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리얼 진보》
진보신당의 정치를 알 수 있는 책
지난해 노무현이 자살하면서 남긴 유작 《진보의 미래》는 ‘노무현 식 진보란 무엇이었나’ 하는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진보 정치인으로 여겼다. 일찌감치 노무현을 ‘좌파’나 ‘진보’라고 비난했던 우파들뿐 아니라, 노무현에게서 진보·개혁의 희망을 봤던 사람들도 그랬다. 그러나 노무현 집권기를 겪으며 진보·개혁을 염원한 대중의 다수가 노무현에 실망해 등을 돌렸다.
그럼에도 노무현 왼쪽의 세력들이 대안적 세력임을 충분히 보여 주지 못한 채 노무현 오른쪽의 우파 정부가 등장하자, 노무현에 대한 정치적 향수도 부분적으로 생겨났다. 향수는 노무현이 자살하면서 극대화했다. 그 후 친노 세력들은 노무현이 남긴 정치적 자산을 활용해 재기를 도모했고, 6월 2일 지방선거에서 약진하는 성과를 거뒀다.
진보신당 활동가와 진보신당에 호의적인 지식인 19명이 쓰고, 진보신당 상상연구소(이하 상상연구소)가 출간한 《리얼 진보》는 노무현의 《진보의 미래》에 답하는 책이다. “노무현이 실패한 곳에서 진보는 시작된다”는 표지 카피는 이 책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 준다.
진보란 무엇인가
1 그러나 《리얼 진보》의 필자들은 2 과연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진보 정권으로 볼 수 있느냐는 올바른 물음을 던진다. 지난 10년은 “가진 자와 기득권 세력에게는 ‘성공한 10년’이었고, 가난한 서민과 보통 시민에게는 ‘잃어버린 10년’”이었다는 것이다.(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 80쪽. 이하 쪽수만 표기)
노무현은 《진보의 미래》에서 자신의 집권기를 “보수 시대의 진보주의 정부”로 규정했다.(이대근, 96) 지난 두 정권에서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으나,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결과 노무현 집권기 동안 “보수주의 헤게모니만 강화”돼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는 길을 열어줬다.(이대근, 83·86)
필자들은 두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비판한다. “노무현 정권을 진보 정권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로 고통받았던 서민들을 희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373) 상상연구소도 ‘다시 ‘진보의 재구성’을 말한다’라는 글에서 한국의 민주화가 “치명적인 약점과 한계들을 안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민주화 과정에서 오히려 “자본의 권력이 급속히 강화”됐고, “민주화 이후 등장한 민주 제도들”이 오히려 “고도의 독점적 정치 체제”를 낳아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다.(347~350)
그런데 민주 정부를 표방한 정부에서 왜 신자유주의가 더 강화됐는가? 이 책의 필자들은 이것이 한국의 민주화 과정과 관련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는 1987년 이후 “정치 민주주의가 상당 정도 진전된 반면 사회·경제 민주주의는 답보를 거쳐 후퇴 국면으로 이어져 왔다”고 평가한다.(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 교수, 75)
그럼에도 민주당과 친노 세력은 자신들과 이명박 정부의 차이점을 강조한다. 반대로, 이 책의 필자들은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유사성을 강조한다. “이번 정권의 대부분의 행동은 이미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에 다 그 ‘기초’를 닦아 놓은 것이었습니다. 파병이나 각종 무리한 재개발부터 말씀입니다. 정치적 역학 관계에서 이명박이 노무현의 정적이지만, 경제·사회 정책의 차원에서는 많은 면에서 계승자에 가깝습니다.”(손호철 서강대학교 교수, 329~330) 따라서 진보의 위치를 정확히 자리매김하려면, “대안 논의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이대근, 96)
이미 노무현 정부 말기부터 진보진영 다수는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부이며 진정한 진보적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등장하자,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반MB를 위해 민주당이나 친노 세력과 연합을 맺어야 한다는 민주대연합 논리를 폈다. 이 책의 필자들이 노무현 정부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려는 것은 바로 이런 진보진영 일각의 태도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죽었을 때 진보진영 일각에서 “일방적인 추모와 찬양” 분위기에 휩쓸리고 “MB에 반대하는 것 자체가 ‘민주’고 ‘진보’라고 착각하는 추세”가 생겨난 것은 “역사에 대한 망각”일 뿐이라는 것이다.(36~37)
그렇다면 《리얼 진보》는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가? 상상연구소 장석준 연구기획실장은 신자유주의에 타협한 “제3의 길” 노선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케인스주의로 단순히 회귀할 수도 없다고 지적한다. 1970년대 이래 “일국 케인스주의 만으로는 지구화된 대자본을 규제할 수 없다는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37~40)
장석준은 “미국이 주도하는 지구 자본주의 질서의 근본 토대”를 넘어서자고 제안한다. “이윤 확보의 자유”와 “근대화”가 민주주의의 발전을 낳았다는 교리와 “국민국가가 민주주의 발전의 주된 무대라는 오랜 신념”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대안적 가치로 평등·생태·평화를, 그리고 이런 대안적 가치를 실현시킬 힘을 만들기 위해서는 연대라는 가치가 중요하다고 한다.(70)
장석준에게서 발견되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은 김상봉 상상연구소 이사장과 박노자의 글에서 더 분명한 어조로 드러난다. 박노자는 자본주의가 소외를 낳는다고 비판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노동 중의 99퍼센트는 대개 그 어떤 독립적 의미가 보이지 않는 단순 반복 행위입니다. … 한국이든 노르웨이든 자본주의에서 사는 인간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주 심각하게 소외돼 있습니다.”(49·54) 따라서 “오늘날 새로운 진보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동시에 진보적 정당을 그렇지 않은 정당과 구별해 주는 결정적인 기준은 자본주의 극복의 의지”다.(55)
김상봉은 자유·평등·정의·만남 등의 가치들을 재검토하며, 이런 가치들이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훼손되는지 통렬히 비판한다. “다른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착취함으로써 자기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오늘날 자본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세계에서 삶의 일반적 형식이 되었다. … 자본이 홀로주체로 군림하는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도, 공화국도 있을 수 없다.”급진적 개혁 강령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비판하는 데서 더 나아가, 진보 좌파가 자본주의 극복을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은 꽤 급진적이면서도 지지할 만한 주장이다. 근래의 세계경제 위기와 기후변화 위기는 자본주의 극복 필요성을 더욱 절감케 한다. 이런 위기는 대중의 삶과 환경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업주들의 이윤 추구 욕망에 의해 운영되는 체제의 작동 원리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경제 위기 대처를 둘러싸고 정부와 기업들은 자신들의 손실을 보전하고자 대중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기후변화 위험이 인류 전체를 절멸의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데도 각국 정부와 기업주들은 이윤을 지키려고 책임 떠넘기기에만 혈안이 돼 있다. 따라서 대중의 삶과 환경을 지키려면 정부와 기업주들의 사회 운영 원리에 근본적으로 도전해야 한다.
(8)
그렇다면 어떻게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대안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까? 《리얼 진보》는 정치·경제·교육·복지·노동·환경·한반도·문화 영역에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한다. 노중기 상상연구소 소장은 그 취지를 이렇게 소개한다. “진보는 구체적인 현실에 취약하다는 보수 정치 세력들의 비판이 사실과는 다르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진보의 영역은 가치의 영역에 머무를 수만은 없다. 우리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과 대결하고 그 대안을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으로 만들 때 진보는 비로소 참된 진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구체적인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현실적인 정책을 내놓는 일은 진보 좌파의 중요한 과제다. 문제는 구체적 정책과 지향하는 목표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가 하는 점이다. 둘 사이에 유기적 관계가 없으면,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목표는 추상적 공문구에 그치기 십상이다.
(240) 세 부류에 대한 맞춤형 정책을 제안한다.
필자마다 불균등하지만, 일부 필자들의 제안은 급진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한 대안들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부동산 계급사회》 저자인 손낙구 ‘정치바로’ 부소장은 “한국인은 크게 ‘집 많은 놈’과 ‘집은 있는 놈’ 그리고 ‘집도 없는 놈’ 세 부류로 나뉜다”며 한국 사회 주택 문제의 현실을 꼬집고,(245) ‘집 많은 놈’에게 주는 각종 특혜를 없애야 할 뿐 아니라, “세 채 이상 소유한 집부자들이 갖고 있는 투기용 주택에 대해 택지 국유화를 단행”해야 한다고 제안한다.(249) 그래야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고, 부동산 투기에 따른 집값 폭등으로 고통받는 가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이명박 정부가 ‘친서민’ 정책이라고 홍보하는 보금자리주택은 여전히 비싼 데다, ‘서울시 장기전세주택’ 시프트도 공급량이 너무 적어 경쟁률이 최고 128 대 1이나 된다. 손낙구는 6백57만 가구 ‘집도 없는 놈’을 위해 저렴한 공공 임대주택을 대폭 늘려야 한다고 제안한다. 4대강 정비 사업 자금 22조 2천억 원만 있어도 1백25만 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193~194) 대학을 평준화하고 “모든 대학을 국립대 무상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198) 당장 모든 대학을 평준화·국립화하기 어렵다면 단계적으로 국립대부터 평준화하고 양질의 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사립대가 자연스럽게 고사해 국립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재근 ‘학벌없는사회’ 대변인의 교육 문제 해법도 급진적이다. 하재근은 한국 사회에서 “특권 세습의 고리”이자 “지배 체제를 안정화” 구실을 하는 대학 서열 체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손낙구와 하재근의 제안은 주택 문제와 교육 문제로 말미암은 대중의 고통을 획기적으로 경감할 수 있는 방안이다. 그런데 이런 정책을 현실화하려면 강력한 사회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뒷받침돼야 한다. 노동계급이야말로 기업주들이 행사하는 권력의 토대인 이윤 생산을 마비시켜서 기업주들에 가장 효과적으로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94~295)
아쉽게도 두 필자의 글은 이 점이 분명하지 않다. 반면, 한재각 기후에너지정책연구소 부소장은 ‘더 적색으로, 더 녹색으로’에서 노동운동의 구실을 강조한다. 한재각은 진보진영이 기후변화 문제를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면서 기존 환경운동의 약점을 비판한다. 그동안 한국 환경운동의 전략이 “소비의 변화를 통해서 생산의 변화를 이끌어 내겠다는 접근”이었지만, “소비의 변화가 자동적으로 지속 가능한 생산의 변화로 이어질 것인지에 대해서 확언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295)
그는 1970~80년대 영국에서 벌어진 ‘사회적으로 유용한 생산’ 운동과 지난해 풍력발전기의 날개를 제작하는 영국 기업 베스타스에서 노동자들이 일자리와 기후 문제를 연결시켜 공장 점거 파업을 벌인 사례를 소개하며 “생산 영역에 기반을 둔 노동운동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발휘할 수 있는 힘과 가능성을 보여 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후퇴하는 복지 전략
앞서 언급한 필자들의 글과는 달리, 이 책에는 노동운동이 투쟁 대의로 삼기에는 부적합한 주장들도 담겨 있다. 대표적으로 김정진 변호사가 쓴 ‘복지 확대를 위한 증세’라는 글과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이 쓴 ‘사회임금으로 복지국가 상상하기’라는 글이 그렇다. 이 두 필자가 쓴 분야는 진보신당이 가장 역점을 두는 사회복지 분야다.
두 필자는 한국의 조세부담률이 매우 낮으므로, 열악한 복지 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려면 증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감세 정책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출발로서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누구의 증세냐다. 서민들에게 세금을 더 걷는 방식은 불평등을 심화시키므로 그와 반대로 부자 증세를 통해 복지의 재원을 부자들이 책임지라고 요구해야 한다. 두 필자는 기본적으로 누진적 세제를 지지한다. 그 중 개인소득세 같은 직접세(김정진)와 사회복지세 같은 목적세(오건호)를 늘리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안들은 몇 년 전까지 민주노동당이 내놓은 부유세 안보다 후퇴한 것이다. 오건호는 이 책 외 다른 글에서 “증세 주체도 가능한 많은 사람일수록 좋다”며 사회복지세를 부유세 방식으로 도입하는 데 반대하면서 일반 직접세 방식을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상위 5퍼센트 계층만을 과세대상으로 하는 진보신당의 ‘사회복지세’ 방안에 대해선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후퇴를 요구하기도 했다.
(232) 최근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준)은 건강보험료를 1인당 월 평균 1만 1천원(가구당 2만 8천원)을 더 올리자고 제안했다.
최근 출범한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준) 준비위원이기도 한 오건호는 건강보험 보장성을 확대하려면 진보진영이 나서서 보험료 인상을 제안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그는 직장가입자들이 보험료를 5조 원 인상하면, 현행법에 따라 사용자도 5조 원을 더 내게 되고, 정부도 2조 원을 투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가입자가 5조 원을 더 내면 총 12조 원의 건강보험 재정이 마련된다”는 것이다.두 필자의 주장대로 노동자들이 세금을 더 내고 건강보험료도 인상했을 때 기업과 정부가 그보다 더 돈을 내서 복지 혜택이 획기적으로 나아진다면, 노동자들이 증세나 보험료 인상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윤태호 부산대 의대 교수, 176~177) 이명박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도 건강보험료 9퍼센트 인상 계획을 내놓고 있다.
문제는 지난 몇 년 간 법인세나 특별소비세 등 부자들이 내는 세금이 오히려 감소해 조세 불평등이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세금을 4대강 사업이나 기업들의 이윤을 보전하는 데 쏟아붓고 있다. 건강보험료 문제도 마찬가지다. “보장성을 달성할 목적으로 보험료는 올렸으나,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국민건강보험 국고 보조의 약속(국민건강보험 예상 총수입의 20퍼센트 부담)은 단 한 번도 지키지 않았다.”그런데도 두 필자는 복지 확대가 더딘 데는 노동운동의 책임이 크다고 주장한다.
(김정진, 211)
민주노총-민주노동당의 실험은 조세를 통한 복지라는 노선이 한국처럼 노동조합이 상대적인 고임금 사업장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에는 제대로 작동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조세를 통한 복지를 위해서는 민주노총 사업장의 노동자도 당연히 더 많은 근로소득세를 부담해야 한다. 그런데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정규직 노동자가 조금 더 부담하고 사용자와 국가가 더 많이 부담하여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놓인 비정규직 노동자를 지원하자는 아주 미약한 ‘사회연대전략’에 대해서도 실질적으로 거부했다.
(오건호, 229~230)
지금까지 진보진영은 재정 문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거나 부자나 기업에게 더 거두면 된다고 주장해왔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국가 재정 확보에 진보진영이 더 실질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필요하다면, 상위 계층의 재정 책임을 압박하기 위해 전체 사회 구성원의 일정한 재정 참여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 대략 연봉 3000만 원 이상 노동자들은 일부라도 세금을 더 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추가 세금은 상위 계층들의 누진적 조세 책임을 이끌어 내는 지렛대 역할을 하며, 이렇게 만들어진 재원은 전체 사회 구성원의 사회임금 확대를 위해 쓰이는 사회연대기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기에 불과하다. 몇 년 전부터 ‘사회연대전략’을 적극 주장한 두 필자는 그동안 기업과 정부가 복지 책임을 외면해 온 현실을 회피한 채 노동자더러 책임지라고 한다. 두 필자는 노동자들이 세금과 보험료를 올리면 (자동으로) 기업과 정부가 돈을 더 낼 것처럼 말하지만, 부자들에게 엄청난 사회적 압력을 가하지 않고서는 양보를 얻어낼 수 없음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두 필자들의 주장이 사실상 뜻하는 바는 부자들이 쉽게 양보하지 않을 테니 노동자들이라도 먼저 세금과 보험료를 올리자는 것이다.
오건호는 이렇게 해서라도 대중에게 “복지 체험”을 제공해 대중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정당화한다. 그러나 복지를 체험하지 못한 게 문제가 아니다. 스웨덴 모델에 대한 높은 관심에서도 드러나듯이 대중은 이미 직간접적으로 복지를 체험하고 있고 복지 강화를 간절히 열망한다. 복지 확대를 요구하는 대중운동이 없던 것도 아니다. 2002년 민주노동당 주도로 시작한 무상교육·무상의료 운동은 그 이후 ‘암부터 무상의료’ 운동으로 표현돼 암 진료비를 많이 낮추는 성과를 거뒀다. 최근에는 무상급식 운동이 지방선거의 핵심 이슈로 부상하기도 했다. 두 필자의 제안은 향후 더 발전할 수도 있는 대중운동에 오히려 어려움을 줄 수 있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노동자의 ‘집단적 경험’을 강조하는 이 주장은 현재까지의 노동자의 집단적 경험이 내가 부담을 하면 나에게 복지가 돌아온다는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있어 대중운동으로 성립될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이다.”
진정으로 복지 확대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한 대중운동을 건설하려면, 노동계급이 먼저 양보할 것이 아니라 기업과 정부의 복지 삭감이나 노동자들에게 책임 떠넘기기에 반대하는 투쟁을 건설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당장 의료 민영화를 저지하는 일도 사활적이다. 이런 투쟁의 힘으로 부자 증세와 복지 확충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어정쩡한 경제 대안
《리얼 진보》는 경제 대안도 일부 다룬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이 쓴 ‘도대체 시장이 있어야 할 제자리는 어디인가’와 정태인 상상연구소 이사가 쓴 ‘경제 대안의 출발점, ‘사회경제’’가 경제 대안을 다룬 글이다.
홍기빈은 한미FTA를 비판한 지식인으로 유명한데, 그는 이 책에서도 한미FTA 비판 논리를 확대해 “과연 이런 정도로 시장경제가 인간 존재의 모든 측면을 지배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고 정당한 물음을 던진다. 올바르게도 그는 시장경제를 찬양하고 이상화하는 주장뿐 아니라, 시장경제를 부분적으로 수정하려는 주장에도 비판적이다.
(126) 대신 그는 칼 폴라니의 사상에서 배우자고 제안한다. 폴라니는 “시장경제에 대한 가불가나 호불호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대신 … ‘인간 사회에서 시장경제가 차지해야 할 올바른 위치는 어디인가’” 하는 물음을 던졌다는 것이다.(127)
그런데 그는 시장경제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비판하는 주장에도 거리를 둔다. 그런 주장은 “‘다른 질서’가 무엇인지, 그것이 정확하게 어떻게 시장경제를 극복하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경제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주장에 대안이 없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오늘날 마이클 앨버트, 팻 드바인 등 대안세계화 운동 내 다양한 논자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뛰어넘는 경제체제로 참여계획경제 모델을 구상하고 있다.6 시장과 ‘자기조정적 시장’을 구별하고 ‘자기조정적 시장’이 억제되거나 제거된 뒤에도 시장은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의 마지막 장에서 대안 사회의 기초는 바로 노동·토지·화폐가 상품이 아니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 되면 시장체제는 원리 차원에서 더는 자기조정적인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7
폴라니 자신도 사실상 시장경제를 뛰어넘는 대안을 모색했다. 물론 폴라니가 “유통주의적 관점에서 시장을 거래 자체 또는 거래가 이뤄지는 장소로만 이해”해,따라서 폴라니가 말한 대안 사회 비전을 철저하게 밀고 나아가면 탈자본주의적 대안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홍기빈은 폴라니를 급진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시장경제를 용인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는 폴라니의 모호한 분석틀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러다 보니 홍기빈의 주장은 시장경제를 부분적으로 수정하자는 견해와 차별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폴라니의 모호함은 시장 체제를 존속한 채 그 비중만 줄이자는 개혁주의적 대안에도 문을 열어놓을 수 있다. 오늘날 사회경제를 강조하는 논자들이 바로 폴라니의 사상을 개혁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조류다. 정태인도 사회경제의 이론적 자원을 폴라니에게서 끌어온다.
(133~134)
그는 2007년 대선 민주노동당 후보 선출 경선에서 심상정 후보의 ‘세박자 경제론’을 입안했다. ‘세박자 경제론’은 시장·국가·사회경제 세 영역의 조화를 통해 경제가 운영돼야 한다는 정책이다. 정태인은 《리얼 진보》에서 “당시에 명확히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폴라니의 ‘시장, 재분배, 호혜’라는 세 가지 사회 통합 양식은 세박자 경제론의 직접적 이론 자원이 될 수 있다”고 썼다.(157) 그럼에도 “국가주의 발전 모델의 전통이 여전히 박정희 신화로 생생한 가운데,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종주국인 미국보다도 더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에서 … 일단 사회경제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는 과제가 중요하다고 본다.(164)
세 영역 중 특별히 호혜(연대)의 원리로 운영되는 사회경제가 각광을 받은 것은 “복지국가의 한계”와 관련 있다고 한다. 물론 정태인 자신은 국가 주도의 공공영역을 배제하지 않는다. “한국의 취약한 사회경제는 기능적으로 공공경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사회경제론자들이 지향하는 호혜와 연대라는 가치는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충분히 공감하는 가치다. 그리고 사회경제의 존재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근본주의와는 다른 경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장점이 있다.
(154~155)
그러나 대부분의 사회경제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정태인도 사회경제와 시장이 양립하는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다. “사회경제는 시장경제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동행하거나 보완하는 존재[다.]” 사회경제는 “시장경제에 대해서 대안적 경영의 준거”를 제시하는 구실을 하고, 자본주의가 낳는 “강력한 이윤 동기는 여러 측면의 혁신을 이뤄” 내므로 시장경제의 “기술, 제도 혁신을 사회경제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모델의 문제는 사회경제가 시장경제를 완전히 대체하지 않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사회경제가 살아남으려면 시장경제와 끊임없이 생산성을 비교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경제가 시장경제 체제의 동역학에 종속되는 길로 나아갈 위험이 크다. 사회경제가 처한 모순은 이미 1백여 년 전 독일의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수정주의 이론가 베른슈타인을 비판하면서 지적한 바다.
협동조합, 특히 생산 협동조합의 경우 그 본질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중간적 존재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교환 속에 있는 사회화된 소규모 생산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에서 교환은 생산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또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이 무자비하게 착취하도록 한다. … 생산 협동조합의 경우, 노동자들은 틀림없이 모순에 빠지게 된다. 즉 노동자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완전한 시장의 절대권력으로 통제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며, 자기 자신에 대립해서 자본주의 기업의 역할을 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 생산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기업으로 전환되든지 노동자들의 이익이 좀더 큰 경우에는 해체되는 식으로 소멸한다.
결국 홍기빈과 정태인이 제시하는 경제 대안은 신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적이긴 하지만 “자본주의 극복 의지”를 제대로 구현하는 데는 부족한 대안이다.
진보의 재구성1 – ‘민주노총당’에서 탈피하기?
(350~351) 민주노동당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 책에서 다루는 ‘진보의 재구성’ 논의는 민주노동당 분당 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책이 규명하려는 ‘리얼 진보’는 민주당이나 친노 세력 같은 자유주의 포퓰리스트 정치 세력과의 차이점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지만, 민주노동당 주류 정파인 NL 경향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다. 진보신당 활동가들은 이미 민주노동당 분당 전인 2007년 무렵부터 ‘진보의 재구성’을 주장했다. 상상연구소는 이 책에 실린 ‘다시 ‘진보의 재구성’을 말한다’라는 글에서 진보 재구성 논의가 겨냥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썼다. “진보 재구성이 자유주의 세력에만 칼날을 겨눈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진보 본류임을 주장하는 진보정당 역시 이 칼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민주노동당 분당 때 그랬듯이 상상연구소는 먼저 민주노동당의 민주노총 기반을 문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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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별 노조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고, 여기에 97년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된 자본의 노동 유연화 공세가 더해졌다. 노동조합이라고는 기업별 노조뿐이어서 대개 대기업·공기업에 몰려 있고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정작 자본의 공세로 가장 신음하는 것은 비정규직·중소기업·여성 노동자들이다. 노동운동의 힘이 미치는 현장과, 노동자들이 가장 고통받는 현장이 서로 어긋난다. 그러다 보니 노동조합은 대다수 노동자의 고통과는 상관없는, 그나마 신세가 좀 나은 소수 노동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노동조합에 기반을 둔 진보정당, 즉 민주노동당의 전진도 더는 불가능해졌다. 민주노동당은 점차 노동계급 전체의 정당이 아닌 소수 조직 노동자만의 당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9 노동자들의 파업이 부문과 업종을 넘어 계급적 단결 양상을 띠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노동조합 운동은 정치성이 약해지고 부문주의도 강해지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약해졌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이 자유주의적 포퓰리스트 정당에서 이탈하는 대중을 견인하는 힘도 기대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이런 변화를 감지하고, 민주노동당 분당 당시 분당파들은 민주노동당의 조직 노동자 기반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이런 평가에 일말의 진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민주노동당의 사회적 기반인 민주노총의 정치적 영향력이 이전만 못하다는 것이다. 1997년 노동법·안기부법 개악에 맞선 대중파업 때 민주노총의 사회적 영향력은 급상승했다.10 첫째, 노동운동 내 정치와 경제의 분업 현상이 나타났다. 노동조합은 경제투쟁을 책임지고, 정치는 개혁주의 정당이 책임지는 식이다.(이 경우에 정치는 대체로 선거에 맞춰져 있다.) 그 결과 노동조합 운동에서 정치성이 약해졌다. 둘째,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노동조합 고위 상근간부층이 하나의 사회계층으로 굳어졌다. 이들은 사용자·정부와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착취 조건을 둘러싸고 중재하는 위치에 있는데, 이들이 하나의 사회계층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노조 기구 보존을 위해 투쟁을 일정 수위에서 자제하고 정부와의 협상에 매달리곤 했다. 문제는 이런 협상 중심적 태도로는 경제 위기 시기에 사용자나 정부에게서 양보를 얻어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협상에 매달리다가 걸핏하면 사용자나 정부한테 뒤통수를 맞고 투쟁 기회를 놓치거나 부적절한 타협을 시도하는 패턴이 반복되면서, 노동조합 지도자들에 대한 현장 조합원들의 냉소와 불신이 커졌다. 비정규직 문제 대응은 대표적 사례였다. 일부 간부들의 비리 사건 등도 노동조합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를 갉아먹는 데 한몫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위기는 조직노동자 기반 자체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에서 나타난 개혁주의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1997년 이후 노동조합 조직률이나 파업 일수 등이 증가하거나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면, 노동조합 운동 자체가 약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체제가 권위주의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점차 이행하면서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11 그래서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은 노동조합 고위 상근간부층의 개혁주의와는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은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을 매개로 현장 조합원들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노동조합 상근간부층보다 오히려 현장 조합원들의 압력에 덜 민감했다. 민주노동당 의원이 비정규직법 개악 과정에서 부적절한 타협안을 제시하는 등 개혁주의적 약점을 보인 것은 바로 이런 특징들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은 노동조합 고위 상근간부층의 정치적 표현체다.따라서 진정한 대안은 노동조합 고위 상근간부층의 부적절한 타협을 비판하고, 현장 조합원의 계급적 단결과 투지를 고무할 수 있는 변혁적 지도력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당파와 진보신당 지도자들은 이런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다. 이들 자신도 노동조합 고위 상근간부층 일부(중앙파)와 개혁주의 지식인들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므로 민주노동당 위기에 책임이 있었다.
그렇다고 분당이 진보신당으로 하여금 변혁적 정치를 수용하게 한 계기가 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의 ‘구좌파’ 이미지를 벗어던지고자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당’이라는 점을 문제 삼았다. 물론 이 메시지에는 진보정당이 조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의제만 중시하는 협소한 노동자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공감할 만한 문제의식도 포함돼 있다. 진보신당이 비정규직 문제와 환경·여성·소수자 등의 쟁점들을 중시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천대받는 집단의 투쟁과 사회 정의를 위한 운동이 노동계급 투쟁과 결합될 때 가장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비정규직 문제도 마찬가지다. 열악한 처지에 놓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설 때 흔히 잘 조직돼 있고 투쟁의 전통이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연대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사활적이다.
따라서 조직 노동자들과 거리 두려는 전략은 바로 지배계급에 맞설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힘과도 거리를 두겠다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우경화의 길을 함축하고 있다. 《리얼 진보》의 일부 필자들이 민주노동당의 부유세 정책을 폐기하거나 회피하고, 노무현 정부가 강조한 ‘정규직 귀족노조론’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채 ‘사회연대전략’ 같은 정규직 양보론을 내놓는 것은 바로 이런 우경화 징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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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책에는 이와는 다른 주장들도 실려 있다. 상상연구소는 한편에서는 진보정당의 조직 노동자 기반을 문제 삼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운동의 힘이 중심에 버티지 않는 한, 다른 국지적 시도들만으로는 결코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언뜻 보면 모순된 주장을 편다.12 진보신당 지도자들도 선거를 위해서 노동조합 고위 상근간부층 기반을 결코 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우경화에도 불구하고 진보신당의 기반이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뜻할 뿐이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을 우경화시킬 때조차 노동자들의 표와 재정 지원 없이는 선거를 치를 수 없었으므로 노동당의 사회적 기반을 미국 민주당처럼 바꾸지는 못했다.그럼에도 분당 때부터 분당파 지식인들이 민주노동당의 조직 노동자 기반을 문제 삼는 바람에 분당 후 진보신당의 기반은 분당 전보다 더 협소해졌다. 그 결과 진보신당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민주대연합 정책 때문에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수도권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민주노동당보다 훨씬 적은 성과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진보의 재구성2 – 북한과 제국주의에 대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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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연구소가 진보 재구성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둘째 이유는 민주노동당 다수파인 NL 경향이 친북 사상을 갖고 있어서 국민적 지지를 얻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분당 당시 논리와 닮았다. “민주노동당 바깥의 그 누구도 북한 체제를 바람직하다고 여기거나 그 정권을 연대의 대상으로 보지 않건만 이 당에서는 그게 맞느니 틀리느니 하며 싸우고 있었다. 누가 이런 정당을 자유주의 세력을 대체할 대안이라고 보겠는가.”북한 체제가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북한 체제는 남한과 꼭 마찬가지로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남한에서 북한 체제를 대안적 사회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특정한 이유로 진보진영 내 다수파가 북한에 호의적인 세력의 지도 하에 활동하고 있으므로, 이런 문제로 진지하게 논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당 당시 이 논의는 진보진영의 건설적 논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당내 평등파가 자주파에게 당권을 빼앗긴 채 만회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자주파 흠집내기 차원에서 느닷없이 제기한 것이었다. 당시 우파들과 분당론자들이 즐겨 사용한 “종북”이라는 표현은 자주성이 없다는 모욕이기도 하거니와 자주파의 정치를 설명하는 정확한 표현도 아니었다.
북한 관료는 착취와 억압을 일삼는 지배계급이지만, 남한의 자주파는 남한 사회에서 천대받는 대중의 일원이고 국가에 탄압받아 온, 진보 운동의 일부이므로 자주파와 북한 관료를 동일시할 수 없다. 그래서 자주파는 북한 관료들의 지침을 그대로 전달하는 전달 벨트가 아니다. 자주파는 북한 관료와 남한 피억압 민중 사이에서 모순적 처지에 놓여 있다. 물론 자주파의 정치도 모순투성이인 데다 민주대연합 노선에서 보듯이 기회주의적이다.
그런데 이런 점을 무시하고, 당시 분당론자들은 자주파를 북한과 동일하게 취급하면서 북한 쟁점을 반NL 세력 규합용으로 활용했다. 그들의 선동에 북한 체제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없었다. 분당 당시 주대환·조승수·진중권·박노자·장석준 등 다수의 논자들은 즉흥적으로 북한을 “왕조”나 “봉건” 사회라고 규정했고, 어떤 이들은 국가사회주의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북한을 국가사회주의로 보는 견해 중에서도 자본주의보다 낫다고 보는지 더 열등하다고 보는지 통일된 견해가 없었다.
분당론자들의 주장대로 만약 북한이 봉건 왕조 사회라면 다른 전자본주의 사회처럼 지배계급의 소비가 축적의 동력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중공업 생산과 군비 투자에 열을 올리는 체제다. 다른 한편, 북한을 국가사회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은 형용모순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정의상 계급이 사라진 사회인데, 계급이 사라졌다면 착취를 돕기 위해 필요한 억압 기구인 국가도 함께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13 당시 분당론자들은 이 쟁점들을 회피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북한 사회 성격을 규명하고 변혁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주파 흠집내기에 주된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다함께’는 분당론자들을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대안적 분석도 제시했다. ‘다함께’는 북한이 중공업 생산과 군비 투자에 열을 올리는 것으로 보아 남한처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경쟁적 축적 동역학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남한과 차이점이 있다면, 사기업이 아니라 국가 관료들 자신이 자본가 구실을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북한 체제는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할 수 있다. 14
분당 당시 ‘다함께’가 바로 이런 문제들을 제기했지만,여전히 친북 좌파와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상연구소는 《리얼 진보》에서도 북한 사회 성격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분당 당시 그토록 요란하게 이 쟁점을 부각시킨 것에 비하면, 너무나 조용해 의아할 정도다. 이쯤 되면, 진보는 반대가 아니라 대안을 통해 재구성돼야 한다는 이 책의 취지가 무색할 지경이다.
북한에 대한 태도는 제국주의에 대한 태도와도 긴밀히 연관돼 있다. 미국 제국주의의 북한 억압이 여전히 한반도 주변을 불안정하게 하고, 남한의 친미 우파는 여전히 걸핏하면 북한 위협을 부추기므로, 두 문제를 완전히 별개 문제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쟁점을 둘러싼 진보진영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당연히 반제국주의가 돼야 한다.
그런데 분당론자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북한에 대한 태도가 더 문제인 것처럼 부각시켰다. 당시 분당론자들의 북한 체제 성격 규정이 너무 자의적이어서 제국주의보다 북한을 더 문제시했던 사람들이 모두 북한을 “왕조”·“봉건” 등 서방보다 열등한 체제로 보는 관점 때문에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논리적으로 보자면 북한을 서방이나 남한보다 퇴보한 사회로 보는 관점이 북한과 서방(혹은 남한)이 대립할 때 친북에 반대해서 차라리 친서방이나 친남한을 택하는 것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미국이나 남한에서 한때 좌파였다가 소련이나 북한 사회 성격을 서방보다 열등한 체제로 여기고는 자유주의자나 우파로 전향한 사람들이 겪은 혼란이기도 했다. 아직은 이 정도의 혼란까지 겪지는 않은 듯하지만, 북한에 대한 진보신당의 관점은 제국주의 문제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부지불식간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하다. 현 진보신당 지도부들은 민주노동당에 있을 때, 북한 핵실험에 대해서도 미국의 대북 압박이 북한의 반발을 낳았다는 점을 보지 않고, 사실상 미국의 대북 압박을 묵인하는 양비론적 태도를 취했는데, 분당 이후에도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과 차별성을 더 부각시키려 해서 그런지, 북한의 로켓 발사 등을 두고 양비론이거나 심지어 북한을 더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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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진보》에 실린 한반도 평화 주제의 글도 제국주의 문제에 대한 온건한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인 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국제정치학 교수는 힘의 우위나 힘의 균형을 평화로 여기는 ‘현실주의적’ 견해와 각종 자유주의적 견해를 비판하고, 군축 등을 통한 적극적 평화가 필요하다는 올바른 주장을 편다. 그러나 동시에 적극적 평화 조처가 너무 급진적으로 여겨질 수 있으니 당분간 자유주의적 접근도 필요하다고 한다. 그 방안은 “국내적 좌우파는 물론 국제적 행위자를 설득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인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이라는 것이다.(281) 그러나 문제는 평화 체제나 동북아 다자간 안보 협력체 등으로 제국주의적 경쟁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평화 체제 제안이 정전 상황을 유지하는 것보다 낫기는 하지만, 평화 체제가 한반도 평화를 온전히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왜냐하면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강대국들 간 갈등이 언제든지 한반도 주변을 불안정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갑우 교수도 이 점을 의식해서인지,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의 국제적 조건을 마련하려면 “동북아 다자간 안보 협력체의 건설을 의제화해야 한다”고 제안한다.(281) 이는 구갑우 개인의 견해가 아니다. 진보신당도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다.
구갑우는 심지어 “오바마 행정부의 ‘핵무기 없는 세상’ 정책은 평화 담론을 지구적 수준에서 재구축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면서 오바마 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낸다.[핵태세 검토 보고서]에서의 비핵보유국들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과 북한, 이란 등에 대한 예외의 천명은 NPT[핵확산방지조약] 체제를 벗어나려는 유혹을 갖는 국가들에 대한 차단의 효과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START 후속협정의 조인 등에 의한 핵군축과 더불어 NPT 체제의 강화에는 분명히 기여할 것이다.
비핵보유국에게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소극적 안전보장’ 정책에 대한 입장을 공식화한 것은 일면 긍정적이다. … NPR
그러나 그것이 곧 수평적 핵확산의 방지에 도움이 되리라고 예단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현재 수평적 핵확산에 있어 관건적 국가들은 북한과 이란인데 이들이 이번 NPR의 내용에 대해 공명하기는커녕 반발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17 그러나 NPT 체제 자체가 완전히 위선적인 체제다. 1968년에 도입된 이 조약은 1967년 이전 핵무기 보유국들(미국, 영국, 소련, 중국, 프랑스)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대신, 나머지 나라들의 핵 보유는 금지함으로써 강대국의 핵독점을 유지하려는 체제였다. 그리고 강대국들은 핵개발을 지속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심지어 미국의 동맹들은 NPT 밖에서 핵개발을 해도 전혀 제재받지 않았다.
진보신당은 NPT 체제가 불평등하다고 인정하면서, 모순이게도 NPT 체제를 지지한다. 그리고 이 조약에 북한이 재가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4월 핵안보 정상회의도 완전히 위선적인 회의였다. 러시아와 핵무기 감축을 합의했지만 지구를 완전히 초토화할 수 있는 무기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을 뿐 아니라,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 지위에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정상회의 직전 발표된 미국의 핵태세검토보고서는 이란과 북한이 비확산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며 핵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고 엄포했다. 핵안보 정상회의는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와 군사적 압박을 가하는 자리였다. NPT에 한 번도 가입한 적 없는 이스라엘은 이런 위협을 받아 본 적이 없다.이렇듯 진보신당이 NL 경향과의 차이점을 주로 부각시켜 진보를 재구성하자는 것은 결국 제국주의 문제에 대한 불철저함만 낳고 말았다.
진보의 재구성3 – 연합전선
《리얼 진보》가 다루는 진보의 재구성 논의의 세 번째 쟁점은 “연합전선”에 관한 것이다. 상상연구소는 ‘다시 ‘진보의 재구성’을 말한다’에서 자신들이 지향하는 “연합전선”을 다른 두 종류의 프로젝트와 차별화한다. 하나는 민주노동당과의 재통합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대연합이다.
(362) 물론 분당을 통해 자주파와 평등파 간 분파 갈등이 확연히 드러난 이상, 통일성을 강조하는 예전의 민주노동당 모델로 돌아가는 것은 비슷한 분란을 재연할 가능성이 높다. 상상연구소의 주장대로 독자적인 당을 따로 만든 후, 연합을 모색하는 것이 더 낫다.
상상연구소는 이념적 차이가 큰 세력들끼리는 당을 따로 만드는 것이 낫다면서 진보정당 통합론을 “무조건 통합론”이라며 강하게 반대한다.그러나 상상연구소의 제안에는 민주노총의 선진노동자 다수가 두 당의 재통합을 바란다는 정서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선진노동자들에게는 아직 두 당의 차이가 자본가 정당과 진보정당 사이의 차이만큼 크다고 느껴지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분당 전 민주노동당 경험에 대한 진중한 자기 반성적 평가도 없다. 사실, 민주노동당을 다정파 연합체답게 느슨하게 운영했다면 분당이 불가피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분당의 계기가 됐던 것은 자주파의 패권주의였지만, 평등파도 애초 민주노동당을 통일성이 강한 ‘당 모델’로 운영하려 해 흔히 패권주의 문제를 낳았는데, 이런 점에 대한 평가는 없이 여전히 그저 NL과는 한 당에 있을 수 없다는 분당 때의 분파적 심정만 앞세워 통합론을 반대하는 것은 씁쓸하다.
(382) 상상연구소는 이를 “연합전선”이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의 제안이 진보대연합 원리와 유사하다고 한다.
또 다른 쟁점은 민주대연합 문제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민주대연합을 비판하며 대안 중심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반MB ‘대안’ 연대”(또는 “민들레 연대”)라고 부른다.이런 입장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대연합에 올인했던 민주노동당의 방침보다 낫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민주대연합 정책에 올인하면서 기초단체장 당선 등 선거적 실리는 챙겼을지는 몰라도, 부단한 노동자 계급 정치세력화라는 대의는 훼손시켰다. 선거 성과 측면에서도 민주노동당은 민주당 후보를 지원하느라 수도권에서는 성과가 좋지 않았는데, 이는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스스로 갉아먹는 행위였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이 노동계급의 대안이 될 수 없는 세력과의 연합에 골몰하는 동안 진보대연합은 추진력이 생기지 못했다.
그러나 비록 민주노동당만큼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진보신당 또한 이런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말로는 진보대연합을 강조하면서도, 여러 단서와 조건을 대며 실제로는 큰 열의를 보이지 않거나, 아니면 부산·고양 등 일부 지역에서는 진보신당 스스로 민주대연합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런 혼란은 《리얼 진보》에도 반영돼 있다. 여러 필자들이 민주노동당의 민주대연합 추진을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결국에는 민주당과의 선거연합도 가능성으로 열어두고 있다.
상상연구소가 모범이라고 제시하는 “연합전선” 사례 중에는 진보대연합과 유사한 사례도 있지만, 민주대연합과 유사한 사례도 있다. 예를 들면, 상상연구소는 1930년대 프랑스에서 파시즘의 득세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결성한 인민전선 사례를 모범으로 꼽았는데, 오히려 이 사례는 민주대연합의 고전적 사례다. 당시 인민전선은 선거 실리로만 보자면 공산당의 득표율 제고에 도움이 됐다. 물론 이조차 대중이 인민전선 정책을 지지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공산당에 대한 투표는 친자본주의 중간계급 정당인 급진당을 지지하라는 공산당의 정책을 거스른 것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인민전선이 계급투쟁에서 하는 구실이었다. 파시즘에 맞서 노골적으로 친자본주의적인 중간계급 정당과도 연합한다는 전략은 노동계급 투쟁이 절정에 이르자, 그 투쟁을 자제시키는 구실을 했다. 나중에는 인민전선 정부가 직접 공산당을 불법화하기도 했다.
즉,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봤을 때 민주대연합의 문제점과 진보대연합의 상대적 우월성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선거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진보대연합은 의의가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진보 양당의 정당 투표를 합하면 10.48퍼센트에 달한다. 만약 양당이 진보대연합으로 출마했다면 그 시너지 효과 때문에 득표율이 더 높아졌을 것이다.(특히 울산이 그랬을 것이다.) 그 결과 진보진영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를 견제할 무시 못할 정치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었을 것이고, 설령 그로 인해 민주당이 한나라당을 압도적으로 꺾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선진노동자들은 한나라당의 공세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맺으며
진보신당 상상연구소가 펴낸 《리얼 진보》는 각기 다양한 필자들이 쓰긴 했지만, 대체로 진보신당의 정치를 집약한 책이다. 이 책은 우선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 ‘리얼 진보’를 모색하는 데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자본주의 극복 의지가 진보의 기준이라는 지적도 좋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대체로 스스로 설정한 진보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데 미흡한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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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일부 급진적 강령이 실려 있지만, 대체로 강령을 구현할 수단을 노동계급 투쟁에서 찾지 않는 듯하다. 분당 당시 진보신당 친화적 지식인들이 민주노동당의 “운동권 정당적 성격”을 비판했던 것이나, 최장집 교수의 애제자이자, 스승의 지론대로 투쟁보다 정당 정치 내의 선거적 대안 모색을 강조하는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가 존경받는 분위기, 이 책이 여전히 민주노동당의 조직 노동자 기반을 문제 삼는 것 등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상상연구소는 선거와 대중투쟁 양날개론을 주장하지만 선거를 대중투쟁의 보조물로 활용하는 변혁적 관점이 아니라 “다양한 대중 운동이 집권의 공동 주체로서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대중투쟁을 선거의 보조물로 여기는 관점을 갖고 있는 듯하다.(262·264) 그런데 강수돌은 추상적 해법을 제시하는 데 그친다. 그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회피하고 “교육과 학습, 성찰과 반성, 소모임과 실천 등”을 통해, “노동을 신앙적으로 숭상”하거나 그와 반대로 “노동자나 노동조합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뒤틀린 주체성’을 바로잡는” 일종의 의식 개혁 운동을 제안한다.(266~267)
또한 어떤 글들은 마땅히 필요한 요구를 회피하는 글들도 있다. 가령 강수돌 교수의 글이 그렇다. 강수돌이 쓴 ‘“모두 일하되 조금씩 일하는 사회”로’는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잘 드러내고 있고 영미식 신자유주의 모델과 유럽 대륙식 “유연 안정성 모델”, 그리고 민주당의 비정규직 개악안 모두에 비판적인 올바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교환가치 내지 가치 증식의 세계를 넘어 참된 인간성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든가, “노동력이 노동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 아니라 개인적 소질과 민주적 합의에 따라 사회적으로 조절되는 창조적 활동이 되어야 한다”는 강수돌의 제안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대안이기도 하다.이 밖에도 앞서 지적했듯이 이 책에는 명백히 우경화를 함의하는 정책들도 담겨 있다. 이는 애초 민주노동당과의 분당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분당 당시 분당론자들이 여러 좌파적 미사여구를 사용했으므로 분당 시도가 민주노동당 내 자주파보다 더 좌파적인 방향을 지향하는 것인지 우경적 방향을 지향하는 것인지 세간인들이 구별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지만, 당시 민주노동당 좌파 의견그룹 다함께는 그 진정한 본질을 꿰뚫어 봤다. 이 책에서도 드러나듯이 여전히 그다지 좌파적 방향은 되지 못하는 듯하다.
따라서 진보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진보신당의 제안 중 민주노동당과의 차별성 두기는 해묵은 종북/친북 타령 말고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듯하다. 그렇다면 민주당이나 친노 세력과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과제에는 성공했는가? 이데올로기적·정치적으로 이들과 독립적인 정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출발은 괜찮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치에는 세력도 중요하다. 아직 진보진영은 노무현 왼쪽의 대안적 세력을 충분히 만족스러운 규모로 건설하지는 못했다. 이제 이런 과제는 노동계급의 투쟁 활성화와 진보대연합의 성공 여부에 상당히 달려 있게 됐다.
물론 이 과제는 진보신당만의 몫은 아니다. 단기적으로는 민주노동당의 민주대연합 올인 정책이 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여전히 민주노동당 분당 당시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진보신당이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나친 경쟁심을 누그러뜨리는 일도 진보대연합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변수가 될 듯하다. 선거와 투쟁 모두에서 진보진영의 단결 대응이 얼마나 잘 성사되느냐에 따라 ‘리얼 진보’를 세력화하는 과제의 성패가 달려 있을 것이다.
주
- 노무현, 《진보의 미래》, 동녘, 2009, 42쪽. ↩
- 이 글에서 각 필자들의 주장을 다룰 때, 처음에는 이름과 직책을 모두 소개하고 다음에는 직책을 생략한다. ↩
- 오건호, ‘정책보다 운동 … 노동조합 나서야, 진보신당 사회복지세 재검토 필요’, <레디앙>(2010.4.23). ↩
- 우석균, ‘복지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2010 보건의료진보포럼 자료집》(2010.1.31). ↩
- 참여계획경제론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평가는 정성진, ‘‘‘21세기 사회주의’와 참여계획경제를 위하여”,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한울아카데미, 2007을 참고할 것. ↩
- 이정구, ‘칼 폴라니 사상에 대한 비판적 평가’, 《마르크스21》 3호(2009년 가을), 323쪽. ↩
- 같은 글, 320쪽. ↩
-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책세상, 2002, 79쪽. ↩
- ‘국민 다수 “민노총 영향력 크다”’, <한겨레>(1997.1.22). ↩
- 이하 내용은 알렉스 캘리니코스, ‘자본주의 국가의 다양한 형태’, 《마르크스21》 4호(2009년 겨울), 243~244쪽을 참고했다. ↩
- 이런 특징 때문에 레닌은 노동당을 “자본주의적 노동자당”이라고 규정했다. 그만큼 노동당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토니 클리프·도니 글룩스타인, 《마르크스주의에서 본 영국 노동당의 역사》, 책갈피, 2008, 171~172쪽. ↩
- 같은 책, 607쪽. ↩
- 김하영, ‘민주노동당 분당 기도는 정당성이 없다’, <맞불> 71호(2008년 1월 14일자호). ↩
- 북한 체제 형성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김하영, ‘북한 국가자본주의의 형성’,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 책벌레, 2002를 보시오. ↩
- 진보신당 대변인실 논평 ‘북한 로켓발사 유감, 그러나 강경대응 옳지 않다’(2009.04.05), ‘북한의 ‘벼랑끝 전술’ 지나치다’(2009.4.14). ↩
-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논평, ‘오바마 행정부의 핵태세검토보고서NPR, 북한 등에 예외를 둔 비핵보유국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의 천명’(2010.4.7). ↩
- 같은 글.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논평, ‘안보리의 ‘핵확산 방지 결의안’에 주목하며’(2009.9.25). ↩
- 김용욱, ‘핵안보 정상회담: 구 체제를 지속하는 오바마의 신 핵안보 체제’, <레프트21> 29호(2010년 4월 10일자호). ‘핵안보 정상회담은 핵없는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 <레프트21> 30호 온라인 기사(2010.4.22) http://www.left21.com/article/8062 ↩
- 1930년대 프랑스 인민전선에 대한 비판은 레온 트로츠키, 《트로츠키의 프랑스 인민전선 비판》, 풀무질, 2001을 보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