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트로츠키 사망 70년
국제사회주의경향의 기원
트로츠키는 정확히 70년 전인 1940년 8월 21일 사망했다. 그는 망명지 멕시코에서,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소련 간첩 라몬 메르카데르에게 살해당했다. 스페인 공산당원인 메르카데르는 스페인 내전 중에 당시 소련 공안기관 내무인민위원부NKVD의 모집으로 모스크바에서 특수요원 훈련을 받았다. 메르카데르는 트로츠키를 얼음 깨는 도끼로 뒤에서 내리쳤다. 소란스런 소리에 트로츠키의 경호원들이 달려와 메르카데르를 죽이려던 찰나에, 간신히 숨이 붙어 있던 트로츠키는 “그를 죽이지 마시오. 그의 얘기를 들어봐야 합니다” 하고 힘들게 말하며 만류했다. 메르카데르는 경찰에 넘겨졌고, 심각한 뇌 손상을 입은 트로츠키는 긴급히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으나 하루 뒤에 숨졌다. 임종 직전 트로츠키가 남긴 최후의 말은 이랬다. “저는 이 공격에서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스탈린은 전에 여러 차례 시도했다 실패한 과업을 결국 달성한 겁니다.”
1 그가 1927년에 예언한 이 “역사의 복수”는 생애 말년의 그가 보기에 목하의 제2차세계대전 중이나 그 직후에 ― “겨우 몇 년이나 심지어 몇 달 뒤에” ― 일어날 것 같았다. 2 스탈린 체제가 마치 “어느 한쪽으로 굴러 떨어지고야 말 피라미드 꼭대기에 놓인 공”처럼 불안정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3 그래서 트로츠키는 소련이 “파시스트적·반혁명적인” 우파 관료의 주도로 서방 제국주의와 유착해 자본주의를 복원하거나 아니면 노동계급이 관료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여는 두 가지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고 했다. 4
그러나 전에 트로츠키는 이렇게도 말했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서기장[스탈린]의 복수보다 역사의 복수가 더 강력하다.”5 )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이라면 트로츠키의 입장은 폐기돼야 한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트로츠키 지지자들 사이에 중구난방과 설왕설래가 한창이던 터에 1949년 중국 혁명으로 마오쩌둥에 의해 또 다른 주요 스탈린주의 정권이 수립되자 정설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또다시 타격을 입었다. 중국 혁명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에 물음을 던지게 만들었다.
종전 후 트로츠키 지지자들은 트로츠키의 이 예측에 집착하다가 동유럽에서 소련 군대나 (유고슬라비아처럼) 토착 스탈린주의 정당에 의해 스탈린 체제가 확장되자 방향감각을 잃고 불확실성 속에서 헤맸다. 만약 동유럽의 새 정권들(인민민주주의를 표방한)이 ‘기형적’이긴 해도 어쨌든 ‘노동자 국가’(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한 것)라면 스탈린주의는 진보적이라는 뜻이 된다. 반면, 만약 이 정권들이 (토니 클리프 주장대로6 그리고 그러한 연속혁명과 그를 통해 세워진 노동자 국가만이 그런 사회의 역사적 숙제인 전前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폐지하고, 민족문제(민족 독립·해방·통일)를 해결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정체政體를 수립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노동자 혁명으로 세워진 노동자 국가이니만큼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고, 이에 자극받은 선진 공업국 노동계급도 혁명으로 집권해 이 상대적 후진국의 노동자 국가를 경제적·군사적으로 원조할 것이라고 했다.
연속혁명론을 통해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이 사회의 소수인 상대적 후진국에서도 노동계급은 인구의 다수인 농민을 이끌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그러나 1949년 중국 혁명은 노동자 혁명이 아니었고(따라서 연속혁명도 아니었다), 따라서 새 중국 국가도 노동자 국가가 아니었다. 게다가 노동자 혁명도 아닌 것이 제국주의를 축출해 민족 해방을 이룩하고, 전前자본주의적 지주제도를 폐지했다. 비록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수립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새 중국의 사회구조는 동유럽·소련과 본질적으로 비슷했다. 그렇다면 이 사회체제도 동유럽과 소련처럼 ‘(기형적) 노동자 국가’로 규정해야 논리적인 것 아닌가. 이것이 일관된 정설파의 논리였다. 정설파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논쟁은 마침내 1951년 동유럽에 대해서든 중국에 대해서든 ‘기형적 노동자 국가’론으로 낙착됐다. 교리를 고수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역逆추론을 하기 시작했다. 즉, ‘중국은 기형적이지만 노동자 국가다. 그러므로 중국 혁명은 연속혁명이다. 노동계급이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익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당이 지도한 혁명이므로 프롤레타리아·사회주의 혁명이다’는 식이었다.
7 그리하여 1951년 미셸 파블로가 지도하는 제4인터내셔널 다수파는 공산당 장기 입당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아예 실행되지 못했거나, 실행됐어도 아무데서도 결실을 보지 못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엄격한 당 통제 체제 때문에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정설파는 1956년 소련이 헝가리 혁명을 분쇄하자 공산당을 탈당한 재능 있고 헌신적인 사람들 수백 명을 가입시키는 소득을 얻었지만 몇 년 만에 이 소득은 거의 무無로 돌아갔다. 잘못된 전통적 교리가 조직 성장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특히 세계경제의 장기 대호황을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말년에 물려준 자본주의 파국론으로는 그럴 수 없었다.
정설파는 ‘기형적 노동자 국가’론(소련의 경우는 1917년 10월혁명이 있었으므로 트로츠키를 따라 ‘변질된 노동자 국가’로 불렀다)의 불가피한 결론으로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돌아섰다.8 “인류의 생산력은 정체한다.” 9 그래서, 설사 제2차세계대전이 노동자 혁명을 부르지 않을지라도 자본주의는 더욱 부패할 것이고, 국가와 더욱 융합할 것이고, 그리하여 남아 있는 민주 정체는 전체주의 정체로 대체될 것이다. 10 또한 개혁주의의 토대는 사라졌다. “체계적인 사회 개혁과 대중 생활수준의 향상을 논할 수 없다. [민중의] 중대한 요구가 모두 자본주의 소유관계와 부르주아 국가의 한계를 넘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1 그래서 개혁주의 정당들은 제 구실을 못 해 불안정해지고 약화될 텐데, 여기에 공산당도 포함된다. 인민전선 정책 채택 이래로 공산당은 개혁주의적이 됐다. “코민테른은 부르주아적 질서 쪽으로 확고히 넘어가 세계 도처에서, 특히 스페인·프랑스·미국 등등의 ‘민주’ 국가들에서 냉소적으로 혁명을 반대하는 구실을 하고 있어 세계 프롤레타리아에게 몹시 큰 난관을 추가적으로 안겨주고 있다. ‘인민전선’이 실행하고 있는 타협 정치는 10월혁명의 기치 하에 노동계급을 무력하게 만들고 파시즘의 준동을 쉽게 만들어 주고 있다.” 12
트로츠키는 1938년 중간계급 지식인 중심의 극소규모 인터내셔널을 창립하면서도 매우 낙관적이었는데, 자본주의의 당면 전망에 대한 파국론적 예측 때문이었다. 예컨대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 “이 체제가 존속하는 것은 더는 불가능하다.”요컨대 세계는 혁명이냐 아니면 노동자들의 대량 빈민화와 전체주의 체제의 확산이냐는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이었다.
전에는 언제나 자본주의 자동붕괴론을 배격했던 그였기에 우리는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이런 주장을 철회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이 견해를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오랫동안 고수했다. 그 바람에 그들은 대중의 진정한 의식·정서와 접점을 찾지 못하고 허세와 기만, 자기 기만으로 그것을 대체했다. 자기 기만은 물신숭배를 바탕으로 했다. ‘이행기 강령’이라는 물신 말이다. 오늘날까지도 지속되는 관행이지만 정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강령에 비범한 마력이나 있는 듯이 착각했다. 더구나 흔히 그들의 강령은 노동 대중의 현재 의식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급진적 요구이기 십상이었다.
13 은 폐기된다. 그러면 노동계급이 아닌 다른 사회집단도 사회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갖가지 대리주의로 빠지게 된다. 1956년 소련군의 헝가리 혁명 진압을 지지한 아이작 도이처, 1960~70년대에 소련과 중국의 대미對美 핵전쟁을 촉구하기까지 한 라틴아메리카 트로츠키주의 지도자 후안 포사다스, 쿠바 카스트로 정권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다 마침내 1980년대에 공식적으로 트로츠키주의를 폐기한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US, 또 고르바초프의 정치 개혁을 지지하다가(다행히 그의 경제 개혁은 지지하지 않았다) 1991년 소련 붕괴로 완전히 길을 잃은 에르네스트 만델 등 정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행로는 대리주의의 연속이었다. 이는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 사상을 고수한 트로츠키의 입장과 동떨어진 것이다. 그들은 트로츠키의 정신이 아니라 자구字句를 신봉한 것이다.
강령 물신주의보다 더 큰 문제는 대리주의였다. 사회주의를 소련 군대나 지식인들이 지도하는 농촌 게릴라 부대가 구현할 수 있다면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의 자주적 활동에 의한 자기 해방으로 규정한 마르크스의 사상1947년, 토니 클리프는 말년의 트로츠키 견해에 결코 작지 않은 문제점이 있음을 느꼈다. 특히 소련을 변질됐어도 노동자 국가로 규정한 것이 현실과 충돌함을 절감했다. 그는 트로츠키가 생산관계와 소유관계를 혼동한 것이 이런 오해의 핵심적 이유임을 간파했다. 즉, 국유화만으로 소련을 노동자 국가로 규정할 수 있는가? 소련 국가는 누가 지배하는가? 노동계급 대중인가 아니면 노동계급과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노동계급 위에 군림하고 노동계급을 억압하는 관료인가? 관료는 노동계급을 억압만 하는 게 아니라 (국가를 통해 간접적·집합적으로) 착취도 하는 게 아닐까? 그 착취의 성격은 무엇인가? 혹시 (세계적 맥락 속에서 보면) 자본주의적인 것이 아닐까? 만일 국유화가 노동자 국가 규정에 그토록 결정적인 요인이라면 사유재산이 없는, 마르크스가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고 부른 사회도 사회주의적(‘노동자 국가’)이었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물음들에 대한 답변들을 계통화해 클리프는 소련과 소련 블록 소속 나라들이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한 클리프는 2년 뒤에 일어난 중국 혁명이 연속혁명이 아니라 농민의 지지를 받은 중간계급 지식인들의 국가자본주의적 혁명이라는 견해에 도달했다. 물론 일본과 서방 제국주의로부터의 민족 해방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한 트로츠키의 권고대로 클리프는 중국 혁명을 (‘무조건 그러나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그 혁명으로 수립된 정권이 티베트 등 한족漢族 외의 다른 소수민족들을 억압하는 것에는 마찬가지로 반제국주의 관점에서 반대했다. 정권이 노동자와 농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 반대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클리프는 중국 혁명과 쿠바 혁명에 ‘빗나간 연속혁명’이라는 어색한 명칭을 붙였다. 노동계급 대신에 다른 계급이 연속혁명의 과제를 성취했다는 뜻에서였다.
14 그리고 전후 호황이 장기화함에 따라 1950년대 중반에 클리프는 임박한 자본주의 파국론 대신에 ‘상시군비경제’에 따른 장기호황론을 내놓게 된다. 15 이제 정설 트로츠키주의의 세 기둥과 대비되는 국제사회주의경향의 세 기둥을 하나씩 살펴보자.
정설 트로츠키주의의 ‘세 기둥’은 ‘변질된 노동자 국가’론, 연속혁명론, 임박한 자본주의 파국론이었다. 클리프는 ‘변질된 노동자 국가’론 대신에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론, 중국·쿠바 연속혁명론 대신에 ‘빗나간 연속혁명’론을 내놓았다. 또한 클리프는 트로츠키의 경제 파국 정설을 고수하고 있던 에르네스트 만델을 비판하면서 경제 호황이라는 현실을 직시하라고 촉구했다.빗나간 연속혁명론
‘연속혁명’이라는 용어는 트로츠키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 말은 애당초 마르크스가 1789년에서 1793년까지 프랑스 대혁명의 잇따른 급진화 양상을 묘사하는 데 사용한 용어였다. 말뜻 자체는 처음에는 소박했다 ― ‘중도에서 멈추지 않는 혁명’. 그 뒤 마르크스는 이 용어를 1848년 유럽 혁명과 관련지어 사용했다. 이 용어는 1849년쯤에 명확한 뜻을 갖게 됐다. 민주주의의 권리들, 민족 통일·독립, 전前자본주의적 지주제도 폐지를 부르주아지나 쁘띠부르주아지가 아닌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음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16 발전이 불균등하다는 것은 사회들이 상이한 역사적 시기에 특정 발전 단계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발전이 결합된다는 것은 특정 조건 하에서 사회들이 하나 이상의 발전 단계들을 건너뛰어 새로운 혼성적 사회구성체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제국주의 시대 들어서 전前자본주의적 사회에도 매우 선진적인 자본주의 생산 형태가 도입될 수 있었다. 우마차와 자동차 공장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불균등한 결합은 그 사회에 새로운 긴장을 조성할 것이다.
트로츠키는 마르크스의 연속혁명 개념을 제정 러시아 상황에 창조적으로 적용했다. 특히, 트로츠키가 자신의 연속혁명론을 도출한 또 다른 이론인 ‘결합된 불균등 발전’론은 1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어떤 사회학적 발전 이론보다 단연 우수하다고 말할 수 있다.연속혁명론과 러시아 혁명
17 그들은 너무 분산돼 있는 데다 생산 방식에 대한 개인주의적 전망을 갖고 있다.
트로츠키는 이러한 결합된 불균등 발전론의 시각에서 1905년 혁명 직후인 1906년, 제정 러시아 사회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러시아는 차르(제정 러시아의 황제) 전제정치에 의해 언론·출판·집회·결사·선거의 자유가 없고, 의회도 없고, 소수민족의 권리도 없다. 게다가 농민이 봉건제에 억압당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1789년의 프랑스 부르주아지와 다르다.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이 인구 중에 차지하는 비율은 프랑스보다 더 작다. 러시아에서 급속한 공업화가 일어났는데도 부르주아지는 같은 속도로 성장하지 못했다. 경제 발전이 국가 주도로, 또 외자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한편, 그에 따라 대공장 제도가 유력해졌고, 이에 어울리게 대규모 노동계급이 창조됐다. 가령 푸틸로프 주물공장의 노동자는 3만 명이나 됐다. 다른 한편, 농민은 분명히 혁명적일 수는 있으나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미약하고 취약한 부르주아지 대對 상대적으로 강력한 노동계급, 이런 상황은 1789년보다는 차라리 1848년과 더 비슷하다. 그렇다면, 1848년처럼 러시아 부르주아지도 노동계급의 투쟁에 겁을 집어먹어 혁명보다는 반혁명, 심지어 개혁보다는 반동을 선택할 가능성이 농후할 것이다. 한편, 러시아 노동계급의 규모나 집중도는 1848년 유럽보다 훨씬 더 나아갔다. 이 점에서 러시아 노동자는 1848년 유럽 노동자보다 더 큰 혁명적 잠재력을 가졌다. 1905년 혁명에서 소비에트(평의회)를 창출했던 것을 생각해 보라. 실로 새롭고 ‘국민적’이고 ‘헤게모니적’인 계급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지 않았던가.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멘셰비키의 주장과 달리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지나 쁘띠부르주아지가 아닌 프롤레타리아가 지도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사실 마르크스가 1848년을 경험한 뒤에 내린 결론이기도 하다.
레닌도 이 점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점에서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고, 다른 한 가지 점에서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잘못된 점은 멘셰비키와 공유한 2단계 혁명 이론이다. 레닌은 차르를 타도하고 권력을 잡은 노동계급이 민주공화국 수립에서 멈추고 일정한 역사 시기 동안 안정화를 추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지배하게 된 계급이 경제적으로 계속 예속 상태일 수는 없다. 결국, 권력을 잡은 노동계급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려 할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에 대한 제국주의 열강들의 군사적·경제적 압력을 분쇄하려면 서구 노동자 혁명의 성공이 꼭 필요하다. 권력을 잡은 서구 노동계급은 러시아 노동계급과 함께 무계급 사회인 사회주의로 전환하는 일에 착수할 것이다.
19 그는 농민이 운동 지도력에서는 노동자와 동등한 반열에 오를 수 없다고 보았다. 노동자가 농민을 지도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레닌의 권력 공식은 노동자와 농민을 병렬시키는 듯했다. 물론 그는 노동자 조직과 정치의 독립성은 물론, 노동자 운동의 주도성을 역설하고 실천했다. 그러나 ‘노농(민중) 민주독재’라는 권력 공식은 민중주의적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었다. 실제로, 나중에 스탈린주의자들은 레닌의 이 권력 공식에 근거해, 운동에서 노동자와 농민을 뭉뚱그리는 민중주의적 실천을 했고, 스탈린주의의 변형인 마오주의는 아예 농민 혁명을 추구하는 옆길로 새 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혁명 운동에서 노동계급 헤게모니에 관한 레닌의 기본 사상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레닌 이론의 모호한 점은 노동자와 농민의 정치 권력 문제였다.검증
1917년 2월에 혁명이 일어나 차르가 퇴진했다. 그런데 이 혁명은 (스탈린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었다. 부르주아지가 지도하지도,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숙제, 특히 봉건제 폐지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다. 봉건제가 폐지된 것은 10월혁명으로 노동자가 권력을 잡고 나서였다. 물론 2월혁명 덕택에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인 입헌민주당(카데츠)이 집권했다. 르보프 공작이 수반인 ‘임시정부’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은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등장한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정중한 설득에 따른 것이었다. 레닌이 지적했듯이, “프롤레타리아의 불충분한 계급의식과 조직 때문에 권력이 부르주아지의 손안에 들어갔다.” 2월혁명 직후의 소비에트는 온건파 사회주의자들인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득세하고 있었다. 소비에트가 진정한 권력이었지만, 부르주아지에 의한 부르주아지를 위한 정부가 먼저 세워져야 한다는 멘셰비키의 2단계혁명론에 따르면 부르주아 정부가 권력을 잡아야 했다.
그 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임시정부가 불안하게 공존하는 ‘이원二元 권력’ 상황이 전개됐다.
자기 나름의 2단계혁명론(차르 타도 후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 단계를 상당 기간 거쳐야 한다는)을 믿고 있던 볼셰비키도 1917년 4월 레닌이 돌아오기까지 멘셰비키와 대체로 비슷한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레닌의 귀국 연설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이 이룬 러시아 혁명으로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 만세!” “우리에겐 의회 공화국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겐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겐 노동자·병사·농업노동자 대표들의 소비에트 말고는 어떤 정부도 필요 없습니다.” 모두들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레닌이 “미쳤다”, “블랑키주의자가 돼서 돌아왔다”, “아나키스트가 돼서 돌아왔다”, “해외에 오래 있다 보니 우리 나라 실정을 너무 모른다”, “나이를 먹더니 망령이 들었나?” 하고들 수근거렸다.
볼셰비키든 멘셰비키든 혁명이 ‘부르주아 단계’를 넘어 나아갈 수 없다고 믿었다. 러시아의 생산력이 더 발전해야만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비에트가 임시정부가 반동 쪽으로 넘어가지 않고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도록 임시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압력단체이자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의회 구실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에, 레닌은 소비에트를 노동자 권력의 맹아로 보았다. 레닌의 방침 전환은 즉흥적 결정이 아니었다. 일찍이 1915년에 그는 세계 전쟁과 제국주의를 분석했다. 거기서 그는 세계가 사회주의를 위해 객관적으로 무르익었다고 주장했다. 1917년 3월에 레닌은 러시아 노동계급이 이러한 사태 전개에 매우 중요한 촉매제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스위스 노동자들에 보내는 작별 편지’라는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객관적으로 불가피하게 제국주의 전쟁에서 비롯하는 일련의 혁명들을 시작하는 영광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에게 주어졌다.” 그는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을 사실상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 귀국 직후 레닌의 주장은 새 세대 청년 당원들, 특히 비보르크 지구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막 혁명 물결에 이끌려 들어와 자신감이 충만하고 패기만만한 열혈 당원들이었다. 이들의 지지에 힘입어 레닌은 다른 볼셰비키 당원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한편, 멘셰비키는 ‘진보적 부르주아지의 역할’이라는 허상에 매달려 부르주아지가 반동 진영으로 투항하는 것을 저지하려 헛되이 애쓰느라 임시정부에 손발이 묶였다. 그래서 그들은 임시정부의 전쟁 노력과 사회 변화 봉쇄 노력을 지지하고, 노동계급과 농민의 열망을 외면했다. 그래서 사태에 뒤처지게 됐고, 마침내 대중에게 외면당했다.
결국, 반봉건 부르주아 과제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은 10월혁명으로 등장한 노동자 국가였다.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숙제를 부르주아지가 해결하지 못하고 사회주의 혁명과 노동자 국가가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의 경계가 무너지고,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과 사회주의적 성격이 서로 결합됐다. 결합된 불균등 발전의 정치적 효과였던 것이다.
중국 혁명과 빗나간 연속혁명
트로츠키는 저발전 자본주의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권리들, 민족 통일·독립·해방, 전前자본주의적 지주제도 폐지를 자본가 계급이 이룩하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계급이 ― 그리고 이 계급만이 ― 다른 피억압 계급들(특히 농민)을 이끌고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계급은 또한 자기 자신의 과업, 즉 노동자 해방과 무계급 사회인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이다. 그래서 혁명은 부르주아적 성격과 사회주의적 성격이 결합되고,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의 구분도 ‘전환적 강령’으로 해소될 것이다.
그러나 1949년 중국 혁명과 1959년 쿠바 혁명은 이 명제를 반증하는 듯했다. 두 경우 모두에서 노동계급은 아무 구실도 하지 못했고, 오히려 중간계급에 속한 급진적 지식인들이 농민(중국에서는 농민의 다수, 쿠바에서는 농민의 소수)을 이끌고 민족 문제와 농업 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부르주아지의 보수적 성격이라는 점은 이 혁명들에서도 다시금 입증됐듯이 보편 타당한 것이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의 주체적 활동은 불확정의 것으로, 노동계급 속에 뿌리 내린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의 존재에 달려 있다. 보수적인 부르주아지와 비활성의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때로는 급진적 지식인들이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다. 그들은 다른 중간계급들(특히 농민)의 지지를 받아 민족 해방과 국가자본주의를 이룩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빗나간 연속혁명’이다.
1949년 여름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인민해방군이 베이징을 점령했다. 이제 한 세기에 걸친 외국의 이권과 외국의 조차지租借地와 외국 군함의 시대는 끝났다.
인민해방군은 처음에 1920년대 후반 장제스의 대학살을 모면한 공산당원들과 좌익계의 일부 국민당 군대 사병들이 중국 남부의 장시에 모여 창설했다. 인민해방군은 지역 농민들을 모집했다.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가 추격하자 마오와 인민해방군은 중국의 남쪽과 서쪽을 빙 돌아 중국 북서부의 옌안까지 1만 1천 킬로미터나 되는 ‘대장정’을 했다. 처음에 떠난 10만 명 가운데 10분의 1 미만만이 생존했다. 그러나 잔류자들은 1937년 일본의 중국 침략 이후 새로운 지지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일본군에 마구 밀린 국민당 군대는 공산당과 싸울 처지가 못 됐다. 장제스는 국민당 군대와 공산당 군대가 항일 전쟁 중에는 서로 싸우지 않기로 하는 데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국민당 군대는 전투 능력이 거의 없었다. 장군들은 대부분 사병과 작전 지역 농민을 윽박질러 축재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반면에, 인민해방군은 꾸준히 역량을 증대시켜 나갔다. 그들은 항일 전투로 중간계급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고, 지대 인하 정책으로 농민의 지지를 받았으며, 사업가들을 위해 안정된 사업 조건을 조성해 줌으로써 일부 자본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1945년 일본의 패전 덕택에 국민당 군대는 갑자기 증강된 데다 미국의 막대한 원조도 받게 됐다. 소련도 이때는 중국 공산당이 아닌 국민당에 원조를 제공했다. 그러나 인민해방군은 사기가 높았고, 규율이 있었다. 국공내전이 일어나자 국민당 군대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때때로 부대 전체가 그 지휘관인 장군들을 포함해 인민해방군 쪽으로 넘어오기도 했다. 1949년 후반 마침내 장제스와 국민당은 본토를 떠나 타이완으로 도망쳤다.
장제스의 패배와 마오쩌둥의 승리는 미국에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동안 미국은 장제스와 그의 부하 장성들에게 막대한 원조를 제공했고, 장제스를 백악관의 하위 제휴자로 여겼다. 미국은 마오쩌둥의 승리 배후에 스탈린이 있다고 확신했지만, 실제로는 스탈린은 국민당에 원조를 제공했고 마오에게는 오히려 정권을 잡지 말라고 조언했다. 마오가 스탈린과 가까워지게 된 것은 한국전쟁으로 미국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오의 농촌 게릴라 전략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 중국의 특수한 상황과 관계가 있다. 그 상황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 군대의 침략과 국민당 군대의 엄청난 부패, 도망다니기 쉬운 광대한 영토, 소련 ‘모델’이 준 희망과 고무, 제국주의 세계체제가 미·소 양대 초강대국 체제로 재편되고 있던 매우 불안정한 과도기였다는 점 등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당과 게릴라 군대의 간부들을 배출한 중간계급 지식인들의 영향력과 역할은 결정적일 수 있었다. 일반으로 말해,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신생국에서 지식인의 구실은 대단히 컸다. 후진성과 제국주의의 굴레가 짐스러운데도 사적 자본가 계급은 너무 약체였기 때문에 국가자본주의가 대안으로 비쳐졌다. 더구나 소련이라는 ‘본보기’가 있는 듯했고, 공산당의 잘 조직되고 규율 있는 활동이 미더워 보였다. 지식인은 생산관계에 매여 있지 않았으므로 ‘직업 혁명가’의 원천이었다. 게다가 여가 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노동자·농민과 달리 지식인은 여가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여가를 이용해 그들은 민족 문화를 누릴 수 있었고, 자신의 중간계급 지위 덕택에 특정 계급이 아닌 ‘민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식인들은 ‘우매한’ 대중에 대해 부채감 또는 죄책감과 함께 우월감도 동시에 느낀다. 그래서 지식인들에게 진정한 민주주의와 대중의 자기 해방은 관심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자애롭고 현명한 베푸는 사람이 되기를 그들은 바란다. 그들에게 국가자본주의는 매력 있는 목표였다.
그래서 그들의 구실은 노동계급의 의식과 활동과 조직에 반비례한다. 노동계급의 이런 주체적 조건들과 지도는 결코 불가피하거나 자동적이지 않다. 그 대신에 다른 계급(특히 지식인)이 다른 목표(국가자본주의)를 혁명적 방식으로 추구할 수도 있다. 위에서 강조했듯이 중국의 빗나간 연속혁명은 당시의 특정 조건들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 점에서 쿠바 혁명은 중국보다 더했다.
오늘의 의미
‘빗나간 연속혁명’이라는 명칭이 부적당하다는 점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자. 자신의 이 신조어를 토니 클리프도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던져야 할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빗나간 연속혁명은 통례인가? 아니면 민족 문제와 농업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서 그람시가 ‘수동적 혁명’이라고 불렀던 위로부터의 부르주아적 개혁이 훨씬 더 일반적인 것일까?
많은 신흥공업국들이 민주주의의 권리들을 확립하지 못했거나 자본주의 이전의 농업 생산관계들을 제거하지 못했다. 정설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것이 부르주아적 과업들의 “완전하고 진정한 해결”(에르네스트 만델의 표현)은 오직 노동자 권력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노동자 혁명 없이도 1990년대 전반부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전환했다. 또, 19세기 후반에 위로부터의 개혁에 착수한 독일·이탈리아·일본도 노동자 혁명과 노동자 권력이 없었는데도 결국 봉건제가 없어졌고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확립됐다. 이들 나라는 모두 일찍이 20세기 초에 이미 제국주의 열강으로 발돋움했다.
한편, 부르주아 민주주의나 민주주의 권리들의 확립이 과연 부르주아지의 과업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위로부터의 부르주아적 개혁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대혁명처럼 가장 철저했던 부르주아 혁명조차 보통선거권이나 노동조합 권리들을 확립하지 않았다.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도 혁명적 사회주의자인 바뵈프와 그의 단체(‘평등파의 음모’라고 불린)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 대중조직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부르주아지의 마지못한 양보로 처음에 시작됐다. 그나마 1930년대엔 곳곳에서 전복됐고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일반화됐다. 그 밖의 나라들에선 아직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통례가 아니라 예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또 자본가 부르주아지든 아니면 국가자본주의 관료든 지배계급은 민주주의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에게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중요한 과제가 아니다. 심지어 농업 문제 해결, 즉 지주제도 폐지조차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니다. 독일·이탈리아·일본의 경우에 보았듯이, 국민국가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지주는 자본가와 타협해 자본축적에 헌신할 수 있다. 따라서 국민국가의 존재야말로 부르주아지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다. 어느 나라가 자체의 지배계급이 형성되고 이 지배계급이 자체의 축적 방식을 추구할 수 있게 되는 데에 ― 달리 표현해 자율적 자본축적의 중추 형성에 ― 가장 큰 구실을 해 온 것은 대개 국민국가에 의한 이 같은 ‘수동적 혁명’이었다.
중국 혁명이나 쿠바 혁명은 ‘수동적 혁명’이 아닌 진정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들도 목적은 똑같았다. 강력한 국민국가를 세워 식민주의적 억압과 수탈을 물리치고 자율적 자본축적 중추를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를 위한 혁명적 길은 위로부터의 개혁의 길보다 훨씬 덜 일반적이었다.
오늘날 빗나간 연속혁명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과연 성공해서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각각 1989년과 1991년 동유럽과 소련에서 스탈린주의 정체政體들이 무너지면서 드러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의 위기는 빗나간 연속혁명의 목표가 비현실적일 것임을 암시했다. 실제로, 1970년대 중엽 세계경제 위기 이래로 일어난 민족 해방 혁명들은 ― 예컨대 니카라과·모잠비크·짐바브웨 등 ―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장기 대호황기에 일어난 중국·쿠바 혁명과 달리 서방 자본주의와 단절하지 못했고, 국내의 사기업체들과 협력하려 애써 왔다. 중국도 1970년대 말부터 시장경제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제3세계주의를 진정한 사회주의인 양 치장하기는 불가능하진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려워진 듯하다.
소수파로라도 노동계급이 존재하는 한은 결합된 불균등 발전 덕분에 그들은 규모에 비해 큰 자신의 사회적 비중을 이용해 다른 계급들을 이끌고 권력을 위한 투쟁에 나설 수 있다. 농민보다 도시 빈민의 존재가 중요해진 오늘날 가장 저명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저술가들(가령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마이크 데이비스, 토니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 등)은 노동계급 운동보다 도시 빈민(‘비공식 부문’)이나 ‘다중’의 혁명적 잠재력에 주목한다. 연속혁명론은 조직 노동계급이 이들을 이끌고 연속혁명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음 ― 그렇지 못할 경우 이들의 잠재력은 자칫 우익 데마고기의 기름진 토양이 될 수도 있다 ― 을 설명해 줄 수 있다. 물론 물자의 희소성으로 영토 분쟁과 종족 분열이 횡행해 노동계급이 성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수축되고 원자화하는 나라(가령 아프가니스탄이나 아이티나 콩고 등지)에서는 국내적 연속혁명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 나라의 사회적 위기의 해결은 노동계급이 혁명적 잠재력을 갖고 있는 인접국의 혁명과 그 확산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것도 연속혁명의 국제적 양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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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자본주의론22 그러자 일단 스탈린주의가 진보적 세력으로 해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에르네스트 만델이 지도하는 정설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1946년 동유럽 국가들을 “자본주의적 완충국”들로 규정했다. 23 동유럽 사회들이 소련 사회구조를 닮았는데도 말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소련은 승전국으로 떠올랐고, 서방과 전리품을 나눠가졌다. 동유럽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이것은 소련 관료가 전쟁을 거친 뒤 또는 심지어 전쟁 중에라도 몰락할지 모른다는 트로츠키의 예상을 빗나간 사건이었다.24 1951년, 정설파는 논리적 일관성을 기하고자 유고와 여타 동유럽 국가들을 “기형적 노동자 국가”라고 규정했다. 25 그러나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증폭시켰다. 만일 동유럽이 기형이라 해도 어쨌든 노동자 국가라면 스탈린주의는 노동자 국가들을 세웠으므로 진보적 세력이 된다. 이것은 정설파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셈이다. 또한 이것은 노동자 국가 건설이 노동자 자신의 행위라는 마르크스의 핵심 원칙과 모순되는 것이기도 하다. 정설파의 공식 견해는 사실상 노동자가 아닌 다른 세력 ― 소련 군대나 티토와 마오의 농민 게릴라 ― 이 노동자를 해방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1948년 봄 티토와 스탈린이 충돌했다. 트로츠키주의 정설파는 티토 편을 들었다. 그러나 ‘노동자 국가’에 맞서 ‘자본주의 완충국’을 지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정설파는 티토가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고 있다고 자의적으로 규정했다.그러나 이 국가들이 노동자 국가들이 아니라면 경제·정치·사회 구조가 이 국가들과 거의 같은 소련도 노동자 국가일 수 없다. 이런 추론에 바탕을 두고 토니 클리프는 1946년부터 소련 사회를 연구해 이듬해인 1947년 《소련 국가자본주의》 초판을 집필했다(출판 연도는 1948년).
26 국가자본주의론은 자본주의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사회주의’ 군도는 ‘바다’ 자체가 바뀌지 않는다면 오래지 않아 물에 잠길 것이라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적 관점을 견지했다. 그럼으로써 국가자본주의론은 1920년대의 고립된 노동자 국가가 세계 자본주의 속에서 결코 극복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볼 수 있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라는 관점에서 동구권 문제를 보지 않고 관료제의 결점에서 문제를 보는 대다수 사람들은 왜 동구권 경제가 과거에는 오랫동안 번영을 누리다가 197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성장이 더뎌지고 마침내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됐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자본의 세계화라는 세계적 맥락 속에서 동구권 위기를 자리매김 하는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 그리고 이 이론만이 ― 이 문제에 답변할 수 있다.
토니 클리프가 대안으로 내놓은 국가자본주의론의 방법상의 결정적 특징은 그 사회들을 세계적 시각에서 봤다는 것이다.관료적으로 변질된 노동자 국가론
27 그들은 소련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 사회인 노동자 국가(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봤다. 28 다만 ‘관료적으로 변질된’ 것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또한 트로츠키와 정설파가 소련 국가의 개혁 가능성에 기댔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혁명이 필요하다고 봤다. 다만 ‘사회혁명’이 아닌 ‘정치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관료가 ‘계급’이 아닌 ‘신분’(또는 계층)이라는 트로츠키의 규정에서 도출되는 실천적 결론이었다. 29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 정설파가 소련을 사회주의로 본 것은 결코 아니다. 관료가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이 아닌 노동계급 내의 특권층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트로츠키는 관료의 권력이 생산수단이 아닌 분배수단의 지배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관료는 소비수단뿐 아니라 생산수단도 지배한다. 즉, 그들은 지배계급인 것이다. 실제로, 관료는 소비보다 생산을 중요시했다. 소비재 부족 사태가 되풀이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도 그랬다. 생산수단의 사유가 아닌 국유가 노동자 국가의 본질적 특징이라는 주장도 잘못됐다. 소유관계는 생산관계의 법률적 형식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유사한 유형의 착취적 생산관계들이 상이한 소유 형태들과 공존할 수 있었다. 예컨대 중세의 농민은 사유지가 아닌 교회 소유 토지에서 일하든, 봉건영주 소유의 토지에서 일하든 똑같이 착취당했다. 또, 아랍 봉건제는 국유재산에 바탕을 뒀는데, 그 지배계급의 성원들은 개인 재산권(사적 소유권)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랍의 농민은 유럽의 농민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착취당했다. 법률적 관계들이 달랐어도 말이다. 소련이 사회주의 또는 노동자 국가라는 주장은 내용보다 형식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사적 소유가 국유로 대체됐다며 소유관계를 강조하고, 시장의 무정부성이 계획으로 대체됐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자들이 생산과정에 대한 통제로부터 배제돼 있는 실제 생산관계를 간과한다. 또한,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군사적으로 생존할 필요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경제 ‘계획’의 내용도 그들은 간과한다. 토니 클리프는 소련이 이행기 사회가 아니라 1928년에 자본주의적 복원이 일어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라고 주장했다. 국가 관료는 이 사회에서 스스로 지배계급이 돼 소련 경제를 자본주의적으로 운영했다. 소련 관료는 스스로 자초한 1926년 영국 총파업 패배, 1927년 중국 혁명 패배, 뒤이은 고립, 침략당할 위험 등에 대응해 무장을 강화해야 했다. 여기에는 중공업의 급성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생산수단의 축적이 지상명령이 됐다. 반혁명은 노동자 권력의 잔재를 남김없이 파괴해 버렸다. 1인 경영제, 노조 무력화, 단체협약 폐지, 개별 고용을 통한 노동계급 원자화, 스타하노프식 노동강도 높이기, 국내통행허가증제 도입, 여성의 예속, 물품세 도입을 통한 물자 이전(소비에서 무기 생산으로), 농업의 강제 집산화, 강제노동수용소, 소수민족 억압 등등.36 관료의 권력은 트로츠키가 지적한 분배 통제나 물질적 소비상의 특전으로 나타나는 기생주의가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차지하는 지위에서 나온다. 그들은 계급이다. 37
국가를 통해 축적 과정을 지배함으로써 관료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자본 인격화’가 됐다. 지배계급인 관료는 노동자·농민과 떨어져 있었고 그들 위에 군림해 왔다. 그들은 도가 지나친 ― 소련의 기준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서구의 기준으로 봐도 ― 부와 특전을 누렸고 일반으로 자신의 계급 지위를 자녀와 손자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노동계급
어떤 사람들은 소련에 임금노동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래서 소련은 자본주의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소련 노동자들의 정치적 권리가 제한돼 있었긴 해도 그들은 ‘자유’ 노동자들이었다. 첫째, 그들은 다른 어떤 개인이나 국가에 속박돼 있거나 소유돼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법률상으로 자유로웠다. 둘째, 그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거나 통제하거나 또는 그것에 속박돼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과 똑같은 관계를 생산수단과 맺고 있었다.
39 이런 노동력 매매를 통해 소련 노동자들은 착취당했다. 이 착취는 자본주의에 앞선 사회에서처럼 특정 노동이나 특정 생산물에 대한 직접적 전유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었다. 서구 자본주의에서처럼 생산물로 구체화된 노동시간 가운데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부분(필요 노동시간)을 뺀 나머지 부분(잉여 노동시간)은 국가와 지배계급이 전유했다. 노동자들은 무보수 잉여노동을 했던 것이다.
그들이 먹고살기 위해서는 관료가 지배하는 국유 기업에 고용돼야만 했다. 서구 자본주의에서처럼 그들은 일할 능력, 곧 노동력을 파는 대신에 임금을 받았다. 노동력은 소련의 공식 계획 당국이 시인했듯이 “그것의 재생산에 필요한 재화량”, 즉 노동력의 가치에 따라 매매됐다.40 소련의 임금 수준은 산업에 따라, 직장에 따라, 지역에 따라, 또 노동계급 내의 기능별·교육별·성별·인종별 계층에 따라 달랐다. 이러한 각 부문의 노동 수요가 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임금률은 중앙 계획 당국에 의해 정식으로 책정된다. 그러나 소련의 계획 입안자 자신이 시인했듯이, “임금 차이를 자의적으로 조정한다는 것은 몹시 잘못된 생각이다. … 이런 관점이 모델을 세우거나 예측을 할 때 여러 실책을 범하게 한 이유였다.” 41 효과적인 임금 책정은 다양한 경제 부문의 다양한 수요에 제대로 부응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게 되면 기업 경영자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노동을 끌어들이려 국가의 임금 시책을 위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42 그래서 소련의 임금과 임금 차이는 자의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계획’되기는 했지만 임금은 현실의 수요·공급, 즉 시장 압력을 반영했고 경제 전반에 노동력을 분배하는 구실을 했다. 이것은 바로 자본주의 경제에서 임금의 고전적 기능이다.(물론 임금 차이는 역시 서구 자본주의에서처럼 노동계급 내부 이간질에도 이바지했다.)
그러나 토니 클리프는 노동시장의 자유화 정도를 과소평가했다. 그가 《소련 국가자본주의》를 집필하던 1947년 당시 입수할 수 있는 정보의 한계 때문이었다. 이것은 여러 해 뒤에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바로잡았다. 더구나 소련에서 개별 기업의 임금 책정은 실제로는 매우 자율적이었다. 경영자들은 서로 상여금이나 성과급 또는 노동 기준량(노르마) 조작 등을 이용해, 자신에게 필요한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경쟁을 벌였다. 이런 일은 노사간 비밀 거래 방식으로 이뤄졌다. 또한 단체교섭권 등 노동기본권이 크게 제한돼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더 높은 임금을 찾아 직장을 바꾸는 것으로 ‘교섭력’을 높였다. 젊은 노동자의 20퍼센트가 취업 첫해에 직장을 바꿀 만큼 이직률이 높았다.44 그러나 국가가 임금 수준 책정을 통해 축적이 급속히 이뤄지는 시기에 임금이 노동력의 가치를 훨씬 웃도는 수준으로 인상되는 것을 방지했기 때문에 기업은 축적률이 저조한 시기에도 장차 일손이 모자라게 되는 때를 대비해 대량 해고보다는 불안정 고용을 선호했다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 이것은 경제에 간접 비용을 부과하는 셈이었지만, 이 점은 서구 자본주의의 사회복지 혜택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인 실업이 소련에는 없었으므로 소련은 자본주의일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고르바초프의 최고 경제 자문이었던 아벨 아간베기얀이 지적한 사실을 드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는 소련 학술원(과학아카데미) 산하 노보시비르스크 경제·산업 조직 연구소 소장 시절인 1965년에 소련 주요 도시의 실업률이 8퍼센트이고 소도시의 실업률은 20~30퍼센트라고 지적했다.마르크스주의 법칙들의 종합
《사회주의 ― 공상에서 과학으로》에서 엥겔스는 이렇게 예측했다.
… 자본주의 사회의 공식 대표자인 국가는 결국 생산에 대한 지도를 맡아야만 하게 될 것이다. … 그러나 주식회사와 트러스트 또는 국가 소유로 변형된다 해서 생산력의 자본주의적 본질이 제거되지 않는다. … 형태가 어떻든 간에 현대 국가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기구이고 자본가들의 국가이며 총 국민자본의 관념적 인격화다. 현대 국가가 생산력 장악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것은 더 많은 시민을 착취한다. 노동자는 임금노동자, 곧 프롤레타리아로 남는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제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정점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정점에 이르면 그것은 넘어진다. 생산력의 국유는 충돌의 해결책이 아니지만 그 안에 해결책의 요소들을 이루는 기술적 조건들이 숨겨져 있다. 이 해결책은 … 사회가 공공연히 그리고 직접적으로 생산력을 장악함으로써만 생겨날 수 있다. … 프롤레타리아가 공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통해 그들은 사회화된 생산수단을 … 공공재산으로 바꾼다.
엥겔스의 예측대로 그 뒤 세계 자본주의는 정도 차이는 있었지만 국가자본주의로 전환했다. 힐퍼딩·부하린·레닌은 자본주의의 이 새로운 국면을 제대로 인식하고자 애썼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에 따르면, 소련 경제는 이들이 파악한 현대 자본주의(제국주의)의 법칙들에 따라 작동했던 것이다. 이 법칙들은 마르크스가 파악한 고전적 자본주의의 법칙들이 변용된 것이다. 현대 독점자본주의에선 가치와 가격 사이에 필연적 조응 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가치법칙이 부분적으로 부정된다. 또, 제국주의적 경쟁에서 비롯하는 전쟁 준비에 의해 경제가 규정된다. 그래서 국가자본주의가 가장 유력한 형태가 된다. 국제 질서도 여러 국가자본주의들 사이의 충돌의 보편화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치법칙은 더한층 수정된다.
45 이를 위해 스탈린과 그 휘하의 관료는 1928~29년 국가자본주의 반혁명을 일으켰다.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선진국들에 50년 뒤졌다. 우리는 10년 안에 이 격차를 메워야 한다. 우리가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그들[서방]이 우리를 분쇄해 버릴 것이다.”
세계 체제의 일부로서 소련은 군사적으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서방과 무기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급속한 중공업 건설이 필요했다.46 비록 ‘부분적으로 부정된’ 가치법칙이었긴 하지만, 이것은 정도 차이일 뿐, 서방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방의 무기·중공업 제품 생산자들이 노동비용을 줄이려 함에 따라 소련도 그렇게 해야 했다. 그 역도 성립했다. 그리하여 소련에서의 구체적 노동은 세계 규모에서의 추상적 노동과 연관되게 됐다. 47
이러한 서방과의 군사적 경쟁이 소련 경제에 가치법칙을 강요했다.48 특히 제1·2차세계대전 때는 더욱 그랬다. 당시의 서방 경제는 현상적으로도 소련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49 그럼에도 물론 자본주의적이었다. 교전국 상호간의 군사적 경쟁은 노동생산성 상호 비교를 강요했다. 50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가치법칙의 이러한 수정된 관철은 서방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했다.51 1930년대에 이 방향으로 가장 멀리 나아간 게 소련이었고 그 다음으로 일본, 독일, 미국 순이었다. 1950년대 이후로는 중국과 브라질·멕시코 같은 제3세계 나라들이 국가자본주의로 나아갔다. 52
단지 전쟁 때만 국가 개입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다. 1930년대 이후 국가는 국민경제에 개입해,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는 산업에 국가보조금을 대주거나 국유화하는 방식으로 가치법칙을 수정했다.53 또한, 주기적 과잉생산 위기를 소련도 경험했다. 54
그러나 소련 경제를 포함한 현대 자본주의가 고전적 자본주의의 법칙들에서 벗어나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윤율의 장기적 저하 추세가 소련과 현대 자본주의에서도 작용한다.55 위기가 나타나는 형식 자체는 마르크스의 고전적 자본주의 모델과 다소 달랐던 것이다. 56
물론 자원 배분이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서가 아니라 관료의 지령에 따라 이뤄졌으므로 위기는 공업 생산의 감소, 공장폐쇄, 실업 급등과 같은 현상보다는 성장률 감소와 같은 현상을 초래했다.상시군비경제론
상시군비경제(‘영구군비경제’ 또는 ‘영구전쟁경제’라는 용어로도 알려져 있다)는 군비(무기) 증강이 경제 전반의 이윤율 저하를 지연시키는 효과를 내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다. 상시군비경제의 효시는 제1차세계대전 중에 군국주의적으로 편제된 국가자본주의였다. 레닌은 이를 두고 ‘전시국가독점자본주의’ 또는 단순히 ‘국가자본주의’라고 일컬었다. 제1차세계대전 중의 군비 경제는 그 효과가 인지되기도 전에 전쟁 직후 포기됐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 소련이 맨 먼저, 그리고 가장 완전한 형태로 상시군비경제를 이룩했다. 비슷한 때 일본도 그랬다. 1930년대 중엽에는 독일도 히틀러 치하에서 상시군비경제 체제를 확립했다. 곧이어 이탈리아와 중남미와 영국도 군비 증강 중심의 국가자본주의로 나아갔고, 미국도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군국주의로 나아갔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도 군비 경쟁은 다시 격화됐다. 이번에는, 냉전을 벌이는 양대 초강대국(즉,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군비 경쟁이었다.
뜻하지 않은 효과
이 군비 증강 드라이브가 경제 부양 효과를 낸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났다. 그래서 1944년 1월 GE(제너럴 일렉트릭) 사의 찰스 윌슨은 “우리 나라에 필요한 것은 상시전쟁경제다” 하고 말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의도되지 않은 역사적 결과’였던 것이다. 급진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즈는 죽기 몇 년 전인 1958년에 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엘리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제2차세계대전 종식 이후 미국 경제 번영의 직접적 토대는 전쟁 경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만약에 군비 축소와 진정한 평화가 양국 사이에 이루어진다면 경제적 ― 따라서 정치적 ― 문제들이 당연히 그리고 절망적으로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소련이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기만 해도 주식시장의 매매에 즉각적인 변동이 발생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세계적인 규모의 협정이 타결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제쳐두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하나의 협상이 타결된다는 두려움이 일면, 주식은 신경과민 상태가 되어 소위 평화 공포를 나타내게 된다. 실업률이 증가하고 따라서 이에 대한 대책이 요구되면 보통, 정부 대변인들은 무엇보다도 전쟁 준비를 하느라고 현재 지출된 비용과 앞으로도 지출될 비용이 더욱 증가한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들을 정당화한다. 1958년 1월 450만 명이 실업 상태에 처했을 때도 미국 대통령은 군수 계약 금액이 1957년에 356억 달러이던 것이 1958년에는 472억 달러로 증가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경제 상태와 전쟁 준비 간의 이러한 상관 관계는 모호하지 않으며, 은폐돼 있지도 않다. 이 관계는 공공연하게 그리고 정기적으로 보도된다. …
[중략]
군국주의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그 자체가 목표가 됐으며, 경제정책은 그 수단이 됐다. …
[중략] 제2차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 호경기가 ― 오직 그것만이 ― 미국을 1930년대의 불경기로부터 구해 냈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 재래식·비재래식 전쟁 물자가 그칠 새 없이 생산됐다. 그 결과는 우리가 두루 아는 바처럼 지난 10년에 걸쳐 위대한 미국의 번영을 가져왔다.
케인스주의자들
58 전쟁이 끝나던 해인 1945년의 군사비는 국민총생산GNP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59 1946~67년에 미국 정부는 예산 총액의 57.29퍼센트인 9천40억 달러를 군사력을 위해 사용했고 겨우 6.08퍼센트밖에 안 되는 9백60억 달러만을 교육·보건·노동·복지·주택·지역개발 등에 사용했다. 60 또, 1966년에 항공기·미사일 산업은 연구 개발을 위해 54억 달러를 사용했고 그 비용의 대부분을 연방 정부에서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건·교육·후생부는 그것의 4분의 1밖에 안 되는 비용만을 할당받았다. 61
그러나 전후 좌파에게 장기 호황과 군비 증강 사이의 상관 관계는 분명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개혁주의자인 케인스주의자들은 호황이 케인스주의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클리프의 비유를 빌리면 “닭 울음소리 때문에 해가 뜨는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다.” 적자재정에 의한 공공지출 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케인스의 조언을 따랐던 정부 자체가 없었다. 오히려 1960년대 초까지 각국 정부는 긴축재정 정책을 추구했다. 그러면서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예컨대 1930년대 중엽에 겨우 36억 달러의 연평균 재정적자(1934년 36억 달러, 1935년 30억 달러, 1936년 43억 달러)를 발생시켰다 해서 로즈벨트에게 매우 분개했던 미국 자본가들은 1941~42년 5백90억 달러의 재정적자에는 괘념치 않았다. 독일의 예를 들면, 1932~37년에 민간소비는 12억 달러밖에 증대하지 않은 반면에, 국민총생산은 1백7억 달러나 증대했는데, 새로운 생산은 대부분 군비 관련 산업들인 중공업에서 이뤄졌다.정설파 트로츠키주의자들
호황의 존재를 인정한 사람들이 호황의 원인을 얼토당토않게 케인스파 경제정책으로 돌린 한편, 극좌파는 아예 호황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의 공산당과 정설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전반적 위기’를 얘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실을 직시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트로츠키 자신이 1930년대 말에 자본주의의 파국을 점치고 있었다. 그래서 진정한 사회 개혁과 대중의 생활수준 향상이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전후 세계 자본주의는 붕괴하기는커녕 유례 없는 장기 호황을 누렸다. 이와 함께 개혁주의가 부활했다. 그래서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득세했다. 영국의 역대 노동당 정부 가운데 1945~51년 애틀리 정부가 가장 효과적인 개혁주의 정부였다. 애틀리 정부 하에서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은 크게 향상됐다. 완전고용과 사회보장제도가 정착됐다. 이와 같은 사정은 서구 전역에서 마찬가지였다.
63 그들은 실제 상황을 정면으로 대하기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지도적인 정설파 트로츠키주의자 에르네스트 만델은 여러 해 동안 장기 호황의 현실을 부정하다가 1964년에는 위기로의 경향이 거의 사라진 ‘신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64
나치 체제와 스탈린 체제 하에서 고립과 고통을 당해 온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심리적으로 기적을 믿어야 하는 처지였다.”호황과 위기를 모두 설명한 클리프
그러나 1974년에 심각한 경제 위기가 찾아왔다. 케인스주의자들은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대학과 언론과 기업인 단체에서 순식간에 완전한 비주류로 전락했다. 머지않아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옳았음이 입증됐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그 전 30년간의 장기 호황을 설명하지 못하던 ‘근본주의자들’이 갑자기 신뢰를 얻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호황을 설명하려 노력해 온 ‘수정주의자들’이 일찍부터 있었다. 그들은 ‘상시전쟁경제’론자들로 불렸던 옥스·밴스와 토니 클리프였다. 특히 클리프의 상시군비경제 이론은 그의 국가자본주의 이론에서 도출된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소련이 서방과의 군사적·경제적 경쟁을 위해 상시군비경제 체제로 돌입한 최초의 경제였는데, 이처럼 국가자본주의와 상시군비경제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그 이론들도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소련을 이해하는 것이 서방 경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였다.
국가자본주의에 의한 상시군비경제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주요 나라들 사이에서 보편화된 뒤 4반세기 동안 자본주의는 장기 호황을 누렸다. 이것은 고전적 자본주의의 정기적 경기변동 주기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왜 상황이 이렇게 달라졌는지를 이해하려면 고전적인 경제 위기의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
과잉생산
‘과잉생산’은 상품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 상품이 팔리지 않고 재고로 쌓여 가는 현상을 가리킨다. 다국적기업들이 식료품을 갖다 버리는 가운데 아프리카와 북한의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 건축 붐이라는데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은 늘어나기는커녕 줄어든다. 철강회사가 문을 닫는데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농민들이 쟁기도 없이 농사를 짓고 있다.
자본주의 기업들은 자기들이 팔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상품을 생산했음을 갑자기 깨닫는다. 그 결과 그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한다. 하지만 이로 말미암아 노동자들은 쓸 수 있는 돈이 줄어든다. 상품에 대한 수요가 감소한다. 재고가 더 늘어난다. 공장가동률이 더 떨어진다. 과잉생산 위기는 더 악화되고 불황이 심화된다.
과잉생산은 이윤을 위한 생산인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이다. 과잉생산은 불합리한 것이지만, 우연한 것은 아니다. 과잉생산은 자본의 본성 자체에 내재한 것이다. 한편으로, 경쟁 때문에 기업주들은 될수록 생산을 확대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이윤 때문에 그들은 될수록 임금을 낮추려 하고 노동자들이 생산한 상품의 가치보다 훨씬 더 적은 보수를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려 한다. 그 결과 생산품의 양과 노동자들의 상품 구매력 사이에 격차가 벌어진다.
만일 생산품과 대중의 제한된 구매력 사이의 이 격차를 메울 수 없다면 자본가들은 상품을 충분히 팔지 못해, 이윤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격차는 새로운 생산수단에 대한 지출로써, 즉 신규 기계설비류에 대한 투자로써 메울 수 있다.(이는 과소소비론의 핵심 주장에 대한 논박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경제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윤을 위해 투자한다. 따라서 투자는 주기적으로 순환한다. 이윤율이 높아 경영주들이 낙관적이면 기를 쓰고 투자해 경기는 호황이 된다. 새 공장을 짓고 기존 공장을 확장한다. 실업자가 줄어들고 취업자가 늘어나면 노동자들이 쓸 수 있는 돈이 늘어나, 상품에 대한 수요가 증대한다. 이 덕분에 경제는 더 확대된다.
그러나 호황은 자멸의 씨앗을 내포한다. 자본가들이 대부분 한꺼번에 쇄도하듯이 투자함에 따라 원자재와 기계설비류와 노동력의 가격이 올라, 마침내 이윤을 잠식하는 수준에까지 이른다. 이쯤 되면 사업 전망이 달라져, 자본가들은 투자를 위해 쇄도했던 것만큼이나 빨리 투자를 감축한다. 과잉생산 위기가 다시 나타나고, 호황은 경기후퇴와 불황으로 바뀐다.
그러나 불황도 상시적이지 않다. 호황이 물가를 상승시켜 마침내 이윤을 잠식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불황은 물가를 하락시켜 마침내 이윤율이 회복된다. 투자가 다시 시작된다.
그리하여 산업혁명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역사 전체는 호황과 불황의 교대가 특징이었다.
낭비적 지출로 격차 메우기
66 크리스 하먼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생산된 상품과 대중의 구매력 사이의 격차를 생산수단이 아닌 군비에 대한 투자 지출로 상당 부분 메운다고 가정해 보자. 군비 생산은 사치품이나 광고·마케팅 또는 투기처럼 생산재도 소비재도 아닌 낭비적 지출 형태다. 물자가 상당 부분 낭비적 부문으로 전용됨에 따라 생산적 부문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가율은 둔화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윤율 저하 경향은 상당히 뒤로 늦춰지게 된다.물론 대규모 군비 부문은 다른 상황이었다면 증대하는 생산적 투자로 사용될 수도 있었을 자원의 대량 낭비를 나타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부담은 미국 경제를 지배하는 대기업들 사이에서 거의 균등하게 분담됐으므로, 생산적 투자를 확장할 각 기업의 능력은 대략 동일한 양으로 억제됐다. 그 결과 단기 경제성장이 전에 경제 주기의 ‘호황’ 부분에서 지녔던 열광적인 속도에는 결코 이르지 못하는 것이었던 반면, 그것은 주기의 불황 부분에서 겪었던 중단 같은 것은 겪지 않았다.
전후와 전전의 경제를 비교하는 것은 이솝 우화의 토끼와 거북이를 비교하는 것과 같았다. 전전 경제는 빠른 속도로 약진하다가, 숨을 헐떡이며 갑자기 멈추었다. 거대한 무기 비용의 낭비라는 ‘부담을 안고 있던’ 전후 경제는 더 느리게 전진했으나, 예전처럼 돌연히 멈추지는 않았다. 이윤율은 억제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전후 경제는 해마다, 10년마다 계속 전진할 수 있었다. 그것의 장기 성장률은 그 전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그리하여 세계체제는 “1950년과 1965년 사이에 1913년과 1950년 사이보다 두 배 빠르게, 그리고 이 전 한 세대 동안의 거의 절반의 속도로” 성장했다.
미국과 소련의 이러한 군비 지출은 잉여가치의 일부를 낭비적 ― 비록 지배계급들의 제국주의적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뜻에서 그들에겐 ‘생산적’ 낭비겠지만 ― 생산으로 전용하는 한편, 미국과 전 세계의 수요와 고용 수준을 떠받치는 구실을 했다. 이것은 다른 경제들, 특히 서유럽과 일본의 경제들이 이윤의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신규 공장과 기술에 투자함으로써, 그리하여 그 생산물을 수출 ― 특히 미국으로 ― 함으로써 성장할 여지를 만들어 줬다.
그 덕택에 독일과 일본 경제는 장기 호황 동안 급성장했다. 초강대국들과는 달리, 그리고 정도는 덜하지만 영국과 프랑스와도 달리, 독일과 일본은 높은 수준의 군비 지출 부담이 없었다. 이 덕분에 두 나라는 특히 수출 시장에서 기회가 충분했던 반면, 세계적으로 고정자본 양을 증대시켜 놓았다.
1960년대 말쯤 생산에 필요한 자본 양이 다시 증가하면서 이윤율이 떨어졌다. 이것은 결국 1974년의 위기를 불러왔는데, 석유 가격 인상은 이윤율 하락으로 허덕이던 자본가들이 마침내 투자를 멈추게 만든 결정타였을 뿐이다.
1974~75년의 위기가 모든 곳에 고르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회복이 진행되자마자 1979~81년에 새로운 위기가 강타했다. 1990~92년에도 위기가 엄습했다. 고실업, 저성장, 대규모 자본 파괴가 뒤따랐다. 1997~98년의 위기는 아시아와 브라질, 러시아에 국한됐지만, 2008년 가을부터 2009년 여름까지의 금융 추락과 경제 공황은 그 낙폭落幅이 하도 커 자본주의가 전후 ‘황금시대’ 수준의 이윤율을 회복하기는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쉽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진정한 문제는 회복 여부나 그 시기 문제와 관계 없이 지배자들이 노동계급에게 비용을 전가하려 한다는 것과 이를 위해 다른 억압받는 사회집단을 속죄양 삼으려 항상 애쓴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이에 대한 저항 운동과 저항 사상을 구축하는 데 힘써야 한다.
■ 토니 클리프, 《트로츠키 사후의 트로츠키주의》, 책갈피, 2010
주
- Sarneh 1991. ↩
- Trotsky 1939, p17. ↩
- Trotsky 1935. ↩
- Trotsky 1938. ↩
- 토니 클리프(1917-2000)는 본명이 이가엘 글룩스타인Yigael Gluckstein으로 팔레스타인계 트로츠키주의자였다. 1947년부터 그는 소련이 ‘(관료적으로) 변질된 노동자 국가’라는 트로츠키의 견해에 반대해 소련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보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바로 《소련 국가자본주의》(초판은 1948년 출판됨)였다.[국역: 《소련 국가자본주의》, 책갈피, 1993.] ↩
- 트로츠키 2003. ↩
- Hallas 1973. ↩
- Trotsky 1939, p9. ↩
- Trotsky 1938, Part 1. ↩
- Trotsky 1939, pp9-10. ↩
- Trotsky 1938, Part 1. ↩
- Trotsky 1938. ↩
- Draper 1971; 드레이퍼 2003. ↩
- Cliff 1947. ↩
- Cliff 1957. ↩
- 좀 오래됐지만 국내 도서로는 유일하게 트로츠키의 ‘결합된 불균등 발전론’의 시각에서 종속이론과 볼리비아·쿠바·칠레의 사회 발전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클리프의 빗나간 연속혁명을 입증한 책이 있다. 럭스브로우 1980. ↩
- 스탈린주의자들의 곡해와 비방과 달리, 트로츠키는 농민이 혁명적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믿지 않았던 ― 그리고 역사 속에서 언제나 입증된 ― 점은, 농민이 독자적인 정치적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
- 국제 혁명을 “동시다발 혁명”으로 왜곡하는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해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물론 10월혁명을 경험하고 성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국제 혁명이 단일한 행위일 수 없다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10월혁명은 역사적 필요성의 압력을 받은 한 후진국 프롤레타리아가 선진국들의 프롤레타리아가 ‘실제로 전면에 나서기를’ 기다리지 않고 성취한 것이었다.” Trotsky 1929, pp21-22. ↩
- 몰리뉴 2003, pp20-21. ↩
- Davidson 2006. ↩
- 이 절은 최일붕 2007, pp149-165를 편집해 재수록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자기 표절’로 필자가 얻는 금전적 이익이나 학술적 지위 제고 따위는 없음을 분명히 밝혀 둔다. ↩
- 캘리니코스 1990, p38. ↩
- 캘리니코스 1990, pp48-53. ↩
- Hallas 1973, p21. ↩
- 캘리니코스 1990, pp53-54. ↩
- 하먼 1990, p74. ↩
- Trotsky 1967, pp61-62. ↩
- Trotsky 1967, p47. ↩
- Trotsky 1967, pp252, 288. ↩
- Trotsky 1967, p112. ↩
- 클리프 1993, pp282-284, 162-163. ↩
- 클리프 1993, pp280-282. ↩
- Molyneux 1981, pp129-130. ↩
- 클리프 1993, pp148-149, 168. ↩
- 클리프 1993, 1장. ↩
- 클리프 1993, pp163-164. ↩
- 클리프 1993, pp162-163. ↩
- 소련 사회과학자들의 논문집인 Yanowitch & Fisher 1973. 특히 pp241-274. McAuley 1979, p66. Smith 1977, pp48, 131-132. 또, 보슬렌스키 1981. 그러나, 터무니없게도 보슬렌스키는 스탈린주의 체제의 기원을 레닌과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
- Rabkina & Rimashevskaya. McAuley 1979, p181에서 재인용. 소련의 계획 당국은 공식 빈곤선을 “최소한의 물질적 만족”이라 불렀는데, 노동자 가구의 3분의 2와 집단농장 농민 가구의 84퍼센트가 공식 빈곤선의 1.4배 이하의 소득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에 대해서는 McAuley 1979, chapter3 참조. 또, Lane & O’Dell 1978, 표 5.7. ↩
- 캘리니코스 1981, pp226-257. ↩
- Rabkina & Rimashevskaya, p208. McAuley 1979, p182에서 재인용. ↩
- McAuley 1979, p182. ↩
- Batyshev 1968. Lane & O’Dell 1978, p90에서 재인용. ↩
- Aganbegyan 1982, p224. ↩
- Harman 1969, p38. ↩
- Harman 1969, p37. ↩
- Harman 1969, p38. ↩
- 하먼 1990a, pp75-79. ↩
- 캘리니코스 1992, pp212-213. ↩
- 하먼 1990b, pp35-36. ↩
- 하울 1990, p121. ↩
- Harman 1976, p27. ↩
- Harman 1976, p28. 하울 1990, pp141-144. ↩
- 하먼 1990a, pp82-85. Harman 1976, p27. ↩
- Harman 1976, p27. ↩
- 하먼 1990a, pp84-85. 하울 1990, pp115, 141-142. 캘리니코스 1981, p257. ↩
- 밀즈 1982, pp57-59. ↩
- Cliff 1999, p50. ↩
- 렌즈 1984, p63. ↩
- 렌즈 1984, p43. ↩
- 렌즈 1984, p44. ↩
- 하먼 1995, p109. ↩
- Cliff 1999, p48. ↩
- Mandel 1964. ↩
- Cliff 1999, p51. ↩
-
이윤율(p)=잉여가치/투자 자본 총액=잉여가치(s)/불변자본(c)+가변자본(v)
이 등식 우변의 분모와 분자를 모두 v로 나누면,
p = (s/v)/(c/v+1), 즉 (착취율 / 자본의 유기적 구성 + 1)
즉, 이윤율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 반비례하고 착취율에 비례한다. ↩ - 하먼 1995, pp135-136. 번역은 오역을 고치는 것을 포함해 내가 다소 수정했다.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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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니코스, 알렉스 1981, ‘임금노동과 국가자본주의’, 하먼·캘리니코스 외,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논쟁》, 풀무질, 1995.
캘리니코스, 알렉스 1992, ‘파산한 이론을 은폐할 수 없는 수사학’, 하먼·캘리니코스 외,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논쟁》, 풀무질, 1995.
캘리니코스, 알렉스 1990, 《트로츠키주의의 역사》, 백의,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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