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왜 자본주의는 경제 위기에 빠지는가
마르크스의 경제위기론과 그에 대한 비판 *
1백 년도 더 전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모순 위에 구축된 체제라는 것을 보여 줬다. 마르크스가 묘사한 자본 소유자들, 즉 은행가들과 기업인들의 모습은 대규모 투자로 산업 생산량과 규모를 늘리려고 점점 더 거창한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그에 따른 위험 부담을 점점 더 두려워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갑자기 확장이 멈추고 뒤이어 불황이 찾아온다.
한동안 산업이 풀가동되고, 새로 공장들이 세워지고, 새로 기계가 도입되고, 인간의 숙련도가 향상된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생산 기구”라고 부른 것이 확대된다. 그러나 다음 순간 공장이 놀고, 기계가 녹슬고, 실업이 증가하면서 지지부진과 막대한 낭비가 나타난다.
1 그는 점점 깊어지는 불황과 사이사이에 점점 짧아지는 호황으로 점철된 체제, 생산 가능한 부를 처리하지 못하는 체제를 묘사한다.
더욱이 마르크스는 이런 “분출, 대격변, 위기가 … 빈번하게 되풀이되고 그때마다 더 큰 규모로 재연된다”고 말했다.사회적 부와 자본의 기능, 그리고 그 증가 정도와 활력이 … 크면 클수록, 산업예비군[실업 — 옮긴이]은 그만큼 더 커지고, … 공식 빈곤율도 더 커진다. 이것이 자본주의 축적의 절대적인 일반 법칙이다.(강조는 마르크스)
3 바로 이 점이 자본주의 ‘생산양식’(부를 생산하기 위한 자본주의적 사회 편제 방법)을 이전의 “길드제, 농노제, 노예제”가 처했던 운명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파멸로 이끄는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4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가 발전하면 할수록 실업과 빈곤이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이런 방식들[길드제, 농노제, 노예제 — 옮긴이]로 부를 생산했던 사회들이 번영기가 지난 후에 돌이킬 수 없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도 그 같은 쇠퇴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사실 그가 1857년에 《자본론》의 초고(일반적으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으로 알려진) 집필에 착수했을 때 그는 이러한 돌이킬 수 없는 쇠퇴 국면이 이미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30년 뒤인 1886년 엥겔스는 《자본론》 1권의 영어판 서문을 쓸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보았다.
1825년부터 1867년까지 거듭 재연된 정체, 번영, 과잉 생산, 위기의 10년 주기 순환은 사실상 멈춘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지속적이고 만성적인 불황이라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탄식하듯이들 염원하는 번영기는 좀처럼 오지 않을 것이다. 번영기의 도래를 예고하는 듯한 징후를 감지한 듯할 때마다 그 징후는 또다시 사라진다.
물론 1857년에 마르크스는 오류를 범했고, 1886년에 엥겔스도 그랬다. 마찬가지로, 1930년대 대불황을 ‘자본주의의 최종 위기’라고 봤던 사상가들도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예측 실패 때문에 많은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조차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론적 분석의 기본 원리들을 거부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어떤 사람들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이 되는 것이라고 봤던 ‘법칙들’ 중 일부를 거부하면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모형을 공공연히 수정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분석을 말로는 수용하지만, 현실 세계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 줄 능력을 그 분석에서 박탈하는 많은 유보적 단서들(‘상쇄 요인’이라는 형태로)을 달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다시 한 번 마르크스가 ‘최종 위기’라고 착각했던 것의 징후가 현존하는 듯한 시기에 살고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던 현상들이 모두 언론 매체에 나날이 언급된다. 세계적 규모에서 실업률 증가, 경제적 정체로 돌이킬 수 없이 나아가는 듯한 경향, 광란적이고 단기적인 투기 호황에 뒤따르는 점점 깊어지는 경기 침체, 이윤율의 장기적인 저하, 체제의 동역학이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전반적인 느낌 — 이것은 또 하나의 착각일 뿐인가? 아니면 마르크스의 분석이 올바름을 참으로 입증해 주는 것인가?
이 책의 논점은 현재 심화하고 있는 경제 위기가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기본 모형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처럼 마르크스 분석의 기본 원리들을 거부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마르크스의 설명에 각종 유보적 단서들을 달아 그 설명력을 박탈하는 것도 잘못이다.
대신에 우리가 마르크스 시대 이래 자본주의 체제의 진로를 설명하기 위해 수정해야 할 점은 어떻게 체제 자체가 특정 발전 단계에서 쇠퇴 압력을 경감시키는 ‘상쇄 요인들’을 만들어 내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후 단계에서 더는 체제가 그 요인들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기초 위에서만 자본주의가 어떻게 장기적인 번영 — 특히 1950년대와 1960년대에 — 을 누릴 수 있었고, 1880년대, 1930년대, 그리고 다시 지난 10년 동안에[이 글은 1984년에 출판됐다 — M21] 장기간의 정체와 위기에 빠졌는지 알 수 있다.
이윤율 저하 경향
위기에 처하는 경향이 있는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마르크스 설명의 핵심은 그가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이하에선 그냥 ‘이윤율 저하’라고 부를 것이다)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성장함에 따라 이윤율, 즉 자본 투자에 대한 이윤의 비율이 하락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방식, 즉 자본주의적 경제 성장이 이뤄지는 방식의 직접적 결과다.
6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윤율 저하’를 완전히 거부한다. 7 한편, ‘이윤율 저하’를 수용하지만 그것을 ‘이윤율 저하 경향과 그 상쇄 경향의 법칙’이라고 불러야 한다면서 그 법칙의 설명력을 박탈하는 식으로 수용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8
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종종 ‘이윤율 저하’가 마르크스 분석의 핵심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마르크스의 저작들에서 ‘몇 가지’ 경제위기론들이 발견되고 ‘이윤율 저하’는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주장이 근래 유행하고 있다.물론 《자본론》에 ‘이윤율 저하’ 이론만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 이론은 어떻게 다른 요인들 — 신용과 화폐의 구실, 서로 다른 생산 부문들 사이의 불균형, ‘고정자본’(건물과 기계류)의 마모, 노동자 대중의 낮은 소비 수준 — 이 상호 작용해 위기를 빈번히 일으키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보충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자신이 촉발시킨 바로 그 생산력 때문에 불행한 운명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마르크스가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윤율 저하’ 경향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를 일으키는 다른 요인들은 생겼다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윤은 자본주의의 핵심 목적이므로 약간의 이윤율 저하도 체제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나타난다. 마르크스가 썼듯이,
자본주의의 자기 확장률인 이윤율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목표인데, 그것의 하락은 …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에 대한 위협으로 나타난다.
10 이윤율 저하는 “자본주의 생산의 진정한 장애물은 자본 자체”라는 것을 보여 준다. 11
마르크스 이전의 경제학자들이 이윤율 저하를 알아챘을 때 이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하며 바라봤음을 마르크스는 주목했다. 왜냐하면 이윤율 저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생산력 발전 과정에서 부의 생산 자체와는 아무 관계 없는 장벽을 만난다는 느낌”을 자아내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단지 역사적이고 일시적인 성격을 입증하는 것이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특정 단계에서 자신의 더 이상의 발전과 충돌하는 방식임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2 를 대신하게 될 때 그 어떠한 자기 조절도 실패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윤율 저하 ‘법칙’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설명에서 단지 부가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이 법칙은 자본주의가 결국 실패하게 마련인 체제라는 마르크스 주장의 핵심이었다. 이 법칙으로써 자본주의의 경제적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마르크스의 분석은 서로 다른 ‘생산양식’의 연속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파악하는 그의 일반적 설명 속에 통합된다. 그리고 이 법칙은 체제의 점진적 개선이나 자본가의 자기 조절로는 경제 위기를 피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이윤율이 어느 수준 이하로 떨어지고 그 결과 생존을 위한 자본가 상호 간의 격렬한 투쟁이 “자본가 계급의 경영상의 우애”법칙 자체
마르크스의 핵심적 주장인즉,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각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생산수단’ — 도구와 기계류 등 — 을 점점 많이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 시대에, 전에는 집에서 직기 한 대를 운전하던 직조공이 동력 직기가 개발되면서 큰 공장의 직조실에서 직조기 열 대를 관리하게 됐다. 이러한 과정은 오늘날까지 계속돼, 비교적 적은 노동자들이 고도로 자동화된 생산 라인을 다루게 됐다. 물론 ‘생산수단’에는 도구와 기계류뿐 아니라 사무실 건물에서 운송 체계에 이르는 것이 두루 포함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관계를 두 가지 방식으로 묘사했다. 각각은 그 관계의 서로 다른 측면을 표현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즉 “산 노동”의 관점에서 생산수단을 “죽은 노동”이라고 불렀다. 생산수단 — 연장, 기계, 공장 등 — 이 모두 노동자들이 과거에 한 노동의 산물이자 그 노동의 축적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관점에서 이 똑같은 생산수단들을 “불변자본” — 자본가들에게 그것들은 자본 투자에 해당한다 — 이라고 불렀다. 생산수단을 가동시키려고 고용한 노동자들은 “가변자본”이다.
논의 과정에서 우리는 양쪽 용어를 다 언급해야 할 것이므로 그것들이 동일한 관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여기서 지적하는 것이 좋겠다.
어쨌든 자본가들이 생산수단과 생산 재료에 쓰는 비용은 노동자 고용에 쓰는 비용보다 훨씬 빨리 증가한다. 그래서 자본 축적 과정 자체가 둘 사이의 비율, 달리 말해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비율 증가를 수반한다.
자본주의 생산이 발달하면서 불변자본에 견줘, 따라서 가동되는 총자본에 견줘 가변자본이 상대적으로 감소하는 것이 … 자본주의적 생산의 한 법칙이다. 달리 말해,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전하는 독특한 생산 방법들 덕분에 특정 기간에 같은 수의 노동자, 즉 같은 양의 노동력이 노동수단(기계류와 각종 고정자본)을 점점 더 많이 가동시키고, 다루고, 생산적으로 소비하게 된다. 따라서 불변자본의 가치도 더 많이 소요된다.
그리하여 생산수단에 대한 투자 수준이 그 생산수단을 가동시키도록 고용된 노동자들에 대한 투자 수준보다 훨씬 더 빨리 증가한다.
이것은 모든 자본가들이 추구하는 황금률인 생산성 증대, 즉 노동자 수가 같아도 상품은 더 많이 생산되는 것을 나타낸다.
생산수단과 결합되는 노동력에 견줘 생산수단이 증대하는 것은 … 노동생산성 증대를 나타낸다. 그러니 노동생산성 증대는 노동 과정의 객관적 요인에 견줘 주관적 요인이 감소하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15 자본의 기술적 구성은 같은 양의 노동력이 생산수단과 생산 재료를 더 많이 다룰 때 증가한다.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에 사용된 노동력의 양에 대한 생산수단의 물리적 크기의 비율을 “자본의 기술적 구성”이라고 불렀고, 사용된 노동력의 가치에 대한 생산수단의 가치 비율을 “유기적 구성”이라고 불렀다.자본의 기술적 구성의 이런 변화는 또한 자본의 가변적 부분의 비용으로 자본의 불변적 부분을 증대시켜, 자본의 가치 구성에 반영된다. … 가변자본에 비례해 불변자본이 점차 증대한다는 이 법칙은 … 모든 단계에서 확인된다.
그러므로 같은 양의 노동력을 사용하려면 점점 더 많이 생산수단에 — 따라서 총자본에 — 투자해야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경쟁이다. 즉, 각각의 자본가가 경쟁 자본가보다 앞서고자 생산성 향상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자본가를 이 과정에 연루시키는 경쟁 압력이 아무리 크다 해도 자본가 계급 전체의 관점에서 경쟁은 매우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17 그러나 노동에 대한 투자 수준이 총투자보다 느리게 증가한다면 이윤의 원천도 총투자보다 느리게 증가한다. 그러므로 투자 한 단위당 이윤, 곧 이윤율은 하락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18
자본가들은 사업의 성패 여부를 그들이 얻은 총이윤(마르크스가 “이윤량”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투자 한 단위당 얻은 이윤, 즉 이윤율로 평가한다. 이윤의 원천은 산 노동을 착취해 창조된 잉여가치이므로, 이윤량은 사용된 노동력의 양, 즉 노동자 수에 달려 있다.마르크스 사후 한 세기 동안의 이윤율 저하 경향
마르크스가 주장했듯이 자본주의 체제가 발전함에 따라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이 실제로 있다면, 이것은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체제를 괴롭히는 문제들 중 많은 것을 설명하는 데 정말로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이윤율 저하 경향은 자본주의 체제가 어째서 발전의 어느 단계에서는 실질임금의 상승을 용인하다가도 이후의 어느 단계에서는 실질임금 상승을 용인하지 않으려 하는지를 설명해 줄 것이다. 즉, 평균 이윤율이 떨어지는 바람에, 실질임금이 오르면 효율이 가장 낮은 기업들은 파산으로 내몰리게 되기 쉽다. 공공 지출도 마찬가지여서 이윤율이 하락하면 꼭 필요한 세금도 더 부담스러워진다.
지구상의 새로운 지역에 대한 투자도 근래에 미국 자본주의의 약점을 보완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도 그러한 투자에 대한 이윤의 비율이 저하하는 경향이 있다면 더 분명해진다. 그리고 케인스적 경제 관리 기법들은, 한편으로는 호황/불황 패턴을 일으키는 다른 압력들은 해소할지 몰라도 장기적인 이윤율 저하 경향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주장을 과거의 경제 위기에 관해 알려진 사실들과 관련지어 본다면 세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 몇몇 중대한 경제 위기들 — 특히 1929년의 공황으로 시작된 위기 — 은 평균 이율율이 상당폭 하락한 뒤 곧이어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둘째, ‘이윤율 저하’가 멈출 수 없는 법칙이라면 어떻게 자본주의가 1880년대 이후 상시적인 위기 상황에 처하는 걸 모면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물론 마르크스는 경제 위기 쪽으로 몰고 가는 압박을 완화시키는 “상쇄 경향들”에 관해 얘기했지만, 그는 이 경향들이 체제의 급속한 확장을 한 세기 이상이나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셋째, 마르크스가 이윤율 저하를 일으킨다고 특별히 지적한 요인인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가는 대략 마르크스가 집필을 중단한 시기의 영국에서, 그리고 1920년대 미국에서 작동을 멈췄다고 지적하는 연구들이 있다. 나중에 실제 증거를 더 면밀히 살피겠지만, 지난 10~15년 사이에 유기적 구성이 다시 증가했음을 일부 계산치가 보여 주고 있음은 여기서 지적할 만하다.
중요한 점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실제로 장기간 오르지 않아 마르크스의 주장에 상당한 의문이 제기됐으며,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주장을 통째로 거부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자신이 이윤율 저하를 때때로 상쇄할 수 있는 상쇄 경향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위에서 필자가 일반적으로 설명한 세 가지 문제에 직면해, 마르크스 ‘법칙’의 비판자 중 많은 사람들은 이 상쇄 경향들이 사실상 이 ‘법칙’을 완전히 상쇄한다고 주장하기가 수월했다.
마르크스의 ‘법칙’이 현재의 경제 위기를 설명하는 데에 실제로 도움이 되려면 불편해도 이런 이의 제기와 1880년 이후의 사실적 증거를 직시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법칙은 그럴 수 있다. 만약 특정 ‘상쇄 경향들’을 나중에 첨언하는 것이 아니라(불행히도 마르크스 자신이 그렇게 그 경향들을 진술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본주의 발전의 특정 시기에 자본주의 구조 속의 한 부분이었던 것으로 본다면, 또 그렇게 봐야만 그 경향들이 어떻게 다른 시기에는 작동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면 마르크스가 말한 ‘이윤율 저하’를 반박하는 주요 주장들과 특정 시기에 이윤율 저하를 상쇄했던 적이 있는 상쇄 경향들을 살펴보자.
기술 진보의 효과
노동 절약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자본 절약적’인 혁신으로 생산성 증대가 흔히 일어난다며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주장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급진적 경제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불변자본의 가치가 상승하려면 불변자본 절약적인 기술 혁신보다는 노동 절약적인 기술 혁신이 더 많이 일어나야 한다. …
경쟁 속에서 비용이 노동의 절약으로 절감되는지 자본의 절약으로 절감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 실제로 선진 자본주의 경제에서 노동 절약적인 기술 혁신보다 자본 절약적인 기술 혁신을 선택하도록 하는 압력이 더 많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몇몇 주장들이 설득력이 있다.
20 왜 그런 몇 가지 경우뿐인지는 설명하지 않은 채 ‘상쇄 경향들’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생산 라인들 — 특히 사치품 생산 라인 — 이 가동된다. … 이 새로운 라인들은 대개 산 노동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왜 노동 집약적 혁신에 근거한 “새 라인들”에 거듭 착수해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시적으로 상쇄할 수 없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마르크스 자신이 생산성 증대가 유기적 구성 상승을 동반하지 않는 “몇 가지 경우”를 언급하면서,21 그러나 쉽사리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빈틈없는 설명의 윤곽은 마르크스의 저작에 존재한다.
자본 축적이 자본 집약적일 수밖에 없다는 마르크스의 논점을 단지 그 사실을 단언함으로써 옹호할 수는 없다.그 설명의 첫 부분은 자본 축적이 진행되는 방식 자체에서 비롯한다. 생산이 한 차례 돌아갈 때마다 잉여가치가 새로 만들어진다. 이 잉여가치를 소유한 개개의 자본들은 (다른 조건이 같다면) 경쟁 때문에 그 잉여가치의 되도록 많은 부분을 다음번 확대 생산 주기에 투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적 노동생산력을 높이는 방법은 모두 … 잉여가치나 잉여생산물의 생산을 늘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결국 잉여가치 생산 증대가 축적의 중요한 요소다. …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거듭 탈바꿈하는 것은 생산 과정에 투입되는 자본의 크기가 증대하는 모양으로 나타난다. 결국 이것이 생산 규모 확대의 기초, 노동생산력 제고 방법들의 기초, 잉여가치 생산 가속화의 기초인 것이다.
23 “생산적으로 사용된 자본은 항상 두 가지로 대체된다.” 자신의 가치를 생산된 상품으로 이전하는 것과, 그 상품들로 구현되는 추가적 잉여가치를 노동자들이 창조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는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말했듯이,‘순수한 자본주의 시스템’(다른 모든 계급들이 소멸돼 노동자와 자본가만 있고, 자본가들은 경쟁 때문에 그들의 잉여가치를 모두 투자해 순전한 자본의 화신으로 행동해야 하는)에서라면 잉여가치의 양이 매 생산 주기마다 무한히 증가할 것이다. 자본가 계급은 잉여가치를 점점 더 많이 그들 마음대로 처분할 것이며 이것을 점점 더 큰 규모의 생산에 투자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을 것이다. 마이클 키드런이 썼듯이, 마르크스의 논거는 다음과 같은 것을 가정한 것이었다. “모든 생산물은 생산적 소비로서 시스템 안으로 다시 흘러 들어온다. 이처럼 폐쇄된 시스템에서는 자원 배분이 꾸준히 투자 쪽으로 방향을 돌릴 것이다.”
이 자체로 ‘산 노동’에 대한 ‘죽은 노동’의 비율이 결국 자동으로 증가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투자는 ‘자본 절약적’일 수도 있다. 과학적 지식이 진보해 새 기술들로 응용되고 있다면 이 기술들 중 일부는 낡은 기술보다 노동자 1인당 사용되는 기계류와 원료를 더 감소시킬 수 있다. 비교적 근래의 사례를 들면, 사진 식자와 석판 인쇄를 사용한 신문 생산은 주조 식자와 활판 인쇄를 사용한 재래식 신문 생산보다 덜 자본 집약적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논의가 불충분하다. 이것만으로는 어느 때든 자본 절약적인 새 기술이 일부 있을 것이라는 점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새 기술의 일반적인 결과가 어떤 것이냐는 점이다. 새 기술은 자본을 절약시킬까 아니면 증가시킬까?
논의를 한 단계 더 진행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경쟁 자본가들이 이윤 추구용으로 대규모 투자를 한다면, 보통의 투자는 자본을 증가시키고 자본 집약적이기 쉬운 것이 전반적 추세일 것이다.
첫째, 각 업종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자본가들은 새 기술을 가장 많이 도입한 사람들일 것이다. 어떤 과학·기술 지식 수준에서든 이런 새 기술의 일부는 실제로 자본 절약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새 기술들이 모두 채택됐을 때도 생산수단에 대한 투자 수준을 높여야만 채택할 수 있는 다른 새 기술들이 여전히 있을 것이다.(아니면 적어도 자본가들은 그러한 기술 혁신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것이다.)
둘째, 노동에 대한 자본의 비율이 증가하지 않고도 상당한 기술 진보는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증가 없이도 기술 진보의 이점을 모두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어떤 생산 분야에서 새로운 과학 지식은 나타나지 않고 있고, 노동에 대한 자본의 비율이 특정 수준일 때 이용 가능한 기존 기술이 보편화된 상황을 잠시 상정해 보기만 해도 쉽게 예증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동자 1인당 생산수단을 더 많이 사용하는 자본가가, 과거에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노동에 대한 생산수단의 비율이 너무 작아서 채택하지 못했던 생산 기술 — 이것을 개발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자본이 없었던 것이다 — 을 채택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노동자 1인당 생산수단을 증가시키지 않는 자본가는 어쩔 수 없이 기존 기술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셋째, 개별 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비율을 증가시킬 수 있다면 그는 노동이 더 많이 필요한 새 기술뿐 아니라 자본이 더 많이 필요한 새 기술에도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 비율을 증가시킬 수 없다면 노동이 더 많이 필요한 새 기술에서만 득을 보게 돼, 그 비율을 증가시킬 수 있는 자본가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할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사업을 하는 자본가는 모두 첨단 기술을 이용하는 방법이 생산수단, 즉 ‘죽은 노동’(과거의 연구·개발 결과 속에 축적된 ‘죽은 노동’을 포함해)에 대한 투자 수준을 높이는 것이라는 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포드 자동차가 제너럴 모터스나 도요타와 경쟁해서 이기는 방법이 노동자 1인당 물리적 투자 수준을 감축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학술 정간물에나 실릴 법한 얘기다. 자본가는 기술 혁신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그 혜택을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보통 인정한다. 기업이 노동자 1인당 자본이 더 적게 필요한 특정 신기술을 우연히 발견할 수 있지만, 그런 혁신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투자 수준을 높이는 것뿐이다.
한 자본가가 노동자 1인당 생산수단에 대한 투자를 감축한다 해도 여전히 그는 경쟁자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새 기술을 우연히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행운은 노동자 1인당 생산수단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자본가도 얻을 수 있고, 이 자본가는 또한 경쟁자들이 우연히 발견한 새 기술들에 필적할 수 있거니와, 자신과 같은 수준의 ‘자본 집약’도를 이루는 데 필요한 자금이 없는 다른 자본가들이 도달할 수 없는 기술 진보도 이룰 수 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노동자들에 대한 생산수단의 비율이 증가하는 데는 한계가 없으므로 이런 경쟁 방법에 따른 기술 혁신에는 이론적으로 전혀 한계가 없다.
이상의 이유들로, 다른 조건들이 같다면 자본 감소가 필요한 새 기술보다는 자본 증가가 필요한 새 기술이 언제나 더 많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리하여 노동자 1인당 생산수단의 평균량 —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기술적 구성” — 은 증가할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상황만이 이 증가를 멈출 수 있다. 즉, 어떤 이유로 이윤 추구용 투자가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 자본가들은 투자 확대를 통해 새 기술을 획득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우연히 발견할지도 모르는 기술들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생산성과 생산수단의 비용
노동자에 견준 생산수단과 생산 재료의 물리적 규모가 증가한다고 해서 반드시 투자 비용이 노동자보다 빨리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 자신이 인정했듯이, 산 노동에 대한 죽은 노동의 비율이 증가하는 것에서 비롯하는 기술 진보는 기계류나 공장이나 원료 한 단위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마르크스가 언급한 요인이다.
불변자본의 가치는 그것의 물질적 양에 정비례해 증가하지 않는다. … 가변자본과 비교한 불변자본의 양을 증대시키는 상황 전개가 또한 노동생산성 증대 결과 불변자본 요소들의 가치를 감소시켜, 불변자본의 가치가 — 비록 계속해서 증가하기는 하지만 — 그것의 물질적 양과 똑같은 비율로 증가하는 것을 막는다. … 드문 경우에야, 불변자본 요소들의 양이 증가하는데도 그 가치가 불변하거나 심지어 감소한다.
다른 말로 하면, 기계는 더 강력하고 복잡해지지만, 거듭되는 기술 진보로 기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작업량은 준다. 그래서 비록 어떤 기계가 이전 기계보다 두 배나 강력하고 생산적일지라도 그 비용은 전보다 덜 들 수도 있다. 자본의 “기술적 구성”은 증가하겠지만, “유기적 구성”, 즉 산 노동에 대한 죽은 노동의 가치의 비율은 불변이거나 심지어 감소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것이 “산업의 발달에 따라 발생하는 … 기존 자본의 가치 하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어느 기계가 (생산성 향상으로) 제작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줄어든 다른 기계로 대체될 수 있다면, 자본가가 볼 때 그 기계가 갖는 가치는 하락하는 것이다. 그 기계 가치의 일부는 기계의 물리적 마모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감가상각돼야 한다.
26 그래서 투자 비용 절감으로 이윤율이 상승할 것이다.
이런 불변자본 감가상각이나 ‘평가절하’가 마르크스의 법칙이 틀렸음을 입증하기 위해 가장 많이 꼽혔다. 예를 들어 제프 호지슨, 이언 스티드먼, 수전 히멀웨이트, 오키시오 노부오, 앤드류 글린 같은 비판자들은 기술 진보로 상품이 항상 과거보다 더 싸게 생산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인즉 이렇다. — 옮긴이] 만약 어떤 산업에서 산 노동에 대한 죽은 노동의 비율이 상승해 생산성이 증가한다면 그 산업의 생산물 가격은 다른 산업들의 생산물 가격보다 낮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결국 다음 생산 주기에서 이러한 산업들에 대한 투자 비용은 감소할 것이다. 경제 전반에 걸쳐 투자가 저렴해지면 생산수단 자체와 소비 수단 등의 추가적 생산도 저렴해질 것이다.언뜻 보기에 이 주장은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잘못된 주장이다. 이 주장은 현실 세계에서 취할 수 없는 논리적 단계를 밟고 있다. 생산 과정상의 투자는 어느 한 시점에서 일어난다. 생산 기술 향상의 결과로 추가적 투자가 저렴해지는 것은 나중의 한 시점에서 일어난다. 둘은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자본가가 오늘 하는 투자는 결코 더 저렴하지 않은데, 일단 그 투자가 운용되면 그 투자 덕분에 같은 투자가 미래에 더 저렴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윤율은 자본가가 과거에 투자한 양에 비해 그가 얻는 잉여가치의 양이다. 그것은 그가 새로 투자할 경우의 투자 비용에 비해 그가 얻는 잉여가치의 양이 아니다. 이 점은 자본주의의 실제 투자 과정이 몇 번의 생산 주기 동안 같은 고정 불변자본(기계류와 건물)을 사용하는 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상기하면 더 중요해진다. 투자가 두 번째나 세 번째나 네 번째 생산 순환 후에 이뤄진다면 그 비용이 줄어들 것이라고 해서 첫 번째 생산 순환 전의 투자 비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주장은 벤 파인과 로런스 해리스가 잘 개진했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는 개념과 자본의 가치 구성이라는 개념이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유기적 구성은 “옛 가치”로 환산해 생산수단에 대한 투자와 노동에 대한 투자를 비교하는 것이지만, 가치 구성은 “생산수단과 임금재를 현재 가치”로 환산해 비교하는 것이다. “유기적 구성의 변화는 기술적 구성의 변화에 정비례하지만, 가치 구성의 변화는 … 그렇지 않다.”
자본가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옛’ 구성, 즉 유기적 구성이다. 자본주의가 그저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구현된 가치들의 자체 확대[“자기 증식” — 옮긴이]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현재의 잉여가치를 그것을 발생시킨 이전 투자와 비교하는 것을 뜻한다. ‘가치의 자체 확대’라는 개념 자체가 이 비교 없이는 앞뒤가 안 맞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업이 채택하는 실제 회계 절차가 꼭 이윤을 최초의 자본과 비교해 이윤율[“수익성” — 옮긴이]을 계산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기업은 수익성 계산에서 자본의 현재 대체원가를 분모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 기업은 비교를 하기 전에, 최초 자본을 대체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필요 노동량을 줄인 기술 진보 효과로 빚어진 최초 자본 가치의 손실을 이윤에서 빼야 한다. 그 결과는 같다. 자본의 가치 저하는 이윤율 하락을 멈추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하락을 가속시킨다. 자본의 가치 감소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감소하려면 이윤 총량을 줄여야 하는데, 그러면 이와 함께 이윤율도 감소하게 된다.
어쨌든, 원래의 투자 비용에 근거한 계산을 해야 자본가들이 투자 결정을 할 때 걸려 있는 문제를 더 잘 포착한다는 주장이 있다. 즉, 자본가들이 투자하기 전에 확신을 갖고 싶은 점은 그들이 지금 하려는 투자와 비교해 — 앞으로 몇 년 후에 투자한다면 들 비용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 충분한 이윤율을 얻을 것이냐는 점이다. 이것이 자본가들의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비록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막상 그때 얻은 이윤율을 평가할 때가 되면, 편리함을 이유로(잇따라 행한 중요한 투자 비용을 합산하기가 어려워서) 서둘러 마련한 대충 손쉬운 절차에 따라, 즉 자본의 대체 비용에 따라 책정한 감가상각 공제액을 이윤과 비교할지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자본가가 생산에 착수할 자본을 은행에서 빌렸다면 그는 그 자본의 원래 가치를 상환해야 하는 것이지, 나중에 똑같은 생산수단이 저렴해지면 그것에 투자할 만큼의 액수를 상환하는 것이 아니다. 그 생산수단들의 가치가 빠르게 떨어진다면 그것은 자본가에게 문제를 가중시킨다. 자본가가 보유한 고정자본의 가치는 첫 번째 주기에서보다 두 번째 이후의 주기에서 더 빠르게 감소한다. 똑같은 양의 생산수단이 생산 과정에서 소모되고 마모되지만 생산수단의 가치는 줄어든다. 그래서 생산되는 상품의 가치 속으로 넘겨지는 불변자본의 가치도 적어진다. 자본가가 가진 생산물의 가치는 감소하며, 따라서 그는 은행 대출 상환이 더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생산성 증가에 따른 자본 가치의 감소는 잉여가치를 잠식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일이 현재 인쇄 산업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 일 년 뒤면 활자 식자기는 지금의 반값이 될지 모른다. 새 기술 때문에 싸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덕분에 인쇄 업체의 사업이 더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생존하려면 인쇄 업체는 18개월 뒤쯤엔 현재 가격의 절반으로 활자 식자기를 사게 될 다른 인쇄 업체들과 경쟁하기 전에, 기계에 들인 돈을 되찾아야 한다. 즉, 기술 변화가 빠를수록 기업은 전보다 더 빨리 투자 비용을 만회하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생산성이 증가하면 불변자본의 가치 감소율이 실제로 가속된다. 이것은 일반으로 자본가의 문제들을 완화시키기는커녕 악화시킨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이 착취율을 높일 수 없다면 그 감가상각을 충당하는 데 잉여가치를 점점 더 많이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새로운 물질적 생산수단 비용이 저렴해져도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 압력을 완화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없다. 유기적 구성이 결국 증가하는 이유에 대해 내가 앞에서 한 주장은 생산수단과 생산 재료의 단지 물리적 비축의 증가와 관계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주장은 무엇보다, 투자 출구를 찾는 잉여가치량의 지속적 증가와 관계가 있었다. 즉, 어느 시점에서든 개개의 자본가가 얻을 수 있고 생산수단에 투자할 수 있는 이 잉여가치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본가는 생산성을 향상시킬 새 기술을 경쟁자들보다 더 많이 도입할 수 있을 것이다. 개개의 자본가가 관심이 있는 것은 생산수단에 잉여가치를 더 많이 투입하는 것이지, 이용 가능한 물리적 생산수단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가는 오늘 1년 전에 치른 것과 같은 가격으로 생산성이 갑절인 기계를 구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경쟁자가 축적된 잉여가치를 더 많이 사용해 생산성이 네 곱절인 기계를 구입한다면 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개의 자본가는 새로운 생산수단에 자신의 잉여가치를 되도록 많이 쓸 때만 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 생산수단이 저렴해져도 결국 그는 경쟁에서 이기려고 생산수단을 더 많이 구매해야 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그래서 만약 투자에 사용할 수 있는 잉여가치가 전보다 더 많다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다른 조건이 같다면, 상승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물질적 생산수단과 생산 재료가 저렴해지더라도 차이는 전혀 없고, 오히려 그 생산수단과 생산 재료가 더 많이 사용되는 결과만 낳는다. 불변자본의 가치를 확대시키는 이런 압력이 없는 조건이 딱 하나 있다. 기술 변화로 옛 생산수단의 가치가 너무 빨리 떨어져 생산물의 가치가 초기 투자 비용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 경우 자본가는 손해를 보는 것이며, 잉여가치는 없고, 이윤율은 마이너스가 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하락하는 조건은 마이너스 축적, 마이너스 이윤율, 따라서 시스템의 완전한 고장일 것이다.
착취 증대와 이윤율
32 그래서 투자 1단위당 노동자 수가 적어져도 각 노동자는 잉여가치를 더 많이 생산한다.
마르크스는 “상쇄 경향”의 하나로, 자본이 그 유기적 구성 증가에도 불구하고 각 노동자에 대한 착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착취 증대는 노동시간 연장이나 물리적 노동강도 강화나 실질임금 삭감을 뜻할 수 있다. 그러나 착취 증대가 반드시 이 중 하나를 수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 1인당 생산수단을 증가시키는 기술 진보는 노동생산성 증대 효과를 낸다. 노동자는 한 시간이나 하루에 같은 노동으로 자신이 전에 생산하던 것보다 더 많이 생산하게 된다. 그래서 노동자가 자신의 소비와 상응하는 상품들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이 감소한다. 그리고 자본가가 잉여가치로서 취할 수 있는 하루 노동량이 증가한다.
예를 들어, 기술 진보로 어느 나라의 노동인구가 각종 재화를 10년 전의 갑절이나 생산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비록 10년 전과 생활수준이 같을지라도 그 나라 자본가들은 이윤을 증대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생활수준 유지에 필요한 재화를 이전 노동시간의 절반으로 생산할 수 있으므로 나머지 절반을 수출용 상품 생산 증대에 투입할 수 있고, 따라서 이윤을 더 많이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필요노동에 대한 잉여노동의 비율은 생산수단이 진보하면 증가할 수 있다. 실질임금이 감소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윤율 저하 경향은 … 노동 착취율 증가 경향과 결부돼 있다. … 잉여가치율 증가와 이윤율 저하는 둘 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생산력 증대가 표현되는 특유의 형식들일 뿐이다.
이것은 이윤율 저하 ‘법칙’ — 착취율 증가는 그저 상쇄 요인일 뿐이다 — 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각종 비판을 낳았다. 예를 들어 폴 스위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생산성 증가 과정의 필수적 부분을 하나의 상쇄 요인으로 별도로 취급하는 것은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더 좋은 방법은 생산성 증가가 잉여가치율 증가를 수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애초부터 인정하는 것이다. … 만일 자본의 유기적 구성과 잉여가치율이 모두 가변적이라고 가정한다면(나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윤율이 변하는 방향을 정확히 알 수 없게 된다.
마르크스 자신이 이런 주장을 다루고 있다. 그의 논점은, 아무리 착취율이 증가해도 각 노동자에게서 추출할 수 있는 총 잉여노동(따라서 잉여가치)이 하루 노동시간의 한계를 초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동자 3만 명을 고정으로 고용하는 기업을 예로 들어 보자. 그 기업이 하루에 물리적으로 가능한 최장 시간(가령 16시간) 노동자들을 일 시키고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도, 그 기업의 하루 이윤은 30,000×16시간의 노동에 구현된 가치를 초과할 수 없다. 이윤이 증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투자가 증가할 수 있는 정도에는 그러한 한계가 없다. 따라서 경쟁 때문에 투자 수준이 계속 오를 수밖에 없을지라도 이윤은 더는 증가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할 것이다. 투자에 대한 이윤의 비율 — 이윤율 — 은 저하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그의 시대 이후에 더 엄밀한 수학적 용어로 달리 표현됐으며, 그의 주장의 다른 부분들을 거부하는 비판자들도 이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개개 자본의 이윤율과 체제 전체의 이윤율
36 앤드류 글린과 37 존 해리슨 38 등도 같은 주장을 했고, 오키시오 39 와 히멀웨이트 40 는 같은 주장을 수학으로 정교화했다.
최근에 마르크스에 반대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개진됐다. 단지 기술 변화만으로는 이윤율 저하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이윤이 증가할 때만 새 기술을 도입하려 하는데, 새 기술을 도입한 한 자본가의 이윤이 증가한다면, 새 기술을 도입한 자본가 계급 전체의 평균 이윤도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언 스티드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쟁의 압박으로 한 산업씩 한 산업씩 … 경제 전체에서 가능한 최고 수준의 이윤율로 균일화하는 생산 방법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이들이 내린 결론인즉 이렇다. 자본가들의 이윤율이 이미 실질임금 상승의 압박을 받고 있을 때만 자본가들은 그 이윤율을 감소시킬 수 있는 자본 집약적 기술을 채택할 것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아니라 임금이 이윤율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저작은 이런 주장에 대해 간단한 답변을 내놓고 있다. 새 기술에 제일착으로 투자하는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들보다 경쟁 우위를 누려 초과 이윤을 얻을 수 있지만, 일단 새 기술이 보편화되면 이 초과분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41 그러나 일단 모든 자본가가 이 기술을 도입하게 되면 상품의 가치는 감소해, 마침내 새 기술로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평균적 노동량과 일치하게 된다. 초과분은 사라진다. 그리고 새 기술을 입수하고자 생산수단이 더 많이 사용된다면 이윤율은 떨어질 것이다.
자본가가 상품 판매 때 명목으로 받는 것은 그 상품에 포함된 사회적 필요 노동의 평균량에 달려 있다. 만약 그 자본가가 생산성이 더 높은 새 기술을 도입하고 다른 자본가들은 그렇지 않는다면, 그는 전과 같은 사회적 필요 노동량의 가치가 있는 재화를 생산하면서도 실제의 구체적인 노동력에는 비용을 덜 지출하는 것이다. 그의 이윤은 증가한다.예를 들어, 산업의 평균적 조건으로 생산하는 기업이 있다고 하자. 이 기업이 불변자본 50단위와 가변자본 50단위로 잉여가치 50단위를 생산한다고 하자. 이 기업은 한 차례 생산 기간에 생산물 150단위를 생산한다. 그러므로 이윤율은 총자본으로 나눈 잉여가치(50/100), 즉 50퍼센트다. 이것을 1단계라고 부르자. 곧,
1단계
불변자본 | 가변자본 | 잉여가치 | 생산물(단위) | 생산물 가격 | 이윤율(퍼센트) |
50 | 50 | 50 | 150 | 150 | 50 |
이제 이 기업이 해당 산업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하다고, 즉 그 기업의 생산량이 너무 적어서 그 기업의 생산비 변화가 산업 전체의 평균 생산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이 기업은 자본 집약적 기술을 도입해, 같은 불변자본으로 그러나 노동자 수 절반으로 같은 양의 상품을 생산할 수 있다. 산업 전반에서 비용은 동일하므로 이 기업이 자기 생산물에 매기는 가격은 투입 원가가 떨어졌다 해도 여전하다. 이 기업의 이윤율은 오를 것이다. 곧,
2단계
불변자본 | 가변자본 | 잉여가치 | 생산물(단위) | 생산물 가격 | 이윤율(퍼센트) |
50 | 25 | 75 | 150 | 150 | 100 |
이 단계에서 이 기업이 얻는 잉여가치에는 기업 내부에서 직접 생산한 잉여가치만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이 기업이 얻는 잉여가치에는 이 기업의 생산비가 평균보다 적어 경제 전체로부터 기업으로 옮겨와 쌓인 초과 잉여가치도 포함된다. 그래서 이 기업의 총잉여가치와 이윤율이 모두 증가한다. 새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수익성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새 기술이 옛 기술보다 더 수익성이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다른 기업들도 새 기술을 채택할 것이다. 이제 새 기술은 덜 중요한 것에서 중요한 것으로 바뀌게 될 것이고, 해당 산업 전반의 평균 생산비는 하락하기 시작할 것이다. 비용이 감소하면서 기업들은 시장 점유율을 늘리려고 가격을 인하하기 시작할 것이고, 그리하여 평균 가격은 새로운 사회적 평균 생산비에 도달할 때까지 하락할 것이다.
결국 새 기술이 산업 전반에서 보편화되는 시점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이 3단계다. 그 기업은 이제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3단계
불변자본 | 가변자본 | 잉여가치 | 생산물(단위) | 생산물 가격 | 이윤율(퍼센트) |
50 | 25 | 25 | 150 | 100 | 33 |
새 기술 덕분에 이제 해당 산업 전반의 이윤율이 감소했다. 이 과정에 포함된 역설인즉, 각 기업이 새 기술을 도입한 최초 효과는 그 덕분에 이윤율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점은 마지막으로 새 기술로 전환한 기업에 대해서도 사실이었다. 전환하기 전에 그 기업은 예전의 더 높은 생산비로 상품을 생산했겠지만, 그 상품에 대해 더 낮은 새 가격만을 받았을 것이다. 그 기업의 이윤율은 영으로까지 떨어지게 됐을 것이다. 새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그 기업의 이윤율은 해당 산업의 새 평균치인 33퍼센트로 증가할 것이다.
경제 위기와 자본 가치의 저하
지금까지 우리는 기술 진보에 따른 생산수단과 생산 재료의 저렴화로 총자본에 대한 이윤 비율 감소 압력이 상쇄될 수 없음을 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가 총자본(대개 ‘자본 일반’이라고도 한다)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단순하게 보지 않았다. 총자본은 서로 경쟁하는 개개의 자본들로 이뤄져 있다. 이 개개의 자본들은 체제의 간헐적인 경제 위기(부분적으로는 이윤율의 장기적 저하 때문에 일어난다)로 피해를 입는데, 그 피해로 일부 자본들은 폐업을 해야 돼 그들의 생산수단은 못쓰게 되거나 다른 자본들에게 매각된다.
여기에 자본주의가 이윤율 저하 ‘법칙’의 효과를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일부 숨어 있다.
경제 위기 속에서는 자본이 뭉텅이로 가치를 잃어버린다. 즉, 기계가 녹슬고, 상품이 팔리지 않거나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나 가까스로 팔리고, 평가액을 인하해야 하는 회수 불능 매출 채권이 급증한다. 만약 이 과정이 모든 자본에 고르게 퍼진다면, 그들이 도대체 어떻게 위기에서 벗어날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실제로는 몇몇 자본들이 폐업을 하므로 남은 자본들이 자본 가치 하락으로 손해를 보지 않아도 된다. 남은 자본들은 폐업한 자본들에게 경제 위기의 비용을 떠넘기는 데 성공할 뿐 아니라, 흔히 생산수단과 생산 재료를 저렴하게 인수함으로써, 즉 노동시간으로 환산한 그것의 현재 가치보다 더 싸게 사들임으로써 자기네 자본의 가치를 높이는 데도 성공한다.
살아남은 자본들은 다른 자본들이 한 과거 투자 덕에 득을 보지만, 자신의 이윤으로 그 투자의 원래 비용을 지불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생존한 자본들은 파산한 자본들이 한 과거 투자의 (기술 진보로 감소된) 현재 가치에 대해서만 걱정하면 된다. 일이 잘 풀리면 실제로 그들은 그 투자의 현재 가치 미만으로 그 투자를 장악할 수 있다. 옛 소유주들은 평가절하가 그들에게는 이윤을 못 얻는 감가상각 변화여서 그들이 한 투자의 가치가 기술 진보로 계속 떨어지는 것에서 아무 득도 볼 수 없었다. 반대로 새 소유주들은 득만 본다. 왜냐하면 옛 소유주들은 파산시의 감가상각비를 부담했지만, 새 소유주들은 추가 수익을 몽땅 거두기 때문이다.
43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법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생산수단의 저렴화를 일종의 매끄럽게 작동하는 메커니즘, 즉 그 덕분에 자본주의가 이윤율 저하에 직면하지 않고 확장할 수 있는 매끄럽게 작동하는 메커니즘으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 이 메커니즘은 경제 위기로 일부 자본들이 다른 자본들에게 손해를 입히면서 자신은 득을 볼 수 있는 한에서만 작용을 할 수 있다. ‘법칙’이 상쇄되려면 생산수단의 저렴화가 피해 입은 자본들이 통째로 사라져 없어져버리는 강제적 가치 하락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기존 자본의 간헐적인 가치 저하 — 이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내재하는 현상으로, 이윤율 저하를 억제하고 새 자본 형성으로 자본 가치의 축적을 앞당기는 수단의 하나다 ― 는 자본의 순환과 재생산의 과정이 일어나는 특정 조건들을 혼란시키며 따라서 생산 과정의 급작스러운 중단과 위기를 동반한다.
경제 위기를 유발하는 부분적인 원인은 이윤율 저하 경향이지만, 결국 위기는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한다. 마르크스는 말한다.
언제나 위기는 기존 모순들의 일시적이고 강제적인 해결책일 뿐이다. 깨진 균형을 잠시 회복시키는 격렬한 분출인 것이다.
더욱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높이는 압력이 위기 덕분에 감소되거나 중단될 수 있다.
위기 시기 동안의 가치 소실에는 총잉여가치의 일부 소실이 포함된다. 이로써 추가적 축적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설사 전체 자본가 계급이 사용할 수 있는 총잉여가치가 감소했을지라도 그 수가 줄어든 자본들이 총잉여가치를 나눠 갖기 때문이다. 비록 자본가 계급 전체가 얻은 잉여가치는 감소했을지라도 개개의 자본가로서는 투자 비용과 비교한 이윤량 기대치가 증가 — 그의 이윤율이 증가 — 한다.
경제 위기는 결정적인 효과를 하나 낸다. 위기는 체제 전체의 총잉여가치량을 감소시킨다. 그럼으로써 위기는 투자 가능 자금 총액을 감소시킨다. 각 자본가는 경쟁자들이 신규 투자 확대용 자금을 찾기가 전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본가가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는 압력은 전보다 줄어든다.
자본 집약적 투자 형태의 압력이 감소할 것이다. 그래서 경제 위기의 부산물 하나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가세 둔화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착취율이 그다지 대단하게 오르지 않아도 이윤율 저하 경향이 상쇄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큰 위기의 직접적 여파로 실업률이 매우 높아지면 흔히 노동자들은 그러한 착취율 증가를 받아들일 것이다.
경제 위기를 통한 구조조정과 체제의 노화 현상
일단 간헐적 위기를 고려하면, 마르크스의 모형이 암시하는 것만큼 빠르게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증가하지 않는 이유를 적어도 일부분 설명할 수 있다. 경제 위기가 매우 심각하면 생산이 한 차례씩 순환될수록 유기적 구성의 장기적 상승 경향이나 이윤율의 장기적 저하 경향이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주장이 실제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위기가 점점 더 심각해질 이유가 뭔가? 도대체 체제가 더는 생산력을 확장시킬 수 없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이유가 뭔가? 그런 논법의 논리적 결론은 경제 위기를 그저 체제가 스스로 구조조정을 하는 방식 — 고통스럽지만 효과적인 방식 — 으로만, 즉 체제의 끝없는 운동 속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비교적 작은 문제로만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10년의[이 글은 1984년에 출판됐다 — M21] 경제 혼란은 그저 구조조정 과정, 즉 새로운 성장기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과정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가 보여 준 자본주의 동역학의 다른 핵심적 특징이 경제 위기를 통한 구조조정에 미치는 급작스럽고 강력한 효과를 간과하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가 서술하는 자본주의는 그저 해마다, 십년마다 똑같은 운동을 하면서, 고정불변의 경제 법칙에 따라 본질적으로 변함없는 형태로 계속 자체 재생산을 하는 체제가 아니다.
물론 자본이 좌우하는 사회라면 어느 사회든 그 사회의 운동을 지배하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듯한 외견상 추상적인 법칙들이 있다고 마르크스는 인정한다. 그런 법칙들은 다음과 같다. 생산자들을 미리 계획되지 않은 그들 생산물들의 상호 작용에 종속시키는 상품 생산 특유의 특성들. 일단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고 노동력 자체가 상품이 되면 그에 뒤따르는 억제할 수 없고 결연한 가치의 자체 확대 에너지. 그 결과 한편으로 이윤율 저하 경향과 다른 한편으로 경제 위기가 되풀이되는 경향. 위기를 통해 자본이 추가적인 자체 확대를 위한 조건들을 복원할 수 있게 되는 것 등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추상적인 순환 운동이라는 최소한의 윤곽만으로도 다른 어떤 것을 은연중에 풍긴다. 즉, 추상적인 자본주의 생산 법칙들이 서로 다른 자본 단위들의 상호 관계, 그리고 그러한 자본 단위들과 노동계급의 관계를 변화시킴에 따라 체제가 부단한 자체 변모를 겪는다는 점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가 자체가 이러한 변화의 한 측면이다. 다른 측면은 자본의 집적(생산 단위가 점점 커지는 것)과 집중(생산 단위의 수가 적어지는 것)이 증대하는 경향이다. 경제 위기는 이윤율 저하 경향과 연관된 문제들을 극복함과 동시에, 자본의 집적과 집중 수준을 높인다.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자본의 집적과 집중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물밀 듯 일어난 파산, 인수, 합병, 국유화 등으로 주요 기업의 수가 감소했고, 이들이 지배하는 자본의 비율이 증가했다. 그래서 예를 들어 1910년 영국의 1백 대 기업은 총생산량의 16퍼센트를 생산했고, 1970년에는 50퍼센트를 생산했다. 1950년 미국의 2백 대 기업은 자산의 49퍼센트를 지배했고, 1967년에는 58.8퍼센트를 지배했다. 물론 이러한 경제들에서도 새 사업체들이 설립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라지는 사업체들도 있거니와, 흔히 더 많다.
세계적으로도 같은 추세가 작용했다. 제1차세계대전 전에도 독일과 미국 같은 신흥국 자본주의들이 그때까지 군림하던 영국 자본주의에 필적할 만한 경쟁자로 부각될 수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인 지금은 더 이상의 신흥 자본주의들이 비슷한 세계적 위상을 확보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새로 산업이 성장하는 지역들은 대개 기존의 세계적 선두주자들의 지류였다. 예를 들어 홍콩은 영국의, 대만은 미국의 발전의 한 갈래였다. 이 추세의 예외는 한 나라 내부의 경쟁 자본들이 국가 자본으로 거의 완전히 대체된 경우였다. 소련과 동유럽, 많은 제3세계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경우에조차 지난 20년간의[이 글은 1984년에 출판됐다 — M21] 패턴은 서방 대기업들의 사업에 점점 더 통합 — 그리고 종속 — 되는 것이었다.
집적과 집중은 자본주의 운동의 기본 법칙이 드러나는 형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자본의 단위가 커지고 그것들 중 소수가 더욱더 체제를 지배할수록 경기순환적 위기가 새로운 확장기를 열기는 더 어려워진다. 비교적 소기업들이 많이 있었던 시대에는 일부가 파산해도 다른 것들이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수의 대기업들이 좌지우지하며 군림하면 그들 중 어느 하나가 파산해도 다른 것들의 사업에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국가 중 어느 하나가 부도나면, 그에 의존하는 다른 기업·국가들의 부도가 차례로 일어날 위험이 있다. 그래서 1981년·82년·83년에 폴란드·멕시코·브라질 같은 나라들의 외채가 세계의 금융 시스템을 결딴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랬다면 결국 다른 나라들의 산업 자본들에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경제 위기를 기회로 삼아 비효율적인 기업들을 희생시켜 효율적인 기업들의 확장을 꾀할 수 있기는커녕 효율적인 기업과 비효율적인 기업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개개의 대기업은 긴밀히 상호 작용한다. 예를 들어, 부품이나 원료 공급으로, 자금 조달로, 생산물의 판로로 교류함으로써 서로 영향을 미친다. 철강 대기업의 장래는 조선 대기업의 장래와, 또 자동차 대기업의 장래와 분리될 수 없다. 석유 기업, 화학 기업, 플라스틱 기업, 인조섬유 제조업체들은 갈수록 더 단일 이익집단을 형성한다. 국민경제 전체의 안정성이 계속해서 소수 은행들의 번영에 달려 있고, 이 은행들은 결국 자신들이 거액을 대출해 준 특정 대기업들이나 국가들에 의존하게 된다. 이들 대기업·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려 애쓰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국가 권력을 이용해 다른 나라 자본들한테 위기의 결과를 전가하려 애쓰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체제의 경기순환적인 운동이 자동적인 작용을 하지 않아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과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지 못한다. 경제 위기가 닥치면 그로 말미암아 부실 기업의 자본뿐 아니라 생존 기업들의 자본도 가치가 감소해 이윤율이 신속히 회복되기는커녕 한층 더 하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만일의 사태가 돌발할까 봐 두려워 각국의 대기업들은 기껏해야 위기가 막연히 연기되기를 바라며 서로 결집해 금융적 그러나 이런 노력의 효과는 경제 위기가 장기적인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하는 주된 요인 구실을 하는 것을 막는 것일 뿐이다.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더 많이 일어날수록 체제가 마르크스 법칙의 결과들을 피할 수 있기를 기대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체제가 덜 성숙했지만 활력 있던 시기에는 위기로 형성되는 상쇄 경향들이 오랫동안 법칙 자체만큼 강력하게 작용할 수도 있지만, 체제가 기운이 별로 없고 쇠약해지면 정반대가 될 것이다. 이윤율 저하는 체제를 고질적인 지지부진함의 진창 속으로 끌어내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장기간의 위기가 순환하는 사이사이에 단기간의 미온적인 확장이 갑자기 나타나기를 되풀이하는 형국이 될 것이다.
제국주의와 전쟁
지금까지 우리가 마르크스의 법칙과 상쇄 요인을 설명하는 데 이용한 자본주의의 모습은 추상적인 것이었다. 그 묘사 속에는 자본가와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자본가는 경쟁의 압력으로 자신의 잉여가치를 모두 축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사이의 경쟁 형태는 시장에서 경쟁자의 판매가보다 저가로 파는 것이다. 국가라는 요소와 다른 나라 자본가들에 대한 무력 사용이라는 요소는 이 시스템 모형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식솔 등 그들에 의존하는 사회 집단의 소비를 위한 재화에, 자본주의 이전의 지배계급들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식민지의 노예화를 위해, 그리고 서로에 대한 전쟁을 위해서 말이다.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은 단순히 가격 경쟁이 아니었다. 언제나 경쟁에는 적어도 광고, 뇌물, 그리고 시장 개방을 강요하기 위한 무력 사용 등에 지출되는 얼마간의 비용도 포함됐다.
자본주의의 실제 역사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이전의 환경 속에서 성장했는데, 거기에는 자본가와 노동자뿐 아니라 자본주의 이전의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인 영주와 농노도 있었다. 노화하는 자본주의에서조차 다른 사회 계급들이 계속해서 양대 계급 사이에 존재한다. 언제나 자본가들은 축적 외의 것들을 위해 잉여가치의 일부를 사용했다. 그들 자신과 부양가족게다가 국가는 미숙한 신생 자본주의의 세계 시장 진출을 돕는 데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했고, 자본주의가 성숙해졌을 때는 그것이 전前자본주의적 경쟁자들을 패퇴시킬 수 있도록 하는 데서 결정적인 구실을 했으며, 자본주의가 노망난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의 모든 활동들과 불가분하게 연계돼 있다.
시스템의 주요 구성 요소들에 대한 추상적인 개요로부터 그 요소들이 작동하는 구체적인 상황으로 나아가는 것은 마르크스의 법칙이 작용하는 방식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마르크스는 그 같은 효과 하나를 그의 ‘상쇄 요인’ 목록에 포함시켰다. 마르크스는 각각의 자본주의 경제가 세계 경제 내에서 작동하며 ‘대외 무역’이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을 지적했다. 첫째, 더 저렴한 원료를 입수함으로써 생산비를 낮추고, 둘째, 임금이 더 낮고 이윤율이 더 높은 지역에 투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출판되고 50년이 지나 레닌은 영국의 자유주의 경제학자 홉슨을 따라 다른 중요한 효과를 언급했다. 국내에서 수익성 있는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자본이 식민지와 반半식민지로 수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레닌 자신은 이것이 마르크스의 법칙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명쾌하게 분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1880년에서 1913년까지 영국 국민생산의 15퍼센트 가량이 해외에 투자됐다.
투자처를 찾는 자금을 위해 이런 해외 출구가 없었다면, 영국의 각 기업은 경쟁자들이 그 자금을 이용해 국내에서 생산수단을 엄청나게 확대해서 경쟁력을 갖추게 될 거라는 두려움 속에서 지냈을 것이다. 이런 두려움으로 각 기업은 자주 바로 그러한 확장을 해야 했다. 국내에서 투자 자금을 구할 기회가 많았다면 그 결과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증가했을 것이며, 그 결과 이윤율이 상당히 떨어졌을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기에 영국 자본가들이 지배하던 잉여가치의 상당 부분이 영국 밖의 세계 경제 부분으로 배출됐고, 그 결과 국내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올라가지 않았다. 그러나 잉여가치의 해외 배출은 본질적으로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는 일시적 메커니즘밖에 될 수 없었다. 이 메커니즘은 자본주의 경제의 ‘외부’에 있는, 잉여를 얻을 수 있는 어딘가를 상정했다. 이 ‘외부’가 존재했던 때는 자본주의가 아직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경계와 북미 지역의 일부에 제한돼 있었고, 나머지 세계 중 자본주의 세계 시장에 통합된 부분에서조차 자본주의 이전의 착취 형태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일단 제국주의가 확립되고 자본주의 착취 형태들이 거의 모든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되자 ‘외부’는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됐다.
다국적기업의 세계에서는, 한 지역에서 잉여가치가 흘러나가면 그 지역에서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 압력을 감소시키지만, 다른 곳에서는 상승 압력을 증가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다. 세계 평균 이윤율은 하락한다. 마르크스 시대에 국민경제가 그랬던 것처럼, 세계 체제가 지지부진한 상태에 빠진다.
우리는 장년기에 접어든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제국주의 열강인 영국에서 1880년대와 1890년대와 1900년대 초에 유기적 구성이 하락했다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제국의 효과가 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국 찾기에는 또 다른 요인이 작용했다. 그 요인은 제국 덕분에 이윤율 저하가 상쇄될 수 있는 정도가 덜해지자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는 점에서 결정적이 됐다. 자본주의가 갈수록 더 국제적인 체제가 됐다는 점이다. 자본가들이 해외로 수출하고 있다는 점에서뿐 아니라 이제 자본가들이 국경을 가로지르는 규모로 생산을 조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자본주의는 국제적 체제가 됐다. 제1차세계대전 직전쯤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의 최대 기업들은 원료는 이 지역에, 생산 시설은 저 지역에, 그리고 시장은 또 다른 지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오늘날 이 추세는 휠씬 더 뚜렷하다. 7대 석유 기업들[‘7공주’라고 불렸다. 지금은 상호 인수·합병으로 4대 기업으로 줄었다. 그러나 이제는 OECD 외부에 중국·브라질·베네수엘라·러시아 등지의 7대 국영기업들이 이들을 능가한다. — 옮긴이]이 세계 석유 생산량의 절반을 지배한다. 그리고 자동차 대기업들은 모두 수십개국에서 제조된 부품들로 이뤄진 자기 나름의 ‘월드카’를 갖고 세계 시장에서 경주하고 있다. 또, 컴퓨터와 우주항공 산업의 기업들은 정말로 업계에서 탈락하지 않으려면 국제적으로 활동해야 한다.
그러나 대기업들의 필요를 사회의 나머지 부분이 충족시키게 할 권력이 있는 메커니즘은 여전히 국민국가들밖에 없다. 아무리 기업의 국제적인 활동 범위가 광범하더라도 각 기업은 어떠한 위협으로부터든(다른 기업으로부터든 아니면 피착취 계급들로부터든) 자신의 사업을 보호받으려고 국민국가에 의존한다. 사실, 그동안 생산의 국제화 과정은 점점 수가 줄어드는 대기업들의 각 국민경제 독점화 과정(앞에서 언급했다)과 함께 점진적으로 일어났는데, 이들 대기업은 갈수록 더 밀접하게 국가와 엮인다.
52 그들 주장의 요체인즉, 그 모순은 전쟁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현대 세계에서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들” 사이의 ‘경제적’ 경쟁은 군사적 경쟁으로 더욱더 보완되고 심지어 대체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열강들은 각각 경쟁국들에게 손해를 입혀가며 매우 중요한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고 강화하고자 무력에 호소함과 동시에, 계속해서 세계를 분할 또 재분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전쟁은 가격 할인이나 호황과 불황처럼 정상적인 자본주의 메커니즘이 된다는 것이다.
국민국가에 대한 의존 증대와 국제화 증대라는 동시에 일어나지만 외견상 서로 모순된 듯한 이 두 과정을 60여 년 전에 관찰한 레닌과 부하린은 제국주의에 관한 고전적 저작들을 썼다.53 막대한 양의 자본이 물리적으로 파괴되고(공장이 폭파되고, 곡식이 수확되지 못하는 등), 훨씬 더 막대한 양의 자본이 그 가치를 잃는다(무역 패턴이 교란되고, 상품이 팔리지 않고 신용이 취소됨으로써). 그러나 보통 이것의 비용은 승자가 패자에게 전가함으로써 불균등하게 부담된다. 경제 위기처럼 전쟁으로도 생산수단에 대한 신규 투자로 이용할 수 있는 잉여가치량이 줄어들 수 있다. 남은 자본들의 이윤율 감소를 꼭 동반하지 않고도 말이다.
그러나 전쟁은 체제의 기본 추세, 즉 마르크스의 ‘법칙’에 엄청나게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다.54 기존에 축적된 잉여가치의 5분의 1과 15년간 추가로 생산된 잉여가치가 소실됐다.
가치들이 어마어마하게 사라져 없어져 버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셰인 메이지[1950년대 초쯤 미국 노동자당 좌파의 한 리더 — 옮긴이]는 1930년대의 대불황과 제2차세계대전이 결합돼 미국 경제에 미친 효과를 추산했다. “1930년과 1945년 사이에 미국 주식 자본의 총 액면가격은 1천4백50억 달러에서 1천2백억 달러로 떨어져, 약 20퍼센트의 순 투자 회수가 있었다.”20세기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불황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 경향을 상쇄하는 매우 값비싸고 고통스러운 방법이 된 시점에서 제국주의적 확장과 전쟁이 그것을 상당 부분 대신하게 됐음을 뜻하는 듯하다.
그러나 전쟁에도 그 나름의 문제가 있다.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파괴력도 증가한다. 무기는 이제 하도 발달해서, 일부 자본을 파괴해 다른 자본에게 득이 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군사적 충돌과 관련된 당사자들의 자본을 모두 파괴할 위험이 있다. 불황을 통한 세계 체제의 구조조정이 매우 어렵고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 됐듯이(아무리 필요한 과정이라 하더라도) 전쟁을 통한 ‘구조조정’과 ‘합리화’도 마찬가지다. 노화하고 있는 자본주의가 금방이라도 불황에 빠질 듯한 상태에 번번이 놓이면서도 체제에 득이 되는 것을 불황으로부터 얻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꼭 마찬가지로 노화한 자본주의는 금방이라도 전쟁으로 치달을 듯한 상황에 번번이 놓이면서도 전쟁으로부터 미심쩍은 이득조차 얻기를 역시 기대할 수 없다.
비생산적 소비와 이윤율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마르크스는 그가 ‘이윤율 저하’를 근거로 세운 일반 이론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무언가를 가리키는 짤막한 말을 지나가는 말로 하고 있다.
55 (강조는 하먼의 것)
고도로 발달한 자본 운동에는 경제 위기 말고도 이 운동을 지연시키는 계기들이 있다. 예를 들어, 기존 자본 일부의 거듭되는 가치 하락이 그런 계기다. 가령 자본의 큰 부분이 직접적 생산의 동인 구실을 하지 않는 고정자본으로 변모하는 것, 자본의 큰 부분이 비생산적으로 낭비되는 것 등이 그런 경우다.(생산적으로 사용되는 자본은 생산적 자본의 사용이 대응 가치countervalue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대체된다.) 자본의 비생산적 소비는 … 한편으로는 자본을 대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을 소멸시킨다.
마르크스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렇다. 어떤 이유로 자본가들이 투자에 사용할 수 있는 잉여가치의 일부를 다른 용도로 전용한다면, 압력이 감소하고, 비용을 절감할 기술 혁신을 추구하는 자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새 자본이 적어지고, 자본 집약적 투자로 나아가는 추세가 감소할 것이다.
56 보아 하건대 키드런은 마르크스가 그 주장을 간결하게 설명했다는 사실[위의 인용문을 가리킴 — 옮긴이]을 몰랐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은 1973년에야 비로소 영어로 출판됐다.) 키드런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같은 논점을 1960년대에 마이클 키드런은 훨씬 더 명백하게 지적했다.[이윤율 저하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두 가지 가정 ― 둘 다 현실적인 가정이다 ― 에 의존한다. [첫째, ― 옮긴이] 모든 생산물은 노동자들이나 자본가들의 생산적 소비를 통해 생산적 투입물로서 체제로 다시 흘러 들어온다. 그래서 이상적으로 말하면 체제에는 아무런 누출도 없고, 지금이라면 투자라고 불릴 것과 노동계급의 소비 사이에 총생산물을 배분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둘째, 이와 같은 폐쇄된 체제에서 그 배분은 점차 투자 쪽으로 선회할 것이다.
첫째 가정, 즉 생산물은 전부 체제로 다시 흘러 들어간다는 가정을 포기한다면, 즉 생산물의 일부가 생산 주기에서 이탈해서 사라진다면, 투자가 고용 노동자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면 이윤율 저하 법칙이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생산-투자-생산의 폐쇄된 순환으로부터 잉여가치의 ‘누출’이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할 것이기 때문이다. 키드런은 나중의 저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르크스의 모형은 생산물이 전부 투자재나 임금재 형태의 투입물로서 다시 흘러 들어오는 폐쇄된 체제를 상정한다. 거기엔 누출이 전혀 없다. 그러나 원리상 누출은 성장 충동을 그것의 가장 중요한 결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 그러한 경우에 평균 이윤율은 저하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점점 심각해지는 불황과 같은 것들을 예상할 이유도 없다.
이 주장에는 흠 잡을 데가 없다. 더 나아가 키드런은 그러한 누출이 취해 온 형태를 말한다.
실제로는 자본주의가 폐쇄된 체제를 이룬 적이 결코 없다. 전쟁과 불황으로 막대하게 축적된 가치를 포함해 어마어마한 양의 생산물이 파괴됐고, 생산물이 더 많이 생산되지 못했다. 자본 수출로 오랫동안 다른 축적물들이 전용됐고 동결됐다. 제2차세계대전 이래 무기 생산으로 많이 누출됐다. 이 누출은 전반적인 유기적 구성의 상승과 이윤율 저하를 번번이 둔화시키는 구실을 했다.
키드런은 잉여가치가 생산수단 확대에 사용되지 않도록 하는 자본가들의 잉여가치 사용 방법이 한 가지가 언제나 있었다면서, 바로 자본가들 자신의 소비를 위해 사치재에 잉여가치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20세기에 엄청나게 확대된 국가의 군비 지출도 같은 식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일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예를 들어, 에르네스트 만델은 이 주장을 “‘유행하는’(즉, 부르주아적) 경제학의 영향을 명백히 받은” 것으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참으로 놀라운 혼동”에 근거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모욕의 말을 무시하고 살펴보면, 키드런에 대한 진정한 반론 시도가 만델의 글 안에 실제로 있다. 만델은 생산되는 상품은 전부 위상이 같다(그것들이 판매돼 거기에 구현된 잉여가치가 실현된다면)고 말한다. 키드런의 오류는 다음에 있다는 것이다.
키드런은 생산 과정과 재생산 과정을 명백히 혼동하고 있다. 다양한 생산 분야에 투자된 자본의 가치가 확대되고 자본이 보유하고 있는 상품들이 그 생산 가격으로 판매됐을 때, 이 자본으로부터 나온 잉여가치는 판매된 상품들이 재생산 과정 속에 들어가는지 여부와 관계 없이 이미 실현된 것이다.
덧붙인 각주에서 만델은 키드런의 설명을 옹호한 내 글을 비판한다.
하먼은 제III부문으로 자본이 유출되는 덕분에, 만일 제I부문과 제II부문에 투자됐다면 유기적 구성을 증가시켰을 자본이 이 부문들에 투자되지 않고 물러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하먼은 이 자본이 제III부문에 투자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거기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증가시킨다는 점을 잊고 있다. 결국 자본이 제I부문이나 제II부문으로 가지 않고 제III부문으로 빠지게 되면 어떻게 이윤율 저하가 일어나지 않는가 하는 점은 [하먼의 설명에서도 ― 옮긴이] 여전히 수수께끼인 것이다.
아마도 만델이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을(키드런이나 내 글은 제쳐두더라도) 좀더 면밀히 읽었다면 그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발견했을 텐데 아쉽다.
만델이 (20세기의 많은 마르크스 연구자들을 따라) “제III부문”이라고 말한 것은 자본가들과 그들의 측근들이 소비할 상품들을 생산하는 경제 부문이다. 이 상품들은 생산수단으로도 사용되지 않고, 노동자들의 노동력과 (화폐를 통해) 교환되는 데도 사용되지 않는 상품들이다.
그러한 상품들은 정의상 ‘생산적 소비’의 대상이 아니다. 생산수단에 속하는 상품은 생산 과정에서 소비될 때 자신의 가치를 새 상품으로 넘겨준다. 자본가들이 이렇게 저렇게 소비한 상품은 다른 어느 것에도 자신의 가치를 넘겨주지 않고 수명을 다한다. 이런 상품에 들어 있는 가치는 과거의 노동을 통해 생긴 것이다. 이 점에는 만델도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상품에 들어 있는 가치는 추가적인 자본 축적에 기여하지 않고 곧 사라진다. 바로 이 점에서 만델이 틀렸는데, 그런 상품에 들어 있는 가치는 ‘임금재’와 생산수단에 들어 있는 가치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반문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좋아, 하지만 다른 점에서는 만델이 맞을 수 있잖아?’ 키드런은 무기 생산이 평균보다 더 높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과 함께 이뤄진다고 시사한다. 자본의 미래 유기적 구성을 낮추는 데 이 점이 어떤 효과를 낼지와 관계 없이 이 점 때문에 즉시 경제 전반의 이윤율이 저하하지 않을까?
키드런 자신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에 주로 활동했던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폴란드 경제학자 라디슬라우 폰 보르트키예비치가 창안한 전문적 공식에 기대어 노동 가치로부터 가격을 계산하려 했다(이른바 ‘전형 문제의 해결책’). 이것은 이윤율이 자본가 계급 자체의 소비를 위한 사치재 생산 경제 분야의 유기적 구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음을 증명했다.
64 그의 방정식은 마르크스의 접근법과 완전히 상충하는 가정에 의존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65 폰 보르트키예비치의 방법에 문제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66 그러나 최근에 안와르 셰이크와 미겔 앙헬 가르시아가 각각 마르크스 자신의 방법을 체계적으로 응용해 노동 가치로부터 가격을 도출해 냈다. 67 그들의 작업을 훑어보기만 해도 그들이 어떻게 폰 보르트키예비치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는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키드런은 이렇게 폰 보르트키예비치에 기댔다고 비난받았는데, 폰 보르트키예비치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고마르크스에 따르면, 한 경제 분야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다른 분야보다 더 높으면, 다른 조건이 같으면 그 분야의 이윤율은 더 낮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기업들은 이 분야에서 생산을 중단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상품 공급이 줄어들 것이고, 그리 되면 가격이 오를 것이고, 그 결과 이윤율은 경제의 평균 수준으로까지 오를 것이다. 요컨대 그 분야의 가격 상승과 그 분야가 나머지 경제 분야들에서 구입하는 상품 가격의 상대적 하락 덕분에 잉여가치가 다른 생산 분야들로부터 충분히 옮겨와, 그 분야의 이윤율이 평균 수준으로 오를 것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가격은 노동 가치로부터 벗어난다. 이 점이 상이한 생산 부문들, 즉 생산수단 자체를 생산하는 산업인 제I부문, 노동자들이 소비할 상품을 생산하는 제II부문, 그리고 다른 모든 것, 특히 비생산적인 부자들을 위한 사치재와 무기를 생산하는 제III부문에서 각각 어떻게 나타나는지 이제 살펴보자.
Ⅰ부문
제제I부문, 즉 생산수단 생산 부문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상승하면 노동자 1인당 투자가 증가한다는 뜻이다. 투자가 잉여가치의 원천보다 빠르게 증가하는 것이므로 이 경제 부문 이윤율의 하락을 부채질한다.
한 부문의 이윤율이 떨어지면 경제 전반의 평균 이윤율도 떨어진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이것의 영향을 즉각 받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제I부문의 기업들은 자기들의 이윤율이 평균보다 낮지만 다른 부문 기업들의 이윤율은 더 높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제II부문과 제III부문에 투자하는 것이 더 이윤율이 높다.
자본은 제I부문에서 흘러나가기 시작하고, 그래서 그 부문의 생산량이 감소한다. 제I부문에서 생산된 상품들에 대한 수요가 이제 공급을 초과하므로 그것들의 가격이 상승하게 되고, 그 결과 여전히 제I부문에 남아 있는 기업들의 이윤이 증가한다. 이에 상응해, 다른 부문들에 투자된 자본의 증가로 생산량이 증가하고, 경쟁이 치열해지고, 가격이 인하되고, 그 결과 이윤이 감소한다.
이 과정의 결과는 모든 부문들의 이윤이 결국, 이제 전보다 낮은 새로운 평균 이윤율 수준에서 안정된다는 것이다. 제I부문의 가격 상승은 나머지 경제 부문의 가격 저하로 상쇄될 것이다. 생산되고 있는 가치의 양이 여전히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두 번째 단계가 뒤따른다.
다음 생산 주기 때 제I부문의 가격 상승의 결과로 생산수단의 비용이 올라간다. 이 때문에 전체 생산비가 올라간다.
그러나 그러한 가격 상승은 제II부문과 제III부문의 가격 하락으로 상쇄됐다. 제II부문의 상품들(식품, 의류, 난방, 주거 등 노동자들의 부양에 필요한 것 일체)의 가격은 하락했다. 그래서 약간 더 낮은 임금으로도 노동자들이 같은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어서, 기업은 실질임금 수준을 감소시킴으로써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고, 생산비도 감소시킬 수 있다.
이러한 인건비 하락으로 생산수단 비용 상승이 부분적으로 메워지는 것이지만, 이것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그렇다. 제III부문, 즉 사치재와 무기류의 가격 하락은 생산 과정으로 피드백되지 않으며, 따라서 효과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반적인 결과는 생산비가 조금 증가하고 이윤율은 하락하는 것이다.
Ⅱ부문
제제II부문, 즉 노동자들의 소비를 위한 상품들을 생산하는 부문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상승하면 제I부문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과 비슷한 효과가 난다. 제II부문의 이윤율이 하락하고, 그래서 자본이 흘러나가기 시작하고, 그래서 생산량과 가격이 하락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경제 전반의 평균 이윤율 수준이 더 낮은 새로운 수준에 도달한다.
2단계에서 상승한 것은 인건비인데, 이제 생산수단 비용 감소가 이것을 부분적으로 메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부분적으로만 메우는 것이다. 역시 제III부문의 사치재와 무기류 가격 하락이 생산 과정 속으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균 이윤율은 하락하고, 그런 다음 좀더 하락한다.
Ⅲ부문
제제III부문은 생산수단 자체도, 생산 과정에 참가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소비재도 아닌 상품들을 생산하는 경제 부문이다. 비생산적인 부자들을 위한 사치재와 무기류가 바로 이 부문에 포함된다.
첫 단계에서는 이 부문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이 제I부문과 제II부문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과 똑같은 효과를 낸다. 이윤율이 저하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자본이 떠나기 시작하고, 그래서 생산량이 떨어지고 사치재와 무기류의 가격이 상승한다. 이어서 나머지 생산량과 가격이 달라져 그 결과 경제 전반의 평균 이윤율이 더 낮은 새로운 수준에 도달한다.
그러나 2단계에서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 물론 사치재와 무기류의 가격은 이제 더 높지만, 이 가운데 아무것도 다음 생산 주기에 생산 과정 속으로 피드백되지 않는다. 그래서 생산비가 더는 오르지 않아 더한층의 이윤율 저하 압박을 받지 않는다.
사실, 제I부문의 생산수단 가격과 제II부문의 소비재 가격이 모두 하락했으므로, 전체 생산비는 감소할 것이다. 그 결과, 다음 생산 주기의 이윤율은 상승할 것이다. 그래서 제I부문이나 제II부문의 유기적 구성 상승이 이윤율을 하락시키고 또다시 하락시키는 데 반해, 제III부문의 유기적 구성 상승은 이윤율을 하락시키고 … 그런 다음 다시 상승시킨다.
그래서 ‘비생산적인 소비’를 위한 상품 생산에 대한 투자에는 독특한 특징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이 부문에 대한 어떠한 투자도 잉여가치를 사라져 없어지게 함으로써 체제 전반에 걸쳐 유기적 구성 상승 압력을 감소시킨다. 둘째, 비생산적 투자는 또한 그 같은 유기적 구성 상승 일체가 이윤율에 미치는 효과를 감소시킨다.
이들 두 가지 효과는 자본주의 체제의 동역학과 관련해 엄청난 함의를 지닌다. 체제의 동역학이 이윤율에 의해 규정되는 정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경쟁의 새로운 양상
노화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비생산적 지출,자본주의 생산과 축적과 부가 발달하면서 자본가는 그저 자본의 화신이 더는 아니게 된다. 자본주의 생산의 발달은 각종 즐거움의 세계를 창조할 뿐 아니라, 투기와 신용제도에서 개인 축재의 원천을 1천 개쯤 드러낸다. [자본주의가 ― 옮긴이] 어떤 발전 단계에 이르면 관례적인 수준의 낭비는 부의 과시이자 따라서 신용의 원천인 동시에 … 사업상 필요한 일이 된다. 사치는 [자본가들의] 표현 비용의 필수적 부분이 된다.
이렇게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지나가는 말로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를 비친다. 곧, 자본주의는 처음에는 비생산적 계급들의 방대한 상부구조를 지닌 이전 사회들의 파괴를 통해 번영했지만, 이제 노화되면서 부진해지고, 그 때문에 그 자신의 비생산적인 상부구조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상업 자본과 상업 이윤을 논의하면서 마르크스는 체제가 확장함에 따라 산업 자본은 자기 생산물의 비생산적 매매에 자금을 대려고 잉여가치를 점점 더 많이 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산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산업 자본의 재순환에 끊임없이 필요한 상업 활동[요즘 말로 물류 운영 ― 옮긴이]도 … 증대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 생산 규모가 선진화하면 할수록 산업 자본의 상업 활동도 … 그만큼 더 증대한다.
자본주의 경쟁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더는 단순히 경쟁자보다 더 빠르게 축적하는 문제가 아니다(설사 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자본주의 경쟁에는 시세를 인위적으로 바꾸기, 상품 광고, ‘제품 이미지’ 창출, 기업 바이어와 국가 기관의 담당자 매수 등등의 수단에 잉여가치를 소비하는 것이 점점 더 많이 수반된다. ‘비생산적’ 소비는 개개의 자본에 점점 더 중요해진다. 비생산적 소비는 경쟁에 실로 새로운 차원을 추가하는 데 치르는 대가인 것이다.
이 비용은 비록 노동자 고용이 거의 언제나 수반될지라도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므로 ‘비생산적’이다. 그 비용 덕분에 단지 고용주들은 그 비용을 치르지 않았다면 다른 자본으로 갔을 잉여가치를 지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그 비용을 가변자본도 불변자본도 아닌 다른 어떤 것, 즉 ‘생산 경비’라고 부른 이유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또한 개개의 자본가가 어떤 상황에서는 그 비용을 ‘생산적’인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고 암시한다. 자본가가 이미 창출된 총잉여가치 가운데 적절한 몫을 얻으려면 이 지출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산업 자본에게 유통 비용은 비생산적 비용으로 나타나며 실제로도 그렇다. 상인에게는 그 비용이 이윤의 원천으로 나타나며, 이 이윤은 일반 이윤율이 일정하다면 유통 비용의 크기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유통 비용 지출은 상업 자본에게는 생산적 투자인 것이다. … 그리고 상업 자본이 구매하는 상업 노동도 상업 자본에게는 직접적으로 생산적이다.
그러한 ‘비생산적’ 소비 분야는 광고 등의 확산으로 마르크스의 시대 이래 엄청나게 성장했다. 금융자본의 발달로 부의 생산에 관련되기보다는 오히려 자본가 계급 성원들 사이의 잉여가치 배분에 관련된 광범한 활동들이 모두 막대한 비용을 잡아먹으며 크게 늘어났다. 주식 거래가 전형적인 사례다.
개개 자본에게는 비생산적이지만 그 존속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다른 종류의 비용도 증가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자본주의 이전의 착취 형태들이 없어지면서 결국 국가의 경비를 자본주의 생산에서 창출된 잉여로 부담해야 한다. 이 국가 경비의 일부는 잉여가치의 창출을 증대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생산적일 뿐 아니라, 경쟁 중에 자본가 계급 전체가 보유한 공동의 부富로부터 일부 자본들이 잉여가치를 더 많이 얻을 수 있도록 돕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비생산적이다. 이런 비용은 그저 경찰에, 유력한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하는 교육제도에, 국가가 재정을 지원하는 성직자들에게, 만성적 실업자들의 소요를 막기 위한 복지비 등등에 지출하는 것과 같은 착취 구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다른 국가 지출은 개개의 자본들이 스스로 생산적 노동을 고용할 수 있도록 실제로 도움이 되는 종류들이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건강과 교육에 대한 지출, 실직 노동자들을 노동 시장에 계속 있게 하는 데 드는 지출, 정년퇴직 후에도 노후보장을 해주겠다고 취업 노동자들을 안심시키는 데 드는 지출 등이 그것이다. 이 지출들은 현대 마르크스주의 저자들의 일부가 ‘재생산적’ 지출이라고 부르고, 다른 이들은 ‘간접적으로 생산적인’ 지출이라고 부르고 또 다른 이들은 ‘필수 비생산적’ 지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지출을 이해하는 최상의 방법은 배타적인 일국 시장 내에서 경쟁하는 개개의 자본에게는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개개의 자본이 그러한 지출에 [세금의 형태로 — 옮긴이] 돈을 대야 하지만, 그러한 지출 덕분에 개개의 자본이 그 지출로부터 마찬가지로 득을 보는 경쟁자들에 대한 이점을 누리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개개의 자본에게 그러한 지출은 노동력에 더 많이 지불해야 하는 것과 거의 똑같은 셈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 자본가들과 경쟁하는 일국 내 자본가들의 총합(부하린이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라고 부른)에게는 그러한 지출은 어떤 점에서 ‘생산적’이다. 그러한 지출 덕분에 ‘외국’ 경쟁자들에게 고용된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만큼 자국 노동자들이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으로 국가의 군비 지출이 있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고전적 제국주의론들의 주장을 살펴봤다. 그에 따르면, 자본이 성장하면 독점화와 함께, 국가와 융합하는 경향이 있고, 전쟁과 전쟁 준비가 일국에 본거지를 둔 자본들이 [해외 ― 옮긴이] 경쟁자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수단 — 주된 수단은 아닐 수도 있다 — 이 된다. 20세기가 진행되면서 군비 지출은 잉여가치를 엄청나게 많이 소비하게 돼, 일부 추산으로는 군비 지출이 개별 자본들의 생산적 투자 못지 않게 소비한다고 한다.
경찰에 대한 지출처럼 군비 지출은 개개 자본가의 생산량이든 ‘총’자본가의 생산량이든 어느 것도 증가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광고 지출처럼 군비 지출은 하나의 자본 블록(‘총’ 국민 자본이나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라고 부를 수 있겠다)이 다른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잉여가치를 잠식할 수 있게 해준다.
1922년 코민테른 4차 대회 연설에서 니콜라이 부하린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다양한 산업 자본가들 사이의 가격 경쟁이 … 마르크스가 거론한 거의 유일한 경쟁 형태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경쟁의 시대에는 가격을 낮추는 방법이 별로 중요하지 않고, 경쟁의 다른 여러 형태들도 발견하게 된다. 부르주아지의 주요 집단들은 이제 국가의 틀 내에서 트러스트화한 집단의 성격을 띠고 있다. … 그러한 기업 형태가 주로 폭력적인 경쟁 형태에 기댄다는 것은 완전히 가능하다. … 이처럼, 국가의 군사적 공격을 낳는 새로운 경쟁 형태가 등장한다.바꿔 말하면 이렇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모형에는 오직 한 가지 차원의 경쟁만이 있을 뿐이다. 비용 절감과 판매가의 인하를 노리고 생산적 투자를 축적해 시장 경쟁을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노화함에 따라 새로운 차원의 경쟁이 시장 경쟁을 보충하고 심지어 가끔 시장 경쟁을 대체하기까지 한다.
20세기 자본주의를 평가하려면 어떤 것이든 이 새로운 차원의 경쟁들, 그리고 그런 경쟁들이 동반하는 다양한 분야로의 잉여가치 지출이 체제의 기본 동역학과 ‘이윤율 저하 법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경쟁의 상이한 차원들과 이윤율 저하 경쟁의 새로운 형태 중 일부에 대해서는 논의할 것이 별로 많지 않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 자신이 상품 판매에 비용을 지출하는 것(그가 ‘상인’ 자본이라고 부른 것)이 미치는 효과를 아주 잘 다루고 있다. 그러한 지출로 잉여가치 총량이 증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생산적 자본가들은 경쟁이 가하는 압력 때문에 스스로 그러한 지출을 하든가 아니면 그들을 대신해 그 일을 할 다른 자본가들에게 이들이 맡은 투자의 양에 비례해 잉여가치의 일부를 지급하든가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비용 지출은 평균 이윤율 저하에 이바지한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지출은 자금을 생산적인 투자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므로 자본가 계급 전체로 하여금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증가시키게 하는 일반적인 압력이 감소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따라서 이윤율에 대한 장기적인 저하 압박도 감소될 것이다.
77 그런 이유로 무기를 일종의 지배계급의 ‘사치재’ 소비 형태로 취급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78
진짜 문제는 군비 지출의 효과 문제다. 군비 지출이 그저 이윤율을 감소시킬 리만은 없다. 평화시의 군비 지출이 최고도에 도달했던 시기(1949년 이후)는 자본주의가 더는 ‘이윤율 저하’로 경제 위기와 부진에 빠지지 않는 듯하던 시기였기 때문에라도 이것은 합리적 의심인 것이다.만약 군비 지출이 정말로 일종의 ‘사치재’ 소비라면, 군비 지출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꾸준히 상승시키는 압력을 상쇄하고, 또한 위에서 개략적으로 서술한 과정을 통해 장기적으로 평균 이윤율을 저하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자본가들은 그 비용을 대기 위해 자기네 잉여가치의 일부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는 그 영토에서 사업을 하는 자본가들의 총합을 대표하므로 이 비용 지출은 단지 자본가들이 자기네가 이미 보유하고 있는 잉여가치를 어떻게 소비하느냐는 문제일 뿐으로, 자본가들이 잉여가치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또 총투자에 대한 총잉여가치의 비율 ― 이윤율 ― 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설명은 자본주의가 1945년 이후 거의 30년 동안, 그 전까지 풍토병처럼 보이던 경제 위기에 처하지 않고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모종의 설명을 제공한다는 이점이 있다.
이 기간의 진정한 상황 전개를 자세히 살펴보는 일은 3장에서 할 것이다. 그러나 노화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이윤율과 동역학 변화를 이해할 수 있으려면 상이한 차원의 경쟁들이 서로 강화하거나 서로 모순되면서 유기적 구성과 이윤율에 상이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살펴봐야 한다.
각각의 경쟁 형태는 목표가 같다. 경쟁에서 밀리면 경쟁 자본들에게 갈 잉여가치를 지배해 개개의 자본(또는 국민 총자본)의 유지와 확대를 꾀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각 경쟁 형태가 모두 세계 체제의 각 발전 단계에서 똑같이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어느 특정 시점에서나 특정 자본(또는 특정 나라의 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경쟁 형태가 가장 효과적이고 따라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기 쉬우며, 다른 경쟁 형태들은 이 경쟁 형태에서 성공하는 데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마르크스가 고찰한 체제는 여전히 대부분이 전前자본주의적인 세계 안에서 비교적 소규모의 자본주의 기업들이 확장하고 있었고, 그것도 가격 기구를 통한 ‘순수한’ 경제적 경쟁을 하면서 아주 성공적으로 확장하고 있던 체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국가에 대한 비용 지출은 개개 자본의 자체 확대를 낳을 투자 분야로부터 그 자본의 잉여가치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다른 상황을 연상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가격 경쟁 위주의 비용 지출보다 군비 지출이 특정 나라의 개개 자본들에게 더 좋은 확장 기회를 제공하는 듯한 상황이 그렇다. 또는 심지어 가격 경쟁 위주로 투자하면 개개 자본들의 군비 지출 유지와 확대의 주된 수단이 될 자원을 전용하는 셈이 되는 상황조차 있을 것이다.
이윤율이 너무 낮아 각 기업이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기를 꺼리는 상황이 있다. 신규 투자가 없으면 모든 산업 부문에 과잉 설비가 막대해, 상품들은 그 가치보다 훨씬 낮게 판매되고, 막대한 ‘과잉생산’이 있게 된다. 국가가 투자를 위해 대량의 잉여가치를 동원하려 해도 새 시장에 진입할 수 있을 만큼 저렴한 비용으로 상품을 생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보호무역의 방법들을 이용해 외국인들에게 국내 시장을 강제로 폐쇄함으로써 ‘국내 자본가들’을 위해 국내 시장의 지분을 확대할 수단에 잉여가치를 사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군비 지출이 아니라면 사용되지 않은 채 방치될 그 잉여가치를 군비 지출로 돌릴 수 있다. 또한 군비 지출은 더 나아가 현재로서는 외국 국가들이 보호하고 있는 외국 시장을 강제로 개방시킬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한 군비 지출이 실제로 결코 새로 가치를 창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국내 자본가들에게 걱정거리가 아니다. 군비 지출 덕분에 그들은 외국 자본가들에게 속한 생산수단을 사용해 창출된 잉여가치를 입수할 기회를 얻는다. 군비 지출은 비록 자본 일반을 확대시키지는 않을지라도, 민간 투자를 할 때보다 더 많이 국민적 자본을 확대시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록 군비 지출의 동기가 자본가 계급과 그 측근들의 사치재 소비와는 다른 고려 사항들에 따른 것일지라도, 군비 지출이 이윤율에 미치는 효과는 같다. 군비 지출은 단기적으로도 이윤율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그저 자본가들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기존 잉여가치를 어떻게 사용할지 자유롭게 결정하는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군비 지출은 장기적으로도 반드시 이윤율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군비 지출에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가 수반될지라도 ‘폰 보르트키예비치 효과’ 덕분에 평균 이윤율이 저하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비 지출 덕분에 유기적 구성의 장기적인 상승 압력이 감소한다.
그 다음에, 1914~18년과 1939~45년의 전면전에서처럼 군비 지출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차원의 경쟁인 듯한 상황이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자본가들에게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자본가들은 생존하려면 군비에 돈을 써야 한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승리를 거둬 잉여가치의 새 원천을 확보할 수 있고 그리하여 자기들의 자본을 확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가망이 변변찮아도 군비 지출을 떠맡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들의 기존 잉여가치 원천을 외국 자본가들에게 빼앗기기 때문이다. 군비 지출은 이제 경찰에 대한 비용 지출과 꼭 마찬가지로 생산을 지속시키는 비용이다. 그러한 단계에서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율을 크게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개별 자본가의 이윤율은 하락할 수밖에 없다. 생산 유지 비용인 군비 지출은 지금 자본가 계급이 지배하는 잉여가치를 직접 잠식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더는 개개 자본가의 이윤율이 아니다. 총력전은 정의상 군사적 생존에 대한 고려에 견줘 가격 경쟁에 대한 고려가 완전히 부차적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자본주의적 관계들이 여전히 우세하다면 그것은 서로 경쟁하는 자본들이 경쟁자들보다 앞서고자 무기를 더 많이 생산하는 데 잉여를 투자하려고 노동의 가격을 최소한으로 낮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투자 결정은 이제 군사적·국가적 결정이 돼, 특정 자본 소유자들의 결정에 우선한다.
이제 이윤율 저하 경향의 효과는 국가의 의사결정 수준에서 나타나는데, 어떤 면에서 그러냐 하면, 승리는커녕 생존을 위해서라도 해야 하는 국가의 군사 활동 능력을 감소시키고, 또한 기존의 비군사적 생산 수준을 국가가 확대(심지어 그저 재생산)하는 능력도 감소시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화하는 자본주의에서는 군사적 경쟁과 경제적 경쟁의 상호 작용이 추세인 상황이 존재한다. 그러한 단계에서는 가격 경쟁 차원과 군사적 경쟁 차원이 서로 모순될 수밖에 없다. 두 차원 모두에서 승리하는 것은 이전의 축적 수준에 달려 있다. 그러나 가격 경쟁에는 재생산 비용을 지출해 축적 수준을 그 이상으로 높이는 것이 수반된다. 군사적 경쟁에는 그 대신에 재생산과 관계 없는 비용 지출이 수반되는데, [자본가들은 ― 옮긴이] 체제의 다른 곳에서 생산된 잉여가치를 이 덕분에 손에 넣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군비 지출이 어떤 수준 이상이면 경제적인 가격 경쟁을 할 능력을 감소시킨다. 그러나 오늘날 전쟁 자체가 너무 비용이 많이 들고 위험해, 군사력을 사용해 그러한 가격 경쟁 — 특히 수출 시장에서의 경쟁 — 의 효과로부터 일국의 자본주의를 잘 보호하기는 쉽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군비 지출이 어마어마한 나라들의 경제성장은 그렇지 않은 나라들의 성장보다 둔화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지난 20년[이 글은 1984년에 출판됐다 — M21] 동안 일어난 일로, 미국의 경제 성장이 일본과 서독의 성장보다 더뎠다.(그리고 이제 소련의 경제성장이 미국의 성장보다 더딘 경향이 있다.) 바꿔 말하면, [잉여가치가 ― 옮긴이] 가장 많이 ‘누출’돼 유기적 구성 상승 경향이 상쇄된 나라들의 경제성장이 누출이 더 적었던 나라들의 성장보다 더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전 세계적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상승해, 마침내 착취율 증가로도 더는 이윤율 저하를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마르크스가 묘사했던 바와 같은 체제의 동역학과, 체제의 여러 발전 단계에서 그 기본 동력을 상쇄할 수 있었던 요인들(마르크스 자신이 지적한 것들을 포함해)을 추상적 수준에서 다루었다.
체제가 노화하면서, 개개의 자본 단위들이 전체 체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더 커져 그 논의에서 이러한 상쇄 요인들이 효과를 내기가 좀더 어려워진다는 점이 논증됐다. 그 상쇄 요인이 경제 위기가 됐든 식민지 확장이 됐든 전쟁 준비에 지출되는 비생산적 소비가 됐든 말이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우리는 체제의 장기적인 추세에 관한 1백 년 전 마르크스의 예측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고 예상할 수 있다.
이제는 그러한 추상적·일반적 고찰을 넘어 20세기 자본주의의 실제 추세와 오늘날의 상황 전개를 살펴봐야 한다. 이것이 다음 두 장의 목적이 될 것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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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hris Harman, Explaining the Crisis: A Marxist Re-Appraisal, Bookmarks, 1999, chapter 1 Marx’s theory of crisis and its critics.
↩
- Karl Marx, Grundrisse (London 1973), p. 623, 637[국역: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그린비, 2007]. ↩
- Marx, Capital: One, p. 645. 이하의 《자본론》 인용문은 모두 모스크바판에서 인용한 것이다. ↩
- 그렇다고 해서 취업 노동자들이 갈수록 더 빈곤해질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알고 싶으면 로스돌스키의 설명을 보라. The Making of Marx’s Capital (London 1977), pp. 300-303[국역: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형성》, 백의, 2003]. ↩
- Grundrisse, p. 749.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과 《자본론》 사이에는 어느 정도 논조의 차이가 있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은 경제 위기가 한창일 때 급히 저술한(마르크스는 당시 경제 위기가 체제 전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미출간 저작인 반면, 《자본론》 세 권은 그 초고를 다시 고쳐 쓰고 편집 체제를 재구성하고 자료와 논지를 더 신중하게 다듬은 (미완성) 저작이다. Rosdolsky, The Making of Marx’s Capital을 보라. ↩
- Marx, Capital: One, p. 6. ↩
- 예를 들어,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December 1979에 실린 토머스 와이스의 논문을 보라. ↩
- 예를 들어, 폴 배런과 폴 스위지가 주장한 독점 이론을 받아들인 사람들, 존 해리슨, 이언 스티드먼, 제프 호지슨, 앤드류 글린 등 피에로 스라파의 영향을 받은 신新리카도 학파, 그리고 이 스라파 추종자들을 비판한 봅 로손 같은 사람들이 그렇다. ↩
- Ben Fine and Lawrence Harris, Rereading Capital (London 1979), p. 64[국역: 《현대 정치경제학 입문》, 한울, 1985]. ↩
- Marx, Capital: Three, p. 236-237. ↩
- Marx, Capital: Three, p. 237. ↩
- Marx, Capital: Three, p. 245. ↩
- Marx, Capital: Three, p. 248. ↩
- Marx, Capital: Three, p. 208. ↩
- Marx, Capital: Three, p. 622. ↩
- 마르크스는 유기적 구성을 c/v(c=불변자본, v=가변자본)라는 대수적代數的 공식으로 나타냈다. 벤 파인과 로런스 해리스는 이와 관련해 마르크스에게는 더 뚜렷한 개념인 ‘자본의 가치 구성’이라는 개념(소비된 노동력의 현재 가치 대 소비된 생산수단과 생산 재료의 현재 가치의 비율)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요점은 소비된 자본의 현재 가치가 최초의 투하 가치와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다루겠지만, 소비된 자본의 가치는 투자된 자본의 가치보다 작아지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자본이 증가할수록 자본 각 단위를 생산하는 데 드는 사회적 필요노동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Fine and Harris, pp. 58-60을 보라. ↩
- Marx, Capital: One, pp. 786-787. ↩
- 이것은 노동가치론의 귀결이다. 여기서 노동가치론의 타당성을 놓고 논쟁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독자들은 힐퍼딩이 (뵘바베르크의 영어판으로 재출간된) Karl Marx and the Close of his System[국역: 《노동가치론 논쟁》, 학민사, 1985]에서, 그리고 부하린이 The Economic Theory of the Leisure Classes에서 한계효용학파에게 응답한 내용과 International Socialism, 2nd series, 3호와 4호에서 벤 파인과 로런스 해리스, 그리고 피트 그린이 스라파 학파에게 응답한 내용을 참조하라. ↩
- 착취율은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착취율이 변할 때 어떻게 되는지는 나중에 볼 것이다. ↩
- ‘Alternative perspectives in Marxist theories of accumulation and crisis’, in The Subtle Anatomy of Capitalism, ed. Jesse Schwartz (San Diego 1977), pp. 207-208. 또한 Phillippe van Parijs, ‘The Falling Rate of Profit Theory of the Crisis, a rational reconstruction by way of an obituary’, in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y 12:1 (Spring 1980), pp. 3-4를 비교해 보라. 나는 파레이스가 명백히 성급한 매장 사건의 방조자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
- Marx, Capital: Three, p. 269. ↩
- 예를 들어 에르네스트 만델은 그의 저서 Late Capitalism (London, 1975), p. 11[국역: 《후기 자본주의》, 한마당, 1985]에서 경제 위기를 겪고 나서 갱신된 고정자본은 “기술 수준이 더 높고”, 따라서 “유기적 구성이 상승한다”고 단언한다. ↩
- Marx, Capital: One, pp. 788-789. ↩
- Marx, Grundrisse, pp. 750-751. ↩
- Michael Kidron, Western Capitalism since the War (London 1968),p.46. ↩
- Marx, Capital: Three, p. 280. ↩
- 이 주장은 보통 “마르크스를 넘어서야 한다”는 말로, 그리고 생산 과정의 투입물의 가치를 산출물뿐 아니라 가격으로도 전형시킬 필요를 고려해야(마르크스는 그러지 않았으므로) 한다는 말로 표현된다. 흔히들 20세기 초 폴란드 경제학자 폰 보르트키예비치가 이 ‘전형轉形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앤드류 글린은 폰 보르트키예비치의 “생산가격과 이윤율에 대한 연립방정식 해법은 자본가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기술을 도입하면 실질임금이 변하지 않는 한 이윤율은 사실상 상승할 것임을 입증한다”고 주장한다.(Bulletin of CSE, Autumn1973.) ↩
- 이 점은 앤드류 글린이 ‘곡물 모델’을 사용해 이윤율 저하를 반박하려 했을 때 로빈 머리가 글린을 비판하면서 지적한 바 있다.(CSE Bulletin, 1973.) ↩
- Fine and Harris, p. 59. 내가 “그들은 … 주장한다”고 말한 이유는 마르크스가 그들만큼 명료하게 구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Capital: One, pp. 774-775를 보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구별이 유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불행히도 그들 자신은 그러한 구별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을 모두 끌어내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나중에 “유기적 구성이 현재 가치로 평가돼야 하는지 아니면 역사적 가치로 평가돼야 하는지에 대한 글린과 머리 사이의 논쟁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p.61)고 말하면서 뒷걸음치는 듯하다. ↩
- 최초 투자 비용을 사용해 계산한 이윤율 공식은 r=s/(c+v)다. ↩
- 물론 잉여가치가 전혀 생산되지 않아 불변자본의 감가상각을 간신히 충당하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또, 소량의 잉여가치가 생산돼 자본가 계급과 그 측근들의 소비를 충당하는 데는 사용되지만 투자에는 쓰이지 않는 더 구체적인 경우(나중에 살펴보겠다)도 있다. ↩
- 여기서 오키시오와 히멀웨이트의 수학적 논증에 대한 반증 하나, 즉 안와르 셰이크의 주장(Anwar Shaikh, ‘Political Economy and Capitalism: Notes on Dobbs’ Theory of Crisis’,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Vol. 2, No. 2 (June 1978))을 살펴볼 만하다. 셰이크는 다른 반증들이 고정자본의 존재를 무시한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그는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셰이크의 수학적 반증은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가정을 내포하고 있다. 셰이크는 한 생산 주기로 회전하는 자본이 새 기술의 도입으로 몇 번의 생산 주기를 가진 자본으로 바뀌는(즉, 생산 주기가 1에서 n으로) 경우를 예로 든다. 이런 상황에서 고정자본에 대한 이윤율은 틀림없이 하락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전 기간이 같은 더 큰 고정자본이 있을 때 이윤율이 반드시 하락하는 것은 아니다. ↩
- Marx, Capital: Three, pp. 227 이하를 보시오. ↩
- Marx, Capital: Three, p. 234. 이 점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장을 온전히 설명한 것으로는 Rosdolsky, p. 398 이하를 보시오. ↩
- Sweezy, Theory of Capitalist Development (London 1946), pp. 101-102[국역: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 필맥, 2009]. ↩
- 이를테면, Okishio, ‘A Formal Proof of Marx’s Two Theorems’, Kobe University Review, No. 18, 1972를 보라. 또한 Ian Steedman, Marx After Sraffa (London,1977)과도 비교해 보시오. ↩
- I. Steedman, Marx After Sraffa, p. 64. 또한 pp. 128-129를 비교하시오. ↩
- Bulletin of the Conference of Socialist Economists (Autumn 1973), p. 103. ↩
- Harrison, Marxist Economics for Socialist (London, 1978), p. 103. ↩
- ‘Technical change and the rate of profit’ in Kobe University Economic Review (1961), p. 85 이하. ↩
- Bulletin of CSE (Autumn 1974). ↩
- “만약 1노동시간이 6펜스로 표시된다면, 12시간의 1노동일에는 6실링[1실링은 12펜스 — 옮긴이]의 가치가 생산될 것이다. 현재의 유력한 노동생산성으로 이 12노동시간에 12개의 상품이 생산된다고 가정하고, 이 상품 한 개에 소비되는 원료와 기타 생산수단의 가치가 6펜스라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 상품 1개의 가치는 1실링이다. 즉, 6펜스는 생산수단의 가치이고 6펜스는 이 생산수단을 가공할 때 새로 부가된 가치다. 이제 어떤 자본가가 노동생산성을 갑절로 높이는 데 성공했다고 … 가정하자. 만약 생산수단의 가치가 변하지 않았다면 상품 1개의 가치는 이제 9펜스로 떨어질 것이다. … 노동생산성이 갑절로 됐는데도 1노동일은 전과 마찬가지로 6실링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다만 이 새로운 가치가 이제는 갑절의 생산물에 분배될 뿐이다. … 이 상품의 개별 가치는 이제 그 사회적 가치보다 낮다. 즉, 이 상품에는 사회적 평균 조건 하에서 생산된 대다수의 같은 상품들보다 더 적은 노동시간이 들어 있다. … 그러나 상품의 현실적 가치는 그 상품의 개별적 가치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다. 다시 말하면, 상품의 현실적 가치는 각각의 경우 생산자가 그 상품에 실제로 소비하는 노동시간이 아니라 그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측정된다. 따라서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는 자본가가 자기 상품을 그 사회적 가치인 1실링으로 판매한다면, 그는 그 상품을 개별적 가치보다 3펜스 더 비싸게 판매하는 것이고, 따라서 3펜스의 특별 잉여가치를 실현하게 된다.”(Capital: One, pp. 316-317.) ↩
- 이 사례의 3단계를 보면, 글린, 해리슨, 오키시오, 히멀웨이트의 주장이 얼핏 그럴듯하게 들린다. 만약 어떤 종류의 재화를 생산하는 기업이 전 세계에서 단 하나뿐이어서 대체할 기업이 없다면, 그 기업은 새 기술을 도입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 기술 도입으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상승하고 이윤율이 저하한다면 말이다. 그 기업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상승시키도록 자극하는 유일한 요인은 노동비용의 상승일 것이다. 노동비용이 상승하면 이윤율은 떨어질 테니까 말이다. ↩
- 이 점은 Fine and Harris, pp. 84, 60-61에서 잘 다루고 있다. ↩
- Marx, Capital: Three, p. 244. ↩
- Marx, Capital: Three, p. 244. ↩
- 이것은 이 책의 보론에서 다루는 ‘장기파동’, ‘구조적 위기’, ‘헤게모니 위기’ 이론가들이 제시한 주장의 함의다. 그것은 또, 파인과 해리스가 발전시킨 견해의 함의이기도 한 것 같다. 비록 그들의 견해는 많은 부분에서 지금까지의 내 주장들과 대체로 비슷하지만 말이다.[‘보론’을 보고 싶은 독자는 Chris Harman 1999, Explaining the Crisis: A Marxist Re-Appraisal, Bookmaks, pp 122-154를 보시오. — 옮긴이] ↩
- 이것은 복잡한 과정을 매우 개략적으로 요약한 것이다. 몇 가지 세부 사항을 더 자세히 다룬 것으로는 Nigel Harris, ‘World Crisis and the Systems’, IS, old series, 100, 그리고 ‘Asian Boom Economies’, IS, 2nd series, 3을 보시오. 또한 Chris Harman, ‘Poland and the Crisis of State Capitalism’, IS, old series, 93-94를 보시오. 그리고 Nagel Harris, Of Bread and Guns (Penguin 1983)도 보시오. ↩
- 체제의 노화에 대한 이러한 통찰은 마이클 키드런이 발전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The Wall Street Seizure’, IS, old series, 44를 보시오. ↩
- Marx, Capital: Three, chapter 14, pp. 232-233. ↩
- Lenin, Imperialism, the Highest Stage of Capitalism[국역: 《제국주의론》, 백산서당, 1986]을 보라. 이에 대해 브라운(Barratt Brown, Essays in Imperialism, p. 35)과 키어넌(Kiernan, Marxism and Imperialism, p. 29)은 반론을 제기하면서, 이 해외투자로 영국에서 빠져나간 자금보다 더 많은 돈이 이자로 되돌아왔으며, 따라서 이 자금 유출은 투자처를 찾는 잉여가치를 흡수하는 방법이 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반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 처음에 해외투자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영국에는 투자처를 찾는 자금 풀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투자 수준도 더 높았을 것이고, 따라서 유기적 구성도 올라갔을 것이다. 이 추가 투자는 해외투자와 마찬가지로 영국에 소득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리 되면, 전에 투자처를 찾던 많은 잉여가치가 유출되고 난 후의 실제 유기적 구성보다 더 높은 유기적 구성 상황에서 영국 내 투자처를 찾는 자금도 더 많았을 것이다. 결국 해외투자로 빠져나간 자금보다 더 많은 자금이 유입됐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해외투자는 영국의 축적 문제를 완화시켰다. ↩
- 이 점과,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화하는 데서 역사적으로 일시적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한 것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저작 The Accumulation of Capital의 커다란 장점이다. 그러나 그녀는 제국주의가 이윤율에 미치는 효과라는 측면에서 제국주의의 구실을 보지 않았다. 룩셈부르크의 견해에 대한 비판은 R. Luxemburg and N. Bukharin, Imperialism and the Accumulation of Capital (London, 1972)에서 부하린 편과, Tony Cliff, Rosa Luxemburg (London, 1980)[국역: 《로자 룩셈부르크》, 북막스, 2001]을 보시오. ↩
- Lenin, Imperialism, the highest state of capitalism 그리고 Nicolai Bukharin, Imperialism (London, 1972). ↩
- 레닌과 부하린은 군비 지출이 마르크스의 법칙에 미치는 효과를 주목하지는 않은 듯하다. ↩
- Shane Mage, The ‘Law of the Falling Rate of Profit’, its place in the Marxian theoretical system and its relevance for the US Economy (PhD thesis, Columbia University, 1963), p. 228. ↩
- Marx, Grundrisse, pp. 750-751. ↩
- ‘Rejoinder to Left Reformism’, IS, old series, 7 (Winter 1961-62)를 보라. ↩
- IS, old series, 27, p.10, ↩
- Kidron, Capitalism and Theory (London, 1974), p. 16. ↩
- Kidron, Capitalism and Theory, pp. 16-17. 처음에 키드런은 ‘누출’이 자본 집약적 재화의 누출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노동 집약적 재화의 누출은 반대 효과를 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인정했듯이, 둘 중 어느 형태의 누출도 추가 투자에 쓰일 수 있는 잉여가치의 양을 감소시킬 것이고, 따라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과 이윤율 저하를 상쇄할 것이다. ↩
- Ernest Mandel, The Inconsistencies of State Capitalism (London, 1969), pp.4, 6. ↩
- Ernest Mandel, Late Capitalism, p.288. ↩
- Ernest Mandel, Late Capitalism, p.289. 그가 언급한 논문은 ‘The Inconsistencies of Ernest Mandel’, in IS, old series, 41이다. ↩
- 키드런 자신도 문제를 약간 혼동하고 있다. 그는 비생산적으로 소비되는 상품을 창조하는 노동 자체는 ‘비생산적’이라고 규정한다. 나는 이 정의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IS, old series, 76의 Capitalism and Theory에 대한 내 평론을 보시오.) ↩
- 이것은 데이비드 야페의 지지자들이 영국 국제사회주의자 단체(International Socialists) 내에 있을 때, 보르트키예비치를 원용하는 주장을 송두리째 비판한 논거였다. 예를 들어 Dan Siquerra, ‘Marx, Bortkiewicz and IS’, IS Internal Bulletin (April 1972). ↩
- 보르트키예비치의 공식은 결국 체제의 총이윤은 총잉여가치와 같지 않다거나 총가격은 총가치와 같지 않다고 시사했다. 보르트키예비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노동가치론이나 이윤율 추세와 관련해 노동가치론에서 끌어낸 결론은 대체로 쓸모없음이 입증됐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
- 특히, 연립방정식의 사용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산이 ‘연립적으로’(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일어난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수 있다. ↩
- Anwar Shaikh, in Jesse Schwartz, ed., The Subtle Anatomy of Capitalism, pp. 106 -107; Miguel Angel Garcia, ‘Karl Marx and the formation of the average rate of profit’, International Socialism, 2nd series, 5. 두 글 모두에서 총가치와 총가격의 괴리, 총이윤과 총잉여가치의 괴리가 나온다. 이러한 괴리의 이유는 전혀 신비할 게 없다. 평균가격은 유기적 구성이 상이한 서로 다른 자본들 사이에서 이윤율이 균등화할 때 형성된다. 높은 유기적 구성으로 생산된 생산물들의 가격은 그 가치보다 높고, 낮은 유기적 구성으로 생산된 생산물들의 가격은 그 가치 이하로 떨어진다. 노동자들의 소비재가 높은 유기적 구성으로 생산된다면, 그 가격은 가치 이상으로 상승하겠지만, (사치재나 생산수단처럼) 자본가들에게 가는 상품은 가치 이하로 떨어질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사회적 생산물의 계급 간 분배는 약간 달라질 것이고, 총이윤도 달라질 것이다. 방정식에서 이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총가격은 총가치와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마르크스는 ‘논박당한’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총잉여가치와 총이윤의 차이는 임의적이지 않다. 후자는 전자에 의존하며, 이론상 후자는 전자로부터 계산될 수 있다. 셰이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Marx’s theory of value and the transformation problem’, in J. Schwartz, The Subtle Anatomy of Capitalism, p. 125에서). “먼저 가격이 가치에 비례한다면, 한 부문의 총가격은 그 부문의 유기적 구성도가 사회적 평균보다 더 낮은지(또는 더 높은지)에 따라 그 부문의 화폐 비용가격에 비해 하락(또는 상승)하게 마련이다. 그 부문의 특정한 화폐 이윤율이 일반 이윤율과 일치한다면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격이 가치와의 엄격한 비례에서 벗어나면 일반적 화폐 이윤율이 일반적 가치 이윤율과 계속 동일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 상품의 가격 총계는 사회적 생산물을 형성하는 상품들의 총 가격이다. 반대로 비용가격의 총계는 전체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상품들(생산수단과 노동력)의 총가격이다. … 비용가격의 총계는 사실상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의 총가격이다.” 그 경우에는 상대가격이 조금만 변해도 총 화폐 이윤이 변할 것이다. 왜냐하면 총 화폐 이윤은 화폐로 환산한 생산물의 총비용에 달려 있는데, 이 비용은 가치로 환산한 생산물의 총비용과는 편차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셰이크는 그 편차가 마르크스가 주장한 노동가치론과 자본주의 동역학의 전반적 타당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생산에서 유래하는 가치와 유통 과정에서 가치가 취하는 형태인 화폐가격을 신중하게 구별”하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구별하고 나면, 화폐의 크기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치 크기와 항상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p.125.) 왜냐하면 “직접가격[가치에 비례하는 가격]과 생산가격의 편차처럼, 가치 이윤율과 화폐 이윤율의 편차는 체계적이고 확정적이기 때문이다. … 화폐 이윤율이 가치 이윤율과 함께 변할 것이라는 점은 증명할 수 있다.”(p.134.)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에서 가치 이윤율의 추세를 파악할 수 있는데, 이 가치 이윤율은 다시 화폐 이윤율의 추세에 직접 영향을 미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 자신이 다음과 같이 주장한 이유였다. “가격이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사회적 자본의 운동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즉, 개별 자본가들에게 돌아가는 가치의 몫이 그들 각각의 투자나 그들 각각이 생산한 잉여가치와 비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교환되는 총생산물의 양에는 변화가 없다.”(Marx, Capital: Two, p.393.) 그러나 셰이크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개별 자본의 관점에서는 상황이 사뭇 다르다. … 상이한 가치 형태들은 개별 자본에 상이한 효과를 미치며, 이 상이한 효과는 축적과 재생산의 역동적 과정에 대해 상이한 함의를 지니게 된다. 체제는 화폐가격의 실제 움직임을 통해 조절된다. 따라서 생산가격 및 생산가격과 가치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 구체적 분석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 길을 따라가는 첫 단계(‘전형 문제’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에서 유일한 단계)는 직접가격에서 생산가격을 도출하는 것이다.”(Shaikh, p. 127.) 오키시오도 1974년 논문에서 셰이크와 동일한 주장을 했다.(‘Value and production price’, Kobe University Review, 1974, pp. 1-2.) 오키시오는 마르크스의 표식을 확장해서 다음을 보여 준다. “비용가격의 생산가격으로의 전형을 고려할 때는 마르크스의 두 번째 명제, 즉 모든 부문의 총잉여가치는 총이윤과 동일하다는 명제가 대체로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서 총잉여가치는 120이지만 총이윤은 114인 경우를 예로 든다. 이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이윤율이 균등화하면 생산가격으로 환산한 비용가격이 가치로 환산한 비용가격보다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오키시오는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사례에서, 제II부문은 임금재 부문이고, 제I부문은 생산재 부문이다. 제II부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평균보다 낮고, 제I부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평균보다 높다고 가정하면, 제II부문의 생산가격은 그 가치보다 낮고, 제I부문의 생산가격은 그 가치보다 높다. 따라서 각 부문에서 생산가격으로 환산한 불변자본 부분의 평가액은 그 가치보다 높고 가변자본 부분의 평가액은 그 가치보다 낮다.” “우리의 사례처럼, 불변자본이 가변자본 전체보다 더 크다면, 비용가격을 생산가격으로 평가할 때 비용가격 전체의 총계는 증가한다.” 그러나 “가치로 측정된 잉여생산물의 양을 생산가격으로 다시 계산하면 … 이것은 생산가격으로 이미 계산된 총이윤과 동일하다. … 120과 114라는 양이 다른 이유는 동일한 잉여생산물을 다르게 계산했기 때문이다. 즉, 전자는 가치로 그리고 후자는 생산가격으로 계산했기 때문에 다를 뿐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이 이윤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사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p.6.) 가치의 가격으로의 전형 문제를 셰이크와 매우 비슷하게 설명한(비록 출발점은 달랐지만) 가르시아가 총잉여가치와 총이윤의 ‘편차’라는 문제를 피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그는 전형 과정에서 착취율(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의 측정 단위, 즉 잉여가치율)이 변한다고 가정한다. 이것은 현실적인 가정이다. 가치의 가격으로의 전형은 노동자들이 실질임금으로서 소비하는 사용가치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재화들의 가격에는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사회 전체의 부에서 노동력에 지출돼야 하는 비율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르시아의 계산과 셰이크·오키시오의 계산이 다른 것은 사실은 설명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가르시아의 방법은 이윤율을 좌우하는 것이 기본적 가치 관계라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보여 준다. 가르시아의 두 번째 논점은 생산수단 생산 부문과 임금재 생산 부문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실제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는 것이다. 생산수단 중에는 아주 높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으로 생산된 몇몇 품목(예를 들어 강철 제품)도 있지만, 원료와 반제품(노동집약적으로 생산되는)도 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생산물은 생산수단으로 쓰일 수도 있고 임금재로 쓰일 수도 있다.(전기, 석유, 식료품 — 이것들은 동물을 사육하거나 공장에서 가공 처리될 때는 생산수단이고, 노동자들이 직접 구매할 때는 임금재다 — 건물, 자동차 등등.)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가르시아의 주장은 지나치다. 그는 사치재 부문의 유기적 구성이 평균보다 높은 상황에서 이윤율을 분석할 때는 자신의 방법에서 결론을 끌어내지 못한다. 이 점은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다. ↩
- 제III부문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이 미치는 이 독특한 효과는 폰 보르트키예비치가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나 연립방정식 해법 때문에 폰 보르트키예비치는 평균 이율율이 먼저 하락했다가 상승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하락과 상승이 동시에 일어나서 서로 상쇄한다고 보게 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발견한 제III부문의 효과를 간단히 일축해 버린 여러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의 실수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
- Marx, Capital: One, p. 544. ↩
- Marx, Capital: Three, p. 293. ↩
- Marx, Capital: Three, p. 296. ↩
- 일국적 수준에서 자본주의에 조언하는 사람들이 특정한 국가지출의 ‘수익률’을 산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고등교육에 대한 로빈스Robbins 보고서”를 보라. ↩
- Mike Kidron, Western Capitalism since the War (London), 1968), p.40. ↩
- N. Bukharin, ‘Address to the Fourth Congress of the Comintern’, in Bulletiin of The Fourth Congress, vol. 1, Moscow, 24 November 1922, p. 7. ↩
- 내가 ‘새로운’ 차원의 경쟁을 말한 것은 전에는 그런 경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자본주의 초기의 ‘중상주의’ 시대에 자본주의는 국가의 활동에 긴밀하게 의존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고전학파 정치경제학자들을 따라, 자본주의가 자립적 체제가 되면 이런 의존이 쇠퇴할 것이라고 보았다. 요점은,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서자, 국가에 의존하는 현상은 마르크스가 예견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다시 한 번 증대했다는 것이다. ↩
- Marx, Capital: Three, pp. 292-294. ↩
- 예를 들어, Mandel, Late Capitalism, p.292~293을 보라. ↩
- Western Capitalism since the War (London, 1968)과 Capitalism and Theory, (London, 1974)에서 마이크 키드런이 한 주장과 내가 ‘Better a Valid Insight than a Wrong Theory’, IS, old series, 100에서 응답한 것을 보라. ↩
- 1943~44년에 독일과 영국 모두 그랬다. 또, 스탈린 치하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소련과 관련해 이 주장을 정교하게 발전시킨 것으로는 Tony Cliff, State Capitalism in Russia (London, 1974)[국역: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국가자본주의론의 분석》, 책갈피, 2011]를 보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