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세계를 뒤흔드는 아랍 혁명 ― 의미와 전망
아랍 혁명의 귀환 *
2 벤야민이 이 글을 쓴 시기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상호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면서 근본적 변화에 대한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듯했던, “세기의 어둠”이라 할 만한 매우 어두운 시기였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2010년 12월부터 아랍 세계를 휩쓸기 시작한 혁명들에도 꼭 들어맞는다. 마치 무無에서 튀어나온 듯한 이 혁명은 수십 년 동안 깊이 누적된 불만들을 분출시키며 중동의 정치 지도를 새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혁명에는 훨씬 더 깊은 역사적 의미도 있다.
달리 말하면, 혁명은 역사의 전진 운동에서 비롯하는 예측 가능한 결말이 아니다. 혁명은 “잔해 더미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재앙”인 역사 속에 예기치 않게 난입하는 돌발 사건이다.먼저 튀니지·이집트·리비아의 격변과 그것이 중동의 나머지 나라들에 끼치고 있는 파급 효과는 아랍 혁명의 예상치 못한 귀환을 알렸다. 1952년 7월 이집트에서 자유장교단이 권력을 장악한 것을 시작으로 아랍 혁명은 당시까지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가 지배하던 중동 지역을 사로잡았다. 가말 압델 나세르는 이집트 국내의 싸움에서 승자로 떠오르고부터 제국주의 열강들에 반격을 가했고 이집트 유산 계급의 자산 대부분을 몰수했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 아니었다.
나세르는 아랍인들이 비록 식민지 시대의 산물인 정치적 국경선에 따라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지만 사실은 단일한 아랍 민족에 속한다는, 중동 사람들이 널리 공유하는 의식에 호소했다. 1958년, 나세르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국가 연합인 통일아랍공화국UAR의 탄생을 선포했다(그러나 이 연합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북부 예멘을 통해 지금처럼 당시에도 아랍 세계의 반동의 보루였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오랜 대리전을 치렀고, 그의 추종자들은 1958~63년 이라크 혁명에서 주도적 구실을 했다. 또한 범아랍 나세르주의 단체인 아랍민족주의자운동ANM은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의 급진파 지도자들을 여럿 배출했다.
그러나 나세르의 범아랍주의는 이후 쇠퇴의 길을 걷다가 1967년 6월 이스라엘과의 6일 전쟁에서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이 패배하면서 치명타를 입게 된다. 참담해진 나세르는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아랍 민족 의식은, 갈수록 타락해 간 이라크와 시리아의 바트당 독재를 통해, 또는 훨씬 더 긍정적이기로는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에 대한 연대의 형태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아랍 민족 의식의 끈질긴 생명력은 1월 14일 튀니지에서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가 타도되고부터 혁명의 바이러스가 이집트·예멘·바레인·리비아로 급속히 전파된 데서도 볼 수 있다. 이 혁명의 파급 효과는 이란(아랍 세계에서 점차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에서도 ‘녹색 운동’의 부활을 촉진할 정도로 컸다. 걸프협력협의회GCC가 3월 중순 바레인에 병력을 파견한 것도 바로 이 혁명 바이러스의 전염을 막기 위해서였다.
3 반대로, 2011년의 아랍 혁명들은 아래로부터의 반란을 원동력으로 한다. 이제는 식상할 정도로 각종 매체에서 거듭 말하듯이, 아랍 혁명은 어느 정당이나 운동의 소유물도 아니며, 이 모든 투쟁에서 신속히 등장한 여러 형태의 자치 조직에 구현된 민주적 열망의 산물이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단순 반복되지 않는다. 나세르의 범아랍주의는 서방 제국주의와 아랍의 민간 부르주아지·지주 모두에 맞서 아랍 세계를 단결시키고자 했다. 그것이 등장한 역사적 배경은 1940년대 말과 50년대 초에 이집트와 이라크의 친영 정권들을 파국적 위기로 몰아넣은 거대한 대중 운동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장교단과 나세르 개인이 가차없이 추진한 위로부터의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나세르 등은 갈수록 무슬림형제단과 이집트 공산주의 운동 같은 대중 세력을 조종하고 분열시키고 야만적으로 탄압하는 방식으로 통제력을 유지하려 했다.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고전적인 정치 혁명의 부활이다. 지난 20년간 수없이 많은 사회이론가들과 언론인들이 혁명은 죽었다고 공언했다. 그 이유가 1989년에 입증된 시장 자본주의의 승리 때문이라고 하든, “포스트모더니티”의 도래 때문이라고 하든 간에 말이다. 한때는 혁명이라는 것이 한 무리의 과두 지배층이 민주주의의 깃발 아래 워싱턴의 강력한 물질적·도덕적 후원을 등에 업고 다른 한 무리의 과두 지배층을 몰아내는 ‘색깔 혁명’이라는 타락한 형태로만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아랍 혁명에서 한 구실에 관한 온갖 잡담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튀니지와 이집트의 혁명이 전개된 방식은 1640년대의 영국 혁명과 1790년대 프랑스 대혁명에서 처음 확립된 패턴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대중 시위, 지배 엘리트들의 분열, 군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쟁탈전, 차기 정권의 정치적·경제적 성격을 둘러싼 갈등, 잠재적으로 더 급진적인 아래로부터의 운동 지속, 이 모든 요소들이 아랍 혁명에서도 관찰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리비아에서는 심지어 더 원초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무아마르 카다피와 그에 맞서는 혁명 세력이 각자 더 많은 전투원과 화력을 끌어모아 상대방에게 결정적 패배를 안기려 하고 있다. 이 내전의 결말은 아직 불투명하다. 한 마디로 말해, 혁명은 21세기의 현실이다.
경제 위기의 정치적 불똥
4 마르크스가 강조했듯이, “생산의 경제적 조건에 가해지는 물질적 변화(자연과학에 버금갈 정도로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와 법률·정치·종교·예술·철학적 변화, 즉 사람들이 갈등을 의식하게 되고 싸우게 되는 이데올로기적 형태를 언제나 구분해야 한다.” 5 즉, 한 사회를 불안정에 빠뜨리는 구조적 모순들을 규명하는 것과, 이런 모순들이 언제 어떻게 결합돼 정치적 폭발을 일으킬지 예측하는 것은 별개다.
아랍 혁명이 허공에서 튀어나왔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너무 단순한 설명이다. 가장 중요한 사례인 이집트 혁명만 해도 결코 허공에서 튀어나오지 않았다. 일단의 급진 좌파 학자들(그 중에는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기고자들도 몇 명 있다)이 이집트 경제·사회·정치의 모순을 소개하고 호스니 무바라크를 “변화의 순간”으로 내모는 저항 운동의 성장을 분석한 공동 연구서를 낸 지가 2년이 채 안 됐다.6 이 문장에서 “아직”이라는 표현이 빠졌으면 큰일 날 뻔했다. 필자가 이에 답하면서 지적했듯이, 지금과 같은 심각한 구조적 위기는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하는 장기적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7
그러나 여기서 논의 대상은 초국가적인 혁명 물결이므로 그것을 촉발한 모순들도 단지 일국적 수준의 모순일 수 없다. 오히려 가장 좋은 분석의 출발점은 세계적 경제·정치 위기일 것이다. 약 1년 전에 《뉴 레프트 리뷰》 편집자 수전 왓킨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어쩌면 2008년 위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경제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치는 답보 상태라는 점일지 모른다.”이번 경제 위기의 원인을 본지(《인터내셔널 소셜리즘》)와는 다르게 설명하는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도 최근에 다음과 같이 이와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다.
구조적 위기는 다면적이고 오래 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컨대 [1930년대 ― M21] 대불황이 정확히 얼마나 지속됐고, 전쟁 준비로 인한 경기 부양이 없었다면 얼마나 더 지속됐을지는 확정짓기 어렵다. 거시경제가 엄밀한 의미의 불황에 빠진 것은 1929년 말부터 1933년 사이다. 그 뒤 경기가 점차 회복되다가 1937년에 다시 산출량이 하락했다. 그러던 중 전시 경제가 사태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 오늘날의 위기도 십중팔구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단 성장률이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돌아서면 이 때부터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긴 하겠지만, 그것은 결코 애당초 위기를 불러왔던 긴장이 해소됐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미해결 과제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플러스의 성장률이라고 해서 양호한 성장률일까? 미국 경제의 불균형은 언제 해결될 것인가? 정부 부채는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달러화는 국제적 압력을 견뎌낼까? 새롭고 지속가능한 경로를 확립하는 것은 길고 힘겨운 과정이 될 것이다.
9 정확히 아랍 혁명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여기서 드러난 단층선은 경제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다. 무바라크 치하 이집트와 벤 알리 치하 튀니지는 둘 다 중동 지역의 신자유주의 모범생들이었다. 세계은행도 튀니지에 관한 보고서(2010년 9월)에서 다음과 같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필자는 “장기화된 경제 위기는 부르주아 정치 구조에 압력을 가하며 그 속의 단층선을 드러낼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튀니지는 균형 성장, 빈곤 퇴치, 양호한 사회 지표 달성 면에서 놀라운 진전을 이뤘다. 지난 20년간 평균 5퍼센트 성장률을 유지했고 1인당 국민소득이 꾸준히 증가한 결과 국민 생활도 더 풍족해졌다. 튀니지의 빈곤율은 7퍼센트로, 이 지역에서 가장 낮은 축에 든다.
11 실제로 이집트는 남반구에서 신자유주의를 개척했다고도 할 수 있다. 1974년 안와르 사다트는 ‘인피타’라고 하는, 해외 무역과 투자에 경제를 ‘개방’하는 정책을 발표했는데, 이는 나세르식 국가자본주의와 정반대 길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12 무바라크는 한 술 더 떠서 1991년에 국제 금융기구들의 경제 개혁 및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수용했다. 이 프로그램의 한 가지 핵심 축은 1991년에 제정된 법률 96조인데, 이 법은 1952년 자유장교단의 토지 개혁으로 소작농에게 부여된 권리를 폐지해 옛 지주들과 그 자손들이 다시 농민들의 땅을 빼앗을 수 있게 해 줬다. 13
비록 무바라크 정권에 대해서는 칭찬을 좀더 아끼긴 했지만 그래도 세계은행은 이집트가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경제 개혁 선두주자로서 튼튼한 실적을 쌓아 왔다”고 치켜세웠다.무바라크 정권은 1990년대에 “나일강의 호랑이” 운운했지만 신자유주의는 이집트·튀니지 경제에 어떤 ‘기적’도 안겨 주지 못했다. 외화벌이의 주된 원천은 중국과의 경쟁에 취약한 섬유 산업과 관광 산업이었다. 경제 자유화는 극심한 경제·사회 양극화를 초래했고, 이는 나세르 치하에서, 그리고 튀니지의 경우는 하빕 부르기바 치하에서 구축된 코포라티즘적 구조들에 압력을 가했다. 앤 알렉산더는 나세르 시절 이집트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노동자들은 정치적 독립을 포기하는 대신 주택 보조금, 교육 등의 복지 혜택, 상대적 고용 안정을 보장받았다. 나세르의 미사여구는 특히 집권 말기로 갈수록 국가 발전에 대한 노동자들의 기여를 찬양하며 노동자들을 이상화했다. 그러나 나세르의 국가는 독립적 노동자 조직들을 분쇄했고 그 자리에 정부에 순종하는 공식 노조 연맹을 설립했다.
15 2009년 아마드 엘 나가르는 “전체 실업자 수가 … 7백90만 명에 이르고, 실제 실업률은 이제 26.3퍼센트이고, 일부에서 15~29세 집단의 실업률은 그 세 배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16 실업률 증가, 특히 청년 실업률 증가는 중동 지역 전체의 문제다. 세계은행의 연구 결과조차 각론으로 들어가면 총론의 들뜬 메시지와는 반대된다. 벤 알리가 퇴진한 다음날인 2011년 1월 15일자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1990년대와 그 이후의 개혁들은 나세르 체제를 깨뜨렸다”고 알렉산더는 말한다. 한편에서는 가난과 불평등과 실업이 증가했다. 2010년 국제노동기구ILO는 이집트인들의 44퍼센트가 국제 빈곤선인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한다고 밝혔다.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청년 실업률은 25퍼센트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그러나 이 수치가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세계은행 연구자들은 이 지역의 15~29세 실업자 수가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다는 증거들을 발견한다. 학교에 다니지도 않고 일자리도 없는 많은 청년들이 구직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통계에서 빠져 있다. 특히 도시의 젊은 남성들은 다수가 불완전 고용 상태에 있거나 비공식 부문에서 일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예 일을 하지 않는 등 노동 시장에서 매우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다.
18 1월 25일 이집트 혁명으로 심지어 〈뉴욕 타임스〉조차 이러한 자유화의 본질이 무엇인지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곧,
반대로, 극소수 거부들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차지했다. 조얼 베이닌은 2004년 7월 이집트 총리로 임명된 아흐메드 나지프 내각의 “경제 부처 장관들”은 “대통령 아들 가말 무바라크 주위를 둘러싼, 서방에서 교육받은 박사 학위 소지자들”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제2의 민영화 공세를 폈고 섬유 공장 기계와 부품에 대한 관세를 폐지하는 등 해외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여러 조처를 취했다.”이집트 정실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인 아메드 에즈는 특히 가말 무바라크와 친한 덕분에, 사유화된 철강 기업을 염가에 사들여 이집트 철강 시장의 3분의 2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국회의원이 된 뒤로 2010년 11월의 노골적인 부정 선거에서 국민민주당NDP의 조폭식 선거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튀니지에서는 벤 알리의 처가인 트라벨시 일가가 혈연을 이용해 자기들 배를 불렸다. 국제투명성기구의 보고를 보면 벤 알리와 트라벨시 일가는 튀니지 경제의 30~40퍼센트를, 즉 약 1백억 달러 상당의 부를 쥐락펴락했다. 벤 알리의 처 레일라 트라벨시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달아날 때 금괴 1.5톤을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문서상으로만 보면 이런[자유화 ― 옮긴이] 정책 덕분에, 국가가 거의 1백 퍼센트 통제하던 경제 체제가 자유 시장 경제로 변모한 듯하다. 그러나 이집트 국내외 전문가들은, 실제로는 모종의 정실 자본주의가 탄생했다고들 말한다. 국영 은행들은 정부를 지지하는 가문들에는 대출을 해 주면서 정치적 연줄이 없는 기업인들에게는 대출을 거부하는 식으로 ‘킹 메이커’ 구실을 했다.
알 아흐람 정치전략센터 경제연구소의 아메드 엘 나가르 소장은 정부 관리들이 정치적 연줄이 있는 가문들에 국유지를 염가에 팔아넘겼다고 말한다. 또한 정부 관리들은 뇌물을 받고 외국 기업들이 국유 기업을 싼 값에 인수할 수 있게 해 줬다. 이와 동시에, 정부는 외국 투자자들이 이집트 기업과 합작 회사를 결성할 것을 요구했다. 수익성이 큰 이들 합작 회사의 이집트 측 투자자로 낙찰된 것은 여당과 친분이 두터운 가문들이었다.
즉, 중동에서 신자유주의는 (추상적인 자유시장 개념에 함축된) 경제와 정치의 분리가 아니라 그 둘의 융합으로 표현됐다. 이는 더는 국가자본주의가 아니었다. 이제 사회 최상층부 사람들은 정치적 연줄에 힘입어 엄청난 축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엘리트층의 그토록 노골적인 부패는 결과적으로 경제·사회적 불만들이 정권 맨 꼭대기까지 향하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세계적 경제 위기가 닥쳐왔다. 후안 콘블릿과 브루노 마그로는 다음과 같이 썼다.
2008년 경제 위기가 오자 이런 구조적 약점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소규모 호황을 가능케 했던 지지대가 모두 날아갔다. 이집트에 초점을 맞추자면, 해외 거주자들의 송금액은 2008년 대비 17퍼센트 감소했고, 2008년에 24퍼센트 상승했던 관광 수입은 2009년에 1.1퍼센트 감소했고, 수에즈 운하 수입은 2008년 대비 여객선 운항이 8.2퍼센트, 화물 운송량이 9퍼센트 하락한 탓에 7.2퍼센트 감소했다. 튀니지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07년에 6.33퍼센트 성장했던 튀니지 경제는 2007년에 4.5퍼센트, 2008년과 2009년에 각각 3.1퍼센트 성장하는 데 그쳤고, 섬유·의류와 석유 관련 제품의 수요 하락 탓에 수출은 25퍼센트 하락했다.중동이 받은 경제 위기의 충격은 실업률 증가, 특히 청년 실업률 증가로 나타났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식품 가격 급등이었다. 이미 2008년 금융 공황 직전에도 생활 물가가 급격히 치솟았다. 헤르만 슈바르츠는 더는 중국의 값싼 공산품 수출이 세계 물가를 끌어내리는 효과를 내지 못하게 된 이 시점이 경제 위기 발전 과정의 전환점이었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수출 호황은 중국 경제의 성장도 불러왔고 이에 따라 중국의 원자재 수요와 반숙련 노동력에 대한 수요도 증가시켰다. 국제 원자재 가격은 2004년부터 상승하기 시작했고, 중국 인건비는 2007년부터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은 디플레가 아니라 인플레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2008~09년 ‘대침체’로부터의 회복도 이와 비슷한 인플레율 상승을 동반하고 있다. 슈바르츠의 주장처럼 중국과 아시아·중남미 ‘신흥 시장’들의 수요 증가가 이런 인플레에 상당한 기여를 했지만, 금융 투기는 그 효과를 엄청나게 증폭시켰다. 식품 가격 앙등은 전 세계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격탄이었다. 미셸 초스도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쌀·밀·옥수수 등 주요 곡물 가격이 모두 급등했다. 쌀 가격은 2003년 톤당 6백 달러에서 2008년 5월 톤당 1천8백 달러 이상으로 5년 만에 세 배나 뛰었다. … 최근에는 2010년 하반기의 FAO[유엔 식량농업기구] 식품가격지수가 32퍼센트 뛸 정도로 곡물 가격이 올랐다.
예컨대 빵 가격 폭등과 품귀 현상은 2006년부터 이집트를 휩쓴 파업 물결(1월 25일 혁명으로 가는 길을 닦은)의 중요한 기폭제였다. 중동 전역의 거리 시위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불만도 높은 물가와 엘리트들의 특권에 대한 것이었다.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으로 촉발된 튀니지의 반란이 벤 알리를 끌어내렸을 때 라르비 사디키는 중동에 형성된 폭발적 정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서방의 안보 전문가들이 걱정해야 하는 것은 쿠란이나 [무슬림형제단 지도자] 사이드 쿠트브(1966년에 사망했는데도 9·11 테러 배후로 지목된)가 아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자본론》을 사서 읽고 마르크스에 심취해 보면서 현실 감각을 회복하는 것, 9·11 이후 안보 지상주의에 찌든 이 세계에서 한 줄기 합리성을 되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그레브 지역의 튀니지와 알제리에서부터 아랍 동부의 요르단과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자긍심을 갉아먹고, 공동체를 파괴하고, 결혼을 포함한 전통적 통과의례까지 가로막는 진정한 테러는 사회·경제적 소외다. 오늘은 알제[알제리의 수도 ― M21]와 카세린[튀니지 중서부의 주요 도시 ― M21]의 거리를 행진하고 있지만 내일은 암만, 라바트, 산나, 라말라, 카이로, 남부 베이루트에 나타날지 모르는 마그레브의 실업자 군대는 실업이라는 테러에 이데올로기로 맞서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따로 이데올로기가 필요 없다. 바로 실업이 그들의 이데올로기다. 주변부가 그들의 지리학이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자발적인 평화적 시위와 자해가 그들의 무기다. 이들이야말로 현대판 “레미제라블”이다.
그러나 경제 위기가 큼직한 투쟁을 촉발하고 있는 곳이 단지 중동만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비록 구체적인 경제 상황과 정치적 맥락은 다르지만, 유럽에서도 긴축 정책의 확산은 2010년부터 그리스 총파업, 영국의 학생 반란 등 만만치 않은 저항을 낳았다. 남아일랜드 자본주의를 대변해 온 정당인 피아나 페일(아일랜드 공화당)이 2011년 2월 총선에서 참패한 결과 피네 게일(통일아일랜드당) 주도의 새로운 연립 정부가 들어서고 신페인과 좌파연합United Left Alliance이 야권 주요 세력이 된 것도 현 상황이 딱히 “정치적 답보 상태”는 아님을 말해 준다. 올해는 미국 위스콘신 주에서도 놀라운 정치적 사건이 발생했다. 위스콘신 주지사 스콧 워커가 공공부문 일자리를 대거 줄이고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단체협상권마저 박탈하려는 데 맞서 대중 운동이 폭발한 것이다. 이는 공화당이 지난 가을 중간선거에서 티파티 운동에 힘입어 압승을 거둔 것의 직접적 결과다. 이제 하원뿐 아니라 주정부까지 장악한 워커 같은 우익들은 ‘큰 정부’를 대대적으로 축소하겠다는 티파티의 꿈을 실현시키려 하고 있다. 본지의 지난 호[《인터내셔널 소셜리즘》 129호 ― 옮긴이]에서 메건 트루델이 예측했듯이, 그 결과로 위스콘신뿐 아니라 공공부문과 조직 노동자들에 대한 비슷한 공격이 벌어지고 있는 다른 중서부 주에서도 엄청난 사회·정치적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다.
위스콘신 주 의사당을 봉쇄한 어마어마한 시위 대열과 그에 맞서 티파티가 조직한 소규모 시위 사이의 대조는 긴축 공세(공화당이 시작했지만 버락 오바마도 완화된 형태로 수용한)가 앞으로 어떤 장애물에 부딪힐 수 있을지를 짐작케 한다.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미국인의 61퍼센트가 워커의 계획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 소득이 2만 4천 달러 미만인 사람들은 74퍼센트, 2만 4천~5만 9천 달러인 사람들은 63퍼센트, 6만~8만 9천 달러인 사람들은 53퍼센트가 반대했고 오직 9만 달러 이상인 사람들만 50퍼센트가 찬성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한 블로거는 이런 통계를 봤을 때 공공부문 노동자들을 신종 ‘복지 여왕’으로 낙인찍으려는 공화당의 전략은 역효과를 낳고 있는 듯하다고 논평했다. 곧,
오랫동안 인정돼 온 단체협상권을 무력화하려는 워커의 시도와 그에 대한 언론의 지대한 관심 때문에 논쟁의 프레임이 바뀌면서 대중이 새로운 시선으로 이 문제를 보게 됐고, 이로 말미암아 공공부문 종사자들에 관한 문제에서 우파가 종래 누려 왔던 우위가 허물어지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물론 어떤 점에서는 우파가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다. 또한 결국에는 워커가 승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구도가 예기치 않게 바뀐 것만은 분명하다.물론 이제 막 태어난 미국의 긴축 반대 운동이 아랍 혁명과 동급인 것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물질적 생존 여력이 훨씬 더 클 뿐 아니라 민주당과 노조 관료들 같은 완충 구조들이 있다. 아랍 세계에서는 이런 완충 구조가 없는 것이 반란에 직면한 지배계급의 운신의 폭을 크게 제약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지역적 차이는 있지만 경제 위기의 충격파가 전 세계에 미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서방 세계의 위기
역사에는 혁명이 한 지역 전체로, 또는 전 세계로 들불처럼 번진 시기들이 있다. 이런 시기가 흔히 오지는 않는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반란이 유럽 전체로 퍼졌던 1848년이 그런 경우다. 1968년에도 ‘신좌파’라 부를 만한 사람들의 시위가 전 세계를 휩쓸었다. 멕시코 시티, 파리, 뉴욕 등 수백 개 도시에서 마르크스주의자와 급진주의자들이 반전 혁명을 일으켰다. 프라하에서는 소련이 신좌파 정부를 분쇄했다. 조금 무리하자면 심지어 중국의 문화혁명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1989년에는 동독 사람들이 서독으로 넘어오려 하면서 촉발된 소요 사태가 동유럽 전체의 반란으로 발전해 소련의 지배를 종식시켰다. … 사회·문화적 조건이 서로 비슷한 곳에서는 비슷한 사건들이 일어나며 한 나라의 선례가 다른 나라로 확산되기 쉽다. 2011년에도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자의 말이 아니라 미국의 “전략 정보” 웹사이트인 〈스트랫포Stratfor〉의 창립자 조지 프리드먼의 말이다. 아랍 혁명은 그 스케일 면에서 실로 1848년 혁명 등에 비견될 만하다. 그러나 2011년과 그 바로 직전의 비교 대상인 1989년 사이에는 한 가지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 [결과론적으로 말해 ― M21] 동유럽 스탈린주의 정권들을 타파한 혁명들은 일반으로 서구 자본주의를 강화해 줬고, 특별히 미 제국주의를 강화해 줬다. 그러나 아랍 혁명(특히 이집트 혁명)은 미국 제국주의에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그 이유는 프리드먼이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한다.
이집트가 친소련 나세르주의 국가였을 때는 세계가 나세르 전과는 매우 달랐다. 사다트의 외교 정책이 바뀌자 세계도 덩달아 변했다. 사다트가 외교 정책을 또 한 번 바꾸자 세계는 또 한 번 변했다. 이집트는 여느 나라와 달리 국내 정치가 국제적인 파장을 낳는 나라다.
이집트는 아랍 세계 최대의 국가이고, 카이로는 그 문화적 수도다. 마그레브 지역과 아랍 동부, 걸프 지역,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이집트가 바뀌면 그 파장이 미치는 범위가 대단히 넓다. 나세르의 위로부터의 혁명과 서방 제국주의와의 충돌은 범아랍 민족주의 물결을 촉발했을 뿐 아니라 (프리드먼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제3세계(즉, 미국과 소련 중 어느 쪽과도 확고한 동맹을 맺길 거부한 탈식민지 국가들)가 정치적 실체로 등장하는 데 기여했다. 이와 비슷하게, 사다트가 1970년대 초 이집트를 우경화시켰을 때도 그 파장은 매우 컸다. 단지 ‘인피타’로 대표되는 경제 정책의 우경화만이 아니었다. 사다트가 1979년 3월에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것도 적어도 인피타만큼 파장이 컸다(이 협정의 결과로 이스라엘 군이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했다). 그것은 가히 지정학적 혁명이었다. 그 전 30년 동안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네 차례 전쟁을 벌였고, 그 중 마지막인 1973년 10월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의 허를 찌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맺은 평화협정 덕분에 남부 전선에 대한 걱정을 덜게 된 것이다. 노엄 촘스키의 지적처럼, “무엇보다 이집트 군대가 아랍-이스라엘 갈등에서 빠지게 됨으로써 이스라엘은 주의를(그리고 군사력을) 점령 지역과 북부 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달리 말하면, 한 세대 동안 시나이 반도에서 지속된 평화 덕분에 이스라엘 군은 레바논과 가자 지구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31 가자 지구 봉쇄를 유지했다. 그 대가로 이집트 군대(여전히 이집트 정권의 존립 기반이던)는 해마다 미국의 군사 원조금 13억 달러를 ‘전략적 지대’로 받아 챙겼다.
사다트와 무바라크 치하에서 이집트는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미국의 굳건한 동맹국이 됐다. 미국은 이들을 필두로 한 동맹 체계를 이용해 중동 지역에서 패권을 유지해 왔다. 무바라크 정권은 여러 방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워싱턴에 증명해 보였다. 1991년 걸프전에서 사담 후세인에 맞서는 동맹을 조직했고,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첩보를 공유했고(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전보를 보면 무바라크의 정보 총책임자이자 잠깐 부통령이 되기도 했던 인물인 오마르 술레이만을 카이로 주재 미국 대사관이 얼마나 아꼈는지를 알 수 있다), 미국에게 테러 용의자들을 넘겨 받아 이집트 감옥에서 고문했고(이 일에 술레이만은 말 그대로 팔 걷고 나섰던 듯하다),그러나 비록 미국과 이집트의 동맹 관계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 밖에도 서방과 아랍 독재 정권들을 이어주는 끈은 수없이 많다. 혁명이 들춰내고 있는 다채로운 비리와 추문들이 그 실체를 말해 준다. 거기서 피해를 본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은 벤 알리 정권과의 유착 관계가 폭로된 후 해임된 프랑스 전 외무장관 미셸 알리오-마리였다. 〈르몽드〉는 (알리오-마리에게 너무 관대한 논조일 수도 있지만)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튀니지 쪽에서 보면 미셸 알리오-마리 스캔들은 거의 부차적으로 여겨질 정도다. 벤 알리 시절에는 프랑스인과 튀니지인 사이의 뒷거래가 워낙 흔하고 익숙한 것이어서 튀니지 사람들에게는 일상적 풍경에 속했다. 튀니지 수도의 온라인 신문 〈카피탈리스〉의 편집자 리다 케피는 지난 20년 동안 “독재자를 후원하는 프랑스적 전통”이 있었다고 말한다. ‘MAM’[미셸 알리오-마리 ― 옮긴이]의 비리가 탄로난 것은 그녀도 다른 수많은 사람들처럼 파리와 튀니스 사이에 형성된 평온한 방조와 묵인의 분위기에 묻어 갔기 때문이다.
33 LSE 전 총장이자 ‘제3의 길’ 이데올로그인 앤서니 기든스는 2007년에 잠깐 리비아를 방문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꼭 카다피가 퇴진해야만 진정한 발전이 가능할까?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 내가 생각하는 20~30년 뒤 리비아의 이상적인 모습은 부유하고 평등하고 진취적인 나라, 즉 북아프리카 판 노르웨이다.” 34
반대로 영국과 미국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훨씬 더 부적합해 보이는 나라인 리비아에 다가가기 위해 (카다피가 미국·영국과 화해한 2007년 이후로)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다. 런던대학교 사회과학대학LSE이 ‘글로벌 거버넌스 센터’를 통해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와 구축한 관계(결국 LSE와 랠프 밀리밴드의 명성에 먹칠을 한)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35 그 밖에도 모니터 그룹은 카다피 일족과 담소를 나누기 위한 트리폴리 순례길에 미국의 거물급 지식인들을 다수 동원했는데, 그 중에는 프랜시스 후쿠야마, 리처드 펄, 로버트 퍼트넘, 조셉 나이, 벤저민 바버도 포함돼 있었다. 36
카다피 정권을 세계 경제에 편입시키려는 노력은 이보다 훨씬 더 나아갔다. 같은 해(2007년) 〈비즈니스 위크〉는 보스턴 소재 컨설팅 회사인 모니터 그룹이 리비아에서 “신흥 친기업 엘리트를 육성하기 위해” 주관한 프로젝트에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경영학 대부이자 《국가 경쟁우위The Competitive Advantage of Nations》의 저자인 마이클 포터가 동참했다고 보도했다.미국 등 서방이 심지어 자신과 가장 오랜 세월 대치한 전력이 있는 아랍 독재 정권을 상대로도 이처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오바마와 데이비드 캐머런은 카다피에 맞선 반란이 시작됐을 때 그토록 신랄하게 카다피를 비난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렇기에 또한 캐머런은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가 이라크에서 벌인 군사적 모험으로 신뢰가 땅에 떨어졌던 ‘자유주의적 개입주의’ 카드를 그토록 빨리 꺼내들었던 듯하다. 즉, 서방 강대국들은 카다피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데 일조함으로써 그 중요한 산유국에 대해 어느 정도 영향력도 얻고, 뒤늦게나마 아랍 세계의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평판도 얻을 수 있겠다는 계산을 했을 법하다.
마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재앙 따위는 완전히 잊은 양 서방 강대국들이 인도주의적 개입과 ‘보호할 의무’ 운운하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아랍 독재자들과 긴밀한 동맹을 맺어 왔던 서방의 전력을 본다면 이들이 리비아에 개입하려는 것이 혁명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37 이는 지난 2006년 1차 조사 때 이집트가 기록한 30퍼센트보다 더 낮아진 수치다. 비록 이집트 군부와 무슬림형제단이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준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앞으로 들어설 새 정권이 최소한 무바라크 정권보다는 더 대중 여론에 민감하다면 미국의 뜻을 예전처럼 고분고분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방 강대국들이 아랍 세계에서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높다. 퓨 연구 센터의 2010년 국제 대미對美 감정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이집트는 미국에 호의적인 인구 비율이 세계 최하위권인 17퍼센트에 그쳤다(흥미롭게도 터키와 파키스탄도 모두 17퍼센트였다). 이라크 전쟁 참패와 경제 위기로 타격을 입고 중국의 급격한 부상에 신경이 곤두선 미국 정책입안자들은 자기 힘의 한계를 서글프게 시인하고 있다.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2주 뒤, 퇴임을 앞둔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는 2002년 6월 조지 W 부시가 미국의 선제 공격권을 주장하는 ‘부시 독트린’을 최초로 발표한 자리인 웨스트 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차기 국방장관이 누가 되든 아시아나 중동 또는 아프리카에 또 한 번 대규모 지상군을 파병하자고 대통령에게 조언한다면 그는 맥아더 장군이 점잖게 표현했듯이 ‘뇌 진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게이츠는 리비아 상공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자는 캐머런의 성마른 제안에도 재빨리 찬물을 끼얹은 바 있다. 비록 오바마 행정부 일각에서는 긍정적 의견도 나왔지만, 미국이 리비아에 대대적인 군사 개입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니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게이츠의 연설에 대해 〈파이낸셜 타임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10년간의 전쟁을 치른 미국은 더는 이전의 미국이 아니다. 오늘날의 미국은 기록적인 적자와 ‘개입 피로증’(미국 외교협회CFR 회장 리처드 하스의 표현이다)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미국 지상군을 해외에 파병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는 로버트 게이츠의 말은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전직 국무부 관리인 아론 데이비드 밀러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너무나 명백한 진실이지만 게이츠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시인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40 ‘자유주의’ 일간지인 〈하레츠〉의 칼럼니스트 아리 샤비트는 다음과 같이 길길이 뛰며 분통을 터뜨렸는데, 그 대상은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미국의 신중함은 1월 25일 혁명으로 자신의 전략적 지위가 매우 위태로워진 이스라엘의 패닉과는 대조적이다.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지자 이스라엘의 한 싱크탱크 소장은 “우리의 분석 틀 전체가 무너졌다”며 망연자실해 했다.서방의 입장은 그들이 지미 카터 미 전 대통령의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힘세고 미개한 독재자들에게 굽신거리면서 온건하고 약한 자들은 저버리자는 것이다.
카터가 [1978~79년 이란 혁명 과정에서] 이란의 팔레비 국왕을 배신한 결과 아야톨라[원래 시아파 종교 지도자를 뜻하지만 영어로는 비하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 옮긴이]들이 군림하게 됐고, 머지않아 이들이 핵으로 무장하는 상황까지 올 것이다. 서방이 무바라크를 배신한 대가도 이보다 가볍지 않을 것이다. 이는 단지 서방에 충성을 다하고 이 지역의 안정과 평온을 추구한 지도자 한 명을 배신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중동과 개발 도상국의 모든 동맹들을 배신한 것이다. 이번 사건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즉, 서방의 약속은 약속이 아니며 서방과의 동맹은 동맹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방은 패배했다. 세계를 이끄는 안정화 세력 구실을 포기한 것이다. 아랍 해방 혁명은 중동 지역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또한 서방의 가속되는 몰락은 전 세계를 바꿔놓을 것이다. 그 한 가지 결과로서,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브라질, 터키, 이란 같은 지역 강국들에게 힘이 급속히 쏠릴 것이다. 서방의 전쟁 억지력이 사라지면서 일련의 국제적 충돌이 벌어질 수 있다. 어쨌든 전반적 결과는 수십 년이 아니라 수년 안에 북대서양 지역의 정치적 패권이 붕괴하는 것이다. 무바라크를 매장하면서 미국과 유럽은 한때 자신이 누렸던 강대국 지위도 함께 묻어버린 셈이다.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서방 패권의 시대도 저물고 있다.
혁명의 급류 속에서 샤비트의 날카롭고 맹렬한 비난은 제국주의 강대국에 의존하는 국가가 그 강대국에게 언젠가는 ‘배신’당할지도 모른다고 느끼는 두려움을 보여 준다. 타리크 알리의 판단은 훨씬 더 신중하다. “중동에서 미국의 패권은 약해지기는 했지만 붕괴하지는 않았다. 독재자가 쫓겨난 후의 체제는 더 자주적인 체제일 가능성이 크다. 또, 그 체제에서는 새로운 민주적 제도 덕분에 정권 교체가 더 쉬워지고, 바라건대 사회적·정치적 필요를 반영한 새 헌법이 제정될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와 튀니지의 군부는 경솔한 행동이 난무하지 않도록 확실히 단속할 것이다.”
43 이런 기준으로 보면, 튀니지·이집트·리비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모두 혁명의 조건을 완전히 충족시킨다. 이 사건들의 추진력은 모두 대중이 아래로부터 발휘한 주도력에서 나왔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대중이 스스로 조직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전 세계 사람들이 지켜보았다.
이런 판단을 평가하려면 혁명 자체를 더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이런 격변들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트로츠키는 자신의 걸작 《러시아 혁명사》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보기에 혁명의 역사는 무엇보다 대중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하는 영역으로 강제로 들어서는 역사다.”이 혁명들이 대중의 자기 조직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순전히 자발적인 혁명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이 잡지[《인터내셔널 소셜리즘》 ― 옮긴이]에 실린 튀니지를 다룬 글에서 샴세디네 므나스리는 그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순전히 자발적인 혁명이었다고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이클 하트와 토니 네그리다.
이 투쟁들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도 논평가들이 오해하게 만드는 듯하다. 오해한 논평가들은 1789년이든 1917년이든 과거 유럽에서 국왕과 황제에 대항해서 일어난 반란의 논리를 따라 사태가 전개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 반란이 조직되는 방식은 지난 10여 년 동안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 즉 시애틀, 부에노스아이레스, 제노바, 볼리비아의 코차밤바 등지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다시 말해, 단일한 중앙집권적 지도자가 없는 수평적 네트워크 말이다. 전통적 야당 기구들은 이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지도할 수는 없다. … 다중은 중앙이 없어도 스스로 조직할 수 있다. 따라서 다중에게 지도자를 강요하거나 다중이 기존의 조직에 포섭되면 다중의 힘은 약해지고 말 것이다.
45 그러나 아랍 혁명들에서는 ‘의식적 지도력’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래서 튀니지에서 튀니지 노동연맹UGTT 지도부는 벤 알리 정권과 유착돼 있었지만, UGTT 산하 노조와 지역 노조들은 2000년대 동안에 점차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고, 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발전하자 항쟁에 적극 참여했고, 1월 14일 UGTT 집행부를 압박해서 총파업을 호소하게 만들었다. 46
그래서 하트와 네그리는 자신들이 혁명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는 것이 새로운 현상이라고 열렬히 찬양하지만, 안토니오 그람시가 1930년에 했던 말은 그들의 주장에도 [반박으로 ― M21]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역사에서 ‘순전한’ 자발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 ‘더할 나위 없이 자발적인’ 운동에서는 ‘의식적 지도력’의 요소들을 확인할 수도 없고 이렇다 할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다.”47 1월 25일 ‘분노의 날’을 처음 조직한 사람들은 바로 이런 다양한 운동에 관여해 온 활동가들이었다. 인권 운동가들, 자유주의자들, 좌파 나세르주의자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그들이었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대결이 시작되자 이 활동가들의 대열에 무슬림형제단의 청년 간부들도 합류했다. 비록 무슬림형제단의 공식 지도부는 여전히 머뭇거렸지만 말이다.
이집트의 1월 25일 혁명은 지난 10년 동안 다양한 운동들, 즉 제2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에 연대하는 운동,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 이집트 자체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 베이닌이 “이집트에서 50여 년 만에 나타난 최대의 사회운동, 1백20만 명이 넘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모종의 행동에 참여한 운동”이라고 부른 파업 투쟁 물결 등이 준비해 온 것이었다. 물론 매우 협소한 활동가 서클들이 1월 25일 혁명을 처음 주도하고 조직했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왜 1월 말의 시위는 대중 항쟁으로 발전했지만 똑같은 활동가들이 그 전에 호소했던 수많은 시위에는 수백 명, 기껏해야 수천 명밖에 안 모였는지는 알지 못할 수 있다. 그 차이를 설명하는 데는 그동안 꾸준히 쌓인 분노와 튀니지 혁명의 본보기가 도움이 될 수 있다. 또, 2010년 11월 실시된 총선의 영향도 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선거 부정이 어찌나 노골적이었던지 그 전까지 국회의원을 보유하고 있던 이슬람주의자들과 나세르주의자들 같은 야당 세력들조차 총선 2차 투표에서 철수할 정도였다. 그러나 혁명의 예측 불가능성은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니다. 1917년 2월 차르의 몰락이 레닌에게 놀라운 사건이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집트 격변의 동역학이 보여 주는 것은 중앙 없는 다중의 서정적인 반란이 아니라, 그람시가 “혁명적 대중의 자발적 운동과 조직하고 지도하려는 중앙의 의지가 서로 수렴하는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부른 것이다.물론 이집트 항쟁의 초기에 ‘중앙’은 규모도 매우 작았고 정치적으로도 이질적이었다. 하트와 네그리의 다중 이론이 아랍 혁명과 부합하는 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혁명의 원동력 구실을 한 운동들이 적어도 처음에는 사회적·정치적으로 서로 구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점 또한, 혁명 초기 단계의 흔한 특징이다. 격변의 내용이 독재자와 그가 관장하는 체제를 제거하는 데 제한돼 있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49 지금까지 우리가 아랍 세계에서 목격한 것은 사회 혁명이 아니라 정치 혁명이었다. 더욱이, 지금까지는 지배자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혁명이었지 그들의 체제 자체를 제거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따라서 무바라크의 몰락에 대한 조지 프리드먼의 첫 반응은 폭로적이었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를 보면, 봉건 체제를 부르주아 체제로 대체한 사회 혁명뿐 아니라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파괴하지 않은 채 옛 지배 집단을 일소한 정치 혁명(1830년과 1848년의 프랑스 혁명,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 등)도 있었다.”이집트에서 일어난 사건은 혁명이 아니었다. 시위대는 체제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무바라크조차 끌어내리지 못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체제를 보존하기 위해 시위를 핑계 삼아 무바라크를 권좌에서 강제로 끌어내린 군사 쿠데타였다. 2월 10일 무바라크가 자발적으로 하야할 뜻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 군부가 무바라크에게 사임을 강요하려고 쿠데타나 다름없는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일단 무바라크가 사퇴하자 군부가 나서서 군사평의회를 설치하고 가장 중요한 부처들을 통제하면서 정권을 인수했다. 정권의 핵심은 항상 군부였다. 2월 11일 일어난 사건은 군부가 직접 통치권을 장악한 것이었다.
이 주장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튀니지와 마찬가지로 이집트에서도 군부가 개입해서 대통령을 제거하고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무바라크의 몰락은 그와 군부가 대통령 후계 구도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던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전보문을 보면, 2008년 9월 이집트 주재 미국 대사인 마거릿 스코비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정보원들은 대통령 아들인 가말 무바라크의 권력 기반은 군부가 아니라 주로 재계 인사들이라는 데 동의한다. 장교들이 최근 ○○○에게 들려준 바를 보면, 군부는 가말을 지지하지 않고 있고, 만약 무바라크가 임기 중에 사망하면 가말이 아버지의 뒤를 잇게 놔두지 않고 군부가 직접 나서서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분석가들은 가말이 선거를 통해 집권하는 과정을 무바라크 대통령이 직접 챙겨서 사실상 가말에게 권력을 넘겨준다면 군부는 이를 용인할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의 견해에 따르면, 2002년 가말이 국민민주당NDP에서 적극 활동하기 시작한 후 2004년에 정권은 가말 주위의 부유한 기업인들에게 이득이 될 사유화 사업 실행권을 내각의 개혁파에게 부여했다. 가말이 군부의 신임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완하려고 NDP 내에 기업인 위주의 가말 권력 기반을 창출하는 것이 정권의 목표라는 게 ○○○의 판단이다. 그는 이런 전략의 필연적 결과는, 군부가 가말의 대통령직 승계 과정을 방해하지 못하게끔 정권이 군부의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52 사실, 아랍 독재 정권들의 정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이집트처럼 매우 복잡하고 제도화한 정권도 있고(지난 몇 년 동안 합법 야당에게 어느 정도 정치적 공간을 허용했다), 개인에게 훨씬 더 집중된 독재 형태도 있다(흔히 지배 가문과 종교 종파라는 사회적 기반이 결합돼 있다). 후자의 형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시리아 ‘공화국’에서 볼 수 있는데,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이븐 사우드의 노쇠한 아들들끼리 왕위를 승계하는 것을 수니파 이슬람의 일종인 와하브파가 정당화해 주고, 시리아에서는 대통령직의 부자 세습이 순조롭게 이뤄졌고 시아파 이슬람의 일종인 소수 알라위파가 정권을 떠받치고 있다.
질베르 아슈카르는 리비아와 달리 이집트와 튀니지에서는 군대라는 기구의 권력 덕분에 지배계급과 서방 제국주의 열강들이 책략을 부릴 여지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리비아에서는 체계적으로 국가기구의 속을 파내서 껍데기만 남겨놓은 카다피의 정책과 카다피 일가의 독재 때문에, 카다피를 제거하려면 군대의 반란과 기존 국가의 파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53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압둘라는 이웃 나라인 바레인과 예멘에서 민중 운동이 분출하고 자국에서 이견이 표명되기 시작한 것을 몹시 우려해서 2월 23일 해외 요양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3백60억 달러짜리 ‘사회적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54 그러나 3월 14일 바레인 경찰이 시위대에 포위돼 쩔쩔매자 사우디아라비아 군대를 바레인으로 파병했다.
리비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일가 독재 체제는 특히 견고해서 깨뜨리기가 좀더 어렵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내무장관인 나예프 왕자는 2003년에 개혁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칼로 쟁취한 것을 칼로 지킨다.”각국 정권 내부의 분열만큼 국가 형태의 차이도 이처럼 각국의 변화 가능성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그런 차이가 있지만 아랍 혁명에서 결정적 요인은 ― 다시 트로츠키의 표현을 빌리면 ― “대중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하는 영역으로 강제로 들어서는” 것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대중은 미리 준비된 사회 재건 계획을 갖고 혁명에 돌입하지 않는다. 더는 구체제를 견딜 수 없다는 강렬한 감정으로 혁명에 돌입하는 것이다. … 따라서 혁명의 근본적 정치 과정은 대중이 사회의 위기에서 비롯한 문제들을 서서히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즉, 대중이 연이어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면서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서는 과정이다.
56 이런 과정의 다양한 국면들, 즉 혁명 세력과 반혁명 세력의, 혁명 진영 내 좌파와 우파의 전진과 후퇴, 승리와 패배 등은 대중이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대중이 당면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 나가면서 “연이어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는 과정은 점진적 급진화와 정치 권력의 결정적 이양으로 이어져 사회 혁명의 시작을 알릴 수 있다.
여기서 트로츠키는 혁명의 핵심적 특징을 강조하고 있다. 즉, 혁명은 국가 권력에 대한 통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결정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또한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2월부터 10월까지 8개월 걸렸는데, 이것은 사실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 7월 바스티유 감옥 습격부터 1794년 7월 테르미도르 쿠데타까지 꼬박 5년 걸렸고, 독일 혁명도 1918년 11월부터 1923년 10월까지 거의 비슷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런 결과는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아랍 세계에서 이와 가장 비슷한 과정이 일어났던 경우는 1958~63년의 이라크 혁명이었다. 이라크 혁명은 압드 알-카림 카심 장군이 이끄는 민족주의 장교들이 왕정을 전복하면서 시작됐지만, 1952년의 이집트와는 사뭇 다르게 민중의 대규모 급진화로 이어졌다. 이 급진화의 주된 수혜자는 공산당이었고, 공산당은 군대 내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1959년 5월 공산당 지도부는 권력 장악을 회피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의 압력이었다(소련은 나세르와 마찬가지로 카심도 냉전에서 동맹 세력이 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그에 따른 사기 저하와 분열 때문에 바트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고,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은 바트당은 1963년 2월 쿠데타를 일으켜 카심을 타도하고 공산당도 피바다에 빠뜨렸다. 미국과 이집트 군부가 대중의 급진화를 막으려고 무바라크를 제거했다는 주장은 꽤나 설득력이 있다. 현대 중동에서 일어난 다른 위대한 혁명적 과정, 즉 1978~79년의 이란 혁명과 비교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당시 이란에서 대중 시위와 파업 물결이 고조되자 국왕 모하메드 레쟈 파흘라비는 가혹한 탄압을 더욱 강화해서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리샤르트 카푸스친스키가 썼듯이, 사람이 죽은 지 40일이 지나서 제사를 지내는 시아파 전통 때문에 “이란 혁명은 40일의 간격을 두고 투쟁이 분출하는 리듬을 따라 전개됐다. 40일마다 절망, 분노, 유혈 사태가 폭발했다. 폭발은 매번 전보다 더 끔찍했고, 규모도 더 컸고, 군중도 많았고, 희생자도 더 늘어났다.” 1978년 9월 8일 샤[이란 국왕의 칭호 ― 옮긴이]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샤의 군대는 테헤란에서 시위대 수천 명을 학살했다.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석유 산업에서 시작된 대중 파업이 다른 산업들로 확산됐다. 거리에서 대규모 유혈 충돌이 잇따르자 점차 군대의 사기와 응집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1979년 1월 미국의 압력을 받은 샤가 마침내 망명 길에 올랐을 때, 반란이 군대 전체로 확산됐고, 무기력해진 장군들은 2월 초에 급진 좌파와 이슬람주의 게릴라 단체들이 조직한 무장 봉기를 막을 수 없었다.이것이 바로 이집트 군 장성들이 극력 피하려고 했던 시나리오였다. 2011년 2월 6일 이후 일주일 동안 이집트의 ‘다중’은 계급적 측면을 더 날카롭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즉, 여태껏 개인들로서 대중 운동에 참여했던 노동자들(물론 집단으로서 전혀 안 보였던 것은 아니지만)의 운동이 결정적으로 무대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노동자들의 파업 물결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주 중반쯤, 카이로 도심의 군중이 더 늘어나고 노동자 파업이 확산되고 경제 상황이 악화하자 고위 군 지휘관들과 민간인 지도자들이 모종의 권력 이양을 놓고 무바라크와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무바라크는 2월 10일 TV 연설에서 약속을 어기고 퇴진하지 않겠다고 말해서 대중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오바마는 사실상 무바라크의 하야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그것은 백악관의 결정적 전환이었다. 그동안 백악관에서는 이집트의 민주적 변화를 지지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자고 주장하는 보좌관들과 그랬다가는 핵심 동맹국과의 전통적인 정부 대 정부 관계가 파탄날 수 있다고 우려하는 보좌관들이 때때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카이로에서도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당시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미국 정부 관리 한 명은 무바라크의 연설 후 몇 시간이 채 안 돼, “군대 내에서 무바라크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동안 군대는 발언 수위를 적절히 조절하면서 사태 전개를 지켜보자는 태도였다”고 그 관리는 말했다. “그들은 무바라크의 연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날 밤이 되자, 이대로는 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금요일[2월 11일]에 무바라크는 하야하라는 말을 들었고, 몇 시간이 채 안 돼 그는 홍해 연안의 휴양지 샤름 엘-셰이크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바라크를 대체한 군대최고평의회(와 그 배후에 있는 이집트 지배계급과 백악관)가 직면한 문제는, 튀니지와 마찬가지로 이집트에서도 경제적 불만과 정치적 불만이 맞물려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쫓겨난 대통령이 임명한 총리가 이끄는 후임 정부가 순전히 허울뿐인 변화만을 약속하는 것으로는 이런 불만을 결코 누그러뜨릴 수 없다.
이 점은 벤 알리 몰락 직후 정권 자체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지속된 튀니지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시위대는 특히, 옛 집권당인 민주헌정연합RCD의 인사들을 모두 정부에서 퇴출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나타난 이런 현상은 사실 훨씬 더 광범한 과정인데, 이것을 두고 이 잡지의 다른 글에서 필립 마플릿은 1974년 4월 포르투갈에서 군대운동AFM, Armed Forces Movement이 우익 독재 정권을 전복한 후 벌어진 광범한 숙청 과정을 본떠 사네아미엔투Saneamiento(정화)라고 부른다.[《마르크스21》 이번 호에 실린 필립 마플릿의 글을 참고하시오 ― M21]
권위주의 정권 전복 후에 나타나는 최초의 민주적 자극 하나는 국가 기구를 정화함과 동시에 그것을 대중에게 책임지는 기구로 탈바꿈시키려는 욕구다. 흔히 구체제의 보안경찰이 그런 숙청과 개혁의 표적이 된다. 예컨대, 포르투갈에서는 안보총국DGS이 그랬고, 1989년 동독 혁명 후에는 슈타지(국가보안부)가 그랬다. 바로 이런 과정이 오늘날 아랍 혁명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래서 3월 초에 카이로 근처의 나스르 시에 있는 국가안보조사국SSIS 본부를 비롯해 많은 보안기관 건물들이 습격당했다. 주된 이유는 기밀 문서를 파기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이었다. 튀니지에서는 시위대가 과도정부를 압박해서 보안경찰 기구를 해체하게 만들었다. 또, 법원의 명령으로 RCD가 해산당하기도 했다. 튀니지 혁명과 이집트 혁명의 두드러진 특징은 서로 상대방을 보면서 용기를 얻는 상호 모방 패턴인데, 이 점은 3월 15일 이집트 내무부가 SSIS 해체 명령을 내린 데서도 잘 드러난다. 두 나라의 대중 운동은 또 거의 동시에 다른 성과들도 쟁취했는데, 구체제에서 유임된 총리를 각각 몰아낸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추상적으로 보면, 이런 투쟁들의 추진력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즉, 이집트 군사정부나 튀니지 과도정부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그리고 더 빠르게 민주화 과정을 밀고 나아가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중동에서 신자유주의가 구현된 형태 때문에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무바라크 정권과 벤 알리 정권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은 이집트와 튀니지 사회의 정치와 경제를 깊숙이 파헤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당장 이집트 군부가 취약해질 것이다. 나세르 시절의 국가자본주의 유산을 간직한 군부는 이집트 국민소득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경제적 제국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나라에서 앞으로 가능한 시나리오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1974~75년의 포르투갈이다. 포르투갈 혁명은 진보적 군인들의 쿠데타로 시작됐다. 그러나 50년간 지속된 독재 정권을 겨냥한 사네아미엔투 운동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정치적 양극화가 촉진되고 노동자들과 사병들의 급진화가 일어났다. AFM이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18개월이 지나자 포르투갈은 1930년대 이후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에 가장 근접한 나라가 됐다. 사회민주주의 세력들이 주도하고 미국이 조종한 전 유럽 수준의 반동이 득세한 후에야 포르투갈 좌파는 패배했다.
다른 시나리오는 1998년 이후의 인도네시아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아시아 경제 위기가 한창일 때 수하르토 독재 정권(지배 가문 중심으로 정실 자본주의가 구축된 또 다른 사례)이 무너지면서 아래로부터의 대중 동원 공간이 새롭게 창출됐지만, 결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적 허울이 도입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분명히 서방 열강들과 이집트·튀니지의 지배계급들은 포르투갈보다는 인도네시아 시나리오를 더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와 튀니지에서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이 융합됐고, 지금 주민 대다수의 경제 상황이 끔찍하리만큼 안 좋아 이런 시나리오가 성공하기는 매우 어렵다. 주민 대중이 받는 경제적 압력(실업, 특히 청년 실업이나 식료품을 비롯한 기본 생필품 가격 인상뿐 아니라 반란 자체가 관광 산업 등에 미칠 악영향도 있다)이 계속해서 불안정 요인 구실을 할 것이다.
62 파업이 계속되고 있을 뿐 아니라 집세부터 부탄가스 가격까지 수많은 사회적·경제적 쟁점을 둘러싸고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이런 경제투쟁들은 1월 25일 혁명을 배경으로 벌어지고 있어서 정치투쟁과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로자 룩셈부르크가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분석한 고전적 저작에서 지적했듯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더욱이, 이집트에서는 노동자 운동의 힘과 자신감이 증대하면서, 다양한 경제적·정치적 요구들을 내놓는 파업과 공장 점거가 늘고 있다. 마플릿이 이 잡지의 다른 글에서 설명한 독립 노조 건설 발의 이후[《마르크스21》 이번 호에 실린 필립 마플릿의 글을 참고하시오 ― M21] 3월 2일 이집트 독립 노조 연맹 건설을 위한 준비 회의가 열렸다.그러나 운동은 향 방향으로만, 즉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도 움직인다. 모든 중요한 정치적 대중 행동은 그 절정에 이르고 나서는 일련의 경제적 대중 파업들을 낳는다. 그리고 이런 법칙은 하나하나의 대중 파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 일반에도 적용된다. 정치투쟁이 확산돼 명확해지고 강화됨에 따라, 경제투쟁은 후퇴하기는커녕 오히려 확산되고 더욱 조직화되고 강화된다. 이 두 가지 투쟁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정치투쟁의 활발한 공격과 승리는 모두 경제투쟁에 강력한 자극을 준다. 이것은 정치투쟁의 활발한 공격과 승리가 노동자들에게 처지 개선을 위한 투쟁으로 시야를 넓혀 주고 또 투쟁 의지를 강화함과 아울러 노동자들의 투쟁 정신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치 행동의 물결이 고양된 뒤에는 언제나 수많은 경제투쟁의 싹을 틔우는 기름진 퇴적물이 남고, 또 그 역도 마찬가지다. 자본에 맞선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이 휴지기를 맞이할 때마다 노동자들을 지탱해 준다. 말하자면,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에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노동계급 역량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다. 바로 이 저수지에서 정치투쟁은 늘 새로운 힘을 끌어내는 동시에, 곳곳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지칠 줄 모르는 경제적 공병工兵들을 각각의 첨예한 충돌로 끌고 간다. 그러면 여기서 대규모 정치투쟁들이 갑자기 폭발한다. 한 마디로 말해, 경제투쟁은 운동을 하나의 정치적 초점에서 다른 초점으로 나아가게 하는 전달 장치다. 정치투쟁은 경제투쟁의 토양을 주기적으로 기름지게 한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는 끊임없이 자리를 바꾼다. 따라서 대중 파업의 시기에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현학적인 도식들이 설명하는 것과 달리, 완전히 분리되거나 서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서 서로 얽혀 있는 두 측면일 뿐이다. 이 두 요소의 통일이 바로 대중 파업이다.
64 물론 이집트 지배계급이 이런 과정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군사정부는 무바라크가 2월 초에 타흐리르 광장 시위대에게 써 봤다가 실패한 방법, 즉 직접적인 반혁명적 강압책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군부는 활동가들을 조용히 체포하고 고문했다. 일부 활동가들은 군사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받기도 했다. 국제 여성의 날(3월 8일)에 깡패들이 여성 시위대를 공격하고 카이로 북부 모카탐에서 소수파 기독교도인 콥트교도를 공격한 것을 SSIS의 반격으로 풀이하는 활동가들도 있다. 65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이런 역동적 상호작용 속에 트로츠키가 말한 “민주주의 혁명이 즉시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전환하며 그럼으로써 연속혁명이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리비아에서는 카다피가 억압과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를 결합해서 권력을 유지할 수도 있겠지만, 이집트에서는 대중 투쟁의 확산과 민중의 조직화 수준을 볼 때 단기적으로는 그런 방식이 통할 것 같지 않다. 이집트에서는 다양한 지역사회와 작업장에서 혁명 수호 위원회들이 건설됐다. 다른 시나리오는 정치적 중재 기구들(그람시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매우 복잡한 구조”를 이루는 “참호 체계들”이라고 부른 것)을 발전시키는 것일 텐데, 그런 기구들은 1954년 자유장교단이 반대파들을 결정적으로 분쇄한 이후 이집트에서는 기껏해야 하찮은 존재였을 뿐이다.67 그런데 무슬림형제단이 부활한 바로 그때 무장 지하드 단체들은 정권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고, 그래서 지하드 투사들은 외국으로 나가 알카에다 결성을 지원했다.
이집트의 자유주의 세력(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아이만 누르, 역사적인 와프드당이 대표적이다)은 너무 허약해서 믿고 의지할 만한 대상이 못 되는 듯하다. 그러나 무슬림형제단은 사뭇 다르다. 서방에서는 이슬람 혐오를 바탕으로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억측이 난무하지만, 사실 무슬림형제단은 매우 모호하고 이질적인 단체로서 역사적으로 다양한 형태를 띠어 왔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대중적인 반反식민지 운동이었다가 나중에 나세르에게 억압당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는 사메 나기브가 말한 ‘포퓰리스트 정치 세력’으로 되살아나서 대학교와 전문가 단체와 빈민가에 강력한 기반을 구축했다. 그 덕분에 비교적 부정이 덜했던 2005년 의회 선거에서는 거의 20퍼센트의 의석을 확보하기도 했다.확고하게 친자본주의적인 무슬림형제단 지도부는 더 세속적인 반정부 세력들과의 동맹을 옹호하는 분파(그래서 2000년대 중반에 [팔레스타인·이라크 ― 옮긴이] 점령과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키파야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카이로 회의에서 나세르주의자들이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협력했다)와 정권에 순응하는 것을 선호하는 정치적 침묵파로 분열해 있다. 1월 25일 혁명 전에는 후자가 우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슬림형제단 활동가들이 항쟁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무슬림형제단의 근본적으로 친자본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그들은 파업 물결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틀림없이 많은 노동자들은 지난 몇 년 동안 무슬림형제단을 가장 강력한 야당 세력으로서 지지해 왔다.
68 비록 제2차세계대전 후에 공산당과 무슬림형제단 때문에 와프드당의 지배력이 약해졌지만, 나세르는 반反식민지 민족주의(무슬림형제단과 공산당 모두 나름으로 지지한)의 영향력도 이용하고 억압과 경제 개혁을 병행하는 방식도 사용한 덕분에 이집트 노동계급을 국가자본주의 체제에서 종속적 지위로 격하시킬 수 있었다.
20세기 상반기 이집트 노동자 운동의 역사적 발전에서 나타난 특징은 ‘노동자주의’(경제 쟁점들을 중심으로 노동계급을 조직화하려는 전투적 경향)와 ‘포퓰리즘’(영국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계급을 초월해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경향)의 결합이었다. 그 덕분에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세력인 와프드당이, 조얼 베이닌과 자차리 로크먼의 표현을 빌리면 “노동운동에서 이데올로기적·조직적 패권 세력”이 될 수 있었다.69 이와 같은 선도적 행동들의 운명은 많은 우연적 요인들에 달려 있다. 그러나 비록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매우 작고 약한 세력이지만 1월 25일 혁명과 이집트 노동자 운동의 발전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집트 노동자들이 분명한 정치적 주장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도와준다면, 중동 전역에서 엄청나게 거대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오늘날의 이집트 상황은 사뭇 다르다. 그렇지만 무슬림형제단의 조직적 자원과 매우 모호한 정치적·사회적 메시지(“이슬람이 해결책이다”) 때문에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에서 독립적인 노동계급 정치가 발전하는 것을 막는 데서 결정적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형제단이 위험한 점은 토니 블레어 같은 자들이 떠들어대는 이슬람주의적 ‘급진화’가 아니라 그들이 보수적 세력으로서 잠재력이 있다는 점이다(비록 그런 구실을 하는 것 때문에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겠지만 말이다). 이것은 아랍 혁명의 특징이 ‘중앙이 없다’는 점이라고 열렬히 찬양하는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잘 보여 준다. 운동 안에서 더 급진적인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조직화하지 않는다 해서, 다른 세력들도 그렇게 조직화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사실, 무바라크가 몰락한 후 이집트에서는 수많은 신생 정당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다행히 민주적노동자당Democratic Workers Party도 창당했다.주
-
출처: Alex Callinicos, ‘The Return of the Arab Revolution’, International Socialism 130(Spring 2011).
↩
- Benjamin, 1970, pp260, 263, 266. 특히 필립 마플릿이 제공해 준 분석과 정보에 감사한다. ↩
- Benjamin, 1970, p259. ‘역사 철학에 관한 테제’를 비평적으로 다룬 글은 Callinicos, 2004, 제5장을 참조하시오. ↩
- 예컨대 Batatu, 1979, Part V, Beinin and Lockman, 1987, chs. XIII and XIV, and Gordon, 1992를 참조하시오. 이집트·이라크에서 나타난 대중 운동과 자유장교단의 상호 작용을 다룬 앤 알렉산더Anne Alexander의 글 초안을 읽은 것도 내게 도움이 됐다. 알렉산더의 유익한 조언에 매우 감사한다. ↩
- El-Mahdi and Marfleet, 2009.[《마르크스21》 이번 호에 이 책에 실린 두 글을 번역 수록했다. 라밥 엘 마흐디와 사메 나기브의 글을 참고하시오 ― M21] ↩
- Marx, 1971, p21. ↩
- Watkins, 2010, p20. ↩
- Callinicos, 2010, pp6-13. ↩
- Duménil and Lévy, 2011, p22. ↩
- Callinicos, 2010, p6. ↩
- http://web.worldbank.org/WBSITE/EXTERNAL/COUNTRIES/MENAEXT/TUNISIAEXTN/0,,menuPK:310024%7EpagePK:141132%7EpiPK:141107%7EtheSitePK:310015,00.html. ↩
- http://web.worldbank.org/WBSITE/EXTERNAL/COUNTRIES/MENAEXT/EGYPTEXTN/0,,menuPK:287166~pagePK:141132~piPK:141107~theSitePK:256307,00.html. ↩
- 예컨대 Waterbury, 1983을 참조하시오. ↩
- Bush, 2009. ↩
- Alexander, 2011.[《마르크스21》 이번 호에 실린 앤 알렉산더의 ‘독재 정권의 무덤을 판 사람들’ ― M21] ↩
- Al-Malky, 2010. ↩
- El-Naggar, 2009, p42. ↩
- http://arabworld.worldbank.org/content/awi/en/home/featured/youth_programs.html. ↩
- Beinin, 2009, p77. ↩
- Fahim, Slackman, and Rohde, 2011. ↩
- Lewis, 2011. ↩
- Kornblihtt and Magro, 2011. ↩
- Schwartz, 2009, p110. pp164-71도 참조하시오. ↩
- Chossudovsky, 2011. ↩
- Sadiki, 2011. ↩
- Trudell, 2011. ↩
- Sargent, 2011. ↩
- 데이비드 맥낼리는 대침체가 ‘대저항’을 낳고 있다고 지적한다. 비록 그가 가장 중요하게 언급하는 사례들(2000~05년 볼리비아, 2006년 멕시코 오악하카)은 경제 위기 발발에 선행하긴 했지만 말이다. McNally, 2011. ↩
- Friedman, 2011c. ↩
- Friedman, 2011a. ↩
- Chomsky, 1999, pp194-5. ↩
- Soldz, 2011. ↩
- Beaugé, 2011. ↩
-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이프 카다피는 2010년 5월 25일 다름 아닌 랠프 밀리밴드 특별 추모 행사에서 ‘리비아: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http://www2.lse.ac.uk/publicEvents/events/2010/20100525t1830vLSE.aspx. ↩
- Giddens, 2007. ↩
- Business Week, 2007. ↩
- Pilkington, 2011. ↩
- Pew Research Center, 2010. ↩
- Gates, 2011. ↩
- McGregor, 2011. ↩
- Gardner, 2011b. ↩
- Shavit, 2011. ↩
- Ali, 2011. ↩
- Trotsky, 1967, I, p15. ↩
- Hardt and Negri, 2011. ↩
- Gramsci, 1971, p196. ↩
- Temlali, 2011. ↩
- Beinin, 2009, p77. ↩
- Gramsci, 1978, p198. ↩
- Trotsky, 1972, p288. 이 차이를 더 깊이 다룬 논의는 Callinicos, 1991, pp50-66을, 관련된 주제로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차이를 다룬 논의는 Rees, 1999를 보시오. ↩
- Friedman, 2011b. ↩
- http://wikileaks.ch/cable/2008/09/08CAIRO2091.html. ↩
- 2011년 2월 22일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이 런던에서 주최한 세미나 “이집트, 튀니지와 중동 혁명”에서 발표한 내용. http://www.isj.org.uk/?id=716에서 동영상을 볼 수 있다. ↩
- Gardner, 2011a. ↩
- Allam and Khalaf, ↩
- Trotsky, 1967, I, p16. ↩
- 독일 혁명은 Harman, 1982와 Broué, 2006을 보시오. ↩
- 이라크 혁명의 기원, 과정, 결과를 자세히 다룬 한나 바타투Hanna Batatu의 역사책은 걸작이다. 1963년 2월 쿠데타에서 CIA가 어떤 구실을 했는지를 요르단 국왕 후세인이 설명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Batatu, 1978, pp985-6을 보시오. ↩
- Kapuściński, 1982, p114. ↩
- Marshall, 1988, 제2장과 Poya, 1987을 보시오. ↩
- Warrick, 2011. ↩
- Clover and Khalaf, 2011. ↩
- Charbel, 2011. ↩
- Luxemburg, 1970, p185. ↩
- Trotsky, 1969, p278. 따라서 닐 데이비슨Neil Davidson이 최근 이 잡지[《인터내셔널 소셜리즘》 ― 옮긴이]에 실린 글에서 “연속혁명론”을 “역사적 개념”이라고 주장한 것은 약간 성급했다. 비록 데이비슨은 스스로 몇 페이지 뒤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불균등·결합 발전이 만들어 낸 “고유한 불안정성”에 “연속혁명의 가능성”이 담겨 있다고 말하면서 모순된 주장을 하지만 말이다. Davidson, 2010, pp195, 197을 보시오. ↩
- Ozman, 2011. ↩
- Gramsci, 1971, p235. ↩
- Naguib, 2009, p114. [《마르크스21》 이번 호에 실린 사메 나기브의 글] ↩
- Beinin and Lockman, 1987, p450; 대체로 Part Two를 보시오. 남아공의 맥락에서 노동자주의와 포퓰리즘의 변증법을 다룬 논의는 Callinicos, 1988, 특히 pp191-194를 보시오. ↩
- Shukrallah and El-Abbas, 2011. ↩
참고 문헌
Al-Malky, Rania, 2010, “In Egypt, A Fair Minimum Wage in Inevitable”, The Daily News Egypt (17 April), http://www.thedailynewsegypt.com/editorial/in-egypt-a-fair-minimum-wage-is-inevitable-dp1.html
Ali, Tariq, 2011, “This is an Arab 1848, But US Hegemony is Only Dented”, Guardian (22 February), 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2011/feb/22/arab-1848-us-hegemony-dented
Alexander, Anne, “The Gravedigger of Dictatorship”, Socialist Review (March), http://www.socialistreview.org.uk/article.php?articlenumber=11580
Allam, Abdeer, and Roula Khalaf, 2011, “Gas Leak in the House”, Financial Times (10 March).
Batatu, Hanna, 1978, The Old Social Classes and the Revolutionary Movements of Iraq (Princeton University Press).
Beaugé, Florence, 2011, “Leur ami Ben Ali”, Le Monde (18 February).
Beinin, Joel, 2009, “Workers’ Struggles under ‘Socialism’ and Neoliberalism”, in El-Mahdi and Marfleet, 2009.
Beinin, Joel, and Zachary Lockman, 1987, Workers on the Nile: Nationalism, Communism, Islam, and the Egyptian Working Class, 1882-1954 (Princeton University Press).
Benjamin, Walter, 1970, Illuminations (Jonathan Cape).
Broué, Pierre, 2006, The German Revolution, 1917-1923 (Brill).
Bush, Ray, 2009, “The Land and the People”, in El-Mahdi and Marfleet, 2009.
Business Week, 2007, “The Opening of Libya” (12 March), http://www.businessweek.com/magazine/content/07_11/b4025061.htm
Callinicos, Alex, 1988, South African between Reform and Revolution (Bookmarks).
Callinicos, Alex, 1991, The Revenge of History (Polity).
Callinicos, Alex, 2004, Making History (Brill).
Callinicos, Alex, 2010, “Analysis: The Radical Left and the Crisis”, International Socialism 126 (spring).
Charbel, Beno, “After 50-Year Hiatus, Egypt’s First Independent Labour Union is Born”, Al-Masry Al-Youm (2 March), http://www.almasryalyoum.com/en/node/337515
Chomsky, Noam, 1999, Fateful Triangle: The United States, Israel and the Palestinians (Pluto).
Chossudovsky, Michel, 2011, “Tunisia, the IMF, and Worldwide Poverty”, Pacific Free Press (23 January), http://www.pacificfreepress.com/news/1/7854-tunisia-the-imf-and-worldwide-poverty.html
Clover, Charles, and Roula Khalaf, 2011, “Egyptian Military Uneasy over Business Ties”, Financial Times (28 February).
Davidson, Neil, 2010, “From Deflected Permanent Revolution to the Law of Uneven and Combined Development”, International Socialism 128 (autumn).
Duménil, Gérard, and Dominique Lévy, 2011, The Crisis of Neoliberalism (Harvard University Press).
El-Mahdi, Rabab, and Phil Marfleet, eds, 2009, Egypt: The Moment of Change (Zed).
El-Naggar, Ahmad El-Sayed, “Economic Policy: From State Control to Decay and Corruption”, in El-Mahdi and Marfleet, 2009.
Fahim, Kareen, Michael Slackman, and David Rohde, 2011, “Egypt’s Ire Turns to Confidant of Mubarak’s Son”, New York Times (6 February).
Friedman, George, 2011a, “The Egypt Crisis in a Global Context: A Special Report”, Stratfor Global Intelligence (30 January), http://www.stratfor.com/analysis/20110130-the-egypt-crisis-in-a-global-context-a-special-report?utm_source=SpecialReport&utm_medium=email&utm_campaign=110130&utm_content=readmore&elq=c424f77855224e0389f5502896006101
Friedman, George, 2011b, “Egypt: The Distance between Enthusiasm and Reality”, Stratfor Global Intelligence (14 February), http://www.stratfor.com/weekly/20110213-egypt-distance-between-enthusiasm-and-reality?utm_source=GWeekly&utm_medium=email&utm_campaign=110214&utm_content=readmore&elq=99def9e522ab44aba611bc5b991fa098
Friedman, George, 2011c, “Revolution and the Muslim World”, Stratfor Global Intelligence (22 February), http://www.stratfor.com/weekly/20110221-revolution-and-muslim-world?utm_source=GWeekly&utm_medium=email&utm_campaign=110222&utm_content=readmore&elq=474ae85e1a5040abb5c36d0580b360ca
Gardner, David, 2011a, “Arab Rulers Confront a New World”, Financial Times (13 February).
Gardner, David, 2011b, “Chill Regional Winds Blow Across Israel”, Financial Times (14 March).
Gates, Robert M, 2011, “Speech, United States Military Academy (West Point, NY)” (25 February), http://www.defense.gov/speeches/speech.aspx?speechid=1539
Giddens, Anthony, 2007, “My Chat with the Colonel”, Guardian (9 March), 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2007/mar/09/comment.libya
Gordon, Joel, 1992, Nasser’s Blessed Movement: Egypt’s Free Officers and the July Revolution (Oxford University Press).
Gramsci, Antonio, 1971,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Lawrence & Wishart).
Gramsci, Antonio, 1978, Selections from the Political Writings 1921-1926 (Lawrence & Wishart).
Hardt, Michael, and Toni Negri, 2011, “Arabs are Democracy’s New Pioneers”, Guardian (24 February), 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2011/feb/24/arabs-democracy-latin-america?INTCMP=SRCH
Harman, Chris, 1982, The Lost Revolution (Bookmarks).
Kapuściński, Ryszard, 1982, Shah of Shahs (Picador).
Kornblihtt, Juan, and Bruno Magro, 2011, “El norte de África en el epicentro de la crisis mundial”, El Aromo, 59 (March-April), http://www.razonyrevolucion.org/ryr/index.php?option=com_content&view=article&id=1395%3Ael-norte-de-africa-en-el-epicentro-de-la-crisis-mundial&catid=201%3Ael-aromo-nd-59-qcunado-digo-futuroq&Itemid=120; English translation by Leonardo Kosloff at http://www.facebook.com/notes/leonardo-kosloff/north-africa-at-the-epicenter-of-world-crisis/10150423086445720
Lewis, Aidan, 2011, “Tracking Down the Ben Ali and Trabelsi Fortune”, BBC News Africa (31 January), http://www.bbc.co.uk/news/world-africa-12302659
Luxemburg, Rosa, 1970, The Mass Strike, the Political Party, and the Trade Unions, in Mary-Alice Waters, ed, Rosa Luxemburg Speaks (Pathfinder); also in http://www.marxists.org/archive/luxemburg/1906/mass-strike/index.htm
McGregor, Richard, “US Loses its Appetite for Job as World’s Policeman”, Financial Times (3 March).
McNally, David, 2011, Global Slump: The Economics and Politics of Crisis and Resistance (PM Press).
Marshall, Phil, 2011, Revolution and Counter-Revolution in Iran (Bookmarks).
Marx, Karl, 1971,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Lawrence & Wishart).
Naguib, Sameh, 2009, “Islamism(s) Old and New”, in El-Mahdi and Marfleet, 2009.
Ozman, Ahmed Zaki, 2011, “The Rise and Fall of Egypt’s Notorious State Security”, Al-Masry Al-Youm (10 March), http://www.almasryalyoum.com/en/node/346917
Pew Research Center, 2010, “Obama More Popular Abroad Than At Home, Global Image of U.S. Continues to Benefit” (17 June), http://pewglobal.org/2010/06/17/obama-more-popular-abroad-than-at-home/
Pilkington, Ed, 2011, “US Firm Monitor Group Admits Mistakes over $3m Gaddafi Deal”, Guardian (4 March), http://www.guardian.co.uk/world/2011/mar/04/monitor-group-us-libya-gaddafi?intcmp=239
Poya, Maryam, 1987, “Iran 1979: Long Live Revolution! … Long Live Islam?”, in Colin Barker, ed, Revolutionary Rehearsals (Bookmarks).
Rees, John, 1999, “The Socialist Revolution and the Democratic Revolution”, International Socialism 83 (summer).
Sadiki, Larbi, 2011, “The ‘Bin Laden’ of Marginalisation” (14 January), http://english.aljazeera.net/indepth/opinion/2011/01/201111413424337867.html
Sargent, Greg, 2011, “Public Employees Not Such an Easy Scapegoat After All” (25 February), http://voices.washingtonpost.com/plum-line/2011/02/public_employees_not_such_an_e.html
Schwartz, Herman M, 2009, Subprime Nation: American Power, Global Capital, and the Housing Bubble (Cornell University Press).
Shavit, Ari, 2011, “The Arab Revolution and Western Decline”, Haaretz (3 February), http://www.haaretz.com/print-edition/opinion/the-arab-revolution-and-western-decline-1.340967
Shukrallah, Salma, and Nourhan El-Abbas, 2011, “January Revolution Generates a New Egyptian Political Map”, Ahram Online (4 March) http://english.ahram.org.eg/NewsContentPrint/1/0/6863/Egypt/0/Januaray-Revolution-generates-a-new-Egyptian-polit.aspx
Soldz, Stephen, 2011, “The Torture Career of Egypt’s New Vice President: Omar Suleiman and the Rendition to Torture Program”, Dissident Voice (31 January), http://dissidentvoice.org/2011/01/the-torture-career-of-egypts-new-vice-president-omar-suleiman-and-the-rendition-to-torture-program/
Temlali, Yassin, 2011, “Pourquoi l’UGTT a joué un rôle aussi important dans l’intifada tunisienne”, Maghreb insurgent (25 January), http://www.maghrebemergent.com/actualite/maghrebine/1976-pourquoi-le-syndicat-a-joue-un-role-aussi-important-dans-lintifada-tunisienne.html
Trotsky, Leon, 1967,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3 vols. (Sphere).
Trotsky, Leon, 1969, The Permanent Revolution and Results and Prospects (Merit).
Trotsky, Leon, 1972, The Revolution Betrayed.
Trudell, Megan, 2011, “Mad as Hatters? The Tea Party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 International Socialism 129 (winter).
Warrick, Joby, 2011, “In Mubarak’s Final Hours, Defiance Surprises US and Threatens to Unleash Chaos”, Washington Post (12 February).
Waterbury, John, 1983, The Egypt of Nasser and Sadat: The Political Economy of Two Regimes (Princeton University Press).
Watkins, Susan, 2010, “Shifting Stands”, New Left Review, II/61 (January/February 2010), http://newleftreview.org/?page=article&view=2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