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알렉스 캘리니코스 방한 강연
자본주의의 대안
이 글은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올해 7월 방한해 본지의 편집자들, 편집팀원들, 그리고 주요 기고자들에게 한 강연과 대화를 녹취한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본지의 편집 자문이기도 하다.
소련 붕괴 이후 자본주의의 대안에 대해 생각하기란 심지어 좌파들에게도 매우 어려운 일이 됐다. 스탈린주의에 반대한 좌파들조차 다수가 소련은 자본주의와는 뭔가 다르다고 암암리에 가정했고, 그래서 소련의 붕괴로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게 됐다고 봤다. 그래서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형태들에 대한 대안이 흔히 논의의 초점이 된다. 신자유주의는 유난히 악랄하고 통제 불능인 자본주의 형태이고,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규제되고 온화한 형태의 자본주의로 회귀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이러한 논의의 배경을 이룬다. 이러한 생각이 표현될 수 있는 한 가지 틀은 발전국가론으로, 장하준의 발전국가론이 대표적 사례다.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훌륭하게 비판한 책이다. 그러나 장하준은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컨대 1990년대 이전 남한에 존재했던 것 같은 좀더 규제된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발전국가 모델은 지속 가능한가?
발전국가 개념을 잠깐 짚고 넘어가자. 내가 알기로 발전국가는 미국의 어느 사회과학자가 1960~70년대 일본의 경제 기적을 설명하고자 처음 정식화한 개념이다. 그는 특히 전후 시대에 수출 산업에 투자를 유도하는 데서 일본 통산성MITI이 했던 구실에 주목한다.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의 남한도 발전국가였다. 일본군 출신인 박정희는 일본이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자국과 식민지 제국에 적용하려고 개발한 발전국가 전략의 영향을 받았고 이를 계승·발전시켰다. 남한의 발전국가는 중앙집권제, 권위주의, 국가와 재벌 간의 긴밀한 유착이 특징이었는데, 이 모든 것의 목적은 자본 축적률 극대화였다. 그런데 이 모델은 1980년대 말에 경제 위기의 압력과 노동자들의 반란에 부딪혀 침몰하고 말았다.
그랬던 발전국가가 어떻게 오늘날 다시 각광받을 수 있는지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발전국가는 중국이다. 물론 중국식 발전국가가 다른 발전국가들과 똑같지는 않다. 과거 일본과 남한과 타이완에 존재했던 발전국가들은 현지 자본을 육성하는 데 주력했고, 대체로 서방 다국적기업을 배제했다. 지금도 일본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는 다른 선진국보다 매우 적다. 반대로 중국에서는 경제를 여전히 좌지우지하고 있는 중국 국가와 다국적기업들이 서로 긴밀히 유착해 있다. 그러나 이른바 ‘동아시아의 기적’이라 불리는 다른 동아시아 경제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경제도 고축적-고수출 모델이며, 무엇보다 저임금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기에 중국의 국민소득 분배를 보면 소비보다 투자의 비중이 훨씬 더 크다. 즉, 수출 산업에 대한 투자를 조달하려고 노동계급을 쥐어짜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이 모델이 과연 지속 가능한지에는 커다란 의문이 존재한다. 우선, 중국이 과잉 축적 위기로 가고 있다는 우려가 있다. 중국 자본은 생산 설비 확장에 자원을 엄청나게 투자하고 있는데, 그 결과 상품이 더 많이 생산되면 누가 그것을 사 줄 것이냐는 얘기다. 중국의 최대 수출 시장은 유럽연합과 미국인데, 현재로서는 둘 다 경기가 꽤나 침체된 상황이다. 중국 지도자들은 “소비를 늘리면 된다”고 말한다. 중국 인민들이 상품 생산이 늘어난 만큼 소비를 늘릴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러려면 노동자 임금을 올려야 하는데, 임금이 오르면 중국 기업주들의 이윤이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 고위층은 중국의 대기업 사장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그들의 이익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중국 노동자들이 있다. 이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갈수록 참지 못하고 있고, 인플레로 생활수준이 하락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1987년 남한에서 일어난 것과 비슷한 노동자 반란이 분출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중국 모델은 진정한 대안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몹시 야만적이고 불안정한 형태의 자본주의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주의 자체의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대안은 무엇일까?
민주적 계획경제의 필요성
마르크스는 “생산자들의 연합”이 지배하는 체제가 자본주의를 대체할 것이라고 했다. 달리 말해,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자들이 자본주의에서처럼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연합을 이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과연 ‘연합’이 무엇을 뜻하느냐는 물음이 제기된다. 나는 이 연합의 두 가지 측면을 특히 강조하려 한다.
첫째, 공산주의 사회는 자주관리 사회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평범한 노동자들이 직장 평의회와 주민 평의회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스스로 사회를 운영할 것이다. 둘째, ‘연합’의 또 다른 측면은 바로 계획이다. 어떤 경제 체제에서든 모종의 조율은 필요하다. 자본주의에서 경제적 조율이 이루어지는 메커니즘은 경쟁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엇이 어떤 용도로 생산돼야 하는지가 사전에 결정되지 않으며, 무엇이 생산됐는지 사후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결국 한 사회에서 생산되는 것은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에서 수익성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 제품들이다. 요컨대 자본주의에서는 경제적 조율 과정이 맹목적이다. 그것은 마치 운전자 없이 주행하는 자동차와도 같다. 자본주의가 경제 위기와 환경 재앙을 초래하는 근본적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정신 나간 경제적 조율 방식을 폐기하려면 계획이 필요하다. 한 사회에서 무엇이 어떤 용도로 생산돼야 하는지를 사회 전체가 집단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오늘날 계획경제는 소련에 존재했던 관료적 지령 경제를 연상시켜 불신을 받는다. 소련 경제는 중앙집권제의 엘리트들이 경제 전체를 운영하는 지극히 상명하달적인 체제였다. 이런 경제 운영 방식은 매우 비효율적임이 드러났다. 계획 책임자들은 복잡한 현대 경제의 모든 부문을 일일이 통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런 류의 ‘계획’은 내가 말한 생산자 연합의 첫째 성격, 즉 자주관리적 성격과 명백히 모순된다. 이러한 스탈린주의 계획은 진정한 계획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실제로 스탈린주의 경제, 더 정확히는 국가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생산의 우선순위가 사회 전체에 의해 집단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과 소련 사이의 경쟁 압력이 생산의 우선순위를 결정했다. 이때 경쟁은 경제적 경쟁이라기보다는 지정학적 경쟁이었다. 달리 말하면, 소련 경제의 최우선 목표는 서방의 무기에 대적할 만한 첨단 무기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소련 경제는 축적률이 매우 높았고 군수품을 생산하고자 중공업 부문으로 자원이 집중 투입됐다. 소련 경제의 상명하달적 성격은 이렇듯 서방 세계를 상대로 벌인 제국주의적 경쟁이 빚어낸 산물이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진정 민주적인 계획경제 모델이다. 최근에 영국의 팻 드빈과 미국의 마이클 앨버트 같은 좌파 경제학자들이 이러한 모델들을 개발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모델의 핵심은 팻 드빈이 ‘협상을 통한 조율’(협상 조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각각의 직장 평의회와 주민 평의회가 생산과 소비에 관해 각자 의견을 밝힌 다음 협상을 거쳐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전반적 계획을 도출한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분권적인 형태의 계획이다. 나는 이러한 발상들이 좀더 정교하게 다듬어져야 한다고 본다. 마이클 앨버트는 아나키스트답게, 여러 직장 평의회와 주민 평의회들 사이에 모종의 수평적 연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앨버트의 모델은 지나치게 분권적이다. 그런 점에서는 일국적 수준이나 심지어 세계적 수준에서 결정된 자원 할당의 우선순위 내에서 생산자들과 소비자들 사이의 협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드빈의 모델이 낫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만약 2015년에 국제 노동자·주민 평의회 최고회의가 열리고(2015년은 너무 낙관적인 타이밍일지 모른다), 그 회의에서 2030년까지 인류가 CO2 배출량을 90퍼센트 줄여야 한다는 결정이 채택된다고 치자. 그러면 개별 지역의 평의회들은 협상을 할 때 이처럼 신속하게 저탄소 경제로 이행한다는 목표와 충돌하지 않는 방안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즉, 무엇을 생산할지는 평의회들이 각자 알아서 결정할 수 있겠지만 생산 방식으로는 이러한 온실가스 저감 목표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지역적이고 수평적인 의사결정이 이뤄지기는 하지만, 더 높은 수준에서 채택된 결정 사항이 일정한 구속력을 갖는다. 예컨대 우리 둘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다고 치자. 나는 2030년까지 CO2 배출량을 90퍼센트 줄여야 한다는 의견이고 당신은 지금 당장 줄여야 한다는 의견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대책을 국제 노동자·주민 평의회 최고회의에서 제시한다. 그러면 두 개의 전문가 팀이 각각의 대책의 실효성을 검토한다. 대의원들은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 등을 참고해서 토론을 벌인 다음 결정한다.
기후변화를 예로 든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가 지구에 가하고 있는 가장 큰 해악에 주의를 환기시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계획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각국이 알아서 기후변화 문제에 대처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18개월 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있었던 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즉, 각국이 “우리 잘못이 아니니 다른 나라부터 감축해야 한다”며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이렇듯 기후변화 문제는 세계적 수준의 계획이 필요함을 보여 주는 사례다.
과도적 요구들
지금까지 민주적 계획경제의 필요성을 살펴봤다. 그러나 여러 종류의 이행에 대해, 그리고 이행기적 조처에 대해서도 논해야 한다. 마르크스도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단숨에 도약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고타 강령 비판》에서 공산주의 사회의 두 단계를 구분했다. 첫 단계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서, 자본주의를 이제 막 벗어난 상태에서 본격적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시작하는 단계다. 공산주의로 이행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옛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잔재가 남아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경우 이 단계에서 시장 메커니즘이나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등 옛 사회와 어느 정도 타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따르면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는 완전한 공산주의가 가능한 조건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는 한편으로 인류의 생산력 발전에서 비롯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협력의 경험을 하며 사람들의 동기가 바뀌고 서로 더 신뢰하게 되는 데서 비롯할 것이다. 공산주의 단계에 도달한 사회의 지배적 원리는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마르크스) 것이 될 것이다.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한다”고 함은 사람들이 능률적으로 생산하도록 물질적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물질적 보상 없이도 한편으로는 사회적 책임감 때문에, 더 중요하게는 자아실현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일이므로 능률적으로 일할 것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이 똑같아지는 획일적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개성이 해방되는 사회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회주의자는 마르크스가 이해한 공산주의 사회를 재즈 밴드에 비유하기도 했다. 재즈 밴드의 멤버들은 각자 다른 악기를 각자 다른 식으로 연주하지만, 그들의 연주가 한데 어우러지면 개별 연주자들의 단순한 합보다 더 큰 뭔가가 탄생한다.
이제 이런 멋진 미래상은 일단 접어 두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우리의 당면 과제는 공산주의의 초기 단계에서 완성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부터 끝장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투쟁들은 대안 문제를 날카롭게 부각시킨다. 왜냐하면 유럽에서는 긴축에 맞선 투쟁이 일어날 때마다 정부와 언론이 “긴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라 망한다”는 메시지를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긴축이 워낙 끔찍해 계속 저항한다. 그러나 긴축에 맞선 대안을 내놓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이 때문에 특히 그리스에서는 긴축에 맞선 상당히 구체적인 대안들이 제시됐다. 그러한 대안들의 출발점은 외채 상환을 거부하자는 것(디폴트)이다. 그리스 등을 끔찍한 고통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 바로 호황기에 누적된 부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부채 부담을 없애는 것, 은행가들에게 돈을 갚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디폴트를 선언한 나라는 유럽연합, 특히 유럽중앙은행과 갈등 관계에 놓일 것이다. 유럽중앙은행은 유로존 국가들에게 매우 엄격한 경제적 규율을 강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디폴트 선언의 논리적 결론은 유로존 탈퇴다. 유로존 탈퇴의 장점은 또 한 가지가 있다. 현재 그리스는 유로존 회원국이어서 유로 이외에 독자적 통화가 없다. 그런데 유로의 환율은 유럽연합의 주요 경제들, 특히 독일과 프랑스 경제의 여건에 좌우된다. 만약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한다면 자국 통화를 다시 사용하게 될 것이고, 이 통화는 유로에 비해 많이 평가절하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 그리스 경제의 회복에 유리해질 것이다.
물론 디폴트와 평가절하가 꼭 좌파적 요구인 것은 아니다. 우파 경제학자들 중에도 그리스와 아일랜드에 디폴트와 평가절하를 주문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부분적인 이유는 노동자들을 더 쥐어짜기 위해서다. 한 나라의 통화가 평가절하되면 수입품이 더 비싸져서 인플레가 심화되기 때문이다. 인플레는 임금을 삭감하고 이윤을 늘리는 한 가지 방법이다. 그러므로 좌파적 버전의 디폴트-평가절하에는 다른 조처도 몇 가지 더 포함돼야 한다. 은행 국유화, 가격 및 자본 통제, 투자에 대한 국가 통제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조처들은 가만히 보면 1970년대 위기 때 좌파 개혁주의자들이 주창했던 ‘대안적 경제 전략’과 많이 닮았다. 이것이 말해 주는 바는, 어떤 문제든 구체적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한 세대 동안 경험했고 매우 심각한 경제 위기가 진행 중인 오늘날 이러한 요구들은 1970년대와는 매우 다른 의미가 있다. 1970년대에는 이러한 요구들이 노동계급 투쟁을 잠재우고 노동자들의 불만을 좌파 개혁주의 정부에 대한 지지로 연결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요구가 자본에 맞선 노동자들의 공세를 재개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1920년대 초 코민테른은 과도적 요구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과도적 요구란 그 자체로 반자본주의적 요구는 아니지만 그 요구를 쟁취하고자 싸우는 과정이 노동자들을 반자본주의적 방향으로 이끄는 요구를 말한다. 나는 앞서 말한 요구들이 바로 그러한 과도적 요구의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그러한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은 긴축에 맞선 방어적 전투를 자본에 맞선 공세적인 전투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이다.
Q 국유화된 경제가 노동자 국가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노동자 국가가 국유화라는 형식을 반드시 포괄해야 되는 것인가 아니면 국유화 없는 노동자 국가도 가능한가? 또, 노동자 국가에서 시장과 인센티브 등 타협이 있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임금노동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스탈린주의 러시아에서 임금노동이 존재했던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노동자 국가, 달리 말해 공산주의의 초기 단계의 결정적 특징은 노동계급이 정치 권력을 쥐고 있다는 점이다. 즉, 노동자들이 평의회나 소비에트 등으로 이뤄진 체제를 통해 정치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설이게도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결정적 수단은 어떤 경제적 조처가 아니라 민주적으로 자체 조직된 노동계급의 정치 권력 장악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과도기 단계인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며, 노동자 권력 하에서 경제를 정확히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는 상황에 따라 많이 다를 수 있다. 다들 알다시피 국유화라는 형식은 다양한 사회·정치적 내용을 담을 수 있다. 노동자 국가에서 국유화는 경제의 사회화를 심화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러나 국유화를 실행하는 방식은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 혁명 이후에 토지가 공식적으로는 국유화됐지만 실제로는 소농들이 토지를 나눠 가졌다. 이는 경제의 사회화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했지만 소비에트 권력의 생존을 위한 전제 조건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임금노동의 존속 여부에 대해 말하자면, 노동자 국가에서도 노동자들이 대부분 임금을 받고 고용될 가능성이 크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초기 단계에서는 “각자 일한 만큼 받는” 원칙에 따라 자원이 분배될 것이라 주장했다. 생산성이 높을수록 더 많이 받는 것이다. 이런 것이 자본주의 이후에도 살아남는 시장 인센티브의 한 예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임금노동과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임금노동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질문했는데, 한마디로 천지차이다. 노동자 국가에서는 노동계급이 진정한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반면 스탈린 치하에서는 노동자들이 정치·경제 권력을 완전히 박탈당했고 원자화되고 분쇄됐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정치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임금노동 형태에 종속돼 있는 상황이 모순으로 보일 수도 있다. 당연히 그것은 모순된 상황이다. 아직 온전한 공산주의로 이행하지 못한 과도기의 상황인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 보여 주듯이, 그러한 상황은 역전될 수도 있다. 반혁명이 승리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경제의 사회화를 심화하고 완전한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투쟁이 필요할 것이다.
Q 팻 드빈과 마이클 앨버트는 기후변화 같은 전 사회적이고 전 지구적인 문제의 해결 방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는가? 또, 앨버트가 분권화를 주장하는 이론적 배경은 소련의 경험과 관계 있는가?
팻 드빈과 마이클 앨버트가 계획을 통해 기후변화 같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계획이 왜 좋은지, 민주적 계획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주로 얘기하는 것 같다.
앨버트가 분권화를 주장하는 이론적 배경을 얘기하자면, 앞서 말했듯이 앨버트는 아나키스트다. 그는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을 이론적 틀로 삼고 있기도 하다. 앨버트가 세계적 수준의 정치적 의사결정의 필요성을 간과하는 것도 이러한 이론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주류 경제학은 분권적 경제가 결국에는 균형 상태에 도달한다고 온갖 마술적인 가정들을 동원해서 주장하는데, 앨버트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흥미롭게도 드빈의 정치적 배경은 좀더 우파적이다. 그는 영국 공산당 출신이다. 그러나 드빈의 경제학적 전제들이 앨버트의 것보다 이론적으로 더 정교하다. 그래서 나는 앨버트보다 드빈의 주장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둘 다 나름의 장점들이 있다.
Q 협동조합 운동이 계급투쟁에 기여한 바와 한계는 무엇인가?
협동조합은 다양한 이유로 생겨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무질서를 제한하는 한 가지 수단이 될 수도 있고, 특정 작업장에서 일어난 투쟁의 결과로서 나타날 수도 있다. 특정 기업 노동자들이 공장 폐업을 막아 보려 했지만 기업주가 끝내 폐업을 하는 경우, 노동자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공장을 계속 돌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어떤 경우에는 대기업이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될 수도 있다. 영국에는 존 루이스라는 고급 유통업체가 있는데, 이 업체의 형식적 소유주는 노동자들이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기업처럼 운영된다.
어쨌든 협동조합은 그 형태가 어떻든 간에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없다. 협동조합은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나 소비자들이 공동으로 소유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시장 경제 속에서 운영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협동조합도 경쟁적 축적의 논리에 따라 운영된다. 그렇기 때문에 협동조합의 협력적 구조를 유지하기는 매우 힘들다. 마이클 앨버트가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그는 어떤 협동조합이 생존하기 위해 비용을 삭감해야 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라고 한다. 비용을 삭감하려면 일부 직원들을 해고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관철시킬 수 있을까? 민주적 투표를 통해 감원을 하기로 결정하고 누가 해고될지를 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십중팔구 커다란 갈등과 상처를 낳을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일부 노동자에게 그러한 경영상의 결정권을 위임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들[경영권을 위임 받은 노동자들 ― 옮긴이]은 “경영이라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네? 동료들을 해고하는 것처럼 어려운 결단도 내려야 하고. 우리는 책임이 막중한 만큼 보수를 더 많이 받아야 해” 하고 말하게 된다.
이처럼 협동조합도 경쟁의 논리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보통의 자본주의 기업과 똑같은 위계제를 택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러시아 혁명이 변질된 과정의 미시적 재연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협동조합을 종파적으로 비난하기만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럼에도 노동자 투쟁의 성과로서 협동조합이 설립되는 경우 그것이 대개는 최선이 아닌 차선의 성과임을 알아야 한다. 역설이게도 때로는 협동조합이 이전 기업보다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임금을 낮추는 데서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노동자들이 “이제 회사가 우리 것이니만큼 우리는 더 큰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없다.
Q 사회적 기업과 공정무역을 어떻게 보는가?
일단 사회적 기업이라는 용어 자체가 매우 막연하다. 영국에서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것이 대개 공공 서비스의 사유화 과정에서 출현한다. 이른바 사회적 기업가라는 사람이 와서는 “내가 이 공공 서비스를 더 값싸고 질 좋게 공급할 수 있다”는 둥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우파 연립정부가 들어선 뒤로 이런 사회적 기업에게 공공 서비스가 이양되는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고, 이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싸워야 한다.
공정무역은 이와 사뭇 다르다. 공정무역은 북반구와 남반구 간의 무역에서 흔히 남반구의 생산자들이 착복당하며, 생산도 환경 파괴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공정무역의 이념은 노동자 처우, 환경 보호 등에 관한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기업들 사이에 무역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공정무역은 자본주의적 경쟁에 윤리적 규범을 부과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자본주의적 경쟁이 실은 어떤 규범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흔히 윤리적 소비라는 개념이 공정무역과 결부돼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공정무역을 강제할 수 있는 주체는 바로 소비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소비자들이 매우 투철해야 하고 많은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보통, 공정무역 제품은 일반 제품보다 비싸 윤리적 소비자들은 비교적 부유한 소비자들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데 설령 내가 슈퍼에 가서 공정무역 바나나를 산다고 해도 그것이 진정한 공정무역 제품인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로서는 그런 제품에 공정무역 인증을 해주는 NGO들과 윤리적 기업들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는 결코 강한 신뢰감을 주는 시스템이 아니다. 공정무역은 또한 소비자가 왕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한다. 그러나 사실 소비자는 왕이 아니다. 이 체제를 지배하는 것은 서로 경쟁하는 대기업들이다.
Q 조너선 닐의 책 《기후변화와 자본주의》를 보면, 지중해를 중심으로 서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 지역을 연결하는 재생에너지네트워크TRAC에 대해 나온다. 그런데 이것을 (사회운동이 아니라) 데저텍이라는 재단을 통해 자본가들이 추진하고 있다. 자본가들의 이런 ‘변화’에 유럽의 기후변화 운동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미안하지만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나는 기후변화 쪽으로는 전문가가 아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자본가들 사이에도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저탄소 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최근 독일 정부는 정치적 압력에 밀려 핵 발전을 완전히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독일의 강력한 반핵 운동 덕분이기도 했지만, 결정타를 날린 것은 후쿠시마 참사였다. 그런데 상당수 독일 자본은 재생 에너지 기술로 제법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것이 한쪽 시각이다. 그러나 자본가들 사이에서 더 우세한 시각은 남아 있는 화석연료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뽑아내서 이용하자는 것이다. 그렇기에 독일 핵 발전소의 해체에 따른 전력 공백이 단지 재생 에너지만으로 채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더 많이 수입하기도 할 것이다. 미국 에너지 업계는 셰일 가스 추출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고 있는데, 셰일 가스 생산이 워낙 성공적이어서 미국이 수입해야 하는 천연가스 수요가 최근 몇 년 사이에 크게 줄었을 정도다. 또한 멕시코만의 석유 유출 사건과 BP 스캔들로 미국이 발칵 뒤집혔는데도 미국 지도층 가운데 해저 석유 시추를 그만두자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도 흥미롭다. 코펜하겐 회의 결과를 봐도 이런 인식이 드러난다. 유럽연합이 약간 예외이긴 했지만 주요 자본주의 강대국들 모두가 사실상 지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고 선언했다. 이렇듯 자본가들 사이에서 대세는 화석연료 경제를 최대한 오래, 빠르게 돌리자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이 점은 전 세계 기후변화 운동을 매우 의기소침하게 만든 듯하다. 그러나 언뜻 기묘한 현상이기는 하지만 일본에서 일어난 핵 사고가 지구 반대편인 독일에서 핵 발전 폐기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을 보면, 장기적으로 에너지와 기후변화를 쟁점으로 강력한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Q 다른 제3세계 나라들보다 한국과 타이완의 경제성장률이 더 높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많은 나라 경제를 국가가 주도하게 됐다. 식민지나 반식민지에서 벗어난 많은 나라에서 국가는 전방위적으로 경제에 개입했고, 이를 통해 흔히 괄목할 만한 산업화를 이뤄냈다. 그런데 대개 이것은 ‘수입대체산업화’라고 불리는 형태로 나타났다. 즉, 미국이나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수입해 오던 제품을 스스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제법 큰, 산업화된 경제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이 경제들은 한계에 봉착했다. 이 나라 산업들이 상품을 판매할 곳은 주로 폐쇄된(외제 수입품으로부터 보호받는다는 의미에서 ‘폐쇄된’) 국내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남한·타이완의 경우 비록 국내 산업이 이런 식으로 보호받기는 했지만 국가가 자기 수중에 자원을 집중시켜 수출 산업에 이를 투자했다. 그래서 이런 나라들의 산업은 더 큰 시장에 상품을 팔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 산업이 성공을 거두면 발전국가가 나서서 좀 더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했다. 처음에는 신발을 만들다가 나중에는 장난감, 선박, 컴퓨터칩, 자동차 등을 생산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이런 전략 덕분에 남한이 비교적 부유한 경제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수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초에 한국과 아르헨티나를 비교해 보면 아르헨티나는 1인당 소득 기준으로 세계 최고로 부유한 나라에 속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상당한 산업 기반을 구축했는데도 주로 식량과 원자재를 수출했다. 반대로 남한은 20세기 초에는 극빈국이었지만 지금은 1인당 소득 기준으로 아르헨티나보다 훨씬 부유하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발전국가를 찬양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세계적 경제 위기 속에서 발전국가 모델은 지탱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다. 더욱이 이제는 다른 나라들도 이 모델을 차용하고 있다. 예컨대 베트남이 그렇고, 훨씬 더 중요한 사례로는 중국이 그렇다. 그래서 오늘날 남한 자본주의는 중국 경제에 편승해야만 현상 유지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설명하려 했듯이 이것은 상당히 위험한 선택이다.
Q 1960년대 이후 브라질 역시 한국처럼 수출 주도 산업을 추진했지만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한국과 브라질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은 브라질이 주로 원자재를 수출하기 때문이다. 물론 브라질은 수입대체산업화를 통해 큼직한 산업 기반을 갖추었고 일부 공산품을 수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브라질의 주된 수출 품목은 식량과 원자재다. 그런데 이 같은 식량과 원자재 수출 의존성은 전망이 밝지 않다. 왜 그런지를 보자. 이 모든 식량과 원자재가 팔리는 곳은 주로 중국이다. 요컨대 국제 분업 체계 속에서 브라질의 구실은 중국의 제조업 인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다. 또한, 브라질 경제의 호황을 틈타 투기 자금이 브라질에 유입되고 있어서 브라질 통화인 헤알화가 절상되고 있다. 브라질 통화가 절상되면 브라질 수출품 가격이 비싸지는데, 식량과 원자재 수출에서 이 점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중국이 그래도 식량과 원자재를 계속 사들일 수 있을 정도로 구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공산품과 경쟁하고 있는 브라질 공산품의 수출에는 문제가 된다. 중국 통화는 달러에 연동돼 있어서 중국 공산품은 수출 가격이 더 싸다. 이 때문에 브라질 제조업은 축소되고 있다. 그래서 브라질은 규모가 크고 중요한 국가임에도 국제 분업 체계 속에서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없는 구실을 하고 있는 역설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Q 최근 그리스에서 제기되고 있는 행동강령과 1970년대 좌파 개혁주의자들이 주창한 행동강령을 비교하면서, 이 둘이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1970년대 좌파 개혁주의자들의 행동강령은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물론 당시와 지금이 맥락은 다를 테지만, 당시에도 사회주의자들은 그런 요구를 지지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함께 싸워야 했던 것 아닌가?
아주 좋은 질문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는 간혹 영국 노동당 좌파에 속한 토니 벤 같은 사람들을 상대로 지나치게 각을 세웠다. 우리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파업하고 있던 노동계급 투사들이 토니 벤의 정책에 기대를 걸면서 사태를 관망하는 쪽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벤의 정책이 초래한 정치적 효과가 대체로 부정적이라고 봤다. 그러나 어쩌면 공동전선 캠페인을 건설해서 벤의 정책이 투쟁을 통해 관철되도록 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공동전선 활동 경험은 1970년대 말의 반나치동맹 이전까지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1980년대 초에 프랑스의 미테랑도 모종의 대안적 경제 전략을 시도했다가 패배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잘못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에 우리가 기회를 놓친 것일 수도 있다.
Q 복지국가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복지국가의 성격은 모순적이다. 한편으로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고 인간적으로 살아 보려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가져온 결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복지국가는, 20세기를 거치면서 적어도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지배계급이 건강하고 교육 받은 안정적 노동력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 결과로 탄생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복지국가는 어느 정도는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의 이해관계를 반영했다. 복지국가가 취하는 형태도 모순적이다. 대개 복지국가의 운영 방식은 매우 관료적이어서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무력감이 들게 한다. 그러나 복지 수급자의 지불 능력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복지가 제공된다는 점은 자본주의의 근본 원칙에 대한 문제 제기이자 도전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재 복지국가는 공격을 받고 있다. 내 생각에 일반적으로 지배계급은 복지국가의 전면 폐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비록 미국 의회에는 복지국가를 완전히 없애려는 극우파 공화당 의원들이 1백 명 정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지배계급은 경제 위기 등을 이유로 복지국가에 대한 지출은 줄이고 싶어 한다. 그들은 또한 한편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노동시장으로 밀어넣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 민간 기업들이 국가를 대신해서 일부 복지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돈을 벌 수 있게 해주려고 복지국가를 구조조정하려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복지국가를 방어해야 하고, 특히 복지 서비스 제공의 공공성을 방어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말만 들어도 역겨운 것이다. 영국 지배자들은 국민의료보험NHS을 구조조정해서 보건의료 서비스 공급자들 간에 경쟁을 훨씬 더 강화하려 한다. 우리는 이에 맞서 저항해야 한다. 자본주의 복지국가의 성격을 이론적으로 규명하기는 다소 복잡할지라도 복지국가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전혀 복잡하지 않다.
Q 그리스에서 국유화와 노동자 통제의 결합을 요구하는 것은 과도하지 않은가?
그리스에서 국유화 요구와 노동자 통제 요구가 결합된 것에 관해 말하자면, 나 자신은 이것이 크게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어떤 요구를 제기할 것인가는 구체적인 상황에 달려 있다. 그리스에서는 매우 전투적인 투쟁들이 벌어졌는데, 아마도 그 때문에 그리스에서는 노동자 통제 하에 은행을 국유화하자는 요구가 광범한 공감을 받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영국에서 제기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요구이긴 하지만, 그런 요구를 정확히 어떻게 제기하느냐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판단할 문제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