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진보사상 조류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 *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비평
닐 데이비슨은 스트래스클라이드대학교의 사회학부 선임 연구교수이자 역사학자다. 공무원 출신으로 영국 공무원노조PCS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데이비슨은 The Origin of Scottish Nationhood(2000)와 Discovering the Scottish Revolution(2003) 등의 책을 썼다. 데이비슨은 Discovering the Scottish Revolution으로 2003년 도이처기념상을 받았다. 도이처기념상은 트로츠키 전기 작가로 유명한 아이작 도이처 부부를 기념해 해마다 가장 훌륭하고 혁신적인 마르크스주의 신간에 수여하는 상이다. 그 밖에도 폴 블랙레지와 함께 Alasdair MacIntyre’s Engagement with Marxism(2008)을 공동 편집했고, Historical Materialism이나 International Socialism 등의 잡지에도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 한국에서는 《상상의 공동체》 1983년 초판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나남, 1991)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됐고, 그 뒤 1991년 개정증보판이 원제 그대로인 《상상의 공동체》(나남, 2002)로 번역 출판됐다.
* 조셉 료베라가 적절히 표현했듯이, 《상상의 공동체》는 “사람들이 마치 그런 표현이 만들어지기를 기다렸던 듯한” 책이었다. 1 《상상의 공동체》 3판 출간[2006년 ― M21]으로 우리는 이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책을 재평가할 기회를 얻게 됐고, 이 책이 일으킨 몇 가지 논쟁을 되돌아볼 기회도 얻게 됐다. 그런 논쟁이야말로 이 책이 인기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런 논쟁은 복잡한 개념으로 이론의 공백을 메우려 할 때 생길 수밖에 없는 오해에서 비롯한 것만은 아니다. 논쟁 가운데 일부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근본적인 이론적 전제들에서 비롯한다. 앤더슨 스스로 썼듯이 “이 책은 모종의 역사유물론과, 나중에 담론 분석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을 결합하려는 시도였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의 포스트모더니즘과 2 마르크스주의 모더니즘이 결합됐다.”
민족주의 연구자라면 누구나 읽어 봐야 하고 참고 문헌에 포함시킬 것이 확실한 책 하나를 들라면 단연 《상상의 공동체》일 것이다.《상상의 공동체》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측면이야말로 이 책을 가장 영향력 있게 만든 요인이었지만, 그 때문에 앤더슨의 마르크스주의는 너무 자주 훼손됐다. 그럼에도 먼저 앤더슨이 이룬 성과를 인정하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왜 이 책의 영향력이 그렇게 대단했는지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마르크스주의 전통 내에서 과거에 민족주의를 어떻게 다뤘는지를 재검토해야 한다.
전략, 정의, 설명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9세기 중반, 다시 말해 서유럽·북미·일본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완수되던 시대에 민족주의 문제를 다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계급(더 일반적으로는 “민주주의 세력”)이 민족 운동과 신생 민족국가 형성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국가가 건설돼야 자본주의 발전이 촉진되고, 그 결과로 노동계급이 등장할 것이고, 유럽의 거대한 반동 세력들(그중 가장 강력한 세력은 러시아의 절대왕정이었다)이 약화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4 오히려 민족 자결 지지 여부는 운동의 성공이 진보적 결과를 낳을 것인지 아닌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각이었다.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특정 운동을 대하는 태도를 운동 지도부의 계급적 성격이나 정치적 태도에 따라 결정하지도 않았다. 1848년 헝가리 반란은 귀족들이 주도했고, 1863년 폴란드 봉기도 귀족들이 이끌었으며, 아일랜드의 페니언 단원들(당시 사회주의 단체가 아닌 집단치고는 많은 점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집단 축에 들었다)조차 가톨릭 교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이런 운동들이 자본주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젖혔거나 절대왕정 국가들의 영향력을 끝장냈다는 객관적인 긍정적 결과에 견줘 보면 그런 부정적 특징들은 결코 결정적이지 않았다. 반대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49년 혁명기에 체코와 남슬라브인들의 민족주의 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는데, 당시 “유럽의 헌병”이었던 러시아 절대왕정이 그 나름의 꿍꿍이에서 체코와 남슬라브인들의 운동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5
민족 자결이 꼭 절대적 우선 사항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모든 민족 집단은 국가를 세울 권리가 있다는, 당시 표현으로 이른바 “민족 독립의 원칙principle of nationality”을 거부했다.이런 사회주의적 전략으로 민족주의에 대처하려 했던 구체적 상황들은 이제 대부분 과거사가 됐지만, 그런 전략에 적용된 방법은 여전히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민족의 출현이나 본질을 설명하지 않은 채로 도출한 것이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민족의 존재를 사실상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민족 이론”과 관련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교훈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데올로기 이론에서 끌어내야지 이론적이지 않은 일부 언급들, 예컨대 게르만족에 관한 언급 따위에서 도출하려 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민족 운동에 대한 올바른 전략적 지침을 남겼지만, 민족의 본질과 민족의식 등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이론적 견해를 남기지 않았다.
6 그러나 비록 일부 참여자들, 특히 칼 카우츠키와 레닌은 민족이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설명하려 했지만, 그런 노력이 논의의 핵심이 된 적은 거의 없었고 보통은 자본주의가 국내 시장을 지배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국토 내의 주민들을 통일시키는 데서 언어가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서 그쳤다. 7
이해할 만하게도 다음 세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시대의 상황 변화에 따라 실천적 필요에 맞게 민족 운동과 민족적 요구에 대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태도 문제를 더 날카롭게 다듬는 데 주력했다. 이런 논의들은 1890년대 중반 무렵부터 시작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초기 네 대회(1919~22년)에서 “민족과 식민지 문제” 논쟁이 벌어질 때까지 계속됐다. 이 논의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주의적 전략 문제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 가운데 하나다.8 )
칼 렌너와 오토 바우어가 대표하는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 경향이 민족 형성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은 사실이다. 특히 바우어의 기념비적 저작인 《민족 문제와 사회민주주의》(1906)가 그랬다. 그러나 바우어가 정의한 민족 개념은 결코 유물론적인 것이 아니었다. 즉, 바우어는 “민족은 운명 공동체로 묶이고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는 인간들의 총합”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바우어가 민족의식의 성장에서 자본주의가 일정한 구실을 한다고 본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해야만 민족이 다른 민족들을 의식하고 민족 간 차이를 의식하게 돼 민족의식이 온전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만 그랬다. 바우어의 저작은 민족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유일한 마르크스주의적 시도로 환영받았지만, 그렇게 환영한 사람들은 대부분 바우어의 주장이 마르크스주의와 거리가 있어서 환영했던 것이다.(물론 오늘날 바우어를 칭찬하는 사람들의 일부는 바우어조차 “경제주의”와 “계급 환원론”으로 너무 기울었다고 비판하지만 말이다.9 민족의 출현이나 민족의식의 본질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는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레닌이 바우어와 정반대 견해라며 제시한 것은 대안적 설명이 아니라 대안적 정의였고, 불행히도 오늘날 많은 좌파가 그 정의를 여전히 광범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1913년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레닌의 지도를 받으며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민족은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안정적 공동체로서, 공통의 언어·영토·경제생활·문화로 표현되는 심리 구조를 바탕으로 형성된다.” 10 늘 그랬듯이, 스탈린은 이런 요소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빠지면 민족이 아니라고도 주장했다. 이런 류의 정의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그런 정의가 마치 과학적 객관성이 있는 듯한 그릇된 인상을 준다는 것인데, 그런 사이비 과학적 객관성은 스탈린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민족들(예컨대, 미국)을 하나씩 떠올려 보기만 해도 곧바로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비록 스탈린은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한 문화적 자치 요구를 무시했지만, 그의 정의는 실제로는 바우어의 민족 개념과 상당히 비슷해서 “공동체”와 “심리 구조”라는 포괄적 범주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1
레닌은 바우어의 이론이 “기본적으로 심리적”인 반면 카우츠키와 자신의 저작은 “역사적·경제적” 설명이라고 주장했지만,12 그러나 그들도 비록 민족주의는 18세기 말에야 출현한 운동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민족 — 적어도 스페인·영국·프랑스 같은 “오래된 역사적 민족들” — 자체는 18세기 훨씬 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봤다.
1920년대 말에 스탈린주의가 승리하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민족에 관한 논의의 주요 원천은 비마르크스주의 정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에게로 옮겨갔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은 국제관계학의 창시자들이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민족-국가”라는 대구對句에서 “국가”에 있었다.앤더슨의 등장 — 정치적·이론적 배경
13 한 민족주의 연구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960년대 이래 민족주의 연구에서 대두한 “근대론” 경향은 민족의 역사를 훨씬 더 짧게 보기 시작했다. 근대론자들 사이에도 강조점은 다양했다. 최초의 “근대론 연구서” 축에 드는 케두리Kedurie의 《민족주의》(1960)는 계몽주의를 민족 형성의 주요 계기로 봤고, 겔너Gellner의 논문 ‘민족주의’(1964)는 산업혁명을 그 계기로 봤다. 그러나 “근대론”이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모든 “근대론자”들은 민족과 민족주의를 모두 비교적 근래에 나타난, “근대의” 산물이라고 봤다.근대론자들은 근대의 민족의식이 아브로스 선언[1320년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로마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잉글랜드의 억압에 맞서 스코틀랜드 독립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한 사건 — M21] 당시 스코틀랜드에 존재했던 민족의식, 또는 셰익스피어나 엘리자베스 1세, 크롬웰 당시 잉글랜드에 존재했던 민족의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봤다. … 근대성이 확립되면서 비로소 민족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모든 계급에게 두루 영향을 미치거나 가장 중요한 정체성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근대론이 학계를 지배한 것은 대략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사이에 네언Nairn의 《영국의 몰락》(1977, 1981), 브륄리Breuilly의 《민족주의와 국가》(1982, 1992), 겔너의 《민족과 민족주의》(1983), 홉스봄과 레인저Ranger가 편집한 《만들어진 전통》(1983), 홉스봄의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1990), 나이절 해리스Nigel Harris의 《민족 해방》(1990) 같은 중요한 저작들이 출판됐다. 이들 가운데 네언·홉스봄·해리스는 집필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했고, 앤더슨도 마찬가지였다.
앤더슨은 동아시아 정치 전문가였다. 앤더슨은 1962년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제2차세계대전 때 일본이 점령해서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를 대체했던 시기의 인도네시아 상황을 연구했다. 이때의 연구를 바탕으로 그는 《혁명기의 자바》(1972)를 출판했다. 앤더슨은 그 책에서 비록 민족주의 문제를 비중있게 다루지는 않았지만, 책의 내용은 그의 향후 관심사에 비춰 볼 때 흥미로운 것이었다. 앤더슨은 1928년에 열린 인도네시아 국민당 산하 청년단체 2차 대회에서 “청년들이 하나의 국민, 즉 인도네시아 국민, 하나의 국가, 즉 인도네시아 국가, 하나의 언어, 즉 인도네시아어에 헌신하겠다는 역사적 맹세를 채택”한 과정을 설명한다. 각지에서 모여든 청년들이 “집단적으로 시작한 새 생활을 이해할 수 있는” 틀은 오로지 민족주의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민족주의는 “정치 지향적인 청년들”, 다시 말해 “그 시대 다른 사람들과는 굉장히 동떨어진” 청년들에게만 한정돼 있었다.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나서야 민족주의는 자바의 작은 도시들과 농촌에까지 널리 퍼지게 됐는데, 그때 자바의 소도시와 농촌 주민들이 겪은 새로운 경험에 일관된 의미를 부여한 것이 민족주의였기 때문이다.
《혁명기의 자바》에서 스치듯 다룬 많은 주제들 — 처음에 엘리트 집단의 집단적 경험에서 생겨난 민족주의가 성장하는 과정, 일련의 협소한 정치적 요구가 아니라 총체적 세계관으로 민족주의를 이해하기 — 은 모두 더 발전된 형태로 《상상의 공동체》에 다시 나타났다.
《혁명기의 자바》가 출판된 직후 앤더슨은 수하르토 정권의 심기를 건드린 죄로 인도네시아에서 추방당했다. 앤더슨은 나중에 “오히려 추방 덕분에 내 연구는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고 연구 주제도 일상의 정치에서 의식 변화 — 현재의 인도네시아를 상상할 수 있게 해 준 — 까지 다양해졌다”고 썼다. 그러나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를 쓴 데는 다른 요인들도 있었다.
15 그러나 사회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주의 이행기에서조차 민족국가와 민족주의가 존속할 것이라는 생각은 이전까지의 모든 마르크스주의 견해와 대립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마르크스주의의 민족주의 이론에 어떤 함의가 있었는가?
1978년과 1979년에 베트남·캄보디아·중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지만, “교전국은 모두 그럴싸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유혈 참사를 정당화하려는 형식적 노력 이상은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그런 국가들의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래 성공한 혁명은 모두 민족이라는 말로 자신을 규정했다. … 그렇게 규정함으로써, 과거 혁명들에서 물려받은 지리적·사회적 공간에 확고히 자리잡을 수 있었다.”16 앤더슨은 네언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면서도 네언의 비판을 마르크스주의뿐 아니라 다른 모든 정치 전통들(앤더슨이 보기에 민족주의를 적절하게 설명할 이론이 없기는 마찬가지인)로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상상의 공동체》를 썼다고 주장한다. 17 그렇다면 앤더슨의 대안은 무엇이었는가?
민족주의를 적절하게 설명할 이론이 마르크스주의에 없다는 인식은 이미 그 때도 있었다. 1976년에 톰 네언은 민족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대실패를 대표한다”고 주장했다.민족주의에 대한 앤더슨의 주장
18 앤더슨은 민족주의를 규정하기 위해, 민족이 왜 상상돼야 하는 것인지를 먼저 지적한다. “민족은 상상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민족의 구성원이라도 같은 민족 사람들 대다수를 결코 알지 못하고 그들을 만나거나 심지어 그들에 관해 들어 본 적도 없지만, 저마다 마음속에는 공동체 이미지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앤더슨은 [민족을 — M21] “상상한다” 해서 [민족이 — M21] “허구적”이라는 뜻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원시적인 채집·수렵 집단 상태를 벗어난 공동체는 모두 비슷한 상상 행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그 공동체가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라 공동체를 상상하는 방식에 따라 구분된다.” 앤더슨은 민족을 상상한다는 것에는 세 측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경계다. 어느 민족도 전 세계를 포괄할 수 없고 각 민족의 경계는 다른 민족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주권이다. 왜냐하면 민족은 한때 왕권 신수설로 뒷받침되던 정통성이 국가의 정통성으로 대체됐을 때부터 생겼기 때문이다. 셋째는 공동체다. 민족의 수평적 연대는 수직적인 적대, 심지어 계급 사이의 적대보다 강력하기 때문이다. 19
앤더슨은 민족주의는 “급격하게 변한 의식 형태”라며 논의를 시작한다.20 그러나 이런 역사적 동력들의 기원은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앤더슨은 중세 말에 핵심적 세계관 세 가지가 무너졌다고 주장한다. 첫째, 기독교와 이슬람의 경전들을 필사筆寫하는 데 쓰는 언어(각각 라틴어와 고전 아랍어) 같은 특정 언어로 표현된 신앙 체계가 진리에 이르는 특권적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상이다. 둘째, 사회는 원래 보통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별종이자 신의 섭리에 따라 통치하는 군주를 정점으로 조직되기 마련이라는 믿음이다. 셋째, 모종의 창조 신화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 통념들은 당연한 이치로서 인간의 삶에 확고하게 뿌리내린 채 일상의 운명(무엇보다 죽음·상실·예속)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 숙명에서 구원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제공했다.
앤더슨은 민족주의가 “18세기 말 서로 관련이 없는 역사적 동력들이 복잡하게 ‘교차’해서 나온 자연스런 증류물”로 창조됐다고 본다. 그리고 민족주의가 일단 창조되자, 잠재적 새 민족은 동일한 경험을 반복하지 않아도 됐다. 민족주의는 “아주 다른 사회적 환경에 다양하게 의식적으로 이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관념은 경제적 변화, 사회적·과학적 발견, 교통·통신의 급격한 발달로 뒤집어졌다. 앤더슨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당시 우애·권력·시간을 서로 연결시키는 새로운 방식을 찾으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22 인쇄 자본주의 덕분에, 라틴어를 할 줄 아는 극소수를 뛰어넘는 광범한 시장이 창출될 수 있었다. 인쇄 언어들은 “상층에서 쓰는 라틴어와 기층에서 쓰는 방언 사이에 단일한 교환·의사소통 영역을 만들어 냈다.” 인쇄 언어는 “언어에 새롭게 영속성을 부여해서 결국 그 언어의 전통이 오래됐다는 이미지 형성에 일조했는데, 이런 이미지야말로 주관적 민족 개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인쇄 언어는 인쇄를 통한 의사소통에서 주도적 구실을 한 특정 방언들을 “지배적 언어”로 만들었다. 이런 과정은 “자본주의, 기술, 인간의 언어 다양성이 폭발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나타난 대체로 무의식적인 과정이었다.” 23
앤더슨이 보기에 그 해결책은 “인쇄 자본주의”의 출현이었다.앤더슨은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민족의식이 어떻게 확산되고 민족주의로 변모했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민족주의에 크게 세 종류가 있었고 이들은 연속적으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크리오요” 민족주의로, 아메리카 식민지들에서 일어난 반란과 관련 있다.(“크리오요”는 유럽계 라틴아메리카인을 뜻하는 스페인어다.) 둘째는 “언어” 민족주의로, 서유럽에서 나타났다. 셋째는 “관제” 민족주의로, 중동부 유럽과 아시아·아프리카의 반反식민주의 운동에서 나타났다.
아마 앤더슨의 가장 대담한 주장은 민족주의의 “선구”가 첫째 종류의 민족주의, 다시 말해 아메리카 식민지 국가들에서 나타난 크리오요 민족주의라는 주장일 것이다. 그는 아메리카에서 민족주의가 발생한 원인을 스페인이 식민지 지배를 강화한 것,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이 확산된 것, 라틴아메리카 대륙이 지리적 경계가 정해진 각각의 행정 단위로 나뉘어 있었던 것에서 찾는다.
이 점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신생 공화국들은 20세기 중엽 아프리카와 일부 아시아의 신생 국가들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 처음에 [라틴 — M21]아메리카의 행정 단위들은 어느 정도 임의적·우연적으로 형성됐고, 특정한 군사적 정복에 따른 지리적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지리적·정치적·경제적 요인들의 영향을 받으며 더 확고한 실체로 발전했다.앤더슨은 두 가지 필연적인 내부 발전 과정이 영토 거주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민족의식으로 바꿨다고 한다. 식민지 정착민의 후예들은 유럽 태생들과 달리 식민지 영토에 일체감을 느꼈다. 그리고 인쇄 자본주의의 특정 형태가 나타났다. 신문은 “똑같은 지면에 이 결혼 소식과 저 상선의 소식, 이 상품 가격과 저 주교의 소식을 함께 실었다.” 그래서 “이 상선, 결혼, 주교, 가격 정보와 관련된 특정 구독자 집단에게 매우 자연스럽게, 심지어 비정치적이라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어 주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적 요소들이 개입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초기에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데 토착 구어가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일단 민족주의가 적용 가능한 모델이 되자 신생 민족은 굳이 토착어를 민족의 기초로 삼지 않아도 됐다. 민족주의는 애초에 대중과 관련을 맺으며 나타났지만, 성공적인 대중 운동을 경험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국가 관료 집단이 “반동적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보수적인” 목적을 위해 민족주의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앤더슨은 1945년 이후 새로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한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 운동은 민족주의의 이런 측면들을 모두 이용했다고 주장한다. “그 때문에 신생 국가들의 ‘건국’ 정책들에서는 흔히 대중의 진심에서 우러난 민족주의 열정도 볼 수 있지만 대중매체, 교육제도, 행정규제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심지어 마키아벨리적으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주입되는 것도 볼 수 있다.”
간략한 설명으로 앤더슨의 미묘하고 복잡하고 정교한 주장을 모두 보여 줄 수는 없다. 앤더슨은 민족주의가 자연적이고 영속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성된 역사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이전의 누구보다 분명히 보여 줬다. 《상상의 공동체》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앤더슨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드는 사례들이 매우 다양하고 참신하다는 점인데, 그 중 많은 것이 버마·타이·인도네시아처럼 그동안 민족주의 논의에서 잘 다루지 않은 지역들의 사례다. 그러나 《상상의 공동체》가 매우 탁월한 책이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회주의 사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도용과 원초론자들의 득세
《상상의 공동체》는 출판되자마자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아마 앤더슨이 기대했던 반향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앤더슨의 저작이 유용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책에서 실제로 더 큰 도움을 얻은 것은 정체성 문제에 집착하는 신생 이데올로기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이었던 것이다.
29 물론 앤더슨은 민족이 담론일 뿐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지만, 그를 비판한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견해를 앤더슨 탓으로 돌리기 일쑤였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의 학자인 머리 피톡은 다음과 같이 썼다. “앤더슨이 말한 ‘상상의 공동체’라는 개념의 약점은 [민족을 — M21] 제멋대로 상상할 수 있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소비자가 일상 용품 고르듯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는 점이다.” 30
앤더슨을 가장 통찰력 있게 비판한 사람 축에 드는 앤서니 스미스는 앤더슨의 연구 자체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은 아니지만 “결국 민족은 철저하게 파헤쳐서 해체시켜야 할 담론이라는 생각이 가장 강력한 영향력으로 남았다”고 지적한다.31 피톡도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민족주의라는 관념을 중세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옹호하려 한다.
스미스는 민족을 ‘항상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의 주요 옹호자 가운데 한 명인데 이런 ‘항상론’은 민족의 기원을 훨씬 옛적의 종족적 정체성에서 찾는다. 스미스는 앤더슨의 주장에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앤더슨은] 이미지나 상징과 무관한 민족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민족의 사회학적 실체를 훼손하고, 많은 사람들이 민족에 느끼는 충성심과 소속감을 약화시키고, 민족의 제도적·정치적·지리적 구성을 흐릴 뿐 아니라 민족 존재의 기반이 되고 그 민족에게 확고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강력하고 대중적인 문화적 자원과 전통도 모호하게 만든다.”32 1990년대에는 그린필드의 《민족주의》(1992), 료베라의 《근대성이라는 신》(1994), 허친슨의 《근대 민족주의》(1994), 헤이스팅스의 《민족의 건설》(1997) 같은 책들이 출판됐고, 에마뉘엘 토드의 두 저작 《경제적 환상》(1998)과 《세계의 다양성》(1999)은 원초론적 본질주의로 완전히 후퇴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톰 네언은 토드의 핵심 주장을 “민족주의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이다”라고 요약하며 이를 지지했다. 33
이런 비판들은 민족이 “근대론자”들의 주장보다 훨씬 더 오래됐다는 주장이 다시 유행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피톡이 지적하듯이, “프랑스 대혁명 전에는 민족과 민족주의가 나타날 수 없었다는 생각은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다.”민족 역사의 재창조
포스트모더니즘적 민족주의론과 원초론적 민족주의론 둘 다에 지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때 《상상의 공동체》가 여전히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러려면 그 책의 주장들을 더 일관된 유물론적 관점으로 통합시켜야 한다.
《상상의 공동체》는 민족주의의 특정 측면들에 대한 일련의 인상주의적 연구들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그런 측면들 사이의 연관성을 찾기가 어렵다. 이 책의 약점은 인쇄 자본주의 개념을 제외하면 민족주의의 여러 측면들을 통합하는 핵심적인 동역학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민족주의의 보편성을 볼 때 민족주의는 인쇄 자본주의보다 더 광범하고 더 근본적인 조건들에서 처음 생겨났고 또 재생산됐음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민족주의론에 크게 기여했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특정 민족들을 두고 이러저러하게 진술한 내용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그들이 의식 형태와 사회적 존재의 일반적 관계에서 출발해서, 특정 의식 형태가 출현하는 역사적 조건에 대해 더 일반적인 진술을 했는데, 이것이 민족의식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물질적 삶을 생산하는 방식이 사회적·정치적·지적 삶의 일반적 과정을 좌우한다. 사람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35 ‘민족’은 이런 역사적 범주 가운데 하나이고 오직 자본주의 사회와 관련해서만 유의미하다. “근대론”을 비판하는 저자들은 이런 특수성을 깨닫지 못한 채 부르주아 “정상 과학”의 꽁무니만 좇고 있을 뿐이다.
특정 의식 형태는 오로지 특정 상황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게오르크 루카치는 이 주장을 더욱 발전시켜서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적·일시적 성격”을 모호하게 하는 사고방식은 “조야하고 개념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비판했다. “[그런 사고방식에서는 ― M21] 자본주의 사회를 규정하는 요인들이 모든 사회구성체에 적용되는 영구불변의 범주가 된다.”36 그러나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예를 들어, 에이드리언 헤이스팅스의 저작을 보자. 그는 영국에서 ‘민족’이 적어도 16세기 이래 “말과 관념”으로 존재했고 십중팔구 14세기 이래 존재했다고 주장한다.개념을 이해하고 단어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 그 개념이 언어와 사회 생활에서 하는 구실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 서로 다른 사회 생활 형태에서는 개념들도 서로 다른 구실을 한다.
다시 말해, 이를테면 14세기에 사람들이 ‘민족’이라는 용어를 썼더라도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로 썼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엄밀한 마르크스주의 잣대로 보면 당시 사람들이 현재와 같은 의미로 민족이라는 말을 썼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이것은 단순히 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이 표현하는 의식 형태의 문제다. 그러므로 민족의식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설명할 때는 반드시 이런 의식 형태, 이런 표현 방식이 나타날 수 있게 해 준 특정한 “사회 생활 형태”를 설명해야 한다.
자본주의와 민족주의의 기원
38 그러나 민족의식과 자본주의의 연관은 이런 설명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사실, 민족의식이 지배적 의식 형태가 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는데,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적 생산양식이 되기까지 수백 년이 걸린 것과 마찬가지였고 그 결과이기도 했다. 39 민족의식의 발전에는 네 가지 주요 요소가 결합돼 있었는데, 그 각각은 정도는 다르지만 자본주의가 봉건 사회에 가한 충격을 보여 준다.
실존적 회의와 인쇄 기술 발전이 우연히 일치해 민족주의가 발생했다는 앤더슨의 주장은 보편적 현상인 민족주의에 대한 설명으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더 일반적인 자본주의 발전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그러나 오토 바우어와 마찬가지로, 앤더슨도 자본주의 발전과 민족주의 사이의 관계를 순전히 우연적인 것으로 본다.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게 한 것은 생산과 생산관계 시스템(자본주의), 의사소통 기술(인쇄술), 인간의 언어 다양성이라는 숙명 사이의 반쯤 우연적이지만 폭발적인 상호작용이었다.”첫째 요소는, 외부 경계가 있고 내부적으로 상호 연결된 경제 활동 지역들이 형성된 것이었다. 유럽은 15세기 말엽에 봉건제의 첫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봉건적 생산양식이 국가 체제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국가 체제는 점차 자본주의적 요소들에 적응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 발전은 생산 영역보다는 주로 유통 영역에서 이뤄졌는데, 그 이유는 상인 자본이 국내 시장을 확장하기 위해 분산된 농업 공동체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또 도시들과도 연결시키기 시작하면서 교역망이 이제 막 생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요소와 직결된 둘째 요소는, 경제적 수준에서 서로 연결되고 있던 공동체들이 공용어를 채택한 것이었다. 시장 거래를 위한 의사소통의 필요 때문에 지역 방언들의 차이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공통의 언어나 적어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만들어졌다. 이런 식으로 언어는 앞서 말한 경제적 네트워크의 경계를 정하기 시작했는데, 그 경계가 중세 왕국의 경계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경제적·언어적 통합은 독일제국 같은 지역보다는 영국처럼 작고 중앙집권제가 발달한 왕국에서 훨씬 더 쉬웠다. 실제로, 국경선은 순전히 한 방언과 다른 방언의 경계에 따라 흔히 결정됐다. 물론 앤더슨이 인쇄술 발명과 그에 따른 대량 출판의 가능성이 표준어 확립에 큰 도움이 됐다고 주장한 것은 옳았다. 대량 출판은 그 출판물에 담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독자층이 미리 존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대량 출판 자체가 그런 독자층의 규모를 늘리는 효과를 냈다. 왜냐하면 인쇄업자들이 모든 지역 방언으로 책을 찍어낼 수는 없었고, 오로지 표준어로 떠오른 방언이나 다른 방언과의 경쟁에서 표준어로 떠오를 수 있는 방언들로만 출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언어의 표준화는 기존의 경제 영역 형성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처음에 자신의 교역망을 통해 언어 통용권의 경계를 정했던 상인들이 점차 그 통용권과 일체감을 가지게 되면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경쟁자들을 축출한 것이다. 토착어가 발전하면서 국제어 구실을 하던 라틴어는 쇠퇴했는데, 이 과정은 16세기 중엽에 사실상 완결됐고 토착어를 쓰는 나라들이 서로 외교적 교류를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통역사라는 직업이 새롭게 각광받았다.
셋째 요소는 신흥 절대왕정 국가들의 성격이었다. 절대왕정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경제적 과도기의 봉건 국가 형태였다. 그러나 절대왕정 국가가 저절로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봉건제 초기의 신분제 왕정이 [후기에 — M21] 더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대체된 것은 봉건 지배계급이 사회적·경제적 압력에 정치적으로 대응한 결과였다. 그런 압력은 그 정도와 내용은 달랐지만 유럽 전역에서 나타났는데, 봉건제가 겪은 첫 위기와 봉건제 내부에서 새로 나타난 자본주의 생산의 경제적 비중 증대가 촉발한 것이었다. 고전적인 군사적 봉건제 시기의 특징이었던 지방 분권은 국가 권력의 중앙집권화에 자리를 내주었다. 특히 상비군 도입과 중앙 정부의 정기적 징세 — 부분적으로는 상비군에게 급료를 지급하기 위한 조처였던 — 가 두드러졌다.
징세는 관료제와 관련 있었고, 징세를 위해 국토 전역에서 통용될 수 있는 모종의 토착어가 관료들에게 필요했다. 그래서 민족의식에서 “언어적” 요소가 강화됐다. 또, 징세는 두 가지 의도치 않은 효과를 내기도 했다. 정기적 징세와 중상주의 정책 채택은 상인 자본가들의 활동을 통해 자생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경제 통합을 강화했다. 그리고 새로운 체제의 특징인 군사적 경쟁 때문에 국가는 재정 지원과 행정 전문가를 제공할 소수 부르주아지의 능동적 지지를 이끌어내야 했다. 이런 혁신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족의 탄생에서 절대왕정이 한 구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절대왕정의 구실은 산파였지 산모가 아니었다. 이 문제는 “근대 국가”가 민족의 탄생에 미친 영향을 거론할 때 흔히 무시되지만, 그러면 절대왕정 국가와 그 후계자인 진정한 근대 부르주아 국가의 차이가 흐려지게 된다. 민족은 절대왕정 국가가 확립되면서 출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타도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넷째이자 마지막 요소는 세계적 종교의 지역적 변형태들이다. 절대왕정의 이데올로기도 왕국과 관련 있는 수호 성인 같은 종교적 인물들의 업적을 강조했지만, 종교가 통치 왕조의 이미지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신성화해서 고양시키는 것 이상의 구실을 하게 된 것은 종교개혁 이후였다. 1517년 이후 개신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된 지역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의 국제적 제도들에 자의식적으로 대항한 신앙 공동체들이 허용됐는데, 이것이 민족의식 형성에 한몫했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성서를 토착어로 번역·출판하는 것을 통해 이뤄졌지만, 이런 성서 보급은 또 시장 교역과 국가 행정이 실행되는 언어적 틀이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개신교는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구실을 했지만, 자본주의 발전이 허용하는 틀 내에서만 그럴 수 있었다.
자연히 그런 과정은 영국에서 가장 멀리 나아갔지만, 영국에서조차 개신교가 왕실과의 유대에서 벗어난 것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은 1603년 이후였다. 가톨릭 교회가 같은 구실을 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민족주의와 부르주아 혁명
40 놀랍게도, 앤더슨은 여기서 프랑스를 거의 처음으로 거론한다. “모델”을 확립하면서 특히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무시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여기서 문제는 프랑스와 미국조차 최초의 민족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네덜란드와 영국이 민족 형성에서 더 앞섰다고 볼 만한 근거가 충분하다. 민족들이 오직 18세기 말의 어느 시기에야 출현했다는 주장은 자본주의가 같은 시기에야 출현했다는 주장만큼이나 불합리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앤더슨이 점진적 변화들에 주의를 기울인 것은 옳지만, 그는 다른 것을 놓치고 있다. 앤더슨은 자본주의 발전의 중간 중간에 찾아온 혁명적 전환점의 폭발적 효과와, 그런 전환점이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민족적 정체성으로 통합하는 데 미친 영향을 간과하고 있다. 앤더슨의 설명은, 말하자면, 과정만 있고 사건은 없었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앤더슨이 민족주의 형성의 주요 계기로 “크리오요” 민족주의에 주목하는 것은 문제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앤더슨은 크리오요 민족주의가 더 앞선 모델을 본뜬 것이라고 설명해서 스스로 모순에 빠진다. “사실, 더 빠르지는 않더라도 1810년대쯤에는 독립적인 민족 국가 ‘모델’을 모방하는 것이 가능했다.” 앤더슨은 이런 모델이 “프랑스와 미국적 요소들의 복잡한 혼합물”이었다고 설명한다.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민족의식을 가진 집단들이 이 새로운 의식 형태를 정치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하자 다른 곳의(처음에는 북미·아일랜드·프랑스, 그 다음에는 세계 곳곳의) 집단들도 민족의 지위를 염원했고, 심지어 사회 발전 수준이 낮아서 아직은 민족의식이 나타나지 않은 곳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부르주아 혁명으로 ‘민족’이라는 용어는 마침내 “국민people”이라는 공동체를 뜻하는 것으로 변모했다. 비록 모든 부르주아 혁명 운동 내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 가운데 하나가 “국민”을 정확히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절대왕정에 대항해 투쟁하면서 왕가를 내쫓거나 파멸시키려면 “국민” 가운데 적어도 상당한 소수파를 동원해야 했다. 이런 동원은 지배자가 외국인이든(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에 맞서 싸운 네덜란드처럼) 아니면 자국인이든(스튜어트 왕조에 맞서 싸운 영국처럼) 흔히 매우 다양한 저항 형태들을 포괄할 수 있는 모종의 정체성이 제시될 때만 가능했다. 민족주의는 그런 정체성을 부여했다.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조건들이 없었다면 민족의식은 꽃필 수 없었고, 심지어 뿌리내릴 수도 없었다. 그리고 비록 부르주아지만의 민족의식이라도 민족의식이 유럽 전역에서 공고해지려면 민족주의로의 전환이 이뤄지고 그것이 민족국가로 구현된 사례가 하나 이상은 있어야 했다. 민족 형성의 구체적 사례들이 존재할 때만 서로 다른 집단들은 자신들이 의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나중에 그들이 독자적으로 민족주의를 발전시키는 데까지 나아갔든 못 나아갔든 말이다.
자본주의적 민족국가는 영국혁명이 종결된 1688년과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된 1789년 사이의 1백 년이 끝나갈 무렵에야 국제적 국가 체계의 상시적 특징이 될 수 있었다. 그 후로는, 민족 형성의 원래 요소들이 존재하든 안 하든 새로운 민족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비록 민족의식이 공고해지려면 당연히 어느 시점에서든 경제적 인프라와 공용어가 도입돼야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주민에 대한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지배력은 그 나라 부르주아 혁명이 전체 부르주아 혁명 사이클의 어느 시점에서 일어났느냐에 달려 있었다. 1688년 이전에 부르주아 혁명이 성공적으로 완수된 두 나라(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민족의식의 존재는 혁명 후의 국가가 연방적이거나 연합적인 구조가 아니라 중앙집권적 기구를 발전시킨 정도에 정비례했다. 이런 면에서 영국의 민족주의는 선행한 네덜란드 민족주의보다 훨씬 앞서 있었을 뿐 아니라 후발 주자인 미국보다도 앞서 있었다. 미국도 1865년까지는 네덜란드와 비슷하게 반쯤 자율적인 주州들의 연합이었다.
1848년 이후 영국이나 프랑스 모델을 따라 국가를 창설하려 한 지배계급은 모두 민족주의를 채택해야만 했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자본가였기 때문이 아니라 프로이센의 융커든 일본의 사무라이든 이탈리아의 왕당파든 심지어 스탈린주의 관료든 모두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우세한 산업사회를 건설하는 데 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민족을 형성했던 부르주아지나 쁘띠부르주아지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주민 대중의 다수였고 점점 더 다수가 되고 있던 이탈리아의 사례는 지배계급이 민족의식을 엘리트 수준에서 대중에게까지 확산해야 했던 상황을 잘 보여 준다. 이런 어려움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심지어 1860년대에도 프랑스어를 쓰지 않는 사람이 주민의 4분의 1이나 됐다.
민족주의와 노동계급
41 민족의식은 새로운 민족국가의 지배자들보다 하층에 있는 사회계급들에게서도 나타나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계획적인 세뇌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훨씬 더 많은 부분은 민족국가 형태로 형성된 사회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새로운 생활 방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노동계급 속에서는 개혁주의적 계급의식이 민족의식과 민족주의가 발전하는 토양이 됐다. 개혁주의적 계급의식은 원래 자본주의로의 이행 과정에서 생겨난 사회적 조건, 더 정확히는 자본주의 산업화 과정에서 생겨난 사회적 조건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이런 일은 처음에는 영국에서 일어났고 이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다.
계급이야말로 《상상의 공동체》에 빠져 있는 중요한 주제인데, 어떠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도 계급 관계에서 민족주의가 하는 구실을 간과한 채 민족주의 문제를 다룰 수 없다.일단 산업화의 최초 충격이 사라지자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덧없이 지나가는 일탈 현상이 아니라 단명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새로운 사회 형태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됐다. 체제가 영속적인 것처럼 보이자 새로운 피착취 계급은 아무리 싫더라도 타협하고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일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공장 체제가 요구하는 혹심한 노동으로 소모된 에너지를 회복해야 하는 “보이지 않는 강제”에 의해 시야가 제한돼 있었다. 이런 상황이 저항을 촉발했지만, 새로운 체제가 체제 방어를 위한 환상들을 만들어 내자 이런 저항과 투쟁에서 일반적인 혁명적 계급의식이 나타날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초기 자본주의에서 착취는 경제적 규율을 동반했는데, 이런 규율은 해고되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착취의 실상, 다시 말해 노동자가 받는 임금이 그가 생산한 것보다 더 적다는 사실은 은폐됐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흔히 자기 사용자를 증오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체제 전체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노동자들이 저항한 결과로 노동조합이 성장했지만, 이 새로운 단체의 목표는 — 체제 전복(항상 먼 미래의 과제였다)에 관한 무슨 미사여구를 늘어놓더라도 — 체제 내에서 노동계급의 상태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른 모순된 의식 형태는 노동자들이 지금 받고 있는 특정한 임금 수준은 거부하면서도 임금 체제 자체는 받아들이는 데서 가장 분명히 드러나지만, 사회 생활의 다른 모든 측면에서도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런 개혁주의 의식과 민족의식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민족의식은 노동자들의 충성을 얻으려고 혁명적 계급의식과 직접 경쟁하지는 않지만, 개혁주의적 계급의식의 핵심 요소로서 혁명적 계급의식과 경쟁한다. 사실, 노동자들이 개혁주의자인 한은 그만큼 민족주의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개별 민족의 자본가 계급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들은 결단코 민족주의자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들은 자신이 우연히 속하게 된 국가의 ‘민족적’ 이익을 지지하지 않고, 세계 어디서 살든지 간에 자신이 속하게 된 계급의 이익을 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주의를 분리주의 운동이 준동하는 시기나 아니면 파시즘과 제국주의가 발호하는 시기에만 우연히 “나타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체제는 일상적으로 체제가 존속하는 데 꼭 필요한 조건으로서 민족주의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대중적 민족주의는 처음에 산업화의 산물이었지만, 그것이 단순히 산업 자본주의의 지배계급에게 쓸모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맞물려서 (지배계급의 처지에서) 민족주의가 필요한 사회를 만들어 냈을 뿐 아니라 (피지배계급의 처지에서) 민족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의식 변화도 가져왔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공장에서 일하고 도시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구조적 지위, 새로운 경험 방식, 새로운 심리적 욕구를 발전시켰다. 혁명적 계급의식이 없는 상황에서 개혁주의적 계급의식과 함께 민족주의도 소외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모종의 집단적 소속감, 자본주의 사회에서 입는 이런저런 상처에 대한 심리적 보상을 제공한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단을 민족주의가 이미 제공하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데서 이데올로기적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자본주의적 민족국가가 확립되면, 국가 기구를 통제하는 자들은 영토 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민족주의의 영향력을 항상 강화하려 한다. 국가는 군 복무할 병사들을 징집하고, 시민들이 세금을 납부하게 하고, 노동자들이 자신과 똑같이 착취받는 외국의 노동자들보다 국내에서 자신들을 착취하는 자들과 공통점이 더 많다고 생각하게 해야 한다. 이 때문에 국가에 확실하게 충성하도록 만드는 것이 지상 과제가 됐고 민족은 그 수단이 됐다. 18세기 이래 영국 노동자들은 흔히 금리 인상이나 임금·복지 삭감을 받아들이거나, 제국주의 전쟁에 참가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그 명분은 결코 영국 자본주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항상 영국 민족을 위해서, “국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 호소를 하는 것은 국가만이 아니다. 일국적 맥락 속에서는 노동계급 단체들도 스스로 개혁주의적 계급의식을 강화한다. 주된 이유는 매국노라고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해서 정치 담론의 틀 안에서 민족주의에 도전하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기존 민족국가의 한계 내에서 정책에 영향을 미치거나 정책을 결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주의도 흔히 개혁주의적 세계관의 모순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맺음말
42 수하르토 정권이 타도된 직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한 강연에서 앤더슨은 그런 견해를 더 분명히 밝혔다. 그는 청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앞서 말했듯이, 민족주의가 자본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오늘날 민족주의는 제한된 특정 상황에서만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 억압에 맞선 운동의 민족주의가 가장 분명한 사례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민족주의자가 될 수 없고, 민족주의 자체를 지지할 수도 없다. 비록 특정한 민족적 요구나 특정 민족 운동을 지지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앤더슨의 결론은 이와 다르다. 그는 《상상의 공동체》에서 다음과 같이 넌지시 말한다. “진보적이고 코즈모폴리턴한 지식인들(특히 유럽의?)이 흔히 민족주의는 타인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거의 병이나 다름없고 인종차별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시대에, 민족은 사랑을, 그것도 흔히 엄청나게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북돋운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하다.”자국 정부나 국가가 범죄를 저지르는데도, 그것도 자국 시민들에게 그런 범죄를 일삼는데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 베트남 전쟁 기간에 대중적 저항의 상당 부분은 미국 시민들의 이 선량한 수치심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인도차이나에서 무수히 많은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3백만 명을 죽인 폭력에 “우리 나라 정부”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 따라서 그들이 저항에 나선 것은 단순히 보편적 인권의 옹호자로서만이 아니라 미국인 공통의 비전을 사랑하는 미국인들로서 그랬던 것입니다.
진정한 민족주의자와 가짜 민족주의자를 나누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앤더슨이 쓴 이 중요한 책이, 여러모로 탁월한 이 책이 결국 실패작이 되고 만 이유는 그가 책의 주제와 관련된 이데올로기적 전제들의 함정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민족의식과 민족국가가 과거 역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형태들임을 보여 줬다. 그러나 민족의식과 민족국가를 출현시킨 힘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미래 역사에서는 그것들이 사라질 수도 있음을 그는 깨닫지 못한다.
주
-
출처: Davidson, Neil 2008, ‘Reimagined Communities’, International Socialism 117(Winter 2008).
↩
- Llobera 1994, p103. ↩
-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이 창안되기 전의 포스트모더니즘. Anderson 2006, p227. ↩
- Marx & Engels 1974, p389. ↩
- Engels 1974, pp381-385. ↩
- 이런 민족들이 본질적으로 “비역사적”이라는 엥겔스의 주장은 범슬라브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비판에 불필요한 헤겔주의적 잔재였다. 비역사성이라는 개념의 문제점과 나중에 엥겔스가 주로 아일랜드 상황을 분석하면서 그 개념을 폐기한 것에 대해서는 Davidson 2001, pp290-292, pp297-302를 보라. ↩
- Haupt & Lowy & Weill 1974; Riddell 1984, pp348-383; Riddell 1991a, pp211-290; Riddell 1991b, appendix 2, pp846-885; Riddell 1993, pp137-171; Adler 1983, pp328-331, pp409-419. ↩
- Kautsky 1976 (Luxemburg), pp126-129; Lenin 1964, p396. ↩
- Nemni 1991, p145, pp181-184. ↩
- Lenin 1964, p308. ↩
- Stalin 1953, p307. ↩
- Ree 1994, p228. ↩
- 고전적 저작으로는 Hayes 1931; Kohn 1944; Cobban 1945; Carr 1945; Deutsch 1953이 있다. ↩
- Kedurie 1960; Gellner 1964. ↩
- Spencer & Wollman 2002, p33. ↩
- Anderson 2006, pp1-2. 1991년 판 서문의 xi쪽도 보시오. 네언도 The Break-Up of Britain 2판에서 똑같은 전쟁을 다루고 있다. Nairn 1981, p371. ↩
- Nairn 1977, p329. ↩
- Anderson 2006, pp208-209. ↩
- Anderson 2006, pxiv. ↩
- Anderson 2006, pp6-7. ↩
- Anderson 2006, p4. ↩
- Anderson 2006, p36. Ozkirilh 2000, p153. 같은 몇몇 비판자들의 주장과 달리 앤더슨은 민족주의가 출현하려면 종교의 중요성이 감소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 ↩
- Anderson 2006, p4. ↩
- Anderson 2006, pp44-45. ↩
- Anderson 2006, p52. ↩
- Anderson 2006, p62. ↩
- Anderson 2006, p133, p135. ↩
- Anderson 2006, p110. ↩
- Anderson 2006, pp113-114. ↩
- Smith 1998, p142. ↩
- Pittock 1999, p140. ↩
- Smith 1998, p137. ↩
- Pittock 1999, pp102-103. ↩
- Nairn 2002, p156. 여기에서 네언은 Todd 1998을 뒤따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신이 이미 몇 년 전부터 바꾸기 시작한 견해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할 뿐이다. 이 점은 Davidson 1999, pp110-111을 보라. ↩
- Marx 1975, p425. ↩
- Lukacs 1971, p9. ↩
- Hastings 1997, p19. ↩
- MacIntyre 1967, p2, p8. ↩
- Anderson 2006, pp42-43. ↩
- 더 자세한 내용은 Harman 1992를 보라. ↩
- Anderson 2006, p81, 각주 34. ↩
- 나는 여기서 노동계급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민족주의와 부르주아지의 관계는 Davidson 2008을 보라. ↩
- Anderson 2006, p141. ↩
- Anderson 1999, p17. 마지막 문장을 보면 불길하게도 리처드 로티의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로티는 미국 백인 자유주의자들이 억압받는 흑인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는 흑인들이 “같은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같은 미국인이기 때문이며, 미국인이 희망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하는 것이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훨씬 설득력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Rorty 1989, p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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