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이론과 실천
《복지국가혁명》, 《대한민국, 복지국가를 부탁해》, 《역동적 복지국가의 논리와 전략》
3 그 결과, “경제 위기와 그 대책의 결과로 기존의 경제적·정치적 합의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많은 일이 이제 가능해졌다.” 4 즉, 수십 년 동안 득세하던 지배 이데올로기가 큰 타격을 입은 현재 상황에서는 대안을 둘러싼 논의가 활성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경제 위기와 그 여파는 보편적 복지라는 의제가 부각된 결정적 계기였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최근작 《무너지는 환상》에서 “세계경제 위기와 그에 따른 정책 대응을 보면, 적어도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 레짐은 실패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5 스웨덴의 의료 서비스는 보험 체계를 도입한 한국과 달리 의료보장 체계다. 즉, 개인들이 내는 보험료가 아니라 조세로 재정을 충당한다. 2005년 현재 한국에서 건강보험 지역가입자의 23퍼센트가 보험료를 체납해 6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조세로 재원을 마련하는 방식이 더 우수하다. 스웨덴에서도 치료를 받을 때는 개인 부담금을 납부하지만 개인이 1년간 부담하는 금액은 진료비와 약제비를 모두 합쳐 2천7백 크로나(약 36만 원)를 넘지 않도록 돼 있다. 초과액은 정부가 부담한다. 또, 아이를 출산했을 때 스웨덴 부모는 1년 6개월가량 출산휴가를 받는다. 휴가 기간에는 정부가 기존 월급의 80퍼센트를 부모에게 지급한다. 7
현재 한국 진보진영에서는 북유럽식 복지국가 모델(특히 스웨덴)이 각광받고 있다.8 북유럽 나라들은 ‘과도한 복지 지출은 비효율을 낳아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우파들의 논리를 실증적으로 반박하는 사례다. 한국 진보진영은 북유럽 나라들을 보면서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양자택일의 딜레마에서 벗어나 성장과 분배를 모두 이룰 수 있다는 ‘영감’을 얻은 듯하다. 즉, 분배를 통해 경제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방안을 발견한 것이다. 다만 논자들마다 강조점은 다르다. 재벌 기업 중심의 산업구조와 복지의 결합을 강조하기도 하고, 연대임금정책을 강조하기도 하고, 조합주의적 의사결정 구조를 강조하기도 한다.
북유럽 나라들의 경제 실적이 괜찮다는 것도 한국 진보진영이 북유럽 모델을 주목하는 중요한 이유다. “북유럽 복지국가들은 경제성장의 성과도 좋을 뿐만 아니라, 최근의 세계적 금융위기에서도 비교적 견고하게 잘 버티는 안정적인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9 2007년 7월 창립한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현재 연구자 1백여 명이 속한 정책 연구 단체로 “역동적 복지국가”를 내세운다. 최근에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주요 인물들은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를 주도적으로 발의하기도 했다. 10
한국 진보진영에서 스웨덴식 모델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곳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다.11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복지를 중심으로 한 연대’ 논의가 무성한 가운데 그 대표적 논자 가운데 하나인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이론과 실천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수준 높은 복지 체계의 수립을 지지하면서, 진정한 “복지 혁명”을 달성하는 투쟁을 건설하려면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서는 변혁적 관점이 필요한 이유도 살펴보려 한다.
이 글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발간한 세 권의 책, 《복지국가혁명》, 《대한민국, 복지국가를 부탁해》, 《역동적 복지국가의 논리와 전략》을 중심으로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이론과 실천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주요 인물들의 정치적 궤적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주장을 살펴보기 전에 이 단체에 속한 주요 인물(특히 창립을 주도한)의 정치적 궤적을 먼저 살펴보겠다. 이것은 이 단체가 현재 주장하고 실천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2 김대중 정부의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입법과 의약분업 시행에 관여했고,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부터 3년 동안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연구원장을 지냈다. 13
● 이상이 공동대표: 제주대 의대 교수. 현재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출범에 참여했고, 1998년부터 2년 남짓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성재 정책위원: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총선에 출마해 국회의원을 지냈다. 새정치국민회의의 후신인 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을 맡았고,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지냈다. 2007년 노무현 정부가 국민연금을 개악하고 한미FTA를 추진하는 것에 반발했다. ● 이태수 공동대표: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 교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정부 자문위원을 지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 참가하기 전에는 좋은정책포럼 창립에 기여했는데, 좋은정책포럼은 김형기 공동대표의 입장을 보면, ‘제3의 길’을 수용한다고 할 수 있다.
● 이상구 홍보위원장: 새천년민주당 보건복지전문위원을 지냈고,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의 보건의료정책 생산에 깊이 관여했다. 나중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실무위원을 거쳐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을 역임했다.
15 전형적인 사회투자국가론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투자국가론자인 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초창기부터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 참여했다.
● 윤종훈 정책위원: 회계사. 2006년 《한국형 신성장동력 사회투자모형과 그 실현을 위한 조세재정개혁과제》라는 보고서를 주도적으로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시민경제사회연구소가 발간했는데, 이 연구소는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국민참여수석을 역임한 박주현 변호사가 설립했다. 이 보고서는 “요소 투입형 경제성장이 한계에 달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노동자들의 인적자본 강화와 기술혁신 투자 강화를 통한 ‘사람 중심의 성장전략’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이처럼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던 인물들이 주도해서 만들었는데, 노무현 정부 말기 들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비판하며 분열해 나온 인물들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각각 ‘생산적 복지’, ‘참여 복지’라는 이름으로 ‘제3의 길’ 식 복지를 시행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한 것에 비판적이며 보편적 복지를 주장한다. 이런 ‘좌선회’에서 나온 대안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역동적 복지국가론’이다. 여기에 진보정당이나 노동운동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사람들과 진보적 지식인 일부가 동참하면서 현재 모습을 갖췄다. 현재, 케인스주의자로 대안연대회의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한 조원희 국민대 경제학과 교수, 민주노동당에서 탈당해 진보신당으로 갔다가 사민주의연대에 몸담고 있는 홍기표 레디앙 기획위원, 역시 민주노동당에서 탈당해 진보신당으로 간 최병천 씨, 민주노동당 대변인을 역임했고 탈당해 진보신당으로 옮겨 간 박용진 씨, 발전국가론자인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 사회연대전략론자인 오건호 전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등이 합류해 정책위원으로 포진해 있다.
역동적 복지국가론
다음 말에서 보듯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특히 사회 양극화 심화에 주목한다.
2007년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절망을 대표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현상은 ‘양극화’입니다. 국민 개개인의 사회적 기여에 대한 보답의 결과가 시간이 갈수록 불평등해지면서 사회경제적 소수 기득 집단과 나머지 대다수 집단 사이의 소득, 자산의 격차는 물론이고 교육, 의료 등 성공을 위한 기회의 격차가 심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18 점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문제의식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양극화 심화의 원인으로 “민주정부 10년 동안 진행된 신자유주의”를 19 지목하면서 시장 만능주의를 비판한다.
이처럼 양극화 심화로 “노동자와 서민의 생활이 갈수록 어렵게 되고, 중산층까지도 경제사회생활의 불안에 만성적으로 노출되는 소위 ‘범 불안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일상적 삶의 근본이 되는 주거와 교육, 노후, 의료 등의 문제를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 즉 ‘시장’에서의 구매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바로 이 사회가 직면한 위기의 실체를 보여 주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21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이런 잔여주의 선별적 성격이 박정희 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한국 복지 체제의 특징이었다고 본다. 물론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정부의 “온정적” 성격 덕분에 “사회복지의 확충과 제도화가 나타”나기도 했다. 22 그러나 그 본질은 “신자유주의 양극화 성장 체제의 부작용 또는 부산물을 사회정책과 복지의 공여를 통해 사후적으로 치유하는 ‘잔여주의’”였으므로 그 성과가 제한적이었다. 23
여기에 “잔여주의 선별적 복지 체제”가 결합되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잔여주의 선별적 복지 체제는 “노동능력이 없는 극히 빈곤한 계층을 소득 및 자산 조사를 통해 선별하여 이들에게만 최저생계를 보장해 주는 방식이다.”사회 양극화 심화와 잔여주의 선별적 복지 체제로 말미암아 한국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졌는데,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그 중에서도 다섯 가지에 주목하면서 “민생의 5대 불안”이라고 일컫는다. 일자리 불안, 보육 및 교육 불안, 주거 불안, 노후 불안, 건강 불안이 그것이다.
이런 “민생의 5대 불안”을 해결할 방안으로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제시하는 것이 보편적 복지와 적극적 복지다. 보편적 복지란,
우리 사회의 가장 가난한 일부 국민만을 복지의 대상으로 삼는 영미식의 선별적 복지가 아니라 중산층을 포함하는 국민 모두가 복지의 주체, 즉 수혜자이자 부담자가 되는 국가복지 체계를 말한다. 이러한 복지체계는 국민 개개인에게 자신의 처지나 조건과 무관하게 인간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한 물적 조건을 제공해 주며,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게 된다. 더불어 패자부활의 기회를 제도적으로 제공함으로써 개인적 삶의 안정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활력과 통합력이 동시에 확보되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25 복지가 경쟁의 결과를 보완해 주는 구실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구실까지 한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것이다. 적극적 복지의 효과는 다음과 같다.
적극적 복지는 “국민 개개인에게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고, 사회구성원의 잠재능력을 극대화[해서] …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의 확대·강화를 가져오”는 것이다.[적극적 복지의] 사회적 효과로는, 적극적 복지가 대단히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기존의 ‘복지는 소비적’라는 신자유주의 지배 담론의 부정적 함의를 털어버리고, 보편주의 복지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을 높여 주는 소위 ‘사회투자전략’으로 기능하는 측면이 있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노동시장의 유연안정화, 이를 통한 사회경제적 계층 이동성의 증대도 적극적 복지의 범주에 포함된다.
27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이를 대체할 대안으로 ‘공정한 경제’와 ‘혁신적 경제’를 주장한다. 용어 자체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이 주장이 바탕에 깔고 있는 ‘일반법칙’과 ‘특수법칙’의 순환이라는 조원희의 분석틀을 알아야 한다. 조금 길기는 하지만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이므로 모두 인용한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더 나아가 경제 운영 원리의 변화도 꾀한다. 왜냐하면 보편적 복지와 적극적 복지를 하려면 재원이 많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경제가 안정적으로 발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자본주의에서는 경제의 안정적 성장이 불가능하다. “현재의 자본주의가 과잉금융화의 신자유주의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일반법칙〉은 마르크스가 잘 정식화한 것으로 가치/잉여가치 생산을 중심으로 한 축적 체제의 작동 양식을 말한다. 자본 간 힘이 비슷하고 따라서 경쟁 과정에서 생산과정을 통해 이윤을 획득하는 것이 중심적인 방법이 되면 자본은 이윤을 증대시키는 방법으로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인 노동력의 착취를 강화하고 투자를 극대화하여 생산과정을 혁신함으로써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데 주력한다. 자본 간 경쟁은 이해대립 때문이지만 경쟁은 또한 투자를 강제하여 서로에 대한 수요를 자극하고 생산성 향상을 가져와 결국은 부가가치를 증대시킨다. … 따라서 일반법칙은 상호상승의 법칙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문명화 작용과 진보성도 여기에서 나온다. …
그런데 일정 기간 동안 일반법칙의 작동은 자본주의 국가 간 또는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국가 간 불균등 성장을 필연적으로 야기하고 그 결과 일반법칙은 가치/잉여가치의 이전을 지배적인 이윤 획득 수단으로 하는 〈특수법칙〉으로 전화된다. 기본 논리는 간단하다. 자본주의는 오로지 생산과 이윤의 극대화만을 위해 존재하는 (따라서 다른 면에서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거대한 기계이며 효과적인 성장 체제와 그렇지 못한 체제(비자본주의나 저발전 자본주의)와의 격차는 필연적이다. 일정한 임계점을 통과하면 강자는 1원을 사용하여 약자를 지배할 때 나오는 이윤이 같은 금액을 생산적으로 투자하여 생산에서 얻는 이윤보다 큰 상황에 직면한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가치 생산이 아니라 가치이전/가치수탈을 중심으로 한 축적 체제가 발생한다. 특수법칙은 강자의 지배라는 적나라한 힘의 논리, 문명화에 대립되는 야만의 경향을 강화한다. 19세기 후반 약 50년(1차 황금기)은 일반법칙이 지배했고 그 후 약 50년, 이른바 제국주의 시기에는 특수법칙이 지배했다. 그리고 2차 대전 후 수십 년간 이른바 2차 황금 성장기의 성장과 쇠퇴기 동안에는 다시 일반법칙이 지배했다. 1980년 이후 자본주의는 금융자본의 논리가 지배적인 힘이 되면서 다시금 특수법칙이 지배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29 즉, 자본주의 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공정한 경제의 요체다. 공정한 경제를 달성하려면,
즉,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는 ‘특수법칙’이 작동하는 시기로 새로운 가치가 생산되지 않고 그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하거나 강자(금융자본)가 약자(생산자본)를 수탈하기만 한다. 이것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신자유주의 규정이다. 새로운 가치가 생산되지 않으니 당연히 보편적 복지와 적극적 복지를 유지할 수 있는 재원을 충분히 마련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 작동 중인 가치의 이전 또는 수탈 중심의 축적 체제인 ‘특수법칙’이 종지부를 찍고 ‘일반법칙’이 작동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기업 지배구조의 투명화, 공정한 대기업-중소기업 관계의 구축, 산업자본에 효과적으로 조응하는 생산적·장기적 금융자본 체계, 금융의 공공성과 중소기업 지원 체계, 협력적 노사관계와 노동권의 신장, 연대적·누진적 조세제도 확립 등이 요구된다. … 이러한 경제체제의 공정성은 … 민주정부의 강력한 개입, 즉 시장과 경제제도에 대한 사회적·민주적 개입과 유능한 정부의 책임 있는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31 더 나아가 한국 경제를 지식기반경제로 전환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단순 제조업 중심에서 미래형 지식산업으로 산업구조 자체를 혁신하고 변환시키려는 노력을 병행하여야 한다.” 32 지식기반경제에서는 인적 자원의 질이 중요하므로 교육정책이 매우 중요해진다. 그래서 “인적자원 개발을 중심으로 하는 역동적 복지국가의 건설에서 교육정책은 생산력 발전의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33
혁신적 경제의 핵심은 생산 양상의 변화에 발맞춰 한국 경제도 그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지식기반경제’로 전환됐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지식기반경제에서는 다품종 소량생산을 특징으로 하므로 규모의 경제보다는 창의성, 다양성, 유연성이 중요시되고, 혁신적 중소기업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이에 더해서 한국 경제를 지식기반경제로 전환하려면 산업구조를 바꿔야 하니 어느 정도의 구조조정이 필요하고 따라서 해고가 불가피하다.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구하는 동안 생활을 유지하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보편적 복지와 적극적 복지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 적극적 복지, 공정한 경제, 혁신적 경제라는 네 가지 원리가 서로 맞물려 작동하는 국가가 역동적 복지국가다. 간단히 말하면, ‘역동적 복지국가’는 수준 높은 국가복지 체계를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이루는 국가를 뜻한다.
경제성장 논리를 받아들인다는 한계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한국 진보진영이 역동적 복지국가를 대안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역동적 복지국가는 한국 진보진영의 대안 전략이 되기에는 한계가 많다. 첫째 한계는 역동적 복지국가론이 자본주의 경제성장 논리를 적극 수용한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이와 관련된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주장을 살펴보자.
장기적으로 볼 때 세계화와 개방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혁신 원리와 경쟁 원리는 장기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원리를 작동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도 복지국가 혁명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불안한 시스템밖에 남지 않습니다. 심장이 수축해서 만들어 내는 혈압은 적정할 경우 구석구석 혈액을 보내는 좋은 기능을 합니다. 하지만 혈압이 너무 높으면 혈관이 터져버리고 맙니다. 경쟁 압력과 시장 압력은 너무 심할 경우 사회를 폭발적 상황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경쟁 압력과 함께 이를 견뎌낼 수 있도록 견실한 사회복지를 제공하여야 합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슬로건을 진보진영이 가져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보개혁 역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와 같은 역동적 복지국가 모델을 통해서요.
37 앤서니 기든스의 주장과 흡사하다. 복지를 먼저 폭넓게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기본 관점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좌파는 이제 시장에 대하여, 부를 창출함에 있어서 기업의 역할에 대하여, 그리고 사적 자본이 사회적 투자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경제성장 논리를 수용하다 보니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사회지출과 복지 의존성 문제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복지국가소사어티는 투자 성격의 사회지출과 보험[소비] 성격의 사회지출을 구분하면서 보험 성격의 지출을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험적 성격의 사회지출이 과도하게 높고 수혜 조건이 까다롭지 않을 때에는 복지 의존성을 유발하여 경제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 보험적 성격의 사회지출에 있어서는 긍적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조화시킬 수 있도록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이다.
사회지출을 투자 성격의 지출과 ‘소비’ 성격의 지출로 나누면서 후자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은 ‘사회투자국가론’의 대표 논리였다. 사회투자국가론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복지 관련 핵심 철학이기도 했다. 게다가 “복지 의존성” 논리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전통적 복지국가를 비난할 때 사용하는 단골 메뉴라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며 보편적 복지를 역설力說하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이 논리를 수용하는 것은 역설逆說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복지 의존성 논리는 결함투성이다. 스웨덴 모델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또 다른 논자인 고세훈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의존성’이라는 지적은 초점을 벗어난 문제 제기다. 예컨대, 우연히 돈 많은 가정에서 태어난 청년 실업자가 부모의 도움을 받는 것은 정당하고, 기댈 가족이 없어서 국가의 도움을 받으면 의존적이므로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부자 남편을 만난 자식 있는 여자와 국가 복지에 의존해야 하는 편모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엄마와 아이를 굶길 수는 없다.
복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봐야 한다. 대표적으로 장애인이 그들인데, 장애의 종류에 따라서는 비장애인과 별 다를 바 없이 노동하며 ‘자활’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이럴 경우조차 국가의 보조가 필요하다) 그럴 수 없는 장애인도 많다. 국가는 무제한으로 조건 없이 이들의 생활을 보장해 줘야 한다. 복지국가는 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복지 의존성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이런 장애인에게 주는 복지는 ‘낭비적’이므로 줄여야 한다는 주장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거나 심지어 그런 결론을 공유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역동적 복지국가론의 ‘보편적 복지’도 재평가해 볼 수 있다. 보편주의는 누구나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관점이다. 보편주의 시각에서 보면 국가와 사회는 사람들에게 복지를 제공할 의무가 있고 사람들은 복지를 누릴 권리가 있다. 따라서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도 없고, 자신의 가난을 ‘증명’하면서 굴욕을 겪지 않아도 된다. 이런 점에서 보편주의는 장점이 큰 개념이다.
그런데 역동적 복지국가론은 보편주의를 너무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나머지 ‘선별적’ 복지의 필요성을 간과하기도 한다. 선별적 복지는 특정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들에게만 복지 혜택을 주는 것이다. 특히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는 복지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장애인 복지가 대표적 사례다. 따라서 진정한 복지국가라면 보편적 복지를 근간으로 해서 선별적 복지도 확충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혁명》에 있던 장애인 복지 계획이 《논리와 전략》에서 빠진 것은 우려스러운 변화인 듯하다.
40 특히 요즘처럼 경제 위기 시기에는 지배계급은 강력한 투쟁에 직면하지 않으면 스스로 복지를 확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2008~09년 경제 위기에서 각국 정부들이 “구제금융과 경기부양책으로 자국의 은행·기업 들을 살리는 데 결정적 구실”을 41 한 데서 봤듯이 재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자들만의 사회주의”를 위해 들어가는 돈을 노동자·민중의 복지 확대로 이전시키려면, 경제성장을 약속하며 저들을 설득하려 할 것이 아니라 이윤 체제를 위협하며 단호하게 투쟁해야 한다.
자본주의 경제성장 논리를 수용한다는 점에서 비롯하는 또 다른 문제점도 있다. 보편적 복지를 이루려면 반드시 노동계급의 대규모 투쟁이 필요한데 경제성장 논리는 이윤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는 노동운동을 군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역동적 복지국가 모델이 자본주의 경제성장에도 좋다고, 복지가 소비적이지만은 않다고 엘리트들을 설득해서 이를 성취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물론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복지는 자본주의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하다. 복지가 자본주의 생산의 핵심 요소인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복지가 있어야 노동자들이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생산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 그러나 크리스 하먼이 지적했듯이, “자본가의 관점에서 ‘노동력 회복’인 것이 노동자에게는 휴식과 여가를 즐기고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임금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임금을 둘러싸고도 계급투쟁이 벌어진다.”지식기반경제론의 한계
42 유럽 최대의 경제 대국 독일, 최근 들어 더욱 주목받는 중국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한계는 역동적 복지국가론이 지식기반경제론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지식기반경제론은 오늘날 자본주의 생산이 물질적 재화 생산에서 비물질적 서비스 생산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함축하는데, 이것은 크게 과장된 주장이다. 캘리니코스가 지적했듯이 “최근 가장 잘 팔리는 상품 중에는 예컨대 휴대전화와 MP3플레이어 같은 새로운 물질적 재화들이 있”고 “성공적인 경제들은 여전히 제조업 상품을 생산하고 수출해서 번창하는 경제인 경우가 흔하”다.그러나 지식기반경제론의 옳고 그름 여부를 떠나 이 글에서 더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지식기반경제론을 바탕으로 만든 정책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이냐다. 지식기반경제에서는 고급 지식을 갖춘 인력을 양성하는 게 중요하므로 지식기반경제론을 바탕으로 한 정책의 골자는 교육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교육이 지식기반경제에 기여하도록 대학 체계를 다음과 같이 재편하자고 주장한다.
현재의 학문 중심 단일 대학 체계를 일반대학은 학문 중심 대학과 법학전문대학원, 의학전문대학원, 경영학전문대학원 등의 전문가 양성 대학으로 이원화하며, 다수의 일반대학들은 산업현장에서 요구되는 기술교육을 실시하는 교육 중심 대학으로 기능을 전환한다. …
이러한 기술교육 체계는 기업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필요로 하는 기술을 직원들에게 교육하고, 이들이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지속적으로 습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동시에 기업에게는 신기술 개발과 직원교육에 대한 부담을 적극적으로 덜어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전국 10개 이상의 광역 단위로 대학마다 매년 1조 원 이상의 연구개발 투자가 가능한 특성화, 전문화된 연구 중심 대학을 육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구상은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대학 재편 계획과 놀라우리만큼 닮았다.
2005년에 발표된 “특성화를 위한 대학 혁신 방안”을 보면, 전국 대학을 수도권과 지방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1) 2단계 두뇌한국21 사업을 담당하는 첨단 과학기술 핵심 인력 양성 및 연구 중심 대학, 2) 지방대학혁신역량강화 사업과 수도권 특성화 사업을 수행하는 중견 기술 인력 양성 기관, 3) 전문대 특성화 사업을 수행하는 실무 기술 인력 기관으로 나눈다. 21세기 지식기반 사회의 국가경쟁력 강화 방안을 목적으로 2000년에 발표된 ‘국립대학 발전계획’을 보면, 국립대학도 1) 연구 중심 대학, 2) 교육 중심 대학, 3) 특수 목적 대학, 4) 실무 교육 중심 대학으로 나눠 집중 육성하겠다고 한다.
45 경쟁력 향상에 핵심적인 기술은 ‘학문 중심 대학’이나 ‘연구 중심 대학’의 성과물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정 지원은 이런 대학들에 몰리기 마련이다. “2005년에 교육부는 서울대 등 수도권 8개 대학을 1그룹이라 칭하면서 “구조 개혁 선도 대학 지원 사업” 예산의 83.3퍼센트를 이들에게 몰아주기로 했다.” 46 지원을 받지 못하는 대학들에는 등록금 책정 자유를 줬다. 그 결과 학생들의 입시 경쟁은 더 격심해졌고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2004~09년 대학 등록금은 사립대는 평균 28.6퍼센트, 국공립대는 평균 44.5퍼센트 올랐다. 47
이런 식의 재편 과정에서 한국 대학들의 서열화는 더욱 공고해졌고 “대학 간 빈익빈 부익부가 더 심해졌다.”48 캘리니코스가 지적하듯이, 지식기반경제론을 바탕으로 한 대학 구조 개편은,
지식기반경제론에 바탕을 둔 대학 구조조정에서 우리보다 한발 앞선 영국에서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타났다. 대학 서열화가 더 고착화했고 대학 간, 교원 간, 학생 간 경쟁이 더 심해졌다. 학내 민주주의는 후퇴했다. 연구와 강의가 분리되면서 강의의 질은 낮아졌다. 소수의 ‘우수’ 연구자들이 받는 혜택은 커졌지만 대다수 교원들은 늘어난 강의를 떠맡아야 했고 비정규직 강사가 많아졌다. 학생들의 처지는 더 열악해졌다.꼭대기에는 “세계 최상급 대학”들이 있고, 비교적 많은 대학은 연구도 조금 하지만 주로 강의를 하고, 밑바닥에는 노동계급 가정의 가난한 학생들에게 기초적인 직업 교육을 하는 커뮤니티 칼리지 같은 대학들이 있는 구조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런 대학 서열화는 이미 학교 교육에 만연해 있는 계급 간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50 그러나 그 대안으로 내놓은 정책은 오히려 서열화를 공고히 하고, 서열 구조를 타파하려는 지향과 화해할 수 없는 긴장을 일으킨다는 한계가 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한국의 대학 진학률을 바라보는 관점을 보면 문제는 더 커진다.
사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도 대학 서열화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어서, “서열화된 대학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고 말한다.51 이는 “원하는 모든 이에게 질 높은 교육의 기회를”이라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지향을 52 무색하게 하는 듯하다. 고등교육의 현실이 문제투성이라고 해서 고등교육 확대의 의의를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이는 보편주의에 어긋나는 주장이기도 하거니와, 앞에서 말한 대학 개편 방안과 맞물리면서 고교 졸업생의 절반에게는 핵심 기술에 접근할 “기회”조차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현재 한국의 대학 진학률이 지나치게 높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경우에만 대학에 갈 수 있도록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을 단계적으로 50퍼센트 이하로 낮추는 등 OECD 국가 수준으로 정상화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경제를 지식기반경제로 전환하자는 주장과 관련해서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도 제시한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이를 ‘유연안정성’ 정책이라고도 부른다. 쉽게 말해서, 기업에게는 필요할 때 자유롭게 노동자를 해고할 권리를 주고(유연성),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에게는 생계와 재교육과 재취업을 보장하는(안정성) 정책이다. 이 정책은 얼핏 보면 기업과 노동자가 ‘윈-윈’하는 방안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안정성 개념은 지지해 마땅하고, 실업이 증가하는 경제 위기 시기에는 더욱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연성 개념과 결합하면서 문제를 낳는다. 정작 경기가 후퇴해 일자리의 절대 규모가 줄어들 때 유연안정성 정책은 무기력해지기 때문이다. 해고가 쉬우므로 실업자는 늘어나지만 경제가 위기이므로 일자리는 적다. 실업이 빨리 해소되지 않아 실업급여를 줄 기금이 부족해지고 실업자들은 저임금 일자리를 강요받게 된다는 문제가 생긴다.유연안정성 정책을 적극 도입한 곳은 덴마크인데, 사실 덴마크는 복지 확대가 아니라 복지 축소 목적으로 유연안정성 정책을 도입했다. 이 정책 도입 전에 덴마크는 실업수당을 무제한 지급했다. 그런데
덴마크 정부는 1994년 사실상 무제한이었던 실업급여의 수급 기간을 7년으로 단축하고 이어 1998년에는 5년, 2001년에는 4년으로 단축해 나갔다. 수급 자격도 엄격해졌다. 과거에는 직업훈련에 참여하거나 채용을 제의받은 경우도 고용 기간에 포함되었으나 이러한 소극적 구직 활동 기간은 고용 기간에서 제외되었고 수급 기간 중 반드시 적극적 구직 활동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 기간이 포함되었다. 적극적 구직 활동(활성화 프로그램 참가 등)을 하였다고 하여 수급 자격이 자동으로 연장되지도 않게 되었다.
55 유연안정성 정책은 전통적 복지국가들의 노동시장 ‘경직성’을 비판하면서 제기된 것으로 56 ‘제3의 길’ 정책의 일환이었고,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생산적 복지’와 ‘참여 복지’에 포함돼 있던 것이다.
이번 경제 위기 때 덴마크 정부는 수급 기간을 다시 2년으로 줄이려고 했다. 결국 “유연성은 강화되고 안정성은 축소된 것이다.”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역동적 복지국가론의 골간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제3의 길’ 정책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 있다. “신자유주의의 최선의 이데올로기적 외피”라고까지 비판받는 실패한 ‘제3의 길’ 논리로 보편적 복지를 이루기는 난망하다.
보편적 복지, 어떻게 이룰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말하는 북유럽 식 복지국가 모델, 또는 스웨덴 식 복지국가 모델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북유럽의 복지 체계는 1970년대 이후 여러 차례 찾아온 세계경제의 위기와 국내 계급투쟁 상황과 맞물리면서 계속 변해 왔기 때문이다. 스웨덴 전문가인 신정완은 1980년대를 기점으로 스웨덴 모델이 해체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 시기는 스웨덴 모델의 해체기라 할 수 있다. 1982년 말에 재집권한 사민당 정부는 경제 침체에 대한 처방으로 ‘제3의 길’ 정책을 추진했다. ‘제3의 길’이란 전통적 사민주의 정책과도 다르고 신자유주의와도 다른 새로운 정책 노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신자유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각인된 정책 노선이었다.
역동적 복지국가론이 지식기반경제론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말하는 스웨덴 식 복지국가란 1980년대 이후 “해체”되고 있는 스웨덴 모델을 말하는 듯하다. 지식기반경제론이 1970년대 말 세계경제 위기로 말미암아 전통적 복지국가들도 위기를 겪으면서 전후 호황과 같은 이른바 ‘요소 투입형’ 경제는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을 골자로 한다는 점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도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말한다.
우리가 추구하려는 신자유주의 양극화 성장 체제의 대안은 자본주의를 끝장내는 사회주의 체제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인류가 역사적으로 경험했던 제2차세계대전 이후 수정자본주의 시대의 ‘유럽 복지국가 30년’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한국처럼 열악한 조건에서 보편적 복지 체계 구축을 시작해야 하는 마당에 “해체”되고 있는 것을 대안으로 삼기보다는 스웨덴의 전성기 복지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 보편적 복지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해체”되고 있는 현재 스웨덴의 복지도 한국인들에게는 부러운 수준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스웨덴 복지가 여전히 괜찮은 수준인 이유는 전후에 장기 호황과 강력한 노동자 운동을 배경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 체계를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유럽 복지국가들이 지금 한국보다 경제 규모가 훨씬 더 작은 상황에서 높은 수준의 복지 체계를 구축했다는 점을 본다면 보편적 복지국가는 전혀 허황한 것이 아니다.
59 삼을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보편적 복지의 정당성이 설득력을 얻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쌓아 두고 있는 사내 유보금, 환경을 파괴할 뿐인 4대강 사업 예산, 부자 감세로 빠져 나간 막대한 돈, 경제 위기의 책임자인 기업주와 은행들을 살리는 데 쓴 돈 등을 보면 재원은 충분하다.
경제 위기 시기에도 보편적 복지 체계 구축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크루그먼이 지적했듯이 경제 위기를 오히려 “사회 안전망에 남아 있는 구멍들을 메울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로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국에서 보편적 복지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지배계급이 스스로 수준 높은 복지를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이 질문은 이런 정책을 어떻게 강제할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바로 여기서 가장 큰 약점을 드러낸다.
60 친노세력을 진보세력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더 큰 문제는 보편적 복지 구축과 배치되는 사회투자국가론을 내세우는 유시민 등 친노세력을 파트너로 삼게 되면 과연 “친 복지국가 노선”을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진보세력이 단결해 ‘통합당’을 건설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해 민주당을 “친親 복지국가 노선 쪽으로 견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진보세력에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같은 진보정당뿐 아니라 창조한국당과 국민참여당도 포함된다.61 정동영은 ‘담대한 진보’라는 이름으로 민주당 당대표 경선에 출마하면서 지난 8월 10일 ‘담대한 진보의 길을 찾다’라는 제목으로 토론회를 열었다. 여기에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이상구와 윤종훈이 참석해 발표했는데, 이상구의 발표 주제는 ‘담대한 진보를 위한 보편적 복지정책 방안’이었다. 62 물론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공식적으로는 민주당을 “친 복지국가 노선”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교두보로 민주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전략으로는 복지를 확대하는 것도 어려울 뿐더러 오히려 “친 복지국가 노선”의 힘만 약화시킬 것이다. 산수에서는 ‘1+1=2’이지만, 정치에서는 ‘1+1=0’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힘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한다면 말이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최근 더 나아가 민주당의 한 분파인 정동영과 손잡는 모습도 보인다.진보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에서 제대로 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민주당·열우당은 지배계급 내 비주류 분파로서 개혁적 언사를 사용했지만 개혁을 일관되게 추진하지 못하고 동요하다가 결국은 우파의 손을 들어주곤 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왼쪽 깜박이를 켜고 우회전 한다”고 비판했다. 그 10년간의 환멸이 지금의 MB 정부가 들어서게 된 배경이었다. 정말이지 우리가 또다시 이런 경험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2006년 중도좌파와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한 이탈리아 재건공산당의 경험도 이를 잘 보여 준다. 이탈리아 재건공산당은 우파인 베를루스코니의 당선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로 중도좌파와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중도좌파 연립정부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불안정한 일자리를 늘리고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동참하는 정책을 폈다. 이때 연립정부라는 틀 자체를 깨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재건공산당은 이런 정부 정책에 힘있게 반대하지 못했다. 그 다음 선거에서 재건공산당을 포함한 급진좌파들은 중도좌파와 따로 선거에 나왔으나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급진좌파들이 중도좌파 연립정부 안에서 저지른 일들에 대한 실망과 환멸 때문이었다. 결국 우파인 베를루스코니가 승리했다.
유럽에서, 특히 스웨덴에서 수준 높은 복지 체계가 구축된 배경을 보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사회민주당의 장기 집권을 요인으로 꼽는다. 그러나 스웨덴에서 사회민주당이 40년 동안 장기 집권하고 수준 높은 복지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체제를 뒤흔들 만큼 강력한 노동자 운동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1933년 세계적인 대공황 상황에서 당시 생산직 노동자들 중 가장 높은 임금을 받던 건설부문 노동자들이 열 달 동안 벌인 강력한 투쟁의 여파로, 2년 뒤인 1935년에 “공적연금 혜택의 범위를 급격히 확대하는” 연금 개혁이 시행됐다. 그 3년 뒤에는 스웨덴노총의 사회적 위상을 급격히 높인 살쮀바덴 협약이 체결됐고 이는 현대 스웨덴 노사관계 모델의 기초가 됐다. 당시 스웨덴은 노르웨이, 영국 등과 함께 노동쟁의 빈도가 가장 높은 나라였다. 1945년에 벌어진 스웨덴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파업 물결(노동손실일수가 한 해에 무려 1천만 일을 넘었는데 이는 1933년의 갑절이었다)은 정부가 제2차세계대전을 핑계로 실시한 임금 통제 정책을 무너뜨렸고, 이듬해에 “공적연금을 질적으로 한 단계 상승시킨” 기초연금이 도입됐다.정성진의 말처럼 “유럽에서 사회 협약과 복지국가, 특히 스웨덴 모델은 역사적으로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대중 저항이 전례 없이 분출한 결과였다. 스웨덴의 계급 세력 관계라는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스웨덴 모델을 수입하거나 벤치마킹하려는 시도는 모두 한낱 몽상일 뿐이다.”
현재 경제 상황에 따른 객관적 가능성과 노동자 투쟁이 어우러지면 보편적 복지는 현실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반자본주의적 대중 운동을 건설하는 것이 보편적 복지를 쟁취하는 데 유일하게 효과적이다.
주
- 《위클리 경향》 867호(2010년 3월 23일자). ↩
- 김하영 2008. ↩
- 캘리니코스 2010b, p26. ↩
- 캘리니코스 2010b, p34. ↩
- 교육 정책과 관련해서는 스웨덴보다 핀란드가 더 주목받는다. ↩
- <프레시안>(2005.7.5). ↩
- 박승희 외 2008, p69, 72-73.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 p56. ↩
- 신정완 2009, p114. ↩
-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의 주장과 실천을 둘러싼 논쟁은 다음 글들을 참고할 수 있다.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 2010a;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 2010b; 김다임 2010; 김종명 2010; 송홍석 2010; 오건호 2010a; 오건호 2010b; 우석균 2010b; 이은경 2010; 장호종 2010a; 장호종 2010b; 장호종 2010c; 홍헌호 2010. ↩
- 《혁명》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창립하면서 낸 책으로 어떤 문제의식에서 단체를 결성하게 됐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부탁해》는 몇 년 동안 웹사이트에서 발표한 성명서와 칼럼을 엮은 책으로 여러 현안 쟁점을 바라보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시각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논리와 전략》은 제목 그대로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핵심 주장을 잘 간추려 낸 책이다. ↩
- ‘진보에 길을 묻다 ④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서울신문>(2009.2.5). ↩
- ‘경향과의 만남: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이상이 제주대 교수’, <경향신문>(2010.3.29). ↩
- 신정완 2009, p110. ↩
- 신정완 2009, p113.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웹사이트. http://www.welfarestate.net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56.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b, p40.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b, p36.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21.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b, p38.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p30-31.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한 것에 반발해 결성된 측면은 있지만 두 정부의 복지 정책을 과도하게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경향도 있다. 이런 태도에 대한 비판으로는 장호종 2009b를 참조. 이런 태도에는 두 정부의 복지 제도 입안 과정에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리더들이 직간접으로 참여했던 경험이 영향을 미친 듯하다.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p32-33.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b, p58.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b, p58.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b, pp58-59.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b, p22. ↩
- 조원희 2009, pp252-253.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b, p22.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b, p59.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b, p60.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a, pp273-274.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b, p154.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27.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28.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p293-294. ↩
- 캘리니코스 2008, pp23-24에서 재인용.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b, p341. ↩
- 고세훈 2007, p239. ↩
- 장호종 2009b, p116에서 재인용 ↩
- 강동훈 2010. ↩
- 캘리니코스 2010a, p194.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b, pp183-185. ↩
- 정선영 2010, p29. ↩
- 정선영 2010, p29. ↩
- 정선영 2010, p29. ↩
- <파이낸셜 뉴스>(2010.2.17). ↩
- 캘리니코스 2010a. ↩
- 캘리니코스 2010a, p207.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217.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b, p182.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33. ↩
- 김문성 2010. ↩
- 한국경제연구원 2008, p116. ↩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3호(2009년 10월 6일자). ↩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09, p5. ↩
- 신정완 2010.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b, p22. ↩
- Krugman 2009.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a, pp25-26. ↩
- 《시사IN》 130호(2010년 3월 13일자). ↩
- 정동영 블로그. ↩
- 김하영 2009, p101. ↩
- 장호종 2009b, p179. ↩
- 정성진 2010, p191.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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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세훈 2007,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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