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반자본주의신당 NPA
프랑스 급진 좌파의 새로운 지평
1989년 톈안먼 사태와 베를린 장벽 붕괴, 1991년 소련 해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가속화,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총파업, 1999년 시애틀과 2001년 제노바의 반세계화 운동 등과 함께 이론적으로뿐 아니라 이제는 경험적으로도 확실해진 새로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 프랑스에서는 여러 경향의 급진 좌파들이 새로운 이론적·실천적 전망을 향해 자발적으로 서로 수렴해 가는 흐름이 형성됐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마침내 2009년 2월 초, 9천1백23명의 활동가들을 창당 멤버로 하는 반자본주의신당NPA, le Nouveau Parti Anticapitaliste의 출범으로 귀결됐다. “21세기의 새로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NPA는 한편으론 프랑스 좌파 내에 존재하는 풍부한 반스탈린주의적 운동의 경험들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새 세대 활동가들에게 열려 있는 대중적 변혁 운동의 활성화라는 미래지향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기존 정치권 내에서 기득권과 실리를 누리는 정당들에 비해서 매우 작은 규모인 급진 좌파 조직들이 통상 합쳐지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의 차별적 명료화에 따라서 더욱더 분열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NPA의 성립은 역사적으로 아주 드물고 힘든 경우이며, 따라서 그만큼 더 참조할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 새로운 당의 실천적 전망이 단기간의 급격한 세勢 불리기가 아니라 반자본주의적 대중 운동의 지속적인 성장과 운동의 국제주의적 연대를 인내심과 끈기를 갖고 추구하는 데 있기에 더욱 그렇다.
프랑스 좌파 운동의 역사에서 NPA의 출범이 갖는 이러한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역사적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첫째는 1930년부터 프랑스에서 트로츠키주의가 밟아 온 역사적 성장과 분열의 과정을 살펴보는 일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타협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사회당PS, Parti Socialiste과 스탈린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공산당PCF, Parti Communiste Français에 맞서서 새로운 조직과 투쟁 노선을 건설하는 일이 1930년부터 1968년까지 이어지는 불투명한 역사적 상황들 속에서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얼마나 험난한 일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며, 또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진정한 좌파 운동의 정립을 위한 올바른 문제틀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68혁명 직후 급부상한 마오주의maoïsme 경향들과 안정적으로 조직적 뿌리를 내린 대표적인 트로츠키주의 경향들이 혁명적 물결의 퇴조기에 전자는 어떻게 소멸하고 또 후자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68혁명 이후 좌파의 새롭게 변화한 이데올로기 지형 속에서 잘못된 이론적 선택이 — 아무리 급진적 전망을 주장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직접적 실천 행위의 효과를 강조하더라도 — 대중 운동 속에서 어떻게 실천적 파탄과 조직상의 소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이해가 바탕이 될 때, 우리는 NPA의 성립 과정을 이루는 추동적推動的 계기들의 현실적 필연성을 제대로 따져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68혁명 이후 1995년까지 지루한 침체기를 견뎌 온 급진 좌파의 어떠한 경향들이, 맨 앞에서 이야기한 새로운 역사적 상황의 대두와 함께 어떠한 반성적 자각과 실천적 욕구들을 느끼면서 어떠한 새로운 조직을 위한 기획으로 수렴될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고찰을 전제로 해서, 우리는 현 단계의 NPA를 특징짓는 기본 원칙들과 조직상의 규약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지배층의 정치적 요구에 끊임없이 그리고 무기력하게 타협적인 태도를 취해 온 사회당에 대한 엄격한 거리두기와 반자본주의라는 두 선행조건 하에서 운동의 다원주의le pluralisme와 조직적 투명성의 필요를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 출범한 지 1년 반밖에 안 되는 NPA의 이러한 시도는 잠정성과 동시에 잠재성도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현실적 전망을 생각해 보는 일은, NPA의 성립 과정에 대한 고찰들과 함께, 한국에서 장차 급진 좌파의 독자적인 대중 정당을 만드는 데 훌륭한 참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 — 68혁명 이전까지
지난 세기를 “전쟁과 혁명”의 시대라고 한다면, 이 와중에서 진정한 사회주의를 향한 급진 좌파의 열망과 노력의 핵심적인 한 부분은 트로츠키주의의 필연적 시작과 고난 그리고 성장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지난 세기의 혁명적 경험들을 더 냉철하고 성숙된 역사적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게 된 현재에 와서 보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것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프랑스의 경우일 것이다. 프랑스에서 트로츠키주의는 공산당 내에서 스탈린주의화에 반대하다 제명된 로스메르Alfred Rosmer, 나빌Pierre Naville, 몰리니에Raymond Molinier, 프랑크Pierre Frank 등을 주축으로 1930년에 프랑스공산주의동맹LCF, Ligue Communiste de France이 결성됨으로써 시작된다. 채 40명도 안 되는 구성원으로 출발한 조직이었지만, 프랑스공산주의동맹은 강한 개성과 — 때로는 모험주의적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 활기에 찬 지식인 타입의 몰리니에와 신중한 노동자 타입의 나빌 사이의 갈등으로 분열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트로츠키는 처음에 몰리니에 편을 들다, 나중에는 나빌의 편을 들게 된다.)
이러한 사례는 갓 출범한 작은 규모의 조직이 적대적인 정치적 환경 속에서 자신의 미래 전망을 불확실성 속에서 암중모색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 즉 조직원들 사이의 개성적 차이가 별다른 여과 장치 없이 조직 운용 방식에 대한 직접적 갈등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문제를 잘 보여 준다. 이러한 불만족스러운 상황에서, 1934년 트로츠키는 공산주의동맹을 사회당에 입당시킨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것은 사회당과 공산당이 단일(공동) 전선을 결성할 경우 형성될 거대한 혁명적 잠재력을 염두에 둔 전술적 결정이었으나, 1935년 사회당에서 축출됨으로써 그러한 시도는 무위로 끝나고 만다.
이에 따라 트로츠키는 독자적인 당 건설이라는 결정을 내리는데, 이 결정을 중심으로 트로츠키주의는 결국 다음과 같이 분열하게 된다. 나빌을 중심으로 하는 다수파의 국제주의노동자당POI, Parti Ouvrier Internationaliste(1936년), 몰리니에와 프랑크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주의공산당PCI, Parti Communiste Internationaliste(1936년), 양편에 반대하던 크레포Yvan Craipeau 등이 결성한 혁명적사회주의청년단JSR, Jeunesses Socialistes Révolutionnaires(1935년), 1938년 트로츠키에 의해 건설된 제4인터내셔널에서 프랑스 지부를 대표하던 POI로부터 탈퇴해서 더 강한 노동자 중심주의를 지향하던, 코르네David Korner(일명 바르타Barta)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연맹UC, Union Communiste(일명 바르타 그룹), 마찬가지로 1938년 POI에서 탈퇴해서 급진적 사회주의자 피베르Marceau Pivert의 노동자농민사회당PSOP, Parti Socialiste Ouvrier et Paysan으로 옮겨간 분파 등.
2 개혁주의나 스탈린주의와는 다른 것을 추구하는 새로운 급진 좌파 운동들이 노동계급 속에서 성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 좋은 예가 가령 피베르의 주도로 창당된 노동자농민사회당인데, 약 1만여 명 정도의 당원으로 출범한 — 따라서 트로츠키주의 조직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큰 — 이 조직조차 양대 조직 사이에서 버텨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런 조직상의 분열 때문에 트로츠키주의는 부르주아지 중의 개혁주의 경향을 대변하던 급진당과 노동계급에 기반한 양대 정당인 사회당과 공산당의 제휴로 성립된 인민전선le Front populaire(1936~38) 기간에 실질적 성장을 할 수 없었다. 사실, 인민전선을 통해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둔 것은 사회당과 특히 공산당이었기에, 그렇지만 인민전선을 거치면서 노동계급 속에 광범하고 강력하게 뿌리내린 공산당도 내부의 동요에 봉착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1939년 8월 23일 히틀러와 스탈린이 맺은 독소불가침조약을 지지한다는 당의 공식 방침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산당 내부의 이러한 동요는 9월 3일 프랑스가 독일과 “기묘한 전쟁la drôle de guerre”에 돌입해서 1940년 6월 22일 항복하게 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이어지는 나치 치하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분출되지 못한 채 사그라져 버리고 만다.4 물론 여기에 합류하지 않은 조직으로는, 애당초 제4인터내셔널에 반대했던, 그리고 여전히 조직원 수가 채 열 명도 안 되던 바르타 그룹이 있다. 그런데 파블로를 중심으로 통합된 이 새로운 조직 PCI도 곧 분열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은 설상가상으로 1940년 8월 스탈린의 첩자에게 트로츠키가 암살당함으로써 마지막 남은 구심점을 잃었지만, 1944년부터 그리스 출신인 파블로Michel Pablo(본명은 Michalis Paptis)에 의해서 제4인터내셔널과 그것의 프랑스 지부인 국제주의공산당PCI, Parti Communiste Internationaliste으로 통합된다.5 이어서 1949년 초에는 르포르Claude Lefort, 카스토리아디스C. Castoriadis,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같은 지식인들이 제4인터내셔널과 PCI의 친소련親蘇聯 경향을 비판하면서 이탈해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Socialisme ou Barbarie”라는 명칭의 그룹과 잡지를 만든다. 이 그룹의 견해는 소련을 트로츠키나 제4인터내셔널처럼 “변질한 노동자 국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미국 노동자당WP, Workers Party 내 두나예프스카야Raya Dunayevskaya와 제임스C. L. R. James, 영국의 토니 클리프Tony Cliff 등처럼 국가자본주의 국가로 보는 것이었다.
1948년 초,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나치 수용소의 참혹한 실상을 최초로 폭로해서 유명해진 옛 트로츠키주의자 루세David Rousset는 사르트르와 함께 해방 이후 양대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드골의 프랑스국민연합RPF, Rassemblement du Peuple Français과 공산당 사이에서 차별화된 제3의 대중 정당인 혁명적민주연합RDR, Rassemblement Démocratique Révolutionnaire을 출범시키는데, 여기로 PCI 구성원 중 절반 가까이가 옮겨간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의 많은 지식인들은 미국과 소련을 대립축으로 하는 제3차세계대전의 발발을 불안하고 막연한 예측이 아니라 거의 위협적인 현실로 여겼는데, PCI의 리더인 파블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임박한 세계대전과 함께 정치 혁명이 일어나 소련의 스탈린주의 관료체제가 일소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세우면서, 공산당에 입당하는 전술을 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히 밀어붙인다. 그 때문에 1951년 2백50명 정도였던 조직원은 1952년 초에는 프랑크를 중심으로 1백여 명 정도만 남게 된다. 파블로의 전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랑베르Lambert(본명 Pierre Boussel)나 블렙트뢰M. Bleibtreu 등을 따라 나가서 다른 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더욱 “오른쪽”으로, 즉 사회당 쪽으로 이탈하는 이들도 생겨나면서, 알제리전쟁이 심각한 국면으로 빠져드는 1956년 무렵 트로츠키주의는 다음과 같이 분열된 모습을 보인다.· 사회당 경향의 좌파 쪽으로 돌아선 사람들 약 50여 명
· 블렙트뢰를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레닌주의 경향 약 20여 명
(위 두 분파는 후에 통합사회당PSU, Parti Socialiste Unifié(1960년)으로 합류한다.)
· 프랑크를 중심으로 한 친 파블로 계열의 PCI 약 30여 명은, 대부분 공산당의 세포조직 속에 들어간다. 이들이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CR, Ligue Communiste Révolutionnaire의 모태가 된다.
· 랑베르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조직 노선을 고수하던 활동가들 약 50명 정도는 후에 국제주의공산주의자조직OCI, Organisation Communiste Internationaliste(1965년), 노동자당PT, Parti des Travailleurs(1991~2008년)과 이 뒤를 이은 독립노동자당POI, Parti Ouvrier Indépendant(2008년)의 모태가 된다.
· 내분으로 말미암아 1950년 바르타 그룹이 해산된 후, 그 뒤를 이어 르노 자동차 공장을 기반으로 재건된 〈노동자의 목소리Voix ouvrière〉를 기관지로 하는 소그룹은 노동자투쟁LO, Lutte Ouvrière의 모태가 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인민전선 시기나 그 이후 1945년부터 공산당이 노동계급 내에서 행사하던 엄청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트로츠키주의는 꾸준히 조금씩 성장했지만, 끊임없는 분열로 여전히 소그룹의 분파들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은 공산당의 교조주의적 태도를 거부하면서 진정한 사회주의적 전망을 추구하려는 사람들 중의 많은 부분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내부 구성원들조차 사회당 쪽이나 독자적인 길을 추구하는 쪽으로 이탈하는 양상을 보였다. 가령, 나빌, 크레포, 블렙트뢰, 조스팽(랑베르 파) 등이 사회당이나 그쪽 경향으로 이탈했다면, 클로드 르포르,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펠릭스 가타리(파블로 파) 등은 이탈 후 독자적인 활동을 벌이다 비판적 지식인의 길을 선택한 사례들이다.
8 )
그러나 이러한 분열상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은 알제리전쟁 기간에 서로 협력하거나 독자적으로, 또는 다른 좌파 조직이나 개인들과 협력하면서 알제리 해방을 위해 합법 투쟁은 물론 비합법 투쟁까지도 활발히 전개한다. 이를 계기로 파블로 계열과 랑베르 계열은 1963년 제4인터내셔널 차원에서 통합을 시도하는데, 그 결과로 제4인터내셔널 통합사무국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여기에 랑베르 계열은 최종적으로는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통합사무국은 프랑크와 만델Ernest Mandel 등이 주도하게 된다.(점차 독단적이 되어 간 파블로는 1960년에 이미 운동에서 배제된 상황이었다.어쨌든, 알제리해방전쟁에 대해 모호하고 위선적인 태도를 취한 사회당이나 공산당과 달리 트로츠키주의는 명확한 국제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했으며, 이를 계기로 1966년에는 크리빈Alain Krivine, 벤사이드Daniel Bensaïd 등을 중심으로 청년들 사이에서 혁명적공산주의청년단JCR, Jeunesse Communiste Révolutionnaire이 만들어지게 된다. “변질한 노동자 국가”인 소련에 대한 엄정한 비판과 반스탈린주의 그리고 국제주의를 정체성으로 한 이 새로운 그룹은 한편으로는 프랑크의 PCI의 영향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급진 좌파의 새로운 실천적 전망을 모색하는 청년들을 위한 미래를 향한 조직이기도 했다.
2. 트로츠키주의 — 68혁명과 그 이후
9 그러나 예기치 못한 화산 폭발처럼 분출한 68혁명 때문에 청년들은 기존의 사회당이나 공산당이 표방하는 것들과는 다른, 가령 아나키즘에서 평의회주의(또는 좌익공산주의),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게바라주의guévarisme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급진 좌파 이념들에 실천적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이것들 중에서는 트로츠키주의와 마오주의가 68혁명 직후에는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사회를 격렬한 내분으로 몰아넣었던 알제리전쟁이 마침내 1962년 알제리의 독립으로 막을 내린 후, 1960년대 프랑스는 일견 본격적인 소비사회의 대두와 함께 권태로울 정도로 평온하고 탈정치화한 것처럼 보였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 직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 청년들은 더는 좌든 우든 기존 정당들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시점에서 조직의 지속성 및 실천적 성장과 발전적 변화라는 관점에서 평가해 본다면, 이 양대 경향은 현격한 대조를 보인다. 명백히 68혁명의 영향으로 1970년대 초반까지는 거의 모든 급진 좌파 조직들이 급격하게 성장한다. 가령 앞에서 언급한, 청년들의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JCR은 1968년 4월에는 3백50여 명의 조직원이 있었다면, 5월의 혁명 발발 기간에 적극적으로 대중 활동에 참여한 결과 6월에는 1천여 명으로 늘어났다.11 외면했다는 사실이다. 이어서 재미있는 사실은 정부의 탄압으로 UJCml이 해체되면서 베니 레비Benny Lévy(일명 Pierre Victor)를 중심으로 하는 소수파가 건설한 비합법 조직인 프롤레타리아좌파GP, Gauche Prolétarienne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혁명 직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급진적 청년들 대다수는 68혁명을 곧 다가올 혁명의 “예행총연습une répétition générale”으로 간주하는 고양된 분위기였으며, 마오주의자들 역시 실천적으로 외면했던 처음의 실책을 깨닫고는 68혁명을 대중의 혁명적 자발성이라는 측점에서 이상화하면서 마찬가지로 이상화한 중국 문화대혁명의 모습과 결합시켜서 노동자들과 대중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더구나 구성원들 중의 주요 멤버가 파리고등사범학교 출신이라는 특권적인 후광 덕분에 사르트르, 라캉, 푸코 등과 같은 저명한 지식인들의 후원과 지지를 손쉽게 이끌어낼 수도 있었다. 12
전통적인 엘리트 교육기관인 파리의 고등사범학교를 근거지로 이론적으로는 알튀세르Althusser의 영향 하에 있던 대표적인 마오주의 조직인 마르크스-레닌주의공산주의청년연맹UJCml, Union des Jeunesses Communistes marxistes-léninistes은 이와는 다른 양상으로 발전한다. 먼저 특이한 점은 흔히 통용되는 “68혁명 = 마오주의자들”이라는 잘못된 공식과는 달리 마오주의자들은 — 알튀세르 자신도 그랬듯이! — 68혁명을 “쁘띠부르주아” 학생들의 소요로, 심지어는 CIA의 음모로까지 간주하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해체된 UJCml의 다수파는 중국공산당의 공식 후원을 받는 비합법 조직인 프랑스마르크스-레닌주의공산당PCmlF, Parti Communiste marxiste-léniniste de France에 합류하는데, 이것은 교조적인 스탈린주의 조직이었기에 성장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프랑스의 이러한 마오주의 조직들의 공통점을 이야기한다면, 지적 노동과 육체 노동, 지식인과 대중, 지도자 또는 지도부와 대중 등의 구분을 거부하는 급진적 반권위주의, 공장 내 비숙련 노동자로 조직원들의 정착, 대중 투쟁 때 폭력을 마다 않는 직접 행동, 그리고 제도권 정치로서 선거의 거부 등을 들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특징들이 실제 현실에서는 다분히 비현실적이라는 점이다. 가령, 그들이 이념상 내세우는 급진적 반권위주의는 68혁명 직후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었지만, 반면 그들 자신의 조직은 고도로 중앙집중적이었고 매우 권위주의적이었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부터 대중의 투쟁 분위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선거 거부나 비합법 조직과 투쟁의 운용과 전개는 곧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이 때문에 GP는 이미 1973년 지도부 스스로 해체를 결정하며, 그 중 일부는 사르트르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일간지 〈리베라시옹Libération〉을 창간한다. 그리고 스스로 해체를 결정하지 않은 마오주의 조직들은 혁명적 분위기의 퇴조 속에서 그리고 그들이 이상화했던 마오와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점점 더 대중으로부터 고립돼 사라지게 된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이들의 잔재는 아마도 ‘정당 없는 정치’를 지향하고 실천하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를 중심으로 한 아주 작은 규모의 그룹 정도일 것이다. 반면, 마오주의와 달리 트로츠키주의는 68혁명 직후 비합법화된 상황에서도 제도권 정치와 선거를 활용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공동) 전선의 정치가 문제인 한, 제도권이냐 아니냐, 합법이냐 아니냐 하는 구분은 부차적으로 여기는 것이 트로츠키주의의 오래된 전통이었다(물론 이 때문에 내부에서 종종 여러 분파로 갈리기도 하지만). 실제로 비합법화된 상황에서도 1969년 4월 JCR과 PCI는 공산주의자동맹LC, Ligue Communiste으로 통합했으며, 그해 말 대통령 선거에 알랭 크리빈을 독자 후보로 내세웠던 것이다.그렇지만 68혁명 직후의 고양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마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LC 또한 주된 전략으로는 혁명적 전위와 소규모의 혁명적 거점들을 중심으로 하는 무장봉기 노선을 채택했다. 그 결과 1973년 6월 극우파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빌미로 다시 해산당하지만, 그 다음 해에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CR으로 이름을 바꿔 다시 출발한다.(LCR이 바로 오늘날 NPA의 출발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재출발과 함께 LCR은 현실의 상황에 맞게 전략적 방향 전환과 조직상의 변화를 꾀한다. 이제 무장봉기 전망을 접고, 노동 현장과 사회운동들 속으로 들어가는 결정과 함께 조직 내 개별 경향들의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가령, 혁명정당론 대 노조 활동 강화론 등). 이 덕택에 마오주의자들과는 달리 LCR은 1970년대 후반까지도 조직적으로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1977년 무렵 전국적으로 약 3천8백 명의 활동가와 1만여 명의 동조자들).
다른 트로츠키주의 조직들도 마찬가지로 성장했다. 랑베르 중심의 OCI 역시 68혁명의 물결을 타고 1970년대에 가장 큰 트로츠키주의 조직으로 급부상했는데, 가령 1970년 2월 파리 근교 부르제Le Bourget 공항의 집회는 1만여 명의 젊은 활동가들을 모을 수 있었다. 〈노동자의 목소리〉 그룹 또한 해산당한 후 노동자투쟁LO으로 재출발해서 성장한 결과, 1974년 대선에서 조직의 대변인인 아를레트 라기예르Arlette Laguiller를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로 내세울 수 있게 된다.(이후 그는 지금까지 한번도 빠짐없이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
17 또한 내부에 개별 경향의 권리를 인정한다. 제4인터내셔널에서 배제된 OCI는 혁명적 전위정당 건설에 반대하며, 노조 활동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개별 경향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제4인터내셔널 결성에 반대했던 LO는 다른 “진정한” 인터내셔널 건설을 추구하고 있으며, 다른 조직들보다 훨씬 더 강한 노동자주의와 “정통” 트로츠키주의의 특징을 고수하고 있다. 당연히 내부에서 개별 경향의 권리는 인정되지 않는다.
이처럼 68혁명을 계기로 조직적으로 급성장한 대표적인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은 지도부의 개성적 차이들 외에도 각각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서로 차별화된다고 볼 수 있다. LCR은 제4인터내셔널의 프랑스 지부를 대표하는 정통성을 지니고 있으며, 혁명적 전위정당의 건설과 동시에 대중 운동 참여와 개입을 추구한다는 변증법적 양면성을 특징으로 한다.18 흥미로운 것은 PT와 그 뒤를 잇는 POI의 성격 변화인데, PT의 결성에 트로츠키주의자들뿐 아니라 공산당 출신들, 사회당 출신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까지 참여하게 되면서 더는 명시적으로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하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이 네 경향을 한데 묶는 정치적 정체성은 계급투쟁 인정, 사회주의·공화국·민주주의 지향, 유럽연합 반대, 기존 정당들과 노조들로부터의 독립성이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이 마오주의 위기의 시기였다면 1980년대에는 트로츠키주의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이것은 혁명적 분위기의 명백한 퇴조와 끊임없는 조직적 분열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역설이게도 광범한 좌파 연합을 통해 1981년 대선에서 승리한 미테랑 정권의 출범과도 연관이 있다. 이 좌파 연합에 적극 참여한 OCI는(1981년부터는 전에 자신들이 부당하게 잃어버렸다고 여기는 조직 명칭인 PCI로 다시 개명함) 나중에 사회당의 우경화와 공산당의 교조주의화에 반발해서 독자적인 노동자 단일 정당 건설로 나아가지만, 이에 반대하는 많은 분파들이 탈당하거나 제명당하면서 세력이 약해진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OCI는 1991년에 노동자당PT을 창당하고, 2008년에는 독립노동자당POI을 재창당하지만, 대중적 영향력을 점차 상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19 LO의 특징은 애당초 트로츠키의 제4인터내셔널을 반대해서 분리해 나온 바르타 그룹 시절부터 지금까지 옛 소련을 트로츠키의 주장에 따라 “변질한 노동자 국가”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20
반면, 처음부터 꾸준히 독자 행보를 해 온 LO는 1980년대에는 미테랑 정부의 우경화와 그로 말미암은 좌파 전체에 대한 대중의 환멸 때문에 침체를 겪지만, 1990년대에 들어 신자유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1995년 대선과 2002년 대선에서 5.3퍼센트와 5.72퍼센트를 얻는 등 대중적 지지를 다시 회복한다.21 1981년 미테랑 정부 출범을 1936년 인민전선의 재연이라고 판단한 지도부는 곧 노동자들의 대규모 투쟁이 뒤따를 것이라는 예측 아래 많은 활동가들을 대규모 공장들로 보내지만 22 예측은 맞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당의 우경화, 1986년 선거에서 좌파의 패배와 좌우 동거 정부 성립 등은 LCR을 더욱 힘든 상황으로 몰아간다. 더구나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변질한 노동자 국가”인 이들 나라의 정치 혁명이 진정한 사회주의를 복원시킬 것이라던 LCR의 이론적 입장마저 어렵게 된다.
LCR은 1980년대뿐 아니라 1990년대에도 계속 침체를 겪는다.23 그 덕택에 그리고 1995년부터 신자유주의와 기업 세계화에 반대하는 대중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LCR은 1990년대 말 다시 스스로 재정립할 수 있게 된다. 24 그 결과, 2002년 대선에서는 28살의 청년 노동자 올리비에 브장스노Olivier Besancenot를 후보로 내세워 25 공산당 후보(3.37퍼센트)보다 더 많은 지지(4.25퍼센트)를 획득한다. 이 사실은 큰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LO의 아를레트 라기예르가 얻은 5.72퍼센트와 합치면, 트로츠키주의가 대선에서 거의 10퍼센트를 얻은 반면 공산당의 쇠퇴는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불리한 상황들 속에서도 LCR이 조직적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지적한 대로 LCR이 폐쇄적인 전위정당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노조들과 다양한 사회운동 연합체들 속에서 활발한 투쟁 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26 트로츠키주의 전체로는 다시금 후퇴를 경험하게 된다. 문제는 LCR의 대중적 약진과 함께 그 이면에서 발생한 정체성의 혼란이었다. 이것은 가령 2003년 LCR의 제15차 전당대회에 참석한 대의원들에 대한 설문조사를 보면 잘 드러나는데, 전체 대의원 중 54퍼센트만이 자신을 “트로츠키주의자”로 간주한 반면 35퍼센트는 그러한 규정을 거부했으며, 11퍼센트는 명확한 거리감을 나타냈던 것이다. 27 이러한 사실은, 요컨대, 트로츠키의 반스탈린주의, 제4인터내셔널, “이행기 강령” 등에 기초한 LCR의 이론적 정체성이 옛 소련 붕괴 이후 조직 안팎의 현실이 바뀐 상황에서 더는 정치적 결속을 위한 중심축으로 타당할 수만은 없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문제점들을 자각한 LCR은 외연이 더욱 열려 있는 반자본주의자들의 결집체로서 새로운 당을 창당하는 길로 나아가며, 2009년 2월 반자본주의신당NPA 출범과 동시에 자동으로 해산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대중적 관심은 2007년 대선에서 아를레트 라기예르의 쇠퇴와 LCR의 선전으로 나타나면서,지금까지 살펴본 프랑스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전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930년에 미약하고 불안하게 출발한 프랑스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좌파 내에서 사회당과 공산당이라는 압도적으로 큰 두 이념적 경쟁자들의 강력한 압력과 견제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내부의 다난한 조직적 분열들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이러한 성장은 특히 사회당의 우경화와 공산당의 급격한 쇠퇴로 빚어진 좌파의 정치적 빈 공간을 이제 그들이 대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물론 이것이 곧 노동계급 지지의 비약적인 증가이지만 앞으로의 지속적인 성장을 자동으로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보장이란 68혁명,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옛 소련의 파탄, 신자유주의와 기업 세계화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항의 증가, 대규모 투쟁 등과 같이 변화하는 현실을 구성하는 핵심적 사건들을 매개로 자신의 정치적 프로그램을 부단히 되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노동 운동과 사회 운동들 속에서 투쟁하는 대중과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결합할 때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틀과 관련해서 우리는 프랑스 트로츠키주의의 대표적 경향들인 OCI, LO, LCR이 각각 다른 선택을 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OCI는 대중의 현실 투쟁이나 그 흐름과 상관없이 스스로 정치적 프로그램만을 변경해서 PT와 POI로 창당과 재창당을 거듭함으로써 외연을 넓히려 했다. 반면, LO는 “정통” 트로츠키주의를 고수하면서 — 아마도 제4인터내셔널 문제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 조직상의 변화 없이 꾸준히 지속해 나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LCR은 변화하는 현실과 자신들의 정치적 정체성 사이의 적합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새로운 당의 건설이라는 문제를 대중 투쟁의 현실적 흐름과 결합시킴으로써 비로소 NPA 출범이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3. NPA의 출범 과정
28 그럼에도 새로운 정당으로 LCR의 발전적 해소라는 기획이 구체적으로 힘을 받은 것은 2002년 대선 이후부터였다. 29 생각의 시작에서 구체적인 실행의 시작까지 근 10년이 걸린 셈인데, 이것은 거의 40년의 역사를 갖는 급진 좌파 조직이 스스로 탈바꿈하는 데 필요한 확신을 주는 현실적 계기들이 있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옛 소련 해체 이후 LCR 내에서는 LCR이 새로운 정치 조직으로 발전적 해소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1992년 전당대회 때부터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 스탈린주의가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진 상황에서 반스탈린주의 투쟁은 상대가 없어진 것이다. 더구나 프랑스공산당은 몰락해 가고 있고, 1980년대 초반부터 자유주의화하기 시작한 사회당이 좌파 내에서 대중적 헤게모니를 잡은 상황에서는, 반자본주의자들이 결집하는 새로운 정치적 중심을 건설할 필요성이 더욱 명확해졌다.30 이것은 자유주의화한 사회당이 좌파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사이에 그 왼쪽에 다양한 좌파 및 급진 좌파 경향들이 부상했다면, 전통적인 우파의 오른쪽에서는 극우파가 그보다 더 빠르고 단결한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줬다.
1995년 공공부문 총파업, 반세계화 운동의 성장 등이 LCR에게 조직상 회복의 계기를 마련해 줬다면, 2002년 대선에서 올리비에 브장스노의 급격한 부상은 LCR로 하여금 정치적 외연 확대를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고 볼 수 있다. 2002년 대선의 특징은 사회당까지 포함해서 좌파 진영에서 14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1차 투표에서 충격적이게도 극우파 국민전선FN, Front National의 르펜Jean-Marie Le Pen이 당시 좌우 동거 정부의 총리이자 유력한 사회당 후보였던 조스팽Lionel Jospin을 간발의 차(0.68퍼센트)로 밀어내고 2차 결선투표에 진출했다는 것이다.31 — LCR에게 여러 급진 좌파들을 결집하는 단일한 조직의 건설이 필요함을 현실적으로 절실하게 확인시켜 주었으며, 이에 따라 당시 지도부는 본격적인 논의에 착수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에는 “트로츠키주의자로 남으려면 더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닐 필요가 있다”라는 말처럼, 32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의 모색이라는 심각한 문제도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선거 직후 대중적 인기와 새로운 활동가들을 많이 얻은 — 이제 조직은 3천 명 정도로 불어났다33 트로츠키주의가 스탈린주의나 그 변종인 마오주의 등과 이념적·실천적으로 치열하게 대립해 온 올바르고 명예로운 역사가 있지만, 1990년대부터 반자본주의 운동에 뛰어든 세대에게는 그러한 역사적 전거가 체험적으로 생소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34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2003년 제15차 전당대회에 참석한 대의원들의 46퍼센트는 “트로츠키주의자”라는 정치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았는데, 이것은 “브장스노 세대” 당원들의 경우 브장스노 스스로 밝히듯이 “트로츠키주의자”보다는 “혁명적 맑스주의자”로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35 “트로츠키주의자가 두 명이면 벌써 경향이 하나 생기고, 세 명이면 바로 분열이다”라는 오래된 적대적 농담은 프랑스 내에서 이 정치 전통의 분열적 성향에 대한 부정적 통념을 잘 보여 준다. 이러한 통념을 불식시키는 것 또한 노동계급 속에서 정치적 기반을 넓히는 데 필요한 일인 것이다.
더구나 브장스노도 인용하듯이,그러나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대두되는 이러한 정치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LCR을 발전적 해소하고 새로운 당을 출범시킨다는 기획은 미래를 향한 실천적 궤도이기에 이 기획이 현실화되려면 우선 크게 두 가지 과제와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조직 내부에서 되도록 광범한 동의를 형성해 나가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이 기획을 중심으로 조직 밖의 어떤 세력들과 어떤 방식으로 수렴해 나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두 과제는 결국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종종 내부의 견해 차이들은 밖의 어느 세력과 일을 함께 하느냐(또는 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도 밀접히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로 얽혀 있기도 한 이 두 과제를 해결하는 데서 2005년 유럽 헌법을 둘러싼 국민투표에서 반대 캠페인은 좋은 발판이 될 수 있었다. 사회당 주류를 제외한 다양한 좌파들이 공동으로 반대 캠페인을 펼쳤는데, 이 입장이 국민투표에서 이겼던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당을 위한 LCR의 기획이 현실적일 수 있음을 보여 줬다. 그러한 확신은 2006년 초 26살 이하를 대상으로 하는 고용‘촉진’ 정책의 일환으로 정부가 내놓은 불평등한 “최초고용계약CPE, le Contrat première embauche”법에 반대하는 청년층의 대규모 투쟁의 승리를 통해서 더 한층 강화된다. 그러나 같은 해 LCR 내에서 벌어진 다음해 대선 후보에 관한 논쟁, 즉 브장스노를 독자 후보로 내세울 것인가 아니면 다른 좌파들과 합의해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단일 후보를 내세울 것인가의 문제는 복잡한 내분 양상을 보이게 된다. 사정이 이렇게 심각해진 것은 2005년부터 노조들과 사회운동 단체들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좌파 내의 좌파gauche de la gauche” 블록이라는 통합화 과정과 연관이 있다. 경계도 다소 모호한 이 “좌파 내의 좌파” 블록이 안고 있는 문제는 첫째, 그것이 위로부터 아래로의 기획이었으며, 둘째, 선거에서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키기 힘든 구조적 한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 블록의 가장 큰 조직은 공산당인데, 이 당은 사회당과의 연합을 통해 선거에서 이익을 취하는 뿌리 깊은 전통이 있다. 이 때문에, 우경화한 사회당에 대해 독자성을 견지하는 후보를 블록 전체의 합의로 내세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구조인 것이다. 따라서 LCR의 다수파는 자유주의화한 사회당과의 명확한 단절을 주장하면서 브장스노를 독자 후보로 내세움과 동시에 그러한 조건이 성사되면 후보 단일화가 가능하다는 제안을 내세웠다. 당연히 공산당은 이에 응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LCR 내에서 끝까지 “좌파 내의 좌파” 블록 참여와 통합 단일 후보를 고집하는 소수파의 반대였다.
어쨌든 단일한 급진 좌파적 연합이라는 위로부터의 협의가 깨지면서, 2007년 대선에도 여러 급진 좌파 후보들이 출마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선전한 후보는 LCR의 브장스노뿐이다(브장스노 4.08퍼센트, LO의 아를레트 라기에르 1.33퍼센트, PT의 쉬바르디Gérard Schivardi 0.34퍼센트, 공산당의 마리-조르주 뷔페Marie-George Buffet 1.93퍼센트, 녹색당의 부아네Dominique Voynet 1.57퍼센트, 무소속의 보베José Bové 1.32퍼센트).
38 새로운 당을 위한 기획을 정식 의제로 올려서 75퍼센트의 찬성으로 통과시킨다. 39 그리고 8월에 브장스노가 LCR의 여름 대학에서 그 기획에 관한 공식 성명을 발표한다. 2008년 1월 전당대회에서는 신당에 관한 정치적 테제들의 심의를 통해서 신당은 ‘반자본주의이고 혁명적이며’, 지역 위원회들의 구성에서 출발해서 전국적 모임과 중앙을 구성한다는 결정을 채택한다. 이에 따라, 신당의 구성 과정은 신속히 진행된다. 이미 6월 말 지역 위원회들의 전국 모임은 1만여 명의 참여자들을 대표하게 되는데, 이것은 당시 3천5백 명이던 LCR의 세 배가량이 되는 규모였다. 2009년 2월 초 창당 대회에는 최종 9천1백23명을 대표하는 대의원들이 모여 정식으로 “반자본주의적인 새로운 당Nouveau Parti Anticapitaliste”이라는 경계가 명확하면서도 비완결적인 명칭을 채택한다. 물론 LCR은 창당 대회 전야에 자동으로 해체됐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2007년 대선 직후인 6월 중순 마침내 LCR의 전국 지도부la Direction nationale는40 물론 이러한 개방성은, 이 글의 맨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사회당에 대한 엄격한 독자성과 반자본주의라는 두 가지 원칙에 동의한다는 조건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신당의 출범을 위한 LCR의 이러한 주도적 활동은 급진 좌파의 활동가들을 향해서 “아래로부터 위로”의 구성적 과정을 열어 준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요컨대, “좌파 내의 좌파” 블록의 경험에서 보듯, 새로운 당을 건설하는 데서 다른 급진 좌파 조직들을 향해 조직 대 조직의 협상과 토론 방식을 통한 “위로부터 아래로의” 호소가 불가능한 만큼, 이번에는 참여를 원하는 활동가는 누구나 지역 위원회에 합류할 수 있도록 개방된 구성적 과정을 시도한 것이다.4. NPA의 구성과 창당 원칙
41 이것은 NPA가 LCR뿐 아니라 규모가 작은 다른 급진 좌파 조직들 및 많은 개별 활동가들을 새로운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지침이라 할 수 있는 창당 원칙을 바탕으로 한데 묶어 만든 당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성적 특징은 전당대회에서 NPA를 대표하는 기구로서 선출되는 남녀 동수의 1백50여 명 규모의 전국정치협의회CPN, Conseil politique national에도 어느 정도 잘 반영돼 있다. 상반되는 정치적 방향성들이 전당대회에서 표결에 부쳐질 경우, CPN은 투표 결과에 비례해서 선출되기 때문이다.(창당 당시 구성된 CPN은 LCR 출신이 아닌 활동가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고, LCR 출신은 약 45퍼센트 정도다. 42 ) 그리고 내부의 제반 경향들과 분파들은 당의 언론 시스템 내에서 표현의 권리를 갖는다.
이렇게 해서 출범한 NPA는 아직 상세하고 완전한 강령이 없으며, 그 대신에 21세기의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즉 민주적이고, 생태적이고, 페미니즘적인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창당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규약도 다음(아마도 2010년 11월) 전당대회에서 최종적인 채택 여부가 결정되는 임시적인 것이다.43 그렇지만 NPA의 기획이 민주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사회주의의 실현인 이상, 당의 구조와 운영 자체도 자신의 이러한 기획과 부합하는 민주적 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노동계급과 대중에게 더 많은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이처럼 경향과 분파의 권리를 상시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CPN 및 그 안에서 선출되는 집행위원회CE, Comité exécutif의 권한과 효율성 그리고 책임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문제점이 있는 듯하다.사실, 아무리 민주적으로 선출된다고 할지라도, 중앙 지도부가 당의 정치적 실천의 효율성을 명목으로 강력한 권한과 책임을 상시적으로 위임받아서 독점적으로 행사하고 이에 대해서 소수파 ‘당원들은’ 전당대회를 제외하고는 공개적인 비판이나 자신의 대안을 표현할 수 없을 때, 이러한 구조 속에서 중앙 지도부는 전당대회에서 원칙적으로 당원들 각자에게 보장되는 표현과 결정의 평등한 권리를 미리 어느 정도 선취해 버릴 수 있다. 따라서 특정한 경우들을 제외하고는(물론 되도록 이 특정한 경우라는 것도 당원 전체의 토론을 거쳐서 미리 규정돼야 한다) 경향과 분파의 권리가 상시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더욱 안정적인 민주적 구조를 가져다줄 수 있다. 이 점에서 NPA 임시 규약 제7항 “우리 기획의 모습과 일치하는 민주적인 당”의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아주 인상적이다.
- 민주주의는 우리 당의 필수 요건이자 성공 요건이다. 민주주의는 우리 기획의 핵심에 있다. 그것은 당연히 정보의 투명성과 소통, 토론의 제반 요소들의 체계적인 수평화, 여러 선택가능성에 대한 인지를 뜻하며, 당의 방향성을 변화시키기 위해 서로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 즉 경향의 권리와 분파의 권리를 인정한다.
- 우리의 목적은 당 내에서 모든 활동가가 각자 자신의 위상을 정립하고 자신의 고유한 주체적 권리를 전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
- 우리는 투쟁하는 당을 건설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따라갈 수 없는 리듬을 특색으로 하는 엘리트주의적 정당의 논리와는 단절하고자 한다. 그러한 당에서는 바로 가장 많이 투쟁하는 이들이 당의 리듬과 정치적 방향성을 동시에 결정하게 된다. …
이처럼, 투쟁적이지만 전위적인 색채는 불식하고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구성적 규정은 우리에게 익숙한 혁명적 정당의 모습과 다소 어긋나 보인다. 그러나 볼셰비키당과 러시아혁명의 경험에서 보듯 레닌이 구상한 민주적이지만 강력한 중앙집중제의 약점이 레닌 사후 여지없이 드러났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21세기의 새로운 사회주의적 전망은 무엇보다도 우선 실질적으로 진정한 민주주의가 조직의 구조 속에서 실천되는 데서 그리고 그러한 실천이 곧 강력한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이어지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44 하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캘리니코스가 인용한 프랑수아 사바도의 글에서 사바도는 에르네스트 만델이 제시하는 혁명의 일반적 정의에 따르면 NPA는 “혁명적”이라고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45 문제는 캘리니코스가 이 “혁명적”이라는 규정을 러시아 10월혁명과 같은 사회주의 혁명의 관점에서 이야기했다는 데 있다. 이에 대한 사바도의 반박은 NPA의 성격 규정에 관한 캘리니코스의 오류를 잘 지적하고 있으며, 46 캘리니코스가 이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 오해는 해소된다. 47 그렇다 할지라도 이러한 논쟁은 애당초 “반자본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이라는 NPA의 다소 모호한 규정이 촉발시킨 측면도 있기 때문에, 여기서 그 창당 원칙을 살펴보는 것이 NPA의 실제적 성격과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NPA는 처음에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프랑수아 사바도의 글을 다소 성급히 오독하면서 규정했듯이 “‘사회의 혁명적 변혁을 위한 정당’이지만,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이해해 온 바와 같은 특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적 정당은 아직 아니다”앞서 언급한 것처럼, 민주적·생태적·페미니즘적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표방하는 창당 원칙은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 인류와 지구를 위험에 몰아넣는 자본주의에 대한 고발, 2)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으로서 21세기의 사회주의, 3) 단기적·장기적 투쟁 목표들과 투쟁 원칙들, 4) 이를 위해 필요한 당의 성격 규정과 그것의 구현으로서 NPA. 그러면 각 부분마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내용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1)은 자본주의의 세계화 속에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양자택일이 현실적 절박함으로 대두된 상황을 경제적·사회적·생태적·국제적 측면에서 기술하면서, 부르주아의 이익을 옹호하는 현재의 국가와 제도들 속에서는 결국 노동자들과 주민들이 정치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한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는 그것을 도덕적으로 교화시키자는, 조절하거나 개혁하자는, 그것을 인간화하자는 주장들을 쓸모없게 만든다. 이러한 주장들이 진지한 것이든 위선적인 것이든 말이다. 그 자체로 체제의 논리는 복지·민주주의·평화가 대규모 생산수단들의 사적 소유와 얼마나 양립 불가능한가를 매일같이 보여 줌으로써 그것의 전복과 사회의 혁명적 변혁의 조건들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하고 있다.”
2)에서는 노동자들과 국민 대다수의 삶의 안정을 위협하고 착취를 강화하는 현재의 위기 상황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에 내재한 자본 일반의 이윤율 하락에서 비롯하는 것이기에, 근본적 해결이란 사회주의일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주의인가? 그것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삶의 전 영역에서 일하는 이들의 권력이 관철되는 생태사회주의écosocialisme이다. 또한 문화·예술·미디어의 민주적 재전유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주의는 당연히 사회당이 이야기하는 개혁적 자본주의나 사회민주주의와 상관없다. 그것은 또한 옛 소련이나 중국처럼 착취와 억압의 메커니즘을 재생산하는 관료적 독재와도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의 민주적인 자기조직화와 자주관리를 향한 것이기에, 정치적 차원에서, 노동조합과 사회단체의 차원에서 가장 폭넓은 결사와 표현의 자유를 함의한다. 그것은 생산의 무한정 발전을 지향하지 않고, 사회적 필요의 생태적 만족에 기반한다. 그것은 특히 여성 억압의 종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주의는 국제주의적이기에, 프랑스 한 나라에 국한해서 건설될 수 없으며, 따라서 프랑스나 인접 국가의 반자본주의적인 승리는 그 즉시로 유럽과 세계로 확산돼야 할 것이다.
이어서 3)에서는 먼저 이러한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현재의 투쟁 목표들을 경제적, 사회적, 민주적, 생태적, 페미니즘적, 소수자 운동적, 국제주의적 필요와 시급성에 따라서 열거한다. 이어서 아래와 같은 NPA의 투쟁 원칙을 제시한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국민의 다수가, 프롤레타리아와 대중의 다양한 부문들이 노동 현장이나 거주 지역에서, 노동조합이나 단체에서, 또한 정치적 차원에서도, 자신들의 민주적 권리들을 유효하게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조직화하면서, 자신들의 힘을 의식해야 한다. 그러한 모든 구조들 속에서 NPA 활동가들은 투쟁의 단결성과 반자본주의적 전투가 고양되도록 분투해야 한다. 특히 그러한 구조들의 독자성을 세심하게 존중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사회 운동의 모든 정치적, 노동조합적, 사회단체적 흐름들을 결합시키면서 되도록 단결된 대중 동원을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대중동원에서 우리는 자주적 조직화의 원칙을 옹호한다. 본질적으로, 자신들의 투쟁의 방향과 형태 및 지도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행동하는 당사자들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4)에서는 아래와 같이 NPA의 목적과 성격을 명확히 선언한다.
… 만일 우리가 당을 구성하기로 결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구조화되고 일관되고 유용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적 투쟁들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촉진하고, 거기에 전적으로 참여하고, 거기에 우리의 생각들과 행동 방안들을 제안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공세를 중단시키고, 사회적·민주적·생태적으로 가장 앞선 요구들을 수용하도록 하고,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열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가장 광범한 대중 동원을 통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서로 한데 모이기 위한, 집단적 투쟁에서 효과적으로 이기기 위한 도구다.
우리는 NPA가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과 같이 전적으로 민주적이기를 원한다.
과거에서 교훈을 이끌어내서, 우리는 해방 운동들의 병폐인 모든 관료주의화 과정들에 맞서서 투쟁한다.
우리 당의 목적은 권력적 방식으로, 권력 자체를 위해서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그 어느 곳에서든, 자본주의 사회의 전복을 준비할 목적으로 투쟁들의 자주적 조직화를 위해서 그리고 노동자들과 주민들의 자주관리를 위해서 싸운다.
우리는 NPA가 지난 두 세기 동안 체제에 맞서 싸워 왔던 이들의 유산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해방적·혁명적 전통들 중의 최상의 유산을, 계급투쟁의 최상의 유산이 살아 있도록 만들기 바란다.
민주주의와 반파시즘 투쟁들을 이어받는 당. 해방의 희망을 암울하게 했던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이탈들과 맞서 싸워 온 기억을 간직한 당. 페미니즘, 반식민주의, 반인종주의 및 모든 차별에 맞선 투쟁들을 자양분으로 하는 당. 급진적인 정치적 생태론에 명확히 반자본주의적 음조를 부여하고 반자본주의에 명확히 생태주의적 음조를 부여하는 당. 일상적 삶의 상업적 획일화에 맞서 창조성과 인정을 향한 개인적 열망들을 배려하는 당.
이상과 같은 것들을 볼 때, “NPA”라는 명칭의 일부를 구성하는 “반자본주의적”이라는 한정은 명백히 새로운 진정한 사회주의적 지향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향은 명백히 “다원주의적”인데, 왜냐하면 사회의 다양한 부분들에서 노동자들과 주민들이 스스로 전개하는 반자본주의적 투쟁들, 가령 반자본주의적 지평 위에서 독자적으로 전개되고 자주적으로 조직화되는 노동 운동이나 여성 운동, 생태 운동이나 환경 운동, 부당한 차별들의 철폐 운동 등은 모두 그 자체로 유의미하며, 서로 존중되고 소통되고 연결돼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것을 촉진하고, 자신의 구조 속에 적절히 반영해야 하는 NPA의 모습 또한 다원주의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NPA의 혁명성은 그것이 반자본주의적 투쟁을 중심으로 모인 당이라는 데 있지, 그러한 구호를 가지고 단순히 선거에 참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물론 선거는 사회에 관한 NPA의 공통 기획을 대중에게 더욱 널리 알리고 더욱 활발한 공감과 주목을 이끌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그 결과를 통해서 대중의 지지도를 검증할 수 있는 주요 수단 중 하나다.
그러나 제도권 좌파의 정당들(사회당, 공산당) 및 녹색당처럼 언제부터인가 주로 선거에만 목을 매다는 순간부터 사회의 급진적 변혁의 지평은 사라져 버리게 된다. 반면, NPA는 노동자들과 주민들이 자신들의 권익과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촉진하고 연결하고 단결시키는 데 필요한 더욱 폭넓고 상시적인 조직을 구성하는 데 목적의 중심이 있다. NPA에 따르면, 오늘날 이것이 절실한 이유는, 사회의 어떠한 부분에서든 본원적인 권익의 옹호나 근본적인 개혁을 위한 싸움들이 체제와 정치에 의해서 되돌려질 수 없는 승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바로 창당 원칙 3부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시하는 것과 같은 일반적 전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공격들을 차단하고 요구사항들을 강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전면적이고 지속적인 파업들과 투쟁들의 발전과 일반화를 통해서다. 바로 이러한 대중 동원에서 나오는 세력 관계야말로 체제와 단절하는 급진적 조처들을 부과하고 사회의 혁명적 변혁을 시작할 정부를 수립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5. 현재의 전망
NPA 출범을 전후로 좌파 내에서 비판적 논쟁들이 활발히 있었는데, 그것을 두 부류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NPA 출범을 반대하는 견해들이고, 다른 하나는 지지하는 입장에서 NPA에게 보내는 비판적으로 조언들이다.
48 6월의 논쟁에서는 사회당, 공산당 그리고 녹색당에 속하는 비판자들이 각각 NPA의 예정된 한계들을 지적하는데, 여기서 그것을 뭉뚱그려 말하면 다음과 같다. 사회당이 굳건히 터를 지키고 있기에 좌파의 공백은 없으며 따라서 NPA가 갈 곳은 없다는 비판, 새로운 사회주의란 과거의 경험에서 보듯 너무 원대해서 아직 알 수 없는 것이기에 공산당처럼 현 상황에 대한 구체적 해법을 갖고 한데 모여야 한다는 비판, 생태적 관점에서 사회 변혁은 사람들의 의식과 타성이 바뀌어야 하는 아주 기나긴 변화를 요구하는 반면 여전히 NPA는 구태의연하게 현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로서 급진적 변혁을 이야기한다는 비판 등이다.
전자는 잡지 《무브망Mouvements》에서 2008년 6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NPA 참여자들과 비판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을 보면 대충 어떤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다.그 밖에도 더욱 중립적으로 앞으로 선거에서 NPA에게 예상되는 결과들을 정치공학적으로 분석하는 비판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사회당이 중도 실용주의라는 “제3의 길”을 택할 경우 NPA에 유리하지만, 이 경우 만일 “좌파 내의 좌파” 블록이 등장하면 NPA에 불리하다고 예측한다. 특히 이와 맥을 같이 하는 비판이 12월의 논쟁에서도 나타나는데, 이에 따르면 NPA는 “좌파 내의 좌파” 블록에 등을 돌림으로써 대안세계화운동연합체인 아탁(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이나 코페르니쿠스재단Copernic에도 등을 돌린 셈이 됐다는 것이다.
49 그 밖에도 NPA 구성 과정에 직접 참여하면서 느낀 비판적 지적도 있는데, NPA에는 경험이 적은 젊은 활동가들이 많기에 이들과 베테랑들 사이의 격차를 제대로 극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50
NPA를 찬성하는 편에서 캘리니코스나 고다르Denis Godard의 비판은 특히 이 마지막 비판의 논지와 유사하다. 이들은 NPA가 사회당 내의 좌파까지도 포괄하는 단일(공동) 전선의 구성을 포기함으로써 노동 운동이나 사회 운동, 선거 등에서 더욱 성공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지적한다.어쨌든 많은 논쟁들을 거치면서 그리고 언론의 주목 속에서 NPA는 성공적으로 출범했다. 그러나 1년 반이 지난 지금 NPA는 비록 투쟁 현장에서는 활발한 모습을 보였을지라도 2009년 6월 유럽의회 선거와 2010년 3월 지방선거에서는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선거에서 급진 좌파들의 단일화가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한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당을 배제하는 NPA와 필요에 따라서 연합하려는 다른 급진 좌파들 사이의 견해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서다. 이에 따라서 공산당과 좌파당PG, Parti de Gauche(사회당에서 왼쪽으로 분열해 나온 분파) 및 기타 좌파들은 좌파전선FG, Front de Gauche을 구성해서, 즉 “좌파 내의 좌파” 블록을 만들어서 선거에 참여한 반면, NPA는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두 차례 선거에서 좌파전선은 선전한 반면, NPA는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위에서 소개한 NPA를 비판하는 예측의 일부가 타당함을 보여 주는 듯하다. 더구나 이미 언급했듯이 선거에서의 단일화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로 탈당하고 좌파전선에 합류한 분파도 생겨났으며, 당원 수도 1년 사이에 8천여 명으로 줄었고, 당의 대표 기구인 전국정치협의회CNP의 활력도 감소된 듯하다.
그러나 노동자들과 주민들의 투쟁 분위기가 상승세를 타지 않는 한, 애당초 NPA의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가 낮은 투표율과 소수당에 불리한 제도를 특징으로 하는 프랑스의 선거에서 제대로 반영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원칙을 저버리고 선거에서 사회당과의 제휴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단일(공동) 전선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1936년 당시 인민전선의 모습으로 후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52 이러한 선택은 금융 위기로 촉발된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 더욱 의미 깊을 수 있다. 왜냐하면 허약해진 유럽연합은 노동자들과 주민들에게 가혹한 긴축을 강요해서 이 상황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으며, 53 이에 대한 효과적인 저항에 필요한 것은 바로 급진적으로 강력히 투쟁하는 당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NPA의 이러한 선택은 우선 다가올 9월부터 대대적으로 시작될, 사르코지 정부의 연금개혁안에 반대하는 투쟁과 맞물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11월의 전당대회에서는 지난 2년간의 실험을 평가하고, 규약을 확정하고, 앞으로의 투쟁 방침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NPA는 선거에서의 단결과 반자본주의적 투쟁의 급진적 기획 두 가지를 한꺼번에 추구하기보다는 후자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 모든 것의 성패와 발전은 물론 당내 민주적 토론의 활성화와 정착, 체제의 부당한 조처들에 맞서는 노동자들과 주민들의 투쟁들, 그리고 이 둘의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결합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필자 이기웅은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다.
주
- 이에 관한 단편적인 기술은 가령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전기의 3부 《추방된 예언자》에서도 나타난다. ↩
- 인민전선이 승리한 1936년 5월 선거에서, 급진당 1백70만 표(1932년 선거에 비해서 60만 표 감소), 사회당 2백20만 표(20만 표 증가), 공산당 1백50만 표(1932년의 두 배)를 얻었다. 그렇지만 이 연합에서 주도적 발언권을 쥔 것은 급진당이었다. Frank 1981, p760 이하 참조. ↩
- 공산당원들의 이러한 동요는 가령 사르트르의 절친한 벗인 니장Paul Nizan이 독소조약에 반대해서 탈당하고 공개적으로 비판 활동을 벌이다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것에서 단적으로 잘 드러난다. ↩
- 파블로가 프랑스 트로츠키주의의 리더가 된 우연한 계기와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Stutje 2009, p98 이하 참조. ↩
- Stutje 2009, p56 참조. 요란스럽고 성대하게 출범한 RDR은 곧 싱겁게 막을 내리게 되는데, 그 주된 이유 하나는 미국 노조들의 재정 지원을 받으려는 루세에게 사르트르가 반발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Cohen-Solal 1985, pp388-407 참조. ↩
- Stutje 2009, pp98-102 참조. ↩
- http://fr.wikipedia.org/wiki/Trotskisme_en_France 참조. ↩
- 파블로의 배제에 관해서는 Stutje 2009, pp111-119 참조. ↩
- 이에 대한 흥미로운 성찰로는 가령 1964년 12월 사르트르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와 한 인터뷰인 ‘L’Alibi(알리바이)’나 1968년 3월 15일자 <르 몽드Le Monde>에 쓴 비앙송-퐁테Pierre Viansson-Ponté의 ‘Les Français s’ennuient(권태로워하는 프랑스인들)’을 참조할 것. ↩
- Johsua 2007, p35 참조. ↩
- 2009년 9월 29일자 <리베라시옹Libération>에서 행한, 마오주의자 출신의 철학자 밀네Jean-Claude Milner의 인터뷰 ‘Dans le maoisme d’après 68, il y a la Chine et Mai(68 이후의 마오주의에는 중국과 5월의 혁명이 있다)’ 참조. ↩
- 1970년부터 마오주의자들의 비합법 기관지들의 편집장 구실을 기꺼이 떠맡았던 사르트르는 한 책의 서문에서 “폭력 투쟁, 자발성, 도덕성”을 특징으로 하는 마오주의자들의 혁명적 행위의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그들이야말로 유일한 혁명적 세력이라고 치켜세운다. Sartre 1972. ↩
- 한 인터뷰에서, 바디우Alain Badiou는 이 두 경향의 마오주의를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신이 속한 그룹이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프랑스공산주의자연맹UCFML이 옳은 노선이었다고 주장한다. Badiou 2007. 2007년에 행한 프랑스어 인터뷰가 영어로 번역돼 다음 사이트에 올려져 있다. http://kasamaproject.org. 그렇지만 마오주의 내에서 그의 소그룹이 노선상 옳았을지는 몰라도, 마오주의 자체가 옳았냐는 것은 그의 주장에서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
- 특히 대중 앞에서는 거의 아나키즘적인 쇼를 벌이던 GP의 이러한 자기모순을 바디우는 신랄히 비판한다. Badiou 2007. ↩
- 이에 대해서는 1997년 말 바디우의 인터뷰를 참조할 것. 이 인터뷰의 영문 번역은 ‘Politics and philosophy: an interview with Alain Badiou’라는 제목으로 다음의 책에 부록으로 수록돼 있다. Badiou 2002. ↩
- 퐁피두가 당선된 이 선거에서, 크리빈은 1퍼센트를, 공산당 후보는 21퍼센트를 얻었다. http://fr.wikipedia.org/wiki/LCR 참조. ↩
- 1970년대 LCR의 이러한 특징에 대해서는 Johsua 2007, pp37-38 참조. ↩
- 1990년대에는 당원이 약 3천 명이었으며, 가령 2002년과 2007년 대선에서는 0.47퍼센트와 0.34퍼센트를 얻었으며, 2008년에 재창당 당원은 1만 71명이었다. http://fr.wikipedia.org/wiki/Parti_des_travailleurs_(France) 참조. ↩
- 1988년부터 지금까지 각종 선거에서 LO의 득표율은 http://fr.wikipedia.org/wiki/Lutte_ouvrière 참조. ↩
- LO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홈페이지 www.lutte-ouvriere.org를 참조할 것. ↩
- 이 시기 LCR의 조직상 쇠퇴는 Johsua 2007, p61, 표1을 참조할 것. ↩
- http://fr.wikipedia.org/wiki/LCR에 따르면, 당시 전체 조직원 1천8백 명 중에서 4백여 명이 현장 노동자로 변신했다. ↩
- Johsua 2007, p39 이하. ↩
- 이러한 회복은 가령 199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LO와 LCR이 공동 후보를 내세워서 5명(LO 3명, LCR 2명)이 당선된 사실이 잘 입증해 준다. ↩
-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등학생 때 JCR을 거쳐 1991년 LCR에 가입한 올리비에 브장스노는 대선 출마 당시 이미 베테랑 투사라고 할 수 있었다. 대학생 때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슈퍼마켓에서 CGT 지부 건설에 가담했고, 1997년부터 현재까지 우체국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
- 라기예르는 1.34퍼센트를 얻은 반면 브장스노는 4.08퍼센트를 얻었다(2002년 대선보다 득표수는 28만 7천 표 이상 증가). ↩
- Johsua 2007, p60 참조. ↩
- Coustal 2008, pp11-12, http://www.contretemps.eu/sites/default/files/coustal.pdf ↩
- Bensaïd 2008, http://www.contretemps.eu/interventions/daniel-bensaid-idee-qui-fait-son-chemin에 재수록. ↩
- 이 선거에서 1차 투표와 2차 결선투표 사이에 LCR은 “르펜을 거리와 투표소에서 격파하자”는 선거운동을 펼쳤는데, 이러한 전술적 유연성은 다른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LO나 PT보다 옳은 것이었다. ↩
- http://fr.wikipedia.org/wiki/LCR p9 참조. ↩
- Pignarre, http://www.contretemps.eu/interventions ↩
- Besancenot 2003. 이 책에서 ‘Trotskysme’ 항목을 참조할 것. ↩
- Coustal 2008, pp13-15 참조. ↩
- Besancenot 2003. ↩
- 브라질·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포르투갈 등과 달리 프랑스에서 특히 선거에서 이러한 “좌파 내의 좌파” 블록의 성립과 운용이 어려운 이유와 블록 내에서 LCR의 곤경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Rousset 2008. ↩
- 피케Christian Picquet를 중심으로 하는 이 소수파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보다는 강한 공화주의적 경향이 특색인데, NPA 창당 직후 탈당해서 선거를 위한 연합체인 좌파전선Front de Gauche에 합류한다. ↩
- 전국 지도부는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는 1백여 명의 위원들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다수파에서 소수파에 이르기까지 여러 경향들을 대표한다. ↩
- Coustal 2008, pp16-17 참조. ↩
- Rousset 2008 참조. 그리고 가령 마르세유 및 부슈-뒤-론Bouches-du-Rhône에서 지역 위원회가 구성되는 구체적 과정에 관한 서술과 일화로는 Coustal 2008, pp19-30을 참조할 수 있다. 또한 NPA 탄생에 관한 카미유 카사비앙카Camille de Casabianca의 다큐 영화 <자, 이제 시작이다 C’est parti>도 흥미로운 기록일 것이다. ↩
- 창당 원칙과 임시 규약에 관한 언급들은 모두 NPA 웹사이트 http://www.npa2009.org를 참조한 것이다. ↩
- http://fr.wikipedia.org/wiki/Noveau_Parti_anticapitaliste pp4-5 참조. ↩
- 캘리니코스 2009b, pp336-337 참조. ↩
- Callinicos 2008. ↩
- Sabado 2008, http://quefaire.lautre.net/que-faire/que-fiare-lcr-no08-mai-juillet/article 이 글에서 사바도는 만델의 다음의 글에 나오는 혁명에 대한 일반적 정의를 인용하고 있다. Mandel 1989. ↩
- Sabado 2009. ↩
- 캘리니코스 2009a. ↩
- http://www.mouvements.info 참조. ↩
- Callinicos 2008. Godard 2009. ↩
- Corcuff 2008. ↩
- Alliés 2010 참조. ↩
- 2010년 6월 27일자 〈리베라시옹〉에 실린 브장스노의 인터뷰는 이것을 추측케 한다. ↩
- 이에 대한 좀더 상세한 상황 분석과 전망으로는 Sabado 2010을 참조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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