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 왜 자본주의는 경제 위기에 빠지는가
1930년대의 대불황 *
세월이 갈수록 자본주의의 구조와 기능이 쇠퇴하면서, 부진과 깊은 위기를 부르는 여러 압력을 극복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렇게 하려는 노력 자체가 체제와 체제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점점 더 파괴적인 조처들을 동반한다.
앞의 장章의 요점을 재정리하자면 이렇다. 체제의 근본적 모순은 투자 규모가 이윤의 원천(노동력)보다 훨씬 빨리 증가하기 쉬워, 이윤율 저하를 부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향을 상쇄할 수 있는 주된 요인은 다음 세 가지다. (1) 간헐적인 위기로 일부 자본들이 사라져 없어지면 다른 자본들이 득을 본다. (2) 제국주의 덕분에 구래의 자본주의 발전 지역으로부터 새 지역으로 투자가 흘러간다. (3) 자본의 특정 부분이 다른 부분과 경쟁하는 것을 도우면서도 생산적 축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식으로, 예컨대 마케팅 비용이나 군비 같은 분야에 투자 가능 잉여가치를 사용하는 것을 늘린다.
이 요인들은 모두 자본주의 발전의 특정 시기에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체제가 지구 전체를 채우고, 자본 단위가 갈수록 커지고 갈수록 상호 의존적이 되고, (경제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성공에 필요한 생산 규모가 갈수록 엄청나게 커지자 이 요인들은 모두 체제에 덜 유용해졌고, 오히려 부작용이 더 커져 심지어 체제에 파괴적이 됐다. 경제가 급속히 확대되던 시기는 이제 지나가고 엄청난 위기의 시기가 닥쳤다. 1870년대와 1880년대,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 사이 시기, 그리고 1970년대 초에 시작된 현 시기[하먼이 이 글을 쓴 때는 1980년대 초였다. — 옮긴이]가 바로 그런 위기 시기다.
이런 상황의 전개 과정을 알려면 자본주의 발전의 각 국면을 차례차례 살펴봐야 한다.
첫 국면 — 고전적 자본주의
고전적 국면의 자본주의는 바로 마르크스가 묘사한 자본주의다. 생산 단위(기업)는 시장에 견줘 보통 소규모였다. 간헐적인 위기로 어떤 기업들은 파산 지경에 몰리게 됐지만 그 덕분에 다른 기업들은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사업 확장을 재개할 수 있었다. 이윤율의 장기적 추세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기업들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활발하게 투자를 늘리지 못하게 만들 만큼 감소폭이 크지는 않았다. 이 시기는 영국과 벨기에에서 시작된 산업 자본주의가 급속히 확장해 미국·독일·스칸디나비아반도·프랑스 등지로도 뻗어나가고, 마침내 세계의 거의 전역이 자본주의 무역에 개방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1870년대와 1880년대에 ‘대불황’이 들이닥쳤고, 그로 말미암아 이 초기 급팽창기는 성장이 둔화됐다. 미국과 독일은 이 심각한 불황으로 1873년 이후 몇 해 동안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경제는 1870년대 말에야 회복됐는데, 몇 해 지나지 않은 1884년에 또다시 위기를 겪게 됐다.
늦어도 1889년쯤에 철강업계의 제왕 앤드류 카네기는 많은 기업주들의 걱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1870년대와 1880년대 전반에 걸쳐 미국 경제와 독일 경제는 여전히 상당한 성장을 누렸다. 이 20년 동안 독일은 처음으로 지속적인 공업화를 이뤘고, 미국은 “주기적 경기변동에도 생산이 꾸준히 증대해 1869년 33억 3천6백만 달러에서 1889년 93억 7천2백만 달러로 늘었다.”제조업자들은 여러 해 동안 모은 저축이 줄어들고 있다.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는 건 언감생심인 채 말이다. 완화 조짐을 보이는 건 무엇이든 반갑게 맞이하는 건 바로 이와 같이 준비된 토양 위에서다. 제조업자들은 여러 해 동안 정식 교육을 받은 의사의 진찰을 받으려 애썼어도 실패해 이제는 아무 돌팔이 의사라도 보이기만 하면 그저 넙죽 그의 제물이 되기 십상인 환자의 처지와도 같다. 1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영국이었다. 영국은 1870년대에만 해도 철·강철·석탄·섬유 같은 핵심 상품을 세계 생산량의 40~50퍼센트씩이나 생산했다. 처음에 닥친 불황은 독일이나 미국의 불황만큼 심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복이 독일이나 미국만큼 지속되지 않아 그 20년 동안[1870년대와 1880년대 — 옮긴이]의 패턴은 전반적으로 부진한 가운데 중간중간에 비교적 짧은 호황기가 끼어드는 식이었다. 그 시대의 분위기를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잘 묘사했다. “신흥 산업경제와 오래된 산업경제가 모두 시장의 문제점들과 이윤율의 문제들에 부딪혔다. 선구적 공업국들의 막대한 이윤이 줄자 기업인들은 애타게 탈출구를 찾았다.”
탈출구는 고전적 자본주의를 탈피해 독점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 변천하는 것임이 곧 드러나게 된다.
독점 기업들과 제국주의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처음에 서로 다른 두 가지 경로로 나타났다.
4 [트러스트는 같은 산업부문에서 자본의 결합을 중심으로 합동한 독점 기업으로, 시장을 지배하려고 각 기업이 독립성을 버리고 합동한 것이다. 한편, 카르텔은 같거나 비슷한 산업부문의 기업들이 경쟁 제한이나 가격 규제를 위해 연합한 형태다. 다른 한편, 신디케이트는 카르텔처럼 독립성을 유지한 채 연합한 형태이지만, 카르텔과 달리 공동 출자를 통해 새 회사를 설립해, 출자한 판매 회사만이 생산물을 판매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 옮긴이] 이 시기에 미국에서는 록펠러·카네기·모건 같은 부도덕하고 불법적인 벼락부자들이 헐값으로 경쟁 기업들을 사들여 우위를 확립했다. 그래서,
미국과 독일에서는 파산과 합병 물결이 추가로 일었다. 그래서 대규모 산업 구조조정이 비교적 큰 대기업들에 의해 좌우되는 방식으로 일어났다. 홉스봄은 이렇게 말했다. “트러스트와 카르텔과 신디케이트 등의 형성이 … 1880년대 독일과 미국의 특징이었다.”1897년에는 자본 총액이 10억 달러 이상인 기업 합동이 82건 있었다. 1898~1900년의 3년간 자본 총액이 11억 4천만 달러인 대규모 기업 합동이 11건 있었다. 1901년, 그때까지의 최대 합동체인 유에스 스틸이 자본 총액 14억 달러를 공시하며 등장했다. 5
6 이 사실에 주목한 조셉 길먼은 이런 언급을 했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이 시기에 상당히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경향을 보였다. 마르크스가 가설에 근거해 제시한 사례에 견주면 꽤 더딘 증가이긴 했지만 말이다.” 7 그래도 역시 경제는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다. 1890년과 1907년 사이에 생산량이 곱절이 됐으니 말이다. 8
이러한 자본 구조조정 덕분에 이전 자본의 일정액을 평가인하[손실처리 식으로 ― 옮긴이]할 수 있었고, 구조조정이 일어나지 않은 나라(예컨대 영국)에선 채택될 수 없었던 기술들을 사용하는 생산에 자원을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자본 구조조정 덕분에 신생 대기업들이 독점 가격 책정을 통해 자기보다 경쟁력이 약한 경쟁자들을 희생시켜 이윤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래서 20년간의 ‘침체’를 겪고 그 뒤에도 상당히 빠른 속도로 경제 확장이 지속될 수 있었다. 물론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계속 급등했다. 어떤 추산으로는 1880년과 1912년 사이에 1백 퍼센트가 증가했고[곱절이 됐고 ― 옮긴이] 다른 추산으로는 1900년과 1918년 사이에 25퍼센트가 증가했다.그러나 1870년대와 1880년대의 경제 위기 시대를 벗어나는 길이 또 하나 있었다. 이 길은 영국 자본주의가 밟은 길이었다. 파산과 인수·합병을 통한 구조조정을 피하고 영국의 제국주의적 권력을 이용해 영 제국, 영연방자치령, 그밖에 영국의 영향력 하에 있는 다른 지역(가령 남미의 일부 지역)에서 안전한 시장과 투자처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체계적인 경제력 집중의 길을 밟는 걸 꺼렸다. … 영국은 산업화 초기 단계의 기술과 기업 조직에 충실히 전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주된 활로는 하나밖에 없었다. … 지구상에서 그때까지 미개발이던 지역을 경제적으로(그리고 갈수록 정치적으로도) 정복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즉, 제국주의였다. 9
10 빠져나간 자본 액수는 대략 국민총생산의 8퍼센트로 증가했고, 국민 저축의 약 50퍼센트를 차지했다. 11
영국의 자본은 점점 더 빨리 해외로 흘러나갔다. 그래서 “해외와 식민지의 기업 주식에 대한 투자 총액은 1883년 9천5백만 파운드에서 1889년 3억 9천3백만 파운드로 증가했다.” ‘자본 집약적’ 신기술을 국내에 도입해야 한다는 압박을 개개의 자본가들이 덜 받음에 따라 체제는 파산과 인수·합병을 통한 구조조정을 최소화하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실제로 자본산출계수[생산의 한 단위에 소요된 자본의 수량으로, 낮을수록 자본의 효율이 높음을 뜻한다. — 옮긴이]는 1880년대 이후 계속 떨어졌다. 자본산출계수는 1855~64년 2.02에서 1865~76년 2.11로, 1875~83년 2.16으로 올랐다가 이후 감소하기 시작해 1884~90년 2.08로, 1891~1901년 1.82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1870년대 동안 곱절로 늘어나며 그 시대의 특징을 이루던 파산도 그 증가율이 감소세로 돌아섰다. 1884~88년 파산 건수는 8천6백62건이었는데, 1889~93년 7천5백21건, 1894~98년 6천4백17건, 1899~1903년 6천17건, 1904~09년 5천9백65건으로 줄어들었다.‘고전적 자본주의’가 위기 시대를 벗어나는 두 가지 길이 무한정 갈라질 수는 없었다. 두 길은 마침내 다시 만나고야 만다. 20세기 초의 마르크스주의적 저술가들이 ‘독점 자본주의’나 ‘금융 자본주의’나 ‘제국주의’라고 부른 것이 그것이다.
미국과 독일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지속적으로 증대하자 마침내 이윤율이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독일 기업주들이 그랬듯이, 기업주들은 1890년대에 겪은 것처럼 실질임금 인상을 중단시키고 생산성 증대에 따른 새 기술에 기대어 이러한 수익성 하락을 만회하려 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대량 생산 기술이 사용됐던 것이다. 그러나 기업주들은 영국식 해결책에도 끌릴 수밖에 없었다. 국민 국가의 물리력을 이용해 해외에 자신을 위한 경제적·정치적 특권 지역을 개척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1890년대부터 계속 독일과 미국이 처음으로 공식 제국과 비공식 세력권을 개발하려 했다. 그 결과 독일은 탕가니카와 아프리카 남서부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했고, 유럽의 중부와 동부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고, 쇠퇴하고 있던 투르크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미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러한 대외 확장은 기성 제국들과, 또 영국·프랑스 세력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러한 대외 확장으로 영국 자본주의의 위기 탈출 방법에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누가 어디를 지배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면전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었다. 미국과 독일의 막대한 자본 집중이 영국을 본받아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동안 영국 자본주의는 뒤늦게 자본의 구조조정과 집중이라는 길을 밟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의 첫 십년대에[1900~10년] 중요한 인수·합병 건이 많았는데, 특히 금융 분야에서 그랬다. 금융 분야에서는 겨우 다섯 개 은행이 군림했다. 그 시기에 다른 일부 산업에서는 새 기술들이 채택됐다. 그러나 인수·합병 물결과 기술 혁신으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가에 따른 이윤율 저하 압박은 경감되기는커녕 오히려 재개됐다. 해외 투자에서 나온 이자와 배당금이 국내로 유입돼 신규 투자로 빠져나가는 액수를 초과하면서 제국이 투자 가능 자금을 처리할 능력이 고갈됐기 때문이다. 자본산출계수가 다시 올라, 어떤 계산으로는 1891~1902년 1.92였던 것이 1908~13년 2.19로 증가했다.
그러므로 제1차세계대전은 이전 40년간 시기의 산물이었다. 즉, 고전적 자본주의가 독점 자본주의로 변모한 결과였다. 독점 자본주의는 그 내부 모순들을 극복하고자 제국주의적 확장에 점점 더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도 독점 자본주의화 추세를 더 뚜렷하게 만드는 구실을 했다. 이제 제1차세계대전으로 주요 열강들은 모두 산업의 집중도에 훨씬 속도가 붙었는데, 전시에 국가가 감독하며 개입해 직접 주요 산업들의 체계를 잡았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20년이 걸렸을 기술 혁신이 겨우 2년 만에 추진됐다. 새로운 업무 패턴이 눈 깜짝할 사이에 추진됐는데, 특히 대량 생산 작업 방식이 순식간에 도입돼, 숙련이 필요 없는 일에 임시로 비숙련공을 쓰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이전 반세기 동안에 자리 잡은 무역 연관이 전쟁으로 끊기자 많은 농업국들(가령 영연방자치령, 인도, 중국, 스페인 등지)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이 장려됐다.
14 영국의 자본산출계수(또한 그에 따라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은 1908~13년 2.19이던 것이 전쟁으로 1922~30년 2.02로 감소했다고 추산된다. 15
그러나 체제의 활력이라는 면을 놓고 보면 제1차세계대전은 유럽과 미국 경제에 서로 정반대 효과를 냈다. 전쟁으로 유럽에서는 상당량의 가치가 사라져 없어졌다. 전쟁이 없었다면 축적됐을 잉여가치가 무기로 변했고, 전쟁으로 공장 설비 등이 파괴됐기 때문이다. 어떤 계산으로는 참전 열강들의 산업 생산을 다 합쳐 봤을 때 개전과 종전 사이에 30퍼센트가 감소했다는 추정치가 나온다.16 다른 계산은 ‘생산적’ 산업 전체의 유기적 구성 수치들을 보여 주는데, 1910년 3.18에서 1920년 3.65로, 그리고 1925년 3.95로 증가했음이 드러난다. 17
반면에 미국은 전쟁 덕분에 산업 생산이 촉진됐고, 유기적 구성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떤 계산으로는 제조업의 유기적 구성이 1912년 3.2에서 1919년 4.3으로, 또 1921년 5.6으로 증가했다.전쟁이 끝난 뒤에 세계 체제의 견지에서 보면 미국 경제의 상황이 점점 더 중요해졌다. 전쟁을 거치면서 대서양 양안의 경제적 무게중심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했다. 세계 총생산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몫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1920년대 미국 경제의 비교적 오랜(7년간) 대확장 덕분에 독일 경제는 전쟁의 효과를 극복할 수 있었다. 유럽이 미국에 투자하는 옛 패턴은 이제 미국이 유럽에 투자하는 새 패턴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미국은 도즈 플랜과 영 플랜을 통해[제1차세계대전 후, 독일에 대한 배상을 결정한 도즈 안案을 오언 D 영이 위원장인 위원회가 개정해 1929년에 영 안案을 실시했다. — 옮긴이] 독일의 산업 확장에 재원을 댔다. 유럽이 미국에 의존하게 된 것은 처음에는 유익한 듯했다. 미국의 산업 생산은 1921년에 급격한 경기후퇴가 있긴 했지만 1929년까지 꾸준히 증대해 1914년 수치의 곱절이 돼, 당시에 거의 기적적인 호황인 듯했다. 라디오·레이온·화학물질·항공·냉장 등 일단의 신생 산업들이 성장해, 1915년에 시작된 자동차 생산이 진정한 도약 단계를 맞았다. 그리고 산업 장비의 상당 부분이 전기로 움직이는 것으로 교체됐다. 이윤의 일반적인 수준이 상승해 1929년의 이윤은 1923년의 이윤보다 22.9퍼센트가 더 많았다.
미국의 호황은 유럽에서 재연됐다. 독일의 산업 생산은 1922년 수준보다 40퍼센트나 증대했다. 프랑스의 산업 생산은 곱절이 됐다. 영국 경제만이 거의 상시적으로 침체해 있었는데, 쇠퇴하고 있던 재래식 산업이 신종 산업으로 대체되지 못한 탓에 생산이 1929년까지도 1919년의 수치에 못 미쳤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위기로 나아가는 경향을 이제는 극복했다고 선언하는 경제학자들이 1927년이나 1928년쯤에 아주 많았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가령 앨빈 핸슨Alvin H Hansen은 “아동기 자본주의가 걸리는 소아과 질병이 완화되고 있다”고 1927년에 쓸 수 있었고, 독일의 베르너 좀바르트는 “유럽의 경제 생활에서 적대적인 경향들이 서로 상쇄돼 줄어 들다 마침내 사라지는 경향이 1875년 이래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20 반면 1929년 이래 지속된 불황기에는 생산량과 무역량이 모두 상당폭 감소했다. 세계 산업 생산은 3분의 1이 감소했고, 미국의 산업 생산은 46.2퍼센트가, 프랑스의 산업 생산은 29.4퍼센트가 감소했다. 영국의 산업 생산만이 소폭 감소했지만, 이는 이미 부진한 수치를 기점으로 해서 더 떨어진 것이었다. 이제 1929년 이래의 불황만큼 심각하거나 오래가는 것은 없었다. 미국과 독일의 불황은 3년이 지나도 바닥을 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불황은 모든 공업국들에 동시에 타격을 입혔다. 그 나라들의 산업이 난관에 봉착했을 뿐 아니라, 농업국 농산물에 대한 수요도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농업국 농산물의 가격은 폭락했고, 그 주민들은 극빈 상태로 내몰렸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1929년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았다. ‘고전적’ 자본주의 시대처럼 독점 자본주의 시대도 오래 끄는 경제 위기로 끝났다. 그러나 이 위기 시대는 이전 것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었다. 1870년대 말과 1880년대의 ‘대침체’ 시기에는 그래도 전체 생산량이 상당히 증가했고, 무역량도 막대하게 늘어났다.(1869년과 1892년 사이에 3배가 됐다.)1930년대의 경제 위기
21 과소소비론의 출발점이 되는 사실은 1920년대의 미국 경제가 높은 생산 증가율에 비해 임금 증가율과 소비 증가율은 얼마 안 됐다는 점이다. 1922년과 1929년 초 사이에 산업 총생산은 3분의 1가량 증가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실질 임금은 겨우 6.1퍼센트 증가했고, 총 소비고는 고작 18퍼센트 증가했다. 1927년과 1929년 사이에 제조업 총생산은 거의 14퍼센트 증가했지만, 소비는 기껏 5.5퍼센트 증가했다. 22
1930년대의 경제 위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설명들 가운데 일반적인 것은 바란·스위지, 길먼, 스턴버스 등의 ‘과소 소비’ 이론들이었다.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로 위기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기가 쉬웠다.
언제나 그랬듯이, 모든 진정한 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추진력에 의해 사회의 생산력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대중의 빈곤과 얼마 안 되는 소비인 것이다. 마치 사회의 절대적 소비 능력만이 생산력의 한계나 되는 양 말이다. 23
그러나 이런 주장의 틈을 메우는 논의를 함으로써 마르크스는 앞에서 언급된 오늘날의 과소소비론자들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과소소비론자들은 자본주의가 오랜 기간 위기를 피하고 호황을 지속시킬 수 있는 이유를 정말로 설명하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설명할 수 있다. 상품의 수요가 생산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들이 임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생산물 전체보다 언제나 적다. 그렇지 않으면 이윤이 남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계속 축적한다면야 이게 문제 될 까닭이 없다. 즉, 자본가들이 생산수단 확대에 투자하면 생산물 가운데 노동자의 소비로 가지 않는 부분에 대한 수요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과잉생산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건 사회의 생산물 가운데 노동자의 소비로 제공되고 남은 부분을 새로운 축적에 사용하지 못하는 때뿐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윤율의 장기적 경향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신규 투자의 원동력이 약해지면 과잉생산이 실제로 가능해진다. 그러나 어떤 특정 위기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저 “이윤율이 저하했으므로 이제 위기가 시작됐다”고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중간에 갖가지 요인들이 끼어 매개변수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20년대 초까지 미국 경제의 이윤율은 떨어지고 있었다.(메이지와 길먼의 계산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진짜로 하락했다고 할 만한 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증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길먼이 계산한 바로는 1880년 69퍼센트에서 1900년 50퍼센트, 1919년과 1923년 29퍼센트로 떨어졌다가 1927년 32퍼센트가 될 때까지 다시 올랐다. 메이지가 제시한 수치는 달랐지만, 추세는 같았다. 메이지의 계산으로는 1900년 10.84퍼센트, 1903년 12.97퍼센트였다가 그 뒤 떨어져 1911년 12.03퍼센트, 1919년 6.48퍼센트가 됐다. 그러나 그리고는 다시 올라 1923년 7.19퍼센트, 1928년 7.96퍼센트가 됐다. 그러나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가로 이미 1919년 이전에 이윤율이 감소한 나머지 생산적 축적의 속도가 줄었다. 요제프 슈타인들[1912년 출생의 오스트리아계 영국인 경제학자 — 옮긴이]의 통계로 1879~99년의 축적률은 연평균 5퍼센트였지만, 1920년대에는 연평균 3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졌다.
26 1890년대와 1900년대 자본형성[투자를 뜻한다고 할 수 있음 — 옮긴이]은 13~14퍼센트였고, 1919~28년에는 10.2퍼센트였다. 바란과 스위지의 주장에 따르면, 이 ‘부진한’ 경향은 1907년과 제1차세계대전 사이의 경제 위기들이 이전의 것들보다 더 심각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27
길먼의 수치로1920년대에는 이윤율이 더는 어떤 생산적 축적 수준을 지속시킬 만큼 되지 못했는데, 그 축적 수준으로는 미국 경제의 잉여가치를 전부 처리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사회 전체의 생산과 사회 전체의 생산적 소비(임금 더하기 생산적 축적) 사이에 간격이 벌어져, 뭔가 다른 것이 그 간격을 메우지 못하면 과잉생산 상황이 되게 됐다. 비교적 낮은 이윤율에 대한 개개 고용주들의 대응은 종업원들을 더욱 착취하는 한편 임금 인상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해서는 그 간격을 더 벌릴 수 있었을 뿐이다. 이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너무 높아져, 총이윤의 증가로는 총이윤 대 생산수단·재료의 비율이 현격히 오르지 못했다. 늘어나는 투자 추구적 자금의 배출구가 마련될 만큼 이윤율이 오르지 못했던 것이다.
이성적 통제가 안 되고 걷잡을 수 없는 자본의 자체 확대[자기증식]로 말미암아 산 노동에 비해 불변자본이 어느 때보다 더 커졌다. 한편으로 이것은 이윤율의 장기적 저하로 나타났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신규 자본축적으로써 대중의 낮은 소비가 보충될 때만 온전히 이용될 수 있는 생산 능력의 창조로 나타났다. ‘과잉생산’과 낮은 이윤율은 동전의 양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20년대의 축적 수준이 낮았다고 해서 1929년 이전에 불황이 발생한 것은 아니다. 전체 생산적 소비와 전체 생산물 사이의 격차가 비생산적 소비 형태들로 메워졌기 때문이다.
28 코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균형이 과잉 구매력을 가진 소집단들의 ‘욕망’을 인위적으로 자극하는 것에 더욱 기대게 된다”고 봤다. 29
비생산적 소비 형태들의 일부는 그냥 지배계급과 중간계급의 사치품 소비였다.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당시 선구자 루이스 코리가 추산한 바로 ‘부르주아지’(코리는 비농민 프티부르주아지도 여기에 포함시켰다)의 소비는 전체 소비의 42.9퍼센트를 차지했다.30 광고 수입만도 1929년 20억 달러나 됐다. 31 제조업 설비투자 총액보다 겨우 25퍼센트 적은 거액이었다. 길먼의 주장으로는 ‘비생산적 경비’(광고비, 마케팅 비용 등)가 1919년 잉여가치 총량의 절반에서 1920년대 말 3분의 2로 증가했다. 32
이 사치품 생산을 보충했던 것은 노화하는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산물인 어떤 경향이었는데, 그것은 각각의 자본이 더욱더 많이 지출해도 전체 잉여가치를 증가시키지 않고, 이미 창출된 잉여가치 가운데 더 큰 몫을 자신에게로 끌어모으는 식으로 지출하게 되는 경향이었다. 코리의 추산으로 1870년 미국 산업의 물류비는 소비자 물가의 30퍼센트였던 것이 1930년 59퍼센트로 증가했다.마지막으로 언급할 요인은 이렇다. 막대하게 축적된 자금이 수익성 있게 투자할 수 있는 배출구를 찾는 것 자체로 과잉 잉여가치 처리 수단이 일시적으로 마련됐다. 투기 호황이 잇따르면서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것 자체로는 잉여가치를 처리하지 못했다. 그저 한무리의 큰손에서 다른 한무리의 큰손으로 투자 가능 자금을 이전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주가와 부동산 가격 상승의 부산물로 거액의 비생산적 경비가 지출됐다(가령 건물 신축, 비생산적 직원들에게 지급되는 봉급, 과시적 소비 따위). 그리고 주가와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조성된 투기 풍조 덕분에 얼마간의 재원이 ‘생산적’ 사업으로도 갔다. 투기 분위기가 없었다면 생각도 못 했을 사업들 말이다. 곧,
남아도는 자본은 더욱 공세적으로, 또 더욱 모험적으로 투자와 이윤을 추구했다. 위험한 사업과 투기 쪽으로 넘쳐 흐르듯이 말이다. 투기성 자금이 기술 변화와 신생 산업들에 달려들었는데, 이 신기술과 신산업은 산업 일반의 요건과 관계 없이 도입되고 있었다. 33
34 1928년 “미국 산업들은 시장의 처리 능력보다 대개 25~75퍼센트 더 많은 생산 능력이 있었다”는 주장이 그동안 있었다. 35
이러한 요인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비록 경제 활동의 속도를 높이는 효과와, 생산적 경제 부문이 생산하는 재화 거의 전부에 대한 수요가 존재하게 하는 효과를 일시적으로 냈지만, 모두 최후 수단으로 생산적 경제에 의존했다. 생산적 경제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지는 순간 이러한 요인들은 모두 그 효과가 떨어졌다. 그리고 생산적 부문의 생산물에 대한 수요가 줄어 그 가격이 비용 이하로 떨어질 때까지 내려가면서 생산적 부문의 이윤율은 더욱 곤란을 겪었다. 광분한 투기 열풍은 호황에 활력을 더할 수 있었고, 심지어 호황을 더 지속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 호황이 한풀 꺾이����� 투기 광풍이 쇠잔해지면 나머지 경제도 그에 질질 끌려가 훨씬 더 침체할 수 있었다. 사실, 경제의 근저에 있는 생산 부문은 취약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축적률은 1920년대 내내 낮았다. 제조업 노동자 수가 1919년 수치를 넘은 해가 한 해도 없었다. 이 시기 내내 생산 능력이 남아돌았다. ‘호황’ 연도였던 1928년에도 산업 생산 능력의 18퍼센트가 사용되지 않았다.마르크스는 호황이 갑자기 불황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정확한 방식들을 《자본론》 제3권에서 논의한다. 그는 세 가지 방식을 언급하는데, 그 방식들은 서로 결합돼 작용할 수도 있고, 각각 따로 작용할 수도 있다. 첫째, 호황으로 실업이 감소하면 임금률이 상승하고 착취율이 줄어, 결국 수익성이 가장 낮은 기업들이 폐업하고 그에 따라 다른 기업들도 파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1927~29년에 임금이 조금 인상되기는 했지만, 총생산량이 훨씬 더 많이 증가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게 불황을 촉발시킨 진정한 요인이었던 듯하지는 않다.
37 이미 과잉생산이 대규모로 존재했는데도 말이다. 일부 산업들에선 생산된 상품들이 다 팔리지 못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러한 투자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 자체로는 특정 산업들의 이 부분적 과잉생산이 전반적인 불황을 일으킨 이유가 되지 못했다.
둘째, 상이한 경제 부문들의 축적이 이성적인 통제가 안 되고 걷잡을 수 없어서 생길 수 있는 불균형이다. 이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일부 산업들은 생산한 상품의 수요가 없어 ‘부분적인’ 과잉생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분명히 이것이 1929년 초 미국에서 전개되고 있던 패턴이었다. 광분한 투기 열풍 덕분에 1920년 이후 어느 해보다 더 많은 투자가 이뤄졌다.이런 사태 전개는 마르크스 설명의 셋째 요인 — 신용과 이자의 구실 — 에 달려 있었다. 산업 자본가의 자본 투자는 끊임없는 과정이 아니다. 산업 투자에는 (공장과 설비 같은) 대형 유형물有形物이 포함되는데, 이 대형 유형물에는 다량의 가치가 구현돼 있다. 이 유형물이 가동되면 거기서 생산물로 가치가 이전된다.(물론 생산물에는 노동자들의 노동도 구현된다.) 그러나 공장·설비 가치의 이 이전은 일시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자본가가 자기의 자본 비용에 돈을 대고, 닳아서 못 쓰게 된 설비와 공장을 대체하는 데 필요한, 마찬가지로 거액의 투자를 하는 데 필요한 가치량을 얻으려면 여러 해가 걸릴 수 있다. 그래서 생산의 한 차례 순환에는 한꺼번에 거액을 지급하고 그런 다음 소액을 느루 수금하는 것이 포함된다.
38 과 당장 투자하기를 원하는 산업 자본가들을 중개하는 구실을 한다. 빌리는 사람들은 빌려 주는 사람들에게 투자로 창출된 잉여가치의 일부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비용을 아주 조금씩 회수하는 동안 자본가는 그것을 즉시 투자할 수 없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자본가는 흔히 그렇게 회수한 비용을 다른 자본가들에게 빌려 준다.(주식 거래를 통해 그럴 수도 있지만 은행을 통해 그럴 가능성이 더 크다.) 그리고 그가 대규모 투자를 원할 때는 직접 자본을 충분히 모을 때까지 굳이 기다리지 않고 주식 거래나 은행 대출을 통해 다시 빌리면 된다. 금융기관은 미래의 투자를 위해 잉여가치를 축적하고 있는 산업 자본가들그 이자는 그들이 얻는 잉여가치에서 공제돼야 하므로, 결국 그들의 수중에 들어오는 최종 이윤량을 감소시킨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발견한 중요한 사실 하나는, 그들이 부담하는 금리가 이윤율을 결정하는 요인들과 똑같은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산업 순환의 중요한 시점에서 금리와 이윤율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왜냐하면 금리를 결정하는 것은 대출 자금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라는 상반된 압력이기 때문이다. 은행에 빌려 줄 수 있는 자본의 공급이 가장 많을 때는 산업의 이윤율이 가장 높을 때일 것이다. 즉, 경제가 한창 성장하지만 임금이 상승하거나 심각한 경제적 불균형이 나타나기 전일 것이다. 경제의 일부에서 이윤율이 저하하기 시작하는 순간(예컨대, 부분적 과잉생산 때문에) 은행에 빌려 줄 수 있는 자본의 공급은 줄어들기 시작한다. 반대로, 대출 자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시점이다. 대규모 투자를 단행할 때 자본가들은 대출 가능한 자본을 많이 끌어다 쓴다. 그리고 상품이 충분히 팔리지 않아서 이런 부채의 이자도 상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대출을 훨씬 더 많이 받으려고 은행을 찾아간다. 은행은 이 대출을 승인할 수도 있고 아니면 신용 공급을 줄여서 기업을 파산케 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 기업에 제품을 공급하던 기업들의 상품 시장이 파괴될 것이고, 따라서 그 기업들의 대출 자금 수요도 증가할 것이다. 어느 경우든, 부분적 과잉생산 위기 때문에 대출 가능한 자본의 공급이 감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출 가능한 자본에 대한 수요는 증가한다. 이 때문에 경제 전체에서 금리가 오르고 경제 위기가 보편적이 된다.
은행가들이 경제 위기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신용의 흐름을 단절시키는 것도 아니고, 고금리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다. 고금리와 신용 흐름의 단절은 오히려 산업 부문 경제 위기의 산물이다. 경제 위기 때 많은 선의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또는 악의의 파시스트들)이 은행의 구실이나 금리 수준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 부질없는 일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은행가들의 존재와 금리 조작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일반적 불합리성의 한 징후일 뿐이다.
40 경제 위기는 사실 그 전에 산업에서 시작됐다. 킨들버거가 옳게 지적했듯이, 미국의 “경기는 주식시장 붕괴 전부터 이미 악화하고 있었다.” 41 자동차 생산은 3월 62만 2천 대에서 9월 41만 6천 대로 감소했다. 42 기계류 생산량은 6월부터 감소하기 시작해서 연말에는 공작 기계와 주조 설비에 대한 신규 주문이 50퍼센트나 감소했고, 기계 산업 전체의 실업률이 10퍼센트에 달할 정도였다. 8월부터는 자동차와 기계류에 이어 철과 강철의 생산량도 감소하기 시작하더니 4개월 만에 총 42퍼센트가 감소했다. 건설도 연말까지 52퍼센트가 감소했다. 43 9월과 10월까지 전체 산업 생산은 연평균 20퍼센트의 비율로 하락하고 있었다. 44
흔히 1930년대의 불황은 1929년 10월 29일 월가의 주식시장 붕괴로 시작됐다고들 생각하지만,45 “1929년 여름에는 불황에 빠졌다는 사실이 누가 봐도 분명했다.” 46 실업자가 1백90만 명이나 됐고 프랑크푸르트 보험회사의 엄청난 실패 후에 파산이 잇따랐다. 벨기에 경제는 3월부터 후퇴하기 시작해서 연말까지 7퍼센트 하락했으며, 영국에서는 전환점이 7월에 찾아왔다. 오직 프랑스에서만 주식시장 붕괴 시점에도 여전히 생산이 증가하고 있었다.
유럽의 불황도 주식시장 붕괴 전에 시작됐다. 독일의 상황이 가장 나빴다. 이미 연초에 독일에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미국의 단기 투자 자금이 본국으로 되돌아온 것이 미국 주식시장 호황을 가열시킨 요인의 하나였다. “많은 독일 산업들이 세계대전 종전 뒤에 실시된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고 있었고, 자본 재건 작업의 종착점에 근접하고 있었다. … 미국의 해외 투자액은 급감하는 쪽으로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그러나 월가 주식시장의 붕괴는 산업 부문 경제 위기의 결과였을 뿐 아니라 산업의 위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반작용을 하기도 했다. 판매가 감소하자 산업 자본가들은 은행에 돈을 빌려 주기보다는 오히려 빌리기 시작했다. 투기적 호황에 뛰어들었던 자들은(산업 자본가들과 은행가들을 모두 포함해) 주식시장 붕괴 후 손실을 만회하려고 더 많이 빌리려 했다. 빌릴 수 없는 자들은 파산했고, 이 때문에 그들의 부채 상환에 의존하던 사람들이 잇따라 손실을 입었다. 갑자기 기업들은 수지타산을 맞추기가 매우 어려워졌고, 불황은 경제의 한 부문에서 다른 부문으로 확산됐다. 미국의 상황은 미국의 대출 덕분에 경제가 회복되고 있던 유럽에도 영향을 미쳤다. 큰 타격을 입은 미국 [금융]기관들은 독일에서 단기자금을 회수했고, 이 때문에 미국 단기자금에 의존해 산업의 과잉설비 자금을 조달하던 독일 산업자본가들은 곤경에 빠졌다. 그들의 대책은 런던에서 자금을 빌리는 것이었는데, 그러자 이번에는 런던의 금리가 오르면서 영국 산업 자본가들을 압박했다.
일단 시작된 후퇴는 결코 끝나지 않을 듯했다. 산업 생산의 감소 때문에 주식시장이 붕괴하고 은행이 압박을 받았는데, 이것이 이번에는 산업 생산을 더 감소시키고 은행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켰다. 미국에서는 지방은행 수백 곳이 파산했고, 유럽의 일부 대형 은행들도 극적으로 붕괴했다. 각국 정부는 정부 지출을 삭감해서, 은행이 받는 압박을 완화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생산 능력과 소비 수요 사이의 불균형을 가중시켰을 뿐, 오히려 산업 부문의 경제 위기를 더 악화시켰다. 호황을 가열시키는 데 일조했던 비생산적 지출은 기업들이 자금을 아끼려 함에 따라 다시 감소했고, 불황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47 미국에서는 한때 노동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실업 급여를 받고 있었고, 독일에서는 1933년 1월에 실업자가 6백만 명이나 됐다. 영국에서는 잠시 동안 실업률이 20퍼센트를 웃돌기도 했다. 세계무역은 1929년 수준의 3분의 1로 급감했다.
전에는 항상, 자동적인 시장 메커니즘이 결국은 경제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줬는데 이제 더는 그런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 듯했다. 경제 위기가 시작된 지 3년 후에도 미국·독일·영국·프랑스의 산업 생산은 여전히 감소하고 있었다. 전 세계의 실업자는 1929년 약 1천만 명에서 1932년 4천만 명으로 급증했다.체제의 노후화가 체제 자체에 타격을 주고 있었다. 일부 자본들이 붕괴해서 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다른 자본들이 성장할 수 있을 때까지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방식은 더는 효과가 없었다. 개별 산업자본이나 금융자본의 규모가 커서 어느 하나라도 붕괴하면 다른 자본들도 함께 붕괴할 지경이었다. 여기서 불황의 특징적 패턴이 나왔다. 산업의 침체가 주식시장 침체를 촉발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식시장 침체가 산업의 침체를 더 악화시키고 은행 파산을 촉진했다. 은행들이 문을 닫으면 산업의 침체는 더욱 악화했고 그러면 은행이 더 많이 파산했다. 붕괴가 잇따르자 안전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체제의 다양한 부분들은 너무 크고 너무 긴밀하게 얽혀 있어서 자본 하나가 다른 자본을 집어삼키면 자신의 생계 원천까지 파괴할 위험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바탕 위에서 제한적 회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정말로 엄청난 파괴 후에야 비로소 그런 회생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1932년 중반에 영국의 산업 생산은 약간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는 석탄, 철과 강철, 조선 같은 오래된 산업 부문에서 12년 동안(겨우 3년이 아니라) 실업률이 높게 지속된 뒤였다. 그리고 그런 호전은 오래된 산업 부문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경금속과 자동차 부문에서 새로운 성장이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 — 독점 자본주의에서 국가자본주의로
1932년까지 사실상 세계 도처의 지배계급들은 경제 위기가 저절로 해결되기를 기대했다. 제1차세계대전 이전의 경제 위기들과 1921년의 경제 위기가 그랬듯이 말이다. 각국 정부가 걱정해야 했던 것은 오로지 균형 예산[긴축재정 — 옮긴이]을 짜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공무원, 교사, 심지어 군인의 급료를 삭감하고 실업 급여도 삭감했다. 균형 예산을 달성해야만 공공사업으로 실업을 약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체로, 오늘날 ‘대처리즘’[신자유주의 — 옮긴이]이라고 부르는 것이 널리 퍼졌다. 미국의 후버, 영국의 맥도널드, 독일의 브뤼닝, 파펜, 슐라이허의 기본 정책이 그랬다. 그러나 1932년 말쯤 — 특히 미국과 독일에서 — 이 정책은 분명히 효과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생산이 과거 수준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에서 자본이 이윤을 내려 애쓰다 보니 자본 자체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전체를 쉽게 전복할 수 있는 사회 세력들이 창출되고 있었다. 모종의 새로운 정책이 필요했다.
결국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국가가 전면에 나서지 않은 채 노동력 재생산(교육, 건강, 고용 보장 등), 사회 기강(법과 질서), 제국주의적 야망 달성(국방) 같은 아주 많지는 않은 서비스를 제공해 대기업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독점 자본주의에서, 국가가 나서서 자국 자본주의의 다양한 구성 요소들의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고, 의식적으로 산업을 구조조정하고, 한 경제 분야에서 다른 경제 분야로 잉여가치를 이동시키고, 주기적 경기변동의 진폭을 완화시키려고 애쓰는 형태의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이런 변화는 이미 제1차세계대전 때 그 징조가 나타났다. [1870~71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같은 5개월짜리 군사작전이 아니라 서로 경쟁하는 제국주의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는 전쟁이라는 점이 명백해지자, 주요 참전국들에서는 국가가 전권을 쥐고 개별 자본들에게 생산을 군사적 노력에 종속시킬 것을 강요했다. 그래서 국가가 원료와 식료품을 배급하고, 공장에 특정 재화 생산을 지시하고, 스스로 군수품 생산과 석탄·철도 산업 등을 조직하고, 필요하다면 비협조적 기업을 몰수하고, 사실상 노동을 징발했다.
48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들’, 49 또는 그냥 ‘국가자본주의’ 50 라고 부른 것을 다룬 글을 썼다.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레닌과 부하린은 ‘국가독점자본주의’,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서유럽에서는 국가가 핵심적 구실을 하는 경향이 확연히 쇠퇴했다. 예컨대, 영국에서 국가는 철도·탄광 통제를 포기했다. 시장 경제가 중앙집권적 전쟁 경제를 대체했고, 점차 독점화한 산업·금융 기업들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똑같은 추세가 독일에서도 나타났다. 비록 독일에서는 (철도, 알루미늄 독점기업, 발전소, 일부 탄광을 소유한) 국가가 생산에 더 직접 관여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국가가 사실상 생산적 구실을 전혀 하지 않았다.
전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일시적 현상이었다. 주요 산업·금융 부문들은 중앙의 군사적·관료적 지시에 종속되지 않고도 자신들의 국제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국가독점자본주의를 포기했다. 그들은 국가의 규제를 받지 않고 다른 나라 자본과 제휴할 수 있는 자유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을 여전히 선호했다.
그러나 독점 자본주의도 불황에서 저절로 회복될 수는 없었으므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국가가 조직한 독점 자본주의로의 회귀 압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불황이 최악이었던 1932년 말 미국에서는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했고, 독일에서는 대기업 총수들과 군부의 잇따른 회동을 거쳐 히틀러에게 권력이 이양됐다. 미국에서는 국가의 민간 자본 감독 강화가 비교적 제한됐다. 이미 허버트 후버[1929~33년 재임 대통령 — 옮긴이]는 국가의 자금으로 기업과 은행을 지원하려 했고, 실업을 약간 해소하려고 소규모 공공사업들을 시작했다. 어쨌든 경제가 제한적이나마 회복되던 바로 그때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이런 조처들을 확대했다. 연방준비제도는 남아 있는 은행들의 자금으로 더한층의 붕괴를 막는 확실한 보증 장치였다. 농산물 가격을 올리기 위해 농작물을 사들여 파괴하는 데 정부 자금이 사용됐다. 토목건설단들이 청년 실업자 2백30만 명에게 일거리를 제공했다. 전국산업부흥법은 카르텔 형성을 촉진해서 산업이 제한적이나마 자체 조절을 하게 했는데, 그 덕분에 가격과 생산수준 통제가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노동조합의 임금 인상(따라서 소비 수요 증대)도 좀더 쉬워졌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처럼 국가가 직접 생산을 조직하는 실험이 약간 있었다. 그와 동시에, 루스벨트 정부는 미국을 금본위제에서 탈퇴시켜, 달러 가치와 미국의 자금 수준이 더는 시장의 자유로운 흐름에만 의존하지 않고 미국의 수출을 지원하려는 정부의 의식적 개입에 의존하게 했다. 뉴딜 정책은 독점 단계의 자본주의가 체계적 국가 개입 없이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만큼 뉴딜 정책은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 단계를 나누는 뚜렷한 분수령이었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적 통제는 제한적이었다. 국가는 민간 부문을 부양하려 했지, 통제하려는 실질적 노력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재정을 투입해 고용을 확대하는 정책이 여전히 제한적이었던 것도 루스벨트가 이끄는 민주당 정부가 균형 예산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53 산업 생산은 1933년 3월에 1924~25년 수준의 59퍼센트에서 7월에 1백 퍼센트까지 상승했으나, 이듬해에는 71퍼센트까지 다시 내려갔다. 실업자는 1백70만 명이 줄었지만 여전히 1천2백만 명이나 됐다.
그렇게 소심한 정책은 경제 위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뉴딜 정책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3년 봄에 시작된 상승세는 어느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사실, “상승세는 … 광범하지도 급속하지도 않았다.”1937년에야(경제 위기가 시작된 지 8년 후였다) 생산은 1929년 수준을 회복했다. 그러나 노동인구는 10퍼센트 더 많고 생산성은 15퍼센트 더 높았으므로 실업률은 14.3퍼센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작은 호황’도 곧 불황으로 바뀌었다.
54 1937년 12월에 철강 생산 설비의 26퍼센트만이 가동 중이었고 섬유 생산량은 3월 수준의 60퍼센트밖에 안 되었다. 1938년에는 산업 전반의 유휴 생산 설비가 40퍼센트에 달했고, 55 실업은 19퍼센트까지 치솟았다. 실업은 1940년까지 줄곧 14퍼센트 이상을 기록했다.
1937년 8월 이후 “미국 역사상 최악의 경기후퇴”가 닥쳐서 “1932년 이후 달성된 경제지표가 대부분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1920년대는 비국가non-state 독점 자본과 연관된 비생산적 지출 형태(마케팅 비용, 광고, 투기 사업, 사치품 소비)가 경제 위기를 늦출 수는 있지만 그 위기의 충격이 전보다 더 커지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는 점을 보여 줬다. 1930년대는 정부의 ‘경기부양책’이 체제의 수명을 연장해 줄 수 없다는 점도 보여 줬다. 더 심대한 변화가 필요했다.
이런 변화를 겪은 첫 번째 서방 강대국은 독일이었다. 히틀러 집권 후 처음 2년 동안 경제 정책은 뉴딜 정책과 매우 비슷했다. 공공사업 — 특히 아우토반[자동차 전용 고속도로] 건설과 철도 체계 확장 등 군사적 기능도 할 수 있는 사업들 — 이 대대적으로 추진됐다.(1930~33년의 취약한 정부는 그만한 규모의 사업을 벌일 수 없었다.) 주택 개량에 국가 보조금이 지급됐고, 산업은 세금 면제와 저금리 대출을 받았으며, 기업들은 대기업의 가격과 이윤을 보호하기 위해 카르텔을 결성하도록 강요받았고, 임금은 불황기의 수준을 유지하도록 법으로 고정됐다. 이미 회복 조짐을 보이던 경제는 이런 조처들 덕분에 탄력을 받아, 산업 생산은 1929년 수준의 53.8퍼센트에서 1934년에는 79.8퍼센트까지 상승했다.
그러나 이런 조처들도 경제 위기를 낳은 압력을 제거하지는 못했다. 실업은 여전히 1929년 수준의 세 배나 됐고, 공공사업 비용을 지급하느라 인플레이션 압력이 창출돼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치 정권은 국가 통제 독점 자본주의로 더욱 나아갔고, 독재 권력을 이용해 경제를 통제했다. 나치가 주요 자본가 집단들은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지만, 이제 그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전폭 지지했던 군비 증강의 필요에 — 1914~18년에 그랬듯이 — 종속돼야 했다. 1933년의 온건한 경기부양책은 1935년 이후[전쟁] ‘준비 경제’ — 군비 경제 — 로 대체됐다.
56 대기업은 대부분 이런 조처들을 기꺼이 따랐다. 그러나 반대한 기업인들은 곧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를 알게 됐다. 독일 최대 기업 중 하나의 총수인 티센은 나치가 집권하기 전부터 그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는데도 괴링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고 독일에서 도망쳐야 했다.
국가는 저축은행을 통제하고 상업은행을 엄격하게 감독하면서 그 은행들의 예금을 새로운 군비 증강 자금으로 사용했다. 산업 기업들은 일정 수준을 넘는 이윤을 모두 군비 증강을 위해 국가에 맡기도록 강제하는 법률이 제정됐다. 대기업은 교묘한 부기簿記로 법망을 피할 수 있었지만, 중소기업은 그럴 수 없었다. 1936년 시작된 4개년계획 시기에 ‘경제 독재자’가 된 헤르만 괴링의 목표는 60~80억 마르크의 투자 계획을 강행하는 것이었다. “투자가 수익성이 있든 없든 모든 방법 — 금융 투자, 국고 보조, 세금 면제, 가격·주문·이윤 보장 — 을 써서 계획을 밀어붙였다.”57 취업 노동자 수는 1천2백90만 명에서 1939년 2천80만 명으로 증가한 반면, 실업자 수는 6백만 명에서 1939년 5월 7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새로운 생산은 대부분 군수산업과 전쟁 준비를 뒷받침하는 산업인 중공업으로 들어갔다. 1932~37년에 국민총생산은 1백7억 달러 증가한 반면, 민간 소비는 겨우 12억 달러 증가했다. 58
영국·프랑스·미국 경제가 1937년에 다시 불황에 빠진 반면 독일에서는 이런 조처들이 경제를 불황에서 건져내 호황을 지속시키는 효과를 냈다. 1936년 독일 경제의 생산량은 1929년 수준을 회복했고 1939년에는 그보다 30퍼센트 더 증가했다. “정부가 채택한 정책 기조는 간단했다. 생산 증가분을 주로 군사 목표 달성에 중요한 산업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생산재 산업의 생산지수”는 1932년에 1928년 수준의 45퍼센트였는데 “1938년에는 1백36퍼센트까지” 상승했다. “소비재 산업의 지수는 같은 기간에 78퍼센트에서 1백7퍼센트로 상승했다.” 따라서 생산재 생산은 2백 퍼센트 증가한 반면, 소비재 생산은 38퍼센트 증가했다.60 또, 미국과 달리 독일 대기업들은 나치의 정책을 방해하지 않았다. “군 장성들은 대기업과 손을 잡았는데, 그 과정에서 사기업들은 경제적 재무장을 자신들에게 완전히 이로운 바람직한 경제적 목표로 받아들였다.” 61
군비 증강과 중공업의 성장은 1929~32년에는 그토록 부족했던 시장과 투자처를 제공해서 경제 전체를 성장시켰다. 호황을 부채질하는 데 드는 비용이 경제성장 자체 덕분에 생겨난 재원으로 대부분 충당됐다. 반면, 미국 뉴딜 정책의 효과는 변변찮았다. “1932~36년에 미국 정부 지출의 절반이 재정 적자로 조달된 반면, 독일에서는 전쟁 전의 시기에 정부 수입의 5분의 1이나 4분의 1만이 적자였다.”그러나 그런 정책에는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독일은 자급자족하는 경제 단위가 아니었다. 생산력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국경의 한계를 뛰어넘어 국제적으로 발전했다. 독일 국내의 경제성장은 수입 — 특히 원료 수입 — 에 의존했는데, 세계경제 정체에 따른 수출 부진 때문에 수입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다.
62 그와 동시에, 독일 정부는 외채 이자 지급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나치는 집권 후 1년이 채 안 돼 이 문제를 감지했다. 1932년에 10억 마르크였던 수출 흑자는 1934년 상반기에 3억 1천6백만 마르크 적자로 바뀌었다. 독일의 금 보유량과 외환 보유액이 급감하자, 나치 정권은 대외무역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했다. 기업은 상품을 수입하기 전에 특별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이런 허가는 최우선 순위의 군수품 같은 “필수 품목들”만 받을 수 있었다. 결국 “독일은 다른 나라들과의 가격 관계가 단절되거나 크게 틀어지면서 경제적으로 고립됐다.” 이 모든 조처들로 말미암아 독일 경제 내에서 ‘아우타르키autarchy, 경제적 자급자족’를 향한 강력한 추진력이 형성됐다. 그러나 그런 조처들도 독일이 세계경제의 다른 부분들에 의존하는 것을 완전히 차단하는 데까지는 나아갈 수 없었다. 군비 호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특정한 전략적 수입품들이 점점 더 필요해졌다. 식량 수입은 쉽게 줄일 수 있었지만, 원료 수요는 끊임없이 증대했다. 처음에 이 수요는 이제 강력하게 중앙집권적이 된 독일 경제의 경제력을 이용해 소규모 외국 공급업자들을 위협해서 충족시킬 수 있었다. 외국 공급업자들은 사실상 독일 수출품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구입하지 않으면 독일에 상품을 판매할 수 없을 것이라거나 기존의 무역 채권을 회수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런 식으로, 예컨대 발칸반도 나라들의 경제는 점차 독일 경제의 지배를 받게 됐다.64 원료 공급이 그렇게 불안정한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은 인접 경제들을 합병하고 그들의 산업을 독일의 군비 증강에 종속시키기 위해 독일제국의 경계를 확장하는 것뿐이었다. 국가가 통제하는 군비 경제를 바탕으로 불황에서 탈출해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제국주의적 전쟁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런 편법들은 임시변통의 구제책에 불과했다. 전에 북아메리카에서 공급되던 원료를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에서 얻으려고 비슷한 압력을 가했지만 실패했고, 그래서 “한동안 무역이 중단됐다가 부채가 어느 정도 감소한 뒤에야 재개됐다.”65 일본은 다른 나라들보다 2년 앞서 불황에서 빠져나왔다. 1934년에 산업 생산은 1929년 수준보다 28.7퍼센트 높았으며 1938년에는 73퍼센트 높았다. 66
독일은 당시 국가 통제 독점 자본주의가 전쟁으로 나아간 가장 중요한 자본주의였지만 첫 번째 자본주의는 아니었다. 미국·영국·프랑스는 서로 경쟁하는 특정 자본가 집단들의 세력 때문에 국가 통제가 제한됐다. 그러나 후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여기서는 국가 관료의 개입이 없었다면 무엇보다 해외 경쟁 때문에 실질적 산업 발전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이 전형적 사례다. 일본 국가는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자본주의 발전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국가 관료와 소수의 자본주의 대기업들은 그 후 줄곧 긴밀하게 협력했다. 그래서 세계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일본은 이미 국가독점자본주의였다. 경제 위기에 따른 일본의 산업 생산 감소는 다른 주요 자본주의 나라들보다 훨씬 작아서, 첫 2년 동안 약 10퍼센트에 그쳤다. 그러다가 1931년에 일본은 군사적 팽창 노선으로 전환했다. 일본 군대는 만주로 진출했고, 정복 지역은 점차 군사화한 일본 경제의 부속물이 됐다. 일본 본토와 점령지의 경제 모두 통합 4개년계획을 바탕으로 한 지속적인 산업 성장을 했다.그러나 일본의 국가자본주의조차 1929년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 그 극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 영광은 소련이라는 옛 노동자 국가가 차지했다.
67 여기서는 1928년 무렵에는 점차 자기 의식적 세력이 된 관료 집단이 운영한 비교적 소규모의 국가 공업 부문이 대규모 개인 농업 부문과 공존하고 있었다는 점만 지적하고 넘어가겠다. 그러나 공업 부문을 통제하는 자들은 국가를 통제한 덕분에 군사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들은 1920년대 말 서방 열강들 — 특히 영국 — 의 점차 적대적인 태도에 직면하자 기존 정책들을 뒤집고 노동자들의 생활수준과 농업을 희생시켜 공업 부문의 대규모 성장을 도모하는 5개년계획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대에 러시아 혁명이 변질된 과정은 다른 문헌에서 충분히 다뤘다.그러나 5개년계획 초기의 목표는 비교적 온건했다. 세계와 단절한 채 소련의 공업을 발전시키거나 개인 농업 부문을 파괴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농업 잉여를 독일과 미국의 생산재를 구매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과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이 실행되기 시작한 바로 그때 1929년 경제 공황이 닥쳐 농산물 가격이 폭락했다. 수입 생산재 대금을 지급하려면 수출 농산물의 비중을 늘려야 했다.(그래서 1928년 0.14퍼센트에서 1931년 7.33퍼센트로 증가했다.) 게다가 공업 중심지로 가는 곡물의 비중도 15퍼센트 증가했다. 그렇게 많은 식량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가장 가혹한 조처 — 농민들의 토지를 몰수해서, 관료가 철저하게 통제하는 ‘집단 농장’에 넘겨주는 것 — 뿐이었다. 생활수준이 열악해진 농민과 노동자의 불만을 억누르고 경제적 목표를 확실히 달성하려면 철저한 전체주의적 독재가 필요했다.
68 영국과 프랑스를 따라잡았다. 1929년에 소련은 세계 공업 생산에서 4퍼센트를 차지했는데 1939년에는 12퍼센트를 차지했다. 69
이를 바탕으로 소련은 대규모 공업화를 이룰 수 있었다. 공식 자료를 보면, 공업 총생산이 1927~28년 1백83억 루블에서 1937년 9백50억 루블(1926~27년 가격 기준)로 증가해,70 “1928~36년에 노동생산성은 세 배 이상 증가한 반면, 실질임금은 사실상 50퍼센트 이상 삭감됐다.” 71
그러나 독일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공업 성장도 소비의 성장이 아니라 생산수단과 군비의 성장이었다. 소비재는 1927~28년에 생산량의 67.2퍼센트를 차지했으나, 공식 수치를 보면 1940년에는 39퍼센트까지 떨어졌다.(감소치를 줄여서 발표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아시아의 거대한 차르 제국의 상속자였던 소련 관료 집단은 일본이나 독일과 달리, 공업화할 수 있는 지역들과 원료를 차지하려고 급속한 영토 확장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39년 소련은 독일과 손잡고 동유럽을 분할했는데(히틀러는 폴란드 서부를 차지하고, 스탈린은 폴란드 동부,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를 차지했다), 이것은 다른 제국주의 열강과 마찬가지로 소련도 군사적 팽창을 이용해 잉여가치의 새로운 원천을 차지하려 했음을 보여 준다.
군사적 국가자본주의 — 독일과 일본의 ‘부분적’ 형태든 아니면 소련의 완전한 형태든 — 가 불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전 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거듭되는 경제 위기의 현실적 대안은 오로지 ‘계획’뿐인 듯했고, 많은 취약한 자본주의 나라들이 이런저런 형태의 계획을 채택했다. 동유럽의 작은 나라들, 파시스트 치하의 이탈리아, ‘포퓰리스트’ 정부가 들어선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에서 강력한 국가 부문이 출현했다. 영국에서도 1930년대 보수당 정부 시절 일정한 국가 개입 추세가 있었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정치적 혼란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불황으로 식량과 원료 수입 비용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중간계급과 취업 노동자들 모두 생활수준이 향상될 수 있었고, 그러자 (경금속과 자동차 산업 같은) 새로운 소비 지향 산업을 위한 시장이 창출됐다. 그렇지만 지배계급의 일부는 케임브리지 경제학자이자 백만장자인 케인스의 사상에 점차 호의를 갖게 됐고, 해럴드 맥밀런 같은 청년 보수당원들은 준準국가자본주의적 ‘중도 노선’을 주창했다. 보수당 정부들은 수입 통제, 철·강철·석탄 산업에서 카르텔 형성, 발전·항공·방송 부문에서 국영 독점 기업 설립, 산업에 투자 보조금 지급 등을 통해 국가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불황에서 전쟁으로
앞서 보았듯이, 다양한 국민국가 자본주의들이 1930년대 경제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의 경제 위기 때 대처 방식이 달랐듯이 말이다. 한쪽 극단에는 루스벨트의 미국이 있었고, 다른 쪽 극단에 스탈린 치하 소련이 있었으며, 그 사이에 국가 개입 강화라는 축을 따라서 영국, 라틴아메리카 나라들, 이탈리아, 독일, 일본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자본주의 방향으로 더 멀리 나아간 나라들에서만 호황이 다시 시작됐다.
72 이후 계속 하락해 1932년에는 1905년 수준과 비슷해졌다. 널리 퍼진 경향 — 독일과 일본에서, 심지어 영국에서도 — 은 ‘아우타르키’, 즉 개별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저마다 자국 국경 내에서 최대한 많은 상품을 생산하려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나라에서 국가는 전보다 훨씬 더 큰 구실을 했다.(비록 외환 통제와 수입 규제를 통해 세계 가격과 국내 가격을 분리하는 수준의 개입에 그쳤더라도 말이다.) 보호주의는 전에도 많은 나라에 있었지만, 1930년대에는 세계 도처로 확산됐다. 국제 무역에서 가치 법칙은 점차 상품의 가격 계산과 유통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국가 통제의 영향을 받게 됐다. 1891년부터 1925년까지 네 배로 늘어났던 세계무역은그러나 거의 모든 생산 활동이 여러 나라에서 생산된 부품과 원료에 의존하는 세계에서 완전한 자급자족은 불가능했다. 아우타르키는 개별 국가들의 아우타르키일 수 없었다. 그것은 ‘블록들’의 아우타르키여야 했고, 각 블록은 특정 국민국가 자본주의가 지배했다. 이 점은 미국·영국·프랑스에게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공식 또는 비공식 제국을 바탕으로 통화 블록 — 달러 블록, 파운드 블록, 프랑스가 지배한 금 블록 — 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존 제국들은 최소한의 비용으로도 결속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이 중에서 1938년까지 ‘국방’비로 국민소득의 1퍼센트 이상을 지출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경제 위기가 시작됐을 때 (대만과 조선에) 작은 제국을 거느리고 있던 일본, 제국이 전혀 없던 독일에게 자급자족은 큰 문제였다. 그들은 군사적 수단으로 국경을 확장할 때만(그래서 독자적 제국과 세력권을 구축할 때만)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 결국 기존 제국주의 열강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군사적 팽창 노선이 결정되자, 그것은 스스로 강화되기 시작했다. 기존 제국들에 도전하려면 군사적·경제적 잠재력을 극대화해야 했다. 제국주의적 모험이 성공할 때마다 이 잠재력은 증대했다.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한 것이 그런 사례다. 그러나 그럴수록 기존 제국들의 적대도 강해졌다. 따라서 군사적 잠재력과 군사적 모험도 더한층 강화해야 했다. 자연히 그 파열점은 독일이 폴란드 서부를 점령하고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했을 때였다.
그러나 독일과 일본 모두 그런 모험을 피할 수 없었다. 군비 지출 덕분에 경제는 초기의 낮은 이윤율에도 불구하고 호황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호황은 임금 동결 덕분에 어느 시점까지는 호황 유지 비용을 자체 조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기업이 군비 증강에 협력하게 된 토대였던 이윤은 잉여가치의 새로운 원천이 획득될 때만, 그리고 무기를 이용해 인접 국가들을 합병하고 그들이 축적한 잉여가치를 대거 몰수하고 그들의 노동인구를 값싼 노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을 때만 비로소 유지될 수 있었다. 1930년대의 군비 경제는 1939~45년의 전쟁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국가자본주의와 전면전의 경제학
전면전을 계획하는 일은 좀처럼 드물다. 전면전은 특정한 제한적 목표를 달성하거나 방어하려는 군사적 행동으로서 시작된다. 이런 목표를 좌절시키려는 군사적 대결 능력 때문에 싸움이 격화하면서 점점 더 많은 병력과 자원이 투입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양쪽 지배계급의 모든 이익이 도마에 오른다. 과거에 이렇게 저렇게 얻은 성과를 지키는 방법은 오로지 군사적 노력을 강화하는 것뿐이다(흔히 비용은 무시한 채). 군비 지출 증가로 지배계급이 얻는 잉여가치도 그만큼 증가할지 안 할지를 경제적으로 따지는 것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군비 지출이 증가하지 않으면, 과거에 얻은 잉여가치와 미래에 얻을 수 있는 잉여가치가 모두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전에 걸었던 판돈을 그저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제 판돈을 더 키워야 한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공격과 수비를 사실상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래서 제한적·‘합리적’ 행동으로 시작된 것이 자체의 비합리성을 드러내게 되는데, 이는 한쪽의 군비 지출이 다른 쪽의 군비 지출을 강요하는 악순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 한쪽의 군비 지출이 물리적으로 완전히 바닥날 때까지 끝없이 계속된다.
이 모든 과정은 고전 자본주의의 ‘순수한’ 경제적 시장 경쟁에서 일어나는 일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한쪽은 다른 쪽이 축적할 수 있으므로 최대한 빨리 축적해야 한다. 유일한 차이는, 시장 경쟁에서는 생산력의 축적이 중요한 반면 전쟁에서는 파괴력의 축적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물론 파괴력은 결국 생산력 수준에 달려 있다.
전면전은 소외된 노동의 세계, 즉 인간이 자신의 과거 활동의 산물에 지배당하는 세계가 가장 끔찍하게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개전 이전 군사적 국가자본주의들의 동역학과 이후의 동역학은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다. 그 전까지는 군비 지출은 어떤 의미에서 ‘생산적’이었다. 즉, 다른 국민국가 자본주의들을 희생시켜 자국 자본주의에 필요한 잉여가치의 새 원천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비로 들어간 자원은 대부분 국가자본주의적 군비 경제로의 이행이 없었다면 여전히 사용되지 않았을 자원임을 감안하면, 군비 지출은 독일이나 일본 자본주의에 큰 이득이었다. 과거에 축적된 총잉여가치 가운데 그들이 처리할 수 있는 총잉여가치의 비율(일국 수준의 이윤율)이 약간 상승했다. 이것은 특히 군비 지출이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억제하고 착취율을 높이는 핑계거리도 됐기 때문이다.
73 부른 것 — 새로운 잉여가치가 모두 군비 지출로 들어갈 뿐 아니라 기존에 축적된 잉여가치 양을 대체하기 위한 감가상각 기금조차 감소하는 상황 — 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양차 세계대전 때 유럽 열강들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전면전이 시작되자, 사정은 사뭇 달라졌다. 양측이 모두 군사적 국가자본주의로 전환했으니 중요한 것은 오로지 군사적 잠재력을 강화하는 것뿐이었다.(그렇다고 해서 각국 자본가계급이 사용할 수 있는 잉여가치가 반드시 증가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축적된 잉여가치는 모두 전쟁 노력에 즉시 투자돼야 했고, 이윤율은 완전히 무시됐다. 경제적·군사적 신규 투자를 할지 말지를 결정한 요인은 이윤율이 얼마냐가 아니라 잉여가치의 양이 얼마냐였다. 정말이지, 사태는 1921년에 부하린이 “마이너스 확대 재생산”이라고전시 경제의 특정 부문들은 편의상, 여전히 평균이윤율을 추구하는 시장 경쟁에 따라 작동하는 것처럼 운영됐다. 그러나 그런 부문들은 전시 생산의 우선순위에 따라 활동이 엄밀히 제한된 중요하지 않은 부문들이었다. 또, 전시 생산에 참여한 개별 기업들은 국가에 서비스를 제공한 대가로 이윤을 계속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런 이윤은 관습적인 회계 장치였을 뿐, 국가의 정치적 의사 결정에 좌우됐고, 더는 경제 내부의 축적 패턴을 결정할 수 없었다. 체제가 여전히 자본주의였다면, 그것은 이런 이윤 때문이 아니라 체제의 동역학이 여전히 서로 다른 자본 간의 — 이 경우에는 서로 경쟁하는 군사적 국가자본주의 간의 — 경쟁적 축적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처지에서 보면, 많은 것들이 시장 경쟁의 결과와 똑같았다. 한 국가자본주의가 군사적 하드웨어를 축적하는 데 성공할 때마다 다른 국가자본주의도 비슷한 수준의 군사적 하드웨어를 축적하려고 애쓸 수밖에 없었다. 서로 경쟁하는 자동차 생산업체들의 판매 경쟁이 서로 다른 자동차 공장들에서 이뤄지는 구체 노동 형태들을 상이한 크기의 동질적 추상 노동으로 전환시켜서 미리 계획되지 않은 내적 상호관계 속으로 끌어들이듯이, 국가들이 서로 상대방을 쓰러뜨리려고 경쟁적으로 탱크를 생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국가자본주의 내에서 이윤율이 사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의미한다. 군산복합체에 들어간 총투자 대비 일국의 총잉여가치 비율이 하락하면, 그 국가자본주의가 경쟁국들과 전쟁에서 이길 능력이 약해진다. 이윤율 저하가 경제 불황을 낳지 않는 이유는, 사용할 잉여가치가 아무리 적더라도 여전히 남아 있는 한은 전쟁 기구가 계속 증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군사적 패배를 당할 수 있다.
이 전면전의 논리는 제2차세계대전 때 완전히 실현됐다. 뒹케르크 철수[1940년 5월 말~6월 초 독일군에 밀린 연합군 33만여 명은 프랑스 도시 뒹케르크에서 철수해야 했다. — 옮긴이] 당시 독일은 단연 세계 최대의 무기 생산국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군비 경제는 여전히 번창하는 민간 경제와 공존하고 있었고, 더디게나마 대중의 생활수준도 향상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초기까지도 계속됐다. 그러나 그 후 전면전의 압박 때문에 군비 생산은 크게 증가해 1940~41년 수준의 세 배에 이를 정도였다. 이 정도의 군비 생산은 비군사적 생산을 다시 감축하고 노동자들과 병사들의 생활수준을 끌어내려야만 달성할 수 있었다.
영국의 재무장은 1938년에야 시작됐고, 1940년에도 군비 부문은 다른 경제 부문보다 실질적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전쟁 초기에는 실업과 유휴 설비 덕분에 다른 부문에서 자원을 가져오지 않고도 전쟁 기구가 상당히 확장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과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도 머지않아 민간 경제는 중앙집권적으로 계획된 전쟁 경제의 부속물로 전락했다. 그러나 여러모로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미국이다. 1938년 유럽에서 전쟁이 터졌을 때 미국 노동인구의 17.2퍼센트가 여전히 실업자였고, 산업 설비의 28퍼센트가 가동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1941년에 미국이 참전하자 “국가는 국민경제의 군수 부문(총 상품 생산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을 통제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국가는 어떤 소비재를 생산해야 하고 어떤 소비재를 생산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 결정했다.” 연방정부는 막대한 돈을 들여 새로운 군수 공장들을 건설한 다음 그 공장들을 민간 기업에 넘겨줘서 운영하게 했다. 1941년에 연방정부의 자본 지출은 1939년 미국의 제조업 투자 총액보다 50퍼센트 더 많았다. 그리고 이것은 같은 해[1941년 — 옮긴이]의 민간 자본 투자보다 더 많았다. 1943년에 국가는 전체 투자의 90퍼센트를 맡았다. 그러나 이렇게 비생산적 생산물에 막대한 지출을 했어도 민간 경제는 침체하지 않았다. 1930년대의 실업자와 과잉 설비가 생산에 투입되자 상품 생산이 기록적으로 증가했다. “전전의 사업이 진척되면서, 1940년은 국민생산이 9백70억 달러에 달한 … 기록적인 해였다. 그러나 1940년은 인력과 산업 시설들이 … 상당히 덜 가동된 해였다. 1943년 말이 되자 총생산액은 1천8백50억~1천9백억 달러로 증가했다. 1943년에는 전쟁 프로그램이 9백억 달러에 달했을 뿐 아니라 소비 지출도(1940년 가격으로 측정했을 때조차) 전보다 증가했다. 배급제, 군수품 우선 공급, 전시 물자 절약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9백만 명이던 실업자가 3년 뒤에는 1백만 명이 채 안 됐다. 그리고 고용된 노동인구는 6천2백90만 명으로 급증했다. 군수 생산 부문에 1천7백30만 명, 민간 생산에 5천5백10만 명이 고용돼 있었고, 1천50만 명은 군대에 있었다. 전쟁 경제는 8년 동안 뉴딜 정책이 이룰 수 없었던 것을 달성할 수 있었다. 즉, 노후한 최대 자본주의 경제의 생산 능력을 풀가동시킨 것이다. 케네스 갤브레이스조차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930년대의 대불황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1940년대의 대규모 전시 동원 속으로 사라졌을 뿐이다.”
국가자본주의와 군비 생산을 바탕으로 체제의 새 성장 국면이 열렸다. 1880년대 이후 독점과 제국주의를 바탕으로 체제의 성장 국면이 열렸듯이 말이다. 옛 국면과 마찬가지로 새 국면도 한동안 눈부신 경제적 성과를 거두지만, 결국 노쇠해지고 있는 괴물의 온갖 질병에 다시 걸리게 된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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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hris Harman, Explaining the crisis: A Marxist Re-Appraisal, Bookmarks, 1999, chapter 2 The crisis last time.
↩
- D. M. Gordon, ‘Up and Down the Long Roller Coaster’, US Capitalism in Crisis, URPE (New York 1978), p. 23에서 재인용. ↩
- Lewis Corey, The Decline of American Capitalism (London 1935), p. 27. ↩
- Eric Hobsbawm, Industry and Empire (London 1969), p. 129[국역: 《산업과 제국》, 한벗, 1988]. ↩
- Hobsbawm, pp. 130-131. ↩
- Corey, p. 30. ↩
- 이하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 그와 관련된 자본산출계수, 이윤율 등의 수치들은 서로 다른 여러 자료에서 인용했다. 미국 경제를 연구한 주요 자료 두 편은 Joseph Gillman, The Falling Rate of Profit (London 1956)과 Shane Mage, The ‘Law of the Falling Tendency of the Rate of Profit’: Its Place in the Marxian Theoretical System and Relevance to the US Economy (Ph.D. thesis, Columbia University, 1963, released through University Microfilms, Ann Arbor, Michigan)이다. 이 두 자료는 마르크스 이론의 몇 가지 논점을 개념적으로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평가한다. 길먼은 제조업만을 취급하고 대체로 세금 공제 전의 이윤 수준을 다룬다. 메이지는 자신이 말한 “자본주의적 부문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산업들(농업, 임업, 어업, 제조업, 운송업, 통신업, 건설업, 공공 설비·서비스 … )”을 다루는데, 이윤은 모두 세금 공제 후의 수치다. 그러나 길먼과 메이지가 제시한 1919년까지의 모습은 서로 비슷하다. 다른 계산 결과들도 제조업의 자본산출계수에 관해서는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예를 들어 The Theory of Economic Dynamics (London 1954), p. 70에서 칼레츠키Kalecki는 1899~1914년에 미국 제조업의 산출 대비 고정자본 비율이 31퍼센트 상승했음을 보여 주고, Capital in the American Economy (Princeton, 1961), p. 199에서 쿠즈네츠Kuznets는 1880~1922년에 제조업의 순생산 대비 고정자본 스톡 비율이 1백 퍼센트 증가했음을 보여 준다. NLR 98, p. 65에서 로손Rowthorn은 쿠즈네츠의 자료를 보면 이런 증가가 공공 설비의 자본산출계수 하락으로 충분히 상쇄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흔히 철도 회사들의 초기 출자 규모가 부풀려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예를 들어, Corey, p. 28을 보시오), 그리고 1884년과 1892년 경제 위기 때 철도 회사들이 평균보다 더 심하게 타격받았음을(그리고 가치 하락 폭이 컸음을) 감안할 때, 로손의 주장이 얼마나 옳은지는 의심스럽다. ↩
- Gillman, p. 36. ↩
- M. Flamand and J. Singer-Kerel, Modern Economic Crises (London 1970). ↩
- Hobsbawm, pp. 131. ↩
- Flamand and Singer-kerel, p. 38. ↩
- H. Feis, Europe, the World’s Banker 1879-1914 (Yale 1931)에 나오는 수치를 Kidron, ‘Imperialism, the highest stage but one’, IS, first series, 9, p. 18에서 인용했다. ↩
- Colin Clarke, Oxford Economic Papers (November 1978), p. 401에 나오는 수치들이다. 자기 나름의 이유에서 클라크는 자신의 방정식에서 설비의 가치를 50퍼센트 증가시키지만, 그렇다고 해서 추세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
- Clarke, p. 401. ↩
- Fritz Sternberg, Capitalism and Socialism on Trial (London 1951), p. 178. ↩
- Clarke. ↩
- Gillman. ↩
- Mage. ↩
- Corey. ↩
- 둘 다 Fritz Sternberg, The Coming Crisis (London 1947)에서 인용. ↩
- Fritz Sternberg, The Coming Crisis, p. 23. ↩
- Baran and Sweezy, Monopoly Capital (London 1973), 8장[국역: 《독점자본》, 한울, 1984], Gillman, 제9장, Sternberg, 위의 두 책. ↩
- Corey, pp. 181-183. ↩
- Marx, Capital: Three (Moscow 1962), pp. 472-473. ↩
- Gillman, p.58. Mage, p. 208. 낮은 이윤율을 경제 위기의 결정적 요인으로 파악한(따라서 1930년대 경제 위기를 다룬 대다수 이론가들보다 더 마르크스에 가까운) 코리가 제시한 수치들도 1923년부터 1929년 초까지 이윤율이 하락했음을 실제로 증명하지는 못했다.(Corey, p. 125를 보시오.) ↩
- Steindl, Maturity and Stagnation in the American Economy (London 1953), pp. 155 이하. ↩
- Kuznets, p. 126에 제시된 결과에 근거한 것. ↩
- Kuznets, p. 228. ↩
- Corey, p. 157. ↩
- Corey, p, 170. ↩
- Corey, p. 170. ↩
- Corey, p. 163. ↩
- Corey, p. 97. ↩
- Corey, p. 172. 또한 Gillman, pp. 129-130와 비교해 보시오. ↩
- Baran and Sweezy, p. 232의 수치들. ↩
- Corey, p. 163. ↩
- 이것은 ‘임금 상승’과 ‘과잉 축적’을 마르크스주의 경제위기론의 핵심으로 파악한 사람들, 예를 들어 Glyn and Harrison, The British Economic Disaster (London 1980)이 틀릴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다. 그 이론은 가장 중요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
- A. D. H. Kaplan, The Liquidation of War Production (New York 1944), pp. 90-91에 나오는 경상 달러 수치들. 불변 달러를 바탕으로 계산한 로버트 켈러Robert Keller는 투자의 정점이 1926년이었고 1928년은 그보다 약간 낮았다고 주장한다.(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y, vol. 7, no. 4 (winter 1975)를 보시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잉 생산이 이미 존재할 때 투자 수준이 높으면 불균형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
- 물론 다른 사람들도 대출과 차입에 관여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장의 핵심이 바뀌지는 않는다. ↩
- Marx, Capital: Three, 제30장. 마르크스의 견해를 조리 있게 설명한 것은 Makoto Itoh, Value and Crisis (London 1981), p. 109를 보시오. ↩
- 이런 식의 설명은 예를 들어, Flamand and Singer-Kerel, p. 61을 보시오. ↩
- Kindelberger, The World in Depression 1929-39 (London 1973), p. 117[국역: 《대공황의 세계》, 부키, 1998]. ↩
- Kindelberger, p. 117. ↩
- Corey, p. 184에 나오는 수치들. ↩
- Kindelberger, p. 117. ↩
- Alvin H. Hansen, Economic Stagnation (New York 1971), p. 81. ↩
- Kindelberger, p, 117. ↩
- Sternberg, Capitalism and Socialism, p. 28. ↩
- 예를 들어 Lenin, ‘The Tax in Kind’, Collected Works vol. 32, p334 이하를 보시오. ↩
- 이것은 부하린이 1915년에 쓴 Imperialism and the World Economy (London 1972)[국역: 《제국주의론》, 지양사, 1987]에서 사용한 용어다. ↩
- Lenin, Collected Works; Bukharin, Economics of the Transformation Period (New York 1971)[국역: 《과도기 경제학》, 백의, 1994]. ↩
- 상세한 것은 Corey and Sternberg. ↩
- Kindelberger, p. 233. ↩
- Kindelberger, p. 232. ↩
- Kindelberger, p. 272. ↩
- Baran and Sweezy, p. 237에서 인용한 수치. ↩
- Daniel Guerin, Fascism and Big Business (New York 1972), p. 236. ↩
- Sternberg, Capitalism and Socialism, p. 353에 나오는 수치. ↩
- Arthur Schweitzer, Big Business in the Third Reich, p. 336. ↩
- Schweitzer, p. 335. ↩
- Schweitzer, p. 329. ↩
- Schweitzer, p. 342. ↩
- Schweitzer, p. 306. ↩
- Schweitzer, p. 443. ↩
- Schweitzer, pp. 442-443. ↩
- Sternberg, Capitalism and Socialism, p. 232. ↩
- Sternberg, p. 365. ↩
- 예를 들어, Chris Harman, ‘How the revolution was lost’, IS, first series 30; 또한 Alan Gibbons, Russia: How the Revolution was Lost (London 1980)를 보시오. ↩
- Alec Nove, An Economic History of the USSR (London 1969), pp. 191, 225[국역: 《소련 경제사》, 창비, 1998]에 나오는 수치. ↩
- Sternberg, p. 373에 나오는 수치. ↩
- 이 주장의 증거는 Tony Cliff, Russia: A Marxist Analysis (London 1963), pp. 33-44를 보시오. ↩
- Cliff, p. 42. 1928~33년의 상황을 보여 주는 서로 다른 수치들은 E. H. Carr and R. W. Davies, Foundations of the Planned Economy, vol. 1 (London 1969), p. 342. ↩
- V. Voitinisky, The Social Consequences of the Great Depression (Geneva 1956), p.66. ↩
- Bukharin, Economics of the Transformation Period, p. 45. ↩
- 전면전이 진행되면 군비 지출이 기존 가치들을 잠식할 수도 있다. 즉, 무기 등의 비용을 치르기 위해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전투원들의 운명은 이윤율뿐 아니라 교전국 양측이 무기로 전환할 수 있는 가치 총액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
- Sternberg, pp. 494-495. ↩
- A. D. H. Kaplan, p. 91. ↩
- Kaplan, p. 3. ↩
- Kaplan, p, 3. ↩
- Kenneth Galbraith, American Capitalism, p.6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