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세계를 뒤흔드는 아랍 혁명 ― 의미와 전망
아랍 민족주의의 부상과 좌절 *
때는 1956년 7월 26일. 수십만 명의 인파가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의 연설을 들을려고 알렉산드리아 만시야 광장에 몰려들었다. 긴장된 분위기였다. 나세르가 나일강에 댐을 지을려고 미국에 차관을 요청했다가 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굴욕적인 거절을 당한 것이 바로 며칠 전이었다. 이집트는 그 전 해인 1955년 체코공화국에게 무기를 지원받은 바 있었다. 덜레스의 의도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반식민주의 언사로 중동 전역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나세르의 콧대를 꺾어놓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제3세계 지도자들에게 냉전 체제에서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1 청중이 웃고 환호하는 동안 포트 사이드에서는 이집트 특공대원들이 수에즈운하회사 본사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드 레셉스”라는 고유명사가 특공대에게 작전 개시를 명령하는 암호였던 것이다. 2 나세르는 연설을 다음과 같은 간결한 선언으로 끝맺었다.
나세르는 연설 중에 세계은행 총재 유진 블랙을 “모기지 대출 식민주의mortgage colonialism” 장사꾼에 비유하며 청중을 웃게 했다. 그는 유진 블랙을 19세기에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회사의 사장이었던 페르디낭 드 레셉스에 비유했다.우리가 굶어 죽는 동안 국가 안의 국가처럼 행세했던 그 제국주의 회사가 우리에게서 강탈해 간 모든 것을 우리는 되찾을 것입니다. … 정부는 대통령령으로 수에즈운하회사를 국유화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이집트의 이름으로 공화국 대통령은 수에즈운하회사가 이집트 기업이 됐음을 선포합니다.
4 그러나 옛 제국주의 열강인 영국과 프랑스 지배자들의 격분에 대면 덜레스의 반응은 오히려 담담한 편이었다. 런던과 파리에서는 정치인들이 서로 경쟁하듯 나세르를 비난하고 나섰다. 노동당(당시 야당이었던) 당수 휴 게이츠켈은 나세르를 히틀러에 비유했다. 앤서니 이든도 나세르를 히틀러에 비유하면서 “이것이 파시스트 정부의 행태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고, 파시즘에 양보했을 때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도 우리는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5
알렉산드리아의 군중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은 마침내 식민 지배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실감했다. 이제 더는 세계 열강들이 이집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지 못할 터였다. 덜레스의 거절에 대한 나세르의 이 같은 응수는 워싱턴을 충격에 빠뜨렸다. 덜레스는 영국 보수당 정부 수상 앤서니 이든에게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토해내야 한다”고 말했다.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사실 그 전부터 나세르를 손봐 줄 명분을 찾고 있었다. 프랑스 군대는 알제리에서 민족 해방 투쟁을 분쇄하려고 야만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 지도자들은 카이로를 은신처로 삼았고 나세르가 이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이든은 그 나름으로 나세르에 대한 강렬한 개인적 증오를 키웠다. 1956년 3월 그는 외무부 부장관 앤서니 너팅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나세르를 고립시킨다거나 “중립화”한다는 둥의 헛소리는 다 뭔가? 내가 원하는 것은 나세르의 파멸이라는 걸 모르겠는가? 내가 원하는 것은 나세르 제거이고, 만약 자네나 외무부가 그 점에 이의가 있다면 각료 회의에 나와서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걸세.
7 오직 이라크 정부만이 변함없이 영국에 충성을 바쳤다. 그래서 영국 관리들도 이라크를 이용해 중동 전역에서 들끓고 있던 민족주의 움직임을 견제하려 했다. 이라크·이란·터키·파키스탄·영국이 1955년에 체결한 군사 동맹인 바그다드 협정을 고안한 인물도 이라크 총리 누리 알 사이드였다. 이든은 나세르를 재빨리 타격하면 세력 균형이 다시 영국 편으로 기우리라고 믿었다.
이든의 진노는 중동이 영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위기감의 반영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말기에 이집트·이라크·요르단은 친영 왕정이 통치하고 있었다. 수십만에 이르는 영국 병력이 중동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인도와 기타 영국 식민지로 통하는 길목인 수에즈 운하는 영국이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여 만에 나세르가 이끄는 민족주의 군 장교들이 이집트 왕정을 타도하고, 영국군이 오랜 게릴라 전투와 대중 시위 끝에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하고, 요르단에서는 후세인 국왕이 대중의 압력에 떠밀려 요르단 군의 영국인 사령관 존 베이곳 글럽을 해임하기에 이른 것이다.8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나세르를 축출하려던 영국·프랑스·이스라엘, 이 세 나라의 책략은 치욕적인 실패로 끝났다. 1956년 11월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영국 정부는 한 주 사이에 유류 배급제 도입에 따른 공포와 혼란, 파운드화 가치 폭락,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의 균열, 내각 분열, 국내와 중동에서의 시위 확산을 한꺼번에 겪었다. 실의에 빠진 이든은 병가를 내고 1957년 1월 결국 사임했다.
그러나 수에즈 사태의 결과는 이든의 기대를 저버렸다.반대로, 나세르는 수에즈 사태를 거치면서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카이로와 바그다드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나세르의 사진을 들고 행진했고 <타임> 표지에도 나세르의 사진이 실렸다. 1956년 11월에 일어난 사건들은 민족 해방이 가능하며 국가가 반제국주의 투쟁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입증해 주는 듯했다. 그러나 한 꺼풀 벗겨 보면 나세르의 승리는 그의 전략에 내재한 한계도 드러냈다. 수에즈 사태는 군대와 집권당을 비롯한 이집트의 핵심 국가 기관들의 약점을 보여 주기도 했던 것이다. 침략군을 몰아낸 진정한 힘은 오히려 아래로부터 나왔다. 1940년대에 영국군의 점령에 맞서는 대중 운동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했던 공산주의자 활동가들이 이번에도 대중적 저항을 이끌었다. 그들은 시민군을 조직했고, 무기를 밀수해 점령당한 포트 사이드에서 게릴라 전투를 계속 벌였고, 수많은 자원자들을 모집해 군사 훈련을 시켰다. 한편 중동 곳곳에서 일어나 영국과 동맹한 정부들을 뒤흔든 대규모 시위들은 결코 나세르의 사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 시위들은 자체적 생명력을 지닌, 아랍 민중의 오랜 해방 투쟁의 최신 국면이었다.
격동의 이집트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집트에서는 한동안 영국 제국주의와 현지의 친영 지배계급에 맞선 대중 시위가 일어났다. 이 단계에서 이집트의 운동은 노동조합, 좌파 민족주의 단체, 공산주의 정당, 학생 단체, 농민 단체 들을 포함한 다양한 반정부 세력들의 광범한 연합을 바탕으로 했다. 제국주의에 맞선 이들의 도전은 기존 정치 질서에 맞선 도전이기도 했다.
9 왕정을 무너뜨린 군 장교들은 이런 사회적 위기를 이용하긴 했지만 그 위기를 촉발시킨 운동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나세르는 비록 무슬림형제단과 공산주의 조직인 민족해방민주운동Democratic Movement for National Liberation 같은 다양한 정파 소속의 활동가들과 협력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장교들이 다른 세력으로부터 독자성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10 그래서 자유장교단Free Officers은 1952년 7월 권력을 장악하자 곧바로 독립 노조와 좌파 들을 공격했고 그 다음으로 무슬림형제단을 공격해서 자신들의 독자성을 확립했다. 11
1952년에 이르러서는 대중 시위가 국가 권력을 기진맥진한 지경에 빠뜨렸다. 군대 내에서는 불만이 고조됐고 수에즈 운하 지대에서는 영국군에 맞선 게릴라 항쟁이 정부를 골탕 먹였다. 1952년 1월 25일에 일어난 카이로 화재는 옛질서의 병폐를 보여 주는 가장 두드러진 징후였다.나세르가 쓴 팸플릿 《혁명의 철학》은 다음과 같이 대중 운동을 지도부 없는 오합지졸로 묘사하면서 장교단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나는 우리가 전위 부대 구실을 하게 될 것이고, 몇 시간이면 이 소임이 끝날 것이라 상상했다. 우리 뒤에는 대중이 따라올 것이고, 이들이 일사불란한 대열을 갖추고 위대한 목표를 향해 행진해 나가리라 상상했다. … 전위는 자기 소임을 다했다. 압제의 진지를 급습했고, 독재자를 몰아낸 다음 대기했다. …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마침내 군중의 끝없는 행렬이 나타났다. 그러나 상상과 현실은 얼마나 달랐던가. 군중은 영락없이 패잔병 행색을 하고 있었다.
13 이렇게 운동의 이름으로 국가를 이용하는 데서 시작해서 국가를 운동 그 자체로 여기게 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1953년 1월 창당한 유일 합법 정당인 해방당Liberation Rally은 군부가 통치하는 3년간의 “이행기” 동안 구舊정당들을 대체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나세르는 운동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국가가 곧 사회 변혁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14 1952년 10월에는 학생회들이 해산됐고 1953년 1월에는 모든 정당들이 해산됐다. 무슬림형제단은 처음에는 용인됐지만, 1954년 10월 나세르 암살 시도가 있고 나서는 공격 받기 시작했다.
자유장교단은 해방당을 창설하는 한편 대중 운동의 중핵을 이루던 조직들을 체계적으로 탄압했다. 쿠데타 이후 몇 주 만에 알렉산드리아 인근의 카프르 알 다와르에서 일어난 섬유 노동자들의 파업은 혹독하게 진압됐다. 파업 참가자 두 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좌파 노조 지도자들이 구속됐고 그 자리에 친정부 인사들이 선출됐다.그러나 국가를 이용해서 운동의 장기적 목표 일부를 달성하는 것은 운동 단체들을 해산시키는 것보다 더 더딘 과정임이 드러났다. 1952년 9월에 단행한 토지 재분배를 제외하면 자유장교단의 집권 초기 몇 년간의 실적은 개혁보다 탄압에 쏠려 있었다. 비록 1956년의 사건들을 계기로 나세르는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의 자산을 몰수한 데 이어 경제에 국가 개입을 확대하는 쪽으로 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1956년 이전에도 이미 나세르는 모종의 ‘위로부터의 반제국주의’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1955년의 반둥 회의에서 나세르는 아랍 국가들이 미국과 소련 중 어느 쪽에도 붙지 말고 힘겹게 얻어낸 독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9월에 그는 체코공화국한테서 소련제 무기를 수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정책들은 모두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 즉, 나세르는 경제·사회 발전의 필요성과 강대국들의 행동, 이 둘 모두 때문에 더 급진적인 대외 정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집트와 체코 간의 무기 거래가 성사되기 전에 나세르는 이미 무기를 구입하려고 미국에 접근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었다.
실패한 음모
15 이스라엘한테는 두둑한 보상이 돌아갈 참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미 이스라엘에 무기와 전투기를 지원하고 있었고, 이스라엘 디모나에 지을 핵 발전소를 위해 프랑스가 핵 기술과 우라늄 연료를 제공하기로 합의한 것도 이 세브르 회의에서였다. 16 결국 10월 29일 이스라엘 군대가 시나이 반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집트 군대가 침략자들과 교전을 벌이는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각본대로 양측에 휴전을 요구했다. 10월 31일 밤 영국이 카이로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엿새 뒤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수에즈 운하 입구에 위치한 포트 사이드에 상륙했다.
1956년 여름, 세계 언론들이 수에즈 운하의 미래를 둘러싼 외교 분쟁을 보도하느라 여념이 없는 동안 영국과 프랑스 정부 관리들은 나세르에 맞서 군사적 행동에 나설 명분을 찾아 내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10월 무렵에는 구체적인 군사 행동 계획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파리 인근 세브르의 어느 별장에서 열린 비밀 회의에서 프랑스·영국·이스라엘 관리들은 이스라엘 군이 먼저 시나이 반도를 공격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나서서 이스라엘과 이집트 군대 양쪽에 수에즈 운하 지대에서 철수하라는 최후통첩을 날린다는 계획을 짰다. 이들의 계산대로라면 나세르는 이 최후통첩에 응하면 시나이 반도와 수에즈 운하를 잃게 될 테니 최후통첩에 응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 도시들을 폭격하고 포트 사이드에 군대를 상륙시켜 수에즈 운하 입구를 장악하면 되는 것이었다.17 그러나 이런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이스라엘 군의 공세를 꺾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시나이 반도의 이집트 부대들은 치열하게 싸웠고 밀타 수로에 투입된 이스라엘 공수부대에 심각한 병력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일단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전투에 합류하자 전세는 이집트 군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해졌다. 나세르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합세로 시나이 반도의 이집트 병력이 포위당할 것을 재빨리 간파하고 전면 후퇴를 명령했다. 나세르의 최측근 고문 가운데 한 명이던 저널리스트 모하메드 하사네인 헤이칼은 바로 이 시점에 이집트 군 사령부 내에서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최고 사령관이자 나세르의 오랜 친구였던 압둘 하킴 아메르가 침착성을 잃고 후퇴 명령을 거부했지만 결국 나세르가 명령을 관철시킨 것이다. 18
이 음모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이집트의 재래식 군사적 대응이 지닌 문제점이 분명히 드러났다. 이스라엘의 공격은 이집트 군의 허를 찔렀다. 나세르는 외국군이 침략해 올 때는 알렉산드리아를 맨 먼저 공격할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시나이 반도 주둔 병력을 3만 명으로 축소했고 그 가운데 일선 전투 병력은 1만 명밖에 안 됐다. 이집트 군에는 또 다른 문제도 있었는데, 비록 러시아제 무기를 충분히 갖추고는 있었지만 그 무기들이 대부분 아직 실전 배치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19 해방당은 노동조합 일부를 포섭해 공산주의 운동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해방당의 주된 임무는 정부 정책을 지지하는 집회들을 배후 조종하는 것이었다.
군 사령부 내의 혼란이 초래한 피해를 그나마 줄여 준 것은 침략군에 맞선 게릴라 전투에 대비해 민중을 무장시키는 새로운 전략 덕분이었다. 이 전략을 실행하는 데서 나세르 정권의 공식 기구들은 다시 한 번 약점을 드러냈다. 특히 유일한 합법 정치 조직인 해방당이 그랬다. 존 워터베리의 지적처럼, 해방당은 “[나세르 ― 옮긴이] 정권 스스로 불법화한 정당들을 대체하려고 정권이 급조해낸 뻔뻔스러운 임시방편”이었다.민중 저항
20 지하 공산주의 조직인 ‘노동자 전위Workers’ Vanguard’의 지도자였던 노동조합 변호사 유수프 다르위시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세르는 이제 해방당의 무기력한 관료 조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려고 공산주의 운동에 기댔다. 공산주의자 활동가들은 이스라엘 침공 직후 정부가 설립한 민중저항위원회에서 핵심적 구실을 수행했다.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을 군사훈련시키는 일에도 참여했다. 침공 뒤 일주일 동안 개인 화기 1백만 정이 지급됐다.변호사 회관에서 열린 1956년 침공에 반대하는 총회에 참석한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저는 뒷줄에 앉았는데 누군가 다가와 제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죠. “당신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 사람이 형사인 줄 알고 “무엇 때문에 그러시죠?”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해방당에 들어 오십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 그렇게 저는 그들과 함께 일하게 됐고 선전 리플릿도 작성하게 됐습니다.
라일라 알 샬은 카이로에서 민중저항위원회 여성지부 건설을 도왔던 기억을 떠올린다. 당시 카이로대학교 정치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가장 큰 공산주의 조직 중 하나였던 민족해방민주운동의 활동가였다.
많은 여성 지식인들과 학생들과 주부들이 함께했습니다. 우리는 카이로 곳곳에 여성 저항위원회를 건설했습니다. 우리는 군대식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를테면 폭탄 제거술과 사격술 말입니다. 당시에 정부는 공산주의자들과 동맹을 맺고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수에즈 운하 근처에 캠프가 있었는데 그 곳은 [저항위원회에 ― 옮긴이] 자원한 공산주의자들이 훈련 받던 곳이었습니다.
파탈라 마흐러스는 노동자전위에서 활동하던 젊은 공장 노동자이자 노조 활동가였다. 그는 자신과 동지들이 알렉산드리아의 산업 지역 라믈라의 노동자들을 군사훈련시킨 경험을 기억한다. 당시 이 곳에는 2만 명을 고용한 시바히앤코Sibahy&co와 같은 거대한 방직 공장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군 지휘부와 협력해 우리는 공장 부지 옆 공터에 무기 조작 훈련소를 지었습니다. 노동자들은 교대 근무를 끝내고 이곳으로 와서 무기 사용법을 훈련 받곤 했습니다. 끝나고 나면 다음 교대조가 훈련 받으러 왔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조직가와 선동가로서 각자의 재능을 기여했고 자신들의 사회적·정치적 인맥도 활용했다. 공산주의자 교사들은 학생들을 조직해 저항위원회를 건설했고 노조 활동가들은 작업장 동료들을, 학생들은 대학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11월 5일, 영국 공수부대가 수에즈 운하로 들어가는 길목인 포트 사이드에 상륙했다. 같은 시간 프랑스 군대는 반대편 제방에 위치한 포트 푸아드를 점령했다. 이스라엘 군의 진격에 밀린 이집트 군이 지리멸렬하게 철수함에 따라 포트 사이드는 무방비 상태였다. 바로 여기서 민중 저항 전략이 시험대에 올랐다. 파탈라 마흐러스의 증언을 보면,
포트 사이드에는 전투를 할 만한 군대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몇몇 개인과 소수 군인과 소규모 부대뿐이었다. 여성과 아이 들을 포함한 포트 사이드의 민중이 침공에 맞서 저항을 이끌었다. 이들은 냄비와 식칼과 지팡이 등을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싸웠다.
카이로 출신의 젊은 언론인 아미나 샤피크는 저항 세력에 동참하고자 카이로에서 포트 사이드로 몰래 들어왔다. 도시는 폭격으로 폐허가 됐지만 저항이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었다. 그녀의 임무는 침공에 맞선 시위를 다룬 외신 기사들을 선전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저는 해외에서 누가 우리를 지지하는지, 누가 우리 소식을 듣고 있는지, 이집트 바깥에서 어떤 시위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글로 썼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고무하려고 했습니다. 저항을 포기하지 말자고 호소했습니다. 사람들은 지쳤고 식량은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우려 노력했습니다.
포트 사이드 민중의 격렬한 저항은 영국과 프랑스의 계획에 심대한 차질을 빚었다. 영국 정부 관리들은 나세르가 미움 받는 독재자이며 이집트인들은 나세르가 패배하고 축출당하는 것을 환영할 것이라는 자기 최면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파탈라 마흐러스가 설명하듯이,
[민중 저항은 ― 옮긴이] 나세르가 아니라 우리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은 우리 땅을 다시 점령하려 했고, 그 이유는 제국주의 기업이었던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나세르가 우리에게 했던 일을 잊었고 우리와 그의 차이점도 잊었습니다. 감옥과 수용소와 고문도 잊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는 이집트를 점령하려는 제국주의 세력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같은 의견이었습니다.그럼에도 민중저항위원회 내부에는 긴장이 존재했다. 정부 당국이 공산당 활동가들의 독자적 활동을 제약하려 했기 때문이다. 무기 훈련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매일 밤 무기를 반납해야 했고 일부 정부 관리들은 저항위원회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려 했다.
그러는 동안 세계 무대에서는 사태가 빠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 정부와 상의 없이 단독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즉각 휴전하라고 요구하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이 미국과 소련의 지지를 받았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반대에 부딪혔다. 소련 수상 니콜라이 불가닌은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해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이는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위협으로 널리 해석됐다. 영국 파운드화가 폭락하고 반전 시위가 힘을 얻으면서 이든의 내각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외무부 부장관 앤서니 너팅이 사임했다. 파운드화 가치를 떠받치기 위한 미국의 재정적 지원을 확보하고자 이든은 11월 6일 휴전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
28 대사관 관리들은 “윗사람들”에게 영국과 이스라엘 간의 공조는 없었다고 설득하기 위해 막후에서 정신 없이 움직였다. 29 1956년 말 영국 대사가 본국으로 보낸 공문은 이 사태에서 영국이 잃을 것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집트를 상대로 한 군사 공격은 아랍 세계 각지에서 시위를 촉발했다. 이라크에서는 이집트 연대 운동이 정부를 뿌리째 흔들며 친영 지배계급의 취약성과 고립을 보여 줬다. 바그다드 주재 영국 대사관이 발신한 공문들을 보면 11월과 12월 그들이 느끼는 위기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시위가 확대되자 총리인 누리 알 사이드는 자신이 국왕의 섭정관인 압둘라에게 해임당할까 봐 두려워했다.지난 7주 사이 우리는 불리한 사태 흐름 속에서도 이라크와의 외교 관계 단절을 막으려 애썼다. 바그다드 협약의 갑작스러운 해체를 막고자, 이라크 석유 회사의 국유화 또는 이에 대응한 치명적 개입을 예방하고자, 누리 알 사이드가 권좌에 남도록 하고자, 이 곳 관리들의 신뢰와 지지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우리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그러나 실패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라크에서 일어난 시위는 단지 이집트가 선동해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나세르가 중요한 상징적 구실을 한 것은 사실이다. 시위대의 구호에서 나세르의 이름이 끊임없이 등장했고, 이라크 전역의 집과 거리 카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연설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이집트가 이 운동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영국과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도발에 맞선 항의로 출발했다가 경찰의 탄압을 계기로 이라크 정부에 맞선 전면적 시위로 재빨리 번진 이 운동의 역동적 전개 과정이 이를 방증한다.
31 누리 알 사이드는 이 운동의 대표적인 타도 대상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국내에서 탄압을 자행했고 중동 지역에서는 특히 바그다드 협약을 체결해 영국의 이익을 수호하는 데 매진했다.
시위의 원동력은 이집트의 사주가 아니라 대중적 민족 해방 운동의 역량이 커진 데 있었다. 1956년 이전에도 이 운동은 이미 두 차례 정점에 올랐다. 1948년에 포츠머스 조약에 항의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1952년에는 또 다른 반란(인티파다)이 일어났다.32 그것을 보면 많은 시위들이 후웨이시 지구에서 시작됐다. 공산주의자들과 더불어 민족주의자들도 적극 참가했다. 시위대의 구호는 “군사법정 철폐”, “범죄자 누리 알 사이드는 물러가라”, “가말 압델 나세르 만세”, “해방된 아랍 국가들과 조화롭게 공존할 민중의 정부를 원한다” 등이었다. 시위가 정점에 오른 11월 24일 “경찰들이 단검, 권총, 돌맹이, 몽둥이로 무장한 성난 군중에게 사방으로 둘러싸[였다]”. 공식 집계를 보면 이 날 두 명이 사망하고 시위자 27명과 경찰 9명이 다쳤다. 그 다음날에는 울라마, 즉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종교적 의무 수행을 거부했고, 경찰이 거리에서 사라졌으며 시위 진압에 투입된 병사들이 시위대 편으로 넘어갔다.
한나 바타투는 1956년 11월 초 나자프에서 일어난 시위를 상세하게 기록했다.바스라의 사태 전개는 바스라 주재 영국 영사가 바그다드에 있는 자기 상관들에게 주기적으로 보낸 공문에 잘 기록돼 있다. 바스라의 가장 큰 시위는 나자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12월 2일에 일어났다. 시위의 중심지는 바스라 시의 여자 중등학교였다.
다른 학교 학생들이 떼지어 학교 밖으로 모였다. 이들 가운데는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시위를 이끈 듯했다. 이들은 익숙한 반정부 구호, 이집트와 시리아에 동조하는 구호를 외쳤다. … 경찰관을 대동한 교육감 대행이 그 여학교 학생들에게 그와 같은 행동을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34 11월 30일 금요일에 아다디아 중등학교 학생들이 가르비아 중학교 학생들의 시위에 합류하려 했지만 그 전에 경찰한테 해산 당했다. 이튿날인 12월 1일 토요일에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북부의 모술 시에서는 12월 초 시위대와 당국 간에 훨씬 더 심각한 충돌이 벌어졌다. 급기야 무장한 군중이 경찰 본부를 점거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가 군 부대가 투입되면서 점거가 해산되고 사태가 일단락됐다. 모술 주재 영국 부영사였던 C J 버제스는 모술 시 총독과 모술 주둔군 사령관과 한 면담을 기초로 이 시위를 바그다드에 자세히 보고했다. 그의 12월 5일자 보고는 11월 30일과 12월 3일 사이에 모술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들을 상세히 다뤘다.이 두 학교 외에도 무타사리피아[총독 관저] 인근의 샤르키아 중등학교, 무타나 중학교, 합다 중학교, 움 알 라비아인 중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옥상에서 반反누리[알 사이드 ― 옮긴이], 반反서방, 친親나세르 구호를 외치며 행인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학생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조직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경찰이 이 학교들을 에워쌌다. 오후 3시 경 밥 알 신자르에 군중이 모였다. “커다란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주되게 ‘누리는 물러가라’, ‘영국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는 별 특색 없는 성인들이 군중을 이끌었다.” 무장한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했다. 오후 4시에는 경찰 본부가 건물 앞 4백 야드까지 이어진 최대 3천 명의 군중에게 포위됐다. 이때 총독이 군대를 불러들이자 시위대는 해산했다. 시위대는 다음날 다시 모이려 했지만 군대한테 해산 당했다.
제국의 종말? 이라크에서 영국의 지배는 그 후 18개월밖에 더 버티지 못했다. 1958년 7월 혁명이 일어나 왕정과 누리 알 사이드와 바그다드 협정을 쓸어버렸다. 그보다 몇 달 전에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나세르를 수장으로 하는 통일아랍공화국UAR으로 통합을 이룬 터였기에 조만간 이라크도 여기에 합류해서 아랍권의 초super국가가 탄생할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다. 영국의 꼭두각시 국왕들이 중동을 지배하던 시대는 영원히 끝났다.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에 아스완 댐을 건설하는 작업이 곧 시작될 참이었다. 나세르는 이 댐이 이집트 경제의 고속 성장을 위한 초석이 되기를 희망했다. 경제에 국가 개입이 확대됐고 의욕적인 사회 개혁 프로그램이 도입됐다. 나세르가 토지 개혁, 기초 생필품에 대한 보조금, 무상 교육, 공공부문 주도로 일자리 늘리기 등의 재분배 정책을 시행한 결과 1960년대 초에는 가난이라는 것도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곧 퇴치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세르가 승승장구하던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국가를 이용해 민족 해방과 경제 발전을 이루려던 나세르의 전략은 1956년 이후 몇 년 만에 내재적 한계에 봉착했다. 통일아랍공화국의 붕괴는 대중 운동의 지지 없이 ‘위로부터의 혁명’을 수행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보여 줬다. 1958년 초에 시리아의 바트당 지도자들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일아랍공화국이라는 단일 국가로 합치자고 나세르에게 제안했다. 나세르가 명목상의 지도자가 되고, 자신들은 나세르의 권위를 이용해 시리아를 지배하고 라이벌인 공산당을 제압하려는 것이 그들의 속셈이었다. 그러나 나세르는 바트당 인사들을 카이로에 있는 직책에 앉히고 자신의 최측근들을 다마스쿠스[시리아 수도 ― 옮긴이]의 요직에 앉힘으로써 바트당 지도자들을 주변화시켰다. 나세르는 또한 시리아 노동조합들을 국가에 종속시키고 정당들을 불법화했다.
그러나 막상 통일아랍공화국의 붕괴를 촉발한 것은 나세르의 경제 개혁을 시리아에 적용하려는 시도였다. 특히 토지 개혁과 주요 산업·은행을 국유화한 “사회주의 포고령”이 문제가 됐다. 이집트에 견줘 시리아의 지주들과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재산을 몰수하려는 나세르의 시도에 저항하기가 더 유리했다. 결국 1961년 시리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다마스쿠스의 통일아랍공화국 정부를 무너뜨리고 자유주의 정치인들의 연합에 권력을 이양했다. 새로 집권한 세력은 곧바로 나세르의 개혁 조처들을 폐기했다. 그러나 통일아랍공화국의 붕괴는 별다른 항의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좌파를 탄압하고 독립 노조들을 무력화하고 바트당을 주변화시킨 나세르에게는 시리아의 구舊지배계급에 맞서 싸울 동맹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민족 해방 대 사회주의 혁명?
나세르의 민족 해방 전략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한 국가의 자원만으로는, 특히 산유국도 아닌 이집트 같은 나라의 자원만으로는 옛 제국주의 세력이나 새로운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싸우기에 애당초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이집트가 영국 제국주의를 물리칠 수 있었던 진정한 비결은 이집트의 대중 운동이 중동 전역의 반식민지 투쟁의 일부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1956년의 사건이 보여 준 영국 제국주의의 진정한 약점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집트를 침공했다가 이라크를 잃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민족국가의 한계를 벗어나려 한 나세르의 시도도 실패했다. 실패의 주된 요인은 통일아랍공화국이 이집트의 “위로부터의 혁명”이 지닌 문제점을 그저 더 큰 규모로 재현하기만 했다는 데 있었다. 또한 나세르는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반식민지 운동의 역량을 잠식함으로써 운동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국가의 역량도 함께 약화시켰다. 그래서 통일아랍공화국은 붕괴했고, 심지어 이집트의 국가자본주의 노선도 단명하게 됐다. “사회주의 포고령”을 발표한 뒤 불과 10년 만에 나세르의 후계자 안와르 사다트는 신자유주의적 개혁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그러나 심지어 그 전에도 이집트 군이 제국주의에 맞선 아랍 세계의 전위라는 주장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는 1967년 6월의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의 승리를 통해 참혹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이집트·이라크·시리아 공산주의자들은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일어난 대중 운동을 계승할 만한 나세르주의가 아닌 대안을 건설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유수프 다르위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세르는 공산주의자들을 개처럼 이용했다. 필요할 때는 우리를 감옥에서 꺼내 줬다가 그 다음날 다시 집어 넣는 식이었다. 당시에 나세르는 우리가 똑똑하고, 글을 잘 쓰고,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고,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있는 등등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를 꺼내 줬다. … 그러나 전쟁과 침략이 끝나고 사태가 잠잠해지자 …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38 이라크에서도 공산당 가입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1958년 혁명 이후였고, 그 전에는 혹독한 탄압으로 당의 역량이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39
공산주의자들이 엄청난 난관을 이겨내야 했던 것은 사실이다. 왕정 치하의 이집트와 이라크에서 공산주의 조직들은 불법이었고 공산당 활동가들은 투옥과 고문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라크에서는 공산당의 총서기와 기타 지도적 인물들이 교수형을 당했다. 이집트의 공산주의 운동은 작고 분열돼 있었다. 가장 큰 공산주의 조직인 민족해방민주운동마저도 절정기에 회원 수가 겨우 2천 명 정도였다.40 이들의 문제는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러시아에서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관계를 다룬 레온 트로츠키의 분석이 이들에게 유용한 행동 지침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동에서 대다수 공산주의 조직은 소련의 스탈린주의 지도부를 따랐고, 그래서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을 기각했다. 41
그러나 탄압만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민족주의 정권들의 위기를 이용하면서 조직을 재건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사실 이집트·이라크·시리아의 ‘민족’ 혁명이 그 한계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 이 세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은 대부분 집권당과 맺은 동맹 속으로 용해되는 길을 택했다.42 당시의 레닌은 비록 노동계급이 농민과 동맹해서 민주주의 혁명의 과업을 수행하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수립된 “민주주의 독재”는 단명할 것이고 얼마 안 가서 보수적인 부르주아 국가로 대체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43 이집트와 이라크의 공산주의 조직들도 이 공식, 혹은 그것의 변종을 받아들였다. 44 이런 세계관이 공산주의자들의 실천에 끼친 영향은 군부가 주도한 1952년과 1958년의 혁명이 “부르주아적 한계”를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에서도 드러난다. 그래서 예컨대 1952년 이집트 최대의 공산주의 조직은 카프르 알 다와르의 섬유 노동자 파업에서 활동가 두 명이 교수형을 당했을 때 연대를 조직하길 거부했다. 45 그런가 하면 이라크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을 지지하는 범계급 동맹을 강화하려고 압둘 카림 카심의 개인 통치에 힘을 실어 줬고 압둘 살람 아리프가 “사회주의 공화국” 구호를 제기한 것을 두고 “애국적 사회 계층을 제국주의의 품으로 달아나게” 할 위험이 있다며 비난했다. 46
오히려 중동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민주주의 혁명을 “부르주아 사회·경제 관계의 범위를 뛰어넘어서” 밀어붙일 수는 없다는, 레닌의 낡은 정식[즉 1917년 혁명 이전의 정식 ― 옮긴이]을 받아들였다.47 그러나 토니 클리프가 《빗나간 연속 혁명》에서 보여 줬듯이, 트로츠키의 예측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일련의 민족주의 혁명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곳곳에서 식민지 정권들이 타도되기는 했지만 노동계급이나 농민이 타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텔리겐차나 군부 내의 일부 세력이 국가 권력을 장악했다. 48
반대로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이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라는 점에는 레닌과 같은 의견이었지만 일단 권력을 장악한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으로만 자신의 과제를 한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혁명은 즉시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하면서 연속혁명이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예측이었다.49 이에 카심은 공산당 활동가 수백 명을 구속하고 공산당과 가까운 조직들을 해산하고 노동조합총연맹 사무실을 폐쇄했다. 비록 탄압이 이집트에서만큼 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카심의 탄압은 공산당을 약화시켰고, 결국 공산당은 1963년에 바트당의 권력 장악을 막지 못했다. 그 후에 벌어진 대학살 속에서 카심과 더불어 공산당원 수천 명이 살해당했다.
이는 공산주의 운동에 심대한 파장을 끼쳤다. 공산주의자들이 민족 해방 투쟁의 지도 세력으로 지목한 바로 그 세력이 이제는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이라크의 카심은 공산당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꼈다. 1959년 이라크 공산당은 바그다드에서 열린 메이데이 시위에 1백만 명을 동원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다.1950년대의 이라크 혁명과 이집트 혁명의 결말은 비극적이었지만 중동의 민족 해방 투쟁은 제국주의와 가난과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감동을 준다. 수에즈 운하 사태의 진정한 영웅은 제국주의에 저항하고자 이집트와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 각지의 거리로 뛰쳐나온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 맞서 일어나고 있는 시위에서도 그와 같은 용기와 희망을 볼 수 있다. 중동의 신세대 사회주의자들이 해야 할 일은 이번에야말로 제국주의의 중동 지배를 완전히 끝장내는 것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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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nne Alexander. ‘Suez and the high tide of Arab nationalism’, International Socialism 112(Autumn 2006).
↩
- 물론 실제로 운하를 건설한 것은 드 레셉스가 아니라 강제 동원된 이집트 노동자들이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운하를 짓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
- 특공대가 이 암호를 놓치지 않도록 하고자 나세르는 10분 사이에 “드 레셉스”를 열네 차례 언급했다. Nasser Foundation 웹사이트 http://nasser.bibalex.org에 게재된 나세르의 1956년 7월 26일 국유화 연설 녹음을 참조하시오. ↩
- 같은 출처에서 인용. ↩
- FRUS (C), 1988, memorandum of a conversation between prime minister Anthony Eden and secretary of state Dulles, 10 Downing Street, London, 1 August 1956, 12.45 pm, document 42, pp 98-99. Gorst and L. Johnman, The Suez Crisis (Routledge, 1997), pp 66-67에서 재인용. 덜레스는 같은 회의에서 나세르에게 일방적으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이든에게 경고하기도 했다. ↩
- A Gorst and L Johnman, 같은 출처 p 69에서 재인용. ↩
- A Nutting, No End of a Lesson: The Story of Suez (Constable, 1967), pp 34-35. ↩
- 1955년 12월 시위의 여파로 요르단에서는 내각이 바그다드 협정 가입에 반기를 드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요르단은 바그다드 협정에 가입하지 못했다. M Oren, ‘A Winter of Discontent: Britain’s Crisis in Jordan, December 1955-March 1956’, International Journal of Middle East Studdies, vol 22, no 2 (May 1990), pp 171-184을 참조하시오. ↩
- ‘수에즈 사태Suez Crisis’를 아랍권에서는 ‘이집트에 맞선 3자 도발’이라고 (더 정확하게) 부른다. ↩
- 이른바 ‘검은 토요일’ 사건에 관한 생생한 기록으로는 Jean and Simmone Lacouture, Egypt in Transition (Methuen, 1958), pp 108-109을 참조하시오. ↩
- Khaled Mohi El Din, Memories of a Revolution: Egypt 1952 (American University in Cairo Press, 1995), p 25. ↩
- 나세르와 무슬림형제단의 관계에 대해서는 R P Mitchell, The Society of the Muslim Brothers (Oxford University Press, 1969), pp 105-106을 참조하시오. 나세르와 공산당의 관계에 대해서는 Mohi El Din의 상기 문헌을 참조하시오. ↩
- Gamal Abd-al-Nasser, Falsafat al-thawrah (Dar al-Sha’ab, no date, 9th edition), p 22. ↩
- 이 같은 패배적 그림은 자유장교단에게 권력을 계속 쥐고 있을 편리한 명분을 제공했다. 그러나 나세르가 노조·정당·학생회를 국가에 굴복시키려고 길고 치열한 싸움을 보면 벌였다는 사실을 보면 1952년 7월에도 운동이 건재했음을 알 수 있다. ↩
- M Pripstein Posusney, Labor and the State in Egypt: Workers, Unions and Economic Restructuring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7), p 45. ↩
- 1956년 이후 수십 년 동안 이들 사이의 정확한 합의 내용은 비밀에 가려져 있었다. 당시 영국 관리들은 이스라엘과 공조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영국 외무장관 존 셀윈-로이드는 영국 하원에서 영국 정부와 이스라엘 정부 사이에 이집트 침공을 둘러싼 “사전 합의는 없었다”고 밝혔다. 1996년에야 비로소 역사가 아비 슐라임이 이스라엘 정부가 보관하고 있던 40년 전 세브르에서 체결된 비밀 각서를 공개했다. A Shlaim, ‘The Protocol of Sèvres: Anatomy of a War Plot’, International Affairs 73, 3 (1997), pp 509-530을 참조하시오. ↩
- A Shlaim, 같은 출처, p 523. ↩
- K Love, Suez: the Twice-fought War (McGraw-Hill, 1969), p 493. ↩
- M H Heikal, Cutting the Lion’s Tail: Suez through Egyptian Eyes (Corgi, 1988), p 197. ↩
- J Waterbury, The Egypt of Nasser and Sadat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3), p 312. ↩
- Heikal, 같은 출처, p 194. ↩
- D Hashmat, ‘Yusuf Darwish, muhami ummal’, Awraq Ishtirakiyya (July/August 2004), pp 24-25. ↩
- Layla al-Shal, telephone interview, Cairo, 31 March 2006. ↩
- Fatallah Mahrus, interview, Cairo, 25 March 2005. ↩
- 같은 출처. ↩
- A shafiq, telephone interview, Cairo/London, 31 March 2006. ↩
- Fatallah Mahrus, 같은 출처. ↩
- Abu-Sayf Yusuf, Wath’iq wa-mawaqif min tarikh al-yasar al-misri 1941-1957 (Sharikat al-Amal, 2000), p 357. ↩
- Telegram, British Embassy, Baghdad to Foreign Office, 1725 23 Dec 1956 FO371/121647. ↩
- 같은 출처. ↩
- 같은 출처. ↩
- 이집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라크 운동 진영에는 공산주의자들부터 아랍 민족주의자, 자유민주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포함돼 있었다. 주요 조직으로는 공산주의 진영의 여러 지하 조직들, 대표적으로는 이라크공산당ICP이 있었고, 그 밖에 아랍 민족주의 정당인 독립당Independence Party, 영국 노동당의 사회민주주의를 대안으로 삼은 카밀 알 차디르치의 국민민주당National Democratic Party이 있었다. 정당뿐 아니라 노조와 학생회도 운동 건설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다음 문헌들을 참조하시오. H Batatu, The Old Social Classes and the Revolutionary Movements of Iraq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8); K Chadirchi, Muthakirrat Kamil al-Chadirchi wa tarikh al-hizb al-watani al-dimuqrati (Cologne, 2002); M Mahdi Kubba, Mudhakirati fi samim al-ahdath 1918-1958 (Beirut, 1965). ↩
- H Batatu, 같은 출처, pp 749-757. 영국 외무성 문서에는 나자프의 사태 전개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는데, 아마도 당시 나자프에는 영국 주재원이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
- FO 371/121647 British Consul-General, Basra to Embassy, Baghdad, 14 December 1956. ↩
- 같은 출처. ↩
- J Waterbury, 같은 출처, pp 61-82, p 209를 참조하시오. ↩
- S Heydemann, Authoritarianism in Syria: Institutions and Social Conflict 1946-1970 (Cornell University Press, 1999)를 참조하시오. ↩
- D Hasmat, 같은 출처. ↩
- J Beinin and Z Lockman, Workers on the Nile: Nationalism, Communism, Islam and the Egyptian Working Class, 1882-1954 (IB Tauris, 1988), p 205. ↩
- H Batatu, 같은 출처, p 897을 참조하시오. ↩
- 1965년 이집트 공산주의 운동 내 대다수는 정권이 만든 정당인 아랍사회주의연합Arab Socialist Union에 흡수·통합되는 것에 합의했다. 이라크에서는 1972년 공산당이 바트당 정부에 들어갔다가 6년 뒤 사담 후세인의 광포한 탄압에 직면했다. 1972년 시리아 공산당도 민족진보전선National Progressive Front 내에서 바트당과 손을 잡았다. ↩
- 트로츠키 저작 전문은 www.marxists.org/archive/trotsky/works/1931-tpv/index.htm에서 찾아볼 수 있다. ↩
- T Cliff, Deflected Permanent Revolution (1963), http://www.marxists.org/archive/cliff/works/1963/xx/permrev.htm에서 재인용. ↩
- 토니 클리프가 지적하듯이, 레닌은 1917년 2월 혁명 이후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노동계급이 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 너머로 밀어붙이게 되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1917년에 레닌이 깨달았듯이) 부르주아지가 허약하고 소심한 나라에서는 부르주아지보다 더 반동적인 세력들이 권력 장악의 기회를 노릴 것이기 때문이다. 1917년 9월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시도가 이 점을 보여 줬다. T Cliff, 같은 출처. ↩
- 이집트 공산주의 운동의 내부 문건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우리가 이집트에서 확립하고자 하는 인민 민주주의는 모종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다. 우리는 제국주의와 봉건제에 맞서 투쟁하는 모든 계급의 민주적 독재를 확립하려 한다.” 출처: Archives of the Communist Party of Great Britain, National Museum of Labour History, Manchester, CP/CENT/INT/56/03 – Note on Communist Policy for Egypt, nd. ↩
- 교수형이 집행되고 며칠 뒤인 1952년 9월 10일에 민족해방민주운동 기관지인 <알 마라인>은 ‘민중과 군이 나아갈 길 ― 제국주의와 배신자들에 맞선 민족 전선’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출처: Communist Party Archives, CP/CENT/INT/56/04 – Summary of Articles from Al-Malayin, 10 September 1952). 다른 이집트 공산주의 조직들은 이런 입장을 채택하지 않았지만 공산주의 운동 내 최대 조직인 민족해방민주운동의 영향력은 운동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데 큰 구실을 했다. ↩
- Aziz al-Haj in Sawt-al-Ahrar, 23 November 1958. H Batatu, 같은 출처, p 834에서 재인용. ↩
- L Trotsky, Permanent Revolution, http://www.marxists.org/archive/trotsky/works/1931-tpv/pr10.htm ↩
- T Cliff, 같은 출처. ↩
- 1958년 혁명에서 이라크 공산당의 역할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A Alexander, ‘Daring for Victory: Iraq in Revolution 1946-1959’, International Socialism 99 (Summer 2003)을 참조하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