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그리와 하트로부터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지키기
August Nimtz, “Class struggle under ‘Empire’: in defence of Marx and Engels”, International Socialism 96(Winter 2002), pp47-70. 오거스트 님츠는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정치학 교수이고, 전국쿠바네트워크(National Network on Cuba) 소속 미네소타 쿠바위원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최근 갈등이 어떻게 해결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이 지역의 긴장은 제2차세계대전 후의 데탕트 시대에 태어난 정치 세대의 다수가 상상도 못했을 일을 보여 준다. 무시무시한 핵전쟁의 현실 가능성 말이다. 사실, 냉전이 끝난 후 우리는 20세기 초 이래로 그 어느 때보다 더 불안정하고 전쟁이 일어나기 쉬운 세계에 살고 있다. 2001년 9·11사태가 터지기 훨씬 전부터 그랬다. 페르시아만과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전쟁들은 이 가혹한 현실의 징조였다. 그때 이후 이런 경향은 더 빨라졌다. 미국의 “선제공격” 정책을 되살린 2002년 6월 1일 조지 부시의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 — 옮긴이] 연설은 그런 불안정성을 질적으로 증대시켰을 수 있다. 제국주의 공격의 잠재적 희생자들에게는 이런 시나리오의 대안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점점 절박한 문제가 되고 있다.
1 오늘날의 현실이 점점 더 분명히 보여 주듯이, 천대받는 사람들은 저항하지 않으면 공멸할 것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는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매우 유명한 책 《제국》을 꼼꼼히 살펴보고 우호적으로 비판하려 한다. 우선, 이 책의 긍정적 측면을 인정할 것이다(그래서 ‘우호적’ 비판이다). 시종일관 이 책의 저자들은 자신들이 “다중”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저항 능력에 대해 낙관적이다. 저자들의 동료나 지인들이 주로 진보적 지식인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낙관주의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매우 오랫동안 이 사회 계층은 피억압자들의 자주적 운명 개척 능력에 대해 비관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중은 주로 자본주의의 희생자들로 묘사됐다. 하트와 네그리가 옳게 비판하듯이, 그런 지식인들이 “서발턴(subalterns)”[천대받거나 억압받는 집단을 가리키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용어 — 옮긴이]을 “행위 주체”로 인정할 때는 “투쟁의 지역화”나 “일상의 저항”을 미화해서 그 자체를 거의 목적으로 보았다. 이 지식인들은 지역적인 것의 원초성에 대한 신화에 빠져, 오늘날 생산자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즉 세계적 상호 연관성을 무시했다.내 생각에 이 책의 가장 큰 논쟁점은 탈산업화한 자본주의와 ‘신경제’ 때문에 고전적 계급투쟁 개념이 쓸모없어졌다는 주장과 관련 있다. 더구나, 이런 새로운 현실 때문에 자본주의 초기의 특징적 저항 방식들, 특히 마르크스의 프로젝트와 관련된 저항 방식들이 쓸모없게 돼 새로운 저항 형태와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 글의 기본 주장은, 하트와 네그리가 마르크스의 프로젝트를 잘 모른다는 것과 그래서 더 효과적인 대안을 내놓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엄청나게 위험한 오늘날의 세계에서 자본주의의 세계적 무질서를 대체할 대안의 필요성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해결책을 거부하더라도 제대로 알고나 거부하자. 내 글의 의도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장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과 달리 나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시대에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프로젝트는 여전히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넘어?
2 그러나 이 지점에서 하트와 네그리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견해와 갈라서기 시작해 “산업 노동계급의 패권적 지위”가 지금은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의미는 나중에 제시한 설명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트와 네그리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물질적 재화의 생산은 사라져가고 서비스의 생산, 특히 정보통신 산업이 급격히 발전하는 변화가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이런 “신경제”에서는 “사유재산이 … 점점 무의미해지”고, 생산에 투입되는 사회적 필요 노동량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더욱 어려워진다고 한다. 주로 산업 생산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 자본주의에서는 사회적 필요 노동량을 계산할 수 있었고, 그래서 산업 노동자들에게 패권이 있었다. 반면, 포스트모던한 자본주의나 제국에서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마르크스가 완성한 노동가치론을 더는 적용할 수 없다고 한다. 3
하트와 네그리의 핵심 주장은, 그들이 “제국”이라 부르는 새로운 세계 질서가 등장했고, 이 “제국”은 과거의 어떤 제국주의 지배 형태와도 다르다는 것이다. 탈영토화한 제국은 특정 장소가 아니라 모든 곳에 있다. 지배계급의 과거 지배 형태들처럼 제국도 근본적으로는, 다중이라는 피억압자들의 민주주의적 염원에 대한 대응이라는 것이다. 과거 지배 형태들과 달리 제국은 진정으로 전 지구적이기 때문에 제국의 지배 영역 “바깥”에는 아무런 공간도 없다. 하트와 네그리의 이 역작은 제국의 계보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프로젝트가 마르크스와 엥겔스뿐 아니라 레닌의 업적에 기대면서도 그것을 넘어선 것으로 본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트와 네그리가 전 세계 생산자들의 운명에 대한 마르크스의 장기적 예측에 동의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세계 구석구석에 침투했기 때문에 “모든 형태의 노동이 프롤레타리아화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사회와 세계 전역에서 프롤레타리아는 훨씬 더 일반적 형태의 사회적 노동이 됐다.”하트와 네그리의 시나리오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대는 근거들에는 그들이 오늘날의 계급투쟁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함의가 있다. 과거에는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근대 자본주의의 혁명적 “다중”이었다면, 오늘날의 “다중”은 더는 산업 생산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다른 부류의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이다. 산업 프롤레타리아보다 더 유동적이고 무정형적인 프롤레타리아가 바로 다중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 선언》에서 예견했듯이, 다중에게는 국경이 없다. 하트와 네그리는 오늘날의 다중이 지닌 힘이 명백히 이런 특징들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오늘날 프롤레타리아가 처한 상황과 특징이 변했기 때문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레닌이 주장한 조직 방식을 더는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 하트와 네그리의 생각이다.
하트와 네그리의 분석에서 더 흥미로운 측면 하나는 미국 정치사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제국의 존재론에서 미국의 지배 엘리트가 핵심적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을 미국으로 환원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제국의 뿌리는 1960~70년대의 노동계급 운동과 대항문화 운동에 닿아 있고 이 운동들은 미국에서 가장 강력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미국은 다른 제국주의 경쟁자들보다 먼저 새로운 지배 형태를 구축하는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 지배 형태가 제국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일환으로, 하트와 네그리는 미국의 노동조합 조직화 수준이 낮고 노동계급 정당도 없어서 미국 노동계급 운동이 다른 선진국들의 노동계급 운동보다 더 강력하다는 이례적인 주장을 편다. 이 두 가지가 없어서 기층 노동자들의 힘이 강력했는데, 이런 일은 대서양 건너편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결코 말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노동계급이 1968년 학생 운동과 효과적으로 결합하지 못함에 따라 드골 정부뿐 아니라 자본 자체도 전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틀림없다. 스탈린주의 정당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엄청난 무게가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노동계급을 짓누르고 손발을 묶었다. 요컨대 노동계급 조직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미국 노동계급의 정치에 대한 또 다른 흥미로운 언급은 프롤레타리아가 제국에 맞서 저항할 때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를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제안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IWW가 “확고하고 안정된 지배 구조”를 갖추지 않아서 효과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중심”의 부재와 “조직적 유동성”과 “인종-언어적 혼종성”(즉, 인종과 민족을 따지지 않고 모든 노동자들을 기꺼이 조직하는 것)의 결합이 오늘날 다중이 모방해야 하는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의 전반적 분석을 고려하면, 이 역작의 끝부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룰 때조차 다중의 투쟁이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한 예측이나 이 의제를 어떻게 발전시킬지에 대한 구체적 제안이 거의 없다는 점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오로지 “우리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 강력한 조직의 건설, 더 정확히 말하면 강력한 조직의 봉기를 말이다. 이런 일에 적합한 조직 모델이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오직 다중만이 실천적 실험을 통해 그런 모델을 보여줄 것이고, 언제 어떻게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지를 결정할 것이다”라는 말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에게 “제3인터내셔널의 침울하고 엄숙주의적인 주체”나 “의무와 훈육을 바탕으로 행동하고, 이상적 계획에 따라 행동한다고 상상하는” 주체가 아니라 IWW 투사를 모델로 삼으라고 권유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하트와 네그리는 “포스트모더니티”가 “코뮤니스트 투사”라는 새로운 부류의 투사를 낳을 것이라는 점만큼은 낙관적이다.
이 지점에서는, 지나치게 세부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더 일반적 수준에서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 단락에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점을 대안으로 제시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더 구체적으로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을 비판해 보겠다.
5 따라서 오래되고 낡아빠진 결정론이라는 비난은 그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넘어섰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다. 이런 주장은 오래됐지만 여전히 설득력이 없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해 알려진 간단한 사실들로 쉽게 반박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방법이 정말 결정론적이라면, 그들이 정치적 삶의 대부분을 혁명 과정을 발전시키는 데 보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현실의 전혀 다른 두 차원에서 활동해 명백한 모순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서슴없이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비난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신들의 정치와 일상 활동을 이론적 관점과 분리해서 보았다는 증거는 없다.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활동이 대체로 무시되기 때문에(다음 단락에서 바로잡으려 하는 것) 그런 비난이 지속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점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하트와 네그리의 해석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이고, 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잘못된 비판을 가하는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치를 알지 못하거나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하트와 네그리는 전자에 속한다.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의 앞부분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선언은 직선적이고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따르는” 반면, 자신들의 선언에는 “어떤 결정론도”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선언에는 “미래를 위한 여백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 권력을 창조하는 다중의 현실적 활동에 존재론적으로 근거를 두는(이것은 유물론적 목적론이다) 급진적 대항역능”만이 있을 뿐이다.하트와 네그리는 자신들의 방법이 “다중의 현실적 활동”을 바탕으로 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방법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는 이 방법이 지혜의 출발점이었을 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중”의 과거를 알기 위해서뿐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도 다중의 “활동”을 결정하는 요인들을 파악하려 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방법이 “결정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하트와 네그리는 현상 수준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는 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본질을 밝혀낸다. 하트와 네그리가 마르크스의 가치 법칙이나 이와 관련된 노동가치론을 기각하고 이 이론들이 “포스트모더니티”의 세계에서도 타당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이유는 주로 마르크스의 이런 인식 방법을 못마땅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또, 가치 법칙이나 노동가치론을 기각하다 보니 1970년대 중반 세계 자본주의의 장기적 위기에 대해서도 할 말이 거의 없다.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과 달리, 미국 자본이 구조조정을 해야 했던 이유는 베트남 전쟁 패배와 1960~70년대의 사회 운동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먼저, 장기 위기와 이윤율 저하가 결정적이었다. 하트와 네그리처럼 이 위기를 과잉생산의 위기로 이해하는 것은 분명히 타당하다. 그러나 가치 법칙과 노동가치론 없이 자본주의 위기를 설명할 수는 없다. 하트와 네그리의 책을 읽다 보면, 자본주의 위기는 이제 과거지사가 됐다거나 가치 법칙은 미래의 경기 하강에 대한 설명과 관계 없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므로 설득력 있는 주장을 내놓아야 한다. 올바르게도 그들은 자본주의의 장기적 변화를 적절하게 설명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설명은 부적절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장기 위기는 “다중의 현실적 활동”을 설명하는 데 결정적이었고, 이 때문에 그들은 그토록 많은 시간을 들여 장기 위기들을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가치 법칙은 정보통신 산업의 주식 거래가 전문화된 나스닥 시장의 최근 붕괴에서도 확인된다. 역시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과 달리, “신경제”, 즉 내가 안나 쿠르니코바[유명한 테니스 선수 — 옮긴이] 경제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구경제”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가치 법칙이 작동했고, 마침내 최후 심판의 날이 닥치고야 말았다. 주요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적이 매우 드물어도 테니스 스타의 시장 가치가 계속 오를 수 있듯이, 자본도 한때는 “신경제”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투자 대비 수익의 시합에서 승리하는 것을 요구했다. “신경제”는 바로 그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사실, 자본은 “가상의” 이윤이라는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잠시 동안 움직일 수 있다. 현상 수준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가치 법칙은 사회적 생산이 사회의 물질적 전제 조건이라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준다. “낡은 굴뚝 산업”, 즉 물질적 재화의 생산에서 작동하는 가차없는 논리가 다시 한 번 분명히 드러난다. 사실, 정보 서비스 경제에서는 사회적 필요 노동을 계산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역시 현상 수준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필요 노동을 계산할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그리고 시장경제 일반)의 역사를 보면 결국 가격은 가치, 즉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필요 노동량을 반영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다른 주장을 하려면, 하트와 네그리는 역시 더 설득력 있는 근거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6 그뿐 아니라, 디지털 저작권 침해 논란을 둘러싼 최근 논쟁에서 드러나듯이 정보통신 서비스에 사유재산 법규를 부과하는 것은 더 어려울 수 있다. 현상 수준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가치 법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어렵다고 해서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제국이라는 더 광대한 세계에서, 브라질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의 활동가들이나 토지나 거주지를 요구하며 투쟁하는 활동가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지주들에게 사유재산은 “무의미”하다고 말해 보라. 하트와 네그리가 사유재산을 간단히 기각하는 것은 그들의 분석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근본 문제를 반영한다. 사회적 생산이 국제적 규범인 세계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무의미”하다는 말은 사실이다. 인류가 사회적 생산을 합리적으로 결정할 능력이 있다는 것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서로 양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다중의 파르티잔[하트와 네그리를 가리킴 — 옮긴이]은 당위와 존재를 혼동하지 말아야 하며, 마찬가지로 역사적 경향과 최근 현실을 뒤섞지 말아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역사가 너무나 자주 입증했듯이 이런 혼란은 치명적일 수 있다.
하트와 네그리의 다른 주장은 간단히 다룰 것인데, 왜냐하면 그런 주장은 현실과 훨씬 더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사유재산은 점점 무의미해진다”는 말 자체가 무의미하다. 심지어 “신경제”의 세계에서도, 냅스터[Napster: 인터넷 음악파일 공유 프로그램 — 옮긴이] 폐쇄에 성공했고, 제2의 냅스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소송을 걸어 위협하는 음반 회사 소유자들에게 그런 말을 해보라. 30년도 더 전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이 통신 산업의 궤적에 대해 정확히 예측했듯이, 통신 산업은 공공재에서 사유재로 변했다.앞서도 지적했지만, 피억압자들의 저항 능력에 대한 하트와 네그리의 낙관주의는 감탄할 만하다. 그렇지만 그들의 인식 방법에는 피억압자들이 필연적으로 성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가정이 함축돼 있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저항이 자동으로 대안 프로젝트 건설로 전환될 것이라고 가정한다는 점이다. 하트와 네그리가 말하는 “투쟁의 축적” 테제, 즉 다양한 곳에서 투쟁한 결과로 다중이 자신들의 집단적 이해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주장은 이런 과정에 의식성이 필요 없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다중은 조직·지도력·규율이 없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되풀이해서 보여 줬듯이, 혁명적 동원은 하나의 과정일 뿐 아니라 매우 불균등한 과정이다. 모든 사람과 모든 사회계층이 똑같은 속도로 급진화하지는 않는다. 어떤 세력은 다른 세력보다 더 먼저 움직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힘을 집중시키기 위해 이렇게 불균등한 세력들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가 과제로 등장한다. 또, 대체로 다중은 당면 쟁점들을 둘러싸고 급진화한다. 모든 사회 운동의 과제는 서로 다른 구체적 투쟁들을 연결하고, 저마다의 처지를 넘어 일반화하고, 당면 상황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구조적 쟁점들을 이해하고, 대안 프로젝트를 마련하는 것이다. 다음 단락에서 보여 주고 싶은 것이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운동 안에서 갑자기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혁명 정당(공산주의자들로 이뤄진 중핵인)이 지도력을 발휘하려면 바로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트와 네그리는 올바르게도 투쟁들 사이의 소통 부재가 문제라는 것, 다시 말해 투쟁들이 서로 연결돼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러나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근거 없이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해 투쟁들 사이의 소통 부재를 찬양하는 듯하다. 역시 현상 수준에 머무른다는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 노동자들이 다른 선진국 노동자들보다 더 강력한 까닭은 노동조합 조직률이 더 낮고 노동자들 자신의 정당인 노동당이 없기 때문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어처구니없다. 이런 주장은 주간 노동 일수가 더 많고(월마트처럼 “근무 시간이 끝났어도” 일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 산재율도 더 높고, 휴일도 더 적고, 실업급여와 의료보험혜택 같은 사회적 임금도 더 적은 미국 노동계급 전체의 현실을 무시한다. 이것은 이른바 “생체정치 권력”이라는 것에 민감하다는 분석치고는 이상한 실수다. 분명한 사실은 미국 자본이 노동자들로부터 잉여가치라는 단물과 피를 더 많이 짜내는 데 세계 도처의 동료들보다 더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1960년대 사회 운동, 즉 대항문화의 비(非)체계적이고 비(非)조직적이며 참신한 특징이 노동계급에 이로웠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이와 관련된 주장으로, 운동의 성공 때문에 자본이 훈육 체제에서 통제 체제로 전환해야 했다는 주장도 지지할 수 없다. 사형제가 노동계급을 훈육하는 체제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미국 지배계급이 1976년에 이 계급 지배 무기를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1960년대 사회 운동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1960~70년대의 정치와 조직화에 대한 어떤 환상에 사로잡혀서도 안 된다. 특히 대항문화에 대한 환상은 금물이다. 당시의 급진화는 1970년대 중반의 장기적 경제 위기가 시작되기 전에 일어난 풍요 속의 급진화였다. 당시의 활동 방식이 당시에는 적절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 급진화하는 청년들과 함께 정치 활동을 하려는 그 시절 출신 사람들의 한 가지 의무는 이 청년들이 당시의 활동 방식을 미화하지 않도록 그들을 깨우치는 것이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그때의 방식은 많은 점에서 스탈린주의의 관료적이고 비민주적인 실천들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런데도 하트와 네그리처럼 그런 방식을 고무하려 하는 것은 심각한 정치적 오류다. 당시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우리는 당시 상황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만 정직하게 말해야지, 불가피성을 미덕으로까지 격상시켜서는 안 된다. 1970년대 중반 이래 꾸준히 지속되는 장기적 경기 하강 국면 속의 오늘날 정치 현실에서는 과거 자본주의 위기 때 노동자들이 고취해야 했던 조직적 의식성과 규율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것들이 필요한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자신들의 선언문 끝부분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라 자유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큰 정부들이 인간성을 얼마나 많이 억압하고 파괴했는지를 아는 코뮤니스트다.” 하트와 네그리가 항의할지 모르겠으나, 그들의 프로젝트는 아나키즘의 정치를 보여 준다. 그들이 1960~70년대의 대항문화 운동과 강령 없이 행동하고 조직적 중심이나 규율 있는 전위(다시 말해, 지도부)를 배격하는 다중을 칭찬하는 것을 보면, 또 아나키즘적 신디칼리스트 조직인 IWW의 투사 개인을 모델로 내놓는 것을 보면 그들의 정치 성향에 대해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때문에 그들의 이론적 지향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적 지향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그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을 결정론으로 묘사했는데, 이런 비난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요 논적이던 미하일 바쿠닌이 한 세기도 더 전에 제기한 바 있다. 물론 하트와 네그리가 아나키스트가 되든 말든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정치적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수 있다. 어쨌든 그들은 코뮤니스트적 정체성이라는 외피 뒤에 숨어서 아나키즘적 대안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해야 하는 일을 회피할 수 있다. 이런 점들 때문에 그들은, 예컨대 80년 전에 IWW가 정치적 과업을 회피한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사회주의적인 큰 정부들”에 대한 정당한 분노(거의 독선에 가까운)를 표출할 수 있는 듯하다.
분명히, “코뮤니스트 투사들”로서 하트와 네그리는 사회민주주의의 실천과 소련에서 벌어진 모든 결과를 포함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일들을 비판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은 역시 적절하지 못하다. 레닌의 “테일러주의”가 소련에서 일어난 반혁명의 씨앗을 뿌렸다는 설명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의 테제는 여전히 최상의 설명일 뿐 아니라 마르크스의 방법에 바탕을 둔 설명이다. 하트와 네그리가 트로츠키의 설명을 지지하면서 인용하는 듯하지만(그저 스쳐 지나가면서 인용한다), 실제로는 그들이 트로츠키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그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하다. 트로츠키는 자신이 러시아 혁명에 대한 “배반”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도 설득력 있게 설명할 뿐 아니라, 스탈린주의가 지도한 노동계급 운동이 그 밖의 지역들(이른바 제3세계와 1968년 프랑스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구성체들 모두)에서 권력을 잡지 못했거나 설령 권력을 잡았더라도 공산주의 혁명을 웃음거리로 만든 이유에 대해서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하트와 네그리가 트로츠키의 주장을 정말 이해했다면, 다양한 투쟁을 연결하는 진정한 기구였던 코민테른이 1928년 즈음에는 왜 그런 구실을 중단했는지도 이해해야 한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스탈린주의화는 “제3인터내셔널의 침울하고 엄숙주의적인 주체”를 육성하는 데 일조했는데, 하트와 네그리가 다양한 곳의 사회적 투쟁들 간 “소통 불능의 역설”이라고 부른 것을 설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만약 그들이 트로츠키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세계적 수준에서 스탈린주의의 헤게모니가 1989년 즈음에 몰락한 것이 왜 1917년 볼셰비키 승리(오늘날의 혁명적 낙관주의를 낳은 진정한 근거) 이후의 어떤 사건보다도 다중의 이익 향상에 가장 유리한 사태 전개인지를 알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처럼 하트와 네그리도 세계를 분석 단위로 삼아 출발한다. 하트와 네그리가 “투쟁의 지역화”에 대한 물신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옳지만, 이렇게 비판할 때 그들은 정반대의 오류를 범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세계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양자택일로 보는 경향이 있어서 지역과 세계가 연결돼 있다는 점을 놓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투쟁은 모두 지역에서 시작된다.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는 천대받는 사람들에게 지역의 투쟁이 세계적 투쟁의 불가결한 일부라는 점을 이해시켜, 그들이 각지의 투쟁들을 서로 연결하는 법, 즉 투쟁을 보편화 하는 법을 알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나중에 보여주겠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트와 네그리가 투쟁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될 것인지에 대해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는 정말로 그들의 반(反)결정론적 태도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역에서 투쟁하는 활동가들에게 그들의 투쟁이 더 큰 구조적 쟁점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신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방법론에서 하트와 네그리가 반대하는 지점임은 명백하다. 역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는 “다중의 활동”이 결정적이긴 하지만 지혜의 출발점인 데 반해, 하트와 네그리에게는 “다중의 활동”이 출발점이자 종점이다.
7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아일랜드와 폴란드에서 벌어진 투쟁에 대해 그랬듯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이름으로 피억압자들의 민족주의를 옹호했다. 또, 제국의 시대에는 세계가 모두 균등하므로 제국주의 사슬의 약한 고리 따위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현실과 맞지 않다. 예컨대 지금의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가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친미 국가들보다 더 불안정하고 취약하다는 사실을 과연 부인할 수 있을까? 사실, 세계적 수준에서는 지역의 투쟁들이 점점 수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트와 네그리처럼 이런 수렴을 완성된 과정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경향과 현실을 뒤섞어 버리는 그들의 또 다른 습관도 정치적으로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하트와 네그리는 자신들의 편견을 드러낸다. 지역의 투쟁이 모두 세계적 투쟁이라는 주장 때문에 그들은 흔히 민족해방 투쟁에 참가한 사람들의 자의식에는 없는 목적론의 딱지를 민족해방 투쟁에 붙이려 한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예컨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반(反)민족적이다”는 주장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각도 아니고 레닌의 생각도 아니다.우리는 생산자들을 점점 위험으로 내모는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하트와 네그리가 다중을 위해 선언한 것 이상이 필요하다. 그들이 “코뮤니스트 투사들”을 표방한다는 점과 오늘날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기본적인 혁명적 의무는 희망을 제시하는 데 그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강령이 낡은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계획과 행동의 기초로 삼은 것보다 질적으로 우월한 뭔가를 내놓아야 한다. 하트와 네그리처럼 “우리는 여전히 … 강력한 조직의 건설, 더 정확히 말하면 강력한 조직의 봉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로 끝맺는 것은 정치적으로 무책임하다. 신뢰할 만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여전히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배워야 할 것이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하트와 네그리가 말한 “포스트모더니티”를 목격할 만큼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진정한 공산주의 정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실천
8 또, 여기에서는 레닌과 트로츠키처럼 그들의 뒤를 이은 사람들의 정치 활동을 평가할 여유도 없다. 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치 이력 가운데 몇 가지 핵심 계기들에 집중할 것이고 이를 통해 “제국”의 세계에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프로젝트가 시대에 뒤지고 유효하지 않다고 치부해 버리는 하트와 네그리의 몇몇 논박들을 다루려 한다.
이하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치를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본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그들이 함께 정치·조직 활동을 한 1846년부터 1895년까지의 50년을 이 글의 한정된 지면에서 다루기는 너무 복잡하다.“무엇을 할 것인가”
9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평생 동안 스스로 ‘과학적 탐구’라고 부른 것보다 정치 활동을 우선시했고 실제 운동이 벌어질 때마다 정치 활동에 뛰어들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세 번째 테제를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 번째 테제와 함께 그보다 더 유명한 열한 번째 테제, 즉 “철학자들은 이렇게 저렇게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테제를 보면 항상 그들의 정치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혁명적 실천이 효과적이려면, 혁명적 이론이 필요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방법론을 흔히 결정론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과학적 공산주의’나 ‘유물론적 역사관’이라고 부른 것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 공산주의’나 ‘유물론적 역사관’을 정식화하기 전에도 그들은 다중의 장구한 민주주의 추구, 즉 “역사의 진정한 운동”을 연구하면 “인간 해방”을 향한 길이 보인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런 역사, 특히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상은 아무것도 실행할 수 없다. 사상을 실행하려면 실제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마르크스가 남긴 불후의 명작 《포이어바하에 대한 테제》(1845)에서 말했듯이, 혁명적 실천은 피억압자들이 교육받는 수단일 뿐 아니라 “교육자도 혁명적 실천이라는 수단으로 교육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 “교육자”도 프롤레타리아와 그 밖의 피억압 계급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대의를 위해 똑같은 혁명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누게 되고, 그 중 하나가 다른 부분보다 우월하게 된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흔한 비난, 즉 그들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우매한 대중’과 계몽된 엘리트의 대립을 전제한다는 비난에 대한 대답이었다. 핼 드레이퍼가 썼듯이, “세 번째 테제는 [프롤레타리아의] 자기 해방이라는 기본 원칙을 마르크스가 철학적으로 정식화한 것이다. 그것은 사회주의 사상에서 아마 처음으로 이론이 이론가를 철저히 되돌아보는 쪽으로 방향 전환한 것이다.”10 따라서 출판 활동이 중요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노동자들과 직접 토론하고 공개적 논쟁에 참여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들은 매우 이른 시절부터 프롤레타리아, 즉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을 이끄는 데 이해관계도 있고 능력도 있다고 판단한 바로 그 계급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엥겔스가 끊임없이 재촉했듯이, 마르크스가 “두꺼운 책”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가 그러한 작업에 착수하자,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대중 강연에 나섰다. 그러나 “현실의 살아있는 사람들 앞에 서서 직접 그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연설하면서 그들이 우리를 직접 보고 듣게 하는 것과 이렇게 ‘마음 속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추상적 청중을 대상으로 극도로 추상적인 글쓰기에 매달리는 것은 사뭇 다르다.”11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과학적 공산주의’에 공감한 정치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이 그들을 1847년에 자신들의 단체에 초빙해 단체를 이끌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단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강력한 권고로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한편, 그들에게 단체의 강령, 즉 《공산주의 선언》을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다. 1848년 혁명의 전야에 출판된 《공산주의 선언》은 대개 음모적 방식으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을 설득해서 노동계급에 대한 종파적 태도를 버리고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의식적인 부분이 되게 하려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첫 번째 “두꺼운 책”인 《독일 이데올로기》(1846)는 ‘유물론적 역사관’의 토대를 놓았는데, 그 이론은 그들의 실천을 명확히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독일 이데올로기》가 그들 생전에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그 책의 사상은 곧바로 그들의 후속 저작들에 반영됐다. 새로운 관점으로 무장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곧장 유럽의 프롤레타리아와 결합을 모색했다. 그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었고 이를 입증하려는 적극적인 노력 덕택에 그들은 결국 성공했다. 이는 다른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경향과의 논쟁에서 이겨야 했을 뿐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청중도 얻으려고 노력해야 했음을 뜻했다. 40년 후에 엥겔스는 그러한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했다. “우리는 … 말과 편지 그리고 출판물을 통해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의 이론적 견해에 영향을 주었다. 또, 이를 위해 우리는 다양한 석판 인쇄 회보들을 전 세계의 우리 친구들과 통신원들에게 발송했다.”12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 해 초에 노동자 운동의 일부가 될 수 있었던 바로 그 방식 덕택에 엥겔스는 자신감 있게 그런 비난을 기각할 수 있었다. 엥겔스는 그러한 “암시에 대해, 우리는 그들과 논쟁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공산주의 노동자들이 스스로 그 비난에 대해 판단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라고 말했다. 노동계급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속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권리는 오직 노동계급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이런 조언은 1847년뿐 아니라 그 후에도 이런 비난이 제기된 때는 그 언제라도 타당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 즉 ‘교육자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최초 결합이 후자의 발의로 실현됐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을 지배하는 새로운 엘리트가 되려 한다는 흔한 비난, 다시 말해 하트와 네그리의 비판에 함축돼 있는 비난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1847년 엥겔스는 반대자인 칼 하인젠에게 다음과 같은 비난을 받았다. “공산주의 저술가들은 공산주의 노동자들을 이용할 뿐이다. … [그들은] 자신들만 아는 비밀스런 지혜를 가진 예언자, 사제, 교사 노릇을 하면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지혜를 가르쳐 주지 않아서 그들이 자립하지 못하게 한다.”13 당시 가장 선진적인 노동계급의 지도자들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그들은 사회 현실을 정확히 표현한 사상(과학)과 그렇지 않은 사상(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데올로기로 여긴 것)을 분명히 구분하고, 마르크스의 강령은 과학에 속한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20년 후 국제노동자협회 총회에서 마르크스는 영국 노동조합 운동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것은 그가 노동자 운동의 지지를 받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초기 저작에서 보여준 통찰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쟁점이 됐던 것은 ‘정신적 노동자’, 즉 지식인들의 총회 참석을 허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였다. 한 영국 대표는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견해를 성공적으로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르크스 — 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 와 같은 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의 대의에 헌신하는 아주 보기 드문 사람들로 그들을 “퇴짜놓는” 것은 너무 편의적인 조처입니다. 중간계급은 오직 과학적인 사람들과 동맹했을 때만 승리할 수 있었고 바로 그 중간계급의 정치경제학 덕분에 그들은 명성을 얻었고, 그 명성을 통해 각료직을 차지해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습니다.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한 사람들을 반드시 우리 총회에 받아들여 그들이 중간계급 정치경제학의 오류들을 분쇄하게 해야 합니다.”14 또는, 《[공산주의]선언》에서 말했듯이,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적 결론은 결코 이런저런 자칭 보편적 개혁가들이 만들거나 발견한 관념이나 원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계급투쟁, 바로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는 역사적 운동에서 생겨나는 실제 관계를 일반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15
따라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치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즉, 다중의 성공적인 투쟁은 사회 현실을 정확히 표현한 강령 — 그들이 과학이라고 생각한 것 — 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은 분명히 하트와 네그리에게 결정론으로 비칠 것이다. ‘실제 역사 운동’에서 배우고 그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사회에 대한 과학을 만드는 수단이었다. 바로 이 점이 엥겔스가 같은 시기에 쓴 공산주의 프로젝트 논쟁 관련 글에서 뜻한 것이었다. 즉, “공산주의는 교리가 아니라 운동이다. 공산주의는 원리가 아니라 사실에서 발생한다. … 그것을 이론이라고 한다면, [공산주의는] 이러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를 이론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조건을 이론적으로 총괄한 것이라는 점에서만 그렇다.”그리고 마찬가지로 같은 시기에 쓴 《철학의 빈곤》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가 전진하는 동안은, 그리고 그와 더불어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 더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는 동안에는 그들[프롤레타리아 이론가들]은 더는 머리 속에서 과학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단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기록하고 그것의 대변자가 되면 된다. 그들이 과학을 추구하고 단지 체계를 만드는 동안에는, 그리고 투쟁의 초기 국면에 있는 동안에는, 그들은 빈곤을 그냥 빈곤으로 바라볼 뿐 그 내부의 혁명적·전복적 측면, 즉 기존 사회를 뒤엎을 측면을 보지 못한다. 그들이 이 측면을 보기 시작하자마자 과학은, 다시 말해 역사적 운동의 산물이고 그 운동과 의식적으로 결합돼 있는 과학은 공리공론이 아니라 혁명 이론이 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중의 효과적인 투쟁이 과학적 사상, 다시 말해 실제 운동을 바탕으로 한 계획이자 계급투쟁의 교훈에서 이끌어낸 정수를 발전시키는 것에 달려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런 지향을 바탕으로 1847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앞서 말한 논적이자 막 공화주의자로 전향한 칼 하인젠을 상대로 유명한 논쟁을 벌였다. 하인젠은 과학적 강령 없이 행동하는 혁명가들이 저지르는 온갖 오류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었다.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민주주의적 대의로 전향한 직후에 하인젠은 그를 추종한 많은 초좌파들과 마찬가지로, “즉각적인 봉기” 요구를 제기했다. 그에 대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즉각적 봉기를 호소하는 인쇄 전단들을 독일에 배포하려 한다. 우리는 그처럼 어리석은 선전을 하며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것이 독일 민주주의에 최악의 피해를 주지 않을지 묻고 싶다. 우리는 그러한 일이 얼마나 쓸모없는 짓인지 경험으로 입증되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다. … 우리는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그 따위 정치적 설교와 훈계에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다. … 우리는 그런 식으로 판단력이나 지각 없이, 그리고 상황에 대한 인식이나 고려 없이, 외부 세계를 향해 혁명을 호소하고 떠들어 대는 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짓 아니냐고 묻고 싶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피억압자들이 혁명적 선전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을 파악”하는 데 ‘유물론적 역사관’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하트와 네그리가 자신들의 실천의 기초라고 주장한 것, 다시 말해 “다중의 실제 활동”을 결정하는 요인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엥겔스는 하인젠의 전술이 재앙적이라면 “당 출판물의 임무는 무엇인가?”라고 묻고서,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당의 요구를 토론하고, 명확히 하고, 상세히 설명하고, 옹호하는 것이며, 반대 당파의 주장을 반박하고 논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에서 ‘민주주의 당파’ —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주 지적했듯이, 공산주의자들은 민주주의 당파의 극좌파였을 뿐이다 — 의 언론이 지닌 구체적 임무는 “현 정부가 쓸모없다는 것과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엥겔스는 더 나아가 그들의 전략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또 다른 임무를 설명했는데, 그들의 동지와 적은 모두 그 임무를 무시하거나 거부했다.
그것[독일 민주주의 당파의 언론]의 임무는 관료·귀족·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소농·도시 쁘띠부르주아지(독일에서는 이들이 ‘민중’이다)를 억압하는 현실을 폭로하는 것, 정치적 억압뿐 아니라 무엇보다 사회적 억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와 그런 억압을 어떤 수단으로 없앨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또, 그것의 임무는 프롤레타리아·소농·도시 쁘띠부르주아지의 정치 권력 장악이 그런 수단을 적용할 첫 번째 조건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것의 임무는 민주주의를 얼마나 신속히 실현할 수 있을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 독자적으로 행동하기에 너무 취약하다면 어떤 당들과 동맹을 맺어야 하는지를 검토하는 것이다.
엥겔스의 조언은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그 신문이 “민중(즉 다중)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고 요구한 것보다 50여 년 앞선 것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전략에서 이런 “민중”의 동맹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민중 동맹’, 특히 프롤레타리아가 여전히 형성되고 있던 독일 같은 나라에서 ‘민중 동맹’이 중요하다고 옹호했다.
19 마찬가지로, 그러한 조언은 다른 억압 민족의 민주주의자들에게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아일랜드의 사례가 대표적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차티스트들이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에 반대하고 아일랜드 노동자들에게 손을 내밀 때마다 박수갈채를 보냈고 다른 나라 민주주의자들에게 알렸던 것이다. 엥겔스는 프랑스의 공화파 일간지인 〈라 레포름〉[‘개혁’이라는 뜻 — 옮긴이]의 독자들에게 “두 섬[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주민들 사이의 동맹”이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해 달라고 요청했다. “영국의 민주주의는 용맹하고 열정적인 아일랜드인 2백만 명이 그 대오에 합류할 때 더 빨리 발전할 것이고, 가난에 찌든 아일랜드도 마침내 해방을 향해 중요한 일보를 내딛게 될 것이다.” 20 하트와 네그리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민족 해방 투쟁과 대립시키는 경향이 있는 것과 달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이 서로 얽혀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가 같은 모임에서 언급한 것처럼,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는 모든 피억압 민족들에게 해방의 신호이기도 하다.” 21
1848년 혁명의 전야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민중 동맹이라는 개념을 프롤레타리아의 다른 동맹자들, 특히 피억압 민족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했다. 특히 민족 자결을 위한 아일랜드인과 폴란드인의 투쟁을 각각 영국과 독일의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위해 필수적인 조처들로 보았다. 1847년 엥겔스가 폴란드인들의 투쟁에 연대하는 모임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 독일의 민주주의자들은 폴란드의 해방에 특별한 관심이 있다. … 다른 민족을 억압하면서 자유로울 수 있는 민족은 없다.”22 20세기의 많은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조언을 쓸모없다고 여기거나 무시했고, 결과는 모두 비극으로 끝났다.
노동자 운동 내의 다른 자칭 사회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확실한 차이 한 가지는 공산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과 밀접히 결합돼 있다는 견해였다. 1892년 엥겔스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는 비난의 하나인,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민주적 지배 형태들을 무시한다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40여 년 동안 마르크스와 나는 오로지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 형태에서만 노동계급과 자본가 계급의 투쟁이 처음에는 보편화되고 나중에는 프롤레타리아의 결정적 승리로 절정에 이를 것이라고 지겹도록 반복해 왔다.”흔히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순전히 이론가로 묘사하지만, 그들 자신은 적극적인 조직가였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하에 대한]테제》와 일치하는 모습이다. 노동자들이 혁명적 계급이라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들은 공산주의 강령으로 설득돼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지도부가 필요했다. 공산주의자 동맹 조직 활동 경험을 토대로, 그리고 1848~49년 혁명의 불 세례를 받고서 그들은 조직에 대한 견해를 체계화하고 생을 마칠 때까지 그 견해를 지켰다. 그것의 많은 부분은 레닌의 무기고의 일부가 되었다.
1850년 늦여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세계 자본주의 경제 발전에 대한 마르크스의 연구를 토대로 1848년에 시작된 혁명의 파고가 가라앉았으며 사회주의 혁명은 유럽의 어디에서도 당면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서유럽 경제는 상당히 호전되고 있었고, 그것은 1848년의 격변에 기름을 부었던 유럽 노동 대중의 불만이 줄어들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한 결론에 따라 정치적 조정뿐 아니라 조직상의 조정도 필요했다. 그래서 그해 초가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런 새로운 현실에 맞춰 자신들의 당 활동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23 자신들의 3년 전 하인젠 비판을 상기시키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런 노선은 독일의 생산자들 사이에서 청중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사태 전개가 머지않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옳았음을 입증했다.
동맹이 직면했던 것은 아마도 혁명 조직으로서는 가장 어려운 도전이었다. 다시 말해, 혁명의 시기가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나는지를 아는 것, 즉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런 시기가 확정된다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했듯이, 정치 활동의 조정이 가능하고 또 필요할 터였다. 동맹의 상당수 소수파는 혁명의 시기가 끝났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런 결정이 가능한지를 문제 삼기도 했다. 그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연구 결과를 무시한 채, 혁명이 여전히 독일에서 의제로 올라 있으며 그들은 그에 상응해 활동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혁명을 호소하는 활동을 계속하겠다는 것이었다. 논쟁에서 마르크스는 이런 견해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독일 민족에 한정된 관점이 《[공산주의] 선언》의 보편적 전망을 대체해 버렸고, 독일 장인들의 민족 감정이 조장되고 있다. 《[공산주의] 선언》의 유물론적 관점은 관념론에 자리를 내주었다. 혁명을 정세의 실제 요인들의 산물로 보지 않고 의지에 찬 노력의 결과로 보고 있다. … 실제 혁명 과정이 혁명적 구호로 대체될 것이다.”런던에는 독일 망명자들뿐 아니라 유럽 각지의 혁명이 실패한 후 여러 나라의 쁘띠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1850년 6월 유럽 민주화 중앙위원회를 결성했고, 결국 공산주의자 동맹의 소수파를 끌어들여, 예상되는 새로운 혁명적 투쟁을 지도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새로운 발견을 토대로 ‘중앙위원회’의 7월 ‘선언’이 “어리석음에 호소”하고 있다고 비판했는데, 그 선언이 계급투쟁을 부정하고, 혁명 이론을 무시하고, 혁명 과정을 단지 조직상의 문제로 환원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예견대로, 2년이 채 안 돼 그 단체는 망하고 말았다. 유럽에 또다시 혁명의 시기가 도래한 것은 10년도 더 지나서였다.
언제 혁명의 시기가 끝났는지를 확정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면, 그것이 언제 시작되는지를 확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웠다. 적어도 10여 년 동안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문제와 씨름했다. 계급투쟁의 소강 상태 덕분에 마르크스·엥겔스 경향은 그런 확정을 하기 위해 필수적인 연구 — 그들은 그것을 “고역”이라고 불렀다 — 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신입 성원 한 사람으로 1850년대 초 런던에 있었던 빌헬름 립크네히트는 마르크스가 자신의 연구뿐 아니라 다른 성원들의 연구도 진지하게 다루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마르크스는 매일 [대영박물관에] 갔고 우리에게도 같이 가자고 강권했다. 탐구하시오! 탐구하시오! 그것이 우리가 그에게 귀가 따갑게 들은 절대적 명령이었고, 그는 뛰어난 머리로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다른 망명자들은 매일 세계 혁명을 계획하고 밤낮 없이 아편 같은 모토에 도취해 있었다. “내일 혁명이 시작될 거야!” 반면, 우리 “잔소리꾼 패거리”, “도적떼”, “인류의 찌꺼기들”[반대자들이 마르크스의 당에 퍼부은 욕설들 중 일부다]은 대영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우리 자신을 교육하고 미래의 전투를 위해 무기와 탄약을 준비했다. …
마르크스는 엄격한 선생님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탐구하라고 강권했을 뿐 아니라 우리가 확실히 그렇게 하도록 만들고야 말았다.
“고역”은 사실 마르크스의 당과 다른 혁명적 경향들의 차이였다. 엥겔스가 1859년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서평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우리 당은 2월 혁명[1848년 파리]으로 정치 무대에 이끌려 들어갔고 그래서 순전히 과학적 목표를 추구하는 일은 중지됐다. 그럼에도, 기본적[‘유물론적’] 관점이 마치 끊기지 않는 실처럼 당의 모든 출판물에 담겨 있었다. …
1848~49년 혁명 패배 이후, 해외에서 독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점차 불가능해지자 우리 당은 이민자들의 말싸움 공간을 … 속류 민주주의자들에게 내주었다. [반면에] 우리 당은 새로운 과학적 전망을 이론적 기초로 삼아서 그것을 정교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런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 당은 망명지의 ‘위인들’처럼 사기가 꺾이지 않을 수 있었다.
아래에서 살펴볼 책은 이러한 연구들의 첫 번째 결과이다.
26 후속편으로 계획했던 책 — 결국 《자본론》으로 출판하게 되는 책 — 에 대해 다른 당원에게 말하면서, 마르크스는 그것이 “약간 다른 형태를 취할 것이며, 어느 정도 더 대중적이 될 터인데 … [그 책이] 분명히 혁명적 구실을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27 당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미래의 전투에 대비해” 과학적 ‘탄약’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또다시 정치 투쟁에서 과학적 작업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 책이 출판되기 몇 달 전 다른 동료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마르크스는 그 책의 목표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나는 우리 당이 과학적 승리를 거두기를 희망한다.”자본주의 경기 순환의 부침이 결정적이라는 것, 특히 경기 하강이 유례 없이 깊을 때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확신했음에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57년의 경제 위기 같은 위기들로부터 정치적 반향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적어도 즉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영국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현대의 산업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희망을 걸었지만 영국의 상황도 결코 더 밝지는 않았다. 특히, 경제 위기가 잦아든 1858년 말에는 그 사실이 더 분명해졌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당시 새로운 혁명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런 맥락에서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던 중에 그 후 친구와 적들이 모두 무시해 버린 매우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낡아 빠졌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자본주의가 이제야 “적어도 대략이나마 세계 시장과 그런 시장을 기반으로 한 생산”을 창출했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1858년에도 실제로 그것이 소멸할 운명이었는지는 의문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대륙에서는 혁명이 임박해 있을 뿐 아니라 즉시 사회주의적 성격을 띨 것이다. 지구상의 이 조그만 귀퉁이에서는 혁명이 필연적으로 분쇄되지 않을까? 부르주아 사회의 운동이 훨씬 더 광대한 지역에서 여전히 세력을 떨치고 있으니 말이다.
29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가 1848년 혁명의 패배와 함께 시작됐다는 것은 그런 혁명이 임박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 이것은 하트와 네그리처럼 역사적 경향과 현재 현실을 뒤섞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보여 준다.
40년 뒤 엥겔스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뒤돌아볼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덕분이었다. 물론 나중에 그가 썼듯이, 문제는 전제가 잘못됐다는 것이었다. 자본주의는 1858년에 결코 그 잠재력을 다 소모하지 않았고, 사회주의 혁명 또한 어디에서도 의제에 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1848년의 사건들을 평가하면서 내린 결론과 같았다. “역사는 우리가, 그리고 우리처럼 생각했던 사람들이 모두 틀렸음을 입증했다. 당시 대륙의 경제 발전 상태를 보면 단연코 자본주의 생산의 폐지가 무르익은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정확히 예측했듯이, 새로운 혁명적 시기가 1860년대 초에 도래했을 때 마르크스는 1848년의 교훈을 실천할 기회가 왔다고 보았다. 그의 지도 아래 1864년에 창설된 국제노동자협회(IWMA)는 조직적으로도 공산주의자 동맹과는 매우 달랐는데, 유럽 정치 역사상 최초로 독립적인 노동계급 정치 활동을 했다. 그는 노동조합이 “일반적인 사회 운동과 정치 운동에 지나치게 초연하려 하는 것” — 레닌이 후에 1902년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경제주의”라고 부른 것 — 을 비판함으로써 협회를 통해 노조가 “노동계급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광범한 이해관계 속에서 노동계급의 조직적 중심으로서 의식적으로 활동하는 법을 배우도록” 설득하려는 투쟁을 이끌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생각하고 정치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의 노력은 엥겔스의 결정적 도움을 받아,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처럼 정치적 행동을 무시하는 노동자 운동 내 다른 경향들의 반대에 맞서 결국 유럽 각국에서 대중적 노동자 정당의 토대를 놓았다. 오늘날의 프랑스 사회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이 그런 사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럽중심주의자였는가?
30 9년 후인 1857년에 그는 완전히 태도를 바꿔, 이제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엄중히 규탄하고 종교에 이끌려 나선 아랍의 반제국주의 저항을 지지했다. 31 엥겔스의 처음 견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유물론적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 운동, 특히 1848년의 교훈은 프랑스 제국주의가 그 전까지는 아무리 진보적이었을지라도 이제는 쓸모없어졌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제 식민지 피지배 민족들의 저항은 지지받아 마땅한 운동이었다. 1883년 죽기 직전에 마르크스는 알제리의 온화한 기후가 자신의 건강에 도움에 되길 바라며 알제리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자신의 딸 로라에게 식민지 민중의 처지에 대해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마르크스의 동지애가 전혀 약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혁명적 운동이 없다면 그들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32
1848년 혁명의 실패를 계기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럽 이외 지역의 발전에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알제리·인도·멕시코의 세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알제리의 사례를 보자면, 《공산주의 선언》 출판 한 달 전에 엥겔스는 프랑스가 알제리를 정복하고 알제리 종교 지도자 압드-엘카데르가 이끈 항쟁이 패배한 것이 “문명의 진보를 위해 중요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라면서 박수갈채를 보냈다.33 그러나 1857~59년에 영국의 지배에 맞선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을 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반(反)식민지 투쟁을 지지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마르크스는 “인도가 영국인들에게 막대한 돈과 인력을 낭비하게 할 것이라는 점에서 현재 우리에게 최고의 동맹자”라고 자신의 협력자[엥겔스]에게 말했다. 34 따라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모두 마르크스가 1848년 말에 혁명 운동의 국제적 상호의존성에 대해 예견했던 것을 이들 나라에서 일어난 항쟁이 입증해 준다고 생각했다. 1871년에 마르크스가 사실상 지도하고 있던 국제노동자협회는 콜카타[인도 서벵골의 주도(州都) — 옮긴이]에 협회의 지부를 설립하고 싶다는 요청이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협회의 런던 소재 집행위원회인 총평의회의 간사는 마르크스로부터 “지부에 현지인들을 반드시 가입시키도록 촉구할 필요성을 … 지시받았다.” 새로 가맹한 지부가 순전히 망명자들의 지부가 되지 않게 하려는 조처였다. 35
마르크스가 처음으로 인도에 대해 쓴 일련의 기사의 논조도 1848년 당시 엥겔스가 알제리에 대해 취한 태도와 비슷하다. 마르크스는 1853년에 영국이 인도의 산업과 사회 구조들을 침식하는 것에 대해 “그것이 사회 혁명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했다. 비록 그런 정책들의 결과를 “목격한 인간이라면 당연히 … 역겹다고 느끼겠지만 말이다.”36 그 후의 역사와 연구 때문에 그들은 이런 평가를 수정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미국 남북전쟁 개전 직전 무렵인 1861년에 쓴 글에서 “미국의 대외 정책이든 국내 정책이든 노예 소유주들의 이익이 길잡이 구실을 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 멕시코 북부의 강탈 덕분에 “노예제와 노예 소유주들의 지배”가 텍사스뿐 아니라 오늘날의 뉴멕시코와 아리조나 주(州)에도 실행될 수 있었다. 37 캘리포니아 금광 개발과 함께 찾아온 이점은 “야만적인” 노예제의 확장으로 훼손됐다.
마지막으로, 멕시코의 사례가 있다. 1849년 엥겔스는 미국의 멕시코 북부 정복이 “전적으로 그리고 오로지 문명의 이익을 위해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정력적인 양키”가 “나태한 멕시코인들”과 달리 “캘리포니아 금광을 신속하게 개발”할 것이고, 그래서 “역사상 세 번째로 세계 무역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다.38 그러한 주장이 만약 마르크스가 서유럽의 자본주의 출현에 대한 자신의 설명을 다른 곳의 모델로 삼으려 했다는 의미라면, 그들은 공부를 더 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1877년에 러시아 혁명가들에게 보낸 잘 알려진 편지에서 말하기를, 자신의 분석을 그렇게 왜곡한 비평가는 “서유럽 자본주의의 발생에 대해 내가 개략적으로 묘사한 것을 역사철학 이론으로 변형시켜서 모든 민족이 역사적 환경과 무관하게 숙명처럼 따라야 할 일반적 발전 경로로 만들어 놓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나서 마르크스는 사회 구성체들을 “역사적 환경”이 서로 다른 구체적 실체로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구성체들을 비교해서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겠지만, 마르크스가 경고했듯이, “일반적인 역사철학 이론을 만능열쇠처럼 사용해서는 그런 통찰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이론의 최고 미덕은 초역사적 이론이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39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논점은 하트와 네그리의 ‘결정론적’ 마르크스에 대한 또 하나의 반박인 셈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마르크스가 세포이 항쟁을 지지한 것을 알지 못하므로 마르크스가 1853년에 인도에 대해 취한 초기 입장을 들어 “유럽중심주의” 지지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마르크스가 유럽 바깥의 역사는 유럽이 이미 지나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으로만 생각했다”고 주장한다.40 그 직후에 이런 주장과, 그들의 새 관점의 근본 전제를 이루는 다른 주장들이 《공산주의 선언》에 포함되게 된다. 《[공산주의] 선언》의 초고격인 엥겔스의 문답식 《공산주의의 원칙들》은 더 명확했다. “이런 혁명이 한 나라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아니다. … 그것은 세계적인 혁명이고, 따라서 세계적인 범위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답하고 있다. 41 1848년 혁명의 전야에 쓰였기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현실의 운동”만이 그 질문에 실질적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런 격변들에 뛰어들 때 견지한 세계적 관점은 항상 정치적 평가의 준거틀 노릇을 했다.
만약 하트와 네그리의 비판 속에 함축된 주장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세계의 나머지 지역보다 유럽의 발전을 우선시했다는 흔한 비난을 반복하는 것이라면, 또다시 그들은 틀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헤겔의 역사철학 덕분에 세계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된 것은 분명하지만, 자신들의 입장을 구체화한 것은 그들이 의식적인 공산주의자가 되고 혁명적 협력 관계를 확립한 1844년이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오직 “생산력의 보편적인 발전”이 이뤄져야만 “각 민족이 다른 민족들의 혁명에 의지하게 되고, 마침내는 지역에 매인 개인들이 세계사적인 개인들, 경험적으로 보편적인 개인들로 대체”돼, “인간들 사이의 보편적인 교제”가 가능해진다고 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 ‘세계사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이미 1848년 말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혁명의 결과가 “이탈리아·캐나다·프로이센·동인도제도·다뉴브강 연안·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투쟁들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관돼 있다고 결론지었다. 1849~50년의 비교적 조용한 시기에 런던과 대영박물관에서 탐구에 몰두한 결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판단을 굳히게 됐다. 그들은 당시 세계의 경제적 중심이 서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했음이 분명하다고 결론내렸다.
[미국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일은, 심지어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보다도 중요한데, 바로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 [그 결과] 세계 무역의 무게중심은 … 이제 북아메리카의 서남부가 되었다. … 지금 대서양이 하는 구실, 그리고 고대에 지중해가 했던 구실을 태평양이 하게 될 것이다.
43 그들은 이런 평가가 아시아의 민족들, 특히 중국 민중에게 혁명적 함의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부분적으로는 영국이 중국 동부 연안 지역에 상업적으로 침투한 결과이기도 했던 1850년 태평천국의 난 소식을 접하고서, 마르크스는 “지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안정된 왕국이 사회적 격변의 전야에 있고, 그것은 어쨌든 문명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44 중국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과 그것이 세계를 뒤흔드는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는 점에 대해 그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때 서유럽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세계관에서 중심에 놓인 적이 있었다면, 확실히 1850년 이후로는 더는 그렇지 않았다. 새로 획득한 세계적 관점 덕분에 그들은 1858년에 조금의 미련도 없이 “지구상의 이 조그만 귀퉁이”를 벗어나 세계를 관찰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1882년에, 유럽중심주의라는 비난의 근거가 됐고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 지역이었던 서유럽이 아니라 당시 농민이 인구의 압도 다수였고 유럽에 한 발만 담그고 있던 러시아가 “유럽 혁명 활동의 전위”가 될 것이라고 정확히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45
이런 평가는 분명히 처음 제시된 것이었다.맺음말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또다시, 냉전 종식 이래 그 어느 때보다 더 불안정해졌다. 세계의 생산자들인 다중 자신이 이에 대항하는 싸움을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해서 이것이 자신의 통찰력이 더 깊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변명거리가 되지는 못한다. 더욱이 하트와 네그리가 제국에 대한 핵심 테제들에서 그러하듯이 질서를 제안하는 것은 다중의 잠재적 전위 투사들을 무장 해제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50여 년 전에 자신들의 견해를 제시했지만, 그때보다도 지금 그들의 견해는 더욱 현실성이 있다. 《제국》의 ‘선언’을 포함해, 그 후 제시된 어느 것도 더 나은 설명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결정론적 해석이 제시하는 바와 달리, 그들은 숙명론자가 아니었기에 지금 인류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하는 양자택일에 직면해 있다는 점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무시무시한 분쟁뿐 아니라, 유럽의 여러 선거에서 파시스트 세력이 약진하는 상황은 인류가 이러한 운명적 선택에 직면해 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 대안을 만드는 데 착수해야 할 의무가 있다. 기다리라는 하트와 네그리의 조언이야말로 필요없다. 제국이 의식·조직·규율 있는 활동 없이도, 다시 말해 혁명 정당 없이도 현실적 대안으로 제국에 맞서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다. 누구보다도 혁명 과정을 잘 이해하고 있던 레닌은 전투가 한창일 때 혁명적 지도부를 만들려 하는 것은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오래 전에 깨닫고 있었다. 하트와 네그리가 더 많이 공감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운명은 진지한 혁명가들이 전투가 한창일 때에야 혁명적 지도부를 만들려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비극적으로 보여 준다. 즉, 그러한 지도부가 이미 존재하지 않아, 대중이 방향성을 결정하도록 제때 돕지 못한다면 그때는 너무 늦다.
역사는 거듭거듭 대중이 기꺼이 행동에 나설 것임을 보여주었다. 하트와 네그리도 아마 이에 동의할 것이다. 역사는 또한 그런 에너지가 가장 효과적으로 집중되지 않는다면, 그런 기회들은 끔찍한 결과를 남긴 채 수십 년 동안 유실된다는 것도 보여 주었다. 아직까지 역사는 대중의 에너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집중하는 방안으로 의식적이고, 조직적이고, 규율을 갖춘 지도부, 다시 말해 혁명 정당보다 나은 대안이 있음을 보여 주지 않았다.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가 지금 처한 현실, 다시 말해 혁명적 지도부가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한 두 곳의 상황만 찬찬히 생각해 봐도 이 주장이 옳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처럼 역사의 교훈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역사의 교훈을 추출할 때 사용했던 방법론을 적절한 대안도 없이 성급히 내다버리는 것은 정치적으로 무책임한 것이다. 특히 “코뮤니스트 투사”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개선할 점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물론자였기에 공산주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핵심 과업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그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그들은 계급투쟁의 실험실인 다중, 프롤레타리아의 생동하는 투쟁에 직접 참여하거나 그와 유기적 연관을 맺었다. 하트와 네그리가 지금까지 내놓은 것을 보면 그들이 그러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주
- M Hardt and A Negri, Empire(Cambridge, Mass, 2000), pp44-46. ↩
- 같은 책, p256. ↩
- 같은 책, pp302, 354-359. ↩
- 같은 책, pp411-413. ↩
- 같은 책, pp64, 66. ↩
- E Mandel, Late Capitalism(New York, 1972), pp402, 406. ↩
- 같은 책, p49. ↩
- A. Nimtz, Marx and Engels: Their Contribution to the Democratic Breakthrough(Albany, 2000)에 그러한 견해와 분석이 제시돼 있다. ↩
- H. Draper, Karl Marx’s Theory of Revolution, vol 1b(New York, 1977), p234. ↩
- K. Marx and F, Engels, Collected Works, vol 38(London, 1975), p23. 이하 MECW로 줄임. ↩
- MECW, vol 26, pp319-320. ↩
- MECW, vol 6, p303. ↩
- Marx-Engels Gesamtausgabe(new edition, Berlin, 1975) Bd 20, 1, pp706-707. ↩
- MECW, vol 6, pp303-304 ↩
- 같은 책, p498. ↩
- 같은 책, pp177-178. ↩
- 같은 책, p294. ↩
- 같은 책. ↩
- 같은 책, p389. ↩
- 같은 책. 당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아일랜드 독립이 영국 프롤레타리아의 주도로 이뤄지리라고 예상했다. 그들은 후에 그러한 견해를 뒤집었다. 1869년에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오랫동안 영국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이 아일랜드 지배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 그러나 더 깊이 연구한 결과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영국 노동계급은 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렛대는 아일랜드에 있습니다.”(MECW, vol 43, p398) ↩
- MECW, vol 6, p388. ↩
- MECW, vol 27, p271. ↩
- MECW, vol 10, pp626-627. ↩
- Marx and Engels Through the Eyes of Their Contemporaries (Moscow, 1978), p71. 마르크스가 당원들의 과학적 탐구 작업을 어떻게 고무하고 격려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훌륭한 사례 중 하나는 요한 에카리우스(Johann Eccarius)와 마르크스의 관계다. 에카리우스는 재단사로 마르크스의 도움을 받아 프롤레타리아 출신 지식인이 됐다.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H. Draper, 앞의 책, vol 2, pp644-653, ‘Two Adventures in Sophisticated Marxology’ 장을 보라. 두 사람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마르크스가 “부당하게 경멸”했다는 아비네리(Avineri)의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 MECW, vol 16, pp470-471. “망명지의 위인들”이라는 표현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52년에 쓴, 혁명가연하는 개혁주의적인 망명자들을 풍자 형식으로 폭로한 같은 이름의 원고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
- MECW, vol 40, p377. ↩
- MECW, vol 41, p193. ↩
- 같은 책, p347. ↩
- MECW, vol 27, p512. ↩
- MECW, vol 6, p471. ↩
- MECW, vol 18, pp67-69. ↩
- MECW, vol 46, p242. 마르크스의 알제리 방문이 순전히 건강상의 문제를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그가 ‘아랍 지역의 공동체 소유’를 탐구하는 데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지적해 둘 만하다.(MECW, vol 46, pp210-211) 마르크스는 1883년에 죽기 약 반 년 전에 영국의 이집트 점령에 반대해 프랑스에서 벌어진 반제국주의 활동들을 호의적으로 보고했다.(앞의 책, p298) ↩
- MECW, vol 12, p132. ↩
- MECW, vol 40, p249. ↩
- General Council of the First International, vol 2(Moscow, 1963-1968), p258. ↩
- MECW, vol 8, p365. ↩
- MECW, vol 19, pp36-37. ↩
- M. Hardt and A. Negri, 앞의 책, p120. ↩
- K. Marx and F.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Moscow, 1975), pp293-294; MECW, vol 24, pp200-201. 레온 트로츠키는 이 주제에 대해 오래 전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초판의 서문에서 ‘산업이 더욱 발전한 나라는 덜 발전한 나라의 미래상을 보여 줄 뿐이다’라고 썼다. 이러한 생각을 조건과 무관하게 문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생산력 발전과 사회적 모순의 심화는 두말할 것 없이 부르주아 발전의 길에 들어선 모든 나라의 운명이다. 그러나 속도와 수준의 불균등성, 즉 인류 발전의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그러한 불균등성은 자본주의 하에서 특히 첨예해졌을 뿐 아니라, 경제 형태가 서로 다른 나라들 사이에 종속·착취·억압이라는 복잡한 상호의존 관계도 발생시켰다.” L. Trotsky, The Living Thoughts of Karl Marx(London, 1946), pp40-41. ↩
- MECW, vol 5, p49. ↩
- MECW, vol 6, pp351-352. ↩
- MECW, vol 10, p265. ↩
-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NRZ Revue의 후속 호에서, “우리는 이미 유럽의 다른 어떤 정기간행물보다 먼저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의 중요성과 그것이 미칠 영향을 지적했다”고 썼다. 같은 책, p504. ↩
- 같은 책, p267. ↩
- MECW, vol 24, p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