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와 역사
한국전쟁, 누구의 전쟁인가?
한국전쟁을 둘러싼 학계의 흐름을 다소 도식적으로 구분해 보자면, 크게 두 번의 전환이 있었다. 첫 번째 전환은, 1950년대부터 보수 우익 사이에서 지배적이던 이른바 ‘전통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른바 ‘수정주의’의 탄생이다.
‘전통주의’ 견해는 냉전이 시작된 이유를 소련의 호전적이고 뻔뻔한 확장욕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전통주의자들은 한국전쟁도 스탈린이 자신의 괴뢰인 김일성을 사주해 남한을 침공하게 한 것으로 본다. 냉전 기간에 미국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었고 소련의 침략에 대항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수정주의는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이 끼친 영향을 크게 받으며, 낡은 전통주의 도식에 물음을 던졌다. 특히, 수정주의자들은 미국이 제3세계 민족해방 운동과 민중의 급진화를 어떻게 억눌렀는지 밝히려 노력했다. 그 결과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라는 미국의 슬로건 뒤에는 추악한 제국주의적 패권 야욕이 도사리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수정주의는 소련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패권 국가였음을 간과하거나, 제3세계 민족해방 세력을 ‘빨갛게 색칠’하는 등의 약점도 있었다.
두 번째 전환은 소련 붕괴와 냉전 해체의 충격파 때문에 일어난 전통주의의 반동이었다. 옛 소련의 기밀 문서가 공개되면서 스탈린주의적 좌파와 수정주의 학파의 일부 가정들이 반박되거나 설득력이 약해졌다. 예를 들어, 남한이 북한을 먼저 침공했다는 북침설은 완전히 파산했다. 공개된 문서는 명백한 남침이었음을 반박의 여지없이 보여 줬다. 또, 38선상에서 남한이 의도적으로 조금씩 도발해 북한의 전면 남침을 불렀다는 ‘유도설’도 설득력이 없어졌다. 북한은 38선상에서 빈번했던 소규모 충돌과 무관하게 완전 통일을 목적으로 전면전을 준비했음이 드러났다. 수정주의 학파의 그릇된 가정들이 반박 당하자 보수·우익들은 이를 빌미로 급진화한 한 세대의 건강한 문제 제기 자체를 몽땅 무효화하려 했다. 전통주의의 반동은 현대사 분야 전반에 걸쳐 거세게 일어났다. 심지어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뻔뻔스런 주장을 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38도선의 획정劃定 경위와 역사적 의의’
만약 미국이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자고 소련에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의 점령하에 들어갔을 것이다. 전후 동유럽의 경험에서 명확히 알 수 있듯이 소련 점령하에 들어간 국가는 모두 공산화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한반도도 공산화의 운명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38도선은 단순히 한반도의 분할을 불러온 것이 아니라, 자유·인권·시장 등 인류 보편의 가치가 미국군을 따라 한반도에 상륙한 북방한계를 나타내는 선이었던 것이다.
분단이 초래한 수많은 비극과 고통은 이들의 안중에 없는 듯하다. 그들은 스탈린과 김일성이 남침을 사전에 협의했다는 사실을 들어 전쟁책임에서 미국과 남한을 면제하려 애썼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공개된 소련 문서들이 전쟁의 기원과 발발에 관한 수정주의자들의 논리 구조를 모두 반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탈린이 주도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전통주의의 기존 가정을 반박하고(물론 소련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자료를 선별 공개했을 가능성도 있다), 스탈린이 아니라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주도했다는 점, 즉 한국전쟁이 내전으로 시작됐음을 뒷받침하는 사료로 해석될 수도 있다. 따라서 내전에서 ‘누가 먼저 총을 쐈는가는 중요하지 않은 물음’이라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이 완전히 뒤집히지는 않은 셈이다. 그래서 대표적인 내전론자라 할 수 있는 브루스 커밍스는 소련 문서 공개 뒤에도 자신이 “기본적 관점을 바꾸지 않았”고 “아직도 한국전쟁이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비롯된 한국 내부의 갈등에서부터 비롯됐다고 생각한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수정주의가 전통주의의 반동을 타개하고 역사의 진실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점은 스탈린주의 전통의 좌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당시 형성된 미국과 소련 양대 세계 질서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북한을 점령했던 소련 군정의 성격과 북한 체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을 설명하는 데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소련과 북한이 어쨌든 미군정과 남한보다는 진보적이라고 봤고 한국전쟁을 모종의 민족해방전쟁으로 이해했다.
이 글은 전통주의에 명백하게 반대하면서도 수정주의 학파와는 다른 역사 해석을 내놓으려는 시도다. 나는 이 글에서 한국전쟁이 미국과 소련 양대 제국주의 세력 간 경쟁의 산물이었음을 보여 줄 것이다. 이것은 우익의 주장과 달리 남한과 미국이 전쟁의 책임에서 결코 면제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 남한과 북한 체제의 성격을 볼 때, 이 전쟁은 모종의 계급 전쟁도, 혁명 전쟁도 아니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 남한 사회주의자들은 미국의 개입에 맞서 싸우면서도 북한과 소련 블록을 정치적으로 지지해서는 안 됐다고 주장할 것이다.)
분단과 두 체제
해방 당시 조선의 좌파는 제2차세계대전의 성격을 제국주의 간 전쟁이 아니라 파시즘 대 민주주의의 전쟁으로 봤다. 그래서 그들은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과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여기고 환영했다. 전후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과 소련은 얄타에서 전 세계 수준의 ‘세력권’ 재조정 협상을 벌였다. 그리고 포츠담에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했다.
3 물론 이는 스탈린의 독창적 통찰이 아니었다. 연합국측도 포츠담 협정에서 사실상 이런 식의 점령 정책에 합의했다. 연합국은 각자의 방식대로 패전국의 파시즘이나 군국주의 정치 체제와 그 경제적·사회적 기반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1945년 여름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전쟁은 과거와는 다르다. 누구든 어떤 영토를 점령하면 그곳에 자신의 사회 체제를 심는다. 누구든 자기의 군대가 미치는 곳까지 자신의 고유한 체제를 이식하고 있다.”4 소련은 독일의 공장을 뜯어갔고 옛 파시스트 지배자들을 숙청했다. 미국도 나름으로 ‘포츠담 혁명’을 추진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재벌을 해체하고 토지를 개혁하는 등 미국식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이식하려 했다.
이를 두고 아이작 도이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협정은 명목상은 여하튼, 점령 지구 내의 경제적·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대한 단독 책임을 각 점령국에 부여했다. 이 때문에 동독은 스탈린의 ‘위로부터의 혁명’이 행해진 무대가 되었다. 포츠담 협정 후 곧 이 혁명이 시작되었다.”비록 옛 지배계급의 혐오스러운 통치 때문에 잠시나마 피점령국 대중의 눈에 점령군의 ‘혁명’이 진보적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위로부터의 혁명’은 승전국이 패전국에 가하는 징벌이었을 뿐, 점령국 민중의 바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연합국 지배자들은 ‘아래로부터의 혁명’ 움직임을 철저히 억눌렀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으로 트로츠키가 기대한 노동자 혁명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컸던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노동자·민중의 급진화는 특히 패전국과 식민 지배를 받던 나라에서 두드러졌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직후 노동자들은 공장을 접수해 스스로 운영하려 했고, 지방에서는 자생적인 자치기구와 무장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러나 미국이 남한을 점령했을 때 이런 흐름은 모두 부정당했다. 미군이 한반도에 발을 딛자마자 처음으로 한 일은 조선인이 세운 건국준비위원회를 무시하고 조선총독부의 권위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옛 식민 지배 기구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하마터면 목숨이 위태로웠을 일본인 지배자들은 미군 덕택에 한동안 지배자 노릇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 후 미군은 친일·친미·반공주의자들을 지배 파트너로 삼았다. 이것은 당시 남한 민중의 정서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새 국가를 건설하는 데 친일파가 끼어드는 것을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여겼다. 또한, 80퍼센트 가까운 사람들이 새 국가의 사회 체제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형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방 당시 총독부의 조선인 경찰 수는 8천 명 정도였는데, 해방 직후 대다수가 도주해 출근율은 20퍼센트도 안 됐다. 그런데 미군정은 이들에게 복귀하라고 명령했고, 경찰력은 3개월 만에 1만 5천 명으로 급격히 늘었다. 과거 독립 운동가와 민중 운동을 탄압했던 자들이 다시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됐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스스로 통제하려는 노력은 미국이 보기에 무책임하고 황당한 짓이었다. 곧,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이 진주하자 자유를 누리게 된 노동자들은 자유의 특전은 기꺼이 받아들였으나 자유로운 활동에 따른 책임감은 수용하지 않았고, 또 이해하지도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자유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일제에 의해 조성된 일체의 기존 질서를 외면하는 식으로 표출되었으며 모든 일본인 재산을 자신들이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 노동자들의 대체적인 주장이었다.그래서 미국은 이런 ‘잘못된’ “노동자들의 의식을 바로잡고자” 사실상 파업권을 부정했고 자주관리운동을 탄압했다. 자주관리운동을 탄압한 미국은 ‘새로운 질서’를 강요했는데, 당시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봉암은 이 ‘새로운 질서’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군정 최고기관으로부터 명령서·지시서들을 손에 쥔 많은 모리배들이 달려들어서 인천에 있는 공장을 접수했고, 그 공장들을 속속들이 팔아먹고 빈 껍질만 남겨놓았다.”
공식 통념과 달리,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미군정과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노동자들의 급진화를 진정시켰는데, 이는 소련의 대미 유화 노선을 반영한 것이었다. 양대 열강 간의 전후 세력권 협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물론 미군은 조선공산당을 탄압했다.
미군정이 강행한 미곡 시장 자유화로 식량 공급 체계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지주, 부농, 악덕 상인들은 쌀을 높은 가격에 팔려고 매점·매석했다. 도시 지역에 심각한 식량 위기가 발생했다. 노동자와 시민 들은 먹을 것을 구하려고 농촌을 헤매다녔다. 당황한 미국은 일제 시대의 강제 공출을 부활시켜 농민들의 쌀을 빼앗아 식량을 조달하려 했다. 주로 빈농들이 손쉬운 제물이 됐다.
이런 상황은 1946년 9∼10월에 벌어진 파업과 봉기의 배경 중 하나였다. 경찰과 우익 폭력단체들은 이 항쟁들을 야만적으로 진압했다. 미국은 이들의 뒤를 봐줬고, 필요하면 미군을 직접 풀어 진압에 나섰다. 경찰과 우익들이 자행한 고문, 암살, 집단 학살 등 남한 사회에 야만이 일반화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소련 점령군도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을 철저히 억눌렀다. 노동자들의 급진화 흐름은 소련군이 매우 일찍 진주한 북한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5년 당시 오노다 시멘트 승호리 공장 관리자 안도 토요로쿠는 8월 15일 해방 당일 북한 노동자들이 즉시 자치위원회를 만들어 공장을 접수했다고 말한다.
[안도]가 승호리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이미 철도는 승객들에게 “일본어가 아니라 오직 한국어로 말할 것”을 요구하는 한국인 요원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안도가 공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자치위원회가 공장을 접수했다. 이 회고에서 안도는 한국인들이 결국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고 예측하고는 일찌감치 자치위원회 조직에 착수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자치위원회 대표는 안도에게 사무실에 있는 현금과 금을 넘겨달라고 요구했고, “공장의 모든 것은 지금부터 한국인이 관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8 자위대 등의 무장 조직은 모두 해산됐고, 무력은 소련군과 북한 보안대로 집중됐다. 인민위원회는 자치 권력의 성격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미국이 남한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련도 이런 흐름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진남포제련소, 조선일산화학 등 여러 작업장에서 일어난 노동자 자주관리 움직임은 소련군이 들어와서 중단됐고, 중요한 공장들은 모두 소련군이 직접 통제했다. 소련의 지휘 하에 북한은 반제·반봉건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표방하며 토지개혁과 산업 국유화 조처를 실행했다. 이 과정에서 농민과 노동자의 실질적 참여는 거의 없었다. 1946년 8월 북한은 소련이 통제하던 공장을 넘겨받아 이를 국유화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48년 3월 로동당 제2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은 국유화 조처를 “인민 경제 발전을 계획적 기초에서 수립할 만한 기본 조건을 지어주었”으며 “동방 제국에서 프로레타리아를 얽매어 놓은 자본주의 철쇄의 고리를 우리 북조선에서 처음으로 마사[짓찧어서 부서뜨려] 놓은 영예스러운 위대한 사변”이라고 평가했다.‘자본주의를 분쇄’했다는 국유화 조처가 북한에서 커다란 사회적 갈등과 긴장을 낳은 것은 아니다. 당시 주요 기간산업이 대부분 일본인 소유였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두고 간 재산인 이 사업체들을 어떤 식으로든 ‘사회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국가가 경제 전반을 ‘계획’하는 체제는 당시 한국 민중에게 생경한 경험도 아니었다. 일제 시대 내내 조선총독부는 경제 전반을 통제하는 사령탑이었고, 1930년대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전시 동원 경제 체제여서 국가가 경제 활동 일체를 거의 전부 관장했다. 특히 태평양전쟁 시기에 이런 경향은 더욱 극단화했다. 기업들은 국가의 할당량에 따라 군수물자를 생산했고, 전쟁 수행에 직접 필요치 않은 ‘낭비적’ 부문의 기업들은 강제로 폐쇄됐다. 농민들은 쌀을 자유 시장에 판매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공출당했고, 노동자들은 식량의 많은 부분을 배급에 의존해 생활했다. 이런 ‘국가자본주의’ 경향은 일본에만 고유한 것도 아니었다. 1930년대 대불황부터 1950년대까지 미국과 유럽의 주요 나라들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경향이 일반화했다. 북한 노동자들은 서방의 여느 공기업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관리자의 지시에 따라 노동해야 했고, 노동과정과 생산과정을 통제하지 못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진행된 북한 토지개혁의 결과는 전통적인 반反봉건 도식과 꽤 차이가 있었다. 토니 클리프는 중국의 토지개혁을 러시아 혁명 때의 농민 반란과 비교하면서, 그 특징을 일부 요약했다. 중국에서는 첫째, 몰수 대상 지주가 굉장히 많았고, 둘째, 대부분의 지주가 영세해 일반 농민과의 경계가 모호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토지개혁에 반대하는 지주들의 저항이 러시아 혁명 때와 달리 격렬했고 ‘대중적’이었는데, 지주들의 이런 광범한 반발은 스탈린이 쿨락을 숙청할 때와 비슷했다.
12 전체 몰수 토지 중 옛 일본인 소유 토지와 조선인 대지주 토지의 비중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압도적인 비중이 영세 지주의 토지였는데, 이들은 사실상 중상층 자영농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북한 지주들은 목숨 건 저항보다는 월남을 택할 수 있어서, 북한 체제가 받는 압력은 상대적으로 덜했다. 이 월남자들은 이후 남한에서 우익 단체의 대중적 기반이 됐다. 어쨌든 토지개혁은 소작농의 수동적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전반적 결과는 전체 농민의 하향 평준화였다. 그리고 지주와 부농 숙청은 국유화 조처와 함께, 급속한 국가 주도 자본축적을 가능케 한 요인이 됐다.
이런 특징은 북한에서도 나타난다. 42만여 호가 적어도 일부라도 몰수 대상이 됐는데, 이는 북한 총 호수인 1백53만여 호의 약 28퍼센트에 달했다.비록 북한에서 소련군 지령에 따른 ‘위로부터의 혁명’이 식민지 잔재와 전근대적 요소를 일소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 과정이 아래로부터 혁명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는 반동적이었던 셈이다.
결국 남과 북 모두에서 점령군과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정책은 트로츠키가 말한 연속혁명의 싹을 자르는 것이었다. [‘연속혁명’은 식민지 등 상대적 후진국에서도 집중된 도시 산업 노동계급만 존재하면 그들이 광범한 농민층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잡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와 봉건제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이론 — M21]
냉전 체제의 시작과 두 개의 분단 정부
1945년 말 모스크바 협상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은 양대 열강이 어떻게 약소국 민족의 자결권을 능멸하는지를 보여 준 것이었다. 당연히 광범한 항의 물결이 일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애초의 반탁 입장을 뒤집으며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했다. 이 틈을 타 우익은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우익은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반소련·반공 정치 공세에 이용했다.
신탁통치는 명목상 통일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양쪽 열강 모두 이 문제에 진지하지 않았다. 어느 쪽도 자신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사실, 양쪽 모두 일찌감치 제각기 남과 북에 자신에 우호적인 정권을 만들기 시작한 상태였다.
13 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곧이어 마셜플랜을 발표했다. 미국은 소련이 서유럽의 전후 폐허 상태를 이용해 영향력을 확대할까 봐 두려웠다. 마셜플랜은 유럽을 미국식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로 통합하는 것과 소련의 동유럽 지배력을 잠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소련도 자기 진영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동유럽과 북한에서 ‘민족자본가’와의 형식적인 연립은 붕괴했다. 소련은 위성국들을 경제적으로 통합해 하나의 블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1946년 들어 미국과 소련 사이에 갈등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1947년 3월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소련 봉쇄 정책을 선언하며 “세계 각국은 이제 양자택일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고 공언했다.제2차세계대전의 승리자로 등장한 양대 열강이 세계 도처에서 지정학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 경쟁의 본질은 패전국의 옛 식민지를 누가 차지하고 서방 제국들의 쇠퇴로 생긴 권력 공백을 누가 메울 것인가였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양대 열강의 원만한 협상으로 통일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 자체가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다. 신탁통치안을 협의하고자 두 차례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는 아무 진척 없이 결렬됐고, 사실상 분단만 확정해 준 꼴이 됐다.
결국 1948년 한반도에는 공식적으로 두 정권이 수립됐고 북한과 남한에는 제각기 자신의 창조주와 비슷한 체제가 형성됐다. 미국이 남한에 세운 피조물은 ‘자유’나 ‘민주주의’와 전혀 상관 없는 끔찍한 경찰 국가였다. 김일성이 항일 무장 투쟁을 한 반제국주의 세력의 일부였음은 틀림없지만 그는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인 소련에 의존적이었고, 북한 체제는 남한 체제처럼 억압적이었다.
남과 북 두 체제의 권력 형태는 달랐지만, 두 체제는 모두 노동자를 착취해 경쟁적으로 자본 축적을 추구하는 체제였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14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 분단 정부 수립 반대 여론이 매우 높았음을 보여 준다. 남로당뿐 아니라 중도좌파, 중도우파, 김구 같은 우파까지도 선거를 거부했으니, 이인호의 주장이 반영하듯이, 대한민국 수립에 반대한 세력이 그만큼 광범했던 셈이다.
남한에서는 분단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저항이 거셌다. 친뉴라이트 우익 학자인 이인호는 분단 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 참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김구를 ‘대한민국 체제 반대 세력’으로 몰아붙였는데,분단 고착화에 반대하는 투쟁은 5·10선거에 반대하는 제주 4·3항쟁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승만 정권은 군대가 제주 항쟁 진압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커다란 위기를 맞았으나 미군이 진압을 지원하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진압을 피해 산으로 들어간 좌파와 지역 민중은 게릴라 투쟁에 돌입했다. 이승만은 게릴라 소탕을 명분으로 대량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제주도에서만 주민 수만 명이 잔인하게 살해됐다.
15 그러나 ‘9월 공세’는 남한 대중운동과 유기적 관계를 맺은 것도, 남한 좌파의 낮은 자신감 수준을 고려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무모한 공세로 게릴라들은 고립됐고, 대중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공세가 패배한 뒤 많은 사람들이 투항했고, 20만 명에 이르는 좌파와 그 동조자들이 보도연맹이라는 굴레를 쓰게 됐다.
1949년 들어 게릴라 투쟁과 남한 좌파의 활동은 현저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북한 정권 수립 1주년인 1949년 9월 9일에 맞춰 시작한 남한 게릴라들의 ‘9월 공세’는 사실상 자멸적 투쟁이었다. 남로당은 9월에 인민군이 남하할 테니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각 도마다 한두 개씩 ‘해방구’를 확보하라는 지령을 각 도당 유격대에 내렸다. 존 메릴이 보기에 이 공세의 목적은 “‘인민의 저항은 이제 전면적인 단계에 들어섰다’는 북한 측의 주장을 지지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애써 시도된 것”이었고, 북한 처지에서 보면 “남한에 대한 공격이 성공할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무르익었다는 사실을 소련 청취자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서였다.”한편, 1949년 중반 들어 남로당과 그 유관 단체는 재편됐다. 5월에 남쪽의 ‘통일전선체’인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 북민전과 통합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됐고, 6월에는 남로당과 북로당이 합당해 조선로동당이 됐다. 이는 사실상 남한의 좌파 운동이 북한 정권에 완전히 종속된다는 뜻이었다.
17 비록 북한이 계속 게릴라 부대를 남파했지만, 이들은 더더욱 대중적 기반이 없어 남한군이 비교적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만약 김일성이 진정으로 남한 민중을 해방시키고자 전쟁을 일으켰다면, 1950년 6월은 너무 늦었다.
1949년 겨울 들어 남한 지역의 자생적인 게릴라들은 존재감이 거의 없을 정도로 쇠퇴했다. 그래서 1950년 1월 남한군은 게릴라 소탕 작전을 “동계 훈련”의 일환쯤으로 취급했다.전쟁을 향해 공개된 옛 소련측 자료를 보면 김일성은 ‘국토 완정完整[국토 통일 — M21]’을 위해 소련에 전쟁 승인과 지원을 여러 차례 요구했다. 이승만의 무력 통일 의지도 결코 김일성에 뒤지지 않았다. 남한군은 미군 대신 38선 경비를 맡게 되자마자 틈만 나면 무력 도발을 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이승만이 정말로 북침을 감행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브루스 커밍스가 적절히 묘사했듯이 “이승만은 종종 주인이 줄을 잡고 있는데도 목걸이에 걸려 거의 질식할 정도로 뛰어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사냥개처럼 보였다.” 소련과 김일성이 보기에도 이승만의 북진 의지는 단순한 공갈 협박이 아니었다. 공개된 옛 소련측 문서를 보면 1949년 여름 스탈린은 남한이 정말로 북침할까 봐 바짝 긴장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1949년 여름 시점에는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보다 우월하지도 않았다. 정병준의 연구 결과를 보면, “1949년 8∼9월까지 남한은 정규군 수준에서 최대 1만 명 이상 북한을 앞서 갔다. 한국군의 급속한 병력 증강은 한국군에게는 자신감을, 북한군에게는 두려움을 자아냈을 가능성이 높다.”
20 김일성이 “양쯔강은 38도선, 난징은 서울이라고 유추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21
김일성이 전쟁에 조바심을 낸 데는 중국의 사태 변화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49년 4월 23일 중국 인민해방군은 스탈린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양쯔강을 넘어 국민당 본거지인 난징을 함락했다. 와다 하루키는 “북조선 지도부[가] 여기서 강한 인상을 받아, 행동 준비를 결단”했다고 본다.실제로 중국군의 양쯔강 도하 직후인 4월 28일 북한은 두 가지 행동을 동시에 추진했다. 먼저, 김일성과 박헌영은 소련 대사 슈티코프를 만나 군부대 재편에 필요한 무기 지원을 요구했고, 필요한 무기 목록을 스탈린에게 제출했다. 그와 동시에, 민족보위성 부상 김일을 중국에 보내 마오쩌둥에게 중국군 소속 조선인 부대를 북한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따라 중국군 소속 조선인 부대가 북한군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의 요구에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각각 무기와 병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아직 남침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스탈린은 중국 혁명이 최종 승리한 직후인 1950년 1월에 남침 승인을 결심한 듯하다. 이즈음 스탈린은 동아시아 정책을 더 공세적으로 전환했다. 예를 들어, 1945년 이래 승인하지 않고 있던 베트남의 호치민 정권을 공식 승인했고, 일본 공산당의 ‘평화혁명 노선’을 공개 비판하면서 미국에 맞서 과감하게 투쟁하라고 촉구했다. 남침 승인은 이런 일련의 흐름 가운데 하나인 듯하다. 결국 스탈린은 3월에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남침을 최종 승인했다. 이어서 5월에는 마오쩌둥도 이를 승인했고, 외국군이 개입하면 중국군을 파견하기로 약속했다.
옛 소련측 문서들에는 소련·중국·북한이 전쟁에 합의하는 과정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스탈린이 전쟁을 승인한 의도와 목적은 여전히 추정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스탈린이 남침을 승인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격화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1949년 8월 소련은 핵폭탄 개발에 성공했고, 이 무렵 미국의 소련 봉쇄 정책은 공세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냉전은 특히 아시아에서 더 뜨거워졌다. 마오쩌둥이 중국을 석권하자, 미국은 얄타와 포츠담 합의를 무시하고 일본 점령에서 소련을 사실상 배제하려 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중심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일본과 단독 강화를 추진하고, 옛 군국주의자들을 복권시키고, 일본을 재무장시키려는 이른바 ‘역코스’를 단행했다. 장제스 몰락 직후, 맥아더는 미국과 일본이 단독 강화를 맺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주도권을 수립하고 아시아 문제의 동향에 대한 잃어버린 미국의 이니셔티브를 되찾는 하나의 방법이며, 아마도 현 시점에서 가장 극적이고 다이나믹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대일 강화조약을 체결하면 우리는 반드시 현재의 경향을 막을 수 있고 종국적으로는 그것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23 마오쩌둥이 최종 승리하자 미국은 소련과 중국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이른바 ‘쐐기 전략’을 구사했는데, 이 때문에 오히려 스탈린의 대미 경계심이 강해졌다. 이 또한 스탈린이 중소동맹을 체결한 이유 중 하나였다.
1950년 2월 모스크바에서 체결된 중소동맹 조약은 이에 맞선 대응이기도 했는데, 이 조약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미일 단독 강화를 저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1월 말 트루먼은 국가안보회의NSC에 새로운 세계 전략을 수립하라고 명령했고, 그 결과는 4월에 ‘봉쇄’와 ‘롤백’을 결합한 이른바 NSC-68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미국의 국방비는 세 곱절로 늘어났다. 또, 2월에는 소련과의 핵무기 경쟁을 위해 수소폭탄 개발을 시작했다.
24 이미 이승만은 장제스와 함께 소련을 봉쇄할 태평양군사동맹을 줄기차게 주창해 온 터였고, 이는 맥아더의 긍정적 반응을 얻은 바 있었다. 맥아더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더 공세적 태세를 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소동맹이 발표된 지 사흘 뒤 이승만은 일본으로 날아가 맥아더를 만났다. 이승만은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일본이 한국의 반공 동맹이라고 선언했다. “성장하는 공산주의 팽창으로부터 일어나는 공통의 위험은 한국과 일본을 단결시켜야 하며 과거의 적대 관계는 망각되고 현재의 제 곤란이 해결돼야 한다.”이렇듯 1950년 초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소련 사이의 긴장은 급격하게 고조되고 있었다.
스탈린은 이즈음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미국보다 소련에 유리하게 바뀌었다고 생각한 듯하다. 스탈린은 전쟁 불가에서 전쟁 승인으로 태도를 바꾼 이유를 김일성에게 설명하면서, 가장 먼저 중국 혁명의 승리, 다음으로 소련이 핵폭탄 개발에 성공해 미국이 쉽게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들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거나, 설사 개입하려 해도 그 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스탈린의 입장 변화에 주요하게 작용한 듯하다. 스탈린은 그리스 내전에는 절대 무력 개입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미국이 결코 그리스를 포기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경우와는 달리, 동아시아에서 장제스가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릴 때 미국은 개입하지 않았다. 게다가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남한을 자신들의 직접 방위선에서 제외한 선언을 막 발표했다. 비록 애치슨 선언은 미국 나름의 ‘전략적 유연성’을 표명한 것이었지만, 스탈린은 이를 미국 봉쇄선의 한계로 여긴 듯하다.
그리고 1949년 6월 미군은 남한에서 철수한 상황이었다. 그리스와 달리 한반도 상황은 유동적인 듯했다. 혹시 미국이 개입하더라도 소련은 직접 군대를 파견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중국군이라는 보험이 생겼기 때문이다. 남한 침공은 성공 확률이 높아 보였고, 소련의 위험 부담은 크지 않은 듯했다. 김일성이 성공한다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신은 크게 떨어질 것이고, 미국은 수세에 몰릴 것이다. 이렇게 판단한 스탈린은 김일성을 활용해 미국의 능력을 시험해 보려 했다.
25 심지어 미국 내에서는 남한의 군사적 가치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미국은 이승만을 ‘리틀 장제스’쯤으로 여겼다. 미국은 장제스에게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었지만, 밑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장제스처럼 이승만 정권도 무능과 부패 때문에 항상 취약해 보였고, 행여 장제스처럼 무너지지 않을까 미국은 노심초사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이승만이 상황을 안정시키지 못하면 원조를 철회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그러나 미국은 남한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남한은 미국이 직접 세운 나라였고, “이데올로기 전쟁터”였다. 게다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서 한국은 일본을 방어하는 전초기지였다. 애치슨은 “원조를 중지하라는 의견이나 이 나라의 건설을 중도에 그만두자는 의견은 완전한 패배주의이며 아시아에서 우리들의 이해로 볼 때 말이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26 또, 미국 CIA 보고서는 미국이 전쟁에 개입해야 할 국제정치적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북한의 공격은 특별히 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신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고 전 세계적인 반공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며 “추가적으로 소련은 자국 또는 공산권의 팽창에 대한 미국의 반응을 시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27 결국 미국은 유엔의 깃발 아래 군대를 대규모로 파병했는데, 이는 남한 국민을 동정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통제하는 일본이 위협받고 동아시아와 나아가 세계 전체에서 미국의 패권과 위신이 추락할까 봐 걱정해서였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을 때 미국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트루먼은 “한국에서 공산측이 승리한다면 일본을 쉽사리 공격할 수 있는 거리에다 적군[소련 군대 — M21]과 비행기를 투입하게 되고, 오키나와와 대만은 양쪽에서 공격당하게끔 개방되리라”고 생각했다.북한의 남한 점령, 해방?
28 이에 이승만은 서울 시민들에게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고 속이고는 야반도주해 버렸다. 북한군의 서울 점령이 임박하자 남한군은 피난민으로 가득 찬 한강철교를 폭파해 버렸다. 이 혼란의 와중에도 남한 정부는 정치범들과 보도연맹원들을 대량 학살하는 짓은 잊지 않았다. 학자에 따라 많게는 30만 명에서 적게는 10만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산한다. 29
개전 직후 북한군의 신속한 진공과 남한군의 패주는 두드러졌다. 6월 27일 미군 군사고문단은 “남한군은 저항 능력이나 싸우려는 의지가 없으며, 따라서 총체적인 붕괴가 임박했다”고 보고했다.30 특히, 학생들은 좌파가 아니더라도 “오만불손한 독재를 자행해 온 이승만 … 이놈이 한번 혼이 나면 얼마나 통쾌할까?” 하는 심정이었던 듯하다. 31
북한군 진주에 남한 주민의 저항이 거의 없었다는 점은 이승만 정권이 얼마나 인기 없었는지를 보여 준다. 오히려 북한군을 내심 환영하는 분위기도 만만치 않았다. 미군 정보 보고서를 보면, 상당수 노동자와 학생들이 북한을 지지했다. 남한을 지지하는 어느 지식인은 서울 학생의 60퍼센트 정도가 북한을 적극 지지한다고 봤다.32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북한 정규군이 피난민으로 위장해 후방 침투를 노렸으므로 미군이 이들을 게릴라로 착각할 수 있었다. 와다 하루키도 “남로당원을 중심으로 한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고 말한다. 33 남한 민중의 수동성을 무엇보다 분명히 확인해 주는 것은 김일성 자신의 발언이다. 그는 “우리가 낙동강 계선까지 나아갔으나 남조선에서는 폭동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며, “만일 부산에서 노동자들이 몇 천 명 일어나서 시위만 하였더라도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34
그러나 북한군의 점령에 대한 주된 반응은 수동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 브루스 커밍스는 전쟁 발발과 함께 남한 지역에서 자생적 게릴라들의 활동이 커다란 구실을 한 것처럼 보지만, 또, 김일성에게 게릴라 전투는 인민의 대중적 항쟁의 일환이 아니라, 정규군에게 부족한 공군력을 대신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이조차 제대로 수행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김일성은 1950년 12월 제3회 조선노동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게릴라 전투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적의 후방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는 것은, 우리 공군이 약하여 기동성이 약한 조건하에서 적의 기동성을 파괴하고 적을 분산격멸하며 적의 참모부와 후방을 습격하고 적의 후방에서 제2전선을 조직함으로써 적의 진로를 차단하여 적에게 공포를 주어 당황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전략상·작전상의 의의가 얼마만큼 중대한 것인가를 망각하여 이를 잘 실천하지 못했다.” 물론 1950년 10월 들어 게릴라들이 수만 명의 ‘대중적’ 성격을 띤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북한 정규군의 군사적 패배의 산물이었고, 본질적으로 정규군과 당관료, 지방의 공산당 동조자들이 뒤섞인 피난 대열이었다. 남부군 출신인 이태의 증언을 들어 보면 이들은 “원래가 피난 대열이나 다름없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곧 투항·도망 등 이탈자가 속출”했다.37 이것이 1949년에 이르면 자작농 37.4퍼센트, 자소작농 41퍼센트, 순소작농 21퍼센트의 비율로 바뀐다. 순소작농이 크게 줄고, 자작농과 반쯤은 자작농인 자소작농이 크게 늘었다.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 개정안이 통과됐으므로 이 추세는 더 빨라졌을 것이다.
북한이 남한을 해방시켜야 한다며 내세운 명분 중 하나는 토지 문제였다. 북한은 남한을 점령하는 동안 북한식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그런데 당시 남한에서 지주-소작제는 이미 해체되는 추세였다. 결정적으로 중국 혁명의 영향 때문이었다. 1945년 남한의 농가 구성은 자작농 13.8퍼센트, 자소작농 34.6퍼센트, 순소작농 48.9퍼센트, 기타 화전 및 고농(머슴)이 2.7퍼센트였다.38 이는 과장이었던 셈이다.) 북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지주의 비중이 별로 크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영세 지주가 몰수 대상이 됐다. 당시 노동당 충남도당 선전부책이던 김남식은 “사실 이때 남한에 [몰수] 대상 지주라는 것은 이미 존재치 않았어요. 그래서 분배 토지의 면적 조정과 농민의 원지주에 대한 상환 채무를 폐기시켰지요” 하고 증언했다. 39
북한측 공식 통계로도 이런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북한이 남한에서 몰수한 토지는 59만 6천여 정보로 점령 지역 총 경지면적의 43퍼센트였다. 즉, 소작지가 크게 줄었음을 알 수 있다.(북한은 전쟁 직전에 남한 총 경지면적 중 소작지가 64퍼센트나 된다고 주장했는데,전쟁으로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농지개혁법안 통과의 정치적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비록 남한 농지개혁이 행정력과 지주의 반발 때문에 지역적으로 불균등하거나 지연되기도 했지만, 전쟁 직전 상당수 농민들에게 분배예정통지서가 발급됐다. 적어도 남한 소작농의 상당수는 분배받을 토지가 곧 자기 땅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경작을 했다는 뜻이다.
또한, 북한에서처럼 현물세와 애국미 수취 등은 남한 농민들을 실망시키는 요소였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북한식 토지개혁에 대한 남한 농민의 반응은 그리 뜨겁지 않았던 듯하다. 물론 남한의 농지개혁에서 고농(머슴)은 수혜가 없어서 북한식 토지개혁을 반겼을 것이다. 실제, 북한은 점령 정책 실행에 이들을 적극 활용했다. 그러나 고농은 농촌 공동체에서 매우 주변적인 존재였으므로 농민들은 이들이 마을의 여론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북한식 토지개혁의 진보적 성격은 많이 희석됐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북한의 토지개혁이 남한 농지개혁의 원동력 중 하나이긴 했지만, 실제 결과 면에서 농민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남한 농지개혁과 대동소이했다.
북한은 점령 기간에 8시간 노동제 등을 골자로 한 ‘해방된 노동법령’도 선포했다. 그러나 이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전시에 8시간 노동이 준수될 리도 없었거니와 노동과정도 남한과 별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은 국가기구나 다름없는 직업동맹으로 대체됐고, 파업과 태업이 금지됐다. 북한 점령 전 이남과 달라진 점은, 노동자 국가가 됐으니 불만을 품지 말고 일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데올로기가 바뀐 것뿐이었다. 어느 ‘해방된 공장’ 지배인의 보고를 보자.
우리 공장 로동자들은 긴 세월을 억압과 착취에 시달려 왔으므로 전에는 고의적으로 태공하여 사고를 일으키며 관리측과 투쟁을 조직[했는데] … 공장이 우리 인민의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를 억압·착취하는 것이었던 조건하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공장이 해방된 그날부터 환경과 조건은 판이하여졌다. … 인민군을 원호함에 이바지하는 것을 자기의 영예로운 임무로 삼게 되었다. … 그러나 원쑤놈들의 압제하에서 일하던 버릇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일부 일꾼들[은] … 이전과 다름없이 로동시간만을 지내면 된다는 생각으로 로동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이 있었으며 자기의 책임량을 완수할 데 대하여 무책임하고 등한시하여 여러 가지 구실을 붙여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 때문에 우리 공장내 로동당 세포의 협조 밑에 직맹단체에서는 … 대중적 비판 사업을 전개하였다. … 이리하여 우리 공장 로동자들은 자각적으로 생산규률과 로동규률을 준수하게 되었다.의용군 모집은 처음에는 자발적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그런 시기는 매우 짧았다. 미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하자마자 북한은 전시동원령을 점령 지역으로 확대했고, 이에 따라 의용군 모집이 아니라 사실상 강제 동원처럼 됐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을 때, 중도파 역사학자인 김성칠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당국은 그 조직적인 모든 기관을 동원하여 애국적인 청년 남녀는 모두 의용군의 대열에 나서라고 외치고 있다. … 그래도 부족함인지 가두에서 젊은 사람들을 붙들어 보낸다 하여 큰 공황을 일으키고 있다. 이즈음 며칠은 그 때문에 그런지 거리에 젊은 사람의 내왕이 부쩍 줄어들었다.”
북한은 미군이 파괴한 인민위원회를 부활시킨다며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 당시 인민위원회는 해방 직전과 달리, 철저히 위로부터 북한 체제를 본뜬 복제품에 불과했다. 선거는 공산당이 추천한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요식 행위였다. 사람들은 후보자가 누군지 선거 장소에 가서야 알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고, 투표는 비밀이 보장되지 않았다. 남한 출신자가 많이 기용됐지만, 실권은 북에서 온 요원들에게 있었다.
지역 인민위원회와 각종 국가기구에는 노동자와 농민 출신자가 많았지만, 이 사실이 모종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뜻하지는 않는다. 국가 자체가 민주적으로 선출되고 노동계급에 책임지는(특히 소환 가능 문제) 기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한 군경 병력이 대부분 빈농 출신이었다고 해서 이 기구를 빈농 권력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남한군과 미군의 북진, 민주주의와 인권?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지만, 전반적 전세는 점점 불리해졌다. 미군이 개입하면서 북한군의 피해가 급증했고, 낙동강에서는 좀처럼 교착 상태를 타개하지 못했다. 그 무렵 미군과 남한군 병력은 이미 북한군을 능가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으로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했고, 곧 서울을 탈환했다.
서울 탈환에 대하여 영국 기자 레지널드 톰슨은 이렇게 보도했다. 당시 상황은 무시무시한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급강하 폭격기가 사방에서 쏟아질 때면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았고 탱크가 포격을 퍼부을 때마다 잿빛 먼지가 흩날렸다. 목조 건물들이 화염에 휩싸였다가 우지직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고 고압 전신주가 쓰러지면서 전선이 엉망으로 뒤얽혔다. 그야말로 사방이 혼란 그 자체였다. … 그런 끔찍한 상황을 해방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43 그래서 연합국 병사들조차 “도대체 우리가 한국을 위해 싸워야 하는 이유가 뭐야?” 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44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던 이승만은 사죄는커녕 돌아오자마자 부역자를 색출하겠다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역자로 몰려 처형됐다. 전국 곳곳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 남한군과 경찰이 지나가는 곳은 거의 예외 없이 피바람이 몰아쳤다. 이런 일들이 하도 광범해서 한 미군 장교조차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이승만은 파시스트다. 미국적 사고방식으로 한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45 여기에 유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으로 원지주에게 갚아야 할 몫까지 합하면, 소작농들은 수확량의 45퍼센트 이상을 정부에 내줘야 했다. 대다수 영세 농민에게 이는 그야말로 생존 한계선이었다. 게다가 미국의 원조 곡물 유입은 농가 경영 상태를 악화시키는 데 크게 일조했다. 결국 춘궁기가 되면 식량이 떨어져 굶어죽는 일이 빈발했다. 1953년 이승만 정부는 전 농가의 절반이 양식이 떨어진 것으로 추산했다.
남한 체제가 복구됐다고 해서 대중의 삶이 북한 점령기보다 나아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오히려 이승만이 유엔군 주둔 경비를 조달하려고 통화를 남발하자 악성 인플레가 발생했고, 이는 노동자와 실업자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또, 이승만은 임시토지수득세를 신설해 농민들을 쥐어짰다. 이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현물세였다. 보수적인 경제학자 이대근조차 이는 “당시 엄청난 전시 인플레 부담을 고스란히 농민에게 떠넘기는 결과로 되어, 오로지 농민 희생 위에서 막대한 전비 조달을 획책했다고 하는 부당하기 짝이 없는 처사”였다고 평가했다.이승만은 농민들에게 전쟁 비용만 요구한 게 아니었다. 그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목숨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반대로, 부유층 자제들은 병역을 면제받거나 입대하더라도 안전한 곳으로 배치됐다. 이런 일은 아주 흔했는데, 당시 통역장교였던 리영희는 이런 모순을 보며 자신이 각성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도피하는 자들의 뒷자리로 매일같이 보충되어 올라오는 신병들의 행렬을 보았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 흠뻑 젖은 채, 판초를 둘러쓴 어깨 위에 M1소총을 메고 진창이 된 산길을 884고지를 향해 비틀거리며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죽으러 가는 것이다. 며칠 만에 서울로 사라져 버린 김 소위 같은 흰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투박하고 땡볕에 그을린 얼굴이었다. 노동자인지 농민인지 하여간 힘없는 사람의 아들들임이 분명했다.
나는 마음의 격동을 참다 못해 호에서 걸어 나갔다. 미끄러운 좁은 산길 옆에 비켜 서서 한 보충병의 대열을 세우고 소리쳤다. … “중학교 이상 다니던 사람은 손 들어봐!” 1백여 명 가운데 손 셋이 올라왔다. … 학교깨나 다닌 젊은이들은 다 어디 가고, 이 틀림없는 죽음의 계곡에는 못 배우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 나라의 불쌍한 자식들만 보내지는가?
남한군과 미군이 반격에 나서 38선을 돌파해 북진했을 때 북한 주민의 일부가 남한군과 미군을 환영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대다수 북한 주민들의 정서는 그렇지 않았다. 남한군이 나남과 청진으로 진격했을 때 보통의 주민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거의 모두 북쪽으로 피난을 가버렸다. 북한 민중에게 남한군과 미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남한 군경과 반공 폭력 단체들이 북한 지역에서 강간·약탈·집단학살 등 온갖 잔인한 범죄를 저질렀음을 입증하는 기록이 수없이 많다. 미군은 한국군의 야만적 학살 행위를 사실상 방조했고 그 자신이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노근리에서는 민간인 1백70여 명이 살해됐다. 포항에서는 미군 구축함이 여성과 어린이가 대다수인 피난민 대열에 인민군이 섞여 있을지 모른다며 함포 사격을 가해 1백여 명이 사망했다. 미군은 남과 북 모두에 무차별 공중폭격을 가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때도 그랬듯이 미국은 미군이 군사시설에 한정해 정밀폭격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미 극동공군 작전분석실 실험 결과에서도 드러나듯이, B29 중폭격기가 “가로 10미터 세로 2백 미터 크기의 대형 건물을 폭탄 하나로 적중시킬 수 있는 확률은 0퍼센트에 가까우며, 최소한 1백∼2백 발의 폭탄으로 대량 폭격을 가해야만 50∼80퍼센트의 적중률을 기록”할 수 있었다. 중국군 개입으로 전세가 다시 역전되자 맥아더는 아예 민간인 거주 지역 시설물까지 군사시설로 간주하겠다며 초토화 작전을 명령했다. 소이탄과 네이팜탄이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비 오듯 쏟아졌다. 예를 들어, 11월 8일 단 하루 동안 신의주에는 소이탄이 총 8만 5천 발 투하됐다. 건물 1채당 평균 6.07발, 사람 1명당 평균 0.67발이 투하된 셈이다. 국제민주여성연맹은 시민 5천여 명이 사망했고, 그 중 무려 4천여 명이 여성과 어린이였다고 보고했다. 남성들은 전선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 종군기자 바렛은 북한의 어느 농촌 마을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중국군이 마을을 점령하기 3∼4일 전에 마을에 대한 네이팜 공격이 진행됐다. 마을 어느 곳에서도 시체가 매장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를 행할 사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연히 한 명의 늙은 여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곳에서 생존한 유일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 4명의 시신으로 가득 찬 검게 그을린 마당 안에서 몇 벌의 옷을 부여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주민들은 마을 전체와 들판에서 발견되고 사살되었다. 그들은 네이팜 공격을 당했을 때 그들이 취했던 자세를 그대로 정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한 남성은 막 자전거를 타려는 참이었고, 50명의 소년과 소녀들은 고아원에서 뛰놀고 있었으며, 한 가정주부는 이상하게 아무 상처도 없었다. … 약 2백 구의 시체들이 그 작은 마을에 놓여 있었다.
아마 한국전쟁 전 기간에 걸쳐 가장 경악스러운 일은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협박한 일일 것이다. 한반도 민중, 특히 북한 주민은 핵무기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다. 중국이 다 된 밥에 재 뿌렸다고 생각했는지 맥아더는 거의 이성을 잃은 듯했다. 그는 핵무기 사용을 승인해 달라고 트루먼에게 여러 차례 요구했다. 맥아더는 만주와 압록강 국경, 한반도 중북부를 방사능으로 뒤덮는 한이 있더라도 중국과 일전을 벌이겠다고 주장했다. 트루먼도 핵무기 사용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핵무기에 대한 금기를 깨버리겠다고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은 폭격기를 동원해 가상 투하 훈련까지 실시했다. 이 계획은 소련과의 제3차세계대전으로 번질까 봐 다행히 실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의 땅에서 벌인 강대국 간의 힘겨루기가 어디까지 막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다.
중국의 참전
1950년 10월 2일 중국 총리 겸 외교부장 저우언라이는 “만일 미군이 북한을 점령한다면 중국은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실상 최후통첩이었다. 미국은 중국의 개입을 우려하면서도 승리에 눈이 멀어 북진을 감행했다. 미국은 북한군이 먼저 넘을 때는 38선이 넘어서는 안 될 신성한 선인 양 주장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38선을 넘을 때는 이를 깡그리 무시했다. 미국은 이 기회에 소련 영역을 빼앗고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을 확립하려 했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본격적으로 열강들의 전쟁터가 돼 버렸다. 이에 따라 남북한 민중이 겪어야 할 고통과 재앙의 크기는 비할 데 없이 커지고 말았다.
마오쩌둥이 개입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요청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주된 동기는 미국의 북진이 당연히 중국에 위협이 될 거라고 봤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의 표현처럼 “한반도는 중국의 머리를 때리는 망치”가 될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사설은 중국이 참전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국은 조선과 타이완 그리고 월남 등 3개 방면으로부터 중국에 대한 진공을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 이 3개의 방면 중에서 조선은 당연히 제일 중요한 지점이다. 미국이 조선에 대한 침략을 완성한 이후에는 그 날카로운 칼날을 중국의 심장부에 꽂아 넣을 것이다. 중국 인민과 세계 인민들은 미국의 동방 침략 계획이 일본 제국주의가 이미 실행했던 ‘북진주의’와 ‘대륙 정책’의 재판再版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전쟁 개전 이틀 후 트루먼이 발표한 성명으로 마오쩌둥의 의심은 더욱 굳어졌다. 트루먼은 한반도 무력 개입뿐 아니라, 7함대를 보내 대만해협을 봉쇄하고, 베트남에서 호치민과 전투중이던 프랑스를 군사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51 실제로, 6월 29일 대만 정부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지상군 3만 3천 명을 파병하겠다고 결정했다. 비록 미국 정부는 중국의 개입을 불러들일까 봐 이를 수용하지 않았지만, 맥아더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장제스 군대를 한반도에 투입하기를 원했다. 중국은 맥아더의 ‘무조건 북진’ 정책에 경계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미국의 북진은 장제스의 망상을 부추길 수도 있었다. 당시 서울 주재 대만 대사 샤오위린邵毓麟은 한국전쟁 개전일 밤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한국전쟁은 대만으로서는 많은 이익이 있을 뿐, 어떠한 해도 없다. … 만약 한국전쟁이 미소의 세계대전으로 전개되면, 남북한은 필연적으로 통일될 뿐 아니라, 우리들도 압록강, 동북 지방을 거쳐 다시금 중국 대륙에 귀환하는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중국의 참전이 미국의 위협 때문이긴 했지만, 중국도 한국전쟁을 계기로 지정학적 경쟁에서 나름으로 이득을 추구했다. 중국은 유엔 가입 문제에서 프랑스의 협력을 얻으려고 베트남 호치민 정권에 미온적 태도를 취하던 것을 철회하고 군사 지원을 본격화했고,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에는 병력 4만 명을 동원해 티베트를 침공했다. 중국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북한군의 작전통제권은 중국군으로 넘어갔다. 남한군 통제권이 미군으로 넘어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연구자인 캐서린 웨더스비가 쓰길, 중국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김일성에게 “이 전쟁은 나와 맥아더의 전쟁이므로 당신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대놓고 말했다.
53 사실상 중국군이 전투의 주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이 중국군을 자신이 지휘하겠다고 주장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압록강을 건넌 펑더화이가 김일성을 찾아갔을 때, 김일성은 그에게 북한군의 상황을 실토했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건데 우리는 지금 3개 사단 병력을 보유하고 있을 뿐입니다.”중국군이 개입하자 미군은 다시 후퇴했고, 전선은 이제 전쟁을 시작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 뒤 거의 2년 동안 38선 부근에서 거의 아무 의미 없는 전투가 계속됐다. 미군은 북한 주민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휴전 협정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특별히 고안된 대규모 공습을 벌였다. 그래서 북한 곳곳의 농업용 저수지와 댐을 폭파시켜 농경지와 마을을 물바다로 만들었는데, 가브리엘 콜코는 “1944년과 1945년 사이 네덜란드에서 나치와 같은 족속들만이 그와 같은 야만스런 행동을 계획했었다”고 지적한다.
중국군과 북한군도 손바닥만한 땅을 차지하려고 수십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켰다.
이 와중에도 남한 지배자들은 국민방위군 예산을 착복해 장정 수만 명을 굶겨죽이고 얼려죽였고, 부유층은 전쟁을 이용해 재산을 불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남한 우익 지배자들은 ‘조국 통일 완수’를 위해 북한에 핵폭탄을 터뜨려 달라고 미국에 애원했지만, 결국 1953년 7월 전쟁은 끝났다. 사실, 이미 1951년 2월 즈음에는 어느 쪽도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를 확인하는 데 무려 2년반의 시간과 수백만 명의 목숨을 허비한 것이다. 순전히 동서 양진영 지배자들의 욕심과 자존심 때문에 말이다.
결론
이상의 논의가 보여 주었듯이, 한국전쟁은 제국주의 간 경쟁의 산물이고, 이것이 마침내 한국전쟁의 근본적 성격을 규정했다. 한국전쟁의 성격을 내전이나 민족해방전쟁으로 보는 사람들은 전쟁의 원인을 대개 분단 구조를 타파하려는 내부의 통일 의지에서 찾거나, 좌우파 간의 갈등이나 계급 갈등, 좌우 갈등이 물리적 충돌로 표출된 게릴라 전투 등에서 찾으려 한다. 물론 한국전쟁에 내전적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제국주의 간 경쟁이 압도적으로 그 성격을 좌우했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 이유는 자유나 민주주의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미국은 동아시아와 나아가 전 세계에서 패권을 강화하려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NSC-68이 제시한 대규모 군비 증강을 추진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서방 제국을 확실히 통제할 수 있게 됐다. 소련은 한반도가 미국 봉쇄선의 약점이라고 여겨 이를 파고들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통일 전쟁을 이용해 동북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을 수세에 몰아넣는 지정학적 전략을 추구했다. 김일성 자신이야 통일을 위한 내전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는 결국 스탈린의 지정학적 의도 안에서만 가능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이유도 그들의 지정학적 이해관계 때문이었지 사회주의적 대의나 약소 민족 자결권을 존중해서가 아니었다. 신생 중국의 지배자들은 초강대국 미국에 맞섰다는 것만으로도 국제 정치에서 그 존재감을 확실히 획득했다.
그 밖에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때, 한국전쟁을 내전이나 민족해방전쟁으로 볼 수는 없다.
첫째,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 것은 국내적 요인이 아니라 국제 정세의 변화였다. 스탈린은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간 세력균형 변화로 유동적인 상황이 조성됐으므로 전쟁을 승인했는데, 김일성은 스탈린의 승인 없이는 전쟁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의 지원과 승인이 없어서 통일 전쟁을 벌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요인들이 작용해 시작된 전쟁을 미제의 압제에 시달리는 남한 민중을 해방시키려 한 민족 해방 전쟁으로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분단 자체가 제국주의 열강간 경쟁과 적대의 산물이었고, 당시 남과 북의 경쟁은 양대 열강의 냉전 경쟁 논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사실, 제국주의에 대한 의존이라는 측면에서는 김일성이 이승만보다 낫다고 볼 근거가 별로 없다.
둘째, 군사적 측면에서도 소련의 사전 개입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소련은 북한에 상당한 무기를 제공했다. 이는 미국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남북간 군사력 균형을 일거에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다. 북한군의 남침 작전 계획을 세운 것도 소련 군사고문단이었다. 스탈린은 제2차세계대전의 영웅이었던 바실리예프 장군을 특파해 북한군 침공 작전을 수립하게 했다.(이는 스탈린이 북한의 성공에 큰 기대를 걸었음을 보여 준다.)
55 이들은 북한 인민군 소속이 아니라 중국 거주 조선인 병사들이었다. “전쟁 발발시 전쟁 수행 주력 집단인 인민군 전선사령부 산하 7개 사단 중 5·6·12사단과 4사단 18연대가 국공 내전 참전 부대”였다. 56 즉, 북한이 최초 남한 침공에 동원한 주력군의 절반에 가까운 병력이 중국 거주 조선인 병사들이었던 것이다.
셋째, 중국의 사전 지원도 간과할 수 없다. 중국은 한국전쟁 발발 전에 국공 내전에 참가한 중공군 소속 조선인 병사들을 북한에 보내 줬다. 이들은 북한 인민군의 주력 사단으로 편제됐다. 브루스 커밍스는 북한이 1947년 초 북한군 수만 명을 중국에 파견했고 이들이 중국 혁명 성공 후 북한으로 귀환했다고 보지만,넷째, 군사적 측면에서도 3년 남짓 되는 한국전쟁 기간의 대부분은 미군과 중국군 그리고 부분적으로 소련군 사이의 싸움이었다.
다섯째, 전쟁 직전 남한에서 게릴라 투쟁은 거의 소멸 단계였다. 김일성도 남한 체제를 내부에서 전복하는 게 이미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소련의 군사 지원을 받는 전쟁으로 통일을 이루려 했다.
여섯째, 남북 정권 간의 투쟁이 계급투쟁의 연장이었던 것도 아니다. 스탈린주의 전통의 좌파는 북한 국가는 어쨌든 노동자 국가인 반면, 남한 국가는 자본주의 국가라고 보지만, 둘 다 계급 착취를 바탕으로 한 계급사회였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들이 서로 상대방 영토를 점령해서 펼친 정책은 어느 한쪽이 질적으로 우월하다고 할 수 없었다.
요컨대, 한국전쟁은 사회주의자들이 어느 한 쪽을 지지할 수 없는 제국주의 열강 간의 세력권 다툼이었다. 이것이 기회주의적 양비론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남한의 혁명적 좌파는 전쟁 상황에 직면해 북과 소련·중국을 정치적으로 지지하지 않은 채 남한 지배자들과 미국의 전쟁 노력에 대항해 정치적·군사적으로 싸워야 했을 것이다. 물론 북한 군대와의 군사적 공동전선은 가능하고 필요했을 것이다. 레닌이 말한 ‘혁명적 패전주의’ 전술인 것이다.
57 이는 이러한 혁명적 패전주의 전술의 기초 개념도 모르거나 악의적인 왜곡의 소치다.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와중에 이런 국제주의적·혁명적 전술의 구현자는 없었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남북한 민중 모두에게 그저 상처로, 무의미한 ‘사변’이나 ‘동란’ 따위로 남아 있다.
일부 좌익 종파들은 양대 세력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의 태도를 “지배계급의 광기어린 마녀사냥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로 도피하려는 것이라고 비난하는데,미국과 중국이 정전협정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려 왔을 때, 어느 보수 성향의 남한군 하급 장교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6·25사변이라고도 부르고 한국전쟁이라고도 부르는 이 전쟁은 우리들의 싸움인 동시에 강대국들의 전쟁이다. 아니 우리들은 강대국 간의 대리전을 치렀다. 우리들은 용병이고 총탄받이였다. 우리들은 수백만의 동포를 죽인 죄인이며 바보 천치 못난 것들이다. 입이 백 개라도 변명할 길이 없다. 무슨 까닭에 피를 흘리고 무슨 까닭에 죽었는가 하는 의문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주
- 교과서포럼,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기파랑, 2008, 137쪽. ↩
- <한겨레>(2009.12.31). ↩
- 필립 암스트롱 외,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두산동아, 1996, 54쪽. ↩
- 아이작 도이처, 《세계 회고록 대전집7: 스탈린》, 수문서관, 1983, 447쪽. ↩
- 박영기·김정한, 《한국노동운동사3 - 미군정기의 노동관계와 노동운동》, 지식마당, 2004, 259~260쪽. ↩
- 김기원, 《미군정기의 경제구조 - 귀속업체의 처리와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을 중심으로》, 푸른산, 1990, 89쪽. ↩
- Park Soon-won, Colonial Industrialization and Labor in Korea: The Onoda Cement Factory(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1999, pp. 161-162. ↩
- 森田芳夫, 《朝鮮終戰の記錄》 資料篇 第3卷, 巖南堂書店, 1983 참조. ↩
- 김일성, ‘당 중앙위원회 사업 결산 보고’, 《북한 ‘조선로동당’대회 주요 문헌집》, 돌베개, 1988, 55쪽. ↩
- 북한 국가자본주의의 형성 과정을 자세히 알고 싶으면 김하영,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 책벌레, 2002를 보시오. ↩
- Ygael Gluckstein(토니 클리프), Mao’s China(George Allen & Unwin Ltd), 1953, pp. 79-91. ↩
- 한림대아시아문화연구소, 《북한경제통계자료집 1946~1948》, 한림대출판부, 1994, 19쪽. ↩
- 해리 S 트루만, 《트루만 회고록 下》, 지문각, 1968, 105쪽. ↩
- <연합뉴스>(2007.11.20). ↩
- 김남식, 《남로당 연구2》, 돌베개, 1984(한국현대사데이터베이스 http://www.kdatabase.com/SchRstBook.aspx?schKeyword=1687), 120쪽 참조. ↩
- 존 R 메릴, 《침략인가 해방전쟁인가》, 과학과 사상, 1988, 294~295쪽. ↩
- <조선일보>(1950.1.4). ↩
- 브루스 커밍스·존 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89, 36쪽. ↩
- 정병준,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돌베개, 2006, 332쪽. ↩
- 和田春樹, 《朝鮮戰爭全史》, 岩波書店, 2002, 40쪽. ↩
- 와다 하루키, 《한국전쟁》, 창작과비평, 1996, 78쪽. ↩
- 맥아더, 《세계 회고록 대전집1: 맥아더》, 수문서관, 1983, 392쪽. ↩
- 소진철, 《한국전쟁 어떻게 일어났나》, 한국학술정보, 2008, 158~159쪽. ↩
- <연합통신>(1950.2.17), 국사편찬위원회, 《자료 대한민국사》16권. ↩
- 예를 들어, 이승만은 1950년 5월 30일 예정된 총선거에서 패배할까 봐 선거를 차일피일 미뤄 정치 불안을 조성한 바 있다. 그리고 살인적인 인플레 때문에 경제도 매우 불안정했다. 미국은 이런 정치적·경제적 불안 상황이 지속되면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
- 해리 S 트루만, 앞의 책, 313쪽. ↩
- ‘미국 중앙정보국 정보보고서 Daily Report 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 자료총서》16, 3쪽. ↩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 자료총서》39, 438쪽. ↩
- 정병준, ‘한국전쟁 초기 국민보도연맹원 예비검속·학살 사건의 배경과 구조’, 《역사와 현실》 54호(2004년 겨울), 95쪽. ↩
- Bruce Cumings, The Origin of the Korean War, volume2: The Roaring of the Cataract 1947-1950(Yuksabipyungsa), 2002, p. 672. ↩
-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0, 105쪽에서 재인용. ↩
- Bruce Cumings, 앞의 책, pp. 686-690 참조. ↩
- 와다 하루키, 앞의 책, 96쪽. ↩
-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나남, 2002, 219쪽에서 재인용. ↩
- 고준석, 《민족통일 투쟁과 조선혁명》, 도서출판 힘, 1988, 182~183쪽. ↩
- 이태, 《남부군 上》, 두레, 1988, 261쪽. ↩
- 조선은행조사부, 《조선경제연보》, 1948, 27~36쪽 참조. ↩
- 리구훈, ‘허구와 기만으로 조작된 소위 남조선 ‘농지개혁법’의 정체’, 《인민》(1950년 6월), 국사편찬위원회, 《북한관계사료집》 40호, 569~571쪽 참조. ↩
- 중앙일보사, 《민족의 증언2》, 1983, 141쪽. ↩
- <당 열성자들에게 주는 주간보> 제2호(1950년 8월 13일 자호), 국사편찬위원회, 《북한관계사료집》12, 534~536쪽. ↩
- 김성칠, 《역사 앞에서: 한 사학자의 6·25일기》, 창비, 2009, 110쪽. ↩
-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472쪽. ↩
- 김기진, 《한국전쟁과 집단학살》, 푸른역사, 2006, 123쪽. ↩
- 같은 책, 65쪽. ↩
- 이대근, 《해방 후 1950년대의 경제》, 삼성경제연구소, 2002, 207쪽. ↩
- 리영희, 《리영희 저작집6: 역정》, 한길사, 2006, 255~256쪽. ↩
- 김태우,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8, 79~80쪽 참조. ↩
- 같은 글, 234~236쪽 참조. ↩
- New York Times(1951.2.9), 김태우, 앞의 글에서 재인용. ↩
- <인민일보>(1950.11.6), 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 수집과, 《중국과 한국전쟁1》, 2002, 49~50쪽. ↩
- 和田春樹, 앞의 책, 169쪽. ↩
- <동아일보>(1995.6.17). ↩
- 홍학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86쪽. ↩
- 가브리엘 콜코,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 청사, 1989, 124쪽. ↩
- Bruce Cumings, 앞의 책, p. 358. ↩
- 이종석, 《북한-중국 관계》, 중심, 2000, 116쪽. ↩
- 볼셰비키텐던시, ‘6.25 잊혀진 전쟁’, http://www.bolshevik.org/hangul/INDEX.htm ↩
- 태윤기, 《군인 일기》, 일월서각, 1985, 17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