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
막스 베버 사회이론에 대한 비판
왜 21세기에도 빈곤은 사라지지 않을까? 자원이 부족해서일까, 부자들의 욕심 때문일까? 왜 전쟁은 끊이지 않을까? 전쟁 없는 세상은 불가능한가? 왜 여성들은 아직도 차별받을까? 온갖 흉악 범죄는 왜 발생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 대체 왜 우리 사회는 이토록 불평등하고 폭력적이며 비인간적인지를.
사회학은 이런 물음에 답하고 우리가 사는 사회를 설명하고자 생겨난 학문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은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려고 사회학 강의를 듣는다. 그런데 사회학은 “사회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놓고 갈등하는 장”이다.(키어런 앨런,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 12쪽. 이하 쪽수만 표기) 예컨대 동료나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가난이 개인의 게으름 탓이냐 불평등한 사회구조 때문이냐 하는 토론이 벌어지듯이 사회학에서도 사회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다.
가끔 이런 논쟁은 칼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를 둘러싼 논쟁으로 되돌아간다. “자본주의의 기원, 성격, 계급의 역할 등에 대한 그들의 해석, 그리고 사회가 변하는 방법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모두 오늘날 토론에도 영향을 미치며 재등장한다. 두 사람이 근대 자본주의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포괄적인 개관을 해놓았기 때문이다.”(12) 이 둘은 오늘날의 사회학자들과는 달리 학문 간 엄격한 구분에 구속되지 않았고, “근대 사회의 근본 동력을 모색하는 웅대한 계획을 가졌다.”(13)
그런데 “고전 사회학 내부에서 논쟁의 승자는 종종 베버이기 마련이다.”(14) 베버는 마르크스와 달리 ‘무리하게’ 현대 사회를 양대 계급 모델로 파악하거나 ‘경제결정론’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베버는 복잡한 다계급 모델과 다수 요인에 따른 인과관계를 중시했다. 또, 베버는 ‘당파성’에 기초를 두고 노동계급 혁명을 옹호한 마르크스와 달리 연구자의 ‘가치 중립’을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베버는 마르크스에 대항할 ‘세련된’ 대안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베버가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베버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마르크스주의 정치에 도전하고자 했다.
소련 붕괴 뒤 베버의 영향력은 더 커졌다. 일찌감치 ‘관료제’의 위험을 경고하고, 노동계급은 분열해 공통된 정치적 목표를 발전시키지 못한다고 했던 그의 주장이 입증된 듯했기 때문이다. 이제 베버는 사회학계에서 “가장 위대하며 가장 숭배되고 조용히 존경을 받는 권위자”가 됐다.(29)
아일랜드의 마르크스주의자 키어런 앨런Kieran Allen은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에서 이런 베버의 권위에 정면 도전한다. 앨런은 더블린대학교에서 고전 사회학 이론을 가르치며 여러 해 동안 베버를 주제로 강의했다. 또, 아일랜드 사회와 정치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썼고, 아일랜드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리더이기도 하다. 앨런은 이 책에서 베버의 사상과 실천을 소개하고 조목조목 비판한다. 앨런은 베버가 열렬한 제국주의자이자 친자본주의자였다는 점을 폭로하고 그의 사회학이 ‘객관적’이거나 ‘가치중립적’이기는커녕 특정한 정치적 견해가 깊이 스며들어 있음을 들춰낸다.
제국의 사회학자
앨런은 먼저 베버를 그가 살던 사회의 정치적 무대 위에 올려놓고, 그가 ‘가치중립적’ 사회학자가 아니라 (마르크스처럼) 매우 정치적인 사회학자였음을 밝혀낸다. 마르크스가 착취받는 노동계급의 이익에 관심이 있었다면 베버는 독일 제국의 이익에 관심을 뒀다는 게 차이였을 뿐이다.
베버는 19세기 말 산업화한 유럽 강대국들이 세계를 재분할할 때 독일의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정책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는 “독일이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역사가 내린 의무일 뿐 아니라 대중이 남부럽지 않은 삶을 향유하기 위한 전제 조건”(40)이라고 믿었다. 베버는 제국주의적 팽창이 독일 산업 발전에 득이 된다고 봤다. “우리에게는 외부의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며, 시장의 확대를 통해 경제적 기회를 확대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 결국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세력을 해외로 확대시키는 것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아프리카 동해안에 있는 열두 척의 선박은 시점에 따라 종결될 수 있는 열두 건의 무역협정보다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45)
베버의 첫 중요 연구서인 《엘베 강 동부 독일의 농촌 노동자 실태》도 독일 제국의 이익을 바탕으로 썼다. 19세기 말 엘베 강 동부에 살던 독일 농부들이 농지를 버리고 도시로 나가기 시작하자 그 지역에 폴란드 계절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됐다. 그러나 베버가 보기에 엘베 강 동부의 토지는 “단지 경제적 단위일 뿐 아니라 지역의 정치적 지배 중심”(46)이어서 프로이센이 독일 전체에 지도력을 발휘하려면 이 지역을 계속 통제하는 것이 중요했다. 베버는 폴란드 노동자들의 이 지역 유입이 국가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폴란드 노동자들을 “짐승”이라고 불렀고, 독일 농부들을 그 지역에 재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버는 제1차세계대전에도 열광했다. 그는 생전에 전쟁을 목격할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기뻐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이 전쟁은 대단히 훌륭하다.”(280) 그는 독일이 영국과 러시아에 맞서 싸우는 것이 “막중한 사명”이라고 주장했다.(281) 앨런이 보기에 베버는 “국민들 사이의 투쟁”이 “인간 생활의 중요한 특징”이고, “국가의 위대성이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51) 그리고 “국민들 사이의 투쟁”에서 승리하려면 국가의 지도력이 사활적이라고 봤다. 특히, 독일의 미래를 책임질 국가의 지도력을 어느 계급이 발휘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했다.(52)
앨런은 베버가 “기업가들의 지도력”을 중시했다고 강조한다.(61) 그런데 당시 독일의 부르주아지는 프랑스나 영국의 부르주아지와 달리 봉건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데 앞장서지 못했다. 그 결과 독일 자유주의 운동은 1848년 혁명 동안 독일을 통일하고 민주주의를 확대하며 산업화를 촉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할 기회를 놓쳤다. 봉건제를 폐지하려는 의지보다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 투쟁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것이다. 결국 독일의 정치적 지도력은 부르주아지가 아닌 융커[지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부르주아 계급과 독일 제국 강화라는 목표에 충실한 학자였던 베버는 이를 매우 안타까워했다.
상인 출신 국회의원의 아들인 베버는 부르주아 계급의 일원이자, 철저한 자본주의 옹호자였다. 앨런은 베버가 “개인 사이의 경쟁적인 투쟁을 가장 소중히 해야 할 최상의 가치”라고 봤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상상할 수 있고 실현 가능한 것 가운데 가장 합리적”인 체제로 봤다고 비판한다.(251) 저자가 보기에 베버는 시장이 “사람들의 욕망에 대해 분명하고 합리적인 한계를 설정한다”고 봤고, 따라서 사회주의는 “시장을 폐지하기 때문에 효과적인 가격을 결정할 방법이 없다”고 여겼다.(255)
베버가 “노동자들의 이해를 보호하고 자본주의의 인도주의적인 측면을 요구한 점에서 때때로 마르크스에 가깝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앨런은 이런 이미지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가령 베버는 “임금노동”을 정당화했다. 베버는 합리성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는데, “경영진이 노동자들의 선정과 사용 방법에 대해 포괄적인 통제를 하면 일반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경제적 합리성을 거둘 수 있다”고 봤다.(256) 그래서 앨런은 베버가 “개인주의적 이기심이 모든 진보의 동기가 되는 힘”이라고 생각했고, 자본주의를 “엄청난 불평등을 야기할지도 모르지만 기술적으로 능률적일 수 있는 유일한 체제”로 봤다고 비판한다.(257)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베버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여기서 베버는 왜 자본주의가 아시아가 아니라 서유럽에서 시작됐는가 하는 물음에 나름으로 답을 내놓았다. 그 답은 종교, 특히 종교개혁이었다.
1 가 출현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고 봤다. 하나는 합리적인 법률 구조와 이를 공정하게 집행할 수 있는 훈련된 관료들이고, 다른 하나는 합리적 경제 ‘정신’, 즉 자본주의 정신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각각 개별적으로 발생할 수 있으나, 이 두 가지가 우연히 결합될 때 혁명적인 결정체[근대 자본주의 — M21]가 나타난다.” 2 여기서, 자본주의 정신이란 “인생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모든 즐거움을 엄격하게 회피하면서 점점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다. “이 정신은 절제하고 근면한 부르주아 계급을 형성”하고 노동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근대 노동계급을 탄생시키는 데 필요했다.”(72)
베버가 자본주의 출현의 근본 원인이 프로테스탄티즘에 있다고 단순하게 주장한 것은 아니다. 베버는 임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합리적 자본주의베버는 동양에서는 이런 자본주의 정신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서유럽에서는 바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여파로 이런 ‘혁명적’ 정신이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중세 시대에 돈벌이란 “‘비열한 것’, 곧 더럽고 죄를 짓는 것”으로 취급됐다. “돈이란 ‘부정 이득’”이었으며 가끔 “똥”으로 묘사되기도 했다.(72) 종교개혁은 이런 중세의 전통적 문화를 뒤흔들었다. 루터와 칼뱅의 가르침이 결정적이었다.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한 루터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이 내린 ‘소명’이나 ‘천직’이 있다는 교리를 설파했다. 루터는 속세에서 벗어난 신성함을 추구하던 가톨릭의 전통에 반대해 ‘진정한 신성함’이란 이 세상에서 맡은 바 의무를 완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버는 루터의 가르침으로 일상생활에서의 노동이 하느님이 맡긴 임무가 됐다고 주장했다.
베버가 보기에 종교개혁에서 더욱 혁명적인 요소를 끌어낸 것은 칼뱅이었다.(73) 칼뱅은 신이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갈 것인지를 미리 정해 놓았다는 ‘예정설’을 폈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신이 과연 선택된 사람인지 아닌지 불안해 했다. 베버는 칼뱅파가 “자기가 선택됐다고 믿는 것, 모든 의심을 악마의 유혹이라고 물리치는 것이야말로 각 개인의 절대적 의무”라고 가르쳤다고 썼다.(74)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신도들을 금욕주의로 이끌었다. “게으름과 시간 낭비가 가장 큰 죄악이 됐다. 모든 것이 소명 추구에 동원됐다.” 이렇게 해서 축적된 부는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징표였다. “아무도 자본가가 되려고 프로테스탄트가 됐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적으로 교의의 심리적 효과가 의외의 결과를 발생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저축이라는 금욕적 충동을 통해 자본축적”이 이뤄졌고, 여러 사업장에 “하느님의 뜻에 따른 인생의 목적으로 일에 매달리며, 맑은 정신을 지니고 성실하며 매우 근면한 일꾼”을 제공했다.(75)
앨런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베버가 어떻게 “사상이 역사의 실질적 힘이 되는지”를 보여 주려 했다교 지적한다. 베버는 관념이 “경제적 상황의 반영이나 상부구조로서 시작한다”는 “순진한 사적유물론”을 공격했다.(77~78) “물론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과 발흥하는 자본가 계급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79) 종교개혁은 봉건 질서와 귀족 제도에 직접 연결돼 있던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반란으로 간주됐다. 따라서 종교 사상 자체가 자본주의 세력의 반란을 자극하는 데 커다란 구실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베버는 왜 루터의 종교 사상이 당시에 광범한 지지를 얻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79) 앨런은 이를 설명하려면 더 광범한 사회적 배경을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유럽 사회는 일종의 ‘시장 봉건주의’를 특징으로 했다. … 시장이 확장되면서 생긴 불안[은] 봉건제도와 교회로 하여금 농민들에게 세금과 십일조 등으로 더 많은 수탈을 하게끔 강요했다. … 종교개혁은 바로 이 같은 문제점을 제기했기 때문에 커다란 지지를 받았다. 그것은 베버가 제시한 것처럼 추상적·신학적인 것이었을 뿐 아니라, 종교적·사회적·정치적 요구를 융합시킨 운동이기도 했다.”(80~81)
앨런은 당시 일어난 경제적 변화에도 주목한다. “여러 가지 지표를 보면 17세기 이전 봉건제도의 골격 안에서 자본주의가 팽창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 종교개혁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도시의 여러 계층에게 ‘소명’과 같은 관념이 새로운 뜻을 지니게 된 것은 바로 봉건제도 아래에서 자본주의와 시장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자본주의적 산업이 발달하던 당시의 사회에 어울리는 신앙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86~87)
또, 앨런은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낳았다는 명제를 뒷받침하려고 프로테스탄트 신학 교리 가운데 일부만 선별했다고 비판한다. 예컨대, 영국의 여러 프로테스탄트 저작에는 “부의 축적을 추구하는 삶에 대한 비판”이 나오지만, 베버는 이를 외면했다.(84)
마지막으로 앨런은 베버가 자본주의 발흥의 물질적 조건을 무시하다 보니, 초기 자본축적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 좀체 설명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식민주의의 가혹한 현실은 물론이고 초기 노동계급에게 시간제 노동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무지막지한 테러가 자행된 사실 등에 대해서 말이다.
결국 베버는 자본가들을 금욕적이고 성실한 “도덕적 인간”으로 치켜세우고, “자본주의의 기원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데 일조한 셈이다.
왜 아시아에서는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했을까?
17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아시아는 유럽보다 훨씬 발전한 곳이었다. “아시아의 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럽 여러 나라의 그것보다 컸다. 산업 기술도 유럽의 수공예 산업이 소유하지 못한 섬세함과 전통을 나타냈다. 그리고 서구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사용하는 더 근대적인 방법에도 아시아의 상인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신용거래, 자금 조달, 보험, 카르텔 등의 문제에서도 인도, 페르시아, 중국 등이 유럽으로부터 배울 것이라고는 없었다. … 그러나 19세기에 이르자 이 나라들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경제는 침체됐으며, 유럽의 공장에 필요한 1차 생산품의 공급자가 됐다.”(94)
베버는 종교 때문에 인도와 중국에서 토착 자본주의가 출현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서구의 산업 발달에 방아쇠를 당긴 것과 달리, 아시아에서는 힌두교와 유교가 자본주의의 출현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베버는 《인도의 종교》, 《중국의 종교》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힌두교 교리를 보면, 현세에서 얼마나 윤리적이었느냐에 따라 무엇으로 환생할지가 결정된다. 즉, 카스트 의무에 얼마나 충실하느냐에 따라 “개 창자의 벌레”로 환생할 수도, “여왕이나 브라만 딸”로 환생할 수도 있다.(100) 베버는 “기술적 변화와 직업적 이동성”을 가로막는 폐쇄적 신분제도인 카스트 질서가 자유 시장의 경쟁을 막았다고 봤다. “모든 직업의 변경, 모든 작업 기술의 변경이 교리상 타락을 야기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힌두교 내부에 경제적·기술적 혁명을 일으킬 수 없었으며, 자본주의를 쉽사리 배태할 수조차 없었다.”(102)
그러나 앨런은 종교가 아니라 인도 사회의 정치경제적 특징에서 저개발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대외무역의 양상, 산업의 지역별 배치, 신용 제도의 성격 또는 토지 자본의 축적과 도시로의 이전 사이의 상관성”, “인도의 정치 구조, 또는 무갈[무굴 제국]의 침공과 뒤이은 그 붕괴가 미친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효과” 등이 중요하다. 하지만, 베버의 《인도의 종교》에는 이런 논의가 전혀 없다.(106)
인도 자본주의 탄생을 방해했다고 베버가 주장하는 폐쇄적인 카스트 제도도 “서양 지배의 산물”이라고 앨런은 지적한다. 영국이 “인도인은 너무 분할되어서 인도를 국가로 발전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주입”하려고 “이전에는 여러 종파가 느슨하게 결합된 것에 불과했던 힌두교를 종교와 비슷한 것으로 만들”고 카스트 서열을 굳건히 했다는 것이다.(112~113)
그러나 베버는 “영국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인도의 발전을 얼마나 저해했는지에 대해 어디에서도 다루지 않는다.”(109) 이처럼 베버가 식민 지배의 결과를 간과한 것은 그가 인종차별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의 종교》에서 베버는 동양인들이 서구인들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라고 전제했고(108), “아시아인의 무제한적인 탐욕”을 비아냥댔다.(105) 이런 관점은 자연히 식민 지배 정당화로 연결된다. 베버는 “[인도에서] 소수 유럽인 지배층과 그들이 부여하는 영국에 의한 평화Pax Britannica를 제거하면 적대적 카스트, 종파, 종족 사이에 목숨을 건 투쟁이 시작될 것”이라고 주장했다.(105)
이런 식의 설명은 《중국의 종교》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앨런은 베버가 《중국의 종교》에서 “물질적 요인과 정신적인 요인을 연결시켜 포괄적으로 설명”하려 애쓰긴 했으나(114) 결국은 다시 종교로 돌아갔다고 비판한다. 베버는 중국의 관료제를 주도한 지식 계급의 종교인 유교에 주목한다. 앨런이 보기에 베버는 중국 지식 계급의 문화를 “‘노인’의 문화”로 봤고 유교를 “예절과 세상에 대한 적응을 권장”하고 “하느님이나 정신적인 왕국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하는 다른 종교들 같은 혁명적 힘은 없”는 종교로 치부했다.(117~118)
앨런은 중국 사회에 대한 베버의 분석에서도 유럽인의 우월감이 엿보인다고 지적한다. “전쟁과 대립으로 점철된 유럽의 역사는 발전과 활기를 가져왔다고 평가된 반면에, 중국 사회는 정체된 관료제를 만들어 낸 평화주의 때문에 멸시되었다.” 앨런은 베버가 “전쟁이 역사를 진보시키는 동력”이라는 견해도 은근히 피력한다고 폭로한다.(119)
베버는 중국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중국인들이 “특히 지적인 분야의 특이한 자극에 … 느린 반응”을 보이며 중국어가 “체계적 사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119~120)
앨런은 베버가 중국의 쇠퇴 요인을 종교의 근본적 결함에서 찾는 것을 비판한다. 그는 유럽 봉건제의 위기가 “영국과 네덜란드의 경우 혁명적인 수단에 의한 부르주아지의 발흥으로 극복”됐지만, “중국에서는 귀족들이 상인들을 더 강력하게 제어하는 데 성공하고, 아래로부터의 약진을 억눌렀”기 때문에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설명한다. 명나라 왕조는 “상인 계층이 지배의 기초를 혼란시킨다고 간주했기 때문에 그들을 적대시”했고, “인도와 아프리카 원정을 끝내고 해외 무역을 중단시키려고 했다. … 이 왕조가 농민 반란에 직면해 무너지자 상류층은 대부분 만주 왕조[청나라 — M21]에 충성을 다짐했다.”(122)
마지막으로, 앨런은 베버가 인도를 분석할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에 대해서도 식민 지배의 결과를 전혀 말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예컨대 “영국은 1841년 난징조약에 따라 중국에 아편을 반입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을 뿐 아니라 수십 년 동안 관세 정책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이것이 중국 자본주의의 발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123)
《중국의 종교》와 《인도의 종교》에서 베버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정신 형성에 프로테스탄티즘이 한 구실이라는 그의 중심적 명제를 뒷받침하려고 인도와 중국의 오랜 경제 발전 역사를 무시하고 이 나라들을 정체되고 수동적인 사회로 묘사했다. 그리고 식민 지배가 인도와 중국의 저발전에 미친 악영향을 무시해서 그 나라들의 정체를 종교 탓으로 돌릴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 두 권의 책은 제국의 창조를 정당화하고자 한 제국주의의 입장을 표명했다.”(125)
방법론적 개인주의
키어런 앨런은 이 책에서 베버 사회학의 방법론도 살펴본다. 베버가 열렬한 제국주의자였다는 사실과 얼핏 보면 모순돼 보이지만, “베버의 사회학은 ‘계급’이나 ‘국가’, ‘가족’ 등을 분해해 그것들을 개인의 사회적 행동이 일으킨 결과로 파악하려 한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베버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사회학자가 된 것은 아직도 우리 사이에 남아 있는 집단이라는 개념의 망령을 쫓아내기 위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회학 자체는 한 사람 이상 개인의 행위로만 진행될 수 있으며, 따라서 엄격히 개인주의적 방법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134)
베버의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 한계효용학파의 영향에서 비롯했다. 한계효용학파는 사회를 ‘시장을 통해 연결된 원자화되고 이기적인 개인들의 합’이라고 봤다. 이런 관점은 마르크스가 개인과 사회를 바라본 관점과는 정반대였다. 마르크스는 사회가 로빈슨 크루소 같은 개인들을 바탕으로 구축됐다는 생각을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사람은 사회에서, 그리고 사회를 통해서만 개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 사회적 관계는 개인보다 먼저 형성되어 개인의 신분을 만들어 내는 것을 돕는다. 달리 말하면 개인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이 구속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134)
베버는 한계효용학파 경제학을 자신의 사회학에 적용했다. 한계효용학파는 상품의 가치가 상품생산에 사용된 사회적 필요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되는 것(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이 아니라 특정 개인의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봤다. 상품의 가치는 추가로 얻는 효용(한계효용)을 측정해야 알 수 있는데, 개인은 서로 다른 욕망을 가졌으므로 상품에 객관적 가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249) 이와 마찬가지로 베버의 사회학은 사회 구조가 아니라 개인에, 그리고 개인이 자신의 행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이처럼 개인의 주관적 가치가 베버 사회학의 중심이었는데, 베버는 개인이 간직하는 가치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고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도 없다고 여겼다.
베버는 “현실에 대한 모든 지식이 행위자가 그것에 대해 취하는 특별한 관점에 의해 구성”된다는 극단적 칸트주의를 채택했는데, 이에 대해 앨런은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만약 어느 사회학자의 가치 체계가 월가의 특정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들이 탐욕적이고 혼란스럽다고 간주하는 반면에, 주식 중개인은 다른 가치 체계를 선택해 그것들이 능률의 모범적 사례라고 간주한다면, 우리는 누구의 견해를 옳다고 평가할 것인가?”(135) 앨런은 여기서 베버 작업의 상대론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권력 투쟁의 불가피성을 강조한 그는 가치 체계란 객관적으로 평가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베버는 독일 관념론의 전통에 따라 일반 법칙의 발견이 인간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어떻게 개인이 자기 행위를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선택하는지를 파악하게 해 주는 “이해verstehen의 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36) 즉, 다른 사람들의 동기에 접근하는 정밀한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인간 행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버는 이를 통해 “정신이나 문화, 동기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과학적일 수 있음을 보여 주고자 했다.(137)
여기서 베버의 ‘가치중립적’ 사회학의 필요성도 도출된다. 베버가 보기에 가치란 옳고 그름을 객관적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므로 서로 다른 가치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런데 앨런은 “갈등을 빚는 가치가 사회의 권력 투쟁을 반영하므로 사회학자들은 연구에 종사할 때 … 반대되는 가치를 가질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접근하려면 일시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배제”할 필요를 느낀다고 분석한다.(138)
베버는 광범한 사회적 필요라는 기준에 따라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앨런이 지적하듯이, “사회는 여분의 요트에 대한 백만장자의 주관적 필요성이 가난한 사람 수천 명의 식량에 대한 요구와 같은지에 대한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317) 여기서 ‘가치중립’이란 결국 “자유 시장의 원자처럼 된 개인에게 비판으로부터의 면책”을 주는 것일 뿐이다.
베버는 ‘가치중립적’ 연구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현재 질서에서 지배적인 정치적 가치를 슬쩍 가지고 들어왔을 뿐이다.”(317) “가치에 대해 비평할 수 없다면, 현재 체제가 지니는 지배적인 가치가 심각한 도전”에 부딪힐 일도 없을 것이다. 결국 베버의 방법론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지배계급에게 유용한 이론이었다.
다계급 세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사회학계에서는 ‘계급이 사라졌다’는 견해가 득세했다.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이 더는 유용하지 않은 듯했다. ‘계급’은 ‘개인’으로 대체됐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막스 베버는 당대 계급의 중요성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계급에 대한 베버의 언급 가운데는 마르크스의 주장과 흡사하게 읽히는 구절도 있다. 예컨대, 베버는 현대 임금 계약의 성격에 거의 환상을 품지 않았다. “고용주와 어떤 계약을 체결하는 노동자의 형식적인 권리는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에게 그 자신의 근로조건을 결정하는 데 실제로 조금도 자유를 부여하지 않[는다.]”(154)
그러나 앨런은 베버가 계급 갈등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자본주의 착취의 결과로 보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베버는 오히려 “권력 투쟁이 인간 생활의 핵심”이라고 보고, 계급과 신분 집단의 갈등은 “일반적인 권력 배분의 표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했다는 것이다.(156)
베버는 권력을 다른 사람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실현하는 기회라고 정의했다. 이런 정의에 따라 베버는 계급이 비슷한 생활 기회와 그 생활의 기회를 어떻게 얻는지를 결정하는 수단에 따라 나뉜다고 봤다. 그리고 이런 생활 기회를 결정하는 것은 “재산”이다.
그러나 앨런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어떻게 몇몇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상당히 많은 재산을 갖게 되었는가?”(156) 베버는 임금 계약의 형식적 평등이 허위라고 인정했지만, 부자들의 재산이 “제도적인 착취로부터 나왔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의 분석은 생산 체제의 착취 문제는 회피한 채, 생산이 끝난 후 시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에서 출발했던 것이다.(157)
앨런은 베버가 계급의 “분할적 성격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런 분석을 내놓게 됐다고 설명한다.(158) 즉, 베버는 “생산에서 형성되는 공통된 이해보다 시장에 만들어진 분할”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먼저 계급을 크게 세 유형(‘재산계급’, ‘상업계급’, ‘사회계급’)으로 나누고 각각을 더 세분화했다. 또, ‘불로소득 생활자’(금융자본가)와 제조업 자본가를 구분했고, 노동자들도 숙련자와 비숙련자로 나눴다. 화이트칼라는 노동자와는 다른 범주의 계급으로 봤다. 베버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통일된 지배계급이나 통일된 노동자계급은 없다”는 것이다.(159) 앨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대신에 표출되는 것은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싸움이다. 각 집단이 혼란스러운 시장의 곳곳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그 결과, 베버에게는 왜 노동자들이 임의로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급을 동일시하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적 공간이 거의 없었다. 그의 광범위한 사회학에서는 개인만이 실재이며, … 노동자들이 공유한 경제적 관심이 어떻게 계급의식적인 조직으로 이어졌는지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베버의 행동 사회학에는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없다.”(160~161)
베버는 계급 구분뿐 아니라 ‘신분’에 따른 사회 분할도 중요하게 봤다. 신분은 특권이나 명예의 서열에 따라 나뉜다. 베버는 사람들이 스스로 신분 집단을 형성해서 자신들의 특권을 보호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특별한 신분적 특권을 지닌 ‘교육받은’ 계층으로 화이트칼라에 주목했다. 화이트칼라는 민간 부문이나 공공 부문 관료제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자신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신분 집단이다. 베버가 보기에 이들은 노동계급의 일부가 아니라 관료 계급에 속한다.(164)
신분에 대한 베버의 주장은 매우 혼란스럽고 모순돼 있기 때문에 오늘날 사회학계에서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예컨대, 베버는 화이트칼라와 궁정 기사를 설명하는 데 똑같이 신분 개념을 사용했지만, 앨런이 지적하듯이 “봉건 사회에서 궁정 기사를 보호했던 신분의 장벽은 현대 자본주의에서 공무원이나 화이트칼라들의 상대적으로 불확실한 ‘신분’ 상황보다 훨씬 영속적이며 엄격했다.”(165)
화이트칼라와 노동계급을 구분한 그의 분석은 한 가지 잘못된 유산을 남겼다. “화이트칼라와 육체 노동자 사이의 견고하고 지속적인 장벽”이 있다는 잘못된 주장이 그것이다.(165) 물론 “20세기 초에 베버가 사무직원과 육체노동자 사이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어 전자와 후자가 다른 계급에 속한다고 생각했음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당시 사무직노동자는 사무실 안의 일을 처리할 하인을 고용하기도 했다. … 고용주는 그와 업무를 협의하고 그의 판단에 의존[했다.]” 20세기 초의 사무직은 중간 관리자 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버가 죽은 뒤 관리직의 기능이 사무직 업무로부터 분리됐으며, 사무실도 공장과 똑같이 합리화 과정의 대상이 되었다. 고용주는 사무직 종사자를 동맹자로 간주하는 대신에 그의 생산성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하고자 했다.”(172~173) 즉, ‘화이트칼라가 프롤레타리아화’했으며, 그 결과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사이의 주된 차이는 사라졌다. “1930년대 중엽에 숙련된 육체노동자들의 임금이 일반적인 화이트칼라의 그것을 앞질렀으며, … 단기 계약직이나 임시직 노동자들이 모두 화이트칼라의 영역에 침투했다. … 이 모든 것은 노동조합의 새로운 회원 가운데 가장 많은 수가 화이트칼라인 까닭을 설명한다. 교사나 간호사의 파업이 이제는 광부나 부두 노동자의 파업보다 더 흔할지도 모른다.”(175~176)
지배의 사회학
계급과 신분에 대한 분석에서 보듯이 베버는 “권력 투쟁이 인간 생활의 핵심”이라고 봤다. 베버의 이런 사상은 니체의 영향에서 비롯했다. 니체는 “세계는 권력 의지이며,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베버는 니체가 귀족 사회를 찬양한 것을 옹호하지는 않았지만, “마르크스와 나란히 니체를 자기 시대의 중요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겼다. 베버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권력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니체의] 견해를 받아들였다.”(182~183) 베버는 지배를 위한 투쟁이 영원하므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은 언제나 존재한다고 여겼다. 베버는 “가장 세련된 형태의 ‘민주주의’를 통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없애려는 생각은 … 어떤 것이라도 공상일 뿐”이라고 말했다.(183) 베버는 ‘지배’를 특수한 성격의 권력 행사라고 여겼다. 지배는 “특정 내용이 포함된 명령에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 복종할 가능성”이다.(185) 베버의 ‘지배’ 개념에는 더 심오한 뜻도 포함돼 있다. 베버는 피지배자들이 단지 외부에서 주어진 지배자들의 명령을 준수하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내적 자기 규범으로 삼는 것이 진정한 ‘지배’라고 했다. “베버에게 지배란 이처럼 ‘합법적인 권위’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4 첫째, 전통적 지배는 먼 옛날의 전통과 관습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족장, 가부장, 봉건 귀족이 행사하는 지배가 이런 유형이다. 둘째, 카리스마적 지배는 영웅적인 인물의 특별한 신성함, 영웅적 행동, 개인적 매력 등을 바탕으로 한다. 혁명 지도자, 예언자, 전사 등이 이 유형의 지배를 행사한다. 셋째, 합법적·합리적 지배는 합법적 규범에 의한 지배다. 관료나 정부 장관 같은 공직자가 행사하는 지배 유형이다.
이런 정의를 바탕으로 베버는 역사적으로 세 가지 합법적 지배 유형이 있다고 봤다.앨런은 각 지배 유형을 설명하면서, 지배에 관한 베버 사회학의 두 가지 중심 가정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첫째, 베버의 지배 유형에는 “시장 메커니즘으로부터 생기는 지배 형태”가 빠져 있다.(187) 베버는 시장 지배 권력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히만 언급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의 지배는 핵심적이다. 평범한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좋든 싫든 임금을 삭감하거나 노동조건을 후퇴시키려는 기업인들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
5 베버의 설명대로라면, 어떤 지배자가 오랜 기간 통치한 것을 두고 그 지배자가 합법성을 획득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배자는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합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오랫동안 지배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주의 정부,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 정권, 미얀마의 군부, 현재의 사우디 왕가 등은 모두 강압을 통해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했거나 아직도 권력을 유지한다.”(188)
둘째, 베버가 지배를 정의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베버는 지배가 곧 그 자체의 합법성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베버의 도식에는 “비합법적 지배라는 지배 유형이 존재하지 않는다.”게다가 지배자가 대중에게 약간의 합법성을 획득한 경우라도 사람들이 지배자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무지한 상태에 놓이기도 하고, 체제가 일시적으로 물질적 보상을 해 주기도 하며, 반대 세력이 약화되어 있거나 흡수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베버는 사람들이 왜 복종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이유는 무시하고, 그 대신에 그들이 지배자에게 백지수표를 준다는 사실만 이야기한다.”(189)
결국 베버의 지배 사회학에는 ‘지배자의 시선’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대중은 대상이지 역사의 주체가 아니며, 지배자의 의지를 실천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의 분석에서는 “국민 대중이 과거에 합법적으로 생각했던 지배자를 어떻게 전복”했는지 찾아볼 수 없다. 베버에게 진정한 행위자는 “자신들의 지배를 강제하는 엘리트, 카리스마를 지닌 영웅, 강대국의 지도자들”뿐이다.(189)
관료제
베버가 말한 셋째 지배 유형인 합리적·합법적 지배는 현대 사회에 나타나는 지배 유형이다. 이 지배 유형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나 전통적 지배자의 임의적 판단에 의한 지배와는 달리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합법적인 규범”에 의한 지배라는 점에서 합리적이다.(204) 합법적·합리적 지배 유형에서는 규범을 관장할 관료 계층이 고도로 발달한다. 관료는 사적 업무와 공적 업무를 명확히 구분하고 규칙에 따라서만 일한다. 관료제는 “계층별 피라미드를 이루고, 위쪽에 있는 직책이 아래쪽에 있는 직책을 감독한다. 규칙은 각 직책에 따라 마련되며, 관리는 그것에 부합할 수 있게끔 훈련을 받는다.”(205)
베버는 관료제를 가장 효율적인 조직 형식이라고 봤다. “관료 조직이 발전한 결정적인 이유는 항상 다른 어떤 조직보다 앞선 순수한 전문적 우월성이다. … 정교함, 속도, 명쾌함, 기록에 대한 지식, 지속성, 신중성, 통일성, 엄격한 복종, 알력이나 물적·인적 비용의 감축 등은 엄격하게 관료적인 행정에서는 최적의 수준에까지 올라간다.”(208)
그러나 그는 관료제의 비인간화 경향도 지적했다. “관료제는 더 완벽하게 발전할수록 ‘비인간화’되며, 공적 업무로부터 사랑, 증오, 그리고 계산할 수 없는 순전히 개인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정서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하는 데 더욱 완전히 성공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의해 그것의 특별한 미덕이라고 평가된다.”(261)
또, 베버는 관료제의 “경직된 정신”이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억압한다고 우려했다. “개별 노동자의 성과는 수학적으로 측정되고, 각자는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가 되며, 이것을 알고 나서는 자기가 더 큰 톱니바퀴가 되어야 한다고 안달한다. 세상이 언젠가 이 작은 톱니바퀴들, 사소한 일에 매달려 있으면서 큰 일을 얻으려 하는 작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리라 생각하면 끔찍하다.”(266)
그러나 베버에게는 대안이 없었다. 그는 관료제를 비난했지만 다른 한편에선 관료제를 조직화의 유일한 방법으로 여겼다.(268) 베버는 자본주의가 관료제를 낳는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은 관료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베버는 관료주의를 벗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훈련된 전문가인 현대의 관료가 어디에서든 일단 지배하기 시작하면, 그 권력은 절대 파괴할 수 없다.”(266) 베버가 보기에 관료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역동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형태의 지도력뿐이었다.(61)
그러나 과연 현대사회에서 관료제는 불가피한가? 앨런은 “비관료주의적 대안도 여전히 가능하다”며 베버의 이런 암울한 전망에 대안을 제시한다.(267)
앨런은 먼저 관료제가 왜 발생하는지를 설명한다. 관료제는 “노동의 사회적 분할과 고도의 희소성 그리고 인간 노동에 대한 제한 등이 있는 사회에서 발전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계급은 “사회를 감시하는 전문화된 관료 조직”이 필요하므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분할한다. 정신노동은 “노동을 어떻게 조직화해야 할지에 대한 지식을 집중시키고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경영자의 몫이 된다.”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은 행정이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게끔 훈련받는다. “사람들이 사회의 일반적인 문제에 참여할 만큼 충분한 자유 시간이나 문화적 자원을 갖지 못하”는 것도 관료제가 유지되는 이유다.(272)
또, “사회에서 요구되는 기초 상품의 지속적인 부족도 항상 특정 규칙에 따라 그 상품들을 분배하는 소수의 특권층을 만들어” 낸다. 트로츠키는 소련의 관료제를 분석하면서 이 점을 훌륭하게 지적했다. “관료적 지배의 기초는 소비재가 부족하여 서로 싸우게 되는 사회의 가난이다. 상점에 상품이 충분할 경우에는 구매자가 원할 때 찾아온다. 상품이 거의 없을 경우 구매자는 줄을 지어 설 수밖에 없다. 줄이 매우 길어지면 질서 유지를 위해 경찰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273)
앨런은 계급 없는 사회에서는 사회를 감시하는 전문적 조직이 더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하루 노동시간을 급격하게 줄이면 대다수 사람들이 일과 자율 행정을 결합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 방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272)
베버가 사람들이 이기심밖에 가지지 않았으며 자연히 공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냉담하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앨런은 관료제의 물질적 토대를 지적한다. “국민 대다수가 자신들의 생활 문제를 결정할 권력을 정말로 가진다면, 그들은 집단 형태의 자율 행정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274) 따라서 문제는 사람들이 자율 행정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사회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집단적으로 통제하느냐다.
베버의 유산과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
베버는 철저한 엘리트주의자였다. 베버의 사회학은 “권력 엘리트가 역사의 참된 주체이며 대중은 불가피하게 수동적이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베버가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을 끔찍한 일로 여긴 것은 당연했다. “소비에트를 통해, 그리고 볼세비키 같은 대중 정당을 통해 조직된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그에게는 너무 끔찍했다.”(290)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졌을 때 베버는 독일 노동자들이 러시아 노동자들을 ‘모방’해 투쟁에 나설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베버는 러시아 혁명을 다룬 글에서 부르주아지의 결정적 구실을 부각하려고 노력했다. “베버는 러시아 노동자의 자주적 행동을 소홀히 다뤘으며, 그들을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볼모로 간주했다.”(290) 베버는 독일 혁명 당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리프크네히트는 정신병원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동물원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295) 한 마디로 말해 베버는 철저하게 부르주아 계급의 편이었다.
오늘날 베버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사회학자는 많지 않다. 그럼에도 베버는 몇 가지 유산을 남겼다. 먼저, 국가 발전의 동력을 찾는 데서 “내재적인 문화적 요인에 초점을 맞추는”(66) 베버의 방법은 ‘근대화 이론가’들에게 계승됐다. 인도와 중국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힌두교와 유교 때문이라고 베버가 주장했듯, ‘근대화 이론가’들은 저개발 국가들의 미발전이 그들의 문화 탓이라고 주장한다. 반대로 산업화에 성공한 나라들은 기업가 정신을 북돋워서 그렇게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데 매우 유용한 논리다.
둘째, 베버의 ‘다계급 모델’ 이론은 ‘노동계급은 죽었다’고 말하는 이론가들에게 자양분을 제공했다. 특히,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블루칼라 노동자의 차이를 과장하려는 사람들에게 베버의 이론은 매우 유용했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로부터의 변화는 관료주의적 악몽으로 이어질 뿐이라는 지배적인 견해”에서도 베버의 유산을 발견할 수 있다.(322)
이런 이론들은 모두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 역사유물론, 노동계급의 혁명적 구실, 사회주의적 전망 ― 을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가 낳은 오물들 ― 전쟁, 환경 파괴, 불평등, 착취 ― 에 맞서 싸운다. 특히, 사람들은 2008년 세계경제 위기를 겪은 후 자본주의의 대안이 무엇인지 궁금해 한다. 최근 경제 위기의 책임을 떠넘기려는 지배자들에 맞서 몇 차례 총파업을 벌인 그리스 노동자들은 오늘날 자본주의를 뒤흔들 노동계급이 사라지기는커녕 여전히 강력함을 보여 준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하는 이론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베버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유용한 안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