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7호를 내며
이명박은 거의 레임덕에 가까운 신세를 벗어나고자 ‘친서민’과 ‘공정한 사회’라는 카드를 들고 나왔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순식간에 30만 부나 팔렸다니 한국의 보통 사람들이 얼마나 정의에 목말라 있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묻어가도 유분수지 이명박이 수사修辭로라도 “공정한 사회” 운운하는 것은 정말 역겹다. ‘공정한 사회’를 들먹인 첫 날 이미 그는 비리 정치인과 기업인들에게 특별사면이라는 특혜를 줬고, 그가 지명한 총리와 장관 후보자 둘이 온갖 비리와 부도덕성이 폭로돼 20일 만에 낙마했다. 소화하지 못할 표어를 내걸었다 급체急滯한 격이다. 이로써 정치 위기를 극복하고자 친위 내각으로 국정 후반을 돌파하려던 그의 계획은 일단 엉망이 됐다.
‘친서민’이 말뿐이라는 얘기는 이제 집권당 국회의원도 대놓고 한다. 권영진 의원은 “정부는 말만 서민 서민 하면서 실제로 예산을 뒷받침하지 않고 있다”며 “취업 후 학자금 상환 제도를 도입하면서 저소득층 성적 우수자에게 장학금 지원을 약속했으나 예산 편성이 안 돼 한 푼도 못 주고 있다”고 투덜거렸다. ‘친서민’ 정책의 또 다른 상징이던 보금자리주택도 건설업계의 요구에 밀려 사전예약 물량이 축소됐다. 최근 발표된 8·29 부동산대책은 서민들의 빚으로 집값 거품을 유지하려는 뻔뻔스런 친기업·친부자 정책이다. 경기가 ‘회복’됐다지만 물가가 올라 실질소득은 감소하고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아직 소폭이지만 한 차례 더 예고되고 있는 금리 인상은 이런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켜 노동자들의 불만을 증폭시킬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 야당뿐 아니라 진보진영도 벌써부터 2012년 총선과 대선 대응에 관심이 쏠려 있다. 이명박에 반대하는 방법으로 노동자 투쟁 같은 대중 자신의 행동은 관심 밖으로 밀려난 듯하다. 물론 2012년 총선과 대선 대응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대중의 행동을 호소하고 건설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진보진영의 총선과 대선 대안도 마련한다는 자세가 아니다 보니, 무성하게 논의되고 있는 연대연합의 규범이 순전한 선거 논리로 대체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한나라당 집권 연장에 맞서 야권 전체의 연합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논리가 우세해지고, 이름은 “진보대연합”이되 실내용은 국민 연합(범계급 연합)인 ‘진보’ 연합(또는 통합) 버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는 취임사에서 무엇보다 야권 연대를 강조했다. 그래야 “진보적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즉, 2012년 대선은 “대통령이 누가 될 것이냐의 문제뿐 아니라 … 누가 그 정부에 들어갈 것이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연립정부를 염두에 둔 말이다. 이처럼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야권 연대에 ‘올인’하면서, 민주당이 점점 대중의 실망을 사고 있는 국면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7·28 광주 재보궐 선거에서 44.1퍼센트라는 높은 득표를 했지만, 오로지 그 지지를 민주당이 야권 연대에 진정성을 보이도록 압력을 넣는 데만 사용하려 한다. 즉,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의 가장 큰 차이로 야권 연대에 대한 진정성을 부각할 뿐, 제국주의와 시장주의 반대 같은 문제는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정희 대표는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에는 샛강,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는 한강이 흐른다는 말도 당시[18대 국회 이전, 즉 이정희 대표가 민주노동당 밖에 있었을 때] 있었는데?”라는 《시사IN》 기자의 질문을 받고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한나라당[은] … 연정 파트너로는 상상할 수 없다. 민주당은 어쨌든 같이 가야 하는 파트너다.” 현재 민주노동당은 진보대통합을 지지하고 있지만, 야권 연대에 대한 이와 같은 확고한 태도를 고려하면 그 진보대통합은 야권 연대를 전제로 한 것일 수밖에 없다. 야권 연대가 진보대통합의 진정한 내용을 좌우할 위험이 크다는 뜻이다.
김태일 신임 민주노총 정치위원장도 진보대통합 구상을 밝히면서, “[6·2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취했던 반MB 연대를 지지한다”고 했다. “통합된 진보정당이 후보를 세울 경우 공동정부 구성이라는 조건으로 민주당과 연대하여 단일 후보를 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레디앙>과의 인터뷰). 요컨대 그의 구상은 ‘진보대통합 해서 야권 연대로 가자. 그래야 민주당과의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는 것인 듯하다. 또, 김태일 정치위원장은 진보통합 원탁테이블 제안 대상에 민주노총과 진보정당들 말고도 국민참여당과 창조한국당을 포함시켰다. 민주노총의 이전 태도와 다른 부분이다.
사실, 지난 몇 달 사이, 특히 지방선거에서 심상정 진보신당 전 대표가 유시민 지지를 선언하고 경기도지사 후보를 사퇴하면서 진보대연합에 참여당이나 민주당 ‘개혁파’를 포함시키려는 경향이 확대된 듯하다. 물론 성찰과 반성을 전제로 하자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느냐도 하나의 쟁점이다. 예를 들어, “선 진보대연합, 후 조건부 민주대연합”을 주장하는 손호철 ‘진보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모임’ 대표는 “선 진보대연합” 부분에 “민주당 내의 좌파”를 포함시킬 수 있다는 견해다. 그러면서 그는 정동영이 “가장 완벽한 반성문을 제출”하며 사회복지 부유세 등을 주장했다고 주목한다. 그러나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이 날카롭게 비판했듯이, 정동영은 2007년 대선에서 종부세에 대한 입장 변경은 없다고 기염을 토하다가 선거를 며칠 앞두고 태도를 싹 바꿔 종부세 완화를 외쳤던 신뢰하기 어려운 기회주의자다. 그런 정동영이 이번에는 사회복지 부유세를 고수할 수 있을까?
민주당부터 진보세력까지 하나로 뭉쳐 미국식 양당제 모델을 만들자는 ‘빅텐트’론이 진보진영에서 별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진보세력이 상당한 지지 기반이 있는 한국에서 미국식 양당 체제를 만들자는 것은 명백한 후퇴다. 그러나 진보정당의 독립성이 형식적 독립을 뜻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덧붙여야 한다.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은 민주대연합 비판에 대해 ‘지금은 전과 달리 독자적 진보정당이 있으므로 비판적 지지 같은 오류를 피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조직의 독자성이 정치의 독자성을 자동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조직 노동운동 내에서 친민주당·친참여당 정치를 구현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의식을 무디게 하고 사기를 저하시킨다.
이번 호에 진보대연합 논의를 다루지 못해 이렇게 간단히 언급했다. 짧은 편집자 머리말에서 이 문제를 더 깊이 다루기는 불가능하다. 한두 호 내에 이 쟁점을 둘러싼 최근 논의를 심도 있게 다루기로 약속하면서 이쯤에서 줄여야 할 듯하다.(초기의 진보연합 논의는 4호에서 다룬 바 있다.)
이번 호는 주목할 만하거나 논쟁적인 이슈를 많이 담고 있다. 먼저, 유럽 반자본주의 좌파 활동가 심층 인터뷰는 유럽의 재정 위기와 그리스 노동자 투쟁의 상황을 쉽고 생생하게 들려줘 독자들이 재정 위기와 긴축 정책을 어떻게 봐야 하고, 노동자 운동과 좌파는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효과적인지 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각각 영국과 그리스의 반자본주의 활동가인 조셉 추나라와 니코스 루도스는 인터뷰를 통해 한국의 좌파 활동가들에게 아주 유익하고 풍부한 분석과 경험을 전해 주고 있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어떻게 이룰 것인가?’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해 보험료를 우선 인상하자는 주장을 날카롭게 비판한 글이다. 필자인 정형준은 인의협(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사로, 한국 의료의 문제점을 폭넓게 살펴보면서 오건호·이상이 씨 등이 제기하는 보험료 우선 인상론의 문제점을 설득력 있게 파헤친다. 그는 한국 의료 체계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심각하게 높은 민간 의존성이 한국 의료의 최대 약점이라고 지적하고, 공공병상을 확충하는 등 의료 체계의 공공성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의료 공공성과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려면 국가와 자본에 대항한 투쟁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번 호는 트로츠키 사망 70년을 <특집>으로 다뤘다. 트로츠키는 1940년 8월 21일 망명지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함께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고, 20세기의 가장 암담했던 시절인 1930년대에도 파시즘에 맞서는 공동전선을 제안하며 진정한 사회주의 정치를 발전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가족들이 거의 다 스탈린에게 살해당하는 온갖 고초 속에서도 반스탈린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트로츠키가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스탈린주의와는 다른 진정한, 마르크스적 사회주의 전통이 이어질 수 있었다.
이번 특집에는 두 글을 실었다. 하나는 폴 르블랑의 ‘트로츠키는 살아 있다!’로, 유명한 전기 작가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전기를 비판한 것이다. 소련 붕괴 후 선진 자본주의 세계의 극좌파가 대개 트로츠키주의 단체들인 상황이 되자 우익과 지배 이데올로그들은 트로츠키를 주된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르블랑은 우익 이데올로그의 공격에 맞서 트로츠키를 훌륭하게 방어하고 있다. 아직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전기가 국내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출판 가능성이 높으므로 미리 르블랑의 글을 읽어 볼 가치가 있다.
다른 하나는 트로츠키 사후 트로츠키주의의 하나인 국제사회주의경향의 기원을 다룬 최일붕의 글이다. 이 글은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 이론, 빗나간 연속혁명 이론, 상시군비경제 이론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할 뿐 아니라 이 이론들의 오늘날의 의미도 짚고 있다.
<시리즈 기획 한국 경제>는 이번 호에 그 세 번째 순서로 ‘한국 진보진영의 경제 대안 논의’를 다뤘다. 필자 강동훈은 이 글에서 한국 진보진영의 개혁주의적 경제 대안 중 주된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주주 자본주의와 재벌 개혁, 보편적 복지국가를 둘러싼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특히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견해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으므로 이와 함께 이번 호 <서평> 코너에 실린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이론과 실천’을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낸 책 세 권을 묶어 서평한 이 글은 이 단체의 견해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요약하고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번 호는 G20과 프랑스 반자본주의신당 NPA를 <쟁점>으로 수록했다. 먼저, ‘G20 - 세계 민중에게 고통 전가하는 ‘글로벌 거버넌스’’는 G20이 어떤 기구인지를 충실하게 폭로하고 있다. 필자 김어진은 이명박이 G20을 임기 중 최대 치적으로 삼고 싶어하지만, G20은 금융 위기 해법을 제시하기는커녕 위기의 대가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려 할 뿐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이명박이 말하는 개발(개도국 지원)의 본질도 파헤치고 있다. 또, 이 글은 런던·피츠버그·토론토에 이어 서울에서도 G20에 항의하는 대중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자본주의신당 NPA - 프랑스 급진 좌파의 새로운 지평’은 유럽 최대의 극좌파 단체로, 자본주의는 물론 스탈린주의 및 사회민주주의와는 다른 대안으로 세계 급진 좌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NPA의 기원과 진화를 우호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필자인 이기웅은 프랑스 파리대학교에서 러시아 언어학을 공부한 덕분에 프랑스어로 된 관련 자료들을 직접 원용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21》 편집팀은 NPA의 등장에 환호하는 입장이지만, NPA 모델이 현 한국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고 본다. 우리는 해외의 훌륭한 사례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고 그로부터 매우 많이 배울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런 경험이 한국에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선진 자본주의 세계에서조차 각국 노동계급의 의식과 조직 상태가 아직 매우 불균등하기 때문이다. 독자들도 이런 분석적(‘비판적’) 관점에서 해외 좌파의 경험을 고찰하기 바란다.
이번 호 <현대 진보사상 조류>는 ‘민족주의 기원과 전파 -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비평’이다. 이 글은 스코틀랜드 민족 문제를 다룬 저작으로 명예스런 아이작 도이처 상을 받은 닐 데이비슨의 논문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데이비슨은 앤더슨의 접근법이 일종의 ‘포스트모더니즘적 마르크스주의’라면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 때문에 앤더슨은 민족의 역사적 실재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오히려 민족 담론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앤더슨은 민족을 ‘상상의’ 것으로 보기 쉬웠다는 것이다. 비록 앤더슨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어떤 대목에서 부정해도 그의 전반적인 논조는 그런 경향을 보인다. 반대로 데이비슨은 민족 일반의 기원과 형성을 자본주의의 발달과 밀접하게 결부시켜 논의한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훼손된 역사유물론적 민족 이론을 전면 복원하려 했다는 점에 데이비슨 글의 의의가 있다. 그의 글이 남의 저작에 대한 논평 형식을 취하느라 불충분한 듯하다고 느끼는 독자는 크리스 하먼의 《민족문제의 재등장》(책갈피)을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편집자 김하영·최일붕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