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민주주의의 성격을 묻는다
레닌주의를 옹호하며 *
오늘날 레닌주의를 옹호하려면 두 가지 과제가 뒤따른다. 첫째는 역사 속 레닌의 정치적 행적을 옹호하는 것이고, 둘째는 레닌의 핵심적 정치 사상이 오늘날에도 타당성이 있고 적용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둘째 과제에 초점을 둘 것이지만, 첫째 과제에 대해서도 몇 가지 언급하면서 글을 시작하려 한다.
1. 역사 속 레닌
나는 다른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레닌은 중요한 인물이다. 레닌이 러시아 역사나 20세기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레닌은 지금도 자본가 계급한테는 위험하고 사회주의자에게는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있는 인물이다.
역사를 통틀어 세계 자본주의 질서가 직면했던 가장 심대한 도전은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뒤이은 국제 혁명의 물결이었다. 당시 몇 년 동안 체제의 존립 자체가 말 그대로 경각에 달려 있었다. 바로 그러한 때 일어난 1923년 독일 혁명의 실패야말로 인류의 운명을 결정지은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역사에서는 100퍼센트 확실한 가정이 불가능하겠지만, 독일 혁명이 성공했다면 십중팔구 스탈린도 히틀러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우리가 사회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과 당시 역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레닌의 정치와 조직이 러시아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2 그러나 레닌주의가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게 스탈린주의로 이어졌고, 그 둘 사이의 핵심 연결고리가 레닌주의 당이라는 것이 레닌 폄훼의 주된 초점이다. 이런 주장은 멘셰비키에서 미국과 영국의 냉전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논자들에 의해 오랜 세월 갈고 다듬어졌고, 그 논지에 대해서는 우파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까지 정치적 색조를 초월해 놀라운 의견 일치를 보여 준다.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자들도 제 나름으로 이러한 [레닌-스탈린 연속성] 주장에 동조했다. 사실상 트로츠키주의자들만이 유일하게 그러한 주장에 반대했다. 그러나 아무리 다수 견해라 해도 틀릴 때가 흔한데, 내가 ‘레닌-스탈린 연속성 테제’라 부르고자 하는 이런 주장도 틀렸다고 볼 만한 강력한 실증적·이론적 근거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자본가 계급과 그 학문적 옹호자들은 언제나 레닌을 깎아내리는 일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폄훼는 상당 부분 레닌 개인을 인신공격하는 형태를 띠었다.먼저 사실들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 정치 사상과 정책 면에서 레닌과 스탈린 사이에는 심대한 차이가 있었다. 레닌은 확고한 국제주의자여서 한 나라에서만도 사회주의가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론을 채택하고 러시아 민족주의를 조장했다. 레닌은 관료와 당 지도자들이 특권을 누리는 것에 반대한 평등주의자였다. 스탈린은 그러한 불평등을 체계적으로 조장했다. 레닌은 인종차별과 유대인 배척을 혐오했지만, 스탈린은 은근하게 또는 노골적으로 그것을 이용했다. 레닌은 천대받는 민족의 자결권을 열렬히 옹호했지만(그는 이 문제를 두고 스탈린과 대립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그러한 권리를 짓밟았다. 레닌은 여성 해방을 확고히 옹호했지만, 스탈린은 전통적 가족을 복원하려 했다. 레닌은 농민에게 농업 집산화를 강요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스탈린은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농업 집산화를 실행했다. 이러한 목록은 거의 무한정 댈 수 있다.
- 레닌이 활동하던 시절의 볼셰비키 당 지도부와 스탈린 치하 볼셰비키 당 지도부 사이에는 인물 구성 면에서 연속성이 거의 없다. 1917년 10월 봉기 직전에 볼셰비키 당 중앙위원회는 정치국 위원 7명을 선출했다. 부브노프,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레닌, 소콜니코프, 스탈린, 트로츠키가 바로 그들이다. 이 가운데 오직 한 명만 살아남았다. 바로 스탈린이었고, 그는 레닌을 빼고 나머지 사람을 모두 살해했다. 부하린, 리코프, 톰스키, 스밀가, 프레오브라젠스키, 실랴프니코프, 퍄타코프, 라데크, 크레친스키는 모두 레닌이 활동하던 시절 볼셰비키 당의 지도적 중앙위원이었고 당 내에서, 혁명에서, 내전에서 모두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탈린이 벌인 숙청으로 모두 살해됐다.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유명 선임 볼셰비키 당원과 공산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트로츠키의 표현처럼, 스탈린주의와 볼셰비즘 사이에는 말 그대로 “피의 강물”이 흘렀다.
- 와병 직전인 1922년 말 레닌은 당과 국가에서 차츰 세력을 키우던 관료에 맞서 전면 투쟁을 벌이기 위해 스탈린과 관계를 끊은 뒤 그를 서기장에서 밀어내려 했다.
- 볼셰비키 당은 창당 때부터 매우 민주적으로 운영됐고 혁명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그랬다. 1921년에 분파가 금지됐지만, 1923년까지도 당은 여러 면에서 민주적이었다. 어느 시기에도 당이 레닌의 개인 독재였던 적은 없었다. 레닌은 표결에서 여러 번 졌다. 예를 들어, 1907년 두마 선거 출마 문제를 두고, 1910년 멘셰비키와의 통합 문제를 두고, 1917년 9월 전러시아민주협의회 보이콧 문제를 두고, 1917년 12월 제헌의회 선거 연기 문제를 두고 그는 소수파였다. 레닌이 몇몇 결정적 국면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은 격렬한 논쟁을 거치며 다수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볼셰비키가 1917년 4월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끊고 노동자 권력 장악으로 노선을 바꿨을 때, 1917년 10월 봉기에 착수했을 때, 1918년 1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조인했을 때 그랬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에 레닌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개인적 권위나 주장의 설득력 때문만 아니라, 시간이 흘러 그의 관점이 객관적 상황의 논리에 들어맞는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이론적 근거들을 살펴보자.
3 카를 카우츠키에게서 바로 따온 레닌의 이 명제는 트로츠키가 말했듯 “편향돼 있어서 틀린 것이다.” 4 그러나 레닌 자신이 1905년에 이를 수정했고, 그런 생각이 그의 사상 전반에 깔린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레닌은 그 뒤로 그런 주장을 다시는 하지 않았고 레닌 자신이 명확히 경고했듯, 《무엇을 할 것인가?》는 “경제주의”(사회주의자는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를 지지하는 것으로 활동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러시아 내의 정치 경향)를 겨냥해 논쟁적으로 쓰느라 “막대기를 구부린” 저술이었다. 게다가 라르스 T 리는 기념비적 학술서 《다시 보는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맥락 속에서 보기》Lenin Rediscovered: “What is to be Done?” in Context에서 레닌이 노동계급을 깔봤다는 주장을 철저하게 반박했다. 리는 방대한 증거를 들어 오히려 레닌이야말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를 통틀어 러시아 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과 잠재력을 한결같이 가장 낙관적으로 본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레닌이 1901년에 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사회주의는 노동계급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다” 하고 한 것을 두고 레닌주의가 태생부터 엘리트주의이고 권위주의라고 단정하는 학계의 신화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반박이 이뤄졌다.스탈린의 러시아처럼 방대하고 오래 유지된 체제(그리고 이와 비슷한 체제가 동유럽, 중국, 북한 등지에도 있었다는 것도 잊지 말자)가 그저 그보다 30년 전에 나온 어떤 “이론”[사회주의가 노동계급 외부에서 주입된다는]에서 “비롯했”다거나 “기초를 둘”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역사를 봐도 틀렸을 뿐 아니라, 사실은 조야하고 막무가내인 관념론이라는 것도 언급해야겠다. 그런 주장은 자본주의가 장 칼뱅의 교리나 애덤 스미스의 이론에서 비롯했다거나, 나치 사회의 본질을 주로 《나의 투쟁》[히틀러의 자서전]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만큼이나 설득력이 없다.
5 말했던 것만 봐도 그렇다.
이런 것들이 아니라 역사유물론적 분석이 필요하다. 곧, 러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논의의 출발로 삼고, 그다음으로 혁명 이후 러시아 내 계급 세력관계와 갈등을 분석해야 한다. 그렇게 분석해 보면, 사회주의의 물질적 토대에 해당하는 발달된 산업과 강력한 노동계급이 1917년에 국제적으로는 분명히 있었고, 특히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는 존재했지만, 러시아만 놓고 보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레닌과 트로츠키뿐 아니라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상식이었다. 레닌이 특유의 직설적 어조로 “독일 혁명이 없으면 우리가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절대적 진리”라고가뜩이나 취약했던 러시아의 물질적 토대는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이 동맹을 맺고 백군 장군들과 함께 일으킨 내전 때문에 급격히 더 나빠졌다. 내전 때문에 경제는 완전히 파탄났고, 그렇잖아도 작았던 러시아 노동계급이 사실상 파괴됐다. 이런 참혹한 상황에서도 볼셰비키가 이끈 노동자·농민 동맹은 백군의 반혁명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몰살당하고 피폐해진 노동계급은 국가기구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힘을 잃었고 국가기구는 10월 혁명 이전의 [차르] 국가 관료 출신자들과 신흥 볼셰비키 관료의 손에 떨어졌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지배계급의 맹아가 등장했다. 그들은 1920년대를 거치면서 갈수록 노동계급과 유리됐고 스탈린의 주도 하에 1927~28년 권력을 완전히 장악해, 서방 자본과 경쟁하고자 러시아에서 경제발전5개년 계획으로 강제적 산업화와 자본 축적을 시작했다. 계급적 측면에서 보면 이것이야말로 러시아에서 일어난 변화의 핵심이다. 혁명이 국제적으로 확산(실제로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고 특히 독일에서 성공 직전까지 갔다)되지 않은 상황에서 외세에 정복당하는 것 말고 다른 시나리오는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볼셰비키 당의 실천과 레닌의 주장과 행동이 이 모든 사태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며, 그것들은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 한에서 냉정히 평가해야 한다. 1917년 말 러시아에 엄청난 대가를 요구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을 맺어야 할지 말지를 두고 일어난 논쟁에서 드러난 것처럼, 레닌의 전략적 목표는 국제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를 구원해 줄 때까지 혁명 러시아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무엇이든 필요한 조처를 취하는 한편, 코민테른을 비롯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국제 혁명을 앞당기는 것이었다. 레닌은 생애 말기인 1923년 초 병으로 정치 무대에서 퇴장할 때까지 이 전략을 계속 추진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레닌과 볼셰비키는 때로는 권위주의 쪽으로 쏠리고 때로는 모험주의 쪽으로 쏠리는 실수를 여러 번 저질렀다. 예컨대 1920년에 바르샤바로 진격하려 했던 것이 그런 실수이고, 1921년이 돼서야 신경제정책을 시행한 것도 실수였을지 모른다. 어쩌면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반란을 진압한 것도 나는 개인적으로는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수였을 수 있다. 당시의 엄청나게 힘든 상황에서 실수는 (도가 지나친 행동이나 심지어 범죄도) 불가피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레닌의 전략은 분명 올바른 것이었다. 당시에 그것 말고 과연 어떤 대안이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드는 선택지가 두 가지 있다. 첫째, “자유주의적” 의회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것. 둘째, 원기 왕성한 “이상적” 노동자 민주주의나 심지어는 국가 없는 아나키스트적 코뮌으로 당장 이행하는 것. 내 보기로 내전 기간과 그 이후 러시아의 조건에서 이 둘 중 어느 것도 가능할 턱이 없었다. 그러려 하다가는 곧장 백군에 궤멸당했을 것이고, 노동자와 혁명가들이 대량학살을 당했을 것이며, 매우 포악한 파시즘 체제가 수립됐을 것이다. 아나키스트 출신의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자였던 빅토르 세르주는 크론시타트 반란을 진압한 볼셰비키를 흔쾌히는 아니지만 지지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보기에 볼셰비키 독재가 무너지면 대혼란이 벌어질 것 같았다. 농민 반란이 일어나고, 공산주의자들이 대학살을 당하고, [러시아의 옛 지배계급인] 망명 반동 세력이 돌아오고, 결국 프롤레타리아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독재가 수립됐을 것이다.”
8 국제 혁명이 없는 상황에서 자국의 부족한 자원에만 기대야 했던 러시아가 살아남는 길은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해 강제로 공업을 발전시키는 것밖에 없었다. 이는 결국 스탈린을 수장으로 하는 관료 집단이 새로운 착취 계급으로 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스탈린의 정책은 레닌주의의 연장선이기는커녕 레닌주의를 반혁명적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스탈린이 1923~24년부터 계속 추구했던 노선은 비록 레닌이 활동하던 시기에 형성된 여러 권위주의적 관행을 답습하기는 했지만, 레닌의 전략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음을 강조해야겠다. 레닌의 전략이 국제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버티면서 소비에트 체제의 관료화 경향에 맞서고자 한 것이었다면, 스탈린의 전략은 자신이 뿌리를 내린 관료 기구를 안착시키고, 결정적으로는 ‘일국 사회주의’ 교리를 천명함으로써 국제 혁명을 내팽개치는 것이었다.2. 오늘날에도 레닌주의는 유효한가
9 그래서 루카치는 레닌의 구체적인 정치적 주장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의 인격만 찬양했다.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레닌 정치 사상의 핵심 부분은(물론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늘날에도 타당할 뿐 아니라 혁명적 사회주의 이론과 실천을 위한 필수적 기초라고 본다.
역사 속 인물로서 레닌을 높이 평가하거나 심지어 존경할지라도, ‘시대가 바뀌어서 레닌주의는 정치 이념이나 전략으로서 더는 가치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유럽 공산당들을 비롯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주류”는 늦어도 1950년부터는 “사회주의로 가는 의회의 길”을 채택하며 레닌주의를 그리 대했다. “주류” 공산주의 운동의 저명한 지식인 죄르지 루카치가 이런 태도의 한 전형을 보여 준다. 1924년에 루카치는 《레닌: 레닌 사상의 종합에 관한 연구》[국역: 루카치 외, 《레닌》, 녹두신서, 1985]라는 짧은 책을 썼다. 이 책은 레닌주의의 정수를 아주 잘 요약했고 또 옹호했다. 그러나 루카치는 1967년 재판再版을 낼 때 쓴 후기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날에는 혁명적 노동계급 운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됐으므로 1920년대의 혁명적 노동계급 운동을 순전히 과거사로 다뤄야 한다. 그래야 마르크스주의가 부활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레닌주의의 세 가지 핵심 축을 중심으로 논의를 펴겠다. 그 셋은 곧, 레닌의 제국주의와 전쟁에 관한 이론, 국가 이론, 당에 관한 이론과 실천이다. 레닌에게는 두말할 것도 없이 훨씬 더 근본적이고 중요했을 노동계급의 혁명적 구실에 관한 이론은 다루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내 보기로 그것은 레닌주의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일반의 대전제이기 때문이다.제국주의와 전쟁
제국주의를 설명하는 레닌의 이론은 그의 유명한 책, 《제국주의: 자본주의 최고 단계》에 가장 잘 담겨 있다. 이 책은 제1차세계대전의 제국주의적 근원과 성격을 설명하고자 1916년에 쓰였다. 또, 20세기 초 자본주의의 발전을 분석하려 노력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집단적 성과물의 하나다. 루돌프 힐퍼딩의 《금융자본》(1910),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 축적》(1913), 니콜라이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1916)도 그런 결과물이고, 중요한 기여를 했다. 레닌은 자신의 제국주의 분석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가장 간결하게 정의하면 제국주의는 독점 단계에 이른 자본주의다. … 그러나 이런 매우 짤막한 정의는 비록 주요 특징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편리하지만 불충분한 것도 사실이다. 실제 현상의 핵심적이고 중요한 특징들을 여기서 도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정의가 그렇듯이 여러 전제 조건이 붙고, 그 가치는 상대적일 뿐이며, 어떤 현상이 완전히 발현하는 과정을 결코 모두 포괄하지는 못하겠지만, 제국주의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기본 특징을 포함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1) 생산과 자본이 고도로 집중돼, 경제에서 결정적 지위를 차지하는 독점을 낳는다. (2) 은행 자본과 산업 자본이 융합한 ‘금융자본’을 기초로 금융 과두제가 등장한다. (3) 상품 수출과는 다른 자본 수출이 각별히 중요해진다. (4) 세계를 나줘 갖는 국제 독점자본 연합이 등장한다. (5) 자본주의 최강대국들 사이의 전 세계 영토 분할이 일단락된다. [다시 말해,] 제국주의는 독점체와 금융자본이 지배하고, 자본 수출이 두드러지게 중요해지고, 국경을 가로지르는 트러스트가 세계를 나눠 갖고, 최강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전 지구를 모두 분할한 단계에 이른 자본주의다. 자본가들이 세계를 분할하는 것은 유별난 악의 때문이 아니라 자본의 집중 정도가 너무 높아 이윤을 얻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보유한 “자본에 따라”, 그리고 “힘에 따라” 세계를 분할하는데, 상품 생산 체제와 자본주의에서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요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상대적 세력 균형이 바뀌면(예컨대 독일의 부상으로) 세계를 다시 분할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진다. 이것이 제국주의 전쟁의 동역학이다.
13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쓴 《제국주의와 국제 정치경제》에서는 14 그 사이에 일어난 변화에 관한 방대하고 훌륭한 분석을 볼 수 있다. 하먼과 캘리니코스는 대표적으로 자본 수출의 중요성 감소, ‘제3세계’로부터 투자의 철수와 공식적 식민주의의 쇠퇴,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유럽의 쇠퇴와 냉전 시대 양강 구도의 탄생, 남한·싱가폴과 뒤이어 중국·브라질 등 신흥공업국NIC의 등장, 제국주의에서 독보적으로 중요한 상품인 석유의 등장, 동구권 ‘공산주의’ 붕괴와 흔히 ‘세계화’로 일컬어지는 시대의 개막 등을 탁월하게 분석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레닌이 거의 100년 전에 제시한 제국주의의 경제적·정치적 구조가 그 동안 단 한 번도 중요한 변화를 겪지 않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방법을 거스르는 것이며,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이전의 모든 시대와 달리 부르주아 시대는 끊임없이 생산을 혁신하고, 모든 사회 조건을 쉴 새 없이 교란시키고, 불확실성과 불안을 영속화한다.” 《공산당 선언》)도 거스르는 것이다. 크리스 하먼이 쓴 ‘제국주의 분석하기’와그러나 이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와 오늘날의 제국주의 사이에는 근본적인 연속성이 있다. 마르크스가 발견한 자본의 집적과 집중 과정이 계속돼, 오늘날의 세계경제에서 거대 다국적기업들의 지배력은 과거 어느 때보다 커졌다. 그럼에도 이런 기업의 압도 다수는 특정 국가에 근거지를 두고, 그 국가의 기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기대고 또 돕는다. 국가는 빈번히 경제적·외교적·정치적·군사적 권력을 휘둘러 이 기업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고 강화한다. 그 결과 세계는 여전히 억압하는 나라와 억압받는 나라로 나뉘게 된다. 이른바 “강대국”great power과 “지역 강국”regional power이 있고 약소국으로 나뉘는 것이다. 제국주의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고 그에 따른 제국주의 전쟁 가능성도 여전하다.
세계화를 둘러싼 호들갑이 절정에 이르렀던 1980~90년대에는 이런 현실을 부인하려는 시도가 많았다. 우파 중 자본주의 세계화를 전폭 지지하는 자들은 세계화가 곧 저개발과 빈곤 문제를 모두 해결할 것이고, 세계가 “평평”해져 국가 간 분쟁이 생길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부르주아지의) 희망 사항이 잔뜩 담긴 “새로운 세계 질서” 담론과 궤를 같이했고, 심지어 “역사의 종말”(심각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갈등이, 즉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일체의 도전이 사라진다는 의미로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쓴 표현)이라는 말도 나왔다. 좌파 가운데서도 나이절 해리스는 세계화 때문에 자본이 국가와의 결탁 관계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주장했고,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영향력이 큰 책 《제국》에서 강대국들이 서로 경쟁하는 전통적 제국주의가 “제국”이라는 탈영토화된 세계체계로 대체됐다고 주장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자본이 더는 국가 권력에 기대거나 연계를 맺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현실성 없다고 생각했다. 기업들이 저마다 사설 경찰과 군대를 보유하지 않는 이상, 국가의 도움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가 없다면 굶주린 자녀를 둔 가난한 사람이 상점에 걸어 들어가 원하는 만큼 물건을 가져가도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따라 할 것이다. 아무튼 실제 역사는 세계화론자들의 기대를 따라주지 않았다. 조셉 추나라가 지적했듯이, “[《제국》의 — 몰리뉴]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2001년 9·11이 터졌고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렇게 보면, 사회주의자가 제국주의에 어떻게 맞서야 할지에 관해 레닌이 정치적·실천적으로 이끌어 냈던 결론의 근본 내용은 오늘날의 혁명적 실천에도 여전히 필수불가결하다. 현대 제국주의의 구체적 경제 구조가 어떻든지 간에 말이다.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제국주의 전체를, 특히 제국주의 전쟁을 비타협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레닌은 바로 이 원칙에 따라, 그 전까지는 열렬히 지지했던 제2인터내셔널과 결별했다. 제1차세계대전이 터지자 제2인터내셔널의 대다수 지부가, 그 중에서도 제2인터내셔널의 주도적 조직이던 독일 사민당이 자국 정부를 지지하는 애국주의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레닌이 고수한 이 원칙이 오늘날에도 유효할 뿐 아니라 필수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한편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대규모 국제적 시위가 21세기 들어 이미 잇달아 일어났다.(2003년 2월 15일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는 아마도 역사상 가장 큰 국제 시위였을 것이다.) 그 반대편에서는 한때 좌파, 사회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사람들이 이슬람 원리주의와 테러리즘의 위협 운운하며 더는 제국주의에 반대하지 않는 개탄스러운 행태를 보였다. 나중에 조지 W 부시를 공개 지지한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행보는 그 전형이었고, 그밖에도 프레드 핼리데이, 닉 코언, 노먼 제라스 같은 사람들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길을 걸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도 여전히 중요한 쟁점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이 근본적으로는 반제국주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좌파 일부를 포함한)은 엉뚱한 주장으로 나아가기 일쑤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서로 다른 종교·인종·민족 사이에 벌어지는 국지적·지역적 분쟁으로 여기며 양쪽이 서로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또는 미국이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하는 것은 ‘유대인의 로비’ 때문이라면서, 마치 유대인들이 미국을(심지어 전 세계를) 조종하는 것처럼 말한다. 이런 종류의 주장은 온갖 유대인 배척 괴담과 음모론으로 곧장 이어진다.
제국주의를 체제 전체로 이해하며 제국주의에 맞서는 것은 오늘날 리비아와 시리아에서(아직까지는 간접적으로) 이뤄지는 ‘인도주의적 개입’ 문제를 보는 데 특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나토NATO가 “[리비아 수도] 벵가지를 구하기” 위해 또는 “학살을 막기” 위해 리비아에 개입한다는 말은 위선적 거짓말이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총체로서 파악하지 않고 리비아를 따로 떼어내 보면 이런 거짓말에 속기가 훨씬 더 쉽다.
16 레닌은 그가 “여러 인민들을 가둔 감옥”이라 부른 차르 제국 내 소수 민족과 관련해서 이 문제를 처음 다뤘고, 그다음으로 제1차세계대전 개전 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소수 민족과 관련해 자결권을 옹호하는 주장을 폈다. 이러한 관점은 나중에 레닌의 반제국주의 노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레닌은 이 문제를 놓고 오스트리아 사회당의 오토 바우어, 로자 룩셈부르크, 동료 볼셰비크인 부하린 등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과도 논쟁을 벌였다.
레닌의 반제국주의 정치에서 또 다른 요소는 민족 자결권 지지다.바우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유지하면서 제국 내 억압받는 민족의 문제를 ‘조화롭게’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바우어는 억압받는 민족들이 정치적으로 독립할 권리를 반대하는 한편 민족적·문화적 자치권(독자적 학교 교육 등)을 옹호했다. 레닌은 정반대 견해를 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국제 문화의 이름으로 억압받는 민족이 정치적으로 독립할 권리를 옹호하는 한편, 문화적 민족주의나 문화 분리주의를 반대했다. 룩셈부르크와 부하린은 민족 자결권이 자본주의 하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공상적 요구이고, 민족주의에 대한 환상을 부추기는 기회주의적 요구라며 반대했다. 이에 맞서 레닌은 독립 국가를 세울 권리를 포함해 민족 자결권은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권리이므로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억압받는 민족의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에는 모두 일반적으로 억압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적 함의가 있고,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무조건 지지한다.
레닌은 민족 자결권을 반대하는 것이 실천에서는 제국주의와 억압을 편드는 꼴이 되며, 억압받는 민족의 분리 독립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억압하는 민족의 노동계급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민족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은 대러시아인들의 자유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 억압하는 국가의 노동자들에게 국제주의를 교육할 때는 억압받는 국가의 분리 독립 자유를 옹호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투쟁해야 함을 반드시 강조해야 한다. 이것 없이 국제주의는 불가능하다.
아일랜드의 1916년 부활절 봉기를 옹호하는 맥락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약소 민족들은 비록 반제국주의 투쟁의 독립 변수로서는 별 힘이 없지만 진정한 반제국주의 세력인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가 무대에 등장하도록 도와 주는 효소나 박테리아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변증법이다.
그러나 동시에, 레닌은 사회주의자들이 국적과 민족을 뛰어넘어 단일한 조직으로 (궁극적으로는 단일한 인터내셔널로) 단결해야 하지만, 사회주의와 부르주아 민족주의 사이의 경계를 흐려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후진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해방 운동에 공산주의라는 빨간 칠을 하면 안 된다. … 코민테른은 식민지와 후진국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지향 운동과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어야 하지만, 그들과 조직을 통합해서는 안 되며, 어떤 상황에서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 설령 그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아직 매우 초보적인 단계에 있더라도 그렇다.
이 주장들은 모두 오늘날에도 매우 유효하다. 레닌의 주장은 이른바 “제3세계”와 “남반구”에서 일어나는 반제국주의 운동·투쟁에 사회주의자들이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이냐와 관련해서도 시사점이 있지만(이 경우 사회주의자들은 해당 국가의 정부나 해당 운동의 지도부를 지지하느냐 마느냐와 무관하게 민족 자결권을 지지해야 한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제국주의 국가 내 소수 민족의 권리 문제와 관련해서도 말해 주는 바가 있다. 예컨대 사회주의자는 퀘벡 민중이나 스코틀랜드 민중이 원한다면 그들이 각각 캐나다나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권리를 옹호해야 한다.(그들이 분리 독립을 원해야 한다고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민족주의 운동에 ‘공산주의라는 빨간 칠’을 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레닌이 활동하던 때보다 오늘날 훨씬 더 중요해졌다. 오랫동안 스탈린주의가 바로 그런 빨간 칠을 일삼아 왔고,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 에티오피아의 데르그 정부(위키피디아에는 이 정부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은 마르크스-레닌주의 군부독재”라고 묘사돼 있다), 짐바브웨의 무가베가 이끄는 아프리카민족동맹애국전선 같은, 본질상 민족주의적이지만 스탈린식 산업화 모델에 매력을 느껴 스스로 ‘공산주의’나 ‘마르크스주의’라고 칭한 정권들이 오랜 기간 존속해 왔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레닌의 반제국주의는 ‘평화 프로세스’ 전후의 아일랜드 독립 투쟁과 관련해서도 분명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의 투쟁이 지닌 반제국주의적이고 따라서 진보적인 함축을 보지 못하는, 그래서 예컨대 아일랜드공화국군IRA 급진파를 우익 친영파 무장 세력과 동급으로 보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일부 사회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불가피하게 반동적 입장으로 이끌려 때로는 소극적으로, 때로는 적극적으로 영국 국가를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반대로, 공화주의자들의 급진적인 언사를 액면 그대로 믿고 그들이 노동자 공화국을 수립할 것으로 기대한 사람들은 그들대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레닌의 국가론
21 《국가와 혁명》은 유명한 저작이니, 길게 인용하기보다는 주요 명제를 간단히 요약하기만 하겠다.
레닌의 국가론은 러시아 혁명의 한가운데인 1917년 8월에 쓴 《국가와 혁명》(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일 것이다)에 제시돼 있다. 레닌은 카우츠키와 플레하노프 등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이 마르크스를 심각하게 왜곡했다고 보고, 국가 문제를 다룬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중요한 구절들을 모두” 검토한 다음 “국가에 관한 마르크스의 진정한 가르침을 재확립”하고자 했다.
- 1. 국가는 영원한 기구가 아니며, 계급으로 나뉘어 화해 불가능한 계급 적대가 발생한 사회의 산물이다.
- 2. 국가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데 이용하는 계급 지배의 기관이다.
- 3. 국가의 정수는 사회 위에 군림하며 군대·경찰·감옥 등 강압 기구로 이뤄진 공권력이다.
- 4. 현대 국가는 자본주의 국가로서 자본가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며 본질적으로 부르주아 독재다.
- 5. 노동계급은 기존 국가를 인수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이는 제2인터내셔널 소속 정당들의 전략이었다)하는 데 사용할 수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파괴·해체·분쇄해야 한다.
- 6. 파괴된 자본주의 국가는 새로운 노동자 국가로 대체돼야 한다. 새로운 노동자 국가에서는 모든 관리를 선출하고 언제든 소환할 수 있어야 하며, 그들의 보수를 보통 노동자 임금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
- 7. 이 노동자 국가는 부르주아의 반혁명적 저항을 제압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안착시키기 위해 꼭 필요하다.
- 8. 완전히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고 나면 국가는 완전히 소멸하고, 협력적 생산자들의 자치 공동체가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레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에 이런 내용이 모두 포함돼 있음을 지적했다. 레닌은 자신이 덧붙인 것이라고는 작업장 대표자들로 이뤄진 노동자 소비에트(평의회를 뜻하는 러시아어)가 노동자 국가의 핵심 기관이 될 것이라는 점뿐이라고 했다. 레닌은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토대로 이런 결론을 도출했지만, 《국가와 혁명》에서 이를 더 심화시켜 다루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레닌이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매우 중요했다. 그의 국가론은 개혁주의(좌파 개혁주의를 포함해)와 혁명적 사회주의의 차이를, 사민주의자들의 ‘마르크스주의’와 제3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의 차이를 더 없이 선명하게 보여 줬다.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의 차이점도 명료하게 해 줬다.
파리 코뮌을 다룬 마르크스의 저술에서도 드러나고 레닌도 거듭 강조했듯이, 혁명적 사회주의가 다른 사상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기존 국가 기구를 인수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이러한 관점은 혁명 시기뿐 아니라 평상시의 정치 실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토니 블레어[전 영국 총리]와 에이먼 길모어[현 아일랜드 외무장관]처럼 자본주의를 거스를 생각이 추호도 없는 우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국가를 거리낌없이 옹호하며 국가가 서로 다른 계급 사이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신화를 퍼뜨리고 “우리의” 군대와 경찰을 전 국민의 수호자인 양 지지한다. 토니 벤, 프랑스 좌파전선의 장-뤽 멜랑숑, 그리스 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같은 좌파 개혁주의자들은 경찰과 법이 자본가 편이라는 것을 곧잘 인식하고 전쟁에도 반대하는 경우가 많지만, 대체로 국가를 파괴하자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좌파 정부가 집권해서 국가를 길들인다는 구상이나 국가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점차 확대시킨다는 생각에 기댄다. 즉, 마르크스와 레닌과는 정반대로 국가를 “인수해서 노동계급이 사용”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구상은 군 장성, 경찰청장, 판사, 고위 관료 등 국가기구들이 수천 가닥 연줄로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다. 또한 좌파 개혁주의자들이 자본주의 국가를 한껏 인정하며 지지하는 주류 개혁주의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집권하게 되면 그런 변질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시리자는 대체로 급진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강령으로 제시하면서도 국가 문제는 제대로 건드리지 못하고 있고 치프라스는 아테네 경찰청장과 공개적으로 악수했는데, 이런 행보는 바로 그런 이유에서 불길한 징조다.
레닌의 국가론에 대해서는 지난 90여 년 동안 다양한 직접·간접적인 반론이 제기됐다. 그 반론들을 여기서 모두 다루는 것은 무리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들을 추려내면 다음과 같다. 1) 다원주의 관점의 주류적 반론, 2) 니체/푸코의 ‘힘에의 의지’론을 기초로 한 반론, 3) 이른바 ‘그람시주의’의 반론, 4) 자율주의/아나키즘의 반론. 아래에서는 각각의 주장을 간략히 소개하고 반박하려 한다.
다원주의 관점의 반론: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 이탈리아의 ‘엘리트 이론’가 가예타노 모스카, 빌프레도 파레토의 저작들을 바탕으로 한 다원주의 관점은 로버트 A 달, 아널드 로즈, 레이먼드 애런 같은 정치학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1950~60년대 사회학계에서 지배적 학설로 자리 잡았다. 다원주의는 오늘날에도 정치나 시사 문제를 다루는 대다수 언론 보도의 밑바탕에 깔린 관점이다. 다원주의는 산업, 금융, 언론, 법조, 의료, 노조, 예술, 스포츠 등 정치·사회 각계에 지배적인 엘리트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이 엘리트들이 단일한 지배계급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경쟁한다고 본다. 엘리트들 사이의 경쟁은 다양한 이익·압력 집단 사이의 영향력 다툼이라는 형태를 띠며 그러한 상호 갈등과 견제 덕분에 어느 한 집단이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에서 정부와 국가는 여러 집단 사이에서 조정자나 중개인 노릇을 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이런 다원주의는 냉전 시기 동구 ‘공산주의’권의 ‘전체주의’에 대항해 형성됐는데, 이런 관점이 미국이나 영국의 의회와 국영 방송국의 정치관과 잘 들어맞았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원주의 관점의 분석은 이미 1969년에 랠프 밀리반드의 저작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The State in Capitalist Society에 의해 사실상 허물어진 바 있다. 이 유명한 저서에서 밀리반드는 풍부한 실증적 증거를 들며 국가 기관을 포함한 다양한 집단의 엘리트들이 거의 모두 동일한 사회계급 출신이고, 같은 명문대학을 다녔으며, 같은 (친자본주의) 기본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므로 그들 사이의 ‘경쟁’은 허상이거나 피상적인 것이며, 그들이 사실상 지배계급을 형성해 국가를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 줬다.
다원주의 관점은 엘리트들이 모두 자본주의 경쟁(경쟁적 자본 축적)이라는 동일한 경제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도 간과한다. 자본주의 경쟁 논리는 정부와 국가의 행태도 좌지우지하는데, 이는 심지어 집권 세력이나 국가 운영자가 자본가 계급 출신이 아닌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니체/푸코식 반론: 영향력이 매우 큰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 국가론이 주장(했다고 푸코가 오해)한 바와 달리 권력은 단지 특정 사회계급이나 국가의 수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 존재하며 감옥, 학교, 병원, 가족, 사무실 등 다양한 제도 속에서 작용하는 관계라고 봤다. 더욱이 푸코는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면서 권력 장악을 추구하기보다는 곳곳에서 나타나는 권력에 맞서 수많은 지역적이고 분산적인 전투를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
이 주장에 다음과 같은 반론을 펼 수 있겠다. 첫째, 흔한 일이지만 푸코도 마르크스와 레닌의 주장을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배격한다. 마르크스와 레닌 그 누구도 권력이 전부 지배계급이나 지배계급의 국가에 있다거나 지역·작업장·가족 수준에서는 권력에 저항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사회의 결정적 권력이 국가와 지배계급에 집중돼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물론 교사가 교실에서, 의사가 병원에서, 아버지가 가족에서 어느 정도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각각의 권력을 자본주의 국가의 권력과 동급으로 보는 것은 “중력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사과의 중력과 지구의 중력을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마오쩌둥이나 카스트로식式 게릴라 투쟁도 결국 수도(즉, 국가)를 장악해야 결판이 나지 않는가.
둘째, 마르크스주의는 학교, 병원, 개인 관계 등에서 강압적 권력 관계가 형성되는 이유에 대한 분석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처럼 계급 분할을 기초로 한 생산양식에 내재한 소외와 착취라는 개념으로 그런 관계를 설명한다. 푸코는 이런 분석을 기각하고 대신에 니체가 말한 본능적이고 보편적인 ‘힘에의 의지’ 개념으로 그런 관계를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힘에의 의지’ 개념은 좌파적 반권위주의 운동의 이론적 기초로 쓰일 수도 있지만, 결국 해방과 승리의 가능성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힘에의 의지가 정말로 보편적인 것이라면, A라는 상대적 약자가 B라는 상대적 강자에 맞서 승리하더라도 바뀌는 것은 없다. A가 B의 자리를 차지할 뿐, 억압적 힘 관계 자체는 계속되는 것이다.
게다가 푸코 자신은 대체로 천대받는 사람들 편에 서는 것을 선택했지만, 그런 이론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는 사실 정해져 있지 않다. 니체의 말처럼 누구나 자기 나름으로 힘에의 의지를 추구한다면 니체 자신이 그랬듯 억압자와 같은 편에 서지 말아야 할 이유가 딱히 없다.
이른바 ‘그람시주의’의 반론: 이 반론은 레닌의 국가론에 대한 반론 중 가장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들리는 반론이다. 그 기원은 그람시와는 무관하다. 그 기원은 사실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이 인민전선 전략에 따라 개혁주의로 선회했던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이 개혁주의로 선회하는 양상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더욱 진척됐는데, 서구 공산당들은 소련의 지령에 따라 사회주의로 가는 각국 나름의 평화로운 의회적 길을 채택했다. 스탈린의 재가를 받아 1951년에 채택한 영국 공산당 강령 ‘사회주의로 가는 영국적 길’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공산주의의 적들은 [영국] 공산당이 영국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고 의회를 폐지하려 한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의 정책에 대한 악의적 왜곡이다. 지금 조건에서는 다른 길을 통해서도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음을 역사는 보여 줬다. 예컨대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공화국들처럼 소비에트 권력이 아니라 인민민주주의를 수립해서 말이다. 영국은 독자적 경로로 사회주의에 도달할 것이다. 러시아 인민이 러시아 고유의 역사적 조건과 차르 통치를 배경으로 소비에트의 길을 통해 정치 권력을 실현했고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공화국들과 중국의 노동 인민은 각자 처한 역사적 조건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치 권력을 획득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영국 인민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역사적 산물인 영국 의회를 압도 다수 인민의 민주적 의지 관철 수단으로 바꿈으로써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진정한 인민민주주의로 변혁할 수 있다고 영국 공산주의자들은 선언하는 바다. 영국 인민이 나아갈 길은 진정으로 인민을 대표하는 의회를 기초로 한 인민 정부의 수립이다.
그람시의 저작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1970년대에 유러코뮤니즘(유럽 공산당 중 소련과 연을 끊은 부류의 정치 경향) 성향의 이론가들은 그람시 사상을 일부 차용해 이러한 의회적 길을 합리화하고 사회민주주의 쪽으로 더욱 기울었다.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옥고를 치르며 1918~23년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혁명이 패배한 원인을 곱씹은 그람시는 러시아의 경우 사회적·경제적 후진성 때문에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가 서유럽의 국가-시민사회 관계와 사뭇 달랐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에서는 국가가 전부였고 시민사회는 원시적인 점액질 형태로 존재했다. 반면 서구에서는 국가가 시민사회와 적절히 관계 맺고 있어서 국가가 휘청거리는 즉시 견고한 시민사회 구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국가는 단지 외곽의 방벽이었고, 그 뒤에는 강력한 요새들과 참호가 버티고 있었다.
그람시는 다음과 같은 지적도 했다.
가장 선진적인 국가들의 경우 … ‘시민사회’는 구조가 매우 복잡해져서 직접적인 경제 요인(위기, 불황 등)의 재앙적 ‘침탈’에도 견딜 수 있는 내성이 생겼다.그람시는 ‘헤게모니’에 대한 강조로 나아간다. 헤게모니란 경제적 우위에 있는 계급이 사회를 지배할 때 강제력과 함께 필요한 문화적·도덕적·지적 지도력을 말한다. 헤게모니를 쥔 지배계급은 강압뿐 아니라 동의에 의해서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한 사회집단의 우위성은 ‘지배’와 ‘지적·도덕적 지도력’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된다. 한 사회집단은 정부 권력을 획득하기 전에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27 이 전망에 따라 그람시는 동맹 구축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이탈리아 상황에서 이 동맹은 특히 북부의 도시 노동계급과 남부의 농민 사이의 동맹을 뜻했다. 유러코뮤니스트들은 그람시의 사상을 끌어와서 “봉기”의 시대(즉, 혁명)는 끝났으니 “국가를 분쇄”한다는 레닌의 발상을 폐기해야 하고, 그 대신 점진적이고 장기적인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문화적 헤게모니를 구축해야 하며, 더불어 좌파 정부 집권을 위해 (중간계급과의) 광범한 민주주의 동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람시와 그람시의 전략(적어도 “이데올로기적·이론적” 요소)에 대한 이 같은 해석은 좌파 학자들에게 광범하게 지지를 얻었고, 그람시가 레닌을 밀어내고 대체했다는 주장은 학계의 새로운 정설이 되다시피 했다.
그람시는 “강제와 동의, 권위와 헤게모니, 선동과 선전 … 전술과 전략 등의 층위들”을 결합한 “이중 전망”dual perspective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그람시의 사상을 완전히 곡해한 것이다. 그람시는 혁명으로 국가를 타도하고 노동자 평의회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 레닌의 국가론을 모두 수용했을 뿐 아니라, 레닌을 “현대 최고의 실천 철학 이론가”로 여겼고, 레닌주의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승·발전시키고자 했다. 그의 헤게모니 개념도 “지적·도덕적 지도력”이 “지배”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 결합을 강조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이중 전망”도 “강제와 동의”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람시가 동맹 맺기를 강조한 것은 이탈리아에서 아마데오 보르디가(그람시 이전에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등이 대표한 초좌파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에서였다. 이는 레닌의 《좌파 공산주의 ─ 유치증》과 맥을 같이하며 볼셰비키의 노동자·농민 동맹 전략을 발전시킨 것이지 유러코뮤니즘의 온건 의회주의를 예고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그러나 그람시의 사상을 차용하든 그렇지 않든 레닌주의에 대한 이런 식의 비판은 명백히 틀렸다. 지배계급이 물리력뿐 아니라 지적 헤게모니에도 의존해 지배한다고 해서, 지배계급의 지적 헤게모니가 무너졌을 때 물리력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으리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 칠레의 피노체트 등 이를 보여 주는 역사 속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구체적 물음을 몇 가지 던져 보면 문제가 더욱 명확해진다. 만약 시리자가 집권해 사회주의를 도입하려 한다면 그리스 군대(1967~73년 군부독재를 이끌었던)나 경찰(50퍼센트가 파시스트 황금새벽당에 투표한)이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할 것인가? 수세기 동안 식민지를 거느린 경험이 있고 맬버러 공작, 웰링턴 장군, 넬슨 제독, 블랙 앤드 탠스[아일랜드의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한 영국 특수경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이 있는 영국 장성들이 제러미 코빈[영국의 좌파 의원] 같은 인물이 집권해서 국방부 등을 ‘민주화’하고 자본주의를 점진적으로 폐지하도록 그냥 내버려둘까? 아니면 “여왕 폐하와 국가(와 우리 계급)를 위해” 들고 일어설까? 미국의 펜타곤[국방부], 중앙정보국CIA, 연방수사국FBI, 뉴욕경찰청NYPD 등을 미국 노동계급이 인수해서 노동계급의 이익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자명해 보인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을 집필한 이래 많은 것이 변했지만, 국가의 계급적 본질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29 아나키즘과 자율주의의 반론을 길게 다뤘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만 다루겠다. ‘라이프스타일 아나키스트’가 아닌 혁명적 아나키스트들은 자본주의 국가 파괴라는 목표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혁명 이후에도 얼마 동안은 노동자들의 국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거부하며, 국가 자체를 당장 폐지하고 권위와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면 심지어 민주적인 기관이라도 전혀 설 자리가 없는 자치 공동체를 즉시 수립하자고 제안한다.
아나키즘/자율주의의 반론: 나는 이미 다른 문헌에서이런 주장은 순진한 동시에 공상적이다. 혁명으로 국가기구들이 분쇄된 뒤에도 자본주의 국가의 핵심 부문은 이전 지배계급의 중핵(고위 은행가와 산업 자본가 등)과 힘을 합쳐 반혁명을 벌여 자본주의를 복원하려 할 것이므로 이를 물리칠 “무장한 인민들로 이뤄진 기구”, 즉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주장은 순진하다. 비록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뒤라도 여전히 계급 분할이 (특히 국제적으로는) 온존하는 상황에서, 소수에게 다수의 의지를 관철할 강제 수단이 전혀 없이도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할 수 있을 정도로 노동자 대중이 하나같이 의식이 깨어 있고 수천 년을 이어져 온 계급 사회의 잔재와 습성들을 한날 한시에 떨쳐낼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그들의 주장은 공상적이다. 그들처럼 국가 권력의 행사를 모두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패배의 보증수표일 뿐이다.
존 홀러웨이 같은 많은 자율주의자들은 본질상 억압적일 수밖에 없는 국가를 장악하겠다는 집착이야말로 오랜 세월 노동자 운동을 타락시킨 원흉이라고 말한다.(그들이 말하는 국가가 부르주아 국가인 이상 이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이는 레닌주의의 입장은 아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대안인즉, 국가를 상대하지 말고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운동 같은, 구성원들이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자율적’ 공간들을 만들어 나가자는 것이다. 이는 비록 단기적으로는 매력적인 전술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회 변혁 전략으로서는 명백히 가망이 없다. 사파티스타 운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줬지만 결국 세계도 멕시코도 바꾸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더욱이, [사파티스타가 활동한]치아파스의 정글 속에서 가능했던 일은 상파울루나 부에노스아이레스나 카이로나 선진 자본주의 세계 어디서도 결코 되풀이될 수 없다. 지금 국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정말 아무 데도 없고, 자율적 공간으로 무한정 지속될 수 있는 곳도 전혀 없다. 그런 공간이 자본주의 권력을 위협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국가를 무시하려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도 우리를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이유에서 레닌의 국가론은 오늘날에도 사회주의자의 실천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레닌주의 당
오늘날 정치적 분위기에 비춰볼 때 이 글이 다루는 레닌주의 핵심 이론 중 가장 인기가 없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당 이론일 것이다. 이는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운동 등 세계 곳곳의 광장 점거 운동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레닌의 당 이론에 대한 반감은 아나키스트와 자율주의자들을 넘어 대다수 좌파가 공유하는 정서이며, 일반 대중이 모든 정당에 대해 막연하게 갖고 있는 불신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므로 특별히 레닌주의적인 당 이론을 다루기 전에 다음 두 가지 질문을 먼저 던지고자 한다. 첫째, 혁명적 당에 대한 이론을 배제하고도 레닌주의자가 될 수 있는가 없는가? 둘째, 정당이라는 것이 태생적으로 잘못된(또는 반민주적인) 것인가?
31 공저자들(물론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아니지만 지젝, 이글턴, 제임슨, 앤더슨, 라자러스, 네그리 등)은 대부분 그런 활동가이자 이론가일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이런 입장의 이론적 선구자는 C L R 제임스와 라야 두나예프스카야다. 그들은 1940년대 미국 트로츠키주의 단체의 한 분파에 속해 있었고, 그 단체에서 분리해 나오면서 레닌의 다른 사상과 러시아 혁명을 지지하는 견해는 고수했지만 전위 정당 개념은 한사코 반대했다. 《레닌 재장전》의 공저자 케빈 B 앤더슨은 십중팔구 오늘날의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인물일 것이다.
자기 나름으로 레닌의 제국주의론과 국가론을 대략 받아들이거나 레닌의 다른 사상도 나름으로 존중하는 활동가와 이론가들이 분명히 있지만, 그들도 레닌의 당 이론은 거부하고 특히 그에 따른 실천을 거부한다. 아마 ‘레닌 재장전’ 대회 참가자와 2007년에 출간된 동명의 책당 이론을 배제한 채 레닌을 추앙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일이겠지만, 현실의 레닌은 1917년 혁명 직전까지 자신의 정치 인생을 몽땅 혁명적 당을 건설하는 데 바쳤다. 심지어 가장 암울했던 반동의 시기인 1907~12년에도 레닌은 혁명적 당을 청산하려는 경향 일체에 맞서 단호하게 싸웠다. 그 뒤 1917년 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전 세계 곳곳에서 혁명적 당을 건설하려는 활동에 착수했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통해 그 당들을 통합하려 애썼다. 그러니 혁명적 당 없는 레닌은 솔직히 말해 속 빈 강정이고 혁명적 당에 대한 이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사실 레닌주의를 폐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32 그러나 계급 사회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노동계급이 이 사회 바깥에서 이상향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계급은 계급 사회 안에서, 그리고 계급 사회라는 조건에서 자신의 해방을 위해 싸워야 하는 처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정당은 노동계급이 이룬 성과이며 아주 제한된 민주주의라도 누리려면 필요한 존재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경험한 대다수 정당의 행태를 보면 정당이 본질적으로 잘못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느낄 만하다. 당은 계급으로 나뉜 사회를 반영하고 표현하므로 계급 사회의 끔찍한 많은 속성을 드러낸다는 것도 이해해야 한다.첫째, 역사를 돌이켜볼 때 정당이 19세기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발전과 노동계급의 선거권 획득과 함께 발전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정당이 생기기 전에는 귀족과 상층 부르주아지 등 ‘고관대작들’의 느슨한 연합체가 전부였다. 일반 대중에게도 선거권이 생긴 뒤에야 상층 및 중간계급을 비롯한 노동계급이 표를 얻기 위해 정당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둘째, 오늘날 복수의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군부독재, 파시즘, 스탈린 독재 체제 등 최소한의 민주주의도 보장되지 않고 정당 설립 자유마저 억압당하는 사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정당이 자연스럽게 사라져 국회의원 등 모든 선출직 대표가 무소속 개인이 됐다고 상상해 보자.(물론 불가능한 상상이겠지만.) 이러한 상황이 과연 노동계급과 대다수 민중에게 득이 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크게 득을 볼 자들은 부자인 부르주아지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와 특권(연줄과 문화적 자산 등)을 모두 이용해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하게 정치를 쥐락펴락할 것이다. 노동계급은 오로지 집단적 기구(노동조합이든 정당이든)가 있어야 자본의 권력과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다.
레닌주의 당이라는 구체적 문제로 다시 돌아가며 나는 다음 세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겠다. 1) 레닌이 구상한 혁명적 당의 주요 특징은 무엇인가? 2) 흔히 듣는 주장처럼 혁명적 당에는 엘리트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이 사실인가? 3) 세계 각국에서 혁명적 당 건설이라는 힘겨운 과업을 수행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국주의나 국가에 관한 이론과는 달리 정당에 관한 레닌의 견해를 정리한 핵심 문헌은 하나도 없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그런 핵심 문헌으로 삼으려는 시도들은 심각한 오류가 있으므로 나는 레닌의 실천 전반을 고려해 그의 당 이론을 간략히 정리해 보겠다.
33 레닌주의 당은 당원들의 정치 의식과 기풍을 끌어올려 그들이 계급투쟁의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단련시킨다. 레닌주의 당은 민주적 중앙집권제에 따라 운영된다. 민주적 중앙집권제는 민주적으로 토론하고 이에 따라 결정된 사항에 따라 행동 통일을 하는 것을 뜻한다.
레닌주의 당의 첫째 특징은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당이라는 것이다. 당의 활동과 가입 대상이 노동계급으로 집중돼 있으며 당이 일차적으로 대변하려는 것도 노동계급의 이익이다. 레닌주의 당의 정책과 활동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레닌주의 당은 공공연히 혁명적인 당이다. 혁명을 목표로 할 뿐 아니라 당원도 대체로 혁명가라는 점에서 그렇다. 레닌주의 당은 ‘광범한 교파를 아우르는 교회’가 아니며 개혁주의 분파를 포함하지 않는다. 투쟁하는 당인 레닌주의 당의 목적은 기업주와 정부에 맞선 일상적 투쟁에서 노동계급 대중과 관계를 맺고 가능하면 그들을 지도하는 것이다. 혁명적 당은 노동자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동조합 안에서 활동하고 선거에도 출마한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레닌주의 당은 다른 정치조직보다 덜 민주적인가? 아니다. 오히려 이 같은 특징 때문에 레닌주의 당은 사회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설할 수 있는 가장 민주적인 조직 형태다.레닌주의 정당의 기반인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민주적인 계급이다. 지배계급과 중간계급 정당의 민주주의는 그들의 ‘타고난’ 지도자들이 누리는 부와 물질적 특권, 그리고 당 간부들의 출세욕에 의해 끊임없이 훼손된다. 물론 노동계급 정당도 이러한 압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문제가 훨씬 덜한 것은 사실이다. 국가를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혁명적 당은 기존 국가를 인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개혁주의 정당보다 이러한 압력에 훨씬 더 잘 견딘다. 혁명적 당은 개혁주의 정당과 다르게 지도자들에게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출세(장관직 임명 등)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개혁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의 민주주의는 당 지도층이 누리는 특권뿐 아니라 그 지도자들이 기층 당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적 전망을 발전시킨다는 점 때문에도 잠식된다. 즉, 그 지도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노동자들을 대리해 자본주의를 운영하려는(노동조합 지도자들의 경우 자본주의와 협상하려는) 전망을 발전시킨다. 당연히 개혁주의 정치인이나 노동조합 지도자는 자신과 기층 당원 사이의 이런 차이점을 능숙하게 감추려 하겠지만, 그럼에도 그런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며 이 때문에 [개혁주의] 정당과 노조 지도자들은 아래로부터 솟아나는 민주적 압력을 단속하는 데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인다. 혁명가들의 당인 혁명적 당은 지도부와 당원들 사이에 이러한 차이가 일어날 가능성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노동계급의 자체 해방 등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헌신과 당원을 정치적으로 교육시키려는 노력도 혁명적 당의 내부 민주주의를 강화시키는 요인이다. 혁명적 당은 당내 문제를 토론하고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능력을 갖춘 당원층을 형성하고자 노력한다. 그래도 당원들 사이의 정치적 수준의 불균등은 불가피하겠지만, 당원들에 대한 체계적인 정치 교육이 거의 없는 대다수 비非레닌주의 조직보다는 훨씬 낫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은 구성원들이 당비나 조합비를 내고 선거 유세에 참여하고 투표하는 한, 정치 교육을 할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일상적 투쟁에 참여하는 것도 조직 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요소다. 그런 투쟁에 참여하면 계급이 직면한 여러 쟁점이 당내 토론에 반영되고, 실행 결과에 비춰 정책의 올바름을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민주적 중앙집권제에 관해 얘기해 보자. 많은 좌파들이 민주적 중앙집권제를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골칫거리로 여긴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결정 사항을 이행하라는 의무를 부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런 의무의 이행은 당원들의 자발적 의사에 달려 있다. 당원들은 언제든 탈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적 중앙집권제는 다수의 결정을 실제로 집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일 뿐 아니라 매우 민주적인 조직 운영 원리다. 왜 그런지는 민주적 중앙집권제를 따르지 않는 조직의 실천과 대조하면 잘 알 수 있는데, 특히 겉보기로는 ‘자유로운’ 개혁주의 정당에서는 지도자들이 다수의 결정을 무시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35 혁명이 일어나는 시기처럼 좀더 나은 때를 기다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승리하려면 혁명적 당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러한 결론은 이론과 경험에서 모두 입증됐다.
노동계급 속에 만만찮게 뿌리를 내린 레닌주의 혁명적 당을 건설하는 일은 그 규모와 상관 없이 매우 어렵고 고된 일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이러한 일을 하기로 자처하는가? 소셜 미디어와 수평적 네트워크가 대세인 오늘날, 혁명적 당은 불필요하고 낡은 유물에 불과하지 않은가?36 그러므로 노동계급에 영향을 미치는 사상에 맞서 싸워야 한다. 노동계급의 의식과 투쟁은 불균등하게 발전한다. 따라서 좀더 의식적이고 선진적인 노동자들을 혁명적 당으로 규합해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노동계급에 미치는 직접적 영향에 맞서 싸우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노동조합 관료들을 통해 미치는 간접적 영향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 이 점은 레닌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혁명적 당이 필요한 이론적 근거는 단순 명쾌하다. 노동계급은 지배계급과 국가처럼 중앙집권적인 적과 대치하고 있으며 그런 적과 싸우려면 노동계급도 중앙집권적인 조직이 필요하다.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물질적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이 정신적 생산수단도 소유한다. 일반으로 말해, 정신적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에 종속된다.”혁명적 당의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경험도 풍부하다. 1848년 파리 코뮌부터 2011년 이집트 혁명까지 노동계급이 체제에 맞서 일어난 사례는 셀 수도 없이 많다. 노동계급이 지역 수준에서 또는 잠시 동안만 권력을 잡은 경우(파리 코뮌)도 있었고 권력 장악에 근접한 경우(1923년 독일, 1936년 스페인 등)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전국 수준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여러 해 동안 권력을 유지한 경우는 오직 한 번, 1917년 러시아 혁명뿐이었다. 비록 스탈린의 반혁명으로 결국 패배했지만 말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다른 실패한 혁명과 달랐던 점은 바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당이라는 대중적인 혁명적 당이 존재했으며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볼셰비키는 러시아 혁명에서 결정적 구실을 했다.
좀더 나은 때를, 즉 혁명이 일어날 때를 기다리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승리한 1917년 러시아 혁명과 패배한 1919~23년 독일 혁명의 차이는 볼셰비키 당이 이미 여러 해에 걸쳐 건설됐고 노동계급의 주요 부분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다는 것이다. 반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 독일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독일 사민당으로부터 너무 늦게 분리해 나온 탓에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강력한 혁명적 당을 건설할 시간이 부족했다. 우리는 최대한 준비돼 있어야 한다. 즉,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당을 건설해야 한다. 바로 지금.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레닌주의의 세 가지 요소가 레닌주의의 전부는 아니다. 그 밖에도 그의 이론과 실천을 총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배울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이 세 요소는 레닌주의를 이루는 핵심 축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혁명적 사회주의 이론과 정치는 레닌이 이룬 성과에 만족하며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세계가 변화하고 자본주의도 바뀌고 있으므로 마르크스주의도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바탕으로 모든 측면에서 발전을 이뤄야 한다. 그런 발전은 레닌주의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레닌주의를 바탕으로 할 때 가장 수월하게 이뤄질 것이다.
주
-
출처: John Molyneux, In Defence of Leninism, Irish Marxist Review Vol 1, No 3(2012)
↩
- John Molyneux, ‘Lih’s Lenin’, http://johnmolyneux.blogspot.com/2006/11/lihs-lenin-review-of-lars-t-lih-lenin.html ↩
- 레닌이 처음부터 권력욕에 눈 먼 사람이었다는 식의 주장은 내게는 항상 황당하게 들렸다. 1893년 차르 치하 러시아에서 권력욕이 있는 청년이라면 응당 차르 정부의 관료가 됐을 것이지, 레닌처럼 회원이 서른 명 정도밖에 안 되고 시베리아 유형을 갈 것이 거의 확실한 ‘노동계급 해방’ 단체에 가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 예를 들어 John Molyneux, Marxism and the Party, London 1978[국역: 존 몰리뉴, 《마르크스주의와 정당》, 책갈피, 2013], 2, 3장과 Tony Cliff, Lenin: Building the Party, London 1975[국역: 토니 클리프, 《레닌 평전1: 당 건설을 항하여》, 책갈피, 2010], 특히 4장을 보시오. ↩
- L. Trotsky, Stalin, London 1968, p. 58. ↩
- Tony Cliff, Lenin: Revolution Besieged, London 1987[국역: 토니 클리프, 《레닌 평전3: 포위당한 혁명》, 책갈피, 2010], p. 54에서 재인용. ↩
- 이 시기에 레닌이 한 정치 활동을 세밀하게 평가한 것을 보고 싶다면, 이런 이론적 준거틀로 분석하면서도 매우 날카롭고 혹독하리만큼 현실을 직시하는 Tony Cliff, Lenin: Revolution Besieged[국역: 토니 클리프, 《레닌 평전3: 포위당한 혁명》, 책갈피, 2010]를 보시오. ↩
- Victor Serge, Memoirs of a Revolutionary[국역: 《한 혁명가의 회고록》, 오월의봄, 2014] http://www.marxists.org/archive/serge/1945/memoirs/ch04x.htm#h3 ↩
- 관료에 맞서 레닌이 말년에 벌인 투쟁을 철저하게 분석한 것을 보려면 Tony Cliff, 앞의 책, pp. 394-442를 보시오. ↩
- G. Lukacs, Lenin: A Study in the Unity of his Thought, London, 1970, p. 89. ↩
- John Molyneux, What is the Real Marxist Tradition?, London 1985[국역: 존 몰리뉴,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 책갈피, 2005]. ↩
- http://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6/imp-hsc/ch07.htm ↩
- http://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6/imp-hsc/ch05.htm ↩
- Chris Harman, ‘Analysing imperialism’, International Socialism 99(2003)[국역: 크리스 하먼, 《크리스 하먼의 새로운 제국주의론》, 책갈피, 2009]. ↩
- Alex Callinicos, Imperialism and Global Political Economy, London 2009[국역: 알렉스 캘리니코스, 《제국주의와 국제 정치경제》, 책갈피, 2011]. ↩
- Joseph Choonara, ‘Empire built on shifting sand’, International Socialism 109(2006), p. 143. ↩
- 민족 문제에 관해 레닌이 취한 태도를 더 자세히 보려면 Tony Cliff, Lenin, Vol 2, All Power to the Soviets, London 1985[국역: 토니 클리프, 《레닌 평전2: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책갈피, 2009], pp. 44-57을 보시오. ↩
- V. I. Lenin, ‘The right of nations to self determination’, Cliff, 같은 책, p. 53. ↩
- Cliff, 같은 책, p. 54. ↩
- Cliff, 같은 책, p. 55. ↩
- V. I. Lenin, ‘Theses on the National and Colonial Question’, in Theses, Resolutions and Manifestos of the First Four Congresses of the Third International (London 1980) p. 77. ↩
- V. I. Lenin, The State and Revolution, Moscow 1977[국역: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 《국가와 혁명》, 아고라, 2013], pp. 9-10. ↩
- M. Foucault, The Will to Know, Alex Callinicos, Is There a Future for Marxism?, London 1982[국역: A. 캘리니코스, 《마르크시즘의 미래는 있는가》, 열음사, 1987], p. 108에서 재인용. ↩
- http://www.marxists.org/history/international/comintern/sections/britain/brs/1951/51.htm ↩
- A. Gramsci,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London 1982, p. 238. ↩
- 같은 책, p. 235. ↩
- 같은 책, p. 57. ↩
- 같은책, pp. 169-170. ↩
- 그람시에 대한 왜곡을 훨씬 더 상세하게 다루며 반박하는 글로는 Chris Harman, Gramsci versus Reformism, London 1983[국역: 크리스 하먼, 《곡해되지 않은 그람시》, 노동자연대, 2004]을 보시오. ↩
- John Molyneux, Anarchism: A Marxist Criticism, London 2011[국역: 존 몰리뉴, 《아나키즘 ─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책갈피, 2013]을 보시오. ↩
- 같은 책, p. 64. ↩
- S. Budgen, S.Kouvelakis, S. Zizek, ed., Lenin Reloaded:Toward a Politics of Truth, Durham and London 2007. ↩
- 이와 관련된 일부 문제들에 관한 논의는 John Molyneux, ‘On Party Democracy’, International Socialism 124, (2009)를 참고하시오. ↩
- 이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는 V. I. Lenin, Left-Wing Communism-an Infantile Disorder를 보시오. ↩
- 이는 절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레닌주의 당들도 계급 사회의 다른 모든 조직과 마찬가지로 엘리트주의, 당내 위계 질서, 민주주의 부족 등과 관련된 온갖 문제를 심심치 않게 겪는다. 차이가 있다면 다른 조직들보다 레닌주의 당이 그런 압박에 더 잘 견딘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John Molyneux, ‘On Party Democracy’를 보시오. ↩
- 소셜 미디어의 활용과 한계에 관해서는 Jonny Jones, ‘Social media and social movements’, International Socialism 130 (2011)[국역: 조니 존스, ‘소셜 미디어와 사회운동’, 《마르크스21》 10호(2011년 여름)]과 John Molyneux, Will the Revolution be Televised?, London 2011, pp. 93-97을 보시오. ↩
-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The German Ideology[국역: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Ι》, 청년사, 2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