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알렉스 캘리니코스 방한 강연
오늘의 정치 전망과 혁명적 전략·전술
이 글은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올해 7월 방한해 본지의 편집자들, 편집팀원들, 그리고 주요 기고자들에게 한 강연과 대화를 녹취한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본지의 편집 자문이기도 하다.
먼저 “혁명의 현실성”이라는 개념에 관한 얘기로 시작하려 한다. 이는 게오르크 루카치가 1924년에 출판된 레닌에 관한 책에서 발전시킨 개념이다. 여기서 ‘현실성’은 복잡미묘한 개념이다. 그 어원은 독일어의 ‘비어클리히카이트Wirklichkeit’로, 헤겔 철학에서 특수한 의미로 사용된 용어다. 헤겔은 ‘현실성’을 본질과 현상의 종합으로 규정했다. 달리 말하면, 근원적 현실을 오해하게 만드는 수많은 표면적 현상과는 달리, ‘현실적’인 것은 근원적 본질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철학적 논의가 왜 필요한가? 왜냐하면 오늘날 ‘혁명의 현실성’을 말한다고 해서 혁명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서울 시내에 가 보면 혁명의 광경이 아니라 사람들이 억수 같이 내리는 비를 피하는 광경밖에 안 보인다. ‘혁명의 현실성’을 말하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에 혁명이 일어나는 조건을 창출하는 강력한 경향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경우 무엇보다 세계경제 위기가 그러한 경향들을 만들어 냈다.
이쯤에서 그람시의 ‘유기적 위기’ 개념을 떠올려 봐야 한다. ‘유기적 위기’란 근저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기가 매우 어려운, 깊숙한 위기를 말한다. 그래서 또한 오래가는 위기다. 그런데 ‘유기적 위기’는 또한 위기에 대응해 각자 자기 나름의 해결책을 적용하려 하는 상이한 사회·정치 세력들이 서로 대결하는 무대를 만들어 낸다. 오늘날의 세계를 보면 이집트와 튀니지의 혁명 세력들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대량 학살이 해결책이라고 믿는 브레이비크 같은 파시스트 쓰레기들도 있다. 나는 ‘유기적 위기’가 갖는 정치적 함의를 더 자세히 논하려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세계경제 위기부터 살펴보자.
위기의 불균등성과 ‘시민사회’의 구실
그런데 경제 위기가 개별 투쟁들에 끼치는 영향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두 가지 매개 변수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매개 변수는 위기의 불균등성이다. 위기의 형태는 분명히 나라마다 다르다. 단지 유럽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독일은 대중국 수출 비중이 큰 덕분에 비교적 성장률이 높지만 아일랜드와 그리스는 격심한 불황에 빠져 있다. 이런 가운데 경제 위기의 구체적 형태가 각국에서 일어나는 투쟁의 성격에 영향을 상당히 미칠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스에서는 내핍에 맞선 절박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지만, 독일에서는 수출 호황이 일정한 완충 효과를 낸 덕분에 경제 투쟁의 수위가 높지 않다.
둘째 매개 변수는 중재 기능을 하는 정치·사회 구조들이다. 이것은 바로 그람시가 말한 ‘시민사회’다. NGO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람시에게 ‘헤게모니’는 강압과 동의의 결합을 뜻한다. 여기서 ‘동의’는 체제의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부분 중 적어도 일부를 포섭하려는 정교한 구조들을 통해 확보된다. 이러한 의미의 ‘시민사회’가 취하는 형태는 혁명적 가능성이 실현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무바라크 치하의 이집트에서 시민사회는 매우 제한돼 있었다. 의회제도나 정당 제도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변호사, 언론인, 의사 등의 협회들이 있었고 정권과 무슬림형제단 사이에 암묵적 합의가 있었지만 이 모든 것들을 합해도 대중을 체제에 포섭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탓에 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집트 지배계급에게는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았다.
그래도 리비아·시리아·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곳에 견주면 이집트 정권은 운신의 폭이 넓은 편이었다. 사실상 가족 독재 정권들인 리비아·시리아·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일가의 지배 체제가 모종의 종족적·종파적 사회 기반으로 지탱되고 있다. 시리아의 아사드와 리비아의 카다피가 혁명에 맞서 사생결단을 벌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나라들에서는 지배자가 루이 14세처럼 “짐이 곧 국가이니라” 하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와 튀니지에서는 적어도 군부가 독립적 기관으로 존재했다. 그래서 군부가 벤알리와 무바라크에게 ‘그만 물러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리아와 리비아에서는 지배 가문이 군부를 워낙 꽉 쥐고 있어 군부가 그런 구실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튼 이집트의 군사위원회 정부는 전에 없던 중재 구조들을 급조해야 했다. 그러나 대중운동이 가하는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떠밀려 황급히 그러한 중재 구조들을 만들어 내야 하는 상황이다. 그 때문에 군사위원회는 양보와 탄압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
그람시가 지적했듯이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는 이보다 훨씬 정교한 중재 구조들이 있다. 비록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반이 축소됐고 노조 조직률이 대체로 하락했지만, 그럼에도 사회민주당과 노조 관료층은 지배계급을 위한 매우 강력한 충격 흡수 장치 구실을 한다. 예컨대 지난 가을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각각 연금 개악 반대 운동과 총파업이 일어났을 때도 노조 관료들이 개입해서 저항의 섟을 죽였다.
물론 현실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노조 관료들이 언제나 투쟁을 배신할 수는 없다. 노조 관료들 자신도 현장 조합원들의 압력을 받으며, 자신들이 그래도 뭔가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공신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적어도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워낙 위기가 심각한 탓에 노조 관료들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한 운동이 발전할 수 있다. 스페인 광장 점거 운동(인디냐토)이 그러한 예다. 청년들이 정치인들과 노조를 포함한 기성 체제 일체를 거부하면서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리스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지만 그리스에서는 급진적·혁명적 좌파들이 강력해서 광장 운동과 노동자 파업 운동 사이에 가교를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연성 자율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많은 경우 공식 노동운동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한다. 그 정서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공식 노동운동은 우리를 배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직 노동계급을 믿을 수 없다. 정치 엘리트들은 그들대로 하나같이 신자유주의에 부역한다. 따라서 우리가 믿을 것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 간의 수평적 조직뿐이다.’
공동전선의 원리
이렇듯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들은 가령 이집트 같은 곳의 동지들이 직면한 문제들과 반드시 같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와 이집트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5월 초에 영국 노동자 대표단이 카이로에 간 일이 있었는데, 이집트 철도 노동자들과 런던 지하철 노동자들 사이에는 거의 통역이 필요 없었다. 기술적 용어도 똑같았을 뿐 아니라 둘이 직면한 문제들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그들은 재빨리 깨달았다. 아무튼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이 이집트 동지들이 마주한 문제들과 1백 퍼센트 일치하지는 않는다. 물론 노-자 갈등이라는 근원적 현실이 우리 모두를 옥죄고 있기에 각국의 상황이 비슷한 점도 많지만 말이다.
선진국에서 나타나는 일부 문제들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어떻게 대처했는지 몇 마디 하려 한다. 내가 보기에 남한은 이집트보다는 영국과 닮은 점이 많기에 이런 얘기가 도움이 될 듯하다. 우선, 노조 관료층이 투쟁을 제약하는 구실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단지 비난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했듯이 노조 관료층은 지배계급과 현장 조합원들 모두에게서 압력을 받는다. 토니 클리프는 자신의 고전적 문서 중 어느 곳에서 노조 관료들이 비겁한 동시에 우왕좌왕하는 존재들이라고 쓴 바 있다. 우리는 바로 이 점(노조 관료의 우왕좌왕)을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노조 관료들 가운데 공동 행동에 동참시킬 수 있는 세력들과 협력하는 동시에 그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것이 공동전선의 핵심이다. 즉, 공동의 적에 맞서 우리보다 우측에 있는 사람들과 협력하되, 그들이 투쟁의 승리에 방해가 되는 정치 노선이나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한 그들에 맞서 싸우기도 하는 것이 공동전선의 원리다.
지난 몇 달 동안 SWP는 복수의 공공부문 노조에서 일부 좌파 노조 관료들과 모종의 공동전선을 형성했고, 이를 활용해 6월 30일 공공부문 파업을 이끌어냈다. 우리는 이 파업의 성공을 지렛대 삼아 올 가을에 훨씬 더 큰 행동을 조직하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데는 더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훨씬 더 크고 우파적인 노조 관료 집단들을 동참시켜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우리의 영향력이 훨씬 작다. 6월 말 파업에 참가한 노조들은 주로 우리가 상당한 기반이 있는 노조들이었다. 어쨌든, 우리의 사례는 어떻게 하면 비교적 작은 혁명 조직이 유리한 여건을 활용해서 노동계급의 대규모 행동을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또한 연성 자율주의에 경도되는 청년들은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SWP는 학생운동 내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한 덕분에 연성 자율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는 청년들과 대화·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그 결과 이 사람들 대부분이 6월 30일 파업을 적극 지지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노동계급의 집단적 행동이 청년들에게도 이익이며 따라서 그들도 파업을 지지해야 한다는 우리의 설득이 먹혀든 것이다. 스페인의 국제사회주의경향 단체인 엔루차En lucha의 동지들도 영국보다 불리한 조건에서 이와 비슷한 일을 해냈다. 비록 스페인 동지들은 [정치 조직에 대한 시위대의 거부감 때문에 ― 옮긴이] 광장에서 신문을 팔지 못하는 등 여러 제약이 있었지만 광장 점거 운동의 일부분이 됐고 그 속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얻었다. 예컨대 그들은 운동이 무한정 광장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지구로 들어가서 더 광범한 사회적 지지를 이끌어내자고 선동하기도 했다.
전술적 탄력성
이 모든 것은 혁명적 전략과 전술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혁명적 전략이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혁명가들이 사용하는 수단·방법 일체를 말한다. 전술이란 특정 상황에 적합한 특정한 수단을 말한다. 그리고 사회 변혁 운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한 가지 값진 교훈은 바로 전술적 탄력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상황이 바뀌면 그에 맞게 전술을 바꿀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특정 전술에 한 조직이 완전히 매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가 SWP 내에서 반전 운동이 퇴조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을 때 나는 거센 공격에 직면했다. 내가 ‘반전 운동의 힘을 뺀다’거나 ‘SWP로 하여금 반전 운동을 사보타지 하게 만들려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것도 같은 SWP 당원들에게서 말이다. 그러나 내게는 반전 운동이 기울고 있다는 것이 너무 명백해 보였으므로 그런 비난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SWP가 그동안 반전 운동에 사활을 걸다시피 해왔기 때문에 반전 운동이 사라지자 마치 우리의 전략이 통째로 사라진 듯했다. 따라서 상황 변화를 직시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했다. 이 경우에는 반전 운동의 퇴조가 워낙 명백했으므로 상황 변화를 직시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그러나 상황이 변했음을 인정하기가 이보다 훨씬 어려운 경우도 있다. 레닌이 1905년 러시아 혁명이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을 때나 클리프가 1970년대 말에 영국의 세력 균형이 결정적으로 지배자들에게 유리하게 변했음을 인정해야 했을 때가 그랬다. 그런데 심지어 상황이 호전됐음을 인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울 수가 있다. 이집트 동지들은 오랫동안 극도의 보안이 요구되는 환경에서 활동했다. 심지어 한국보다 더 심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변했다. 이제는 공개적으로 혁명적 선전을 할 수 있으며, 누군가에게 가입 권유를 하기 전에 꼼꼼한 배경 조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한국 동지들도 그랬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제는 보안에 대한 그러한 집착이 새로운 사람들을 가입시키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한 조직이 그토록 많은 역량을 투여했던 기존의 전술을 포기하기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일 수가 있다. 즉, 전술적 탄력성은 필요하지만 쉽지 않다.
전술적 탄력성을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먼저, 굳건한 정치적 자신감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술을 바꾸면 이런 말을 듣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당신들 2년 전에는 딴 소리하지 않았는가?” “기회주의자들 같으니라고.”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자신감이다. 그러한 자신감은 전술의 변화가 혁명이라는 동일한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경로 변경일 뿐임을 이해하는 데서 비롯한다. 트로츠키는 종파주의자들을 겁에 질린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달리 말해, 종파주의자는 실수를 끔찍이 두려워한다. 자신의 혁명적 원칙이 훼손될까 봐 그러는 것이다. 요컨대 그러한 비난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정치적 자신감이 필요하다.
둘째, 독자적 분석 능력이 필요하다. 자신이 처한 정세를 분석하고, 특히 정세 변화를 포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때 과거에 자신이 했던 말이나 존경하는 인물이 과거에 했던 말 때문에 분석에 방해를 받아서도 안 된다.
셋째, 주도력도 있어야 한다. 단지 사태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에 개입해서 그것을 바꾸려 해야 한다. 작은 조직일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사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일개 지역이나 부문에서는 작은 조직도 사태 흐름을 바꿀 수 있다. 위험을 감수하고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결과를 전혀 장담할 수 없는 경우에도 뭔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도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소규모 종파들만이 실수를 하지 않는다. 종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 일도 없다. 그래서 종파들은 팔짱 끼고 앉은 채로 다른 이들의 실수를 지적하는 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사태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혁명가라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물론 때로는 도박이 실패할 수도 있다. SWP가 조지 갤러웨이와 동맹을 맺었던 ‘리스펙트RESPECT’ 선거 연합의 실패를 두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리스펙트가 실패할 줄 진작에 알았다. 갤러웨이 같은 인물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나?” 그러나 나는 리스펙트라는 도박을 벌인 것에 추호의 후회도 없다. 우리에게 쥐어진 패가 좋지 않았을 뿐이다. 더 좋은 패가 쥐어졌다면 좋았겠지만 말이다. 만약 리스펙트가 잘 됐다면 우리는 강력한 급진좌파 선거 연합을 구축한 상태에서 경제 위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꺼이 실수를 교정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혁명가들의 보수성이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즉, 실수를 해놓고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말이다.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면 잘못된 전술을 추구하는 데 갈수록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된다. 실수를 했을 경우 그것을 분명하게 직시할 수 있어야 하고 가차없이 교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이러한 덕목들을 시시콜콜하게 늘어놓는 것은 그것을 레닌이나 트로츠키나 클리프의 책에서 읽어서가 아니라(물론 책에도 나와 있기는 하지만) 지난 몇 년 사이 그러한 교훈들을 뼈저리게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배운 점은 유능한 혁명 조직을 건설하려면 그와 같은 덕목들을 갖춘 리더들을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객관적 정세와 계급투쟁 상황을 섬세하게 분석할 능력이 있다 해도 사태에 제대로 개입할 능력이 없다면 말짱 헛것이기 때문이다.
Q SWP의 중앙위원이던 존 리즈와 린지 저먼이 지난해 SWP와 갈라섰다. 같은 원칙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어쩌다 그렇게 됐는가?
존 리즈와 린지 저먼과 오랜 세월 함께해 왔던 만큼 나 자신도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많은 생각을 해봤다. 두 가지 측면의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첫째는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리즈와 저먼은 영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사회운동의 지도자들이 됐다. 그 자체로는 아주 훌륭한 성과였다. 그러나 갈수록 그들의 정치적 역할은 반전 운동을 이끄는 것으로 한정됐다. 그래서 SWP 내에서도 그들은 전쟁저지연합StWC의 대변인 구실을 하게 됐다. 이러한 경향은 그들이 리스펙트 내에서도 지도적 인사들이 됨에 따라 더욱 증폭됐다. 이 때문에 그들의 활동에서 SWP 활동은 갈수록 부차적인 것이 됐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혁명가이길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 지평에서 SWP는 더는 중심을 차지하지 않았다. 이를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탈당파가 결성한 단체인 ‘카운터파이어Counterfire’의 창립 총회에서 저먼은 이렇게 연설했다고 한다. “이제 더는 <소셜리스트 워커> 신문을 판매하지 않아도 돼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내가 이 얘기를 젊은 SWP 당원 한 명에게 했더니 그는 “그런데 저먼이 마지막으로 신문을 팔았던 것이 언제였던가?” 하고 반문했다. 즉, 저먼의 경우 이론과 실천 사이에 간극이 생겼던 것이다.
이는 둘째 측면의 설명과도 연결된다. 리즈와 저먼이 그렇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SWP 지도부는 어째서 그 지경이 될 때까지 그 둘을 집단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솔직히 SWP 지도부는 그 둘을 통제하지 못했고, 이는 나 자신을 포함한 지도부 공동의 책임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SWP 내에서 두 사람이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커져서 그들에게 책임을 묻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당을 떠난 뒤에 우리가 논의했던 사안 중 하나는, 아무리 중요한 인물일지라도 통제받을 수 있도록 지도부의 구조를 강화하는 방안이었다. 아무튼 이상과 같은 여건 속에서 리즈와 저먼은 자신들이 당보다 상위에 있다고 여기게 됐다. 그래서 그들은 리즈가 리스펙트와 관련해 실수를 했을지 모른다는 문제 제기 자체를 수용할 의향이 없었다. 또한 어떤 식으로든 통제를 받을 용의도 없었다. 그들이 이 같은 태도를 드러낸 순간 나는 그들과 결정적으로 갈라섰다. 내 관점에서는 어떠한 개인도 당보다 상위에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편 그들이 탈당한 정치적 이유는 ‘운동주의’라는 말로 요약된다. 카운터파이어의 실천 속에서 이 운동주의 경향은 한편으로 자율주의에 타협하고 다른 한편으로 노조 관료들의 꽁무니를 쫓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그들은 영국 노총TUC이 총파업을 선언해야 한다는 SWP 당원들의 주장에 반대했다. 그러한 주장이 일부 좌파 노조 지도자들을 난처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같은 변질은 그 속성상 일단 시작되면 갈수록 더 심해진다. 그래서인지 카운터파이어는 이제 불안정·비공식 노동의 확산으로 인해 노동계급의 성격이 바뀌었고, 따라서 SWP처럼 공공부문 파업을 선동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등의 주장까지 한다. 트로츠키가 오래 전에 지적했듯이, 작은 찰과상이 온몸을 썩어 문드러지게 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Q 공동전선은 전략인가, 전술인가?
공동전선에 관한 고전적 문헌들은 공동전선을 전술이라고 부르며 때로는 ‘정책’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는 공동전선을 전술로 규정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즉, 그것은 특정 상황에서 그것이 적절할 때 적용하는 방법이다. 공동전선이 전술이냐 전략이냐 하는 문제는 SWP 내의 분파 투쟁에서도 하나의 쟁점이 됐다. 존 리즈는 공동전선이 우리의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즉, 공동전선(정확히 말하면 [리스펙트 같은 ― 옮긴이] 특별한 형태의 공동전선)이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의 대大원칙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실제로 관여한 공동전선들을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되돌아보는 데 장애가 됐다. 그러나 공동전선을 전략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또한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공동전선이 가능한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건설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많다.
Q 올해 들어 광장 점거 운동이 지배적인 투쟁 형태로 자리잡은 것 같다. 사회주의자들이 광장 점거 운동을 계급 투쟁의 기폭제로서 활용할 수 있다고 보는가?
나는 광장 점거 운동이 지배적인 투쟁 형태라고 보지 않는다. 물론 타흐리르 광장 시위를 계기로 그것이 어떤 상징적 중요성을 띠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집트 동지들의 말을 들어 보면 알렉산드리아와 수에즈 같은 곳에서는 더 전투적인 행동들이 주를 이뤘다. 카이로만 놓고 보더라도 타흐리르 광장에 앉아 있는 것만이 투쟁의 전부가 아니었다. 카이로의 모든 경찰서가 남김없이 불에 탔다. 물론 스페인에서 등장한 광장 점거 운동은 전체적으로 보아 매우 긍정적인 사건이다. 아테네의 신타그마 광장 점거는 더욱 긍정적인 사건이다. 시위대가 노동자 운동에 덜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그리스의 계급투쟁 수위가 스페인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반영한다. 그런데 나는 광장을 점거하는 전술이 물신화될 위험이 있다고 본다. 예컨대 지난 3월 런던에서 노조가 조직한 대규모 행진이 열렸을 때 우리는 런던 중심부의 트라팔가 광장을 타흐리르 광장으로 만들자는 캠페인 제안에 어느 정도 타협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 보니 그 캠페인은 무용지물이었다. 50만 명 이상이 행진하는 동안 한 2천 명이 트라팔가 광장에 모였던 것 같다. 그 캠페인은 더 큰 행진에 개입할 수 있었을 사람들의 역량을 분산시켰다. 그러한 전술을 시도해 본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경험을 통해 나는 광장 점거 전술을 물신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나라 동지들에게 광장을 점거하라고 권하지는 않겠다.
Q 이집트에서 연속혁명 전략이 적용돼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그렇다면 이집트에서 연속혁명 없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과제가 성취될 수 없는가? 달리 말해, 위로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이행할 가능성은 없는가?
이집트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1970년대 중반 포르투갈 혁명 때 우리는 포르투갈이 사회주의 혁명 아니면 파시즘으로 갈 것이라 주장하는 오류를 범했다. 사회민주주의가 제3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집트에서는 그렇게 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중재 구조들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 사회민주당 구실을 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는 무슬림형제단이다. 그런데 무슬림형제단도 첨예한 내분을 겪고 있다. 또한 경제 위기의 심각성 때문에 지배계급의 운신의 폭이 좁다. 혁명 자체가 이집트의 관광 소득을 결딴냄으로써 위기를 더 악화시켰다. 이집트는 IMF와 사우디아라비아 등에게서 큼직한 차관을 받았지만, 거기에는 신자유주의 개혁 실행 등의 조건이 따라붙는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이집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확립되기가 어렵다. 어렵긴 하지만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애당초 연속혁명론은 복수의 가능성에 관한 이론으로 이해해야 한다. 연속혁명론은 결코 노동자들이 필연적으로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끌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컨대 1920년대 중반 중국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집트에서는 연속혁명 과정이 일어나기에 유리한 조건들이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있다.
Q 중국의 혁명적 전망은 어떠한가? 중국에는 어떤 혁명적 좌파들이 있는가?
중국의 혁명적 전망에 관한 질문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거巨한 질문이다. 분명 중국에서는 대규모 노동자 투쟁이 계속 누적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측하기 어려운 한 가지 중요한 변수는 중국 호황의 붕괴 여부다. 오늘치 <파이낸셜 타임스>를 보니, 중국의 어느 블로거가 중국 고속철 참사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렇게 썼다고 한다. “중국은 뇌우雷雨 속으로 돌진하는 고속 열차와도 같다.” 이 열차가 탈선하게 될까? 나는 그렇다고 볼 근거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제나 이러한 일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가 없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미지수는 앞으로도 중국 공산당이 이러한 투쟁들을 차단하고 무마시킬 능력이 있느냐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내에서도 온갖 견해차가 있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예컨대 충칭시의 당서기[보시라이 ― 옮긴이]처럼 자신을 마오주의의 화신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있다. 공산당 내의 이 같은 긴장은 당이 대중의 불만을 표현하기 쉽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이 같은 긴장은 공산당이 응집력 있게 행동하는 것을 가로막을 것이다. 중국의 혁명적 좌파에 관한 질문은 영국보다 남한의 동지들이 더 답하기 쉬울 것이라 생각한다.
Q 영국의 ‘노동권운동Right to Work Campaign’은 노동자 투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그 성과와 전망은 무엇인가?
대체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극좌파 내의 경쟁 때문에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긴축에 맞선 저항을 단일 대오로 결집시킨다는 연합체가 세 개나 결성됐는데, 서로 경쟁하는 극좌파 조직들이 각각의 연합체에 관여하고 있다. ‘노동권운동’에는 SWP가, ‘저항 연합Coalition of Resistance’에는 카운터파이어가 관여하고 있고, 전국직장대표네트워크National Shop stewards’ Network는 노동자인터내셔널위원회Committee for a Worker’s International의 핵심인 사회당이 발의한 연합체다. 이러한 경쟁 구도는 여러 가지 비생산적인 책략과 암투를 조장했다. 우리는 지금껏 보수당과 자유당에 맞선 항의 시위를 잘 조직해 온 노동권운동을 더 키우고 싶지만, 그와 동시에 공공 노조가 긴축 반대 운동에 합류한 것을 계기로 이 운동을 진정 단일 대오로 결집시킬 수 있는 틀이 마련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좌파들이 저마다 자신의 연합체야말로 저항을 단결시키는 구심이라고 주장하는 상황보다는 그 편이 낫다.
Q 네그리주의자들과 연성 자율주의자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전자는 후자에게 영향력이 있는가?
연성 자율주의는 네그리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보다 훨씬 광범하게 퍼져 있는 사고방식이다. 확실히 영국에서는 네그리의 영향력이 비교적 작고 지식인 사회에 한정돼 있다. 아마도 네그리의 책이 많이 팔리기는 해도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정작 읽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도 한 가지 원인일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네그리의 영향력이 축소됐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오늘날 진정한 스타 지식인은 지젝이다. 솔직히 그의 유명세는 많은 부분 그의 엔터테이너 기질에서 비롯했다. 그럼에도 지젝의 정치는 대체로 네그리보다 낫다. 네그리 사상 중 그나마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다중’ 개념이다. 혁명적 주체로서의 다중 개념보다는 노동계급 중심성을 부정하는 개념으로서의 다중 개념이 더 영향력이 있었다. 즉, ‘이제는 노동계급이 아니라 비정규직이나 불안정 노동 등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널리 유포됐다. 흥미롭게도 지젝은 바로 이 지점에서 네그리와 의견이 같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상식 수준의 연성 자율주의 경향은 특정 지식인의 영향력과는 무관한 것 같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앞서 설명한 요인들[공식 노동운동의 배신 등 ― 옮긴이]에서 비롯한 것이라 봐야 한다.
Q 노조에서 좌파 관료들과 공동전선을 구성하는 것은 반전 운동이나 반파시즘 운동에서의 공동전선과는 어떻게 다른가?
공동전선 문제를 이해하는 데는 SWP 내에서 일어났던 논쟁을 되짚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전쟁저지연합은 매우 큰 운동 단체였다. 아마 지금도 거의 모든 주요 노조의 지지를 받고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전쟁저지연합의 대의명분에 매우 큰 힘이 됐고, 때로는 재정적으로도 도움이 됐다. 그런데 노조 지도자들로서는 전쟁저지연합을 지지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전혀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뭔가 궂은일을 떠맡지 않아도 됐다. 오히려 반전 집회 연단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이미지가 좋아질 수 있었다.
그런데 리먼브라더스 파산 사태 이후 존 리즈와 린지 저먼은 SWP가 경제 위기에 대응해 전쟁저지연합과 비슷한 연합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것이 미친 짓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첫째, 전쟁저지연합의 동력이자 그것이 촉진했던 반전 운동은 노조 관료들의 영향권 밖에서 분출했다. 둘째, 내핍에 반대하는 연합체를 구성할 경우 노조 관료들이 정권과 정면 대결을 벌여야 한다. 영국 최대 산별 노조의 위원장인 렌 맥클러스키가 연설에서 “내핍은 나쁘다”고 말했다 치자. 그렇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그래 맞다, 하지만 당신은 내핍에 맞서 무엇을 할 것인가? 총파업이라도 할 것인가?” 이처럼 경제 위기 대응 공동전선을 위로부터 만들자는 주장에 우리가 반대했을 때 우리는 노조 관료들과의 공동전선 자체를 배제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과의 공동전선이 효과적이려면 그들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지렛대가 필요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우리의 주장이 옳았음이 입증됐다. 저먼과 리즈가 저항 연합을 결성했을 때 그들은 상층 노조 관료들에게서 많은 지원을 받았다. 맥클러스키는 노동조합 행진에 가져올 팻말 제작에 쓸 돈을 그들에게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영향력은 일방적이었다. 저먼과 리즈는 맥클러스키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이 총파업 요구를 반대한 이유도 그것이 맥클러스키를 난처하게 할 수 있어서였다.
6월 말 공공부문 파업에 참가한 교사·강사·공무원 노조들은 우리가 어느 정도 기반이 있는 노조들이다. 우리는 공무원 노조 지도자인 마크 서보트카를 중요한 동맹으로 획득했고 그밖에 우리와 정치적으로 가까운 노조 관료들을 많이 획득했다. 그런데 이들은 또한 싸워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이는 동맹 당사자들이 서로 주고 받을 것이 있었던 상황이다. 즉, 우리가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기도 했지만, 우리 덕분에 더 큰 규모의 행동을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이 그들에게도 도움이 됐다. 이제 우리에게는 그러한 성과를 이어가면서 그들을 계속 같은 편으로 묶어 두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이것만으로도 만만치 않을 테지만, 거기에 더 큰 노조들을 동참시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대형 노조들이 더 보수적이기도 하고, 정부가 어떤 노조에게는 양보하고 어떤 노조는 공격하는 식으로 분열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쨌든 이 연합은 그 전에 존재했던 모든 반反내핍 연합체들과 성격이 현격히 다르다. 파업이라는 무기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이 있다.
Q 스페인 동지들은 어째서 광장에서 신문을 팔 수 없었는가? 신문이 아니라면 어떠한 방식으로 운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
그들이 신문을 팔 수 없었던 것은 모든 정치 조직들의 공식적인 시위 참가가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페인 동지들은 광장 가장자리에 가판대를 차리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우회했다. 그들은 또한 광장 점거에 참가하고, 다른 사람들과 잘 협력하고, 좋은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등의 방식으로 영향력을 얻었다. 그들은 이미 예전부터 좋은 평판을 쌓아 왔으므로 어렵지 않게 영향력을 얻을 수 있었다.
Q NPA는 사회운동의 독자성 논리에 타협하는데, 정당이 사회운동에 간섭한다고 비판받을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것인가?
비판받을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NPA 자신이 사회운동의 ‘독자성’을 믿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두고 SWP와 NPA는 오랜 논쟁을 벌여 왔다. 예컨대 그들은 최고의 유럽사회포럼이었던 2002년 피렌체 유럽사회포럼에 SWP가 눈에 띄게 개입한 것을 비판한 적이 있다. 우리의 개입이 사회운동의 독자성을 침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NPA의 전신인 LCR은 1968년의 희망이 좌절된 경험 때문에 큰 트라우마가 있다. 이로 인해 LCR은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패배기를 반영하는 일련의 사상들을 받아들이게 됐다. 이 시기에 그들이 도출한 교훈은 말도 안 되는 것들이 많다. 이러한 점이 앞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NPA는 훌륭한 활동가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데, 그들 가운데 일부는 주요 노조의 간부들로서 종종 타협하라는 압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노조에 소속된 NPA 당원들은 자기 작업장의 현안에 대해서는 중앙의 어떤 관여도 없이 각자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방치되고 있는 것 같다. 아주 해로운 관행이다.
Q 지젝이나 바디우의 사상에는 전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가?
전혀 없다. 지젝은 자신에게 무슨 전략이 있는 것처럼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 자체를 종종 농담거리로 삼았다. 그리고 마오주의자 출신인 바디우는 원칙을 굽히지 않는 초좌파로 남았다. 그래서 바디우는 노조도 싫어하고, 민주화 운동도 싫어하고, 오직 자신이 신봉하는 어떤 추상적 원칙에 들어맞는 운동만을 좋게 본다. 그래도 지젝과 바디우는 냉전 종식 이후 완전히 쓰레기 취급 받았던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논의를 부활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어쨌든 이들은 전략에 관해서는 1백 퍼센트 순진무구한 사람들이다.
Q 연속혁명 개념을 둘러싸고 SWP 내 논쟁이 있는데, 이에 대해 소개해 달라.
닐 데이비슨이 지난해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저널에 연속혁명론에 관한 긴 글을 기고했다. 내가 볼 때 연속혁명론에 관한 그의 해석은 혼란돼 있다. 내 생각에 그가 하려는 말은 다음과 같다.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은 원래 불균등·결합 발전의 적용을 받는 사회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될 가능성에 관한 이론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모든 나라가 자본주의다. 그러므로 이제 어디서도 부르주아 혁명은 필요 없다. 따라서 연속혁명도 있을 수 없다.’ 이에 대한 나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비록 모든 나라가 자본주의인 것은 맞지만, 불균등·결합 발전 때문에 어떤 나라에서는 민주주의 문제가 특히 중요하다. 이러한 사회들은 또한 노동자·농민·도시빈민 등을 포함하는 복잡한 사회적 구성을 지닌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이러한 여건들은 연속혁명의 동역학이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이 된다. 예컨대 무바라크 치하의 이집트도 자본주의였지만 거기에는 거대한 민주주의 투쟁의 잠재력이 존재했다. 이 민주주의 투쟁은 결정적으로 조직 노동계급과 도시빈민들의 활약 덕분에 돌파구를 열었다. 그리고 이 점이 연속혁명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요컨대 닐 데이비슨은 비록 여러 모로 훌륭한 동지이지만 나는 이 쟁점에 관해서는 그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