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알렉스 캘리니코스 2011년 방한 강연 (2)
인민전선이 진보운동의 패배를 부르는 이유
이 글은 알렉스 캘리니코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장이 2011년 7월 방한해 본지 편집자들, 편집팀원들, 그리고 주요 기고자들에게 한 강연과 대담을 녹취한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본지의 편집 자문이기도 하다.
‘인민전선’은 원래 코민테른이 1934~35년에 채택한 정책의 이름이었다. 그때는 이미 코민테른이 소련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도구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그래서 코민테른의 정책은 각국 공산당에 강요되기 일쑤였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당에서 제명당했다. 인민전선 정책이 도입된 것은 코민테른의 역사에서 특히 재앙적인 국면을 거친 직후였다. 이른바 ‘제3기’ 정책이 시행된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의 시기가 바로 그것이다. ‘제3기’ 정책의 기초가 된 이론(‘이론’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은 이른바 ‘사회파시즘’론이었다. 즉, 사회민주주의도 일종의 파시즘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는 우리가 앞에서 다룬, 사회민주주의에 관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분석과 극단적으로 배치되는 관점이다.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자본주의적 노동자 당’이라는 모순적인 존재로 이해한다. 반대로 사회파시즘론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독일 나치나 이탈리아 파시스트 당과 동급으로, 보통의 부르주아 정당보다 더 나쁘게 본다.
이 제3기 정책은 공산당이 대중 정당으로 존재했던 독일에서 대참사를 불렀다. 히틀러와 나치의 부상에 맞서는 데서 공산당이 독일 사민당과 단결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산당이 나치와 협력해 사민당을 해코지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공산당과 사민당의 분열 때문에 세계 최강이었던 독일 노동운동이 마비됐고, 이는 결국 1933년 1월 히틀러의 집권이라는 재앙을 초래했다. 히틀러의 승리는 유럽의 전반적 우경화를 낳았다. 예컨대 오스트리아에서는 우파적 가톨릭 정당이 노동자 운동을 파괴했고, 프랑스에서는 우익이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이는 국제 노동운동 진영의 강력한 반발을 낳았다. 파시즘에 맞서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한다는 압력이 아래로부터 거세게 일어났다. 인민전선 정책이 채택된 부분적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압력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책은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대외 정책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중부 유럽과 동유럽을 정복하려는 야욕이 있었는데, 그러려면 소련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데다 어차피 반공주의가 나치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으므로 국제 무대에서 나치의 주적은 소련이었다. 그래서 히틀러의 집권을 가능하게 해 준 스탈린조차도 히틀러에게 겁을 먹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독일에 맞서 이른바 ‘민주적’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프랑스와 동맹하는 대외 정책을 택했다. 인민전선 정책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인민전선의 역사적 경험
그렇다면 인민전선은 과연 무엇인가? 인민전선은 노동자, 농민, 그리고 가장 중요하기로는 이른바 ‘진보적 부르주아지’를 포괄하는 계급 동맹이다. 달리 말하면, 파시즘에 맞선 노동계급의 단결 요구에 대한 응답이기는 하되, 피착취 계급을 부르주아의 일부 부문과 단결시키는 방식의 응답이다. 이때 동맹 상대인 부르주아지는 파시즘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진보적인 세력으로 묘사된다. 1936년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된 것은 이 정책에 힘입은 바가 크다.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는 공산당과 사회당, 그리고 급진당이 참여한 연립정부였다. 급진당은 자유민주주의 정당이었지만 프랑스의 주요 부르주아 정당이기도 했다. 그래서 19세기 말 프랑스 제국의 확장에도 적극 관여한 바 있었다.
인민전선이 그 본질상 바로 이러한 부르주아 동맹 세력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억누르는 구실을 한다는 것은 역사에서 입증됐다. 프랑스에서는 인민전선 정부가 집권한 데 고무된 노동자들이 1936년 5~6월에 대중 파업과 공장 점거를 벌였다. 프랑스 역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컸던 이 노동자 투쟁을 두고 프랑스 공산당은 신생 정부를 불안정하게 한다며 반대했다. 공산당 지도자 토레즈는 “적당한 시점에 파업을 끝낼 줄도 알아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실제로 공산당은 파업을 끝내려고 애썼다. 그 결과 부르주아지가 갈수록 인민전선 정부를 통해 자기 목적을 관철시키는 방향으로 사태가 흘러갔다. 그들은 인민전선 정부에 압력을 넣어 통화를 평가절하하고 내핍 정책을 도입하게 만들었다. 결국 인민전선 정부는 1939년에 지리멸렬하게 와해됐다. 1936년에는 인민전선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던 의회가,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한 직후인 1940년 5월에 가서는 페탱 원수가 이끄는 친나치 정권을 선출했다.
스페인 내전 때는 인민전선의 해악이 더욱 극적으로 드러났다. 선거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하자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쿠데타를 저지한 것은 노동자들의 봉기, 특히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의 봉기였다. 그 결과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후원을 받는 프랑코 추종 세력과 공화주의 세력인 인민전선 정부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그런데 내전은 공화주의 진영 내부에서도 일어났다. 인민전선 정부는, 그리고 특히 인민전선에 참여하고 있던 공산당은 내전에서 승리하려면 프랑스·영국·소련의 지원을 받는 규율 잡힌 상비군을 갖추고 재래식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화주의 진영에는 혁명적 세력도 있었다. 원래 스페인에서 강력했던 아나키스트들이 있었고,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자당POUM이라고 하는 유사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조직도 있었다. 이들은 혁명을 심화시키는 것이 우파에 맞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즉, 농민들은 토지를 접수하고 노동자들은 공장을 접수하라고 선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모로코에서도 반란을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모로코인 병사들이 파시스트 군대에 소속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공화주의 진영 내부의 알력은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전투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전투에서 정부 측이 승리했다. 참고로 영국의 트로츠키주의자 영화감독인 켄 로치가 만든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을 보면 스페인 내전이 아주 잘 묘사돼 있다. 전투가 끝나자 공산당은 코민테른이 파견한 ‘자문단’과 소련 보안경찰의 도움으로 공포 정치를 시행했다. 그 과정에서 POUM 지도자가 암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좌파를 탄압한 것이 파시스트에 맞선 승리를 낳지는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공화주의 정부를 지원하지 못했지만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프랑코에게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1939년 프랑코가 승리했고, 이때부터 시작된 우익 공포 정치는 196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참고로 프랑코의 승리 이후 스페인 사회의 분위기는 영화 <판의 미로>(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에 잘 묘사돼 있다.
인민전선의 셋째 사례는 제2차세계대전 중에 훨씬 더 큰 규모로 나타났다. 나치가 점령한 유럽에서 일어난 레지스탕스 운동이 그 사례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등장은 대중적 급진화 과정의 일부였다. 나치 점령 경험은 유럽 전체를 좌경화시켰다. 이를 반영하듯 각국의 레지스탕스 운동에서 가장 큰 세력은 대개 공산당이었다. 레지스탕스 운동이 가장 거셌던 발칸 반도, 특히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레지스탕스 세력이 여러 지역을 나치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런 해방구에서는 여성들이 전보다 더 적극적인 구실을 하는 등의 사회적 변화도 나타났다. 발칸 반도에서는 이탈리아 병사들이 레지스탕스 편으로 넘어와 독일군에 맞서 함께 싸우는 등 국제주의적 움직임도 어느 정도 나타났다. 참고로 <코렐리의 만돌린>(존 매든 감독)은 이 사건을 몹시 나쁜 시각에서 다룬 영화다. 아무튼 레지스탕스 운동은 결국 영국과 미국이 유럽을 나치한테서 탈환했을 때 그들에게 골칫거리 하나를 안겨줬다. 나치 지배가 무너지자 레지스탕스 운동이 자연스럽게 권력의 공백을 메운 것이다. 미국과 영국은 제2차세계대전 개전 이전 상태로 복귀를 원했고, 그래서 레지스탕스 운동의 혁명적 잠재력을 크게 우려했다.
그런데 이때 스탈린이 미국과 영국을 도와줬다. 스탈린은 유럽을 동서로 양분하기로 영국의 처칠과 합의했다. 스탈린은 동유럽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서유럽에서 서방 제국주의가 질서 회복에 나서는 것을 기꺼이 용인할 태세가 돼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944~45년 겨울 아테네에서 영국 공수부대가 그리스 레지스탕스 세력을 소탕할 때도 스탈린은 이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 토레즈와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톨리아티는 빨치산 투사들에게 무장 해제를 촉구했다. 즉, 스탈린과 서유럽 공산당 지도자들은 서유럽 자본주의의 안정성 회복에 일조한 것이다. 이때가 인민전선 이데올로기가 가장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다. 비록 훗날에는 잊혀졌지만, 당시는 할리우드에서 인민전선을 찬양하는 영화들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여기에서도 인민전선 때문에 혁명적 기회가 헛되이 날아갔다.
단계혁명론과 ‘역사적 타협’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인민전선 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명료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서유럽 공산당들이 개발한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소수의 대기업이 경제와 국가를 모두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독점 자본에 맞서는 광범한 민주주의 연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연합에 포함될 세력으로 노동계급, 농민, 중소기업, 반독점 자본가 등이 거론된다. 이것은 인민전선 전략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다만 여기서는 국가가 중립적이라는 가정이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독점 자본에 장악된 국가를 광범한 민주주의 연합이 탈환해서 민중의 통제 하에 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대한 명백한 수정이다. 그렇기에 1960년대에 서독에서 등장한 혁명적 학생운동이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가장 먼저 문제 삼은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제3세계에서는 인민전선 전략이 단계혁명론과 궁합이 잘 맞았다. 단계혁명론이란 제3세계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또는 민족·민주주의 혁명)이 먼저 일어날 것이고 사회주의 혁명은 그 다음 단계에 가서야 일어날 것이라는 사상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민족·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할 주체가 누구냐는 의문이 제기되는데, 그에 대한 답이 바로 인민전선이다. 다만 제3세계에서는 동맹 상대인 부르주아지가 반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또는 민족 자본가)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버전의 인민전선 전략이든 패배를 부른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예컨대 이라크에서는 1958~63년 거대한 혁명적 격변이 있었다. 민족주의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친영 왕정을 타도했다. 카셈 장군이 이끈 이 장교들은 나세르의 자유장교단 운동을 본보기로 삼았다. 이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 10년 동안에도 이라크에서는 대중 운동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왕정이 타도되자 대중 운동이 더 힘을 받았다. 이라크에서 가장 강력한 대중 정당은 공산당이었다. 이라크의 혁명적 정세가 심화하는 가운데 공산당은 마음만 먹으면 권력 장악을 향한 노동계급의 투쟁을 지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런 구실을 하지 않았다. 공산당이 인민전선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카셈이 중동 지역에서 소련에게 중요한 동맹이 될 수 있다는 언질을 소련측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결과 장기간에 걸친 동력 고갈과 사기 저하가 나타났고, 종파 간 분열이 이 과정을 더욱 재촉했다. 이를 틈타 1963년에 CIA가 배후조종한 우익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공산당은 분쇄되고 사담 후세인이 권력을 차지했다.
둘째 사례는 1970년대 이탈리아다. 1970년대에 이탈리아 공산당은 동구권 바깥 세계에서는 가장 큰 공산당이었다. 1969년부터 이탈리아에서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이 촉발한 거대한 급진화 물결이 일었다. 이 때문에 부르주아 정치는 갈수록 위기로 빠져들었다. 공산당 없이는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점점 분명해졌다. 이에 공산당 당수 베를링구에르는 ‘역사적 타협’이라는 해결책을 들고 나온다. 1973년 칠레에서 우익 군부 쿠데타로 모종의 인민전선 정부가 타도됐는데, 베를링구에르는 이것을 보면서 인민전선의 문제점을 깨닫기는커녕 ‘지금까지 우리는 인민전선을 너무 협소하게 이해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때까지는 인민전선에 포함될 [부르주아 ― 옮긴이] 세력을 ‘사회당 + 군소 부르주아 정당’으로만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독민주당과의 역사적 타협’이라는 것이 베를링구에르의 결론이었다. 기독민주당은 이탈리아의 주요 자본주의 정당으로서 나토·바티칸·마피아와 긴밀히 연계돼 있었다. 즉, 이탈리아 사회의 모든 악이 집약된 정당이었다.
기독민주당과 공산당 사이에 맺어진 ‘타협’의 내용은 결국 공산당이 기성 정당으로서의 명망을 이용해 이탈리아 자본주의를 구원하러 나선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전 총리를 포함한 이탈리아 지도층 인사들을 납치·살해하는 좌익 테러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러한 납치 사건 중 적어도 일부는 우익과 국가의 소행이 아닌가 하는 온갖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런데 ‘역사적 타협’이 체결됨에 따라 이탈리아 공산당은 좌익 테러에 대한 광포한 탄압에 지지를 제공했다. 그러나 일단 이탈리아 자본주의가 안정을 되찾고 급진화 물결이 가라앉자 공산당은 토사구팽 당했다. 1980년에 피아트 경영진은 노동자 투사들을 무더기로 해고하며 현장 조합원 운동을 파괴하려 했다. 이에 항의하는 파업 현장에 베를링구에르가 지지를 표명하러 갔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 밖에도 1980~9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여러 사례를 들 수 있겠지만, 어쨌든 요지는 같다. 인민전선은 진보적 운동을 전진시키기보다는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자본가의 이해관계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인민전선은 승리가 아닌 패배로 끝난다. 트로츠키의 1930년대 저작 때부터 혁명가들은 줄곧 이렇게 주장해 왔다. 이를 두고 인민전선 옹호자들은 혁명가들을 단결에 반대하는 종파주의자들로 몰아붙였다. 말도 안 되는 비방이다. 트로츠키는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독일에서 시행된 ‘제3기’[초좌파적 종파주의 ― M21] 정책의 폐해를 정확히 내다보고 비판한 인물이다. 그는 사회민주주의가 파시즘의 일종이라는 주장을 누더기로 만들었고, 파시즘에 맞서 노동자들의 공동전선이 필요하다고 줄기차게 강조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기본 원칙이다. 우리는 인민전선을 거부하지만 노동운동 내 다양한 세력을 공통의 적에 맞서 단결시키는 공동전선을 추구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단결이지, 노동계급을 자본가 계급의 일부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Q 인민전선론자들은 인민전선의 실패 경험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가?
보통 그들은 우리가 인민전선의 역사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평가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제2차세계대전 때 인민전선 덕분에 히틀러를 패퇴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히틀러를 패퇴시킨 것은 인민전선이 아니라 미국·영국·소련의 군사력이었다. 이 세 국가의 동맹은 정치적 결합이 아니라 각자 자기 잇속을 추구하는 국가들의 실용주의적 동맹이었다. 그래서 히틀러가 제거되자마자 그들은 서로 적이 됐고 그렇게 냉전 시대가 도래했다. 인민전선 옹호자들은 ‘달리 대안이 없었다’고도 말한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무렵 그리스와 이탈리아에 들어온 미·영 군대가, 물리치기에는 너무 강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해보지 않고서 어떻게 알겠는가? 세력 균형이라는 것은 이론적 분석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만 검증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멸적인 행동도 서슴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말기에 서유럽에는 공산당이 이끄는 무장 저항 세력이 해방시킨 지역이 곳곳에 있었다. 세력 균형이 결코 불리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러한 이점을 팽개쳐 버렸다. 1945년에 그리스 공산당은 소련의 압력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고, 이를 계기로 얼마 뒤에는 도리어 우파가 내전을 일으켰다. 스페인에서는 인민전선이 명백히 혁명과 내전의 패배를 불렀다.
Q 프랑스 급진당이 스페인 내전 당시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1939년까지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한 유화정책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독일과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독일이 제1차세계대전의 결과로 상당한 불이익을 당했고 이에 불만을 품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과 이탈리아가 원하는 것을 주면 그 둘을 달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영국 총리 체임벌린과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가 히틀러에게 체코슬로바키아의 절반을 넘겨준 1938년 9월의 악명 높은 뮌헨 조약도 이런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히틀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머지않아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반쪽과 폴란드까지 차지했지만 말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는 영국의 대외 정책을 따라갔는데, 영국은 마지막 순간까지 히틀러와의 충돌을 필사적으로 피하려 했다.
Q 인민전선 노선을 추구하는 공산당은 여전히 중간주의 정당인가 아니면 개혁주의 정당인가?
공산당은 원래 혁명 정당으로 출발했다가 스탈린주의 정당으로 변질됐다. 스탈린주의 정당들의 결정적 특징은 설령 그들이 대중적 노동자 정당일 때도 정치적으로는 소련의 대외 정책에 종속돼 있었다는 것이다. 소련의 대외 정책이 바뀔 때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공산당이 보인 좌충우돌이 이를 말해 준다. 그러나 공산당에는 딜레마가 있었다. 공산당이 그 나라 노동운동에 뿌리를 깊이 내릴수록 그 나라 노동운동에 순응해야 하는 압력이 커진 것이다. 그러한 압력 탓에, 일반적으로 노동조합 내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이 커지고 공산당원인 노조 간부가 늘어날수록 공산당은 점차 개혁주의로 기울었다. 이런 딜레마는 각국 공산당의 역사에서 여러 형태로 표출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소련과의 관계는 약해졌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더욱 약해졌다. 왜냐하면 제2차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유럽의 절반과 핵무기를 보유한 초강대국이 된 덕분에 대외 정책에서 다른 나라 공산당들에 훨씬 덜 의존해도 됐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서유럽의 주요 공산당들은 노동계급 기반뿐 아니라 원내 의석도 상당수 갖추고 있었으므로 소련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다. 그래서 서유럽 공산당들은 시간이 갈수록 소련과 멀어졌고 소련의 대외 정책을 비판하는 것도 덜 주저하게 됐다. 물론 소련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지만 크게 약화된 것은 사실이었다. 공산당이 노골적인 개혁주의 정당으로 변한 것도 이 과정과 함께 진행됐다. 전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느 트로츠키주의자가 한 말이 기억난다. “과거에 오스트레일리아 공산당은 오스트레일리아 노동계급과 부르주아지, 그리고 소련 지배계급, 이 세 계급 사이에서 동요했다. 그러나 이제는 오스트레일리아 노동계급과 부르주아지 두 계급 사이에서 동요한다.” 그러므로 중간주의는 아예 해당 사항이 없다. 중간주의 정당은 혁명과 개혁 사이에서 동요한다. 이와 달리 공산당은 스탈린주의 정당에서 개혁주의 정당으로 변해 왔다. 이는 주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공산당에 해당하는 얘기다. 다른 지역에서는 그림이 좀더 복잡하다.
Q 당신은 어떤 글에서 이탈리아 재건공산당이 이탈리아 민주당과 선거 연합을 맺을 수는 있어도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것은 문제라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좌파가 민주당 같은 정당과 선거 연합을 맺을 수 있는가?
내가 정확히 뭐라고 썼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재건공산당이 민주당과 ― 옮긴이] 협력할 수 있는 두 가지 정당한 방식에 대해 썼던 것 같다. 그중 하나는 민주당과 모종의 선거 연합을 맺는 방식이었다. 민주당은 옛 공산당의 비교적 보수적인 다수파를 흡수한 좌파 자유주의 정당이다. 나는 재건공산당 의원들이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우파에 맞서 때로는 민주당 의원들과 연대 투표를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라고도 썼다. 왜냐하면 다른 조건은 일단 제쳐두고 볼 때, 베를루스코니와 우파의 복귀를 재건공산당이 방조했다는 비난을 듣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도좌파 연립정부의 내각에 참여하는 것은 연대 투표와는 성격이 다른 문제다. 그래서 나는 재건공산당 의원들이 전쟁과 긴축에 찬성표를 던지느니 차라리 연립정부를 와해시키는 것을 불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중도좌파 연립정부가 근소하게 원내 과반 의석을 유지하고 있던 2006~07년의 복잡한 상황을 배경으로 쓴 글이었다.
Q 사회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민전선이 결성된다면 우리는 거기에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가?
답하기가 매우 어렵다. [인민전선 참여 여부는 ― 옮긴이] 그 인민전선의 구체적 형태에도 달려 있고, 우리의 청중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독립적 선전·선동이 가능한지 아닌지에도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조심스럽게 답하는 이유는 정말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르크스주의가 그저 몇 마디 공식으로 환원될 수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는 우리 모두 실천 속에서 터득해야 하는 방법론이다.
Q 당신이 신형 공동전선의 한 사례로 언급한 적이 있는 짐바브웨의 민주변화운동MDC에는 사회주의자들과 부르주아 야당이 모두 포함돼 있었는데, 한국에서도 그런 모델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MDC는 1990년대 말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전투적인 노동자 운동이 등장하면서 결성됐다. 이 운동은 극도로 비민주적인 무가베 정권을 타도하고자 하는 다수 대중의 염원도 대변했다. MDC 결성 당시에 가장 강력한 동참 세력은 노동조합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MDC의 지도자인 창기라이는 원래 노조 지도자였다. 그러나 MDC는 비록 인민전선 이데올로기를 채택하지는 않았어도 사실상 인민전선이었다. 일부 백인 농장주들을 비롯한 일부 대자본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MDC는 도시 노동계급과 빈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운동이기도 했다. 짐바브웨의 국제사회주의 경향 동지들이 MDC 창립을 돕고 거기에 참여한 것은 옳았다고 본다. 그들이 너무 일찍 MDC를 탈퇴했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보기에는 MDC 내에서 독립적으로 선전·선동할 기회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MDC 같은 모델이 가능하냐는 질문은 이해가 잘 안 된다. 민주노동당은 언제나 민주노총과 긴밀한 연계가 있었는데, 만약 민주노총이 민주당이 포함된 어떤 광범한 연합을 지지한다면 그 연합을 MDC와 유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상황은 짐바브웨와 워낙 달라서 딱히 어떤 구체적 가능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Q 영국에서는 인민전선의 문제가 없었는가? 인민전선과 관련해 영국 동지들이 경험으로 얻은 교훈이 있다면 알려 달라.
영국 사례를 들지 않은 것은 영국 공산당이 옛날부터 다른 유럽 공산당보다 훨씬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영국 노동계급의 전투적 부분에서는 영향력이 상당히 있기는 했다. 제2차세계대전 때는 소련이 참전하자 영국 공산당도 인민전선 전략을 채택했다. 참고로 소련이 참전하기 전인 첫 2년 동안 각국 공산당은 제2차세계대전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했다. 달리 말해, 독일과 이탈리아에 맞서 영국과 프랑스를 편들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이것을 보면 공산당이 얼마나 좌충우돌했는지를 알 수 있다. 1930년대 초에는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사생결단을 벌이다가 1930년대 중후반에는 인민전선을 지지했다가 1930년대 말에는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제2차세계대전 초기 소련과 독일이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은 데 따른 것이었다. 스탈린은 독일과 프랑스·영국이 서로 싸우는 것을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면서 어부지리를 얻기를 기대했다. 체임벌린과 마찬가지로 스탈린도 히틀러를 신뢰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어쨌든 일단 소련이 참전하자 영국과 미국 공산당은 참전론으로 입장을 바꿨을 뿐 아니라 파업까지 반대했다. 공산당은 금속 등의 산업에서 직장위원을 조직하는 데 기여한 정당이었는데, 이 영향력을 이용해 이번에는 군수 물자 생산에 총력을 기울이자고 독려했다. 영국에서는 이 덕분에 소규모 트로츠키주의 조직이 공산당 대신 파업을 주도할 기회를 얻기도 했다. 전쟁 기간 대부분에 걸쳐 영국을 통치했던 것은 노동당과 보수당의 연립정부였는데, 공산당은 종전 이후에도 이 연립정부가 유지되는 편을 선호했다. 다행히 노동당은 좀더 영리했다. 노동당은 독일이 패배하자마자 총선을 치르자고 주장했다. 총선 결과 노동당이 역사적 승리를 거두었고 영국에서 근대적 복지국가가 정착됐다.
영국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에 관해 말하자면, 앞에서 한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즉, 내가 어떤 표준 공식을 제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계급 간 세력 균형과 우리 자신의 역량 등 구체적인 여건을 봐야 한다. 1930년대의 비극에 일조한 한 가지 요인은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이 대체로 아주 작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태 흐름에 미미한 영향력밖에 행사할 수 없었다. 우리가 더 힘이 있다면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리겠지만 그때조차 그러한 가능성이 제기되는 구체적인 맥락을 살펴야 할 것이다.
Q 1970년대에 이탈리아 공산당이 주요 부르주아 정당과 연합하기 전까지 각국 공산당들은 프랑스 급진당 같은 군소 부르주아 정당만을 인민전선의 연합 대상으로 삼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프랑스 급진당 등은 주요 부르주아 정당과 성격이 달랐는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미 언급했듯이 급진당은 프랑스의 주요 자본주의 정당이었다. 자유주의·세속주의·공화주의 정당이었던 만큼 이데올로기적 톤은 진보적으로 들릴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급진당은 파리 코뮌을 짓밟고 나서 수립된 제3공화국의 핵심 정당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부르주아 정치권 내에서도 날카로운 양극화가 일어났다. 좀더 우파적인 부르주아 정당들은 공화정에 반대하고 가톨릭 교회를 지지하는 교권주의적 성향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 점에서 나치 점령기에 프랑스에서 수립된 비시 정권은 이런 세력들이 프랑스 혁명의 유산을 지우려고 만든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 같은 부르주아 정치의 관점에서 보자면 급진당이 진보적으로 보일 수 있었다. 인민전선의 전반적인 기조도 프랑스 혁명의 유산을 수호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급진당은 프랑스의 주요 자본주의 정당이었다. 급진당 각료들은 식민지 정복을 주도하고 파업을 탄압하는 등등의 일을 했다.
이탈리아를 보자면, 기독민주당이 전후 이탈리아의 지배적 부르주아 정당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말기에 이탈리아 국가를 장악해 재정비한 것은 기독민주당이었다. 1940년대 말에는 매우 위협적으로 보였던 공산당의 약진을 가로막은 것도, 이탈리아를 나토에 확고히 편입시킨 것도 기독민주당이었다. 그 밖의 부르주아 정당들은 기독민주당보다 작고 약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도 분열돼 있었고 약했다. 그래서 기독민주당과 공산당, 이 양대 정당이 이탈리아 정치를 주도했다. 이탈리아에서 ‘역사적 타협’ 이전의 인민전선은 기독민주당이라는 공통의 적에 맞서 공산당과 군소 부르주아 정당들이 연합하는 것을 의미했다. ‘역사적 타협’이 획기적 반전인 것은 이 때문이다. 공산당이 자신의 오랜 적을 끌어안은 것이다. 기독민주당은 1970년대 들어 지독한 부패의 늪에 빠졌고 1990년대 초에는 마침내 파멸했다. 그러니 ‘역사적 타협’이란 이 끔찍하게 부패하고 경멸받는 정당을 구제해 주는 것을 의미했다.
Q 차베스와 룰라도 인민전선을 통해 집권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어떻게 보는가?
룰라와 인민전선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룰라 집권기의 브라질 노동당은 고전적인 사회자유주의 정당이었다. 브라질 노동당은 지금도 노동계급에 기반이 있기는 하지만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실행하고 있다. 물론 노동당이 원내 다수당이 아니어서 온갖 군소 부르주아 정당들과 연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인민전선이라고 부른다면 인민전선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너무 희석된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일찍이 1890년대부터 부르주아 정당들과 연합을 해 왔다. 이런 류의 연합은 스스로 급진좌파 또는 혁명적 좌파라고 칭하는 세력들이 이른바 진보적 부르주아지와 연합해서 뭔가 바꿔보려고 하는 것을 뜻하는 인민전선과는 다르다.
차베스도 진정한 인민전선의 사례라고 볼 수 없다. 차베스는 좌파 군 장교로서, 그의 정치력은 그가 대중과 직접적으로 맺고 있는 관계에 달려 있다. 그는 최근에 와서야 그나마 정당 조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구축했다. 이 정당 조직은 정부의 방침을 대중에게 하달하는 구실을 한다. 이것을 인민전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차베스가 일부 부르주아지들과 거래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민전선이라는 것은 부르주아지를 상대로 한 좀더 명시적이고 전략적인 거래다.
Q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에 입당했을 때 트로츠키도 이를 지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국민당은 노동당이나 사회민주주의 정당과는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면, 공산당의 국민당 입당도 일종의 인민전선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국민당 입당이 결정된 것은 인민전선 전략이 정식화되기 전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인민전선에 대한 비판과 동일한 논지에서 비판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국민당은 식민지 열강과 연계된 반동적 세력들에 맞서 민족해방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공산당이 국민당에 들어간 것은 원칙적으로는 잘못이 아니라고 본다. 더욱이 공산당은 아주 공개적으로 입당했다. 이때도 진짜 문제는 코민테른에서 내려온 지침이었다. 공산당이 이른바 진보적 민족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농민 투쟁을 자제시켜야 한다는 지침 말이다. 이는 중국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 와 있다는 단계혁명론의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자문은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의 ‘쿨리’[미 대륙으로 끌려가 고된 일을 했던 아시아인 노예들 — 옮긴이] 노릇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 장제스가 1927년 상하이에서 공산당원들을 몰살한 것이 비극의 절정이었다. 공산당원들은 학살을 피해 도시를 떠나야 했고 그 결과 공산당은 노동계급과 단절됐다. 농촌 기반 전략인 마오주의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러나 어쨌든 애당초에 국민당에 입당할지 말지는 순전히 전술적인 문제였다.
Q 한국에서는 1987년 6월 항쟁 당시 국민운동본부라는 기구가 중추적 구실을 했다. 국민운동본부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지도부에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인민전선이었다고 보지만 좌파가 여기에 참여하고 지지한 것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셸 뢰비가 ‘제3세계에서는 인민전선이 옳다’고 일반화한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앞서 말했듯이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은 구체적 상황과 기회에 달려 있다. 예컨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독립적 노동조합이 등장하면서 혁명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아마도 거기가 혁명가들이 있기에 가장 좋은 자리였을 것이다. 1987년에 국민운동본부도 남한의 혁명가들이 있기에 가장 좋은 자리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일반적 공식을 만들 수는 없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공산당이 이끄는 인민전선인 레지스탕스에 참여하는 것이 옳은지 틀린지를 놓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다른 대안이 무엇이 있느냐다. 그러나 나는 미셸 뢰비가 인민전선 참여에 관한 일반적 공식을 만든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미셸 뢰비는 훌륭한 이론적 글을 많이 썼지만 구체적 정치 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둔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