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을 돕기 위하여
혁명정당과 민주주의
이 글은 런던에서 열린 MARXISM2009에서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연설한 ‘Democracy & the revolutionary party’를 녹취해 번역한 것이다. 이 글은 특정 배경에서 생겨나고 강화된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상명하달식 지도 관행과 이것을 시정하고 당내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과정을 돌아보며 혁명정당의 민주집중제적 조직 운영 원리를 풍부하게 다루고 있다. SWP가 처한 구체적 맥락이 있는 논의이지만, 우리에게도 힌트를 줄 것이라고 생각해 싣는다.
1 의 원인과 우리의 실책 등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결국 한 달 전[6월]에는 당내 위원회[민주주의 위원회]가 제출한 당내 민주주의 관련 보고서의 내용을 토론하기 위해 특별 당대회를 개최하기까지 했다. 나도 그 보고서를 작성한 위원회에 포함돼 있었다. 특별 당대회의 결과로 우리는 활동 방식을 일부 수정했다. 이렇듯 구체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SWP가 어떤 문제를 겪었는지에 관한 내 견해를 뒤에 가서 밝히겠지만, 그 전에 먼저 당내 민주주의 문제를 더 큰 틀에서 살펴보려 한다.
혁명정당과 민주주의는 중요한 주제다. 그런데 최근 SWP 안에서 당내 민주주의가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데는 구체적인 맥락이 있다. 리스펙트RESPECT 사태나는 노동자 운동 자체의 민주적 성격을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으려 한다. 노동자 운동에는 뿌리 깊은 민주적 본능이 있다. 독일 파시즘에 관한 저작에서 트로츠키는 자본주의 사회의 틀 안에서 고도로 민주적인 조직 형태들이 등장하는 것이 노동자 운동의 발전이 갖는 의미 중 하나라고 말했다. 특히 노동자 운동에서는 노동자들의 집단적이고 민주적인 자기 조직화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노동계급의 본질적 특징을 반영한다. 착취당하는 계급인 노동자들은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주요 피해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잠재적인 힘도 갖고 있다. 기업주들의 이윤이 결국 노동자들에게서 나오므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종속적인 지위를 오히려 무기로 삼아서 집단으로서 행동하면 기업주들에게서 양보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힘을 키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발적 조직을 결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결성한 조직이 효과적이려면 민주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노동계급의 운동에는 뿌리 깊은 민주적 본능이 내재해 있다.
그러나 노동자 정당들, 즉 노동계급 운동에서 발전해 나오는 정당들을 보면, 비록 노골적인 자본가 정당들보다는 대체로 더 민주적이지만(사실 그게 그렇게 자랑할 일은 아니다. 아무리 내세울 게 없기로서니 “보수당보다 우리가 더 민주적”이라고 굳이 말하고 싶은가?) 그럼에도 당내 민주주의를 제약하려는 정당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개혁주의 정당들의 경우에 아주 분명하다. 영국 노동당(더는 개혁주의 정당이라고 부르기도 거북하지만), 독일 사민당, 프랑스 사회당 등 개혁주의 정당들은 아무리 제한적이고 왜곡된 방식일지라도 여전히 자본주의에서 착취받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노동자 투쟁을 자본주의의 틀 안에 가두려 한다. 노조 관료들도 이런 구실, 즉 노동자들의 자발적 조직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자들의 자발적 활동을 통제하고 제약하는 구실을 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개혁주의 정당들도 의원단이 평당원들에게 책임지지 않으며 상명하달 식으로 기층을 통제하고 제약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스탈린주의 정당도 앞서 말한 특징들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스탈린주의 정당들은 원래 혁명적 정당이었다가 특정 형태의 개혁주의로 전향했기 때문에 앞서 말한 개혁주의의 모순들을 모두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정당의 경우 거기에 특정한 관료적 집중제 모델이 하나 더해졌다. 이 모델은 1920년대에 러시아 혁명의 변질과 소비에트 몰락의 결과로 소련에서 등장한 것인데, 이후 스탈린과 소련 관료들이 해외 공산당들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소련 대외정책의 도구로 삼기 위해 이 모델을 해외로 수출했다. 그래서 스탈린주의 정당의 경우 노동자 민주주의에 대한 제약이 특히 심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정당일지라도 진정한 노동자 정당인 경우(서유럽 공산당들은 그랬다)에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요소를 일부는 채택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강력한 정당이 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탈린주의 정당 안에는 관료적 집중제와 노동자 민주주의의 요소가 복잡하게 혼재한다.
이런 것들이 대중적 노동자 정당의 전형적인 문제들인데,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주류 정당을 닮아가면서 노동계급 기반이 점점 약해짐에 따라 그런 문제들이 더욱 두드러지게 됐다. 그래서 개혁주의 정당에 그나마 존재했던 노동자 민주주의의 요소들이 쇠퇴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반면 혁명정당의 조직 운영 원리는 이들과 사뭇 다른데, 보통 이 원리를 민주집중제라고 한다. 나는 민주집중제의 두 가지 핵심 측면을 강조하려 한다. 첫째, 민주집중제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다수결 원칙을 철저하고 체계적으로 적용한 결과다. 다수결 원칙은 표결을 통해 과반수가 결정한 사항을 모두 따라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런데 이 다수결 원칙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표결로 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내실 있는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 어째서 민주집중제가 다수결 원칙의 철저한 적용인가? 우선, 민주집중제가 제대로 작동하는 경우라면 충분한 민주적 토론을 대단히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혁명정당에게 이것이 왜 중요한가? 혁명정당은 노동자 운동에 체계적으로 개입해서, 노동자들이 더 높은 수준의 자의식과 자기 조직화를 달성하고 궁극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도록 돕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혁명정당은 노동자 투쟁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있는지 언제나 스스로 시험해 봐야 한다. 또한 이 시험을 얼마나 잘 통과하고 있는지 반드시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조직이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허심탄회하고 충분하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다수결 원칙을 철저히 적용할 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가령 당대회 같은 행사에서 일단 토론을 거쳐 다수결로 결정된 사항을 모두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단지 민주주의의 일반적 원칙을 확인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어떤 결정도 실행되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 결정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더라도 누가 옳고 그른지는 결국 실천을 통해 입증돼야 한다. 그리고 실천을 통해 입증하는 방법은 당대회에서 결정된 사항을 모두가 실행해 보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한 번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 결정에 평생 구속되는 것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혁명정당이란 노동계급 내에서 벌어지는 여러 투쟁, 여러 운동과 상호작용하는 개입주의 정당이기 때문에 레닌이 나폴레옹을 인용해서 말했듯이(사실 잘못 인용한 것이지만) “일단 뛰어들고 판단은 그 다음에” 해야 한다. 즉, 토론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고, 결정을 바탕으로 행동한 다음 그 결정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적절한 때에(보통은 다음 번 당대회가 되겠다) 우리의 활동을 되돌아보는 토론을 하고, 지난번에 채택된 결정들을 평가한 뒤, 당내 과반수가 새로운 결정들을 채택한다. 이처럼 토론, 결정, 개입, 다시 토론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 점은 민주집중제에서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이상이 민주집중제의 첫째 측면인데, 스탈린주의의 영향으로 이 측면은 가려지고 왜곡됐다. 그러나 일단 다수결 원칙의 철저한 적용이라는 핵심 원리를 이해한다면 실로 대단히 민주적인 조직 운영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들 민주주의와 중앙집중제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정말 힘을 발휘하려면 일단 결정된 사항을 철저하게 적용한다는 의미에서 중앙집중제가 꼭 필요하다.
이것이 민주집중제의 한 요소라면 다른 한 요소는 좀 더 논쟁할 여지가 있는 것인데, 당을 움직이는 데서 중앙 지도부가 하는 핵심적 구실이 바로 그것이다. 내 생각에 이 점은 두 가지 이유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나는 결정 사항을 효과적으로 실행하려면 모종의 집행 기관에 책임을 위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작고 결속력이 있으며 신속히 행동할 수 있게 잘 조직된 기구가 필요하다. 이런 기구에 결정 사항의 효과적인 실행 등에 대한 책임을 위임해야 한다. 당 지도부가 필요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애당초 혁명정당이 왜 필요한지에 관한 레닌의 주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레닌의 주장에 담겨 있는 핵심 요소 중 하나는, 비록 혁명으로 발전하는 대중 투쟁을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들이 권력 장악에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정도의 깊은 혁명적 의식에 자동으로 도달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권력 장악에 성공하려면 깊고 체계적인 혁명적 의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권력 장악을 향한 투쟁은 실로 복잡다단하다. 자본주의 자체가 고도로 복잡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인종차별, 성차별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노동자들을 갈라놓으며, 자본주의에서 제기되는 온갖 쟁점들은 단지 간접적이고 매개된 방식으로만 노동과 자본 간의 근원적 갈등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복잡한 계급투쟁의 항로를 항해해야 한다. 또한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을 수동적이고 파편처럼 낱낱이 흩어지고 순응하는 상태로 묶어 두려 한다.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이 그러한 수동성과 파편화를 극복하고 자기 해방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계급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항상 노력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파편화의 압력은 전체 노동계급뿐 아니라 혁명정당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일상적 현실이다. 노동계급에 어느 정도 뿌리내린 진정한 혁명정당이라면 전체 계급의 이런 분위기, 분열 등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계급에 더욱 깊이 뿌리내릴수록 자본주의 사회가 가하는 모종의 파편화 압력과 사태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압력을 더 많이 받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압력을 받게 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성공의 징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당내에서 그러한 압력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는 투쟁이 필요함을 말해 준다.
그렇다고 해서 당대회 사이사이에 당의 지도를 책임진 중앙 지도부가 항상 옳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도부는 큰 실수를 범할 수도 있다. 위대한 혁명정당들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볼셰비키나 독일 공산당, 또 어떤 면에서는 차티스트들도 이에 해당되는데, 지도부가 당과 운동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려는 과정에서 종종 실수하고 내부적으로도 분열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앙 지도부의 필요성은 ‘지도부의 무오류성’ 따위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지는 기구의 필요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민주집중제 조직에서는 지도부가 제 구실을 다하도록 당 전체가 항상 지도부에 압력을 가하고 지도부의 실수를 바로잡는 구실을 해야 한다.
자, 이런 것이 말하자면 민주집중제의 이상적인 모델이며, 따라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델이다. 그러나 이 모델이 항상 완벽하게 구현되지는 않는다. 나는 [앞에서] 개혁주의 정당과 스탈린주의 정당이 흔히 당내 노동자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억누르는 이유에 관해 일종의 폭넓은 사회학적 분석을 제시했다. 그런데 개혁주의도 아니고 스탈린주의도 아닌 트로츠키주의 정당 같은 혁명정당들의 역사를 보더라도 비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사례들이 종종 있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중에서 특히 한 가지 문제에 주목하려 한다.
SWP의 창시자인 토니 클리프는 “권력이 아니라 무無권력이 부패의 원인이다” 하고 종종 말했다. 그런데 혁명 조직의 문제점 중 하나는, 적어도 대부분의 시기에 힘이 없다는 것, 즉 무권력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사태의 흐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사회 변혁이라는 원대한 이상을 품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소규모 조직에 불과한 상황 말이다. 매주 모임에 나오는 사람은 여섯 명밖에 없고, 신문 판매를 조직하기도 힘들기 짝이 없고 … 이런 상황, 정말 버티기 힘들다. 그리고 이상과 현실 사이의 이 같은 간극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차라리 부정하고픈 강력한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뻥튀기의 유혹 말이다. 토니 클리프는 뻥튀기의 위험을 항상 날카롭게 인지하고 있었다. 클리프는 종종 트로츠키의 다음 말을 인용했다(어디서 인용한 구절인지 잘 모르겠는데, 어쩌면 클리프가 지어낸 말일 수도 있다. 여하튼 나는 아무리 뒤져도 출처를 찾아내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노동계급에게 거짓말하지 않는다.” 클리프는 우리가 거짓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단지 그게 도덕적으로 옳아서가 아니라, 더 중요하기로는 다른 사람을 정치적으로 속이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을 속이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유혹, 즉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가공의 자신감을 얻으려 자신을 속이고 싶은 유혹은 실로 엄청나게 클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집단적인 자기기만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는 민주주의가 위협이 된다. 민주적인 조직에서는 회원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노동자들이 곧 권력을 장악할 거라 말하는데, 이 나라에서는 지난 5년 동안 파업이 한 건도 없었다. 불법 상황이라서 동지들이 대부분 감옥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 글쎄, 내가 볼 때는 혁명이 임박한 것 같지는 않다.” 이래서 민주주의는 현실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에게 위협이 된다.
이렇게 보면 어째서 상당수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이 체계적으로 민주주의를 억누르는 상명하달식 관행들을 갖고 있는지 이해가 된다. 영국에서 이를 보여 주는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제리 힐리가 이끌었던 정설 트로츠키주의 경향 조직인 사회주의노동자연맹Socialist Labour League과 그 후신인 노동자혁명당Workers’ Revolutionary Party이었다. 그들은 제2차세계대전 때부터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고, 노동자들은 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사회주의노동자연맹(또는 노동자혁명당)이 노동계급의 지도 정당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자본주의가 역사상 가장 긴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노동자들이 절대로 권력 장악에 다가가지도 않았거니와 대부분은 사회주의노동자연맹의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던 1950~60년대에도 이들은 이런 주장을 했다. 자기들끼리는 우리가 노동계급을 지도한다느니 어쩌느니 했지만 노동자들에게는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특히 제리 힐리는 조직을 매우 비민주적으로 운영하면서 자기 노선을 비판하는 회원들을 가차 없이 짓밟기로 유명했다.
헌신적인 혁명 조직들이 비민주적 관행에 빠지는 이유가 이것뿐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 부정이 매우 중요한 요인임은 틀림없다.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것도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만, 또 다른 방법도 있다. 예컨대 제4인터내셔널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논쟁을 회피하고 타협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또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나는 전자의 방법에 더 포커스를 맞추려 한다.
우리 전통의 장점 중 하나는 우리 자신의 약점에 대한 가차 없는 현실주의다. 토니 클리프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최대한 명료하게 이해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역량을 실제 이상으로 부풀리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껏 우리 조직이 간직해 온 정치문화와 지향점이 이런 것이었다고 말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실천이 항상 그에 부합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9개월 동안 당내에서 많이 토론된 주제이지만, 내가 보기에 전통적으로 매우 튼튼하던 우리의 민주집중제적 실천이 약해진 것은 1990년대를 거치면서였다. 여러분 가운데 일부는 당시에도 당원이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운 좋게도 그때 없었던 듯하다. 1990년대는 꽤나 힘든 시기였다. 1990년대 전반기에는 파시즘, 탄광 폐쇄, 주민세 등 단일 쟁점을 둘러싼 큼직한 대중 운동들이 일어났고, 우리는 그런 운동에 개입해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95년 들어 멈췄다. 운동이 사라지고 대규모 캠페인들이 사라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괴상한 일이지만, 마치 영국 사회 전체가 토니 블레어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상황이었다. 보수당이 끝장나다시피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에 희망을 걸고 있었고 정권 교체를 기대하고 있었다. 블레어에게 큰 환상을 품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게 당시의 정치적 현실이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우리는, 정당으로서 우리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 커졌지만 운동에 몸담고 있지는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계속 나아가려고 애썼던 듯하다. 그 과정에서 중앙위원회 등이 주도해 조직하는 다소 주의주의적인 위로부터의 캠페인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됐던 듯하다. 그런 식으로 당원들의 사기 저하를 막고 어떻게든 예전처럼 계속 나아가려고 한 것이다.
그러다가 시애틀 시위와 9·11 테러를 계기로 반자본주의 운동과 반전 운동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대단히 긍정적인 변화였지만 묘하게도 이미 존재하던 상명하달식 관행은 강화됐다. 이는 내 책임이기도 하다. 운동이 뜨면서 SWP 중앙위원들이 전쟁저지연합, 저항의 세계화GR 같은 운동들을 발의하고 출범시키는 데 매우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당이 이미 상명하달식으로 운영되던 경향이 있었기에 새로운 운동에 뛰어든 중앙위원들(나를 포함한)의 [평당원들에 대한 — 옮긴이] 책임성은 종전보다 더욱 약해지고 말았다. 그 대가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리스펙트 사태를 통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 중요한 공동전선이 어쩌다가 그토록 해로운 방식으로 붕괴했는지를 해명하라고 당원들이 정당하게 요구한 것에서 특히 더 분명해졌다. 우리가 열띠게 토론한 주제 중 하나도, 또 우리가 시정하려 한 문제도 이처럼 책임성 없는 상명하달식 지도 관행이 알게 모르게 조직에 스며든 문제였다. 그리고 이 문제의 근원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회피하고픈 충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덧붙여 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 그러나 혁명가들이 아직 딱히 어떤 해법을 논의하지 못한 문제를 언급하려 한다. 조직 자체도 물질적 현실의 일부라는 점이다. 한때 아나키즘적 신디컬리스트였다가 파시스트로 전향한 미헬스라는 사람이 쓴 유명한 책이 있다. 20세기 초에 출판된 《정당Political Parties》이라는 책인데, 독일 사민당이 관료적 정당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매우 흥미로운 책이지만 미헬스는 이 과정을 “과두 지배의 철칙”이라 부르며 그게 만물의 섭리라고 결론내린다. 말하자면, 어떤 조직이든 필연적으로 관료화하고 비민주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론으로서 이는 헛소리다. 미헬스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지도자와 추종자로 나뉜다는 둥의 말로 자기 이론을 합리화하는데 그냥 헛소리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과두 지배의 철칙” 어쩌고 하는 얘기는 딱히 흥미로울 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조직 자체가 하나의 물질적 현실로서 나름의 제약을 가한다는 점만큼은 옳다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우리가 채택하는 조직적 해결책은 거꾸로 우리의 정치에 반작용하고 정치를 규정하기도 한다.
MARXISM 같은 행사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일들을 떠올려 보라. MARXISM 준비는 SWP의 방대한 자원이 투입되는 엄청난 사업이다. 단지 시간만 많이 드는 게 아니라 몇 개월 전부터 행사를 홍보하고 공간을 예약하는 등 수많은 일을 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은 우리의 정치적 일상에 온갖 압력을 가한다. 물론 혁명 자체가 세계 변혁을 위한 조직화의 과정이므로 이런 종류의 압력들이 나타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어쨌든 조직은 그 자체의 논리를 가지며 특정한 조직적 수단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실천에 영향을 끼친다. 이는 그람시의 저작에도 일부 함축돼 있는 문제인데, 혁명가들이 좀 더 깊이 논의해 봐야 하는 주제다. 조직 자체가 물질적 현실이라고 해서 우리가 비민주적 조직 방식을 탈피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건 전혀 진실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실제로 우리는 대단히 민주적인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조직은 그 자체의 논리를 가진다는 얘기다.
한편, 혁명 조직들의 서로 다른 조직 운영 방식도 흥미롭다. 서유럽에서 가장 큰 두 극좌파 조직은 영국 SWP와 프랑스 반자본주의신당 NPA다. NPA는 LCR의 후신으로서 더 크고 광범하며 개방적인 버전의 LCR이라 할 수 있다. SWP와 NPA를 비교해 보면 두 가지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 먼저, SWP는 이론적·이데올로기적 명료함을 매우 강조하며 개입주의적 지도의 전통이 강하다. 반면, LCR은 이데올로기적 일관성과 명료함에 대한 강조는 덜하지만 핵심적으로 곳곳의 노동계급 지구, 작업장, 노조 등에 뿌리내린 노련한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으며 이 점이 NPA에게도 커다란 자산이다. 그리고 일종의 형식 민주주의 전통이 매우 강해서 “경향 유지권”이라는 것도 갖고 있다. 달리 말해, LCR에 존재했고 현재 NPA에 존재하는 다양한 분파들이 상시 분파로서 존속할 권리를 누린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SWP는 구체적인 논쟁이 있는 경우, 특히 당대회를 앞두고 논쟁이 벌어지는 맥락에서만 분파의 존재를 허용한다.
두 조직 모두 나름의 장점과 약점이 있다. LCR의 장점은 NPA에 반영돼 있고, 우리는 또 우리대로 장점이 있다. 그러나 나는 “LCR의 방식은 프랑스 여건에 잘 들어맞았고 우리 방식은 영국 여건에 잘 들어맞았으니 둘 다 똑같이 유효하다”는 식으로, 말하자면 문화 상대주의적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비록 현재 우리가 NPA와 추진하고 있는 대화와 대승적 협력이 대단히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말이다. SWP의 장점 두 가지만 언급하려 한다. 첫째, 강력한 중앙 지도부가 있는 조직의 장점 하나는 정치적 책임 소재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즉, 어떤 일이 잘못되거나 조직이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면 중앙위원회가 책임을 진다. NPA는 책임 소재가 다소 불분명하다. 형식적 민주주의 구조를 훨씬 더 강조하는 NPA에서는 지도부에 책임이 집중되는 일이 별로 없다. 둘째, 상시 분파나 경향을 두지 않는 것의 커다란 장점은 막상 논쟁이 벌어질 때 가변적인 견해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누구나 사안별로 각각 다른 견해를 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당원들은 구체적 사안의 시시비비만을 놓고 논쟁을 벌이기 때문에 사안별로 같은 편이나 반대편에 서는 사람들이 매번 바뀐다. 모든 사안에 항상 똑같이 접근하는 영속적 집단은 없다. 리스펙트 사태 이후의 논쟁에서 주목할 만한 점도 동지들이 체계적인 분파를 형성하기보다는 각각의 사안에 매번 다른 견해를 취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이 우리의 장점이라고 해서 우리의 실천이 항상 그런 장점들을 구현했다는 말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1990년대에 나타나기 시작해 역설이게도 1999년과 2000년 이후 더욱 강화됐다고 한 그 문제의 핵심은 중앙위원회가 비록 형식적으로는 당에 책임을 졌지만 당이 중앙위원회의 실수에 대해 집단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역량은 아주 약해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우리가 최근 당내 민주주의 강화를 위해 취한 조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만약 중앙위원회가 실수하면 따끔하게 질책할 수 있도록, 더 실질적으로 중앙위원회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메커니즘들을 재건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당내 민주주의를 이렇게 저렇게 손질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나는 SWP의 민주주의 전통이 매우 강력하며, 따라서 우리가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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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 토론조슈아:혁명 정당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알렉스의 지적이 중요한 것 같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수하고도 오랫동안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모르는 척했다가는 상당한 사기 저하를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보겠다. 지회 모임을 중단하기로 한 결정에 관해 지난 몇 달 간 많은 토론이 오고갔다.(내가 가입했을 당시에는 지회 모임이 없었다.) 지난 몇 달 사이에 많은 지도적 당원들이 그 결정이 실수였다는 견해를 밝혔는데, 내가 지회에서 전국위원회 참가 보고 등을 할 때마다 많은 평당원들이 그런 평가를 듣고 대단히 고무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회 모임을 중단하기로 결정할 당시에는 속으로 그 결정이 잘못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한 당원 들이, 다른 사람들도 그것이 실수였음을 인정했다는 소식을 듣자 기분이 아주 좋아진 것이다. 그 당원들에게는 이 사건이 당내에서 자신들이 얼마든지 이견을 표현할 여지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듯했다.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준다. 지회 모임 중단 결정에 관한 평가를 둘러싸고 개인적으로 함께 토론한 당원들은 지회 활동 등에 예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존 몰리뉴:우리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블로거들의 세계에서는 SWP가 극도로 비민주적이라는 얘기가 때로는 속삭이듯이, 때로는 떠들썩하게 터져나온다. 그러나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알렉스와 함께 민주주의 위원회에서 일한 경험과 지난 48년 동안 운동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말하건대, SWP가 최근 당내 논쟁을 진행한 방식은 가히 민주주의의 모범이었다. 사회주의 운동에서 내가 경험한 것 중 이것보다 우수한 선례는 없었다. [ … 녹음 상태 불량 … ]
물론 SWP의 당내 민주주의가 항상 완벽한 것은 아니었고, 앞으로도 항상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엄청난 압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당 밖의 노동계급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매순간 옥죄는 압력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의회라는 장식물을 제외하고는 노동자들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어떤 발언권이나 통제력도 가지지 못하며 단지 밥벌이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사회다. 그런 까닭에 정치 조직에서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다. 나는 노동자 조직에 뿌리 깊은 민주적 본능이 있다는 알렉스의 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모순이 있고, 상반되는 압력도 있다. 때로는 그 압력을 버텨내기 힘들다. 이렇게 생각해 본 적 있지 않은가. ‘사측에 맞서 싸우라고? 그래, 힘들지만 뭐 … 정부에도 맞서 싸우라고? 으음 … 그래, 힘들지만 그것도 … 헉, 노조 지도부에도 맞서 싸우라고? 이거 완전 … 노조 지도부에 맞서 싸우는 틈틈이 내가 소중히 여기는 정당의 지도부와도 논쟁하라고? 으아악 … 차라리 사측과 정부 편에 붙고 말지!’ 우리 모두 이런 종류의 압력에 항상 노출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투쟁이 필요한 것이다.
상시 분파 모델에 관해서 한마디 하겠다. 그 모델에 나름의 장점이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혁명적 상황에서는 대단히 해로울 것 같다. 혁명 조직을 왜 건설하는가? 혁명이 도래하면 결정적 순간에 결정적 행동을 취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상시 분파 모델은 혁명기에 당이 취해야 할 일치된 행동에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신입 당원:어제 SWP에 가입했다.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난해 같았으면 결코 가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결국 가입하게 된 것은 SWP의 장점이라든가 당세 확장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의 문제가 무엇이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관해 자기 생각을 말하는 당원들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걸 보면서 ‘아, 이 조직은 변할 수 있는 곳이구나, 내가 들어가서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점을 다들 유념해야 한다. 이런 방법이 아니면 나처럼 고집센 사람을 가입시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질문이 하나 있다. 알렉스는 SWP가 상명하달식 지도 관행을 극복했다고 말했는데, 향후 똑같은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어떤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는지 궁금하다.
찰리 킴버:[앞부분 녹음 상태 불량] 나는 지도부의 필요성에 관해서 한 마디 하려 한다. 혁명정당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노동계급 내의 불균등성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정당 내에도 불균등성이 있다. 그래서 지도부가 해야 할 일은 뛰어난 인자들을 전면에 배치하고 계급투쟁을 전진시키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노선이 더 광범한 지지를 얻도록 하는 것이다. “영국 일자리는 영국 노동자들에게British jobs for British workers” 구호에 관한 우리의 대응을 사례로 들어 보겠다.
린지Lindsey 지역 건설 노동자들의 파업 초창기에 이 구호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대응 방향을 두고 좌파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 그때 SWP가 그 구호에 반대하는 주장을 내놓은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어떤 주장을 내놓을 것인지 신속하게 정해야 했다. 금요일 오후에 나를 포함한 세 명이 모여서 SWP의 방침을 결정했다. 큰 틀에서 우리가 잡은 방향이 옳았던 것 같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날 모임이었다. UNITE[건설노조가 포함돼 있는 노조 연맹] 소속 직장위원인 당원들의 모임을 소집해서 두세 시간 동안 그 전날 작성한 초안을 가지고 토론했다. 진지한 당원들, 신입 당원들이 두루 있었다. 토론 결과 초안이 기본적으로 올바르며 앞으로 당내에서 그 견해를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 자리에 모인 동지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에 근거한 판단으로 중앙위원회의 견해를 수용한 것이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 나름의 시각과 주장을 원안에 덧붙였다. 그 모임에서 토론된 내용을 더 큰 당내 모임에서 다시 토론에 부쳤다. “영국 일자리는 영국 노동자들에게”라는 구호에 반대하는 주장을 당 전체로 확산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다른 동지들의 경험과 주장을 보탬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나는 이런 것이 우리의 활동 모델이 돼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노동계급 내에서 제기되는 주요 쟁점에 대해 아무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 자유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어떤 태도를 취하되 그것이 올바른 태도인지를 다른 동지들에게 끊임없이 점검받으면서 그들의 경험을 당내로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지도가 정치적 주장에 바탕을 둬야 함을 의미한다. 나는 조직 내에서 노동조합 활동 조직 담당자인데, 내가 하는 일은 여러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예컨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한 시간 반 정도 차를 몰고 건설 현장에 가서 신문을 팔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이건 비밀인데, 이런 일에 자원자가 쇄도하지는 않는다. 존 셰블 동지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일을 맡아 줬다. 내가 단순히 존 셰블 동지에게 지시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존 셰블 동지가 이 일이 국제 노동계급의 대의를 위해 필요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창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것이 우리의 지도 방식이어야 한다. 열띠게 토론하고, 당원들에게 끊임없이 점검받고, 당 바깥의 노동자들에게도 점검받아야 한다. 그와 동시에, 지도부 자신이 방침을 정하고 당 안팎에서 이것을 주장하고 논쟁해야 한다. 우리가 “영국 일자리는 영국 노동자들에게” 구호에 대처한 과정이 이를 잘 보여 줬다고 생각한다.
비당원:나는 당원은 아니지만 SWP 당원들을 동지로 생각한다. 내가 궁금한 점이 있다. SWP 지도부는 내가 지지하는 일부 철학자들을 여러 차례 비판한 바 있다. 내가 설사 당원이 되더라도 라캉이나 르클로드 같은, 내가 기본적으로 공감하는 사상가들을 비판하는 기사가 실린 신문을 판매하거나 그들을 비판하는 행동을 지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당의 결속을 위해 내 신념을 포기해야 하는가?
샐리:지도부의 지침이 현장 상황에 비춰 봤을 때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나는 민주집중제를 항상 이렇게 이해했다. 중앙의 지침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때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당원의 권리일 뿐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신이 속한 지역이나 현장의 상황, 주변의 반응 등을 중앙으로 피드백 해 줘야 한다. “영국 일자리는 영국 노동자들에게” 문제에 관한 UNITE 소속 당원들의 토론에서 볼 수 있듯이, 당원들이 입 다물고 있어서는 안 된다. 단지, ‘어, 이건 아닌데 … 이렇게 했다간 반응 안 좋을 텐데 … ’ 하고 속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당신의 경험을 피드백 해 줘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민주주의 위원회의 설립에서 특별 당대회까지 이어진 과정은 많은 당원들에게 큰 희열과 해방감을 맛보게 해 줬다는 것이다. 우리가 범한 실수를 우리 자신이 모르는 척하지 않고 직시한 것은 정말이지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신입 당원 한 분은 당의 문제점에 관해 당원들과 대화를 나눈 것이 가입 계기였다고 말했는데, 나도 우리 자신의 문제점에 관해 주변 사람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때 그들도 우리를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항상 느낀다.
상시 분파 문제에 관해 말하자면 알렉스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존 몰리뉴가 한 말을 알렉스가 한 것으로 착각한 듯 — 옮긴이]. 당내 분파 또는 경향은 마치 손가락과 같다. 한동안은 손가락이 각자 이렇게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겠지만 행동할 때는 주먹으로 뭉쳐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 당의 로고도 주먹이 아니겠는가.
정리 발언
존 몰리뉴가 민주주의 위원회의 경험에 관해 언급했다. 나도 존과 더불어 위원회에서 활동했는데, 존의 말대로 매우 유익하고 건설적인 경험이었다. 존과 나의 관계에 관해서 잠깐 얘기해야겠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가 맺어 온 정치적 관계는 어떤 점에서 혁명정당의 작동 방식을 보여 주는 모범 사례이기 때문이다. 3년 반 전 중앙위원 선거에서 존이 나의 경쟁 후보로 출마했을 때는 서로 칼부림이라도 할 태세였다. 그러나 리스펙트 사태가 터져 갤러웨이 등이 공격했을 때 존은 당을 가장 열정적으로 방어한 사람 중 한 명이었고, 따라서 우리는 어깨 걸고 함께 싸웠다. 지난해 말 즈음에 당내 논쟁[존 리즈를 차기 중앙위원 명단에 올리지 않기로 함에 따라 당 중앙위원회 내에서 벌어진 논쟁 — 옮긴이]이 다시 불거졌을 때도 우리는 같은 편이었다. 그러다가 민주주의 위원회에 들어가서는 다시 의견 충돌을 빚었고 한 번은 대판 싸우기도 했다. 싸움질이 그 자체로 좋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때로는 서로 동의하고 때로는 반대하는, 그런 유동적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안 자체의 성격만을 놓고 서로 동의하든 반대하든 해야지, 오랜 세월 서로 비판해 온 분파에 각자 소속돼 있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부딪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더욱이, 존과 나 사이의 논쟁은 사회주의 혁명의 대의에 절대적으로 헌신한다는 틀 내에서 한 논쟁이었다. 나는 이런 것이 올바른 논쟁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지나치게 상명하달식인 당 운영 방식을 어떤 계기로 교정하게 됐느냐”고 질문했다. 현실이 그것을 강제했다. 리스펙트 사태는 사실상 거대한 현실 검증의 장이었고, 검증을 통해 드러난 조직 실태는 완전 엉망이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한동안 당내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지만 매우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어떤 일이 크게 잘못되면 한바탕 논쟁을 벌여서라도 반드시 그 원인을 밝혀내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런데 리스펙트 사태는 그 충격이 워낙 컸던 덕분에 당을 최선의 길로, 즉 철저한 토론과 자기 쇄신의 길로 되돌려놓았다.
당 주류의 이론적인 견해에 동의하지 못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겠다. 당의 입장에 어느 수준까지 동의할지는 결국 스스로 판단할 문제다. 나 역시 몇몇 철학적 문제와 관련해서는 항상 당내에서 이단 취급을 받았다. 존 몰리뉴 같은 사람들은 내가 알튀세르에 호의적인 것 때문에 벌써 몇십 년째 나를 비판해 왔다. 하지만 질문한 동지에게는 이런 문제가 부차적이길 바란다.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문제들이 있다. 당신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면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혁명의 주체가 노동계급이라고 보는가? 세계 혁명의 필요성에 동의하는가? 인종차별, 성차별 등에 반대하는가? 이런 생각을 공유하는 혁명가들이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을 돕고자 조직을 결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문제에서 우리와 생각이 같다면 그것만으로도 함께하기에 충분하다. 그에 비하면 나나 당신이 라캉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만들려는 정당은 혁명적 투사들의 정당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맞선 혁명적 투쟁을 이끌고자 한다. 자신감 있고, 독립적으로 사고하며, 논쟁할 태세가 돼 있는 투사들의 조직 없이는 그런 과업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민주집중제는 중앙위원회가 “뛰어” 하면 평당원들이 그저 “얼마나 높이 뛸까요” 하고 반문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찰리 킴버가 말했듯이, 당을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려 할 때 그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토론과 논쟁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볼셰비키가 매우 유연한 조직이었다는 비당원 동지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우리에게도 볼셰비키의 사례는 매우 중요한 준거점이다. 그럼에도 레닌을 무슨 착해빠진 자유주의자로 이상화하지는 말자. 레닌은 어떤 노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관철시키려고 싸웠다. 그가 올바르다고 생각한 방향으로 당을 이끌고자, 당내 과반수의 지지를 얻고자 싸운 것이다. 이것은 민주집중제에 꼭 필요한 요소다. 민주주의가 당의 생명인 것도 맞지만, 민주주의에는 당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투쟁하는 지도부도 포함된다. 물론 중앙위원회가 틀렸다고 판단될 때 당내 절차에 따라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당원들의 의무다. 그러나 우리 사이의 논쟁은 그저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당과 운동을 전진시키는 방법에 관한 우리의 논쟁은 때로 당과 운동의 명운이 걸린 정치투쟁이다. 그런 논쟁에서 지도부가 무오류라거나 일단 지도부를 믿고 보자는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혁명정당에서 리더십[영어로는 똑같은 단어가 ‘지도부’를 뜻할 수도 있다 — 옮긴이]이란 올바른 방향으로 당원들을 설득할 책임을 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엊그제 가입한 신입 당원의 발언에 관해 한마디 하고 싶다. 그는 자신이 SWP를 변화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 결정적인 가입 계기였다고 말했는데, 아주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SWP는 중앙위원회의 전유물도 아니고 존이나 나 같은 사람들의 전유물도 아니다. SWP는 당원 모두의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입당하는 신입 당원들이 더없이 소중하다. 혁명정당은 정체할 수 없다. 끊임없이 환골탈태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입을 권유하는 것은 총알받이가 필요해서가 아니다. 물론 우리는 여러분을 죽도록 ‘혹사’하고 최대한 ‘착취’하려 하겠지만, 단지 그것만 바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SWP에 가입함으로써 세상을 바꿀 새 세대의 혁명가들이 되길 바란다. 오늘 발언한 신입 당원 같은 동지들이 언젠가 당 지도부의 일원으로서 당을 이끌게 될 날을 기대해 본다.