- ‘한국사회 미래 논쟁: 최장집 교수와의 좌담 전문’, 〈한겨레〉(2007.6.16). ↩
- 주2와 동일. ↩
-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2002), 57쪽. ↩
- “‘심상정 지지’ 최장집 — 진보정치 모델 지켜야”, 〈오마이뉴스〉(2008.4.6). ↩
- 최장집 외, 《어떤 민주주의인가》, 후마니타스(2007), 41쪽. ↩
- 최장집, 《민주주의의 민주화》, 후마니타스(2006), 23쪽. ↩
- 최장집 외, 《어떤 민주주의인가》, 후마니타스(2007), 45쪽. ↩
- 같은 책, 43쪽. ↩
- 최장집, “‘반이명박’ 넘어 ‘대안정부’ 준비해야”, 〈한겨레〉(2009.6.1). ↩
- 최장집, 《민주주의의 민주화》, 후마니타스(2006), 26쪽. 강조는 나의 것. ↩
- 같은 책, 33쪽. ↩
- 같은 책, 43쪽. ↩
- “최장집 교수, ‘100일 정권이 퇴진하는 사태 올 수도”, 〈경향신문〉(2008.6.11). ↩
- 같은 글. ↩
- 최장집, ‘촛불집회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2008년 6월 16일 〈경향신문〉 주최 긴급 시국대토론회 개회사. ↩
- 주2와 동일. ↩
- 박래군, ‘촛불항쟁의 전개과정과 직접민주주의: 진보적 인권운동의 관점에서 본 촛불항쟁’, 《진보평론》 37호(2008 가을). ↩
- 고길섶, ‘공포정치, 촛불항쟁, 그리고 다시 민주주의는?’, 《문화과학》 55호(2008 가을). ↩
- 박명림, ‘한국 민주주의 — 온 길, 선 곳, 갈 길’, 2009년 6월 9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최 ‘한국민주주의와 87년체제’ 토론회 발표문. ↩
- 같은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