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이론 심층 탐구
마르크스의 소외론 *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과거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술 진보를 이룩했다. 지금은 우주 여행과 인터넷과 유전자 공학의 시대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힘 앞에서 이토록 무력감을 느낀 적도 없다. 전에는 우리의 노동 생산물이 우리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 적이 없다. 지금은 핵 재앙과 지구 온난화와 무기 경쟁의 시대이기도 하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 전체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남을 만큼 생산할 수 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빈곤으로 성장 장애를 겪고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다. 우리는 자연을 통제할 힘이 있지만, 우리 사회의 특징은 불안정성이다. 경제 침체와 군사적 충돌이 마치 불가항력의 자연 재앙처럼 우리 삶을 파괴한다. 도시의 인구밀도가 높아질수록, 고독하게 외톨이로 사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칼 마르크스는 이 체제가 아직 발흥기였을 때조차 이런 모순이 분명했다고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한편, 과거 인간 역사의 시대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산업과 과학의 힘이 인간의 삶에 나타났다. 다른 한편, 로마 제국의 공포를 능가하는 쇠퇴의 징후도 존재한다. 우리 시대에는 모든 것이 모순투성이처럼 보인다. 인간의 노동을 덜어 주고 생산성을 높여 주는 놀라운 힘을 가진 기계가 있는데도 우리는 아사와 과로를 목격한다. 부의 최신 원천이 빈곤의 원천으로 둔갑하는 것을 보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예술의 성공은 개성을 상실한 대가처럼 보인다.마르크스는 소외 이론을 발전시켜서, 사회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비인격적 힘의 이면에 인간의 행동이 있음을 밝혀냈다. 마르크스는 우리가 사는 사회의 양상들이 우리와 무관하고 자연발생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과거 인간 활동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 줬다. 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자 게오르크 루카치는 마르크스의 이론이 “고정적이고 비역사적이고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회 제도의 겉모습을 해체해 버린다. 사회 제도의 역사적 기원을 밝혀내서, 사회 제도가 모든 점에서 역사에 종속돼 있으며 심지어 역사적으로 몰락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지적했다. 마르크스는 과거의 인간 행위가 현대 세계를 창출했다는 것뿐 아니라 인간의 행위가 자본주의의 모순이 없는 미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보여 줬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을 발전시켜, 인간이 사회에 의해 형성됐지만 그와 동시에 그 사회를 바꾸려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 사람이 “결정된 세계”이자 “세계를 만들어 내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 줬다. 자신의 선배 격인 헤겔이나 포이어바하와 달리, 마르크스는 소외의 근원이 심리나 종교가 아니라고 봤다. 마르크스는 소외가 물질 세계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해했다. 소외는 통제력 상실, 특히 노동에 대한 통제력 상실을 뜻했다. 마르크스의 소외론에서 노동이 그토록 결정적 구실을 하는 까닭을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 본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사상을 살펴봐야 한다.
인간 본성은 무엇인가?
4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자연을 상대로 노동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이 동물의 노동과 구별되는 까닭은 인간이 의식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의 도입부에서 이 점을 묘사한 부분은 유명하다.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이 사회와 무관한 고정불변의 것이라는 상식에 반대했다. 그는 불변의 인간 본성처럼 보이는 많은 특징이 사실은 사회마다 매우 달랐음을 보여 줬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 자체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을 상대로 노동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인간 사회의 변함없는 특징, 즉 “자연이 인간에게 부과한 영원한 조건”이라고 주장했다.거미는 직조공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며, 꿀벌의 집은 많은 인간 건축가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라도 가장 훌륭한 꿀벌보다 뛰어난 점은, 집을 짓기 전에 이미 머리 속에서 집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노동과정의 끝에 얻는 결과물은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유용한 입문서인 《칼 마르크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에른스트 피셔도 인간 노동의 고유한 특징을 묘사했다. 피셔는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의식적으로 행동하므로 기존의 성과를 이용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역사가 있지만 동물은 그렇지 않다. “동물의 본성은 영원한 반복이지만, 인간의 본성은 변형·발전·변화다.”
자연을 상대로 한 노동은 자연뿐 아니라 노동자 자신도 바꾼다. 마르크스는 이런 생각을 《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외부 세계를 상대로 행동하고 바꾸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성도 바꾼다. 인간은 잠자고 있는 능력들을 계발해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한다.” 따라서 노동은 노동자가 자신이 사는 세계를 만들어 내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창조와 혁신의 자극을 받는 역동적 과정이다. 마르크스는 의식적으로 노동하는 능력을 우리 “종種의 본질”이라고 불렀다.
마르크스가 《경제학·철학 수고》(1884년)에서 설명했듯이, 우리 종의 본질은 또한 사회적 존재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사람들은 개인적 선호와 관계 없이 서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왜냐하면 협력해야만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강조했다. “사회는 그저 개인들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사회는 개인들이 맺고 있는 관계와 연관의 총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물질 세계와 관계 맺는다. 노동을 통해 인간은 자기 계발을 한다. 노동이 인간 관계의 근원이다. 따라서 노동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사회 전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노동하고 노동 방식을 개선하고 기존의 성과를 이용하는 능력 덕분에 생산력은 꾸준히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발전의 결과로 계급 사회가 등장했다. 사회가 잉여 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도 남들의 노동을 통제해서 살아가는 계급이 등장할 가능성이 생겨났다. 이 과정은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관리하는 데서 꼭 필요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 즉 생산자들이 자기 노동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따라서 노동의 소외는 계급 사회에서 비롯했다. 에른스트 피셔는 노동의 무한한 잠재력이 어떻게 사라지게 됐는지를 탁월하게 묘사했다.
최초의 도구에는 미래의 잠재적 도구들이 모두 들어 있다. 의식적인 활동으로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최초의 인식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필연적인 미래의 변화가 모두 들어 있다. 자신의 손과 지성과 상상력을 이용한 노동으로 자연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 생명체는 결코 그 일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뭔가를 해낼 때마다 새로 개척해야 할 영역이 생겨난다. … 그러나 노동이 창조적이지 않고 파괴적이면, 노동이 강압적으로 이뤄져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하지 못하면, 노동으로 인간의 육체적·지적 잠재력이 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사枯死한다면, 노동은 자신의 본질을,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부정하게 된다.
8 개인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분리시킨다. 그러나 소외는 모든 계급 사회에서 언제나 존재하는 고정불변의 인간 조건이 아니다.
계급 분화가 일어나 한 계급이 사회에 필요한 생산수단을 지배하면서 개인과 사회의 분리가 심화했다. 사회 생활의 특정 형태가 “자아의 두 차원, 즉 개인과 공동체를 분열시켜”자본주의와 소외 — 늘 겪는 일상사
9 토지가 생산의 원천이었고, 봉건적 장원 제도가 지배적이어서 사람들은 자신을 개인으로 이해하지 않고 토지와 관련해서만 이해했다. 마르크스는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봉건 사회에서 사람들은 아직 자연을 통제하지도, 기근을 겪지 않을 만큼 넉넉히 생산하지도, 질병을 치료할 수단을 개발하지도 못했다. 사회 관계는 모두 “노동 생산력의 낮은 발전 단계, 그에 상응해 물질 생활의 생산 과정 내에서 사람들이 맺는 제한된 인간 관계, 따라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제한적 관계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았다.”봉건적 토지 소유에서는 외부적 힘인 토지가 인간을 지배한다. 농노는 토지의 부속물이다. 장자 상속권자, 즉 맏아들도 토지에 귀속된다. 토지가 장자를 상속받는다. 토지 소유가 사적 소유의 토대다.
11 바로 이 동물학이 인간의 삶과 인간 관계를 결정했다. 낮은 수준의 생산력 때문에 농민은 끊임없이 노동을 한 반면, 봉건 영주와 성직자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농민에게서 강제로 빼앗았다.
토지 소유는 상속과 혈통에 의존했다. ‘혈통’이 운명을 결정했다. 초기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혈통과 가계, 요컨대 육체의 계보에 대한 귀족의 자부심이 … 드러나는 학문이 바로 문장학紋章學이다. 귀족의 비밀은 동물학이다” 하고 썼다.12 봉건 사회의 사회적 관계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였지만, 명백히 개인 간의 사회적 관계였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개인들이 노동을 하면서 맺게 되는 사회적 관계는 어쨌든 그들 사이의 인격적 관계로 나타나지, 사물들[노동 생산물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위장되지는 않는다” 하고 썼다. 13
따라서 소외는 낮은 수준의 생산력, 인간의 토지 종속, 봉건 지배계급의 지배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소외에는 한계가 있었다. 농민은 자신의 토지에서 일했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대부분 개별 가족 단위에서 생산했다. “사람도 토지에 속박돼 있었지만, 토지도 인간에 속박돼 있었다. … 농민은 중세 시대의 농노조차 적어도 노동 생산물의 50퍼센트, 때로는 60~70퍼센트를 소유했다.”14 그런 사회는 야만적인 인클로저[공유지에 울타리로 경계선을 쳐서 사유지로 만드는 것]를 통해 탄생했다. 그래서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의 다수가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을 직접 이용하지 못하게 됐다. 그 결과 생존을 위해 새로운 형태의 착취, 즉 임금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무토지 노동자 계급이 등장했다. 자본주의는 “인간 관계, 생산 도구, 생산 원료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 왔다. 15 이런 근본적 변화 때문에 삶의 양상 전체가 변했다. 심지어 시간 개념조차 크게 바뀌었다. 17세기에만 해도 장난감이었던 시계가 노동시간을 측정하거나 근무태만을 헤아리는 수단이 됐다. 왜냐하면 “산업 규율이 요구하는 노동 윤리와 시간 엄수 습관을 추상적인 시간으로 측정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16
그러나 봉건제의 속박과 자본주의의 동역학은 매우 달랐다. 부르주아지는 돈으로 모든 것을 사고팔 수 있는 사회를 원했다. “판매는 소외를 실천하는 것이다.”17 그러나 19세기에 임금노동이 다른 지급 방식들을 대체했다. 이제 노동이 시장에서 사고팔리는 상품이 된 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형식상 서로 독립적이지만 실제로는 단단히 연결돼 있다. 생산은 집이 아니라 새로운 규율 시스템이 적용되는 공장에서 이뤄진다. 공장에서는 노동의 기계화 때문에 인간과 기계의 관계가 바뀌었다. “인간 독창력의 훌륭한 산물인 기계가 노동자들에 대한 전제적 지배의 원천이 됐다.” 18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장인이나 숙련공의 노동과 공장 노동자의 노동을 비교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생산하고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할 권리를 더는 행사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노동 생산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다.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는 18세기 런던의 역사를 다룬 《런던의 교수형London Hanged》에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기 생산물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18세기 후반의 “사법 공격” 같은 혹독한 탄압을 겪은 뒤에야 노동자들은 자신이 생산한 것이 공장을 소유한 자본가의 것이라는 사실을 수긍했다. 18세기에 대다수 노동자들은 임금을 화폐로 받지 않았다. “러시아의 농노 노동, 미국의 노예 노동, 아일랜드의 농업 노동, 런던의 도시 노동은 사실은 물물교환이었다.”수공업과 매뉴팩쳐에서는 노동하는 사람이 도구를 이용하지만, 공장에서는 기계가 인간을 이용한다. 전자의 경우는 인간에서 노동 도구의 운동이 시작되지만, 후자의 경우는 기계의 운동을 인간이 따라야만 한다. 매뉴팩쳐에서 노동하는 사람은 산 메커니즘의 일부다. 공장에서는 노동하는 사람과 독립해 있는 생명 없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인간은 단지 산 부속물일 뿐이다.
20 19세기에 산업화를 비판한 존 러스킨도 비슷한 지적을 하면서, 분할되는 것은 인간이므로 노동 분업은 틀린 말이라고 썼다.
공장 생산에서 가장 중요하고 파괴적인 특징 중 하나는 분업이었다. 자본주의 전에도 사회적 분업이 존재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부문의 생산이나 기술에 참가했다.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각 생산 부문 내에 세부적인 분업이 생겨났다. 이런 분업 때문에 노동자들은 특정 임무와 원자화된 활동으로 부문화돼야 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자신의 한두 가지 능력만을 실현할 뿐, 다른 능력은 모두 희생해야 했다. 해리 브레이버맨은 이런 분업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사회적 분업은 사회를 세분하지만 작업장 내 분업은 인간을 세분한다. 사회의 세분은 개인과 종種의 능력을 발전시키지만, 인간의 세분은 인간의 능력과 필요를 고려하지 않고 이뤄지므로 인간과 인간성을 해치는 범죄다.”21 노동자는 자본주의와 무관하게 살아갈 수 없게 됐다. 노동을 한다는 것은 인간 기계가 된다는 뜻이었다. 노동을 못 하는 것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삶을 뜻했다. 노동을 못 한다면, 자본이 노동자를 버린다면, 노동자는 생매장당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자본이 존재해야 노동자도 존재할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 자본이 노동자와 무관하게 노동자의 삶의 내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22 [노동자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노동은 생존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은 강요된 노동이 됐고, 노동자는 노동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없고 무엇을 어떻게 만들지도 선택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체제에서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에게 점점 종속된다. “따라서 [노동자는]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기계 수준으로 전락하고, 인간에서 추상적 활동과 욕망 덩어리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또한 시장 가격과 자본 투자의 변동, 부자의 변덕에 점점 더 휘둘리게 된다.”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적外的인 것이고 그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는 사실,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할 때 자기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비참하고 불행하다고 느끼고, 정신적·육체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발전시키지 못하고, 자신의 육체를 학대하고 정신을 파괴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노동자는 노동하지 않을 때만 자신을 느끼며, 노동하고 있을 때는 자신을 느끼지 못한다. 노동하지 않을 때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노동할 때는 집을 떠난 것처럼 불편하다. 따라서 노동자의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이다. 노동자의 노동은 강요된 노동이다.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노동의 낯선 성격은 육체적 강제나 그 밖의 강제가 사라지자마자 노동을 전염병 피하듯 피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24 이런 집단성은 자본주의 생산 방식에 반대하는 끊임없는 투쟁이나, 기계의 통제를 받지 않고 오히려 기계를 통제할 권리를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빈번하게 나타났다. 후자의 경우 가장 유명한 것은 19세기 초의 러다이트 반란이었다. 반란이 아주 광범하게 확산되자 마침내 이를 분쇄하기 위해 출동한 군대가 웰링턴 장군의 지휘하에 워털루 전투에 파병된 군대보다 더 많았다.
공장 체제에서 노동의 파편화는 또 다른 면이 있다. “작업장에서 단편적 노동을 하는 세분화된 노동자[의 등장은] 가치를 생산하는 계급이 집단적이 됐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혼자서 온전한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는 없기 때문이다.”소외의 네 가지 측면
자본주의의 발전은 되돌릴 수 없음이 입증됐고,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규모의 소외가 나타났다. 《경제학·철학 수고》(1844년 수고 또는 파리 수고로도 알려져 있다)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가 만연하는 구체적 방식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25 그 결과 노동자들은 영양실조에 시달리면서도 시장에 내다 팔 환금換金 작물을 경작하고, 자신이 입주하지도 못할 주택을 짓고, 구입할 수 없는 자동차를 생산하고, 신을 수 없는 신발을 만든다, 등등.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재화로부터 소외당한다. 다른 사람, 즉 자본가가 노동자의 생산물을 소유하고 처분하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든 사람들은 창의력을 발휘해 자신이 사용하고 교환하고 판매할 재화를 생산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이것이 소외된 활동이 된다. “노동자가 자기 생산물을 이용해 생존을 유지하거나 더 나은 생산 활동에 참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노동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 아무리 절박하게 필요할지라도 — 자기 손으로 생산한 것에 손댈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의 생산물은 모두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26 노동자는 이런 창의성을 영원히 잃어버린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노동자에게 자극이나 활력을 주지 못하고, 또 “미개척 영역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주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자의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피로감만 주는 까닭이다.
사실상 노동 생산물이 노동자를 지배하므로,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자기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이 증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이작 일리치 루빈은 《마르크스의 가치론에 대한 소론》이라는 훌륭한 책에서 상품 생산의 양적 측면과 질적 측면을 살펴본다. 첫째, 노동자는 자신이 만들어 낸 가치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다. 노동자가 생산한 몫을 기업주가 독차지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착취당한다. 질적으로도, 노동자는 창의적 노동을 자신의 생산물에 투입하지만 그 대가로 창의적 노동을 받을 수는 없다. 루빈이 설명하듯이, “창의력의 대가로 노동자는 임금이나 급료, 즉 얼마간의 화폐를 받고 이 돈으로 노동 생산물을 구입할 수 있지만 창의력을 구입할 수는 없다. 창의력의 대가로 노동자는 재화를 얻는다.”27 마르크스는 이것을 자본주의에 고유한 현상으로 봤다.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열심히 일하면 대개 더 많이 소비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가 열심히 일할수록 자신에게 적대적인 체제의 힘을 강화시킨다. 노동자 자신과 노동자의 내면 세계는 더 가난해진다. “노동자가 저가 상품이 될수록 그는 재화를 더 많이 생산한다. 인간 세계의 가치가 떨어질수록 사물 세계의 가치는 증대한다.” 28
이렇게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는 것을 두고 마르크스는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노동자의 소외는 노동이 대상이자 외부적 실재가 된다는 뜻일 뿐 아니라, 노동이 노동자의 외부에, 노동자와 무관하게, 노동자에게 낯설게 존재하고, 점점 자율적인 힘으로서 노동자와 대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노동자가 대상에 불어넣었던 생명이 적대적이고 낯설게 노동자와 대면한다.”29 노동과정은 노동자의 통제력을 벗어났을 뿐 아니라 노동자에게 적대적인 세력의 통제를 받는다. 왜냐하면 자본가와 관리자 들이 우리에게 더 열심히, 더 빨리, 더 오래 일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리 브레이버맨이 지적하듯이, “노동의 구매와 판매를 바탕으로 한 사회에서는 작업을 분할하는 것이 임금 비용을 절약한다.” 30 그래서 기업주들은 노동과정을 더 잘게 나누는 데 관심이 있다. 그 결과 엄격하고 반복적인 과정이 노동자의 개인적 재능이나 기술을 가려 버린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노동과정으로부터의 소외: 마르크스가 파악한 소외의 두 번째 요소는 생산 과정에 대한 통제력 상실이다. 노동 조건, 노동이 조직되는 방식, 노동이 우리에게 육체적·정신적으로 미치는 영향에 대해 우리는 발언권이 없다.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 상실은 우리의 창의적 노동 능력을 대립물로 바꿔 놓는다. 그래서 노동자의 “활동은 수동적이고, 힘은 무기력하고, 생식 능력은 거세당하고, 노동자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에너지, 개인 생활은 자신을 거역하는 활동이고 자신과 무관하며 자신의 것도 아니다. 도대체 활동이 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공장 노동은 신경계를 극도로 소진시키고 다양한 근육 활동을 없애며 육체적·지적 활동의 자유를 완전히 빼앗아 버린다. … 공장 메커니즘에 포함되고 그 메커니즘과 함께 지배자의 힘의 일부가 되는 과학, 거대한 물리력, 노동 대중 앞에서 공장 작업에 무의미한 개인들의 전문 기술은 극히 일부만 남고 사라진다.
32 노동일과 작업 공간 등 노동 조건은 이미 결정돼 있다. “아주 세부적인 동작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업 공정을 관리자와 엔지니어가 구상·설계·측정하며 훈련을 통해 업무 표준에 적합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은 사전에 결정된다.” 33 노동자들은 기계 취급을 받는데, 그 목표는 노동의 주관적 요소를 객관적이고 측정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과정으로 바꾸는 것이다.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의 몇몇 훌륭한 구절에서 점증하는 노동과정의 합리화와 기계화가 우리 의식에 끼치는 영향을 다뤘다. 다음 인용문이 보여 주듯이, 그의 분석은 예언적이며 오늘날 화이트칼라 노동의 모습을 매우 정확하게 묘사한다.
마르크스 시대 이래 현대의 생산 방식은 노동과정의 분열을 증대시켰다. 현대적 생산 조직은 지금도 조립라인 방식을 바탕으로 한다. 과학 연구를 이용해 생산 과정을 작업 공정별로 분할한다. 그 결과 첫째, 단순 작업을 하는 화이트칼라 직업이 생겨나고, 관리자가 생산 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독점하게 됐다. “사고와 행위, 구상과 실행, 손과 마음의 통일은 자본주의가 처음부터 파괴하려 한 것인데, 이제는 과학과 다양한 공학 수단을 이용한 체계적 분해에 의해 공격받고 있다.”노동과정의 합리화로 말미암아 노동자의 인간적 본질과 특수성은 합리적 예측에 따라 기능하는 추상적인 특수 법칙과 대비되는 오류의 원천으로만 여겨진다. 객관적으로든 노동과 관련해서든 인간은 이 과정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인간은 기계 시스템에 통합된 기계의 일부다. 그는 이 기계 시스템이 이미 자체적으로 존재하고, 인간과 무관하게 기능하며 좋든 싫든 그 법칙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동료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셋째, 노동자는 같은 인간으로부터 소외된다. 이 소외는 부분적으로는 계급 사회 구조에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적대에서 비롯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착취하고 생산물을 통제하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한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인간의 활동이 자신에게는 고통이지만, 틀림없이 다른 사람에게는 즐거움과 기쁨을 제공한다. … 따라서 그가 자신의 노동 생산물, 즉 자신의 대상화된 노동을 자신과 무관한, 낯설고 적대적이고 강력한 대상으로 여기게 되면, 그와 그 대상의 관계는 다른 사람 — 자신에게는 낯설고 적대적이고 강력하고 무관한 — 이 지배하게 된다. 그 자신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활동이라면, 그는 다른 사람의 지배·강압·속박 속에서 그를 시중드는 활동을 하는 것이다.
36 노동자들은 개인들로서가 아니라 다른 생산관계의 대리인, 자본·토지·노동의 인격화로서 남과 관계를 맺는다. 버텔 올먼이 썼듯이, “우리는 남을 개인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연장선으로 이해한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자본은 독립적이고 인격이 있는 반면, 산 인간은 의존적이고 인격이 없다.’” 37 개별 생산자의 상품은 비인격적 형태로 나타난다. 누가 어디에서 어떤 특정 조건에서 생산했는지는 관심이 없다. 상품 생산이 뜻하는 바는 누구나 “남의 생산물을 사용하지만, 정작 자신의 노동 생산물로부터는 소외된다”는 것이다. 38
게다가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상품의 구매와 판매를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노동자는 생활 속에서 노동을 통해 의식주 등을 만드는 수천 명과 날마다 접촉한다. 그러나 자신이 구매해 소비하는 상품들을 통해서만 그들을 알 뿐이다. 이 때문에 에른스트 피셔는 노동자가 남을 “동등한 권리를 지닌 동료”가 아니라 “상사나 부하, 지위가 있는 사람, 크고 작은 권력체”로 본다고 지적했다.마르크스는 대량 상품 생산이 인간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인간의 능력을 착취하면서 새로운 욕구의 끊임없는 창출을 추구한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남 위에 군림하며 낯선 권력을 확립하려는 노력은 모두 … 비인간적이고 세련되고 부자연스럽고 비현실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채 발명의 재능을 가지고 끊임없이 계산하는 노예가 된다. 그[뚜쟁이]는 자기 이웃의 가장 타락한 욕구 충족을 도와 주고, 그의 요구에 영합하고, 그의 불건전한 욕망을 부추기고, 모든 약점을 이용해서 성교의 대가로 돈을 뜯어낸다.우리는 남을 이해타산의 렌즈를 통해 본다. 우리의 능력과 필요는 돈벌이 수단으로 변질되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경쟁자나 부하나 상사로 생각한다.
인간 본성으로부터의 소외: 네 번째 요소는 마르크스가 “유적類的 존재”라고 부른 것으로부터의 소외다. 우리가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주위 세계를 의식적으로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우리의 노동은 강요받는, 강제된 노동이다. 노동은 개인적 선호나 집단적 이익과 아무 관계도 없다. 자본주의 분업은 생산 능력을 엄청나게 증대시켰지만, 부를 창출하는 사람들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이 과정을 묘사했는데, 그것은 체제에 대한 감동적인 고발이다.
노동이 부자를 위해서는 기적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궁핍을 생산하는 것이 현실이다. 노동은 궁궐을 짓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오두막집을 짓는다. 노동은 아름다움을 가져다주지만 노동자에게는 추함을 가져다 준다. 노동은 기계 작업으로 대체되지만, 일부 노동자들은 야만적인 노동으로 내몰리고 다른 노동자들은 기계가 돼 버린다. 노동은 지혜를 생산하지만 노동자에게는 어리석음과 백치병을 선사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인간은 이익 증진을 위해 집단으로 행동할 능력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그 능력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사적 소유와 계급 분열 속으로 가라앉는다. 인간은 생산을 의식적으로 계획하고 생산과 사회의 발전 필요성을 일치시킬 능력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그 능력은 무계획적인 이윤 추구로 뒤바뀐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자연을 개조하지 못하고, 인간 행위의 결과를 통제할 수도, 심지어 예측할 수조차 없다. 예컨대, 산업 전반에서 거듭되는 저렴한 신기술 개발이 산성비나 가스를 발생시켜 오존층을 파괴할 수 있다.
42 그리고 어느 기업의 특정 제품이 대박을 터뜨릴 수 있지만, 그러면 다른 기업들의 시장이 타격을 받는다.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공급 과잉을 일으킨다. 노동자가 더 많이 생산하지만, 그 생산물이 팔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과거 사회에서는 결핍·기근·흉작으로 고통을 겪었다. 자본주의에서 경제 침체가 뜻하는 바는 노동자들이 “너무 많이 생산해서 소비를 줄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노동자들의 노동이 덜 생산적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43 우리가 겪는 경제 위기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잠재적인 생산 능력을 억제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사회 조직이다.
마찬가지로, 작업장의 생산성을 향상시킨 자본가는 의도치 않게 이윤율을 떨어뜨리고 자기 계급 전체의 이윤율도 둔화시킨다.상품 물신성은 무엇인가?
44 자본주의는 상품 생산이 일반화한 최초의 체제다. 이 체제에서 상품은 “사회 전체의 보편적 범주”가 된다. 45 상품 생산의 득세는 우리가 만든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상품의 지배는 우리 사회에 너무 만연해 있어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인간이 성취한 것 전체와 생산물 전체가 상품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유력한 사회의 부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 나타난다.”46 상품은 사용가치가 있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교환가치도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들의 다양한 욕구는 상품 구입을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다. 상점에서 식료품을 사고, 자동차나 버스 티켓을 사서 여행하고, 책·TV·컴퓨터를 구입해 지식을 얻는다. 그러나 상품의 이런 유용성보다 압도적으로 중요한 것은 교환가치이며 인간 욕구의 충족은 시장의 작동과 분리되지 않는다. 47
상품의 신비: 모든 사회에서 인간은 노동으로 만든 재화로 필요를 충족시킨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하의 상품을 분석하고는 “상품은 우리 외부에 있는 대상으로, 그 속성에 의해 인간의 온갖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재화다” 하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욕망이 위胃에서 생겨나는지 환상에서 비롯한 것인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48 마르크스는 상품 유통에 의해 개별 생산자들 간의 관계가 그들이 생산한 상품들 간의 관계로 바뀐다고 설명했다. 개별 생산자들은 서로 분리돼 있지만, 각자의 상품에 완전히 의존한다.
시장에서 상품의 유통은 생산과정보다 훨씬 더 신비롭게 은폐된다. 생산과정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신이 생산하는 상품과 얼마간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다. 상품들이 시장으로 보내져 화폐로 교환되고 그 다음에 다른 상품들과 교환되면서 이 관계는 사라진다. 마르크스가 썼듯이, “직접적 생산과정과 유통 과정의 통일인 실제 생산과정은 새로운 구성물을 만들어 내는데, 이 구성물 속에서는 내적 연관의 맥脈이 점차 사라지고, 생산관계들은 서로 무관하게 되고, 구성 가치들은 서로 무관한 형태로 굳어진다.”상품 소유자들은 자신들을 독립된 사적 생산자로 만드는 분업 때문에, 사회적 생산과정과 이 과정에서 그들이 맺는 관계가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것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 그들의 상호 독립성은 자신들의 생산물을 통한 전면적인 상호 의존 체제로 보완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50 개인들이 상품 소유자로서만 생산 과정에 참가하므로 상품은 사회적 특성을 획득한다. 마르크스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러므로 생산자들에게는 그들의 사적 노동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 개인들이 각자 노동과정에서 맺는 직접적인 사회 관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통한 개인 사이의 관계로 그리고 사물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나는 것이다.” 51 그래서 마치 시장 자체가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게 가격 등락을 일으키고 노동자들을 한 생산 부문으로 밀어넣거나 다른 생산 부문에서 밀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는 사물이라는 사회적 형태를 통해 개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52 이것은 소외된 관계의 다른 측면을 포함하는데, 마르크스가 주장했듯이, “경제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경제적 관계의 인격화일 뿐이고, 그들은 이 경제적 관계의 담당자로서 서로 상대한다.” 53
자본주의 체제에서 개인은 노동력이나 생산 도구 같은 것을 소유해야만 생산관계에 참가할 수 있다. 그 결과 개인들 자신이 아니라 “마치 사물이 스스로 생산관계를 확립할 능력과 덕목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54 오늘날 TV와 자동차뿐 아니라 섹스와 예술, 노동 등 갖가지 시장이 존재한다. 에른스트 피셔가 썼듯이, “우리는 점차 상품 세계의 생활에 익숙해진다. 이 세계의 특징은 아마 휴가용 전단지와 신제품 광고 모델일 것이다. 우리는 싸게 팔려고 내놓은 소외된 대상들의 소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필요한 물건(또는 유행하는 물건)을 마법처럼 상품으로 바꾸는 것이 무엇인지를 거의 묻지 않는다. 또, 일상 현실이 돼 버린 네온사인 불빛과 깜빡이 조명이 반짝이는 마녀의 연회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도 묻지 않는다.” 55
마르크스는 인간 관계가 사물화事物化하는 과정 전체, 즉 인간의 능력이 생명 없는 대상에 귀속되고 사회 조직이 인간 의지와 무관하게 나타나는 과정을 상품 물신성으로 설명했다. 상품 물신성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강화됐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개인·가정·사회의 필요를 전부 떠맡고, 그런 필요를 시장에 종속시켜 자본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개조한다.” 화폐: “보편적 뚜쟁이.” 교환가치를 창출하고 상품을 유통시키려면 다른 모든 상품을 대표할 수 있는 상품이 필요하다. 이 상품으로 서로 다른 상품들을 비교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발전하자 서로 다른 상품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문제가 제기됐고, 그와 동시에 보편적 상품인 화폐 형태로 그 문제를 해결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물리적 대상인 금이나 은이 “인간 노동의 직접적 화신化身”이 된 것이다. 화폐의 발전으로 인간과 생산물의 관계는 인간의 통제나 의식적 행위와 무관한 물질적 형태를 띤다. “이런 상황은 먼저 인간 노동의 산물이 일반으로 상품 형태를 띤다는 사실로 나타난다. 따라서 화폐 숭배의 수수께끼는 상품 숭배의 수수께끼로, 이 수수께끼가 지금 우리 눈앞에서 우리를 현혹하고 있다.”57 상품 유통에서 화폐의 구실은 그 과정과 관련 맺는 인간의 의식을 결정한다. 화폐는 물건의 가치를 나타내고, 스스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메사로시가 설명하듯이,
마르크스는 화폐를 인간과 인간의 욕망을 중매하는 “보편적 뚜쟁이”라고 불렀다. 애초 금속의 형태를 띠었던 화폐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무가치한 합금 동전이나 지폐에 밀려 오래 전에 폐기됐다. 그리고 지금은 화폐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 화폐는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상품이다. “화폐는 다른 모든 상품의 겉모양을 벗겨낸 것이자 보편적 소외의 산물이다.”화폐의 거대한 힘은 자연적 속성 같다. 확실히 화폐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자본주의적 물신숭배의 두드러진 사례며, 그 절정은 자본을 낳는 이자다. 이 점에서 사람들은 화폐가 더 많은 화폐를 만드는 자기증식 가치가 있고 … 노동자, 기계, 원료 등 모든 생산 요소는 그저 조력자로 그 지위가 격하되며 화폐 자체가 생산자를 부유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59 마르크스는 이런 소유욕이 어떻게 고무되고 부정되는지도 설명했다. “노동자는 살 수 있는 만큼만 소유할 수 있고, 또 노동자의 삶은 오로지 소유를 위한 것이다.” 60 마르크스가 쓴 《경제학·철학 수고》의 한 구절은 이 점에 대해 특별한 통찰력을 보여 준다. 그는 화폐가 어떻게 개성을 없애 버리는지를 설명한다. 자본주의가 개성의 만개를 인정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멋진 응답이다.
그리하여 화폐는 거대한 능력을 갖게 되지만, 동전의 이면을 보자면, 인간의 욕망과 능력이 마르크스가 소유 의식이라고 부른 것으로 축소된다. “사유재산은 우리를 매우 어리석거나 편협하게 만들어, 우리가 그 물건을 갖게 될 때, 그 물건이 자본으로서 우리를 위해 존재할 때, 우리가 그 물건을 직접 소유하거나 먹거나 마시거나 입거나 거주할 때, 요컨대 우리가 그 물건을 사용할 때 비로소 그 물건은 우리의 것이 된다.”화폐를 매개로 나에게 존재하는 것, 내가 구매하는 것, 즉 화폐가 구매하는 것이 나, 곧 화폐 소유자다. 화폐의 힘이 강해질수록 나도 강해진다. 화폐의 속성은 화폐 소유자인 나의 속성이자 나의 가장 중요한 힘이다.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결코 나의 개성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나는 추남이지만, 미녀를 살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추남이 아니다. 왜냐하면 못생긴 데서 비롯한 불쾌감조차 화폐 덕분에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서 나는 절름발이지만, 화폐는 나에게 24개의 다리를 구해 준다. 따라서 나는 절름발이가 아니다. 나는 부도덕하고 부정직하며 파렴치한 개인이지만, 화폐가 존경을 받으면 그 소유자인 나도 존경 받는다. … 화폐를 통해 나는 인간의 마음이 열망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의 모든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화폐는 나의 무능을 정반대의 것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62 지배계급이 소유한 막대한 생산력은 상상을 초월한 부를 안겨다 주지만, 그들은 체제의 거대한 경제력을 통제할 수 없고, 심지어 체제의 한 부문조차 정확하게 계획할 수 없다. 자본가들은 모순에 빠져 있으며, “자본은 사회적 힘이지만, 그 소유는 집단적이 아니라 사적이므로 자본 운동은 필연적으로 자기 행위의 사회적 함의에 무관심한 개별 소유자들이 결정한다.” 63 자본가는 경쟁자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경쟁하고, 그의 행위들은 개별 기업에만 온전히 합당하므로, 그의 행위가 사회 전체로 확대되면 많은 기업을 파산시킬 수 있는 경제 침체를 낳는다. 경제 위기는 체제가 개별 자본가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다. 이것은 왜 위기가 지배계급의 자신감과 이데올로기를 그토록 강타하는지를 말해 준다. 자본가는 자신의 대담한 기업가 정신이 부를 창출한다고 믿고 싶어하지만, 현실에서 그는 “다른 사람이 만든 물결에 올라탄다.” 64 계급투쟁은 자본가가 막을 수 없고, 또 자본가가 피고용인들의 노동에 얼마나 의존하는지를 절실히 느끼게 하고, 경제 위기와 마찬가지로 지배계급의 전망에 치명타를 가한다.
상품 물신성과 계급: 소외와 상품 물신성은 모든 사회 관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부를 소유한 자들도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그 속에서 구체적 관계를 형성한다. 그들의 개성은 자본주의의 명령에 파묻힌다. 마르크스가 썼듯이, 부유해지려는 본능은 “수전노에게는 개인적 특징일 뿐이지만 자본가에게는 사회 메커니즘의 결과이며 자본가는 그 메커니즘의 톱니바퀴일 뿐이다.”마르크스는 《신성가족》에서 지배계급의 이런 상황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유산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느끼는 인간적 자기 소외는 동일하다. 그러나 전자는 이 자기 소외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자기 확신을 얻으며, 그 소외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힘을 깨닫는다. 유산 계급은 소외 속에서 인간의 존재감 비슷한 것을 느낀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자기 소외 속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그들은 소외 속에서 자신의 무기력과 비인간적 존재의 현실을 경험한다.그래서 소외가 비록 자신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줄지라도 지배계급은 체제 내 객관적 지위 때문에, 자신들이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권력과 야만성뿐 아니라 소외도 낳는 그 체제를 언제나 옹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루카치는 지배계급이 자본주의의 상품 물신성을 절대 극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하는 착취자 구실이나 체제 옹호자 구실을 거부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의 진정한 성격을 결코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자본주의 사회 제도들의 근간이 되는 진정한 사회 관계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생산관계가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이라고 계속 믿고 싶어한다. 루카치는 반대로, 비록 상품 물신성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긴 해도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의 현실에 영원히 눈감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루카치는 오히려 노동계급의 반자본주의 투쟁이 사회의 부를 생산하는 데서 노동계급이 하는 진정한 구실을 드러내므로 노동계급만이 자본주의에서 사물화의 베일을 벗길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주장했다. 계급투쟁이 일어나면 노동자들은 더는 자신을 고립된 개인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루카치는 노동자들이 상품 물신성 이면에 있는 현실을 힐끗 보는 것이 혁명적 사회 변혁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암시한다. “그래서 인간의 성취가 그의 전체 개성과 분리돼 상품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면서 오직 프롤레타리아만이 혁명적 의식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 이론의 유용성과 오용
67 그러나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소외론을 관념론과 섞어버렸다.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소외를 사회 편제가 아니라 심리학의 관점으로 설명했다. 1950년대 후반에 등장한 신좌파는 스탈린주의의 이론과 실천에 반발했지만, 신좌파의 일부 필자들은 스탈린주의라는 목욕물과 함께 마르크스주의라는 아기도 내다버렸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일부 핵심 관점, 예컨대 사회 구조를 형성하는 데서 경제 구조가 주된 구실을 한다는 것과 자본주의의 핵심에는 객관적인 계급 적대가 놓여 있다는 것을 기각했다. 페리 앤더슨이 썼듯이,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공통된 전통으로 가장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아마도 대대로 이어온 유럽 관념론의 지속적인 보존과 영향일 것이다.” 68 소외는 현대 생활의 불행, “고독한 군중”, “원자화된 도시인들의 군상이 이렇다 할 목표나 의사결정 권한이 없는 사회 시스템의 압력에 짓눌려 부서지고 마비됐다고 느끼는 것”을 설명하는 데 한정됐다. 69 소외는 사회 편제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되게 심리 상태를 뜻하는 것이 됐다.
소외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에서 핵심적이지만 논쟁적인 면도 있다. 소외 문제를 다룬 마르크스의 핵심 저서인 《경제학·철학 수고》가 1932년에 드디어 출간되자, 이 책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와 장-폴 사르트르를 포함해 ‘서구 마르크스주의’로 알려진 전통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70 그러나 이 편집자들은 소외를 심리 상태로만 이해해 소외는 “특이한 종류의 심리적·사회적 혼란, 예컨대 패배, 불안감, 사회적 무질서, 절망, 몰개성, 불안정, 무관심, 사회의 해체, 고독감, 원자화, 무력감, 무의미, 고립, 염세론, 신뢰나 가치 상실과 관련된다.” 71 소외가 특정한 심리 문제일 뿐이라면, 소외의 해결책도 개인의 의식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소외가 주되게 정신 상태라고 한다면, 사회 조직의 근본적 변화 없이도 소외를 치유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이 주장했듯이, 각종 소외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깨질 수 있는 “환상의 사슬”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슬은 “전형적인 대안적 사고 방식들”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72
이 시기에 일부 분야에서 유행한 혼란스런 소외 개념의 전형은 에릭 조셉슨과 매리 조셉슨이 편집한 책, 《고립된 인간: 현대 사회의 소외Man Alone: Alienation in Modern Society》다. 이 책은 1962년에 초판이 나온 뒤 1968년까지 8쇄가 인쇄됐다. 조셉슨 부부에게 소외는 “우리 시대의 특징인 무시당하는 삶들의 침묵하는 절망”을 묘사하는 것이고, 소외를 겪는 사람들의 긴 명단에는 여성, 이주자, 성 소수자, 마약 중독자, 청년, 예술가 등이 있다.73 마르크스의 이론은 생산과정이 사회 전체를 형성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방법을 제공한다. 두 가지 활동 분야가 소외와 관련해 특별히 논쟁적이다. 첫째, 지적 또는 정신적 노동의 지위와 소외된 생산의 창의성이다.
그러나 소외에 대한 마르크스의 저작들, 《경제학·철학 수고》,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자본론》을 보면 마르크스에게 소외는 단지 정신 상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인 정신의 근원은 사회 전체의 조직 방식에 있다.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소외된 개인의 생활은 질적으로 똑같다. 그의 종교 활동, 집안일, 정치 등은 그의 생산 활동만큼이나 뒤틀리고 잔인해진다. … 이런 감옥의 담장 밖에는 인간의 활동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74 그러나 지식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이 가치 있다고 해서 그들이 보편적 소외 형태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은 아니다. 그 반대로,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 하나는 지식의 상업화다. 75 마이크로칩이나 컴퓨터 소프트웨어 설계는 콩 통조림이나 자동차와 꼭 마찬가지로 자본가의 재산이다. 자본가들은 육체 노동을 이용해 부를 쌓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정신 노동을 전유해서 부를 쌓는다.
이 글에서 설명한 분업은 노동과 창의성의 날카로운 분리로 이어진다. 노동은 엄격히 통제받고, 개별 업무들로 세분된다. 각각의 과정에서 창의적 요소들은 수많은 파편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노동 자체는 상품이며 그 가치는 생산에 들어간 노동 시간, 예컨대 노동자의 훈련과 교육에 들어간 시간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숙련 기술자나 엔지니어는 미숙련 노동자보다 임금을 더 많이 받을 것이다. 브레이버맨이 썼듯이, “이런 식으로 어떤 사람의 노동 시간은 무한한 가치가 있는 반면 다른 사람의 노동은 거의 가치가 없는 양극화한 구조가 거의 모든 노동과정에서 나타난다.”사회적 분업은 지식 노동자들이 사회의 새로운 진실을 발견할 잠재력을 갉아먹는다. 프란츠 야쿠보프스키가 썼듯이,
사회적 분업은 경제에서뿐 아니라 사회 생활과 사고 전반에서 일련의 하위 영역sub-spheres을 만들어 낸다. 이 영역들은 독자적 법률 장치들을 자율적으로 발전시킨다. 전문화의 결과로 개인의 영역은 각각 자체의 고유한 특정 대상의 논리에 따라 전개된다.
77 새로운 기술과 방식을 개발할 수 있는 우리의 잠재력은 모두 경쟁에 종속된다. 자본주의 사회 구조 자체가 우리의 지적 발전이 사회의 실제 운동과 완전히 동떨어진 사실을 추적하도록 강요한다. 쓸모 있는 발전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발전을 억제하고 제약하는 틀 내에서 연구가 이뤄진다는 뜻이다.
지적 활동은 이런 한계 안에서 사회 전체와 고립된 채 이뤄진다. 결국 개별 학문은 “자신의 구체적 현실의 토대를 이루는 방법이나 원리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78 과학자와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예술가도 인간 창의성이 상품으로 바뀌는 일반적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첫째, 다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술가도 자신의 돈벌이 능력에 의존한다. “부르주아지는 지금까지 경외심과 존경을 받던 직업들의 후광을 벗겨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의사, 변호사, 성직자, 시인, 과학자를 임금노동자로 바꿔놓았다.” 79 둘째, 런은 상품 생산이 예술의 진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한다. 예술 작품이 시장에서 판매된다는 사실이 작품 구상과 창작을 결정한다. 마르크스는 유진 수의 소설을 비평하면서 이와 관련한 사례 하나를 제시했는데, 그는 “부르주아 사회가 의도하는 윤리적·정치적 가정이 작가에게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다.” 80 예술도 결코 상품 물신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 가지 형태의 정신적 신비화 — 예술은 물질적 현실에 초연하다는 낭만적 예찬 — 가 상업의 확대로 서서히 무너지자 새로운 물신성이 그것을 대체했다. 상품 물신성.” 81 이것은 또한 새롭고 도전적인 문화 발전이 어떻게 단순한 상품으로 빠르게 체제에 통합되는지를 보여 준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 작품들이 콩 통조림과 마찬가지 지위로 몰락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예술은 우리의 상상력과 감성을 자극한다. 예술은 사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구체적 현상 이면에 있는 모순을 들춰낼 수 있다. “예술은 사회 현실을 뒤덮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연기를 꿰뚫어볼 수 있다.” 일부 예술가들은 온 힘을 다해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현존 체제에 대한 예찬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때조차 그들의 창작품은 자본주의의 구체적 현상을 꿰뚫을 수 있다. 런이 썼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예술의 생산과 소비도 동일한 과정을 밟는다. 유진 런이 《마르크스주의와 모더니즘》이라는 탁월한 책에서 설명했듯이, 부르주아 사회는 예술의 자유를 제공하기도 하고 빼앗기도 한다. “예컨대, 분업과 인간 활동 방식의 기계화 때문에, 또 질보다 양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부르주아 사회 — “봉건적” 속박에 비해 진보한 — 는 또한 여러 예술 형식에 해롭다.”예술은 넘쳐나는 소외를 보여 주는 교환 비율로 환원될 수 없다. 그 후광이 제거됐음에도 예술은 사회·경제 상황을 낯설게 하는 것을 넘어 문제를 진단하고 강조할 수 있다. … 모든 예술은 자본주의가 충족시킬 수 없는 미학적 즐거움과 교육 욕구를 창출하는 능력이 있다. 비록 점점 더 시장의 영향을 받지만, 예술의 창작과 소비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며 공장 노동이나 순전한 상품과 똑같지 않다.마르크스의 소외론 적용에서 두 번째 논쟁은 노동 영역 밖에 있는 활동을 분석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문제다. 이런 활동은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하는 활동이다. 노동의 세계가 우리를 녹초로 만들고 비참하게 만들고 적대적인 것이 될수록 사람들은 노동 밖의 삶에 자기 에너지를 쏟는다. 체제가 발전하면서 우리의 욕구와 기대를 키우는 새로운 시장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예컨대, 날씬한 몸매와 젊음을 보장해 준다는 상품들, 스포츠 게임, 자연 체험, 예술의 향유 같은 욕구를 개발해 온 거대 산업들을 생각해 보라. ‘레저 산업’과 ‘연예 산업’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노동과 여가의 분리로 자유 시간에 공백이 생겨났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일과 후 시간 때우기도 시장에 의존하게 되고, 시장은 규격화된 도시 환경에 적합하고 생활 자체의 대체물 노릇을 하는 활력 없는 오락과 여흥, 볼거리를 엄청나게 발전시킨다.” 1990년대 생활의 뚜렷한 특징은 개인과 가정이 사적私的인 세계로 후퇴한 것이다. 특정한 라이프 스타일의 선택이야말로 개인적 성취를 위한 진정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패션, 요리, 휴가, 정원 가꾸기를 다루는 TV 프로그램과 잡지에 대한 관심이 늘고, DIY(Do-It-Yourself: 소비자가 직접 만드는) 시장이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가정과 집은 그 자체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여가 활동이 됐다. 그와 동시에, 가정과 집은 시장의 우선순위에 종속돼 갔다. 우리의 자유 시간을 늘릴 수 있는 상품은 모두 가정을 정서적 안식처가 아니라 소비 단위로 만들 뿐이다. “현대의 가족과 서비스 산업 발전이 가사 노동의 부담을 덜어 주면서 가정 생활의 공허함도 늘어난다. 인간관계의 부담을 제거하면서 애정도 없애 버린다. 복잡한 사회 생활을 만들어 내면서 공동체의 흔적을 깡그리 지워 버리고 금전 관계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85 메사로시는 또한 소외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관계를 이룰 능력을 빼앗아 간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제한된 사적인 개인 생활 영역에서 인간성 상실에 대한 보상을 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소외를 강화할 뿐이다. “자율성에서 치료책을 찾는 것은 틀렸다. 우리의 고통은 자율성의 결여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 구조 — 생산양식 — 에서 비롯한 것이다. 사회 구조는 인간을 서로 고립시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한다.” 86
더욱이, 메사로시는 사적인 생활로의 후퇴가 자본주의의 지배력을 강화시켰다고 설명한다. “사생활과 개인 자율을 예찬하는 것은 이중적 기능을 한다. 객관적으로는, 주류 권력자들에 대한 하층 계급의 도전을 예방한다. 주관적으로는, 개인을 조종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메커니즘이 신비화한 고립되고 무기력한 개인으로 도피해서 거짓 성취감을 느끼게 만든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창의력을 표현하려는 노력이 소외를 근절할 수는 없다. 소외의 근절은 사회 전체의 변혁에 달려 있다. 우리는 개인 생활과 여가 시간을 계획하고 준비하지만, 자연계의 모습을 결정할 집단적 능력을 개인적으로 발휘할 수는 없다. 라이프 스타일과 여가 활동으로 소외에서 해방될 수는 없으며 소외의 바다에서 자유의 섬조차 만들어 낼 수 없다. 소외의 근원이 자본주의 사회이므로 그 사회에 맞선 집단적 투쟁만이 소외를 근절하고 날로 발전하는 우리의 막대한 능력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며 노동을 다시 삶의 중심으로 확립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썼듯이, “물질적 생산 과정, 즉 사회적 생활 과정은 자유롭게 결합된 인간들이 하는 생산으로 바뀌고 그들이 의식적·계획적으로 통제하게 될 때 비로소 그 신비의 베일을 벗을 것이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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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udy Cox, “An Introduction to Marx’s Theory of Alienation”, International Socialism 79 (Summer 1998)
↩
- K Marx, ‘Speech at the Anniversary of the Peoples’ Paper’, E Lunn, Marxism and Modernism [국역: 《마르크시즘과 모더니즘》, 문학과 지성사(1996)]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 p31에서 인용. ↩
- G Lukacs,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국역: 《역사와 계급의식》, 거름(1999)] (Merlin, 1971), p47. ↩
- 마르크스가 인간 소외에 대한 분석을 처음으로 발전시킨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철학적 선배인 헤겔은 소외를 인간 정신의 발전 과정의 한 계기로 봤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하는 소외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내놓았다. 그는 인간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힘을 상상의 신들에게 넘겼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 소외를 합리적 주장만으로도 근절할 수 있다고 봤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론적 소외 개념과 포이어바하의 비역사적 유물론을 모두 비판했다. 마르크스의 이론적 배경을 알고 싶다면 A Callinicos, The Revolutionary Ideas of Karl Marx[국역: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 책갈피(2007)], (Bookmarks, 1996), ch 3을 보시오. ↩
- E Fischer, How to Read Karl Marx (Monthly Review Press, 1996), p53에서 인용. ↩
- 같은 책, p52. ↩
- 같은 책, p51. ↩
- 같은 책, p54. ↩
- T Eagleton, Marx (Phoenix, 1997), p27. ↩
- K Marx, Capital[국역: 《자본론》, 비봉(2004)], vol 1 (Penguin, 1976), p173. ↩
- K Marx, Early Writings (Penguin, 1975), p318. ↩
- P Walton and A Gamble, From Alienation to Surplus Value (Sheed and Ward, 1972), p20에서 인용. ↩
- E Mandel and G Novak, The Marxist Theory of Alienation (Pathfinder, 1970), p20. ↩
- K Marx, Capital, p170. ↩
- K Marx, I Meszaros, Marx’s Theory of Alienation (Merlin Press, 1986), p35에서 인용. ↩
- P Linebaugh, The London Hanged (Penguin, 1993), p396. ↩
- 같은 책, p225. ↩
- 같은 책, p374. ↩
- 같은 책, p24. ↩
- K Marx, Capital, p460. ↩
- H Braverman, Labour and Monopoly Capitalism[국역: 《노동과 독점 자본》, 까치글방(1989)] (Monthly Review Press, 1974), p73. ↩
- K Marx, Early Writings, p285. ↩
- 같은 책, p335. ↩
- 같은 책, p326. ↩
- P Linebaugh, 앞의 책, p225. ↩
- B Ollman, Alien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143. ↩
- I I Rubin, Essays on Marx’s Theory of Value[국역: 《마르크스의 가치론》, 이론과 실천(1989)] (Black Rose Books, 1975), pxxv. ↩
- K Marx, Early Writings, p324. ↩
- E Fischer, 앞의 책, p67. ↩
- 같은 책, p327. ↩
- H Braverman, Labour and Monopoly Capitalism (Monthly Review Press, 1974), p80. ↩
- E Fischer, 앞의 책, pp58-59. ↩
- H Braverman, 앞의 책, p171. ↩
- 같은 책, p180. ↩
- G Lukacs, 앞의 책, p89. ↩
- K Marx, Early Writings, p331. ↩
- E Fischer, 앞의 책, p63. ↩
- B Ollman, 앞의 책, p144. ↩
- Rubin, 앞의 책, p15. ↩
- K Marx, Early Writings, p359. ↩
- 이런 경험의 단면을 뛰어나게 묘사한 것으로 C Caudwell, The Concept of Freedom (Lawrence and Wishart, 1977), p49를 보시오. ↩
- K Marx, Early Writings, p325. ↩
- C Harman, Economics of the Madhouse[국역: 《신자유주의 경제학 비판》, 책갈피(2001)] (Bookmarks, 1995)을 보시오. ↩
- E Mandel, 앞의 책, p22. ↩
- K Marx, Capital, 앞의 책, p125. ↩
- 같은 책, p125. ↩
- 같은 책, p1. ↩
- 같은 책, p165을 보시오. ↩
- B Ollman, 앞의 책, p187에서 인용. ↩
- K Marx, Capital, pp202-203. ↩
- 같은 책, p21. ↩
- 같은 책, pp165-165. ↩
- 같은 책, p24. ↩
- 같은 책, p179. ↩
- H Braverman, 앞의 책, p271. ↩
- E Fischer, 앞의 책, p68. ↩
- 같은 책, p187. ↩
- 같은 책, p205. ↩
- I Meszaros, 앞의 책, p197. ↩
- K Marx, Early Writings, p351. ↩
- 같은 책, p361. ↩
- 같은 책, p377. ↩
- G Lukacs, 앞의 책, p133에 인용된 마르크스의 말. ↩
- 같은 책, p63. ↩
- B Ollman, 앞의 책, p154. ↩
- K Marx, The Holy Family[국역: ‘신성가족’,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 박종철출판사(1997)], F Jakubowski, Ideology and Superstructure in Historical Materialism[국역: 《이데올로기와 상부구조》, 한마당(1987)] (Pluto, 1990), p87에서 인용. ↩
- G Lukacs, 앞의 책, p171. ↩
- P Anderson, Considerations on Western Marxism[국역: 《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 이매진(2003)] (New Left Books, 1976), pp50-51. ↩
- 같은 책, p56. ↩
- E Mandel, 앞의 책, p6. ↩
- E and M Josephson, Man Alone: Alienation in Modern Society (Dell Publishing Co, 1968), p12. ↩
- 같은 책, p13. ↩
- 같은 책, ch 1. ↩
- B Ollman, 앞의 책, p202. ↩
- H Braverman, 앞의 책, p83. ↩
- 예컨대, G Carchedi, Frontiers of Political Economy (Verso, 1991), p18를 보시오. ↩
- F Jakubowski, 앞의 책, p96. ↩
- 같은 책, p96. ↩
- E Lunn, 앞의 책, p15. ↩
- 같은 책, p16. ↩
- 같은 책, p12. ↩
- 같은 책, p16. ↩
- 같은 책, pp15-16. ↩
- H Braverman, 앞의 책, p278. ↩
- 같은 책, p282. ↩
- I Meszaros, 앞의 책, p26. ↩
- 같은 책, p267. ↩
- K Marx, Capital, p1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