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노동계급 형성과 민주노조운동의 사회학》
한국 노동계급은 쇠퇴했는가?
한국 노동운동이 전보다는 정체된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진보진영 활동가들과 노조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조돈문과 유사한 생각이 상식처럼 퍼져 있다. 그런데 흔히 쇠퇴론에는 운동의 활력 감퇴를 확장해서 노동계급의 잠재력 훼손으로 과대 해석하는 혼란이 뒤섞여 있다.
이러한 노동운동 ‘쇠퇴론’이 나오는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쇠퇴론은 굴곡이 있기 마련인 계급투쟁에서 활력이 덜한 운동의 정체기나 침체기 때 제기되곤 한다. 또, 쇠퇴론은 자본주의 산업 재편과 신자유주의 같은 경제정책 변화를 반영하기도 한다. 유럽에서는 전후 장기 호황 종료 이후 신자유주의 확산기에 이런 주장이 기승했고, 한국에서도 1997년 이후 10여 년간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확산됐다.
그러나 요즘에는 노동계급이 쇠퇴했다는 주장이 전보다 더 어색하게 들린다. 유럽 노동계급이 ‘보수화로 야성野性을 잃었다’는 주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다시 투쟁에 나서고 있고, 이집트 노동계급도 신자유주의에 맞선 반격의 선두에 서 있다. 그럼에도 노동계급 쇠퇴론이 여전히 활동가들을 짓누르는 이유는 국내 계급투쟁이 아직 교착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 계급이 아닌 다중이 주체라는 ‘자율주의’, 정규직이 양보해야 고립을 면하고 ‘계급형성’이 가능하다는 ‘사회연대전략’ 등이 있다. 조돈문은 최근 들어 지역 운동과의 접촉을 강조하고, 노동자 ‘양보교섭’의 필요성도 주장한다. 그러나 모순되고 혼란스런 주장이 뒤섞여 있긴 해도 조돈문이 사회연대전략 같은 노골적인 정규직 양보론을 주창하거나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기각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관심과 애정과 실망과 안타까움으로 빚어진” 《사회학》은 “노동계급 형성과 민주노조운동의 거듭남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다.(15) 대우자동차 파업과 삼성의 노동자 탄압에 맞선 운동에 연대했고 지금도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조돈문의 실천적 면모 때문에 노동운동의 현 상황을 보는 그의 고찰이 진지하게 다가오지만, 그의 상황 인식은 지나치게 비관적인 면이 없지 않다.
자본주의 경제 구조 변화로 노동운동이 구조적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은 새로운 전략 추구로 이어진다. 지역·사회운동과 융합하자는 ‘사회운동노조주의’,혼란스러운 계급 개념
3 불평등이 심해졌는데도 계급형성이 후퇴하고 계급의식이 약해진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66) 노동계급의 처지가 후퇴하는데 투쟁이 불충분한 현실의 답답함이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호황이든 불황이든 경제 상황과 투쟁이 직결된다는 기계적 관점은 마르크스의 생각과는 무관하다. 마르크스의 눈으로 볼 때 계급의식 발전의 결정적 요소는 계급투쟁이다. 투쟁 돌입 여부는 불만 수준보다는 자신감에 달려 있다.
조돈문은 “외환위기 이후 노동계급 형성의 후퇴는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자들에게 난제”라고 말한다.·지식 같은 개인의 보유 자원 양과 종류도 기준에 포함해야 한다”고 4 비판하자 조돈문은 자신도 사실상 그런 방법을 사용하고, 베버 등의 방법과 개념적 차이는 있어도 계급 위치 측정을 위한 조작화 단계에 이르면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60-61)
그런데 조돈문을 비롯한 사회학자들은 투쟁의 동역학보다는 현상을 세부적으로 설명하기에 몰두한다.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저자 구해근이 “계급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베버나 부르디외의 등급별 개념, 문화 조돈문이 받아들이는 에릭 올린 라이트의 ‘분석적 마르크스주의’는 생산수단 통제력 보유 여부를 계급 분석의 기준으로 채택한다는 점에서 베버주의 등과 차이가 있다. 그러나 조돈문은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 보유 정도(기술재)에 따라 개인의 계급적 위치가 달라질 수 있다고도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전문적 기능이 있는 기술직이나 고학력자는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자가 아닌 계급이 된다. 에릭 올린 라이트는 이를 아주 분명하게 규정한다. “자본주의에서 높은 기술 수준을 가진 임금 생활자들(예를 들어 전문직)은 착취당하는 동시에 기술을 보유했으므로 착취자들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기 시작하면 소득 규모, 직업의 종류, 문화적 소양 수준, 소비 수준 등 끝도 없이 등급을 나눠서 계층을 구분하는 부르주아 사회학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진다는 문제가 생긴다. 이런 접근법이 도달할 수 있는 정치적 결론은 노동계급이 “내부적 분절화”나 “계급 내 양극화 확대” 등으로 갈수록 단결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에릭 올린 라이트를 겨냥해 “분석적 마르크스주의는 … 날이 갈수록 마르크스주의를 부르주아 사회학과 사회민주주의 정치로 대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계급은 노동자들을 등급 매기는 것과 무관하다. 계급 규정은 개인의 문화적 취향, 소비 패턴, 임금 수준, 직업의 종류, 의식 등 온갖 기준으로 표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딱지 붙이는 것이 아니다. 계급은 생산관계에 놓인 실질적 지위에 따른 구분이지 분배 질서에서 어디쯤 있느냐에 따른 것도 아니다. 계급은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력이 있는지 없는지, 다른 말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처지인지 아닌지에 따라 나뉜다. 따라서 계급은 주관적인 태도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형성된 관계다. 자동차 공장 노동자가 오페라 관람을 다니며 스스로 중산층이라 생각하더라도 그는 노동자다. 계급은 착취의 집단적 표현이자, 착취가 사회구조에 반영되고 고착화된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적대적이다. 바로 이 적대적 관계가 자본주의 사회를 규정한다.8 조돈문이 ‘계급형성’이라고 규정한 “구조적으로 정의된 노동계급이 하나의 집합적 행위자로 형성되는 과정”은 마르크스가 말한 ‘대자적 계급’이 구성되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돈문은 개념상의 혼란 때문에 ‘계급형성’의 후퇴를 노동계급 잠재력 약화와 등치시킨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노동계급에게 부여한 지위 자체가 노동계급의 잠재력이라고 봤다.
조돈문의 ‘계급형성’론에서 드러나는 계급 개념은 매우 모호하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노동계급이] 자본에 대해서는 이미 하나의 계급이지만 … 투쟁 속에서 대중이 결합하고 자신을 대자적 계급으로 구성한다”고 명확하게 설명했다.9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의 통념을 받아들이고 때때로 반동적 선동에 이끌리는 것을 개탄했지만, 혁명을 향한 투쟁에서 자본주의의 오물을 벗어던지고, 사회주의 권력을 감당할 혁명적 계급으로 거듭나리라고 확신했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들이 흔히 후진적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스러운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지배계급의 사상들은 어떠한 시대에도 지배적 사상이다. 사회의 지배적 물질적 힘인 계급은 동시에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힘”이라고 말했다.10 자본가 계급은 노동계급을 착취하지 않으면 체제를 운영할 수 없으므로 노동계급은 자본주의를 극복할 힘이 있다. 노동자들은 착취를 바탕으로 한 적대적 계급 관계의 압력으로 투쟁에 나서면서 모순된 의식에 도전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조직과 의식을 발전시키면서 ‘대자적 계급’이 된다.
노동계급의 ‘분절화’, ‘파편화’도 자본주의가 가하는 경쟁 압력의 반영이다. 마르크스는 이미 《공산당 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이나 정당으로 조직되는 것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으로 말미암아 늘 방해받을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사람들을 만든다”고도 했다.이처럼 계급을 보는 마르크스의 관점은 사회를 위계 질서로 구분해 서열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바꿀 노동계급의 잠재력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규명하는 데에 관심을 둔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계급론을 통해 사회의 진정한 분할선과 계급투쟁의 동역학을 이해할 수 있다.
산업구조의 변화와 노동계급
조돈문은 제조업이 줄고 서비스업 노동자가 늘어나면서 노동계급의 조직과 의식이 후퇴하고 있다고 본다. “제조업에 비해 노조 조직률이 낮고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서비스업의 상대적 팽창은 노동계급형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임은 이미 경험적으로 확인 됐[다.]”(405)
한국 경제의 제조업 고용 비중이 1990년 27.4퍼센트를 정점으로 2010년 17.3퍼센트까지 하락하고, 서비스업이 급팽창한 것은 사실이다.(83) 그러나 제조업은 한국 경제에서 여전히 비중이 매우 높고 중요하다. 국내총생산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7.5퍼센트로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30퍼센트와 견줄 만하고, OECD 가입국 중에서도 가장 높다. 현대자동차 같은 기업의 노동자 파업은 나라 경제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제조업 생산물에 기반을 두지 않은 업종이 거의 없다는 점도 중요하다. 서비스업도 크든 작든 대부분 제조업 설비에 의존하고, 정보통신업조차 핵심 기술 혁신은 제조업에서 일어난다. 물류·금융·법률 시장 육성화가 제조업 기반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도 제조업의 실질적 비중을 보여 준다.
11 따라서 제조업 부문 노동자들이 지닌 계급적 잠재력은 쇠퇴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졌다. 제조업 고용 인원 감소 수치에 착시 현상이 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실제로는 같은 공장에서 같은 노동자가 여전히 같은 일을 하는데도 전에는 제조업으로 분류되다가 지금은 서비스업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식당·청소·경비·설비 노동자들은 전에는 제조업 노동자로 분류됐지만 지금은 용역·외주화의 결과로 서비스업으로 분류된다.
제조업 고용 인원이 감소한 것은 제조업이 덜 중요해져서가 아니라 제조업 생산성이 서비스업보다 더 빠르게 늘었기 때문이다. 크리스 하먼이 지적했듯이 “30년 전보다 조금 더 적은 노동자들이 그때보다 훨씬 많은 상품을 생산한다.”·지하철·항공·버스에 고용된 운수 업종 노동자가 60만 명이다. 이 노동자들은 노동력·생산물 수송을 담당하고 이윤 생산 체제에서도 중요한 기능을 한다. 공공행정 분야에 고용된 96만 명도 공무원노조나 공기업노조로 조직돼 있고, 민영화와 연금 개악을 일부 좌절시키기도 했듯이 투쟁력도 상당하다. 교육 노동자는 1백41만 명인데 전교조의 정치적 영향력이 적잖다. 1백10만 명으로 추산되는 보건복지 분야 노동자들도 대학병원을 주축으로 산별노조를 가장 먼저 건설했을 만큼 조직이 발달돼 있다. 78만 명이 고용돼 있고 KT노조와 SK브로드밴드노조가 있는 정보통신 부문이나, 1백35만 명이 고용돼 있고 금융노조와 사무금융연맹이 있는 금융 부문도 “계급형성”의 걸림돌 부문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서비스업 증대로 노동계급의 힘이 약화된다는 듯이 말하는 것은 현실과 다르다.
서비스 산업 부문의 팽창이 노동계급 형성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주장은 상당히 과장됐다. 조돈문이 인용하는 자료(100)를 자세히 뜯어보면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분석 결과를 보면, 2010년 8월 현재 전체 노동자 1천7백만 명 가운데 서비스업 노동자는 1천1백90만 명이다. 그런데 전체 서비스업 노동자 가운데 절반인 6백20만 명은 공공부문 노동자다. 공공부문은 조직률이 높고, 세계 노동운동에서도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그중 철도·음식·숙박업으로 치환한다.(93) 그러나 도소매·음식·숙박업 노동자들은 전체 서비스업의 25퍼센트인 3백만 명밖에 되지 않고, 더 중요한 점은 이 부문도 조직화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호텔, 대형 할인점, 백화점에 노조가 있고, 2000년 롯데호텔 파업과 2007년 이랜드 홈에버 점거 파업은 이 부문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잠재력을 보여 줬다. 서비스 노동자 상당수가 사실은 청소, 경비, 병원 보조, 운전사, 택배 노동자 등 육체 노동자들이거나, 단순 반복 노동에 시달리는 영업직이다. 홍대·이대·연대·고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은 서비스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변모한 것이 노조운동 기반의 약화를 초래했다는 주장이 과장임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다.
서비스업 증가가 노동계급 조직과 투쟁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주장은 서비스업을 단순히 도소매 노동계급은 자본축적에 따라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고 기존 산업이 쇠퇴하는 과정에서 계속 변화를 겪었다. 1970년대와 1980년에는 섬유 공업과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이 중요했다면,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자동차와 조선 등 중공업 노동자들이 투쟁의 선진 부위로 나섰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 이후는 공공부문의 투쟁이 중요해지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 노동자들의 새로운 집중이 이뤄지면 낡은 집중은 해체되곤 했다. 이처럼 노동자들이 재조직화되는 것을 두고 노동계급이 파괴되고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쉽게 빠질 수 있는 오류이지만 역사적 사실에는 들어맞지 않는다.노동조합 조직률
한국 노동조합 운동의 전망을 어둡게 보는 사람들은 10퍼센트대에 고정된 낮은 노조 조직률을 근거로 든다. 유럽 국가들에 견줘 조직률이 워낙 낮아 영향력이 작은 데다 지속적인 하락 추세여서 구조적인 위기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조돈문도 노조 조직률 하락은 국가와 자본의 탄압이 성과를 거둔 결과이고, 비정규직 확산이나 노동시장 변화, 서비스 산업 팽창 같은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것이어서 하락 추세를 반등시키기 어렵다고 본다.(146)
노조 조직률이 하락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1987년 투쟁 이후 1989년 말 정점에 이른 노조원 수는 1백93만 명으로 조직률은 18.6퍼센트였다. 2010년 현재 노조 조직률은 9.8퍼센트다.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미국(12.3), 일본(18.5), 호주(19.7) 등보다 낮고, 유럽 국가들에 견주면 훨씬 낮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노동계급의 잠재력 쇠퇴로 보기는 어렵다.
첫째, 한국의 노조 조직률이 낮은 데에는 한국 현대사에 아로새겨져 있는 반공 독재 정권의 집요한 탄압이 큰 영향을 줬다. 1945년 해방 직후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는 1946년 초에 이미 55~57만 명의 조합원을 포괄했고, 1946년 9월 총파업 때는 90퍼센트가 넘는 조직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전평을 불법화했고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대한노총)을 조직하고 깡패들을 시켜 민주노조를 파괴했다. 50만 명이 학살된 보도연맹 사건의 희생자 상당수가 노동조합 활동가였다. 노동운동에 대한 궤멸적 탄압과 노동계급의 피눈물 위에 한국 정부가 세워졌다. 뒤이은 군사정권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노동조합을 강경하게 탄압했다. 지금은 상황이 훨씬 나아졌지만 여전히 선진국보다 비할 데 없이 광포한 국가 탄압이 노조 조직률 상승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13 그러나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 자체가 노조를 심각히 와해시켰다고 보기 어렵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신자유주의 정책이 시작된 1997~2001년 노조 조직률은 12퍼센트였다. 현재 노조 조직율은 9.8퍼센트인데, 이를 심각한 하락으로 보기는 힘들다. 더구나 조합원 수는 지난 10년 동안 되레 증가했다. 조합원 수는 2001년 1백57만 명에서 2009년 현재 1백64만 명으로 늘었다. 조합원 수가 늘어나는데도 조직률이 계속 떨어지는 것은 전체 고용 인구의 증가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이다.
둘째, 신자유주의 정책이 노조 조직률 축소를 초래한 것은 사실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노동자들을 더 쥐어 짜 수익률을 만회하려는 것이므로 우선 노조를 무력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공세로 1980~2003년 세계적으로 스페인·싱가포르·타이완을 제외한 많은 선진국 노조 조직률이 하락했다.14 민주노총은 1997~98년에 거대한 파업을 조직하며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음을 보여 줬는데, 당시 민주노총의 조직률은 12퍼센트 정도였다. 그럼에도 당시 파업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 만큼 강력했던 것은 민주노총이 주요 대공장과 공공부문에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투쟁의 경험과 전통도 중요하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민주노총의 잠재력은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셋째, 노동조합의 힘은 단지 조합원 수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전체 경제에 파급력이 큰 핵심 부문이 조직돼 있는지가 중요하다.또, 전체 노조 조직률이 감소하는 동안 조직 노동부문에서 민주노총이 차지하는 비율은 계속 증가해 왔다. 출범 당시 민주노총의 조합원은 41만 8천1백54명이었고, 이는 전체 노조 가입 노동자 1백61만 명의 26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재 민주노총 조합원은 70여 만 명으로, 조직 노동부문의 45퍼센트를 차지한다. 이런 사실을 볼 때 노조 조직률 하락이 곧 노동계급의 구조적 위기를 나타낸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화한 진술이고 과장이다.
비정규직과 민주노총
조돈문은 정규직의 보수화와 이기주의의 확산으로 민주노조운동이 도덕적 지도력을 복원하기 어렵게 됐다며 비정규직 주체 형성을 강조한다.(409)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주체로 조직돼야 한다는 것은 지당한 얘기다. 그러나 이것을 정규직과 대립시키는 것은 문제다. 그는 “비정규직 노조 조직의 보전과 투쟁 승리에 기여하는 가장 중요한 변인이 정규직 노조의 연대라는 사실은 경험적으로 확인됐다”면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상호 적대감이 크다고 강조한다. 또, 정규직은 노조 조직률은 높지만 의식이 낮고, 비정규직은 조직률은 낮지만 의식은 높은 부조화가 있다고 말한다.(409)
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정규직 연대 투쟁이 부족한 것은 엄연하고 아쉬운 현실이다. 이 때문에 대다수 노조 활동가들도 조돈문과 비슷하게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제로섬 관계에 있다는 생각을 공유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의식하든 못 하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해관계는 충돌하지 않는다. 물질적 이해관계가 같지만 자본가 계급의 이간질과 이데올로기 공세로 커진 분열이라면 단결할 수 있다.
자본가 계급은 이윤 증대를 노리며 노동자를 쥐어짜는 방편으로 비정규직을 확대하려 한다. 이런 공격은 정규직 노동자의 작업 강도 강화와 통제 강화로도 이어진다. 또, 비정규직의 열악한 처우는 정규직 때문이 아니다. 지난 10여 년간 국민소득에서 전체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임금 몫인 노동소득분배율 자체가 정체하거나 떨어졌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몫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의 몫을 가져가는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계급적 이해가 일치한다는 점은, 조돈문도 인정하듯이 조직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이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410) 따라서 현재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기적인 태도를 보고서 정규직과 민주노총의 구실을 기각한다면 비정규직과 정규직 모두의 이익에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돈문이 민주노총 지도부의 연대 투쟁 회피에 낙담해 정규직과 민주노총이 아닌 “비정규직 계급주체 형성”을 제시하는 것은 성급하다.
물론 조돈문이 일관되게 정규직과,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을 기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민주노총 중심의 노동계급 형성 가능성은 아직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고 하고,(142) 민주노총으로 조직된 부문이 여전히 선진적이어서 민주노총이 “대항 이데올로기 기구”의 구심이 되고 있다고도 한다. 또, 그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하나의 노조에서 단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1사 1조직’ 확대 같은 좋은 방안도 제시하고 있다.(411)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 조돈문은 명백히 정규직 보수화론에 기울어 있다. 더 큰 문제점은 모순이게도 그가 노동운동을 더 보수화시킬 방안들을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돈문은 노동자들의 양보교섭을 주장한다. 1998년 2월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참가가 불가피했다고 보는(41) 조돈문은 투쟁보다는 대화를 통한 협상안 만들기를 강조한다. 자신이 자문단을 이끌고 참여했던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반대 투쟁 때도 조돈문은 고립을 면하려면 노동자들도 자구책을 내야 했다고 한다.(163) 그러나 조돈문이 지지한 ‘한시적 공기업화 후 재매각 방안’은 쌍용자동차 사례에서도 확인됐듯이 노동자들의 고용을 안정시킬 대안이 될 수 없다. 조돈문은 노동자들이 기업 회생을 위한 양보에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을 아쉬워 하지만,(255) 2009년 쌍용차 투쟁 때 노조 지도부가 추진한 ‘선제적 양보’는 노동자들에게 더 큰 희생을 강요하는 것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대우차 투쟁의 패배는 과감한 양보 의지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당시 지도부가 과감한 공장 점거 전술을 회피하다가 때를 놓친 탓이었다.
그러나 《사회학》에서 조돈문은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조의 지도부를 거의 비판하지 않는다. 사실 지난 10여 년 동안의 투쟁에서 민주노총 지도자들과 각급 노조 상근 간부들은 투쟁을 과감하게 이끌기보다는 자기 제한적 전술을 펴며 예리한 충돌을 회피했다. 흔히 투쟁을 질질 끌며 힘을 빼고 때로는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강요하며 배신적 타협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투쟁이 좌절되는 경험이 누적될수록 선진 노동자들의 실망과 체념이 커졌다. 이와 같은 노조 상근간부층의 구실을 간파하지 못한 채 정규직 조직 노동자 전체를 비난의 대상으로 돌리는 것은 카드를 뒤섞는 것이다.
또, 조돈문은 노동조합 경영 참가도 제시한다. “동기 부여가 됨으로써 직무에 헌신하고 … 노동자 감시 비용도 절감”하자는(226-227) 것이다. 그런데 이 방안은 따지고 보면 노동자 스스로 착취율을 높이도록 애쓰겠다는 다짐일 뿐이다.
한편, 조돈문이 ‘노동계급 형성’을 위한 과제로 제시하는 것 중에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제안도 포함돼 있다. 조돈문은 신자유주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선 대항 이데올로기 기구로서 민주노총을 강화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지도부가 조합원들을 객체화하지 말고 노조 민주주의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407) 또, 조돈문은 노동운동의 강화를 위해서 진보정당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민주노총이 새 계급정당 안에서 도덕적 지도력을 갖춰야 한다고 본다.(420-421) “민주노조운동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실질적으로 대변하며, 비정규직 주체 형성을 적극 지원” 해야 한다는(416) 주장도 전적으로 옳다.
조돈문이 말한 ‘계급형성’을 위해서라도 강력한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난 몇 년 동안 일어난 투쟁들은 한번 시작하면 첨예한 충돌로 이어지는 패턴을 보였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양보할 여지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 성과를 쟁취하려면 과감하게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회사 살리기’, ‘국가 경제 우선’, ‘집단 이기주의’ 등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맞서고 노동자들의 단결과 자신감을 드높일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정치 대안을 명확히 해야 한다. 또, 노조 지도자들이 투쟁을 회피하거나 배신적 타협을 할 때 현장 노동자들이 독자적 행동을 조직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마치며
조돈문은 《사회학》에서 현재 한국 노동계급이 후퇴하고 있다며 나름의 근거를 제시했다. 그는 경제 위기로 노동자들의 삶이 후퇴하면 계급 의식이 전진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의 입장이라고 잘못 전제하고는, 현실은 이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부르주아 사회학의 파편화된 개념을 적용한다. 그런데 깨진 유리로 보면 사물도 깨져 보이듯이 부르주아 사회학 개념으로는 계급이 갈수록 분절하고 파편화하며 해체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봤듯이, 한국 노동계급은 쇠퇴하지 않았고, 핵심 조직 부위인 민주노총의 조직력은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이것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장차 벌어질 수 있는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다시 활력을 찾을 수 있음을 뜻한다.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의 접근법에서는 계급투쟁의 변수와 동역학을 분석하려는 노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체로 피상적인 증상을 쫓아가 해명하려는 부르주아 사회학적 접근법을 수용하는 그들의 분석은 노동계급의 잠재력과 계급투쟁을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진보진영의 실천적인 학자로 여전히 노동운동에 애정을 쏟고 있는 조돈문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피상적인 접근으로 노동계급의 쇠퇴를 선언한 경우는 역사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1830년대 부상한 차티스트 운동이 점차 가라앉자 그 지도자 중 한 명이던 토마스 쿠퍼는 이제 노동계급이 힘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정치적으로 후퇴해 “사회주의의 가르침에 관한 진지한 논쟁을 찾아 볼 수 없다”고 개탄하고는 혁명적 정치를 포기하고 우경화했다. 그러나 쿠퍼가 말한 ‘노동귀족’은 20세기 초 혁명적 투쟁의 핵심 부위가 됐다.
신자유주의 공격의 행동대장이던 대처 정부 시절 영국 광원 파업이 패배하고, 노동당이 선거에서 연거푸 패배했을 때도 “노동계급이여 안녕”을 외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영국 공산당의 에릭 홉스봄은 노동계급이 쇠퇴했다며 자신의 정치적 우경화를 합리화했다. 지금 한국 노동운동의 상황이 25년 전 영국과 같지 않지만, 당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크리스 하먼이 했던 다음과 같은 반박은 시공을 넘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상승기에 노동계급의 의식과 활동성은 파리 코뮌 때처럼 객관적인 잠재력보다 훨씬 강력하게 솟구쳐 오를 수 있다. 역으로 투쟁의 침체기에 계급의 의식과 활동성은 객관적 힘 이하로 하락할 수 있다 … [그러나] 가까운 어느 땐가 투쟁 수준이 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노동계급이 무용지물이라는 고르즈, 홉스봄 … 일파에 대한 명확한 반박이 될 것이다.
내핍 정책에 맞서 지난 6월 30일 75만 명이 파업을 했고, 11월 30일에도 또다시 2백만 규모의 파업을 벌인 영국 노동운동은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 옳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한국 노동계급은 1980년대 영국 노동계급이 겪은 것 같은 긴 침체를 겪지도 않았다. 노동계급이 일시적으로 사기저하를 겪는다고 해서 그 잠재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주
- 조돈문은 “구조적으로 정의된 노동계급이 하나의 집합적 행위자로 형성되는 과정”을 “계급형성”이라고 한다. 이를 다시 조직적 형성(민주노조의 영향력)과 이데올로기적 형성(계급의식 고취 정도)으로 나눠서 보는데,(106-107) 조돈문은 둘 모두 후퇴했고 계급이 “해체”되고 있다고도 본다. ↩
-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노동계급이 분절화되고 노조운동이 고립되는 상황을 피할 수 없다고 보고, 과거의 운동 방식에서 벗어나 지역 운동이나 사회운동과 결합해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킴 무디와 피터 워터먼이 주요 논자다. 사회운동노조주의는 노조 밖 정치 쟁점에 참여하자는 취지는 좋지만, 노동조합 운동을 소홀히 하거나 노동계급 고유의 이해관계를 삭감하려는 잘못된 접근이 포함돼 있다. 국내에서는 받아들이는 논자마다 견해 차이가 있지만 사회진보연대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등이 1998년 이후 적극 소개했고, 공공노조의 상당수 활동가들도 공감한다. ↩
- 조돈문은 마르크스의 일부 개념에 부르주아 사회학을 혼합한 ‘분석적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다. ↩
- 구해근 2007, p255. ↩
- 라이트 2005, p130. ↩
- 캘리니코스·하먼 2001, p186. ↩
- 캘리니코스·하먼 2001, pp29-32. ↩
- 마르크스 2007, p295. ↩
- 마르크스 2007, p226. ↩
- 마르크스 2007, p409. ↩
- 캘리니코스·하먼 2009, p113. ↩
- 캘리니코스·하먼 2001, p34. ↩
- 배규식 외 2008, p50. ↩
- 캘리니코스·하먼 2001, p133. ↩
- 캘리니코스·하먼 2001, pp166-167. ↩
참고 문헌
구해근 2007, ‘세계화 시대의 한국 계급 연구를 위한 이론적 모색’, 《경제와 사회》 76호.
라이트, 에릭 올린 2005, 《계급론》, 한울 아카데미.
마르크스, 칼 2007,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 박종철 출판사.
배규식 외 2008, 《87년 이후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한국노동연구원.
이원보 2005,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최일붕 2007, ‘이명박 당선의 모순과 정권의 불확실한 앞날’, <맞불> 70호(2007.12.24).
캘리니코스, 알렉스 & 하먼, 크리스 2001, 《노동자 계급에게 안녕을 말할 때인가》, 책갈피.
하먼, 크리스 2009, ‘세계의 노동계급’, 《마르크스21》 2호(2009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