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1 경제 위기와 중국 모델
‘중국 모델’을 둘러싼 최근 좌파들의 논의
들어가며
2008년 가을 전 세계는 1930년대 대불황 이후 가장 심각한 경제 위기로 빠져들었다. 미국 주택·소비 시장이 꽁꽁 얼어붙고 대미 수출국들은 엄청나게 큰 타격을 입었다. 2009년 주요 선진국들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한국이 간신히 0.2퍼센트 성장한 것이 〈파이낸셜 타임스〉의 뉴스거리가 될 정도로 위기는 심각했다. 그런데 중국은 예외였다. 2009년 중국의 성장률은 8.7퍼센트였다. 이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연평균 10퍼센트 이상 성장한 것보다는 낮았지만, 다른 어떤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기록이었다. 2000년대 중국 경제가 서방 시장, 특히 미국 시장에 많이 의존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 경제가 위축하는 상황에서도 유지된 중국의 높은 성장률을 다소 뜻밖으로 생각할 수 있다. 중국을 수출 의존 경제로 폄하하던 사람들은 틀렸고 중국을 찬양하던 사람들은 맞는 듯했다. 중국을 모종의 사회주의, 또는 자본주의보다 진보적인 사회로 여기던 사람들의 주장에도 덩달아 힘이 실렸다.
그동안 진보진영에서 중국을 우호적으로 본 논자들은 대부분 중국이 워싱턴 컨센서스에 어긋나는 정책을 일부 유지하면서도 고도 성장을 이룬 것이나, 유엔 안보리와 WTO 협상장에서 서방 열강의 눈밖에 난 남반구 국가들의 ‘보호자’ 구실을 한 것에 주목했다. 이런 논자들은 대체로 대안세계화 운동의 중요한 한 축인 남반구주의자(“제3세계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을 자본주의에 맞선 궁극적 대안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 모델 자체에 호의적인 주장들이 나타났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집권하면서 공산당의 통치 방식에 약간 변화를 꾀하기 시작한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국영기업의 무차별 민영화를 중단했고 오히려 국영기업의 구실을 강화했다. 이에 더해, WTO 가입 논쟁 과정에서 시장 지향적 개혁에 반대하는 주장을 펴며 본격적으로 영향력이 커진 지식인들(이른바 ‘신좌파’)의 표현을 일부 수용했고(2005년에 발표한 과학적 발전관이나 ‘사회주의 농촌 건설’이 대표적이다), 좀더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로 공산당의 통치를 정당화했다. 중국의 일부 신좌파 지식인들은 후-원 집권기의 변화를 두고 공산당 정부가 ‘사회주의적 과거’를 부분적으로 부활시키려는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중국 모델에 호의적인 주장들이 등장한 또 다른 중요한 계기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실패와 그로 말미암은 미국 제국주의의 위기였다. 부시 정부의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침략 전쟁이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되고, 이스라엘과 에티오피아를 앞세운 레바논·소말리아 개입도 실패하면서 세계 지정학적 질서에 엄청난 변화(또는 권력 공백)가 일어났다. 중국은 의도했든, 안 했든 그 공백을 메우기 시작한 나라들 중에서 가장 돋보였다. 1990년대 초 일본 경제의 거품이 붕괴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함께 사라졌던 ‘헤게모니 이행론’이 다시 떠올랐고 중국이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됐다. 조반니 아리기의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이하 《베이징》), 마틴 자크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때When China Rules the World》 등 진보 버전의 헤게모니 이행론도 속속 등장했다. 또한, 미국 제국주의의 일방주의를 진보적으로 견제할 세력이 등장해 장기적으로 좀더 정의로운 세계 질서가 탄생할 수 있으리라는 단초를 1980년대 중반부터 중국 정부의 공식 외교 독트린이던 다극화多极化에서 찾는 견해도 개진됐다. 국제적으로는 제니 클레그가 《중국의 세계 전략China’s Global Strategy》에서 다극화론의 좌파적 버전을 가장 세련되고 정교하게 제시했다. 한국에서는 좌파 민족주의 경향이 대체로 이런 견해를 받아들였다.
중국 공산당의 통치 방식 변화와 ‘테러와의 전쟁’ 실패가 낳은 중국 모델을 둘러싼 호의적 관심은 세계경제 위기에서도 중국이 홀로 고도성장하는 현 상황 때문에 더 증폭됐다.
앞서 간략히 소개한 중국 모델을 둘러싼 논의들은 좌파 정치의 주요 쟁점 세 가지와 관련 있다. 첫째, 반자본주의 대안과 시장의 관계다. 중국이 시장을 활용하면서도 자본주의 논리를 거슬러 대중의 복지를 크게 향상시키고 있는 것이라면(그것을 ‘비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부르든,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부르든) 시장 자체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단지 국가가 개입해 ‘시장의 룰’을 바꾸도록 하면 충분할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중국의 일부 신좌파처럼 국가 관료 집단이 자본을 통제하는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본다면,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서 노동계급의 구실은 의미 없거나 기껏해야 부차적일 것이다. 셋째, 반제국주의 투쟁과 중국 같은 ‘남반구’ 국가의 관계다. 중국 정부가 다극주의를 내세운다는 이유로 미국의 패권 전쟁과 제국주의 세계 질서에 반대하는 운동이 중국 정부를 동맹으로 삼아야 한다면, 반제국주의 투쟁은 대중 운동이 아니라 국가 간 외교에서 특정 세력을 지지하는 방식을 중심에 두게 될 것이다. 이 글의 목적상 이 세 쟁점을 모두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중국 모델을 둘러싼 논의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세 쟁점에 관한 답을 얻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돼 있다. 1절은 중국 사회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중국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논의들을 다룰 것이고, 2절은 세계체제 차원에서 중국의 부상을 진보적으로 해석하는 논의들을 다룰 것이다. 조반니 아리기는 1·2절 모두에서 주요 논자로 다뤄질 것이다. 비록 고인이 됐지만 그의 저작이 최근 중국을 둘러싼 좌파들 간 논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1. 중국 사회의 성격을 둘러싼 논의
세계적 경제 위기 상황에서도 유지되는 중국의 고도 성장이 좌파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점은 페리 앤더슨이 최근 중국의 성장에 관해 《뉴레프트리뷰》 2010년 1·2월 호에 기고한 논문인 ‘두 개의 혁명 - 대략적 고찰’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앤더슨은 특유의 유려한 문체와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 준다. 그러나 다른 좌파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사회의 성격을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앤더슨은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을 비교하면서, 재앙에 빠진 러시아 경제와 달리 중국 경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세 가지 요인을 지적한다. 국영부문 구조조정의 점진적 추진, 관료 집단의 상대적 능동성, 대중의 상대적 자발성이다. 그러나 이런 특징들은 중국의 성장 동력과 중국 사회의 성격을 규명할 때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앤더슨은 중국의 성장 동력과 사회 성격을 스스로 규명하지 않고, 기존의 세 가지 견해를 소개했다.
첫째, 최근 역사학계에서 가장 유행하는 견해로, 오늘날 중국의 고도성장은 수천 년 간의 중국 제국의 유산 덕분이라는 해석이다. 심경深耕을 바탕으로 한 상업적 역동성, 분업 심화, 도시 네트워크 발달과 국내 교역 확대, 기록적 인구 증가, ‘근면혁명’ 등등. 즉, 오랫동안 역사상 가장 크고 선진적인 경제였던 중국 경제는 전형적인 ‘스미스식 성장 방식’으로 발달했고, 아편 전쟁 전까지는 서유럽보다 더 발달하진 않았더라도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 중국은 외세 침략과 국내 혼란 때문에 기존 발전 경로에서 벗어났다가 이제는 원래 중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했던 지위를 회복했다는 것이다.
둘째,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큰 견해로, 중국의 과거로 오늘날의 중국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미스가 강조했듯이 해외 무역의 부재 때문에 당시 전통 중국 경제는 경쟁적 자극이 부족했고 재산권 보장이 미흡해서 기업가 정신이 나타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중국의 발전은 맬서스식 패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오늘날 중국의 고도성장은 전과 달리 중국이 뒤늦게나마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편입된 덕분이다. 시장을 외국인 투자에 개방하고 재산권을 점진적으로 강화한 덕분에 마침내 생산요소들이 역동적으로 사용될 환경이 조성됐다. 풍부한 해외 자본과 기술이 무궁무진한 값싼 노동력과 결합해 중국 역사상 가장 막강한 수출 체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셋째 견해는 중국의 경제성장을 낳은 핵심 요인을 중국 혁명에서 찾는다. 마오 시대의 성과가 개혁 시기의 성공을 낳은 튼튼한 뿌리가 됐다는 것이다. 중국 혁명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현대 중국 역사상 최초로 강력한 주권 국가를 건설해 반半식민지의 멍에를 떨쳐 버린 것이다. 그 밖에도 잘 교육받고 규율 있는 노동력이 형성된 것, 비교적 분권화한 제도적 틀로 지방 자치를 허용하면서도, 동시에 계획·공공부문·대외 무역에서 강력한 경제 통제 메커니즘을 확립한 것 등이 있다. 이런 전환적 조건 덕분에 개방 정책이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을 어떤 생산양식으로 보는가를 기준으로 이 세 견해는 순서대로 각각 비자본주의 시장경제론, 시장 자본주의론, (중국 정부가 주장하는) ‘사회주의’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좌파 내에는 세 견해가 모두 있다. 물론 중국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보는 좌파들은 앤더슨이 소개한 주류 경제학자들(시장 자본주의론)과 달리 중국 체제에 비판적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주로 첫째와 셋째 견해를 논쟁적으로 다룰 것이다.
1) 아리기의 비자본주의 시장경제론
오늘날 첫째 견해를 대변하는 가장 유명한 논자는 아리기다. 아리기는 전자본주의 유산과 사회주의 유산이 결합한 덕분에 중국이 고도성장했다고 본다. 아리기는 두 유산 중에서도 전자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중국 ‘신좌파’와 그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후자를 강조한다. 아리기는 《베이징》에서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적용해 오늘날의 중국을 비자본주의 시장경제로 규정하면서, 중국을 설명하는 데 마르크스보다 스미스가 훨씬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아리기는 스미스의 진짜 사상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왜곡한 스미스와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아리기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스미스는 ‘야경 국가’와 ‘보이지 않은 손’의 신봉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스미스는 국가 개입이 없으면 기업들이 점차 소수 독점체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고 봤다. 그리고 독점은 독점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뿐 아니라 독점 기업의 생산물을 구매해야 하는 소비자 등 ‘국민’의 ‘보편적 이익’을 침해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스미스는 국가가 개입해 기업들의 독점화를 막고 경쟁적이고 공정한 시장을 유지해 복지를 최대한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정한 시장 질서가 유지돼야 독점 기업이 노동자에게 소외를 강요하는 분업이 아니라 노동자가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분업이 이뤄지고, 그 결과 신민의 보편적 이익이 최대한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공정한 경쟁 체제를 유지하고자 국가가 개입하는 사회로 중국(청나라)을 들었다. 청나라에도 당대 유럽과 비교해 규모나 활동에서 뒤지지 않는 상업 자본가들이 있었으나(예컨대 명말 청초의 정성공), 국가의 엄격한 통제 아래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국가 기구를 좌지우지할 만큼 독점화하지는 못했다. 그 덕분에 청조 국민국가(아리기는 청나라 때 동아시아는 이미 국민국가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본다)는 자본가의 이익이 아니라 ‘국익’을 중시하면서 상평창常平倉으로
아리기의 이런 관점은 전자본주의 사회의 성격이나 전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설명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큰 차이가 있다. 실제로 아리기는 《베이징》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자본주의 이행 조건과 청나라 경제를 다룬 미국 마르크스주의자 로버트 브레너의 주장을 비판했다. 브레너는 자본주의의 등장이 자본주의 소유관계(또는 생산관계)의 등장 —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독점하면서 직접생산자인 농민이 생산수단을 잃고 임금노동자가 되는 과정 — 과 관련 있다고 분석했다. 전자본주의 사회에서와 달리 자본가는 생산수단·원자재·노동력을 모두 시장에서 구매해야 하며 투자금을 웃도는 이윤을 얻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다른 자본가와 치열하게 경쟁하며 경쟁자보다 더 성공적으로 이윤을 획득하지 못하면 파산할 수 있다. 이런 경쟁 압력 때문에 자본주의는 그 전의 생산양식보다 생산성 향상 속도가 빠르다.
5 틀렸다면서, 생산성, 1인당 소득, (영양 섭취를 포함한) 생활수준 면에서 청나라가 유럽 자본주의보다 결코 뒤지지 않았다고 주장한 케네스 포머란츠나 빈웡의 주장을 근거로 든다. 포머란츠 등은 아리기와 마찬가지로 청나라에서 스미스식 경제성장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6 아리기는 청나라를 보면 생산관계를 중시하는 마르크스 이론이 근대 사회 변화를 적절히 설명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7
아리기는 자본주의 소유관계 덕분에 영국이 청나라를 포함한 동시대 어떤 사회보다 더 우월한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브레너의 주장이또한 아리기는 현대 일본 경제학자 스기하라 카오루의 이론이 스미스, 포머란츠 등의 주장과 동일한 내용을 이론적으로 가장 명확하게 표현한다며 스기하라의 이론을 적극 차용한다. 스기하라는 근대 경제가 3대 혁명을 거쳤다고 주장한다. 근대 초 동아시아의 ‘근면혁명’, 서구의 산업혁명,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과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에서 근면혁명과 산업혁명이 결합돼 나타난 ‘동아시아 경제 기적’이 그것이다. 근면혁명은 17세기부터 동아시아 3국(청, 조선, 도쿠가와 막부 시대 일본)에서 자리잡은 발전 형태로, 이 세 나라의 공통점인 풍부한 노동인구를 이용한 농업과 공업 발전으로 생활수준이 향상된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근면혁명에서 기술 혁신과 기계 투자는 인적자원 투자보다 부차적이다. 그리고 근면혁명은 산업혁명보다 에너지 투입량도 적고 친환경적이라고 한다.
8 서방이 개입하기 전까지 조공 체제로 묶여 있던 동아시아는 비교적 평화로웠기 때문에 군비에 대규모로 투자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리기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서방이 중국과 아시아 시장에 진출한 동력을 서방의 우월한 생산력에서 찾았으므로 근대 사회 변화를 잘못 설명했고, 그런 관점은 유럽중심주의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보다 스미스의 이론을 채택해야 하는 둘째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면 19세기에 서방 열강은 어떻게 중국을 압도해 반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는가? 아리기는 다시 한 번 스미스의 이론에 기댄다. 스미스는 국내 독점 기업들은 좁은 국내 시장을 넘어 해외로 확장하는 경향이 있어서 군비 증강에 필요한 기계와 기술 혁신을 중시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당시 서구는 중국보다 생산성이 높지는 않았지만, 독점 기업들이 대거 등장한 덕분에 중국보다 무력이 더 발전해서 강제로 중국 시장을 개방하고 상품 판매를 강요해 토착 경제를 파괴할 수 있었던 반면,한편, 스기하라는 19세기 말부터 동아시아 3국이 서방을 따라잡으려고 산업혁명을 추진했지만, 일본만 부분적으로 성공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스기하라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이 미국 중심의 세계적 네트워크에 편입돼 서방의 기술과 동아시아의 근면혁명을 결합하고 나서야 동아시아 나라들이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본다. 스기하라는 이런 결합이 한국, 대만, 그리고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에도 확산됐다면서 이런 변화가 세계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일본과 나중에는 다른 아시아 나라들은 동아시아의 제도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최상의 서구 기술을 수용했다. 덕분에 미국식 길보다 인적자원을 훨씬 더 철저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서구 기술과 동아시아 인적자원이 결합돼 높은 경제성장률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 결합의 정도는 전쟁 전보다 훨씬 더 강력했고 기술과 제도의 더 큰 충돌과 통합을 낳았다. 이것은 세계 발전 단계에서 세 번째 단계를 뜻한다. 이 세 번째 단계의 등장은 세계 역사의 큰 변화를 뜻한다. 첫째, 세계적 소득 불평등의 악화를 막을 수 있다. 식민주의 아래 서방식 길은 비백인 인구의 실질 임금을 올리지 못했다. 반면에, 오늘날에는 대다수 개도국이 노동집약적인 산업화를 추구할 수 있는 실질적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만약 ‘유럽의 기적’이 세계경제의 변화를 촉발한 생산 기적이라면, ‘동아시아 기적’은 지구적 산업화의 혜택을 대다수 세계인에게 가져다 준 분배의 기적이다. 둘째, 동아시아식 길의 등장은 에너지 절약적 기술을 보존·개발해서 산업화 확산에 기여했다. 산업화 확산과 선진국의 많은 에너지 소비 때문에 발생한 환경 파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이 과정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지구적 산업화를 가능하게 할 유일한 방법은 지구적 수준에서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분배 기적이 지속되려면 서구식 길이 동아시아식 길로 흡수 통합돼야 한다. 그 반대가 아니라.중국의 부상에서 진보적 의미를 찾으려는 아리기가 스기하라의 접근법을 전폭 수용하는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인력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은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는 초착취 공장이 대거 등장했다는 뜻이다. 스기하라의 견해는 전후 일본과 한국, 대만 등에서 나타난 ‘동아시아 모델’을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보수적 관점일 뿐이다. 한국에서 뉴라이트 계열 출판사인 ‘전통과 현대’가 스기하라의 저작을 출판한 것도 그 때문이다.
11 식민지 근대화론과 비슷한 주장을 하는 인도 경제학자 티르탕카르 로이나 12 스기하라의 주장을 인용하며 아시아가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역사상 언제나 아시아가 서구보다 앞서 있었고 19세기 중반부터 서유럽이 차지한 우위조차 아시아가 이미 구축해 놓은 전 세계 무역망을 잠시 가로챈 덕분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프랑크는 과거에 아시아가 앞설 수 있었던 것은 로이와 스기하라가 말하는 전통적 발전 방식 덕분이고 최근 아시아 나라들의 고도성장은 이 전통이 현대적으로 부활한 덕분이라고 봤다.
이처럼 서방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서구 진보 지식인이 아시아의 경제성장을 찬양하는 보수 학자들의 주장에 호감을 갖는 일은 전에도 종종 있었다. 예컨대, 저명한 종속이론가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1995년에 쓴 《리오리엔트》에서13 적용해 오늘날 중국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려 한다. 스기하라 자신은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아리기는 동아시아 경제와 서구 경제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스기하라의 도식을 스미스(와 페르낭 브로델)의 시장경제/자본주의 구분과 접목했다. 이는 아리기가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마르크스주의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르게 사용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아리기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이 전혀 쓸모가 없다는 프랑크의 주장에 공감한다. 그러나 그와 달리 우리는 대안적 자본주의 개념을 채택하려 한다”고 말했다. 14
물론 아리기와 프랑크의 차이점도 있다. 《리오리엔트》를 쓰면서 해당 사회의 구체적 생산양식과 사회 성격 분석을 완전히 포기한 프랑크와 달리, 아리기는 스미스와 스기하라와 자신이 오랫동안 영향받은 페르낭 브로델의 이론을15 전자는 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리기의 견해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에서는 후자와 같은 경제 작동 방식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 사회의 성격을 “비자본주의 시장경제”로 규정해야 한다. 중국 공산당 정부가 민간 기업들을 서로 경쟁시켜 이윤율을 떨어뜨리고 힘을 약화시켜 통제하고, 자본가의 특수한 이익에 굴복하지 않고 ‘국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등장한 농촌 기업인 향진기업을 보면, 중국의 개혁·개방이 농촌과 농민을 희생시킨 자본주의 방식이 아니라 스미스식임을 알 수 있다. 광둥 등 연안 공업단지의 생산방식도 향진기업과 마찬가지로 고정자본 투자 대신 인간 노동의 창조성을 충분히 활용하는 근면혁명 방식이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역사상 전례 없는 수준으로 빈곤 인구를 줄이고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한 것은 중국이 자본주의가 아니라 스미스식 성장을 추구하는 비자본주의 시장경제였기 때문이다.
아리기가 자본주의를 정의하는 핵심 기준은 국가가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행위원회”인지, 아니면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는지다.16 달리, 아리기는 중국에서는 ‘약탈적 축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아리기가 신자유주의에 관한 하비의 주장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기는 신자유주의가 1970년대 자본주의의 심각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선택된 방식이었다는 하비의 주장을 수용한다. 또, 자본주의 경제 위기 해결책으로 공간적 해결책과 시간적 해결책이 있고, 오늘날 중국이 자본주의 위기의 공간적 해결책이 추구되는 장소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인정한다. 17 그러나 아리기는 세계의 잉여 자본이 중국을 공간적 해결처로 삼으며 중국으로 몰려들었다고 해서 중국이 자본주의가 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리기의 핵심 근거는 농민공(이농 노동자)들이 여전히 고향에 가족 토지 소유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노동자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18
아리기는 여기에 다른 근거 하나를 덧붙인다. ‘약탈적 축적’이 없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가 《신자유주의 — 간략한 역사》에서 중국이 워싱턴 컨센서스의 정책들을 교과서처럼 따르지는 않지만 자본가 ‘계급 권력의 회복’을 위해 그것을 선택적으로 적용하고 있다면서 이를 ‘중국식 신자유주의’라고 규정한 것과19
2) 아리기 이론 비판아리기가 인용한 포머란츠와 빈웡의 저작들은 중국의 전통 사회가 정체한 사회였다는 인종차별적 주장들을 반박하는 데서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청대 중국이 복지를 최대한 제공하고 자연을 보호하는 스미스식 선순환을 하고 있었고, 나중에 나타난 문제는 순전히 서방의 군사 침략 때문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아리기의 주장대로 당시 중국은 브레너가 지적한 전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기존 생산관계가 새로운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는 모순)이 없는 새로운 사회였는가?
20 또, 최근 중국 환경사를 개척한 마크 엘빈은 청나라가 친환경 생산 체제였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파괴력이 자본주의보다 작았던 것은 단지 생산력 수준이 자본주의보다 낮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나라 때도 농업 생산이 정체하면서 새로운 농지를 확보하려는 무리한 개발이 있었고 각종 상업 수요의 급증으로 산림이 마구 벌목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환경 훼손이 심각했다. 이 때문에 농지를 둘러싼 사회 갈등이 전반적으로 심화했다. 21 18세기 말부터 농민 반란이 좀더 빈번해지고 그 첨예함도 갈수록 전투적으로 변했는데, 22 이는 당시 중국 사회가 중대한 모순에 직면했다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한다.
필자의 생각은 부정적이다. 황종지가 16~18세기 중국에서 가장 발달했던 강남 지역의 농업과 가내수공업 생산을 분석한 것을 보면, 비록 이 시기에 생산이 발달하고 인구가 성장한 것은 맞지만 18세기 들어 기술 혁신이 없는 상태에서 농업 생산성 향상이 정체하기 시작했고, 가내수공업과 상업은 주로 농업 소득 하락을 보충하기 위해 발달한 궁여지책의 성격이 강했다. 결국 어느 순간에는 정체한 생산성이 크게 증가한 인구를 감당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리기의 주장은 오늘날의 중국을 분석할 때 더 큰 문제가 있다. 먼저, 아리기는 스미스와 스기하라 등의 이론과 개념을 일관성 없이 매우 혼란스럽게 적용한다. 예컨대, 아리기는 스미스(와 브로델)의 시장경제/자본주의 구분법을 차용하면서 스기하라의 동아시아 경제론을 결합한다. 이 개념대로라면 중국뿐 아니라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도 비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리기는 《베이징》에서 이 쟁점을 모호한 태도로 회피한다. 그는 ‘동아시아 모델’이라는 말을 거듭 사용하고 일본·한국·대만의 생산 체제가 중국과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면서도,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동아시아 나라들도 비자본주의 시장경제인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또, 아리기는 청나라 때의 근면혁명과 마오쩌둥 시대를 모두 우호적으로 다루면서도, 막상 개혁·개방 과정에서 이 두 시대의 유산이 어떻게 결합돼 긍정적 영향을 미쳤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또, 아리기는 “국익”, “보편적 사회 이익”, “공익” 등 갖가지 용어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면서 국가가 이런 가치들을 보장하는 존재인 양 가정한다. 이 용어들이 흔히 계급사회의 불평등한 현실을 감추는 데 사용되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24 그러나 중국 경제를 분석할 때는 기업 간 치열한 경쟁으로 말미암은 낮은 이윤율이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주장한다. 기업 도산과, 그에 따른 실업과 은행 부실 심화는 중국 정부한테 골치거리일 텐데 말이다.
아리기 현대 중국론의 둘째 문제점은 이윤율 하락 문제에서 매우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아리기는 《베이징》에서 미국 헤게모니 위기와 세계경제 위기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로 낮은 이윤율을 꼽는다.격렬한 기업 경쟁으로 중국 노동자와 민중이 이득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림1과 그림2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지난 20년간의 치열한 기업 경쟁 체제는 1960~70년대 한국이나 대만보다 더 심각한 저임금 구조를 강요했다. GDP 가운데 임금 몫은 줄고 이윤 몫은 늘어난 것을 보면 중국 정부의 우선순위가 아리기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공익’이 아니라 기업 이익, 즉 기업을 통제하는 당·국가 관료 집단과 자본가들의 이익에 맞춰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후-원 체제가 등장한 2000년대 초부터 임금이 약간 상승한 것은 사실이지만 저임금 구조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25 불평등(상대적 빈곤)은 훨씬 심해져, 지니계수는 1978년 0.317에서 2006년 0.496로 급등했다. 26
물론 개혁·개방 이후 빈곤 인구가 크게 준 것은 사실이다. 농민 약 2억 명이 중국 정부 기준으로 빈곤선에서 탈출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개방 초기에 일어난 것이고, 곡물 수매 가격 인상 같은 정부의 양보 정책 덕분이었다. 기업 간 경쟁이 더 치열해진 1990년대 이후로는 빈곤 문제 해결 속도가 훨씬 더뎠다. 1990년대부터는 고도성장에도 불구하고 절대 빈곤 인구의 비율은 거의 변하지 않았고, 2003년 이후에는 오히려 더 증가했다. 그 결과로 하루 소득이 1달러에서 2달러 사이를 맴도는 인구가 4억 명이나 된다.27 이는 2008년 금융 위기가 터진 뒤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이 시행한 정책과 다르지 않다.
아리기의 주장대로 기업들의 치열한 경쟁 때문에 이윤율이 하락한 것은 사실이다.(그림3) 그러나 아리기의 가정과 달리 중국 정부가 독점화를 저지하고자 의도적으로 이윤율을 떨어뜨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국 정부는 이율율 하락으로 기업이 도산하고 은행 대출이 부실해질까 봐 매우 걱정한다. 그래서 1990년대 말 낮은 이윤율과 동아시아 위기가 맞물려 엄청난 은행 부실 문제가 불거지자 중국 정부는 구제 금융 명목으로 평범한 노동자·농민의 저축과 세금을 부실 은행에 쏟아부었다. 물론 중국 정부는 여전히 국영부문을 경제 운용의 주요 도구로 활용한다. 그러나 이것이 민간 자본가들을 억누르는 정책인 것은 아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정부가 저임금 체제 구축을 돕는다든지, 구제 금융으로 부실 자산을 보전해 준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중국 정부는 민간 자본을 육성하고 보호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중국 민간 자본가의 압도 다수는 공산당 일당 독재를 지지한다. 서구 사회학자들이 중국 민간 자본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두 차례(1999년과 2005년)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기업 규모의 차이와 상관없이 95퍼센트 이상이 공산당의 경제 개혁 정책을 지지했다.29 ‘서민 총리’라는 원자바오의 아들도 최근 10억 달러를 모은 사모펀드의 공동 창립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30
심지어 국가와 민간 자본이 결합하기도 한다. ‘민간 자본’ 중 규모가 크고 중요할수록 전현직 공산당 고위 관료와 그 친인척이 소유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현재 중국 최고 부자인 부동산 재벌 종칭호우는 공산당원이자 정치협상회의 대표다.31 그 결과 성장률은 높아졌지만 일자리 창출 속도는 갈수록 떨어졌고, 32 1990년대 말~2005년에 인적자본 대비 고정자본의 증가 속도는 세계 최고였다. 33 또, 향진기업 운영 방식이 노동의 소외가 없는 목가적 방식이었던 것도 아니다. 간혹 가족이 운영하는 가내공장처럼 아리기의 묘사와 비슷한 기업도 있지만, 대부분은 지방정부나 개인이 소유하는 중소기업이고 운영 방식도 이윤 창출을 극대화하고자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는 여느 자본주의 기업과 다르지 않았다. 34
아리기 이론의 셋째 문제점은 오늘날의 중국 경제가 ‘약탈적 축적’ 체제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아리기의 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향진기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중국이 노동집약적 발전을 했고, 노동자들은 생산과정을 조직하는 데 기여하는 등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으므로 소외된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 고도 성장의 핵심 특징은 인적 자원 투자가 아니라 고정자본 투자였다. 고정자본 투자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40퍼센트를 넘었는데, 이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35 이런 중국판 인클로저의 규모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국 농토의 용지 변경 속도를 보면 많은 농민이 생산수단(토지)을 잃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1990년대~2000년대 초 상하이 남쪽 저장성에서는 저장성 도시 면적의 세 곱절이 넘는 4천 평방킬로미터에 개발 지구 7백58곳이 지정됐다. 중국 전역에 6천 곳의 개발 지구가 존재한다. 36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에서 도시 인구 수가 농촌 인구 수를 넘어선 것이 산업화가 시작된 지 거의 2백 년이 지난 제2차세계대전 이후였다는 점과 비교하면, 중국의 도시화가 느리다고 볼 수는 없다. 37
아리기는 중국 농민이 생산수단인 토지를 잃고 노동자가 되는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약탈 없는 축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국에는 농촌에서 자기 토지를 잃고 도시로 와 유랑 노동자가 된 농민들이 있다. 상당수는 지방 관료와 민간 개발업자 간 부패 사슬 때문에 최소한의 보상금도 받지 못하고 자기 땅에서 쫓겨났다. 이런 불의에 항의하는 농민들의 투쟁이 어찌나 격렬했던지, 광둥성 동저우에서는 지방정부가 토지 강제 수용에 반발하는 농민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농민 스무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38 토지는 거의 사유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 방식이 토지 강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중국 KFC에 납품하는 농축산 기업에 고용된 농민들처럼 39 대규모 슈퍼 체인이 소농들과 공급 계약을 맺는 것도 일종의 프롤레타리아화로 볼 수 있다. 계약 내용은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분석한 초기 자본주의의 노동자 고용 형태인 선대제와 비슷한 경우가 흔하다. 40 농민들은 형식적으로는 자유롭게 계약을 맺고 일하지만,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지 결정할 실질적 권한이 없다. 또한, 일부 지역에서는 농업 노동자를 고용하는 대규모 영농도 나타나고 있다. 41
물론 중국의 농민 대다수는 아직 법적으로 자기 토지를 점유할 수 있고중국 농민들이 프롤레타리아화하는 가장 흔한 형태는 가족 구성원의 일부가 임금노동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다. 법적으로 토지를 점유하고 있더라도 그 소득만으로는 가족을 부양하기 힘들어 따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다. 1980년대 말부터 부의 분배와 투자에서 중국 농촌이 철저히 소외되면서 생긴 농촌 소득의 구조적 문제(절대적·상대적 빈곤의 악화, 도농간 엄청난 소득 격차, 농업 지원금 고갈)로 이농 현상이 생겨났다. 아이러니이게도, 최근에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사람은 ‘아리기 동인’이자 국외에서 활동하는 중국 신좌파인 흥호풍이었다.
[공산당 정부의] 도시 편향 정책으로 농촌 경제는 상대적으로 정체되고 농촌 지방 정부들은 재정 압박을 크게 받았다. 1990년대부터 농촌 소득이 악화하고 농촌 공업(특히 초기 시장 개혁에서 고용을 창출했던 향진기업)이 쇠퇴하면서 농촌의 대다수 청년 노동자들은 도시로 떠났고, 이 때문에 다시 농촌 사회의 위기가 심화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중국의 농업은 무시당했을 뿐 아니라 도시 성장을 위해 희생당했다. 최근의 한 연구 결과를 보면, 1978~2000년에 재정 정책(조세와 정부 지출)과 금융 제도(저축과 대출)를 통해 재원이 농촌 - 농업에서 도시 - 공업으로 계속 이전됐다.
43 농촌의 저발전과 엄청난 세금으로 고통받던 많은 농민 가족 구성원 중 일부가 일자리를 찾아 농촌 인근 도시나 대도시로 나가야 했다. 한 연구 결과를 보면, 1995~2002년 농가 소득 증가에서 임금이 기여한 몫이 50.4퍼센트나 된다. 이것은 “농촌 임금 고용이 상대적으로 급증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농업 소득이 농가 소득 증가에 기여한 몫은 19.1퍼센트뿐이었다. 44
1990년대 중앙 정부가 도시의 공업 개발에 집중하면서 지방 정부 지원을 줄이자 지방 정부들이 농민들에게 토지 보유세를 엄청나게 물렸는데, 이것도 농가 소득을 위협했다. 많은 농민이 과도한 세금을 내지 못해 파산했다.45 그러나 한국에서 명절 때 귀향하는 노동자들의 가족이 토지를 조금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그 노동자를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듯이, 중국의 농민공을 임금노동자로 규정하지 않는 아리기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는 1960년대 한국과 대만의 이농 현상과 비슷하다. 당시 한국과 대만에서 이농 현상이 대규모로 나타난 것은 대규모 영농이 등장해 소농들이 토지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농가 소득을 보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엄청난 인구 차이를 감안하면 총 인구 대비 이농 인구 비율은 오늘날 중국보다 1960~70년대 한국이 훨씬 높았다. 그러나 토지를 빼앗겨 프롤레타리아가 된 것이 아니라, 국가 정책 탓에 농촌 경제가 정체하고 농촌의 고용 기회가 감소한 결과 소농들이 도시로 이주해 프롤레타리아가 된 기본 방식은 유사했다. 그래서 농촌에 남은 가족들은 여전히 토지를 보유했고 농촌의 소농경제적 성격은 유지됐다.46 이조차 1990년대 사유화 물결을 무시한 부정확한 주장이다. 그런데 오늘날 중국 사회 성격을 다루는 논자들은 대체로 국영기업의 성격을 두고 치열하게 논쟁한다(1990년대 말 국영기업 사유화의 규모와 방식, 사유화된 국영기업의 운영 방식, 남은 국영기업이 중국 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그 운영 방식 등). 따라서 이 문제를 다루려면 아리기 외 다른 논자들의 논의를 살펴봐야 한다.
아리기의 넷째 약점은 중국 사회 성격이나 프롤레타리아화 문제를 다룰 때 국영기업과 국영기업 노동자들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가의 구실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국영기업의 성격을 분석하지 않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그가 《베이징》에서 국영기업을 언급하는 유일한 구절은 국영기업 개혁의 핵심이 사유화가 아니라는 부분인데,3) 국영부문은 사회주의인가?
47 만약 중국이 사회주의 사회라면 국영기업 종사자들을 자본주의적 노동자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좌파 논자들이 중국의 국영부문을 사회주의와 같은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레디앙〉에 중국 관련 논문을 기고하는 김정호가 그렇다. 최근에 그는 2008년 경제 위기 상황에서도 중국 경제의 예외적인 고성장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우월성을 보여” 준다고 주장했다.장영석 성공회대학교 교수도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90년대 말 국유기업 노동자의 상품화는 달성되었지만, 여전히 국유기업의 노동자를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와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개혁·개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중국 공산당은 여전히 ‘사회주의’를 강조하고 있고, 국유기업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경영자들도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의 이데올로기, 제도, 실천, 기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이 경영의 필요만을 내세워 노동자를 관리하고 구조조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점은 국유기업 노동자의 상품화 과정은 농촌 노동력의 상품화 과정과 달리 신자유주의적 자본축적 방식과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영석은 아리기와 달리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는 인정한다. 그러나 개혁·개방 시대에도 국영부문이 여전히 중요한 부문으로 남아 있는 한 중국이 완전히 자본주의로 이행한 것은 아니라고 암시한다.
아주대학교 세계학연구소의 이홍규도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에 기고한 글에서 중국은 사회주의 부문과 자본주의 부문이 서로 경합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중국은 ‘시장화’ 개혁을 가속화하고 있으나 여전히 국유부문이나 집체소유제와 같은 사회주의적 소유 부문을 유지 강화시키면서 민간 부분의 확대도 동시에 도모하는 새로운 혼합경제 체제 구축을 통해 공공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 중국 체제의 속성을 보면, 결국 국가사회주의, 소박한 공동체사회주의, 그리고 국가자본주의 심지어는 신자유주의적 속성도 함께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중국의 체제 성격을 파악할 때 중국의 아름답지 못한 현실을 부정하거나 중국 당국의 레토릭을 그대로 수용하는 행태 역시 부끄러운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전히 실험중인 이 체제의 미래를 단언하는 것도 섣부른 일이 될 것이다.
50 1990년대 말부터 중국 공산당 정부는 이윤율을 높이고자 많은 국영기업에서 노동자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가차없는 구조조정과 대량 해고를 단행했다. 구조조정을 시작할 당시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연 10퍼센트대였다. 그런데도 중앙 정부는 실적과 무관하게 해고 할당량을 일률적으로 지정했고, 해고 목표 달성 여부를 공장 관리자의 인사고과와 성과급 책정에 반영했다. 51 한 마디로 말해, 중국 정부는 어쩔 수 없어서 국영기업을 구조조정한 것이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좀더 효율적으로 경쟁하고자 노동자들을 더 쥐어짰던 것이다. 52 그 결과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에 6천만 명이나 일자리를 잃었고, 국영기업의 경영자와 노동자 간 평균 급여 차이는 무려 1백 곱절이나 됐다. 덕분에 중국 기업의 이윤율은 1990년대 후반 약간 상승할 수 있었다.(그림3 참조)
이런 주장은 그럴듯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실제 현실과 맞지 않는다. 오늘날 중국의 국영기업은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운영된다. 물론 국영기업과 사유화된 국영기업이 모두 노동자를 가혹하게 해고하고 복지를 삭감한 것은 아니다. 앞서 인용한 장영석은 바로 이런 사례들을 두고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의 이데올로기, 제도, 실천, 기억”이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도도한 자본주의 물결에 맞서는 사회주의적 흐름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선진 자본주의 경제에서도 기업의 중요도, 잉여 자금의 규모, 예상되는 노동자들의 저항 수준 등을 고려해 선별적으로 구조조정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1990년대~2000년대 초 꽤 많은 유럽 나라에서 국영부문의 장기 고용이 확대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개혁·개방 이전의 국영부문은 사회주의적이었는가? 개혁·개방 시대와 달리 마오 시대에 국영부문이 국내 시장의 경쟁 압력에 종속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운영 방식은 마르크스적 의미의 사회주의인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마오 시대 작업장 ‘사회주의’의 근거로 흔히 제시되는 노동자 경영 참가 제도(직공대표대회職工代表大會 등)는 법으로 보장된 권리대로 시행된 적이 없었다. 중앙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투자와 분배 등 중요한 사항들을 미리 결정한 상태에서 공장 경영진이 재량권을 약간 발휘했을 뿐이다.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가하려면 자주적 노조를 결성해 실제로 대표를 보낼 수 있어야 마땅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는 일본이나 독일의 이름뿐인 노동자 경영 참가 제도만도 못했다.농촌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1958~60년 대약진 운동 당시부터 농민들은 종종 지극히 불합리한 명령을 억지로 따라야 했다. 대약진 운동 당시를 회고한 한 농민은 이런 불평등한 구조가 낳은 참사를 잘 알려 준다.
55 관리자들]은 인민공사 현장국에 제출한 정기 보고서에서 과학 영농으로 재배한 기간에 천문학적인 비율로 곡물 생산이 증가했다고 주장했습니다. … [그러자] 더 많은 수매 할당량[이 부과됐고] … 이 새로운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 관리들은 농민들이 개인적으로 저장한 것까지 찾[았고] … 농촌 지역 식량문제[가] 악화[했습니다.] … 즉각적으로 3년에 걸친 자연재해가 뒤를 이었습니다. 56
‘과학 영농’을 촉진하고자 중앙 정부로부터 몇 가지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 핵심은 … 주어진 땅에 무조건 되도록 많은 작물을 심는 것[이었습니다.] … 전통적 모내기 방법에서는 모와 모 사이 간격을 15센티미터로 [하는데] … 과학적 방법은 7센티미터로 하라고 … 이 새로운 과학적 영농 방식을 채택한 땅에서는 1959년 여름 수확기에 거의 아무 것도 거둬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 그들[생산대
57 마크 셀던과 리칭콴은 이런 불평등한 구조에 주목해 마오 시대에 생산과 분배를 전적으로 통제하는 관료와 노동자·농민 사이에 근본적인 계급 분단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58 즉, 공산당 고위 관료는 중국 사회의 생산과 분배를 지배하는 지배계급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1957년 백화제방 운동부터 문화혁명을 거쳐 1980년대 초까지, 중국 공산당 체제에 비판적인 급진 활동가들이 거듭거듭 제기한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문화혁명 당시 성무련(‘호남성 무산자계급 혁명파 대연합’의 줄임말) 등은 “관료적 특권 계급”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려 했다. 59 중국에서 관료적 특권 계급의 존재는 훗날 사회학적 조사로도 입증됐다. 한 중국 사회학자는 마오 시대와 개혁·개방 시대 모두 관료 집단이 지극히 안정적으로 재생산됐음을 발견했다. 60 ‘주자파’와 특권 관료를 제거하겠다던 문화혁명이 끝난 뒤에도 기존 고위 관료층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됐던 것이다. 61 그들은 다른 자본주의 나라의 지배계급처럼 세대를 거치며 자신의 계급적 지위를 재생산할 수 있었다.
이런 재앙적 정책의 결과로 약 5백만~7천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된다. 셀던·리칭콴과 마오 시대 급진파들은 특권적 관료 계급의 존재를 정확하게 인식했다. 그러나 관료들이 어떻게 생산과 분배를 조직·통제하는지,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일관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들은 관료층이 개인의 부귀영달을 바라고 생산과 분배를 비민주적으로 통제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고위 관료와 대중 사이에 소득 격차는 있었다. 그러나 잉여는 대부분 관료들의 호주머니가 아니라 무기 생산과 밀접하게 연관된 중공업에 재투자됐다. 그 결과 전체 산업에서 중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52년 33퍼센트에서 1978년 72퍼센트로 급상승했다.63 리민치는 이 과정을 착취라고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에서 관료 계급이 노동자·농민을 착취해야 하는 기본적인 동역학을 잘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 사회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여기서 핵심 키워드는 리민치가 지적한 ‘경쟁’과 ‘자본축적’이다. 루미 하산은 이런 통찰을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틀로 종합한 뒤 중국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정의한다.
이들과 달리 중국 신좌파의 일원인 리민치는 《중국의 부상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종말》에서 당시 중국의 생산과 분배 구조를 날카롭게 통찰했다.(비록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에서 마오쩌둥이 저지른 잘못은 눈감아 줬지만 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중국은 여전히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일부였고 열강 간의 극심한 군사적·경제적 경쟁 압력에 노출돼 있었다. 이런 경쟁에 소요되는 자본축적을 위해 필요한 재원을 얻으려면, 국가는 노동자와 농민에게서 잉여생산물을 수취해 자신의 수중으로 끌어모아야 했다.”경제가 거의 전부 국가 소유고, 시장은 거의 존재하지 않고, 시장의 구실을 정부 지정 가격이 대신하므로 국내에는 시장가격을 바탕으로 한 내부 경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군사 경쟁은 강력한 축적 경향을 낳는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전자본주의 생산양식과 다른 점은 경쟁과 축적이라고 설명했다.(봉건 시대와 고대 사회에도 일정한 경쟁이 벌어지는 시장이 존재했지만 축적을 강제하는 강력한 힘은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외국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관료 계급이 통제하는 경제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 마오 시대의 중국도 같은 이유에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였다. … 마오의 중국을 움직이는 핵심 동력은 외부 세계(의미심장하게도 1960년경부터는 소련도 포함된다)와 군사적으로 경쟁하기 위해 군사와 중공업 부문에 자원을 집중하는 급속한 축적이었다.
65 단지 노동자를 쥐어짜는 것만으로는 생산성 향상이 쉽지 않다는 점이 드러났다. 특히, 1970년대 말 베트남과 벌인 짧은 전쟁에서도 승리하지 못하자 중국 지배계급은 세계 시장에 진출해 최신 기술을 도입하고 국제 분업의 이점을 이용해 성장률과 생산성을 높여야 함을 절감했다. 개혁·개방과 구조조정은 세계 시장에 접근하려면 치러야 할 대가였다. 개혁·개방과 구조조정은 생산양식의 변화라기보다는, 국유부문이 주도해 군사적 경쟁을 벌이던 방식에서 국유부문과 민간 부문이 혼합돼 군사적 경쟁과 시장 경쟁에 동시에 대응하는 방식으로의 변화, 즉 동일한 생산양식 내의 부분적 변화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덩샤오핑이 추진한 개혁·개방과 1990년대 국영부문 구조조정의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좀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마오 시대 중국 경제는 1970년부터 역동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연평균 성장률은 1952~57년 9.2퍼센트에서 1966~76년 5.1퍼센트로 하락했다.66 즉, 마오 시대의 노동자들을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혹자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지도 모른다. 고위 관료들의 비민주성은 사실이지만 마오 시대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종속되지도 않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릴 수 없는 고용 안정과 복지를 누리지 않았는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이중의 ‘자유’가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을 빼앗겨 생산수단에서 ‘자유’롭다. 둘째, 노동자들은 노예나 농노와는 달리 인신이 속박되지 않아 일할 곳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마오 시대에는 국가 관료들이 군사력 경쟁을 위해 생산수단을 지배했기 때문에 노동자는 생산수단에서 ‘자유’로웠다. 둘째 ‘자유’와 관련해서는 결국 노동시장이 있었느냐 하는 문제가 관건이다. 중국을 ‘비자본주의 시장경제’나 ‘사회주의’로 보는 논자들은 흔히 높은 고용 안정성과 복지 수준을 감안하면 중국에서는 ‘노동 유연성’이 부족하므로 자본주의적 노동시장이 작동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다수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완벽한 노동시장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고, 모두 국가와 기업의 필요에 따라 ‘왜곡’됐다. 예컨대, 제2차세계대전 후 최장기 호황 동안 일본과 독일을 포함한 많은 선진국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직률은 놀랄 만큼 낮았다. 기업주 처지에서도 호황기에는 숙련 노동자들을 붙잡아 두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특히 일본 기업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평생 고용, 연공서열형 임금제, 각종 복리후생 시설 같은 기업 내 복지도 제공했다. 그렇다고 모든 노동자들의 처지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일본 기업들은 비정규 노동자를 완충 장치처럼 이용해 시장 변동에서 오는 충격을 완화했다. 이런 구조는 수십 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다가 일본이 심각한 불황에 빠진 1990년대 들어서야 서서히 파괴되기 시작했다.68 일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성과 복지 수준도 불균등했다. 마오 시대 중국에서도 국영기업 노동자, 집체기업 노동자, 일종의 계약직 노동자들로 분화가 일어났고 전자에서 후자로 갈수록 고용 안정, 임금, 복지 수준이 낮아졌다. 69 물론 중국의 계약직 노동자들은 일본의 계약직 노동자들과 달리 시장 수요 변동의 완충 장치 구실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국제적 군사 경쟁 압력이 창출하는 필요에 따라 고용됐다가 부담이 되면 해고될 수 있었으므로 자본주의적 경쟁에서 완충 장치 구실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마오 시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중국 국영부문 노동자들의 처지도 동시대 일본 대기업 노동자들의 처지와 비슷했다.70 로 해고된 노동자 비율보다 더 높았다. 1961~63년에는 도시 국영기업 고용 노동자의 38.4퍼센트나 되는 1천9백4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1973년에도 국영부문 노동자의 3퍼센트에 해당하는 1백70만 명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71 즉, 중국 노동자들은 마오 시대에도 자본주의 경쟁 압력에 종속된 처지였던 것이다.
사실, 마오 시대 중국 노동자들의 고용이 안정적이었다는 주장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예컨대, 최근의 한 연구 결과를 보면, 중국에서 1957~90년에 1967년과 1976년 이태를 제외하고 해마다 한 곳 이상의 성에서 정부가 지시한 노동자 해고가 있었다. 해고가 극심했던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 1970년대 초, 개혁·개방 초기에는 성과 도시들의 거의 절반에서 대량 해고가 있었다. 특히, 1961년과 1962년에는 20개 성 모두에서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1960년대 초 전체 노동자 중 해고된 노동자 비율은 1990년대 샤강下岗이라는 형태72 그러나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사회주의 전망을 포기하면서 갑작스레 동양중심론자로 돌변했듯이 아리기도 — 비록 프랑크보다는 훨씬 세련되고 매우 유용한 통찰도 제시하지만 — 비슷한 궤적을 밟은 듯하다.
결론을 말하면, 아리기의 ‘비자본주의 시장경제’론이든,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든, 중국 국영부문을 사회주의의 유산으로 착각하고 지지하는 입장이든, 중국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특히 아리기는 과거에 사회주의를 지지했는데, 이제는 중국 모델을 ‘비자본주의 시장경제’라며 옹호하는 태도는 상당히 퇴보한 것이다. 1968년 ‘열대 아프리카의 사회주의와 경제 발전’이란 글을 썼을 때 아리기는 비록 종속이론을 수용하기는 했지만 기층 민중이 사회를 운영하는 모종의 사회주의 사회를 바랐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당시 그는 ‘사회주의’를 표방한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 정부들이 자립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킬지는 몰라도 사회주의 사회는 아니라고 비판하기도 했다.2. 중국의 국제적 지위 부상을 둘러싼 논의
1) 동아시아 조공체제 부활론과 다극화 전략론 진보 진영 일각에서 중국 모델을 높이 사는 것은 단지 중국 사회 성격 때문만은 아니다. 예컨대, 아리기는 중국의 부상 덕분에 외교적·경제적으로 세계 질서의 경쟁적 성격이 약해지고 좀더 공정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리기 주장의 근거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먼저 아리기가 마르크스보다 스미스가 우월하다고 본 이유를 다시 떠올려야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리기는 스미스가 자본주의 확장과 군국주의의 관계를 마르크스보다 더 잘 파악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서구 자본주의가 우월한 생산성 덕분에 중국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고 착각해 자본주의의 군국주의적 측면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리기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산 메커니즘을 완전히 잘못 이해했고 심지어 토머스 프리드먼의 “평평한 세계”론과 별 다를 바 없다고 혹평했다. 아리기는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번성하게 된 원인을 봉건제에서 각 정치 단위들이 소규모로 찢어져 상시적으로 무력 충돌을 일삼던 것에서 찾는다. 왕조들은 제각기 부족한 군비를 보충하려고 상인들과 손을 잡았다. 상인들은 절대왕정과 손을 잡고 왕조 간 무력 다툼을 자신의 상업적 이익을 위한 다툼, 즉 시장 지분을 둘러싼 투쟁으로 전환시켰다. 그 결과 국가가 자본주의 상인의 이해관계를 추구하게 되면서 인력보다 군비 확장과 관련있는 기술 혁신과 공업 고정자본에 더 많이 투자하게 된다. 이런 군국주의 움직임 덕분에 산업 자본주의가 꾸준히 발전할 수 있었고,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정복하면서 산업 자본주의를 확대·재생산할 자본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었다. 아리기에 따르면, 이것이 자본주의 확산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75 아리기는 오늘날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생산 체제가 형성된 것도 과거 조공체제가 현대적 형태로 부활한 것으로 본다. 동아시아 질서를 중국의 “비자본주의 시장 체제”가 국제적으로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76
아리기는 청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는 정반대의 노선을 추구했다고 주장한다. 거대 국민국가 청나라의 존재 덕분에 세력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고 동아시아 국민국가들은 무력을 증강하고자 상인에게 구걸하고 상인을 위한 해외 정복 전쟁에 뛰어들 필요가 없어 국내 경제 발전과 ‘국익’ 증진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리기는 비교적 평화적인 동아시아 체제를 조공체제라고 표현하면서, 동시대 서구 체제와 비교한 조공체제의 우월성을 중국-조선-도쿠가와 일본의 삼국 관계에서 거의 3백 년간 전쟁이 없었던 것에서 찾는다.77 부른) 에 빠진 미국은 이런 네트워크의 등장을 묵인해야 했다. 1990년대 일본의 장기 불황이 시작되면서 이 네트워크의 중심축은 중국으로 이동했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화교 자본이 이 네트워크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과거 조공체제에서 성장한 화교 자본은 19세기 말 조공체제가 붕괴하고 서방 산업 자본주의와 군국주의가 아시아의 숨통을 죄는 와중에도 물밑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오늘날 그들은 중국과 다른 아시아 나라들의 자유무역지대에 노동집약적 공장을 건설하면서 산업 자본이 아니라 인력 자본의 창의성에 투자하는 옛 동아시아 근면혁명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78
아리기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0세기 들어 동아시아 생산 체제를 부활시킨 것은 전후 일본이었다. 일본은 서방 시장에 수출할 상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한국과 대만을, 나중에는 동남아 국가들을 생산 네트워크로 끌어들였다. 베트남 전쟁으로 헤게모니 위기(아리기가 미국 헤게모니의 ‘신호적 위기’라고79 현재 미국의 최종적 위기는 과거의 헤게모니 국가(네덜란드와 영국)의 최종적 위기와 다른데, 새로운 자본축적 순환을 가능케 할 대안적 자본주의 헤게모니 국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는 세계가 헤게모니 국가가 없는 총체적 무질서와 지정학적 경쟁으로 빠져들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가능성도 있다. 중국의 부상이 아직 비자본주의적 형태를 띠므로 5백 년의 자본주의 세계 질서를 다른 것으로 바꿀 중요한 기회이기도 하다. 물론 중국 정부가 미국과 타협하거나 그 자신이 먼 미래에 또 다른 자본주의 헤게모니 국가가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80
(이하 계속 아리기의 주장)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체제가 등장하는 데서 특히 중요한 계기는 부시 정부가 미국 헤게모니의 ‘신호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벌인 ‘테러와의 전쟁’이 실패하면서 미국 헤게모니의 ‘최종적 위기’가 닥쳤다는 점이다.81 자크가 꼽는 중국의 핵심 특징은 두 가지다. 첫째, 중국은 겉모습은 국민국가이지만 청대까지 수천 년 간 이어져 온 “중국 문명의 유전자”가 82 여전히 남아 있는 문명국이다. 둘째, 문명국의 특징 때문에 중국은 힘이 강해질수록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의 관계를 국민국가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이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조공체제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자크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아시아에 국민국가 체제를 도입한 유럽과 미국이 동아시아에 미치는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이들과 동맹 관계를 맺고 있던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 중심의 조공체제에 다시 흡수되고 있다. 새로운 조공체제는 국민국가 체제와 달리 매우 안정적일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중국의 압도적 힘의 우위와 광대한 중국 시장이 제공할 이익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공체제는 동아시아를 벗어나 확장될 수도 있다. 특히, 중국보다 현저히 약소국인 중앙아시아·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 등이 조공체제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중앙아시아를 제외한 지역은 지리적으로 워낙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제약이 있지만 말이다. 83 그런데 (아리기와 달리) 중국 사회와 조공체제를 비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중국을 포함해 “오늘날 모든 성공적인 경제 전환의 사례는 자본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84 그러나 서방이 남반구 국가에 천편일률적인 발전 방식을 강요한 것과 달리 조공체제에서는 각기 다른 ‘근대성’이 존중받을 수 있다. 즉, 조공체제에 기초한 국제 관계는 각국이 고유한 발전 방식을 추구할 가능성을 열어 주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아리기의 이런 주장은 마틴 자크가 쓴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때》 덕분에 더 널리 알려졌다.85 자크와 마찬가지로 왕후이도 중국의 전통적 문명국이 단일 민족이나 하나의 우월한 민족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국민국가보다 포용성이 훨씬 더 크고, 오늘날 중국이 여전히 문명국의 성격이 있다고 본다. 현재 중국의 영토가 청 제국의 영토와 거의 일치하고 중국 공산당 정부조차 한족 민족주의보다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민족 자치권을 옹호한다는 것이다. 86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펴는 논자들이 있다. 예컨대, 오랫동안 미국의 패권적 외교 정책을 비판한 이삼성은 최근에 출간한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에서, 미국이 20세기에 아시아에서 구축한 패권 체제와 달리 “조공과 책봉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전통 시대 동아시아 국제 관계 양식은 강대한 세력과 약소 사회들 사이의 전쟁과 평화를 규율하기 위해 전통 시대 동아시아가 창안해 낸 국제적 규범과 제도였다”고 높이 평가한다. 87
아리기나 자크 같은 서방 지식인들만 조공체제를 우호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중국 ‘신좌파’의 대표적 사상가인 왕후이도 동아시아에서 민족주의 간 충돌을 방지하려면 과거 중국이 건설했던 조공체제와 문명국의 경험을 반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88 이는 클레그가 레닌 제국주의론의 핵심을 ‘열강의 분열을 이용하라’로 터무니없이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 정부의 다극화 전략을 좌파의 시각에서 가장 상세히 발전시킨 《중국의 세계 전략 - 다극화된 세계를 향하여》의 저자 제니 클레그는 아리기·자크·왕후이와 달리 전자본주의 시기의 조공체제가 아니라 중국의 현대 외교 정책에서 새로운 세계 질서의 단초를 본다. 클레그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 정부의 공식 외교 이데올로기인 ‘다극화’에서 새로운 진보적 세계 질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심지어 다극화를 “21세기의 레닌주의”라고도 부른다.클레그는 냉전이 끝나고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열강의 분열을 이용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됐다고 주장한다. 특히 부시 정부가 일방주의 정책을 펴면서 심지어 미국의 전통적 우방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올 정도로 분열이 심해졌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을 둘러싼 대서양 동맹 국가들 사이의 갈등이 대표적 사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반목하는 국가들(베네수엘라·이란·북한 등)과, 반목하지는 않지만 유일 초강대국 체제에 반대하는 남반구 국가들(브라질·인도·러시아 등)을 동맹으로 규합하고, 미국과 그 동맹들(유럽연합과 일본 등)의 분열을 이용해, 미국과 직접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세계 질서를 조금씩 진보적으로 변화시키자는 것이 ‘다극화 전략’이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다극화 전략은 결국 중국이 자본주의 세계시장과 제국주의 질서에 편입되고 제국주의 체제를 뒷받침하는 국제기구에 참가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떻게 진보적 질서가 나타날 수 있는가? 그리고 현재의 다극화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지배적 제국주의 강국이었던 영국에 맞서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이 이합집산했던 것과 질적으로 다른가?
89 뒤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클레그는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현존 세계시장의 틀 내에서 성장하는 전략임을 인정한다. 중국이 말하는 다극화된 세계가 제국주의 열강 간 경쟁 구도로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이론적으로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중국이 기존 세계 질서에서 진보적 변화를 꾀할 수 있고 그런 변화가 새로운 열강 간 쟁탈전으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이 세계시장을 이용해 성장하려면 미국 제국주의의 일방주의에 도전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중국이 떠오르는 제국주의 열강이며 중국의 부상이 제국주의 국가들 간 경쟁의 혼란을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본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존 리즈의 주장을 강하게 비판한중국의 발전은 세계 패권과 불평등의 구조 전체에 도전한다. 미국은 서방의 금융과 독점자본의 세계 지배를 굳히고자 세계 질서를 독점적으로 통제하려 하지만, 중국은 자신이 빈곤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면서 좀더 평등한 발전을 보장하는 민주적 규칙에 근거를 둔 국제 질서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중국은 단지 세계 안보뿐 아니라 자국 안보를 위해서라도 그런 국제 질서가 필요하다.
91 특히 중국을 동맹으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클레그는 이 과정에서 중국이 기존 국제기구들, 즉 유엔, 유엔 안보리,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다양한 비서방 지역 기구들(상하이협력체, 라틴아메리카의 메르코수르 등)을 강화하면서 미국 자본의 이익이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클레그가 보기에 2008년 경제 위기 발생 후 G7을 대체하며 등장한 G20도 중국의 다극화 노력이 거둔 성과다. 남반구 국가들이 최강대국과 같은 테이블에서 자기 주장을 펼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클레그는 “진보적인 사람들은 G20 회담을 대체로 지지해야 한다”면서‘이윤보다 인간을’ 앞세우는 토요일 시위[G20 반대 시위]의 요구들은 [중국과 남반구 국가들 덕분에] 정상회담장 안에서 제기될 방안들, 즉 세계경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새롭고 공정한 국제 금융 질서, 최빈국 지원 증대 등과 연결될 것이다. 우연찮게도, ‘이윤보다 인간을’은 2004년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채택된 구호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다극화의 가치를 강조하며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중국과 남반구 국가들을 잠재적 동맹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민경우는 더는 종속-자주의 틀이 아니라 다극화의 틀로 세계 정세를 봐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은 이제 경제적으로는 거대한 거품과 불균형이 파열되고 정치군사적으로는 미국 주도의 일극질서가 붕괴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미국 주도의 금융질서는 ‘미국-중국(또는 동아시아)’ 사이의 거대한 무역구조와 달러 리사이클링이라는 불균형 구조에 의해 지탱되었고, 미국 가계의 과소비가 파열되면서 무너지고 있다 … 멀게는 2005년 중-러의 다극 선언과 공동 군사훈련, 가깝게는 2008년 8월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략으로 정치군사적인 차원에서 미국 주도의 일극질서는 끝났다. 여기에 북, 이란 등이 핵과 미사일을 고리로 미국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2) 조공체제 부활론과 다극화체제론 비판 아리기·자크·클레그 등의 논의는 중국을 미국에 뒤이을 헤게모니 국가로 보는 것은 아직 섣부르지만, 중국의 부상이 세계 질서에 미칠 영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에서 이들이 기대하는 긍정적 효과는 현실과 맞지 않을 뿐더러, 정치적으로 위험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앞에서 나는 아리기가 조공체제를 이해하는 방식이 보수적 사학자들의 논의와 매우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보수적 동양사학자 권선홍도 “조공관계는 결코 무력이나 수탈에 의한 지배 종속 관계가 아니라 온정, 이익 공여와 존경, 감사의 교환관계라고 할 수 있으며, 로마제국이나 근대 서구 식민지 체제와 같은 직접적인 지배 통제 관계가 아니라 교화·덕화의 과정”이라고 아리기와 비슷한 주장을 편다.
95 청왕조의 대외 정책이 평화로웠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조공체제를 호의적으로 보는 논자들은 당시 국제 관계를 청-조선-일본의 관계로 한정하면서 조공체제와 동아시아 평화 체제를 연결시킨다. 그러나 청나라 건국 전후기는 대규모 전쟁으로 점철돼 있었다. 특히 유혈 낭자했던 중앙아시아 정복 전쟁을 보면 “3백 년간의 평화”라는 말은 너무 터무니없게 들린다.
그러나 조공체제에 관한 이런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최근 연구 결과들을 보면, 청왕조 들어 조공체제는 오히려 뼈만 앙상한 형식적인 제도가 됐다. 실제 물자 교류는 조공보다 상인들의 교역에 더 의존했다.96 청나라가 벌인 정복 전쟁의 규모가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점령 규모보다 훨씬 작았고 “청나라의 지리적 팽창은 해외 주변부에서 자원을 채취하고자 다른 나라와 경쟁하려는 목적도 없었고, 그런 결과를 낳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97 유럽 국가 간 전쟁은 이윤을 위한 것이었지만, 청나라의 정복 전쟁은 ‘안보’를 위한 것이었다.
아리기는 이런 비판을 의식해 2009년 발표한 글에서 청나라의 정복 전쟁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청나라 통치 첫 1백50년 동안 중국이 변경에서 벌인 많은 전쟁은 내 주장을 부인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일면적이다. 전자본주의 농업 사회에서는 토지와 농민을 얼마나 보유했느냐에 따라 지배계급이 조세와 공물로 수취하는 잉여의 양이 결정됐다. 청나라는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수도와 북부의 소농 경제와 상대적으로 지주제가 발달한 남부 곡창 지대를 연결하는 거대한 조세·공물 수송망으로 유지됐다. 변경과 중앙아시아에서 거듭거듭 벌인 정복 전쟁은 영토와 농민을 지배해 왕조의 안정적 잉여 수취 체제를 유지하려는 것과 관련 있다. 청나라는 같은 이유에서 남중국해로 접근하는 서양 상인의 움직임을 강하게 통제하기도 했다.99 클레그는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할 당시 중국이 유엔 안보리를 이용해 미국 제국주의의 전쟁을 견제했다고 보지만, 실제 중국 정부의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2002년 말 중국은 애초의 이라크 침략 반대 입장을 철회했고 전쟁을 묵인했다. 심지어, 미군의 이라크 점령이 시작된 2003년에는 프랑스와 러시아 등 이라크 침략을 둘러싸고 미국과 갈등을 빚은 안보리 이사국들이 미국 주도의 ‘재건’을 승인하도록 중재했다. 당시 유엔 주재 중국 대사 왕광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이 전 세계 초강대국임을 인정해야 한다. 만약 미국이 유엔에 참여하지 않으면 유엔은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없을 것이다.” 100
중국의 부상을 호의적으로 다루는 주장의 정치적 문제점은 우선, 오늘날 중국이 기존 세계 질서와 타협하는 것에 너무 관대하다는 것이다. 냉전 해체 후 중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미국의 해외 침략 — 1991년 제1차 걸프전쟁, 영화 ‘블랙호크다운’으로 유명한 미 특전사의 소말리아 침략,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략과 2003년 이라크 침략 등 — 을 대부분 묵인하거나 승인했다. 게다가 중국은 2001년에 시작된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앞장서 지지하기도 했다. 그 대가로 중국은 미군의 보호를 받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 대규모 광산 개발 사업에 진출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은 중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중국 정부가 테러 단체로 지목한 신장 위구르 자치 지역의 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ETIM을 국무부 지정 테러 단체로 등록했다. 2010년 2월에는 미군 무인폭격기가 ETIM 지도자를 암살하기도 했다. 중국은 아프팍 전쟁에도 상당히 깊이 연루돼 있다. 중국은 파키스탄 정부가 ETIM 지도자들을 공격하는 대가로 파키스탄 정부에 1억 8천만 달러를 지원했다.102 그러나 클레그는 테러의 증거가 있든 없든 ‘테러와의 전쟁’은 결코 테러를 없애지 못하고 테러를 낳는 근원인 강대국들의 약소국 억압과 불공정한 세계 질서를 강화해 오히려 더 큰 비극을 낳는다는 점을 보지 않는다.
아리기와 자크는 중국 대외 정책의 이런 어두운 측면을 별로 다루지 않는다. 클레그는 중국과 ‘테러와의 전쟁’의 관계를 다루지만, 무비판적이다. 중국은 증거가 있어야 테러리스트를 공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미국과 다르다는 것이다.103 중국의 신좌파 지식인 왕후이도 중국 정부의 티베트 억압을 비판하기보다는 티베트 민족 자치권을 옹호하는 서방 지식인들의 ‘오리엔탈리즘’과 ‘민족주의적 관점’을 비판한다. 그는 중국이 민족국가가 아니라 옛날부터 전해 내려 온 민족자치권을 보장하는 체제라고 주장한다. 그는 민족자결권을 요구하는 티베트인들이 서방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수용해 오히려 피해를 입고 있는 양 암시하면서, 민족자결권 요구를 옹호할 것이 아니라 기존 민족자치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중국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04
클레그는 티베트와 신장 문제도 다루지만, 중국 정부가 지역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하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클레그는 중국 정부에 반발하는 세력은 발전 자체에 반대하는 반동 세력인 양 강하게 암시한다.(예컨대 달라이라마가 ‘티베트 문화 절멸론’을 주장한 것이 “발전에 앙심을 품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독립국이던 곳을 1949년 중국이 강제 병합한 이후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중국의 점령에 반대하는 항쟁이 벌어졌고 중국 정부가 인명을 살상하며 강력히 진압하는데도 항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따라서 두 소수민족의 자결권 요구를 그저 추상적으로 “민족주의적”이라고 치부하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좌파는 이들의 요구를 지지해야 한다. 중국의 부상을 긍정적으로 다루는 논자들의 다른 정치적 문제점은 오늘날 중국의 경제 성장이 낳은 무역·투자 네트워크를 미화한다는 것이다. 아리기는 중국 경제의 성장이 조화로운 국내 발전을 추구하는 조공체제를 부활시키고 농업과 복지를 우선하는 스미스식 선순환 성장을 낳으리라고 기대한다. 클레그는 중국의 부상이 “공정한 세계화”를 낳는다고 여긴다.107 따라서 중국 중심의 무역망에 참여한 나라들이 모두 중국의 부상에서 혜택만 얻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제권과 개별 국민 경제가 중국 경제와 맺는 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각 경제들 사이의 관계는 불안정·모순·갈등도 내포한다.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자.
그들이 내놓은 주된 근거는 2000년대 일본·한국·아세안·독일 등 동아시아와 유럽의 제조업 수출국, 브라질·아르헨티나 등 라틴아메리카 농업 수출국, 앙골라·니제르·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아프리카 천연자원 수출국이 모두 고도 성장하는 중국을 중심으로 짜여진 무역망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2005년도 세계 경제성장률의 3분의 1 이상을 중국이 기여했다는 계산도 있다. 2008년 경제 위기 뒤에는 인도와 함께 세계 성장률의 거의 절반을 기여했다는 주장도 있다.108 물론 2009년 중반부터 중국 경제가 8퍼센트 넘는 성장을 하면서 네트워크가 어느 정도 복구된 듯하지만, 이는 중국 정부가 돈을 엄청나게 풀어 고정자본 투자 붐과 부동산 투기 붐을 인위적으로 유지한 덕분에 가능했다. 그런데, 이런 불안정한 성장은 세계시장이 회복되지 않으면 오래 유지될 수 없다. 즉, 중국 중심의 무역망은 불안정한 자본주의 경기순환에 철저하게 종속되고 이해타산으로 엮인 상업적 관계다. 이는 최근 그리스 등 유럽연합 나라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중국 정부가 취한 태도를 봐도 알 수 있다. 중국은 2009년 G20 정상회담 결과 IMF와 세계은행의 지분을 늘렸고 그 안에서 목소리를 높이겠다고 말했지만 막상 IMF가 그리스에 금융 지원을 대가로 사상 최악의 긴축재정을 요구하자 이 조처를 묵인했다. 109
첫째, 중국과 다른 나라들 사이의 무역망을 좀더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미국 시장이라는 ‘최후의 소비 지역’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즉, 서브프라임 모기지 거품과 각종 투기에 의존한 미국이나 유럽 소비 시장의 호황과 긴밀하게 연결된 네트워크였던 것이다. 그래서 2008년 9월 서브프라임 모기지 거품이 꺼지고 전 세계적 신용경색이 발생하자 중국 무역망의 폭과 규모는 크게 줄었고 여전히 그 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둘째, 경제 위기 때 이 나라들의 관계는 극단적 상호 의존과 극단적 경쟁이 공존하는 매우 모순된 관계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중국 경제가 계속 성장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제조업 과잉생산이 심해졌기 때문에 결국에는 경쟁 요소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흥호풍은 중국의 부상과 지난 40년 간의 세계적 과잉생산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70년대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심각한 불황과 금융 위기, 국가의 재정 위기, 브레턴우즈 통화 체제 붕괴로 몸살을 앓았다. 이 위기는 유럽과 일본이 전시 파괴에서 회복하고 효율적인 생산 체제를 구축해 세계시장에 공산품을 과잉 공급하는 등 1960년대 말부터 자본 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진 결과였다. 이 때문에 대다수 중심부 국가에서 이윤율이 하락했다. 중심부의 자본과 자본가 국가는 데이비드 하비가 “공간-시간적 조정”이라고 부른 다양한 전략을 사용해 위기를 극복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완화시키려 했다. 그런 전략 중 하나는 자본을 제조업 부문에서 금융과 부동산 투자로 이동시켜 이윤 실현의 순간을 지연시키는 것이었다(즉, 시간적 조정). 또 다른 전략은 새로운 영토를 세계시장에 편입시키고 흔히 이윤율이 체제 평균보다 높은 이 지역으로 잉여 자본을 수출하는 것이었다(공간적 조정).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고치려는 시도가 1980년대와 1990년대 신자유주의·세계화 프로젝트였다. … 그러나 이런 시도는 위기를 잠시 지연시켰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조처들은 세계적 금융 불안정을 심화시키고 잉여 자본 흡수 지역을 잉여 자본 수출 지역으로 전환시켰다. 더 큰 과잉축적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세계 생산 시설과 잉여 자본이 몰려든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되면서 이제 중국에서 과잉생산 위기가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
111 그러나 2001년 닷컴 호황 붕괴로 과잉 축적 위기가 폭발해 제조업 국가들이 파괴적인 제로섬 게임으로 내몰릴 것이라던 예측은 빗나갔다. 오히려 수출 주도형 경제들은 큰 호황을 누렸다. 이는 미국에서 부동산을 담보로 가계 대출이 늘고, 그 결과 공산품 소비가 지속된 덕분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가계 대출 확대는 주요 수출국들이 수출로 벌어들인 돈으로 미국 국채를 대거 사들인 덕분에 가능했다. 이런 상호 의존은 수출국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수출국들의 기업 중 상당수는 최종 소비국에 수출하기 전 생산과정의 일부나 전체를 중국에 의존하게 됐다. 이 기업들이 중국에 핵심 부품과 반제품을 수출하면 중국에 있는 공장들이 그것을 완제품으로 조립해 미국과 유럽 시장으로 수출하는 방식이었다. 한편에서는 미국과 수출국들 사이에, 다른 한편에서는 제조업 국가들 사이에 형성된 상호 의존 관계는 한동안 과잉생산 문제를 해결하는 듯했다.
2000년대 초반 〈이코노미스트〉는 이미 중국의 부상이 다른 수출국들에 엄청난 압력이 됐다고 경고한 바 있다.그러나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 이후 세계경제가 저성장 모드로 진입한 상황에서 중국의 엄청난 생산 시설은 이제 과잉생산 문제를 악화시키는 골칫거리 중 하나가 됐다. 중국 정부는 과잉생산 문제를 푸는 해결책으로 수출 증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파이낸셜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중국의 수출 증가가 세계 체제에 엄청난 긴장을 유발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무역수지 흑자국들[중국과 독일]은 기존 상황이 지속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의 무역 흑자 의존 때문에 수입국들이 파산해서 그 피해가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용인하려 하지 않는다. 이미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편, 대규모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해 온 나라들이 거품 붕괴 후 민간 부문의 차입 감소로 발생한 대규모 재정 적자를 줄이려면 이제 수출을 늘릴 수밖에 없다. 만약 흑자국이 총수요 확대를 통해 그런 수출 증대를 수용하지 못한다면 세계는 “너 죽고 나 살기식”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다. … 바로 이런 메커니즘이 1930년대에 파국을 낳은 주된 요인 중 하나였다.
113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2009년 발표한 국방 계획에서 ‘중국 위협’을 명분으로 대규모 해군 증강을 정당화했다. 114
울프가 현 세계경제 위기가 1930년대와 비슷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은 시사적이다. 1930년대 대불황 당시 제로섬 게임 같은 경제적 경쟁이 제2차세계대전 발발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경제적 경쟁은 경제적 보호주의 블록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군사동맹 형성까지 나아갔지만, 현재의 경제 위기와 국가 간 갈등은 아직 1930년대 수준에는 크게 못 미친다. 그러나 그런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고 그 갈등의 한복판에 중국이 있다. 예를 들어, 서구 거대 기업과 연합한 오스트레일리아 철광 기업의 준독점적 지위에 도전하려는 중국의 움직임은 2009~10년 철광석 가격을 둘러싼 중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의 치열한 신경전으로 확산됐다.중국이 열강과 맺은 관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과의 관계다. 오바마 정부 들어서도 미국은 세계 패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세계경제 위기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과의 경제적 협력을 강화하는 듯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위안화 절상 문제나 무역 분쟁 등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런 갈등은 군사적 차원의 경쟁과도 맞물려 있다. 예컨대 미국이 대만에 무기를 수출하는 문제나 미국과 중국이 남중국해 주변에서 군사력을 증강한 것이 그런 사례다. 오바마가 부시 정부의 아프리카사령부 설치 계획을 계승한 것도 중국의 영향력 확산을 견제하려는 의도와 관련 있다.
이런 갈등은 언제나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으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 일찍이 1910년에 루돌프 힐퍼딩은 《금융자본》에서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했다. 그는 당시 영국과 독일의 경쟁 관계를 두고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독일은 오늘날 자본주의와는 무관한 역사적 이유 때문에, 이렇다 할 정도의 식민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반면, 최강의 경쟁자인 영국과 미국(미국은 대륙 전체를 일종의 경제적 식민지로 활용하고 있다)뿐 아니라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같은 작은 나라들도 상당한 식민지를 갖고 있으며, 또한 장래의 경쟁자인 러시아도 두려울 정도로 거대한 경제 영역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독일과 영국 사이에는 (각각의 위성국을 포함해) 대립이 크게 격화되지 않을 수 없으며, 결국에는 무력에 의한 해결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불행히도 이 경고는 양차 대전의 발발로 현실이 됐다. 물론 제국주의적 경쟁이 늘 곧장 강대국 간 전쟁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이 당장 전쟁을 벌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나 경제 위기가 더 심각해지고 강대국 간 경제적 경쟁이 더 치열해지면, 세계는 더욱 불안정해질 것이다.
116 물론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아프리카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을 걱정하는 미국과 서방의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중국의 ‘신식민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지난 1백50년 동안 서방 제국주의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아 파괴하고, 독립 후에는 외채와 IMF 구조조정으로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것은 비판하지 않는다. 지금도 여전히 가장 앞장서서 아프리카에서 자원 쟁탈전을 벌이고 군사적 개입을 자행하는 외부 세력은 미국과 서방 열강들인데도 말이다. 117 일부 좌파들도 ‘신식민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물론 아프리카 민중의 처지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맥락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셋째, 중국과 아프리카 국가들의 관계도 첨예한 논쟁거리다. 중국이 특히 아프리카에 개입하는 것을 두고는 꽤나 자극적인 표현인 “신식민주의”라는 말이 사용된다.그러나 신식민주의라는 용어는 중국의 아프리카 정책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중국이 아프리카에서 다른 열강들과 벌이는 경쟁이 19세기 말 서방 열강들이 벌인 아프리카 영토 쟁탈전처럼 현지 지배자들을 용인하지 않고 배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좌파 학자인 로저 사우스홀은 새로운 아프리카 쟁탈전의 성격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 쟁탈전과 오늘날 쟁탈전의 핵심적 차이는 외부 세력이 아프리카의 자원에 접근할 때 형식적으로 독립된 주권 국가와 협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의 핵심 메커니즘은 ‘매판주의’, 즉,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자신들에게 이득을 주는 외부 세력과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평범한 아프리카 시민들의 복지를 희생시키면서 말이다.
실제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나이지리아 같은 지역 강국들은 서방과 아시아 강대국들의 아프리카 진출을 중개하면서 국제 위계질서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 나라들은 더는 외교적으로 미국과 프랑스라는 전통적 열강에 종속될 필요가 없어졌다. 중국이 아프리카의 천연자원 획득에 열성적으로 뛰어들면서 이런 성격이 더 강화됐다. 오늘날 중국은 천연자원 수백억 달러어치를 아프리카에서 수입하고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에 일조하면서 아프리카 정부들의 국고 확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히려 이 점 때문에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이 다극화의 진보적 가능성을 보여 준다고 주장하는 논자도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다극화 확산으로 말미암은 변화 중 하나는 과거 서방이 지원하던 독재 정권들을 이제는 중국이 지원한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 정부가 짐바브웨의 무가베 독재 정부에 무기를 지원하다 덜미를 잡힌 사례는 중국의 다자주의가 아프리카 대중에게 이롭지 않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 준다.
서방의 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의 대안이라는 중국의 이미지는 냉혹한 현실과 점점 충돌하고 있다. … 잘못된 통치에 저항하는 대중운동을 냉대하는 중국 정부의 태도는 2008년 5월 나중에 ‘수치의 배’로 불리게 된 선박을 통해 짐바브웨에 무기를 보낸 것에서 극적으로 드러났다. 2008년 3월 짐바브웨 선거에서 집권당은 야당에 패배했고 평범한 사람들은 극심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정부에 반대했다. 짐바브웨 군사령부는 추가 탄압을 위해 중국제 무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모잠비크, 남아공, 나미비아와 앙골라의 노동자들은 이 배의 화물을 하역해 짐바브웨로 수송하기를 거부했다. … 확인되지 않은 보고에 따르면 이 무기들은 아프리카 남쪽 해안의 우회로를 거쳐 비밀리에 전달됐다고 한다.
또한, 중국은 상대적 약소국에는 공갈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2006년 잠비아 대선에서 중국 기업이 소유한 광산 노동자들의 처우가 쟁점이 됐을 때 중국 정부가 보인 태도가 대표적 사례다.
2005년 4월 잠비시에 있는 중국인 소유의 광산에서 최근 35년 간 최악의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현장 인부 52명이 다 죽었다. 그들은 대단히 위험한 곳에서 일하면서도 시급이 15~30달러에 불과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 중국 기업과 정부가 적절한 안전 기준을 지키지 않은 데 대한 분노가 폭발했다. … 2006년 야당 대통령 후보 마이클 사타는 잠비아 광산과 무역업에 대한 중국의 투자를 대선 쟁점으로 만들었다. 사타는 “중국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잠비아인들을 학대합니다. 우리는 착취하는 투자자들을 환영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는 잠비아인의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121 이것만 보더라도 중국판 다자주의가 남반구의 대중에게 전혀 자비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중국의 반응은 과거 서방 정부와 기업의 오만한 모습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잠비아 주재 중국 대사는 만약 잠비아인들이 사타를 당선시키면 중국은 잠비아에서 모든 투자를 회수하겠다고 협박했다.결론
122 또,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경제성장 방식이 아무리 자본주의적이더라도 ‘저성장’에 고통받는 남반구가 중국에서 배울 점이 서구 자유주의 모델에서 배울 점보다 더 많다는 주장도 있다. 123
이 글에서 다룬 주장들 외에도 ‘중국 모델’을 옹호하는 주장은 더 많다. 예컨대, 최근 프랑스의 좌파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1871년 파리 코뮌과 함께 문화혁명 — 실패한 실험임을 인정하면서도 — 에서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럼에도 이 글에서 분석한 것을 통해 잠정적으로 세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아리기처럼 아무리 그럴듯한 수식어를 붙이더라도 시장경제는 진보적 대안이 될 수 없다. 중국 경제를 보더라도 저임금 체제 지속, 이윤율 하락, 1997년 동아시아 경제 위기 이후 부실 자산 폭증 등을 보면, 시장경제는 통제할 수 없는 위험한 시한폭탄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중국 국영부문을 사회주의와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이 없는 것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다. 앞에서 분석했듯이 중국은 국가자본주의 체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중국 모델은 자본주의를 대체할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러기는커녕 체제 내에서 경쟁국들과 더 효과적으로 경쟁하려면 중국 경제는 비민주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중국이 세계 체제에서 하는 구실을 볼 때 오늘날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다극화 전략은 비판적 시각에서 재평가돼야 한다. 특히, 최근의 일부 사건들은 다극화론이 얼마나 잘못된 결론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줬다. 국제 반제국주의 세력 중 일부, 예컨대 베네수엘라의 좌파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티베트와 신장의 소수민족 반란이나 이란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지 않거나 아예 미국 제국주의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몰아붙이기도 했는데, 이는 다극화론의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그들은 이란의 아마디네자드 정부나 중국-러시아 정부 등이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다극화의 한 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히려 진정한 반제국주의 세력인 이란 기층 투쟁이 국제 반제국주의 운동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
이처럼 중국 모델에 대한 평가는 진보진영의 전략 논의와도 긴밀한 연관이 있다. 이 글이 이런 논의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
- Lin Chun, The Transformation of Chinese Socialism(Duke University Press), 2007. ↩
- Perry Anderson, ‘Two Revolutions - Rough Notes’, New Left Review 61(Jan-Feb 2010), pp. 91-92. ↩
- 평소 국가가 몇몇 지방 거점에 식량을 비축했다가 심각한 기근 등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농민들에게 비축 식량을 배급하는 제도로 청조 지배 체제를 안정시킨 핵심 제도 중 하나였다. 이를 다룬 가장 훌륭한 책은 P E 빌, 《18세기 중국의 관료제도와 자연재해》, 민음사, 1995다. ↩
- Giovanni Arrighi, Adam Smith in Beijing: Lineages of the Twenty-First Century(Verso), 2007, p. 328. [국역: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길, 2009] ↩
- Robert Brenner & Christopher Isett, ‘England’s Divergence from China’s Yangzi Delta: Property Relations, Microeconomics, and Patterns of Development’,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61, No. 2(May 2002). ↩
- Keneth Pomeranz, The Great Divergence: China,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E conomy(Princeton), 2000, Bin R Wong, China Transformed - Historical change and the limits of European Experience(Cornell University Press), 1997. ↩
- Giovanni Arrighi, 앞의 책, pp. 91-92. ↩
- 같은 책, p. 77. ↩
- Sugihara Kaoru, ‘East Asian Path’, Economic and Polical Weekly Vol 39, No.34(Aug 21-27, 2004), p. 3857. ↩
- 스기하라 카오루, 《아시아간 무역의 형성과 구조》, 전통과 현대, 2002. ↩
- 안드레 군더 프랑크, 《리오리엔트》, 이산, 2003. ↩
- 로이는 인도 민족주의 좌파 지식인 — 공산당과 네루주의 지식인 — 의 영국 식민 통치 비판 논리를 시장주의에 입각해 맹렬히 공격했다. 그는 영국 제국이 기존 인도 전근대 정치 구조를 해체시킨 덕분에 전근대 정치 구조의 억압을 받던 소상공업자들이 자유롭게 경제 활동을 벌일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면서 제조업이 상당히 발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Tirthankar Roy, The Economic History of India 1857-1947(Oxford University Press New Delhi), 2000. 프랑크는 로이의 저작에서 소상공인들의 ‘역동성’에 주목한다. ↩
- 브로델은 근대 세계경제가 세 층위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맨 밑바닥에는 사람들의 일상적 생계 활동을 의미하는 ‘일상 생활’이 있다. 그 위에는 상업 활동 등과 연관된 ‘교환의 세계’가 있고, 마지막 제3층에 독점 자본과 국가의 연합으로 구성된 ‘자본주의’가 있다. 즉, 브로델은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분석할 때도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명확히 구분한다. 페르낭 브로델, 《물질 문명과 자본주의》, 까치, 1995을 보시오. 그러나 무려 6권으로 구성된 이 역작을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김응종, 《페르낭 브로델 - 지중해·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살림, 2006, 2장을 볼 것. ↩
- Giovanni Arrighi (EDT), The Resurgence of East Asia - 500, 150 And 50 Year Perspectives(Routledge), 2003, p. 263. ↩
- Giovanni Arrighi, Adam Smith in Beijing: Lineages of the Twenty-First Century(Verso), 2007, p. 92. ↩
- David Harvey, The Short History of Neoliberalism(Oxford), 2006, p. 151.[국역: 《신자유주의 — 간략한 역사》, 한울, 2009]. ↩
- Giovanni Arrighi, 앞의 책, 2007, pp. 215-222. ↩
- 같은 책, pp. 361-367. ↩
- 나는 이 글에서 중국과 애덤 스미스에 관한 아리기의 주장을 대단히 비판적으로 다루겠지만, 《베이징》의 전체 내용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테러와의 전쟁’을 전후한 미국 제국주의의 위기에 관한 분석은 이 문제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을 만큼 탁월하다. ↩
- Philip C C Huang(황종지), The Peasant Economy and Social Change in North China(Stanford University Press), 1985. The Peasant Family and Rural Development in the Yangzi Delta, 1350 -1988(Stanford University Press), 1990. 복잡한 황종지의 이론을 간결하게 정리한 것으로는 리보중, 《중국 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모색》, 책세상, 2006, 82~96쪽을 보시오. ↩
- Mark Elvin, ‘The Historian as Haruspex’, New Left Review 52(July-Aug 2008), p. 87. 당시 환경 문제에 관한 쉬운 설명으로는 정철웅, 《역사와 환경: 중국 명청 시대의 경우》, 책세상, 2002와 오금성 외, 《명청 시대 사회경제사》, 이산, 2007에 수록된 정철웅의 ‘환경’을 보시오. 후자의 책에서 정철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명청 시대 사회경제사 연구자들은 청 중엽 사회적 동요의 원인이 강남 지역과 같은 중심 지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변경 지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바로 이런 변경의 동요와 사회적 불안정은 그 일대의 환경 악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251쪽) ↩
- Hung Ho-Fung, ‘Changes and Continuities in the Political Ecology of Popular Protest Mid-Qing China and Contemporary Resistance’, China Information XXI (2) (2007). ↩
- Leo Panitch, ‘Giovanni Arrighi in Beijing: An Alternative to Capitalism?’, Historical Materialism 18(1)(2010), p. 79. ↩
- 심지어 이 주장도 일관되지 않다. 리처드 워커가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는데, 아리기는 한편으로는 브레너의 이윤율 하락 이론을 비판하면서 “1980년대 미국과 세계 자본주의가 직면한 문제는 낮은 이윤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Giovanni Arrighi, 앞의 책, 2007, p. 159) 하고 단언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문제가 폭발한 정확한 원인을 찾기 힘들지만 이윤율 위기와 미국 헤게모니 위기가 결합돼 발생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같은 책, p. 157) 하고 주장한다. Richard Walker, ‘Karl Marx between Two Worlds: The Antinomies of Giovanni Arrighi’s Adam Smith in Beijing’, Historical Materialism 18(1)(2010), pp. 60-61. ↩
- 2005년 통계. C Fred Bergsten & Bates Gill & Nicholas R Lardy & Derek J Mitchell, China : The Balance Sheet(Public Affairs), 2006, p. 18. ↩
- Cary Huang, ‘Going backwards ever faster’, South China Morning Post(August 2, 2009). ↩
- Hung Ho-Fung이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강연회 ‘China, Japan and the U.S.: Together in Crisis?’에서 발표한 내용에서. ↩
- Bruce Dickson, Wealth into Power(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p. 140. ↩
- ‘Rich brew ‘Tea Party’ debate on property tax Wealthy rail against proposed real estate levy’, Bloomberg(Mar 17, 2010) ↩
- ‘Firm founded by Wen’s son eyes US$1 billion fund’, Reuters(Jan 25, 2010) ↩
- 2008년 말 경기 부양책을 시작한 뒤로는 거의 50퍼센트에 육박하고 있다. Tom Holland, ‘The whole world may be in danger of turning Japanese’, South China Morning Post(Oct 06, 2009). ↩
- Hu Angang, Employment and Development(Chinese Academy of Social Science), 1998, p. 6. Dorothy Solinger, State’s gains, Labor’s losses(Cornell University Press), 2009, p. 113에서 재인용. ↩
- 후안강, ‘중국 경제는 어떻게 쾌속 성장할 수 있었는가?’, 〈중국 전문가 포럼〉(2004.6.18). ↩
- 향진기업의 실상은 황수민, 《린 마을 이야기》, 이산, 2003을 볼 것. ↩
- 당시 이 투쟁은 “작은 톈안먼 항쟁”으로 불렸다. He Bochuan, ‘La Crise Agraire en Chine’, Isabelle Thireau & Hy Linshan(eds), D’une légitimité à l’autre dans la Chine rurale contemporaine, p. 121. ↩
- 같은 글, p. 123. ↩
- D S Bell, The French Socialist Party(Oxford Zed), 1988, p. 12, Dorothy Solinger, 앞의 책, p. 34에서 재인용. ↩
- 법적으로 모든 토지는 국가 소유지만 개혁·개방 이후 농민들은 토지 사용권을 부여받았다. 1980년대 초 농가청부제로 시작해 처음에는 가족에게 토지 사용권을 15년 보장했고 나중에는 보장 기간을 30년으로 늘렸다. ↩
- Qian Forrest Zhang & John A Donaldson, ‘The Rise of Agrarian Capitalism with Chinese Characteristics’, The China Journal no. 60(July 2008), p. 25. 이 논문은 자본주의적 영농의 형태로 독립 상업농과 계약농을 구분한다. 현재는 후자가 자본주의적 고용 관계와 비슷하다. ↩
- 선대제란 자본주의 상인이 독립 생산자(소농이나 수공업자)에게 원료나 반제품, 도구 등을 제공해 상인이 원하는 상품을 생산케 하는 제도를 말한다. 독립 생산자들은 자본가에게 직접 고용되지 않았을 뿐 사실상의 통제를 받았다. ↩
- Qian Forrest Zhang & John A Donaldson, 앞의 글, pp. 38-43. 저자들은 이때도 고용 형태가 ‘중국적 특색의 반프롤레타리아 농업 노동자’, ‘반프롤레타리아 농업 노동자’, ‘프롤레타리아 농업 노동자’의 세 가지로 나뉜다고 주장한다. 구분 기준은 지역 정부가 토지를 여전히 형식적으로 소유하고 있는지, 고용된 노동자가 조금이라도 별도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지 등이다. ↩
- Hung Ho-Fung, ‘America’s Head Servant? - The PRC’s Dilemma in the Global Crisis’, New Left Review 60(November-December 2009), p. 14. ↩
- Au Loong Yu, ‘China: End of a Model…Or the Birth of a New One?’, New Politics 47(Summer 2009). ↩
- A R Khan & Carl Riskin, ‘China’s Household Income and Its Distribution, 1995 and 2002’, China Quarterly 182(June 2005), p. 361의 Table 4. ↩
- Koo Hagan(구해근), ‘From Farm to Factory: Proletarianization in Korea’,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Vol. 55(October 1990), pp. 673, 675-676. 한국과 대만에서도 토지가 소농의 개인적 소유물인 반면에 개혁·개방 시기 중국은 법적으로 토지 사용권을 국가에서 일시적으로 보장받는 방식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
- Giovanni Arrighi, 앞의 책, 2007, p. 356. ↩
- 김정호, ‘중국 경제 8.7%↑ 의미 - “사회주의 시장경제 우월성 입증” 불균등발전론 → 균형전략으로’, 〈레디앙〉(2010.1.29). ↩
- 장영석, ‘개혁개방 이후 중국 노동정책의 변화’,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6권 제3호(2009년 가을), 50~51쪽. ↩
- 이홍규, ‘중국 모델의 등장은 동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새세상연구소(2010.2.4). ↩
- Joel Andreas, ‘Changing Colours in China’, New Left Review 54(November-December 2008), p. 132. ↩
- Dorothy Solinger, 앞의 책, p. 116. ↩
- 같은 책, pp. 82-83. ↩
- Kevin Doogan, New Capitalism - The Transformation of Work(Polity), 2009, pp. 180-184. ↩
- 같은 책, pp. 18-19. ↩
- * 20~30호로 이루어진 농업 생산의 관리와 회계의 기본 단위 - M21 ↩
- 황수민, 앞의 책, 119쪽. ↩
- 중국 정부의 공식 사망자 통계가 없고 1953년 인구 조사가 엉망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대약진 운동 기간에 비非자연사의 수가 몇 명인지는 큰 논란거리다. 또한, ‘정상 출생률’과 비교했을 때 태어나지 못한 유아의 수를 비자연사 수에 포함할지, 그 중 몇 명이 마오 정부의 정책 때문에 죽은 것으로 볼 것인지도 일치된 의견이 없다. 중국 관변 연구소들은 아사자가 대략 1천만~1천7백만 명이었다고 본다. 대약진 운동을 다룬 고전으로 손꼽히는 재스퍼 베커의 Hungry Ghosts는 3~4천만 명이 아사한 것으로 제시한다. 보통 후자가 더 현실에 가깝다고 평가받는다. 《中華人民共和國史(第四卷)──烏托邦運動:從大躍進到大饑荒(1958-1961)》, pp. 619-623에서 재인용. 최근 전 〈신화사〉 기자가 홍콩에서 출판한 《墓碑-中國六十年代大饑荒紀實》는 가장 많은 약 7천만 명(아사자 3천6백만 명, 태어나지 못한 유아 4천만 명)을 제시했다. 楊繼繩, 《墓碑-中國六十年代大饑荒紀實》, 天地圖書有限公司, 2009, p. 904. 리민치 같은 일부 신좌파들은 가장 적은 5백만 명(아사자)을 제시한다. Li Minqi, The Rise of China and the Demise of the Capitalist World Economy(Monthly Review Press), 2008, p. 43.[국역: 《중국의 부상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종말》, 돌베개, 2010] 그러나 어느 기준으로 해석하든 엄청난 인재가 발생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
- Lee Ching-Kwan & Mark Selden, ‘China’s Durable Inequality: Legacies of Revolution and Pitfalls of Reform’, Japan Focus(January 21, 2007), http://japanfocus.org/-Mark-Selden/2329 ↩
- 錢理群, 《拒絶遺忘 - “1957年學” 硏究筆記》, 牛津大學出版社, 2007, 1장. Lauri Palteamaa, ‘The Democracy Wall Movement, Marxist Revisionism, and the Variations on Socialist Democracy’, Journal of Contemporary China 16(53)(November 2007), pp. 606-608. ↩
- Li Chunling, ‘Mobilite sociale et clases en Chine’, Laurence Roulleau-Berger(Sous la direction de), La Nouvelle Sociologie Chinoise, pp. 163-166. ↩
- Li Minqi, 앞의 책, p. 55. ↩
- Rumy Hassan, ‘Reflection on the Impact upon China’s Polity from the Retreat of State Capitalism’, Critical Sociology 34(4)(2008), p. 579. ↩
- Li Minqi, 앞의 책, p. 50. ↩
- Rumy Hassan, 앞의 글, pp. 576-577. ↩
- 胡鞍鋼, 《毛澤東與文革》, 大風, 2008, p. 748. ↩
- Li Minqi, 앞의 책, pp. 51-52. ↩
- Junya Hamaaki & Masahiro Hori & Saeko Maeda & Keiko Murata, ‘Is the Japanese employment system degenerating? - Evidence from the Basic Survey on Wage Structure’, ESRI Discussion Paper Series No.232(March 2010), pp. 7-8. ↩
- Anita Chan & Jonathan Unger, 앞의 글, p. 7. ↩
- 김영진, 《중국의 시장화와 노동정치》, 오름, 2000, 37쪽. ↩
- 샤강은 중국 국영기업 특유의 고용정리 방식으로, 해고 후 최소한의 생계보조비를 공장이 지급한다. 사실상 해고이지만 ‘일시 휴직’으로 분류된다 - M21 ↩
- Lei Guang, ‘Broadening the Debate on Xiagang: Policy Origins and Parallels in History’, Edited by Thomas B Gold & William Hurst & Jaeyoun Won & Li Qing, Laid-Off Workers in a Workers’ State - Unemployment with Chinese Characteristics(Palgrave), 2009, pp. 29-30. ↩
- Giovanni Arrighi & John S Saul, ‘Socialism and Economic Development in Tropical Africa’, The Journal of Modern African Studies Vol. 6, No. 2(Aug 1968). ↩
- Giovanni Arrighi, 앞의 책, 2007, p. 20. ↩
- 같은 책, pp. 265-274. ↩
- 같은 책, p. 320. ↩
- 같은 책, p. 206. ↩
- 아리기의 《장기 20세기》를 보면, 신호적 위기란 헤게모니 국가의 위기로 세계경제의 실물적 팽창이 한계에 도달하면서 자본 투자로 이윤을 계속 얻기 힘든 상황을 말한다. 따라서 지배적 경제 활동은 이제 실물(무역과 생산)에서 금융 거래와 투기로 전환된다. ↩
- Giovanni Arrighi, 앞의 책, 2007, pp. 32-37. ↩
- 같은 책, Chapter 7. 여기서 최종적 위기란 신호적 위기로 시작된 금융 팽창으로도 헤게모니 국가의 위기가 계속되고 헤게모니 국가가 주도하는 지배적 축적 체제가 헤어나기 힘든 위기에 빠져드는 상황을 말한다. 아리기는 이런 최종적 위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가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
- 이 점은 《베이징》보다는 《장기 20세기》 영어판 2010년 신판 후기에 더 명확히 표현돼 있다. Giovanni Arrighi, ‘Postscript to the Second Edition of The Long Twentieth Century’(March 21, 2009), pp. 20-22.(이 페이지는 Verso에서 출판된 책의 페이지가 아니라 아리기가 출판 전에 인터넷에 공개했을 때 페이지임.) ↩
- Martin Jacques, When China Rules the World - The End of the Western World and the Birth of a New Global Order(Penguin), 2009. 경제 위기 아래 중국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그의 책은 영미권 베스트셀러가 됐고 온갖 주류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
- 같은 책, p. 418. ↩
- 같은 책, pp. 418-423. ↩
- 같은 책, p. 415. ↩
- 조경란은 왕후이를 “서양적 패러다임에 대항하는 민족주의”로 분류했다. 조경란, ‘현대 중국 민족주의 비판 - 동아시아 인식을 중심으로’, 《역사비평》 90호(2010 봄), 439쪽. ↩
- 汪晖, ‘超越东方主义与民族主义’, 《21世纪经济报道》(2008.6.1). ↩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1 - 전통 시대 동아시아 2천 년과 한반도》, 한길사, 2009, 181쪽. ↩
- Jenny Clegg, China’s Global Strategy – Toward a Multipolar World(Pluto), 2009, p. 97. ↩
- 같은 책, p. 6. ↩
- 같은 책, p. 7. ↩
- Jenny Clegg, ‘We should broadly back G20’, Morning Star(March 30, 2009) http://www.morningstaronline.co.uk/index.php/news/layout/set/print/content/view/full/73635 ↩
- 같은 글. ↩
- 민경우, 《진보의 재구성》, 시대의 창, 2009, 87~88쪽. ↩
- 권선홍, ‘조선과 중국의 책봉·조공관계’, 권선홍·황귀연·김홍구·박장식·우덕찬, 《전통 시대 중국의 대외관계》, 부산외국어대학교출판사, 1999, 21~22쪽. ↩
- William Rowe, China’s Last Empire - The Great Qing(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pp. 133-138. ↩
- Giovanni Arrighi, ‘China’s Market Economy in the Long Run’, Hung Ho-fung(edited by), China and the Transformation of Global Capitalism(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9, p. 25. ↩
- 같은 글, p. 25. ↩
- Lucia Pradella, ‘Beijing between Smith and Marx’, Historical Materialism 18(1)(2010), p. 91. ↩
- Allen Carlson, ‘More than just saying No’, Alastair I Johnston & Robert Ross(edited by), New Directions in the Study of China’s Foreign Policy(Stanford University Press), 2006, p. 184. ↩
- Jon Alterman & John Garver, Vital Triangle - China, the U.S. and the Middle East(CSIS), 2008, p. 31. ↩
- Kristine Kwok, ‘Pakistan says Xinjiang terror group broken’, South China Morning Post(May 08, 2010) ↩
- Jenny Clegg, 앞의 책, 2009, pp. 177-178. ↩
- 같은 책, pp. 155-156. ↩
- 汪晖, 앞의 글. http://www.wyzxsx.com/Article/Class17/200806/40777.html ↩
- 김용욱, ‘티베트인들의 투쟁을 옹호하라’, 〈맞불〉 80호(2008년 3월 31일자호), 김용욱, ‘신장 유혈 사태의 책임은 중국 정부의 식민 지배에 있다’, 〈레프트21〉 9호(2009년 7월 4일자호)를 참조하시오. ↩
- Jenny Clegg, 앞의 책, p. 97. ↩
- ‘노무라 “올 세계경제 4.2% 성장 … 중국·인도 절반 이상 기여”’, 〈조선일보〉(2010.1.27). ↩
- Yongding Yu, ‘China’s Policy Responses to the Global Financial Crisis’, Journal of Globalization and Development Vol. 1, Issue 1(2010), pp. 2-3. ↩
- Kevin Brown & Christian Oliver & Tim Johnston, ‘Asia irked by IMF ‘leniency’ to Greece’, Financial Times(May 1 2010). ↩
- Hung Ho-fung, ‘Rise of China and the global overaccumulation crisis’, Review of International Political Economy 15:2(May 2008), pp. 152-153. ↩
- ‘Asian companies and the China challenges’, Economist(Apr 25 2002). ↩
- Martin Wolf, ‘China and Germany unite to impose global deflation’, Financial Times(March 16 2010) ↩
- Paul Cicatell, ‘China’s asent and Japan’s raw material peripheries’ Hung Ho-fung(edited by), China and the Transformation of Global Capitalism(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9, pp. 119-120. ↩
- ‘Rudd tries to calm Beijing on navy build-up’, Reuters(May 02, 2009). ↩
- 루돌프 힐퍼딩, 《금융자본》, 새날, 1994, 467쪽. ↩
- 이상수, ‘중 원자바오 총리 ‘아프리카 착취론’ 반박’, 〈한겨레〉(2006.6.20). ↩
- 세르주 미셸·미셸 뵈레, 《차이나프리카》, 에코리브르, 2009. 미국 석유 기업들이 나이지리아 등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 산유국의 노른자위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2007년 아프리카통합사령부를 설치했다. ↩
- Roger Southhall, ‘Scrambling for Africa? Continuities and Discontinuities with formal imperialism’, Edited by Roger Southall & Henning Melber, A New Scramble for Africa?: Imperialism, Investment and Development(University of Kwazulu Natal Press), 2009, p. 30. ↩
- Henning Melber, ‘Global Trade Regime and Multi-Polarity’, Edited by Roger Southhall & Henning Melber, 앞의 책, p. 74. ↩
- Ching Kwan Lee, ‘Raw Encounters: Chinese Managers, African Workers and the Politics of Casualization in Africa’s Chinese Enclaves’, The China Quarterly 199(September 2009), p. 664. ↩
- Dan Haglund, ‘In It for the Long Term? Governance and Learning among Chinese Investors in Zambia’s Copper Sector’, 같은 책, p. 635. ↩
- Alain Badiou, ‘La Derniere revolution?’, L’Hyopthese Communiste(Lignes), 2009. ↩
- 경제 위기에서 이런 입장이 확산되는 배경과 비판에 대해서는 Au Loong Yu, ‘China: End of a Model…Or the Birth of a New One?’, New Politics 47(Summer 2009)을 보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