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6호를 내며
이번 호는 천안함 사건 같은 현안 쟁점들, 중국 모델이나 신자유주의적 대학 구조조정처럼 세간의 관심을 끄는 문제들을 여럿 다뤘다.
먼저, 이번 호가 〈초점〉을 맞춘 쟁점은 천안함 사건, 유럽의 재정 위기, 낙태 윤리 논쟁이다. 김하영의 ‘천안함 사건을 통해 본 동아시아 질서 변동과 한반도’는 천안함 사건이 백령도 연안에서 벌어진 것, 원인을 둘러싼 의혹이 두 달 반 넘게 지속되고 있는 것, 미국과 남한 정부가 원하는 대북 제재가 난항을 겪고 있는 것 자체가 많은 것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첫째, 긴장을 부추겨 온 이명박 대북정책의 무능과 실패, 둘째, 미국의 상대적 패권 위축과 중국의 부상, 그리고 이런 변동이 낳는 지정학적 효과, 셋째, 동아시아에서 패권 위축을 만회하려는 미국의 전략과 그 전략에서 ‘북한 위협’ 카드의 용도 등이 그것이다. 특히, 이 글은 최근 미국발 금융 위기가 미중 간 세력관계 변동에 미친 영향, 경제 위기로 중미 간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이 심화되는 양상을 보여 준다. 또, 오바마 정부가 “협력”을 강조하고 다자주의를 채택하고 있지만, 대중 정책은 여전히 모순적이고 대북 정책도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분석하고 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유럽의 위기와 저항’은 과연 좌파가 최근의 세계 자본주의 위기에 서투르게 대응하다가 중대한 정치적 기회를 놓쳐버린 것인가 하는 질문에 흥미롭게 답하는 글이다. 캘리니코스는 한국에서도 번역 출판되고 있는 《뉴레프트리뷰》의 편집자 수전 왓킨슨의 문제 제기에 답하고 있지만, 사실 더 광범한 좌파들이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캘리니코스는 경제가 빠르게 회복하지 못할 것이므로, 질질 끄는 경제 위기는 부르주아 정치 구조에 압력을 가해 그 약점을 드러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민간 부채의 엄청난 증가에서 시작된 이번 경제 위기는 지금 공공 부채의 위기로 전이된 국면을 지나고 있다. 이 국면에서 가장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유로존이다. 캘리니코스는 유로존의 고질적인 구조적 결함이 어떻게 경제 회복을 저해하는지 설명한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자들은 노동자와 서민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캘리니코스는 그리스와 영국 등지에서 보듯이 노동자 운동이 이런 희생 강요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는 상황은 아니라면서, 현재 운동의 복잡한 양상과 급진 좌파의 상황 등을 분석한다.
그동안 한국에서 낙태는 법적 제한에도 불구하고 관행적으로 용인되는 상황이었으나 최근 우파들이 낙태 시술 병원을 형사 고발하고 정부가 낙태를 단속하는 등 공격을 받고 있다. 이에 여성·진보단체들이 낙태 단속과 처벌에 반대하며 여성 자신의 결정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최규진의 ‘낙태 윤리 논쟁과 낙태권 운동’은 낙태 공격에 반대하고 나아가 낙태 합법화 운동에 기여하고자 쓴 것으로, 우파들이 낙태를 공격할 때 핵심 무기로 사용하는 윤리 문제, 태아 생명권 문제 제기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최규진은 의료윤리를 연구하는 의사로서 윤리 문제를 앞세워 낙태를 공격하는 우파들의 논리를 의학과 철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하나하나 조목조목 비판한다. 여성의 결정권을 지지하지만 우파들의 태아 생명권 주장에 내심 곤혹스러웠던 사람들에게 이 글은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이 글은 낙태 공격이 시작되고 있는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미국의 사례에서 낙태권 쟁취 운동의 교훈을 이끌어낸다.
이번 호는 〈특집〉을 두 개 마련했다. 먼저, 〈특집1〉은 경제 위기와 중국 모델을 다룬 것으로, 중국 경제의 현 상황을 분석한 글과 중국 모델을 둘러싼 좌파들의 논의를 분석·비판한 글을 실었다.
이정구의 ‘갈림길에 선 중국 경제’는 세계경제 위기 속에서 빠르게 회복한 중국 경제가 과연 앞으로도 그 추세를 이어갈 수 있을지 분석한다. 이정구는 미국발 경제 위기와 그에 대응하면서 중국 정부가 시행한 정책이 중국 경제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고, 중국 경제 위기의 원인을 둘러싼 논쟁도 소개한다. 필자는 중국 정부가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쓴 결과 재정적자 규모가 크게 늘고 국유기업의 부실이 온존하는 등 부작용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또, 일각에서는 이번 기회에 수출 주도 중국 경제의 체질을 내수 확대로 개선해 가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이와 더욱 멀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용욱의 ‘중국 모델을 둘러싼 최근 좌파들의 논의’는 2000년대 중반부터 좌파 사이에서 증대하고 있는 ‘중국 모델’ 논의를 검토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통치 방식 변화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실패로 좌파들 사이에서 높아진 중국 모델에 대한 호의는 최근 세계경제 위기 속에서도 중국이 고도 성장을 지속하자 한층 증폭됐다.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는 한국 진보진영도 예외는 아니다. 김용욱은 중국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하거나 중국의 국제적 부상에 기대를 거는 국내외 좌파 논자들의 광범한 저작을 추적해 그들의 주장을 소개하고 비판한다. 특히 중국을 둘러싼 좌파들의 논의에 큰 영향을 미친 조반니 아리기의 주장을 심도 있게 다룬다. 이 글은 중국 사회의 성격을 ‘비자본주의 시장경제’나 ‘사회주의 시장경제’ 등으로 보는 견해의 문제점, 중국의 국제적 부상에 기대를 거는 동아시아 조공체제론이나 다극화체제론의 약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특집2〉는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신자유주의와 대학 구조조정’을 번역한 것으로,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학과 그 구성원들이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다룬다. 캘리니코스는 자신의 25년 넘는 대학 교수 경험을 바탕으로 생생하고도 깊이 있게 이 문제를 파헤친다. 이 글이 특수한 영국 얘기일지라도 그 보편성이 너무도 흥미롭다. 캘리니코스가 분석한 신자유주의적 영국 대학 ‘개혁’의 현실이 한국과 거의 똑같아서 독자들은 무릎을 치며 빨려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올해 한국에서 벌어진 세 사건 — 중앙대 구조조정, 김예슬 선언, 한국의 대학사회가 증오스럽다는 유서를 남긴 어느 대학강사의 자살 — 은 한국의 대학 현실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장이었다. 이 글은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분석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이 글은 한국에서도 유행인 ‘지식경제’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점점 열악해지는 대학 교원·학생들의 처지와 그 변화의 의미도 상세히 다룬다. 이 글은 대학생, 교수, 강사 등 신자유주의적 대학 구조조정에 맞서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호에서 다룬 〈현대 진보사상 조류〉는 존 롤즈의 《정의론》이다. 정의 문제는 전쟁과 신자유주의로 얼룩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이다. 최일붕의 ‘정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 존 롤즈 《정의론》 읽기’는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다양한 개혁주의적 논의의 바탕에 깔려 있는 롤즈 《정의론》의 핵심적 주장들을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비판한 글이다. 롤즈는 자신이 보편적인 정의 원칙들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지만, 최일붕은 실제로 그의 정의 이론은 특정한 사회적·역사적 상황과 그 상황에서의 특정한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의의 원칙들이 언제나 주로 역사적·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고 보며, 따라서 계급 사회의 정의관은 특정 사회계급(들)의 이익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역사유물론의 관점을 바탕으로 롤즈 《정의론》이 다루는 촘촘한 논의들을 따라가며 흥미로운 비판을 제기한다. 필자는 롤즈 정의론을 전폭 수용하는 개혁주의자들과 함께 공동 투쟁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자유와 평등, 민주, 인권, 우애 등 고전적 자유주의의 가치들은 자유주의 한계 안에서는 완전히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정의 문제 해결은 정의가 문제가 되는 사회 자체를 뛰어넘어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강동훈의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변화’는 〈시리즈 기획 한국 경제〉의 두 번째 글이다. 같은 필자가 쓴 이 시리즈의 첫 번째 글, ‘한국 경제 불안정한 회복의 이면’은 5호에 실렸다. 강동훈은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한국 지배자들이 경제 성장률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며, 경제 성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저축과 투자를 중심으로 1997년 이후 한국 경제의 변화를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그러면서 1997년 위기 이후 기업의 투자 부진을 단기 수익성 추구 경향, 주주들의 배당 증대 압박, 자본의 국외 유출 등 금융화 효과로 설명하는 금융화론자들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조목조목 지적한다. 한국 경제는 1997년 위기 이후 투자와 저축의 괴리를 카드·부동산 거품을 바탕으로 한 소비 붐과 수출 증대로 메워 왔으나 2008년 세계경제 위기로 이런 전략은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또, 이런 상황에서 임금 인상이나 복지 확대를 통한 민간 소비 증대로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을 도모하자는 개혁주의 전략은 자본가들의 저항을 억누르지 못하면 현실화될 수 없을 텐데, 그럴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게 힘이 있다면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제거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와 역사〉는 올해로 60년이 된 한국전쟁을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분석한 한규한의 ‘한국전쟁, 누구의 전쟁인가?’를 실었다. 한국전쟁은 한국 현대사의 분기점이었다. 분단이 고착화된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거니와, 민족 성원의 가슴에 상흔을 깊이 남긴 비극이었다. 여전히 민족 성원 다수가 통일을 지지하는 것도 바로 대량 살육이 수반된 전면전을 치른 경험 때문이다. 전쟁 경험은 또한 남과 북 양쪽에서 특정 사상만 허용되는 비민주적 정치를 더 쉽게 조장했다. 체제 부정 사상은 양쪽 다 모종의 보안법으로 금압하고 있다.
또한 전쟁과 분단은 군국주의를 부추겼다. 한 번 전면전과 대량 살육을 치른 경험 때문에 두 국가는 서로 불신을 거두지 못한 채 꾸준히 군사력을 증강해 왔다. 김대중-노무현의 대북 화해·협력 정책 하에서도 해마다 군사 예산이 증가했다. 그리고 전쟁 경험 때문에 외국 군대의 주둔이 더 쉽게 정당화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위협’을 명분으로 중국과 일본을 의식한 주한 미군 주둔을 더 쉽게 합리화한다.
만일 한국전쟁이 민족 해방 전쟁(전쟁 초기 몇 달 동안은 이런 성격이 일부 있었지만)이었다면 실패했더라도 이 모든 것을 한국전쟁을 이유로 정당화하기가 다소 어려울 것이다. 한규한은 이 글에서 어째서 한국전쟁이 이런 진보적 성격의 것이 못 되고 그저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다툼이 한반도를 제한된 무대로 해서 격화된 것이었을 뿐인지 보여 준다.
이번 호에는 책 두 권의 서평을 실었다. 하나는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를 포함해 내로라하는 진보신당 활동가와 지식인 들이 쓴 《리얼 진보》다. 그만큼 이 책은 진보신당의 정치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을 평한 정병호는 진보신당의 진보 재구성 프로젝트가 몇 가지 합리적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우경화 방향을 가리킨다고 분석한다. 최근 지방선거 이후 진보신당은 민주대연합 문제를 둘러싼 당내 분열로 큰 위기를 겪고 있는데, 정병호는 이 책에 담긴 진보신당의 정치에 이미 이런 위기의 씨앗이 포함돼 있었다고 지적한다. 진보신당의 정치를 정확하게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이 서평이 유용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키어런 앨런이 쓴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이다. 키어런 앨런은 아일랜드 마르크스주의자로 더블린대학교에서 고전 사회학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막스 베버는 마르크스·뒤르켐과 함께 고전 사회학의 거장으로 꼽히는데, 특히 마르크스주의에 비판적인 사회학자들 다수가 수용하는 저명한 사상가다. 이 책은 베버의 사회이론을 그저 공식처럼 소개하는 다른 사회학 개론서들과 달리, 베버를 그가 살던 시대적 상황에 올려놓고 그의 사회이론을 조명하는 장점을 지닌 책이다. 이 책을 평한 이현주는,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베버의 저작들까지 두루 검토해 베버가 본질적으로 친제국주의·친자본주의 사상가이고 베버의 사회이론도 그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한다고 분석하는 저자 앨런의 주장을 충실히 소개한다. 이 서평은 대학 강의실 등에서 베버의 사상을 접해 봤으나 그 핵심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2010년 6월 19일
편집자 김하영·최일붕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