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세계를 뒤흔드는 아랍 혁명 ― 의미와 전망
이집트 민주화 운동 *
새로운 조류들
이집트 활동가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대중 앞에 자신의 견해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박탈당했다. 인쇄 매체는 강력히 통제되고 집회와 로비 활동은 긴급조치법으로 금지됐다. 집회나 행진을 조직하는 사람들은 폭행이나 구속이나 투옥이나 그 이상의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2000년 이래 저항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잇따른 운동들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2004년 민주화 활동가들은 안정적으로 보이는 무바라크 정권의 헤게모니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키파야(충분하다!)’란 구호로 알려진 ‘변화를 위한 이집트 운동’과 ‘변화를 위한 운동들’이라고 알려진 그 자매 단체들은 이집트 국내외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 운동은 정치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중동 바깥에서 널리 퍼진 관점, 즉 아랍 세계는 근본적으로 민주화를 거부한다는 생각에 도전하는 등 많은 금기를 깨뜨렸다. 그러나 이 운동은 상승세를 타다 갑자기 추락하며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과 이 운동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을 좌절과 혼란에 빠뜨렸다. 이런 급격한 변화의 이유는 무엇이고, 이것이 더 넓은 사회에 미치는 파장은 무엇인가?
1 이 시위들은 서로 다르지만 상호보완적인 활동들을 지속해 왔고, 현대 이집트 정치에서 새로운 국면을 열었을 만큼 중요한 사건들이었다. 게다가 이 국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
이집트의 민주화 운동은 흔히 예고없이 나타났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불가사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관점은 특히 유럽 언론에서 두드러진다. 예컨대 영국의 <가디언>은 “난데없이 불쑥 나타난 키파야 운동의 기층 참가자들”이라고 보도한 바 있고, 독일의 <슈피겔>은 “‘변화를 위한 운동’, 즉 키파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보도했다. 사실 이집트의 민주화 운동은 시위들의 연속적인 흐름이라는 사슬 속의 한 고리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집트 사회 운동을 다룬 여러 문헌에서는 이를 두고 ‘시위의 주기들’이라고 불렀다.운동의 등장
1952년 쿠데타 이후 존속한 이집트 헌법을 보면, 대통령은 국민투표를 거쳐 ‘재선’할 수 있고 국민투표에는 의회에서 추천한 단 한 명이 후보로 오른다고 돼 있다. 이 절차야말로 대통령과 연계된 유일정당이 지배하는 권위주의 국가 체제의 핵심이다. 여당은 그동안 ‘해방당’에서 ‘국민연합’, ‘사회주의연합’, 가장 최근에는 ‘국민민주당NDP’까지 다양한 이름을 내걸었다. 국민민주당은 1976년, 명목상 다당제 내 여러 정당들 중 하나로 출범했다. 사실 이 정당은 이전의 집권당한테서 모든 권력을 이어받았다. 장기 집권한 이집트 대통령들은 셋 다 국민민주당 내 핵심 인사들이었고, 덕분에 이 정당은 브라운리가 칭한 것처럼 “개발도상국에서 가장 오래된 권위주의 정권들 중 하나”(Brownlee, 2007: 3)인 이집트 정부를 지금도 장악하고 있다.
1976년에서 2005년 사이 치러진 여덟 번의 총선에서 국민민주당은 민중의회(하원)의 다수당 지위를 여유롭게 유지했고, 당선이 보장된 대통령 후보를 거듭거듭 내세웠다. 그러나 무바라크에게 다섯 번째인 6년의 새로운 임기를 허락할 국민투표가 있기 직전인 2004년,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변화를 위한 대중 운동(프리덤 나우)’과 키파야는 “무바라크의 5선 연임과 … 향후 무바라크의 둘째 아들 가말의 ‘권력 승계’를 거부한” 여러 단체들 중 가장 먼저 생겨난 단체였다.(Shehata, 2004: 4) 이 단체에는 ‘민주주의를 바라는 여성들(거리는 우리의 것)’, ‘변화를 바라는 청년들’, ‘변화를 바라는 기자들’, ‘변화를 바라는 예술가들’, ‘변화를 바라는 노동자들’ 등이 속해 있었다. 이런저런 차이가 있었어도 이 단체들은 몇 가지 근본 원칙들에 동의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바라크의 대통령직 연장 거부, 무바라크 일가의 권력 세습 반대, 선거 민주주의 지지였다.
3 키파야 운동은 계속해서 거리 집회, 대학 내 집회, 다양한 모임, 거리 행진 등 여러 가지 공개 활동을 조직했다. 이 운동의 정치적 불복종 전략은 곧 활동가들이 구속과 탄압의 위험을 무릅썼다는 것을 뜻했다. 경찰은 때때로 집회가 보이지 않고 또 집회의 주장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회 대열을 완전히 고립시켰다(진압 경찰이 집회 대열을 겹겹이 에워싸서 오직 결의 수준이 높은 활동가들만 집회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키파야 운동은 1년 만에 단체 결성 선언문에 동의하는 1천8백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공개적으로 정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곧 보안 당국의 밀착 감시 대상이 된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집트 사회에서 이 숫자는 아주 인상적인 것이었다.(Kifaya 2004) 키파야 결성 선언문에는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는 원칙들이 제시돼 있다.
2004년 12월 12일, 키파야는 첫 (침묵)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마르크스주의자, 나세르주의자, 이슬람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고참 활동가 일곱 명이 저녁 모임에서 새로운 대중 운동 단체에 관한 생각과 ‘키파야’라는 구호를 처음 논의하고 난 뒤 석 달도 안 돼 성사됐다.우리 서명자들은 이집트 시민이고, 이집트의 다양한 사회 구성원 중 일부로서 지식사회, 시민사회, 정치공간, 문화공간, 노동조합 등 다양한 공적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사회 각계각층에 포진해 있는 우리는 이집트 사회의 풍부한 정치적 다양성을 보여 준다. 우리는 오늘날 두 가지 중대한 위험이 우리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고 본다. 이 위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강화하고 둘 중 한 가지만 따로 해소할 수 없다.(Kifaya 2004)
키파야 운동은 이 두 가지 위험을 ‘아랍인들의 땅[팔레스타인과 이라크]에 대한 끔찍한 공격’과 이집트 정치체제 곳곳에 만연한 ‘억압적인 철권통치’라고 규정하고 다음과 같은 개혁을 요구했다.
대부분 정치 활동이 처음인 청년 수백여 명이 곧이어 키파야 운동에 동참했고, 이들의 활동은 이집트 국내외 언론의 1면을 장식했다. 바이닌은 비록 키파야 운동의 전국적 조직 역량에 한계가 있었지만 “그 슬로건[충분하다!]은 이집트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았다. 키파야 운동은 이후 2년 동안 거기서 파생된 수없이 많은 운동들에 영감을 줬다”고 지적한 바 있다.(Beinin, 2007: II) 키파야 운동이 성장하자 무바라크는 ‘키파야’란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운동을 공격했다. 무바라크는 이 운동이 이집트 외부 세력의 사주를 받았고 집회 참가자들이 돈을 받고 참가한다고 주장했다. “키파야의 활동은 돈으로 매수한 것들이다. 나도 마음만 먹었다면 돈을 주고 집회를 조직해 ‘충분치 않다’고 외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무바라크 반대편의 사람들은 이 발언이 무바라크 자신의 정치 집회 동원 방식을 보여 준다고 되받아쳤다.)대통령직을 포함해 사회 모든 영역에서 권력 독점을 폐지할 것
정당성의 궁극적 원천으로서 법의 지배를 확립할 것
국가의 부에 대한 근거 없는 독점과 낭비를 없앨 것
이집트가 국제사회에서 잃어버린 정당하고 의미 있는 지위를 회복할 것(Kifaya 2004)
키파야 운동의 젊은 활동가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무바라크 정권에 맞섰다. 시내 중심가에서 집회를 하는 데서 더 나아가 슈브라, 사이다 제이납 등 카이로의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비공식 집회를 하는 등 ‘게릴라’ 행동을 펼쳤다. 이들은 휴대폰 문자 메시지와 인터넷을 활용해 집회 시간과 장소를 공유했다. 아지미(Azimi, 2005)는 ‘변화를 바라는 청년들’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두세 명씩 짝을 지은 활동가들이 광장이나 공원에 모여 소형 사진전을 열고 시민들에게 전단을 나눠 준다. 그러고 나서 거리의 시민들과 즉흥적으로 토론을 벌인다(“두 단어면 충분하다”가 이 활동가들의 모토다). 사람들의 일상적 고민을 정치 체제의 실패와 연결시키고자 활동가들은 교통비, 의료보장, 실업 등 삶의 모든 영역에 맞닿아 있는 문제들을 제기하고 토론한다.
한 가지 중요한 변화는 청년들이 블로그와 웹페이지를 다양하게 활용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집회를 조율하고, 구속과 기소 관련 정보를 전파하고, 전략·전술을 논했다. 레빈슨은 “온라인 모임”들이 “급성장하고 있는 이집트 저항 세력의 확성기 구실을 하고 있다”고 평했다.(Levinson, 2005) 그는 온라인 네트워크가 급속하게 저항 운동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저항 운동 초기에 만들어진 블로그들은 이제 이집트 정치 환경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2007년을 기준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블로거가 6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비록 그 중 소수만이 정치 문제를 다뤘지만, 이들은 숫자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했다.(Saleh 2007)
5 주변 시민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일부 시민들은 행진에 합류했고 대부분은 그저 쳐다볼 뿐이었다. 무바라크 정부 지지자로 보이는 청년들이 시위대를 공격하자, 시위대는 그들을 조롱했다. “어이, 20파운드(시위대에 반대해 모인 이들이 돈을 받고 참가한 자들이라는 뜻). 지금 뭔 소리 하는 거야?” 이런 활동들은 활동가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대중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이런 행동들은 추동력을 잃지 않고 계속됐고, 정부는 이에 대처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래서 일부 행진들은 주변에 경찰이 없는 상태에서 진행됐다. 그것을 두고 한 청년 활동가는 집회 참가가 “마치 데이트에 나갔다가 상대방에게 바람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6
온라인을 통한 의사 소통 덕분에 활동가들이 경찰보다 한 수 앞서 움직일 수 있게 되면서, 몇몇 집회들은 경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시민들이 많은 곳을 가로질러 행진하기도 했다. 이런 대중 집회는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처음 있는 것이었다. 2005년 6월, ‘변화를 위한 대중 운동’은 카이로 시내 인근의 슈브라 지역에서 활동가 5백여 명이 참가한 집회를 열었다. 여기서 집회 참가자들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쇼핑 거리와 시장을 가로질러 행진했다. 이들이 내건 구호는 그곳 시민들이 공공장소에서는 결코 들어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키파야, 키파야”, “무바라크 퇴진”, “콘돌리자, 무바라크에게 비자를 주고 미국으로 데려가라(당시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가 이집트를 방문 중이었다).”7 시위대는 사실상 전염성이 강한 변화 열망을 옮기고 다니는 병원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이들이 공공장소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거리를 통제하는 데 익숙한 정부 당국에 공포심을 안겨 줬다.
카이로 거리의 일상을 오랫동안 연구한 사회학자 아세프 바야트는 이런 행동이 “초대받은 사람들을 불러모을 뿐 아니라 그들과 비슷한 불만 — 그것이 실재하는 것이든 상상 속의 것이든 — 을 느끼는 이방인들도 함께 끌어들인다. … 단지 시위대가 불러일으키는 소란과 불확실성이 아니라, 이런 잠재적 폭발력이야말로 공공장소 구석구석에서 힘을 행사하는 정부 당국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운동의 기원
8 가드당은 역사가 깊은 (또 정부에 아주 타협적인) 와프드당에서 분리돼 나온 분파였다(가드당의 지도자 아이만 누르는 당의 창당 서류를 위조했다는 죄목으로 국가가 기소해 2005년 1월 투옥됐다). 와프드당과 형식적으로는 좌파 정당인 타감무당 등 전통적 야당의 당원들도 키파야 운동에 동참했다. 그러나 타감무당은 지도부 차원의 조율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운동 내에서 타감무당은 지나치게 현실에 안주하는 것으로 비쳐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키파야 운동은 사실상 이집트 정치에 생기를 불어넣은 새로운 활동가들의 결집체였다.
키파야 운동의 수평적 구조는 다양한 지역 수준의 이니셔티브를 가능케 했다. 지도부 차원의 결정은 여러 경향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의 합의를 통해 이뤄졌다. 이 안에는 카라마당(나세르주의자들), 가드당(자유주의자들), 중앙당과 노동당(이슬람주의자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이 있었다. 정부는 가드당을 제외한 모든 조직들을 불법으로 규정했다.9 키파야 운동은, 정권에 맞선 도전이 — 설사 정치체제 자체에 맞서는 것이 아닐지라도 — 기존 정치 조직의 틀 바깥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확인해 주는 듯했다.
이런 변화가 그토록 의미심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1990년대 초, 무바라크는 이슬람주의자들의 활동에 맞선다는 구실로 도입한 일련의 억압적 법률과 긴급조치법을 활용해 공식 정치의 공간을 없애려 했다.(Kienle 2001; Schwendler and Clark 2006) 1990년대 내내 정권에 저항하는 공개적인 움직임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고, 대다수 학자들은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사라졌다고 분석했다. 예컨대, 브라운리는 “무바라크가 이슬람주의자들, 좌파들, 인권 단체들을 엄청나게 탄압한 나머지 이집트 내부에는 변화를 위한 동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고 분석했다.(Brownlee 2002: II) 새로운 대중 행동이 이런 시기에 마침표를 찍었다. 대중 행동을 중심에 둔 활동, 광범한 단체들의 참여, 정치 활동 참여 강조 등도 새로운 발전이었다. 이전 수십 년 동안 일터와 거리에서 일어난 운동은 경제적 또는 지역적 불만으로 촉발되곤 했다. 그러나 이제 이런 문제들뿐 아니라 정치 개혁 요구를 중심으로 다양한 경향의 모임과 개인 들이 뭉쳐 기존의 합법 야당들의 무기력이 남긴 유산에 도전했다.키파야 운동의 성장은 사회 운동을 다룬 문헌에서 ‘파급 효과’라고 부르는 개념으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메이어와 휘티어는 운동이 다른 운동들과 분리돼서 서로 아무 영향도 주고받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고 “오히려 다른 운동에서부터 성장하고, 또 다른 운동을 만들어 내며, 다른 운동들과 협력하고, 더 큰 문화적·정치적 환경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서로 간접적인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지적한다.(Meyer and Whittier 1994: 277) 운동에 참가해 그것의 등장과 성장을 지켜본 사람들의 증언이나 이집트 운동의 주요 활동가들과 한 인터뷰를 보면, 키파야 운동이 사실 이전에 있었던 운동들, 즉 2000년과 2001년 팔레스타인 인티파다 연대 시위와 2003년 반전 운동의 뒤를 이은 대중 행동의 ‘세 번째 주기’임을 알 수 있다. 키파야 운동과 이집트반세계화운동AGEG의 주요 활동가였던 W(보안상 이유 때문에 가명을 썼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04년의] 대중적 항의 운동은 우리가 지난 10여 년 사이 목격한 최초의 거리 시위였던 인티파다 연대 시위에 이은 대중 집회의 세 번째 국면이었다. 인티파다 연대 시위 이후에는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가 있었다. 이 두 국면을 거치며 운동은 확실히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인티파다 연대 시위와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 모두 연대 구호에서 시작을 했지만 결국에는 무바라크와 경찰, 더 나아가 체제 자체에 반대하는 구호로 마무리되곤 했다. 2003년 3월 20일과 21일 반전 시위 이후 경찰은 특히 무자비한 탄압을 일삼았다. … 바로 그때 처음으로 여러 정치 조직들이 무바라크를 끌어내리는 것을 공공연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전에는 이 문제를 분명하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2000년 9월에 시작된 제2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는 이집트 거리 정치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프랫이 말한 것처럼, “제2차 인티파다는 아마도 제1차 걸프전 이후 아랍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급진적인 자발적 시위들을 촉발했다.”(Pratt 2007: 170) 이집트에서는 학생 수천 명이 거리로 나왔는데, 이는 학생들이 설사 시위를 하더라도 대학 캠퍼스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무바라크 정권의 철칙을 깨뜨렸다. 그 중에는 무바라크 정권의 고위 관리 자제들이 많이 다니는 엘리트 학교인 카이로아메리칸대학AUC의 청년들도 있었다. 전국에서 일어난 학교와 거리의 집회들에 관한 수많은 목격담을 들어 보면, 고등학생들도 운동에 대거 참여했다. 사디키는 인티파다가 곧 “아랍의 수백만 인민에게 영적인 중요성을 띠게 됐고, 언젠가 분노한 아랍인들이 대중 저항을 통해 정의와 평등과 해방이라는 자신들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게 했다”고 지적한다.(Sadiki 2000: 83) 이 점은 이집트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덕분에 광범한 이집트 대중, 특히 학생들이 이스라엘과 미국을 겨냥한 대중 시위, 학내 활동, 보이콧 캠페인 등을 벌여 정권에 대한 환멸을 표출할 기회를 갖게 됐다.
12 PCSI는 단체 간 이데올로기적 차이와 역사적 앙금을 극복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대중 캠페인으로 연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PCSI와 ‘변화를 위한 대중 운동’의 창립 멤버였던 아이다 세이프 엘 다울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티파다 덕분에 거리에서 집단적 정치 행동이 부활했다. 새로운 행위 주체들이 혁신적인 공동의 연대체를 건설하기도 했다. 고조되는 분위기를 타고 2000년에는 NGO 스무 곳과 다양한 배경을 가진 독립적 활동가들이 ‘인티파다를 지지하는 민중위원회PCSI’를 결성했다. 이 위원회에는 직업협회와 NGO의 활동가들뿐 아니라 서로 경합하는 정치 경향들, 즉 무슬림형제단, 나세르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이 이집트 현대사 최초로 함께했다. 이후 2년 동안 PCSI는 팔레스타인에 보낼 40만 달러 상당의 성금과 구호품을 모았고(이집트 대중 정치의 맥락에서 볼 때 매우 큰 액수다) 이집트 정부에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라고 요구하는 서명에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PCSI의 경험은 한동안 커다란 영감을 줬다. 이후 우리가 서로 다른 정치 경향들이 함께하는 민주화 운동 연대체를 만들 때 재현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 운동이었다.
PCSI의 모델을 따라 AGEG, ‘변화를 위한 3월 20일 운동’, 노동권방어위원회 등 수많은 대중 운동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이 단체들의 구체적인 의제는 저마다 달랐지만, 어쨌든 이 단체들의 등장은 큰 중요성이 있다. 이미 대중의 신뢰를 잃은 정당들 바깥에서 활동가들이 개입할 수 있는 연대체가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 단체들 덕분에 활동가들은 지속적으로 만나 협력할 수 있는 공간을 갖게 됐다. 활동가들은 이를 통해 협상 기술, 전술, 그리고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이 점은 국가의 억압이 강화되면서 거리 활동에 제동이 걸렸을 때 특히 더 중요했다. 또한 이 연대체들을 통해 활동가들은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대중의 범위가 바뀌는 것에 감을 익히기 시작했다. 케말 할릴, 아이다 세이프 엘 다울라, 함딘 사바히 등 연대체의 주요 인사들이 이후 등장하는 민주화 운동의 발의자이자 지도자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티파다를 지지하는 대중 캠페인과 거리 활동들이 잦아든 2002년 이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항의하는 새로운 운동이 떠올랐다. 2003년 3월 20일 활동가들은 카이로 시내 중심지에서 대중 시위를 호소했다. 약 수백 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됐던 타흐리르 광장은 4만 명이 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평소처럼 폭력적 대응을 했다가 이미 “거리는 우리의 것”(시인 살라 자힌의 노래에서 따온 문구)이라 선언한 시위대의 활동이 더 크게 번질까 봐 두려웠던 무바라크 정부는 망설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보안 경찰에게 해산 당할 때까지 24시간 넘게 광장을 지켰고, 이 행동은 이후 ‘타흐리르 인티파다’로 알려졌다. 어떤 이는 이 집회를 두고 “1970년대 이후 카이로에서 볼 수 없었던 이틀이었다”고 회상했다.
보통 잡아먹을 듯 빵빵거리는 차량들 사이로 보행자들이 목숨을 걸고 길을 건너던 타흐리르 광장은 이날만큼은 시위대의 차지였다. 시위대는 갑자기 차가 없어진 타흐리르 광장을 약 12시간 동안 경이로운 듯 돌아다녔다. 환희에 찬 한 활동가는 말했다. “우리가 새장 밖으로 나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야.” 진압 경찰들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그들은 오직 광장 외곽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광장 중앙을 시위대에 내 줬고, 시위대 3천여 명은 연설을 듣고 구호를 외쳤다. … 정권 반대 구호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Schemm 2003)
이후 며칠 동안 전국의 대학 캠퍼스, 모스크, 광장, 학생 밀집 거주지 등 전국에서 집회가 있을 만한 곳들에는 모두 무장한 보안 차량과 진압 경찰들이 진을 쳤다. 여러 명이 구속되고 두 번의 집회가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무산되면서 초반의 대중 동원 물결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분위기가 바뀌고 대중의 자신감이 고조된 것은 돌이킬 수 없었으며, 한때 이집트 정치의 특징이었던 ‘거리’의 전통이 부활했다.
시위의 주기
14 이 신생 운동은 이전에 있었던 대중 캠페인의 지도부 구조와 동원 연결망을 활용했을 뿐 아니라 집회 참가자 공동체들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바야흐로 각각의 활동 국면이 이전의 행동들과 국가의 대응에 영향을 받는, 일련의 시위 주기가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민주화 운동은 일련의 활동들이 서로를 강화하는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활동 내부에서는 서로 공유되는 연결망과 서로 중첩되는 지도부가 전략과 전술을 배우고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면서 자신감이 고취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화 운동이 단지 주요 정치 행위 주체들과 그들의 활동이 만들어 낸 ‘파급 효과’의 산물일 뿐이라는 말은 아니다. 각각의 운동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또 오랫동안 대중을 소외시켜 온 이집트 경제와 국가 체계의 끊임없는 구조적 위기 속에서 촉발됐다. 그러나 각각의 운동의 궤적은 반복된 상호 보강 작용을 통해 만들어졌고, 이것은 곧 더 큰 파급력을 지니게 될 참이었다.
2004년 12월에 시작된 정치적 자유화를 요구하는 초창기 시위들에는 팔레스타인 인티파다 연대 집회와 반전 집회에 참가했던 사람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처음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많이 참가했다.구조와 주체
2005년 국민투표를 앞둔 시점에 민주화 운동이 부상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왜 그 전이나 후가 아니었을까? 몇 가지 사회운동 이론이 제시하는 환원주의적 답변, 즉 운동의 참가자들이 선거를 앞두고 기회를 포착했다는 설명이 충분치 않은 이유는 이것이 무바라크 재임 기간에 있었던 첫 국민투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운동이 부상하기 전에 권위주의적 환경에 이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결국 [이 시점에 ― M21] 민주화 운동과 그 활동가들(주류 정당 바깥에서 충원된)이 등장한 것은 그 전에 나타난 시위의 주기들을 고려할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선행한 시위 주기들 속에서 공유된 인물과 지도부, 집회 참가자 공동체, 집단적으로 습득한 전술, 이데올로기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공간 형성 등이 민주화 운동에 활력을 더해 준 것이었다. 또한 민주화 운동의 부상은 변화하는 구조적 요인들, 즉 무바라크 정권이 북아프리카의 친미·친이스라엘 국가를 자임함으로써 정당성이 약화했고 신자유주의 ‘개혁’의 결과 대중의 생활수준이 악화한 것 등의 반영이기도 했다. 바로 이런 구조적 조건의 변화와 새로운 정치 행위 주체들의 개입 덕분에 민주화 운동이 약화한 뒤에도 대중의 불만이 표출될 수 있는 환경이 계속 조성됐다.
15 해외 언론은 여러 차례 보도하며 당시 폭력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이집트 특파원은 경찰과 국민민주당 관리들이 저지른 난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키파야 운동은 무바라크 정권이 제공할 수 있는 개혁의 한계를 확인하고 억압 조처를 활용하고자 하는 정권의 의지를 가늠함으로써 정권의 단단함을 판가름할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초기 몇몇 제한적인 민주화 시위에서 자제력을 발휘했던 무바라크 정권은 2005년 3월을 기점으로 자신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슬림형제단이 개입해 여러 도시에서 호소한 집회에 강경하게 대응한 것이다. 키파야 운동과 발맞춰 정치 개혁을 요구한 집회 참가자들에게 경찰은 최루탄과 무차별적인 구타로 대응했다. 다칼리아에서는 진압 경찰의 공격으로 무슬림형제단 소속 타렉 간남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구속됐다.(Howeidy 2005b) 국가의 폭력 조처 강화는 키파야 운동의 활동가들도 겨냥했다. 2005년 5월 25일, 정부의 헌법 76조 개정 시도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여성 참가자들은 보안 경찰들에게 조직적인 성희롱을 당했다.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국민민주당 관리들이 청년 수백 명을 지휘해 반정부 시위대를 공격했다. 본지 특파원을 비롯한 기자들과 당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몽둥이를 든 남성들이 시위대를 맘껏 구타하도록 진압 경찰이 진입로를 만들어 주는 것을 봤다. 특히 여성들이 표적이 됐는데, 카이로 중심가 기자협회 건물 계단에서 열린 집회의 참가자들은 대부분 남성이었지만 그 중 최소 다섯 명의 여성이 끌려 나와 따귀를 맞고 주먹으로 맞고 발길질 당하고 심지어 성추행까지 당했다. 최소 두 명의 여성의 블라우스가 찢겨졌다.(Williams 2005a)
그 후 몇 개월 사이, 이슬람주의 지식인 모하메드 알아와, 판사 타리크 엘 비쉬리, 전 장관 예히아 엘 가말, 전 총리 아지즈 세드키 등 저명 인사들이 모여 ‘변화를 위한 국민 전선’을 결성했다. 이 단체는 정부의 경제·정치 정책을 비판하며 무바라크의 퇴진을 요구했다. 한편, 유럽에 거주하는 이집트 사업가들과 전문직 종사자들은 영국 런던에서 ‘이집트를 구하기 위한 전선’을 결성했다. 이 새로운 단체들의 대중 동원 능력은 제한적이었지만, 이들은 중간계급 내 무바라크 정권 지지자들과 어용 지식인들에 도전하며 민주화 운동에 힘을 더했다. 동시에 이들은 정치적 자유화를 위한 대중 캠페인이 가치 있고 생산적인 대중 행동이라는 정당성을 더해 줬다. 2005년 여름,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사회주의자들, (이슬람주의) 노동당, 무슬림형제단이 동참한 ‘변화를 위한 국민연합’이 만들어졌다. 이 단체의 결성은 정치적으로 판이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공식적이고 체계적인 협력(개인적 차원을 넘어 조직적 차원에서)을 천명한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곧 이런 전략이 유효한 것인지, 심지어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인지를 둘러싸고 특히 좌파 진영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17 그러나 함자위가 지적한 것처럼,
그러나 이런 상황 변화(무바라크 지지자들의 이반, 그리고 서로 반목하던 정치 세력들 사이의 공조) 가운데 어떤 것도 그 이후로 성명서 발표, 기자회견·집회 개최 이상의 성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키파야 운동은 애초 10만 명이 참여하는 집회를 조직하고 대중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을 펼치려 했다.새롭게 등장한 시위 운동은 거리를 다시 정치 활동의 장으로 만드는 데서 상대적으로 성공을 거뒀지만, 지지자들을 확대해 나가는 데서는 대체로 효과적이지 못했다. 그것은 이 운동이 도시 중심부를 제외하면 영향력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키파야 운동과 그것에 뒤이은 운동들은 분명 의미 있는 숫자의 이집트 중간계급을 동원하는 데 실패했다.(Hamzawy 2005:4)
그러나 이 운동이 더 광범한 정치 지형에 미친 효과는 상당했다. 키파야의 활동은 비록 수백 명 이상을 끌어들이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운동 단체들이 정부와 갈라선 수백만 명을 어떻게 대변하고 또 그 속에서 조직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들을 제기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하는 세력들이 의견 일치를 이루었다는 사실 자체가 서로 이질적인 재야 세력들에게 권위를 가지는 것이었다. 세속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사람부터 이슬람주의 신정국가를 지향하는 사람까지, 정치적 이상향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무바라크의 지배를 끝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런 중요한 발전은 이집트 정치에서 무엇보다 절실했던 ‘공동전선’ ― 최근 사회 운동을 다룬 문헌에서 ‘협력적 분화’라고 부르는 ― 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대중 행동이 낳은 명확한 성과였다. 압델 라흐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집트처럼 역사적으로 저항 세력들이 서로 분열해 왔고, 정치 환경이 극도로 권위주의적인 곳에서 공동전선은 정치적 자유와 더 광범한 변화의 달성 가능성을 높여 준다. 좌파와 우파 진영 내에서 공동전선은 여전히 논쟁거리이지만, 현실에서는 공동전선이 거듭 여러 사회 경제적 투쟁 속에서 등장했다. 이집트 내 어떤 정치 단체의 발의도 없이 시작된 파업 투쟁을 보면, 함께 협력해 본 경험이 거의 없는 좌파 활동가들도 이제는 파업 연대 활동을 벌이는 데서 효과적으로 협력한다.연대체 건설을 특징으로 하는, 최근 성장하고 있는 국제 운동들이 채택하고 있고 이집트 운동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한 가지 두드러진 전술은 “협력적 분화”를 보장하는 수단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연대체에 속한 단체들은 “운동의 적들에 맞서서는 연대의 외관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지지자들과 소통하는 데서는 차별화를 꾀할 수 있다.”(Bandy & Smith 2005: 10) 이 덕분에 서로 표방하는 이데올로기, 계급 이익, 장기적 과제가 다른 다양한 정치 조직들이 협력할 수 있다.(Abdel-Rahman 2009: 40)
키파야의 여파
2005년 대선이 끝나자 키파야 운동과 그 자매 단체들은 차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다른 행위 주체들이 정치 무대 전면에 등장했다. 2006년, 이집트 판사들이 사법권 독립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것은 국가의 핵심부에서 정권의 반대파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판사들은 선거 제도 내부의 부정부패 의혹을 제기했고, 사법부가 정치적 압력을 받지 않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등 정권에 강력히 도전했다. 현행 헌법상 판사들은 선거 결과를 승인해야 한다. 사법부 내 준準공식 협회인 ‘판사모임’은 2005년 총선 결과를 승인하길 거부했다. 1백 명 넘는 판사들이 선거 부정을 신고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집트 상급 법원의 판사인 마흐무드 마키와 히샴 알바스타위시는 선거 부정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2006년 2월, 그들은 판사에게 부여된 면책 특권을 박탈당했고 ‘국가 모독죄’로 징계 청문회에 소환됐다.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 크게 주목 받았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이집트 정부는 판사들이 자신들의 직무를 수행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징계했다. 이집트 정부는 유권자를 협박했다는 광범한 증거들을 조사해야지 선거 부정을 알린 사람들에게 화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Human Rights Watch 2006a)
‘판사모임’ 소속 판사들은 알렉산드리아의 판사모임 회관에서 점거농성을 조직했고, 그 뒤에 카이로 회관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이들이 징계 재판에 출석하고자 고등법원에 나타나자,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시민들에게 이들은 자신의 변화 열망을 대변하는 사람들이었다. 시민들은 “판사들이여, 판사들이여! 우리를 압제자로부터 구원하소서!” 하고 외쳤다.(BBC 2006) 이들의 다수는 키파야 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이었다. 많은 시위 참가자들이 경찰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았고 2백50명 이상이 구속됐다. 이윽고 무슬림형제단이 대중 집회에 동참했다. 2006년 5월, 이들의 집회는 카이로 시내를 마비시켰다. 집회를 지켜본 독립적 관찰자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경찰은 활동가들뿐 아니라 기자와 카메라 기자 들도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이집트 정부는 평화 시위를 하는 반대자들을 그야말로 뿌리 뽑으려 작정한 듯하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개혁적인 판사들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커지는 것을 자신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실질적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Human Rights Watch 2006b)
노동자들의 등장 판사들의 대중 캠페인이 잦아들자(기소된 판사들 중 한 명은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다른 한 명은 견책을 받았다) 새로운 대중 행동의 물결이 몰려왔다. 이번에는 노동자들과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침묵을 지켜 온 산업 노동자들이 잇따라 파업에 돌입했다. 수년간 이어진 이 파업들은 공공부문, 민간부문 할 것 없이 이집트 경제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발생했다. 그 중에는 마할라 알 쿠브라의 방직 공장 노동자들처럼 역사적으로 노동계급 전투성의 핵심이었던 부문도 있었고, 세무 공무원 등 사무직 공무원들도 사상 처음으로 파업에 참여했다. 노동자들은 대부분 임금 인상, 계약 조건과 보너스 개선, 일자리 보장을 요구했다. 몇몇 투쟁에서는 현장조합원 노동자들이 공식 노조기구와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사실상 국가와 충돌했다. 자유주의적 성향의 신문 <알미스리 알야움>은 2006년에만 2백22건의 점거 파업, 조업 중단, 단식 투쟁, 집회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또 2007년 1월부터 4월까지 거의 매일 새로운 노동자 투쟁을 보도했다.(Beinin and Hamalawy 2007) 이처럼 사회경제적 요구를 앞세운 저항에 첫 해에만 1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동참했는데, 이는 “지난 반 세기를 통틀어 이집트에서 가장 큰 사회운동”이었다.(Beinin 2007: 20)
비록 민주화 운동이 노동자 운동과 조직적 연계, 겹치는 지지층, 또는 두 운동에 모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진 못했지만, 노동자 운동의 부상을 민주화 운동의 영향과 떼어놓고 볼 수는 없다. 노동자 운동 참가자들의 다음과 같은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키파야 운동과 관련 단체들의 활동은 실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최근 이집트에서 있었던 정치적 격변들, 즉 2000년 9월 팔레스타인 인티파다 연대 운동에서 가장 최근의 헌법 개정 운동까지, 그리고 그 사이 2003년 이라크 침공 반대 운동과 헌법 76조 개정 반대 운동, 대선, 총선 등이 노동자들에게 끼친 영향을 무시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사회의 일부인 노동자 계급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영향을 받습니다. 보안 경찰에 맞서 집회·시위의 권리를 획득한 정치 운동은 분명 수십 년간 잠잠했던 기존 체제를 뒤흔들었습니다.(El-Bassiouni and Saeed 2007: 6)
사라지는 듯했던 민주화 운동의 뒤를 이은 노동자 투쟁은 민주화 운동과 유기적인 연관성이 있다. 브라운리는 둘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에 주목한다. “키파야 운동의 집회는 그 규모가 수십 명에서 수백 명 정도에 그쳤지만, 그 운동에 힘입어 다른 집단들이 과감히 정부를 비판하고 키파야 운동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표명할 수 있었던 듯하다.”(Brownlee 2007: 149) 민주화 운동은 무바라크 정권이 제공할 수 있는 ‘민주화’와 정치 개혁의 한계, 또 대중의 변화 요구에 저항할 수 있는 정권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 구실을 했다. 키파야 운동은 정치적 프로세스에 새로운 메커니즘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를 뛰어넘는 의의도 있다. 즉, 키파야 운동은 비록 그 자체로는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후 다른 운동들에서도 성공적으로 채택되는 전술을 도입해 서로 경합하는 행위 주체들 사이 협력을 가능케 했고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강화했다.
결론
경제·정치·사회 쟁점을 둘러싼 저항이 일반화하면서 무바라크 정부의 정책에 환멸을 드러내는 이집트인의 수가 전례 없이 늘어났고, 그 면면도 이전 어느 때보다 다양해졌다. 온갖 종류의 산업과 공공 서비스 부문 활동가들, 시골 학교의 열악한 학습 조건에 항의해 점거 농성을 펼친 부모들, 도시 정화 계획으로 주거지에서 쫓겨난 슬럼 지역 거주자들, 자식을 경찰이 고문한 것에 항의하며 단식 투쟁을 벌인 어머니들, 깨끗한 물을 요구하며 행진을 한 수십여 마을의 주민들이 그들이다. 맥아담 등이 지적한 것처럼, “사회 운동, 혁명, 파업, 민족주의, 민주화 등 다양한 형태의 갈등이 유사한 기제와 과정들을 통해 발생”하는 모종의 “갈등의 동역학”이 사람들의 행동 속에서 나타났다.(McAdam et al. 2001: 4)
2006년 미조직 대중이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보면 저항의 파고가 높아진 것이 민주화 운동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키파야 운동과 그 자매 단체들이 비록 그 규모와 지지층에서는 대규모 운동을 건설하지 못했지만 쿠란이 “들불로 번질 불꽃”이라 부르는 것을 만들어 낸 것만은 분명하다.(Kuran 1989: 42) 정권이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는 듯 보일 때, 정권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은 개인적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 이 때 대다수 시민들은 자신의 불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길 꺼린다. 아주 사소한 충격들이 정권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이것이 ‘밴드웨건 효과(편승 효과)’를 부추겨 그동안 은폐돼 있던 온갖 사회적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날 때까지 정권은 마치 확고부동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Kuran 1989: 42)
다양한 운동들이 이처럼 상호 연관성을 갖는 것이 꼭 운동 참가자들의 직접적인 정치적 학습의 결과이거나 상이한 운동들 사이에 참가자들이 중복되는 데서 비롯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특정 운동이 남긴 ‘선례’의 효과일 수도 있다. 이집트의 경우 민주화 운동을 다룬 언론 보도 덕분에,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여러 행보가 일터와 지역사회에서 널리 회자된 덕분에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대안과 가능성의 폭이 넓어졌다. 키파야 운동과 그에 앞선 운동들은 대중이 자신의 환멸을 표출하는 데 도움을 줬고 집단 행동이 구체적 불만과 요구를 널리 알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다 줬다. 저항 운동의 성장은 새로운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장을 마련했다. 민주화 운동은 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조직하기 위한 대안적 수단을 제시해 이집트 정치 영역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정권 교체의 실현 가능성도 높였다.
이집트 국가는 앞으로 또 한 차례 대중적 저항의 주기를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국제 금융 위기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상황에서 2011년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그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비록 2005년 민주화 운동이 결정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 어쩌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 무바라크 정권에 대한 도전은 분명 정치적 권리와 민주화를 둘러싼 영역에서 다시 불거질 것이다. 키파야 운동과 그 자매 운동들의 활동가들, 또 그들의 지지자들이 아직 완전히 후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언제든 다시 개입해 자신들의 경험을 전수할 준비가 돼 있다. 게다가 이집트 노동계급 운동은 계속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다가올 대중적 저항의 주기가 정권에 더 큰 위협이 되는 것은 바로 50년 만에 가장 강력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노동 운동이 이 주기의 서막을 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민주화 운동이 팽창할 수 있는 영역이 전례 없이 넓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때 새롭게 부활할 민주화 운동 앞에는 한 가지 과제가 제기될 것인데, 노동 운동처럼 사회경제적 요구를 앞세운 저항에 참가하는 사람들과 민주화 운동이 유기적인 연계를 맺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주
-
라밥 엘 마흐디는 이집트의 사회주의자다.
출처: Rabab El-Mahdi, ‘The democracy movement: cycle of protest’, Egypt: The Moment of Change, Zed Books, 2009.
↩
- McAdam et al. 2001을 보시오. ↩
- 이 글에서는 ‘키파야’와 ‘민주화 운동’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했다. ‘키파야’는 다양한 민주화 운동 집단 중 하나이지만, 그 중 가장 컸고 대표적 민주화 운동으로 여겨진다. ↩
- 키파야 사무국장인 조지 이사크와 한 인터뷰. 2006년 8월 9일 카이로. ↩
- 쿠웨이트 신문 <알 사야사>와 이집트 카이로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알 아흐람>에 보도된 것으로 Howeidy 2005a에서 재인용. ↩
- 슈브라 시위 보도와 사진은 Arabawy 블로그(http://arabist.net/archives/2005/06 /23/demo-in-shubra/)를 보시오. ↩
- Ibid. ↩
- Shahine 2005에서 재인용. ↩
- 이집트 법에는 정당은 국가에서 지정한 기구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고 돼 있다. 이 기구만이 공개적으로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
- Shehata (2004: 4)는 참가자들의 ‘수와 이데올로기적 다양성’에 관해 논평한다. Schwedler and Clark 2006도 참조하시오. ↩
- 2006년 7월 6일 카이로에서 한 인터뷰. ↩
- 무역과 각종 협력 관계로 이스라엘과 국교를 ‘정상화’하려는 이집트 정부의 행보가 표적이 됐다. ↩
- PCSI 창립 멤버인 A 엘마샤드와 한 인터뷰. 2007년 1월 27일 카이로. ↩
- 아이다 사이프 엘다울라와 한 인터뷰. 2006년 8월 8일 카이로. ↩
- 2005년 키파야의 운영 위원이던 사람과 한 인터뷰. 2006년 12월 카이로. ↩
- 무바라크는 2005년 2월 헌법 76조 개정 움직임을 시작하면서, 1952년부터 대통령 선출 방법이었던 단일 후보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 대신에 대선에서 복수 후보가 입후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05년 5월 25일 76조 개정에 대한 찬반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키파야 활동가들은 현 집권당이 계속 대통령직을 독점할 수 있게 한 개정 내용에 문제가 있음을 제기했다. 그들은 또한 국민투표의 질문이 모호할 뿐 아니라 오해를 유발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
- ‘Protesters Attacked in Cairo’, Washington Post, 26 May 2005. ↩
- 2004~05년 키파야 대변인을 지낸 칸딜과 한 인터뷰. 2006년 8월 카이로. ↩
- 이집트 혁명적 사회주의자와 한 인터뷰. 2007년 1월 31일. ↩
- ‘이집트 노동자 노조 감시’가 발간한 보고서(아랍어)에 제시된 수치. 이곳에서 발간된 보고서들은 Arabawy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2007년 4월 보고서를 보시오. http://arabist.net/arabawy/wp-content/uploads/2007/05/aprilreport.pd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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