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진보진영 집권 전략, 어떻게 볼 것인가?
진보-개혁 연립정부는 지속 가능한가? *
로자 룩셈부르크에게서 배운다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 부르주아 정부 입각 문제는 1899~1902년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1890년대에 반유대주의 극우 왕당파들이 선동한 악명 높은 드레퓌스 사건(날조된 반역 혐의로 유대인 장교가 구속된 사건)이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다. 당시 급진주의[당시에 중도좌파계의 공화주의 정치운동 ― 옮긴이]에서 사회주의로 전향한 장 조레스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들이 이 선동에 맞서 싸우며 드레퓌스 석방 운동에서 핵심 구실을 했다. 1899년 6월 보수파 변호사 출신의 정치인인 발데크 루소[당시 새 총리로 임명됐다 ― 옮긴이]는 드레퓌스 사건을 종결하고 프랑스 사회를 다시 안정시키고자 조레스의 사회주의자 동료인 밀랑을 내각의 상무 장관으로 임명했다. 1871년 파리 코뮌에서 노동자 대학살을 감독하고 드레퓌스의 석방에 반대한 갈리페 장군도 밀랑과 함께 입각했다. 조레스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밀랑의 입각을 정당화했다. 첫째, 우익인 왕당파에 맞서 “공화국을 방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밀랑의 입각은 “자본주의 사회 발전에서 과도기, 즉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공동으로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단계”이며 “사회주의자의 입각은 이 단계의 정치적 표현”이라는 것이었다.
2 1900년 9월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서도 ‘내각 참여’를 지지하는 견해가 주를 이루었다. 인터내셔널의 주요 이론가인 칼 카우츠키는 “내각 참여를 원칙적으로 비판”하기를 거부했고(그는 독일에서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면서 논쟁을 벌였다), 대의원들은 정부 입각을 금지하는 것에 반대했다. 3
이러한 주장은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 진영의 대다수에게는 익숙했다. 그 운동에서 마르크스주의 세력의 지도자인 쥘 게드, 마르크스의 딸과 사위인 로라와 폴 라파르그 부부는 밀랑의 입각에 반대했지만 ‘그들 자신의 대오’ 내에서 광범한 반발에 직면했다.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는 조레스가 정부 입각을 지지하는 것은 근본적인 과오라고 확신했다. 그는 독일 사회주의 신문인 〈라이프치히 폴크스차이퉁〉에 기고한 연재 기사에서 조레스의 주장을 낱낱이 분석해, 그가 추구하는 노선이 엄청나게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룩셈부르크의 비판 가운데 하나는 조레스가 1890년대 우파 선동의 성격을 그릇되게 분석했다는 것이었다. 우파의 목적은 프랑스 정치에서 우파의 영향력을 확산시키고 군국주의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당파의 쿠데타는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룩셈부르크의 주장대로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주요 세력들은 이미 오랫동안 공화국에 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더 근본적인 주장을 했다. 즉, 정부 입각으로 프랑스 사회나 그 국가의 성격이 바뀔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곧,
현재 독일 사민당에서 특히 베른슈타인의 이론으로 널리 알려진 기회주의적 사회주의 개념으로 보면, 다시 말해 부르주아 사회에 사회주의를 점진적으로 도입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자들이 정부에 입각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당연한 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만일 자본주의 사회에 사회주의를 은밀히 점진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가 자발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할 수 있다면,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 정부에 꾸준히 들어가는 것은 실로 부르주아 국가들이 점진적으로 발전한 자연스러운 결과다.부르주아 정부의 성격 자체가 사회주의적 계급투쟁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우리는 사회주의자가 입각함으로써 빚어질 어려움이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위해 어느 직책을 맡아야 한다면 그에 따르는 위험이나 어려움을 회피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대체로 정부 부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 정당에게는 활동 무대가 될 수 없다.
부르주아 정부의 성격은 정부 각료 개인들의 성격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에서 그 정부가 담당하는 유기적 기능에 달려 있다. 현대 국가의 정부는 본질적으로 계급 지배 조직이며, 그 조직의 정상적 기능은 계급 국가의 존재 조건 중 하나다. 사회주의자가 정부에 입각해도 계급 지배가 지속되는 한 부르주아 정부는 사회주의 정부로 변모할 수 없다.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장관으로 바뀔 뿐이다.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장관이 실현할 수 있는 사회 개혁도 그 자체로는 사회주의와 아무 관련이 없다. 오로지 계급투쟁을 통해 얻은 개혁만이 사회주의적 개혁이라 할 수 있다. 장관이 가져다준 사회 개혁에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성격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성격이 배어 있다. 왜냐하면 그 장관은 자신의 직책상 부르주아 군국주의 정부의 모든 기능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과 유착하기 때문이다. 의회에서든 지방자치단체에서든 우리는 부르주아 정부에 맞서 싸워서 유용한 개혁을 얻어 낸다. 장관직을 맡은 후에 부르주아 국가를 떠받쳐서 마찬가지의 개혁을 얻을 수도 있다. 부르주아 정부에 사회주의자가 입각하는 것은 생각과는 달리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국가를 부분적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가 사회주의 당을 부분적으로 정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 운동]가 야당 구실을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당연한 것이다. 사회민주주의가 집권당이 되는 것은 오직 부르주아 국가가 완전히 파괴된 뒤에나 가능하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공화국을 전복하려는 쿠데타 위협이 실질적이었다손 치더라도 발데크 루소 정부는 그 위협을 저지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는 공화국의 제도적 틀 안에서 움직였다. 즉 군부 고위층이 민주적 통제를 전혀 받지 않고 행동할 권리에 정부는 도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레스를 지지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맞서기는커녕 그 정부의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 상황에 굴복했다.
발데크 루소의 급진주의 내각[1899~1902년 ― 옮긴이]은 … 19개월 동안 아리송한 책략을 부리면서 … 결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 마침내는 야단법석을 떨다가 공화국은 군부의 깡패들을 어찌해 볼 처지에 있지 못하다고 선언했다. … 이런 것을 위해 사회주의자가 내각에서 협력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말인가? [군사 쿠데타의] 위협이 정말로 크고 심각했다면 내각이 짐짓 행동하는 체한 것은 공화국과 공화국에 희망을 건 정당들에 대한 배신이었을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으므로 정부는 사회주의자의 정부 참여를 대중이 지지하는 계기가 된 커다란 쟁점 ― 드레퓌스 사건 ― 앞에서 멈칫했다. 내각이 구성될 때쯤에는 드레퓌스가 무고하다는 것이 명백해졌을 뿐 아니라, 드레퓌스의 석방을 막으려고 거짓 증언을 하고 그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을 부당하게 괴롭힌 혐의로 고위 군장교들이 유죄 판결도 받았다. 밀랑은 정부에 입각하는 이유가 군부에서 드레퓌스를 상대로 음모를 꾸민 자들을 법정에 세우고 드레퓌스의 혐의를 완전히 벗기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정부는 드레퓌스를 사면했을 뿐(이는 드레퓌스의 유죄를 인정한 상태에서 방면한다는 것을 뜻했다), 진상 규명을 외면하고, 음모를 꾸민 군부 관계자들을 풀어 주었다. 달리 말해, 조레스를 따르는 사회주의자는 정부에 남는 대가로 드레퓌스를 위한 온전한 재판 요구를 포기했던 것이다. 4년이 지나서야 추가 폭로가 잇따르면서 마침내 후임 정부는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회주의자의 부르주아 정부 입각을 반대했다고 해서 혁명에 미치지 못하는 쟁점을 둘러싼 운동을 건설하는 것에 반대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혁명가들이 의회 제도를 활용하는 투쟁을 포함해 개혁을 위한 투쟁에서 제 구실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라파르그와 마찬가지로 그는 쥘 게드가 이끄는 프랑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드레퓌스 누명 벗기기 운동을 거부한 것은 오류였다고 생각했다. 라파르그가 게드와 그 동료들의 “어처구니없고 상상하기 힘든 행동” 때문에 조레스와 밀랑의 주장이 그토록 인기를 끌 수 있었다고 불만을 나타낸 것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동의했을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의 잠재적 반동 세력이 모두 깨어났다. 노동계급의 숙적인 군국주의가 본색을 드러냈으므로 모든 창끝을 이들에게 겨눠야 했다. 노동계급은 처음으로 거대한 정치 투쟁에 뛰어들라는 요청을 받았다.
11 얼마 안 돼 발데크 루소 정부가 무너지자 룩셈부르크가 올바르다는 것이 입증됐다. 밀랑과 그의 측근인 브리앙은 사회주의를 포기했다.
조레스는 1890년대 중반에는 매우 올바르게도 그 투쟁에 기꺼이 나섰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가 관찰한 대로 1899년에 그는 정부 입각을 지지해서 그 투쟁을 방해했다.조레스는 좌선회했고 제1차세계대전 직전에 극우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12 그리고 그 경우 사회주의자들은 “정부의 활동과 목적에 연대”하는 것에 활동을 국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3 1918년 11월 독일 혁명으로 이 문제가 구체적으로 제기되자 그는 좌파 독립사회민주당의 정부 참여를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는 독립사회민주당이 노동자들을 달래서 그릇된 안도감에 빠뜨리는 데 이용되는 동안 반혁명 세력은 부르주아 사회의 안정을 되찾을 준비를 착실히 해 나아가고 있음을 간파했다.
정부 참여를 둘러싼 논란은 제1차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도 이어졌다. 1899년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자의 정부 입각 가능성을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국한했다. 즉, 노동계급이 너무 취약해서 권력을 잡을 수 없을 때 반혁명에 맞서 대중을 동원해야 하는 경우로 한정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일시적 상황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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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hris Harman, ‘The history of an argument’, International Socialism 105(Winter 2005).
↩
- 조레스의 견해를 이렇게 요약한 내용은 P Fröelich, Rosa Luxemburg(London, 1940), p81에서 볼 수 있다. ↩
- L Derfler, Paul Lafargue and the Flowering of French Socialism(Harvard University Press, 1988), p217. ↩
- 위의 책, p233. ↩
- Leipziger Volkszeitung, 6 July 1899에 실린 R Luxemburg의 ‘Eine Taktische Frage’는 R Luxemburg, Ausgewählte Reden und Schriften, vol ll (Berlin, 1955)에 수록돼 있다. Mary Phillips가 영역한 이 인용문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Liz Chapman이 새로 영역한 문장은 A tactical issue를 보시오. ↩
- R Luxemburg의 ‘The Dreyfus Affair and the Millerand Case’는 Cahiers de la Quinzaine, no 11 (1899)에 실린 글을 영역한 것이다. www.marxists.org/archive/luxemburg/1899/11/dreyfus-affair.htm에서 볼 수 있다. ↩
- ‘Eine Taktische Frage’를 보시오. ↩
- New International, (New York, 1939), pp234-235. R Luxemburg의 ‘The Socialist Crisis in France’는 New International, (New York, 1939)에 영역문이 실려 있다. ↩
- 위의 책, p235. ↩
- 라파르그가 게드를 비판한 내용은 위의 책 L Derfler, p222를 보시오. ↩
- New International, (New York, 1939), p235. ↩
- 위의 책 p310. ↩
- 이 점에서 룩셈부르크의 태도는 1905년 러시아의 레닌과 유사했다.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105호에 실린 Mark Thomas의 글을 보시오. ↩
- ‘Eine Taktische Frage’를 보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