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알렉스 캘리니코스 2011년 방한 강연 (2)
사회민주주의 — 제대로 이해하고 대처하기
이 글은 알렉스 캘리니코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장이 2011년 7월 방한해 본지 편집자들, 편집팀원들, 그리고 주요 기고자들에게 한 강연과 대담을 녹취한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본지의 편집 자문이기도 하다.
먼저 사회민주주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소개한 다음 사회민주주의의 변천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사회민주주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은 토니 클리프의 《영국 노동당의 역사》에 응축돼 있는데, 거기서 클리프는 노동당을 ‘자본주의적 노동자 당’이라고 규정했다. 노동과 자본 사이에 존재하는 근원적 적대 관계를 감안하면 ‘자본주의적 노동자 당’이라는 말은 형용모순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므로 클리프의 이 규정은 사회민주주의 정당 내에서 뭔가 수상쩍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경고한 것이기도 하다. 이보다 더 정확히 규정하자면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노조 관료층의 정치적 표현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조 관료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의 근원
자본주의에서 노동자 투쟁은 대부분 매우 자기 제한적인 경향을 보인다. 즉, 노동자들은 기업주들에 맞서 격렬히 싸울 수는 있지만, 그때조차 감히 자본주의까지 타도할 엄두는 못 낸다. 그래서 아무리 전투적이고 성공적인 파업일지라도 결국 노동자와 기업주 간에 모종의 타협으로 끝나곤 한다. 계급 간 세력 균형에 따라 타협의 내용이 노동자들에게 더 유리하거나 불리해질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처럼 투쟁이 타협으로 끝나게 된다면 누군가는 타협을 이끌어내는 협상을 맡아야 한다. 누군가가 기업주들에 맞서 노동자들을 대표해야 한다. 실제로 노동자들에게 대표가 없으면 기업주들에게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노동자들이 1973년에 역사적인 파업에 나섰을 때 기업주들이 맞닥뜨린 문제 한 가지도, 흑인 노조가 불법이었던 탓에 기업주들에게 협상 상대방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이 같은 계급 간 타협에서 협상을 담당하는 노동자 대표들의 계층이 형성되고 굳어진다.
그런데 그러한 타협은 아무리 그 내용이 노동자들에게 유리하다 해도 여전히 타협에 머무르기 때문에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영속화시킨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 노동자 대표층의 존재 자체에 어떤 보수적 경향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수적 경향은 노조 기구가 정교해지고, 상근 간부층이 형성되고, 이 상근 간부들이 노동자 대중보다 물질적 특권을 더 많이 누리게 될수록 더욱 강해진다. 노조 간부들은 대체로 그들이 대표하는 노동자들보다 훨씬 후한 보수와 연금을 받고, 해고당할 위험에 시달리지 않으며, 착취의 압력에서 자유롭다. 그래서 노조 간부들, 즉 노조 관료층은 노동자 투쟁을 기존 체제의 틀 내에 가두어 두는 것에 이해관계가 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노동자 투쟁이 자기 제한적 수준을 넘지 못하게 하려고 애쓴다. 이 점이 때로는 노동자 투쟁에 대한 고약한 배신을 낳기도 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이 발전함에 따라 노동운동의 정치적 대표체가 필요하다는 압력도 나타난다. 정치 무대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강력한 노동운동이 등장했을 때 기존 부르주아 정당들로는 노동운동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청의 결과로 탄생하는 정당은 노동자 대중이 아니라 노조 관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흔히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영국 노동당이나 브라질 노동당처럼 자신들이 노동운동에서 발생했음을 반영하는 당명들을 갖는다. 때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공산당처럼 당명이 더 급진적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노동자 대중을 실제로 대변하거나 노동자 대중의 통제를 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노조 관료의 이익을 대변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등장이 갖는 의미는 이중적이다. 노동운동이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라는 독자적인 정치적 대표체를 얻게 되는 것은 분명 일보전진이다. 그래서 노동계급 정당은 없고 오직 민주당과 공화당만 있는 미국 노동자들의 상황은 끔찍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것은 노동운동에 대한 노조 관료들의 지배력을 통해서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과를 초래한다.
우선, 노조 관료들과 이러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정당들은 강령 면에서 기껏해야 개혁주의 정당일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이들의 목표는 매우 전투적이더라도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해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점진적으로 바꾸는 것에 머무른다. 유럽의 고전적 개혁주의 정당들이 그랬다. 둘째, 이렇듯 다수 의석 확보를 강조하므로 노동계급을 위한 이 정당들의 정치적 대표 행위는 의회 참여로 환원되고 만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보통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에서 번창하는 경향이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 가지 기본 전제는 경제와 정치의 체계적 분리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투쟁과 관련된 고도로 정치적인 온갖 쟁점들이 ‘경제적’인 문제로 규정되고, 따라서 정치적 의사결정의 대상이 아닌 문제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정치’는 선거에서 이기고 법안을 통과시키는 문제로 한정된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정치는 경제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 여겨진다. 가장 중요한 정치적 쟁점들은 흔히 경제 영역에서 발견되는데도 말이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정치와 경제의 이런 분리를 받아들이고 또 강화한다. 나아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 덕분에 정치와 경제의 경계선을 수호하는 데서 각별히 중요한 구실을 한다. 실제로 개혁주의 노동운동 진영에서는 노조 관료들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원내 지도자들이 모두 경제와 정치의 분리를 매우 힘주어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노조 지도자들은 당이 산업 투쟁에 관여하는 것을 강력히 거부한다. 일례로 1905년 러시아 혁명 직후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 헌법의 민주화를 이룩하려면 독일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독일 노조 관료들의 격분을 샀다. 정치 지도자가 왜 자기들 일에 간섭하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내용의 요지는 노동자 투쟁의 자기 제한적 경향이 사회민주주의와 개혁주의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기 제한적 경향은 한 나라의 구체적인 정치 지형과 상관 없이 어디서나 존재한다. 그래서 조직화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없는 곳에서도 개혁주의 경향이나 개혁주의자들은 존재한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없는 미국에서도 이런저런 형태의 사회민주주의적 정치 경향이 존재한다. 이들은 주로 노조에 기반을 두고 민주당을 이용해 개혁주의 정치를 실현하려 한다.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할 점은, 노동자 운동이 새로 부상하면 사회민주주의가 급속히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50~60년대부터 자본주의에 나타난 한 가지 중요한 변화는 미국과 유럽 이외의 지역들에서 흔히 독재 정권의 지배 하에 새로운 자본 축적 중심지들이 출현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1970년대부터 이러한 새로운 자본 축적 중심지들에서 매우 전투적인 노동운동이 분출했다. 이 노동운동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터져나왔기 때문에 경제와 정치의 분리를 존중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운동들은 혁명적 잠재력이 매우 크다. 그 덕분에 이 운동들은 상당한 경제·정치 구조 개혁을 달성해 냈고, 그 결과 독재 정권들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해체시키면서 노동운동을 위한 일정한 공간을 확보해 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들 나라에서는 사회민주주의가 현란한 속도로 성장했다.
세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1970년대 브라질에서 매우 전투적인 독립 노조연맹인 꾸찌CUT가 탄생했고, 1980년대에는 노동자당PT이 탄생했다. 제4인터내셔널 등에 소속된 혁명가들DP도 브라질 노동당 창당에 힘을 보탰다. 당시에는 브라질 노동당이 혁명 정당도 아니고 개혁주의 정당도 아닌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 정당이라는 논의가 무성했다. 그런데 브라질 노동운동의 지도자였고 이후 노동당 지도자였던 룰라는 8년간 [자본가들에게 ― 옮긴이] 착하고 안전한 신자유주의 대통령으로 복무하다가 올해 초 퇴임했다. 그의 후계자 지우마 호세프는 좌익 게릴라 출신으로 1970년대에 군사 독재 정권한테 고문까지 당했던 인물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흑인 노동자들의 전투적인 운동을 발판으로 1980년대에 남아프리카공화국 노동조합회의COSATU가 결성됐다. 그러나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집권한 1994년에 이르러 COSATU는 본질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인(오늘날의 표현으로는 ‘사회자유주의적’이라고 부를 만한) 사회운동의 산업 부문으로 변질됐다. 내 생각에 한국의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역사도 이와 비슷한 패턴을 따르는 듯하다. 차이가 있다면 민주노동당은 아직 브라질 노동당이나 ANC처럼 집권에 성공하지는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역사적 선례를 꼭 염두에 둬야 한다. 현재 이집트에서는 독립 노조들이 조직되고 있고 아마도 ‘노동자농민당’이라고 불리게 될 광범한 정당이 결성되고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진전이고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동지들도 여기에 적극 관여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이집트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안착된다면(그리 될지 매우 큰 의문이 있지만) 이집트에서도 브라질과 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수 있음을 우리는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의 진화
사회민주주의는 결코 정태적이지 않다.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진화해 왔고, 유럽에서 그러한 진화가 가장 명백히 드러난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부터 시작되는 오랜 시기 동안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노동계급 기반이 점차 침식됐다. 당원 수도 대체로 아주 많이 감소했다. 그래서 오늘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1950~60년대에 견줘 대중적 노동자 정당으로서의 성격이 훨씬 약해졌다. 물론 불균등성은 있다. 영국과 남유럽보다 스칸디나비아와 독일에서 전통적인 대중적 노동자 정당들이 더 건재하다. 당 지도부가 더 중앙집권적이 되고 당원들의 통제에서 더 벗어나는 경향도 나타났다. 당원들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대자본·언론과는 더 가까워졌다. 즉,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구조에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강령에도 변화가 있었다. 전후 장기 호황을 거치면서 당초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창립 이념이었던 고전적 개혁주의 강령이 폐기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원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강령은 여러 개혁을 성취하면서 사회를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점진적으로 변혁하길 지향하는 고전적 개혁주의 강령이었다. 그런데 1950~60년대에는 고전적 개혁주의 강령이 여러 형태의 케인스주의 강령으로 바뀌었다. 국가가 경제성장을 충분이 달성한다면 부와 소득을 재분배하는 개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 케인스주의 강령의 골자였다. 달리 말해,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않고도 개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케인스주의 강령은 1950~60년대의 경제 호황 때는 언뜻 보아 합리적인 듯했다. 경제 호황기에는 실제로 상당 수준의 재분배와 개혁을 이루는 것이 가능했다. 특히 서유럽에서 복지국가가 대대적으로 확산된 것도 호황 덕분에 가능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경제 위기가 부활하자 케인스주의적 사회민주주의의 실효성은 훨씬 약해졌다. 결정적 고비는 프랑수아 미테랑이 프랑스 대통령이 된 1981년이었다. 미테랑이 국유화를 비롯한 케인스주의 정책을 실행에 옮기자 금융시장은 프랑스에 혹독한 응징을 가했다. 그 결과 미테랑은 1983년에 케인스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사실상 신자유주의를 수용했다.
프랑스가 매우 극적인 사례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대체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변절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장 그럴싸하게 포장한 사례는 1990년대 중반부터 영국 노동당을 이끌었던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이다. 토니 블레어의 말처럼 ‘제3의 길’의 요지는 기업 활동과 정의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자유시장 체제에서도 개혁이 가능하다는 생각인데, 이는 케인스주의를 통해 개혁을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도 훨씬 비현실적인 생각이다. 바로 이것이 흔히 ‘사회자유주의’라 불리는 현상이다. 즉,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결합(종합)이다. 트로츠키가 말한 불균등·결합 발전의 한 가지 사례이기도 하겠지만, 브라질에서는 특히 사회자유주의가 급속히 발전했다. 룰라는 브라질 노동계급 중에서도 매우 가난하고 인종적으로 억압받는 부분 출신이다. 그런데도 그의 정부는 대기업들과 매우 친하게 지냈고 온갖 부패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사회자유주의가 등장한 결과 일부 극좌파는 이제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다른 부르주아 정당 사이에 더는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노동자 인터내셔널을 위한 위원회Committee for a Worker’s International’라는 트로츠키주의 경향이 그렇게 주장한다. 프랑스의 반자본주의신당NPA도 이런 주장에 종종 이끌린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주장은 지금껏 설명한 사회민주주의의 깊은 뿌리를 간과하는 것이기도 하고, 지독히 부패하고 불신받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조차 때때로 노동계급 기반을 재건할 수 있음을 보지 못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영국 노동당이 이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다. 2010년 총선 무렵 노동당은 심각한 신뢰 위기를 겪고 있었다. 전 노동당 총리 토니 블레어는 이라크 전쟁에서 부시의 하수인 노릇을 한 것 때문에 대중에게 경멸을 샀다. 고든 브라운도 재무장관 시절 런던 금융권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경제 위기에 일조한 것 때문에 대중에게 불신받았다. 따라서 선거에서 노동당이 참패할 것이 유력해 보였다. 실제로 노동당은 2010년 5월 총선에서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내가 사는 동네를 비롯해 런던에서 노동계급 구성이 가장 뚜렷한 몇몇 선거구에서는 오히려 노동당 득표가 증가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유권자들이 노동당 편으로 돌아섰다. 이는 고든 브라운 등이 지난 보수당 정부에 대한 노동계급의 악몽 같은 기억에 호소하는 전술을 구사한 결과다. 영국 노동계급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대처 정부에 대한 깊은 울분과 증오를 간직하고 있다. 노동당은 바로 그러한 울분과 적개심에 호소해 노동계급 지지 기반의 중핵을 지켜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총선 이후로는 당원 수가 수만 명이나 늘었고 지방의회 의석도 수백 개나 늘었다. 요컨대 사회민주주의는 뱀파이어 같다. 심장에 대못을 박아야만(혁명의 승리) 확실히 죽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새로운 좌파 개혁주의 정당들이 등장한 것은 흥미롭다. 몇 년 전 독일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중대한 분열을 겪었다. 독일 사민당SPD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중핵이라고 할 수 있는 정당으로, 노동계급 기반이 아직 비교적 강력하다. 그런데 일부 노조 간부들이 사민당을 탈당해 디링케라는 새로운 좌파 개혁주의 정당을 만든 것이다. 이 노조 간부들뿐 아니라 구 동독의 스탈린주의 정당 출신자들과 극좌파 세력들도 디링케 창당에 동참했다. 디링케는 선거 공간에서 결코 무시 못할 세력인데, 여기에는 최근까지 사민당 지도자였던 오스카 라폰텐이 디링케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도 한몫했다. 그 밖에 디링케만큼 존재감이 크지는 않지만 최근 프랑스 사회당에서 떨어져 나온 프랑스 좌파당도 있다.
공동전선 전술
이렇듯 개혁주의는 자기 갱신 능력이 있다. 그렇다면 혁명가들에게는 개혁주의자들과 그들이 노동계급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처할 전술이 필요하다. 공동전선 전술은 바로 그러한 필요에서 나온 전술이다. 공동전선은 1920년대 초 독일에서 혁명적 정당인 공산당이 여전히 사민당을 지지하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전술로서 고안됐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러시아 혁명 직후 코민테른의 역사에서 나타난 한 가지 중요한 패턴은 대중 정당으로서 공산당이 흔히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분열을 통해 탄생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공산당은 사회당이 분열한 결과로 탄생했고, 독일 공산당은 독립사민당USPD의 분열을 계기로 대중 정당이 됐다. 디링케와 프랑스 좌파당을 보면, 오늘날에도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왼쪽으로 분열할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현재에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더 낮아졌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조직적 쇠퇴와 노동계급 기반 축소가 그러한 분열을 더 어렵게 만든다. 영국에서는 이라크 전쟁 참전으로 엄청난 정치 위기가 발생한 적이 있다. 블레어가 부시를 따라 참전하기로 결정한 것을 두고 노동당이 심각하게 분열했다. 토니 벤과 제러미 코빈 같은 좌파 인사들은 블레어의 결정에 강력히 반발했다. 그러나 이들을 포함해 노동당 내의 어떤 규모 있는 세력도 탈당하지는 않았다. 그런 탓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반전 운동 진영의 급진적 선거 연합인 리스펙트RESPECT를 출범시키려 했을 때 우리에게는 좌파 개혁주의 진영의 동맹 세력이 거의 없었다. 좌파 의원인 조지 갤러웨이가 리스펙트에 합류했지만, 그는 다소 신뢰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설령 그가 좀더 안정적인 인물이었더라도 연합체에 혁명적 조직 하나만 달랑 있고 개혁주의 세력이 거의 없는 것 자체는 문제였다.
요컨대 사회민주주의와 관계 맺기는 매우 복잡한 문제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한국과 독일의 국제사회주의 경향 동지들이 그랬듯이 개혁주의 정당에 들어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어쨌든 이상의 논의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기본적인 교훈은 현재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영향력을 무시하는 것은 크나큰 오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혁주의자들의 지지 세력을 우리 편으로 끌어오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
우선, 내가 말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노동계급 기반 축소’는 적어도 1960년대부터 진행된 장기적 과정이다. 따라서 1995년에 블레어가 국유화 문제를 다룬 노동당 당헌 4조를 삭제했을 때 노동당의 노동계급 기반이 강력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또한 오늘날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분열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라크 전쟁은 영국 사회 전체를 양극화시키고 특히 노동당을 양극화시킨 엄청난 정치 위기를 불러왔다. 그만큼 위기가 컸는데도 갤러웨이를 비롯한 몇몇 개인을 빼면 노동당에서 ‘대거’ 이탈한 세력이 없었다는 것이 나로서도 놀라웠다.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이 노동계급 기반의 약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독일 사민당의 분열은 독일 노동운동이 비교적 강력하다는 점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독일 노동자들은 영국 노동자들이 1980년대에 대처 정부 때 겪었던 것과 같은 크나큰 패배를 겪지 않았다. 또한, 당시 독일에서는 슈뢰더가 이끄는 ‘적록 연정’이 ‘어젠다 2010’이라고 하는, 독일 역사상 가장 급속한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정책은 꽤나 성공했다. 독일 자본주의의 경쟁력이 지난 10년 사이 그토록 힘있게 회복된 것도 부분적으로 이 정책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노동조합들 사이에서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노동조합 최상층 지도자들이 아닌 중간 간부들이 특히 슈뢰더의 노선에 크게 분개했다. 이들은 영국 노동자들이 겪었던 것과 같은 패배를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사민당에서 떨어져나와 새 정당을 결성할 정도로 자신감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어차피 정당 체계가 매우 파편화돼 있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당적을 옮기는 일이 영국이나 독일보다 훨씬 흔하다. 더욱이 프랑스에서는 명백히 급진 좌파들에게 더 넓은 선거 공간이 존재한다. 이 점은 트로츠키주의 대선 후보들이 모두 합해 10퍼센트를 득표한 2002년 대선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같은 대선에서 사회당 총리는 겨우 18퍼센트를 득표했다. 그래서 프랑스 좌파당 지도자인 멜랑숑도 독자적 정당을 결성하면 자신이 주도권을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사회민주주의의 변천에 관한 내 설명은 주로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사회민주주의 세력들은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보다 더 불안정할 수도 있다. 예컨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COSATU 내에서는 과연 COSATU가 앞으로도 ANC·공산당과 동맹 관계를 유지해야 하느냐, 그리고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속 지지해야 하느냐를 둘러싸고 심각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만약 COSATU가 실제로 ANC 정부와 결별한다면 COSATU, ANC, 공산당이 연쇄적으로 분열할 수 있다.
프랑스 좌파당은 프랑스 공산당이 포함된 ‘좌파 전선’이라는 더 넓은 연합체에 소속돼 있다. 한때 강력했던 프랑스 공산당은 지금은 많이 약해졌지만 그래도 지방에서는 제법 튼튼한 기반이 있다. 그래서 멜랑숑은 공산당을 포섭하고 흡수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이 좌파 전선에 공산당이 참여한다는 사실 때문에 일부 NL 경향이 좌파당에 매력을 느끼는 것일지 모른다. 멜랑숑은 영리한 정치인이다. 그러나 그의 일부 정치관은 상당히 반동적이다. 그는 이슬람 혐오주의자로 히잡 문제에 관해 아주 고약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프랑스의 리비아 개입도 지지한다.
리스펙트 결성을 시도한 것에 대해서는 한 점의 후회도 없다. 거대한 정치 위기가 일어났고, 대규모 반전 시위가 열리는 와중에 사람들은 ‘참전당인 노동당이 아니라면 다음 선거에서 어느 당에 투표해야 할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록 노동당이 분열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동맹 세력이 상당히 있었다. 갤러웨이는 유명 정치인으로서 전쟁에 확고히 반대했다. 그뿐 아니라, 전에는 노동당을 지지했던 무슬림들도 리스펙트를 지지했다. 사실, 무슬림들은 리스펙트의 가장 큰 지지 기반이기도 했다. 만약 우리가 리스펙트를 발족시키지 않았다면 아마도 갤러웨이와 일부 무슬림들이 어떤 식으로든 다른 선거 대안을 결성했을 것이다. 내 생각에 리스펙트 결성은 단지 해 볼 만한 시도였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의무이기도 했다. 우리는 무슬림들에게 지하드주의 외에도 세속적인 반제국주의 좌파가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줘야 했다. 물론 리스펙트가 성공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실수도 많이 했다. 그러나 추호도 후회하지 않는다.
질문자는 존 리즈의 정의를 따라 리스펙트를 ‘특수한 유형의 공동전선’으로 규정하는 듯하다. 이는 분명 개념상의 혁신이었다. 왜냐하면 고전적인 공동전선은 비교적 협소한(한정된) 쟁점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것을 뜻하는데, 리스펙트는 사실상 어떤 개혁주의 강령을 통째로 공유하는 공동전선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존 리즈와 다른 면에서 의견 차이가 있지만 리스펙트에 관한 그의 규정 자체에는 이견이 없었다. 유럽의 급진 정당들을 봐도 사실상 연합체인 정당들이 많다. 즉, 이 급진 정당들은 본질적으로 개혁주의 세력과 혁명적 세력의 연합체다. 포르투갈의 좌파 블록도 그렇고 독일의 디링케도 그렇다. 이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지배력에 균열을 내는 선거 연합이 등장할 때는 흔히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둘러싼 이견을 초월한 단결이 이뤄지기 때문인 듯하다.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설령 경제와 정치의 분리가 한국 노동운동에 심각한 해악을 끼쳤다 해도 그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에 관한 지금까지의 분석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민주주의가 좋으냐 나쁘냐에 관한 도덕적 판단이 내 주장의 요지는 아니다. 물론 마거릿 대처를 제외하면 내가 가장 증오하는 인물은 토니 블레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회민주주의가 그 특성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영향력이 있다는 점이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부르주아 정당이지만 일반적인 부르주아 정당과는 다른 방식으로 노동자들과 관계 맺는다. 그러므로 혁명가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다른 부르주아 정당과는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기대를 거는 노동자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에 투표하는 노동자와 민주노동당에 투표하는 노동자가 있다고 치자. 내 생각에는 이 중 민주노동당에 투표하는 노동자가 훨씬 더 계급의식적이고, 노조에 소속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우리가 민주노동당에 투표하는 노동자에게 ‘당신 지도자들은 투쟁을 배신하는 야바위꾼’들이라고 말한다면 그가 귀담아 들을 리 없다. 우리는 개혁주의를 지지하는 노동자들과 대화 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리 하려면 먼저 그들과 우리의 공통점을 밝혀야 한다. 때로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주의 지도자들을 비판해야 할 때가 있다. 토니 블레어가 총리였던 시절에는 우리와 노동당 지지자들 모두 블레어를 증오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등 사회민주주의 정당 지지자들을 대할 때 대체로는, 지도부 비판이 출발점이 돼서는 안 된다.
Q. 영국에서 직장 대표는 노조 관료층에 속하는가? 또, 최근 SWP는 정치적 노동조합 운동을 주장하는데, 이는 현장 조합원 운동과 병행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유보하고 대신 채택한 것인가?
영국에서 노조 간부trade union official는 노동조합에 상시적으로 고용된 유급 간부를 말한다. 선출직도 있지만 임명직이 더 많다. 반대로 직장 대표는 직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서, 자기 부서의 동료 노동자들이 선출한 대표를 말한다. 그래서 노조 간부와 현장 조합원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괴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직장 대표들은 그들 자신이 현장 조합원들이다. 실제로 제1차세계대전 무렵부터 1970년대까지의 영국 현장 조합원 운동사를 살펴보면 직장 대표들이 핵심 조직자 구실을 했다. 물론 지금까지 한 얘기는 현실을 단순화해서 설명한 것이다. 실제 역사는 좀더 복잡하게 전개됐다. 1960년대 말부터 사용자들은 상근 직장 대표들을 육성하는 전략을 의식적으로 추구했다. 상근 직장 대표(직장 대표 중에서도 선임인 경우가 많다)는 여전히 회사에 고용된 직원이지만 일은 하지 않고, 작업장에 자기 사무실이 따로 있는 경우도 많다. 이런 식으로 상층 직장 대표들은 자신들이 대표해야 할 기층 노동자들에게서 멀어지게 됐다. 그 결과 노조 관료와 현장 조합원들 사이의 경계가 다소 흐릿해졌다. 달리 말하면 노조 관료층이 작업 현장으로까지 확장됐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현장 조직을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었고, 영국 노동자들이 1980년대 대처 정부 때 겪은 패배에도 일조했다.
그러므로 질문자가 제기한 현장 조합원 운동이냐 정치적 노동조합 운동이냐 하는 딜레마는 성립하지 않는다. 대처 정부 시절의 패배와 한 세대 동안의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현장 조직들이 매우 약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조직률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높고 특히 공공부문 조직률이 높지만, 직장 대표 등의 비상근 대의원들은 독자적인 힘이 별로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장 조합원 운동에 기반을 두고 뭔가를 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일단 현장 조직부터 재건하는 것이 관건이다. 몇 년 전에 우리는 ‘정치적 노동조합 운동’이라는 구호를 만들었는데, 반자본주의·반전 운동으로 표현된 정치적 급진화 물결이 노동조합에도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정치적 노동조합 운동을 주장하고는 있지만, 현재는 영국 연립정부의 긴축 공세 때문에 쟁점이 더 날카롭게[연금 문제 등으로 ― M21] 좁혀져 있는 상태다. 현재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전략은 한편으로 좌파 노조 관료들과 공동전선을 맺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압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 영국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회복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되면 현장 조직을 실질적으로 복원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이집트 노동자농민당과 관련해서는, 내가 앞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안착화하려면 먼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안착화해야 한다’고 말한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집트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안착은커녕 본격적으로 도입되지도 않았다. 지난 주말[2011년 7월 넷째주]에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열렸는데 군사 정부가 깡패들을 동원해서 시위대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렇듯 이집트에는 사회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는 토양이 없다. 노동자농민당은 혁명적 좌파가 주도하고 있는 프로젝트로서, 그 핵심 인물은 국제사회주의 경향인 혁명적 사회주의자 단체RS의 이전 회원이었고 지금도 RS와 동맹 관계에 있는 카말 할릴이라는 사람이다. RS 동지들도 노동자농민당 건설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즉, 그것은 엔트리[입당]가 아니라 창당이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부르주아지들이 앞다투어 자기 정당을 만들려고 하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 당이 개혁주의 정당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과는 매우 다른 상황에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스 공산당은 노동계급 기반이 강력하지만 매우 종파주의적인 정당이고, 다른 어떤 세력과도 동맹 맺길 꺼린다. 반대로 시리자는 정치적으로 훨씬 개방적이지만 정체성이 모호한 선거 연합이다. 어쨌든 둘 다 대단히 기회주의적일 때가 많다. 그래서 설령 이 둘 사이의 동맹이 가능하다 해도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지 여부는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United Against Fascism은 SWP가 발의한 공동전선이다. 여기서 우리는 노동당과 노조 내의 주류 인사들과도 협력한다. 또는 매우 구체적인 어떤 쟁점을 놓고 일부 개혁주의 세력과 공동전선을 맺을 수도 있다. 예컨대 노동당 좌파 지도자들은 전쟁저지연합 활동에 적극 참가하기도 했다. 엔트리 전술은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엔트리는 소수의 혁명가들이 더 넓은 활동 무대를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예컨대 프랑스의 국제사회주의 경향 동지들은 NPA에 들어가 있는데, 지금까지는 NPA가 프랑스 동지들에게 소규모 혁명 조직으로 있을 때보다 훨씬 유리한 활동 무대가 돼 왔다. 그런데 때로는 혁명가들이 더 큰 틀에서 진행되는 좌파 진영의 재편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자 엔트리를 택할 수도 있다. 예컨대 독일 동지들은 좌파 노조 관료들과 동맹을 결성함으로써 디링케의 창당에 기여했다. 이 덕에 독일 동지들은 더 넓은 활동 무대를 얻었을 뿐 아니라 디링케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는 우리 동지들이 디링케 내의 좌파 지도자인 라폰텐과 동맹을 맺은 덕분이기도 했다. 내 생각에는 독일 동지들이 설령 SWP처럼 수천 명 규모의 단체였다 해도 디링케에 들어가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사회민주주의와 결별하기 시작하는 과정에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혁주의 세력과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해 몇 가지 일반적인 얘기는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각자가 처한 조건과 기회를 아주 구체적으로 따져 보는 것이다.
아주 구체적인 기준은 없다. 공동전선을 맺으려면, 우리가 개혁주의자들을 공동전선에 끌어들일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은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때 변수는 조직 규모와 [계급에 ― 옮긴이] 뿌리내린 정도일 것이다. SWP는 극좌파로서는 상당히 큰 조직이지만, 예컨대 영국 연립정부에 맞서 노동당과 공동전선을 형성하기에는 너무 소규모인 단체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 혁명가들이 특정 쟁점을 두고 개혁주의자들과 공동전선을 맺는 것은 가능하다. 예컨대 반파시즘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