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진화하는 결혼》
결혼은 영원 불변이 아니다
‘미국 현대 가족위원회’에서 연구와 대중 교육을 담당하고 대학에서 역사와 가족학을 가르치는 스테파니 쿤츠는 《진화하는 결혼》에서 방대한 인류학적·역사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결혼의 역사와 오늘날의 ‘결혼의 위기’를 설명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흔히 남녀가 사랑을 바탕으로 결합해 남자는 생계를 책임지고 여자는 살림 — 경제적 생산과는 관계 없는 — 을 맡는 형태의 가족을 꾸리는 것이 옛날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결혼이라고 말한다. 쿤츠는 이런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며 이 책을 시작한다.
쿤츠는 “이른바 ‘전통적인’ 결혼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최근인 자본주의가 등장할 때부터 발달하기 시작해 ‘결혼의 황금기’라고 일컬어지는 1950년대에 절정에 이른 새로운 결혼 형태”라고 주장한다. “18세기 말까지 전 세계 대부분의 사회들은 결혼이 경제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에서 너무나 중요한 제도이기 때문에 당사자 두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결혼 당사자들이 사랑이라는 비이성적이고 덧없는 것을 기반으로 결정을 내리려 한다면 정말 문제였다.”(스테파니 쿤츠, 《진화하는 결혼》, 20쪽. 이하 쪽수만 표기)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결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한다면 누구와 할 것인지에 관해서 거의 선택권이 없었으며, 자식을 낳을 것인지 말 것인지에 관해서는 아예 선택권이 없다시피 했다.”(32)
쿤츠는 결혼의 의미와 규범도 시대마다, 사회마다 달랐다고 말한다. 쿤츠는 예를 아주 풍부하게 들어 과거 시대의 다양한 결혼 형태와 그에 따른 규범을 오늘날의 결혼상으로 투사하려는 사람들을 꼬집는다.
고대 중국에서 여자는 자매들을 예비용 아내로서 시댁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티베트, 카슈미르, 네팔에서는 여자가 한 집안의 형제들과 결혼할 수 있으며, 이 형제들은 모두 그녀와 성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 책에는 이 외에도 알래스카 북부의 에스키모인들의 공동 결혼 관계, 베네수엘라 바리 족 여성들이 임신 기간에 여러 남성들과 관계를 맺고 그 남성들은 모두 보조 아버지가 돼 여자가 낳은 아이를 함께 부양하는 얘기 등 오늘날의 결혼 규범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이 보면 소스라치게 놀랄 예들이 많다.
이렇듯 “결혼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항상 경제적, 사회적인 면에서 결혼이 수행하는 기능에 따라 달라졌으며, 결혼의 기능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는 것이 이 책에서 쿤츠가 말하려는 핵심 취지다.
결혼의 발명
쿤츠는, 결혼이 여자를 보호하고자 고안됐다는 흔해 빠진 이론, 결혼이 여자를 억압하고자 고안됐다는(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한) 이론 모두를 풍부한 반대 증거를 제시하며 반박한다.
쿤츠는, 결혼이 십중팔구 성적인 동반자 관계, 자녀 양육,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일 등을 조직하는 비공식적 수단으로서 생겨났으리라고 본다. 특히 “육친이나 지역적 끈을 넘어서 협력과 유대의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결혼이 생겨났다”는 점을 강조한다. “원시 사회에서 결혼은 일차적으로 자기 집단의 경계를 넘어서서 협력적인 관계를 넓히고 사람과 자원을 순환시키는 수단이었다. 사람들이 새로운 집단과 혼사를 맺으면, 이방인이 친척이 되고 적이 동맹으로 변했다.”(88)
쿤츠는 원시 사회를 결코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남녀 관계와 사람들의 관계가 매우 평등했으며 결혼 생활에도 억압적 요소가 없었다고 말한다. “원래 결혼이라는 제도에는 여자와 아이들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해 주거나 현대의 많은 부부들이 꿈꾸는 공평하고 사랑이 넘치는 관계를 만들어 주는 요소가 없었다. 하지만 예를 들어 노예제도처럼 한 집단이 반드시 다른 집단에게 예속되게 만드는 요인도 없었다.”(88)
또한 쿤츠는 성별 분업이 상당히 일찍부터 발달한 것은 사실이지만, 매우 탄력적이었으며 협동에 바탕을 둔, 그야말로 서로 생존하는 데 필수적인 분업이었지 결코 어느 한쪽이 우월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수렵·채집 집단과 평등주의적인 원시 농경사회에서는 결혼 생활이 불안정해지더라도 오늘날과는 달리 여자와 아이들이 빈곤해지지 않았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은 집단의 노동에 동참했으며 공평한 몫을 나눠 받을 권리가 있었다.”(96)
사유재산권
그런데 인류가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하고 사유재산권이 등장하면서 결혼 자체를 비롯해 결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관계가 엄청나게 바뀌었다. 쿤츠는 이것을 첫 번째 결혼 혁명이라고 이름 붙였다. “친족 집단들이 땅과 자원에 대해 영구적인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물건과 권력을 축적하는 집안들이 생겨났다. 일이 이렇게 되자 부유한 집안들은 가난한 집안들과 자원을 나누고, 공동으로 노동하고, 동맹을 맺는 데 흥미를 잃어버렸다. 사람을 교환하는 결혼은 서로 은혜를 주고받으며 유대감을 다지는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방법이라기보다 자원에 대한 소유권을 더욱 강화하는 수단으로 점차 변해 갔다.”(88)
지배적인 친족 집단들은 부와 권력을 쌓아 가면서 더 제한된 사람들하고만 혼인을 하게 됐다. 심지어는 재산과 친족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고자 족외혼을 버리고 족내혼 ― 이집트, 하와이, 페루의 잉카제국 같은 여러 고대 왕국의 귀족과 통치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결혼이 놀라울 만큼 흔했고, 신성한 것으로 간주됐다 ― 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혼이 지위와 재산을 물려주는 최고의 수단이 되면서 남녀 모두 행동에 더 큰 제약을 받게 됐다. 남자들도 여자들처럼 부모가 선택한 여자와의 결혼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여자들은 ‘부정한’ 혈통의 아이를 낳아 가문에 ‘이질적인 이해관계’를 들여올 수 있으므로 성적인 면에서 더 엄격히 통제받았으며, 간통하거나 혼전성교를 하면 심하게 처벌받았다. 고대 국가들은 법과 도덕적 통념을 통해 남자에게 아내가 “타인의 씨를 너의 밭에 뿌리지 않도록” 주의 깊게 감시하라고 훈계했다. 합법적인 아이와 사생아의 지위는 모든 고대국가에서 점점 더 엄격하게 구별됐다. 승인받지 못한 결합에서 태어난 아이는 땅·지위·시민권 등을 물려받지 못했으므로, 대다수는 사실상 노예가 되거나 굶주림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91)
기원전 12~11세기 아시리아에서는 여성의 혼전 순결을 중시했고, 간통한 기혼 여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여성의 몸은 아버지와 남편의 재산으로 간주됐다. 아시리아의 법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남편은 아내에게 채찍질을 하거나, 머리카락을 뽑거나, 구타하거나, 귀를 자를 수 있다. 그것은 죄가 아니다.” 구약성서에는 처녀성을 지키지 못한 신부를 돌로 쳐 죽일 수 있다고 돼 있다.
쿤츠는 “고대 세계에서 아내들의 예속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쟁기의 발명”이었다고 지적한다. “쟁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농사에서 여성의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든 것이다. 보통의 여자들보다 힘이 센 사람만이 쟁기를 다룰 수 있으므로, 여자들은 괭이로 밭을 맬 때와는 달리 쟁기질을 하며 아이를 키울 수는 없다. 남편들은 결혼할 때 신부값을 지불하는 대신 지참금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딸들의 가치는 점점 낮아져 때로는 여아 살해가 자행되기도 했다. 고대국가의 등장과 함께 전쟁이 빈발한 것도 여자들의 지위를 한층 더 떨어뜨렸다.”(91)
이 과정을 두고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권의 전복은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였다. 남성은 집안의 통제권을 장악했고, 여성은 지위가 낮아지고 노예 상태로 전락했으며, 남성 욕망의 노예이자 단지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가 됐다. …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계급 적대는 일부일처제 결혼에서 남녀의 적대가 발전한 것과 동시에 일어났고, 최초의 계급 억압은 남성의 여성 억압과 동시에 일어났다.
정략결혼
고대 사회에서 결혼은 재산과 땅을 물려주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됐을 뿐 아니라 유력한 가문들이 사회적 네트워크와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는 주요 수단이기도 했다. 결혼은 심지어 군사 동맹과 평화조약을 체결시키는 구실까지 했다.
이렇듯 결혼이 많은 것을 좌우했으므로, 결혼이 정치적 음모의 온상이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정략결혼은 고대 사회에서 등장해 중세 유럽의 지배계급한테는 아주 흔한 일이 됐다. “고대와 중세에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들의 결혼 이야기는 정치 스릴러, 기업 인수·합병, 전쟁 서사시와 비슷하다. 심지어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추리소설 같은 결혼 이야기도 있다.”(25) 결혼이 재산과 권력을 위한 냉혹한 계산 속에 맺어졌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휴대전화 통신사를 바꿀 때처럼 감정적 혼란을 거의 겪지 않고 배우자를 바꾸는 사람도 있었다.(120) 재산이 별로 없는 평민에게도 결혼은 대개 개인적인 만족과 행복 추구가 아니라 현실적인 계산에 따른 결정이었다. 결혼은 수렵·채집 사회가 농경 사회로 바뀌면서 점점 늘어나기만 하는 노동량을 농민들이 조절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집약적인 농업이나 목축이 시작되면서 가정 내 성별 분업은 생존하자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 됐다. 여자에게는 쟁기질을 해 줄 남자가 필요했고, 남자에게는 천을 짜고, 음식을 저장하고, 담요를 짜고, 곡식을 갈아 줄 여자가 필요했다. 여자는 들일을 거들 아이를 많이 낳는 데도 필요했다. 고대 부족사회와 왕국의 주민들은 대개 자신뿐 아니라 통치자를 위해서도 일해야 했다. 남자가 관개시설, 공공 창고, 신전 단지 같은 국가의 건설 사업에 동원되면, 누군가가 집에 남아서 살림과 들일을 맡아야 했다. 그래서 고대 사회의 하층계급 사람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영혼의 동반자가 아니라 노동의 동반자였다. 1인 가정은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중세
3 (152) 그런데 그와 동시에 이혼도 엄격히 금지했다.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가복음 10장 9절)
중세 시대에는 기독교가 정략결혼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초기 기독교는 세속적인 일에 무심하다 못해 적대적이기까지 했으며 결혼보다 독신 생활을 높게 쳤다. 초기 기독교는 결혼과 친족 관계 속에서 수행해야 하는 의무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이었다.”그러나 “교회의 정치적 역할과 경제력이 커지면서 교회는 서유럽에 새로이 생겨난 왕국들의 정치적 결혼, 이혼, 가족 문제에 깊이 휩쓸리게 됐다.”(156) 이 과정에서 교회는 특정 지배자와 손을 잡기도 했으므로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언제나 동요했으며, 이혼이나 일부일처제 문제를 두고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태도를 취했다.
중세의 영주는 농노와 그 자식들의 혼사에 지대한 관심을 두었다. 어떤 지역에서 영주(땅이 교회 소유라면 수도원장)는 자기 농노와 다른 장원 출신 여성의 결혼을 막을 권한이 있었다. 심지어 영주가 소작인의 딸들에게 남편감을 골라 줄 권리까지 있는 지역도 있었다.
1344년 독일 검은 숲[슈바르츠발트]의 한 영주는 자기 휘하의 남자 가구주들 중 열여덟 살이 넘은 사람과 열네 살이 넘은 여자들은 모두 자신이 골라 주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 규정은 심지어 과부와 홀아비들에게도 적용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영주에게 벌금을 내면 스스로 배우자를 고를 자유를 얻을 수 있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누군가와 반드시 결혼해야 했으며 결혼하지 않으면 더 커다란 대가를 치렀다. …
지주들이 농노들의 결혼에 관심을 가진 것은 부부간의 분업이 농촌 경제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남녀 농민이 결혼해서 이룬 가정은 생산의 기본 단위였[으며] 이 가정이 영주에게 지불해야 하는 세금은 남녀 모두의 노동을 바탕으로 계산됐다.(196~197)
또한, 쿤츠는 중세 유럽의 농가들은 상호원조와 공동 책임의 네트워크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에 친족이 아닌 이웃들도 누가 누구와 결혼하는지에 깊숙이 관여했다고 주장한다.
노동의 동반자에서 영혼의 동반자로
18세기에 시장 경제와 임금노동이 확산되면서 급격한 변화가 생겨났다. 임금노동이 확산되면서 젊은이들은 부모와 친척들에게 덜 의존하게 됐고 부모와 친척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힘도 약해졌다.
시장 경제의 확산 덕분에 얻은 부로 자유를 산 중간계급은 개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새로운 정치·철학 사상(계몽주의)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계몽운동가들은 남녀 관계를 포함한 사회적 관계들을 무력이 아니라 이성과 정의의 바탕 위에서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행복 추구가 정당한 목표라고 믿은 그들은 재산이나 지위를 위한 결혼보다는 사랑을 위한 결혼을 옹호했다. … 결혼은 교회나 국가가 지나치게 간섭해서는 안 되는 개인적인 계약이 되었다.”(255)
그리하여 “1700년대 말에는 중매결혼 대신 개인이 직접 배우자를 선택하는 결혼이 사회적 이상으로 자리잡았으며,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이 장려되었다.”(254) 남편과 아내의 구실도 바뀌었다. 경제적 생산이 가정에서 공장으로 옮겨가면서 남편과 아내는 “노동의 짝”에서 “영혼의 짝”으로 바뀌었다.
쿤츠는 이런 변화를 “사랑의 혁명”이라고 부르면서, 경제적·정치적 이익이나 의무가 아니라 애정과 동반자 관계에 바탕을 둔다는 결혼의 근본적 전제 자체에 사회생활을 조직하는 안정적인 제도로서의 결혼을 궁극적으로 허물어뜨리는 혁명적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주장한다.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는 가족의 등장
“전통적인” 결혼이 생계를 책임지는 남성과 살림을 맡는 여성의 결합을 뜻하게 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과거 지배계급을 제외한 거의 모든 아내들은 전통적으로 아이들을 기르고 식사를 준비하면서 생산 활동도 담당했다. 그러나 임금노동과 상업이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별도의 직장으로 옮겨가면서 살림과 생산 활동의 통합이 어려워졌다. 일부 가정에서는 아내가 살림에만 전념하는 것이 경제적 성공을 나타내는 사회적 신분의 표식이 됐다. 사회의 상류층과 중산층 지식인들은 험한 바깥세상에서 생계를 책임지는 남편의 모습, 가정에서 오로지 아이들과 남편을 돌보는 상냥한 아내의 모습을 미화하기 시작했다. 냉혹한 세상에서 벗어나는 “피난처”, “오아시스”라는 말 등으로 새로운 가족 형태를 찬양하며 가족들만의 사적인 공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뿔뿔이 흩어져 남자고 여자고 어린애고 할 것없이 공장과 광산에서 장시간 노동을 하게 된 노동계급에게는 가족을 꾸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북미의 흑인 노예들은 특히 더 그랬다. 쿤츠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목사들이] 부유한 신자들에게 가정의 ‘격을 높이고’ 거실을 ‘제단’으로 만드는 데 돈을 쓰라고 촉구하는 동안,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노동계층에 속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가족들만의 사적인 공간을 확보하거나 여자와 아이들을 바깥세상으로부터 보호할 방법이 없었다. 가정의 즐거움을 다룬 빅토리아 시대의 글 속에 묘사된 이상적인 가정생활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림의 떡이었다.”(293)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런 비참한 생활 때문에 노동계급은 가족의 결속력에 더 의지하게 됐고, 사람들은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고 여성이 아이를 돌보며 살림을 책임지는 형태의 가족을 이상으로 삼게 됐다.
게다가 이 방법은 대개 경제적으로도 이득이 되었다. 여성의 임금이 일반적으로 남성 임금의 3분의 1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가족들의 옷을 짓고, 식사를 준비하고, 텃밭을 가꾸고, 닭을 키우고, 가능하다면 하숙까지 치는 여성들은 밖에서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여성들보다 더 가정경제에 도움이 되었다. …
기혼 여성들의 열악한 작업환경과 낮은 임금을 감안하면, 그토록 많은 저소득층 여성들이 ‘귀부인 같은’ 전업주부 생활을 꿈꾼 것도 무리가 아니다. 비록 노동계층의 여성들은 집 밖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들의 미래 희망 속에서는 남자가 생계를 책임지고 여자는 살림을 맡는다는 이데올로기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301~303)
더구나 “남자가 생계를 책임지고 여자가 살림을 맡는 결혼 생활을 이상적으로 보는 시각은 빈곤층을 위한 복지제도 향상과 임금 인상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 준다는 점에서도 노동계층에게 매력적이었다. … 19세기 말의 30여 년 동안 노동운동가들은 남자가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이상을 이용해서 모든 남성 노동자들이 생계비를 충당할 수 있는 수준의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303)
지배자들도 이런 가족 형태가 노동자들을 순종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1834년에 발표된 한 에세이는 결혼이 노동 소요를 막는 방벽 기능을 한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지적했다. “남자가 자존심 때문에 … 매일 노동을 하는 대가로 빈약한 봉급을 주는 폭군 소인배의 말에 분노할 때, 이로 인해 아내가 고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소란스러운 감정이 가라앉고 그는 계속 열심히 일하며 아내의 다정한 말에서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327)
4 수명이 늘어나고, 이혼율이 줄어들거나 일정 수준을 유지해서 사람들의 결혼 생활 기간도 그 어느 때보다 늘어났다. 5
쿤츠는 새로운 결혼과 가족 형태가 1950년대에 절정에 다다랐다고 말한다. 1950년대에 경제가 번창하고 실질임금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대다수 가정은 실제로 한 사람의 수입만으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자본주의 역사 최초로 광범한 다수가 결혼할 수 있게 되고(전 인구의 95퍼센트가 결혼했다), 결혼 연령이 낮아지고,그러나 쿤츠는 “역설이게도, 역사상 결혼이 가장 확고해지고 안정적으로 보이던 바로 그 때, ‘사랑의 혁명’이 가장 완벽하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던 바로 그때, ‘초강력 폭풍’의 구름은 이미 지평선에 모이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1960~70년대에 폭발할 모순이 이미 1950년대에 심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경제적 팽창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적 행복과 성적 만족 추구가 결혼 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
전후에 경제가 팽창하면서 노동 기회도 확대돼 직장에 다니는 기혼 여성들의 비율이 크게 늘어났다. 이제 여성들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결혼을 미뤘고, 대학에 갈 생각이 없는 여성들은 어머니의 충고를 받아들여 몇 년 동안 독신 직장 여성의 삶을 즐기다가 결혼했다. 여성이 독신 생활을 오래 유지하면서 직장과 학교에서 경험을 쌓을수록 개인적인 포부와 자신감도 커졌다. 개인적인 자아실현에 대한 여성들의 기대치가 높아지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여성 또한 늘어나면서 여성들은 더는 사랑 없는 결혼 생활에 안주하지 않으려 했고 이혼율은 한층 더 급격히 증가했다. …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무과실 이혼이 널리 퍼져나[갔다]. …
게다가 1960년대 피임약 개발은 젊은이들이 결혼의 울타리를 벗어나 성관계를 맺는 것을 훨씬 쉽게 만들어 줬다. … 이제 섹스와 출산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수천 년 동안 여성들의 삶을 결정했던 원치 않는 임신이라는 유령이 사라진 것이다. … 또, 즉석식품과 다림질을 하지 않아도 되는 셔츠 덕분에 주부들의 부담이 줄어듦과 동시에 남성들 또한 엉성하게나마 편안한 독신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432~435)
쿤츠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의 사회운동, 그리고 여성이 직장에서 수행하는 역할과 출산권의 근본적인 변화는 1970년대에 광범위한 변화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바탕이 되었다”고 말한다.(436) “1960년대의 반전운동과 인종차별 반대운동 뒤에는 가정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여성의 역할, 구애, 결혼에 관한 1950년대의 관념들이 한꺼번에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이다. … 뉴욕의 게이바인 스톤월 인에 대한 경찰의 일상적인 단속이 폭동으로 발전해 몇 주 만에 동성애자 해방전선이 만들어진 것도 그해[1968]의 일이었다.”(425)
여성의 법적 지위와 시민권은 크게 변했다. 1972년 미국 교육법 9장은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모든 프로그램에서 성차별을 금지했다. 1973년 미국 대법원은 여성에게 낙태 선택권이 있다고 판결했다.
이에 더해 ‘합법적인 자식’과 ‘혼외자식’을 구분하는 것을 약화시킬 일련의 법개정이 있었다. 1968~78년 미국 대법원이 내린 일련의 판결들 덕분에 혼외자식과 미혼모의 권리가 신장했다. 1969년 서독·스웨덴·영국은 혼외자식에게도 유산상속권을 줬고, 1973년 프랑스는 모든 자식들에게 법적으로 똑같은 권리를 부여해 1790년에 혁명가들이 내세웠던 “프랑스에는 사생아가 없다”는 슬로건이 마침내 현실이 됐다. 1975년 혼외자식의 법적 지위에 관한 유럽 회의는 혼인 관계에서 낳은 자식과 혼외자식을 차별하는 법을 폐지하라고 모든 국가에 권고했다.
쿤츠는, ‘합법적인’ 자식과 ‘사생아’의 구분이 사라져 결혼 제도는 수천 년 동안 수행해 온 기능을 상실했고, 결혼이 사람들의 정치적·경제적 권리와 의무에 미치는 영향력이 약해졌다고 설명한다.
1970년대 말에는 이러한 추세들이 모두 하나로 통합돼 개인의 관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엄청나게 변했다. 1978년에는 스스로 독신을 선택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신경증 환자거나,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 미국인이 겨우 25퍼센트밖에 안 됐다. 1950년대에는 미국인 대다수가 그리 생각했는데 말이다.
쿤츠는 “1973년에 전 세계적인 경기후퇴가 있은 뒤 가정경제가 더욱 압박을 받게 된 현실은 전통적인 성역할과 결혼 규범에 도전한 또 다른 변화들을 주도했다”고 말한다. “1973년 경기 후퇴로 남성들의 실질임금이 하락하자 더욱 많은 기혼 여성들이 임금노동을 하게 됐고 남자가 생계를 책임지는 가족 구조는 커다란 도전을 받게 됐다. 또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미국 경제의 구조조정의 현실은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결혼을 미루게 만들었다. … 남자가 생계를 책임지는 결혼 모델은 20세기의 마지막 30여 년 동안 북아메리카와 서유럽 전역에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혼은 도처에서 성행동, 삶의 구조, 자녀 양육의 양상을 결정하는 힘을 잃기 시작했다.”(449)
초강력 폭풍: 20세기 말 결혼의 변신
1970~90년에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는 이혼율이 세 곱절 늘었고, 영국에서는 네 곱절 뛰었다. 1990년대 미국과 서유럽에서는 이혼율이 감소하기 시작했지만, 결혼율은 그보다 훨씬 빨리 감소했다. 그래서 쿤츠는 “과거 결혼율과 재혼율이 계속 높게 유지되는 동안에는 이혼율의 증가로 인해 결혼의 보편성이 위협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 말에 재혼율이 곤두박질치고 독신자, 동거 등 결혼을 대신할 수 있는 생활 방식이 많이 생겨났고, 결혼율이 줄어들면서 이혼율 증가의 충격이 한층 증폭됐다”고 지적한다.(450)
1970년부터 1999년 사이에 미국의 동거 커플 수는 일곱 배 증가했다. 처음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 때에는 대부분의 커플들이 여자가 임신하면 결혼을 선택했다. 하지만 1990년대에는 임신을 하거나 아이를 낳더라도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 결과 20세기 말에는 미혼모의 자식이 어린이 세 명 중 한 명꼴이었다. 2003년에 실시된 미국 인구조사에서는 동거 커플의 거의 40퍼센트가 18세 이하의 자녀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18세 이하의 자녀들과 함께 살고 있는 부부의 비율(45퍼센트)과 거의 맞먹는 숫자였다. … 1997년에 실시된 연구를 보면, 최근 미국의 미혼 여성들이 낳은 아이들 중 40퍼센트 이상이 의도적으로 계획된 출산이었다.(451, 462)
오늘날 스웨덴에서는 해마다 부부가 낳는 아이보다 동거 커플이 낳는 아이가 더 많다.
쿤츠는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가가 계속 늘어난 것도 결혼 모델을 상당히 바꿔 놨다”고 지적한다. 맞벌이 가정 비율은 1970년 39퍼센트에서 1998년 62퍼센트로 늘어났다. 여성의 직장 생활이 가정경제에 핵심적 구실을 하게 됐으므로, 여성이 아이 양육에만 전념하려고 쉽사리 취업을 미루거나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게 됐다.
1970년부터 1997년 사이에 전체 노동력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0년대 탈레반이 지배하던 아프가니스탄을 제외하고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서 증가했다. 여성의 노동 패턴 변화는 출산 혁명의 원인이자 결과였으며, 이는 선진국뿐만 아니라 개도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말에 가난한 나라의 여성들은 대개 자녀를 여섯 명 낳았다. 오늘날에는 평균 세 명 미만의 자녀를 낳는다. 사실 인구통계학자들은 2050년 이전에 세계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475)
그래서 과거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는 결혼 형태가 자리를 잡을 때 여성들 대다수가 경제적 문제만 없으면 집에서 살림을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1995년 실시한 조사 결과를 보면, 오늘날 직장에 다니는 기혼 여성들 중 경제적인 문제만 해결된다면 집에서 살림을 하는 편이 더 좋다고 대답한 사람은 3분의 1이 채 되지 않았다. … 미국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그 어느 선진국보다 길어 남녀를 막론하고 가정이 있는 노동자들이 일과 가정생활의 균형을 맞추느라 25년 전보다 훨씬 더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도 말이다.”(455, 457)
많은 여성들이 직장을 다니면서 부부 관계나 성 역할 구분도 무뎌졌다. “여성들은 직장에 다닐 때 사회뿐만 아니라 남편도 자신을 더 존중해 준다고 항상 말한다. 돈을 버는 여성들은 전업주부들보다 가정 내에서 의사결정권을 훨씬 더 많이 갖고 있고, 부부의 소득에서 아내의 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을수록 남편이 가사와 자녀 양육을 더 많이 돕는다. … 오늘날 많은 남자들이 아이를 기르면서 느끼는 기쁨을 알게 됐고 [그와 동시에] 아이들로 인해 자신의 자유가 제한된다는 사실도 느끼게 됐다.”(457)
오늘날에도 여전히 여성들은 이혼 뒤에 생활수준이 하락하지만, 이토록 많은 여성들이 남편 없이도 자신과 아이들을 부양할 수 있었던 적은 역사상 한번도 없었다. 20세기 초만 해도 사회적 냉대도 냉대지만 이혼한 여성이 자신과 아이들을 혼자서 부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1970년 이후 기대 수명이 급격히 늘어난 것도 결혼의 변화에 일조했다. 기대 수명이 늘어나면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사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힘든 도전이 됐다. 대부분의 시간을 자녀 양육에 바칠 때는 그럭저럭 괜찮은 듯하던 관계가, 아이들이 모두 자라고 부부가 단둘이 보내야 하는 기간이 30년이나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까지 그 어떤 세대도 배우자와 이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하지 않았다.(460) 최근 황혼 이혼이 급격히 늘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
독신 추세도 널리 퍼져 있다. “미국의 독신 가구는 현재 전체의 4분의 1을 넘는다. 1950년에는 유럽의 모든 가구들 중 10퍼센트만이 독신 가구였다. 그런데 50년이 흐른 뒤 독신 가구는 영국에서 전체의 3분의 1, 스웨덴에서는 40퍼센트를 차지했다.”(474) 쿤츠는 독신자 가구가 늘어난 것에 상당한 의미를 둔다. “역사적으로 혼외 성관계, 이혼, 동거, 혼외출산 등의 비율이 지금보다 높았던 적이 여러 번 있기는 했다. 하지만 혼자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던 적은 없다.”(472)
동성 결혼
쿤츠는 이런 변화에 동성 결혼 허용 문제를 덧붙인다. 21세기 초에 캐나다 2개 주가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고,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뉴멕시코·뉴욕·오리건에서 동성 커플에게 혼인증명서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쿤츠는 “단기적인 관점에서 미국이 벨기에, 네덜란드, 캐나다처럼 동성 결혼을 합법화할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동성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이미 상당히 변했다”(469)고 말한다. 실제로 “2002년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42퍼센트가 동성애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대답했다(미국은 선진국들 중에서 성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편에 속한다). 이탈리아에서 같은 대답을 한 사람은 16퍼센트, 프랑스에서는 13퍼센트, 스페인에서는 5퍼센트에 불과했다.”(469)
7 을 양육하고 있고, 미국의 8개 주와 워싱턴 DC가 아이에게 어머니나 아버지가 두 명인 상황을 법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헌법이 수정되든 안 되든, 동성 가정이 다시 벽장 안으로 숨지는 않을 것”(470)이라고 예측한다. 또, 스페인·아이슬란드·독일·헝가리·남아프리카공화국·포르투갈·대만·아르헨티나 등 여러 나라에서 동성 커플들이 결혼한 이성 커플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꽤나 누린다는 사례도 든다.
그래서 쿤츠는 미국에서 여성 동성 가정의 3분의 1, 남성 동성 가정의 5분의 1 이상이 18세 미만의 생물학적 자식결혼의 ‘비제도화’
쿤츠는 이런 변화로 말미암아 “우리 할머니 세대와 달리 요즘 사람들은 [결혼] 제도 속에서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서구 국가에서 기혼자와 미혼자의 법적인 책임과 권리를 구분하는 선이 모호해졌[고]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뿐만 아니라 일부 비서구권 국가에서도 정부나 고용주들이 가구 내의 동반자 관계를 중시하는 법률들을 채택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은 커플들도 결혼한 사람들과 똑같은 보험 혜택, 상속권, 기타 법적인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476) 쿤츠는 이제 “모든 지역에서 결혼이 점점 선택의 문제로 변하고 있으며, 점점 힘을 잃고 있다. … 사람들에게 결혼하라고 압력을 넣거나 의지에 반해서 결혼 생활을 계속하라고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사회의 힘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이제는 성공적인 인생이나 지속적인 성적 관계를 위해 반드시 결혼할 필요가 없다”며 “수천 년에 걸친 전통이 이렇게 종말을 맞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쿤츠의 이런 전망은 너무 낙관적이고 일면적인 듯하다. 쿤츠가 밝혀냈듯이, 현대 자본주의가 점점 가족을 약화시키고 해체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는 가족을 유지시키려 애쓴다는 점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쿤츠는 우파 정치인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가족의 신성함을 부르짖고, 이혼율과 혼외 성관계 증가로 사회가 타락하고 있다고 개탄하는 것을 두고 “시대의 변화에 뒤떨어진” 무망한 짓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는 것은 시대착오적 망상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가족의 존속에서 이득을 얻는 현실 때문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가족은 여전히 노동력을 판매할 수 없는 사람들이나, 병자나 장애인이나 노인들을 부양하는 기관이고, 미래의 노동자인 아이들을 양육하는 기관이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아이들이 10대 중후반만 되면 노동시장에 편입돼 독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학 교육이 확대되고 청년 실업도 심각해 젊은이들이 가족의 물질적 지원에 의존하는 기간이 점점 더 길어졌는데, 이것도 가족의 구실을 강화하는 데 일조한다.
쿤츠는 결혼이 더는 필수가 아니게 된 또 다른 이유로 ‘합법적인’ 자식과 혼외자식의 구분이 사라진 것을 든다. 1970년대 이후로 많은 나라들이 혼외자식을 차별하는 법을 폐지한 것은 분명 인본주의적 조처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조처는 혼외자식을 부양할 의무가 생부에게(국가가 아니라!) 있음을 명시해 자녀 양육의 책임을 여전히 개별 가정에 떠넘긴다. 오히려 책임을 져야 할 가족 단위를 늘리는 효과를 내는 셈이다. 여러 나라에서 혼외자식의 권리를 옹호하는 법이 통과한 데는 점점 늘어나는 혼외자식을 부양할 책임이 가족(어떤 형태든)에 있음을 분명히 해 놓으면 국가는 책임을 벗어나면서도 미래의 노동자를 안전하게 길러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상황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결혼하지 않고 전형적인 가족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힘겹다. 쿤츠도 인정했듯이 독신 가구나 동거 커플이 엄청나게 많아지기는 했지만, 이는 결혼 전에 거치는 “임시적인 것”으로 취급되곤 한다. 스웨덴처럼 복지 수준이 높은 유럽 일부 국가들에서는 결혼하지 않고도 아이를 낳고(심지어 둘째 아이를 낳고) 동거하는 커플이 많아졌지만 미국처럼 복지 수준도 열악하고 성적으로 보수적인 나라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임금이나 복지는 남녀가 결혼한 가정을 전제로 책정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의료보험에 부양자(또는 가입자)와 피부양자가 명기된다.
또, 현재 가족법은 부부가 서로 배우자나 자녀에게 해야 하는 의무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이혼율이 제아무리 치솟아도, 이혼 가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여전히 ‘결손’ 가정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혼모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과거보다 한결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노동계급 여성이 결혼하지 않고 혼자서 생계를 꾸리고 아이를 기르기는 너무나 힘겹다. 비록 돌봐야 할 남편이 없으니 가사 노동에 들이는 시간이 줄어든다 할지라도 말이다.
“선택”의 자유도 여전히 제한적이다. 특히 동성애자 커플은 엄청난 편견과 차별에 시달린다. 일부 동성애자들이 굳이 결혼권을 요구하면서 자신들의 관계를 전통적인 성 역할에 우겨 넣으려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이 하는 구실이 여전하고 거기서 자본주의가 이득을 보는 이상, 가족 안에서 살림을 주로 맡아 아이들을 기르고 남편을 돌본다는 여성의 ‘성 역할’도 쉽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여성들이, 특히 기혼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대거 진출했는데도, 임금이나 승진에서 차별받고 성적으로 조신해야 한다는 등의 여성 억압이 존속하는 것이다.
1930년 이래로 가장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복지를 삭감하고 개별 가족에 재생산 비용을 갈수록 더 많이 떠넘기려 한다. 그래서 낙태권을 공격하는 등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저기서 대량해고와 임금·연금 삭감 위협이 커지고, 노동 조건이 열악해지고, 사람들이 체제 내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기가 어려워질수록 사람들의 고독감과 소외는 더 커질 것이다. 노동계급의 가족이 여성 억압, 가정 폭력, 아동(과 노인) 학대로 얼룩져 있어도, 갈수록 버티기 어려운 이 비정하고 냉혹한 세상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방어 기제로 결혼과 가족에 집착하는 것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현대 자본주의가 가족과 여성 억압의 토대를 허물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투쟁으로 쟁취한 변화들 때문에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선택’의 문제로 여기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쿤츠가 사유재산권의 출현과 동시에 결혼의 성격과 여성의 지위가 바뀌었다고 말했듯이, 자본주의를 변혁해 계급사회를 종식해야만 수천 년 동안 여성(과 남성)을 짓눌러 온 제도로서의 결혼은 완전히 힘을 잃을 것이며 여성 억압도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결혼의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하긴 하지만, 결혼의 기원과 역사, 여성의 지위 변화를 실로 방대하고 생생한 자료와 예를 들어 아주 재미있게 설명한 이 책은 읽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MARX21
주
- 엥겔스, 프리드리히 1991,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아침, pp76-89. ↩
- 노예는 결혼해서 따로 가정을 꾸리는 것이 금지돼 있었다. 그러나 가정이 많은 양의 생산을 담당해야 했으므로 노예가 아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결혼이나 동거를 해야 했다. ↩
- “무릇 내게 오는 자가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누가복음 14장 26절) 예수는 새로 들어온 제자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잠시 다녀와도 되느냐고 묻자 가지 말라면서 “죽은 자들로 저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고 말했다.(마태복음 8장 22절) ↩
- 1900년에는 20~24세 남성의 22퍼센트만 기혼이었는데, 1950년에는 40퍼센트 이상이었다. 1950년대 초 프랑스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24세 남자 중 기혼자의 비율이 50년 전의 갑절이나 됐다.(389) ↩
- 영국에서 1850년에 태어난 여성들은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평균 29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지만, 1950년에 태어난 여성들은 45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프랑스에서도 같은 양상이 나타나, 1860년대에 28년이었던 평균 결혼 기간이 1960년대에는 42년으로 늘어났다.(390) ↩
- 한국은 최근 20년새 황혼 이혼율이 네 곱절 늘었다. 2008년 4월 21일 통계청 발표. ↩
- 동성 커플이 되기 전에 낳은 자식으로 유전적 연계가 있음을 나타내는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