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보험료 우선 인상론 비판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어떻게 이룰 것인가?
2008년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를 거론했고, 집권 초에는 병원과 민영 의료보험의 결합을 촉진하는 의료법 전부개정안과 경제자유구역 영리병원 허용을 넘어서 전국적 영리병원 허용을 골자로 하는 ‘의료 선진화 로드맵’을 발표했다. 그러나 2008년 촛불 항쟁으로 드러난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밀려 의료 시장화를 노골적으로 시행하지는 못했다.
1 등 이명박 정부의 의료 민영화 시도는 거세다. 더구나 한국은 전례 없이 빠른 고령화 사회 진입 속도, 2 높은 노동강도, 긴 노동시간, 낮은 수준의 공공보건 서비스로 말미암아 건강보험 지출이 계속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2010년 들어서 건강관리서비스법안·병원채권·병원경영기업MSO 도입을 포함해 각종 의료 민영화 법안을 도입하려 하고, 6월 지방선거 패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료 민영화론자들을 전방위에 포진하는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의료 민영화 추진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 의료 공공성을 강화하는 가장 올바르고 효과적인 방안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한국 의료 체계의 형성 과정 한국 의료 체계는 일제가 남긴 의료 체계를 계승하면서 시작됐다. 일제 말 관공 의료 체계는 해방 후에 점차 미국식 의료 체계로 바뀌었는데, 그것은 전염병 통제와 공중 보건 활동은 국가가 관리하고 일반 진료는 민간에 일임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에 이미 전체 의사 3천8백81명 중 76.6퍼센트가 개업의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의료 시설이 대부분 파괴된 상태에서 미국 원조에 의존하게 되면서 미국식 의료 체계가 더욱 안착됐다. 이때 미국식 전문의 제도와 전문 과목 중심의 진료 시스템 등이 생겨났다. 의료 부문은 전후 복구와 군비 지출 증가 때문에 자원을 제대로 배분받지 못했다. 의료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기초적인 건강보험조차 없었다. 1950년대에는 의료 인력, 약품, 병원 등 모든 의료 자원이 부족해 전염병 예방과 기생충 박멸 사업 같은 기초적인 공공의료 사업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1960년 한국의 영아사망률은 1천 명당 70명으로 매우 높았다(2009년 4.1명).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자원을 대부분 산업자본과 군비와 사회기반시설에 배치하며 국민 건강은 등한시했다. 더구나 자본축적을 위한 매우 높은 노동강도 때문에 노동자들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또한 공공의료 체계 구축을 소홀히 한 결과 1966년에 사립병원의 병상 수가 공립병원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6 1977년 의료보험 실시를 계기로 의료 수요가 급증하면서 사립병원이 급성장했다. 7 1977년 1백79곳이던 병원이 1987년에는 5백31곳으로 늘어났고, 대부분 사립병원이었다. 8
1970년대 산업화로 말미암아 도시 노동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자본의 처지에서도 노동력을 건강하게 관리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전염병 예방과 기생충 박멸 사업 같은 공공 예방 서비스가 일부 시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질병 치료는 여전히 공공 영역이 아니라 사적 영역에 남아 있었다. 1977년에 와서야 5백 명 이상을 고용한 일부 사업장에서 보장성이 낮은 건강보험이 도입됐다. 그러나 기업별 조합으로 운영돼 건강보험 재정이 기업의 자금줄 구실을 했고, 병원비 지출 제도도 병원에 유리한 ‘행위별 수가제’가 유지됐다.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결과 1988~89년 전 국민 건강보험이 도입됐다. 그렇지만 기업별 조합과 지역 조합의 분리, ‘행위별 수가제’는 그대로 유지됐다. 1985년부터 의료 인력 공급을 위한 의과대학이 증설되고 이에 발맞춰 대형 대학병원이 늘어났다. 1990년대 들어 1천 병상 이상을 보유한 병원(아산병원, 삼성병원 등)이 급격히 많아졌다. 이때부터 10년 넘게 병원끼리 과잉 경쟁한 결과, 병원 순위가 ‘자본조달 능력’에 따라 결정되면서 아산병원과 삼성병원은 2000년대 들어 2천 병상을 보유한 초대형 병원이 됐다. 이런 거대 병원 사이의 과잉 경쟁으로 자본집중 수준이 더 커졌고, 병원 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게 됐다.10 건강보험 보장성도 낮아 민간 건강보험 시장이 팽창하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1998년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의약 분업과 의보 통합을 실시하는 등 부분적으로 개혁 조처를 도입했다. 그러나 노동시장 유연화를 필두로 하는 병원 경영 합리화 과정과 “영리병원 허용, 민영보험 활성화”를 지향하는 의료 산업화 정책의 틀이 짜인 것도 이때였다. 2000년에 시작된 의약 분업에 반발해 의사들이 수익 손실을 이유로 폐업 대란을 일으키자, 정부는 2000~01년 사이 무려 네 차례에 걸쳐서 수가를 인상해 줬고, 그 탓에 건강보험 재정은 심각한 적자 위기를 맞게 됐다. 또, 2000년에는 대기업 ‘부자’ 조합과 도시·농촌의 ‘빈자’ 조합을 통합해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통합 건강보험이 시작됐다. 이는 ‘의료보험 연대회의’가 주도해 벌인 10년간의 노동자·농민·시민 운동을 통해 가능했다. 그 사이 병원 수는 급증해 급성질환 병상은 2000년 1천 명당 5.2침상에서 2007년 7.1침상으로 병상 수만 놓고 보면 수요를 초과할 정도로 많아졌다(OECD 평균 3.8병상). 그러나 전체 병상에서 공공 병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1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2003년 노무현 정부는 대중의 개혁 열망을 기반으로 집권했지만, 영리병원을 허용하고, 민간보험을 활성화하는 의료 산업화 정책을 추진했고, 한미FTA 등을 강행하면서 제약 자본의 특허권을 강화해 주고 서비스 산업을 영리화하려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무상의료’를 주장하며 ‘암부터 무상의료’ 같은 요구를 부분적으로 관철시키고, 경제자유구역 내 영리병원의 내국인 진료와 전국 영리병원 도입을 저지했다.
앞에서 간단히 살펴봤듯이 해방 후 지난 60년간 한국 의료보장 제도와 의료 체계 역사에는 대중 투쟁의 성과와 한계가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열악한 공적 의료 구조
11 결국 환자가 직접 내는 돈이 많은 셈이다. 게다가 지난 10년간 추진된 의료 산업화, 노동 유연화 정책 탓에 명목상으로는 공립병원인 국립 대학병원이나 의료원 등도 사립병원과 별 다르지 않은 기능을 하고 있다. 12 행정안전부나 광역자치단체가 독립채산제를 통해 병원에 흑자 경영 압박을 가하고, “수익성”을 기초로 업무 평가를 시행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의료 공급은 거의 사적 자본에 의존한다. 한국의 공공 병상 보급율은 10퍼센트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다. OECD 평균인 75퍼센트에 한참 못 미치고 OECD 국가 중 공공 의료 서비스가 가장 취약한 일본의 26퍼센트보다도 훨씬 낮다. 게다가 한국은 GDP 대비 의료비 지출이 6.8퍼센트로 OECD 주요국 중 가장 낮으면서도 민간 의료 지출은 GDP 대비 3.1퍼센트로 OECD 평균인 2.4퍼센트를 넘어서 OECD 주요국 중 미국 다음으로 높다.(그림1)멕시코 | 미국 | 한국 | 캐나다 | 이탈리아 | 독일 | 영국 | 일본 | OECD 평균 |
45.2 | 45.4 | 54.9 | 70 | 76.5 | 76.9 | 81.7 | 81.3* | 71.8 |
13 차등 병실료, 보호자 식대, 간병인 등은 모두 환자 부담이다. 14 민간 의료의 천국인 미국에서조차 하위 26.1퍼센트에 속하는 인구는 거의 무상으로 치료받는 현실에 비춰 보면 한국의 의료보장은 너무 열악하다. 15
의료비 보장도 취약하다. ‘의료 구호 제도’부터 보자. 현행 보건의료 제도에서 진료비 감면은 ‘의료 보호’ 제도라고 불렀던 기초급여 제도로 시행되고 있는데 진료비를 감면받는 인구는 전체 인구의 3.6퍼센트밖에 안 된다. 그나마도 전액을 보장받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2퍼센트이고 나머지는 부분적으로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이조차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항목에서만 면제가 가능하고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의료비는 전액 개인 부담이다.한국인의 96퍼센트가 적용받는 건강보험 제도를 보자. 보험은 공보험이든 사보험이든 위험보장 기능이 있어야 ‘보험’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건강보험은 이런 기능이 약하다. 한국의 건강보험 보장성은 55퍼센트 정도로 OECD 국가 중 멕시코와 미국에 이어 밑에서 셋째다. 취약한 공적 의료 구조가 의료 공급자의 자율성을 극대화한 ‘행위별 수가제’와 만나 의료비가 계속 증가했다. ‘행위별 수가제fee for service’는 검사, 처치, 처방 하나하나에 점수를 매겨 이를 기준으로 병원에 보험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행위 수가 많을수록 보험금을 많이 받을 수 있으므로 병원들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보험심사 기준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까지 행위를 늘리게 된다. 환자가 비용을 모두 부담하는 건강보험 미적용 항목은 제약 조건도 없다. 특히 새로 도입되는 시술이나 약품이나 검사 등은 그 효용성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대부분 건강보험 적용이 보류되는데, 환자들은 ‘신기술’이라는 병원 측의 소개에 취약할 수밖에 없으므로 1백 퍼센트 자기 부담으로 치료받기 일쑤다. 그래서 ‘행위별 수가제’에 대한 문제 제기가 계속 있었다.
이런 의료비 부담 때문에, 집안에 암 환자나 만성 중증 환자가 한 명 있으면 집안이 흔들리거나 거덜났다. 이런 현실을 낳은 건강보험에 대한 광범한 대중의 불만을 바탕으로 2005년 ‘암부터 무상의료’ 운동이 상당한 성과를 거둬 암 환자의 건강보험 적용 항목 본인 부담율이 5퍼센트로 낮아졌다.
연도 | 정액형보험 | 실손형보험 | 전체 | |||
수입보험료 | 증가 | 수입보험료 | 증가 | 수입보험료 | 증가 | |
2003년 | 55,102 | 100 | 8,351 | 100 | 63,453 | 100 |
2005년 | 72,648 | 131.8 | 12,317 | 147.5 | 84,965 | 133.9 |
2007년 | 90,146 | 163.6 | 21,732 | 260.2 | 111,878 | 176.3 |
2008년 | 95,000 | 172.4 | 25,000 | 299.4 | 120,000 | 189.1 |
자료: 이상이 외 2009 |
17 의료보장이 전반적으로 취약해 민간 보험 가입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또, 처음에는 특정 질환에 걸렸을 때 치료비를 보상해 주는 상품을 중심으로 시작된 민간 보험이 이제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본인 부담금을 전액 또는 상당액 보상하는 실손형 보험으로까지 확대됐다.(표2)
이런 운동들에 힘입어 의료보장 제도의 보장성이 어느 정도 강화되기는 했지만1990년대 보건의료 운동이 주요 과제로 삼았던 건강보험 통합과 의약 분업으로는 사적 영역에 의존하는 의료 공급 구조와 낮은 의료보장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 명백해지자, 2001년부터 보건의료 운동에서 무상의료 쟁점이 제기됐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무상의료’ 요구가 시작됐다. 노동자들은 열악한 공적 의료 시스템을 개혁하고자 투쟁했다. 2005년 민주노총의 보건부문 대정부 요구안은 다음 세 가지를 명확히 제시했다.
1. 병보다 더 무서운 병원비, 무상의료로 해결하라.
2. 공공병원 확충으로 질좋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라. 3. 선진국처럼 기업의 건강보험 부담률을 60퍼센트로 올려라.
결국 사립병원이 횡행하는 상황에서 공공병원 확충 요구는 무상의료와 더불어 옵션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 사립병원의 비중이 90퍼센트를 넘어서는 상황에서 의료는 이윤과 더욱 밀접하게 연결됐고, 기형적인 한국 의료 시스템은 더욱 악화했다. 예를 들어 병원의 지역 편중, 특정 전문과 의사와 병원의 성업, 특정 시술 선호, 특정 약품 사용 등의 문제가 있다. 사립병원은 의사들에게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를 지급하며, 심지어 서울대병원 같은 국립 대학병원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갑상선암 수술 건수는 OECD 평균보다 10곱절 많고, 척추 수술은 일본보다 7곱절 많다. 무릎 관절 치환수술도 지역 편차가 심하고,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그림2)
19 사립병원의 비중이 높다 보니 경쟁에서 낙오된 공공병원은 낙후해지거나 시장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20 서울대병원 같은 국립 대학병원은 말할 것도 없고, 지역 의료원 같은 거점 공립병원도 노후화하거나, 아니면 사립병원과 마찬가지로 비보험 진료가 증가하는 나름의 시장화 과정을 겪었다.
대형 병원의 독식도 엄청나서, 서울 아산병원과 삼성병원 두 곳의 암 수술 비중이 전체의 18퍼센트에 이른다.이렇게 공공병상이 거의 없는 기형적인 의료 공급 체계임에도 영리법인 비허용과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덕분에 현 의료시스템이 겨우 유지된 측면이 있다.
병원 자본과 보험 자본
한국에서 병원 자본은 1980~90년대에 대형 자본으로 성장했다. 한국의 병원 자본은 규제 없는 시장 제도를 통해 성장했지만 주로 대학병원 중심이어서 비영리법인 형태로 성장했다. 현재 대형병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학병원은 모두 학교법인, 사회복지법인, 의료법인 등 비영리법인 형태다. 다른 한편, 동네 의원을 제외하면 전체 병원의 절반 정도가 개인병원 형태다.
그동안 병원 자본은 사적으로 개업하고 매매할 수는 있었으나 영리법인은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자본 이동이 부자연스럽고, 병원 운영으로 큰 돈을 벌어도 그 돈을 학교, 종교 단체, 장학 재단 등 비영리법인 안에서만 순환할 수 있었다. 신자유주의 시장화를 추구한 김대중 정부는 ‘의료 선진화’를 명목으로 사립병원에 영리화의 길을 열어 줬다. 2002년 말 ‘경제자유구역 지정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는데, 이것이 영리법인 병원 도입의 발판 구실을 하게 됐다. 2005년 노무현 정부의 보건복지부 산하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는 영리병원 도입의 포문을 열었다.
지방에서 큰 성공을 거둔 전문 병원과 네트워크 병원 등이 의료 민영화의 첨병으로 나섰고, 병원협회와 의사협회가 노골적으로 의료 민영화를 주창하기 시작했다. 삼성생명 같은 보험 자본도 의료 민영화 관련 보고서를 내면서 보조를 맞췄다.
21 현재 초대형 병원 중 네 곳(아산병원, 삼성병원, 세브란스병원, 서울대병원)에서 하는 암 수술 건수는 전체의 28.1퍼센트에 이른다. 22
실제로 아산병원이나 삼성병원 같은 초대형 종합병원을 보면, 부대 사업이나 건강검진 등 비보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수익 구조면에서는 이미 충분히 영리화됐다. 2009년 부대 사업이나 검진 등의 수익을 제외한 진료 수익만으로도 매출 1조 원이 넘는 병원이 다섯 곳이나 된다. 2000년대부터 의료 민영화 추진론자들은 크게 두 가지를 동시에 요구했다. 하나는 영리법인 도입이다. 병원을 한층 더 영리화해서 주식이나 채권 등으로 자본을 모으고, 그 이윤을 배당으로 쓰거나 타 산업자본과 연계해 재투자하겠다는 것이다. 병원 자본가들의 처지에서는 지금까지 획득한 이윤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병원의 처지에서는 자본을 더 많이 모아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으므로 솔깃한 방안일 것이다. 또한 산업자본가와 금융자본가 들도 이윤율을 좀더 확실히 보장해 줄 수 있는 경쟁력 있는 병원 산업 부문에 투자하려고 군침을 흘리고 있다. 2004년부터 경제자유구역에 외국인 영리병원을 도입하려 했고, 그 뒤에는 이 병원들의 내국인 진료를 허용해 병원 영리화를 확대하려고 한다. 병원경영기업과 건강관리 회사 등을 허용해 영리병원 도입을 촉진하려는 계획이 현재 추진 중이다.다른 하나는 민간 의료보험 규제 완화다. 앞에서 썼듯이 한국의 민간 의료보험은 1997년 이후 급격히 성장해 기존 보험상품 시장이 포화되고 새로운 보험상품 판매 시장이 떠오르고 있는 지경이다. 2002년 집단 실손형 보험상품 허용, 2005년 개인 실손형 보험상품 허용 등 규제 완화 조처가 꾸준히 있었다.
현재 민간 의료보험사들은 개인 질병 정보를 제공하고 병원과 직접 계약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고 요구한다. 이를 통해 기존 제도 하에서 민간 의료보험의 안정적 재생산 구조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이는 병원 자본과 민간보험 자본의 일정 수준 이상의 결합을 뜻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민간 의료보험사들이 병원 자본과 점점 더 결합하다가 실질적으로 통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삼성생명은 이런 과정을 위의 그림처럼 설명한다.(그림3)
24 이는 한미FTA 반대 운동과 영화 〈식코〉 등을 통해 미국식 의료보험 제도의 위험성이 많이 알려진 데 힘입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보험 자본가들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고, 그동안 그나마 통제되던 진료비가 시장에서 임의로 결정되면서 병원 자본도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삼성생명의 이익이 더 증가할 것이고, 삼성병원의 수익도 함께 증가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2008년에 내놓은 경제 계획 자료들을 보면, 민간보험 도입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2008년 촛불 항쟁이 벌어지기 전부터 인터넷 등을 통해 ‘민영보험 및 병원영리화 반대’ 여론이 퍼져갔다.25 외다리로 오래 걸을 수 없듯이, 한쪽 부문만으로는 큰 이득을 챙기지 못한다.
병원 영리법인화와 민간보험 도입은 의료 민영화를 받쳐 주는 두 개의 다리다. 양쪽이 모두 성공적으로 도입돼야 기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다.26 그마저도 대부분 미용과 성형 같은 비보험 치료를 위한 상품이었다. 1997년 집권한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 노동당 정부도 보수당 정부에 이어 ‘시장 개방’을 추진했다. 공공지출을 줄이고,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부자 감세를 시행했다. 의료 부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의료 부문 공격은 다른 부문에 견줘 성공적이지 못했다. 노동계급의 불만과 저항이 있었고, 1차 의료를 책임지는 의사들도 국립 의료 시스템인 NHS 공격에 반대했다. 이 역시 공공병원 시스템이 그 기반에 있다.
그런데 공공병원의 비율이 높은 나라에서는 영리법인이 큰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민간보험도 큰 재미를 볼 수 없다. 미국처럼 공공병원 비율이 낮아야 ‘영리병원+민간보험’의 효율이 극대화될 수 있다. 영국에서는 1970년 민간보험이 도입되고 1991년에 보수당 정부가 민간보험 가입을 장려했지만, 공공의료 시스템에서 환자 부담금이 평균 2.7퍼센트밖에 안 되므로 민간보험 가입률이 10퍼센트 이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은 사립병원 비율이 90퍼센트 이상이므로 자본가들이 의료 민영화로 배를 불릴 수 있는 호조건이다. 2008년 10월 전 세계적 금융 위기 이후 케인스주의가 제한적으로 힘을 얻는 상황에서도 한국의 의료 민영화 공세는 강화되고 있다.그동안 한국의 의료 시민단체 NGO와 노동조합 등은 의료 민영화 반대와 함께 건강보험 문제를 중심적 요구로 다뤄 왔다. 그러나 한국의 기형적 의료 문제들은 공공병원과 공공의료 지원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기인했거나 악화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보건의료 운동은 이제 공공병상을 늘리는 것, 즉 사립병원을 공공병원화하거나 국유화하는 것에 좀더 강조점을 둬야 한다.
보험료 우선 인상론의 문제점
보건의료 부문 운동은 1987년 이후 공통의 운동 과제를 둘러싸고 여러 조직이 함께 단일한 공동전선 조직을 운영해 왔다. 1987~88년 전 국민 건강보험 도입 당시 보장성 강화와 보험료 공평 부과를 요구한 운동에서부터 노동조합, 농민단체, 보건의료인 전문가 단체, 빈민단체, 시민사회단체 들이 하나의 전국적 공동전선 조직을 만들어 운동을 건설했다. 이런 바람직한 전통은 1990년대 내내 유지됐고 2000년 건강보험 통합 운동 이후에도 ‘건강연대’ 같은 공동전선이 운영됐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보건의료 운동은 다른 시민사회 운동과는 달리 정부에 입각하거나 친 민주당 행보를 보인 인사들을 운동 지도부에서 배제해 운동의 분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단일한 운동 대오가 분열했다. 의료 민영화 반대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한 범진보 개혁 운동이 분열한 것이다. 노동자와 서민들이 먼저 보험료를 인상해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자는 ‘시민운동’의 등장이 분열을 촉발했다.
28 ‘저부담 저급여 저수가’ 논리는 병원 자본을 제외한 자본(보험 자본, 제약 자본 등)과 국가를 중립적이라고 여기거나 책임 주체에서 배제한 다음 낮은 건강보험 보장성을 수요자(환자·노동자)와 공급자(병원 자본) 간의 문제로만 접근하는 이론이다. 병원 자본은 이 이론을 종종 악용했다.
노동자들이 먼저 보험료를 인상하자는 주장의 연원은 “‘저부담 저급여 저수가’를 ‘적정부담 적정급여 적정수가’로 바꿔야 한다”는, 그동안 보건의료 학계 일부가 개진해 온 논리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2000년 김용익 교수는 보험료를 인상하지 않으면 국민 의료비 부담이 더 늘어나게 된다며, 보건의료 서비스 구성을 정상화하려면 수가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29 그러나 2008년 경제 위기 속에서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민주노총 등이 반대하면서 단결된 운동 대오가 유지됐다.
2005년에 보건의료노조가 ‘가구당 3만 원 더 내면 무상의료’라고 주장한 적이 있으나, 이 주장은 민주노총 내부의 비판을 받으며 설 곳을 잃고 사라졌다. 당시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국고 예산 지원 비중과 사용자 부담분을 높이자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그 뒤 2008년 이진석 교수는 “건강보험 재정을 1.5배 늘리면 보장성 90퍼센트가 가능”하다며 노동자들이 보험료를 올려 5조 원을 마련하자는 계획을 제출했다.그런데 2010년 7월 17일 “1만 1천 원의 기적으로 가계 부담은 줄이고 병원비 걱정은 없애자”고 주장하며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이하 시민회의)가 분리 출범하면서 의료 민영화 반대 운동의 분열을 야기했다.
노동자들이 먼저 보험료를 인상하자고 주장하는 시민회의에는 몇몇 세력이 참여하고 있다. 우선, 보편적 증세를 꾸준히 주장한 오건호 씨(전 공공노조 사회공공연구소 정책실장)로 대표되는 사회연대전략 지지 세력이다. 진보신당 건강위원회 중심의 교수들과 전 참여정부 인사들이 이 세력의 주를 이룬다. 2005년 오건호 씨는 정규직이 연금 보장 부분의 일부를 양보해 비정규직 연금을 조성하고 소득세 증세 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당시에는 국민연금과 관련해 사회연대전략을 주장한 것이다. 오건호 씨는 촛불시위가 한창인 2008년 6월 건강보험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의료 영역을 보자. 진보정당과 민주노총은 오래 전부터 무상의료를 주장해 왔다. 그런데 어떻게 무상의료를 달성할지에 대해선 사실 대답이 없다. “부유세를 거두면?”, “우리가 집권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질병으로 고통받고 가계가 무너지는 사람들에겐 멀리 있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보험료 인상과 보장성 강화를 함께 제안했다.
보장성 확대를 위한 구체적 방안을 내야 한다. 나는 몇 해 전 보건의료노조가 제기한 “가구당 월 3만 원 더 내면 무상의료”라는 구호가 발전되지 못한 게 아쉽다. 매년 연말에 벌이는 건강보험료, 수가 협상에서 노동조합이 ‘중대질환 보장성 강화’와 ‘건강보험료 인상’을 한 묶음으로 제안할 수는 없을까?
둘째, 보건의료노조와 사회보험노조의 지도자들이다. 나순자 보건의료노조 위원장과 김동중 사회보험노조 위원장이 시민회의 제안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보건의료노조는 앞에서 밝혔듯이 2005년에도 ‘가구당 3만 원 더 내면 무상의료’ 주장을 한 바 있다.
32 따라서 민주노총이 건강보험료의 기업 부담률을 올려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온 것은 정당하다.
그런데 한국 건강보험의 열악한 현실을 봤을 때 이는 부적절한 주장이다. 특히 재원 마련 구조를 보면,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한국 건강보험은 개선할 점이 많다. 한국에서는 건강보험료를 노동자와 기업주가 1 : 1 비율로 분담해서 납부한다. 우리와 의료 제도가 가장 비슷한 대만을 보면 노동자와 기업주가 1 : 2 비율로 부담하고, 프랑스도 기업주가 노동자보다 갑절 이상 부담한다. 네덜란드는 보험 민영화 이전인 2004년 기업주가 노동자보다 무려 6곱절 많이 부담했다. 독일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와 기업주의 분담률이 1 : 1이지만, 본인부담 의료비가 연소득 2퍼센트를 넘지 않도록 하는 상한제가 있다.(한국 노동자 평균 임금 기준으로 환산하면 본인 부담 의료비가 1년에 70만 원을 넘지 않는 수준이다.)33 제약협회는 임시총회 등에서 줄기차게 적정 부담을 위한 보험료율 인상을 주장했다. 34 의료 산업의 확장을 위해서다. 여기에 ‘저부담 저급여 저수가’를 ‘적정부담 적정급여 적정수가’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 35 이 이용됐다.
그러나 시민회의의 주장에는 기업 부담이 빠져 있다. 보건의료노조와 사회보험노조의 지도부가 기업의 부담률을 높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현 제도 하에서 보험 재정 전체를 늘리고자 노동자들의 보험료 인상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럽다. 실제 병원협회는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보험재정 확대를 위한 보험료 인상을 주문했고,혹 병원 산업의 성장을 통한 보건 노동자들의 이익 실현이라는 점 때문에 자본과 싸우기보다는 노동계급의 양보를 먼저 주장하려는 것이라면 이는 명백한 ‘노사협조주의’일 것이다. 보건의료노조와 사회보험노조 지도부의 시민회의 참여가 평조합원들의 동의에 바탕을 둔 것인지도 의문이다. 실제로 사회보험노조 경인지부는 시민회의에 반대하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보험료를 인상하여 보장성을 강화하자는 운동을 건강보험에 종사하고 있는 노조가 주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조합원들의 동의가 전제되지 않고 절차적으로도 중대한 하자가 있는 사안으로 당연히 폐기되어야 한다.
셋째, 민주당-친민주당 인사들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시민사회정책수석을 역임한 서울대 김용익 교수, 이성재 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등이 있다. 제주대 이상이 교수도 김대중 정부 시절 민주당의 보건의료담당 정책위원이었고 참여정부 때는 건강보험공단 연구소장을 지냈다.
마지막으로,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는 위에서 언급한 세 세력에 포함되는 인물들이 대부분 몸담고 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보편적 복지’를 매개로 민주당과의 연합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시민운동론이나 정치운동론의 베이스 캠프 기능을 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 기능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정책네트워크 집단으로서의 느슨한 연계망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 민주당 내 개혁파의 시민사회운동 진지다. 후자의 의미로 활동하는 핵심 인사는 이상이 교수와 이성재 씨 등이 있다. 전자의 의미에서는 더 광범한 세력이 참여하고 있는데, 대안연대회의 소속의 일부 교수들이나 진보신당에 몸담고 있는 교수들이 그렇다.
참여정부 출신 인사들과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국민 부담을 긍정적으로 본다. 전 국민 소득세 증세가 필요하다는 ‘보편적 증세’를 주장한다. ‘복지를 확대하려면 정부와 사용자뿐 아니라 국민도 부담을 늘려야 한다’는 것은 노무현 정부 ‘참여 복지’의 핵심 내용이었다. 당시 진보진영은 이를 두고 복지 확대 책임을 국민에게 떠넘기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시민회의의 제안은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이미 폐기된 전략의 부활이자 ‘참여 복지’의 재판으로 볼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복지 개혁이란 ‘제3의 길’ 식 복지 ‘개혁’(이른바 ‘적극적 복지’, ‘일하는 복지’)이고 성장 논리와 시장 개혁을 받아들이는 분배안으로서, 당시 부자 감세와 한미FTA 추진 등을 보건대 복지는 외피일 뿐 실제로는 대자본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치적 수사였음이 입증된 바 있다. 시민회의의 제안은 이런 ‘제3의 길’ 식 복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계급으로부터의 후퇴
37 국가와 기업에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노동자 스스로 돈을 내겠다는 일은 훌륭하다며 칭찬한 셈이다.
시민회의 주장의 핵심은 노동자가 보험료를 가구당 1만 1천 원(현행 보험료의 약 40퍼센트) 인상하면 ‘자동으로’ 정부 국고 지원분과 기업 부담분도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법정 보험료율이다. 그러나 보험료율의 동반 상승은 국가와 기업의 동의가 있어야 실행 가능하다. 〈조선일보〉는 시민회의의 출범을 앞두고 ‘무상의료’ 의제 확대를 경계하면서 국가와 기업의 추가 부담에 난색을 표했다. 그러면서도 “건보 재정 건전화를 요구하면서도 재정 부담은 정부나 기업 탓으로만 돌리던 상황에서 이번엔 국민 개인 부담부터 촉구하고 나선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는 이진석 교수의 주장을 인용했다. 그러나 노동자가 먼저 보험료를 인상하자는 주장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정부는 2006년까지 지역의보 재정의 50퍼센트를 지원하기로 했지만, 2002년 42.7퍼센트, 2003년 46퍼센트, 2004년 45.2퍼센트, 2005년 45.1퍼센트, 2006년 42.5퍼센트에 그쳐 기준 비율인 50퍼센트에 도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또, 정부는 2007년부터 전체 보험료 예상액의 20퍼센트를 국고에서 지원하기로 했지만, 2007년 17.3퍼센트, 2008년 16.7퍼센트, 2009년 18.5퍼센트만 지원하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실제 지난 8년 동안 정부가 국고지원 비율을 지키지 않아 미납된 금액이 총 4조 2천억 원에 이른다.이런 상황에서는 노동자와 기업주의 보험료 납부 1 : 1 비율과 정부의 전체 보험료 예상액 20퍼센트 지원조차 자동으로 지켜지리라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궤적을 보건대 기업과 국가는 시민회의의 보험료 우선 인상 요구를 향후 보험료 인상 협상에 이용하면서, 자신들의 부담은 늘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39 요구 사항을 ‘시민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현 제도가 시민들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이렇듯 시민회의는 재정 마련 방안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논외로 한 채 바로 보험료 인상 얘기를 꺼낸다. 다시 말해, 시민회의의 주장은 현행 제도는 그대로 둔 채 보장성 강화만 쟁점으로 삼자는 것이고 노동자가 먼저 양보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나머지 주장들은 부연일 뿐이다.
시민회의는 기업 부담률을 올리자는 주장은 하지 않고, 그나마 정부 지원을 30퍼센트로 늘리는 것마저 시민들이 알아서 결정하면 그만이라고 하는데,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국고 지원 증액은 의사협회 등 의료 직능단체들도 하는 요구다.40 즉, 요구의 선명성을 거론하기 전에 그런 요구와 행동이 계급운동과 계급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야 한다. 따라서 양보안이라는 겉모습뿐 아니라 시민회의의 이론에 숨겨진 핵심, 실천적 결론, 정치적 의도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타협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시민회의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운동 과정에는 불가피한 타협이 있을 수 있고, 또한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그런 타협을 통해 운동이 발전하고 계급의식이 발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처럼 마르크스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는 (이론을 구성하는) 항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법에 있다.보험료 인상 선언 운동의 비현실성
시민회의가 건설하는 운동은 오로지 ‘보험료 인상 선언’이다. 나머지는 오건호 씨가 말하듯이 ‘지렛대 원리’로 자동으로 실현된다. 그리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우선, 보험료 인상 ‘선언’이 보험료 인상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41 지속된 경기 침체 상황에서 가족을 부양하고, 각종 대출금 갚으랴 자녀 교육비 대랴 쪼들리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보험료 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노동자와 그럴 수 없는 노동자로 분열할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처지에서 40퍼센트는 매우 큰 인상폭이다. 보상이 크니 그냥 올려보자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게다가 보험료율은 누진율이 아니고 정률이므로 가처분소득이 적은 저소득층에게는 더 큰 부담이 된다. 또한 소득이 정규직 평균 임금 이상인 노동자들의 보험료 인상액은 월 2만 원 이상이 된다.노동자들의 처지와 분열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남는 문제는 보험료를 인상할지 말지 결정하는 것이 국가라는 점이다. 따라서 국가와 자본이 보험료를 인상하도록 만들려면 그들을 압박할 투쟁과 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상 선언 운동은 기본적으로 계몽적인 운동이다. 압박할 대상과 투쟁할 쟁점은 희석돼 있고, 선명한 것은 오로지 참여자들의 선언뿐이다. 결국 보험료를 인상하는 데조차 적극적 투쟁이 필요한 현실에 비춰 봤을 때 보험료 인상 선언이라는 전술은 비효과적이고 공상적이다.
둘째, 보험료가 인상됐을 때 보장성 확대가 뒤따른다는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번번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듯이 국고 지원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노동자의 보험료 인상이 국가와 자본의 보험료 인상을 자동으로 강제한다고 보는 것은 순수한 법치적 사고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도 국가와 자본을 압박해야 한다. 그런데 정해진 국고 지원 이행도 강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선언 운동만으로 국가와 자본을 압박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42 이처럼 기업 부담률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프랑스처럼 싸워야 높일 수 있다.
게다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시민회의는 기업 부담률을 늘리자는 주장도, 국고 지원을 늘리자는 주장도 하지 않거나 소극적이다. 제약 자본 통제에 관해서는 논의조차 하지 않는다. 공급자 통제와 수가제 변경 문제는 나중의 과제로 미뤄 뒀다. 그러나 기업 부담률을 늘리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노동자와 기업주의 5 : 5 비율을 4 : 6으로 바꾸면 기업이 약 4조 3천억 원을 더 부담하게 된다. 나라마다 이 비율은 다르지만 프랑스는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기업 부담을 계속 늘리고 있다.현재 국고 지원율이 전체 보험료 예상 수입의 20퍼센트로 고정돼 있는데 이 비율을 높이는 것도 핵심 문제 중 하나다. 2009년 기준으로 국고 지원을 20퍼센트에서 30퍼센트로 늘리면 2조 7천억 원을, 40퍼센트로 늘리면 5조 4천억 원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다. 김영삼 정부 시절 40퍼센트였던 법인세는 지난 20년간 계속 떨어져 이제 20퍼센트를 바라보고 있다. 부동산 보유세인 종부세와 재산세 등도 줄고 있다. 이 상황에서 국고 지원을 늘리라는 주장은 부자 감세에 맞서 빈부격차 확대를 막는 효과도 낼 수 있다. ‘사회보장세’ 같은 특수 목적세를 신설하거나 부자 증세를 통해서 말이다. 이는 다른 복지 운동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미칠 것이다.
병원 자본 통제 문제
우여곡절 끝에 보험 재정이 확충되더라도 확대된 보험 재정 지출을 통제해야 한다는 문제가 남는다. 앞에서 봤듯이 민간에 의존하는 한국 의료 체계에서 이 부분은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다. 초대형 병원들은 보험 재정 확대를 갈망해 왔다. 따라서 병원 자본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될 수 있다.
표3. 연도별 보험료율, 노동자 월평균보험료, 총보험재정 변화 추계 | ||||
연도 | 보험료율 | 노동자 월평균 보험료 | 건강보험적용인구 1인당 월평균 보험료 | 총보험료 (단위: 천 원) |
2001 | 3.4 | 26631 | 11274 | 8856157614 |
2002 | 3.63 | 32374 | 13425 | 10927688306 |
2003 | 3.94 | 41863 | 16248 | 13740850544 |
2004 | 4.21 | 46287 | 17985 | 15614222872 |
2005 | 4.31 | 50034 | 19104 | 16927713937 |
2006 | 4.48 | 53788 | 20851 | 18810579314 |
2007 | 4.77 | 59073 | 23690 | 21728699897 |
2008 | 5.08 | 65918 | 26836 | 24973026442 |
2009 | 5.08 | 66759 | 27620 | 26766081793 |
2010 상반기 | 5.33 | 72190 | 30717 | 누적중 |
출처: 국민건강보험공단 2010 |
최근 5년 동안(2004~09년) 개인이 내는 월평균 보험료는 1만 7천9백85원에서 2만 7천6백20원으로 53.6퍼센트 인상됐고, 2001년부터 계산하면 거의 2백 퍼센트 인상됐다. 2001년부터 보험료율도 56.2퍼센트 인상됐고, 총보험재정은 무려 3배 이상 증가했다.(표3) 그러나 이 기간에 보장성은 55퍼센트 안팎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즉, 재정 지출 절감 방안이 없는 보험료 인상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것이다.
43 이런 지적에 대해 오건호 씨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립병원이 대부분인 한국처럼 공급자 통제가 불명확한 상황에서는 설사 보험료 인상으로 보장성을 높이더라도 보험료가 해마다 추가 인상될 수 있다. 1960년 미국에서 의료 시스템을 개혁했을 때도 공급자 통제 없이 재정 확충만 우선 시행한 결과, 막대한 의료비가 지출되는 현재의 미국 의료 시스템만 남게 됐다.이것이 민간 소유 의료 체제, 행위별 수가제도의 힘이다. 만약 보험료를 올리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더 낮은 보장성과 더 커진 본인 부담금 몫을 감수하고 있을 것이다.
공공병상을 늘리고 공급자를 통제하는 방안을 마련하지 않고 보험료만 인상해서는 보장성을 강화할 수 없다는 것을 오건호 씨도 아는 듯하다. 그러나 보험료 부담만 키우고, 보장성을 강화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가 아니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결과라면 보험료를 40퍼센트 인상해도 보장성 90퍼센트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고 앞으로 보험료가 계속 올라도 넋 놓고 쳐다만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민회의 주장의 모순이다.
45 행위별 수가제도 바꿔야 한다.
비용 억제 방안도 필수다. 현재 건강보험 재정 지출의 30퍼센트를 차지하는 약제비 10조 원 중 10~15퍼센트만 줄여도 1조 1천억~1조 6천억 원을 절약할 수 있다. 한국의 약제비 비율은 OECD 평균보다 15퍼센트 정도 높다.이처럼 정부와 기업에 부담을 더 지우고 약제비를 절감하고 수가 방식을 바꾸면 노동자들이 더 부담하지 않아도 충분히 보장성을 확대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국고 지원 확충 요구는 국가재정 우선순위와 직결된 문제이므로 사회간접자본 투자, 성장 산업 투자, 은행 퍼주기, 4대강 사업 등 토목산업 지원, 국방비 등보다 복지 예산의 우선순위를 높이는 효과가 있고,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공공병상 확충 같은 실질적인 국고 재정 지원책을 실현할 수 있다. ‘도시 보건지소’ 도입이나 의원과 병원의 국유화는 국고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공공병상 확충은 단순한 보장성 확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운동이 노동자 운동에 미치는 영향, 노동계급 의식과 조직에 끼칠 영향이다.
계급의식
시민회의는 국가와 기업이 더 내라는 진보진영의 정당한 요구를 철회하고, 노동자들이 먼저 양보하자고 한다. 오건호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 역시 국고 지원 확대가 갖는 진보성에 동의한다. 동시에 ‘건강보험 하나로’가 지닌 재정 확충 방안 역시 국고 지원 못지않게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 무엇보다도, 보험료 지렛대 방식이 가지는 강점은 국민들에게 건강보험 제도 내부에서 보장성 확대를 달성하는 구체적인 경로를 보여 준다는 점이다. 무상의료가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국고 지원의 장벽을 어떻게 허물지 난감해 하던 시민들에게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풀뿌리 운동에 있어서 이는 정말 중요한 요소다.
보험료 인상 운동이 노동자들에게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길’이란 국가와 기업이 하지 않으려 하는 일을 스스로 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즉, 노동자들이 스스로 보험료 인상을 선언하면서, 국가에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개별적 실천에 만족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훨씬 구체적 실현 방법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싸울 때 후진적인 사상 같은 평상시에는 넘지 못할 듯하던 벽을 극복하는 것을 목격한다. 노동자들은 국가와 기업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계급의식과 조직을 획득해 간다. 금 모으기 운동처럼 국가와 기업을 대신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계급의식의 퇴보를 뜻한다. 재정 위기를 국가와 기업이 책임지든 노동자가 책임지든 수치상 결과(재정적자 폭 감소)는 같을 수 있지만, 이후 사회의 변화 방향과 분위기에는 전혀 다른 효과를 미치게 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행동하면서 의식도 변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봤다. 운동에서 당면한 요구를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계급의식을 획득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오건호 씨가 말하는 보편적 복지나 복지 체험이 노동자들의 투쟁과 의식 변화 없이 이루려는 것이라면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계급 운동에 해를 입힐 위험성이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보험료 인상 요구는 목적을 위해 과정을 생략하는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다. 즉, 제도권 안에서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계급 세력 관계와 이후 진보진영의 전망 등은 과감히 생략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정치적 의도를 교묘하게 숨겨 놓을 수 있다.
한편, 시민회의는 시간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상이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계적으로 공공병원의 비중을 30퍼센트 수준까지 높여야 하겠으나, 이것도 단기간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행위별 수가제를 하루아침에 폐지할 수 있는가? 낭비적 지출 구조의 핵심인 행위별 수가제를 최대한 빨리 포괄적 보수 지불 방식으로 개편해야겠으나, 기술적으로도 최소 5년 이상이 걸린다. 정치적 협상까지 고려하면 더 오래 걸릴 것이다.
즉, 보장성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조처들을 모두 당장에 도입하기는 힘드니 나중에 요구하자는 주장이다. 노동자들이 먼저 보험료를 올리는 방법이 가장 쉽고 빠르다는 얘기인 셈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보험료 인상 선언이야 쉬울지 몰라도 구체적인 인상폭을 정하고 보장성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협상을 고려한다면 시민회의의 구상이 실현되는 데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도 시민회의의 시각은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다.
공공병원 확충과 수가제도 변화를 우리 운동의 당면 과제로 삼기 어렵다는 주장의 또 다른 근거를 보자. 이상이 교수와 이진석 교수는 2년 전에 함께 발표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현 상황에서 의료 공급자들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거나, 재정적 대안이 제시될 수 없는 근본적 개혁 과제는 1단계 목표 달성 이후의 운동 과제로 배치함. 큰 틀의 공감대와 공통의 목표 마련을 저해하는 의료 공급자 측과의 갈등을 최소화함.
요컨대 시민회의의 주장은 보험재정 확대라는 ‘큰 틀의 공감대’를 위해 의료 공급자들과의 마찰을 줄이려는 구상에서 나온 것이다. 의료 공급자란 다름 아닌 병원 자본을 뜻한다.(그리고 앞에서 지적했듯이 병원 자본은 보험재정 확대를 지지한다.) 결국 공공병상 확충 등의 문제에서는 병원 자본이 개혁 대상임을 밝히고도 개혁 조처를 도입하는 데서는 병원 자본과의 충돌을 회피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상이 교수는 최근 시민회의의 핵심 참여자인 오건호, 김용익, 정태인 씨와 함께 참석한 〈경향신문〉의 전문가 간담회에서 ‘복지 의존증’을 걱정하면서 현금 지원과 달리 서비스를 지급하는 의료 부문에 대한 투자는 기업 생산성을 늘리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건강보험 보장성이 강화된다고 국가재정이 파탄나거나 기업이 어려워지지 않는다. 연금이나 고용보험은 급여율이 높으면 복지 의존증이 나타날 우려가 있다. 현금으로 지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료, 보육, 사회 서비스는 정부 투자가 많을수록 경제성장을 자극해 사회가 안정된다. 사회 서비스가 촘촘하게 짜여져 있는 북유럽 국가가 그렇지 않은 남유럽 국가들에 비해 생산성이 높다. 복지는 사회 전체적으로 생산성을 높이게 돼 있다. 복지 설계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교수가 모든 복지 설계는 생산성과 별개로 진행돼야 한다는 원칙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시민회의의 전략이 국가와 기업의 요구에 알아서 부응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50 이상이 교수의 보장성 강화 계획은 고전적 개혁주의 복지국가 모델에서도 후퇴한 복지국가론이다. 즉, 사회민주주의의 신자유주의 판인 ‘제3의 길’ 복지론이고 성장을 위해 노동자들의 양보를 강요하는 ‘성장과 함께하는 복지’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유럽의 수준 높은 의료복지 서비스는 노동계급 투쟁의 산물인 동시에 계급 세력 관계의 반영물이다.또한 부자 증세를 비롯한 국가재정 우선순위를 교정하는 과제를 회피하는 것을 보면 시민회의가 계급으로부터 더 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부자 감세를 추진하는 이명박 정부에서 노동자들이 먼저 보험료를 인상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풀뿌리 운동은 지역 운동이 아니라 개개인의 참여를 강조하는 것인 듯하다. 보험료 인상 선언은 개인의 실천일 수밖에 없고, 실제 시민회의는 개개인의 보험료 인상 의지를 찬양하고 있다.
51 이는 노동자들의 ‘주인의식’이 높다는 것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보험료 인상에 부정적인 이유는 부자 감세에 대한 반감과 높은 세금에 걸맞지 않은 낮은 보상 때문일 것이다.
시민회의는 보험료 인상으로 ‘참여’의식이나 ‘주인’의식을 형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동안 노동자들이 보험료를 철저하게 내지 않아서, 또는 납부하는 보험료가 너무 적어서, 또는 주인의식이 없어서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의 72퍼센트가 세금을 더 내더라도 복지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무엇보다 정당·단체 참가가 아니라 개인 참가를 강조하는 시민회의의 운동 방식은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보험료 인상 선언은 개인이 하는 것이더라도 기업과 정부의 양보를 강제하는 것은 개인들의 선언만으로는 안 된다. 따라서 시민회의가 자신의 계획을 진지하게 추진하려면 또 하나의 정치 세력이 되거나 다른 정치 세력을 지지해야 하는 상황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개인 참여형 ‘풀뿌리 운동’인 시민회의는 노동조합 운동이나 조직적 운동을 배제하고 명망가 중심의 운동이 되거나, 진보정당과 노동운동 바깥에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운동이 될 공산이 크다. 시민회의의 개인 참가 방식 덕분에 노조 지도자들은 조합원들의 민주적 동의 없이 시민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런 방식은 자기 비판을 전혀 하지 않는 옛 민주당·열우당 정부 참여 인사들에게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 주는 구실을 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의료 민영화의 틀을 다진 것은 지난 10년의 민주당 정부였는데 말이다. 따라서 시민회의가 개인 참여형 ‘풀뿌리 운동’에 강조점을 두는 것은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당과의 정책 연합을 상정해 뒀다는 의심을 살 만도 하다.
52 그러나 경제 위기가 더욱 심화할 가능성이 있는 지금, 그 전망은 결코 밝지 않다.
시민회의 내 일부 인사들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가 지배계급의 공감을 살 수 있다고 기대하는 듯하다. 시민회의 참가자인 제주의대 박형근 교수는 “‘건강보험 하나로’가 현실화되는 것은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버지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의 미래를 밝게 보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하고 말했다.게다가 앞서 봤듯이 시민회의의 제안은 법을 개정하는 운동도 아니므로 보험료를 더 내겠다는 자기 선언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보험료를 더 내겠다고 집회나 시위를 벌이기도 힘들고, 결국 시민 계몽 강좌와 시민들의 선언을 유도하는 캠페인이 될 것이다. 시민회의는 시민들의 참여를 거듭거듭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주장을 선전하면서 보장성 강화에 동의하는 정치 세력의 동정을 살필 공산이 크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국가와 기업에 맞선 의료 민영화 반대 투쟁 등에는 수동적 자세를 보이며 운동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또, 정부가 보험료 인상을 들고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도 있다. 올해 건강보험 재정은 단기 적자만 약 1조 5천억 원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돼 수치로만 보면 보험료를 8퍼센트 이상 인상해야 하는 형편이다. 정부는 적자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려고 보험료를 8퍼센트 인상하려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럴 때 시민회의는 40퍼센트를 인상하자고 요구하는 황당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특히 정부의 보험료 인상안을 거부하는 투쟁이 벌어지면 그 반대 편에 서서 보험료 인상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시민회의는 건강보험료 인상을 둘러싼 구체적 투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숫자로만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에 운동에 큰 혼란을 일으킬 여지를 만들었다.
재정 적자를 해결하려는 전 세계 지배계급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고, 한국에서도 ‘재정 건전성’ 확보의 일환으로 공공요금이 인상되고 복지재정이 삭감될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험료 40퍼센트 인상안은 대중의 경제적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요구가 될 공산이 크다. 재정 삭감에 맞서려면 노동자들의 부담이 아니라 국고 지원을 늘리라고 요구해야 한다. 시민회의의 전술은 재정 건전성을 위한 공격이 시작되면 대중의 호응을 얻기 힘들거나, 얻더라도 운동의 방향을 헷갈리게 할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보장성 강화 방안
53 이에 더해 보장성 강화 운동을 통합하자고 제안했다. 신영전 교수는 시민회의와 달리 국가와 기업주들의 책임을 요구하는 대안을 제시했다.
올해 6월 30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건강보험 통합 10주년 심포지엄에서 신영전 ‘건강권 보장과 의료 공공성 강화를 위한 희망연대’(이하 건강연대) 정책위원장은 ‘1백만 원의 개혁’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새로운 보장성 강화 방안을 제시했다.신영전 교수는 프랑스처럼 누진적으로 기업주들에게 더 많은 책임을 부여하는 특수 목적세인 ‘사회보장세’를 신설하자고 했다. 상위 1천 개 기업에 연매출의 0.5퍼센트가량을 사회연대 갹출금으로 부과하고 제약회사 광고료의 10퍼센트와 민간 보험회사 수입의 1퍼센트를 세금으로 거두자고 제안했다. 사회보장세 같은 목적세는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 의료 개혁과 함께 시행하는 조세 제도로 보편적 증세 방식이 아니라 부자 우선 증세 방식으로서 좋은 대안이다.
무엇보다 신영전 교수가 제시한 방안에는 공공병원 확충 계획이 포함돼 있다. 도시 보건지소를 확대하고 개인병원을 모두 비영리병원으로 전환하자는 매우 중요하고 급진적인 제안도 들어 있다. 보험료 부과 방식을 놓고도 노인·저소득층의 보험료를 경감하고 보험료 상한선을 폐지해 현재의 역진적인 보험료 부과 체계를 개선하자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노동자들의 근로소득에 부과하던 보험료를 부자들의 소득원인 금융소득과 재산소득 등 모든 소득에 부과하자고 주장한다.
이 밖에도 유럽과 대만 등에서 시행되는 본인부담금 상한제를 일단 연간 1백만 원까지로 시행하자고 한다. 본인부담 상한제가 비보험 영역까지 포괄한다면 실질적인 무상의료로 가는 의미 있는 전진이 될 것이다. 이 제안에는 청소년까지는 무상의료를 적용하자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의료 공급자에 대해서는, 병원에 지급하는 보험금 총액을 제한하는 ‘총액예산제’를 도입해 과잉 진료를 막고, 하나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진료비 총액을 제한하는 ‘포괄 수가제’를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보험재정 낭비의 주요인으로 지목된 약값 인하도 포함됐다.
마지막으로, 이런 요구를 중심으로 보편적 복지를 요구하는 ‘통합적 사회운동’을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보편적 부담’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시민회의의 ‘보편적 복지’와 다른 점이다.
표4. 프랑스 일반제도 건강보험 보험료율의 변화(단위: 퍼센트) | |||
연도 | 노동자 | 사업주 | 합계 |
1991 | 6.8 | 12.6 | 19.4 |
1992 | 6.8 | 12.8 | 19.6 |
1997 | 5.5 | 12.8 | 18.3 |
1998* | 0.75 | 12.8 | 13.55 |
2006 | 0.75 | 13.1 | 13.85 |
* 1998년부터는 일반사회보장분담금CSG과 함께 여러 가지 사회보장 목적세의 도입으로 노동자 보험료율이 획기적으로 하락함.(2006년 건강보험에 대한 CSG의 요율은 임금과 자본수익 모두 5.25퍼센트임.) 자료: http://www.ameli.fr |
신영전 교수의 제안은 건강보장 운동의 분열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또한 국가와 병원 자본과 제약 자본에 대한 구체적 요구들을 담고 있어 대중의 지지를 받아 온 무상의료를 실현할 요구들로 활용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이룰 수 있는가
54 ‘쥐페 플랜’의 신자유주의적 공격은 상당 부분 좌절됐다. 그 후 2003년과 2007년에도 대규모 노동자 투쟁이 일어나 기업주들의 부담을 더 늘리도록 건강보험을 개혁했다. 55 현재 프랑스의 건강보험 보장성은 93퍼센트로 무상의료나 거의 마찬가지다. 지난해에도 사르코지의 의료보험 공격 등에 대항해 대중파업이 벌어졌고, 노동자와 기업주의 건강보험 부담률은 6.8 : 12.8에서 0.75 : 13.1로 벌어졌다.(표4) 이는 자본소득과 재산 등에 대한 특수 목적세의 부가로 격차를 벌리고, 기업의 이윤에 세금을 부과한 덕분이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부담은 줄이면서도 높은 수준의 건강보험 보장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책적 요구보다 중요한 것은 1996년 프랑스의 건강보험 ‘개혁’에서 보듯이 강력한 노동자 투쟁이 전제돼야 의료 시스템의 개혁을 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 프랑스의 우파 총리 쥐페는 공공부문 구조조정과 신자유주의 복지 공격을 포함하는 ‘쥐페 플랜’을 내놓았다. 건강보험을 기업조합 체계에서 국가 관리로 이전해 비용을 절감하고 보험 재정을 삭감하려 했다. 이에 맞서 1995년 말 공공부문의 강력한 대중파업이 있었다. 이 때문에 쥐페의 구조조정안은 의도와 달리 의회가 건강보험 재정을 책임지고, 기업주들에게 ‘사회보장세’ 같은 목적세를 부과하는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따라서 건강보험 보장성을 확대하는 데서도 중요한 것은 대중 투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개혁의 쟁취와 유지는 노동계급 자신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점을 프랑스는 보여 준다. 그리고 지속적 투쟁으로 형성된 발전된 계급의식이야말로 진정한 ‘복지 체험’이다.
결론
지난 60년간 한국 의료 시스템은 민중이 부단히 싸워 온 성과와 과오가 아로새겨져 있다. 현재 한국 의료의 문제점은 첫째, 거의 없다시피 한 공공병상과 사적 의료 시스템의 고착이다. 둘째, 병원 자본의 팽창과 의료공급 체계의 허점으로 말미암은 의료시장 확대다. 셋째, 공공보험의 낮은 보장성 탓에 민간의 의료비 지출 증가가 가속된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계급은 의료 민영화와 민간보험 도입을 강하게 추진했다. 이에 우리 운동은 지난 10년간 의료 민영화에 반대하고 건강보험을 강화하고자 단결된 투쟁을 벌여 왔으나, 최근 시민회의가 주장하는 보험료 우선 인상 선언 운동으로 분열했다.
보건의료 운동을 하나의 부문 운동으로만 여겨서는 안 되고, 전체 운동과 계급정치 역학에 비춰 사고해야 한다. 공공병상 확충과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같은 요구는 국가와 자본에 대항한 싸움을 회피해서는 쟁취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투쟁 과정에서 획득하는 이데올로기는 무상의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
의료 부문은 필수 서비스 부문이지만 전문가는 적어서 눈속임이 쉬우므로 구체적인 대중적 홍보가 중요하다. 2007년 ‘식코 보기 운동’이 그 다음해 의료 민영화 반대 운동에 큰 도움이 됐듯이, 건강보험 강화와 병원 공공화도 충분하고 지속적으로 홍보해야 촛불 항쟁 같은 기회를 만나 운동을 확대할 수 있다. 보건의료 운동은 눈앞의 성과만 보지 말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 공공병상 확충을 포함한 의료공공성 확보 요구가 당장 성취하기 힘들 것이라고 해서 회피·방치하거나 지엽적 개선을 위한 정책에만 매몰돼서는 안 된다.
56 지금처럼 자본주의 경제의 장기적 위기로 지배계급이 알량한 개혁마저 빼앗으려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1996년 프랑스에서 의회가 건강보험 재정을 책임지고 사회보장세를 도입하게 된 배경도 1995년 말에 벌어진 공공부문 총파업이었다. 노동계급의 투쟁, 아래로부터의 저항 없이 자본가들에게 의료 개혁을 얻어내려는 생각은 환상일 뿐 아니라, 운동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의료 개혁은 유럽에서 하고 있듯이 자본주의에서도 충분히 성취 가능한 과제다. 그렇다고 해서 자동으로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영국의 NHS나 스웨덴의 연금 제도 역시 노동계급 투쟁의 산물이었다.병원과 의원은 2000년 의약 분업 당시 의사 폐업으로 무려 41퍼센트에 이르는 수가 인상을 따낸 적이 있다. 당시 의사 폐업은 환자를 볼모로 한 전문가 집단의 무자비한 집단 이기주의였다. 그러나 그들이 국가를 상대로 보인 단호함만은 배울 만하다. 의료 개혁을 이루려면 기업 분담률 향상, 공공병상 확충, 보장성 강화 같은 핵심 요구부터 단호하게 주장해야 한다. 즉, 국가에는 공공병상 확충을 요구하고, 병원 자본과 제약 자본을 통제하는 싸움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런 요구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결합되고 긴축 반대 투쟁 등과 만날 때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투쟁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듯이, 의료 민영화 반대 운동과 보장성 강화 운동도 부침을 겪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계급의식의 성취, 투쟁들의 상호 연결, 조직 건설 같은 과제를 위해 노력하며 이와 함께 다음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싸움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맞닥뜨릴 때 더 나은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필자 정형준은 의사이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
- 〈한겨레〉(2010.6.7); 〈국민일보〉(2010.8.7). ↩
- 한국 사회는 2018년 고령 사회(65세 이상 인구 14퍼센트)에서 2026년 초고령 사회(65세 이상 인구 20퍼센트)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통계청 2006. ↩
- 신규환·서홍관 2002, p98에서 재인용. ↩
- 통계청 국가통계포털. ↩
- 신규환·서홍관 2002, p99. ↩
- 우석균 2007. 행위별 수가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
- 신영전 외 2006, p109. ↩
- 대한병원협회. ↩
- 미국에서 1972~82년에 이 같은 병원 간 무한경쟁과 자본집중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군비경쟁과 비슷하다는 의미로 의료군비경쟁medical arms rac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장 유명한 논문은 1987년 미의학회지에 실린 Robinson 1987이다. ↩
- OECD Health Data 2009. ↩
- OECD Health Data 2009. ↩
-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 2001. ↩
- 건강보험통계연보 2008. ↩
- 현행 건강보험에서 의사들의 치료 행위는 급여 항목과 비급여 항목으로 나뉜다. 급여 항목은 건강보험의 자기 부담금이 적용된다. 비급여 항목은 다시 인정 비급여와 임의 비급여로 나뉜다. 인정 비급여 항목은 건강보험의 수가 조정은 받으나 전액 환자 부담이다. 임의 비급여 항목은 미용 성형 수술처럼 의료비를 완전히 시장에 맡기는 방식이다. ↩
- 국민건강보험공단 2004, p115. ↩
- 신영전 외 2006; 조홍준 2008; 허순임 2007. ↩
-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OECD 기준으로 의료비 공적 부담율이 45퍼센트에서 55퍼센트로 증가했다. ↩
- 2005년 민주노총 대정부 요구안 ― 보건부문 ↩
- 〈중앙일보〉(2010.7.20). ↩
- 〈쿠키뉴스〉(2008.6.19). ↩
- 〈매일경제〉(2010.6.20). ↩
- 〈중앙일보〉(2010.7.20). ↩
- 〈한겨레〉(2010.6.15). ↩
- 〈한겨레〉(2007.12.28). ↩
- 삼성경제연구소 2007. ↩
- 국민건강보험공단 2004. ↩
- 우석균 2010. ↩
- 〈의협신문〉(2000.5.23). ↩
- 〈중앙일보〉(2008.9.13). ↩
- 오건호 2008. ↩
- 오건호 2008. ↩
- 국민건강보험공단 2004. ↩
- 〈청년의사〉(2008.1.8). ↩
- 제약협회, 임시총회 결의문(2010.6.9). http://www.kpma.or.kr ↩
- 김용익 2000. ↩
- 사회보험노조 경인지부 2010. ↩
- 〈조선일보〉(2010.6.8). ↩
- 〈한겨레〉(2010.3.23). ↩
- 〈데일리메디〉(2010.4.19). ↩
- 룩셈부르크 2002, p54. ↩
- OECD Health Data 2009. OECD는 한국의 정규직 노동자 평균 임금을 3백8만 원이라고 보고했다. ↩
- 국민건강보험공단 2004, p196. ↩
- 이은경 2010. ↩
- 오건호 2010b. ↩
- OECD Health Data 2009. ↩
- 오건호 2010a. 강조는 인용자. ↩
- 이상이 2010. ↩
- 이상이 외 2009. ↩
- 〈경향신문〉(2010.7.19). ↩
- 장호종 2009, pp175-181. ↩
- 〈한겨레〉(2010.5.15). ↩
- 박형근 2010. 박정희를 건강보험의 아버지라고 묘사하는데, 이에 대한 반박으로는 우석균 2007을 보시오. ↩
- 신영전 2010. ↩
- 국민건강보험공단 2004. ↩
- 프랑스의 격변의 10년에 대해서는 Wolfreys 2006을 보시오. ↩
- 장호종 2009, pp175-1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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