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세계를 뒤흔드는 아랍 혁명 ― 의미와 전망
나세르에서 무바라크까지 *
이런 사건들을 보면 한 가지 명백한 의문이 떠오른다. 한때 진보적인 아랍 민족주의를 주창하고 팔레스타인 민족의 권리를 옹호한다고 여겨지던 이집트가 어떻게 미국이나 이스라엘과 손잡고 가자 지구를 봉쇄할(같은 아랍 민족으로서 정의롭지도 않고 국제법 위반이기도 한) 수 있는가? 이런 협력 때문에 오늘날 이집트는 조롱거리가 됐고, 특히 미국이 아주 손쉽게 이집트의 협조를 끌어내는 듯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미들 이스트 리포트Middle East Report》 온라인판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확실히 이스라엘과 미국은 몇 년 동안 이집트에 압력을 넣어서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의 ― 옮긴이] 밀수를 ‘단속’하게 했고, 2008년에 미국 의회는 이 문제 때문에 1억 달러 상당의 이집트 원조를 보류하기도 했다. 또, 이집트가 봉쇄에 협력한 덕분에 미국의 귀중한 전략적 동반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도 확실하다. 2007년 라파 봉쇄 이후 이집트의 인권 상황과 억압적 정치체제에 대한 미국의 비판이 눈에 띄게 약해진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최근 이집트는 미국한테서 중요한 양보 두 가지를 얻어냈다. 하나는 원조의 일부가 이제는 기부금 형식이 될 것이라는 점이고(그러면 의회가 이집트 원조에 특정한 개혁 조처들을 조건으로 달기가 더 힘들어진다), 다른 하나는 12월 30일 미국이 이집트에 F16 전투기 20여 대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가 봉쇄에 협력한 것은 단지 외부의 압력에 적응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집트 정권 스스로 국내 사정을 감안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집트가 봉쇄를 지지한 국내적 이유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집트 정부는 [팔레스타인의 ― 옮긴이] 전투적 이슬람주의 무장 집단인 하마스가 이란의 대리인이고 이집트 최대 야당으로서 조직 기반이 탄탄한 무슬림형제단의 동맹 세력이라고 여겨서 하마스를 불신한다. … 지하 장벽 구축은 이집트가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의 대의에서 점차 멀어지고 이스라엘과의 안보 협력을 강화해 온 과정의 절정이다. 그 과정을 촉진한 최근의 극적 사건이 하마스의 총선 승리다.
이 글에서는 그 “수십 년 동안의 과정”, 즉 중동에서 서방 제국주의를 공공연하게 거부하던 이집트가 제국주의의 “전략적 동반자”로 변모하게 되는 과정과 그것이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 것이다.
나세르주의 이집트가 중동 한복판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라는 점과 1869년에 개통된 수에즈 운하 때문에 영국 제국은 멀리 떨어진 해외 자산, 특히 인도를 지배하고 보존하는 데서 이집트의 굴종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영국은 1882년 수에즈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려고 그 지역을 점령했다. 〈뉴욕 타임스〉 중동 특파원을 지낸 케닛 러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후 72년 동안 이집트 민족주의자들은 영국을 몰아내려고 애를 썼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 제국주의 열강의 선두 주자가 된 미국은 중동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지역에서 소련이 세력을 구축하지 못하도록 감시의 눈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역사가 로이드 가드너는 다음과 같이 썼다.
구舊식민지 시대는 거의 끝났다. 그 대신에 미국이 군사적 연줄을 이용해 옛 제국의 힘을 대체할 새로운 구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위협’이 핵심적 구실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유 세계’의 조직화를 위해 ‘제국을 초대’하는 것이 합리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경제에서 중동산 석유(와 이 석유를 서방으로 수송하는 통로인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이 커지자 미국의 관심은 중동 지역의 아랍 정권들과 ‘우호 관계’를 다지는 데 집중됐다. 그러나 미국이 1948년 수립된 신생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한 것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졌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식민지로 점령한 것을 지지한 미국의 행동은 당시의 탈식민지 추세와 조화되기 힘들었다.
1952년 이집트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하급 장교 집단(가말 압델 나세르를 중심으로 한 자유장교단)이 권력을 잡았다. 이들은 친영親英 왕정의 국왕 파루크를 나라 밖으로 내쫓았다. 나세르의 득세와 함께, 아랍 전체의 단결과 서방 열강에 대한 저항을 비전으로 제시한 대중적 민족주의 물결이 중동 전역에서 고조됐다. 이 프로젝트는 수많은 사람들을 고무했고, 그 덕분에 이집트는 미국과 소련에게서 독립하려는 일부 아랍 세계의 리더가 될 수 있었다. 나세르는 파루크 왕이 떠난 이집트에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이집트의 주권을 모욕하는 중대한 사안이라고 여긴 것, 즉 영국군 주둔 문제를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지렛대를 물색했다. 따라서 나세르가 신흥 강대국 미국의 영향력을 지렛대 삼아 영국군을 몰아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미국의 지원에 의존하게 됐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미국은 커밋 루스벨트를 이집트로 파견하면서 “동양의 강력한 지배자들에게 파견된 유럽인들처럼 루스벨트가 나세르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기를 바랐다. 루스벨트의 새로운 임무는 그 이집트인[나세르 ― 옮긴이]을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탈식민지 지도자들에게 긍정적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세르는 착한 제자, 정말이지 열심히 배우는 제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국과 이집트의 우호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나세르가 미국의 무기 이전이 더디고 경제 원조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에 점차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미국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관계에 끼치는 부담을 완화하려고 이집트에 대한 공개 지지를 철회했다.
두 가지 새로운 사건 때문에 나세르와 서방은 마침내 충돌했다. 첫째는 1955년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신생 독립국 29개가 모인 반둥 회의에서, 독자 생존이 가능한 듯한 비동맹 진영의 리더로서 나세르의 명성이 크게 높아진 것이었다. 둘째는 그 후 몇 달 만에 나세르가 소련 진영과의 무기 거래를 공식 발표했다는 것이었다. 이 무기 거래를 통해 이집트는 군수 장비를 수입해서, 아랍 세계의 정당한 지도자 지위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체결한 2억 달러 상당의 계약에는 미그15 제트기 2백 대, T34 탱크 2백75대를 비롯한 많은 군수품이 포함돼 있었다. 이집트의 어려운 경제 상황도 미국에 대한 이집트의 참을성을 시험하는 계기였다. 특히, 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수출 작물이었던 면화 수출이 “1년 남짓 기간에 26퍼센트나 감소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미국 정부의 농업 보조금 덕분에 미국 농부들이 면화를 세계시장에 헐값으로 내다 팔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이집트가 면화를 수출할 수 있는 새로운 판로가 돼 주었을 뿐 아니라 무기와 면화를 물물교환 했으므로 가뜩이나 부족한 달러나 파운드로 현금결제를 하지 않아도 됐다.”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이집트와 서방 열강의 관계 악화는 절정에 달했다. 이제 수에즈 운하(와 연간 1억 달러쯤 되는 통행료 수입)는 이집트 국가가 통제하게 됐다. 나세르의 공세에 서방 정부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은 자기들을 모욕한 나세르로 하여금 대가를 치르게 하려고 서로 군사협정을 맺고 이집트를 침략했다. 그러나 미국은 차라리 나세르의 성공을 감수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이 승리하면, 미국의 경쟁국들이 미국이 노리는 지역을 직접 점령하는 시대가 다시 시작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미국의 압력을 받은 영국과 프랑스는 목표 달성 직전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몇 달 후 이스라엘도 시나이 반도의 점령지에서 철수했다. 나세르는 전쟁의 승리자로 떠올랐다.
이집트의 국가자본주의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얻으려 한 나세르의 노력이 보여 주듯이, 이집트 정권은 특정 경제정책이나 정치적 계획을 추진할 때 실용주의와 실리정치를 발전시켰다. 나세르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지침 구실을 한 것은 그 조처가 아랍 세계의 공인된 리더가 되려는 이집트의 노력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였다. 수에즈 운하 국유화는 아스완 하이댐 건설이라는 야심찬 프로젝트와 맞물려 이집트 경제를 더한층 국유화하는 방향으로 몰아가는 효과를 냈다. 이것은 공업화를 추진한 많은 나라들이 자본을 집중해서 공업화와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하려 할 때 흔히 실행한 노선이었다. 그렇게 해서 선진 서방 공업국들을 따라잡으려 했던 것이다. 이집트의 석유 생산량은 페르시아만의 아랍 산유국들과 견주면 역사적으로 보잘것없었지만, 정치적 지도력 덕분에 이집트는 산유국들의 증대하는 부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정치적·경제적으로 빠르게 근대화하는 아랍 민족의 리더가 바로 이집트라는 생각을 뒷받침하는 데 도움이 됐다. “1960년대 중반 5대 아랍 산유국(이라크·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리비아·알제리)의 연간 정부 세입을 모두 합치면 20억 달러쯤 됐다. 그 수입은 현대적 사회기반시설들을 건설하고 사회복지 서비스를 확충하는 … 데도 쓰였지만, 그런 토대 위에 더 정교한 행정 체계와 국방·안보 기구를 설립하는 데도 쓰였다.”
그러나 이 국가자본주의 정책은 이집트의 경제발전을 도모하는 수단으로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소련과의 동맹과 나세르의 혁명적 미사여구 때문에 이집트 국가의 경제 개입은 흔히 “사회주의적” 정책으로 묘사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경제 구조의 변화는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전혀 변화시키지 않은 국가자본주의 토대 위에서 추진됐다. … 초기의 평등 지향적 조처와 염원이 아무리 대단했어도, 이 사회 계급[즉, 국가를 통제하는 관료들]이 근본적으로 일관된 프로젝트를 제시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모든 진보적 조처는 매우 많은 문제를 자아냈다. 전에는 혁명의 동력으로 여겨졌던 그들의 민족주의 자체가 나중에는 중대한 사회경제적 분화, 즉 새로운 국가자본가 계급에서 출현한 특권층과 전통적 계급들로의 분화를 흐리는 효과를 냈다.
나세르의 민족주의는 결국 성장하는 이집트 노동계급의 요구를 누그러뜨리는 데 민족주의 미사여구를 이용한 이집트 소수 특권층의 지배를 확립해 주었다.
이집트, 팔레스타인인들, 1967년 전쟁
11 게다가, 거의 20년 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다루는 데서 독자적 목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1964년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출범했다. PLO는 이스라엘 안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의 권리를 요구하며 독자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48년 이후 팔레스타인 민족의 주요 대변자 구실을 하던 이집트 정부는 이제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 안에서 영향력을 놓고 다투는 몇몇 경향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됐다.
1960년대 초에 이집트 주도로 아랍 세계를 통일하려던 나세르주의 프로젝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아랍 세계 자체가 “광범한 나세르주의 노선 위에서 급격한 변화나 혁명에 헌신하는 집단이 지배하는 국가들과, 정치적·사회적 변화에 더 신중하고 나세르주의의 영향력 확대에 적대적인 집단이나 왕조가 지배하는 국가들”로 분열했다.한편, 이스라엘은 1960년대 중반에 이웃 나라들보다 더 강력해졌다고 느끼고 군사적 수단을 써서 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렸다.
이스라엘 인구는 계속 증가해서(주로 이민 덕분이었다) 1967년 무렵 약 2백30만 명이 됐는데, 그 중 13퍼센트 정도가 아랍인이었다. 미국의 경제 원조, 전 세계 유대인들의 기부금, 서독의 배상금 덕분에 이스라엘의 경제력도 더욱 커졌다. 이스라엘은 또, 자국 군대, 특히 공군의 병력과 전문성을 증강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자신이 이웃 아랍국들보다 정치적·군사적으로 더 강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웃 아랍국들의 위협에 대처하는 최선의 길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러지 않을 때보다 더 안정적인 협정을 맺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팔레스타인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고 1948년에 끝내지 못한 전쟁을 끝내려는 희망도 있었다.
13 그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중동 지역의 세력 관계 재편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나중에 6일 전쟁으로 알려지게 되는 전쟁을 시작해서, 이집트·시리아·요르단에 궤멸적인 군사적 타격을 가하고 요르단강 서안 지방, 가자 지구, 시나이 반도, 골란 고원을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점령했다.이스라엘 군사력이 아랍 국가들의 군사력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이 각각 외부 세계와 맺는 관계가 바뀌었다. 이스라엘의 존재를 위협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 위협이 사실이든 아니든 유럽과 미국에서 연민을 자아냈는데, 유럽과 미국에서는 제2차세계대전 때 유대인이 겪은 운명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신속한 승리도 미국이 이스라엘을 더 바람직한 동맹으로 여긴 데 한몫했다. 아랍국들, 특히 이집트가 볼 때 전쟁 결과는 모든 면에서 아랍국들의 군사적·정치적 능력의 한계를 보여 준 패배였다.
게다가 이집트는 1963~69년의 유혈낭자한 예멘 내전에서 “공화파”를 지원했다가 패배감만 더욱 심해졌다. 이집트가 예멘 내전에 가장 깊숙이 개입했을 때는 예멘 주둔 이집트군이 약 7만 명이나 됐다. 그래서 당시 미국 외교관들은 예멘을 이집트판 베트남으로 여겼다. 1967년 전쟁 후에 나세르는 시나이 반도에 주둔하는 이스라엘 군대 문제로 골치를 썩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훨씬 더 많은 경제적 자원을 이집트 군대 재건에 쏟아부어야 했고, 그래서 이미 1960년대 초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경제적 정체가 더욱 악화했다. 결국 나세르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재빨리 로저스 플랜[1969년 미국 국무장관 로저스가 제안한 중동 평화안 ― 옮긴이]과 유엔 결의안 242호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획득한 영토를 돌려받는 대가로 ‘평화’를 보장하는 교환 원칙이 확립됐다. 비록 다른 아랍 나라들에서 나세르의 명성은 그럭저럭 유지됐지만 이집트 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쇠퇴하고 있었다.
미국이 볼 때 6일 전쟁은 아랍 민족주의에 대항하고 아랍 세계를 단속하는 데서 이스라엘의 군사적 유용성을 결정적으로 입증해 준 사건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충직한 부하 노릇을 하는 이스라엘의 힘을 강화해 주려고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경제 원조를 급격히 늘리기 시작했다.
‘인피타’
1970년대 초가 되자 국가자본주의 조처들로는 이집트 경제를 더 발전시킬 수 없었다. 이집트 경제는 막대한 부채, 고물가, 고유가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70년 나세르가 죽은 뒤, 역시 자유장교단 회원이었던 안와르 사다트가 후임 대통령이 되자 이집트 경제 내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던 추세(‘인피타’, 즉 개방 정책)가 더욱 빨라졌다. 인피타는 신자유주의 의제를 경제 전반에 강요하는 포괄적 정책이었다. 환율 통제가 완화되고, 기업 투자 면세免稅 지역이 창설되고, 다양한 공기업이 사유화(되거나 적어도 시장의 압력에 종속)됐다. 개방 정책은 정치적 변화와 경제적 변화를 모두 추구했다. “정치 수준에서는, 미국과 화해하면 아랍과 이스라엘의 충돌을 신속히 해결하고 이집트를 전쟁 상태에서 빼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제 수준에서는, 이집트가 나세르의 ‘사회주의’ 노선을 폐기하고 공공연한 자본주의 노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인과 결과를 간단히 따져 보면, 이런 방안은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고 이집트 경제에 신선한 피를 공급하려는 것이었다.”
1974년에 개방 정책을 공식 발표하기 전에 이미 이집트는 서방, 특히 미국과 손을 잡기 시작했다. 나세르는 계속 미국의 후원을 얻으려고 했을 뿐 아니라 1972년에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이집트는 소련 군사고문 약 2만 명을 축출하기도 했다. 1973년 10월에 마지막 전쟁이 끝난 뒤 사다트는 전쟁 결과가 긍정적이라고 생각했다. 이스라엘의 군사적 우위가 확고해지고 미국의 중동 지배가 더욱 굳건해졌는데도 말이다.
사다트가 볼 때, 1973년 전쟁은 군사적 승리를 얻으려고 싸운 것이 아니라 초강대국들에게 충격을 주려고 벌인 전쟁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초강대국들이 사태 악화와 위험한 충돌을 막으려고 이스라엘과 아랍국들의 협상 타결을 적극 주선할 것이라고 봤던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됐지만, 그 결과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힘과 발언권은 더 강화됐다. 전쟁 초기에는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해서 이스라엘이 패배하지 않게 했고, 나중에는 세력 관계를 협상 타결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끄는 등 미국의 전쟁 개입은 결정적이었다.
1973년 전쟁 직후에 미국은 세 가지 주요 외교 목표를 대체로 달성할 수 있었다.
첫째는 중동 지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전반적으로 잠식하는 것이었다. … 둘째 목표는 아랍-이스라엘 충돌의 성격 자체를 변모시킬 수 있는 정치적 합의, 즉 아랍과 이스라엘의 충돌에서 그 이데올로기적 맥락을 제거하고 그래서 아랍-이스라엘의 충돌을 단순한 영토 분쟁으로 만들어 버릴 합의를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런 계획은 팔레스타인인들과 아랍 민족주의자들에게 근본적으로 불리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맞선 투쟁을 정착민들의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 세력의 침투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셋째 목표는 (경제 원조와 영토 조정을 통해) 이집트가 안정의 이로움을 느끼게 만들어서, 아랍국과 이스라엘의 대결 전선에서 이집트를 사실상 이탈시키는 것이었다.
한편, 이집트는 개방 정책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집트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외국자본에게 이집트 투자에 대한 확신을 별로 주지 못했다. 이집트의 붕괴하는 사회기반시설, 취약한 교통통신망, 국가의 몰수 조처에 대한 오래된 두려움 때문에 서구 투자자들과 아랍 투자자들 모두 안전한 미국과 유럽의 금융기관들을 선호했다. 인피타 초기의 수입 통제 완화는 부유층을 위한 사치재가 이집트로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효과만 냈다.
18 그리고 1961년부터 1981년까지 20년 사이에 이집트는 식량 수출국에서 세계 최대의 식량 수입국 중 하나가 돼 버렸다. 이집트 전체 식량 소비의 약 절반을 수입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19
외국자본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개방 정책으로 말미암아 이집트 경제는 강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약해졌다. 이집트의 빈민과 노동계급이 특히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인구의 하위 20퍼센트가 전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0년 6.6퍼센트에서 1965년 7.0퍼센트로 증가했다가 1970년대 말에는 5.1퍼센트까지 떨어졌다. 반대로 상위 5퍼센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1960년 17.5퍼센트에서 1965년 17.4퍼센트로 약간 낮아졌다가 사다트의 정책이 시행된 지 몇 년 뒤에는 눈에 띄게 증가해 22퍼센트까지 늘어났다.”캠프 데이비드 협정에서 제1·2차 걸프전까지
1977년 11월 사다트는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이스라엘과 평화 협상을 추진함으로써 아랍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리고 1년 뒤에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미국의 주관 하에 평화협정이 정식으로 체결됐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외교·경제 관계를 정상화하는 대가로 시나이 반도를 돌려주기로 합의했다. 또,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서는 요르단강 서안 지방과 가자 지구에 모종의 ‘자치’를 허용한다는 데도 합의했지만, 자치의 구체적 내용은 나중에 논의하기로 미뤄 뒀다. 물론 이스라엘은 이런 자치와 점령지의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 지속이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20 예컨대, 1982년에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즉시 이집트는 아랍연맹에서 쫓겨났고 아랍연맹 본부는 카이로에서 튀니스로 옮겨 갔다(이집트를 아랍연맹에서 쫓아낸 아랍 정권들도 결국은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인정했지만, 사다트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것에 대한 그들의 불쾌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집트와 서방 진영의 통합은 완료됐고, 사다트는 통합이 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집트 경제가 비틀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으로 이집트가 고립에서 벗어나고 미국 원조의 물꼬가 트이기를 바랐다. 1981년 이슬람주의 세력이 사다트를 암살한 것은 이집트가 추구한 노선에 대한 심각한 좌절감이 표출된 것이었지만, 당시 확립된 패턴은 지금까지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는 전임자인 사다트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신호가 떨어진 뒤에야 외교적 개입에 나섰다. 침공 2주째에 이집트 정부는 [미국 국무장관 알렉산더 헤이그의] 정책을 조용히 수용해서, ‘온건’ 아랍 국가들에게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확대하면 전투적인 팔레스타인해방기구라는 성가신 존재를 신경쓰지 않고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실제로 이집트 지배계급은 비굴하게 미국의 이익을 열심히 옹호한 대가로 후한 보상을 받았다.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국이 쿠웨이트에서 이라크를 몰아낼 군사 동맹 대상을 물색하고 있을 때, 이집트 대통령[무바라크]은 주저하지 않고 그 동맹에 가담했다. 그가 얻은 보상은 … 미국, 걸프 국가들, 유럽이 이집트의 부채 약 2백억 달러를 탕감해 주고 거의 같은 액수의 부채 상환 기한을 연장해 주었다는 것이다.” 2003년 조지 W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벌였을 때도 이집트는 기꺼이 미국에 협력했다. 2006년 이라크에서 격렬한 전투가 한창일 때 미국 국무부 관리는 무바라크의 무자비한 보안경찰과 고문 만행 때문에 중동의 민주주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국의 주장이 무색해진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이집트 원조는 계속 중요하다고 확언했다. 미 국무부 근동 담당 차관보인 데이비드 웰치는 “[미국과] 이집트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는 여러모로 미국 중동 정책의 주춧돌”이라고 말했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이집트는 미국 군용기의 이집트 영공 비행을 3만 6천5백53회 허용했고 미 해군 함정의 수에즈 운하 우선 통과를 보장해 줬다.
24 부패로 말미암아 이집트에는 터무니없이 부유한 극소수 상류층이 형성됐고, 그 꼭대기에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재산을 모은 무바라크 자신의 가문이 있다. 평범한 이집트인들의 생활 조건은 절망적이다. 실업률은 몇 년째 두 자릿수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연간 6천 달러[약 7백만 원 ― 옮긴이]가 채 안 되고, 식량 위기는 빈번하게 되풀이된다.
1970년대 이후 미국의 이집트 원조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1979년 이후 미국은 해마다 이집트에 군사 원조 13억 달러, 경제 원조 8억 1천5백만 달러씩을 제공했다. 1975년 이후 이집트가 미국에게 받은 돈은 모두 합쳐 5백억 달러가 넘는다.”그러나 미국은 무바라크 정권을 계속 지지하고 있고, 미국의 외교 정책 입안자들은 이집트의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다. 피상적인 주류 언론 보도와 근시안적인 공화당 정치인들은 가금 딴소리를 하지만 말이다. 영향력 있는 미국 외교협회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과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방해 세력 배역을 맡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협정을 체결할 수 있도록, 그리고 더 많은 아랍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승인하도록 조용히 일관되게 노력했다. 그렇지만 미국의 불만도 이해할 수 있는데, 미국과 이집트의 관계는 중동 평화가 머지않았다는 예상과 함께 시작됐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의 중동 지배는 이스라엘·이집트와 함께 시작됐지만, 동맹의 범위는 더 확대됐다.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후 미국은 사실상 이집트와의 관계를 이용해 다른 아랍 정권들을 동맹국으로 만들었다. 타리크 알리는 2003년 부시의 이라크 침략 당시 미국의 동맹국들을 죽 훑어보며 다음과 같이 썼다.
아랍 여론의 압도적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에 ― 옮긴이] 예속적인 정권들은 돈줄을 쥔 주인에게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이집트에서 무바라크는 미국 해군이 수에즈 운하를 자유롭게 통과하도록 허용했고 미국 공군에게 이집트 영공을 내주었다. 그리고 무바라크의 경찰은 많은 시위대를 폭행하고 체포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정은 크루즈미사일을 받아들여 자국 영토를 방어하고, 미군 사령부가 자국 영토에서 작전을 지휘할 수 있도록 받아들였다. 걸프 국가들은 사실상 미국의 군사적 부속물이 된 지 오래였다. 제1차 걸프전 때 약간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했던 요르단은 이번에는 선뜻 군사기지를 제공해서 미군 특수부대가 국경 너머 이라크를 공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외국에서 어리석은 것만큼이나 국내에서는 억압적인 이란의 물라[이슬람 율법학자 ― 옮긴이]들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아프가니스탄식 작전에 협력했다. 아랍연맹은 회원국 다수가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데도 그 전쟁에 반대한다고 공표함으로써, 수치羞恥를 집단적으로 표출하는 능력을 평소 이상으로 발휘했다. 아랍연맹은 카바[이슬람의 가장 신성한 도시인 메카에서 가장 신성한 성전]를 붉은색, 흰색, 푸른색으로 칠해 놓고도 검은색이라고 우길 수 있는 기구다.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인들
이집트가 가자 봉쇄에 일조한 것은 미국의 전반적 의제에 굴종해 온 것의 연장이다. 그러나 이집트 대중이 팔레스타인인들의 민족적 권리를 광범하게 지지하는데도 이집트 정권은 항상 팔레스타인의 대의에 모순된 태도를 취했다. 한 이집트 사회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집트 정권은 팔레스타인이라는 카드를 모순되게 사용합니다. 이따금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 대한 반감을 조성해서 [이집트 ― 옮긴이] 민족주의 히스테리를 부추깁니다. 또, 무슬림형제단의 영향력 증대에 대항하는 방안의 일환으로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멸시합니다. 무슬림형제단이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 예컨대, 사다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애쓸 때, 이집트의 주요 정체성은 ‘파라오’ 시대에 있다고 강조하는 악랄한 반反아랍 캠페인을 선동했습니다. 국영 언론사가 앞장서서 아랍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이집트의 전쟁과 빈곤을 팔레스타인인들 탓으로 돌렸고, 그런 주장이 공공 문화에 스며들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문화적으로 다시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부르주아지의 욕구에 잘 들어맞습니다.
이런 주장은 일부 사람들에게 먹혀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불만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집트가 1948년부터 1979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 때까지 팔레스타인을 위해 충분히 희생했다는 정부의 공식 태도는 일부 이집트인들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스펙트럼의 차이를 떠나서 많은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역사적 ‘형제’에서 모종의 적으로 돌려 버린 이런 정책 전환을 몹시 불쾌하게 생각한다. 아흐마드 유수프 아흐마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집트의 안보 정책은, 이해할 수 없게도, 이스라엘이 아니라 가자 지구를 이집트에 대한 주된 위협으로 여기게 됐다.” 마찬가지로 칼럼니스트인 파흐미 후와이디도 이집트의 “전략적 비전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인들이 위험하다고 여기게 됐다. 그리고 이 서글픈 결론이 옳다면, 나는 강철 장벽이야말로 … 수치스런 벽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변화의 전망
이집트 지배계급은 수십 년 전부터 미국과 이스라엘에 충성해 왔다. 팔레스타인의 대의에 헌신하겠다는 미사여구를 계속 늘어놓았지만, 그 미사여구는 의무적인 것만큼이나 얄팍했다. 그 미사여구는 이집트의 외교 정책 지침으로서는 아무 구실도 못했지만, 모든 아랍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이집트 정부도 그런 미사여구를 계속 늘어놓아야 했다.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에 맞선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을 본능적으로 지지하는 가난한 이집트 대중을 계속 지배하려면 말이다.
그러나 이집트 지배계급은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착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재산과 권력, 지속적인 번영은 제국주의와 동맹한 덕분이다. 반대로, 팔레스타인의 해방은 중동 전역의 세력 균형을 어그러뜨릴 것이다. 이집트 지배계급에게는 자국 국민을 억압하는 것이 가자 지구 봉쇄를 지원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스라엘의 사회주의 단체인 마츠펜Matzpen을 위해 (‘A 사이드’라는 필명으로) 쓴 글에서 모셰 마초베르와 자브라 니콜라는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지속적인 수탈을 뒷받침하는 관계망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는 시온주의에 정면으로 맞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 뒤에서는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는 아랍 정권들과 아랍 반동 세력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협하고 있다. 제국주의가 중동에 실질적 이해관계가 있는 한은 제국주의는 자신의 천생연분 동맹인 시온주의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거나 시온주의가 전복되도록 놔둘 가능성이 없다. 제국주의는 아랍 석유의 마지막 한 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시온주의를 방어할 것이다. 반대로, 제국주의 착취의 하위 파트너인 아랍 각국 지배계급들을 전복하지 않고는 제국주의의 중동 지역 이해관계와 지배를 분쇄할 수 없다. 여기서 끌어내야 하는 결론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제국주의 지배가 중동 전역에서 끝장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중동 전체의 정치적·사회적 해방을 위한 더 광범한 투쟁을 자신들 주위로 결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30 노쇠한 무바라크가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려 하면서 이집트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집트와 전 세계 혁명적 좌파의 취약성 때문에 중동에서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혁명적 운동이 발전하려면 몇 년 더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반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중요한 서광이 몇 가닥 비치고 있다. 가자 자유 행진, 비바 팔레스티나 같은 노력들, 특히 전 세계에서 성장하는 이스라엘 제품 불매 운동, 이스라엘에 대한 투자 회수, 이스라엘 경제 제재 추진 운동은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을 뒷받침하는 데서 대단히 중요하다. 31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과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을 이룰 수 있는 필수 요소다.
그런 반란이 언제 시작될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집트에서 계급투쟁이 고양되고 있다는 상당한 조짐이 있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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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ric Ruder, ‘Egypt, Israel, and the U.S. From Nasserism to collaboration’, International Socialist Review 70(March–April 2010).
↩
- Rory McCarthy, “Egypt building underground metal wall to curb smuggling into Gaza,” Guardian, December 10, 2009, and Lina Attalah, “Will Egypt’s underground wall end the Gaza tunnel trade?” Electronic Intifada, January 8, 2010. 가자 지구의 경제에 터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싶으면 Eric Ruder, “Gaza’s tunnel economy,” Socialist Worker, August 19, 2009를 보시오. ↩
- Eric Ruder, “A victory for Viva Palestina,” Socialist Worker, January 8, 2010. ↩
-
Ursula Lindsey, “Egypt’s wall,” Middle East Report Online, February 1, 2010,
http://www.merip.org/mero/mero020110.html ↩ - Ibid. ↩
- Lloyd C. Gardner, Three Kings: The Rise of an American Empire in the Middle East After World War II (New York: The New Press, 2009), 136에서 인용. ↩
- Ibid., 151-52. ↩
- Ibid., 148. ↩
- Ibid., 157. ↩
- Albert Hourani, A History of the Arab Peoples (New York: Warner Books, 1991), 410. ↩
- Marie-Christine Aulas, “State and ideology in republican Egypt,” in Fred Halliday and Hamza Alavi eds.,State and Ideology in the Middle East and Pakistan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88), 137. ↩
- Hourani, A History of the Arab Peoples, 409. ↩
- Ibid., 412-13. ↩
- 흔히들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국들이라는 골리앗에 맞서서 자신을 방어해야 했다고들 생각하지만, 사실 1967년에 이스라엘은 침략자였다. 1967년 전쟁과 1973년 전쟁에 대해서는 Norman Finkelstein, Image and Reality of the Israel-Palestine Conflict (London: Verso, 1995)의 5장과 6장을 보시오. 이스라엘이 1948년부터 1973년까지 잇따라 ‘방어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는 일반적 주장을 철저하게 파헤친 것은 Noam Chomsky, The Fateful Triangle: The United States, Israel and the Palestinians(Boston: South End Press, 1983), 98-103을 보시오. ↩
- Hourani, A History of the Arab Peoples, 413-14. ↩
- Marie-Christine Aulas, “Sadat’s Egypt,” New Left Review I/98: July-August 1976, 84. ↩
- Hourani, A History of the Arab Peoples, 419. ↩
- Naseer Aruri, Dishonest Broker: The U.S. Role in Israel and Palestine (Cambridge, MA: South End Press, 2003), 21-22. ↩
- Marvin Weinbaum, “Egypt’s ‘Infitah’ and the politics of U.S. economic assistance,” Middle Eastern Studies, vol. 21 no. 2 (April 1985): 217. ↩
- Ibid., 206. ↩
- Hourani, A History of the Arab Peoples, 420-21. ↩
- Judith Tucker and Joe Stork, “In the footsteps of Sadat,” MERIP Reports, no. 107 (July-August, 1982): 3. ↩
- “The IMF’s model pupil,” The Economist (U.S. edition), March 20, 1999. ↩
- Rick Kelly, “Bush administration defends US military aid to Egypt,” World Socialist Web Site, May 22, 2006. ↩
- Charles Levinson, “$50 billion later, taking stock of U.S. aid to Egypt,” Christian Science Monitor, April 12, 2004. ↩
-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paper, “Strengthening the U.S.-Egyptian relationship,” May 2002, www.cfr.org/publication/8666 ↩
- Tariq Ali, Bush in Babylon: The Recolonisation of Iraq (London: Verso, 2003), 159. ↩
- 2010년 1월 24일 필자가 이집트 사회주의자와 개인적으로 나눈 대화 내용이다. ↩
- Lindsey, “Egypt’s wall.” ↩
- Moshe Machover and A. Said (Jabra Nicola), “Arab revolution and national problems in the Arab East,” The International, Summer 1973. ↩
- 이집트에서 식료품 가격이 폭등할 때 일어난 노동자 파업을 다룬 ISR의 기사는 Hossam El-Hamalawy, “Revolt in Mahalla,” International Socialist Review 59, May-June 2008을 보시오. ↩
- 이런 노력들을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www.gazafreedommarch.org, www.vivapalestina.org, andwww.bdsmovement.net 등을 보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