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G20 세계 민중에게 고통 전가하는 ‘글로벌 거버넌스’
이명박은 G20 정상회의 개최를 임기 중 최대 치적으로 남기기를 바란다. G20 의장국이 된 것은 굉장한 의미라며 G20 정상회의 개최로 ‘코리아 프리미엄’이 1퍼센트만 발생해도 약 5조 원의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호들갑이다. G20 정상회의 개최를 명분으로 민주적 권리 침해도 극심하다. 한나라당은 지난 5월 국회에서 G20 경비에 군대를 동원할 수 있도록 한 ‘G20 정상회의 경호 안전을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경찰은 G20 정상회의에 연인원 40만 명의 경찰력을 동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애국주의를 조장하는 대대적인 홍보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 이후 긴박하게 구성된 G20 정상회의가 경제 위기 극복 방안을 내놓을 것이라는 기대는 시간이 갈수록 옅어지고 있다. 특히 지난 6월 캐나다 정상회의에서는 ‘뭔가를 합의할 수 없다’는 것에만 합의했다는 조소가 나올 지경이다. 그러나 G20이 ‘글로벌 거버넌스’ 시대의 징표이고, 불안한 세계경제와 정신 나간 금융 체제를 개혁할 수 있다는 막연한 환상 또한 존재한다.
G20은 언제 어떻게 왜 생겨났나? 그동안 G20이 제시한 경제 위기 해법은 무엇이었나? 이 ‘해법’으로 세계 민중은 조금이라도 실익을 얻었는가? G20이 국제 공조를 이룰 수 없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가까스로 이룬 국제 공조조차 이렇다 할 효과가 있기는 했는가? 서울 회의를 비롯해 G20 정상회의의 앞날은 어떤가? 진보 운동은 G20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 글은 이런 물음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다.
G20의 탄생 배경 1997년 아시아 경제 위기 직후 “선진국과 신흥국 간의 국제 협력 필요성”이 제기돼 1999년 G8과 주요 신흥국들의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로 시작된 G20은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를 계기로 일약 정상회의로 격상됐다. 이른바 G8 주요국들이 G20을 정상회의 체제로 끌어올린 것은 경제 위기 불길이 번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다급함 때문이었다. G8 선진국들이 공격적으로 금리를 내리고 유동성을 공급해도 신흥 경제국들, 특히 중국이 선진국 채권을 매각하고 유동성을 흡수해 버리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이다. 마침 오바마도 남반구 주요국들이 포함된 G20을 경제 위기 대응을 위한 주된 국제적 논의의 장으로 활용하려던 부시의 계획을 계승할 터였다. 미국 지배자들은 가공자본의 엄청난 손실을 국제 공조를 통해 분담하고자 했다. “미국에 집중되었던 경제 위기 책임론을 희석시키고자 회의 개최에 동의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2 미국과 유럽 경제의 지위는 예전보다 축소되고 특히 2008년 세계경제 위기 때문에 더더욱 그 위상이 실추된 반면, 중국의 입김은 더 세졌다. 중국도 G20에 수동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중국은 G20을 새로운 최고협의기구premier forum로 적극 환영하면서 세계경제 질서 재편을 주도하기 위해 G20을 적극 활용하는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3
그러나 G20이 주로 미국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미국이 쥐락펴락하는 회의체인 것은 아니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과 중국 등도 G20을 이끌고 있다. 유럽 정상들은 미국과 함께 G20 정상회의를 제안했다. 2008년 10월 전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와 유럽연합EU 순회 의장이던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와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바호주Jose Manuel Barroso가 캠프 데이비드에 모여 금융 공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논의했는데, 여기서 사르코지가 부시에게 G20 정상회의 소집을 제안했다. 유럽 정상들도 중국이 필요하다는 데 적극 동의했다. 중국이 빠진 G8 회의는 공허하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강력하게 대두했다.다시 말해, G20 정상회의가 출현한 배경에는 첫째 2008년 세계경제 위기로 말미암은 다급함, 둘째 국제경제에서 주요 나라들의 서열 변동이라는 두 요인이 자리잡고 있다. 일각에서는 G20에 남반구의 몇몇 국가들이 포함된다는 점을 근거로 그래도 G20은 G8보다는 더 민주적인 글로벌 거버넌스가 아니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G20 참가국들을 살펴보면 참가국 선발에 강대국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호주·터키·아르헨티나·사우디아라비아 등은 미국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들이다. 반대로, 미국은 G7이 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 참가국을 선정할 때 말레이시아를 철저하게 배제했는데, 그 이유는 말레이시아의 반反IMF 태도 때문이었다. 즉, “친미 국가가 상대적으로 유리했던 것이다.”
G20 정상회의에 참가하는 정부들이 남반구 민중의 의사를 잘 반영하거나 민주적인 것도 결코 아니다. 브라질·남아공·인도 정부는 자국 민중에게 신자유주의를 강요하는 핵심 주체다. 이들은 항상 다른 약소국을 희생시켜 자국의 이득을 늘리려 하며 언제든지 미국·유럽·중국 등의 강대국들과 거래할 태세가 돼 있는 하위 경쟁자일 뿐이다. 이 나라들은 자기네 지역에서 나름대로 패권을 휘두르는 ‘아류 제국주의’ 국가라 할 수 있다. 10대 경제 대국 중 하나인 브라질의 자본가 계급은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 관세 동맹을 통해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같은 나라의 자본을 휘하에 거느리며 영향력을 강화해 왔다. 인도는 주요 다국적기업과 하청 관계를 맺으며 이들과 수익을 공유할 뿐 아니라 파키스탄과 핵무기 경쟁을 벌이는 지역 맹주다. 남아공 정부도 물가 인상, 물과 전력의 사유화, 일자리 축소, 부자 세금 감면 등을 추진하면서 자국 민중에게 신자유주의를 강요해 왔다.
무엇보다 일부 사람들이 G8과 G20이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근거로 제시하는 중국은 어떤가. 중국도 아시아 곳곳에서, 심지어 아프리카에까지 영향력과 패권을 행사하려고 애쓰고 있다. 중국은 신장 지역과 티베트를 강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러시아 다음으로 아프리카에 무기를 많이 수출하고 군병력을 파견하는 등 서방 열강들과의 패권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다. 또한 중국 지배자들은 미국과 유럽 지배자들만큼이나 자국 노동자·민중에게 고통을 강요하고 있다. 최근 중국 IT 노동자들의 연쇄 자살은 중국 자본주의의 처참한 현실을 보여 줬다. 일자리를 잃은 농민공 3천만 명의 비참한 현실은 결코 중국이 경제 위기의 고통에서 비켜나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줬고, 중국 남부 자동차 노동자들의 연쇄 파업은 고통스런 현실에 저항하는 신세대 노동계급 운동의 탄생도 보여 줬다.
5 필요하다면 긴축정책을 과감히 사용하라는 주문도 계속됐다. “부채를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재정 정책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6 남반구의 주요 정부들이 위와 같은 정책들을 선진국 등쌀에 어쩔 수 없이 논의한 게 아니다. 매우 자발적이었다.
남반구 정부들이 반민중적 국제 공조에 앞장서 왔음은 2008년까지의 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 결과를 봐도 알 수 있다. 2007년 남아공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성장과 개발에 기여하는 재정적 요인들Fiscal elements of growth and development’이라는 표어 아래 그리고 주최국 남아공 정부 관료들을 비롯한 남반구 정부들의 적극적인 호응에 힘입어 사유화가 공공연하게 장려됐다. “국가 재산의 사유화는 단기적으로 재정 역량을 창출하는데, 이는 조기 부채 상환으로 장기적 부채 부담을 줄여 지속가능한 재정 역량을 창출할 수 있다. 공공서비스의 상업화도 운영 부담을 줄일 수 있다.”1999년 탄생한 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가 당시 1990년대 말 신흥 경제국의 금융 위기가 선진국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회의였다면 2008년 G20 정상회의는 선진국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가 심화·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한 회의였다. 그러나 참가국이 늘고 몸집만 커졌을 뿐 G20은 위기 해결책도 못 내놓는 별 볼일 없는 회의체일 뿐이다.
말만 무성한 G20의 금융 규제
최근 G20이 자신의 유용성을 입증하기 위해 매달리는 정책 중 하나가 바로 금융 규제다. 그리고 G20에 대한 높은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부분도 바로 금융 규제 관련 논의다.
그러나 G20 정상회의가 회를 거듭하는 동안 금융 규제 방안들은 말만 무성했지, 사실상 규제라고 할 수도 없는 조처로 후퇴하거나 심지어는 기존 규제조차 폐기됐다. 2008년 11월 15일 워싱턴 정상회의와 2009년 4월 런던 정상회의는 금융기관의 위험자산 규모를 관리·감독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고 각종 규제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자기자본비율 규제 같은 규제 조처들은 계속 후퇴하고 있다.
7 그래서 2008년 금융 위기 때도 위기에 빠진 은행 대부분이 외형상으로는 자기자본비율 8퍼센트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도산 직전 리먼브러더스의 자기자본비율은 11퍼센트였다!
바젤Ⅰ과 바젤Ⅱ는 국제결제은행BIS 산하 바젤은행감독위원회BCBS, Basel Committee on Banking Supervision가 은행의 부채에 대한 자기자본비율을 높여서 은행의 방만한 운영을 막으려고 만든 규제 조처였다. 그런데 세계 각국의 은행들은 지금껏 위험자산 대비 자기자본비율을 8퍼센트 이상 유지해야 하는 이 규제를 요리조리 피해 왔다. 새로운 금융상품을 활용해 자기자본비율을 부풀리거나 필요자기자본을 계산할 때 은행 자체 내부 모델을 이용해서 외형상으로만 자기자본비율을 충족시키기 일쑤였다.그래서 2009년 G20 런던 정상회의는 이런 현실을 반영해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국제 금융투기꾼과 대형 은행 들에 무서운 회초리를 들겠다고 한 것이다. 결국 G20의 제안에 따라 2009년 12월 바젤은행감독위원회는 은행의 자본 기준 강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글로벌 은행 규제 강화안(바젤Ⅲ)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규제안은 은행권의 압력으로 점차 후퇴했다. 최근 바젤은행감독위원회에서 논의되는 내용들을 보면, 은행의 자기자본비율 규제 수위를 낮추고 시행 시점도 늦추자는 은행들의 요구가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은행이 소유한 다른 금융회사 지분을 기본자기자본비율에서 제외하려던 계획은 철회됐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유럽의 상당수 대형 은행들이 소유한 신흥국 은행 등의 지분이 자본이 아닌 위험자산으로 분류돼 이 대형 은행들이 부실 은행으로 전락할 판이었다. 그래서 글로벌 금융기관들은 올해 말에 체결될 예정인 바젤Ⅲ를 후퇴시키려고 정치권에 온갖 로비를 하고 압력을 가했다. 결국 지난 7월 27일 바젤은행감독위원회는 바젤Ⅲ의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미국과 영국을 겨냥해 은행 규제 목소리를 높였던 독일과 프랑스도 원래 안대로 규제를 강화하면 유럽 은행들의 피해가 클 것으로 보이자 규제 완화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G20은 경제 위기를 촉발한 파생상품을 두고도 말만 무성할 뿐 이렇다 할 규제안을 도입하지 않았다. 오바마의 금융 규제안인 ‘볼커 룰’도 파생금융상품을 규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파생상품 거래 규정이 당초 안에서 대폭 완화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은행들은 여전히 아시아 사모펀드 투자 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은행권 고위직 보너스 규제도 실질적 성과가 없다. 은행장들이 받는 막대한 보너스는 대중의 분노와 비판의 대상이 됐지만, 정부가 제공한 값싼 돈으로 주머니가 불룩해진 은행들은 옛 관행을 지속했다. 한술 더 떠 대형 은행들은 정부 과세를 피하려고 아예 급여 총액을 늘리거나 보너스 대신 기본급을 올리려고 한다. G20의 대표적인 금융 규제책으로 급부상했던 은행세를 G20 정상회의에서 다시 거론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은 G20이 말하는 금융 규제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보여 주는 대표 사례다. 은행세는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은행 구제에 들어간 세금을 회수하고, 앞으로 금융 위기가 발생할 때 써야 할 비용을 충당하려고 은행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애초 은행세를 제안한 것은 IMF였다. IMF는 지난 4월 G20의 요청으로 작성한 금융시스템 개혁 보고서에서 금융안정분담금FSC, Financial Stability Contribution과 금융활동세FAT, Financial Activities Tax를 제안했다. 이른바 ‘오바마세Obama Tax’라고 부르는 금융안정분담금은 은행 등 대형 금융기관의 예금을 제외한 부채에 해마다 0.15퍼센트의 세금을 부과해 부실채권 구제 기금으로 쓰인 돈을 보상하자는 것이다. 금융활동세는 금융기관이 거둔 일정 수준 이상의 순익과 보너스에 물리는 세금이다. 그런데 이 보고서는 G20 정상들 사이에 합의가 결렬되면서 제출하자마자 용도 폐기됐다. 은행세 안은 지난 6월 부산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와 캐나다 정상회의에서 사실상 폐기됐고, 오는 11월 서울 정상회의에서는 아예 이 문제를 논의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IMF가 내놓은 조세안이 도입되더라도 구제금융에 들어간 비용을 회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판에 그마저도 폐기된 것이다. 2008년 미국 정부가 쏟아부은 금융 구제 비용을 마련하려면, ‘금융안정기금’을 도입할 경우 23년, ‘금융활동세’를 함께 부과한다 해도 10년 넘게 걸린다.
현재 각국 정부들이 도입하려는 은행세는 은행을 구제하려고 조성하는 세금일 뿐이지 노동자들의 복지 향상에 쓰려고 걷는 세금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금융기관들은 뻔뻔스럽게도 다음번 위기 때 자신들을 구제하는 데 쓰일 돈을 마련하자는 것에도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은행세가 도입될 때조차 중요 내용은 빠지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 결과 독일조차 부과 대상에서 보험사는 제외했다. 이렇게 G20의 금융 규제안이 계속 후퇴하고 속 빈 강정이 되는 사이에 위기의 주범인 주요 은행들은 정부가 거저 준 돈으로 온갖 투기 행위를 벌이고 막대한 보너스 잔치를 벌였다. 골드만삭스, JP모건, 바클레이스, HSBC 같은 더 크고 강력한 은행들의 이윤이 증가한 것은 한편으로 경쟁업체들이 파산해 사라져서였고 다른 한편으로 대대적인 국가 지원을 받은 덕분이었다. 이들은 이제 뻔뻔스럽게도 긴축재정을 위해 공공서비스를 줄이라고 요구하고 있다.
11 금융의 무절제한 자유는 경제 위기가 폭발한 뇌관이지 결코 그 자체가 근본 원인은 아니다. G20에서 논의되는 금융 규제책은 국제 금융시장이라는 톱니바퀴에 모래를 약간 뿌리는 구실밖에 하지 못한다. 톱니바퀴를 멈추려면 자본주의 이윤 생산이라는 엔진 자체를 멈춰야 한다.
그러나 이런 금융 규제책들이 제대로 실행된다고 하더라도 이번 경제 위기 해결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이번 위기의 원인은 … 금융시장의 문제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G20 정부들의 경기부양책과 긴축정책
12 사정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2008년 11월에 중국 정부는 5천9백억 달러 규모의 매머드급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2008년 위기가 터지자 대다수 G20 정상들은 대기업들의 도산과 급격한 수요 감소를 막으려고 경제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국민소득에서 국가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이미 30~40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상황에서 2008년 위기 직후 추가로 경기부양책을 쓴 것이다. 2008~10년에 이런 종류의 추가적 경기부양책은 평균적으로 국민소득의 약 2.5퍼센트에 이르렀고, 오바마 정부는 2008년에 무려 GDP의 5.6퍼센트를 경기부양책에 썼다.2009년 G20 런던 정상회의는 “사상 최대의 경기부양책”을 결정했다. 그 주요 내용은 각국 정부가 2010년 말까지 총 5조 달러의 재정지출을 통해 4퍼센트의 세계경제 성장을 이루기 위해 공조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G20 주요 회원국들의 경기부양책은 부자들을 부양하는 것에 맞춰 있었지, 결코 노동자·민중을 부양하는 게 아니었다. 예를 들어 2009년 3월 월스트리트 은행들은 그 전 해에 연방정부에게서 구제금융 2천4백30억 달러를 받아서 1백80억 달러를 연말 임직원 보너스로 지급했다. 유럽연합은 금융권에 경제 위기의 책임을 묻지도 않고 돈을 퍼주기 바빴다. 심지어 신용평가 회사들(스탠더드 앤 푸어스, 무디스 등)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파산한 은행들에 모조리 최고 투자 등급을 주기도 했다.
대규모 경기부양책이 실시됐지만 노동자들의 처지는 더 나빠졌다. 2009년 10월 미국의 실업률은 17년 만에 최고치인 10.1퍼센트까지 치솟았다. 전일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시간제로 일하는 노동자까지 포함하면 실질 실업률은 17.2퍼센트나 됐다. 미국 GDP의 5퍼센트에 해당하는 7천8백70억 달러의 예산을 기초로 한 ‘미국 경제회복 및 재투자법’이 통과되고 오바마가 취임한 뒤 오히려 실업자가 2백만 명이나 더 늘었다.
물론 2007년부터 중국 등 일부 개도국을 제외하고는 선진국의 민간 기업 투자가 지극히 미약하고 2008년 말부터는 신용경색으로 자금줄이 말라붙은 상황에서, 세계경제가 1930년대 같은 대불황으로 추락하지 않은 것은 정부들이 대규모로 은행들을 지원하고 경기부양책을 펼친 덕분이었다.
그러나 2008년 이후 경기부양책은 세계경제의 추락을 어느 정도 완화하기는 했지만 경제 전반은 부채에 더 많이 짓눌리게 됐다. G20 각국이 부자들을 살리느라 지출한 막대한 비용은 정부 부채 증가분의 40퍼센트를 차지한다. G20 참가국들의 누적 손실은 GDP의 27퍼센트에 이른다.
각국 정부는 이렇게 ‘손실을 사회화’해 놓고 이제 와서는 이를 핑계로 긴축재정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G20 정상들은 캐나다 정상회의에서 2013년까지 재정 적자를 절반으로 줄이기로 합의했다. 이미 〈파이낸셜 타임스〉는 2010년 6월 초 부산 G20 재무장관 회의 결과를 보도하면서 회의 기조가 ‘재정 건전성’에 확고히 맞춰졌다고 전했다. 캐나다 정상회의는 각국 정부가 추진할 재정 건전성 강화 방향이 정부 재정을 줄이는 긴축정책임을 분명히 했다. 또, 캐나다 정상회의는 재정 문제가 심각한 나라는 구조조정 속도를 높이라고 촉구했다. 캐나다의 저명한 반자본주의 활동가이자 《슈퍼 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의 저자 나오미 클라인은 캐나다 정상회의의 합의가 낳을 효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충격적일 정도의 긴축 규모를 보면 위기의 대가를 치를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해진다. 학생들은 수업료를 더 많이 내야 하고, 연금은 더욱 줄어들 것이고,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일자리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G20은 IMF가 그리스에 요구한 긴축정책 지지 성명서를 재빠르게 발표했다. 그러나 최근 유럽 재정 위기에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다. 부실 금융권을 구제하느라 정부가 돈을 쏟아부은 것이야말로 유럽 재정 적자의 핵심 원인이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부활한 글로벌 금융기관이 이제는 공무원 임금·사회복지 연금 삭감 등 평범한 노동자들의 생계를 망가뜨려야만 돈을 빌려 주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다.
게다가 재정 건전성 강화 정책은 세계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공산이 매우 크다. 재정 긴축은 대중 소비를 위축시키고 소비 위축은 경제 위기를 더 부채질할 것이다. 역설이게도, 긴축을 강권하는 IMF는 그리스가 긴축정책을 도입하면 앞으로 2년간 성장률이 7퍼센트나 줄어들 거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2013년까지 재정 적자를 절반으로 줄이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한 결정이어서 G20 참가국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재정 위기가 유럽 각국으로 번질까 봐 노심초사한 유럽연합과, 긴축이 소비 위축으로 이어질까 봐 전전긍긍한 미국이 설전을 벌였고, G20 캐나다 정상회의는 재정 긴축을 합의하고는 “재정 긴축이 경기회복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위험이 있다”는 구절도 포함시켰다. 6월 초 부산 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는 내수 확대와 재정 긴축 둘 다에 합의했다. 오바마는 재정 적자 규모를 점차 줄이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경기부양을 너무 빨리 멈추면 경기침체가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8월 10일 미 연방준비은행도 그동안 긴축정책을 강조해 오다가 신중론으로 돌아섰다. 당장 긴축정책을 쓰기에는 세계경제, 특히 미국 경제가 매우 불안정하고 위태롭다는 것이다. 반대로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바호주는 “적자 감축과 부채 안정화를 위해 확실한 목표에 합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질적인 재정 지출 축소를 주장한다. 영국은 2015년까지 1천1백30억 파운드 규모의 재정 적자 감축 방안을 발표했고, 독일도 4년 동안 8백억 유로를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경기부양론자들과 재정건전화론자들 사이에 만리장성이 있는 것처럼 과장해서는 안 된다. 경기부양책과 케인스주의 정책 입안자의 대명사인 루스벨트는 1933년 전국산업부흥법 등을 통해 공공사업을 추진하다가 공화당 의원들과 보수적 민주당원들의 반발 때문에 균형예산과 재정건전성 강화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14 이명박 정부는 아직은 본격적인 긴축에 나서겠다고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한국 지배계급은 적어도 2∼3년 안에 긴축재정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본격적인 긴축정책은 대중의 생활 조건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뜻한다.
나라마다 속도와 시기는 다르지만 G20이 긴축정책을 전반적인 출구 전략으로 삼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것은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2008~09년에 금융 회사와 건설사 등에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쏟아부어 OECD 회원국 중 국가 채무가 가장 빠르게 증가한 나라(2008년 18.4퍼센트, 2009년 11.4퍼센트)다.이명박 정부를 포함한 각국 정부는 캐나다 G20 각종 회의에서 권고된 재정 건전성 논의들을 긴축정책의 근거와 지침으로 활용하고 있다. G20은 단지 무능하기만 한 게 아니라 사악하기도 하다.
G20 국제 공조가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
15 이번에는 G20 정상회의가 있어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G20 서울 정상회의 준비위원회는 G20의 국제 정책 공조 덕분에 “세계경제가 비교적 빠른 회복세”를 보일 수 있었다고 말한다. “1930년대에도 당시 금융·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국제모임(1933년 66개국 모임)이 있었으나 국제 공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대공황이 장기화되는 결과”를 초래했지만세계경제가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지도 논쟁할 여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G20의 국제 공조가 원활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전례 없는 경기부양책 합의와 국제 공조라는 화려한 발표문 이면에는 G20 정상회의 회담장 전체를 지배한 참가국 사이의 치열한 논쟁과 신경전이 있었다. 예를 들어, 경기부양책이 논의되는 과정에서는 미국·영국·일본과 독일·프랑스의 이해가 상충했다. 유럽연합은 경기후퇴시 자동안정화 정책automatic stabilizer을 시행해 국내총생산의 3.3퍼센트를 재정정책에 사용하게 돼 있다. 그러나 독일 총리 메르켈은 무리한 경기부양책이 오히려 경기회복을 저해할 것이라며 추가적인 재정지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유럽중앙은행장 장 클로드 트리셰도 재정확대 무용론을 주장했다. G20 런던 정상회의에서 유럽의 재정확대 무용론은 미국의 재정지출 확대 주장과 초장부터 정면 충돌했다.
G20의 국제 공조가 얼마나 무망한 것인지는 보호무역주의 역풍이 이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G20은 2008년 11월 15일 열린 비상 정상회의에서 보호주의를 거부하겠다고 공언했지만 그 후 G20 회원국 중 17개국 정부가 국제무역에서 자국 기업들의 경쟁 우위를 보장하려고 최소 47개에 이르는 조처를 도입했다. 각국의 수출보조금 정책도 더 강화됐다. 예컨대, 미국·프랑스·독일·영국·캐나다·중국·브라질·아르헨티나·스웨덴·이탈리아는 모두 자국 자동차 산업에 직간접으로 금융 지원을 했다.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2009년 초 미국 의회가 공공사업에 미국산 원자재만을 사용하도록 규정한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조항을 오바마의 경기부양책 초안에 넣은 것이다.
한편 중국은 수출을 늘리려고 위안화 평가절하를 방치했다. 미국과 유럽연합,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인도·브라질 등 이른바 신흥 시장 강국들과 미국은 자국의 수출 확대를 위해서는 상대편에 자유무역주의를 요구하는 동시에 자국 시장 보호를 위해서는 보호무역주의를 옹호한다. 따라서 이명박이 2008년 11월 워싱턴 정상회의에서 자신이 제안한 ‘스탠드스틸(무역 및 투자에 대한 새로운 장벽 금지)’이 1차 G20 정상선언문에 반영돼 보호무역주의 흐름을 차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강조하는 것은 근거없는 자화자찬이다.
16 즉, 금융 위기 당시 각국의 대응 양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경제 위기에 대응하는 가장 중요한 단위는 결국 개별 국민국가다. 바로 여기에 G20의 근본적 모순이 있다. G20이 때때로 국제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그 합의가 공문구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각 나라 정부와 자본은 다른 나라를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한다. 2008년 11월 독일 경제장관 미하엘 글로스는 거리낌없이 이렇게 말했다. “다른 나라들이 취한 조처가 … 우리 나라의 수출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17 가혹하게 말하면 독일의 전략은 다른 나라의 재정지출에 무임승차함으로써 국가 부채와 수출 시장 손실 비용을 다른 나라에 떠넘기는 것이다. 중국에 압력을 가하는 미국, 미국의 요구를 흔쾌히 수용하지 않는 중국과 그 틈에서 미국 편을 드는 한국, 유로화 통용 지역의 동료 회원국의 도움 요청을 나 몰라라 하는 독일 등은 모두 상대방을 희생시키고 수출을 늘려 위기를 해결하려는 이기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
요컨대 G20은 국제적 위기에 직면해 모종의 국제적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각국 정부들의 공통된 필요가 낳은 산물이었지만, G20의 국제 공조는 어그러지고 삐걱대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특정 국가를 특정 자본들과 묶어 주는 연결망에서 부분적으로 비롯하는 국민국가들 사이의 이해관계 불일치는 국제적 공조가 꼭 필요해지는 바로 그 시점에 국제적 공조를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금융 규제에 관한 이해관계가 나라마다 다른 것도 제대로 된 규제 도입을 가로막는 또 다른 요인이다. 은행세 도입이 불발로 끝나거나 핵심 내용들이 빠져 솜방망이 규제책이 된 것은 단지 대형 은행들의 로비 때문만은 아니다. 자국 은행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국민국가들 사이의 경쟁 관계도 한몫했다. 처음에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은 은행세 도입에 찬성했지만 중국·캐나다·호주·인도·브라질 등은 강하게 반대했는데 반대한 측은 자국 은행들이 이번 위기와 무관하고 건전한 편인데 왜 부담을 져야 하느냐고 항의했다. 은행세가 효과적이려면 모든 주요 정부들이 동시에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 그러나 G20 참가국들은 여러 규제와 세금이 도입됐을 때 자국 금융권의 경쟁력이 떨어져 월가의 전 세계 금융 지배가 더 강화될 것을 우려한다. 이렇게 각국의 이해관계가 달라 파생상품에 대한 국제적 규제가 말의 성찬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세피난처 규제를 둘러싸고도 설전이 벌어졌는데, 프랑스는 가시적인 규제 강화를 주장했지만 영국 금융규제위원회는 ‘조세피난처가 경제 위기의 본질은 아니’라며 반대했다. 중국은 홍콩과 마카오 때문에 조세피난처 규제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각국이 자국 금융시스템이나 자국 금융기관보다 경쟁국에 더 부정적인 규제 체제를 찾기 위해서 여러 제안들을 놓고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기 때문에 합의가 별 효과 없는 내용에 그치기 일쑤”라고 지적했다. 20세기 중반에는 개별 국민국가가 시장을 규제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처럼 세계화된 시장을 통제하려면 국제적 규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 국가 체제가 일치된 경제 위기 대응을 할 수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뷸균등하게 발전하고 특정 지점들에 경제력을 집중시킨다. 이런 쏠림 현상은 특정 자본들과 특정 국가들 사이에 강력한 유착 관계를 형성시킨다. 그 결과로 등장하는 경제력과 정치권력의 복합체들은 언제나 서로 이해관계가 엇갈린다.
그래서 G20 정상회의들이 참가국 간의 이견을 얼버무린 것 말고는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것이다. 물론 어떤 국제적 협력이나 공조도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 공조는 참가국의 이해관계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G20의 국제 공조가 세계경제 위기를 해결하거나 완화하리라는 기대는 환상일 뿐이다.
IMF를 화려하게 부활시키기
G20은 힘 잃고 골골대던 IMF라는 악마를 부활시켰다. 2008년 11월 G20 워싱턴 정상회의는 G20 회원국이 IMF와 세계은행이 실시하는 금융부문평가프로그램FSAP, Financial Sector Assessment Program을 받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또, G20 정상들은 IMF와 금융안정위원회FSB(1999년 G7이 아시아 외환 위기 재발 방지와 국제 협력을 목적으로 설립한 금융안정화포럼FSF이 확대·개편된 기구)에 금융 규제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감독할 권한을 줬다.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IMF에게 명실상부한 금융 감독 권한을 쥐어 준 것이다.
IMF에 더 많은 돈을 지원한다는 결정도 내렸다. 2009년 4월 런던 정상회의에서는 IMF 재원을 5천억 달러나 늘리기로 합의했다. 이것은 런던 정상회의에서 이견 없이 합의에 이른 사항이었다. 나아가 2009년 11월 피츠버그 정상회의는 ‘IMF와 세계은행이 G20을 지원하고 상호 협력하는 21세기 새로운 글로벌 체제’를 천명했다. 그리고 G20은 IMF의 권한을 확대하는 결정도 했다. 2010년 2월 인천 송도에서 열린 G20 재무차관 회의 결과를 보면, IMF는 각국의 출구 전략을 모니터링하고 11월 G20에 최종 보고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IMF가 낼 보고서는 G20의 실행 메커니즘으로 작동할 것이다.
IMF는 G20이 채워 준 세계경제 감독관이라는 완장을 차고 악명 높은 구제금융 채권자 노릇을 재개했다. IMF는 유럽연합의 가난한 회원국들인 동유럽의 라트비아·헝가리·루마니아 등에 ‘구제금융’ 지원을 대가로 사회복지 삭감, 공무원 연금과 임금 삭감, 의료 등 공공서비스 민영화, 정리해고 요건 완화 같은 ‘노동 유연화’를 강요했다. 특히, IMF는 2009년 성장률이 마이너스 12퍼센트로 전망되는 라트비아에 추가 긴축을 요구했고 이행되지 않으면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압박했다. 그동안 IMF는 라트비아에 공공부문 노동자 임금을 45퍼센트 낮추고 실업률을 20퍼센트 이상으로 올릴 정책을 도입하라고 권고했다. 지난 2년 동안 IMF의 조건을 수용한 결과 라트비아의 GDP는 25퍼센트나 줄었다. 심지어 IMF 자신도 세계경제가 회복세를 유지하더라도 라트비아 경제는 2015년에야 2006년 수준을 회복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20 헝가리 국민 대다수가 이에 반대했고, 신임 총리 역시 IMF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IMF는 즉시 금융 지원을 중단했다.
IMF는 지금 그리스에 동일한 조건을 강요하고 있다. 또, 우크라이나(2008년 11월), 아이슬란드(2008년 11월), 그루지야(2008년 9월), 파키스탄(2008년 11월)에도 구제금융의 대가로 한결같이 고금리, 임금동결, 긴축정책을 요구했다. 이는 해당 국가의 교육·의료 등 사회서비스 예산 축소로 이어졌다. 헝가리에는 공공서비스 부문 노동자들의 임금을 해마다 7퍼센트씩 감축하는 긴축 조건을 제시하기도 했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G20에서 합의된 경기부양액의 대부분이 IMF 자본 확충에 쓰이는데 최근 몇 달 동안 IMF가 10여 개 국과 체결한 자금 지원은 경기부양이나 성장 촉진보다는 경기회복에 나쁜 것들을 부과하고 있다. 의료사고를 낸 의사한테 돈을 더 줘서 병원을 확장하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22 즉, 정부 빚이 더 늘어나지 않도록 공공지출을 줄이라는 것이다. “향후 10~20년간 GDP 대비 부채비율을 위기 전보다 낮은 수준으로 줄이는 긴축정책을 시행해 재정 여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좀더 노골적인 표현도 눈에 띈다. 23 IMF는 보험시장 활성화도 주문하고 있다. 회원국들이 민간부문의 헤지Hedge 수단을 활용하도록 지원하고 보험사에 회원국의 리스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감독을 실시해 외부 충격에 대비한 보험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국유화에 대비한 민간 보험 상품도 개발하라고 주문한다.
IMF가 단지 구제금융을 받은 나라들에만 긴축재정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올해 초 인천에서 열린 G20 재무차관 회의에서 IMF는 정부 부채 비율을 안정화시키려면 재정 수지 관리가 필요하다며 “고령화로 말미암아 지출 압력이 높아지고 있는 연금과 의료분야 등 의무 지출 분야를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코리아 이니셔티브’의 본질
24 그러나 서울에서 G20이 열리게 된 결정적 배경에 대해 《한겨레21》은 이렇게 지적했다. “미국발 글로벌 경제 위기로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새로운 글로벌 금융경제 질서 형성에 앞장섰다가는 적반하장이라는 비판을 듣게 될 게 뻔했다. 오바마로서는 미국의 입장을 대변해 줄 제3국이 필요[했다.]” 25
이명박 정부는 G20 의장국이 마치 대단한 것인 양 과대포장하느라 정신이 없다. 다섯 그룹별로 순환제로 운영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청와대는 G20 정상회담 유치는 “글로벌 경제 위기 극복 과정에서 보여 준 이명박 대통령의 탁월한 리더십을 세계가 평가한 결과”라고 자화자찬한다.이명박 정부는 “G20 의장국으로서”라는 말을 각종 대내외 정책과 국정 운영을 발표할 때마다 갖다 붙인다. “G20 의장국으로서” 아프리카에 해군함을 보내고, 아프가니스탄에 재파병도 한다. 또한, 이명박 정부가 ‘코리아 이니셔티브Korea Initiative’로 내세운 몇 가지 목표들은 이미 G20에서 논의된 내용이거나 제국주의 열강들을 흉내내고픈 열망의 표현이다. 이명박 정부는 코리아 이니셔티브, 글로벌 코리아, ‘국격 상승’ 등 애국주의적 홍보에 열을 올리지만 이것들은 평범한 한국인들 삶의 질 향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질을 위협한다.
26 한 마디로 말해, IMF의 구실을 ‘소방수’에서 ‘예방주사’로 바꾸자는 것인데,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소방수와 독이 든 예방주사 중 어느 것이 덜 나쁠까? 이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개도국의 금융 위기가 선진국으로 번지면 되겠느냐고 미국을 간신히 설득해서 서울 정상회의 의제에 오른 것으로, 아시아판 IMF를 만드는 데서 한국이 중심 구실을 하겠다는 야심이 표현된 것이다.
첫째, 글로벌 금융안전망GFSN, Global Financial Safety Net 구축이다. 올해 초 다보스포럼 특별 연설에서 이명박은 이것을 11월 서울 정상회의의 주요 의제로 제안했다.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을 통해 위기 전염 방지 장치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급전’이 필요한 국가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IMF가 유동성 위험이 있어 보이는 국가들에 돈을 빌려 주겠다고 먼저 제안하는 방식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급격한 자본변동성에 대응할 수 있도록 IMF의 지원 역량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게 글로벌 금융안전망의 핵심이다.둘째, “강하고 지속가능하며 균형적인 성장을 위한 협력 체제” 논의다. 글로벌 불균형 해소를 위한 국제 공조 체계 구축은 G20 정상회의의 가장 중요한 표어 가운데 하나다. 미국의 대對중국 무역적자액이 전 세계 경상적자액의 43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커서 세계경제 회복이 불투명하므로 이를 해결하자는 게 G20이 내거는 균형 성장의 목표다. IMF는 그동안 두 가지 해결책을 내놓았다. 중국이 위안화를 절상하거나 미국이 재정 확대 정책을 철회하는 것이다. 그러나 2005~08년까지 위안화 절상에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크게 줄지 않았다. 그래서 위안화 평가절상이 중국산 수입제품의 가격만 높여 미국의 소비 수요를 억제할 거라는 견해와 미국이 재정 확대 정책을 철회하면 경기 침체가 올 수 있다는 견해 사이에서 엎치락뒤치락이 계속될 것이다. 서울 정상회의에서 이 문제가 평화롭게 해결되기는커녕 미국과 중국 사이의 환율 전쟁이나 무역 갈등을 부채질할 공산이 크다.
셋째, 국제금융 규제·개혁 의제다. 앞에서 다뤘듯이 이 의제는 별 실효성 없는 규제안들을 확인하는 수준에서 그칠 공산이 크다. 은행들이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멍이 숭숭 뚫린 바젤은행감독위원회의 ‘은행 건전성 규제’가 서울 정상회의에서 합의될 것이다.
넷째 국제 금융기구 개혁 의제와 다섯째 개도국 개발 의제에 관해서는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국제 금융기구 개혁 ― 악마 변신술
G20은 IMF가 세계경제 감독 기능을 하려면 개도국에서 지탄과 증오의 대상이 돼 왔던 이미지를 불식해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 G20은 IMF와 세계은행의 지분을 선진국에서 개도국으로 각각 5퍼센트, 3퍼센트 이상 이전하려고 한다.
현재 IMF의 5대 주주인 미국·일본·독일·영국·프랑스가 IMF 이사회와 주요 권한을 지배하고 있다. 이 5개국의 의결권을 합치면 38퍼센트가 넘는다. 미국의 의결권이 17퍼센트에 이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모잠비크는 0.1퍼센트의 의결권을 갖고 있다. 아프리카 46개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사는 (총 24명 중) 겨우 두 명뿐이다. 미국은 선출 이사 수의 변화나, 할당액의 변화 같은 중대 사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G20의 개혁안에는 IMF에서 안건을 거부하는 데 필요한 지분을 15퍼센트에서 25~30퍼센트로 확대해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IMF 대표성이 조정된다고 해서 IMF의 본질이 바뀔 수 있을까? IMF 총재와 부총재가 개도국 출신이 되면 “미국 재부무 지부”라는 IMF의 성격이 과연 바뀔까? 개도국 출신이 주요 국제기구의 수장이 되는 것은 미국과 강대국에 충성한 대가인 경우가 흔하다. 예컨대 “태국의 부총리인 수파차이 파니차팍은 IMF에 협력적 태도를 보인 [대가로] 훗날 WTO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되는 보상을 받[았]다.”
28 따라서 IMF의 공식 수뇌부가 다양한 나라 출신들로 구성된다 해서 미국의 영향력이 축소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노엄 촘스키는 “IMF는 지금도 미국의 재무부 지부에 불과하다. IMF가 개과천선할 것이라고 믿어야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IMF는 종종 미 재무부의 꼭두각시로 묘사된다. 그러나 [IMF]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만큼 그러한 관계가 확연히 드러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미 재무부에서 국제관계를 담당하는 차관(그리고 폴란드 쇼크요법 프로그램에서 삭스의 파트너 구실을 했던) 데이비드 립튼은 미국 회사들의 이익이 최종 문서에 확실히 반영되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했다. 〈워싱턴포스트〉의 폴 블루스타인에 따르면 립튼의 존재는 미국이 IMF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분명한 표시였다.”29 캉드쉬는 한국에 IMF 구제금융 조건을 강요한 자다.
‘IMF 운영개혁위원회’의 면면을 살펴봐도 IMF의 성격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IMF 운영개혁위원회의 주요 인물인 전 IMF 총재 미셸 캉드쉬와 전 미국 재무장관 로버드 루빈이 누구인가? 오마바 정부 경제팀의 막후 인물인 루빈은 전 골드만삭스 회장이고 지금은 시티그룹 경영위원회 의장이다. 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월가맨’이라고 불리며 최근 금융 위기의 시발점이 된 대형 투자은행의 파생상품 투자를 조장한 장본인이다. 그는 김대중을 만나 대대적인 구조조정 약속을 받아 내기도 했다.G20의 IMF 개혁안은 미국의 지분을 다소 줄인다 해도 IMF 지분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극심한 이해다툼을 조장할 것이다. 출자 지분이 더 많은 국가일수록 더 많은 투표권을 가지므로 일본, 유럽 국가들, 중국이 지분 확대를 위해 덤벼들고 있다. 런던 정상회의에서 중국은 IMF 지분 확대를 위해 외환보유액 중 1천만 달러를 IMF에 대출해 주는 방안을 먼저 제안한 바 있다.
30 이 제도로 돈을 빌리려면 경제 기초 체질과 정책 건전성, 정책 이행 실적 등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FCL은 그 역할이 제한적이고 높은 수수료, 충분하지 않은 자금 제공, IMF 지원에 대한 여전한 낙인 효과 등 때문에 현재까지 멕시코(4백70억 달러), 폴란드(2백6억 달러), 콜롬비아(1백5억 달러)만이 자금 지원을 요청했을 뿐이다.” 31
G20은 런던 정상회의에서 IMF가 강도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려고 대출 조건이 다소 완화된 새로운 구제금융 제도 도입을 제안했다. 2008년 10월부터 도입한 신축적 신용공여제도FCL, Flexible Credit Line가 그것이다. IMF는 G20이 제안한 신축적 신용공여제도가 매우 진일보한 것이라고 광고한다. 그러나 돈을 빌리는 나라들이 이 제도를 이용할 만한 자격, 즉 돈 갚을 능력이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한다.G20은 IMF를 성형수술해 복권시키려 한다. 그러나 G20이 추진하는 IMF 개혁은 세계 민중의 삶을 고통으로 빠뜨리는 데 일조할 뿐이다.
이명박이 말하는 개발(개도국 지원)의 본질
이명박이 가장 강조하는 서울 의제 중 하나인 개발(개도국 지원) 의제를 보자. 이것은 좀 길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한국 정부는 선진국과 개도국의 중재자 구실을 하겠다면서 마치 자신이 개도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양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32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고기 잡는 지혜를 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G20이 전수하고자 하는 고기 잡는 법은 무엇일까?
G20의 개도국 지원은 “단순한 원조가 아닌 개도국의 장기 성장을 촉진하는 방향”에 맞춰져 있다고 한다.33 이 프로그램은 빌 게이츠 재단 등이 돈을 대고 세계은행이 관리하게끔 돼 있는데, 월든 벨로는 세계은행이야말로 농업을 망친 대표적 주범이라고 지적한다. “세계은행이 구상하는 패러다임”에 따라 “영세농을 기업 농장으로 전환”한 결과 “기업농들이 국제적인 생산 체제와 공급망을 형성시켜 독점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오히려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기아 문제와 저질 식량 생산 문제가 크게 악화됐고 농업 관련 환경 파괴 사례도 그 어느 때보다 많아졌다.” 34 월든 벨로의 폭로를 보면 빌 게이츠 재단이 농업 관련 기금 조성에 열을 올리는 진정한 이유를 알 수 있는데, 빌 게이츠는 미국 최대 에탄올 공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농업연료 사업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 35
G20 서울 정상회의 준비위원회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최근 미국이 주장하는 ‘세계농업·식량안보프로그램Global Agriculture and Food Security Program’을 들고 있다. “단순한 식량 원조에서 벗어나 개도국의 농업생산성을 증대시킬 투자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36 그런데 PPP는 철도·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부문의 운영권을 사기업에 주는 사유화 방식이다. 요금 인상과 대형 사고를 일으키기 십상인 PPP의 대표적 사례가 영국의 철도 사유화였다. 37 이 위험한 방식을 지금 개도국에 전수하겠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고기잡는 법”의 일환으로 제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G20 준비위원장 사공일은 “개발도상국이 원조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개발 역량을 배양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면서 “PPPPrivate Public Partnership(공사협력체 방식)”를 제시했다.G20과 이명박 정부가 말하는 빈곤국 원조는 공적개발원조ODA를 의미하는데, 이는 빈곤국들의 필요가 아니라 선진국의 필요에 맞춰져 있다. 그나마 한국의 ODA 지출 수준은 OECD 국가 중 꼴찌다. 원조를 주는 나라의 상품만을 사용하고 차관도 포함되는 ODA의 구조 때문에 “실제로 원조국들은 원조의 평균 7퍼센트만을 인간 발전의 가장 시급한 부분에 할애하고 있다.”(〈유엔개발계획 보고서〉) G20의 원조는 이런 구조에 여전히 갇혀 있다.
38 따라서 사실 외채 탕감은 물론이고 오히려 배상을 해야 한다. 다섯 세기에 걸친 약탈과 노예제와 식민화, 그리고 20여 년에 걸쳐 구조조정을 강요당한 아프리카와 제3세계 빈곤국 민중의 고통을 감안한다면 채권자들은 마땅히 이 고통을 보상해야 한다. 외채 전액 탕감은 이 보상의 첫 걸음일 뿐이다.
실질적 부채 탕감은 G20에서 제대로 거론되지 않는다. 여전히 최빈국들은 해외 부유한 채권자들한테 진 빚에 허덕이고 있다. 1990~93년에 아프리카는 해외 채권자들에게 해마다 1백34억 달러씩 원리금을 상환했다. 이는 아프리카 의료서비스에 쓰인 정부 지출액의 네 배다. 한 통계를 보면 개발도상국들은 1980년에 외채 1달러당 이미 7.5달러를 상환했으며 앞으로 4달러를 더 갚아야 하는 지경이었다.39 그러나 최빈국에 절실한 것은 지원국의 미래 수익을 위해 각종 조건을 단 지원이 아니다. 깨끗한 식수, 의약품, 식량을 무상으로 지원해야 한다.
G20은 아프리카 빈곤국 어린이들을 위한 무상 지원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엉뚱하게도 이명박 정부는 한국이 금융 정보통신 강국답게 개도국에 금융서비스 접근성 제고 방안을 전수하겠단다. 금융 소외 계층이 휴대폰이나 ATM 등을 활용해 쉽게 금융거래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것이다.40 세계은행이 개발·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주축이 돼야 한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격이다. 세계은행은 다국적기업의 이해를 우선시한다. 예를 들어 현재 교토 기후변화협약 틀 안에서 추진되는 일부 프로그램을 감독하는 기구가 세계은행인데, 감독 위임을 받은 세계은행 이사들은 재생에너지 자원에 집중 지원하라는 자문회의의 권고를 무시한 채 석탄·석유·천연가스 채굴 투자 사업에 막대한 돈을 지원하고 있다. 세계은행은 ‘빈곤축소전략보고서PRSP, Poverty Reduction Strategy Papers’라는 제도를 만들기도 했는데, 미국의 저명한 진보 지식인 마이크 데이비스는 PRSP는 원조가 빈곤 지역에 돌아갔다는 증거를 확보하려는 수작일 뿐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41 G20은 이처럼 환경 파괴와 빈곤 확대에 책임이 있는 세계은행더러 오히려 이 문제들을 해결하라는 황당한 주장을 펴고 있다.
한편, G20은 “세계은행 등 다자 개발 은행이 식량안보, 인간안보, 민간주도 성장 및 인프라 지원, 녹색경제로의 전환 등에 중점 기여토록 촉구”한다. 또 다른 개발 의제는 녹색성장이다. 그러나 정부와 언론의 호들갑스러운 선전과 달리 G20 정상회의가 기후변화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적은 한번도 없다. G20 피츠버그 정상회의는 ‘화석연료 보조금 철폐’를 합의했지만, 구체적 실행 계획이나 강제 규정은 없었다. 그저 “에너지 및 재무 장관들이 국내 상황에 기초를 두고 이행 전략과 시간표를 발전시키”라고 했을 뿐이다. 또, ‘청정·신재생 에너지 공급의 확대와 에너지 효율 개선’을 약속했지만 누가 언제까지 얼마를 부담할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청정에너지 기술 이전도 “자발적으로 하게 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기업들이 경쟁력 있는 기술을 자발적으로 다른 나라 경쟁 기업들에 넘겨줄 리 없으므로 이것은 공문구일 뿐이다. G20에서 한국이 기후변화 대응 프로젝트와 친환경 경기부양을 실시하는 나라로 꼽힌 것을 보면, G20이 얼마나 친환경과 거리가 먼지 분명히 알 수 있다. 런던 정상회의는 경기부양 예산 중 녹색 투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로 한국(80.5퍼센트)을 꼽았는데 여기에는 ‘4대강 살리기’와 주변 정비 사업 예산이 포함돼 있다! 4대강 죽이기가 G20에서는 녹색 투자로 변신한 것이다!이명박 정부는 개발 의제를 통해 “경제 위기 극복 경험을 공유”하겠다고 떠들어댄다. 이것은 대다수 한국인들의 뇌리에 고통으로 각인된 IMF 경험을 국제적으로 공유하겠다는 것이다. 이명박이 런던 정상회의 때 참가자들에게 나눠 준 ‘한국의 경제 위기 극복 사례’라는 문건을 보면, 주로 IMF 구제금융 당시 한국 정부가 캠코(한국자산관리공사)를 이용해 금융 부실채권을 매입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당시 정부가 공적 자금 1백60조 원을 퍼부어 금융기관을 구제하는 동안 무수히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명박 식 개도국 지원의 본질은 한 마디로 말해 ‘글로벌 착취 코리아’의 경험을 개도국 민중에게 강요하겠다는 것이다.
G20 항의 운동의 방향
G20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위에서 살펴봤듯이, 세계경제 위기의 책임을 세계 민중에게 전가하고, 그 사실을 감추려고 악마 화장술에 의지하는 위선적인 G20에 분명한 항의를 표명해야 한다.
44 시민단체들의 로비 활동으로 G20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 과정에서 시민단체들이 포섭되거나 G20에 진보적 색깔을 덧입히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이명박으로서도 NGO의 요구를 듣는 척하면서 G20이 진보적 회의체인 양 보이게 하는 것은 전혀 손해 볼 일이 아닐 것이다.
일각에서는 G20에 로비를 해서 G20 정상들에게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비의 대표적인 사례로 시민단체 대표들이 회원국 정부 관리와 만나 의제에 관해 면담하는 ‘G20 Civil Dialog’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G20 Civil Dialog’가 G20에 항의하는 목소리를 전달하는 창구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G20이 시민사회단체의 목소리도 듣는다는 생색만 내는 장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부가 지원하는 G20 모니터링 사업의 연구 책임자는 “국내외 NGO 대표를 옵서버로 초청하거나 자문회의를 개최하여 국제 시민사회와의 소통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는데, 이는 “G20 아시아 국가와의 공조를 강화하고 비회원국 및 NGOs를 포섭하기 위한 가칭 글로벌 소사이어티 아웃리치Global Society Outreach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제기한 것이다.진보 운동은 무엇보다 G20이 어떤 기구인지, G20 정상들이 모여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날카롭게 들춰내고 폭넓게 알려야 한다. 이를 통해 경제 위기의 책임을 전 세계 민중에게 전가하려는 것을 포함해 G20의 악행에 맞서는 광범한 항의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 또, G20 방식의 위기 해결책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위한 더 나은 해결책이 있음을 주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위기의 주범인 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노동자·서민의 세금을 쓸 것이 아니라 금융권에 세금을 부과해 이윤을 환수하고 파산 금융기관을 국유화해 공공의 선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과 공공서비스 확대, 더 많은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필요하다.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녹색 일자리를 확대해야 한다. 재생에너지를 확대하고, 열효율이 높아지도록 건물과 주택을 고치고, 대중교통 체제를 획기적으로 바꿔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 등등.
우파들은 불황기에 재원 확보가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이는 변명일 뿐이다. 세계적으로 원자재·금 투기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보면 돈은 넘쳐난다. 한국도 단기 부동자금이 무려 6백조 원이나 된다. 부족한 재원은 부자 감세를 철회하고 부유세와 기업세를 대폭 확대해 마련할 수 있다. 또, 재원 확보를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금융 규제를 실시해야 한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이라크·아프가니스탄·아프리카 파병에 쏟아붓는 돈만 따져봐도, 재원 확보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게 명백하다. 부시가 이라크 전쟁에 사용한 돈만도 3조 달러에 이른다. 무엇보다 G20 서울 정상회의에 항의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전히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이탈리아, 한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해야 한다. G20은 결코 평화적인 국제 공조체가 아니다. G20 정상회의는 “테러 방지”와 “테러 자금 조달 및 건전성 기준에 대한 조처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하면서 이란과 북한을 압박해 왔다. 2009년 11월 G20 워싱턴 정상회의는 경제협력개발기구 산하 자금세탁 방지 국제기구FATF에 의뢰해 ‘테러 조직’ 자금 세탁에 협조적인 나라들을 솎아내기로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FATF는 ‘테러 국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에 막대한 경제·군사적 지원을 하는 미국 정부를 지목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우리는 고장난 자본주의를 계속 지탱시키려는 G20 체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진정한 국제 공조는 시장 경쟁이 아닌 협력과 연대를 바탕으로 한 민주적 계획경제 속에서 가능하다. 서울 정상회의를 앞두고 있는 지금, 망가진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대안이 필요함을 주장할 좋은 기회다.
46 서울 정상회의의 예산도 무려 1천3백억 원에 이르는데, 이 중 많은 부분이 경호·경비에 쓰일 예정이다. 47
지금, G20을 빌미로 한 민주적 권리 탄압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 이명박은 꼴보기 싫은 집단들을 모두 G20이라는 청소기로 다 빨아들여 버리려는 심산인 듯하다. G20에 항의하는 세계 곳곳의 시위는 항상 삼엄한 경비와 광포한 국가 탄압 속에서 벌어졌다. 그린피스의 자료를 보면, 캐나다 정부는 G20 토론토 정상회의의 경호와 보안을 위해 향후 5년간 전 세계 모자보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돈을 퍼부었다.48 캐나다에서는 2만 5천 명이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고, 민중 정상회의가 토론토 라이어슨 대학에서 열리기도 했다.
매우 삼엄하게 경비했음에도 G20 정상회의는 매번 격렬한 항의 시위에 부딪혔다. 2009년 4월 G20 런던 정상회의 당시 노동조합, NGO, 급진좌파 정당, 환경 운동가, 반전 활동가 들은 ‘사람이 최우선이다!Put People First!’라는 연합체를 결성해 정상회의에 항의했다. 주요 슬로건은 “너희들의 위기에 우리가 대가를 치르지는 않겠다”였다. G20 런던 항의 시위는 경제 위기에 대한 불만과 맞물려 3~4만 명이 집결했다. 피츠버그에서는 경찰이 회담장에서 8백 미터 떨어진 곳에 4미터 높이의 철벽까지 세우고 모든 집회를 엄단하겠다고 했지만 “자본주의에는 희망이 없다”는 손팻말을 든 학생과 시민 4천여 명이 평화 행진을 벌였다.한국에서 9월 초 발족 예정인 G20 공동대응 준비위원회도 한국 민중의 정당한 목소리를 제대로 모아 항의 시위를 조직할 채비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G20은 수십억 명의 삶이 걸린 문제를 다루면서도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으로 운영된다. G20회의는 모두 비공개이고 참관도 없다. 이명박은 다국적기업(G20 참가국들의 1위부터 20위 기업을 망라하는 4백 개 기업)의 수장들만 초청했다. 공식적인 합의문은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와 정상회의 때만 발표되고 그 밖의 회의 내용은 철저히 비밀이다. 이토록 철저하게 비민주적이고 무능한 자들이 우리를 쥐어짜도록 팔장끼고 지켜볼 수는 없다.
필자 김어진은 G20 공동대응 준비위원회 공동운영위원장이다. 이 글은 개인 의견임을 밝힌다.
주
- 김기석 2010, p36. ↩
- Reuters(17 April 2009). ↩
- 지만수·박민숙, 2010. ↩
- 김기석 2010, p27. ↩
- http://www.g20.org/Documents/g20_work_programme_2007.pdf ↩
- http://www.g20.org/Documents/work_programme_2003.pdf ↩
- 전창환 2010, p21. ↩
- http://economy.hankooki.com ↩
- IMF는 단기투자 목적 달러화 유입을 억제하기 위해 고정수익상품과 증시에 투자되는 자금에 일괄적으로 2퍼센트의 세금을 부과하는 금융거래세(일종의 토빈세)에는 반대한다. “금융 거래가 많다고 해서 위험이 커지는 것은 아니며 실질 부담이 소비자에게 전가될 수 있는 등 G20이 추구하는 목적과 맞지 않는 단점이 있다”는 게 주요 근거다. ↩
- ‘IMF and bank taxes Published’, Financial Times(22 April 2010). ↩
- 캘리니코스 2009. ↩
- OECD Economic Outlook: Interim Report, March 2009, ch3. ↩
- http://www.naomiklein.org/articles/2010/06/sticking-public-bill-bankers-crisis ↩
- 〈레프트21〉 33호(2010년 6월 5일자). ↩
- G20 정상회의 준비위원회 홍보기획단 2010, p9. ↩
- 캘리니코스 2010, p145. ↩
- 캘리니코스 2010, p146. ↩
- Financial Times(10 Feb 2010). ↩
- Callinicos 2007; Callinicos 2009. ↩
- Socialist Worker 2146(11 April 2009). ↩
- ‘G20서 ‘백지수표’ 받은 IMF, 구조개혁은 외면’, 〈민중의 소리〉(2009.4.14)에서 재인용. ↩
- 호세 비날스Jose Vinals IMF 통화 및 자본시장부 금융 자문관·파올로 마우로Paolo Mauro IMF 재정부 과장, ‘위기 대응 조치에 대한 출구 전략’, KDI-IMF ‘세계경제의 재건’ 국제회의 발표 자료. http://jach68.blog.me/40102114672에서 인용. ↩
- 같은 글. ↩
- 〈청와대 정책소식지〉 51호, p4. ↩
- 조계완 기자, ‘한국에 사탕 쥐어 준 미국과 영국의 웃음’, 《한겨레21》 제781호(2009년 10월 16일자). ↩
- G20 정상회의 준비위원회 홍보기획단 2010, p32. ↩
- 클라인 2008, p347에서 재인용. ↩
- 클라인 2008, p346. ↩
- 〈한겨레〉(2008.11.25). ↩
- http://www.imf.org/external/np/sec/pr/2010/pr1008.htm ↩
- 최희남 2010, p310. 최희남은 G20 정상회의 준비위원회 의제총괄국장이다. ↩
- 최희남 2010, p372. ↩
- 최희남 2010, p372. ↩
- 벨로 2010, p244. ↩
- 벨로 2010, p189. ↩
- 〈연합뉴스〉(2010.8.1). ↩
- 〈프레시안〉(2005.11.17). ↩
- 미예 & 뚜생 2006, p185. ↩
- 최희남 2010, p373. ↩
- G20 정상회의 준비위원회 홍보기획단 2010, p33. ↩
- 데이비스 2007, p103. ↩
- 〈레프트21〉 37호(2010년 7월 31일자). ↩
- ‘Towards a Global Green Recovery : Recommendations for Immediate G20 Action’(2 April 2009). ↩
- 김기수 2009. ↩
- G20 공동대응 준비위원회 2010, p74. ↩
- G20 공동대응 준비위원회 2010, p60. ↩
- 〈경향신문〉(2010.1.7). ↩
- http://sptzin.tistory.com/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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