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류 분석
우석훈과 사회적 경제
우석훈은 최근 인기 있는 신자유주의 비판가 중 한 명이다. 그는 한미 FTA를 비롯해 전임 정부와 현 정부가 펼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책과 글을 많이 썼고 그래서 두 정부 모두 우석훈에게 정부 비판을 삼가라는 압력을 넣기도 했다.
박권일과 함께 쓴 책 《88만 원 세대》는 20대가 처한 암울한 현실을 고발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라는 부제가 붙은 책들을 잇달아 써내며, 비정규직·청년실업·전쟁·교육·개발주의·생태 등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를 다뤘다.
우석훈은 한국생태경제학회 회원이고, 녹색 운동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초록정치연대 정책국장으로 활동했다. 현대환경연구연 연구위원이기도 했고, 에너지관리공단 기후변화협약 대책단 팀장으로 유엔 기후변화 국가 간 대책회의 협상에 참가한 경력도 있다.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 외에도 안전한 먹거리, 아토피, 미세 먼지 등 생태 문제를 다룬 《도마 위에 오른 밥상》, 《아픈 아이들의 세대》를 썼고, 새만금 간척이나 골프장 개발 등 환경 파괴를 다룬 글도 많이 썼다. 우석훈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면, 생태주의를 다룬 책을 곧 낼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생활협동조합 활동에 애착을 갖고 지속적으로 참여하는데, 그의 문제의식과 주장은 생협 활동가들과 비슷한 점이 많다.
생태주의
우석훈은 자신을 ‘C급 경제학자’로도 소개하는데, 이는 그가 생태주의를 추구하는 것과 관련 있다.
생태경제학이라는 얘기를 들고, 지난 15년 동안 그야말로 철저하게 마이너로 살았다. 주류에서도 마이너였고, 좌파에서도 마이너였고, 심지어 환경단체에서도 마이너였다. 언제나 마이너로 살다 보니, 이제는 마이너 감성이라는 게 마치 내 몸에 잘 맞는 옷처럼 익숙해졌고, B급 영화, C급 학자, 그런 게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익숙해졌다.
우석훈이 사용하는 ‘토건국가’라는 용어는 개발주의가 주요 특징인 한국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도시와 농촌의 생태를 파괴하는 동시에, 사회 전반에 온갖 해악을 끼치는 것을 폭로하고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그는 시장 만능주의가 낳은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생태·젠더·지역성을 우선적인 물음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생태, 젠더, 지역성. 일단은 그 세 가지가 폴라니 시대에 한국인으로서 어딘가에 휩쓸려 가지 않으면서 우리식의 문제 풀이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생태적인 사유는 이 상황에 어떤 것일까,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성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면 어떻게 보일까, 그리고 서울과 수도권의 눈이 아니라 지역의 눈으로 본다면 사물은 어떻게 보일까, 그것이 경제인류학의 ‘호혜성’의 출발점일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근본(또는 심층)생태주의자deep ecologist는 아니다.
극단적인 환경주의인 근본생태주의자들은 보다 원칙적이며 원론적인 변화를 요구하거나 아니면 보다 도덕적인 접근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환경적인 측면에서 일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에는 지나치게 원론적인 주장들에 편중되어 있거나, 아니면 잘 받아들이기 어려운 근본적인 변화들에 치중되어 있어 오히려 반감을 사게 되는 경우가 많다.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생태경제’를 “에너지와 물질의 투입은 줄이고, 지식과 문화의 투입은 늘리는 국민경제”라고 설명한다. 국외 자원 확보를 위한 대외 팽창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를 ‘평화경제’라고도 부른다. 우석훈 자신이 설명하듯, 이 ‘생태경제’ 개념은 이른바 ‘지식경제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폴 로머의 ‘내생성장론’(‘신성장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기후변화 국가 간 협상에 한국 대표로도 참석하고, 초록정치연대 활동에도 참여하는 등 이른바 녹색 운동의 ‘정치세력화’에도 참여했다.
5 2006년 총선을 평가한 글에서도 “중앙 정치에서 거대 정당이 가지고 있는 흐름과는 별도로 지역의 자치와 풀뿌리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별도의 흐름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가 유럽의 지역당을 모델로 한 ‘지역당’ 방식에 의한 시민 정당의 논의로 분명히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쓴 바 있다. 6
굳이 세분해서 보자면, 녹색 운동의 ‘정치세력화’ 방식에는 중앙 정치를 무대로 하는 모델과 지역 정치를 무대로 하는 모델이 있다. 우석훈은, “한국형 녹색당 창당” 시도인 초록정치연대 활동에도 참여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중앙’ 정치를 무대로 하는 ‘녹색당’ 모델보다는 ‘지역당’ 방식을 더 좋아할 것으로 보인다(물론 이 두 방식이 항상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많은 시민단체 활동가처럼 그도 시민운동 위기의 대안으로 이른바 대변형 또는 준정당형 시민단체 방식의 활동보다는 ‘사회적 경제’를 구성하는 ‘사회적 기업’이나 생협 같은 ‘풀뿌리 자치운동형’ 시민단체 활동을 강조한다.경제의 생태적 전환과 사회적 경제
우석훈이 생각하는 “생태적인 사회의 조건과 한국 사회의 대안”은 무엇인가? 그는 국민국가 경제 모델에서 찾자면, “스위스와 덴마크 사이의 그 어느 지점을 향해서 가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녹색의 대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최근 5년 동안 전체 경작 면적의 10퍼센트 내외를 유기농으로 경작하는 변화를 만들어 낸 이 유럽 국가들은 … 대체로 현재 한국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에 비하면 훨씬 ‘녹색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들을 많이 갖추고 있다. 전체적으로 지역 자치가 발달했고, 도시가 비대해지지 않았고, 유전자 조작 식품GMO에 대한 사회적 모라토리엄을 가지고 있고, 특정 요소에 대해서 불균형 성장 전략을 택하지 않았고, 삶의 질이 매우 높다. 현상적으로만 본다면 지금 한국 정부가 행하고 있는 여러 정책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셈이다. … 이들 나라는 대체로 사회 내부가 생태계 자체의 조화에 근접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운영한 나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나라들이 ‘녹색적’ 특성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나라의 특징 중 하나는 ‘국가’와 ‘기업’ 외에 ‘비영리 부문’이라고 할 수 있는 협동조합, 즉 이른바 COOPs가 잘 발달해 있어 비시장 영역이 크다는 점과 공간의 외연적 성장을 최대한 자제하는 특별한 발전 양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석훈은 경제를 생태적으로 전환하려면 자신이 “비영리 부문” 또는 “비시장 영역”이라고 부르는 경제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이 경제 영역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990년 이후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을 타고 기업들이 국가를 일방적으로 누르고 지배적 위치에 올라서지 못한 이유에는 국가와 기업 외에 또 다른 제3부문이 존재하기 때문이란 점도 있습니다.
시민경제 혹은 사회경제, 협동조합 등 국가와 대기업에 기계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또 다른 부문을 가진 나라 혹은 지역들이 이 신자유주의의 광풍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나름대로 독자적이면서도 편안한 경제를 가지고 있게 되었더라,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거지요.
저는 시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상태는 지옥이고, 그렇다고 조직[맥락상 국가로 읽어도 무방하다]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상태(즉 사회주의 상태)도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찾을 것인가, 그게 학자로서 저에게 던져진 큰 질문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불안하지만 안정성을 잃지 않는 국민경제, 그것이 바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혹은 ‘신뢰의 자본주의’라고 생각하며, 한국 경제의 대안이 그런 모습 가운데 하나이기를 원합니다. 그런 제3부문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그것이 곧 장기적으로 평화를 담보하는 평화경제라고 저는 봅니다. 그래야만 지금과 같은 토목경제가 해체되고, 한반도 생태계와 국민경제가 최소한의 공존을 추구할 수 있는 생태적 전환이 가능할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대안, 사회적 경제? 우석훈이 말하는 “제3부문(섹터)” 또는 “사회경제”는 특히 시민단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개념이다. 구체적으로 사회적 기업, 자활공동체, 사회적 일자리 사업 조직, 생활협동조합, 의료 생협, 지역 화폐, 아나바다 운동 단체, 자선모금 단체, 마이크로크레딧 기관 등이 “사회적 경제” 조직에 포함된다.
“제3섹터”는 북미에서 공공서비스의 대안적 공급자 역할로 주목받은 개념으로 국가와 시장 사이에 있는 매우 다양한 조직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럽에서는 제3섹터 대신 흔히 사회적 경제라는 용어를 쓴다. 한국에 “제3섹터”라는 개념이 처음 소개된 것은 제러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이 번역된 때라고 하는데, 리프킨은 제3섹터 활성화로 자립적 지역사회를 수립해 시장 세계화에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2 그런데 실제 경험을 볼 때 사회적 경제가 그의 말대로 “신자유주의의 광풍”을 막는 수단으로 유용할지는 의문이다.
우석훈도 “제3부문”을 “‘풀뿌리 민주주의’ 혹은 ‘자치’를 강화해서 세계화라는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역풍에 맞서 버텨 보자는 의미”로 설명한다. 자활정책연구소 책임연구원인 김정원 전북대 교수는 사회적 경제라는 개념이 한국에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의 경제 위기 시절에 주로 유럽에서 빈곤과 실업 극복을 위한 조직적 실천들이 소개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당시 유럽의 사례는 한국의 당면한 빈곤과 실업을 극복하는 데 시민사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했고 많은 활동가들은 빈곤과 실업 극복을 위한 실천 방법으로 이를 적극 수용했다”고 한다.시민단체들이 국가 대신 복지서비스 제공에 적극 나선 직접 계기는 IMF 경제 위기였다. 1998년 주요 시민단체들은 거의 모두 실업 극복 운동에 적극 참여해 겨울나기 사업, 구호 사업, 자활공동체 사업, 여성 실업자 지원 사업, 직업훈련 지원 사업 등을 벌였다. 이 운동의 구호는 “실질적인 고통 분담”, “고난의 상호 연대” 등이었고, 민간의 힘으로 빈곤과 실업을 극복한다는 취지로 각 지역 풀뿌리 수준으로 퍼져 나갔다. 처음에 쌀 배급이나 무료급식 같은 구호 사업에 집중됐던 활동은 점차 ‘일자리 창출’로 옮아갔다. 이 과정에서 많은 NGO들은 정부의 공공근로 사업을 민간 위탁받는 일에 적극 참가했다.
그러나 빈곤과 실업 극복을 위한 대안적 실천이라고 활동가들이 적극 받아들인 유럽의 경험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국가 복지를 민간에 이양하는 위험성 때문이다.
제3섹터에 대한 관심이 좌우 모두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 좌파는 주로 풀뿌리 조직과 빈곤층의 주체화라는 측면에서 제3섹터의 유의미성을 바라보는 반면에, 우파는 정부의 비용 절감이라는 측면에서 제3섹터의 유의미성을 바라본다. 만약, 우파의 시선이 지배적일 경우 제3섹터는 민영화 정책의 도구가 되거나 국가의 규제 철폐를 선도하거나 이미 획득된 시민들의 복지에 대한 권리를 훼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후자의 위험이 분명히 드러났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복지 업무의 민간 역할 확대는 명백히 후자, 즉 정부의 비용 절감이라는 관심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 두 정부는 복지 확충이 절실히 필요할 때 그런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출범했지만, 정부가 나서 복지를 제공하기는커녕 “생산적 복지”나 사회투자국가처럼 복지국가를 비판하는 논리를 원용하며 사실상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민간단체들이 사회서비스 제공에 나서도록 만들고 복지에 시장을 도입했던 것이다.
사회적 경제는 ‘국가도 시장도 아닌’ 대안이라는 상像을 갖고 있다. 이는 국가는 부패하고 비효율적이므로 국가가 복지를 맡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생각으로 연결된다. 또한, 과거와 같은 복지국가는 불가능하다는 인식도 깔려 있다. 우석훈도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인 지금은 과거와 같은 복지국가 모델이 더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스웨덴의 ‘사회적 대타협’ 모델을 대안으로 여기지 않는다(오히려 그는 스웨덴에서 발달한 사회적 경제에 주목한다). 국가 복지에 대한 이런 생각은 그 의도와는 달리 국가가 좀 더 쉽게 복지에서 손을 뗄 수 있게 해 준다.
사회적 경제 - 반자본주의적 대안?
우석훈은 사회적 경제를 ‘호혜’, 연대 등의 가치에 바탕을 둔 경제라고 정의한다. 사회적 경제를 실현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가 시장이 낳는 해악을 없앨 수 있으므로, 이것을 일종의 대안으로 여긴다. 연대·공동체·자치·생태·젠더 같은 ‘대안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제라고 이해하거나 정의하면서 말이다.
국가도 시장도 아닌 ‘제3의’ 경제 영역이라는, 통상적인 사회적 경제의 정의들은 사회적 경제가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지금의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을 보여 줄 뿐, 그 진정한 성격은 모호하고, 또 논자마다 주장과 강조점이 다르다. 우석훈은 사회적 경제에서 ‘생활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을 강조하는 듯한데, 여기에 ‘장인 전통’(“마에스트로”)을 유지하는 소규모 공업 등 다양한 요소를 포함시킨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제2부문인 시장은 대기업을 뜻한다’고도 말한다(그러나 그가 중소기업 일반을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사회적 경제를 실현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 경제가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대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석훈은 시장만 있어서도(신자유주의) 안 되고 국가만 있어서도(사회주의) 안 되므로 제3부문과 함께 3자가 균형을 이루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석훈의 주장은 체제 내 개혁을 추구하는 개혁주의의 일종이고, 우석훈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이것이 ‘새로운 실험’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사회적 경제가 추구하는 가치(마르크스주의자들도 적극 공감하는)가 과연 시장 체제, 즉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18 협동조합 자체가 경제는 이해타산적으로만 운영될 수 있다는 시장 옹호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실증적 존재라는 점에서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지금의 사회적 경제 개념에 포함되는 당시 협동조합 운동에 반자본주의적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마르크스가 말한 협동조합 운동은 오늘날 협동조합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생활협동조합 같은 ‘소비조합’이 아니라 ‘생산조합’이었다).우리는 협동조합 운동이 계급 적대에 기초를 둔 현재의 사회를 개조할 세력의 하나라는 것을 인정한다. 이 운동의 커다란 공적은, 노동이 자본에 예속돼, 궁핍을 만들어 내는 현재의 전제적 제도를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의 협동 사회라는, 복지를 동반한 공화적 제도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실천적으로 증명한 데에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협동조합 운동 자체는 자본주의 사회를 바꾸는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적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경제의 토대를 공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협동조합은 시장에 대한 반발로 출발하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지배적 생산양식인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부속물일 뿐이다.
협동조합 제도가 개별 임금 노예의 개인적 노력으로 만들어 내는 정도의 영세한 형태로 제한되는 한, 자본주의 사회를 개조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사회적 생산을 거대하고 조화로운 자유로운 협동조합 노동 체제로 전환하려면 전반적인 사회적 변화, 즉 사회의 전반적 조건이 변해야 한다. 이 변화는 사회의 조직된 힘, 즉 국가 권력을 자본가와 지주의 손에서 생산자 자신의 손으로 옮기지 않고서는 결코 실현할 수 없다.
사회적 경제를 실현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시장 체제의 ‘함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시장 경제가 가하는 압력이라는 현실 사이의 딜레마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거나 따지고 들지는 않는다. 우석훈의 글에서는 ‘함정’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발견하기가 어렵다. 이와 관련해 우석훈이 자주 인용하는 칼 폴라니에 대해 한 가지 언급할 것이 있다.
21 홍기빈은 “폴라니의 결론은 시장경제는 허구다,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21세기 들어 신자유주의가 중대 기로에 서 있는 현 시점에서 폴라니를 읽는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지점”이라고 말한다. 22
최근에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가 주목받는 것은 사회적 경제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것과 관련 있다. 폴라니의 저작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한 홍기빈은 “사회적 경제가 폴라니와 많이 겹친다”고 말한다.문제는 폴라니의 ‘이중 운동’이라는 개념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이중 운동’은, 안정적인 공동체(사회)에서 시장은 사회 내부에 ‘파묻혀embeded’ 있는데, 시장이 자기조정적 운동을 벌여 사회 밖으로 나와 공동체와 대립하고 공동체를 위협하게 되면, 이에 반작용하는 공동체의 자기 보호 운동이 진행된다는 개념이다. 여기서 공동체의 자기 보호 운동은 꼭 ‘아래로부터’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위로부터’도 나오고, 파시즘과 같은 형태도 띤다.
폴라니의 ‘시장’과 ‘사회(공동체)’ 개념은 자기조정적 시장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마르크스의 개념보다 허술하다. 폴라니의 사상에서는 축적 개념, 즉 자본주의 경제에서 시장 제도(자본주의 생산양식)가 어떻게 다른 생산양식에 압력을 가하고 자신을 재생산하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이 때문에 시장 제도와 양립하는 점진적 대안을 추구할 수 있는 것처럼 인식될 여지가 있다.
폴라니의 개념을 옹호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설명을 경제환원론으로 일축하고는, 시장의 대안을 모색하는 데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적절하지 않다는 식으로 말한다.
자유주의 사상에서는 개인의 경제적 동기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요소는 비합리적 선택으로 취급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생산관계를 둘러싼 인간 집단, 즉 계급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 경제적 동기를 가장 중심에 놓는다는 점에서는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다. 폴라니의 사상이 돋보이는 것은 이 대목에서다. 폴라니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사회다”라고 말한다. 개인도, 계급도 아니다. 사회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을 경제환원론으로 치부하는 것은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거나 곡해(시장 권력이라는 문제를 회피해서 개혁주의적 대안을 그럴싸하게 보이게끔 포장하려는 의도라면)한 것이다.
24 《자본론》 2권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다른 생산양식(예컨대 노예제 등 종류를 불문하고)에서 만들어진 노동생산물(상품)을 어떻게 자본주의적 잉여가치 축적 순환에 끌어들이는지 설명했다. 25 따라서 이런 설명에서 마르크스에게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생산양식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서로 다른 생산양식을 자신의 (단순·확대) 재생산에 끌어들이면서 스스로 지배적인 생산양식이 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전체에서 임금 문제를 중요하게 다뤘는데, 마르크스는 임금이 계급투쟁과 역사적 조건 등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또한, 마르크스는 ‘토대’(경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지만, 결코 토대 자체를 사회로 파악하지는 않았다. 사회는 토대(경제)와 상부구조 사이의 복잡한 상호 작용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중시한다.사회적 경제의 현황 - 시장과 정의는 양립할 수 있는가?
우석훈은 “제3부문”을 이루는 경제 기관인 사회적 기업의 창업을 촉진해서 사회적 경제가 확대되기를 바란다.
27 정부 지원은 기존의 국가가 시행하던 재분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기부, ‘윤리적 소비’, ‘자원 봉사’는 사람들의 도덕에 기대야 하고, ‘사회책임투자’를 통한 자금 조달이 늘어나려면 사회적 기업이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사회적 기업이 ‘수익성 추구’만을 목표로 삼는 기업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면서도 ‘사회적 가치’(‘분배 정의’)를 실현하려면, 추가적인 자원이 필요하다. 아마도, 일반 기업에 비해 사회적 기업이 실현하려는 ‘사회적 가치’만큼 자원이 더 필요할 것이다. 사회적 기업은 정부 지원, 기부, ‘윤리적 소비’, ‘자원 봉사’, ‘사회책임투자’ 등 “다양한 복합자원multi-resources”에 의존해야 한다.게다가 사회적 경제를 확대하려면, 자본 축적이 필요하다. 이는 사회적 기업이 더 많은 자금을 끌어들이고, 분배를 위해 쓸 돈을 축적을 위해 유보해야 한다는 의미다. ‘국가도 시장도 아닌’ 대안을 표방하는 사회적 기업의 논리상 ‘자립’을 추구해야 하지만, 외부에서 들어오는 대가 없는 ‘부의 이전’이 사라지면 사회적 기업은 다른 기업과 똑같이 운영될 수밖에 없다. 장원봉은 최근 비영리 조직이 급속히 시장화하는 것을 “제도적 동형화isomorpism”의 틀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소개한다. 예컨대, 아이켄베리Eikenberry와 클루버Kluver는 “‘자원의존이론’의 측면에서, 비영리 조직들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서 이런 자원을 통제하는 조직들과의 상호 작용이 점점 불가피해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제도이론’의 측면에서, 그들에 대한 지원과 합법성을 위해서 조직들은 제도적 환경 내에서 그것의 규범과 요구 사항을 따라야 하는데, 최근의 제도적 환경이 비영리 조직들로 하여금 조직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 시장 판매의 수익 구조와 영리 기업과의 파트너십 구조를 강제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29 사회적 기업은 사실상 정부의 추진력 덕분에 증가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정부에게 ‘사회적 기업’ 인증을 받은 곳은 2백18곳(2009년 1월 현재)이고, 자활공동체는 1천여 곳(2008년 12월 현재), 사회적 일자리 사업 조직은 4백여 곳(사회적 기업 포함, 2008년 11월 현재)이다.인증 사회적 기업을 일자리별로 구분해 보면, 사회적 기업의 성격을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사회적 기업은 거의 대부분 정부의 재정 지원 사업을 모태로 하고 있었다. 노동부 사회적 일자리 사업에서 발전한 경우가 52.5퍼센트이고, 장애인 작업장인 경우가 16.2퍼센트, 자활공동체가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한 경우가 14.9퍼센트로 나타났다. 기타 복지부 사업이나 노인 일자리 사업 등 정부의 재정 지원 사업인 것이 확실한 경우가 3.1퍼센트로서, 전체 인증 사회적 기업 중 87.1퍼센트는 정부의 재정 사업으로 시작해 사회적 기업으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사회적 기업들 사이에서 “정부의 제도적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종종 지역에서 매우 치열한 경쟁을 하기도 하며, 지역 내 시민사회와의 관계보다는 지방정부와의 관계를 더 중시”하는 사례도 나타난다.
이 때문에 사회적 기업이 본래 취지에 맞게 정부 의존성에서 탈피하고 자율성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자율성을 키운다는 말은 정부 지원을 더는 받지 않는다는 뜻인데, 이는 여느 기업처럼 자체로 수익을 낼 수 있는 ‘경영’ 활동이 사회적 기업에도 필요하다는 뜻 아닌가?
32 [강조는 나의 것]
인건비 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지원 방식은 사회적 기업의 자립을 촉진하기 어렵고, 자율성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 … 사회적 기업은 시장 수익을 통하여 근로자 인건비를 마련하려는 의지가 줄어들 수 있고, 상대적으로 안이한 경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정부의 지원이 없어진다면 사회적 기업의 장기적인 생존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기업은 어떻게 해서든 정부의 인건비 지원 기준에 부합하려 할 것이고, 결국 민간 부문의 오랜 미덕인 자율성을 상실하고, 정부 사업의 대행자 역할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사회적 기업이 과연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과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있다. 이 점은 영·미식 사회적 기업에서 두드러진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기업의 형태로 실현하여 사회 문제의 개선에 도움이 되는 기업이 [영·미식] 사회적 기업이다. 따라서 이윤 배분의 제한이나 민주적 의사결정 등이 사회적 기업의 주요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또한 사회적 기업에서 생산하는 산물도 사회서비스라기보다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이용한 산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회적 기업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기업과 혁신적인 기업가(정신)는 경영학의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개인이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게 된다.
34 그러나 우석훈 자신이 관여한 ‘20대 당사자 운동’의 ‘성적’을 볼 때,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게다가 ‘20대 창업론’을 강조하는 듯해서 시장 지상주의에 도전한다는 의미가 무색해 보인다. ‘20대가 창업 정신으로 무장해 무능한 386 세대가 망친 경제를 혁신하자’는 변희재를 우석훈 자신이 치켜세우는 바람에 《88만 원 세대》의 공저자인 박권일조차 “지금 우석훈이 <조선일보>-변희재와 함께 ‘CEO 운운’할 때는 아니지 않은가” 하고 꼬집을 정도였다. 35
한편, 우석훈은 운동 주체들의 경제적 이유 때문에도 사회적 기업이 적합한 모델로서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의 ‘88만 원 세대’에게는 민중운동이나 시민단체 활동이 맞지 않는다고 한다. ‘88만 원 세대’는 생계도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활동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우석훈은 활동가와 단체 들도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운동이 사회적 기업 같은 형식을 선호하게 된다고 말한다. 활동가들은 대부분 ‘도시빈민’으로 곤궁하게 살고 있고, ‘촛불단체’로 찍혀 지원이 끊긴 단체들은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수익을 낼 수 있는 사회적 기업 같은 경제 조직을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바로 시장 체제가 가하는 압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때문에 “최근의 사회적 기업에 대한 제도적 환경은 제도적 동형화의 지향을 시장화에 두고 있다는 측면에서 더욱 우려”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사실 사회적 기업은 가장 주요하게는 이윤의 극대화를 제일의 원리로 하는 영리 기업의 시장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시민사회의 경제적 개입을 위한 매개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기업의 시장화에 대한 강조는 시장(제2섹터)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등장한 시민사회(제3섹터)를 다시 한 번 시장 실패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 결국 사회적 기업을 통해서 제3섹터가 제2섹터에게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하는 형국이 되고 만다.
올해 한국사회포럼에서 열린 “한국 사회적 경제의 과제와 전망”이라는 토론은 활동가들의 고민을 보여 주는 자리였다. 한 활동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근 2~3년간 사회적 기업과 관련된 활동을 하면서 현장에서 … 양적 성장에 비례하는 질적 변화를 담보하지 못하는 사회적 기업의 한계에 적잖이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 ‘사회적 기업도 기업이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는 이익을 실현해야 한다는 논리’ … 는 결국 실천 행위를 경영 활동으로 치환하게 되고 정치적 실천들을 배제하면서 분배의 원칙에 균열을 만들게 됩니다. 기업이 경제 활동의 주체가 되는 자본주의적 질서에 사회적 기업 또한 포섭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듭니다. 자본주의적 질서 하에서 경쟁을 통해 생존해야 하는 절박함과 동시에 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하는 목적의식 사이에서 사회적 기업은 항상 긴장 상태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사회적 기업의 경우 비자본주의적·반자본주의적 입장들이 논의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것 같은 인상과 정부가 인증을 매개로 적극적으로 제도화해 간 과정이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석훈에게서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지금의 사회적 기업에 관한 논의는 이게 과연 economically viable[경제적으로 생존 가능]한 것인가, 그리고 그렇다면 그 크기가 어느 정도 될 것인가, 이런 논의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얘기는 다들 하는 얘기니까 … 좀더 조직론으로 들어가고, 의사결정론에 가까운 분석 같은 것을 좀 해 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얘기이기는 한데, 한국에서는 대체적으로 큰 얘기, 그리고 거대 담론에 대해서 사람들이 훨씬 살갑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
나는 얘기를 더 잘게 쪼개고, 쪼갠 것을 또 쪼개어서,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그런 주제들을 차분하게 살펴보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다. 사회적 기업의 조직론적 분석 같은 것은, 그런 평소의 내 취향에 잘 맞는 얘기이기는 하다.
정부에 의존해 성장한 사회적 기업보다 자발적 활동이 더 주요한 협동조합 운동은 어떤가? 한국에서 협동조합 운동은 안전한 먹거리를 도시민들에게 공급하는 생활협동조합이 대표적이다. 생활협동조합은 유기농 생산자에 대한 지원(‘한살림’은 유기농 쌀 생산에서 시작한 생협 운동이다), 공정무역, 지역 식량 체계 구축, 일 공동체(워커스 콜렉티브), ‘윤리적 소비 운동’ 등을 추구한다. 그러나 생협 활동의 중심은 ‘소비조합’으로서 유통 영역에서 조합원들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공급하는 데 있다. 보통, 사회적 경제에서 사회적 기업은 ‘생산’ 영역, 생협은 ‘소비’ 영역으로 분류된다. 생협은 1980년대부터 시작해,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최근에는 30퍼센트 이상의 성장률을 보이며 급성장했다. 먹거리 구매 생협은 2008년 12월 기준으로 158개 회원 조합에 33만 3천1백50명의 조합원, 매출 3천5백70억 원 정도로 파악된다.
그러나 유기 농산물의 시장성이 확인되자 대기업들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유기 농산물 시장에 적극 뛰어들었고 대형 마트와 백화점에 유기농 코너가 생겨났다. 이런 변화는 생협의 성장뿐 아니라 운영 원리에도 나쁜 영향을 미쳤다. 생협 사이에 경쟁이 심해졌고, 공동체의 기반이 되는 공동 구매도 빠르게 사라졌다. 오히려 생협들도 운영의 효율성에 집중하고 조합원들도 편의성을 추구하게 됐다. “거의 모든 생협이 어쩔 수 없는 시대 분위기를 탓하며 매장 중심, 개인 공급 중심으로 바뀌게 됐다.” 생협에 오랫동안 몸담아 온 사람들은 그 좌절감을 이렇게 표현한다. “[생협은] 살벌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로 돕고 협동하는 공동체의 꿈을 이루는 방파제였다. 하지만 … 꿈은 점점 사라지고 기구와 운영 조직만 남은 사례를 보면 생협이 이루려는 꿈이 쉽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다.”사실상, 생협은 안전한 먹거리를 공급하는 유통 조직이므로 조합원들이 대부분 생협을 그저 안전한 먹거리 공급처로 여기고 대안 운동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조합원의 활동 참여율은 2퍼센트에도 못 미친다). 생산자인 농민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있다. “농민들 중 상당수는 생협이 물류센터 직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조직이라는 비판을 한다.”
42 생협이 공급하는 농산물은 한국 전체 농산물의 1퍼센트 정도다. 일반 농산물보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싸다는 점(20~30퍼센트 정도) 때문에 이 운동이 중산층의 운동이라는 비판과 조합원 수 증가에도 한계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공급 측면에서 보자면, 유기농 소농이 공급할 수 있는 물량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 생협 확대에 근본적 한계로 작용한다. 구매력 있는 중산층을 벗어나 대다수 가구의 밥상을 지키기에 생협의 능력은 턱없이 모자라다. 우석훈도 인정하듯, 뭔가 변화가 있으려면 정부의 농업 정책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우석훈은 “생협은 믿을 수 있는 음식을 공급하는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식”이라고 말하지만,이화여대와 서울대에서 ‘대학 생협’이 철수한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경쟁력 있는 유기농 먹거리 부문 외의 다른 영역(특히, 생산영역)에서 생협의 활동은 훨씬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생협 운동이 비록 먹거리의 대안적 유통 운동만이 아니라 학습과 자치의 지역공동체 운동의 잠재성을 안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이러한 확대된 운동을 실현할 수 있는 계기는 충분치 않다.” 시장의 경쟁 압력 때문에, 생협도 ‘분배 정의’를 실현하기에는 매우 제한적인 영역에 고립돼 있거나 생협 자체가 ‘제도적 동형화’에 빠질 위험을 안을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러한데, “거대 유통 체제와 불안전한 식탁이 현실에 대한 모순들을 모두 생협의 문제 설정 안으로만 환원하려 들” 필요가 있을까?
사회적 기업과 생협은 각각 경제의 생산과 유통 영역에서 활동한다. 앞서 살펴봤듯이 사회적 기업은 다른 기업(마르크스주의적 개념으로 보자면 산업자본)들과의 경쟁 압력에 시달린다. 이는 사회적 기업이 공급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분배적 정의’를 훼손할 것이다. 유통 영역의 소비조합 또한, 백화점과 대형 마트 등(상업자본)과 경쟁해야 한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분배적 정의’를 훼손할 것이다.
생협의 경우조차 생산자인 농민과 생협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현실을 보면 사회적 경제가 그 규모를 확대할수록, 생산 영역과 유통 영역의 분리가 커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가 ‘상품 물신성’ 개념을 통해 설명했듯, 자본주의에서는 사람들의 관계가 인격적인 관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물(상품)들의 관계로 나타나게 된다. 유통 영역에서 소비자는 생산의 사회적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 즉,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소비자는 자신이 마시는 커피에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생산된 커피와 소농들의 협동조합에서 생산된 커피가 각각 얼마만큼 들어있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분배적 정의’를 위해 돈을 더 지급하려는 사람들의 ‘연대 의식’도 개별 상품처럼 낱낱이 원자화하고(집단적 힘으로 나타나기 어렵다) 상품화한다(기업이 이를 마케팅에 활용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44 그러나 둘 다 시장의 압력 때문에 타협과 고립이라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공정무역’ 운동의 베테랑 활동가들은 운동이 모종의 위기 상황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공정무역의 주류화와 양적 팽창을 지지하는 논리(공정무역 상품이 더 많이 팔려야 그 돈으로 농민들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므로)는 “거대 기업이 한 해에 로스팅하는 공정 무역 커피량이 소규모의 로스터 1백 명이 평생 하는 것보다 많을 것”이라는 것이다. 거대 기업에 커피를 공급하려면 소농이나 소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생산되는 물량으로는 부족하다. 이 때문에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생산된 상품들을 공정무역 상품으로 인증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그래서 공정무역 운동은 주류화에 편승하는 공정무역 상품기구FLO와 대안적 생산 체제 구축을 염두에 두는 ‘대안무역기구ATOs’로 양분된다.후생 측면을 보면 사회적 경제가 국가 복지보다 더 나은 삶의 수준을 제공할 것이라는 증거도 없다. “국가의 재분배”를 요구하고 싸우는 것은 시장 권력에 효과적으로 도전하는 방식이다(물론, 사회적 경제의 한계 때문에 사회적 경제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국가의 재분배”가 여전히 중요한 문제라는 점은 인정한다). 복지 재원은 기업주들이 가져간 부에서 나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태적 전환은 어떻게 가능한가?
45 물론, 그가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는 스탈린주의자들도 있어서 그런 비판이 타당할 때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최근의 연구 결과들을 보면, 마르크스가 생태 문제에 심오한 통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자들이 생태학의 발전에 선구적 구실을 하기도 했다. 마르크스주의가 반생태적이라는 편견은 러시아 혁명이 실패하고 과학과 실증주의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상황에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가 생태적 연구와 관심을 소홀히 해서 나타난 결과다. 현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체로 생태주의자들과 함께 생태 위기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문제 해결을 위해 공동으로 투쟁하는 세력이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가 반생태적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 우석훈도 이와 다르지 않은 듯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간 사회의 주요 생태 문제들을 다뤘다. 당시에 리비히가 발전시킨 농화학 이론에 힘입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낳는 도시와 농촌의 분리가 물질 순환 고리를 깨뜨리고 있음을 알았다. 도시는 넘쳐나는 유기물 쓰레기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농촌은 농산물의 형태로 토양에서 도시로 빠져나가는 유기물을 화학비료로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도시와 농촌의 거리를 최대한 줄이고, 물질 순환을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는 생태와 양립할 수 없으므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파괴한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를 복원해야 한다.이를 위해 필요한 조처들을 생협 운동과 사회적 경제로 도입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런 조처들의 전면적 실시는 오로지 자본주의가 폐지돼야 가능할 것이다. ‘토건국가’가 낳는 도시와 농촌의 분리, 그리고 농촌이 도시에 종속되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특수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축적의 고유한 문제다.
47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이윤을 낼 수 있다는 이유로 고가의 대형차들이 생산되고 팔리는 것을 보라. 로머의 논문이 나오고 ‘지식 경제’라는 용어가 유행한 후에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계속 늘었고,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추세다.
우석훈은 로머 모델을 바탕으로 “에너지와 물질의 투입은 줄이고, 지식과 문화의 투입은 늘리는 국민경제”를 주장하는데 이것은 지식경제론이나 탈물질화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이런 주장들은 경제가 경쟁력을 높이려고 자원과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자본주의가 생태와 양립할 수 있을 것처럼 호도하는 논리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자원과 에너지 이용의 효율성이 늘더라도 이윤 추구를 위한 생산 증대 경향이 이를 압도할 것이다.48 이라고 말했다. 호랑이의 발톱도 양파 껍질 벗기듯 하나씩 차례로 뽑을 수 없는데, 하물며 괴물은 오죽하겠는가? 이것은 존 벨라미 포스터가 말하듯이 ‘혁명적인 사회 변화를 위한 생태학’이 필요한 이유다. 결국 오늘날 “사회주의로의 이행과 생태적 사회로의 이행은 동일한 것이다.” 49
‘파국의 심각성과 대안의 온건함’은 생태주의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말이다. 자본주의를 자본주의의 산물인 야만과 연결시켜 보면, 많은 사람들은 십중팔구 자본주의를 호랑이나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괴물’에(우석훈처럼) 비유할 것이다. 그런데 대안에 비춰 보면 어떤가? 전에 어떤 사람은 “양파는 한 꺼풀씩 벗겨서 먹을 수 있지만, 살아 있는 호랑이의 발톱을 하나씩 뽑을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호랑이에게 먼저 잡아먹히고 말 것”사회적 경제는 시장 권력에 효과적으로 도전하는 방식이 아니다. 노동계급은 파업을 통해 자본주의의 연료인 이윤에 타격을 주는 등 시장 권력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노동자들이 그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고무하고 그 힘을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풀뿌리 자치 등을 강조하며 시장 권력의 뒤를 봐주는 국가 권력에 대한 도전, 즉, 정치 투쟁을 회피하는 태도로는 사회의 자원과 부를 대중이 통제하게 할 수 없다. 시장과 공존하면 포섭과 고립이라는 딜레마를 벗어나기 힘들다. 시장 권력과 이를 지키는 국가 권력에 도전해 자본주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자본주의를 길들이려는 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 대안이다. 물론 이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야 이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사회를 총체적으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주
- 우석훈, ‘생태 유토피아, 초고를 시작하다…’, 우석훈 블로그 http://retired.textcube.com/category/출간%20이야기/생태경제학%20시리즈?page=2. ↩
- 우석훈, ‘마르크스 30년, 케인스 30년, 하이에크 30년, 그리고 폴라니 30년’, 《인물과 사상》 129호(2009년 1월). ↩
- 우석훈, ‘레스터 브라운, 《지구를 살리는 새로운 경제학》, 도요새(2003) 서평’, 《환경과 생명》 37호(2003년 가을). ↩
- 우석훈, 《괴물의 탄생》, 개마고원(2008), 275~276쪽. ↩
- 우석훈, ‘명박 2년, 길 잃은 시민사회’, 《인물과 사상》 134호(2009년 6월). ↩
- 우석훈, ‘시민운동과 5·31 지방선거에 대한 약간의 논리연습’, 《시민과 세계》 9호(2006년 하반기). ↩
- 우석훈, ‘생태적인 사회의 조건과 한국 사회의 대안’, 《환경과 생명》 47호(2006년 봄). ↩
- 같은 글. ↩
- 우석훈, 앞의 책, 99, 104, 267쪽. ↩
- 신명호(2009), 김정원,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의 재조직화를 위한 제언’, 한국사회포럼 기획토론 발표문(2009.08.27.)에서 재인용. ↩
- 김하영, 《한국 NGO의 사상과 실천》, 책갈피(2009), 123쪽. ↩
- 우석훈, 앞의 책, 102쪽. ↩
- 김정원,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의 재조직화를 위한 제언’, 한국사회포럼 기획토론 발표문(2009.8.27). ↩
- 김하영, 앞의 책, 122쪽. ↩
- 김정원, 《사회적 기업이란 무엇인가》, 아르케(2009), 33쪽. ↩
- 김하영, 앞의 책, 124~125쪽. ↩
- 우석훈, 앞의 책, 192쪽. ↩
- 칼 마르크스, ‘임시중앙평의회 대의원에게 보내는 개별적 문제에 관한 지침’, 《맑스·엥겔스의 농업론》, 아침(1990), 160쪽. ↩
- 같은 책, 159쪽. ↩
- 같은 책, 159~160쪽. ↩
- 홍기빈, 《GQ》 한국판 2009년 9월호 인터뷰. ↩
- 홍기빈, ‘칼 폴라니 2 - 자기조정시장 개념의 탄생’, 〈프레시안〉(2009.7.17). ↩
- 홍기빈, ‘칼 폴라니 3 - 자유주의 삼위일체와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 〈프레시안〉(2009.7.28). ↩
- 벤 파인, 《요점 자본론》, 한울(2002), 114~116쪽. ↩
-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2권, 비봉출판사(1989), 123~125쪽. ↩
- 알렉스 캘리니코스,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책갈피(1993), 135쪽. ↩
- 장원봉, ‘사회적 기업의 제도적 동형화 위험과 대안 전략’, 《시민과 세계》 15호(2009년 상반기). ↩
- 같은 글. ↩
- 김정원, 앞의 글. ↩
- 박찬임, ‘사회적 기업의 성장과 정부 지원 - 평가와 새 방향’, 《시민과 세계》 15호(2009년 상반기). ↩
- 김정원, 앞의 글. ↩
- 박찬임, 앞의 글. ↩
- 장원봉, 앞의 글. ↩
- 우석훈, ‘명박 2년, 길 잃은 시민사회’. ↩
- 박권일, ‘88세대론 <조선> 독우물에 빠지다’, <레디앙>(2009.1.30). ↩
- 장원봉, 앞의 글. ↩
- 김병기, ‘사회적 경제에 대한 토론문’, 한국사회포럼 기획토론 발표문(2009.8.27). ↩
- 우석훈, ‘사회적 기업의 케이스 스터디’, 우석훈 블로그 http://retired.textcube.com/9. ↩
- 안병덕, ‘사회적 경제 측면에서 본 생협의 현황과 전망’, 한국사회포럼 기획토론 발표문(2009.8.27). ↩
- 김하영, 앞의 책, 158~159쪽. ↩
- 김정원, 앞의 글. ↩
- 우석훈, 《음식국부론》, 생각의 나무(2005), 213쪽. ↩
- 이동연, ‘생태주의 대안 운동의 가능성과 한계: 공정무역 운동에서 생협 운동까지’, 《문화과학》 56호(2008년 겨울). ↩
- Ian Hudson & Mark Hudson, ‘Review Articles on Gavin Fridell’s Fair Trade Coffee: The Prospects and Pitfalls of Market Driven Social Justice, Daniel Jaffee’s Brewing Justice: Fair Trade Coffee, Sustainability, and Survival, and Laura Raynolds’, Douglas Murray’s & John Wilkinson’s Fair Trade: The Challenges of Transforming Globalization’, Historical Materialism 17(2009), pp238-240. ↩
- 우석훈, ‘마르크스 30년, 케인스 30년, 하이에크 30년, 그리고 폴라니 30년’. ↩
- 존 벨라미 포스터, 《생태 논의의 최전선》, 필맥(2009), 36쪽. ↩
- 같은 책, 29쪽. ↩
- 토니 클리프·도니 글룩스타인, 《마르크스주의에서 본 영국 노동당의 역사》, 책갈피(2008), 257쪽. ↩
- 같은 책, 4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