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알렉스 캘리니코스 2011년 방한 강연 (2)
금융화와 오늘의 세계경제
이 글은 알렉스 캘리니코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장이 2011년 7월 방한해 본지 편집자들, 편집팀원들, 그리고 주요 기고자들에게 한 강연과 대담을 녹취한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본지의 편집 자문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최근 역사에서 금융시장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금융시장의 자금 이동으로 촉발된 동아시아 위기를 떠올려 봐도 그렇고, 1930년대 이후 사상 최악의 경기 침체를 부른 2008년 금융 붕괴를 떠올려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오늘날 금융시장이 하는 기능을 어떻게 이론화할 것인가?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이를 ‘금융화 문제’라고 부른다.
금융화에 관해 여러 관점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뒤메닐과 레비의 관점이다. 뒤메닐과 레비는 신자유주의를 금융의 헤게모니로 규정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주장이 함축돼 있다. 첫째, 금융이 경제 전체를 지배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뒤메닐과 레비는 금융 부문이 헤게모니를 차지하기까지 나타난 정치적 과정에 주목한다. 특히, 1979년 미국 연준 의장 폴 볼커가 일으켰다는 ‘쿠데타’에 주목한다. 그 ‘쿠데타’란 볼커가 금리를 급격히 인상해 미국 경제를 비롯한 세계경제에 큰 침체를 불러일으킨 것을 말한다. 이 쿠데타는 여러 가지 파급효과를 낳았는데, 그중 하나가 제3세계 여러 나라들이 외채를 갚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비롯한 외채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 나라들은 IMF와 세계은행이 요구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금융의 헤게모니를 강화시켜 준 정치적 과정은 이 밖에도 몇 가지가 더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메닐과 레비뿐 아니라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동의한다. 특히 1970~80년대에 금융시장 규제 완화에 속도가 붙었다. 뒤메닐과 레비는 이러한 금융화가 선진국의 경제성장을 둔화시켰고 현재의 경제 위기를 불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2004년에 출판한 책에서 금융의 지배가 금리 인상을 불러왔다고 주장했다. ‘금리가 오르면 생산적 투자가 어려워진다. 투자 자금의 조달 비용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금리는 투자를 저해하고 경제성장을 저해한다. 반대로 금융권은 이자 수익이 올라 이득을 본다’는 것이다.
뒤메닐과 레비의 분석에는 분명 장점이 있다. 예컨대, 그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빈부격차 확대와 관련된 아주 자세한 데이터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들의 분석에는 커다란 허점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2004년 저서에서 금리 인상이 금융 지배의 결과라고 했는데, 오히려 2000년대 초 미국 연준은 금리를 매우 낮은 수준으로 인하했다. 특히 2008년 붕괴 이후 미국과 영국의 금리는 거의 제로 금리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인플레를 감안하면 마이너스 금리다. 그러므로 금융권이 고금리를 강요한다는 주장은 너무 일면적이다. 심지어 저금리 기조가 은행들에 이득이 되고 있다는 점도 덧붙여야겠다. 은행들은 중앙은행한테서 초저금리로 돈을 빌려 좀더 높은 금리로 대출해 이윤을 얻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뒤메닐과 레비보다 좀더 정교한 관점으로 금융화를 봐야 한다.
금융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비교 수단으로서 금융자본에 관한 이론을 한 번 살펴보자. 금융자본론은 제1차세계대전 이전에 오스트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 루돌프 힐퍼딩이 개발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레닌과 부하린 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힐퍼딩은 자본주의가 갈수록 조직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단지 기업들이 더 커진다는 뜻이 아니었다. 은행들이 산업 기업들을 지배하게 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즉, 자본주의가 은행들의 지배 하에 조직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힐퍼딩의 이론이 ‘금융자본’론이라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론은 오직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기에만,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현실에 부합했다. 19세기 말 미국과 독일에는 이 이론이 어느 정도 들어맞는 것이 사실이다. 당시 영국이 여전히 세계 최강의 자본주의 국가인 상황에서 미국과 독일이 산업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과 독일 경제의 보호주의 장벽이 매우 높았던 것도 영국과의 경쟁으로 자국 산업이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미국과 독일에서는 은행들이 산업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는 매우 중요한 구실도 했다. 미국과 독일 자본주의는 비교적 역사가 짧고 취약했다. 산업 기업들이 투자에 필요한 자원을 어디서 끌어다 쓸 수 있었을까? 바로 은행들이 필요한 자원을 한데 모아서 기업들한테 빌려 주는 구실을 했다. 흔히 미국과 독일의 은행들은 영국 투자자들과 자국 기업들 사이에서 중개인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제1차세계대전 이전 시기 신흥 공업국이었던 미국과 독일에서 은행들은 실제로 중요한 전략적 구실을 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의 사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 미국은 더는 외국 자본을 빌려 쓰는 개도국이 아니었다. 도리어 다른 나라에 자본을 빌려 주는 처지가 됐다. 이처럼 힐퍼딩이 설명하려 한 제1차세계대전 이전의 경제 관계들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에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미국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독일에서는 은행과 산업 기업 간의 관계가 여전히 고도로 제도화돼 있었는데, 이는 일본에서 그와 비슷한 관계가 존재한 것과 부분적으로 같은 이유에서였다.
오늘날 금융화의 특징
오늘날의 금융화는 힐퍼딩이 묘사한 것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첫째, 산업 기업과 은행 사이의 상호 독립성이 훨씬 커졌다. 또한 오늘날에는 금융시장이 워낙 발달해서 기업들은 필요한 자금을 금융시장에서 직접 조달할 수 있다. 즉, 은행의 자금 중개 기능은 기업들에 더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GM이나 GE 같은 일부 대기업들은 아예 자기 은행을 보유한다. 이처럼 대형 제조업·유통업 기업들은 스스로 금융시장에 참여하는 주체다. 그렇다면 은행들이 버는 돈은 과연 어디서 나오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예전에는 은행들이 기업에 대출해 주면서 돈을 벌었다. 그러나 기업들한테 더는 은행이 필요하지 않게 되자 최근 수십 년 동안 은행들은 돈벌이가 될 만한 온갖 기상천외한 사기 수법을 개발해 냈다. 오늘날 은행들은 기업들의 주식 매각이나 인수·합병을 도우면서 수수료를 챙기며, ‘프롭 트레이딩’[고객의 예금이 아닌 자기 자산이나 차입금을 주식, 채권, 파생상품 등에 투자해 수익을 올리는 것 — 옮긴이]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투기를 벌이기도 한다. 달리 말하면, 은행들은 더는 타인을 대리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금융시장에서 투기를 해 돈을 번다. 2000년대 중반의 신용 호황 때 은행들이 벌인 온갖 미친 짓 가운데 상당수도 이러한 자체 투기와 관련 있었다.
금융화의 둘째 특징은 모든 사람이 거기에 말려들게 됐다는 점이다. 제조업·유통업 기업들이 직접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중간계급과 노동계급 가계들도 금융시장에 참여하게 됐다. 신용카드 사용자는 누구나 금융시장 참가자다. 주택 담보 대출을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왜일까? 신용카드를 사용하거나 주택 담보 대출을 받으면 그 순간 다른 누군가에게는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자산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은행들이 한 일도 평범한 소비자들의 가계 대출 등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 이윤을 최대한 뽑아내려 한 것이었다.
금융화의 셋째 특징은 금융 파생상품의 범람이다. 파생상품이란 말 그대로 다른 어떤 상품의 가치에서 파생된 가치를 지닌 상품이다. 원래 파생상품은 미래의 가격 변동에 대비한 일종의 보험으로 개발됐다. 파생상품의 예로는 여섯 달 뒤 석유 1천 배럴을 미리 정한 가격에 살 수 있는 권리 등이 있다. 파생상품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미래를 계획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투기 수단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 신용부도스와프CDS가 이를 보여 주는 사례다.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 줄 때는 채무자가 돈을 갚지 않을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는 동시에 CDS를 매입하면 채무자가 돈을 갚지 않을 때를 대비해 보험을 든 것 같은 효과가 있다. 만약 채무자가 돈을 갚으면 채권자는 CDS 매입 비용만 지불하면 그만이다. CDS라는 보험 상품을 발행한 금융기관에 보험료를 낸 셈 치면 된다. 그런데 2008년 금융 위기 직전에는 일부 은행과 헤지펀드가 특정 기업의 파산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해당 기업이 파산하면 돈을 벌어보겠다는 베팅 수단으로 CDS를 대거 매입했다. 이 모든 요인들이 결합돼 금융 붕괴가 촉발됐다.
2001년에서 2004~05년 사이의 매우 낮은 금리 덕분에 은행들은 돈을 쉽게 빌릴 수 있었지만, 정작 그 돈을 수익성 있게 사용할 방법을 찾지 못해 갈수록 애를 먹고 있었다. 결국 그들이 생각해 낸 한 가지 절묘한 꼼수가 바로 그 유명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이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가난하거나 신용 등급이 낮아 돈을 빌려 주기가 매우 위험한 가계를 상대로 한 주택 담보 대출을 말한다. 그 대신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을 받는 사람은 일반 모기지 대출보다 더 높은 금리를 부담한다. 결국 가난한 흑인 가계 등을 대상으로 이처럼 고금리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을 해 주는 사업이 성행하게 됐다. 대출을 상환할 때 첫 해에는 낮은 이자를 부과하다가 다음 해부터는 이자가 껑충 뛰는 식의 사기 수법도 동원됐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대출을 이렇게 남발한 은행들은 원리금을 돌려받을 때까지 서브프라임 대출 채권을 쥐고 있을 마음이 없었다. 워낙 돌려받지 못할 위험이 큰 부실 채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행들은 여러 서브프라임 대출 채권을 묶어 부채담보부증권CDO이라는 파생상품을 만들었다. CDO에는 서브프라임보다 더 안전하지만 금리는 더 낮은 모기지 대출 채권들도 함께 섞였다. 그런 다음 은행들은 신용평가회사를 매수해 CDO에 높은 신용 등급을 부여하게 했다. 그런 다음 이 CDO를 사 줄 ‘호구’를 물색했다. 주로 독일 은행들이 호구 노릇을 했다. 이 모든 일은 순조롭게 돌아가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금리가 오르자 서브프라임 대출을 받은 사람들 상당수가 이자를 갚지 못하게 됐다. 그래서 디폴트에 빠졌다. 그러자 갑자기 모기지 대출 채권의 가치와 그것을 짜깁기해 만든 상품인 CDO의 가치가 폭락했다. 그리고 CDO를 발행한 은행들은 자신들이 미처 팔아치우지 못한 채 떠안고 있는 부실 채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더 양심 불량인 은행들은 CDO 시장의 붕괴 가능성에 베팅하며 자신이 보유한 CDO를 투매했다. 은행들이 서로 대하는 방식은 서로 살점을 뜯어먹으려고 덤비는 상어 떼에 비유할 수 있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서 점점 큰 은행들이 파산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2008년 9월 15일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했다. 수많은 서구 은행들은 이 시기에 떠안은 부실 채권들을 지금도 털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윤율 저하 경향과 금융화의 관계
내가 마지막으로 다루려는 쟁점은 위기를 초래하는 자본주의의 장기적 경향과 금융화의 관계, 특히 이윤율 저하 경향과 금융화의 관계다. 마르크스는 금융 부문이 가치를 창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은행들이 하는 일은 생산적 부문의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의 일부를 흡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금융화 현상이 더 큰 틀의 축적 과정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먼저, 이윤율 저하 경향에 관해서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다. 그러나 내가 볼 때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이윤율이 결정적으로 하락했다는 로버트 브레너와 크리스 하먼의 분석이 옳다. 신자유주의의 본질은 이윤율을 1950~60년대 수준으로 회복시키려는 시도다. 이를 위해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무지막지한 공세를 퍼부었고, 그 결과 특히 미국에서 착취율이 급상승했다. 그러나 착취율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이윤율을 1950~60년대 수준으로 회복시키기에 역부족이었다. 선진국 경제들의 성장률이 1973년 이후 저조했던 것은 바로 이윤율 저하 때문이었지, 금융화 때문이 아니었다. 금융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도 이윤율 저하라는 배경이 중요하다. 생산적 투자로 충분한 이윤을 얻기 어려워지면 생산적 부문이 아닌 다른 부문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자본가들이 일차적으로 동료 자본가의 돈을 빼앗으려고 각축을 벌이는 곳인 금융시장이 대안적인 투자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금융시장은 또한 예기치 않은 어떤 요인 때문에 경제 전체에서 더 중요한 구실, 즉 경제성장의 엔진 구실을 하게 됐다. 1990년대 말의 닷컴 호황과 2000년대 중반 미국의 주택시장 호황을 보면 동일한 패턴이 관찰된다. 두 경우 모두 많은 사람들이 보유한 어떤 자산의 가격이 상승했다. 닷컴 호황 때는 주식 가격이 올랐고, 주택시장 호황 때는 주택 가격이 올랐다. 두 호황 모두 버블(거품)이었다. 즉, 자산 가격이 경제적 현실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치솟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버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자신이 소유한 집 가격이 50퍼센트, 심지어 1백 퍼센트 오르면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단지 기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돈도 더 많이 빌릴 수 있다. 돈을 더 빌려서 카드 빚을 돌려막기도, 새 차를 장만하기도, 휴가를 떠나기도, 또는 단지 장을 보러 가기도 쉬워진다. 미국의 주택시장 버블이 이런 식으로 소비를 촉진했다는 많은 증거가 있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자산 버블은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유효수요를 지탱하는 구실을 했다. 이탈리아의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는 이를 두고 ‘자산 거품이 주도한 민간 케인스주의asset bubble driven privatized Keynesianism’라고 했다. 케인스는 경제 위기를 막으려면 정부 지출을 통해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유효수요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이러한 해법이 잘못된 것으로 치부됐다. 그런데 앞서 말한 금융 거품들은 마치 민간 케인스주의적 총수요 관리와 비슷한 효과를 냈다. 즉, 높아진 자산 가격이 사람들로 하여금 돈을 더 많이 빌리고 쓰도록 부추긴 것이다. 여기서도 국가의 개입은 있었다. 금리를 낮게 유지함으로써 애당초 버블이 발생하게 만든 것이 바로 국가였다. 이렇듯 금융시장의 버블은 이윤율이 여전히 비교적 낮은 상황에서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대안적 수단이 됐다.
이 점을 보면, 어째서 미국 주택시장의 붕괴가 그토록 재앙적인 경제 위기를 불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 탓에 미국 자본주의는 특히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여전히 주택시장이 침체에 빠져 있다. 주택 가격이 심지어 1930년대 대공황 때보다 더 큰 폭으로 하락했다. 소비자들은 갚아야 할 빚이 많은 탓에 돈을 아껴 쓰고 있다. 많은 은행들이 정부한테 온갖 지원을 받고 겨우 살아남았지만 여전히 많은 병폐를 안고 있다. 미국 은행들보다 훨씬 가혹한 구조조정을 겪은 유럽 은행들은 상태가 더욱 엉망이다. 이렇듯 현재로서는 그동안 경제성장을 이끈 주된 엔진 하나가 고장 난 것으로 보이며, 그것을 대체할 엔진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Q 크리스 하먼은 2003년에 쓴 ‘제국주의 분석’[국역: 《크리스 하먼의 새로운 제국주의론》, 책갈피, 2009 ― M21]에서 레닌과 부하린의 금융자본 개념이 조금 다르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설명해 달라.
하먼이 레닌과 부하린의 금융자본 개념 차이를 지적한 것은 전적으로 옳다. 전반적으로는 부하린의 제국주의 관련 저작이 레닌의 것보다는 경제 이론 면에서 더 정교하다. 부하린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 축적론》에 대한 탁월한 비판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레닌은 부하린의 저서인 《이행기 경제학》에 몇 가지 부차적인 주석을 달았다. 거기서 레닌은 부하린이 변증법과 모순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부하린은 자본주의의 조직화 경향이 ‘통합된 국가자본주의’의 등장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봤다. 즉, 국가가 경제 전체를 조직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부하린은 앞서 언급한 한 가지 잘못된 경제 위기 이론, 즉 경제 위기가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 때문에 발생한다는 이론을 수용했으므로 일단 완전한 국가자본주의가 탄생하면 경제 위기가 사라지리라고 예측했다. 국민경제 안에서는 국가가 생산과 소비를 조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유일하게 남는 모순은 국가 간 지정학적 경쟁일 것이다. 이런 관점 때문에 부하린은 1929년에 경제 위기를 내다본 어느 부르주아 경제학자의 예측을 비웃었다. 달리 말하면, 부하린은 제국주의를 국가자본주의화 경향과 자본의 국제화 경향이 결합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탁월하게 분석했지만, 어느 지점부터는 마치 국가자본주의화 경향이 다른 한 쪽 경향인 국제화 경향을 완전히 압도해버리는 것처럼 분석을 전개한다. 그래서 레닌은 부하린이 ‘모순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레닌 버전의 제국주의론은 비록 이론적으로는 덜 정교했지만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세력 관계를 끊임없이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인 ‘불균등 발전’이라는 탁월한 개념을 포함한다. 국가들 간의 안정적인 연합이 불가능한 것은 바로 이 불균등 발전 때문이다. 하먼이 정확히 이러한 차이점에 주목한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본 레닌과 부하린의 차이는 이렇다.
Q 크리스 하먼은 오늘날 금융 부문이 과거의 상시무기경제와 비슷한 구실을 한다고 지나가듯이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필진 중에는 금융 부문은 상시무기경제와 달리 이윤율 저하를 한동안 상쇄하는 구실을 할 수 없다고 반론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당신의 설명을 들어 보니 금융이 이윤율을 지탱하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하는 이중적 기능을 하는 것 같은데, 상시무기경제와 비교해 설명해 달라.
하먼이 금융화를 상시군비경제에 비유한 것은 사실이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직후에 쓴 소책자[국역: ‘또다시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 《21세기 대공황과 마르크스주의》, 책갈피, 2009 ― M21]에서 그는 ‘상시부채경제’를 말했다. 현대 자본주의가 갈수록 대규모로 누적되는 부채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에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상시부채경제’가 상시무기경제와는 다르다고 본다. 무기는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상품이다. 무기의 특수한 점은, 일단 생산되고 나면 자본주의의 재생산 과정에 재투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기는 노동자들이 소비할 수도 없고, 다른 제품의 생산에 사용될 수도 없다. 그래서 하먼은 무기가 일반이윤율 형성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무기 생산에 대한 투자가 높은 수준으로 이뤄졌지만,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급상승하거나 이윤율이 하락하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편, 무기 생산은 케인스주의적 기능도 수행했다. 즉,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유효수요를 유지하거나 확대하는 구실도 했다.
그런데 금융자본은 아까 말했듯이 생산 부문에서 나온 잉여가치 일부를 단지 흡수하기만 하는 자본 형태다. 금융 부문에서는 어떠한 생산적 노동도, 가치 창조도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금융과 무기 산업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그 때문에 금융은 일반이윤율 형성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금융은 무기경제와 같은 케인스주의적 기능을 할 수 있다. 즉, 금융 버블과 ‘자산 효과’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유효수요를 유지하거나 확대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이 점에서는 상시무기경제와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더 일반적인 측면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무기경제는 25년 동안 서방 자본주의를 안정시켰다. 반대로 금융화는 자본주의를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자산 버블과 연동시킨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더한층 불안정하게 만든다.
Q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호황은 전쟁이 불러온 대량 파괴와 상시무기경제의 효과가 결합돼 나타난 것일 텐데, 둘 중 어느 것의 효과가 더 컸다고 보는가?
상시무기경제와 자본 파괴 중 어느 쪽이 장기 호황에 더 기여했는지를 따지는 것은 큰 실익이 없다고 본다. 둘 다 상호 보완적인 구실을 했다. 군비 지출을 주되게 떠맡은 나라는 미국과 영국이었다. 특히, 미국의 군비 지출은 앞서 설명한 경제 안정화 효과를 냈다. 미국과 영국은 제2차세계대전 승전국이었고 미국 본토는 공격을 받지 않아서 자본 파괴 정도가 미국과 영국에서 가장 낮았다. 자본 파괴 효과가 가장 컸던 곳은 유럽 대륙과 일본이었다. 이 두 지역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득을 봤다. 첫째, 신규 생산 시설을 가지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둘째, 서독과 일본은 군비 지출 수준이 매우 낮았으므로 산업 육성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미국과의 생산성 격차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상시무기경제의 안정화 효과가 없었다면 서독과 일본이 그렇게 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Q 신자유주의를 새로운 ‘축적 체제’라고 규정하는 좌파들이 있는데, 이런 주장은 왜 문제가 되는가?
나는 ‘축적 체제’라는 개념이 그다지 유용하다고 보지 않는다. 부분적으로는 이론적 이유 때문이다. 원래 미셸 알리에타가 창안한 축적 체제 개념은 생산과 소비를 조율하지 못하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때 축적 체제라는 것은 축적과 생산을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시키는 일련의 제도를 말한다. 약 20년 전에 로버트 브레너와 마이클 글릭은 축적 체제론을 매우 설득력 있게 비판했다. 나는 단일한 ‘신자유주의 축적 체제’라는 개념도 딱히 쓸모가 없다고 본다. 단지 선진국만 놓고 보더라도 ‘축적 체제’의 형태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금융화의 중심지는 미국과 영국이다. 이 두 나라에서는 금융의 힘이 매우 커졌지만 제조업은 어느 정도 쇠퇴했다. 그런데 독일의 그림은 또 완전히 다르다. 독일 자본주의는 ‘조율된 자본주의’의 한 사례로서, 힐퍼딩이 묘사한 은행과 산업 부문의 통합이라는 특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또한 독일은 세계 2위의 수출 대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주력 수출 품목은 고도로 특화된 기업(일부는 대기업이고 다수는 중소기업인)들이 생산하는 복잡한 제조업 제품이다. 독일은 미국과 영국보다 앞서 설명한 형태의 금융화 수준이 훨씬 낮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어떤 단일한 ‘신자유주의 축적 체제’라고 말할 때 나는 그 축적 체제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Q 2008년에는 ‘국가의 귀환’에 대한 얘기가 많았지만 이제는 신자유주의가 더욱 독해진 모습으로 귀환한 것 같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확실히 국가의 대대적인 귀환이 있었고 그것은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미국 정부는 은행들을 구제했을 뿐 아니라 GM과 크라이슬러를 국유화했고, 거의 3년째 초저금리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엄청난 양의 자금을 은행 시스템에 투입했다. 국가 개입의 규모가 워낙 컸으므로 이를 역전시키려는 강경한 움직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의 티파티와 영국의 보수 연립정부가 그런 예다. 이들이 돌이키려 하는 현실 하나는 경제 위기 이후 국가 지출이 증대한 동시에 경제 전체의 규모가 수축된 탓에 경제 전체에서 국가가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이 많이 커졌다는 것이다. 문제는 경제가 국가 지원 없이 버티기는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는 영국 정부 각료 한 명이 영국 중앙은행더러 금융 시스템에 더 많은 돈을 퍼부으라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유로존 위기에서는 위기의 단계마다 유럽 중앙은행이 내키지는 않지만 경제를 지탱하는 데서 더 큰 구실을 떠맡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이처럼 국가는 2008년에 귀환해서 지금도 떠나지 않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케인스주의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주요국 정부들은 케인스주의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교리 수준에서는 케인스주의를 재고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가 주요 경제를 지탱하고 있다는 현실에는 변함이 없다. 중국 경제도 마찬가지다.
Q 2008년의 ‘국가의 귀환’은 자본의 국제화 경향과 국가화 경향 사이의 모순에 이전과는 다른 특징을 부여하는가? 또는 자본주의가 어떤 새로운 단계에 왔다고 볼 수 있는가?
국가자본주의로 회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국제 자본이 국민국가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다. 그러나 국민국가들의 여전한 권력이 모순을 더 악화시킬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유럽연합은 국민국가를 초월하는 세계적 모범 사례로 여겨졌다. 그러나 2008년 이후 우리가 발견한 것은 여전히 국민국가들이 유럽연합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국가들의 지배는 유로존 위기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고 유로존을 해체 직전까지 몰고갔다.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말하기는 조심스럽다.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대大변화’를 너무 성급하게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직 경제 위기가 한참 더 갈 텐데 앞으로 어떤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Q 데이비드 하비의 ‘탈취에 의한 축적’론에 크리스 하먼은 꽤나 비판적이지만 당신은 하비에 더 호의적인 듯한데, 그 차이는 무엇 때문인가?
데이비드 하비를 대하는 하먼과 나의 논조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하비의 ‘탈취에 의한 축적’ 이론에 동의하기 때문은 아니다. 샘 애슈맨과 나는 《히스토리컬 머티리얼리즘》에 기고한 글[Sam Ashman & Alex Callinicos (2006), ‘Capital Accumulation and the State System: Assessing David Harvey’s The New Imperialism’, Historical Materialism 14 (4):107-131 ― M21]에서 ‘탈취에 의한 축적’론을 하비 자신과 제3자들이 오·남용하는 사례를 상세히 비판했다. 나는 하먼이 ‘신자유주의를 이론화하기’라는 글[국역: ‘신자유주의의 진정한 성격’, 《21세기 대공황과 마르크스주의》, 책갈피, 2009 ― M21]에서 하비를 너무 심하게 비판한 것 같고, 하먼에게도 그렇게 말한 바 있다. 물론 그 글의 내용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조가 너무 공격적이었다. 나는 하비가 하는 구실이 대체로 매우 긍정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하먼과 논조 차이가 있다. — 옮긴이] 하비의 온라인 마르크스주의 강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경청하는 거대한 국제적 청중을 만들어 냈다. 또한 그는 비록 레닌주의자는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조직하고 투쟁할 것을 고무한다. 하비와 나는 지난해에 그리스 동지들이 주최한 맑시즘 행사에서 발표를 하기도 했는데, 당시 그의 논조는 매우 긍정적이고 고무하는 투였다. 또한 사석에서는 SWP가 하는 일이 매우 훌륭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내게 말하기도 했다. 즉, 그는 우리와 동일한 정치관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전반적으로 우리에게 매우 우호적이다. 따라서 내가 볼 때 우리는 그를 동맹으로 대해야 한다. 하먼의 생각이 나의 이런 생각과 얼마나 달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Q 금융자본의 산업자본 지배를 이야기할 때 상업자본은 거론되지 않는데, 오늘날 상업자본이나 유통자본은 어떤 지위에 있는가?
상업자본에 관한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생산의 조직 방식에 큰 영향을 끼치는 거대 유통 자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월마트가 대표적인 사례다. 몇 년 전 수치를 보면 미국으로 수입되는 중국산 제품의 10분의 1이 월마트를 통해 수입된다. 즉, 월마트는 대체로 가난한 미국 소비자들에게 판매할 값싼 제품을 생산하고자 노동자들을 초착취하는 중국의 공장들과 직접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슈퍼마켓 산업이 고도로 집중화돼 있다. 영국의 거대 슈퍼마켓 기업들은 영국 농민들뿐 아니라 제3세계 농민들에게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현대 자본주의에서 상업 자본이 독자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지적은 매우 옳다.
Q 아랍 세계에서 금융화는 어떤 파장을 미치고 있는가?
금융화는 아랍 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랍 세계의 부가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걸프 지역에서 특히 더 그렇다. 두바이와 카타르 같은 나라들은 금융 중심지로서 자국 경제를 특화하려 해 왔다. 이런 곳의 금융 활동은 많은 부분이 합법성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서방 금융기관들한테 아주 매력적이다. 서방 은행들은 법률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는 거래를 이런 나라에서 눈에 안 띄게 벌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고유가 덕분에 걸프 지역에는 자본이 남아도는 국가와 기업들이 많다. 이런 남아도는 자본 덕분에 이들은 서방의 금융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서방의 일부 은행은 걸프 지역의 자금을 수혈받아 구제되기도 했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